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58권, 숙종 42년 1716년 10월

싸라리리 2025. 11. 30.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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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정해

응교(應敎) 어유귀(魚有龜)·교리(校理) 홍계적(洪啓迪) 등이 상차(上箚)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윤선거(尹宣擧)의 문집(文集) 가운데에 있는 몇 가지 말은 사림(士林) 중에서 전하여 말하는 자가 매우 많아서 초야(草野)의 경망한 논의가 날로 더욱 격렬하여집니다. 노성(老成)하고 충후(忠厚)하다는 뜻을 발설하지 않으려는 것은 대개 이 일을 가벼이 논하자니 혹 명백히 밝히기 어렵겠고, 중하게 논하자니 혹 참혹하게 되겠으므로, 발설하였다가 알맞지 못하는 것보다 차라리 덮어 두어 발설하지 않는 것이 낫기 때문이었습니다. 불행히도 신구(申球)의 소(疏)가 나와 곧바로 성조(聖祖)를 근거없이 헐뜯은 것으로 단정한 것은 그 본정(本情)을 벗어난 데에서 나왔으니, 이에 윤선거에게 편드는 무리가 좋은 기회로 여겨 신구를 빙자해서 말썽을 돋을 방법을 꾀하여 감히 재신(宰臣)의 소에서 근거없는 말을 빌어 먼저 시험하여 볼 생각을 하고 뜻이 맞는 무리 중에서 독수(毒手)를 빌어 공동(恐動)하는 말을 만들어 냈는데, 반드시 이렇게 하고서야 뭇사람의 입을 막을 수 있고 천청(天聽)을 어지럽힐 수 있으며 윤선거의 흠을 덮을 수 있고 한 무리의 선류(善類)를 빠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니, 계략을 세우고 마음 쓴 것이 교묘하고도 참혹합니다.
이 때문에 대신(大臣)이 한 번 차자(箚子)를 올려 논변(論辨)하였는데, 말의 조리가 명쾌하여 신구에 대하여는 도깨비 같은 자로 지목하고 윤선거에 대하여는 망령된 자로 규정하면서 재량하고 참작하여 다만 판본(板本)을 헐기를 청한 것은 이것이 점점 격렬하여지는 논의를 막고 어지러이 떠드는 단서를 진정시킨 것에 지나지 않으니, 피차를 위하여 매우 깊이 염려하였던 까닭입니다. 어느 말이 화(禍)를 꾸미는 것과 비슷한 것이 있기에 하나도 사화(士禍)라 하고 둘도 사화라 하여 앞에서 창도(唱道)하고 뒤에서 화응(和應)하며 번갈아 헐뜯고 공격하여 마치 큰 화가 앞으로 일어날 듯이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한낱 윤선거를 위한 것일 뿐이겠습니까? 반드시 대신을 무함하려 한 것입니다. 비단 한 대신을 무함할 뿐이 아니라, 반드시 선류를 죄다 해치려 한 것입니다. 오늘날의 처분이 용서는 있고 벌은 없다면, ‘화(禍)’라는 한 자가 과연 무엇에 근거하였겠습니까? 지금 세변(世變)이 날마다 일어나고 광란(狂瀾)이 그치지 않으므로, 그 거짓을 꾸미는 것이 참혹하고 속에 감춘 것이 험악하여 장차 사림에 끝없는 화를 끼칠 것이니,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엄히 가리고 매우 물리쳐서 참설(讒說)이 행하여지지 못하고 화의 싹이 아주 끊어지게 하소서.
접때 부수찬(副修撰) 조관빈(趙觀彬)이 아뢰어 도당록(都堂錄)545)   때의 일을 논하여 무릅써 있기 어려운 단서로 삼았으니, 조관빈이 말한 까닭은 다문 문형(文衡)546)  과 천관(天官)547)  의 좌이(左貳)548)  가 참여하여야 할 것인데 참여하지 않은 데에 있을 뿐입니다. 그날 회권(會圈)549)  한 것이 과연 전례가 있다면 그가 혐의하는 것은 실로 고집할 것이 없을 것이니, 청컨대 전례를 살펴서 상의하여 품재(稟裁)하라고 명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우악하게 비답(批答)하여 가납(嘉納)하고 도당록의 일은 전조(銓曹)에 명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대개 홍문록(弘文錄)550)  을 도당(都堂)에서 회권할 때에는 으레 정부(政府)의 동벽(東壁)·서벽(西壁)551)  과 이조(吏曹)의 당상(堂上)과 대제학(大提學)이 모두 나아가야 하고 혹 대제학이 외방(外方)에 있으면 제학(提學)이 대신 나아가는데, 이 해에 도당에서 권록(圈錄)할 때에는 대제학이 경중(京中)에 있었으나 바야흐로 사직했기 때문에 제학이 대행하였다. 조관빈이 그 도당록 안에 들었으나 구례(舊例)를 어겼다고 생각하여 마음에 그르게 여겼는데, 이때에 이르러 부수찬이 되니, 드디어 상소하여 ‘권록이 격식을 어겼으므로 구차하게 무릅쓰고 있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정원(政院)에서 그 소를 물리쳤으나, 조관빈이 마침내 이 때문에 패초(牌招)를 어겨서 체직(遞職)되었으므로, 당차(堂箚)552)  에 언급하였다.

 

10월 2일 무자

임금이 날씨가 매우 춥다 하여 숙위(宿衞)하는 군사 중에서 옷을 얇게 입은 자에게 유의(襦衣)553)  을 내리라고 명하였다.

