9월 1일 정사
좌의정(左議政) 김창집(金昌集)이 임상극(林象極)이 상소한 요지가 아주 도리에 어긋나기 때문에 상차(上箚)하여 사직하고 이어서 소장(疏章)을 봉입(捧入)하지 말라는 명을 거두기를 청하니, 임금이 우악하게 비답(批答)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9월 2일 무오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일전에 좌상(左相)이 차자(箚子)로 아뢴 것은 오로지 시사(時事)를 매우 근심하여 참작하고 조정(調停)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임상극(林象極) 등의 소에는 대개 흉신(凶臣)으로 지목하여 그 욕한 것이 거의 여지가 없다. 반드시 대신으로 하여금 불안하게 하여 국사를 무너지게 하려 하였으니, 마음 씀이 흉악하여 더욱 매우 통탄스럽다. 결코 그 소를 봉입하지 못하게만 하고 말 수 없으니, 임상극을 정배(定配)하여 한편으로는 호오(好惡)를 바루고 한편으로는 징계를 엄하게 하라."
하였다. 드디어 문천군(文川郡)에 정배하였다.
김태수(金台壽)를 정언(正言)으로, 조성복(趙聖復)을 지평(持平)으로, 조관빈(趙觀彬)을 수찬(修撰)으로, 조영복(趙榮福)을 장령(掌令)으로, 박봉령(朴鳳齡)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계복(啓覆)514) 이 내일로 정해져 있고, 문안(文案)은 반드시 정부(政府)의 상복(詳覆)515) 을 거친 뒤에야 입계(入啓)할 수 있는데, 좌의정(左議政) 김창집(金昌集)이 임상극(林象極)의 소(疏) 때문에 인퇴하여 거행할 수 없으므로 형조(刑曹)에서 아뢰니, 임금이 괴귀(怪鬼)같은 무리의 흉악한 말은 말할 것도 못되니 대신은 곧 나와서 일을 보살피고 상복하라는 뜻으로 김창집에게 하유(下諭)하였다. 전유(傳諭)한 사관(史官)이 돌아와 그의 말을 아뢰기를,
"신하가 뜻밖에 남의 구설에 오르는 것이 예전부터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마는, 또한 어찌 신이 당한 것과 같은 것이 있겠습니까? 그 소의 개요는 대략 이미 아뢰었겠습니다마는, 그 가운데에서 가장 참혹한 것은 후사(喉司)에서도 차마 더 써서 다 들지 못하였으므로, 성상께서 죄다 아시지 못할 것입니다. 신이 비록 천지의 인애(仁愛)로 곡진히 비호를 받더라도 무슨 낯으로 다시 조정에 들어가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다시 보내어 하유하기를,
"이번 임상극의 일은 참으로 하나의 세변(世變)이다. 이러한 흉악한 말은 본디 말할 것도 못되는데, 경이 차자를 올리고 인퇴하였으니, 사체(事體)에 크게 손상된다. 친림(親臨)하여 여수(慮囚)516) 하는 날에 시임 대신(時任大臣)이 참여하지 않을 수 없고 또한 전석(前席)에서 면대하여 이르겠으니, 경(卿)은 안심하고 들어와 참여하라."
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니, 임금이 이회원(李會元)의 일만을 따랐다.
9월 3일 기미
이기익(李箕翊)을 발탁하여 승지(承旨)로 삼았다.
좌의정(左議政) 김창집(金昌集)이 돈소(敦召)를 두 번 받고도 출사(出仕)하지 않으므로, 임금이 다시 승지(承旨)를 보내어 하유(下諭)하기를,
"경(卿)의 차자는 논한 것이 바르고 의리가 밝은데, 이상극(林尙極)이 사나운 독을 더욱 부렸으니, 어찌 마음 아프지 않겠는가? 잇따라 사관(史官)을 보내어 빨리 나오도록 권면한 것은 대신을 위안하려는 것일 뿐이 아니라 사체(事體)를 위한 것 때문이다. 빨리 전의 분부를 따라 안심하고 들어와 참여하라."
하였으나, 김창집이 또 명에 따르지 않았다. 임금이 다시 하유하기를,
"내가 바야흐로 편전(便殿)에 나와 앉아 경이 들어오기를 기다린다."
하니, 김참집이 나와서 계복(啓覆)에 참여하였다.
임금이 초복(初覆)을 행하였다. 끝나고서 장령(掌令) 안중필(安重弼)·헌납(獻納) 조명봉(趙鳴鳳)이 각각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교리(校理) 어유귀(魚有龜)가 말하기를,
"오명윤(吳命尹)은 선정(先正)을 근거없이 욕한 것이 지극히 낭자하므로 무릇 듣는 자가 모두 통탄하니, 현관(賢關)의 선비로 대우할 수 없습니다. 대간(臺諫)의 논계(論啓)를 윤허하지 않으신다면, 신은 아마도 공론이 신장될 날이 없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도 그 죄가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죄로 말하면 유북(有北)517) 에 귀양보내도 남는 죄가 있겠으나, 대신(大臣)이 말한 사체(事體)에 관한 말도 본디 해롭지 않다. 그는 돌볼 것도 없으나 뒷 폐단을 또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으니, 대간의 논계를 윤허하지 않는 것이 이 때문이다."
하였다.
