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59권, 숙종 43년 1717년 2월

싸라리리 2025. 11. 30.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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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3일 무자

황해도 옹진현(瓮津縣)에서 황당선(荒唐船)040)   한 척과 사람 열 둘을 잡았는데, 도신(道臣)이 계문(啓聞)하였다. 또 말하기를,
"황당선의 사람을 겨우 압송한 지 한 달이 안되어 또 이렇게 잡았습니다. 번번이 압송하면 그 폐해를 지탱하기 어려울 것이니, 방어사(防禦使)로 하여금 편의에 따라 놓아 보내게 함이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비국(備局)에서 복주(覆奏)하기를,
"이미 잡았는데, 방편으로 놓아 보내는 것은 사체(事體)가 미안하니, 이번에는 역원(譯院)041)  에서 재자관(䝴咨官)을 차정(差定)하여 봉성(鳳城)으로 압송하게 하되, 이 뒤로는 바다 가운데에 떠 있는 황당선은 내양(內洋)으로 몰아들여 압송하는 폐단을 끼칠 필요가 없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2월 4일 기축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수안 군수(遂安郡守) 강욱(姜頊)은 지난해 봄에 백성이 곤궁하여 전세전(田稅錢)을 장만하기 어렵다 하여 본도(本道)의 상정미(詳定米)를 청해 얻고는 은점(銀店)에 나누어 주고 억지로 1만 1천여 냥을 받아들였는데, 바친 전세전은 7천여 냥뿐이고, 그 나머지는 죄다 사복(私服)을 채웠으니, 파직(罷職)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간원(諫院)에서 전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판결사(判決事) 홍경렴(洪景濂)은 나이가 늙어 쇠모(衰耗)하고 정신이 없어서 청리(聽理)하고 결단할 즈음에 사람들의 말썽을 많이 불러일으키니, 청컨대 체차(遞差)하소서."
하니, 임금이 홍경렴의 일만 따랐다.

 

2월 5일 경인

밤에 간방(艮方)042)  ·곤방(坤方)043)  에 불빛 같은 운기(雲氣)가 있었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2월 6일 신묘

장령(掌令) 송사윤(宋思胤)이 강욱(姜頊)의 일에 잘못 의율(擬律)하였다 하여 인피(引避)하였으나 퇴대(退待)하지 않고, 이어서 전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어 강욱을 나문(拿問)하여 죄를 정하기를 청하고, 또 말하기를,
"태천현(泰川縣)에서 인신(印信)을 잃은 일이 있었는데, 병사(兵使)의 비장(裨將) 공우성(孔又聖)이 비술(秘術)이 있다 하여 전패(殿牌)044)   앞에 꿇어앉아 손을 모으고 저주(咀呪)하였습니다. 또 길가에 던져진 익명서(匿名書)에, ‘재임(齋任) 김국빈(金國賓) 등이 인신을 훔쳤다.’ 하였는데, 스스로 담당하여 옥사를 다스려야 한다 하여 난잡하게 음형(淫刑)을 베풀어 마침내 경폐(徑斃)하게 하였습니다. 버려두고 묻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그때의 현감(縣監)은 우선 나문(拿問)하고, 공우성은 경옥(京獄)에 나치(拿致)하여 엄히 핵사(覈査)하게 하소서. 사직 대제(社稷大祭) 때에 향합(香盒)의 하대(下臺)를 공공연하게 잃어버려 향실(香室)에서 가져온 향합으로 옮겼습니다. 일을 맡은 관원은 살피지 못한 잘못을 면할 수 없으니, 그때의 단사(壇司)를 파직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강욱 이하 세 가지 일만 따랐다.

 

하교(下敎)하기를,
"눈병이 이러하니 고치는 방도를 늦출 수 있겠는가? 온수(溫水)를 멀리 가져오면 반드시 기(氣)가 많이 새겠지만, 선조(先朝)에서 이미 거행한 일이 있으므로, 물을 길어 와서 시험삼아 목욕해 보려 하니, 내국(內局)045)  으로 하여금 의관(醫官)들에게 물어서 아뢰게 하라."
하였다. 그래서 약방(藥房)에서 의관들에게 물어 말하기를,
"먼 곳에서 길어 오면 참으로 기가 샐 염려가 있으나, 극진하게 하는 도리로는 한 번 시험하더라도 무방하겠습니다. 병조(兵曹)와 경기·충청 두 도에 분부해서 역마(驛馬)를 정제하여 기다리게 하고, 본원(本院)에서 의관을 정하여 보내어서 감독하여 길어서 올려 보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약방(藥房)의 세 제조(提調)와 우의정(右議政) 이이명(李頤命)이 청대(請對)하니, 임금이 불러서 보았다. 도제조(都提調)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성후(聖候)의 안질이 이러하신데, 미처 시험해 보지 않은 것은 온천(溫泉)이고, 선조(先朝)에서 이미 기이한 효험을 보셨으므로, 혹 이 의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질은 손상받는 것이 각각 다르고, 또 선조에서는 춘추가 강성하실 때이었으나, 이제 성상께서는 쇠약해 가시는 나이므로, 피부가 수척해져서 가볍게 시험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길어 와서 시험삼아 목욕하는 것은 수기(水氣)가 이미 새어 결코 효험이 없으리라는 것을 알겠으니, 근력이 거둥하실 만하면 차라리 이때에 거둥하여 친히 목욕하여 효험을 바라시는 것이 낫겠습니다. 오직 명백하게 하교하시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고, 이이명은 말하기를,
"온천에 거둥하시어 조금이라도 이로움이 있다면 어찌 감히 막을 수 있겠습니까마는, 이제 문과 뜰 사이에서도 오히려 행동하기 어려워 전각(殿閣)에 한가히 거처하시며 침수(寢睡)도 편하지 않을 때가 많은데, 더구나 거둥하여 노동하시는 것이겠습니까? 또 목욕한 뒤에는 허약해지고 피곤해진다는 것이 과연 방서(方書)에 말하는 것과 같다면, 그 우려하는 것이 더욱 어떠하겠습니까? 단지 다하지 못하였다는 회한(悔恨)을 없앨 수 있다고 하교하셨으니, 군하(群下)가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길어 와서 목욕하면 반드시 그 효험이 없을 것이니, 성의(聖意)가 어떠하신지 명백히 하교하셔야 마땅합니다."
하고,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온천에서 목욕하여 눈병을 치료하는 것이 의서(醫書)에 실려 있지는 않으나, 의서에, ‘현부(玄府)가 막히면 반드시 안질(眼疾)이 된다,’ 하였으니, 현부는 곧 땀구멍입니다. 온천에 목욕하여 땀을 내어 현부가 트이면, 안질을 고칠 수 있을 것이니, 또한 의서에서 말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조에서 안질을 오래 앓으시다가 을사년046)  에 처음 거둥하여 시원하게 기이한 효험을 보셨으므로, 하교한 것이다. 요즈음 입이 써서 약을 들 수 없고, 한때 침을 맞아도 반드시 효험을 바랄 수가 없다. 온양(溫陽)에 가는 것은 스스로 기력을 헤아리면 미치지 못할 염려가 없을 듯하다. 다만 목욕한 뒤의 이해(利害)가 어떠할는지 모르겠으나, 먼저 두부(頭部)를 감고 물을 뿌려 씻는다면 어찌 해롭기야 하겠는가?"
하였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가서 목욕하시는 것으로 정하시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한 번 가서 목욕하면 다하지 못하였다는 회한을 없앨 수 있을 것이니, 거둥하는 것으로 정하는 것이 마땅하다. 선조에서 온양에 거둥하신 것은 을사년부터 기유년047)  까지 모두 3월에 하셨으니, 가는 날짜를 이에 의거하여 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이명이 말하기를,
"찬찬하게 날짜를 배정하여 혹시라도 서둘러 가는 일이 없어야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는데, 민진후가 7일로 나누어 배정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임금이 또 이것은 참으로 부득이한 일이나, 이런 흉년을 당하여 폐단을 끼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하다 하여 모든 일을 힘써 줄이도록 명하였다. 따라서 배종(陪從)하는 신하들은 선조에 견주어 수를 줄이고, 모든 변통할 만한 것은 조건을 상정(詳定)하여 폐단을 없애도록 힘쓰라고 명하였다. 이이명이 말하기를,
"마병(馬兵)이 대가(大駕)를 호위(扈衛)하고 향병(鄕兵)이 뒤따르므로, 야차(野次)하는 행궁(行宮)에서 결진(結陣)해야 하는데, 수가 적으면 모양을 이루기 어렵고, 지금 향병을 징발하기도 어렵습니다. 도성(都城)에 머무는 군사는 마병·금군(禁軍)을 합하여 2,3초(哨)만 남겨 두고 도감(都監)의 군사 2천이 호종(扈從)하면, 비록 향병이 아니라도 거둥할 수 있겠으나, 저 곳에 이른 뒤에 행궁을 시위(侍衛)하기가 어렵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런 때에 어찌 향병을 징발할 수 있겠는가? 물러가서 군사를 거느리는 관원과 상의하여 선처하라."
하였다. 임금이 또 을사년 거둥 때에 과거(科擧)를 설행(設行)한 전례를 물었는데, 김창집이 말하기를,
"을사년 이후 5년 동안에 을사년과 병오년048)   두 번만 과거를 설행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친히 거둥하고 과거를 설행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반드시 서운해 할 것이다."
하였다. 민진후가 환궁(還宮)한 뒤에 가을이 되기를 기다려서 설행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답하지 않았다. 이이명이 말하기를,
"도성에 머무는 군사인 두 군문(軍門)은 교대로 번들어야 할 것이고, 표하(標下)가 또 5,6백 명 있어서 그 장관(將官)으로 하여금 대오(隊伍)를 만들어 도성에 머물게 할 뿐인데, 향병을 징발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향병을 어찌 징발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전에는 충청 감사(忠淸監司)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호위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본도(本道)에 토산(土産)을 진상(進上)하는 것은 전례가 있더라도 특별히 면제하라고 미리 분부하도록 하라."
하였다. 신하들이 이미 물러가고 나서 예조(禮曹)에서 3월 초 3일로 온양에 거둥할 길일(吉日)을 가려서 아뢰었다.

