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병진
임금이 하교(下敎)하여 팔도(八道)의 감사(監司)와 양도(兩都)001) 의 유수(留守)에게 유시(諭示)하기를,
"아아! 국가가 불행하여 해마다 기근이 거듭되어 백성의 곤궁이 오늘과 같은 때가 없었으니, 한밤에 근심하고 탄식하면 좋은 옷과 좋은 음식도 마음에 편하지 않다. 지난해 재해는 근년에 없던 것으로서 팔도가 똑같은데, 바닷가가 더욱 심하여 떠나 흩어지는 자가 잇달아서 열 집 가운데에서 아홉 집이 비었고, 그 밖의 장문(狀聞)도 놀랍고 비참한 것이 많다. 세전(歲前)에 이러하면 앞일을 알 만한데, 공사(公私)의 저축이 아주 텅비어서 손댈 데가 없으니, 말이 여기에 미치면 근심되는 마음이 타는 듯하나, 어떻게 계책을 세워야 할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불쌍한 이 죄 없이 가난하여 의지할 곳이 없는 백성이 다 나의 적자(赤子)이니, 어찌 자식의 병이 위급하여도 부모로서 어찌할 수 없음을 핑계대어 팔짱을 끼고 죽기만 기다릴 것인가? 이것을 미루어 논하건대, 오늘날 재앙을 구제하는 방도는 다름 아니라 오직 지극한 정성에 달려 있을 뿐이다. 예전에 송(宋)나라의 지청주(知淸州) 부필(富弼)이 지극한 정성으로 백성을 구제하였으므로, 온전히 살 수 있는 자가 많았다. 아아! 각도의 방백(方伯)·수령(守令)이 능히 백성의 일을 제집의 일처럼 여겨서 마음을 다하여 돌보고 지극한 정성으로 진구(賑救)한다면, 또한 어찌 구제할 방도가 없겠는가? 아아! 농사에 힘써야 또한 가을에 바랄 것이 있으므로, 여느 해에도 본디 착실히 일을 권과(勸課)해야 할 것인데, 더구나 큰 기근을 당하여 어찌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겠는가? 제언(堤堰)을 수리하고, 종량(種粮)을 주고, 게으름을 경계하는 등과 같은 일에 있어서 농정(農政) 중에 가장 긴요한 것이 이것이다. 아아! 앓는 중에도 일념이 모두 백성에게 있으니, 입으로만 하는 말이 아니라, 오로지 진심에서 나오는 말이다. 아아! 너희 도(道)를 안찰(按察)하는 신하는 내가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정사에 근심하는 것을 몸받아 두 가지 정상에 관계되는 모든 일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봉행하여, 여위는 백성이 없고 일구지 않는 밭이 없게 하라. 변장(邊將)·찰방(察訪)에게도 관하(管下)가 있으므로 진구하는 일을 마찬가지로 신칙(申飭)하지 않을 수 없으니, 모두 잘 알게 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대정(大政)002) 때에는 이조(吏曹)의 낭관(郞官)은 먼저 벼슬을 옮기지 못하고, 마지막에야 옮길 수 있게 하라고 명하였다. 도목(都目)003) 의 규례는 반드시 본조의 낭관이 있어야 개정(開政)할 수 있는데, 혹 낭관과 친족이 되는 자를 의망(擬望)004) 하려 하면, 도정(都政)이 끝나기 전에 낭관을 먼저 다른 벼슬로 옮겨서 가관(假官)이 갈음하여 맡게 하는 것이 이미 그릇된 관례가 된 것을 임금이 알기 때문에, 특별한 분부를 내려 신칙(申飭)한 것이다.
1월 2일 정사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진후(診候)를 마치자, 도제조(都提調)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어제 내리신 덕음은 뜻이 간절합니다. 고요히 조리하시는 중에 백성의 일을 이토록 염려하시니, 모든 도를 안찰(按察)하는 신하와 수령(守令)·변장(邊將)들이 어찌 두려운 마음으로 봉행하지 않겠으며, 더구나 각도의 백성이 누구인들 감읍(感泣)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어사(御史)를 보내어 진정(賑政)을 염찰(廉察)하게 하는 것도 그만둘 수 없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도 그럴 생각이 있었으나, 전에는 다 진정을 마친 뒤에 보내어 염문(廉問)하게 하였다. 수의(繡衣)005) 에 맞을 만한 사람을 먼저 뽑아서 아뢰라."
하였다. 김창집이 또 말하기를,
"지사(知事) 이광적(李光迪)에게 지난해 회방(回榜)006) 때에 이미 명하여 꽃을 내리고 또 먹을 것을 내리신 것은 참으로 늙은이를 우대하시는 성의(盛意)에서 나왔습니다마는, 이제 나이가 아흔에 찼는데, 전에는 이러한 사람에게 조가(朝家)에서 특별히 은전(恩典)을 베풀어 품계(品階)를 바꾸어 자급(資級)을 높여 주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품계를 바꾸어 자급을 높이라고 명하였다. 도승지(都承旨) 조도빈(趙道彬)이 말하기를,
"지난해에 박사제(朴師悌)·이세경(李世庚) 등 여섯 사람이 추조(秋曹)007) 에서 소란을 일으킨 것은 참으로 전에 없던 변괴였습니다. 그러나 한 해가 지나도록 멀리 귀양보내어 징계될 만하고, 그 가운데에는 혹 늙고 병든 부모가 있는 자도 있으니, 정리(情理)가 가엾습니다."