9월 4일 경신
이어서 초복(初覆)을 행하였다. 【임금이 편찮기 때문에 이틀로 나누어 하였다.】 끝나고서 형조 판서(刑曹判書) 민진후(閔鎭厚)가 나아가 말하기를,
"과거(科擧)에 관한 사문(査問)은 이미 버려두라는 명이 있었으나, 그 뒤에 또 윤팽수(尹彭叟)·갑술(甲戌) 등을 엄히 형신(刑訊)하라는 분부가 있었습니다. 옥사(獄事)의 체례(體例)로 말하면 모두 다시 핵실(覈實)하여야 하겠으나, 점점 만연하니 사체(事體)가 미안합니다. 또 윤팽수 형제는 그 정상에 용서할 만한 것이 있으나, 그 아비가 정장(呈狀)한 뒤에 그 아들이 어찌 말을 바꾸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아비 윤필정(尹弼鼎)의 일은 매우 밉거니와, 그 아들이 과연 말을 바꾸려 한다면 본디 대질할 때에 말을 바꾸어야 할 것인데, 그는 서둘러 형관(刑官)의 집에 정장하였으니, 그 마음 쓴 것이 더욱이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상께서도 그 사이 일의 정상에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 있다는 분부를 하셨습니다. 또 이정흥(李禎興)은 이빈흥(李賓興)과 지친(至親)인데도 때에 따라 말을 바꾸어 이빈흥에게 화(禍)를 끼쳤으니, 또한 풍교(風敎)에 관계되므로 정상에 아주 통탄스럽습니다."
하고,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윤팽수 형제는 이미 전과 같이 바로 공초(供招)하였으므로 반드시 다시 형신할 것 없으나, 이정흥은 다시 물어야 하겠습니다."
하고,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갑술도 판부(判付)에 따라 엄히 형신하였으나, 그는 천한 사람이므로 때에 따라 말을 바꾸니, 매우 꾸짖을 것도 못됩니다."
하니, 임금이 윤필정과 이정홍은 엄히 형장을 가하여 추문(推問)하고, 윤팽수 형제와 갑술 등은 형신하지 말고서 급바로 말을 바꾼 죄로 조율(照律)518) 하라고 명하였다. 승지(承旨) 홍호인(洪好人)이 말하기를,
"봄에 김순행(金純行)·이시정(李蓍定) 등이 선정(先正)을 위하여 밀봉한 글을 올려 신변(伸辨)하였는데, 성교(聖敎)에 따라 정거(停擧)하였습니다. 이제 와서 시비가 크게 밝혀져서 이미 벌을 풀어 주라고 명하셨으나, 태학(太學)의 재임(齋任)이 제 뜻대로 벌준 것이 30여 인이 되도록 많아서 장벽(墻壁) 사이에 벌명(罰名)이 낭자하니, 선처하도록 분부하여 많은 선비를 위로하시는 것이 사의(事宜)에 맞을 듯합니다."
하고,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만성(李晩成)이 말하기를,
"김순행 등은 벌명이 풀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당초에 다들 신문(神門)에 배사(拜辭)519) 하고 물러갔습니다. 대개 신문에 배사한 유생(儒生)은 국가에서 특별히 권하여 들어가게 하는 거조(擧措)가 없으면 으레 반중(泮中)520) 에 다시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쾌히 깨달아 시비가 크게 밝혀진 뒤에는 그 때의 처분이 마땅하지 못하였던 것을 깊이 뉘우쳤다. 유벌(儒罰)이 아직도 풀리지 않은 것은 매우 놀라우니, 본관(本館)의 당상(堂上)을 시켜 타이르고 벌을 풀어 주어 신문에 배사한 유생을 특별히 권하여 들어가게 하도록 하라."
하였다. 장령(掌令) 안중필(安重弼)이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말하기를,
"용인 현령(龍仁縣令) 이국휴(李國休)는 정사(政事)에 법을 어긴 것이 많고 백성의 산지(山地)를 마구 빼앗았습니다.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
하니, 임금이 나문(拿問)하라고 명하였다. 안중필이 의율(擬律)을 잘못하였다 하여 인피(引避)하고, 헌납(獻納) 조명봉(趙鳴鳳)은 반열(班列)에 조금 늦게 나아갔다 하여 정원(政院)에서 하리(下吏)를 가두어 다스렸으므로 인피하여 모두 퇴대(退待)하였는데, 이튿날 처치하여 안중필을 체직시키고 조명봉은 출사(出仕)시켰다.
9월 5일 신유
남도규(南道揆)를 집의(執義)로, 이택(李澤)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정필동(鄭必東)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9월 6일 임술
화성(火星)이 태미 서원(太微西垣) 안으로 들어갔다.
이홍제(李弘躋)·임상극(林象極)이 소두(疏頭)로 상소할 때에 소하(疏下)이었던 권필형(權弼衡)과 윤선거(尹宣擧)의 문도(門徒)인 조태징(趙泰徵) 등이 상소하여 같이 벌을 받기를 청하였는데, 말이 더욱 도리에 어긋나고 어지러웠다. 날마다 정원(政院)에 와서 바치되 반드시 신시(申時) 이후에 들어와서 궐문(闕門)이 닫혀도 물러가지 않으므로, 정원에서 계품(啓稟)하여 내보냈는데, 이날 또 왔으므로 정원에서 아뢰고 이어서 봉입(捧入)하여 처분을 명백히 내려 시끄러운 것을 그치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이러한 소장(疏章)은 평복(平復)된 뒤에 와서 바치라는 성명(成命)이 이미 있는데다가, 더구나 이제 처분이 크게 정하여진 뒤인데, 어찌 감히 종일 들어와서 일마다 굳이 떠드는가? 매우 놀랍다. 결코 봉입하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
하였다.