 

이희조(李喜朝)를 탁배(擢拜)하여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으로 삼았다.

 

10월 3일 기축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논핵(論劾)하기를,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 장붕익(張鵬翼)은 군무(軍務)를 포기하고 백성과 군졸을 침학(侵虐)하며 술에 취하여 날을 보내고, 아문(衙門)에 나아가 집무하는 것을 전패하며 죄가 없는 자를 때려 죽인 것이 대여섯 사람이나 됩니다. 패악(悖惡)한 일을 낱낱이 말하지 않아도 족하니, 청컨대 나문(拿問)하여 죄를 정하소서. 철원 부사(鐵原府使) 임순원(任舜元)은 백성과 산지(山地)를 다투고 위협하여 무덤을 팠으니, 나문하여 청컨대 밝혀서 처치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임순원의 일만을 따랐다.

 

10월 4일 경인

공조 참판(工曹參判) 이태좌(李台佐)가 상소(上疏)하였다. 그 대략 말하기를,
"신구(申球)의 소가 처음 나왔을 때에는 사당(私黨)을 편드는 논의일지라도 서로 돌아보고 놀라와하며 감히 버젓이 구제하려 해명하지 못하였는데, 대신(大臣)의 차자(箚子)가 한 번 나오자 신구의 말이 서고 신구의 형세가 펴졌으므로, 뒤를 이어 올리는 글에는 여지 없이 논단(論斷)하고 마침내 선정신(先正臣) 윤선거(尹宣擧)를 신구가 들추어 고한 죄과에 두었으니, 오늘의 거조(擧措)를 보면, 그 조정한다는 것이 마침 격동시켜 일을 만드는 것이 되었습니다. 이미 한 번 글을 써서 결단하여 경솔히 처분을 청하고 마지막에는 또 언로(言路)를 매우 막아서 감히 비평하지 못하게 하여, 그 치우친 그릇된 소견으로 임금의 과실을 이끌어 만들었으니, 장래의 해독은 마침내 조정에 화(禍)를 끼치고 나라를 망치게 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엄히 비답(批答)하여 배척하였다.

 

10월 5일 신묘

지평(持平) 이정주(李挺周)가 상소(上疏)하였다. 그 대략에 말하기를,
"성심(聖心)이 쾌히 깨달아 국시(國是)가 크게 정하여진 뒤 일종(一種)의 당에 죽을 힘을 다하는 무리가 늘 두드려 흔들 생각을 품었는데, 불행히도 신구(申球)이 소(疏)가 나오게 되자 머리를 모으고 손뼉을 치며 탈 만한 시기라고 생각하여 미치지 못할까 염려하듯이 번갈아 나와 상소하니, 참으로 슬픕니다. 대저 윤선거의 두세 가지 글은 자기 잘못을 숨기려 하다가 마침내 임금을 핍박한 것이니, 누가 그 말이 망령된 줄 모르겠습니까마는, 반드시 순연히 잘못이 없는 처지에 두려하였습니다. 대신(大臣)이 한 번 차자(箚子)를 올린 것은 오로지 근거없는 의논을 진정시키고 시비를 밝히려는 뜻에서 나왔는데, 도리어 무함하고 헐뜯는 데 여력을 남기지 않으니, 그 천정(天聽)을 어지럽히려 하고 조정의 진신(搢紳)을 모함하는 꼴은 참으로 차마 바로 볼 수 없습니다. 신은 임진년554)  의 과거(科擧)에 관한 사문(査問)에 대하여 더욱이 놀랍고 한탄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이돈(李墩)이 거자(擧子)를 두루 찾아다닌 것과 궐문(闕門)이 닫히지 않은 것은 뭇 증거가 갖추어지고 여러 사람의 눈을 가릴 수 없는데도 때를 타서 일어나 옥안(獄案)을 뒤집으려하니, 그 교유(敎誘)한 자취와 경영(經營)한 정상이 참으로 지극히 교묘하고 치밀한데다가, 더욱이 통탄스러운 것은 권응(權譍)의 죄를 꾸민 일입니다. 그 말이 곧은 것을 노여워하여 유감이 뼈에 사무쳐서 억지로 죄안(罪案)을 만들어 낭자하게 고문 하였습니다.
아! 권응은 바로 사간(司諫) 권변(權忭)의 아들입니다. 권변이 역경에서도 마음을 지킨 청렴한 절개는 일세(一世)에 탄복한 바이고 권응의 재주와 지행(志行)도 사류(士流)가 추대하여 허여하는 바인데, 더구나 눈으로 보고서 말하고 사실에 따라서 대답한 것을 무슨 노여워할 만하고 미워할 만한 일이 있어서 사사로운 원수를 갚듯이 차마 형장(刑杖)을 가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이 과거에 관한 옥사(獄事)가 아직 구명되지 않았는데 금부(禁府)의 당상(堂上)은 인혐(引嫌)하며 줄곧 미루고 있습니다. 이 옥사의 요체는 이돈이 두루 찾아 다녔는지에 달려 있을 뿐이며 윤팽수(尹彭叟)와 갑술(甲戌)이 말을 바꾼 것은 이미 교유하고 위협하였기 때문이고 이제 또 승복(承服)한 것이 전안(前案)과 같으므로, 조정순(趙正純)과 이성곤(李成坤) 형제가 있을 뿐이니, 사문하는 일은 금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다 지엽(枝葉)의 지엽인데 다섯 달 동안 수인(囚人)을 지체시키고 안사(按査)할 사람이 없으니, 이제 신충(宸衷)에서 결단하여 참작하여 처분하셔도 옥사를 소결(疏決)하는 도리에 해롭지 않을 듯합니다."
하고, 소 끝에 또 이정익(李禎翊)을 거두어 쓰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아! 시비를 아는 천성을 사람마다 가졌으니, 윤선거의 글이 망령된 것을 누구나 모르는 것이 아니다마는, 당론(黨論)이 날로 깊어지고 의리가 어두워져서 신변(伸辨)을 핑계삼아 반드시 이기려고 다투는 것은 참으로 큰 세변(世變)이니, 어찌 놀랍고 한탄스러워 견디겠는가? 권응의 아비가 권변이라 하니, 이 사람이 마음으로 애쓴 청렴한 절개는 나도 아름답게 여기는데, 어찌 권변의 아들이 마음에 달가와서 임금을 속이겠는가? 그 억울함을 알 수 있으니, 특별히 서용하라. 윤필정(尹弼鼎)이 정장(呈狀)하고 윤팽수와 갑술이 말을 바꾼 것은 다 달래고 위협한 데에서 말미암았는데, 이제까지 사람들이 이돈을 구제하려 하다가 도리어 이돈이 두루 찾아다닌 것만 드러나게 하였으니, 과연 무엇이 이롭겠는가? 나는 오수원(吳遂元)을 과방(科榜)에서 빼고서야 국가의 처분이 명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원곤(李元坤) 등은 지레 참작하여 처분할 수 없다. 이정익의 일은 내가 유념하겠다."
하였다.

