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58권, 숙종 42년 1716년 12월

싸라리리 2025. 11. 30.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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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정해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도승지(都承旨) 조도빈(趙道彬)이 말하기를,
"성상의 환후(患候)는 안질(眼疾)이 매우 중하시므로 잔 글자는 살펴보시기에 방해되는 것이 있으니, 이 뒤로는 아뢰는 글과 뭇 신하의 소장(疏章)은 그 글자 모양을 조금 크게 하여 바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외방(外方)의 연은점(鉛銀店)은 다 호조(戶曹)에 속하였으나, 연(鉛)은 각 군문(軍門)에 나누어 보냈는데, 근래 연군(鉛軍)이 점점 줄어서 드디어 나누어 보내는 규례를 폐지하였으므로, 군문의 연환(鉛丸)이 매우 어렵습니다. 홍천(洪川)에 있는 수어청(守禦廳)의 둔전(屯田) 안에서 연맥(鉛脈)을 찾았고 지평(砥平)의 둔전 안에도 철맥(鐵脈)이 있으니, 모두 수어청에 붙여 군기(軍器)의 소용에 갖추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도제조(都提調)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요즈음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조정에서 번번이 나누어 주도록 권하는 영(令)을 내렸으나, 외방에서 사진(私賑)한 사람을 두 전조(銓曹)에서 수용(收用)한 일이 없으니, 실신(失信)으로 돌아가는 것을 면하지 못합니다. 두 전조에 각별히 신칙(申飭)하여 모두 수용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날씨가 춥다 하여 승지(承旨)를 전옥(典獄)에 보내어 경수(輕囚)를 석방시켰다.

 

12월 2일 무자

안중필(安重弼)을 장령(掌令)으로, 김여(金礪)를 지평(持平)으로, 조영복(趙榮福)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송상기(宋相琦)가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이헌영(李獻英) 등을 복시(覆試)하라는 명이 특교(特敎)에서 나왔으므로 해조(該曹)에서는 다시 품처(稟處)할 수 없습니다마는, 대개 당초에 대신(大臣)이 헌의(獻議)한 것은 본디 간신(諫臣)이 말한 미리 꾸몄다는 말 때문인데, ‘그 형은 조금 이름이 있으나 그 아우가 글을 모르는 것은 세상이 다 안다.’ 하였으니, 주의(主意)는 미리 꾸민 것이 사실인지를 밝히려 한 것입니다. 이제 와서 헌신(憲臣)이 아뢴 것은 오로지 서제(書題)의 글자로 표해서 농간하였다 하여 뽑아 버리기를 청하였으니, 앞의 말에 따르면 미리 꾸민 것을 주로 삼고, 뒤의 말에 따르면 글자로 표한 것을 중하게 여긴 것입니다. 이제 대신(臺臣)이 논한 것 때문에 대신(大臣)이 의논한 것을 인용하였으나, 사단(事端)이 각각 달라서 서로 부합하지 않습니다. 또 대신(大臣)의 의논에는 미리 꾸민 것을 논하였을 뿐이고 농간한 것을 말하지 않았다면, 조금 나은 형을 이제 다시 시험하더라도 어떻게 밝히겠습니까? 대신(臺臣)이 아뢴 데에 미리 꾸민 것을 말하지 않고 표를 만들어 둔 것을 논하였을 뿐이라면, 이것은 이미 드러난 일일 것이니 이것으로 감률(勘律)하면 족한데, 어찌 다시 시험하고서야 알겠습니까? 또 생각하건대 이헌장(李獻章) 무리가 만일 끝내 시험에 나아가지 않는다면 한갓 나라의 체모만 손상할 뿐일 것이니, 또한 장차 어떻게 처치하겠습니까? 바라건대 깊이 더 예재(睿裁)하고 또 대신(大臣)에게 물어서 처분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대신에게 물어서 처치하라고 명하였다. 그 뒤에 대신들의 의논이 다 복시하는 것이 옳다 하므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대관(臺官)이 과방(科榜)에서 뽑아야 한다는 논계(論啓)를 다시 냈다가 한 해를 지내서야 비로소 멈추었는데, 이헌영 형제는 마침내 시험에 나아가지 않고, 심지어 나문(拿問)하게 되어서는 공초(供招)한 말에 온 조정을 욕하여 그 분을 풀었으므로, 임금이 특별히 명하여 과방 가운데에서 모두 뽑아 버리게 하였다.

 

12월 5일 신묘

전라도 전주(全州)·고부(古阜) 등 고을에서 천둥 소리가 동남으로부터 일어나 서북으로 옮아 갔다.

 