9월 7일 계해
좌의정(左議政) 김창집(金昌集)이 유생(儒生)에게 배척받았다 하여 소(疏)를 두고 성밖으로 나갔는데, 그 소에 이르기를,
"대저 그른 사람과 함께 선조(先朝)를 가리켜 의논한 자도 오히려 완전한 덕을 지닌 군자임을 잃지 않는다면, 그 글에 의거하여 그 망령된 것을 말한 자만이 어찌 흉신(凶臣)이 되겠습니까? 대저 윤선거(尹宣擧)의 말은 아주 이를 데 없으므로, 말하는 자가 ‘풍병(風病)을 앓아 심성(心性)을 잃은 자가 아니면 누가 감히 근거없이 헐뜯을 마음을 싹틔울 수 있겠는가?’ 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그러한데도 외람된 줄 아주 몰라서, 더럽혀져 깨끗하지 못한 몸을 위로 높고 넓고 광명하신 성조(聖祖)에 견주었으니, 이것은 곧 분수에 넘치고 망령된 것입니다. 그들은 바야흐로 사림(士林)에서 큰 의리를 칭찬하고 효종(孝宗)과 아울러 거론하는 덕을 같이 한 신하를 중죄(重罪)로 간주하면서 도리어 윤선거가 감히 성조를 끌어대어 함께 더럽혀진 처지로 돌리려 한 것을 잘못이 없다고 하는 것은 또한 무슨 까닭입니까? 더구나 이것이 정당한 의리라면, 윤선거가 당시에 사귀던 어진 사우(師友)가 많지 않다 할 수 없는데, 다만 음흉하여 바르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힘써 창화(唱和)한 것은 더욱 어찌 의심스럽지 않겠습니까? 송시열(宋時烈)이 일찍이 그가 윤휴(尹鑴)를 끊지 못한 것을 배척하였더니, 그 아들 윤증(尹拯)이 힘을 써서 변명하여 그가 이미 끊은 지 오랜 것을 스스로 밝혔으나, 이제 보면 처음부터 서로 끊지 않았을 뿐더러 도리어 그 말에 차중(借重)521) 하여 자기의 부족한 것을 감싸려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처심(處心)·행사(行事)가 이미 저러하였고 말과 글이 또 이러한데도 남이 득실을 점검하는 것을 노여워하니, 또한 그르지 않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우악하게 비답(批答)하고 이어서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함께 오게 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조상우(趙相愚)가 상차(上箚)하여. 윤선거(尹宣擧)의 문집(文集)의 판본을 헐라는 명을 거두고 또 소장(疏章)을 봉입(捧入)하지 말라는 금령(禁令)을 풀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들어주지 않았다.
9월 8일 갑자
제주 별견 어사(濟州別遣御史) 황귀하(黃龜河)가 조정으로 돌아와 제주 거자(擧子)의 시권(試券)을 바치니, 임금이 대제학(大提學) 송상기(宋相琦)에게 명하여 성적의 차례를 매기게 하여 유학(幼學) 고만첨(高萬瞻) 등 세 사람에게 직부 전시(直赴殿試)522) 를 내렸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서종태(徐宗泰)가 상차(上箚)하여, 신구(申球)가 남을 무함하여 법을 어긴 죄를 다스리고 윤선거(尹宣擧)의 문집(文集)의 판본(板本)을 헐라는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니, 임금이 시비가 정하여진 뒤에 그칠 수 없다고 답하였다.
호조 참의(戶曹參議) 이동암(李東馣)이 상소(上疏)하여, 김창집(金昌集)을 헐뜯어 욕하고, 또 말하기를,
"후사(喉司)의 신하가 대신(大臣)에게 아부하고 금령(禁令)을 빙자하여 소유(疏儒)를 구박하고 건복(巾服)을 찢었으니, 이것은 실로 3백 년 동안에 없던 변괴입니다."
하였는데, 정원(政院)에서 물리쳤다.
9월 9일 을축
권엽(權熀)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무릇 진구(賑救)하는 일에 관계되어 즉시 복계(覆啓)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비국(備局)의 유사 당상(有司堂上)이 대신(大臣)에게 물어서 품정(稟定)하라."
하였다. 이때 대신이 성 밖으로 나가서 묘당(廟堂)에 주관하는 자가 없으므로 임금이 진정(賑政)이 지체될까 염려하여 특별히 당상을 시켜 대신 아뢰게 하였다.
문학(文學) 여필희(呂必禧)가 상소(上疏)하여, 김창집(金昌集)을 헐뜯어 배척하되 지록(指鹿)523) 의 간사함과 장마(仗馬)524) 의 배척을 들어서 말하기까지 하고, 또 이홍제(李弘躋)·엄경수(嚴慶遂) 등을 죄준 것의 부당함을 논하며, 끝에 말하기를,
"후사(喉司)에서 소장(疏章)을 봉입(捧入)하지 아니하여 대신에게 아첨할 줄만 알고 천청(天聽)이 가리워지는 것을 돌보지 않으니, 신(臣)은 당여(黨與)는 아래에서 이루어지고 임금의 형세는 위에서 외로와져서 전하의 국사(國事)가 장차 날로 잘못 될 듯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비답(批答)을 내리지 않고 특교(特敎)하기를,
"이 소의 사연을 보건대, 악인의 죄목을 주워 모아 나라를 근심하고 일을 논한 대신에게 뜻대로 헐뜯어 욕함이 더하니 참으로 놀랍고 한탄스럽다. 이러한 소장은 일체 봉입하지 말라고 이미 성명(成命)이 있었으므로 후사에서 본디 마음대로 막은 것이 아니니, 임금의 형세니 당여니 하는 따위 말로 극진히 말하여 헐뜯어 욕한 것도 매우 놀랍다. 문학 여필희를 파직(罷職)하여 서용(敍用)하지 말라."
하였다.
정언(正言) 조상경(趙尙絅)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여필희(呂必禧)가 직분을 넘어 상소하여 미친 듯이 꾸짖고 어지럽게 떠들며 비참한 칼날과 독하게 쏘는 것으로 화(禍)를 일으킬 마음을 가져 당여(黨與)는 아래에서 이루어지고 임금의 형세는 위에서 외로와진다고 말하기까지 한 것은 변서(變書)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예로부터 간사한 무리가 기회를 틈타 불쑥 일어나 선류(善類)를 무함한 것이 어찌 한정이 있었겠습니까마는, 여필희처럼 마음 쓰는 것이 음흉하고 참혹한 자는 없었습니다. 바라건대 빨리 귀양보내는 벌을 주어 참설(讒說)을 미워하게 하소서, 이동암(李東馣)은 한결같이 반복(反覆)하면서도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인데, 잗단 음흉한 말들을 주워 모아 천청(天聽)을 현혹하고 사당(私黨)에 아첨할 계책으로 삼으려 하였습니다. 소유(疏儒)의 건복(巾服)을 찢었다고 한 것은 근거없이 지어낸 말이니, 또한 파직하여 속이는 버릇을 징계하여야 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네가 논한 두 가지 일은 옳다. 여필희는 관작을 삭탈(削奪)하여 문외(門外)로 출송(黜送)하고 이동암은 파직하라."
