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59권, 숙종 43년 1717년 3월

싸라리리 2025. 11. 30.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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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병진

온천에 거둥하려는 것을 종묘(宗廟)에 고하였다.

 

어사(御史)로 뽑힌 홍계적(洪啓迪)·김운택(金雲澤)·이명언(李明彦)·조영복(趙榮福)·윤양래(尹陽來) 등을 패초(牌招)하여 각도로 나누어 보냈다.

 

호군(護軍) 이운징(李雲徵)이 죽었다. 임금이 조제(弔祭)·치부(致賻) 등 으레 행할 은전(恩典)을 거행하지 말라고 특별히 명하였다. 그가 기사년083)  의 흉당(凶黨)으로서 죄진 것이 매우 무겁기 때문이었다.

 

3월 2일 정사

김재로(金在魯)를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삼았다.

 

사학(四學)의 유생(儒生) 심봉위(沈鳳威)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좌찬성(左贊成) 권상하(勸尙夏)는 실로 성조(成朝)의 원로(元老)이고 사문(師門)의 적전(嫡傳)입니다. 전하께서 근일에 시비를 이미 정하여 출척(黜陟)을 크게 밝히셨으니, 참으로 권상하를 돈소(敦召)하고 모유(謨猷)를 자문하여 우리 국가의 원기가 되고 우리 사림(士林)의 모범이 되게 하셔야 할 것이데, 승탁(陞擢)한 뒤로 은소(恩召)가 오래 없어서 반드시 불러올 뜻이 없으시니, 치의(緇衣)084)  의 정성에 미진한 데가 있어 지난번에 견복(甄復)하여 발탁하신 것이 한갓 겉치레로 돌아갈 듯합니다. 아아! 권상하가 임하(林下)에서 글을 읽고 덕을 기른 것이 거의 50년인데, 어찌 반드시 공부는 있어도 쓸데가 없어서 마치 먹지 못하는 계포(繫匏)085)  와 같겠습니까? 또 이제는 전하께서 시비를 가릴 즈음에 남김없이 환히 아시고 사정(邪正)을 분변(分辨)하여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을 잘 밝히셨으니, 지금이 바로 군자의 도가 늘어 가고 소인의 도가 줄어 갈 때입니다. 전하께서 비지(批旨)를 분명히 내려 성심(誠心)을 펴 보여 반드시 불러오기로 마음을 가지신다면 권상하가 도리어 무엇 때문에 끝내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권상하가 사는 곳이 온궁(溫宮)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더욱이 부지런히 불러서 뒷 수레에 태워 널리 구제할 방책을 함께 강구하시면 사문이 매우 다행할 것입니다. 또 삼가 듣건대, 선왕(先王)께서 온천에 거둥하셨을 때에는 도내(道內) 선현(先賢)의 서원(書院)과 묘소에 사제(賜祭)하는 일이 있었다 합니다. 이제 전하께서 모든 의문(儀文)에 관계되는 것은 한결같이 옛 규례를 준행하시므로, 이런한 영전(令典) 또한 반드시 먼저 거행하시겠지만, 그 사이에 마땅한 사람이 아닌데 외람되게 제사하는 경우가 있다면, 또한 이때에 시급히 바로잡아서 한 도의 선비의 추향을 정하지 않을 수 없으니, 윤선거(尹宣擧)의 서원이 그것입니다. 대저 윤선거가 한 세대에서 추대받는 것은 그가 능히 스스로 뉘우쳤기 때문이었는데, 그 스스로 뉘우친 것이 가식에서 나왔으니, 강도(江都)의 한낱 부로(俘虜)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기의 잘못을 꾸미려고 참람하게 지존(至尊)을 끌어대고 남몰래 그릇된 사람과 함께 앞장서서 흉악한 말을 기술하였으니, 성조(聖祖)의 한낱 무신(誣臣)에 지나지 않습니다. 스스로 윤휴(尹鑴)와 절교하였다고 하였으나, 윤휴가 글을 지어 평생의 교분(交分)을 서술하기에 이르러 주무(綢繆)한 자취가 남김 없이 드러났으니, 역적 윤휴의 한낱 지기(知己)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의 학문을 상달(上達)한 데로부터 깊은데로 들어간 것이라 하여 소식(蘇軾)의 학문에 견주었으나, 소식은 선(禪)을 배운 자이므로, 윤증(尹拯)이 이른바 입산(入山)한 잘못이 참으로 있다 한 것에 내력이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으니, 이것도 사문의 한 죄인이 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데도 유현(儒賢)으로 대우하여 제사를 지낸다면, 사림의 수치가 되는 것이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윤선거의 증시(贈諡)·사전(祀典)은 다 유현을 대우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신들의 생각으로는 모두 삭제하고 헐어서 징토(懲討)하는 뜻을 보인 후에야 시비가 크게 정해져서 후세의 비난을 아주 끊을 수 있을 것이라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批荅)을 내려서 가납(嘉納)하고, 삭제하고 허는 일은 해조(該曹)에 명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3월 3일 무오

임금이 온양(溫陽)으로 거둥하였다. 사시(巳時)에 대가(大駕)가 창덕궁(昌德宮)을 나가 숭례문(崇禮門)을 거쳐서 서빙고(西氷庫)의 강가에서 주정(晝停)하고, 왕세자가 나룻가까지 따라가서 지송(祗送)한 뒤에 궁으로 돌아갔다. 미시(未時)에 임금이 배를 타니,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신시(申時)에 배에서 내려 가교(駕轎)를 타고 떠나 저녁에 과천(果川)의 행궁(行宮)에서 유숙(留宿)하였다.