12월 6일 임진

전라도 진도군(珍島郡)의 백성 김서(金瑞) 등 아홉 사람이 바다에서 표류하여 유구국(琉球國)에 닿았는데, 그 나라에서 청국(淸國)으로 보냈으므로 청국에서 이자(移咨)하고 내보냈다. 김서 등이 서울에 이르니, 임금이 비국(備局)에 명하여 바다에서 표류한 사정을 문초하게 하였는데, 김서 등이 전말을 대략 써서 대답하기를,
"갑오년608)   8월 7일에 진상(進上)할 생복(生鰒)609)  을 캐러 배를 같이 타고 바다로 들어갔는데, 갑자기 광풍을 만나 대양(大洋)에서 출몰한 지 17일만에 비로소 유구국 지경에 닿을 수 있었습니다. 40여 인이 와서 모여 굶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좁쌀죽을 먹여 주린 창자를 적시게 하고는 곧 부축하여 마을 안으로 들어가 밥을 갖추어 환대하였습니다. 그리고 새로 별관(別館)을 지어서 살게 하면서 대를 엮어 울타리를 만들어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고 의복과 음식을 수시로 장만하여 주며 상하 남녀(上下男女)가 번갈아 보러 와서 주찬(酒饌)을 주었으니, 그 나라의 풍속이 순후(醇厚)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나라에서 한 해를 넘겨서 그 지방말을 조금 알았는데, 그 왕성(王城)까지의 거리를 물었더니 10리쯤에 지나지 않았고 종소리가 때때로 은은히 들렸습니다. 그 나라의 넓이는 동서로 4일정(日程)이고 남북은 동서에 미치지 못하는데, 대저 산은 높고 들은 좁아서 밭이 많고 논이 적으며, 기장과 삼은 나지 않고 뽕과 모시는 자못 넉넉하였습니다. 새는 까치가 없고 짐승은 범이 없으며, 또 닭의 울음이 우리 나라와 달라서 보름 전에는 초경(初更)부터 5경까지 경마다 울고 보름 뒤에는 우리 나라처럼 새벽에 웁니다. 민호(民戶)는 번성하나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은데, 다 긴 옷을 입고 다들 우리 나라 남자처럼 머리를 묶어 망건(網巾)처럼 건(巾)으로 머리를 싸며, 여인은 머리에 대모(玳瑁) 비녀를 꽂으므로, 구별할 수 있었습니다. 음식은 우리 나라와 다를 것이 없는데, 떡을 만들 때에는 반드시 사탕을 섞습니다. 농사는 11월에서 정월 사이에 모를 내고 오뉴월에 수확하며, 소채는 사시사철 자랍니다. 엄동(嚴冬)에도 우리 나라의 구시월만한 날씨에 지나지 않고, 또한 서리와 눈이 없습니다. 성지(城池)는 도성(都城) 밖에 따로 성을 쌓은 곳이 없고, 병기(兵器)는 우리 나라와 다를 것이 없으나 활은 나무를 깎아 대를 붙이고 본디 뿔을 붙이는 일이 없으므로 멀리 쏘기에 마땅하지 않습니다.
저희들이 본국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가졌던 배가 죄다 부수어져서 바다에서 타기 어려운 형세였습니다. 그 나라는 으레 3년에 한 차례씩 중국에 조공(朝貢)하는데 마침 그 차례가 되었으므로 을미년610)   11월 24일에 그 나라의 사신(使臣)이 데리고 한 배에 같이 타서 병신년611)   윤3월 9일에 복건(福建)에 건너가 닿았습니다. 수로(水路)는 몇 천 리인지 모르겠고, 그 농업을 물었더니 한 해에 두 번 거둔다 하였으며, 집과 의복은 매우 사치하고, 인물이 황도(皇都)와 다를 것이 없으며, 좌우의 시사(市肆)에 진기한 보배가 산처럼 쌓였고, 밤에는 등촉(燈濁)이 낮처럼 밝습니다. 저희들을 접대하는 절차는 관가에서 양찬(糧饌)과 의자(衣資)를 주었습니다. 7월 15일에 복건을 출발하여 세 척의 마상(馬尙)에 나누어 타고 【마상이란 것은 청나라의 작은 배 이름이다.】  강가를 따라서 거슬러 올라가 20일이 지나서야 비로소 육지에 내리게 되었습니다. 올 10월 23일에 북경(北京)에 닿아서 옥하관(玉河館) 바깥 5리 쯤에 있는 절에 머물렀는데, 날씨가 춥기 때문에 떠나지 못하게 하고 본국의 동지사(冬至使)를 기다려 함께 돌아가게 하기에 저희들이 ‘부모·처자는 우리가 모두 죽었다고 생각하여 밤낮으로 울부짖고 있을 것인데 어찌 차마 잠시라도 지체할 수 있겠느냐?’고 대답하였더니, 통관(通官)들이 가엾이 여겨 돌아가도록 허락하고 추위를 막는 행장 도구를 각각 주었는데, 이것은 황제가 내린 것이라 하였습니다. 11월 10일에 황성(皇城)을 떠나 여차(驢車) 2승(乘)에 나누어 타고 12월 2일에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서 왔습니다."
하였다. 그래서 비국에서 연로(沿路)에 분부하여 말을 주고 음식을 먹여 본토(本土)로 돌려보내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2월 7일 계사

반궁(泮宮)612)  의 유생(儒生)에게 감(柑)을 내리고, 명제(命題)하여 선비를 시험하여 으뜸을 차지한 생원(生員) 유복명(柳復明)에게 급제(及第)를 내렸다.

 

비국(備局)에서, 헌납(獻納) 조명봉(趙鳴鳳)이 계청(啓請)한 각 영문(營門)의 잡물(雜物)을 분정(分定)하는 것을 금지하는 일 때문에 복주(覆奏)하기를,
"각 영문의 잡물을 분정하는 폐단을 참으로 대계(臺啓)에 말한 것과 같으나, 일체 금단하면 막히는 꼬투리가 많이 있습니다. 영중(營中)에게 긴요하게 쓸 것이라면 반드시 그 값에 맞추어 정하여 각 고을을 시켜 보내지 말게 하고 모든 사용(私用)에 관계되는 것은 일체 분정하지 말라고 각도에 행회(行會)613)  하여 전과 같이 난잡한 폐단을 없애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비국(備局)에서 재생 구관 당상(裁省勾管堂上)과 상의하여 재생 절목(裁省節目)을 정하여 청하기를,
"공물(貢物)은 을해년614)  에 재생한 전례에서 그 가미(價米) 10분의 1을 줄이어 원공(元貢)은 있으나 진배(進排)가 없는 것은 모두 우선 줄이고, 선혜청(宣惠廳)·호조(戶曹)·병조(兵曹) 및 호조에 속한 아문(衙門)의 경비(經費)에 관계되는 용도(用度)도 을해년의 전례를 본떠 줄이어 별단(別單)에 써서 들이며, 각전(各殿)·각문(各門)의 수직(守直)과 액정(掖庭) 각처의 수직 군사도 을해년의 전례에 의하여 별단에 쪽지를 붙여서 수를 줄이어 들이게 하소서. 이 밖의 각사(各司)의 잗단 용도는 각사로 하여금 적당히 줄이게 하고, 공물가(貢物價)는 이미 10분의 1을 줄였으니 관용 작미(官用作米) 등 잡비(雜費)도 이에 따라 줄여 받고, 신포(身布)를 용도로 하는 아문은 더욱이 절약하여 줄여서 재상(災傷)을 입은 고을에서 신포를 줄여 준 것을 채워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비국(備局)에서, 입진(入診)하였을 때에 민진후(閔鎭厚)가 아뢴 목대전(木代錢)을 절정(折定)615)  하는 일 때문에 복주(覆奏)하기를,
"정부(政府)·이조(吏曹)·예조(禮曹)를 물론하고 포보포(砲保布)·악공포(樂工布)는 모두 정식(定式)에 따라 목(木)616)   한 필(匹)에 절전(折錢) 두 냥으로 하라는 뜻으로 각사(各司)와 제도(諸道)에 분부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2월 8일 갑오

서방에 불빛 같은 운이 있었다.