하고,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도 말하기를,
"임상극(林象極)·권필형(權弼衡)이 대궐에서 소란을 일으킨 것에 비하면 차이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놓아 보내라고 명하였다. 민진후가 말하기를,
"전에 만력(萬曆)병신년008) 유구국(琉球國)이 그 나라의 표류인(漂流人)을 우리 나라에서 돌려보내 주었다 하여 북경(北京)에서 사례하는 자문(咨文)009) 을 주어서 하지사(賀至使) 민여경(閔汝慶)이 받아 왔습니다. 이번에 우리 나라 사람이 표류하여 유구에 닿았다가 다행히 살아 돌아올 수 있었는데, 마침 세갑(歲甲)이 병신년과 서로 같아서 일이 우연한 것이 아닌 듯하니, 이번에 또한 자문을 보내어 사례하는 일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고, 김창집도 말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에 명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그 뒤에 예조 판서(禮曹判書) 송상기(宋相琦)가 상소(上疏)하여 그것이 옳지 않음을 말하였는데, 이르기를,
"황조(皇朝) 때에는 우리를 오히려 한집안처럼 보아서 무릇 조빙(朝聘)하고 교제할 즈음에 매우 구금하지 않았으나, 지금도 저들이 과연 황조처럼 태연히 의심하지 않을는지 신은 모르겠습니다. 번복(藩服)이 스스로 서로 글을 통하는 것이 외교(外交)의 경계를 범하였다 하여 혹 시끄러운 말이 있게 된다면, 황조 때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해명하여 저들이 말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또 만력 때에는 우리 사신이 마침 저 나라의 사신이 조공(朝貢)할 때를 당하여 그대로 전하였으므로, 이를테면 열국(列國)이 서로 선물하는 것과 같아서 애초에 왕실(王室)에서 금하는 것이 아니었으나, 공공연하게 예부(禮部)에 이자(移咨)하는 것은 당시에도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였을 듯합니다. 또 만력 때의 자문은 황조를 찬양하여 받드는 말로 그 주의(主意)를 삼았으나, 지금은 이미 그렇게 할 수 없으니, 만약 그런 말도 없이 유구국에 사례만 한다면, 예부에서 보고서 성내지 않을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 말을 옳게 여겨서 일을 드디어 그만두었다.
1월 3일 무오
예조 참의(禮曹參議) 조태억(趙泰億)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오늘날 조정(朝廷)의 큰 시비는 신구(申球)의 일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어찌 일찍이 태평한 세상에서 문자(文字)를 결적(抉摘)하여 남의 죄안(罪案)을 만드는 것을 보셨겠습니까? 성상의 처분이 전후에 아주 다르므로 당시 사람의 의기(意氣)가 대개 꺼리는 것이 없었고, 김치후(金致垕)에 이르러 더욱 여지가 없었는데, 전하께서는 도리어 장려하여 마지않고 오직 그 말을 옳게 여겨 따르셨습니다. ‘선정(先正)’이라는 칭호는 조가의 작명(爵命)처럼 주고 빼앗을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전하께서는 유상(儒相) 【곧 윤증(尹拯)이다.】 이 죽자, 신하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이 두자로 부르시다가, 오늘날에는 참칭(僭穪)이라 하여 엄중하게 금하시니, 신(臣)은 전하의 거조(擧措)가 어떠한지를 모르겠습니다."
하고, 소 끝에 또 이선부(李善溥)·오명준(吳命峻) 등 상소한 신하들과 전후에 상소한 유생(儒生)으로서 죄받은 자를 영구(營救)하였는데, 임금이 비답(批答)을 내려 엄중하게 배척하였다. 이튿날 특교(特敎)를 내려 윤증에게 증시(贈諡)하라는 명 【연전에 윤증에 대하여 의시(議諡)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미처 거행하지 못하였다.】 을 도로 거두고, 조태억의 벼슬을 체차(遞差)하였다.
평안도 가산군(嘉山郡)에서 천둥하였다.
1월 5일 경신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이유(李濡)가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일전에 특별히 내리신 비망기(備忘記)의 근심이 간절하신 분부는 보통과 매우 다르니, 모든 번선(藩宣)010) ·자목(字牧)011) 의 직임에 있는 자로서 누구인들 감히 감격하여 스스로 죄책하려 하지 않겠습니까마는, 공사(公私)의 저축이 텅 빈데다가 곡식을 생산할 방책이 없으니, 비록 마음을 다하여 봉행하려 하더라도 쌀도 없이 밥을 짓고자 하는 것과 같은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종전에도 흉년에 권분(勸分)012) 하라는 명령이 있었으나, 재물을 내어 사사로이 진구(賑救)한 무리가 수용(收用)된 일이 드물었다. 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다 실망하여 반드시 조정의 명령을 다시 믿을 리가 없으니, 양전(兩銓)013) 에 분부해서 전후의 승전(承傳)을 상고해 내어 우선 과궐(窠闕)에 따라 조용(調用)할 것이며, 또 다시 명백히 효유(曉諭)해서 관가(官家)에 곡식을 바치게 하여 혹 굶주린 백성에게 나누어 먹이고, 진정(賑政)이 끝나거든 그 공효(攻效)가 많고 적은 것을 보아 참작하여 차임(差任)하되, 각 군문(軍門)의 장교(將校)가 구근(久勤)하여 응당 옮길 자리 같은 데에는 우선 먼저 이들을 채워서 차임해 보낸다면, 참으로 격려하는 도리에 맞을 것입니다. 저 후한 봉료(俸料)를 가만히 앉아서 먹는 장교는 한 도목(都目)쯤 좀 물리더라도 어찌 억울함을 호소하기에 이르겠습니까? 또 공사(公私)의 토목일을 모두 정파(停罷)하려는 뜻은 중신(重臣)이 결정한 바가 있습니다. 다만 공가(公家)의 낭비는 아껴야 하겠으나, 사가(私家)의 역사에 이르러서는 금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전에 범중엄(范仲淹)014) 이 영절서(領浙西)이었을 때 큰 기근을 당하여 백성에게, ‘공임이 매우 싸므로 토목의 역사를 일으킬 만하다.’