 

10월 6일 임진

한영휘(韓永徽)를 사간(司諫)으로 삼고, 권변(權忭)을 특별히 초탁(超擢)하여 공조 참의(工曹參議)로 삼았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서종태(徐宗泰)가 전일 상소하여 윤선거(尹宣擧)의 문집(文集)의 판본(板本)을 헐라는 명을 거두기를 청하였는데, 그 뒤에 여러 신하의 상소에 대한 비답(批答)이 매우 엄하였으므로 감히 스스로 편안할 수 없다 하여 약방(藥房)의 직소(直所)에서 나가서 상소하고 대죄(待罪)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여러 신하의 상소에 비답한 가운데에 말한 것은 대신(大臣)을 가리켜 배척한 것이 아니니, 경(卿)이 인책하여 스스로 담당하는 것은 지나치지 않겠는가?"
하였으나, 서종태가 호소하여 마지않으니, 임금이 그 약방의 직임을 갈도록 허락하여 김창집(金昌集)으로 대신하였다.

 

10월 7일 계사

전일의 도당록(都堂錄)을 개권(改圈)하라고 명하였다. 이조(吏曹)에서 전일 옥당(玉堂)의 차자(箚子)에 대한 비답에 따라 전례를 살폈더니, 옥당의 차자에 이른바 전례가 있다는 것은 대개 문형(文衡)이 차출되지 않았으므로 제학(提學)이 대신하여 담당한 것이고 문형이 경중(京中)에 있는데 제학이 대행한 전례가 없었으므로, 이에 따라 품계(稟啓)하니,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전례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면, 도당록에 든 사람들은 반드시 행공(行公)해야 할 이치가 없으니, 변통하여 개록(改錄)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을 듯하다. 해조(該曹)를 시켜 품처(稟處)하되, 대제학(大提學)에게 사고가 없고 경중에 있으면 제학이 홀로 참여하지 못하는 것으로 정식(定式)하라."
하였다, 그 뒤에 이조에서 개록하는 것은 사체(事體)가 매우 중대하다 하여 의정부(議政府)에서 품처하게 하기를 청하였는데, 의정부에서 말하기를,
"이미 전례를 어긴 것을 면할 수 없다면, 개록하는 것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0월 8일 갑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유(李濡)가 나이를 이유로 상차(上箚)하여 치사(致仕)를 허락하여 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돈면(敦勉)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70세에 치사하는 것은 예(禮)의 규제가 매우 엄하나 근세 이래로 이 도리가 폐기된 지 이미 오래되었다. 남은 목숨이 다하도록 늙어도 물러갈 줄 모르는 것은 세상이 다 그러한데, 이따금 경서(經書)를 인용하여 물러가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더라도, 임금이 반드시 만류하고 허락하지 않으므로, 염치의 예절이 이 때문에 점점 무너져서 물러가는 풍속은 아주 들리지 않으니, 아! 개탄스럽다."


【태백산사고본】 66책 58권 37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616면
【분류】인사-관리(管理) / 역사-사학(史學)
사신(史臣)은 말한다. "70세에 치사하는 것은 예(禮)의 규제가 매우 엄하나 근세 이래로 이 도리가 폐기된 지 이미 오래되었다. 남은 목숨이 다하도록 늙어도 물러갈 줄 모르는 것은 세상이 다 그러한데, 이따금 경서(經書)를 인용하여 물러가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더라도, 임금이 반드시 만류하고 허락하지 않으므로, 염치의 예절이 이 때문에 점점 무너져서 물러가는 풍속은 아주 들리지 않으니, 아! 개탄스럽다."

