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58권, 숙종 42년 1716년 11월

싸라리리 2025. 11. 30.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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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일 무오

천둥하고 우박이 내렸다.

 

충청도 공주(公州) 등 여섯 고을에서 천둥 소리가 크게 일고 비와 우박이 섞여 내렸으며, 강원도 원주(原州)와 경기 수원(水原) 등 열 고을에서 천둥하였다.

 

11월 3일 기미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논핵(論劾)하기를,
"합천 군수(陜川郡守) 이정절(李挺晢)은 배[船]를 만들어 이익을 늘려 죄다 제 주머니로 돌리고 간사한 서리(胥吏)를 신임하여 뇌물을 받는 문이 크게 열렸으니, 청컨대 파직하여 서용하지 마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11월 5일 신유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는데, 임금이 이정절(李挺晢)의 일만을 따랐다.

 

응교(應敎) 어유귀(魚有龜), 교리(校理) 윤봉조(尹鳳朝)·홍계적(洪啓迪)이 흉년이 들고 재앙이 거듭된 까닭으로 상차(上箚)하여 경계할 것을 아뢰어 덕을 닦고 성실을 힘써서 백성을 유화(柔和)하고 영명(永命)을 빌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우악하게 비답하여 가납(嘉納)하고 차본(箚本)을 금중(禁中)에 두었다.

 

11월 6일 임술

김상직(金相稷)을 대사간(大司諫)으로, 황귀하(黃龜河)를 교리(校理)로 삼았다.

 

간원(諫院)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말하기를,
"강계 부사(江界府使) 권극승(權克升)은 사람됨이 어리석고 어지러운데 외람되게 변방의 중진(重鎭)에 제수되어 형장(刑杖)이 지나치고 노략질을 일삼으며, 그 도의 감사(監司)가 세삼(稅蔘)을 감면하여도 모두 억지로 받아들이면서 칭량(稱量)을 무겁게 합니다, 온 경내(境內)가 불만하여 조석을 보전하기 어려우니, 청컨대 파직하여 서용하지 마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11월 7일 계해

날씨가 매우 춥다 하여 숙위(宿衞)하는 군졸 가운데에서 옷이 얇은 자에게 유의(襦衣)를 내리라고 명하였다.

 

11월 8일 갑자

간원(諫院)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는데, 임금이 권극승(權克升)의 일만을 따랐다.

 

11월 9일 을축

이관명(李觀命)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조도빈(趙道彬)을 도승지(都承旨)로 삼았다.

 

선혜청(宣惠廳)에서 아뢰기를,
"대신(大臣)의 상차(上箚)에 따라 경중(京中)의 용도(用度)를 바야흐로 적당히 줄일 것을 의논하니, 외방(外方)의 수용(需用)도 줄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남(三南)은 감영(監營)의 관수(官需)를 모두 8분의 1을 줄이고 그 밖의 갖가지 내려야 할 것도 모두 8분의 2를 줄이되, 청컨대 제도(諸道)에 분부하여 신결미(新結米)를 거둘 때에 비로소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때 좌의정(左議政) 김창집(金昌集)이 거듭된 기근 때문에 상차하여 적당히 줄이기를 청하니, 임금이 선혜청 당상(宣惠廳堂上) 조태채(趙泰采)·이건명(李健命)·권상유(權尙游)에게 명하여 그 일을 맡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먼저 외방에서 쓰는 것을 줄일 것을 아뢰었다.

 

11월 12일 무진

권적(權𥛚)을 검열(檢閱)로 삼았다.

 

익양 도정(益陽都正) 제(梯)·양평정(陽平正) 장(檣)이 선조(宣祖)·효종(孝宗) 양조(兩朝)의 어필(御筆)을 상소문과 함께 바치고, 창녕 도정(昌寧都正) 장(樟)도 선조·원종(元宗)·효종·현종(顯宗) 사조(四朝)의 어필을 바쳤는데, 임금이 세 사람을 모두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정원(政院)에서, 종신(宗臣)이 어필을 바치는 것은 상전(賞典)을 바라는 데에서 나오는데 전에 연신(筵臣)이 아룀에 따라 일체 상주지 말라는 명이 있었으니, 이제 한꺼번에 세 사람을 상주는 것은 정식(定式)하여 금지하게 한 뜻이 아주 없어지므로 도로 거둘 것을 계청(啓請)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11월 13일 기사

달이 필성(畢星)을 범하였다.

 

병조 참의(兵曹參議) 이정신(李正臣)이 상소(上疏)하여 윤선거(尹宣擧)를 신구(伸救)한 데에 말하기를,
"하늘에서 굽어보시는 밝은 성조(聖祖)께서 어찌 조신(朝臣)의 붕당(朋黨)에 관여하시겠습니까마는, 전후에 말하는 자는 문득 감히 성조를 말 삼아 중위(重威)를 빌어 빙자해 말하여 협제(脅制)하는 계략으로 삼으니, 그 남을 무함하는 술책은 교묘하나, 어찌 우리 성상의 효성을 근심하지 않고 스스로 무엄한 죄에 빠지는 것입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엄하게 비답(批答)하여 배척하였다.