고 일렀는데, 대개 여유있는 자의 재물을 내어 가난한 자에게 베풀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항주(杭州)가 편안하여 백성이 떠나지 않았으니, 이것은 도리어 토목일을 황정(荒政)의 한 단서로 삼은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탐라(耽羅)015) 한 섬은 재황(災荒)이 혹심하니, 진청(賑廳)과 강도(江都)에 있는 쌀 가운데 3,4천 석을 덜어내 연로(沿路)의 변장(邊將)으로 하여금 차례로 호송하게 하소서. 어세(漁稅)의 매매를 일체 정파하면 막히는 단서가 없지 않을 것이니, 그 값을 넉넉히 주어 그 세를 적게 받아들이되, 관할하는 경내(境內)에서 팔지 못하고 반드시 다른 도의 다른 고을에서 매매하게 하여 싼값으로 억지로 거두어들이는 폐단을 없애소서. 그리고 새로 차출된 수령(守令)은 반드시 5일 안에 보내되, 지체하는 자가 있으면 적발하여 책벌(責罰)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원로 대신(元老大臣)이 백성을 구제하는 방책으로 조목조목 아뢴 것이 참으로 나라를 근심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다만 사사로이 진구한 사람을 착실히 조용하는 것은 가하겠지만, 각 군문의 무사로서 구근하여 응당 옮겨야 할 자리에 죄다 이들을 채워 차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전에는 흉년에 공사의 토목일을 으레 모두 정파하였고, 인용한 범중엄의 일도 똑같지 않은 바가 있다. 사가의 일만을 어찌 금하지 않겠는가? 나머지 일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다. 그 뒤에 묘당에서 복주(覆奏)하기를,
"제주로 옮기는 일은 양남(兩南)의 곡식을 차례로 제때에 들여가야 할 것이니, 다시 경곡(京穀)을 나를 필요가 없습니다. 어염세(魚鹽稅)를 거두는 일은 줄여 받는 사목(事目)을 상의하여 별단(別單)에 써서 들여 계하(啓下)한 뒤에 항식(恒式)으로 정하고, 수령에 제배(除拜)되었으나 아직 서경(署經)016) 하지 않은 자 외에는 재상(宰相)·삼사(三司)에 두루 떠나는 인사를 하지 못하였더라도 반드시 5일 안에 사조(辭朝)017) 하되, 기한이 지나도 가지 않는 자는 정원(政院)으로 하여금 살펴서 추고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월 6일 신유
간원(諫院)에서 전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인의(引儀) 홍석중(洪碩重)은 전에 수어 둔감(守禦屯監)이었을 때 산골의 백성을 침탈하여 죄진 것이 낭자한데 문득 본청(本廳)에 구근(久勤)하였다 하여 본직(本職)에 제배(除拜)되었고, 흥양 현감(興陽縣監) 이석담(李碩聃)은 명망도 모자라는데다가 이력도 아주 없으니, 청컨대, 홍석중은 나문(拿問)하고 이석담은 개차(改差)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1월 7일 임술
태학 유생(太學儒生)들이 조태억(趙泰億)이 상소(上疏)하여 헐뜯어 배척한 말이 있었기 때문에 권당(捲堂)018) 하였다. 임금이 대사성(大司成) 박봉령(朴鳳齡)에게 명하여 유생들을 권유(勸諭)하여 생각하는 바를 써서 바치게 하였더니, 조태억의 소에 있는 말을 두루 변명하고, 또 말하기를,
"조태억 등이 번번이 쟁변(爭辨)하다가 말이 궁한 뒤에는 반드시, ‘이 일은 본래 조정(朝廷)에 올리지 않아야 할 일이다.’ 하는데, 이 또한 사리에 닿지 않는 말입니다. 대저 항간의 천한 사람 가운데에도 혹 교화를 손상시키고 윤리를 무너뜨리는 자가 있으면 나라에 상형(常刑)이 있고, 《주례(周禮)》의 향팔형(鄕八刑)019) 으로 말하더라도 사삿일이라 하여 묻지 않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유현(儒賢)이라는 이름으로 임하(林下)에서 글을 읽어 절반의 나라 사람에게 존경받는데, 그가 하는 짓은 모두 세도(世道)를 무너뜨릴 만한 것이니, 왕자(王者)가 나오면, 그 일이 사가(私家)에 관계된다 하여 죄주지 않겠습니까? 그 소에는 또, ‘남의 문자(文字)를 드러내어 그 계책을 반드시 이루려 한다.’ 하였는데, 아아! 이른바 문자에 성조(聖祖)를 핍박하는 일이 없고 선정(先正)을 헤치는 말이 없다면, 누가 기꺼이 드러내려 하겠으며, 어떻게 그 계책을 이루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조태억이 이 글을 지은 자에게 허물을 돌리려고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남이 드러내지 말기를 바라기는 또한 어려울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하교하기를,
"조태억이 여러 선비를 헐뜯어 욕한 것은 매우 무엄하나 혐의할 것도 못된다. 빨리 들어가도록 권하라."
하였다. 그래서 유생들이 드디어 명을 따라 재사(齋舍)에 들어갔다.
형조(刑曹)에서 대신(大臣)에게 의논하여 율문(律文) 가운데 전가 사변조(全家徙邊條)의 20여 조항을 헤아려 줄이고, 팔도의 감사(監司)와 양도(兩都)의 유수(留守)에게 반시(頒示)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지난해에 우의정(右議政) 이이명(李頤命)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사형(死刑)에서 한 등급을 줄여 전가 사변(全家徙邊)020) 이 되는 것은 《대전(大典)》021) 가운데의 본율(本律)은 한 조문뿐이었는데, 그 뒤에 점점 더하고, 또 비율(比律)을 많이 적용하여 드디어 점점 넓어졌으니, 청컨대, 형관(刑官)으로 하여금 대신과 상확(商確)하여 헤아려 줄이게 하소서."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헤아려 줄여서 아뢴 것이다.
1월 8일 계해
경상도 청송(靑松)·영양(英陽)·진보(眞寶) 등 고을에 지난달 14일에 지진(地震)이 일어났고, 대구(大丘)·경주(慶州)·동래(東萊)·의성(義城)에 지난달 21일에 지진이 일어났는데, 도신(道臣)이 아뢰었다.