하였다.
지평(持平) 조성복(趙聖復)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임상극(林象極)의 무리는 시비를 돌보지 않고 공론과 힘껏 싸우며 소장(疏章)을 번갈아 내어 날마다 공거(公車)525) 에서 떠들고, 어제 여필희(呂必禧)의 소(疏)가 또 나와 이 일의 시비를 적지 않게 제론(提論)하였는데, 오직 대신(大臣)을 치는 것을 일삼아서 조정을 두드려 흔들 계책을 부렸으니, 아! 또한 통탄합니다. 윤선거(尹宣擧)는 안으로 어진 부형(父兄)이 있고 바깥으로 엄한 사우(師友)가 있어 평소에 도의(道義)를 강구하며 속유(俗儒)로 자처하지 않았으나, 오직 강도(江都)의 한 가지 일 때문에 늘 마음에 스스로 언짢아 한 것이 있었고, 당시의 사우(士友)들도 다 흠으로 여겼는데, 적신(賊臣) 윤휴(尹鑴)만이 말하기를, ‘본디 부끄러워할 만한 것이 아니다.’ 하니, 윤선거가 겉으로는 서로 괴로와하는 듯하였으나 속으로는 실로 기뻐하였습니다. 윤휴의 기피하여야 한다는 말을 듣게 되어서는 드디어 인책하여 스스로 폐고(廢錮)하는 것을 뛰어난 대절(大節)로 여기고 순연히 허물이 없는 처지에 스스로 서려 하였으나, 그것이 도리어 지존(至尊)에게 항거하여 핍박하는 죄에 빠진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대신의 차자(箚子) 가운데에 있는 ‘마음은 엄폐된 것이 있고 사리는 살피지 못한 것이 있다.’ 한 것은 다 적확한 말이며, 신(臣)은 이것도 윤휴의 독에 맞은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오직 저 윤선거를 위하여 편드는 자는 감히 모두 으르렁거리며 앞뒤에서 창화(唱和)하여 뭇사람의 입을 억제하는 바탕으로 삼습니다. 세도(世道)가 이에 이르렀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우악하게 비답(批答)하였다.
9월 10일 병인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윤선거(尹宣擧)의 문집(文集)의 판본(版本)을 헐라고 하교한 지 오래 되었는데 오히려 거행하지 않으니, 매우 놀랍다. 시비가 정하여졌으므로 단연코 고칠 수 없으니, 곧 판본을 헌 뒤에 계문(啓聞)하도록 본도(本道)에 분부하라."
하였다.
정원(政院)에서, 순장(巡將)·감군(監軍)이 패(牌)를 받으면 으레 돈화문(敦化門)의 동협문(東挾門)을 거쳐 나가는데 소유(疏儒)가 소란을 피우는 데에 막혀서 문을 닫을 시한이 이미 가까왔어도 나가지 못하기 때문에 계품(啓稟)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유생(儒生)은 유생이고 순장은 순장이며, 감군은 해가 저물기 전에 일찍 나가야 할 것인데, 소유가 막기 때문에 인정(人定)526) 때에야 비로소 나가니, 어찌 이러한 사리가 있겠는가? 매우 근거없는 일이다."
하였다, 정원에서 그 순장을 추고(推考)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대사간(大司諫) 이세면(李世勉)이 충청 감영(忠淸監營)에서 상소(上疏)하기를,
"신(臣)이 전에 아뢰어 논한 일이 거듭 더하여 판본(板本)을 헐어 없애라는 명까지 있게 되었습니다. 임금의 전에 없던 과실을 눈으로 보고도 잠자코 말이 없이 오직 봉행하는 것을 공경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직분을 저버리고 나라를 저버리는 것이니, 어찌 감히 이 일을 하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엄히 비답(批答)하고 그 벼슬을 갈라고 명하였다.
9월 11일 정묘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말하기를,
"어제 순장(巡將)·감군(監軍)이 소유(疏儒)에게 막혀서 밤이 깊어서야 나간 것은 참으로 전에 없던 변괴입니다. 순장·감군이 몸에 어압(御押)을 차서 이미 임금의 명을 받았으면 대신(大臣) 이하 모두 회피할 것인데, 어찌 소유가 막는 데에 얽매여 궐문(闕門)을 닫는 시한 전에 나가지 못하겠습니까? 일이 놀라운 것이 이보다 심할 수 없으니, 모두 나문(拿問)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끝의 일만을 따랐다.
임금이 특별히 승지(承旨)를 보내어 좌의정(左議政) 김창집(金昌集)에게 돈유(敦諭)하였으나, 김창집이 잇따라 상소하여 면직(免職)을 바라니, 임금이 다시 승선(承宣)527) 에게 명하여 돈유하게 하였다.
9월 12일 무진
심택현(沈宅賢)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삼았다.
병조 참판(兵曹參判) 이대성(李大成)이 상소(上疏)하기를,
"송(宋)나라의 설앙(薛昂) 등이 《자치통감(資治通鑑)》의 판본(板本)을 헐기를 청하였는데, 태학 박사(太學博士) 진관(陳瓘)이 책사(策士)528) 할 때에 신종(神宗)의 어제 서문(御製序文)을 인용하여 물었으므로, 설앙의 의논이 절로 막혔습니다. 지금 윤선거(尹宣擧)의 문집(文集) 가운데에는 효종(孝宗)·현종(顯宗) 두 조정의 은비(恩批)를 갖추어 실은 것이 모두 열 일곱이므로, 신종의 한 수의 서문에 비하여 다과(多寡)가 현격할 뿐만이 아니니, 판본을 헐게 하여서는 안되겠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이번에 판본을 허는 일은 아주 정당하여 조금도 의심할 것이 없는데, 말이 되지 않는 말로 잇따라 상소하니, 인심의 함익(陷溺)이 극심하다. 윤선거의 글이 이미 매우 망령되거니와, 적신(賊臣) 윤휴(尹鑴)의 말은 더욱이 매우 흉패(凶悖)한데도 매우 배척하지 않고 반드시 인쇄하여 전하려는 것은 또한 무슨 마음인가? 인용한 송나라 때의 일은 매우 어그러진다."