 

11월 14일 경오

좌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약방(藥房)에 입직(入直)하였다가, 이정신(李正臣)의 소(疏)에 논척(論斥)한 말이 있다 하여 나갔는데, 임금이 특교(特敎)로 하유(下諭)하여 불렀다. 김창집이 상차(上箚)하여 면직(免職)을 청한 데에 말하기를,
"어리석은 신(臣)으로서는, 인용하여 견준 것이 무엄하여 이 때문에 우리 전하의 효성을 근심할 수 있다는 것을 알 뿐인데, 변론(變論)한 자가 도리어 이 때문에 죄를 얻는다는 것은 끝내 모르겠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우악하게 비답(批答)하여 돈면(敦勉)하니, 이튿날 김창집이 입직하였다.

 

달이 필성(畢星)을 범하였다.

 

평안도 숙천부(肅川府)에서 무지개가 동남쪽에 보이고 해시(亥時)에 천둥하였다.

 

11월 15일 신미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가고 달무리가 목성(木星)을 둘렀다.

 

11월 16일 임신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말하기를,
"숭릉(崇陵)577)  의 백호(白虎)578)   앞에 한 긴 골짜기가 있습니다. 봉릉(封陵)할 당초에 그곳 민전(民田)을 사서 나무를 길렀는데, 근년에 대신(大臣)이 능관(陵官)의 청에 따라 연중(筵中)에서 아뢰어 능졸(陵卒)에게 잘라 주어 경작하게 하였으므로 하나의 농장(農場)을 만들었으니, 당초에 사서 묵힌 뜻이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사체(事體)가 미안한 것이 이보다 심할 수 없으니, 청컨대 전대로 묵혀서 나무를 기르게 하소서. 접때 대신이 아룀에 따라 각 아문(衙門)·궁가(宮家)에서 내년 봄에 어염세(魚鹽稅)를 거두는 것을 일체 우선 폐지하였습니다. 이것은 본디 전부터 명신(名臣)·석보(碩輔)가 애써 그 폐단을 말하여 온 것인데, 이제 전하께서 특별히 면제하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기회에 영구히 시행할 법으로 삼지 않으면, 뒷날 다시 백성의 폐해가 될 것은 단연코 알 수 있습니다. 이제 한 관사(官司)를 따로 세워 대신이 거느리되 한(漢)나라의 수형(水衡)579)  과 당(堂)나라의 염철(鹽鐵)과 송(宋)나라의 다염(茶鹽)처럼 연해(沿海)의 어염을 총괄하고, 여러 궁가·아문에서는 차인(差人)을 보내지 못하게 하여 이제까지 이것에 의지하여 수용(需用)한 것을 적당히 갈라 주게 하면, 도리를 어겨 침탈하는 폐단이 이로부터 길이 없어질 것이니, 청컨대 묘당(廟堂)을 시켜 절목(節目)을 강정(講定)하여 곧 시행하게 하소서. 음성 현감(陰城縣監) 정혁선(鄭赫先)은 다스리는 것이 매우 각박하고 오로지 가혹하게 침학(侵虐)합니다. 산전(山田)에서 세를 매긴 것이 거의 평야(平野)보다 더하고 적지(赤地)에서 세를 거두는 것이 상년(常年)보다 훨신 많으므로, 온 경내(境內)가 불만하여 장차 흙이 무너지듯할 형세이니,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경작하는 것과 어염세를 금하는 두 가지 일만 따르고, 이헌영(李獻英)의 일에 답하기를,
"우상(右相)의 의논대로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니, 해조(該曹)를 시켜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11월 17일 계유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일을 다시 아뢰었는데, 임금이 정혁선(鄭赫先)의 일만을 따랐다.

 

하교(下敎)하기를,
"계동(季冬)580)  이 멀지 않으므로 삼복(三覆)은 병을 견디고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정원(政院)은 알아서 거행하라."
하였다. 드디어 이달 22일로 길일(吉日)을 가려서 들였다.

 

전라 감사(全羅監司) 김보택(金普澤)이 상소(上疏)하여 재결(災結)을 더 주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이미 더 주라는 명이 있었다고 답하였다.

 

제주 목사(濟州牧使) 홍중주(洪重周)가 장계(狀啓)하여 도중(島中)의 흉년 든 정상을 아뢰고 곡물(穀物)을 얻기를 청하였는데, 비국(備國)에서 복주(覆奏)하여, 호남(湖南)에 있는 강도미(江都米) 3천 석(石)과 어영청(御營廳)의 호남 연해 군보미(軍保米) 3천 석을 각 진포(鎭浦)의 병선(兵船)을 징발하여 기일을 정하여 들여보내고 진휼청(賑恤廳)을 시켜 옮겨 주어 도로 갚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1월 18일 갑술

정호(鄭澔)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윤봉조(尹鳳朝)를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이희조(李喜朝)를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삼았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희조는 고(故) 부제학(副提學) 이단상(李端相)의 아들이다. 일찍부터 거자업(擧子業)581)  을 그만두고 선정(先正)의 문하(門下)에 출입하여 서론(緖論)을 얻어 듣고서 산림(山林)에서 뜻을 지키고 영달(榮達)을 구하지 않았다. 이따금 어버이를 위하여 외읍(外邑)에 잠시 부임하였으나 만년에는 소지(召旨)를 받아도 사양하고 벼슬하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66책 58권 42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618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사학(史學) / 인물(人物)