1월 9일 갑자
밤 2경(二更)부터 3경까지 달무리가 목성(木星)을 둘렀다.
대사간(大司諫) 김상직(金相稷)이 상소하기를,
"승지(承旨) 이기익(李箕翊)과 정언(正言) 조영복(趙榮福)이 상소하여 인피(引避)하고 서로 공박하는 것은 맑은 조정에서 서로 공경하는 도리에 어그러지니, 청컨대, 모두 그 벼슬을 체임(遞任)하여 경책(警責)하는 뜻을 보이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처음에 조영복이 전(前) 상주 목사(尙州牧使) 이징해(李徵海)의 탐오(貪汚)한 정상을 탄핵하였으므로 이징해가 잡혀와서 사문(査問)을 받았다. 본도(本道)의 사장(査狀)이 정원(政院)에 이르렀으나, 임금의 환후가 더하기 때문에 머물러 두었는데, 조영복이 대청(臺廳)에 나아가 인피(引避)하였다. 해방 승지(該房承旨) 이기익이 ‘사장을 아직 등철(登徹)하지 않았으니, 대관(臺官)이 먼저 인피함은 마땅하지 못하다.’ 하고, 그 피사(避辭)를 물렸는데, 조영복은 이기익이 이징해를 감싸는 것으로 의심하여 상소하여 헐뜯었고, 이기익도 상소하여 변명하였다. 그리고 이리저리 서로 헐뜯으며 오래도록 그만두지 않으므로, 김상직이 상소하여 이를 말한 것이다. 그 뒤에 대사헌(大司憲) 이관명(李觀命)이 상소하기를,
"김상직이 양편이 다 그르다는 논의를 만들어서 대각(臺閣)을 경시하는 풍조를 조성(助成)하였습니다."
하니, 김상직이 드디어 인피하였는데, 처치하여 체임(遞任)하였다.
1월 10일 을축
오시(午時)에 천둥하고 밤 1경(一更)에 달무리가 목성(木星)을 둘렀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어사(御史)에 적합한 사람 홍계적(洪啓迪)·김운택(金雲澤)·최상리(崔尙履)·김재로(金在魯)·조상경(趙尙絅)·이명언(李明彦)·홍정필(洪廷弼)·이인복(李仁復)·조영복(趙榮福)·윤양래(尹陽來) 등을 초계(抄啓)하였다.
1월 11일 병인
오시(午時)에 천둥하고 밤 2경(二更)에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진후(診候)를 마치자, 도승지(都承旨) 조도빈(趙道彬)이 임금의 안질이 점점 심하여 보기가 어려운데, 소장(疏章)의 글은 반드시 장지(長紙)를 써야 하므로, 펴 보기에 더욱 방해된다 하여 고례(古例)에 따라 한 자 두세 치를 격식으로 삼기를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윤증(尹拯)의 서원(書院)을 새로 세우는 일을 폐지하라고 명하였다. 처음에 향유(鄕儒) 심익래(沈益來) 등이 상소하여 윤증을 위하여 홍주(洪州)에 사우(祠宇)를 세우기를 청하였는데, 예조(禮曹)에서 복주(覆奏)하니, 윤허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정원(政院)으로 하여금 그 주본(奏本)을 가지고 들어오게 하고, 허락하지 말라고 고쳐서 명하였다.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황일하(黃一夏)·윤헌주(尹憲柱) 등이 수인(囚人) 이원곤(李元坤)이 공사(供辭)에서 침범하여 꾸짖은 것으로 인하여 상소하여 사직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이원곤이 죄인으로서 어찌 감히 옥관(獄官)을 구죄(構罪)할 수 있는가? 참으로 매우 통탄스럽다."
하였다. 이때 조정순(趙正純) 등이 이원곤과 대변(對辨)하였는데, 이원곤은 말이 군색하여 대답하지 못하였다. 정상이 궁하여 의지할 데 없게 되니, 금오(金吾)022) 에서 조정순과 민계수(閔啓洙)를 먼저 석방하고, 그 형 이성곤(李成坤)을 가두어 둔 것을 좌우하려는 뜻이 있는 것이라 하여 옥사(獄辭) 가운데에서 매우 꾸짖었으므로, 황일하 등이 이 때문에 상소하여 변명한 것이다.
1월 12일 정묘
간원(諫院)에서 전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니, 임금이 이석담(李碩聃) 등의 일만 따랐다.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갑자년023) 차대(次對) 때에 두 대신이 윤증(尹拯)의 일로 아뢴 것이 있었는데, 내가 곧 윤허하여 유신(儒臣)으로 대우하지 않았었다. 이제 와서 의서(擬書)가 한 번 나오게 되어 허물이 두루 드러나니, 이것은 참으로 사문(斯文)의 큰 이변이다. 스승과 제자가 있고부터 이후로 듣지 못한 것이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는가? 아아! 내가 옛날의 잘못을 시원스럽게 깨달아 처분이 크게 정해졌으니,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을 밝히는 도리에 있어서 결코 선정(先正)이라는 참칭(僭稱)을 금하고, 증시(贈諡)하고 사우(祠宇)를 세우라는 명을 도로 거두는 데에만 그칠 수 없으니, 이제부터 다시는 윤증을 유현(儒賢)이라 부르지 말아서 내가 어진이를 존중하고 간사한 자를 배척하는 뜻을 명백히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이유민(李裕民)을 승지(承旨)로, 송사윤(宋思胤)을 장령(掌令)으로, 조상경(趙尙絅)을 정언(正言)으로, 박사익(朴師益)을 교리(校理)로, 김흥경(金興慶)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삼았다.
1월 14일 기사
평안도 가산(嘉山)·희천(熙川)·강동(江東)·성천(成川) 등 고을에서 천둥하였다.