 

온천에 거둥하는 것 때문에 경기와 지나는 곳의 명산(名山)·대천(大川)에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배종(陪從)한 백관(百官)으로는 승지(承旨) 3원(員),  【도승지(都承旨)는 약방 부제조(藥房副提調)로서 나아갔으므로 이 가운데에 들어 있지 않다.】  한림(翰林)과 주서(注書) 각각 2원, 내의원 제조(內醫院提調) 3원, 의정부(議政府)의 대신(大臣) 2원, 종친부(宗親府)의 당상(堂上) 5원, 의빈부(儀賓府)의 당상 1원, 의금부(義禁府)의 당상 2원과 낭청(郞廳) 3원, 이조(吏曹)의 당상과 낭청 각각 1원, 호조(戶曹)의 당상 1원과 낭청 2원, 예조(禮曹)의 당상과 낭청 각각 1원, 병조(兵曹)의 당상 2원과, 낭청 4원, 형조(刑曹)의 당상과 낭청 각각 1원, 사헌부(司憲府)의 대신(臺臣) 2원과 감찰(監察) 2원, 사간원(司諫院) 2원, 홍문관(弘文館) 2원, 승문원(承文院) 1원, 통례원(通禮院)의 통례(通禮) 2원과 인의(引義) 2원, 사옹원(司饔院)의 낭청 2원, 상의원(尙衣院)의 낭청 1원, 사복시(司僕寺)의 낭청 2원, 관상감(觀象監)·전의감(典醫監)·혜민서(惠民署)의 관원 각각 1원  【사옹원 이하 여러 관사(官司)의 당상은 다 다른 직책으로 나아갔으므로 낭청만을 썼다.】 이고, 도총부(都摠府)·선전관(宣傳官)·어의(御醫)·내의(內醫)·금루관(禁漏官)·향실 충의(香室忠義)도 모두 배종하였는데, 육조(六曹) 이하는 을사년086)  의 전례보다 원수(員數)를 줄인 것이다. 1품(品)이상은 1원마다 종[奴] 3명과 말[馬] 2필(匹)을, 당상 정3품 이상은 1원마다 종 2명과 말 1필을, 당하 3품 이하는 1원마다 종 1명과 말 1필을 데려가는 것을 허락하였는데, 다 호조에서 날마다 봉료(奉料)를 나누어 주었다.

 

훈련 도감(訓鍊都鑑)·금위영(禁衛營)의 군사들이 행궁(行宮) 밖에 결진(結陣)하여 날이 저문 뒤에 등(燈)을 걸고 인정(人定) 뒤에는 조두(刁斗)087)  하였다. 이날부터 회란(回鑾)하는 날까지 이와 같이 하였다.

 

대가(大駕)가 숙소(宿所)에 있을 때에는 엄고(嚴鼓)088)  를 쓰지 않고 선전관(宣傳官)으로 하여금 나각(螺角)을 불게 하고, 출차(出次)할 때에 엄시각 단자(嚴時刻單子)를 쓰지 않고 군령(軍令)이라고만 칭하였는데, 대개 병조(兵曹)에서 정한 절목(節目)에 따라 비국(備局)에서 청하여 시행한 것이다.

 

대가(大駕)가 과천(果川) 지경에 이르니, 좁은 길에서 관광하는 백성이 매우 많았다. 나졸(邏卒)이 쫓으니, 임금이 다 내 백성이므로 쫓아서는 안된다 하여 금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서울에서는 이날부터 크고 작은 모든 관원이 다 융복(戎服)을 입고 출입하였다. 회란(回鑾)하는 날까지 이렇게 하였다.

 

3월 4일 기미

진시(辰時)에 대가(大駕)가 과천(果川)을 떠나 광주(廣州) 사근천(沙斤川)에서 주정(晝停)하고 저녁에 수원 행궁(水原行宮)에서 유숙하였다.

 

대가가 사근천에 이르렀을 때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윤지완(尹趾完)이 길가에서 지영(祗迎)하니, 정원(政院)에서 아뢰었다.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서종태(徐宗泰)도 길가에서 지영하고, 이어서 행진(行陣) 뒤를 따랐는데, 정원에서 아뢰니, 임금이 말을 주라고 명하였다.

 

유도 대신(留都大臣) 이유(李濡)·수궁 대장(守宮大將) 김주신(金柱臣)·유도 대장(留都大將) 이기하(李基夏)가 궁성(宮城) 안팎의 숙위(宿衛)가 무사함을 계문(啓聞)하고, 수궁 승지(守宮承旨) 허윤(許玧)·홍호인(洪好人)이 궐내(闕內)가 무사함을 치문(馳聞)하고 긴급한 문서를 봉진(封進)하였다. 이날부터 회란(回鑾)하는 날까지 이와 같이 하였다.

 

3월 5일 경신

사시(巳時)에 대가(大駕)가 수원(水原)을 떠나 미시(未時)에 진위 행궁(振威行宮)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종반(宗班)이 문안할 때에는 본디 승지(承旨)가 나아가는 규례가 없는데, 그저께 과천현(果川縣)에서 문안할 때에 승지가 사리에 어두워 나아가 참여하였고, 본현(本縣)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근거할 만한 전례가 없음을 알고 처음에는 자못 지난(持難)하였으나, 종반에서 재촉함에 따라 다시 나가 기다렸으니, 살피지 못한 잘못을 면할 수 없습니다. 해당 승지를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소서."
하니, 임금이 처음에는 따르지 않다가, 승지들이 이 때문에 지레 나가니, 임금이 대계(臺啓)가 멈추기 전에는 승지들이 행공(行公)할 수 없는 형세이나, 후사(喉司)가 구차하고 간략하다 하여 드디어 대계에 따르고, 승지에게 명하여 직임을 보살피게 하였다. 해당 승지는 안중필(安重弼)·이성조(李聖肇)이었다.

 

우의정(右議政) 이이명(李頤命)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의 무덤이 수원(水原) 땅에 있는데, 이제 대가(大駕)가 이 곳을 지나니, 근시(近侍)를 보내어 특별히 유제(諭祭)를 내림이 마땅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선대왕(先大王)께서는 온천에 거둥하실 때마다 지나는 경기 고을과 호서(湖西) 한 도(道)의 나이 80인 자에게 모두 노직(老職)을 내리고 가자(加資)하였는데, 이제 대가가 경기에 있으니, 도신(道臣)에게 명하여 80 이상의 노인을 초록(抄錄)해 내어 아뢰게 하고, 호서는 온궁(溫宮)에 거둥하신 뒤에 본도(本道)로 하여금 초록하여 아뢰게 하는 것 또한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하고, 끝에 말하기를,
"어제 길가에 영부사(領府事) 윤지완(尹趾完)이 와서 맞이하였습니다. 매우 연로한 노인이 스스로 그 정성과 예절을 다하니 우악하게 예우해야 할 것이데, 후사(喉司)에서 미리 고하지 못하였으므로, 이제까지 미치는 바가 없었습니다.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그 집에 뒤좇아 가서 하늘에 응답하고 백성을 구제할 방책을 묻는 것이 마땅합니다. 또 판부사(判府事) 서종태(徐宗泰)가 스스로 허물을 끌어대고, 정적(情跡)이 편안하지 못하여 감히 대신들과 함께 서울에 머물를 수 없고 반열(班列)에 나아가 대가를 호종(扈從)할 수도 없다 하여 우모(羽旄)089)  만 바라보며 뒤따라 온다 합니다. 어제 정원(政院)의 계달(啓達)로 인하여 비록 말을 주라는 명이 있었으나, 면려(勉勵)하여 반드시 대가를 따르게 하여 중도에서 방황하지 않게 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윤허하고, 승지에게 명하여 송시열의 무덤에 가서 제사하게 하였다. 또 사관을 보내어 특교(特敎)를 가지고 윤지완·서종태에게 가서 면유(勉諭)하게 하였으나, 두 신하가 다 사양하여 명에 따르지 않고, 서종태는 역마(驛馬)를 타지 않고 끝내 사기(私騎)로 갔다.