 

응교(應敎) 어유귀(魚有龜)·부교리(副校理) 김재로(金在魯)·부수찬(副修撰) 홍계적(洪啓迪) 등이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임금은 한 호령 한 동작에 모두 법도가 있습니다. 액정(掖庭)의 예속(隷屬)이 얼마나 비천하며 장첩(狀牒)으로 정소(呈訴)하는 것이 얼마나 외람된 일인데, 전하께서는 도리어 하늘 같은 존엄을 굽혀서 친히 제지(題旨)를 내리셨습니까? 천례(賤隷)가 가져다가 정원(政院)에 바친 것이 거의 관부(官府)에서 이첩(移牒)하는 것과 같았으니, 군명(君命)을 더럽히고 나라의 체모를 무너뜨린 것이 지극합니다. 후사(喉司)049)  의 신하는 상세히 묻고 살펴 알아서 혹 승전색(承傳色)을 죄주기를 청하거나 바로잡도록 아뢰어야 할 것인데, 대수롭지 않게 보아 넘겼으며, 어제 전교(傳敎)하신 뒤에도 의심스런 것을 밝혀 아뢰는 한 마디 말이 없었으니, 해당 승지(承旨)는 경계하는 방도가 없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또 그 글 가운데에 승전색의 처분이라고 말하였으니, 이것은 반드시 내시에게 바치는 것인데, 곧바로 전하의 앞에 올려서 성명(聖明)께서 번거롭게 친히 사지(辭旨)를 내리시게 한 것입니다. 승전색의 죄상을 엄중히 감단(勘斷)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저 오늘날의 폐단은 액정의 예속이 능멸당할까 걱정하는 것이 아니고, 나라의 법이 시행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이제부터 이 무리들은 죄가 있거나 없거나 한결같이 유사(有司)에게 회부하여 궁부(宮府)가 일체라는 뜻을 보여 군하(群下)로 하여금 모두 전하의 공평하고 밝은 도리를 우러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너희들의 차자(箚子)는 바로잡으려는 정성에서 나왔고, 궁부가 일체라는 말에 이르러서는 더욱 좋으니, 내가 가납(嘉納)한다. 이번에 써서 내린 것이 사사로이 비호하는 것은 아니나, 과연 대단한 실착임을 깨달았다. 해당 승지는 추고(推考)하고, 승전색은 파직하고, 장두(狀頭)인 별감(別監)은 유사로 하여금 과죄(科罪)하게 하라."
하였다. 대개 이때 액정 별감(掖庭別監)이 금령(禁令)을 무릅쓰고 밤에 다니다가 포청(捕廳)에 잡혔는데, 그 무리가 나졸(邏卒)을 때리고 잡힌 자를 겁탈하였다. 그래서 대장(大將)이 계품(啓稟)하여 죄주기를 청하였는데, 별감들이 내시에게 청하여 와람되게 첩장(牒狀)을 바쳐 임금의 제지(題旨)를 받아 정원에 주기까지 하였으므로, 옥당(玉堂)에서 차자를 올려 논하고, 헌납(獻納) 이정익(李禎翊)도 상소하여 개진(開陳)하니, 임금이 모두 가납한 것이다.

 

2월 8일 계사

달무리가 목성(木星)을 둘렀다.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윤헌주(尹憲柱)를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홍치중(洪致中)을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조태채(趙泰采)를 판의금(判義禁)으로, 윤봉조(尹鳳朝)를 부응교(副應敎)로, 황귀하(黃龜河)를 부교리(副校理)로 삼고, 호조 판서(戶曹判書) 권상유(權尙游)를 정리사(整理使)로 삼아 충청도로 내려보내어 온천에 거둥할 때의 모든 일을 돌보게 하였다.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 안중필(委重弼)·헌납(獻納) 이정익(李禎翊)·정언(正言) 조상경(趙尙絅)이 차자(箚子)를 올려 온천에 거둥하는 것을 멈추기를 청하고, 교리(校理) 박사익(朴師益)도 차자를 올려 다투었으나, 임금이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2월 10일 을미