1월 15일 경오
비국(備局)에서 청하여 수원 부사(水原府使) 이교악(李喬岳)을 체임(遞任)하였다. 이때 이교악이 진곡(賑穀)을 모으기 위하여 기패관(旗牌官) 등의 첩(帖)을 파는 것을 허가하였는데, 총융사(摠戎使) 김중기(金重器)가, ‘장교(將校)의 액수(額數)가 많아지면, 항오(行伍)가 부실해지고, 또 값을 받고 승보(陞補)하는 것은 전에 금령(禁令)이 있었다.’고 말하고, 독촉하여 값을 돌려주고 첩을 거두게 하니, 이교악이 이로 인하여 비국에 신장(申狀)하고 사퇴하여 마지않았다. 비국에서, 무장(武將)은 기율을 중하게 여겨 반드시 그 영을 시행하려 하고, 문리(文吏)는 진대(賑貸)를 중하게 여겨 그 일을 변경하려 하지 않으니, 형세가 서로 용납하기 어렵다.’고 아뢰어 체임한 것이다. 그런데 이교악이 또 가선첩(嘉善帖)·절충첩(折衝帖) 50장을 만들어 보내어 본부(本府)로 하여금 팔게 하고, 값을 바친 장교는 값을 돌려주고 마음대로 판첩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월 16일 신미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진주 목사(晋州牧使) 오명희(吳命禧)는 진사(賑事)를 빙자하여 오로지 탐독(貪黷)만 일삼고, 몰래 계략을 써서 화리(貨利)를 긁어 들였으니, 파직(罷職)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충청 감사(忠淸監司) 권성(權𢜫)이 상소하여 황정(荒政)을 논하였는데, 비국(備局)에 내렸다. 비국에서 복주(覆奏)하여 청하기를,
"충주(忠州)에 있는 진청미(賑廳米) 4천 석과 강도(江都)의 쌀 5천 석 및 도내(道內)의 환상 모곡(還上耗穀)024) 을 아울러 진자(賑資)에 쓰도록 허가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월 17일 임신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니, 임금이 오명희(吳命禧)의 일만 따랐다.
이의현(李宜顯)을 대사헌(大司憲)으로, 홍만우(洪萬遇)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이유민(李裕民)을 수원 부사(水原府使)로 삼았다.
1월 18일 계유
약방(藥房)에서 사옹원(司饔院)으로 옮겨 직숙(直宿)하였다. 이때 임금의 여러 증세가 더욱 심해졌으므로 약방에서 날마다 옮겨 직숙하여 약시중들기 편리하게 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는데, 이날 입진(入診)하였을 때에 약방의 여러 신하가 또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월 19일 갑술
경상 감사(慶尙監司) 홍우녕(洪禹寧)이 상소하여 도내(道內)의 적곡(糴穀)을 받아들이는 것을 멈추고, 제주(濟州)로 곡식을 옮기라는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는데, 비국(備局)에 내렸다. 비국에서 복주(覆奏)하여, 적곡은 받아들이는 것을 정지하도록 허락하고, 제주로 옮기는 쌀은 2천 석을 줄이도록 하였다.
1월 20일 을해
정도복(丁道復)·남도규(南道揆)를 승지(承旨)로, 조상건(趙尙健)을 지평(持平)으로, 윤봉조(尹鳳朝)를 사인(舍人)으로, 이수민(李壽民)을 통제사(統制使)로 삼았다.
장령(掌令) 송사윤(宋思胤)이 상소하기를,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이 만년에 서실(書室) 곁에 사우(祠宇)를 세워 신종 황제(神宗皇帝)를 제사함으로써 만절필동(萬折必東)025) 의 뜻을 두고자 하였는데, 그 뜻은 실로 초인(楚人)이 모옥(茅屋)에서 소왕(昭王)을 제사한 옛일을 본뜬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경영(經營)이 성취되기 전에 문득 기사년의 화026) 를 당하였으므로, 그 문인(門人) 권상하(權尙夏)에게 글을 남겨 그 뜻을 이루게 하였는데, 갑신년027) 봄에 이르러 비로소 사우를 세우고 제례(祭禮)를 거행하였으니, 국가에서 전결(田結)·노비(奴婢)를 주어 제수(祭需)를 장만하는 것을 도와야 하겠습니다. 증(贈) 영의정(領議政) 송갑조(宋甲祚)는 송시열의 아비인데, 광해군(光海君)이 모후(母后)를 서궁(西宮)에 유폐하였을 때에 송갑조가 새로 입격한 진사(進士)로서 홀로 흉론(凶論)을 배척하였으므로, 규례대로 은혜를 받았으며, 선정신 김상헌(金尙憲)은 그를 표창하여 광류(狂流) 가운데 지주(砥柱)028) 라 하였습니다. 증시(贈諡)의 은전을 아직도 거행하지 못하였으니, 추증을 거행하고 그 제사를 받드는 자를 거두어 녹용(錄用)해야 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소를 예조(禮曹)에 내렸다. 그 뒤에 예조 판서(禮曹判書) 민진후(閔鎭厚)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모옥에게 소왕을 제사한 것은 사민(士民)이 추모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니, 애초에 국가에서 알 바가 아닙니다. 송사윤이 소 가운데에 인용한 우제묘(虞帝廟)도 참람합니다. 중국에서도 그러한데, 더구나 우리 번방(藩邦)이겠습니까? 더욱 감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도우려면 관원을 두어 수호(守護)하고 제사해야 마땅할 것인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전결만 주는 것은 사체(事體)가 어떨는지 모르겠습니다. 송갑조가 수립한 것은 참으로 뛰어나지만, 사절(死節)한 사람에 비하면 조금 차이가 없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두 가지 일을 모두 우선 천천히 하라고 명하였다.
1월 22일 정축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고, 논핵(論劾)하기를,
"개천 군수(价川郡守) 이만구(李萬衢)는 사람됨이 어리석고 도리에 어그러져서 물의(物議)가 시끄러우니,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 노세면(盧世冕)은 사람됨이 어리석고, 또 흉소(凶疏)에 참여하였으니, 태거(汰去)하소서."