 

10월 9일 을미

해창위(海昌尉) 오태주(吳泰周)가 졸(卒)하였는데, 나이는 49세이었다. 오태주는 성품이 본디 평온하고 조용하여 사치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예서(隷書)에 능하여 오직 글을 가지고 스스로 즐겼다. 기사년555)  의 화(禍)를 겪고부터 더욱 스스로 경계하여 의복·거처는 품질이 좋고 사치한 버릇을 아주 없앴다. 임금의 권우(眷遇)가 매우 지극하였는데 죽으니, 임금이 슬퍼하여 친히 글을 지어서 제사하였다.

 

10월 10일 병신

금성(金星)과 토성(土星)이 서로 범하였다.

 

형조(刑曹)에서 권필형(權弼衡)에게 공초(供招)를 받아서 아뢰니,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문목(問目) 이외에 전달되지 못한 소(疏)를 베껴 바쳐서 대신(大臣)을 욕한 것이 지극히 참혹하고 선정(先正)을 헐뜯되 지극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일이 놀랍고 한탄스러운 것이 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 본죄(本罪) 이외에 또 한 죄안(罪案)을 더하여 정배(定配)하라."
하였다.

 

10월 11일 정유

조관빈(趙觀彬)·김태수(金台壽)를 정언(正言)으로, 유명홍(兪命弘)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제도(諸道)의 진정(賑政)을 살펴서 성주 목사(星州牧使) 윤헌주(尹憲柱)·평해 군수(平海郡守) 이익필(李益馝)·갑산 부사(甲山府使) 변진영(邊震英) 등은 가자(加資)하고 나머지는 등급을 나누어 논상(論賞)하였다.

 

10월 12일 무술

대사헌(大司憲) 정호(鄭澔)가 현도(縣道)에 부쳐 상소(上疏)하여 치사(致仕)를 청하고, 이어서 윤선거(尹宣擧)의 글이 도리에 어긋남을 논하였다 이르기를,
"오늘날 성상께서 나라의 시비를 명백히 바루어 한때의 분란을 진정시키려 하신다면, 전후에 상소하여 윤선거를 구제한 무리를 정원(政院)에 불러 윤선거의 문집(文集) 가운데에 있는 성조(聖祖)를 무함한 두세 가지를 뽑아 내어 선조(宣祖) 때에 상소한 유생(儒生)을 정원에 불러 물은 전례처럼 하문하셔서 낱낱이 조목으로 아뢰게 하소서. 그들이 만일 조목에 따라 해명하여 명백히 풀지 못하면 성조께서 당하신 무함은 하늘이 개어 해가 환히 나타나듯이 절로 밝혀져서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소 끝에 또 김창집(金昌集)이 무함받은 것을 변명하면서 정성을 다해 소환하여 나라를 구활(救活)하고 백성을 구제하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오늘날의 일은 시비가 이미 밝혀졌으므로 굳게 지켜서 고치지 않으면, 불러서 묻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당을 감싸는 논의가 절로 그칠 수 있을 것이다. 정성을 다하여 대신을 소환하라는 말은 바로 내 뜻에 맞는다."
하였다.

 

10월 13일 기해

이상성(李相成)을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10월 14일 경자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과 문정공 송준길(宋浚吉)의 서원(書院)에 어서(御書)한 원액(院額)556)  을 내리고,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내가 생각하건대 낭성(娘城)557)  에 화양 서원(華陽書院)이 있고 상산(商山)558)  에 흥암 서원(興巖書院)이 있으니, 바로 두 선정(先正)의 사액 서원(賜額書院)559)  인데, 편액(扁額)을 건 지 세월이 오래 되었다. 병중이므로 필획(筆劃)이 더욱 졸렬하나, 반드시 친히 써서 판자에 새겨 내리려 하는 것은 내가 존경하는 마음을 붙이기 위함이다. 아! 임금이 어진이를 존경하는 것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다면 또한 선비의 추향을 정하여 사설(邪說)을 그치게 할 수 있을 것이니, 내 뜻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의조(儀曹)560)  를 시켜 함께 곧 걸게 하라."
하고, 이어서 사제(賜祭)하였다. 정원(政院)에서 내린 성교(聖敎)를 판자에 새겨서 두 서원의 어서한 편액 옆에 같이 걸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고 좌참찬(左參贊) 민진후(閔鎭厚)에게 명하여 써서 걸게 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말하기를,
"접때 과옥(科獄)을 다시 사문(査門)할 때에 전 판의금(判義禁) 윤덕준(尹德駿)·전 지의금(知義禁) 윤지인(尹趾仁)은 자기와 뜻을 달리하는 편을 치기에 급급하여 옥안(獄案)을 농간하였습니다. 그 큰 것을 뽑아 말하면, 권치대(權致大)가 두려워서 말을 바꾼 것을 곧바로 공초(供招)한 것이라 하여 옥안을 뒤집는 바탕으로 삼고, 권응(權譍)이 바른 것을 지켜서 변하지 않는 것을 저항하는 것이라 하여 마침내 매를 치는 형(刑)을 베풀었습니다. 또 그 당초의 언계(讞啓)561)  에 이미 말하기를, ‘권상유(權尙游)의 글과 권엽(權熀)의 말에는 다 위협하고 교유(敎誘)한 일이 없습니다.’ 하였는데, 기록하고 마감할 때에는 일체 뒤집어서 곧바로 위협하고 교유한 죄과로 몰았고, 궐문(闕門)의 일에 있어서는 위장(衞將) 등이 스스로 변명한 말만을 의지하여 공안(公案)으로 인정하고 임당(任瑭). 이수강(李壽岡) 등은 물어야 할 사람인데도 버젓이 빼어 두고서 단련하여 옥사를 구성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성명(聖明)께서 이미 통촉하셨으나, 징계하는 법은 아직 거행하지 않았으니, 청컨대 모두 관작(官爵)을 삭탈(削奪)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끝의 일만을 따랐다.