하였다.
9월 13일 기사
임금이 도승지(都承旨) 이관명(李觀命)을 보내어 좌의정(左議政) 김창집(金昌集)에게 하유(下諭)하기를,
"이제까지 경(卿)이 차자(箚子)로 아뢴 것은 오로지 억제하고 조정하려는 뜻에서 나와서 의리가 밝고 바르니, 경(卿)의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이 아니면 어떻게 이에 이르겠는가? 이것이 내가 한 번의 차자에 곧 윤허한 까닭인데, 뜻밖에 괴귀(怪鬼) 같은 무리가 낯을 바꾸어 번갈아 나와서 뜻대로 거짓을 꾸며 버젓이 헐뜯어 욕하여 홀로 기무(機務)를 담당하는 대신이 불안하여 나가게 하고야 말았으니, 그 마음을 써서 계략을 꾸민 것이 어찌 매우 마음 아프지 않겠는가? 아! 내 뜻이 굳게 정하여지고 시비가 크게 밝혀졌으므로 위험한 말은 말할 것도 못되는데, 경이 줄곧 돌보지 않아 생각을 고치지 않는다면 마침 그 두드려 흔드는 계략에 맞을 만하니,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더구나 이제 재황(災荒)이 극성하여 진정(賑政)이 바야흐로 급한데, 묘당(廟堂)이 비어서 재결할 사람이 없으니, 병중에 우울하여 병 하나를 더한 듯하다. 경의 국가를 몸받는 정성으로 어찌 생각이 여기에 미치지 않는가? 그러므로 후설(喉舌)의 장(長)을 보내어 간절한 진심을 알리니, 경은 모름지기 깊이 헤아려서 빨리 들어와야 한다."
하였으나, 김창집이 간절히 사양하고 명을 따르지 않았다.
임금이 특교(特敎)로 공조 판서(工曹判書) 조태채(趙泰采)에게 하유(下諭)하기를,
"내가 경(卿)을 임용한 지 오래 되었거니와, 오직 그 은권(恩眷)이 끝내 변하지 않으므로, 시기하는 무리가 반드시 경에게 원한을 풀려 한다. 거짓을 꾸미는 참혹함이 박필몽(朴弼夢)에 이르러서 극진하였으니, 통탄하여 견딜 수 있으랴마는, 경이 무함받은 것은 본디 이미 누명을 씻었는데, 어찌하여 내가 전후에 특별히 하유한 뜻을 체념하지 않고 줄곧 물러가 있는가? 내가 경을 생각하여 마지않아서 꿈에 나타나기까지 하였다. 경이 전석(前席)에 입시(入侍)한 것을 보고 마음에 매우 기뻐하다가 깨어서는 생각이 더욱 간절하여 잊을 수 없다. 아! 내 뜻을 끝내 저버려서는 안되니, 다시는 정세(情勢)를 말하지 말고 즉일로 들어와야 한다."
하니, 조태채가 감격하여 조정에 나아갔다.
9월 14일 경오
밤에 크게 천둥하고 번개치며 우박이 내렸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순장(巡將) 이팽년(李彭年) 등을 나추(拿推)하여 공초(供招)를 받어 주언(奏讞)529) 하니,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순장·감군(監軍)은 몸에 어압(御押)을 차므로 사체(事體)가 가볍지 않으니, 본디 소유(疏儒)가 막을 수 있는 바가 아닌데, 끝내 막혔다가 경고(更鼓)530) 때가 되어 갈 때에야 비로소 나갔다. 이것은 실로 전에 없던 변괴이니, 앞장선 유생(儒生)을 적발하여 죄주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전 대사간(大司諫) 이세면(李世勉)은 자신이 간장(諫長)의 자리에 있으면서 시비를 밝히고 사습(士習)을 바룰 도리를 생각하지 않아서 종이에 가득한 장황한 것이 모두 당론(黨論)을 부식(扶植)한 것도 본디 이미 옳지 않은데다가, 반복(反覆)하여 붙좇는 꼴이 가장 밉다. 이러한 사람은 조정에 그대로 둘 수 없으니, 파직(罷職)하여 서용(敍用)하지 말라."
하였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올해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이광적(李光迪)이 급제한 지 회갑(回甲)이 되는 해입니다. 일찍이 듣건대. 전배(前輩)도 이러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에는 특별히 명하여 사화(賜花)하였다 합니다. 이것은 유전(流傳)하는 말이므로 잘 알 수는 없으나, 이제 특별히 늙은이를 우대하는 은전을 내린다면 합당할 듯 합니다."
하니, 임금이 해조(該曹)에 명하여 쌀·고기·베·비단을 내리게 하였다.
9월 15일 신미
천둥하고 번개쳤다.
강화(江華)의 여인 어린(於隣)과 간부(奸夫)가 함께 모의하여 지아비를 죽였는데, 삼성 추국(三省推鞫)531) 하여 승복(承服)받고 죽였다.
정원(政院)에서 천둥·번개의 변 때문에 경계를 권면하는 말을 아뢴 데에 이르기를,
"전하께서 진실로 능히 일심(一心)으로 경외(敬畏)하여 늘 신명(神明)을 대하는 정성을 지니고 뭇 신하를 이끌어 능히 표준을 세우는 방도를 다하여 희노(喜怒)가 중도에 맞고 용사(用捨)를 반드시 공정하게 하며 넓고 평탄하여 치우침이 없이 공경하고 합심하는 데로 돌아가도록 힘쓰신다면, 실혜(實惠)가 아래에서 극진할 수 있고 천노(天怒)가 위에서 그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였다.