[註 581] 거자업(擧子業) : 과거에 응시하기 위한 공부.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희조는 고(故) 부제학(副提學) 이단상(李端相)의 아들이다. 일찍부터 거자업(擧子業)581)  을 그만두고 선정(先正)의 문하(門下)에 출입하여 서론(緖論)을 얻어 듣고서 산림(山林)에서 뜻을 지키고 영달(榮達)을 구하지 않았다. 이따금 어버이를 위하여 외읍(外邑)에 잠시 부임하였으나 만년에는 소지(召旨)를 받아도 사양하고 벼슬하지 않았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도제조(都提調)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접때 초복(初覆)한 뒤로 성상의 환후가 더하신데 날씨가 바야흐로 추우므로 더욱이 염려스러우니, 삼복(三覆)은 조금 물리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하고, 도승지(都承旨) 조도빈(趙道彬)도 이어서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삼복은 초복처럼 번거롭지 않으니, 하루 안에 할 수 있다. 또 죄수 가운데에 살릴 만한 자가 없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데, 이 추운 달에 줄곧 갇혀 있다가 지레 죽게 된다면, 어찌 불쌍하지 않겠는가? 앞으로 증세가 반드시 나아지리라 기대하기 어렵고 입춘(立春)도 멀지 않으니, 반드시 정한 날에 거행하려 한다."
하였다. 김창집이 또 말하기를,
"번번이 흉년을 당하면 문득 공작(工作)을 멈추는데, 더구나 올해에는 재황(災荒)이 극심하니, 경외(京外)·공사(公私)의 토목 영건(土木營建)과 백성을 부리는 데에 관계되는 모든 일은 모두 금단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신칙(申飭)하라고 명하였다.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근년에 대신이 어세(漁稅)의 일을 아뢴 때에 포(布)의 댓가로 쳐주는 돈이 차이가 있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국가의 정식(定式)은 목(木)582)  한 필(疋)을 돈 두 냥으로 갈음하는데, 의정부(議政府)·이조(吏曹)·예조(禮曹) 같은 데에서 받는 것은 각 다르고 그 수량이 지나치게 많으며, 포보(砲保)·악공보(樂工保)의 신포(身布)는 목품(木品)이 본디 좋다는 핑계로 따로 더 정하여 줍니다. 정사(政事)를 하는 도리는 고르게 하는 것보다 앞세울 것이 없으니, 이 뒤로는 각사(各司)와 포보·악공보를 물론하고 모두 정식대로 돈 두 냥으로 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고, 김창집이 말하기를,
"포보목(砲保木)은 군사의 의자(衣資)이기 때문에 본래 정세(精細)하고, 악공포(樂工布)의 댓가로 주는 돈이 다른 신포보다 조금 많은 것은 형세가 그러한 것입니다. 이제 두 냥을 한 가지 예(例)로 단정하면, 받는 자는 억울하다고 말할 단서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에 명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조도빈이 말하기를,
"익녕 도정(益寧都正) 제(梯) 등 세 사람이 사조(四朝)의 어필(御筆)을 바쳤다 하여 모두 가자(加資)의 은전(恩典)을 베푼 것은 은상(恩賞)이 방만(放漫)할 뿐더러 전에 정식한 본의에 어긋나니, 이 뒤로는 정식을 더욱 밝혀야 하겠습니다."
하고, 김창집도 그것이 온당하지 못함을 말하니, 임금이 이 뒤로는 신칙하여 봉입(捧入)하지 말게 하라고 명하였다. 김창집이 또 말하기를,
"우윤(右尹) 이희조(李喜朝)가 시골에서 종기를 심하게 앓는데 집이 매우 가난하여 약을 대기 어렵습니다. 전부터 국가에서 예우(禮遇)하는 사람에게는 혹 약을 제급(題給)한 일이 있으니, 이제 의사(醫司)를 시켜 제급하면 아랫사람을 생각하여 주는 도리에 맞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의사에 명하여 약을 내려 주게 하였다. 민진후가 말하기를,
"어전(御前)에 깐 지의(地衣)가 매우 해어졌습니다. 검소함을 나타내는 성덕(聖德)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보기에 미안하니, 고쳐 만들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11월 19일 을해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말하기를,