 

장령(掌令) 조영복(趙榮福)·지평(持平) 조성복(趙聖復)이 잇따라 상소하여 윤선거(尹宣擧)를 선정(先正)이라 부르는 것을 금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고, 이어서 이제부터 신칙(申飭)하여 아뢰는 글에 다시는 윤선거를 선정이라 부르지 못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강원도 양구현(楊口縣)의 민가 99호가 한꺼번에 불타 없어졌는데, 도신(道臣)이 계문(啓聞)하니, 임금이 휼전(恤典)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10월 15일 신축

진시(辰時)에 무지개가 건방(乾方)562)  에 보였다.

 

평안도 영원(寧遠)에 큰 눈과 우박이 두 치쯤 내리고, 개천(价川)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간원(諫院)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논핵(論劾)하기를,
"남병사(南兵使) 윤우진(尹遇進)은 제배(除拜)된 당초에 대론(臺論)이 중발(重發)하였는데도 무릅쓰고 부임한 것이 본디 한심하였는데, 군무(軍務)를 포기하고 오로지 탐오(貪汚)를 일삼으며 여색(女色)에 미혹(迷惑)되어 뇌물을 받는 문이 크게 열렸으니, 청컨대 파직(罷職)하여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예산 현감(禮山縣監) 정지녕(鄭志寧)은 사송(詞訟)의 청단(聽斷)에 뇌물을 받는 길이 크게 열렸으니, 청컨대 파직하여 서용하지 마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장령(掌令) 안중필(安重弼)이 상소(上疏)하여 엄경수(嚴慶遂)·이태좌(李台佐)의 죄를 징계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엄경수는 관작(官爵)을 삭탈(削奪)하여 문외(門外)로 출송(黜送)하고 이태좌는 파직(罷職)하라고 명하였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사신(使臣)이 떠날 때가 이미 가까왔는데, 대신(大臣)이 유고(有故)하여 아직 사대(査對)하지 못하였습니다. 일찍이 병술년563)  에 삼공(三公)이 인퇴(引退) 하였기 때문에 본원(本院)의 당상(堂上)이 3원(員)을 갖추어서 개좌(開坐)하여 사대한 뒤에 본원의 관원을 시켜 대신의 사제(私第)에 가지고 가서 보이게 하였습니다. 이래도 이러한 전례를 써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민진후가 또 말하기를,
"서원 부부인(西原府夫人)  【곧 광성 부원군(光城府院郡) 김만기(金萬基)의 부인이다.】 은 나이가 여든이 넘었는데 아들이 모두 죽었으니, 해조(該曹)를 시켜 월름(月廩)을 제급(題給)하게 하는 것이 혜양(惠養)하는 도리에 실로 맞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도승지(都承旨) 이관명(李觀命)이 말하기를,
"두 서원(書院)에 어필(御筆)하여 편액(扁額)을 내리신 것은 실로 사설(邪說)을 그치게 하고 선비의 추향을 정하시려는 뜻에서 나왔으니, 무릇 사림(士林)에 있는 자가 누구인들 흠앙(欽仰)하지 않겠습니까? 또 사제(賜祭)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전에는 이러한 비상한 성거(盛擧)가 있으면 혹 특별히 근시(近侍)를 보내어 거행하게 한 때가 있었으니, 이제도 근시를 보내는 것이 사의(事宜)에 맞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관명이 또 크게 흉년이 들었다 하여 더욱더 절약하는 방도에 유의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서종태(徐宗泰)가 강교(江郊)에 나갔는데, 임금이 하유(下諭)하여 불렀으나 오지 않았다.

 

10월 18일 갑진

좌의정(左議政) 김창집(金昌集)이 전후에 상소하여 면직(免職)을 호소한 것이 여남은 번이었으나, 임금이 이미 사관(史官)을 시켜 기다려서 같이 오게 하고 또 여러번 승지(承旨)를 보내 돈면(敦勉)하여 버려두지 않았으며, 또 바야흐로 약원(藥除)의 직임을 띠었으므로, 마지못하여 대궐에 나아갔다. 임금이 곧 명하여 인견(引見)하고 간절히 위유(慰諭)하니, 김창집(金昌集)이 드디어 약방(藥房)에 입직(入直)하였다.

 

윤양래(尹陽來)를 사간(司諫)으로, 황선(黃璿)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10월 20일 병오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말하기를,
"접위관(接慰官) 권시경(權始經)은 본디 명망이 없고, 시종(侍從)을 지내지 않았으며 나이도 늙어서 빈개(儐价)564)  의 직임에 맞지 않으니, 청컨대 개차(改差)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권시경의 일만을 따랐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도제조(都提調)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고(故) 판서(判書) 김진규(金鎭圭)가 반제(泮製) 때에 제학(提學)을 나중에 패초(牌招)하여 고교(考校)에 참여시키는 것을 온당하지 못하게 여겨서 아뢰어 논한 것이 있었으나, 아직 품처(稟處)하지 못하였습니다. 말세의 인심이 착하지 않아서 번번이 과시(科試) 뒤에는 반드시 사람들이 말이 많으니, 제학이 나중에 들어가 참여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합니다. 이 뒤로는 대제학(大提學)이 반궁(泮宮)에 나아간 뒤에 곧 양관(兩館)의 제학(提學)을 불러 미리 빈청(賓廳)에 와서 기다리게 하고 대독관(對讀官)도 와서 기다리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열성지장(列聖誌狀)》을 국가에서 이미 개간(開刊)하였으나, 그 가운데에 책문(冊文)·악장(樂章)은 빠진 것이 없지 않습니다.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이 공사(公私)의 문적(文籍)에서 살펴 내어 보탠 것이 있으니, 옥당(玉堂)을 시켜 가져오고 여러 글을 다시 살펴서 낱낱이 거두어 싣게 하고 이어서 개간(改刊)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이명(李頤命)을 우의정(右議政)에 제배(除拜)하고, 이정익(李禎翊)을 장령(掌令)으로, 황귀하(黃龜河)를 헌납(獻納)으로, 윤석래(尹錫來)를 지평(持平)으로, 최수범(崔守範)을 검열(檢閱)로 삼았다.