 

12월 10일 병신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말하기를,
"이헌영(李獻英) 등을 복시(覆試)하라는 명은 그 제술(製述)하는 것이 능한지를 밝히려는 것입니다마는, 당초 대계(臺啓)는 표를 만들어 두어 사정(私情)을 쓴 것을 말하였으니, 이제 복시하더라도 어찌 제술을 잘하고 잘하지 못하는 것으로써 그 글자로 표하여 두었는지 표하지 않았는지를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대저 과장(科場)은 법례(法例)가 매우 엄하여 서제(書題)에 쓰는 글자는 한결같이 내건 글자 모양에 따르고 감히 별체(別體)로 쓸 수 없는데, 더구나 두 시권(試券)에는 다 없던 체로 썼으므로 그 표를 만들어 두어 사정을 쓴 자취가 분명하여 엄폐할 수 없으니, 복시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고 모두 과방(科榜) 안에서 뽑아 버리소서. 접때 두 선정(先正)617)  의 서원(書院)에 편액(扁額)을 어서(御書)하고 특별히 사제(賜祭)하신 것은 사체(事體)가 매우 중대한데, 옥천 군수(沃川郡守) 이희함(李喜涵)은 제관(祭官)으로 차출되었으되 병을 핑계하고 나아가지 않아서 막중한 사전(祀典)이 거의 모양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때 봉명(奉命)한 신하가 본도(本道)에 관문(關文)을 보내어 계문(啓聞)하여 논죄하게 하였으나, 도신(道臣)이 작은 일처럼 여기고 계문하여 파직하지 않았으니, 규검(糾檢)하는 체례(體例)를 크게 잃었습니다. 이희함은 파직하고 감사(監司) 권성(權惺)은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끝의 일만을 따랐다.

 

이유민(李裕民)을 승지(承旨)로, 이중협(李重協)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12월 12일 무술

평안 감사(平安監司) 조태로(趙泰老)가, 도내(道內)에서 효자(孝子) 이두필(李斗弼)·임후궁(林後弓)·문덕(文德)·진기영(秦起英)·김익화(金益華)·이정한(李廷翰)·황대요(黃戴堯)와 박동채(朴東彩) 및 그 종자(從子) 박하순(朴夏淳)과 영변(寧邊)의 관노(官奴) 사군(士軍) 및 그 아들 주봉(周奉), 그리고 절부(節婦) 김봉선(金奉先)의 아내 김씨(金氏)는 행의(行誼)가 뛰어나다 하여 장계(狀啓)하여 정포(旌褒)618)  하기를 청하였는데, 예조(禮曹)에 내려 등급을 나누어 가장 뛰어난 자는 정려(旌閭)하고 그 다음은 복호(復戶)619)  하여 차등을 두어 물건을 내렸다.

 

12월 14일 경자

이병상(李秉常)을 사간(司諫)으로, 이의현(李宜顯)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삼았다.

 

비국(備局)에서, 청국(淸國)이 표해인(漂海人) 김서(金瑞) 등을 압송한 일 때문에 특별히 재자관(齎咨官)620)  을 보내어 이자(移咨)하여 신사(申謝)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황해 병사(黃海兵使) 이천근(李天根)이 잡은 황당선(荒唐船)621)  의 인수(人數)·성명·물건을 계문(啓聞)하였는데, 청국(淸國)에 이자(移咨)하고 압송하였다. 이때 해서(海西)의 바다에 황당선이 출몰하는 일이 없는 날이 거의 없고 혹 이삼십 척까지 되었는데, 수신(守臣)이 혹 한두 번 잡은 일이 있었으나 사정을 신문할 수 없고 혹 저 나라에 압송할 때에 폐단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기꺼이 힘을 내어 잡으려 하지 않아서 거리낌없이 앞바다에 출몰하게 되므로, 사람들이 많이 근심하였다.

 

12월 15일 신축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논핵(論該)하기를,
"형조 좌랑(刑曹佐郞) 이사윤(李帥尹)은 제도(諸道)의 재상(災傷)을 추고(推考)할 때와 갖가지 속전(贖錢)을 거둘 때에 중간에서 농간하여 태반을 소비하였으니, 태거(汰去)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태거하는 일만을 따랐다.

 

12월 16일 임인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논핵(論劾)하기를,
"양주 목사(楊州牧使) 이홍(李宖)은 성질이 본디 소홀한데다가 술도 좋아하여 조곡(糶穀)의 염산(斂散)을 모두 교활한 서리(胥吏)에게 맡기니, 파직(罷職)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12월 17일 계묘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논핵(論劾)하기를,
"여주 목사(驪州牧使) 남취명(南就明)은 도임한 뒤로 날마다 술에 취하여 서족(庶族)이 용사(用事)하고 사사로이 도살(屠殺)하며 곡물을 무역하니, 파직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우의정(右議政)        이이명(李頤命)이 상차(上箚)하여 황정(荒政)을 논하였는데, 올해의 세태(稅太)는 그 반을 줄이는 것을 허락하고 기병(騎兵)·보병(步兵)의 신포(身布)도 세전(歲前)까지 기한하여 거두어 들이되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내년 가을로 물려 받아들이는 것을 허락하며 진휼청(賑恤廳)·경리청(經理廳)의 환자[還上]도 우선 받아들이는 것을 멈추기를 청하였다. 또 돈을 주조(鑄造)하기를 청하여 말하기를,
"신이 돈을 주조하기를 청하는 것은 관가에서 물건 값의 귀천을 조정하는 권세를 잡기 위한 것뿐이 아니라 백성에게는 물건을 무역하는 이익이 있기에 또한 말하는 것입니다. 그 남는 것을 조금 가져다가 그 이익을 흩어 주면 모든 신포의 대전(代錢)과 진정(賑政)에 쓴 것을 갚아야 할 것에 반드시 보태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주조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자는 다 ‘구리[銅]는 토산(土産)이 아니고 풍속이 돈에 익숙하지 않으며 수십 년 통용하는 동안에 민심이 날로 교묘해져서 간도(姦盜)는 늘어나고 뇌물 쓰는 것이 방자하며 부유한 자는 더욱 부유해지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하여지는데, 이제 귀하여짐에 따라 점점 없어지게 되므로, 그 형세에 따라 폐지하는 것이 옳다’ 합니다. 그 말이 그럴듯하나, 나라 안에 산이 많아서 구리는 바둑처럼 벌여 있으므로 구리가 없다 할 수 없으며 다만 캐고 불리는 방법을 모를 뿐인데, 백성의 풍속이 지리(地利)를 다하지 못하며 버릇이 낭비를 좋아하여 다른 나라의 구리를 사서 타구(唾具)와 요강을 만들기까지 합니다. 아무리 다른 나라에서 난다 하더라도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구리가 모자랄 것을 걱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돈을 통용하는 폐단은 신도 이러하다고 생각 않는 것은 아니지마는, 그 잘잘못은 본디 통행하려 할 때에 쟁변(爭辨)하였어야 했고, 이제는 이미 공사(公私)의 통용이 궁벽한 곳이나 외딴 섬에까지 두루 미쳤는데, 어찌 하루아침에 문득 폐지하여 억만(億萬)의 재물을 크게 잃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귀하기를 은화(銀貨)와 같게 하더라도 백성이 십백 냥(十百兩)을 갖추어 승·합(升合)으로 바꾸지 못할 것이고, 또한 심한 폐단을 구하지 못할 것이니, 계책을 얻었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눈앞의 다급한 것을 구제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관중(管仲)이 말하기를, ‘우(禹)는 역산(歷山)의 화폐를 조조하고 탕(湯)은 장산(莊山)의 화폐를 주조하여 백성의 곤궁을 구제하였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큰물과 가뭄이 있을 때에 화폐를 만드는 것은 옛 성인(聖人)도 행하였습니다.
또 전사(前史)를 살피건대, 조위(曹魏)622)                   수십 년을 제외하고는 돈을 통용하지 않은 때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곡물은 먹을 수 있고 베는 입을 수 있거니와, 입고 먹을 수 없는 것을 가져다가 그 간에 통용했던 것은 성인의 이용 후생(利用厚生)하는 대권(大權)인데, 어찌하여 절로 귀하여지거나 절로 폐지되도록 맡겨 둔 채 그 변하는 것을 제어하지 않으십니까? 또 도주(盜鑄)가 많아 백성의 풍속이 더욱 공교하여지는 것을 근심하는데, 지금 관주(官鑄)가 없어서 대도(大盜)가 이미 해도(海島)에서 사주(私鑄)하였으므로 바야흐로 경옥(京獄)에 가두고 추문(推問)하는 것은 그것이 매우 귀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니, 어찌 관주 때문이었겠습니까?"
하고, 끝에 말하기를,
"형옥(刑獄)이 많이 지체되었으니, 마땅히 경외(京外)의 형관(刑官)에게 별유(別諭)하여 죄가 의심스러운 자는 가볍게 하고 지체되어 있는 자는 소결(疏結)하게 하여야 되겠습니다. 사변(徙邊)623)                  하는 율(律)은 당초에 변방을 충실히 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죄는 사형(死刑)에서 1등을 감하되 도망하면 일죄(一罪)624)                  가 됩니다. 《대전(大典)》625)                  에 그 율은 1조(條) 뿐이었는데, 그 뒤에 사목(事目)이 날로 늘어서 이제는 각영(各營)에서 율문(律文)에 견주어 스스로 결단하는 것이 점점 많아졌으니, 형관을 시켜 묘당(廟堂)에 모여 곧 의논하여 정해서 그 율을 참작하여 줄이게 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이제 경(卿)이 조목조목이 아뢴 것은 참으로 마땅하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빨리 품처(稟處)하게 하되, 진휼청·경리청 두 청의 환자(還子)는 특별히 받아들이는 것을 멈추고, 세째 건 가운데에서 특별히 하유하는 것과 사변의 형률(刑律)을 작처(酌處)하는 일은 곧 의논해 정하여 두 가지를 모두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12월 19일 을사