하니, 임금이 태거하는 일만 따랐다.
1월 23일 무인
밤 5경(五更)에 달이 목성(木星)을 둘렀다.
의금부(義禁府)에서 말하기를,
"이원곤(李元坤)과 임건원(任健元)이 대질한 말은 각각 스스로 전후의 초사(招辭)를 자세히 설명한 것인데, 장서(長書)를 찢은 것은 이원곤의 대단히 어그러진 단서입니다. 교묘히 꾸며서 속인 군색한 꼴이 갖가지로 나오니, 청컨대, 이원곤을 형추(刑推)하여 정상을 알아내게 하소서. 이성곤(李成坤)은 중신(重臣)으로서 그 아우가 눈으로 본 일을 물었을 때에 그가 이미 옳다고 답하였는데, 【처음에 예조 판서(禮曹判書) 민진후(閔鎭厚)가 이성곤에게 이원곤의 일을 물었더니, 실상(實狀)이라고 대답하였는데, 이원곤이 나문(拿問)받고 굳게 숨기자, 이성곤도 전에 말한 것을 숨겼다.】 이제는 이 일을 패초(牌招)029) 받고 나아갔다가 집으로 돌아간 것으로 돌립니다. 정태(情態)가 매우 교사(巧詐)하나, 아우의 증언 때문에 형추가 그 형에게 미치면 윤기(倫紀)를 손상시킬 것이니, 청컨대, 이것으로 조율(照律)하소서."
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이원곤은 전후에 엄중하게 물을 때에 끝내 속이고 번번이 어지럽고 사리에 맞지 않는 말로 교묘히 꾸며서 공초하였으니, 각별히 엄중하게 형추하여 반드시 정상을 알아 내도록 하라."
하였다.
전라 감사(全羅監司) 김보택(金普澤)·충청 감사(忠淸監司) 권성(權𢜫)이 다 국가에서 준 것 외에 재결(災結)을 더 주었으므로, 상소하여 마음대로 거행한 죄를 받기를 청하니, 임금이 급암(汲黯)이 제서(制書)를 사칭하고 창고의 물건을 낸 일을 인용하여 대죄(待罪)하지 말라 명하였다. 좌의정(左議政) 김창집(金昌集)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일이 기강에 관계되므로 장차 마음대로 하는 것이 습관을 이루게 될 것이니, 두 도의 감사를 모두 파직(罷職)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고 다만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라고 명하였다. 그 뒤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이명(李頤命)이 또 말하니, 임금이 김보택·권성을 체임(遞任)하도록 명하였다.
1월 24일 기묘
이원곤(李元坤)을 선천(宣川)에 유배(流配)하고, 이성곤(李成坤)을 도배(徒配)하였다. 임금이 이원곤을 형신(刑訊)하라는 명을 이미 내렸는데, 교리(校理) 김재로(金在魯)가 상소하기를,
"이원곤은 어그러진 단서가 죄다 드러났으나, 끝내 승복하지 않으니, 해부(該府)에서 형신을 청하는 것은 법례(法例)가 옳으며, 각별히 엄중하게 형신하라는 하교도 매우 징계하려는 뜻에서 나왔습니다. 다만 생각하건대, 아조(我朝)는 나라를 세우며 인후(仁厚)한 뜻을 근본으로 삼아 사대부를 특별히 대우하므로, 매우 악한 대벽(大辟)이 아니면 쉽사리 고략(拷掠)을 더한 적이 없었으니, 진실로 한 사람이 간사하게 속인 것으로 인하여 문득 사대부를 대우하는 법을 무너뜨려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원곤의 정상은 다시 물을 것도 없으니, 그 죄를 곧바로 결단하더라도 그가 또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 말을 받아들여 드디어 형신(刑訊)을 그만두고 멀리 귀양보냈다.
처음에 임진년030) 과거(科擧) 때 장옥(場屋)이 엄하지 못하여 사람들의 말이 시끄러웠는데, 하나는 대궐의 문이 닫히지 않았다는 것이고, 하나는 이돈(李墩)이 문임(文任)031) 으로서 대궐에 나아가 시관(試官)으로 낙점(落點)032) 받은 뒤에 도로 대궐 밖으로 나가 거자(擧子)033) 오수원(吳遂元)에게 들렀다는 것이다. 그때 이미 여러 신하의 소계(疏啓)로 인하여 문이 열렸다고 질언(質言)한 권치대(權致大)·조명(趙銘) 및 이돈이 거자를 두루 찾아다니는 것을 직접 보았다는 이빈흥(李賓興)·윤팽수(尹彭叟)·사노(私奴) 갑술(甲戌) 등을 나래(拿來)하여 핵사(覈査)하자, 옥사(獄辭)에 관련된 자가 매우 넓어지고 일에 다 근거가 있으므로, 드디어 이돈을 귀양보내고, 오수원과 장옥의 시한(時限) 이후에 시권(試券)을 내고 참방(參榜)된 이진급(李眞伋)을 방목(榜目)에서 빼 버렸는데, 이돈은 드디어 적소(謫所)에서 죽었다. 병신년034) 에 이르러 이돈의 당류(黨類)가 국사를 담당하게 되자, 이돈을 위하여 신설(伸雪)하려고 다시 옥사(獄事)를 일으켜 권치대·조명 및 이빈흥·윤팽수·갑술 등을 모두 나래하였는데, 권치대 등이 반드시 죽게 되리라고 생각하여 드디어 전의 말을 모두 뒤집고, 판서(判書) 권상유(權尙游)가 글을 보내어 서로 권하였다고 끌어대었으므로, 권상유가 이 때문에 대질하러 나아갔고, 삭직(削職)되었다. 