 

3월 6일 신유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진시(辰時)에 대가(大駕)가 진위(振威)를 떠나 직산(稷山) 소사(素沙)에서 주정(晝停)하고, 저녁에 직산(稷山)의 행궁(行宮)에서 유숙하였다.

 

현종(顯宗)이 온양(溫陽)에 거둥하였을 때에 직산에 주필(駐蹕)하여 한 작은 정자(亭子)를 새로 짓고, 영소(靈沼)라고 이름 붙이고 두어 무(畝)쯤 되는 못[池]을 판 다음 내시에게 명하여 연(蓮)씨를 넣게 하였는데, 꽃과 잎이 매우 무성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올라 보고 느낌이 있어 시(詩) 한 장(章)을 지으니, 대가를 따라온 신하들이 다 화답(和答)하였는데, 도신(道臣)이 마침내 어제(御製)를 새겨 정자에 걸었다.

 

경기와 호서(湖西)의 나이 80이상 된 노인에게 모두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이명(李頤命)이 차자(箚子)를 올려 청하였기 때문이다.

 

3월 7일 임술

달이 사성(思星)을 범하였다.

 

진시(辰時)에 대가(大駕)가 직산(稷山)을 떠나 오시(午時)에 천안(天安)의 행궁(行宮)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특교(特敎)를 가지고 가서 좌찬성(左贊成) 권상하(權尙夏)에게 이르게 하기를,
"내가 경(卿)을 돈소(敦召)한 것이 모두 몇 번 되었으나, 나의 정성이 성실하지 못하고 예(禮)가 극진하지 못한 나머지 막연히 조정에 나올 기약이 없으니, 어찌 부끄러움을 금하겠는가? 한 번 온천에 목욕하기로 정하고부터 경의 덕용(德容)을 볼 수 있고 내가 반드시 오게 하려는 마음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여 마음속으로 스스로 기뻐서 손을 꼽아 기다렸다. 이제 내가 여기에 와서 생각이 매우 간절하여 특별히 사관을 보내어 나의 지극한 뜻을 유시하게 하니, 경은 반드시 깊이 헤아려 안심하고 함께 와서 나의 허저(虛佇)090)  하는 바람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3월 8일 계해

진시(辰時)에 대가(大駕)가 천안(天安)을 떠나 오시(午時)에 온천의 행궁(行宮)에 이르렀다.

 

관원을 보내어 온천에 치제(致祭)하였다.

 

간원(諫院)에서 전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어제 대가가 숙소에 이른 뒤 대정(大庭)의 문안하는 반열(班列)에서 창녕군(昌寧君) 장(樟)이 무릎을 세우고 앉아 행동이 태만하였습니다. 승전색(承傳色)이 출입할 때에도 몸을 조금 움직이는 듯이 하고는 전혀 일어나고 엎드리지 않았으니,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장의 일만 따랐다.

 

임금이 충청 감사(忠淸監司) 윤헌주(尹憲柱)와 차원(差員)으로 와서 기다리는 도내의 수령(守令)을 소견(召見)하였다. 특별히 명하여 공조 판서(工曹判書) 조태채(趙泰采)도 같이 들어오게 하였는데, 대개 조태채가 바야흐로 진휼청 당상(賑恤廳堂上)의 직무를 띠었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에게 매우 급한 병이 있어서 이 만부득이한 행차를 하였으나, 민사(民事)를 생각하면 마음이 매우 불안하다."
하고, 또 진정(賑政)과 농사의 형편을 죄다 아뢰라고 명하였다. 윤헌주(尹憲柱)가 말하기를,
"도내의 땅이 없어 굶주리는 백성이 10만 3천여 구(口)나 되는데, 진자(賑資)는 피곡(皮穀) 18만 석(石)과 쌀 1천여 석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으로는 진구(賑救)를 이어 갈 수 없으므로, 뒤에 조목조목 벌여 적어서 장문(狀聞)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농사꾼이 밭에서 힘써 일하며 농사 지어야 또한 풍성한 가을 수확이 있을 것이므로, 굶주림을 진구하는 것을 진실로 늦출 수 없으나, 씨앗을 주는 것도 긴급하니, 유의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여러 가지 백성의 고통을 내가 행궁에 있을 때에 낱낱이 장문하여 변통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윤헌주가 도내 큰 고을의 오래 체납된 군포(軍布)를 적당히 탕감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에 명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임금이 여러 고을의 굶주리는 백성과 죽은 수를 두루 묻고, 또 농사를 권과(勸課)하고 진정(賑政)에 마음을 다하라고 입시(入侍)한 수령들에게 경계하여 이르고, 이어서 모든 폐막(弊瘼)을 도신(道臣)과 상의하여 구획하여 아뢰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또 조태채(趙泰采)에게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여 묻기를,
"지난번 대관(臺官)의 상소로 인하여 하교한 것이 있었는데, 어떻게 조치하였는지 알려고 같이 들어오게 하였다."
하였는데, 조태채가 말하기를,
"경성(京城)의 굶주리는 백성이 5천여 명이나 되고, 이 뒤에 또한 얼마나 되는지 모르는데,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외방(外方)도 알 만합니다. 일전에 진위(振威)의 작문(作門)밖에 모여 온 걸인이 매우 많으므로, 신(臣)이 본현(本縣)의 진미(賑米) 수십 두(斗)를 가져다가 나누어 주었습니다. 을사년091)   선조(先朝)에서 온천에 거둥하셨을 때에 행궁 근처에 모여 온 굶주린 백성에게 죽미(粥米)를 나누어 준 일이 있으므로, 미처 성지(聖旨)를 내리기 전에 온양(溫陽) 인근이 네댓 고을에서 받아들인 대동미(大同米)를 이미 받아 두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교를 받고서 경청(京廳)의 쌀을 바야흐로 배로 청주 별창(淸州別倉)으로 나르는 쌀 1천여 석을 본도에서 가져다 쓰고자 하였으나, 묘당에서 이 염려 때문에 또한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호서 열읍(列邑)의 기근은 어느 곳인들 그렇지 않겠습니까마는, 그 가운데에서 태안(泰安)·보령(保寧)같은 고을이 더욱 참혹하니, 이것은 도신과 상의하여 참작해서 옮겨 주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승지(承旨) 이병상(李秉常)이 말하기를,
"충청 병사(忠淸兵使) 오중주(吳重周)가 지영(祗迎)한 뒤에 그대로 머물러 기다립니다. 반드시 상교(上敎)가 있어야 감히 본영(本營)으로 물러갈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물러가라고 명하였다. 이병상이 또 말하기를,
"근일 호중(湖中)에 학문에 뜻을 두고 있는 선비가 많이 일어나므로, 일전에 옥당(玉堂)에서 차자(箚子)를 올려 찾기를 청하니 거행하라는 명까지 있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일정한 것을 가리키는 분부가 있은 연후에야 거행할 수 있을 것이니, 도신으로 하여금 대신에게 의논해서 천목(薦目)092)  을 정하여 곧 천거하여 아뢰게 함이 마땅합니다. 권상하(權尙夏)가 본도에 살고 있으므로, 학문에 뜻을 둔 선비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니, 앞으로 인접(引接)하실 때에 특별히 하문(下問)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옳게 여겼다. 임금이 또 이병상에게 묻기를,
"지난번 태학생(太學生)들이 선정(先正)의 종사(從祀)를 청한 상소에 대한 비답(批答)에서 이미 온천에 가서 치제(致祭)하려는 뜻을 보였는데, 어찌하여 거행하지 않는가?"
하였는데, 이병상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곧 거행할 것입니다마는, 선조에서 거둥하셨을 때에 선정신(先正臣) 송준길(宋浚吉)의 청에 따라 고(故) 판서(判書) 김정(金淨)과 사절신(死節臣) 조헌(趙憲)·송상현(宋象賢)과 고 참찬(參贊) 송인수(宋麟壽)와 고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의 무덤에 치제하였으니, 지금도 전례에 따라 사제(賜祭)하고 송준길의 무덤에도 치제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마찬가지로 사제하라고 명하였다.