이택(李澤)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12월 20일 병오

금부(禁府)에서 아뢰기를,
"이원곤(李元坤)의 일은 성교(聖敎)에 따라 주언(奏讞)하여야 하겠습니다마는, 안옥(按獄)하는 도리는 반드시 죄인이 항거할 말이 없게 하고서야 의언(議讞)할 수 있습니다. 이원곤의 공사(供辭)에는 세 가지 의심스러운 꼬투리에 따라 다섯 가지를 물어야 한다거나 아홉 가지를 물어야 한다 하면서 고집하여 임가(任家)의 어그러진 꼬투리를 말하므로 임방(任防) 부자에게 한 번 묻지 않을 수 없으나, 옹서(翁婿)626)  가 대질하는 것은 윤리에 손상되는 것이 있고 그 아들에게 물어도 대변(對辨)할 만하니 임건원(任健元)을 도로 가두어 추문(推問)하고, 조정순(趙正純)·이성곤(李成坤)에게도 반복하여 힐문하지 않을 수 없는데, 조정순의 공초(供招) 가운데에는 또 민계수(閔啓洙)를 긴요한 증인으로 삼았으니 또한 나문(拿問)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금부에서 여러 사람에게 묻고 나서, 또 이원곤이 허다히 변명한 말은 죄다 전후의 초사(初辭)를 연출한 것이어서 별로 단정한 말이 없고 이른 바 물어야 할 조목이라는 것은 임건원의 공초 가운데에 이미 조목조목이 말하여 변명한 것이 많으며 조정순·민계수가 공초한 것에는 대단하게 서로 어그러진 것이 없어서 다시 물을 만한 것이 없다 하여, 임건원·조정순·민계수를 모두 놓아 보내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2월 21일 정미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 김연(金演)이 장계(狀啓)하여, 경원부(慶源府)의 개시(開市)627)  는 의주(義州) 중강(中江)의 개시한 예와 마찬가지로 낮에만 교역(交易)하고 또 저들이 성부(城府)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면서 아울러 이 뜻으로 청국(淸國)에 이자(移咨)하기를 청하였는데, 비국(備國)에서 복주(覆奏)하기를,
"경원부의 개시는 저들이 소란을 피움이 그지없으므로 도신(道臣)이 장계하여 아뢴 데에 참으로 의견이 있으나, 해부(該部)에 이자하는 것은 가벼이 의논할 수 없습니다. 이번 재자관(齎咨官)이 사신(使臣)에게 품의(稟議)하고 이어서 일행 중의 역관(譯官)과 함께 저들의 사정을 상세히 탐지하여 온 뒤에 처치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말하기를,
"한성 판관(漢城判官) 허증(許增)은 군자 판관(軍資判官)을 맡았을 때에 번번이 창고를 열 때가 되면 미리 심복 겸인(傔人)628)  을 시켜 창고 근처에 사는 사람에게서 돈을 거두고 기일이 되면 쌀 한 섬을 더 내어 그 값을 갚았는데, 그 일이 드러날세라 염려하여 서둘러 주선하여 본직(本職)을 꾀하여 받아서 자취를 엄폐할 계책을 하였으니, 태거(汰去)하소서. 양지 현감(陽智縣監) 김순신(金舜臣)은 백성을 침학(侵虐)하여 자기를 살찌우고 세미(稅米)를 방납(防納)629)  하였으니, 파직(罷職)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이홍(李宖)·허증의 일만을 따랐다.

 

12월 22일 무신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니, 임금이 김순신(金舜臣)의 일만을 따랐다.