윤팽수의 아버지 윤필정(尹弼鼎)이 먼저 스스로 형관(刑官)에 투서하여 그 아들이 임진년에 대답한 것은 진실로 무망(誣罔)한 것이라 하며 죄를 면하기를 바라니, 윤팽수와 그 형 윤팽수 (尹彭壽)·갑술 등도 드디어 붙좇아 스스로 전의 말은 무망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유독 권응(權譍)만은 임진년에 장옥을 설치한 뒤에 대궐문이 닫히지 않은 것을 직접 보고서 개탄하여 다시는 부거(赴擧)하지 않으려 하고 친한 벗에게 말하였는데, 이 때문에 옥사(獄辭)에 관련되어 옥에 갇히고 고략을 더하기에 이르렀으나, 끝내 사실대로 대답하고 변경하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이빈흥은 전의 말을 굳게 지켜 이돈이 거자를 두루 찾아다닌 것을 밝혔는데, 이빈흥의 종제(從弟) 이정흥(李禎興)이 비로소 이빈흥을 위하여 증언하였다가, 이때에 이르러 또 말을 바꾸었으므로, 이빈흥이 드디어 혹독하게 고문당하였으나, 끝내 굽히지 않았다. 임금이 추안(推案)을 보고 통촉하였으나, 법조(法曹)035) 에서 굳이 이돈의 처지를 위하므로 특별히 명하여 버려두고 묻지 말게 하였다. 그런데 마침 국면이 또 바뀌게 되니, 권치대·조명 및 윤팽수·갑술 등이 또 그 말을 바꾸어 임진년에 증언한 것을 따랐다. 임금이 그들이 속여 꾸며서 공초하여 권상유를 구무(構誣)하였다 하여 특별히 명하여 권치대·조명 등을 멀리 귀양보내고, 윤팽수·갑술·이정흥 등을 도배(徒配)하고, 윤필정은 형관에 투서하고 아들을 시켜 말을 바꾸게 하였다 하여 형신하여 멀리 귀양보내고, 나머지 사람은 다 석방하도록 명하였다. 처음에 이원곤은 임진년 정시(庭試) 때의 고관(考官)이 낙점(落點)된 뒤에 마침 이돈이 거리 앞을 지나 가는 것을 보고, 고관이 나왔으므로 과거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문득 그 아내의 오라비 임건원(任健元)에게 말하고, 또 민계수(閔啓洙)·조정순(趙正純) 등 여러 사람에게 말하였다. 그리고 이원곤의 형 이성곤은 판서(判書) 민진후(閔鎭厚)와 지극히 친밀하였는데, 민진후를 방문하였을 때에 민진후가 그 일을 물으니, 이성곤이, ‘참으로 그런 일이 있다.’고 말하였다. 이돈이 거자를 두루 찾아다닌 일이 발각되어서는 이원곤이 전에 말한 것을 숨기려고 그 아내의 아버지 임방(任埅)과 임건원에게 가서 모의하였으나, 임방이 이미 진신(搢紳) 사이에 전파하였고, 민계수·조정순도 이빈흥의 아들과 수작하고 이원곤이 이빈흥에게 이야기하였으므로, 이 때문에 이원곤을 끌어대어 증거로 삼았다. 이원곤이 나치(拿致)되어 임방 부자 및 민계수·조정순 등과 대질하였는데 말의 조리가 막혔으므로, 드디어 죄를 받았다. 과거에 관한 옥사가 다시 일어난 뒤로 모두 10여 개월이 지났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결말이 났다.
1월 26일 신사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진후(診候)를 마치자, 의관(醫官) 방진기(方震夔)가 말하기를,
"성상의 환후(患候)에 다리가 저리고 눈이 어지러운 등의 증세는 시험삼아 온천(溫泉)에서 목욕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와 어의(御醫)에게 두루 물었는데, 가부가 반반이어서 의논이 하나로 돌아가지 않으므로, 임금이 입시하지 않은 어의들에게 다시 묻고, 또 대신(大臣)들에게 묻도록 명하였다.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경차관(敬差官)이 연분(年分)036) 을 복심(覆審)하는 것은 전혀 실효가 없으므로, 지난해에는 경차관을 보내지 않고 결수(結數)를 정해 주어 도신(道臣)이 마침내 마음대로 주도록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청컨대, 원장(元帳)에 등록한 각도의 전결(田結)에 대하여 재년(災年)에 주어야 할 결수(結數)를 미리 정하여, 가장 심한 재년에는 원장에 등록한 것에 비하여 3분의 2 또는 반을 주고, 그 버금가는 재년에는 절반 또는 3분의 1을 주고, 조금 결실한 재년에는 3분의 1 또는 4분의 1을 주는 것으로 정식(定式)을 만들어 전례를 상고하여 거행하되, 어사(御史)를 암행시킬 때에는 사정(私情)을 따라 고르게 분배하지 않는 감사(監司)와 상사(上司)를 속이고 은결(隱結)037) 을 사사롭게 쓰는 수령(守令)을 각별히 더 염문(廉問)하여 종중 과죄(從重科罪)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에 명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그 뒤에 묘당에서 말하기를,
"재결(災結)을 미리 정하면 막혀서 방해되는 것이 많습니다."
하므로, 과연 거행하지 않았다. 민진후가 또 청하기를,
"비국(備局)의 문랑청(文郞廳) 세 자리는 사관(四館)038) 의 참하관(參下官)039) 중에서 명망이 있는 자를 차출해서 집필하여 공문을 돌리게 하고, 무랑청(武郞廳)과 마찬가지로 20개월 만에 6품(品)으로 승진시켜 미리 양성하는 방도로 삼으소서."
하니, 임금이 또한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였다. 그 뒤에 묘당에서 말하기를,
"게으른 버릇은 신진(新進)이 가장 심한데, 만약 이 법을 시행하면 폐단이 거듭 생겨 죄벌(罪罰)이 잇달을 것이니, 옛 규례에 따라 6품 이상으로 차출하소서."
하였다.