"양덕 현감(陽德縣監) 이국형(李國馨)은 지난해에 감영(監營)에 청하여 진자(賑資)를 얻어서 상고(商賈)583)  에게 내어 주어 팔아서 사사로 썼으며, 술을 싣고 기녀(妓女)를 데리고 촌간에서 음식을 요구하므로, 온 경내(境內)의 백성이 난리를 만난 듯하니, 청컨대 파직(罷職)하여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이조(吏曹)에서, 명관(名官)으로서 수령(守令)이 된 자는 잘 진휼(賑恤)하고 잘 다스렸더라도 승자(陞資)하지 말기를 대간(臺諫)이 계청(啓請)한 일 때문에, 복주(覆奏)하기를,
"명류(名流)이기 때문에 미리 유력하리라고 의심하여 구별하는 것이 있다면 이미 일체로 상주기를 힘쓰는 정사(政事)가 아닐 것이고, 이것으로 정식(定式)하기까지 한다면 사체(事體)에 손상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청컨대 이제부터 각도에 신칙(申飭)하여 진정(賑政)을 끝내고 아뢴 때에 진곡(賑穀)이 많고 적은 것을 셈하지 말고 치적(治績)과 진정이 뛰어난 자만을 뽑게 하며, 해조(該曹)에서 복계(覆啓)할 때에도 이것으로 경중을 나누어 논상(論賞)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비국(備局)에서, 한 관사(官司)를 따로 세워 어염(魚鹽)을 총괄하기를 대간(臺諫)이 계청(啓請)한 일 때문에 복주(覆奏)하기를,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살펴보면, 호전(戶典) 어염조(魚鹽條)에 ‘염분(鹽盆)은 적부(籍簿)를 만들어 본조(本曹)·본도(本道)에 두고, 세염(稅鹽)은 곡(穀)·포(布)로 바꾸어 군자(軍資)에 보태고, 어전(魚箭)에서 나는 어물(魚物)은 천신(薦新)·상공(常貢)을 제외하고는 곡물로 바꾸어 군자 별창(軍資別倉)에 보탠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조종(祖宗)의 성세(盛世) 때에 어찌 사문(私門)에서 그 이익을 마음대로 하게 하였겠습니까마는, 임진란(壬辰亂) 뒤에 여러 궁가(宮家)가 새로 돌아오자 의지할 바가 없으므로 그때 탁지(度支)584)  의 신하가 어염장(魚鹽場)을 주기를 청하였으니, 이것이 절수(折受)585)  의 시작입니다. 이제는 경이(京外)의 아문(衙門)과 신구(親舊)의 궁가에서 다투어 받고 차지하여 망망한 대양(大洋)의 작은 배까지도 다 소속이 있으니 각처의 차인(差人)이 번갈아 와서 거듭 거두어 매나 범처럼 움켜 가느라 강해(江海)에 출몰합니다. 일생 동안 바다 물결과 소금 연기 사이에서 신고(辛苦)한 자는 손에 돈 한 푼이 없어 하늘에 부르짖고 해독을 원망하게 하는 것이 가는 곳마다 다 그러한데, 아문·궁가에서 받아들이는 것은 겨우 10분이 1입니다. 효종(孝宗)께서 이 폐단을 통촉하여 백성을 보전하는 도리는 사(私)를 없애는 것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수의(繡衣)586)  를 각도에 나누어 보내어 살펴서 아뢰게 하셨으니 장차 크게 변혁될 것이었는데, 미처 시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선대왕(先大王) 때에 이르러 전후에 명하여 폐지한 곳이 한둘 뿐이 아니고 성명(聖明)께서 임어(臨御)하신 이래로도 연한을 한정하여 혁파한 곳에 많았는데, 이제 대신(大臣)·대신(臺臣)이 한 번 말함에 따라 쾌히 처분을 내리셨으니, 신들은 본디 마땅히 봉행하되 미치지 못할까 염려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일에는 차례가 있고 정사는 익히 강구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니, 반드시 먼저 연해의 어염장을 살펴서 두서를 정리한 뒤에 구관(句管)하여 총괄할 관사를 정하고 함께 의논하여 규제하여 마침내 영구한 법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이 법이 잘 만들어져 세식(稅式)을 너그럽게 정하고 징수하는 권한이 한 군데로 모일 수 있다면, 비록 남는 것 없이 각사(各司)·제궁(諸宮)에 나누어 주어 다시 군국(軍國)을 크게 돕지 못하는 것이 역대(歷代)나 조종 때와 같더라도, 오히려 포악하게 요구하고 거듭 거두는 폐해를 영구히 끊어서 해민(海民)의 몹시 다급한 괴로움은 풀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본사(本司)의 제거(提擧) 가운데에서 주관(主管)할 수원(數員)을 먼저 차출하고 곧 경외에 이문(移文)하여 근본까지 구명하게 하며 그 문서가 다 도착하거든 절목(節目)을 상의한 뒤에 아문을 설치하는 등의 일을 다시 품정(稟定)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대개 어염은 나라의 계책 중에서 큰 것인데, 우리 나라의 절수하는 법은 옛 제도와 크게 어긋나서 이익은 사문으로 돌아가고 원망은 공조(公朝)로 돌아가 마침내는 1백 년이 되어도 바로잡기 어려운 고질적인 폐단이 되었으므로 묘당(廟堂)에서는 이 기회에 한 번 정돈하려고 아뢴 말이 근본에 소급하고 말을 극진히 하여 명백하고 자세하였다. 그러나 이 뒤에도 절수가 여전하여 끝내 실효(實效)가 없이 한갓 한바탕의 헛된 말로 돌아갔으므로 식자가 한탄하였다.