 

12월 24일 경술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도제조(都提調)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도당록(都堂錄)을 고친 뒤에 기록된 사람인 김재로(金在魯)·박사익(朴師益) 등이 지나치게 스스로 인혐하여 행공(行公)하지 않으므로 분의(分義)·사체(事體)가 다 매우 미안하니, 죄책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벌주면 그들의 소원에 마침 맞는다 하여 각별히 신칙(申飭)하여 행공(行公)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김창집이 또 말하기를,
"우의정(右議政) 이이명(李頤命)이 상차(上箚)하여 아뢴 것 가운데에서 세태(稅太)를 반으로 줄이고 기병(騎兵)·보병(步兵)과 수군(水軍)의 갖가지 신포(身布)를 내년 가을로 물려서 받아들이고 전화(錢貨)를 더 주조(鑄造)하는 일을 품처(稟處)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호조(戶曹)의 경비(經費)가 구차하고 달리 손댈 곳이 없으면 지금 있는 콩[太]을 옮겨다가 쓰는데, 이제 만약 반을 줄이면 내년 경비에 쓸 것을 결코 대기 어려울 것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 제로(諸路)의 세태는 1결(結)에서 4두(斗)를 거두는 것 안에서 1두를 줄이도록 하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김창집이 또 말하기를,
"기병·보병과 수군의 신포를 모두 내년 가을로 물려서 받아들이면 그 사이의 사세도 매우 염려스러울 것이니, 절반은 상납(上納)하고 반은 내년 가을로 물려서 받아들이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하고,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제반 신포는 죄다 물려서 받아들이도록 하고 기병·보병만 끼지 못하게 하면 어찌 소외된 한탄이 없겠습니까? 더구나 수군은 여러 군사 중에서 가장 고역(苦役)이라 하는데도 매우 천하게 대우하므로 여느 때에도 늘 억울한 마음을 품는데, 이제 또 물려서 받아들이는 가운데에 들지 못한다면 반드시 그 원망을 더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마찬가지로 절반을 물려서 받아들이라고 명하였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시사(市肆) 사이에서는 은(銀)과 돈이 거의 맞먹습니다. 돈은 폐단이 있다 하여 폐지하고 쓰지 않는다면 그만이겠으나, 그대로 통용한다면 반드시 더 주조하여 용도(用度)를 도와야 합니다. 대신(大臣)이 상차한 뜻은 그런대로 재화(財貨)를 만들어 내는 도리가 되지만 재상(宰相)들의 의논은 불편하게 여기는 자가 많습니다. ‘이제 더 주조하더라도 백성에게 이익은 없고 도리어 허다한 간사한 폐단만 일으키며, 또 우리 나라는 본디 구리가 나지 않아서 사들이는 비용이 적지 않으므로 얻는 이익이 그 잃는 것을 채우지 못하니 결코 주조하여서는 안된다.’ 하나, 그대로 통용하려면 더 주조하여야 할 형세입니다."
하고, 민진후가 말하기를,
"이미 전화(錢貨)를 통용하였으면 본디 잇따라서 더 주조하여야 하겠습니다마는, 돈의 폐단이 점점 늘어서 경성(京城) 사람은 불편하게 여기는 자가 많고 외방(外方)으로 말하면 도둑이 이 때문에 치성(熾盛)하니, 이른바 백성을 부유하게 하고 이익을 더하게 하는 것이 더욱이 곤궁한 백성의 견디기 어려운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백성의 뜻은 모두가 폐지하기를 바라니, 어찌 더 주조하여 실망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설령 더 주조하는 것이 유리하더라도 황정(荒政)에 도움이 미치지는 못할 듯하고 더 주조할 때에 드는 공장(工匠)의 요포(料布)도 적지 않으니, 차라리 그 요포를 곧바로 진자(賑資)에 쓰는 것이 이득이 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화는 예전부터 폐단이 있었거니와, 지금 민간에 도둑이 방자히 다니고 부유한 자는 더욱 부유하게 되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하여지는 것은 다 돈을 통용하는 데에서 말미암은 폐단이다. 더 주조하는 것으로 말하면 매우 어려운 데에 관계되니, 묘당(廟堂)에서 더욱 익히 강구하여 다시 품정(稟定)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12월 25일 신해

간원(諫院)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는데, 임금이 남취명(南就明)의 일만을 따랐다.

 

12월 26일 임자

도목정(都目政)을 행하였다. 박봉령(朴鳳齡)을 승지(承旨)로, 홍계적(洪啓迪)을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김재로(金在魯)를 교리(校理)로, 김유경(金有慶)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12월 27일 계축

도목정(都目政)을 행하였다. 윤봉조(尹鳳朝)를 부교리(副校理)로, 박사익(朴師益)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이의현(李宜顯)을 부제학(副提學)으로, 박봉령(朴鳳齡)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이정익(李禎翊)을 헌납(獻納)으로, 김취로(金取魯)를 정언(正言)으로, 이정주(李挺周)를 장령(掌令)으로, 이관명(李觀命)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이성조(李聖肇)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일본(日本)의 새 관백(關白)이 즉위하였으므로 차왜(差倭)630)  가 동래부(東萊府)에 이르러 경사를 고하고 이어서 매[譍] 6련(連)을 요구하였는데, 예조(禮曹)에서 복주(覆奏)하여 매를 사 가도록 허락하였다.

 