 

3월 9일 갑자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온천에 고제(告祭)할 때에 전사관(典祀官)이 먼저 본군(本郡)에 통지하여 향축(香祝)을 봉안할 곳을 미리 설치하게 하였으나, 본관(本官)이 전혀 거행하지 않았으며, 제물(祭物) 가운데 희생도 여윈 것으로 구차하게 채웠습니다. 이번에 제사하는 일은 정성을 다하고 예(禮)를 경건히 하는 까닭이 어떠한 것인데, 모든 일이 구차하고 간략한 것이 이보다 심할 수 없었으니, 온양 군수(溫陽郡守) 최상항(崔尙恒)을 파직(罷職)하소서."
하니, 임금이 최상항의 일만 따랐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는데, 우의정(右議政) 이이명(李頤命)이 같이 들어가 이튿날 온천에 목욕할 절차를 의논하여 정하였다. 도제조(都提調)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권상유(權尙游)가 아뢴 바에 따라 산 꿩과 산 노루를 전부 감하라는 분부가 있었으므로, 편의한 대로 얻은 것이 혹 있어도 감히 봉진(封進)할 수 없다 합니다. 수령(守令)이 혹 얻은 것이 있으면 감영(監營)에 보내고, 약방(藥房)에 옮겨 보내어 진공(進供)하는 바탕으로 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이명이 말하기를,
"어제 승지(承旨)가 아뢴 바로 인하여 도내의 선현(先賢)과 절의인(節義人)에게 사제(賜祭)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조(先朝)에서 사제한 곳으로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과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 부자(父子)와 문효공(文孝公) 조익(趙翼)의 무덤도 다 도내에 있는데, 치제(致祭)하는 가운데에서 빠졌습니다."
하였는데,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조익은 선조에서 그가 전에 사부(師傅)를 지냈기 때문에 특별히 사제하였고, 그때 이시백(李時白)이 졸서(卒逝)한 지 오래지 않았는데 또한 임사(任使)한 대신(大臣)이라 하여 사제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조에서 두 사람을 치제한 것은 그 때문일 뿐인데 이제는 선조와 차이가 있으니, 김집·이귀 두 신하의 무덤에만 치제하게 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민진후가 또 말하기를,
"권상하(權尙夏)에게 사관(史官)을 보내어 유소(諭召)하셨으므로 반드시 오게 하려는 성의(聖意)를 알 수 있으니, 권상하에게 어찌 한 번 천안(天顔)을 뵈려는 마음이 없겠습니까마는, 다만 일찍이 출세하지 않았던 사람을 숭반(崇班)에 발탁하여 놓았으나, 그 형세가 쉽사리 나올 수 없을 것입니다. 인군(人君)이 어진이를 대우하는 것은 진실로 천위(天位)를 함께 하여 천직(天職)을 닦으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직명(職名)을 나오기 어려운 단서로 여긴다면, 우선 참작해서 선처하여 올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고, 인하여 뒷 수레에 싣고 가서 양연(兩筵)093)  이 출입하게 하면, 그 보람이 사업을 경륜(經綸)하는 것만 못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 뜻도 진실로 그러하였는데, 경(卿)의 말이 좋다. 마땅히 더욱 유의하겠다."
하였다.