 

9월에 웅천(熊川)·김해(金海) 지방에서 지진(地震)이 있었고 이날 용궁(龍宮)에도 지진이 있었는데, 도신(道臣)이 계문(啓聞)하였다.

 

10월 21일 정미

간원(諫院)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말하기를,
"선산 부사(善山府使) 정사신(丁思愼)은 정사(政事)에 어둡고 어지러운 것이 많고 또 술에 빠져서 크고 작은 정령(政令)이 다 서리(胥吏)의 손에서 나오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10월 22일 무신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말하기를,
"아경(亞卿)의 품질(品秩)은 어진이에게 벼슬을 주기 위한 것이니, 진곡(賑穀)을 많이 준비하였다 하여 초탁(超擢)해 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성주 목사(星州牧使) 윤헌주(尹憲柱)는 시종(侍從)에 출입한 사람으로서 이미 자목(字牧)의 직임을 받았으니, 수천 석을 스스로 마련했더라도 직분 안의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승질(陞秩)하는 것은 관방(官方)을 중히 여기는 도리에 매우 어긋나니, 청컨대 윤헌주에게 가자(加資)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명류(名流)가 이른바 스스로 마련하였다고 하는 것은 묘당(廟堂)이나 진청(賑廳)에 힘이 있어 술책으로 전포(錢布)를 얻어서 요리하여 장만한 것에 불과할 뿐이니,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지 칭찬해야 할 일은 아닙니다. 이것을 공이라 하여 높은 품질을 상주는 것은 명기(名器)를 삼가는 도리에 매우 어긋나니, 이 뒤로는 명관(名官)으로서 수령(守令)이 된 자는 잘 다스리고 잘 진휼(賑恤)한 성적이 있더라도 다른 상을 주고 승자(陞資)를 허락하지 말 것을 해조(該曹)를 시켜 정식(定式)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고, 명관에게 가자를 허락하지 말기를 청한 일에 답하기를,
"잘 다스리고 잘 진휼한 일이 뛰어나다면 어찌 명류라는 데에 얽매여 다른 상을 줄수 있겠는가?"
하고, 이어서 해조(該曹)에 명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10월 24일 경술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말하기를,
"와서 별제(瓦署別提) 김사석(金士碩)은 본서(本署)의 공물 주인(貢物主人)565)  으로서 본서의 관원에 제배(除拜)되었으므로 듣는 사람마다 모두 놀라와하니, 청컨대 태거(汰去)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끝의 일만을 따랐다.

 

간원(諫除)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는데, 임금이 정지녕(鄭志寧)의 일만을 따랐다.

 

비국(備局)에서 아뢰기를,
"민진후(閔鎭厚)가 아뢴 바에 따라 수군(水軍)에게는 이미 병보(並保)를 채워 주게 하였으므로 대포(代布)가 도로 세 필(匹)이 되었는데, 이정청(釐正廳)의 절목(節目) 가운데에서 시행할 만하고 폐단이 없는 것을 다시 정식(定式)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이정청의 절목은 자못 상세하여 폐단을 고친 보람이 많이 있습니다마는, 대포를 두 필로 줄여서 주기 때문에 원망하는 말이 없지 않으므로 도로 폐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는 병보를 충정(充定)하였으므로 다시는 방해받을 걱정이 없으나, 각 진보(鎭堡)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폐단은 변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당초의 절목 가운데에서 호서(湖西)의 수군에 관한 상정(詳定)을 본떠 다시 증감하여 별단(別單)으로 써서 들이니, 청컨대 이것을 각 해사(該司)와 양남(兩南)이 감영(監營)·통영(統營)·수영(水營)에 분부하여 올해부터 이에 따라 거행(擧行)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0월 27일 계축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말하기를,
"예조 정랑(禮曹正郞) 유태장(兪泰章)은 마음 쓰는 것이 음흉하고 일하는 것이 아름답지 않습니다. 무부(武夫)를 속여서 뇌전(賂錢)을 받았다가 드러나게 되어서는 도로 주기를 애걸하였으니, 청컨대 태거(汰去)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유태장의 일만을 따랐다.