12월 29일 을묘

태학생(太學生) 김치후(金致垕) 등 80인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천지의 기(氣)에 음(陰)이 있고 양(陽)이 있어서 사람에게서는 사(邪)가 되고 정(正)이 되는데, 그 대소(大小)가 왕래하고 반복하여 굴신(屈伸)하는 것은 모두가 이란(理亂)의 운수에 관계되니, 그 기미가 매우 두렵습니다. 이 때문에 성인(聖人)이 쾌괘(夬卦)631)  를 설명한 단사(彖辭)632)  에 ‘쾌는 결(決)이니, 강(剛)이 유(柔)를 결단하여 없애는 것이다.’ 하였으니, 그 소장(消長)·부억(扶抑)할 즈음에 엄하게 한 것이 지극합니다. 지금 세도(世道)가 거의 떨어졌다가 다시 연장되고 사문(斯文)이 이미 어두어졌다가 도로 밝아졌으니 본디 다시 형통(亨通)하는 운수라 하겠습니다마는, 전하께서는 시비·사정(邪正)의 분별에 있어서 단칼로 자르지 못하시므로 참으로 쾌결(夬決)하는 의리에 부족함이 있으니, 또 뒷날에 제자리걸음하는 근심이 전보다 심하지 않을런지 어찌 알겠습니까? 신들은 이것을 염려하여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한 번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생각하건대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의 도덕·학문의 천심(淺深)과 고하(高下)는 신들이 엿보고 헤아릴 것이 아닐지라도 대개 그 행한 것은 주자(朱子)의 도(道)이고 중하게 여긴 것은 《춘추(春秋)》의 의리이니, 출처(出處)하는 것이 시종 순수하여 한결같이 의리가 바른 데에서 나왔습니다.
따라서 이를 존경하는 자는 양(陽)이고 군자(君子)이며 이를 반대하는 자는 음(陰)이고 소인(小人)이니, 이것은 백세(百世)를 기다려도 의심스럽지 않을 것입니다. 한 번 문하(門下)에 화(禍)가 일어나고부터 변괴가 거듭 생겨서 세도(世道)가 승강(升降)하고 반복하는 것을 거의 이루 헤아릴 수 없는데, 의리가 어둡고 이언(異言)이 시끄러운 것은 근일에 이르러서 지극합니다. 그러나 접때 전하께서 윤증(尹拯)의 신유년633)   의서(擬書)를 가져다 보시고 하교하시기를, ‘글의 사연이 과연 박절한 것이 많으니 전연 허물이 없는 데로 돌릴 수는 없다.’ 하시고, 이어서 또 묘문(墓文)에는 본디 윤선거(尹宣擧)를 욕한 것이 없고 《주례(周禮)》의 글은 마침내 오늘날의 일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시니, 윤증이 스승을 저버린 죄가 비로소 연감(淵鑑)에서 피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또 정섭(靜攝)하시는 중에 두 선생의 서원(書院)의 편액(扁額)을 손수 쓰시고 간절한 비망기(備忘記)를 특별히 내려 선비의 추향을 정하고 간사한 말을 그치게 한다고 분부하셨으니, 더욱이 양을 부축하고 음을 누르는 성심(盛心)을 우러러 볼 수 있습니다마는, 전하께서 윤증을 처치하시는 방도는 아직도 허물이 있는 것과 허물이 없는 것 사이에 두어 끝내 매우 미워하여 배척하시는 거조(擧措)는 없었습니다. 혹 전하께서 평소에 예우(禮遇)하였다는 것을 생각하여 우선 도내(道內)에 두시더라도 그 일은 실로 천리(天理)와 민이(民彛)에 관계되는데, 전하께서 끝내 어찌 사사로이 하실 수 있겠습니까? 윤증의 글 가운데에 나열한 것은 모두가 예전에 이른바 크게 간특한 자의 지극히 이를 데 없는 행실입니다. 안으로는 기질(氣質)과 학문을 겉으로는 문장(文章)과 사공(事功)을 모두 패(霸)와 이(利)의 죄로 돌렸는데, 윤증이 과연 본원(本源)의 심술(心術)을 의심하게 되었다면 문하에 있던 40년 동안에 강론한 것이 무슨 일이기에 일찍이 한 마디 말도 여기에 미친 것은 없고 책상자에 사사로이 감추어 둔 것 가운데에서 죄악을 열거하여 평생을 판단하되 법리(法吏)가 율문(律文)을 엄하게 적용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으니, 공교하게 헐뜯은 것이 이러한데도 공정한 마음으로 학문을 논하였다고 스스로 말한들 누가 믿겠습니까?
윤증의 문도(門徒)는 문득 이것을 간쟁(諫諍)하는 아들과 충성한 신하에 견주는데, 아들이 아버지에게 또는 신하가 임금에게 간쟁하는 일은 본디 있으나, 어찌 윤증이 스승을 대우하듯이 고약한 말을 한 일이 있었습니까? 흉당(凶黨)이 죄를 꾸며서 송시열을 죽일 때에 억지로 만든 모든 죄안(罪案)이 윤증의 글 가운데에 있는 뜻에 나타나지는 않았으나 맥락(脈絡)과 귀추(歸趣)가 아득하게 서로 맞고, 대의(大義)를 헐뜯은 것으로 말하면 흉당이 못한 것을 윤증은 해냈습니다. 그렇다면 윤증의 글이 올봄에 비로소 나왔더라도 그 말은 본디 이미 남의 손을 빌어서 술책이 부려진 것입니다. 윤증을 까닭없이 〈스승을〉 저버린 것으로 돌리면 상정(常情)에 그럴 듯하지 않으므로 논하는 자가 문득 묘문을 빙자하여 말하였으나, 묘문이 아뢰어졌되 본디 헐뜯은 말이 없자 십수 년 동안 빙자하여 말하던 것으로 낙착되지 않을 것이므로 본원(本源)에 관한 말로 바꾸어 마치 윤증이 이러한 것을 보고서 끊은 것처럼 하였는데, 그 증거로 삼은 것이 바로 의서에 있습니다. 의서가 나오고서 문득 그 묵은 유감과 함께 숨기려 하니, 전후에 고집하던 것이 모두 거짓말이 되었습니다. 대개 묘문에는 본디 욕한 것이 없었으나 윤증의 마음에는 차지 않으므로, 유감을 마음속에 쌓아 두고 틈이 생길 때를 기다리다가, 급기야 세도가 여러 번 변하여 화기(禍機)가 장차 임박하니 스스로 배반할 생각을 남몰래 결정하여 겉으로는 예모(禮貌)를 지키는 체하고 속으로는 실로 함해(陷害)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선정신(先正臣) 박세채(朴世采)에게 보낸 서신에서 몰래 헐뜯었다가 일이 드러나게 되니, 비로소 감히 스승과 왕복할 때에 곧바로 가리켜 배척하되 마치 성벽(城壁)에 다가가서 싸움을 돋우며 적국이 노하지 않을까 염려하듯 하여 반드시 틈이 생겨 고절(告絶)하고야 말려고 하였습니다. 이미 끊은 뒤에는 스스로 구실이 모자란다고 생각되자 그 스승을 걸주(桀紂)634)  에 견주고 마침내 수업(受業)한 권수(卷數)의 다소를 헤아려 저버려도 해롭지 않다는 뜻을 보였으니, 이것은 다 스승과 제자가 있은 이래로 들어 보지 못한 큰 변괴입니다. 윤증이 조심스럽게 많은 생각을 한 것은 또한 일조일석의 일이 아니고 반드시 아부하는 자가 점점 많아져 기세가 퍼져서 힘이 분문(分門)하여 대항할 만하게 되기를 기다려서야 감히 창을 잡고 쳤으니, 이것이 어찌 자제를 거느리고 부모에게 배반하는 것과 다르겠습니까?