 

11월 20일 병자

임금이 삼복(三覆)을 행하였는데, 사형에 처할 자가 17인이고 사형을 감면한 자가 5인이었다. 지평(持平) 이정주(李挺周)가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말하기를,
"아내를 죽인 죄인 이인선(李仁先)·김귀현(金貴賢)은 그 죄상을 따져보면 실로 용서할 만한 꼬투리가 없으며, 박명진(朴鳴震)이 인명을 살상하고 최필영(崔必永)이 인가에 불을 놓고 최선봉(崔先奉)이 인신(印信)을 위조한 것은 모두가 죽어야 할 죄이므로 실로 살려줄 만한 꼬투리가 없는데, 성상께서 갑자기 사형을 감면하라는 명이 계셨습니다. 비록 살리기를 좋아하는 성의(盛意)에서 나왔더라도 법은 지극히 엄하므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모두 율문(律文)대로 처단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헌납(獻納) 조명봉(趙鳴鳳)이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말하기를,
"군기 첨정(軍器僉正) 이하상(李夏相)은 시장(柴場)을 적간(摘奸)587)  할 때에 산전(山田)이 묵은 곳에 전혀 급재(給災)하지 않아서 궁벽한 산협(山峽)의 잔폐(殘弊)한 백성이 백지 징세(白地徵稅)를 면하지 못하고, 그 밖에 폐단을 지은 것이 끝이 없으니, 파직(罷職)하소서. 석성 현감(石城縣監) 송진동(宋鎭東)은 정령(政令)이 도착(倒錯)되고 거조(擧措)가 해괴하며 간사한 서리(胥吏)를 가까이하고 믿어 심복으로 삼아서는 지세(地稅)를 함부로 받고 우속(牛贖)588)  을 억지로 거두었으니, 파직하소서. 외방(外方)의 영문(營門)에서 수용(需用)하는 데에 관계되는 모든 물건은 싼값으로 열읍(列邑)·열진(列鎭)에 토산(土産)을 분정(分定)하는 것이 이미 그릇된 규례가 되어 민간에서 내도록 요구하므로 폐단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러한 큰 흉년을 당하여 이러한 폐해를 전례라 핑계하고 줄곧 잘못을 이어 가서 곤궁한 백성에게 손해를 끼칠 수 없으니, 일체 금단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고, 다만 이하상은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推考)하라고 명하였으며 끝의 일은 묘당(廟堂)에 명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유(李濡)가 말하기를,
"각 영문에서 잡물(雜物)을 분정하는 폐단은 참으로 대간(臺諫)의 말과 같습니다. 감영(監營)에서는 으레 각 고을에 있는 감영의 곡물로 회계(會計)하여 감제(減除)하나, 병영(兵營)·수영(水營)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수영에서는 소속 각 진포(鎭浦)에 분정하되 그 값을 주지 않으므로 변장(邊將)이 수군포(水軍布)로 사서 보내는데, 수군포는 댓가를 주어 사변에 대비하게 하는 바탕이라 관계된 바가 매우 중대하니, 대간의 말대로 일체 혁파(革罷)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이것을 거조(擧條)589)  에 내어 제도(諸道)에 신칙(申飭)하라고 명하였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만성(李晩成)이 말하기를,
"민사(民事)가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북한(北漢)의 환자미[還上米]는 전혀 준봉(準捧)590)  할 수 없는 형세이니, 감봉(減捧)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북한을 주관(主管)하는 대신(大臣) 이유(李濡)에게 물었다. 이유가 말하기를,
"참작하여 줄여 주게 하여도 안될 것이 없을 듯합니다."
하고, 우의정(右議政) 이이명(李頤命)이 청하기를,
"북한·강도(江都)를 물론하고 열읍(列邑)에 있는 모든 군향(軍餉)에 있어서 재상(災傷)을 가장 심하게 입은 고을은 반을 줄이고 그 다음 가는 고을은 3분의 1을 줄이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1월 21일 정축

도당(都堂)에서 홍문록(弘文錄)에 뽑힌 사람을 개권(改圈)하여, 서명균(徐命均)·김재로(金在魯)·조관빈(趙觀彬)·김유경(金有慶)·이진망(李眞望)·심공(沈珙)·이명언(李明彦)·박사익(朴師益)·최상리(崔尙履)·황규하(黃奎河)·이인복(李仁復)·송진명(宋眞明) 등 12인을 뽑고, 박필몽(朴弼夢)·이세덕(李世德)·윤성시(尹聖時)·조석명(趙錫命)·조원명(趙遠命)·이덕수(李德壽)·권익관(權益寬)·엄경수(嚴慶遂) 등 8인을 태거(太去)하였다.

 

11월 22일 무인

대사헌(大司憲) 이관명(李觀命)·지평(持平) 이정주(李挺周)가 인피(引避)하기를,
"전일 이헌영(李獻英)을 과방(科榜)에서 뽑아 내기를 계청(啓請)한 데에 대한 성비(聖批)에 ‘근년 우상(右相)이 의논하여 품처(稟處)한 대로 하라.’는 분부가 있었으므로 헌의(獻議)를 가져다 살폈더니, 조어(措語)는 미리 꾸몄으리라고 의심하게 된다하여 복시(覆試)591)  를 청하였을 뿐이지 표지를 만들어 두어 농간하였다 하여 곧바로 뽑아 버리기를 청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본디 그대로 연계(連啓)592)  하여야 하겠으나, 우선 해조(該曹)에서 품계(稟啓)하기를 기다려 그 처결을 본 뒤에 발계(發啓)하여도 안될 것이 없으므로 상의하여 우선 멈추었습니다. 물의는 수의(收議)가 대계(臺啓)의 본의와 같지 않은데 문득 우선 멈춘 것은 그르다 하니,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없습니다."
하고 드디어 퇴대(退待)하였는데, 헌부(憲府)에서 처치하기를,
"상의하며 우선 멈춘 데에는 절로 소견이 있었으니, 출사(出仕)시키소서."
하였다.

 