 

우의정(右議政) 이이명(李頤命)이 상차(上箚)하였다. 대략에 이르기를,
"보건대 전에는 흉년이면 그 해의 환상(還上)566)  까지도 반드시 줄이는 영(令)이 있었는데, 올해는 재황(災荒)이 있는 지방의 백성이 유이(流移)하여 사방으로 나가 도로에 잇따랐습니다. 초겨울에 이러하다면 봄이 된 뒤는 알 만하니, 지금 아직 죄다 유산(流散)하기 전에 빨리 수량에 맞추어 다 바치라는 영을 거두는 것만 못합니다. 전례에 따라 가장 심한 고을은 그 반을 줄이고 그 다음 가는 고을은 3분의 1을 줄이며 조금 충실한 고을은 수량대로 다 바치게 하면, 눈앞에서 안집(安集)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올해의 재결(災結)은 특별히 새 규례를 만들어 그 수를 아뢰어 정하여 제도(諸道)에 획급(劃給)하는데, 이것은 대개 관리가 농간하는 폐단을 깊이 알아서 번신(藩臣)을 시켜 법도 안에서 주선하게 하려는 것이니, 또한 그 뜻이 처음부터 좋지 않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야흐로 분정(分定)할 때에 외방(外方)의 재실(災實)에 관한 신보(申報)가 미처 일제히 오지 않아서 묘당(廟堂)과 지부(地部)567)  의 문견(聞見)이 두루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다과(多寡)를 참작한 듯은 하나 실은 여기에서 멀리 헤아린 것입니다. 전에는 한전재(旱田災)568)  를 주지 않았으나 남도(南道)에는 혹 7, 8만 결(結)을 주었는데, 이제는 한전재도 허가하나 정수(定數)는 도리어 적어졌으므로, 더 주기를 청하지 않으면 백지(白地)에서 세(稅)를 거두어야 할 형세이니, 흉년의 정사가 어찌 이럴 수 있겠습니까? 해조(該曹)에서 이미 복계(覆啓)하여 막기는 하였으나, 특별히 명하여 더 주시기 바랍니다. 전일 대신(大臣)의 차자(箚子) 가운데에 용도(用度)를 줄이기를 청한 것이 있으나, 요즈음 조정이 갖추어지지 않아서 아직 거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신해년569)   이후로 흉년에 줄인 일도 한두 번이 아니니, 빨리 어느 해의 전례를 따라 들어오는 것을 헤아려서 내어 쓰는 규례를 정하라고 명하셔야 하겠습니다.
성상께서도 조구(漕丘)570)  ·회계(會稽)571)  의 마음으로 능히 불에 타는 자를 구제하고 물에 빠진 자를 건져내는 인정(仁政)을 다하신다면, 큰 천명(天命)을 받아 이어 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근일 민간의 돈이 매우 귀하여 거의 은(銀)과 같습니다. 이것은 실로 자모(子母)572)  를 경중(輕重)하는 방편이고 재물을 다스려 나라를 유족(裕足)하게 하는 대정(大政)인데, 더구나 흉년을 당하여서는 더욱이 돈이 경하고 미곡(米穀)이 중하게 하여야 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구리[銅]를 캘 줄 몰라서 다른 나라에서 가져오니, 실로 예전에 이른바 산에서 돈을 주조(鑄造)한다는 것에 어그러집니다. 통용하기가 조금 어려우므로 전부터 통용하다가 곧 폐지한 일이 잦았으나, 이제는 돈을 통용한 지 이미 30년이 되고 먼 지방에도 두루 통용하였는데, 수년 전에 돈이 흙처럼 천하였으므로 야인(冶人)573)  이 혹 돈을 녹여 기구를 만들어서 오늘날처럼 귀하게 되었다 합니다. 귀하면 내어주고 천하면 거두어들이는 것은 또한 옛사람이 재화(財貨)를 통용하여 백성을 편리하게 하는 정사(政事)이니, 이제 먼저 재력이 있는 두세 아문(衙門)을 시켜 구리를 사서 돈을 주조하여 그 통용하는 길을 너그럽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듣건대 초계 군수(草溪郡守) 윤성준(尹星駿)이 관소(官所)에서 죽었다 합니다. 이 사람은 여러 해 동안 시종(侍從)하였으므로 소원(疎遠)한 자와 다르고, 퇴폐한 물결 가운데에 휩쓸리는 것을 스스로 벗어나지는 못하였으나 평소에 남을 몹시 해치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 영외(嶺外)에서 죽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가엾습니다. 청컨대 연도(沿途)에 명하여 그 여츤(旅櫬)574)  을 호송하게 하여 아랫사람을 돌보는 은혜를 다하소서. 또 동시에 외직(外職)에 보임된 구만리(具萬理)·심상정(沈尙鼎) 등이 떠날 때에는 사람들이 중풍을 앓고 오래 학질을 앓는 것을 염려하였으며 당초에 좌죄(坐罪)된 것도 이미 죽일 만한 죄가 아니었으니, 또한 아울러 진념하셔야 하겠습니다. 멀리 귀양보낸 죄인 정식(鄭栻)은 집에 여든 살 된 늙은 어미가 있으므로 멀리 떨어져 있는 정을 듣는 자가 가엾어하고, 또 그가 당차(堂箚)에 참여한 것을 강제당한 뒤에 좇은 것이므로 먼저 발론한 자와 차이가 있을 듯 하니, 또한 특별히 너그러운 은혜를 주셔야 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급재(給災)하는 한 가지 일은 경(卿)의 말이 마땅하니, 아뢴 대로 시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용도를 줄이는 일은 좌상(左相)이 일찍이 차청(箚請)하여 윤허받았으니, 빨리 거행하게 하고 환상(還上)과 돈을 주조하는 일은 묘당(廟堂)을 시켜 품처(稟處)하게 하라. 윤성준의 일은 차사(箚辭)대로 분부하며, 구만리·심상정은 특별히 체직하도록 하고, 정식은 중도(中途)에 양이(量移)하라."
하였다. 그래서 정식을 원주(原州)로 옮겼다.