 

충청도의 유생(儒生) 정동장(鄭東章) 등이 상소하여 여섯 조목을 아뢰었는데, 첫째 유망(流亡)한 자의 적체된 포흠(逋欠)을 탕감해서 인족(隣族)을 침학(侵虐)하여 징수하는 것을 늦추기를 청한 것이고, 둘째 각 아문(衙門)과 여러 궁가(宮家)에서 절수(折受)094)  한 곳은 각 고을로 하여금 적당히 세를 거두어 곧바로 보내게 하여 차인(差人)이 침탈하는 폐단을 없애기를 청한 것이고, 세째 속오군(束伍軍)에게 급복(給復)095)  하고 면역(免役)하는 규례를 거듭 밝혀서 연습하는 방도를 다하게 하기를 청한 것이고, 네째 군포(軍布)를 거둘 때에 병리(兵吏)가 뇌물을 받는 폐단을 엄금하기를 청한 것이고, 다섯째 도내(道內)의 충신·효자·열부(烈婦)·의인(義人)에게 모두 포숭(褒崇)을 내리기를 청한 것이고, 여섯째 도내의 억울한 옥사(獄事)를 신리(伸理)하기를 청한 것이었다. 소 끝에 또 말하기를,
"이상(李翔)은 일찍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으므로, 여러 조정에서 성의를 다하여 정초(旌招)하기까지 하였으나, 불행히 원한을 갚으려는 사람이 시기를 틈타 구함(構陷)하였으므로, 마침내 옥중에서 병들어 죽게 되었으니, 오히려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이 남에게 보낸 글월 가운데에 이상이 당초에 상소한 것은 못된 일을 미워하고 풍속을 바로잡으려는 데에서 나왔다고까지 하였는데, 이것은 백세(百世)의 정론(正論)이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고(故) 상신(相臣) 유상운(柳尙運)이 일찍이 연중(筵中)에서 재리(財利)를 탐한다는 비방은 아주 원통한 것이라고 대답하였는데, 이것은 진실로 한 도내의 공론입니다.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특별히 신설(伸雪)하도록 명하여 끝내 예우하는 은혜를 베푸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묘당(廟堂)에 명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3월 10일 을축

밤에 유성(流星)이 북두성(北斗星) 위에서 나와 간방(艮方)의 하늘가로 들어갔다.

 

사시(巳時)에 임금이 온정(溫井)에 나아가 두부(頭部)를 1백 바가지 감고, 이어서 각부(脚部)를 씻었다.

 

비국(備局)에서 말하기를,
"행궁(行宮) 담 밖에 각처의 걸인이 요즈음 많이 왕래하므로, 본군(本郡)의 굶주린 백성으로 초록(招錄)된 자 외에도 따로 접제(接濟)하는 방도가 없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런데 금문(禁門)에 아주 가까운 곳은 또한 이들이 모이게 할 수 없으니, 청컨대, 진청(賑廳)의 당상(堂上)으로 하여금 곡식을 나르는 배가 정박하는 곳에 나가서 마른 식량을 나누어 주고, 돌아갈 만한 자에게는 식량을 주어 돌려보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3월 11일 병인

사시(巳時)에 임금이 온정(溫井)에 나아가 두부(頭部)를 2백 50 바가지 감고, 이어서 각부(脚部)를 씻었다.

 

대가(大駕)를 호종(扈從)한 신하들에게 명하여 북탕(北湯)에서 목욕하게 하였다. 이탕은 침전(寢殿)의 북쪽 담 밖에 있는데, 뭇 신하에게 목욕하게 한 것은 선조(先朝)의 구례(舊例)를 따른 것이다.

 

대가(大駕)를 호위(扈衛)한 각 군문(軍門)의 군사를 중일(中日)096)  의 규례에 따라 번을 나누어 시재(試才)하라고 명하였는데, 대개 선조(先朝)에서 온천에 거둥하였을 때의 전례를 원용한 것이다. 여러 날 동안 거행하고서야 끝났는데, 수위(首位)를 차지한 다섯 사람에게는 직부 무과 전시(直赴武科田試)를 내리고, 그 다음은 등급을 나누어 상주었다.

 

좌참찬(左參贊) 권상하(權尙夏)가 임금이 온천에 거둥하였다는 말을 듣고 오다가 괴산(槐山)에 이르러 병 때문에 지체하였는데, 사관(史官)이 이미 별유(別諭)를 전하고 돌아와 그 정상을 아뢰니, 임금이 다시 보내어 이르기를,
"경은 대대로 벼슬한 신하로서 본디 과연 세상을 잊은 자가 아니니, 휴척(休戚)을 같이하는 의리에 있어서 차마 나를 버리고 돌아보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더구나 내가 이 도내에 왔으니, 이것은 참으로 얻기 어려운 기회인데, 끝내 서로 만날 수 없다면, 나의 결연(缺然)함이 또한 어떠하겠는가? 경이 본직(本職)에 대하여 한결같이 사양하는데, 이번에 나오기 어려운 것이 또한 혹시라도 이로 말미암는다면, 국가에서 유현(儒賢)을 대우하는 것은 직질(職秩)이 있고 없는 데에 관계되지 않으니, 어찌 윤허하지 않겠는가? 경은 모름지기 이 뜻을 본받아 포의(布衣)로 입대(入對)하여 내가 밤낮으로 허저(虛佇)하는 바람을 저버리지 말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함께 오라고 명하였다.

 

3월 12일 정묘

진휼청 당상(賑恤廳堂上)이 비국(備局)의 결정에 따라 신창현(新昌縣)의 배가 정박하는 곳에 나가 굶주린 백성 1천 5백여 명을 불러모아 장약(壯弱)을 구별하여 마른 양식을 주고, 그 가운데 가장 심한 자에게는 죽을 만들어 먹이고, 타일러서 각각 본읍(本邑)으로 돌아가게 하고는 돌아와 그 정상을 아뢰었다.

 

승지(承旨)를 보내어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의 무덤에 유제(諭祭)하고, 예조(禮曹)의 낭관(郞官)을 보내어 이순신(李舜臣)·송인수(宋麟壽)·김정(金淨)·송상현(宋象賢)·이귀(李貴)의 무덤에 제사하게 하였다.

 

간원(諫院)에서 전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충주 영장(忠州營將) 정선강(鄭善綱)은 도둑을 다스리는 정사가 매우 소략하고, 뇌물을 받는 문을 크게 열어 놓아 청탁이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있으며, 공궤(供饋)에 쓸 것을 가전(價錢)으로 갈음하여 받고 있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3월 13일 무진