오명윤(吳命尹)의 소(疏)에 이른바 병이 부스럼과 혹으로 드러났고 조정의 권세를 농간하여 국가를 병들게 하였다는 것은 모두가 윤증에게서 이어받은 꼬투리인데, 마침내 스스로 기사년635)  의 흉당의 전철(前轍)을 밟는 데에 빠졌습니다. 그들이 변함없이 버리지 않는 것은 다만 예설(禮說)의 일과 목천(木川)의 일과 인인(忍人)이니 수빈(水濱)이니 하는 따위 말인데, 예설은 이미 이시정(李蓍定)의 소에서 분명히 밝혀졌고, 더구나 허황(許璜)이 생존하여 목천의 일은 언근(言根)이 명백하며, 김수택(金壽澤)이 상소하여 【김익희(金益熙)의 증손인 김수택이 상소하여 그 할아버지가 과연 인인에 관한 말을 하였다고 말하였다.】  인인이니 수빈이니 하는 말이 절로 귀착이 있게 되었으니, 날조한 정상은 다른 것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대개 윤증에게 편드는 무리가 처음에는 아버지와 스승은 경중이 있다는 분부에 자중(藉重)636)  하더니 나중에는 본원의 심술에 관한 말을 만들어 내었으며, 또 혹 이미 끊은 뒤 수년 동안의 말과 글에서 주워 모아서 스승과 제자 사이가 당연히 끊어져야 할 증거로 삼아 동쪽에서 패하면 서쪽으로 달리고 옷깃을 잡으면 팔꿈치가 나타났으니, 돌아보건대, 어찌 함께 곡직을 겨루고 시비를 다툴 만하겠습니까?
근래 피차의 글이 공거(公車)에 함께 들어와서 전후의 사실이 죄다 예조(禮曹)에 올랐으므로 윤증의 심적(心跡)은 본디 이미 마디마디 드러났으나, 전하께서 얼음이 풀리듯 깨달으신 것은 마침 의서가 나온 때에 있었으니, 이 글은 또한 다행히도 그 무리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 폐간(肺肝)을 다 볼 수 있었으나, 또한 불행히도 윤증이 죽기 전에 나오지 않아서 성명(聖明)께 바로잡혀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윤증이 그 스승을 근거없이 헐뜯은 것은 이 글 하나만으로도 족한데, 또 예설의 일에 따라 어록(語錄)을 집성(輯成)하고 증연(增衍)을 창출(創出)한 것이 모두 근거없는 말이었으며, 이것도 모자라서 그 아우 윤추(尹推)를 시켜 《회려시말(懷驪始末)》 한 통을 짓게 하였는데, 그 선정에서 독을 부린 것은 더욱이 차마 말할 수 없습니다.
대개 회(懷)란 선정이 살던 회덕(懷德)이고 여(驪)란 적신(賊臣) 윤휴(尹鑴)가 살던 여주(驪州)인데, 그 글에 ‘남인(南人)이 아니었더라도 회가 족히 당시의 일을 도와 이루었을 것이니, 그가 죄를 얻고도 자기 집에서 죽은 것은 실로 다행하다.’ 하고, 또 ‘회와 여는 한 일이 거의 같고 흉사(凶死)한 것이 서로 같다.’ 하며, 또 ‘윤휴보다 또한 심하다.’ 하였습니다. 아! 그 이른바 당시의 일이란 곧 기사년에 흉악한 무리가 폐모(廢母)한 일이며, 그 이른바 흉사한 것이 서로 같다는 것은 곧 귀양간 이후의 명을 적신 윤휴가 처형된 것과 마찬가지로 본 것이니, 윤증이 변변치 못하기는 하나 어찌 차마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선정이 세변(世變)을 만나 목숨을 보전하지 못한 것은 일대(一代)의 사류(士類)가 마음이 무너지고 가슴이 아플 뿐이 아니라 평소에 선정을 좋아하지 않던 자일지라도 모두 슬퍼하고 아까와하는데, 더구나 40년 동안 아버지처럼 섬긴 사람만은 몹시 슬퍼서 상심하지 않고 그 죽음이 다행이라 하고 윤휴보다 심하다고 말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마음이 잔인하고 그 말이 흉참(凶慘)하기가 이와 같은데, 신들이 바야흐로 스승을 저버린 죄로 꾸짖으려 한다면 마침 너무 소홀함을 보일 만할 것입니다.
의서 가운데에 이른바 주자의 도(道)와는 서로 같지 않은 듯하고 《춘추》의 의리는 전혀 실사(實事)가 없다 한 것은 더욱이 사문(斯文)·세도(世道)의 화(禍)를 연 것인데, 윤증이 스승을 저버린 것이 반드시 이 일에 뿌리를 두지 않았다고 할 수 없으니, 신들이 본원에 소급하여 논하겠습니다. 선정신(先正臣) 김장생(金長生)이 일찍이 말하기를, ‘맹자(孟子)의 공(功)은 우(禹)보다 못하지 않고 주자(朱子)의 공은 또 혹 더하다. 주자가 아니었으면 요(堯)·순(舜)·주공(周公)·공자(孔子)의 도가 밝혀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였는데, 송시열이 잘 지켜 잠시도 잊지 않고 외우며, 성인이 다시 일어나더라도 이 말은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므로, 그가 주자의 글을 신명(神明)처럼 받들고 부모처럼 믿어서 한 가지 언행(言行)과 한 가지 동정(動靜)까지도 한결같이 주자의 법문(法門)에 근본하지 않는 것이 없었고, 마침내 자신이 도를 위하여 죽어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이러하였으므로 주자를 저버린 말은 모두 문득 다 엄한 말로 매우 배척하였습니다. 적신 윤휴가 《중용(中庸)》을 개주(改註)하였을 때에 송시열은 사문의 난적(亂賊)이라고 배척하였으나 윤증의 아비인 윤선거만은 힘껏 감싸고 고명(高明)한 것이 송시열보다 낫다고 말하기까지 하였으므로, 송시열이 일찍이 꾸짖기를, ‘《춘추》의 법으로는 난신(亂臣)·적자(賊子)는 먼저 그 당여(黨與)를 다스리는 것이니, 공(公)은 윤휴보다 먼저 처형되어야 한다.’ 하였는데, 윤휴가 날뛰게 되어서도 윤증은 오히려 끊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주무(綢繆)637)  한 자취는 윤휴가 지은 윤선거의 제문(祭文)에서 볼 수 있으니, 송시열이 이른바 윤휴의 독에 맞았다고 한 것은 참으로 실제에 맞는 말입니다. 윤증이 그 아비의 연보(年譜)를 짓게 되어서도 윤휴를 숭장(崇奬)하여 경서(經書)의 설(說)에 얽매이지 않고 옛사람의 말에 얽매이지 않아서 견식(見識)이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하였으나, 이것은 윤휴를 주자 이상으로 뛰어나게 한 것입니다. 그가 주자를 저버리고 적신 윤휴를 편든 것은 실로 가정에서 심법(心法)을 전수(傳授)한 것이니, 윤증으로 하여금 송시열을 주자와 서로 비슷하다고 말하게 한다면 송시열을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겠습니까?