 

10월 28일 갑인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말하기를,
"임진년575)   정시(庭試)의 과방(科榜)이 발표된 뒤에 사람들의 말이 들끓고 뭇사람의 뜻이 울분하므로 사문(査問)하는 일이 있게 되었는데, 이돈(李墩)이 거자(擧子)를 두루 찾아다닌 정상은 여러 사람이 다 같이 본 것이기에 엄폐하기 어려웠고 수인(囚人)들의 공초(供招)에서 이미 판명되었으니, 오수원(吳遂元)을 과방 가운데에 그대로 두는 것은 단연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이헌영(李獻英)·이헌장(李獻章) 형제로 말하면, 시권(試券)의 서제(書題) 가운데에서 공수(龔遂)576)  의 ‘공’ 자를 자획(字劃)을 바꾸어 별체(別體)로 썼으므로 그 표를 만들어 두어 농간한 자취가 분명하여 엄폐할 수 없으니, 당초에 뽑아 내기를 청하여 아뢰고 한 달이 넘도록 쟁집(爭執)한 것이 대개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 과장(科場)을 엄하게 하여 뒷 폐단을 막는 도리로서는 결코 기왕에 있던 일이라 하여 버려둘 수 없으니, 청컨대 오수원·이헌영·이헌장 세 사람을 과방 가운데에서 뽑아 버리소서."
판윤(判尹) 강현(姜鋧)은 매우 귀가 어두워서 송자(訟者)가 소청하는 말을 전혀 듣지 못하여 하리(下吏)를 시켜 옮겨 써서 고하게까지 하였으므로, 교활한 서리(胥吏)들이 중간에서 농간하여 하고 싶은 대로 늘리고 줄이니, 청컨대 체차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오수원의 일만을 따랐다.

 

간원(諫院)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말하기를,
"순천 군수(順川郡守) 김만주(金萬胄)는 일찍이 남방의 고을을 맡았을 때의 일 때문에 바야흐로 사문(査問)을 시행할 일이 있어서 곧 감죄(勘罪)를 기다리는 사람인데, 무릅쓰고 물러가지 않으니,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정사신(丁思愼)의 일만을 따랐다.

 

이민영(李敏英)을 승지(承旨)로, 이재(李縡)를 부제학(副提學)으로, 황귀하(黃龜河)를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10월 29일 을묘

임금이 초복(初覆)을 행하였다. 【전에 이미 초복(初覆)을 행하였으나, 대신(大臣)이 유고하여 삼복(三覆)에 미치지 못하였는데, 또 뒤미처 승복한 죄인이 있으므로, 또 초복을 행하라고 명하였다.】  끝나고서 형조 판서(刑曹判書)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본조(本曹)의 죄인 가운데에는 사수(死囚)가 많아서 60여 인이나 되고 혹 1백 번도 넘게 형신(刑訊)을 받은 자가 있습니다. 신(臣)의 얕은 소견으로는 사생(死生)을 직단(直斷)하기 어려운 것이 있어서 혹 살릴 의논에 붙이고 싶은 자가 있더라도 감히 본조에서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으니, 소통(疏通)하는 도리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에 의논하여 처결하라고 명하였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건명(李健命)이 말하기를,
"지난해 함경 감사(咸鏡監司) 이광좌(李光佐)의 장청(狀請)에 따라 비국(備局)에서 복주(覆奏)하여, 이 뒤로 곤수(閫帥)는 반드시 북로(北路) 아홉 고을의 수령(守令)을 지낸 뒤에야 비의(備擬)하는 일을 윤허받았으니, 이것은 대개 북방의 수령을 선택하되 싫어서 회피하는 버릇을 막으려는 데에서 나왔습니다. 다만 북로는 먼 지방이므로 해조(該曹)에서 차출하여 보낼 때에 반드시 선택하여 비의하지 못하는데 지금은 일찍이 북로의 수령을 지낸 사람 가운데에서 곤수에 맞을 만한 자가 아주 적으니, 혹 명망이 뛰어난 자가 있으면 얽매이지 말고 융통하여 비의하는 것도 혹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대신에게 물어서 윤허하였다, 장령(掌令) 조영복(趙榮福)이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는데, 임금이 강현(姜鋧)의 일만을 따랐다. 정언(正言) 송필항(宋必恒)이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는데, 임금이 윤우진(尹遇進)·김만주(金萬胄)의 일만을 따랐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유(李濡)가 말하기를,
"해민(海民)이 사는 길은 오로지 어채(漁採)에 의지합니다. 근래 어산(漁産)이 절종(絶種)하여 소득으로 생계를 유지할 만하지 못한데, 감영(監營)·병영(兵營)과 여러 궁가(宮家)의 차인(差人)이 배마다 5관(貫)의 돈을 거두어 관가(官家)에 바치는 것은 10분의 1도 못됩니다. 그러므로 차인은 집을 일으키는데, 해민은 치우치게 혹독한 폐해를 받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분부하여 금단하라고 명하였다. 이유가 또 말하기를,
"각도(各道)의 연해(沿海)에서 절수(折受)하였다는 핑계로 왕래하는 배에 대하여 모두 세(稅)를 거두는 것은 그 폐단이 또한 심하니, 마땅히 일체로 폐지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0월 30일 병진

조명봉(趙命鳳)을 헌납(獻納)으로, 유명웅(兪命雄)을 판윤(判尹)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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