간원(諫院)에서 전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니, 임금이 정선강(鄭善綱)의 일만 따랐다.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각 군문(軍門)의 군사가 다 땔나무를 벌채하여 스스로 대게 한 것은 대개 조금이라도 민폐를 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듣건대, 각영(各營)의 군사가 땔나무를 벌채할 즈음에 무덤에 기르는 소나무·개오동나무이건 마을에 심은 뽕나무·밤나무이건 묻지 않고 모두 다 베어서 거의 남은 것이 없으며, 심하면 정원(庭園)에 불쑥 들어가 울타리를 헐기까지 한다고 하니, 당초에 폐단을 줄이려던 뜻이 도리어 백성을 해치게 되었습니다. 엄히 금단하되, 범한자는 중률(重律)로, 다스리고, 주장(主將)도 논벌(論罰)하소서."
하니, 임금이 끝의 일만 따랐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는데,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건명(李健命)이 청대(請對)하여 함께 들어갔다. 진후(賑候)를 마치자, 도제조(都提調)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이상(李翔)이 상소하여 음옥(淫獄)을 논한 것은 진실로 마땅하지 못하였으나, 이것은 산야(山野)의 오활(迂闊)한 사람이 세상의 물정을 모르고 그 일이 윤상(倫常)에 관계된다 하여 개연(慨然)한 마음이 없지 않아서 사직하는 소(疏)를 올리며 함께 논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마는, 도리어 원수처럼 미워하는 무리에게 문치(文致)097)   당하여 마침내 옥중에서 병들어 죽기에 이르렀고, 시신(屍身)을 도시(都市)에 드러내고 두 아들과 한 종[奴]과 문생(門生) 한 사람이 항양(桁楊)098)  아래에서 죽었으니, 이처럼 참혹한 화를 입은 것은 고금에 드문 것입니다. 저 구허날무(構虛揑無)한 자는, ‘이상이 유두성(柳斗星)의 재산에 욕심을 냈다.’하나, 이것이 어찌 만에 하나라도 근사(近似)한 말이겠습니까? 갑술년099)   개기(改紀)하던 처음에 위에서 연중(筵中)에서 하문하시자, 유상운(柳尙運)이 대답하기를, ‘유두성은 이상에게 이성(異姓) 육촌 형제의 아들이 되고, 또 친형제가 많아서 죽더라도 그 재산이 어찌 이상에게 돌아가겠습니까?’ 하였습니다. 대개 유상운은 이상에 대하여 본디 사사롭게 비호할 뜻이 없었으나 그 말이 이러하였으니, 재산을 탐하였다는 말은 저절로 허망한 것이 되었습니다. 이제 온천에 거둥하신 때를 당하였고, 또 옥사(獄事)를 신리(伸理)하는 일이 있는데, 도내의 억울한 일로는 이보다 더한 것이 없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신하들로 하여금 소견을 아뢰게 하였다.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부제조(副提調) 이관명(李觀命)도 다 그 억울함을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일찍이 전에도 이상을 위하여 신변(伸辨)한 자가 한 둘이 아니었는데, 유생의 상소가 마침 본도에 거둥하여 와 있을 때에 이르렀으니, 지극히 억울한 것이 아니면 이와 같지는 않을 듯하다. 유상운도 이상을 사사롭게 비호할 사람이 아니고, 또 이상이 전에 여러 번 입시(入侍)하였는데, 그 사람됨을 보면 반드시 이런 일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도내의 억울한 자를 소석(疏釋)하는 날을 당하여 이미 그 억을함을 알았으면 신변하는 일은 지난(持難)할 필요가 없을 것이니, 특별히 복관(復官)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김창집이 또 말하기를,
"지난해 봄에 우의정(右議政) 이이명(李頤命)이 통청(通淸)100)  한 선비를 뽑아서 찬선(贊善)·진선(進善)·사업(司業) 등의 벼슬에 품계(品階)에 따라 차출하여 제수하고, 경외(京外)의 유생 가운데 학문에 뜻을 둔 사람을 찾아서 벼슬을 제수할 것을 아뢰어 윤허받았으나, 그 뒤에 이진유(李眞儒)가 공척(攻斥)하니, 끝내 거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말하기를, ‘학문이 있는 자를 조정(朝廷)에 올려 대각(臺閣)의 반열(班列)에 두면 모든 백성이 흥기(興起)하고 사방이 풍동(風動)101)  할 것이다.’ 하였는데, 어찌 이진유의 그릇된 말 때문에 끝내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통청한 선비를 뽑는 것은 전조(銓曹)102)  에서 한결같이 공의(公議)에 따라 찬선 등의 벼슬에 품계대로 차출하여 제수할 수 있을 것이고, 학문에 뜻을 둔 사람에 이르러서는, 본도(本道)는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널리 더 찾게 하고, 경중(京中)과 다른 도는 육조(六曹)와 삼사(三司)의 장관(長官)으로 하여금 각각 한 두 사람을 천거하게 하여 묘당(廟堂)에서 뽑아 아뢰게 한다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천주(薦主)가 정선(精選)한 연후에야 천거받은 사람이 반드시 정밀(精密)할 것이니, 천주가 먼저 정밀하게 뽑아서 아뢰게 하라."
하였다. 민진후가 또 말하기를,
"선정신 김장생(金長生)은 이미 종사(從祀)하라는 명이 있었으므로, 으레 본가(本家)에서 치제(致祭)하는 일이 있을 것이니, 봉사손(奉祀孫)에게 특별히 벼슬을 제수하여 조복(朝服)을 입고 제사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벼슬을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이건명이 말하기를,
"도감군(都監軍)과 금군(禁軍)의 별장(別將)에 속한 자는 이미 시재(試才)하는 가운데에 들었습니다. 신(臣)이 거느린 군관(軍官)·별무사(別武士)·순령수(巡令手)·제색 표하(諸色標下)는 항오(行伍)가 없더라도 신이 이미 거느려 배종(陪從)하여 왔고, 포도 군관(捕盜軍官)으로 내려온 자는 행진(行陳) 가운데에 들지 않았더라도 이미 금군이니, 또한 마찬가지로 시재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윤허하였다.

 

좌찬성(左贊成) 권상하(權尙夏)가 괴산(槐山)에서 상소하여 병 때문에 소명(召命)을 사양한다고 아뢰니, 임금이 답하기를,
"경(卿)이 소 가운데에서 본직(本職)을 힘껏 사양하였으니, 경이 나오기 어려워하는 것은 이 때문인 듯하다. 내가 바야흐로 반드시 오게 하려고 마음먹었으므로 본직에 대하여는 애써 따라서 경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였으니, 경은 이 지극한 뜻을 몸받아 행재소(行在所)로 나오라."
하였다.

 

3월 14일 기사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어제 대청(臺廳)에서 비답(批答)을 들을 때에 주서(注書)가 초책(草冊)에 성비(聖批)를 잘못 썼으므로, 승지(承旨)가 전하려다가 도로 정지하였습니다. 사관(史官)이 일깨워서 밤이 늦어서야 전하였으니, 해당 주서를 추고(推考)하소서."
하니, 임금이 추고하는 일만 따랐다.

 

간원(諫院)에서 전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이인 찰방(利仁察訪) 성진령(成震齡)은 죄를 범한 겸종(傔從)을 비호하여 간원의 하인을 묶고 곤장으로 위협하였으니,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성진령의 일만 따랐다.