헌부(憲府) 【지평(持平) 이중협(李重協)이다.】 에서 전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일전에 액정(掖庭)의 예속(隸屬)이 사사로이 스스로 내시에게 정소(呈訴)하고, 내시가 중간에서 성상께 아뢰어 번거롭게 제지(題旨)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비록 예명(睿明)이 깨달으심으로 인하여 곧 처분을 내리셨으나, 내시의 무엄함이 지극하였습니다. 정상이 몹시 통분하니 해당 승전색(承傳色)을 먼 곳에 정배(定配)하소서. 당초 액정의 예속이 와서 제첩(題牒)을 보였을 때에 해당 승지(承旨)는 말을 만들어서 계품(啓稟)했어야 마땅하며, 내시에게서 나온 농간이라면 마땅히 곧 죄주기를 청했어야 합니다. 과연 성지(聖旨)를 써서 내리신 것이라면, 더욱 작환(繳還)050)  함으로써 바로잡는 책무를 다했어야 할 것인데, 몽연(蒙然)하게 도로 주었습니다. 직분을 다하지 못한 잘못을 버려두고 논하지 않을 수 없으니, 해당 승지를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승전색은 삭직(削職)하라고 명하고, 승지의 일은 그대로 따랐다.  【승지는 남도규(南道揆)이다. 승전색에 대한 논계(論啓)는 두세 번 아뢰고 곧 멈추었다.】


【태백산사고본】 67책 59권 9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636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註 050] 작환(繳還) : 돌려보냄.

 

좌의정(左議政) 김창집(金昌集)·우의정(右議政) 이이명(李頤命)이 각조(各曹)의 당상관(堂上官)과 빈청(賓廳)에 모여 온천에 거둥한 전례를 참고하여 되도록 간약(簡約)하게 의정(議定)하여 절목(節目)을 만들어서 아뢰었다.

 

이성조(李聖肇)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비국(備局)에서 말하기를,
"을사년051)   온천에 거둥하실 때의 진로(津路)는 서빙고(西氷庫)를 거쳤는데, 선창(船倉)을 구축하지 않고 작은 배를 이어서 길을 만들어 어선(御船)에 잇대었으니, 이번에도 이대로 행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정원(政院)에서 아뢰기를,
"온천에 거둥하실 때에는, 각도의 감사(監司)가 을사년의 전례에 따라 경상(境上)에 와서 기다려야 하겠으나, 강원 감사는 병오년052)  에 대신(大臣)이 아룀에 따라 본영(本營)에 머물러 있었고, 경기 감사는 대가(大駕)를 따라 경상에 이르렀으며, 충청 감사는 온천에 미리 이르러 모든 일을 거행하였으니, 이제도 이 전례를 쓰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예조(禮曹)에서 말하기를,
"병오년·정미년053)  ·기유년054)   세 해에는 선조(先朝)에서 왕대비(王大妃)를 모시고 온천에 거둥하실 때 고취(鼓吹)가 전도(前導)하는 절차가 있었으나, 오직 무신년055)  에 거둥하셨을 때에는 고취를 없앴으므로, 계품(啓稟)합니다."
하니, 임금이 고취를 쓰지 말라고 명하였다.

 

2월 11일 병신

안중필(安重弼)을 승지(承旨)로, 홍계적(洪啓迪)을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삼았다.

 

수찬(修撰) 조관빈(趙觀彬)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이수민(李壽民)은 상례(常例)로 조용(調用)된 무부(武夫)이므로, 본디 재능이 모자란데, 병곤(兵閫)056)  에 오른 지 얼마 안되어 문득 통수(統帥)057)  에 발탁되었습니다. 송사윤(宋思胤)은 성질이 용렬하고 문벌이 한미하여 본래 명망이 없는데, 겨우 낭서(郞署)058)  를 지내고 갑자기 장헌(掌憲)059)   벼슬을 차지하였습니다. 개정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개정하라는 논의는 매우 지나치다."
하였다.

 

2월 12일 정유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이번에 온천에 거둥하는 것은 만부득이한 데에서 나왔으나, 마침 흉년을 당하여 폐단을 끼치는 단서가 많을 것이니, 내 마음이 어찌 편안하겠는가? 특별히 진휼(軫恤)하는 방도가 없어서는 안되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지나는 곳과 근처 각 고을의 병신년060)   조(條)의 전세(田稅)·대동(大同)061)  을 품지(稟旨)하여 적당히 줄여서 내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는데, 비국(備局)에서 복주(覆奏)하기를,
"온양(溫陽) 한 고을은 병신년조의 전세를 완전히 감면하고, 호서(湖西)는 병신년 대동(大同)의 실결(實結) 7만 6천 10결(結)을 결마다 각각 2두(斗)씩 감면하면 감면할 것이 1만 1천 3백 40석(石)이 될 것인데, 본도(本道)의 감사(監司)로 하여금 그 출역(出役)이 어렵고 쉬운 데에 따라 구별하여 감면해 주게 하고, 경기의 고을은 결마다 대동미(大同米) 3두씩을 감면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이유(李濡)를 유도 대신(留都大臣)으로, 총융사(摠戎使) 이기하(李基夏)를 유도 대장(留都大將)으로 삼고, 경은 부원군(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을 수궁 대장(守宮大將)으로 삼아 금중(禁中)에서 직숙(直宿)하게 하였다.  【호위청(扈衛廳)에서 직숙하였다.】


【태백산사고본】 67책 59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636면
【분류】왕실-행행(行幸)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군사-군정(軍政)

 

가난한 종친(宗親)이 많다 하여 해부(該府)에 명하여 특히 매우 가난한 자를 초록(抄錄)하여 아뢰게 하고, 물건을 내려 급한 사정을 구제하라고 명하였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는데, 우의정(右議政) 이이명(李頤命)도 함께 입시(入侍)하였다. 도제조(都提調)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왕세자는 대가(大駕)를 따라가지 못하고 대궐 밖에서 지송(祗送)만 해야 하므로, 정리(情理)가 매우 결연(缺然)할 것이니, 지송·지영(祗迎)을 전보다 조금 먼 곳에서 하는 것이 정례(情禮)에 맞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진두(津頭)에서 행하라고 명하였다.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거둥하신 뒤에 왕세자가 궁관(宮官)을 보내어 문안하는 것을 과천(果川) 한 곳에서만 행하는 것은 정례가 혹 너무 간약(簡約)한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온천에 막 도착한 때와 목욕한 뒤에 두 번 더 행하라고 명하였다. 이이명이 말하기를,
"선조(先朝)에서 거둥하셨을 때에는 충청 병사(忠淸兵使)가 군사를 거느리고 소사(素沙)에 와서 기다렸습니다. 이번에 비록 향군(鄕軍)을 징발하지는 않으나, 수신(帥臣)은 경상(境上)에서 맞이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이이명이 또 말하기를,
"땔거리를 장만한 뒤에 밥짓는 것은 군법(軍法)에서 꺼리는 것인데, 지금 굶주린 백성에게 땔거리를 내도록 요구하기는 참으로 어려우니, 훈장(訓將)에게 분부하여 스스로 장만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제조 민진후가 말하기를,
"이런 때에 과거(科擧)를 설행(設行)하기는 마침내 어려울 것이니, 가을이 되기를 기다려 따로 설행하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호종(扈從)하는 군사는 한데에서 숙위(宿衛)하므로 진실로 응시하게 해야 마땅하나, 배종(陪從)하는 음관(蔭官)과 본도(本道)의 차원(差員)을 문과(文科)에 응시하도록 허락하면, 향유(鄕儒)가 참석하기 어려울 것이니, 이것은 허가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것이 참으로 옳으니, 이대로 분부하라."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대가(大駕)가 출궁(出宮)한 뒤에 날마다 공상(供上)할 물종(物種)을 계품(啓稟)하니, 임금이 어육(魚肉) 15종(種)과 소채(蔬菜) 10종을 봉진(封進)하라고 명하였다. 이 뒤에 또 어육은 줄여서 10종으로 하라고 명하고, 또 연로(沿路) 각 고을의 다담(茶啖)을 모두 그만두라고 명하였다.