공주(公州)의 유학(幼學) 김덕린(金德麟)이 상소(上疏)하였다. 대략에 이르기를,
"생각하건대 우리 효종 대왕(孝宗大王)께서는 총명하고 예지(睿智)한 자질로서 비색(否塞)을 경복(傾覆)하고 둔난(屯難)을 구제할 마음을 가지셨으니, 침과(枕戈)593)  ·상담(嘗膽)594)  하는 뜻은 하늘에 질증(質證)할 만하고 날은 저물고 길은 멀다는 분부는 귀신을 느껴 울게 할 만하였습니다. 덕(德)을 같이하는 신하를 널리 구하여 반드시 보복할 방책을 늘 강구하셨으니, 10년 동안 경영한 것은 신밀(愼密)한 계책이고 토벌하여 보복하는 의리는 해와 별처럼 밝았습니다. 불행히도 문득 승하하시어 오랜 뜻이 풀리지 못하였으나, 인심을 맑게 하고 세교(世敎)를 붙들어 세워서 후세가 짐승이 되는 것을 면하게 한 것으로 말하면 어찌 우리 성조(聖祖)께서 끼친 풍습이고 남긴 공렬(功烈)이 아니겠습니까? 그 성덕(盛德)·지성(至聖)은 본디 영구히 특별하게 일컬어져야 할 것인데, 다만 전장(典章)을 거행할 겨를이 없어 아직 숭봉(崇奉)하는 의례(儀禮)를 지체하고 세실(世室)의 예의를 거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신민(臣民)이 함께 우울하고 한탄하는 바입니다. 지금 의논하는 자가 혹 성조의 공렬이 저렇게 성대하시니 두어 자의 칭송을 더하더라도 반드시 손익(損益)될 것이 없을 것이라 하나, 또한 매우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주 무왕(周武王)이 상(商)나라를 토벌한 뒤에 그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추존(追尊)하여 특별히 왕작(王爵)을 더하였는데, 이것이 본디 천고(千古)의 달효(達孝)입니다. 한 선제(漢宣帝)가 즉위한 처음에 친히 내린 수조(手詔)에 ‘효무 황제(孝武皇帝)께서는 인의(仁義)를 몸소 실천하고 위무(威武)를 격려하여 공덕이 무성하시니, 묘악(廟樂)에 칭송하여야 한다.’ 하고 이에 높여서 세종묘(世宗廟)라 하였는데, 선제가 조상의 공렬을 크게 나타낸 것을 전사(前史)에서 칭찬하였습니다. 또한 우리 나라에서 선왕을 높인 법도 다 두루 셀 수 있는데, 당저(當宁)의 존호(尊號)로 말하면 위로 공경(公卿)부터 아래로 삼사(三司)까지 말을 같이하여 굳이 청하여도 끝내 윤허하지 않으셨으니, 성조의 높은 공렬과 성대한 덕만이 어찌 사라져서 칭송할 것이 없겠습니까? 더구나 이제 사설(邪說)이 뒤를 이어 일어나서 우리 성조께서 다하지 못하신 사업을 헐뜯어 꺼리지 않으니, 성심(聖心)에도 반드시 슬퍼서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효종의 세실이 이미 이루어졌는데, 휘호(徽號)를 추상(追上)하는 것이 어찌 내 지극한 소원이 아니랴마는, 다만 이 일은 지극히 중대하니, 예관(禮官)을 시켜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처음에 승문 판교(承文判校) 유백승(柳百乘)이 효종의 휘호를 추상하기를 청한 소(疏)가 정원(政院)에 이르렀으나, 정원에서 이 일은 지극히 중대하므로 한 미관(微官)이 감히 건청(建請)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하여 받지 않았다. 그러자 김덕린이 이어서 정원을 배척하여 ‘찬양할 도리는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미룰 마음을 먹는다.’ 하였으므로 정원에서 마지못하여 계품(啓稟)하니, 임금이 명하여 정원을 배척한 말을 삭제하고 들이게 하여 비답(批答)을 내렸다. 예조(禮曹)에서 복주(覆奏)하기를,
"시임(時任)·원임(原任)의 대신(大臣)과 2품(品) 이상과 삼사를 시켜 빈청(賓廳)에 모여 의논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효종의 존주(尊周)하는 의리는 본디 이미 우주에 밝게 나타나 해와 별처럼 빛나니, 두어 자의 휘호가 어찌 성덕(聖德)에 빛을 더할 만하랴마는, 유백승·김덕린 등이 미말(微末)의 무리로서 분수를 벗어나 상소한 것은 그 마음이 오로지 공(功)을 바라고 상(賞)을 바라는 데에서 나왔으니 매우 외람된다."


【태백산사고본】 66책 58권 44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619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왕실-종사(宗社)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역사-사학(史學)


[註 593] 침과(枕戈) : 창을 베개삼고 잔다는 뜻으로 군사(軍事)를 생각하여, 안면(安眠)하지 않고 비상(非常)에 대비함을 이름. 《진서(晋書)》의 "해가 기우는 데도 밥먹기를 잊고 창을 베고 날이 새기를 기다린다[日昃忘食枕戈待且]"는 데서 인용한 말임.[註 594] 상담(嘗膽) : 쓸개를 맛본다는 뜻으로, 복수하려고 모든 간고(艱苦)를 참는 것을 이름.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복수할 생각으로 몸을 괴롭게 하고 노심 초사(勞心焦思)하며 늘 쓸개를 맛보았다는 고사(故事)에서 나온 말임.
사신(史臣)은 말한다. "효종의 존주(尊周)하는 의리는 본디 이미 우주에 밝게 나타나 해와 별처럼 빛나니, 두어 자의 휘호가 어찌 성덕(聖德)에 빛을 더할 만하랴마는, 유백승·김덕린 등이 미말(微末)의 무리로서 분수를 벗어나 상소한 것은 그 마음이 오로지 공(功)을 바라고 상(賞)을 바라는 데에서 나왔으니 매우 외람된다."

 

11월 23일 기묘

간원(諫院)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는데, 임금이 송진동(宋鎭東)의 일만을 따랐다.