 

충청도의 유생(儒生) 이덕함(李德涵)이 상소하여 충정공(忠貞公) 윤집(尹集)을 위해 사우(祠宇)를 세우기를 청하고, 또 말하기를,
"윤집과 홍익한(洪翼漢)의 무덤이 다 도내에 있으니, 사제(賜祭)를 명하여 절의를 숭상하고 어진이를 숭상하는 덕을 넓히소서."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려 사우를 세우는 것을 윤허하고, 인하여 두 신하의 무덤을 치제(致祭)하라고 명하였다.

 

3월 16일 신미

밤에 달무리가 화성(火星)을 둘렀다.

 

사시(巳時)에 임금이 온정(溫井)에 나아가 두부(頭部)를 3백 50바가지[瓢] 감고, 몸을 3백 주(籌) 씻었다.

 

간원(諫院)에서 전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액정(掖庭)의 예속(隷屬)과 상사(上司)의 하인이 각 고을의 의막(依幕)에 흩어져 나가 낯을 바꾸어 번갈아 요구하며 관원을 침범하여 능멸하고 하리(下吏)를 차고 밟기까지 하였으니, 청컨대 각별히 엄중하게 신칙(申飭)하고, 드러나는 자가 있으면, 유사(攸司)로 하여금 과죄(科罪)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말단의 일만 따랐다.

 

2경(二更)에 전의현(全義縣)의 가가(假家)에서 불이 나서 석성(石城)·은진(恩津)·덕산(德山) 등 여러 곳의 가가에 번져서 자량(資粮)·기용(器用)·의복(衣服)·마초(馬草)·시탄(柴炭)이 모두 타고, 덕산의 병부(兵符)도 소실(燒失)되었다. 병조(兵曹)에서 아뢰어 금화 차사원(禁火差使員)은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불낸 사람은 본도(本道)로 하여금 과죄(科罪)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이어서 하교(下敎)하여 담배[南草]를 엄중히 금하게 하였다.

 

3월 17일 임신

오시(午時)에 임금이 온정(溫井)에 나아가 두부(頭部)를 4백 바가지 감고, 하부(下部)를 3백 주(籌) 씻었다.

 

전라도 무주부(茂朱府) 덕유산(德裕山)에 이날 눈이 내려 한 치쯤이나 쌓였다.

 

김상직(金相稷)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조태구(趙泰耉)를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조관빈(趙觀彬)을 부교리(副校理)로, 김유경(金有慶)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전라 감사(全羅監司) 김보택(金普澤)이 장계(狀啓)하여 도내의 곡물을 옮겨 보낼 수 없는 형편을 말하고 제주(濟州)에 2천 석을 옮기는 것을 정지하기를 청하였는데, 비국(備局)에서 복주(覆奏)하기를,
"이제 와서 도로 정지함으로써 해외(海外)에서 밤낮으로 희망하는 것을 끊을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그 뒤에 김보택이 또 치계(馳啓)하여 힘껏 다투니, 드디어 전의 명을 거두었다. 이 뒤에 김보택이 또 장계하여 해마다 7,8월에 거느린 군관(軍官)을 가려서 제주에 보내어 세 고을의 수령(守令)과 농사 형편을 답험(踏驗)해서 풍흉(豊凶)을 상세히 알아본 다음 곡식을 얼마나 보낼 것인지 미리 작정하기를 청하였는데, 비국에서 복주하니, 윤허하였다.

 

강원 감사(江原監司) 이만견(李晩堅)이 치계(致啓)하여 올해에 울릉도(鬱陵島)를 수토(搜討)하는 일을 정지하기를 청하였는데, 비국(備局)에서 복주(覆奏)하기를,
"근년에 수토하는 것은 빈 섬을 가서 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 이런 흉년에 민폐를 많이 끼칠 수는 없으니, 우선 정지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3월 18일 계유

오시(午時)에 임금이 온정(溫井)에 나아가 두부(頭部)를 5백 바가지 감고, 배꼽 아래를 2각(二刻) 동안 담갔다.

 

사은사(謝恩使) 겸동지사(兼冬至使) 일행이 연경(燕京)에서 돌아와 압록강(鴨綠江)을 건넜는데, 평안 감사(平安監司)가 계문(啓聞)하였다.

 

3월 19일 갑술

곤방(坤方)에 불빛 같은 운기(雲氣)가 있었다.

 

사시(巳時)에 임금이 온정(溫井)에 나아가 두부(頭部)를 5백 바가지 감고, 배꼽 아래를 2각(二刻)동안 담갔다.

 

3월 20일 을해

오시(午時)에 임금이 온정(溫井)에 나아가 두부(頭部)를 5백 바가지 감고, 배꼽 아래를 2각(二刻)동안 담갔다.

 

사간(司諫) 이정익(李禎翊)이 혼자서 하(河)103)  의 일과 유점(楡店)의 일 두 가지를 정계(停啓)하였다 하여 동료 대간(臺諫)에게 배척당하자, 인피(引避)하고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렸다. 대개 두 가지 계(啓)는 거듭 발론(發論)한 것인데, 이정익이 정지하려고 글을 보내어 정언(正言) 조상경(趙尙絅)에게 물었더니, 조상경은 뜻이 같지 않아서 환도(還都)한 뒤에 다시 의논하기를 요구하였으나, 이정익이 갑자기 정지하였다. 조상경이 동료에게 경시당하여 말이 쓰이지 않았다 하여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니, 이정익이 인피하였는데, 처치하여 이정익을 체차(遞差)시켰다.