 

이관명(李觀命)을 도승지(都承旨)로, 이병상(李秉常)을 사간(司諫)으로, 송유룡(宋儒龍)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송유룡은 기사년062)  의 잔당으로서 경력도 짧은데 문득 은대(銀臺)063)  에 들어갔으므로, 물정이 놀라와하였다.

 

2월 14일 기해

홍호인(洪好人)·이병상(李秉常)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이병상은 사간(司諫)에서 초배(超拜)되었다. 이정익(李禎翊)을 사간으로, 박성로(朴聖輅)를 장령(掌令)으로, 이인복(李仁復)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좌의정(左議政) 김창집(金昌集)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도하(都下)의 굶주린 백성이 진청(賑廳)에서 먹여주기를 바라는데, 당상(堂上) 2원(員)이 다 배종(陪從)하여 온천에 가면 민정(民情)이 서운할 것입니다. 조태채(趙泰采)는 금오(金吾)의 수석(首席)을 겸하고 또 태복 제거(太僕提擧)를 띠었으므로 변통하기 어려울 듯하나, 송상기(宋相琦)의 본직(本職)은 차관(次官)으로 하여금 갈음하여 가게 하더라도 이미 불가(不可)할 것이 없으며, 문형(文衡)064)  의 직임에 이르러서는 제학(提學)도 갈음하여 행할 수 있으니, 남아서 진휼(賑恤)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통제사(統制使) 이수민(李壽民)은 논사(論思)하는 말이 이처럼 바른데도 염우(廉隅)가 무릅쓰고 부임하기 어려우니, 우선 체개(遞改)해야 마땅하겠습니다. 전 통제사 윤각(尹慤)은 그 어버이의 병이 나아 가고 또 형제가 없는 외아들과 같은 예가 아니니, 그대로 두어 흉년에 영송(迎送)하는 폐단을 없애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2월 15일 경자

판부사(判府事) 이여(李畬)가 여주(驪州)에서 현도(縣道)를 통한 상소에서 온천에 거둥하는 일을 멈추고 길어 와서 목욕하여 보기를 청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한 번 가서 목욕하는 것을 조금도 늦출 수 없다. 반복하여 헤아려서 이미 단정하였다."
하였다.

 

2월 16일 신축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건명(李健命)이 청대(請對)하여 임금에게 아뢰기를,
"온양(溫陽) 지경 안의 옛길은 50년 동안 황폐하여 무덤이 많고 나무가 자라 길을 트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옆에 길 하나가 있는데, 옛길에 견주어 7리가 가깝다 하니, 편리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새길이 편리하고 가깝다면 새길로 가야 마땅하다."
하였다. 이건명이 또 말하기를,
"병조(兵曹)의 역마(驛馬)가 매우 피곤할 것이니, 호조(戶曹)의 별고(別庫)에 있는 쌀과 콩 각각 1백 석(石)을 얻어 역졸(驛卒)에서 나누어 주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승지(承旨) 이성조(李聖肇)가 말하기를,
"대가가 온천에 거둥하신 뒤에 경외(京外)의 제배(除拜)된 관원이 숙사(肅謝)하는 일은 품정(稟定)하는 방도가 있어야 마땅합니다. 배종(陪從)하는 관원이 이배(移拜)되면 대전(大殿)에만 숙배하고 대가(大駕)가 환궁한 뒤에 비로소 중궁전(中宮殿)과 세자궁(世子宮)에 숙배(肅拜)하고, 유도(留都)하는 관원과 경중(京中)에 있는 사람이 혹 벼슬을 옮기거나 제수(除授)되면 먼저 중궁전과 세자궁에 숙배하고 대가가 환궁한 뒤에 대전에 숙배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2월 17일 임인

정리사(整理使) 권상유(權尙游)가 온천의 행전(行殿)065)  이 세월이 오래 지나 변하였다 하여, 치계(馳啓)하여 대강 단청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개수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2월 18일 계묘

진휼청(賑恤廳)에서 도하(都下)의 기민(飢民)에게 인구를 계산하여 양식을 줄 경우 외방에서 고향을 떠나 빌어먹다가 경청(京廳)에 진구(賑救)한다는 말을 듣고 날마다 모여 오는 자가 3천 명이나 되도록 많은데도 양식을 줄 것인지를 아뢰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김재로(金在魯)를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2월 19일 갑진

진시(辰時)부터 미시(未時)까지 햇무리하였다. 신시(申時)에는 해에 중운(重暈)이 있었는데, 내운(內暈)에 양이(兩珥)가 있고, 햇무리 위에 관(冠)이 있고, 아래에 이(履)가 있었다.

 

옥당(玉堂)의 관원이 연명(聯名)하여 상소(上疏)해서 온천에 거둥할 때에 모두 배종(陪從)하여 하루에 두 번 문안하는 반열(班列)에 함께 참여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2원(員)이 배종하는 것은 이미 전례가 있으니, 더 따라갈 것 없다."
하였다.

 