9월 16일 임신
하교(下敎)하기를,
"급제한 지 회갑이 되는 것은 참으로 드물게 있는 것이므로 참으로 귀하게 여길 만하다. 옛일을 본떠 우대하는 특전을 보여야 하니, 지사(知事) 이광적(李光迪)에게 꽃을 만들어 내리라."
하였다. 이광적이 드디어 꽃을 머리에 얹고 전문(箋文)을 받들고서 대궐에 나아가 배사(拜謝)하니, 임금이 선온(宣醞)하여 위로하라고 명하였는데, 한때 전하여 성대한 일이라 하였다.
형조 판서(刑曹判書) 민진원(閔鎭遠)이 상소(上疏)하기를,
"어제 본조(本曹)에서 유생(儒生) 권필형(權弼衡)을 가둘 뜻을 아뢰었습니다. 이어서 전옥서(典獄署)의 첩보(牒報)를 보니, 권필형이 갇힐 때에 유생 여덟 사람이 갓을 벗고 문을 밀면서 한꺼번에 불쑥 들어와 함께 갇히겠다고 스스로 말하며 쭈그려 앉아서 나가지 않는다 하였으므로, 신(臣)이 논하여 아뢰고 엄히 신칙(申飭)하여 곧 내보내게 하였으나, 옥졸(獄卒)은 힘이 약하여 이미 몰아서 끌어내지 못하고 유생들은 끝내 동념(動念)할 뜻이 없습니다. 신은 변변치 못한 자로서 외람되게 형관(刑官)의 장(長)이 되어 이미 형옥(刑獄)을 검칙(檢飭)하지 못하여 막중한 영어(囹圄)에 외인이 마구 들어와 밤을 지내는 폐단이 있게 한데다가, 더구나 이 여덟 사람 가운데의 두 사람은 신에게 처족(妻族)이 되어 피하여야 할 혐의가 있으므로 이미 연유를 갖추어 계품(啓稟)할 수 없었으니, 어찌 감히 벼슬에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유생이 한 짓은 참으로 놀랍다. 다시 엄히 신칙하여 곧 내보내게 하라."
하였다. 처음에 조태징(趙泰徵)과 【윤증(尹拯)의 문생(門生)이 상소한 때의 소두(疏頭)이다.】 권필형이 【임상극(林象極)과 벌을 같이 받겠다고 상소한 때의 소두이다.】 상소하러 대궐에 가서 순장(巡將)을 막았으므로, 임금이 그 앞장 선 자를 죄주라고 명하였으나, 권필형 등 아홉 사람이 모두 ‘일을 같이하였으므로 처음부터 앞장선 자가 없다.’고 말하며 끝내 지적하여 고하지 않았다. 대개 사람이 많으면 임금이 묻지 않으리라고 생각한 것인데, 임금이 소두를 가두어 다스리라고 명하였다. 조태징은 조관(朝官)이므로 금부(禁府)에서 가두었고, 권필형은 형조에 갇혀야 할 것인데, 그 소하(疏下) 박사제(朴師悌) 등 여덟 사람이 서로 이끌어 소란을 일으키고 법관(法官)을 욕하며 옥문(獄門)을 두드려 열고 불쑥 들어와 벌여 앉아서 밤을 지내고 나가지 않으므로, 민진원이 상소하여 말하니, 임금이 내보내라고 명하였으나, 또한 나가려 하지 않았다. 박사제 등이 임금의 명을 원망하고 관부(官府)를 짓밟은 것은 참으로 전에 없던 일인데, 조정에 기강이 없어서 하는 대로 맡겨 두고 막지 못하였으니, 또한 식자가 한심하게 여겼다.
9월 17일 계유
밤에 천둥하고 번개쳤다.
조도빈(趙道彬)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송필항(宋必恒)을 정언(正言)으로, 어유귀(魚流龜)를 응교(應敎)로, 최규서(崔奎瑞)를 예문 제학(藝文提學)으로 삼았다.
9월 18일 갑술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말하기를,
"일전에 유생(儒生) 권필형(權弼衡)을 가둘 때에 다른 유생 여덟 사람이 한결같이 갇히겠다고 스스로 말하며 옥중(獄中)으로 불쑥 들어왔으므로, 형관(刑官)을 시켜 막게 하였으나 막지 못하였습니다. 엄히 신칙(申飭)하여 내보내라는 명이 있고 이제 이미 여러 날이 되었으나, 완강히 움직이지 않고 끝내 물러갈 뜻이 없으니, 그 행동이 매우 도리에 어긋나고 관계되는 것이 중대한 것으로는 이와 같은 것이 없습니다. 더구나 적발하여 죄주라는 명이 특교(特敎)에서 나왔으니 바로 예전에 이른바 조옥(詔獄)532) 이라는 것인데, 이제 그 무리가 많은 것을 믿고 이러한 놀라운 짓을 하니, 광망(狂妄)한 것으로 미루고 용서한다면, 그 조정을 깔보고 형옥(刑獄)을 어지럽히는 버릇이 장차 조금도 그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청컨대 앞장서서 마구 들어간 유생을 먼 곳에 정배(定配)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끝의 일만을 따랐다.