《춘추》의 대의(大義)로 말하면 곧 송시열이 일생 동안 부담한 것입니다. 효종(孝宗)께서 일찍이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을 바루는 것이 내 책임인데, 나와 이 일을 함께 하는 것은 경(卿)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하시니, 송시열이 지우(知遇)에 감격하였습니다. 모든 시행하는 것이 모두 천리를 밝히고 인심을 바루는 일이었는데, 하늘이 송(宋)을 복되게 하지 않아 문득 승하하시어 철장(鐵杖)·목마(木馬)가 천고에 한을 끼쳤으나, 독대(獨對)하여 말한 것에서도 오히려 대신의 신밀(愼密)한 계책을 상상할 수 있어 천년 뒤에도 지사(志士)가 눈물을 흘리게 할 만하니, 풍성(風聲)·의열(義烈)은 영구히 천하·후세에 할말이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뛰어나게 볼 만한 사실이 아니겠습니까마는, 윤증만은 무슨 마음으로 감히 방자하게 이토록 헐뜯었겠습니까? 여기에도 그러할 까닭이 있었습니다. 대개 윤선거는 젊었을 때에 강개(慷慨)하고 또한 일찍이 대의(大義)로 자허(自許)하였으나, 강도(江都)의 변을 당하게 되어서는 벗과 함께 죽기로 약속하였으나 죽지 않았고 아내와 함께 죽기로 약속하였으나 역시 죽지 않고서 이름을 고치고 종[奴]이 되어 오랑캐[虜]에게 항복하여 구차히 면하였으니, 자신의 명예가 크게 떨어져 세상의 큰 치욕이 되었습니다. 그 뒤에 사우(師友) 사이에서 종유(從游)하여 다행히 허물을 보충하였다는 이름을 얻기는 하였으나, 자신이 중죄를 져서 끝내 대의에 용납되기 어렵다는 것을 스스로 알았습니다. 이 때문에 대의를 듣기 싫어하는 뜻이 뱃속에 가로붙어 닿는 곳마다 드러나서, 사죄라는 이름은 오로지 구차히 산 것 때문이었으나, 바뀌어서 명을 어긴 죄가 되었고, 헛된 명성을 경계한 것은 실공(實功)을 힘쓰는 것인 듯하였으나 실은 해치려는 마음에서 말미암았는데, 감히 죽지 않은 뜻을 스스로 도해(蹈海)의 절개로 돌렸습니다.
헐어 없앤 판본(板本) 가운데에 있는 글로 말하면 비록 근거없이 헐뜯은 것은 아닐지라도 성조(聖祖)께서 당시에 처변(處變)하신 일을 넌지시 지극히 더러운 자신에 견주어 후세 사람이 감히 제흠을 의논하지 못하게 하여 스스로 엄폐할 생각을 하였으니, 그 또한 외람되고 무엄하기가 심한 것입니다. 윤선거의 마음 쓰고 생각하는 것이 본디 이러하므로 윤증이 계술(繼述)하고 경영한 것은 오로지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그 아비가 구차하게 살아 남은 허물을 본디 죽어야 할 의리가 없었다고 말하기까지 하여 반드시 더할 나위없이 착하고 허물이 없는 처지에 두려하면서 송시열에 대하여는 힘이 부족할까 염려하듯이 방자하게 헐뜯었으니, 그 전혀 사실이 없는 배척도 바로 가법(家法)을 전수한 것입니다. 대개 그 마음은 세상에 이런 대의가 없어지고서야 난을 당하여 구차히 살아 남은 것을 충분한 도리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신들이 마음에 더욱이 통탄한 것이 있습니다. 근년 윤증이 죽었을 당초에 이른바 제문(祭文)이라는 데에 무향(婺鄕)638)  의 정학(正學)이라 일컬은 것은 광대 놀음과 거의 같은데다가 심지어 대절(大節)을 지켰다고까지 한 것은 더구나 아주 그럴듯하지도 않다는 것은 삼척 동자라도 다 그 가소로움을 알 것인데, 윤증에게 편드는 자는 따라서 화응(和應)하여 드디어 《춘추》의 대의를 윤가 부자에게 돌리고 송시열을 가리켜 빈말을 해댄다고 하였습니다. 아! 《춘추》의 의리는 주실(周室)을 높이고 이적(夷狄)을 물리쳐 사람이 오랑캐의 풍습을 따르는 것을 면하게 하는 것일 뿐인데, 이제 환난을 당하여 창졸한 기회에 욕된 것을 무릅쓰고 구차히 살아 남아서 이것이 《춘추》의 의리라 하고, 위아래가 거꾸로 놓일 때에 문을 닫고 구제하지 않고서 이것이 《춘추》의 의리라 하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러한 도리가 있겠습니까? 윤증 부자가 마음을 다 써서 오랑캐[虜]에게 아첨한 집의 자손 【최석정(崔錫鼎)이 윤증의 제문을 지었다.】 에게서 이 ‘절의(節義)’라는 두 자를 겨우 얻었으니, 이것이 어찌 영예가 될 만하겠습니까?
아! 윤증은 외모가 순후(醇厚)한 듯하나 마음은 음밀(陰密)하여 밖으로는 기세(氣勢)를 끼고 속에는 기괄(機栝)639)  을 감추었습니다. 화복(禍福)을 따르고 피할 적에 힘을 쓰고 윤리가 무너지고 끊어질 때에 입을 다물며, 한 편의 흉당(凶黨)과는 친밀하다가 소원하고 헤어지는 듯도 하다가 모이는 듯도 하여 혈맥(血脈)은 서로 관통하고 정적(情迹)은 헤아릴 수 없었는데, 《가례원류(家禮源流)》가 나타나서 의리에 어그러진 죄가 더욱 드러났고 의서(擬書)가 나와서 스승을 무함한 자취가 더욱 나타났으니, 한 몸으로서 두 스승을 저버려 세도(世道)·인심이 이토록 무너지게 한 것은 참으로 윤증이 으뜸입니다. 윤증이 폐고(廢錮)에서 기신(起身)한 것은 실로 기사년 초에 있었으므로 이것만으로도 윤증을 부끄러워 죽게 할 만한데, 그대로 추배(推排)하여 정승 자리에 앉히고 죽어서는 외람되게 선정(先正)이라는 호칭을 붙이니, 이것으로 세변(世變)을 볼 만합니다. 접때 대신(臺臣)이 말하지 않았다면 그만이겠으나, 이미 말하였으면 어찌하여 윤선거를 선정이라 부르는 것만을 금하고 윤증에게는 미치지 않았습니까?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현사(賢邪)의 분별을 살피고 소장(消長)의 기미를 염려하여, 윤증에 대한 선정이라는 참칭(僭稱)을 금하여 사설(邪說)의 근원을 영구히 막아서, 대의를 어두워진 데에서 밝히고 사도(師道)를 이미 없어진 데에서 보존하여, 천리(天理)가 날로 밝아지고 인심이 날로 바루어지게 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이어진 수천 마디 말이 오로지 바른 것을 돕고 사악한 것을 배척하여 근본을 뽑고 본원을 막으려는 데에서 나왔으므로 말이 엄하고 사리가 밝아서 펴 보고 권태를 잊으니, 가탄(嘉歎)하여 마지않는다. 내가 선정에 대하여 존경하는 정성을 더욱 도타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른바 참칭 【윤증에 대한 선정이라는 호칭이다.】 은 이제부터 아주 금하여 시비가 더욱 밝아지게 하겠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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