여섯 도(道)의 유생(儒生) 윤현(尹俔)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한(漢)나라 유신(儒臣) 동중서(董仲舒)가 말하기를, ‘《춘추(春秋)》에서 대일통(大一統)이란 천지(天地)의 상경(常經)이요 고금의 통의(通誼)인데, 이제 스승들은 도(道)를 달리하고 사람들은 논(論)을 달리하니, 육예(六藝)의 과목과 공자(孔子)의 학술에 있지 않은 모든 것은 다 그 길을 끊어서 아울러 나아가지 못하게 한 후에야 통기(統紀)가 하나로 돌아갈 수 있고, 백성이 따를 바를 알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생각하건대, 우리 나라는 열성(列聖)께서 서로 이어받아 정치와 교화가 아름답고 밝아서, 의리의 근원을 처음으로 창도한 전조(前朝)의 신하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로부터 본조(本朝)의 오현(五賢)066)   및 양현(兩賢)067)  이 잇따라 종향(從享)되었으니, 대일통의 의리에 이르러서는 먼저 힘쓸 일을 해냈다고 하겠으나, 그 이도(異道)·이론(異論)만은 죄다 끊지 못하였습니다. 한 번 적신(賊臣) 윤휴(尹鑴)가 사문(斯文)을 해치고 어지럽힌 뒤로 몰래 보호하고 서로 돕는 무리가 불행히도 요즈음 사문(斯門)안에서 나와 헐뜯는 말이 위로 도통(道統)에 미쳐 정도(正道)가 날로 어두워지는데, 다행히 오늘날 성학(聖學)이 고명(高明)하시어 진위(眞僞)를 간파하시고 열 줄의 윤발(綸綍)068)  에 성의(聖意)를 명시하여 선비의 추향을 바루고 간사한 논설을 그치게 하셨으니, 이는 바로 이단을 물리치고 정도를 밝히는 하나의 큰 기회입니다. 그 길을 끊어 아울러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뜻은 더할 것이 없으나, 이른바 통기를 하나로 돌리고 민지(民志)를 정하는 방도는 오히려 다하지 못한 것이 있으니, 곧 선정신(先正臣) 김장생(金長生)을 종사(從祀)하는 전례(典禮)가 아직 거행되지 못한 것이 이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선정(先正)이 주자(周子)·정자(程子)·장자(張子)·주자(朱子)의 도덕(道德)·학문으로 한(漢)나라·진(晋)나라의 여러 유현(儒賢)의 입언(立言)·저술(著述)을 아울러 도덕·학업을 전수하여 세도(世道)를 돕기에 이른 것은 그 공이 도리어 한나라·송(宋)나라의 여러 유현보다 더한 것이 있습니다. 가정(家庭)에 있어서는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이 그 시례(詩禮)의 가르침에 감화받아 그 부사(父師)의 전통을 이었고, 문하(門下)의 전통에 있어서는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 두 유현이 일찍부터 시우지화(時雨之化)069)  를 입어 마침내 도통(道統)의 학문을 전하였습니다. 그 인재를 성취하고 사문을 도운 것이 이처럼 성대한데, 오로지 배향(配享)하는 예(禮)만은 아직도 미루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성조(聖朝)의 흠결이 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대저 종향하는 전례(典禮)는 대개 또한 국가 전례 중에서 지극히 중대한 것이므로, 반드시 그 사람의 도덕(道德)·공업(功業)이 공론에 맞아야 바야흐로 배향할 수 있는데, 이제 선정의 도덕·학문이 저렇듯 크고 입언·저술이 저렇듯 갖추어지고 전도(傳道)·수업(授業)이 저렇듯 넓으니, 성무(聖廡)에 종향하는 것이 과연 공론에 맞지 않겠습니까? 신사년070)  의 수의(收議) 때에 대신(大臣)과 유신(儒臣)들이 모두 똑같은 말로 청하였으나, 윤증(尹拯)과 한두 이의(異議)하는 무리만이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으니, 사문의 응당 거행해야 할 전례가 이 때문에 미루어졌습니다. 대저 윤증은 송시열이 선정의 도를 터득하여 위로 이이(李珥)·성혼(成渾)의 통서를 잇고, 멀리 고정(考亭)071)  의 통서를 이어받은 것을 늘 미워하여 마침내 배반하고 연원(淵源)에까지 미쳤으니, 그가 선정을 종사(從祀)하기를 청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대개 그의 실상이었습니다. 아아! 윤증이 스승을 저버린 자취가 오늘날에 이르러 남김없이 드러났습니다. 성상께서 어진이를 높이고 간사한 자를 물리치는 방도를 모두 더욱 엄하게 하신다면, 오직 선정이 진실로 두 현신(賢臣)의 연원이 나온 근본이니, 그 근본을 미루어 표창하는 일을 오늘날 더욱 먼저 힘써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도 종사하는 전례가 아직도 고요하니, 실로 신들이 전하에게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어진이를 높이는 정성이 매우 가상하므로, 내가 바야흐로 잠자코 있는 가운데 깨달았다."
하였다.

 

2월 20일 을사

우윤(右尹) 이광좌(李光佐)가 사직하는 소(疏)에서 신구(申球)의 일을 다시 논하여 말이 매우 격렬하게 질책하였는데, 정원(政院)에서 금령(禁令)이 있다 하여 계품(啓稟)하여 물리치니, 이광좌가 더욱 노하여 다시 상소하여 정원을 헐뜯었다. 승지(承旨)들이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니,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우윤 이광좌는 시비가 크게 정해진 뒤에 승부를 다투며 소를 올려 다시 전의 일을 제기해서 불안한 일을 일으키려 하였다. 소는 비록 물리쳤으나, 의사(意思)가 아름답지 못하니, 본직과 겸직을 모두 체차(遞差)하도록 하라."
하였다.

 

간원(諫院)에서 전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음죽 현감(陰竹縣監) 조수달(趙壽達)이 남형(濫刑)하여 사람을 죽였으므로, 시친(屍親)이 발장(發狀)하였는데, 스스로 추관(推官)을 맡아 태연히 벼슬에 있으니, 나문(拿問)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나문하는 일만 따랐다.

 

장령(掌令) 박성로(朴聖輅)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성후(聖候)가 편찮으시어 시조(視朝)072)  하는 의례(儀禮)가 오래 폐지되었는데, 이제는 날씨가 맑고 온화하여 삼양(三陽)이 창달하였으니, 참으로 천시(天時)를 많이 대하여 답답한 기(氣)를 적당히 펴고 신하를 인접(引接)하여 앉거나 누워서 논설하되, 아울러 조정(朝政)에 언급하시면, 상하가 서로 미더울 뿐만 아니라 모든 일이 폐기될 염려가 없을 것이니, 막힌 기후가 이로 인하여 점점 트이게 되실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지난 가을의 흉작은 예전에 드물던 것인데, 온천에 거둥하시는 일이 마침 이때를 당하였으니, 주련(駐輦)하는 곳에서 누더기 옷을 걸치고 굶주려 부황(浮黃)이 든 사람들이 천백(千百)으로 떼 지어서 전하에게 먹여 주기를 바랄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특별히 진휼(賑恤)해서 그 희망을 조금 위로해야 할 듯합니다. 김홍석(金弘錫)·이희춘(李喜春) 등은 선정(先正)을 위하여 무원(誣冤)을 신구(伸救)한 반유(泮儒)073)  를 마음대로 처벌한 것이 실로 강박(姜樸)과 매우 다를 것이 없는데, 일전에 당후(堂后)074)  의 망(望)에 방자하게 비의(備擬)075)  되었으니, 책벌(責罰)하여 징려(懲礪)하는 바탕으로 삼으소서. 지난 가을에 연령군(延齡君)의 겸종(傔從) 등이 추조(秋曹)의 금리(禁吏)를 잡아다가 벌주는 것이라 하여 한없이 때렸습니다. 무뢰한 하인들이 감히 궁가(宮家)의 위세를 빙자하여 국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중간에서 스스로 방자하였으니, 유사(有司)로 하여금 적발하여 과죄(科罪)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맨 먼저 아뢴 말은 나라를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을 매우 아름답게 여긴다. 온천에 목욕한 뒤에 기력을 보아서 하겠다. 특별히 진휼하는 일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주서(注書)는 파직(罷職)하라. 소(疏) 끝에 아뢴 일은 앞장선 한 사람을 유사로 하여금 가두어 다스리게 하라."
하였다.

 

2월 21일 병오

달무리가 목성(木星)을 둘렀다.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이날 지평(持平) 이중협(李重協)이 이원곤(李元坤)의 일을 아뢰는 것을 멈춘다는 것을 전계(傳啓)하였다. 뒷날에 지레 멈추었다 하여 물의가 일어났기 때문에 인피(引避)하였는데, 처치하여 체임시켰다.