교리(校理) 황귀하(黃龜河)가 상소(上疏)하기를,
"순장(巡將)·감군(監軍)은 몸에 어압(御押)을 차므로 사체(事體)가 지극히 중대하여 왕자(王子)·대신(大臣)일지라도 모두 회피하는데, 이제 이 소유(疏儒)가 어찌 막는 것이 분수를 범하고 예(禮)를 업신여기는 것이 된다는 것을 모르겠습니까마는, 궐문(闕門)을 잠글 때가 되어 가도 끝내 나가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전에 없던 일이고 그 밖의 행동도 매우 도리에 어긋나서 전혀 선비다운 모양이 없으니, 이들은 본디 사습(士習)으로 책망할 수 없습니다마는, 이미 소생(疏生)인데 질곡(桎梏)533) 을 가하면 성조(聖朝)의 관대한 체모에 손상이 있을 듯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9월 19일 을해
반유(泮儒)의 구일 과제(九日課製)534) 를 이날로 물려 설행(設行)하여 으뜸을 차지한 생원(生員) 윤광천(尹光天)에게 급제(及第)를 내렸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여(李畬)가 시골에서 상소(上疏)하여 치사(致仕)535) 하기를 청하고, 또 기호(嗜好)를 물리쳐 정신을 보호하여 아끼며 희노(喜怒)를 적절히 삼가서 표준을 세워 신하에게 임하는 몇 가지를 아뢰었는데, 임금이 우악하게 비답(批答)하여 가납(嘉納)하고 치사를 윤허하지 않았다.
9월 20일 병자
달무리가 목성(木星)을 둘렀다.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말하기를,
"당습(黨習)이 점점 깊어지고 인심이 함닉(陷溺)하여 지친(至親) 사이에 혹 원수처럼 보고 서로 공격하는 자가 있으므로, 유식한 자가 한심하게 여긴 지 본디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전 부호군(副護軍) 이세면(李世勉)은 좌의정(左議政) 김창집(金昌集)의 이성 종제(異姓從弟)로서 접때 상소하여 침공(侵攻)한 것이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하여, 판본(板本)을 허는 일을 사화(士禍)로 돌려 은연중에 유자광(柳子光)에게 견주었으니, 풍교(風敎)를 바로잡고 윤의(倫義)를 붙들어 세우는 도리로서는 파직(罷職)만하고 말 수 없습니다. 청컨대 관작(官爵)을 삭탈(削奪)하여 문외(門外)로 출송(黜送)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이세면의 일만을 따랐다.
9월 21일 정축
이완(李浣)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형조(刑曹)에서 아뢰기를,
"사헌부(司憲府)의 계사(啓辭)로 말미암아 옥문(獄門)에 함부로 들어올 때에 앞장선 자를 먼 곳에 정배(定配)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전옥서(典獄署)에 분부하여 적발하게 하였으나, 유생(儒生)들 여덟 사람이 한꺼번에 불쑥 들어왔으므로 누가 앞서고 누가 뒤따랐는지 모르겠고, 달리 적발할 길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다시 엄히 신칙(申飭)하여 반드시 적발하라고 명하였다. 형조에서 또 말하기를,
"전옥서에서는 어제부터 오늘까지 잇따라 탈보(頉報)536) 를 일삼고 끝내 현고(現告)537) 한 일이 없습니다. 당초에 유생이 이름을 벌여 써서 들인 가운데에서 소두(疏頭) 아래에 가장 먼저 이름을 쓴 자는 박사제(朴師悌)이니, 이 사람을 앞장 선 자로 논하여 멀리 정배하여야 할 것인데, 전옥서의 첩보(牒報) 가운데에는 감히 ‘앞장 선 자를 적발하는 것은 본서(本署)에서 하여야 할 것이 아니기에 벌을 받더라도 결코 봉행할 수 없다.’고 말하였으니, 성명(成命)을 업신여기고 사체(事體)를 모르는 것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본서의 해당 관원을 태거(汰去)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9월 22일 무인
유성(流星)이 천원성(天苑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538) 으로 들어갔다.
9월 24일 경진
홍문관(弘文館)에서 아뢰기를,
"일찍이 고(故) 상신(相臣) 김수흥(金壽興)의 아룀에 따라, 송시열(宋時烈)이 엮은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를 옥당(玉堂)을 시켜 교정(校正)하여 간행(刊行)하라고 이미 성명(成命)이 있었습니다. 그때 고 판서(判書) 김창협(金昌協)이 관직(館職)에 있어서 교정하는 일을 전관(專管)하다가 승직(陞職)한 뒤에도 본관(本館)의 계품(啓稟)에 따라 끝내 고교(考校)하게 하셨습니다. 김창협이 물러가 있는 중에도 이미 성명을 받았고 또 사문(斯文)539) 에 관계되는 중대한 일이므로, 지금 찬성(贊成) 권상하(權尙夏)와 왕복하며 상의하여 여러 해 동안 수정(修整)하였으나 일을 마치지 못하였는데, 이제 권상하가 교정을 끝내고 깨끗이 베껴 써서 모두 17책(冊)을 본관에 돌려 보냈으니, 청컨대 전에 명하신 데에 따라 교서관(校書館)에 분부하여 박아 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 유집일(兪集一)이 장청(狀請)하기를,
"내려 주신 내탕은(內帑銀) 2천 냥으로 호조미(戶曹米) 4천 석(石)을 사서 내년 봄이 되거든 굶주린 백성에게 거저 주고, 전에 사들인 관서(關西)의 세미(稅米)는 진청(賑廳)에 이록(移錄)하여 본도(本道)의 분적(分糴)540) 으로 삼겠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경기는 다른 도와 다르고 장청한 것도 매우 마땅하니, 특별히 청한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형조 판서(刑曹判書) 민진원(閔鎭遠)이 상소(上疏)하였다. 대략 말하기를,