 

11월 24일 경진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는데, 임금이 이국형(李國馨)의 일만을 따랐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유(李濡), 좌의정(左議政) 김창집(金昌集), 우의정(右議政) 이이명(李頤命), 판중추부사 김우항(金宇杭) 등이 2품 이상 및 삼사(三司)의 제신(諸臣)과 함께 빈청(賓廳)에 모여 효종 대왕(孝宗大王)에게 존호(尊號)를 추상(追上)하는 일을 의논하였는데, 공조 판서(工曹判書) 조태채(趙泰采), 좌참찬(左參贊) 민진후(閔鎭厚), 우참찬(右參贊) 황흠(黃欽), 호조 판서(戶曹判書) 권상유(權尙游), 예조 판서(禮曹判書) 송상기(宋相琦),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만성(李晩成),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건명(李健命), 호조 참판(戶曹參判) 신임(申銋), 대사헌(大司憲) 이관명(李觀命), 예조 참판(禮曹參判) 이의현(李宜顯), 개성 유수(開城留守) 송정명(宋正明) 등이 다 ‘효종 대왕께서 10년 동안 임어(臨御)하시면서 강명(講明)한 것은 《춘추(春秋)》의 큰 의리이고 면려(勉勵)한 것은 내정(內政)을 닦고 외이(外夷)를 물리치는 지극한 계책이었으나, 백등(白登)595)  의 깊은 수치를 씻기 전에 영안(永安)596)  의 유조(遺詔)를 문득 내리셨으니, 충신(忠臣)·지사(志士)의 아픔이 어찌 끝에 있었겠는가? 당시에 다하지 못한 지업(志業)은 또한 만세(萬世)에 할말이 있을 만하다. 이 때문에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이 일찍이 건청(建請)하여 세실(世室)로 받들어 백세(百世)에 덕(德)을 관망(觀望)하게 하였으니, 존봉(尊奉)이 이미 지극하므로 두어 자의 칭호는 증손(增損)하는 바가 있을 만하지 못하다.’ 하였는데, 사간(司諫) 윤양래(尹陽來), 헌납(獻納) 조명봉(趙鳴鳳), 정언(正言) 송필항(宋必恒)·황선(黃璿), 징령(掌令) 윤석래(尹錫來), 지평(持平) 김태수(金台壽)·이정주(李挺周), 응교(應敎) 어유귀(魚有龜), 교리(校理) 홍계적(洪啓迪)·황귀하(黃龜河) 등의 의논도 대략 같고, 병조 참판(兵曹參判) 황일하(黃一夏)·훈련 도정(訓鍊都正) 김중기(金重器)는 성대한 전례(典禮)를 추거(追擧)하기를 청하였다. 그래서 이유·김창집·이이명·김우항이 아뢰기를,
"종묘(宗廟)의 예(禮)는 세실보다 높은 것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한(漢)나라의 신하가 말하기를, ‘공(功)은 고황제(高皇帝)보다 높은 이가 없으므로 제(帝)를 위하는 것은 태조묘(太祖廟)이어야 하고, 덕(德)은 효문 황제(孝文皇帝)보다 높은 이가 없으므로 제(帝)를 위하는 것은 태종묘(太宗廟)이어야 한다.’ 하였는데, 이것은 은(殷)·주(周) 이래 지극히 높인 것입니다. 생각하건대, 우리 효종 대왕께서 상성(上聖)의 자질로 양구(陽九)597)  의 운(運)을 당하여 그 만세에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을 바로잡고 대의(大義)를 펴신 것은 천지를 범위로 할 만하였으므로 참으로 천하에 할말이 있을 수 있으니, 참으로 만고(萬古)의 제왕(帝王)에게 없던 성덕(盛德)입니다. 존숭(尊崇)하는 예에 하나라도 맞지 않는 것이 있다면, 대저 혈기(血氣)가 있는 무리라면 누구인들 그 정성을 다하려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본디 오늘날 초야(草野)의 말을 기다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하건대 존명(尊名)·융호(隆號)는 이미 대행(大行)598)   때에 올렸고 세실의 의(義)와 관덕(觀德)의 묘(廟)를 아울러 얻어 또한 백세에 조천(祧遷)599)  하지 않는 예(禮)를 정하였으니, 존주(尊周)의 의(義)는 본디 이미 남김없이 천양(闡揚)하였는데, 이제 와서 두어 자의 시호(諡號)를 추상하여도 성렬(聖烈)에 더하는 것이 없을 듯합니다. 또 삼가 듣건대 효종께서 처음 즉위하셨을 때에 조정(朝廷)의 신하들이 인조(仁祖)의 존시(尊諡)를 추상하기를 청하였더니 하교(下敎)하기를, ‘선왕(先王)의 뜻이 아니므로 계술(繼述)의 의리에 어그러진다.’ 하셨다 합니다. 하교하신 말씀이 아직도 사람들의 이목에 있으니, 성명(聖明)께서도 선지(先旨)를 따라서 양조(兩朝)의 겸손한 덕을 빛내셔야 하겠습니다. 오직 성명께서 깊이 생각하여 잘 처치하시기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생각하건대 우리 성조의 성대한 덕과 큰 공렬은 천고에 우뚝하게 빛나니, 이번에 추숭(追崇)을 청한 것을 누가 감히 이의(異議)하랴마는, 세실의 대례(大禮)를 이미 거행하였으니, 존봉(尊奉)하는 도리에 유감이 없을 것이다. 대신의 헌의(獻議)가 바로 내 뜻에 맞으니, 다시 의논할 것 없다."
하였다.