 

김재로(金在魯)를 부교리(副校理)로, 조명봉(趙鳴鳳)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2월 22일 정미

햇무리하였는데, 양이(兩珥)가 있고, 햇무리 위에 관(冠)이 있고, 아래에 이(履)가 있고, 좌우에 극(戟)이 있었으며, 백홍(白虹)이 해를 꿰뚫었다. 사시(巳時)부터 신시(申時)까지 햇무리하였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을 때에 정리사(整理使) 권상유(權尙游)가 말하기를,
"온천에 거둥하실 때에 각참(各站)에서 바치는 찬물(饌物) 가운데 산 노루와 산꿩은 얻기가 매우 어려우니, 이 두 가지는 산 것이 아니라도 품질과 맛이 변하지 않았으면, 봉진(封進)하도록 허가하여도 무방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모든 일을 힘써 간략하게 하도록 하였으니, 꿩과 노루를 진배(進排)하지 말게 함이 옳다."
하였다. 권상유가 또 말하기를,
"연(輦)이 지날 때에 길이 향교(鄕校) 앞을 거치게 되니, 연에서 내리시는 절차가 있어야 할 듯합니다."
하였는데,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향교를 지날 때에는 가교(駕轎)에서 내려 인부가 낮추어 받들고 지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권상유가 또 말하기를,
"듣건대, 병판(兵判) 이건명(李健命)이 아뢴 바에 따라 천안(天安)부터 온궁(溫宮)076)  까지는 새길을 닦을 것이라 합니다. 이른바 새길에는 좁고 진창이 많이 있으나, 옛길은 이런 폐단이 없습니다. 지사(知事) 강현(姜鋧)의 집에는 근처에 산소를 썼는데, 어로(御路)가 용호(龍虎)가 됩니다. 그래서 나무를 많이 길렀는데, 이제 나무가 다 말라 죽었으므로, 개수(改修)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옛길을 닦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이어서 농사의 형편과 밀·보리가 어떠한지를 물었는데, 권상유가 말하기를,
"지금 본 바로는 잘 익을 희망이 있을 듯합니다."
하였다. 도승지(都承旨) 이관명(李觀命)이 백홍(白虹)이 해를 꿰뚫은 이변 때문에 진계(陳戒)하고, 또 하유(下諭)하여 백성의 고통을 물어 곧 행조(行朝)에 장문(狀聞)하게 하여 곧 변통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고, 인하여 경기·충청 두 도의 감사(監司)에게 하유하라고 명하였다.

 

시강원 보덕(侍講院輔德) 윤양래(尹陽來)·필선(弼善) 이정주(李挺周)·겸필선(兼弼善) 어유귀(魚有龜)·문학(文學) 황선(黃璿)·겸문학(兼文學) 윤봉조(尹鳳朝)·겸사서(兼司書) 홍계적(洪啓迪)·설서(說書) 어유룡(魚有龍)·겸설서(兼說書) 유척기(兪拓基) 등이 연명해서 상소하여 왕세자가 수가(隨駕)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세자의 수가는 정례(情禮)로는 진실로 그러해야 하겠으나, 마련하지 말게 한 데에도 뜻이 있다."
하였다.

 

호조 참판(戶曹參判) 신임(申銋)이 바야흐로 관상감 제조(觀象監提調)를 겸직하였으므로, 홍변(虹變) 때문에 상소하여 온천에 거둥하는 것을 멈추기를 청하였는데, 이르기를,
"해는 양(陽)의 으뜸이고 임금의 상징입니다. 양이 음(陰)에게 상하는 것은 큰 이변이니, 이번에 온천에 거둥하시는 일은 결코 만전(萬全)의 길이 아닙니다. 대신(大臣)·제신(諸臣)이 번갈아 글을 올려 멈추기를 청하였으나, 전하께서는 모두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시경(詩經)》에, ‘하늘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유업을 보전하리라.’ 하였으니, 이는 바로 전하께서 공손하게 잠자코 수성(修省)하실 때이고, 조용한 곳에서 수양하실 때인데, 어찌 몸소 멀리 거둥하여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도리를 소홀히 하실 수 있겠습니까? 옛 충신(忠臣)중에는 도망하기에 임박하여 말의 배띠를 끊으며 간하여 말린 자077)  가 있었습니다. 거둥까지는 아직 열흘이 남았으니, 오히려 멈출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예사롭지 않은 이변으로 인하여 감히 법도를 지키는 간쟁(諫諍)을 다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이제 경(卿)의 소사(疏辭)는 대개 나라를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에서 나왔으나, 병을 고치는 완급(緩急)은 그 경중에 따라 같지 않다. 내 병은 눈에 있으므로 바로 서둘러 고쳐야 할 것이니, 결코 늦출 수 없다."
하였다.

 

2월 23일 무신

정원(政院)에서 홍변(虹變)으로 인하여 생각하는 바를 아뢰어 인외(寅畏)078)  하여 수성(修省)하기를 청하고, 또 말하기를,
"온천에 목욕하려고 거둥하시는 것이 만부득이한 데에서 나왔으나, 마침 전에 없던 흉년을 당하였으니, 성념(聖念)에 염려를 끼치는 것을 면할 수 없습니다. 모든 호위(扈衛)하는 의장(儀仗)과 공억(供億)하는 비용을 모두 절약하였으니, 이 밖에 조금이라도 폐단이 곤궁한 백성에게 미치고 일이 성대한 데에 관계되는 것은 더욱 일체 정파(停罷)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온천에 거둥하여 과거(科擧)를 설행(設行)하는 것은 선조(先朝)에서 혹 행한 전례가 있기는 하나, 그때에는 흉년이 들어 굶주리는 것이 이처럼 심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더구나 이제 하늘이 견책을 보여 경고(警告)함이 정녕한데, 다만 한때 위로하고 기쁘게 하기 위하여 이 겉치레인 일을 베푼다면, 마침내 농사를 방해하고 백성을 해치는 것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유념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이번에 경계를 아뢴 것은 오로지 나라를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데에서 나왔으니,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거둥한 뒤에 과거를 설행하여 위로하고 기쁘게 하는 것은 내가 옳지 않은 것을 모르겠다. 더구나 선조에서 이미 행한 전례가 있는 것이겠는가? 그만둘 수 없다."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이명(李頤命)이 홍변(虹變)으로 인하여 차자(箚子)를 올려 책면(策免)하기를 청하고, 덧붙여 생각하는 바를 아뢰었는데, 이르기를,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 아득히 먼 하늘은 사람의 일에 관계가 없다 하지 마시고, 또 지난해에도 이런 이변이 있었다 하여 눈앞에 분명한 조짐이 없었음에 버릇되지 마시고, 오직 아들이 부모의 노여움을 당한 듯한 마음가짐으로 하늘을 섬기는 정성을 더욱 돈독하게 하소서. 이번에 거둥하여 온천에 목욕하시는 것은 만부득이한 데에서 나왔으므로, 위로 하늘과 아래로 백성이 반드시 전하를 노여워하지 않을 것이나, 전하께서는 또한 매우 경계하고 두려워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미 절손(節損)하였다 하더라도 더욱 간약(簡約)하게 하시고, 이미 감면하여 진휼하였다 하더라도 백성의 고통을 더욱 살펴서 재앙을 구제하고 농사를 살피는 정사(政事)를 크게 행하여 민정(民情)이 기뻐하게 되면, 하늘의 노여움도 그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삼가보건대, 춘방(春坊)079)  의 신하가 어제 동궁(東宮)이 수가(隨駕)하기를 청한 바가 있었는데, 대개, ‘태자(太子)는 임금이 가면 지키고 지키는 자가 있으면 따라간다. 따라가는 것을 무군(撫軍)이라 하고 지키는 것을 감국(監國)이라 한다. 이것이 옛 제도이다.’ 한 것 때문일 것입니다. 성명(聖明)께서 수가를 윤허하지 않은 것은 지키는 것을 중히 여기셨기 때문이겠으나, 때에 따르는 의리는 경중이 혹 바뀌기도 하는데, 지금에 있어서는 찬선(饌膳)을 보살피고 안부를 묻는 예(禮)가 도리어 중하니, 어찌 상규(常規)를 고수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기근이 매우 심한데 재앙이 또 일어나니,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병중에 매우 깊다. 그 까닭을 밝히면 참으로 부덕(否德)으로 말미암는데, 보필하는 신하가 어찌 면직을 바라기까지 하는가? 차자(箚子) 가운데 진계(陣戒)한 말이 매우 절실하니,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래의 일은 예전에 임금이 가면 태자가 감국한다는 것이니, 이제 내가 세자의 수가를 윤허하지 않은 것은 지키는 것을 중히 여길 뿐만 아니라, 폐단을 줄이는 뜻이 실로 그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다만 강두(江頭)에서 영송(迎送)하는 예(禮)를 거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하였다.