"일전에 박사제(朴師悌)를 멀리 귀양보낼 것을 윤허하신 뒤에 함부로 들어간 일곱 사람이 비로소 옥(獄)에서 나갔다 하므로, 신이 오늘 아침에 부지런히 아문(衙門)에 나아갔습니다. 권필형(權弼衡)은 공초(供招)를 받아야 할 것인데, 혹 공초를 받을 때에 또 전과 같이 함부로 들어오는 폐단이 있을까 염려하여 문졸(門卒)에게 엄히 신칙(申飭)하여 특별히 더 파수(把守)하게 하였으나, 이윽고 유생(儒生) 수십 인이 뒷문으로부터 불쑥 들어왔다 하므로, 신이 하리(下吏)에게 분부하기를, ‘이처럼 난잡하면 공초를 받을 수 없다.’ 하고 도로 하옥하여 뒷날의 좌기(坐起)541) 때를 기다리게 하였더니, 전일 함부로 들어왔던 유생 여섯 사람이 곧바로 마당 안으로 들어와 대면하여 꾸짖기를, ‘박사제는 어찌하여 억지로 멀리 귀양보내고 우리들은 죄주지 않는가? 어찌하여 스스로 적발하지 않고 전옥서(典獄署)의 관원에서 미루었는가?’ 하며 욕하여 마지않고 벌여 서서 나가지 않았습니다. 신이 예졸(隷卒)을 시켜 부액(扶掖)하여 나가게 하였더니, 문판(門板)을 차서 모두 깨었습니다. 행동이 놀랍고 두려워서 당중(堂中)이 모두 떨므로 신이 어쩔 수 없이 좌기를 파하고 지레 돌아갔습니다. 청컨대 신이 물러서 직분을 다하지 못한 죄를 바루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이들이 개좌(開坐)할 때를 타서 불쑥 들어와 욕하며 마치 죄를 따지는 듯이 하였고 문판을 차기까지 하였으니, 일마다 놀랍고 어그러진다. 이것은 실로 전에 없던 큰 변괴이거니와, 이러한 난민(亂民)을 유생으로 대우할 수 없으니, 모두 극변(極邊)에 정배(定配)하여 악을 징계하는 법을 엄하게 하라. 경(卿)이 면직을 청하는 것은 사체(事體)를 크게 손상하니,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이때 유생들이 큰길에 모여 돌을 소매에 담고 막대기를 들고서 동서로 뛰어다니며 사람을 찾느라 서로 떠들며 길가는 사람을 물리치니, 사람들이 다 ‘이들이 선비라 이름하며 일마다 무함을 변명한다 하나, 마침내 행동하는 것은 거리의 무뢰한과 거의 같으니, 청금(靑衿)542) 의 수치가 여기에 이르러 극진하였거니와, 예전에 이른바 오경(五經)이 땅에 떨어졌다는 것이 불행히도 가까와졌다.’ 하였다.
9월 25일 신사
사직(司直) 이선부(李善溥)가 상소(上疏)하여 신구(申球)의 일을 논하고 김창집(金昌集)을 헐뜯어 배척하였는데, 임금이 비답(批答)을 내리지 않고 특교(特敎)를 내려 파직(罷職)하였다.
9월 27일 계미
금성(金星)이 태미원(太微坦) 좌집 법성(佐執法星)을 범하였다.
좌윤(左尹) 이광좌(李光佐)가 상소(上疏)하여 신구(申球)의 일을 논한 데에 이르기를,
"상신(相臣)은 신구의 소가 화(禍)를 떠넘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 악역(惡逆)으로 몰아서 극률(極律)을 청하는 것이 화를 떠넘기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신구 한 사람을 죄주면 화근이 끊어질 것인데, 무슨 참작하고 조정하여 논할 만한 것이 있기에 이런 말도 되지 않는 말을 하면서 판본(板本)을 헐기를 청하기까지 하니, 스스로 멍에를 메고 따르는 것이 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단 말입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엄히 비답(批答)하여 물리쳤다.
좌의정(左議政) 김창집(金昌集)이 이선부(李善溥)·이광좌(李光佐)가 헐뜯어 배척한 일 때문에 상소(上疏)하여 신구(申球)를 죄줄 수 없다는 것을 변명한 데에 말하기를,
"예전에 송(宋)나라의 지한양군(知漢陽軍) 오처후(吳處厚)가 채확(蔡確)의 시(詩)를 올렸는데, 이것이 참으로 시안(詩案)543) 인 듯도 하고 참으로 부회(傅會)인 듯도 하였으나, 범순인(范純仁)은 다만 말하기를, ‘대개 부모가 불효자를 두었으면 천둥이나 귀신은 용서할 수 없는 것이나, 부모가 친히 죽을 곳에 버려둔다면 도리어 은애(恩愛)를 손상할 듯하다.’ 하고 이어서 너그러이 용서하기를 청하였을 뿐입니다. 어찌 도리어 오늘날의 사람들처럼 오처후의 죄를 청하였겠습니까? 주자(朱子)도 말하기를, ‘채확을 죄에 빠뜨리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하였을 뿐입니다. 어찌 오처후를 죄주지 않았다 하여 원우(元祐)544) 의 군신(君臣)까지 허물하였겠습니까? 신(臣)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오늘날 김종직(金宗直)이 당한 것과 같은 참화(慘禍)가 없다면 신구는 결코 유자광(柳子光)과 같다 할 수 없을 것이고, 처분이 오처후를 죄주지 않은 것과 같다면 전하께서도 철종(哲宗)이 면한 평의(評議)를 받지 않으실 것입니다. 혹 변변치 못한 사람이 있어서 윤휴(尹鑴)의 무리가 효종(孝宗)을 평의한 것처럼 성덕(聖德)을 몰래 평의한다면, 신도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우악하게 비답(批答)하여 위유(慰諭)하였다.
개성 유수(開城留守) 송정명(宋正明)이 상소하여 옥문(獄門)을 함부로 들어온 유생(儒生)을 멀리 귀양보내라는 명을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9월 28일 갑신
금성(金星)과 화성(火星)이 서로 범하였다.
이홍술(李洪述)을 훈련 대장(訓鍊大將)으로 삼았다.
9월 30일 병술
눈이 내렸다.
조성복(趙聖復)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정주(定州)의 유생(儒生) 정후교(鄭後僑) 등이 상소(上疏)하기를,
"본주(本州)는 일명 신안(新安)이므로 서원(書院)을 창건하여 주자(朱子)의 화상을 봉안하였으니, 청컨대 서원의 편액(扁額)을 내리소서."
하니, 예조(禮曹)에 내렸다. 복주(覆奏)하니, 윤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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