1월 27일 임오
온천에서 목욕하는 것이 마땅한지의 여부를 대신(大臣)들에게 문의하였는데,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이유(李濡)가 말하기를,
"성후(聖候)가 미령(未寧)하신 것이 이미 여러 해가 되었는데, 약이 효험이 없어서 여러 증세가 더하니, 온천을 시험하려는 것은 만부득이한 데에서 나왔습니다. 이미 선조(先朝)에서 경험한 것이 있는 까닭에 사람들이 반드시 행할 만하다고 하겠습니다마는, 그때는 성고(聖考)의 춘추가 왕성하실 때이므로 혈기가 한창 왕성하셨으나, 지금은 성상께서 쇠약해 가시는 나이인데, 오래 정섭(靜攝)하시던 끝에 2백여 리나 되는 곳에 흔들려 가신다면, 실로 중도에서 손상을 더할 염려가 있습니다. 그리고 목욕을 시험한 뒤에는 진원(眞元)에 손상이 없으리라 보장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고, 행 판중추부사 서종태(徐宗泰)는 말하기를,
"온수(溫水)는 「본초(本草)」에 손발이 오그라들고 손발을 쓰지 못하는 것을 고친다고 말하였으나, 화증(火症)을 다스리는 데에는 아주 맞지 않습니다. 또 진액(津液)을 많이 잃으므로, 혈기가 충실하지 않으면 더욱 경솔하게 시험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합니다. 지금 성상의 모든 기후는 먼길에 손상될 염려가 있을 뿐만 아니라, 병의 근원을 고치는 법에 있어서도 확실히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우의정(右議政) 이이명(李頤命)과 판중추부사 조상우(趙相愚)·김우항(金宇杭) 등의 의논들도 다 신중한 방도를 말하였으며, 입시(入侍)하지 않았던 의관(醫官)들이 각각 소견을 아뢴 것도 하나로 돌아가지 않으니,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대신들이 헌의(獻議)한 것은 내 몸을 염려하는 것이 지극하다 하겠다. 신중한 방도를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마는, 지금 눈으로 보는 것이 어두운 것은 지난해보다 심하니, 치료가 조금 늦어지면 앞으로 염려되는 것은 반드시 눈이 어두운 데에만 그치지 않을 것이며, 다리가 저린 것이 여러 해 동안 낫지 않으니, 또한 침과 약으로 효험을 바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눈병과 다리가 저린 것은 온천에서 목욕하기에 가장 마땅한데 효험을 거두면 다행일 것이고, 방해가 있으면 또한 곧 멈추어도 손상이 없을 듯하다. 혹 해로울 것이 없고 효험이 없더라도 이렇게 한 후에야 나에게 다하지 못한 회한(悔恨)이 없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먼저 두부(頭部)를 감고 하부(下部)만 목욕하면 크게 피곤할 염려가 없을 것이다. 이것을 의관들에게 묻고 대신들에게 다시 의논하도록 하라."
하였다. 그래서 대신 이유 등이 전에 말한 것을 다시 아뢰고, 또 말하기를,
"신(臣)은 의리(醫理)에 아주 어두워서 목욕을 시험한 뒤에 눈이 어둡고 다리가 저린 데에 효험이 있을는지 감히 알 수 없으나, 목욕한 여느 사람에게서 익히 듣건대, 허약(虛弱)하고 화증(火症)이 있으면, 도리어 기(氣)를 쏟아서 열(熱)을 돕는 해가 많다 합니다. 신이 크게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의관들의 논의도 각각 소견을 고집하여 들쭉날쭉 같지 않았다. 응교(應敎) 어유귀(魚有龜)·교리(校理) 박사익(朴師益)·부교리(副校理) 김재로(金在魯)·수찬(修撰) 조관빈(趙觀彬) 등이 상소하여 그 옳지 않음을 극진히 아뢰었는데, 이르기를,
"의관들이 고집하여 말하는 것은 한낱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을 고치는 옛 방문에 의거한 것일 뿐입니다. 눈병을 아울러 고치는 것에 이르러서는 선조(先朝)에서 이미 그러한 경험이 있다 하나, 실로 나이의 장쇠(莊衰)가 이미 다른데다가 성증(聖證)의 원인이 같지 않은데, 더구나 목욕한 뒤에 크게 피곤하다는 말이 방서(方書)에 실려 있으니, 이제 요행을 바라는 논의를 믿고 수백여 리나 되는 곳에 거둥하시면, 반드시 성환(聖患)에 맞는 치료가 되지 않고 마침 옥후(玉候)에 손상을 더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대신과 유신(儒臣)의 말은 진실로 우려하는 정성에서 나왔다. 시험삼아 목욕해 보는 이해(利害)도 참으로 알고 확실히 볼 수 없다면, 익히 헤아리지 않아서는 안될 것이니, 우선 앞을 보고 천천히 의논하여 처치하겠다."
하였다.
1월 28일 계미
묘시(卯時)부터 신시(申時)까지 햇무리하였다.
1월 29일 갑신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이원곤(李元坤)이 전후에 공초한 것은 간사한 정상을 숨기기 어렵습니다. 두 차례 질문하였을 때 둔사(遁辭)로 조리가 꺾였으므로, 해부(該府)에서 법에 따라 형신(刑訊)하기를 청하자 성교(聖敎)가 준엄하여 각별히 엄중하게 형신하라는 명을 내리시기까지 하였는데, 이제 사대부는 용서할 바가 있다고 한다면, 설령 죄가 이원곤보다 더한 자가 있어도 다 형신하지 않아서 끝내 승복(承服)받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까? 유신(儒臣)은 이원곤을 형신하는 것을 뒷 폐단에 관계된다고 말하였으나, 신은 옥사(獄事)의 정상이 구명되기 전에 문득 먼저 죄를 감정(勘定)하는 것이 진실로 크게 뒷 폐단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전에 판부(判付)하신 대로 엄하게 형신하여 정상을 알아 내게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조영복(趙榮福)을 장령(掌令)으로, 홍계적(洪啓迪)을 부교리(副校理)로, 이병상(李秉常)을 부응교(副應敎)로, 민순(閔純)을 전라도 병마 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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