 

2월 24일 기유

밤에 유성(流星)이 유성(柳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의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색은 붉었으며, 빛이 땅을 비추었다.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옥수(獄囚)가 지체되는 폐단은 외방(外方)이 더욱 심하여 혹 여러 해 동안 판결하지 않아 옥중에서 병들어 죽는 자도 있으니, 이제 거둥할 때를 당하여 어찌 막히고 답답한 것을 터서 화기(和氣)를 부를 방도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온궁(溫宮)에 이른 뒤에 대신(大臣)과 삼사(三司)가 한 곳에 모여 충청·경기의 각 고을에 지금 갇혀 있는 죄인에 대하여 경중을 구별하여 의논해서 아뢰되, 죄가 의심스러우면 오직 가볍게 하여 너그러운 법을 따르도록 힘쓰고, 잡범(雜犯)인 사죄(死罪)까지도 품지(稟旨)하여 아울러 사유(赦宥)하도록 하라."
하였다.

 

평안도 각 고을 백성으로서 염병(染病)을 앓고 있는 자가 3백 13명이고, 죽은 자가 10명이며, 전라도 각 고을에서 염병을 앓고 있는 자가 9백 20여 명이고, 죽은 자가 1백 10명인데, 도신(道臣)이 아뢰었다.

 

2월 25일 경술

조영복(趙榮福)을 헌납(憲納)으로, 김태수(金台壽)를 지평(持平)으로, 조도빈(趙道彬)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삼았다.

 

사간(司諫) 이정익(李禎翊)이 상소하여 온양(溫陽)에서 과거(科擧)를 설행(設行)하는 일을 멈추기를 청하였는데, 이르기를,
"과거를 설행하는 일은 선조(先朝)에서 이미 행한 전례이므로 위로하고 기쁘게 하는 도리로서는 바로 준행(遵行)하고 폐기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굶어 죽은 사람이 잇달아서 기상(氣象)이 슬프니, 전하께서 주필(駐蹕)하신 뒤에 이러한 경황을 보시면 무슨 마음으로 과거를 설행하는 일을 하시겠습니까? 비록 과거에 나아가는 자로 말하더라도 부황(浮黃)이 들어 거의 죽게 된 가운데 또한 양식을 싸가지고 먼길을 일제히 와서 모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거둥하시기 전에 특별히 윤음(綸音)을 내려 본도의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한 방면에 두루 유시(諭示)하게 하고, 환궁(還宮)하여 가을 곡식이 익기를 기다려 따로 중신(重臣)을 보내어 과거를 설행해서 사람을 뽑고, 서울에 올라와서 방방(放榜)080)  하게 하면, 조정에서 위로하고 기쁘게 하는 도리를 이에서 다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그 소를 묘당(廟堂)에 내렸다. 비국(備局)에서 복주(覆奏)하여 가을 곡식이 익기를 기다려 명관(命官)을 내려보내어 과장(科場)을 설치해서 시취(試取)하고, 호가(扈駕)한 군사는 서울로 돌아간 뒤에 따로 시취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경상도 각 고을의 백성으로 염병(染病)을 앓고 있는 자가 9백 30여 명이고 죽은 자가 1백 50여 명이고, 우역(牛疫)으로 죽은 것이 3천 7백여 두(頭)이며, 충청도에서 염병을 앓고 있는 자가 3백 60명이고 죽은 자가 1백여 명인데, 도신(道臣)이 아뢰었다.

 

2월 26일 신해

제주 목사(濟州牧使) 홍중주(洪重周)가 서장(書狀)으로 민사(民事)의 위급한 정상을 아뢰고, 곡물을 옮겨 곧 들여보내어 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본도(本島)에 획급(劃給)한 곡물을 아직도 들여보내지 않았으니, 불쌍한 우리 섬 백성을 다 죽이게 되어 내가 해마다 진휼(軫恤)하는 뜻이 허투(虛套)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저절로 상심된다.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각도에 엄히 신칙(申飭)하여 빨리 들여보내어 학철(涸轍)081)  의 위급함을 구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그래서 비국(備局)에서 복주(覆奏)하여 전라·경상 두 도의 감사(監司)를 추고(推考)하고, 두 도의 도사(都事)를 독운관(督運官)으로 차출하여 아직 들여가지 않은 곡물을 빨리 독촉하여 보내게 하기를 청하였다.

 

부응교(副應敎) 윤봉조(尹鳳朝)가 차자(箚子)를 올려 홍변(虹變) 때문에 진계(陳戒)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우리 전하께서 임어(臨御)하신 40여 년 동안 일념으로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조금도 게을리하시지 않았으나, 근년 이래로 성체(聖體)가 오래 편찮아 수응(酬應)에 방해되므로 문부(文簿)가 적체(積滯)되고 백관(百官)이 관무(官務)를 게을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직무를 게을리하며 세월을 보내고, 대각(臺閣)에서는 고요한 것이 버릇되었으니, 그 경계하고 이끄는 방법에 있어서는 어찌 성명(聖明)의 책임이 아니겠습니까? 이는 전하께서 한결같이 마음을 바르게 가지고, 미루어 사방에 미치게 하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팔도에서 기근을 고하여도 구제할 방책이 없습니다. 경기·호서에서는 죽는 자가 잇달고 있는데, 온천에 시험삼아 목욕해 보시려는 행차가 마침 이러한 때에 있고, 더구나 이제 재이(災異)가 일어난 것이 바로 거둥이 멀지 않은 때에 있었으니, 하늘이 우리에게 고한 까닭에는 그 뜻이 있을 듯합니다. 기일이 이미 임박하였으므로 중도에서 그만두기 어렵게 여기신다면, 모든 비용에 관계되는 것을 더욱 절약하고, 행주(行厨)에 공진(供進)하는 것을 모두 간략하고 검소하게 하여 재이를 만나 찬선(饌膳)을 줄이는 뜻을 보일 것이며, 여러 가지 쓸데없는 비용에 이르러서는 유사(有司)로 하여금 수입을 헤아려 장만하게 하여 그 폐단을 더는 것은 그만둘 수 없을 것입니다. 일전에 내리신 비망기(備忘記)에 적체된 옥사(獄事)를 소통(疏通)하라 하신 하교는 진실로 덕을 닦고 허물을 살피는 마음에서 나오셨으나, 백성의 고통을 구제하는 도리는 더욱 민정(民情)을 이끌어 통달하게 하는 데에 달려 있으니, 참으로 행전(行殿)에서 온천에 목욕하는 여가에 자주 방백(方伯)·수령(守令)을 인견(引見)하여 여리(閭里)의 고통과 읍정(邑政)의 폐단을 조용히 강구하여 곧 변통하시면, 크고 작은 병폐를 곧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호서 지방은 인재가 모여 있는 곳이므로, 경학(經學)에 뜻을 두어 자신을 단속하여 스스로 수양하는 선비가 많이 있을 것이니, 또한 빨리 찾아서 특별히 수용하여 유일(遺逸)이 없게 하면, 용동(聳動)하고 흥기(興起)시키는 것은 과거를 설행하여 위로하고 기쁘게 하는 것만 할 뿐이 아닐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우악한 비답(批荅)을 내려 가납(嘉納)하였다.