 

11월 25일 신사

조성복(趙聖復)을 장령(掌令)으로, 조관빈(趙觀彬)을 수찬(修撰)으로, 김재로(金在魯)·박사익(朴師益)을 부수찬(副修撰)으로, 김간(金幹)을 집의(執義)로, 박필주(朴弼周)를 돈녕부 참봉(敦寧府參奉)으로 삼았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김간(金幹)은 일찍부터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의 문하에서 수업(受業)하여 요체(要締)를 지키고 벼슬하지 않았다. 이따금 고을에서 분주한 적이 있으나 또한 오래 있지 않았으며, 만년에는 조정에서 징사(徵士)600)  로 대우하여 잇따라 불러 여러 번 헌부(憲府)의 벼슬을 제배(除拜)하였으나 병들었다고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박필주는 선조(宣祖) 때의 명신(名臣) 박동량(朴東亮)의 손자인데, 젊어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어 과거(科擧) 공부를 달가와하지 않고 자신을 수양하는 학문에 자못 마음을 두었으므로, 한때의 사류(士類)가 칭찬하였다. 여러 번 천거에 들어 잇따라 제배하는 명이 있었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66책 58권 46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620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사학(史學) / 인물(人物)


[註 600] 징사(徵士) : 조정에서 부른 학덕(學德)이 높은 선비.
사신(史臣)은 말한다. "김간(金幹)은 일찍부터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의 문하에서 수업(受業)하여 요체(要締)를 지키고 벼슬하지 않았다. 이따금 고을에서 분주한 적이 있으나 또한 오래 있지 않았으며, 만년에는 조정에서 징사(徵士)600)  로 대우하여 잇따라 불러 여러 번 헌부(憲府)의 벼슬을 제배(除拜)하였으나 병들었다고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박필주는 선조(宣祖) 때의 명신(名臣) 박동량(朴東亮)의 손자인데, 젊어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어 과거(科擧) 공부를 달가와하지 않고 자신을 수양하는 학문에 자못 마음을 두었으므로, 한때의 사류(士類)가 칭찬하였다. 여러 번 천거에 들어 잇따라 제배하는 명이 있었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11월 27일 계미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수어청(守禦廳)의 군보(軍保)601)  는 3천 명으로 정액(定額)되었으나 잡탈(雜頉)이 늘 많고 재감(災減)602)  도 잦아서 청중(廳中)의 수용(需用)은 번번이 모자라는 것을 걱정합니다마는, 근년에 양역(良役)603)  의 폐단이 매우 민망스러우므로 신(臣)이 본청(本廳)에서 잇따라 전토(田土)를 사서 보액(保額)을 점차 줄이려하는데, 지금 면세(免稅)한 쌀은 겨우 군수보(軍需保) 4백 명이 바치는 쌀의 수량에 해당합니다. 이 뒤로는 군보 4백 명이 비더라도 채우지 말고 2천 6백 명으로 보액을 고쳐 정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기하(李基夏)를 포도 대장(捕盜大將)으로 삼았다.

 

제주(濟州)의 진정(賑政)을 살펴, 전 제주 판관(濟州判官) 남구명(南九明)은 파직(罷職)하여 추고(推考)하고 가자(加資)를 삭탈하며, 전 제주 목사(濟州牧使) 변시태(邊是泰)·전 정의 현감(旌義縣監) 김초보(金楚寶)는 나문(拿問)하고, 전 대정 현감(大靜縣監) 이현징(李顯徵)은 파직하였는데, 어사(御史) 황귀하(黃龜河)의 별단(別單)에 따라 비국(備局)에서 등급을 나누어 논죄(論罪)한 것이다.

 

충의위(忠義衞) 봉학주(奉鶴周)가 격쟁(擊錚)하고 상언(上言)하기를,
"목조(穆祖)의 황고(皇考)의 묘소가 삼척부(三陟府)의 서쪽 노동(蘆洞)에 있고 황비(皇妣)의 묘소가 부(府)의 서쪽 동산(東山)에 있는데, 묘역이 무너져서 후면에만 아직 곡장(曲墻)의 유지(遺址)가 있습니다."
하고, 수호군(守護軍) 김무원(金武元)이 또 말하기를,
"정사년604)  에 부사(府使)가 두 묘소에 흙을 보태고 사초(莎草)를 고칠 때에 석곽(石槨)이 드러나 있으므로 그 위에 흙을 가져다가 봉분(封墳)하였다 합니다."
하였는데, 예조(禮曹)에서 복주(覆奏)하기를,
"삼척 땅에 국릉(國陵)이 있다는 말은 유래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신묘년605)  에 양주(楊州)의 이제(李㫼)와 계유년606)  에 경주(慶州)의 이영원(李榮遠)과 기묘년607)  에 삼척(三陟)의 이세열(李世說)이 다 이때문에 상소(上疏)하였고, 그 뒤에 경주 사람 김득웅(金得雄) 등이 연명(聯名)하여 비국(備局)에 정장(呈狀)하였으며, 전후 수십 년 동안에 도신(道臣)이 간심(看審)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닌데, 마침내 증험이 없어 매번 정지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인용한 여러 가지 말도 특별히 믿을 만한 꼬투리가 없는 듯하나 일이 중대한 데에 관계되니, 도신을 시켜 친히 가서 간심하게 하고 봉학주도 내려보내어 증거 삼아 묻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 뒤에 이 일은 마침내 무실(無實)한 것이 되었다.

 

11월 30일 병술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이헌영(李獻英)·이헌장(李獻章) 등은 근년에 대신(大臣)이 헌의(獻議)한 대로 복시(覆試)하라고 분부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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