 

2월 27일 임자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진후(診候)를 마치자, 도제조(都提調) 김창집(金昌集)이 임금의 안질이 매우 중하다 하여 거둥과 진정(賑政)에 관계되는 것 외에는 삼사(三司)에서 일을 말하는 소(疏)일지라도 일체 봉입(捧入)하지 말게 하기를 정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김창집이 또 말하기를,
"온천에 거둥하실 날짜가 멀지 않았는데, 회란(回鑾)082)  하신 뒤에 어사(御史)를 보내려면 어사에 뽑힌 사람은 온궁(溫宮)에 가서 기다려야 할 것이니, 이것도 어렵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각도에 한꺼번에 보낼 것 없으니, 거둥하기 전에 보내려 한다."
하였다.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절사(節使)가 돌아오는 것이 회란하시기 전에 있으면, 복명(復命)하는 일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행(使行)이 돌아왔으면 환궁(還宮)하기를 기다릴 수 없을 것이니, 역마(驛馬)를 타고 온양(溫陽)에 이르러 숙배(肅拜)하게 하되, 원역(員役)은 따라오지 말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2월 28일 계축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어제 연중(筵中)에서, 약원(藥院)의 진달(陳達)로 인하여 삼사(三司)에서 일을 말하는 소(疏)도 온천에 거둥하시기 전에는 봉입(捧入)하지 말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대저 국가에서 삼사를 둔 것을 이목(耳目)의 직임을 주고 논사(論思)의 직책을 준 것인데, 이렇게 간우(艱虞)가 눈앞에 넘치고 재이(災異)가 매우 참혹한 때를 당하여 비록 도움을 구하는 하교를 날마다 내리시더라도 오히려 언로(言路)가 넓지 못할까 걱정해야 할 것인데, 어찌 거듭 금령(禁令)을 더하여 간언(諫言)하러 오는 길을 끊을 수 있겠습니까? 삼사의 소를 봉입하지 말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이중협(李重協)을 정언(正言)으로, 송필항(宋必恒)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2월 29일 갑인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을 문묘(文廟)에 배향(配享)하라고 명하였다. 태학생(太學生) 조겸빈(趙謙彬)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인군(人君)이 일에 임하여 청단(聽斷)하는 도리는 그 말이 따를 만하면 곧 청종(聽從)하고 망설이지 않아야 할 것이며, 그 일이 결단할 만하다면 곧 단행하여 오래 버티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이미 국론이 귀일(歸一)되었는지를 살피고, 또 향례(享禮)가 마땅한지를 살피고 나서 흔쾌하게 따르고 빨리 결단하는 것이 천둥이 격렬하고 바람이 나는 듯이 한다면 어찌 성주(聖主)의 명정(明政)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생각하건대, 선정신(先正臣) 문원공 김장생은 동방의 대현(大賢)이고 아조(我朝)의 유종(儒宗)으로서, 성혼(成渾)·이이(李珥)를 이어서 집대성하고 정자(程子)·주자를 이어서 도통을 전하였으므로, 여러 조정의 예우(禮遇)를 받고 한 세대의 모범이 되었으니, 두 현신(賢臣)과 함께 성무(聖廡)에 종향(從享)하고 사전(祀典)을 나란히 벌여야 마땅할 것입니다. 팔도에서 합사(合辭)하고 관학(館學)에서 소리를 같이하여 전후의 선비들이 해마다 부지런히 청한 지 이제 40년이 되어 갑니다. 우리 성명(聖明)께서 이미 선정의 도덕이 종사(從祀)하는 은전(恩典)에 합당함을 환히 아시나, 다만 신중히 하는 것이 지나치기 때문에 유음(兪音)을 아직 내리지 않으시니, 사림(士林)이 답답하게 여기는 것이 오래 갈수록 더욱 절실합니다. 지난번 윤현(尹俔) 등이 전에 청한 것을 거듭 아뢰었는데, 비지(批旨)가 온순(溫諄)하고 수작이 메아리가 울리듯 하여, ‘내가 바야흐로 잠자코 있는 가운데 마음에 깨닫는 바가 있다.’고 하교하시기에 이르셨으므로, 온 나라 안의 선비들이 모두 용동(聳動)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욕례(縟禮)의 거행을 얼마 안 가서 보게 되었으니, 이는 참으로 사문(斯文)이 다행하고 성덕(聖德)이 매우 빛나는 때입니다. 바라건대, 흔쾌하게 명명(明命)을 내리셔서 빨리 성대한 전례(典禮)를 거행하여 사문을 행복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어진이를 높이는 정성이 매우 가상하다."
하였다. 일전에 여섯 도의 유생의 상소에 비답(批荅)한 가운데에 말한 것은 진실로 뜻한 바가 있어서 이제까지 망설이던 것과 매우 달랐다. 이튿날 조겸빈 등이 다시 상소하여 성대한 전례를 빨리 거행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선정의 도덕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그래도 이렇게 망설인 것은 대개 신중히 하려는 데에서 나왔으나, 중외(中外)의 선비들이 합사하여 같은 목소리로 문묘에 배향하기를 청한 것이 수십 년이 되었고 매우 간절하니, 공의(公議)가 있음을 대개 알 수 있다. 온천에 가서 제사하는 날을 기다릴 필요가 없으므로 청한 바를 특별히 윤허한다.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성대한 전례를 빨리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5월 20일을 배향하는 길일(吉日)로 가리고, 또 하루 전에 대성전(大聖殿)에 고유(告由)하고, 본가(本家)에 예관을 보내어 사제(賜祭)하고, 교서(敎書)를 내리게 하고, 또 종사한 이튿날에 팔방에 반교(頒敎)하기를 청하였다. 대개 구제(舊制)에 따른 것인데, 임금이 옳게 여겼다.

 

2월 30일 을묘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길이라는 것은 나그네가 같이 다니는 곳인데, 여러 번 거둥을 겪은 길은 사체가 더욱 중하니, 한 사람이 사사롭게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사(知事) 강현(姜鋧)은 그 선대의 무덤을 온양(溫陽)의 어로(御路) 옆으로 옮겨 정하고, 출입을 금하여 수호하는 곳을 넓게 차지하려는 계책을 삼고는 언덕을 쌓고 도랑을 파고, 평탄한 옛길을 끊고, 산을 파고 골짜기를 막아서 따로 한 가닥 새길을 텄으니, 일이 놀라운 것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파직(罷職)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강현의 일만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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