 

3월 21일 병자

오시(午時)에 임금이 온정(溫井)에 나아가 두부(頭部)를 5백 바가지 감고, 배꼽 아래를 2각(二刻)동안 담갔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는데, 우의정(右議政) 이이명(梨頤命)이 함께 입시(入侍)하였다. 진후(診候)를 마치자, 도제조(都提調)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날마다 비가 내리는데 군사들이 한데에서 지내며 그대로 맞고 있으므로, 병을 앓는 자가 많이 있습니다. 호군(犒軍)104)  은 서울로 돌아간 뒤에 해야 하겠으나, 위로하여 기쁘게 하는 일이 없어서는 안되겠으므로, 병판(兵判) 이건명(李健命)과 상의하였더니, 한때 군사에게 먹이는 비용은 장만할 수 있다 하니, 각 해사(該司)에 분부하여 장만하여 나누어 공궤(供饋)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먼저 소고기와 술을 나누어 먹이라고 명하였다. 이이명이 말하기를,
"때때로 중사(中使)나 병판을 보내어 군사들을 위문하는 것도 한 가지 위로하여 기쁘게 하는 방도입니다."
하니, 임금이 병판에게 명하여 먼저 가서 위문하라고 명하였다. 이이명이 말하기를,
"사신(使臣)의 선래 장계(先來狀啓)를 보건대, 저들도 무사하지 못합니다, 서적(西賊)이 침범하여 어지럽히므로 군사를 징발하여 정토(征討)해야 하고, 해적(海賊)의 여얼(餘孽)이 모반하여 해도(海島)에 웅거해 있으므로 조선도 해방(海防)을 엄히 경계해야 한다는 말까지 있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이런 일에 처음 소문이 있을 때에는 장차 설시(設施)하는 것이 있는 것처럼 하다가, 오래되면 점점 해이해집니다. 경인년105)  에 구획(區劃)한 군보(軍保) 및 아전과 관노(官奴)로 대오(隊伍)를 편성했던 일 또한 모두 폐기하였다 하니, 이제 각 고을에 신칙(申飭)하여 폐기하는 데 이르지 않게 해야 마땅하겠습니다. 또 평안 병사(平安兵使) 이삼(李森)이 장계(狀啓)하기를, ‘친기위(親騎衛)에는 시재(試才)하여 급제(及第)를 내린 자가 있기 때문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사람이 많으니 더 둘 수 있겠습니다.’ 하였으니, 또한 5백 명까지 더 두도록 허가함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곧바로 그 수를 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도의 감사(監司)와 병사(兵使)에게 분부하여 헤아려 아뢰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이이명이 또 말하기를,
"경기와 호서의 옥수(獄囚)에 대해서는 묘당(廟堂)과 삼사(三司)로 하여금 모여서 의논하라는 하교가 있었으니, 일찍이 전에 온궁(溫宮)에서 소결(疏決)할 때에는 감사가 같이 참여한 규례가 있었으니, 경기 감사는 멀리 있어서 같이 참여할 수 없더라도 충청 감사는 같이 참여하여 회의하게 하는 것이 사의(事宜)에 적합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민진후가 또 말하기를,
"찬선(贊善) 권상하(權尙夏)가 이제 바야흐로 오는 중이니, 예대(禮待)하는 도리로서는 말을 주는 은전(恩典)이 있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을 주도록 분부하라고 명하였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건명(李健命)이 각영(各營)의 군사가 결진(結陣)한 곳을 순심(巡審)하며 임금의 뜻을 선포하여 위문하고, 돌아와 아뢰어 마초(馬草)와 공석(空石)106)  을 더 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전라도 태인현(泰仁縣)의 인가 1백 6호(戶)가 한꺼번에 타 버리고 죽은 자가 3명이었는데, 도신(道臣)이 계문(啓聞)하니, 임금이 각별히 휼전(恤典)을 거행하게 하였다.

 

3월 22일 정축

미시(未時)에 임금이 온정(溫井)에 나아가 두부(頭部)를 2백 바가지 감고, 다리 아래를 1각(一刻)동안 담갔다.

 

훈국(訓局)107)  ·금영(禁營)108)  의 대가(大駕)를 호종(扈從)한 군사 중에서 전후에 병들어 죽은 자가 7명이나 되는데, 임금이 고마(雇馬)로 주검을 나르고 물건을 내려서 매장하라고 명하였다.

 

어유귀(魚有龜)를 사간(司諫)으로 삼았다.

 

경상도 각 고을에 백성으로서 염병을 앓는 자가 2천 2백 79명이고 죽은 자가 2백 40여 명인데, 도신(道臣)이 계문(啓聞)하였다.

 

3월 23일 무인

임금이 목욕을 정지하고 환도(還都)하겠다고 하교하고, 인하여 기일을 25일로 정하라고 명하였다. 대개 임금의 모든 환후가 거둥한 뒤로 더하지는 않았으나, 목욕한 지 이미 오래 되었어도 안질(眼疾)에 끝내 변동이 없었고, 이날부터는 자못 괴롭고 어지러운 기가 있기 때문이었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진후(診候)를 마치자, 도제조(都提調)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25일은 길일(吉日)이 아니고, 또 태복시(太僕寺)와 각역(各驛)의 말을 이미 돌려보냈으므로, 시기에 미치기 어려운 형세이니, 기일을 물려 정하소서."
하니, 임금이 27일로 물려 정하라고 명하였다. 김창집이 또 말하기를,
"옥수(獄囚)의 소결(疏決)은 대가(大駕)가 온궁(溫宮)에 있을 때에 거행해야 하겠으나, 이제는 환도하는 날짜가 이미 임박하였으니, 회란(回鑾)한 뒤에 거행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어서 중관(中官)에게 명하여 예조(禮曹)에서 회란 때의 보사제(報謝祭)에 관하여 품정(稟定)한 초기(草記)를 내어 보이게 하고 마땅한지를 물었는데,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목욕하여 효험을 얻었으면 진실로 사례가 있어야 마땅하겠지만, 이번에는 보사하는 의리가 없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보사제를 거행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도승지(都承旨) 이관명(李觀命)이 말하기를,
"굶주린 백성이 지치고 여위어서 본토로 돌아가지 못하는 자가 많은데, 고역(雇役)의 값을 받아서 생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회란한 뒤에는 이들이 있을 곳을 잃고 구덩이를 메워 죽을 걱정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니, 진청(賑廳)이 당상(堂上)으로 하여금 접제(接濟)할 방책을 강구하여 정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하였는데, 민진후가 말하기를,
"듣건대 진청에서 날라 온 쌀이 아직 남은 것이 있다 하는데, 진청의 당상은 이제 대가를 따라 환도할 것이니, 본도의 감사와 상의하여 남은 쌀을 옮겨 보내어 구활(救活)하도록 명하시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진청의 당상은 대가를 따라가야 할 것이니, 본도의 감사로 하여금 특별히 구제하게 하라."
하였다.

 

신시(申時)에 임금이 한기(寒氣)가 갑자기 급하고 다리가 저린 것이 특히 심하고 가슴속이 막히고 어지러운 기도 있어서 신음하는 소리가 문밖까지 들렸다. 약방(藥房)의 세 제조(提調)가 황급히 입진(入診)하고 자금단(資金丹) 두 알을 달여서 바치니, 한참 만에 먹은 것을 토해 내고 증후가 조금 더하였다. 신하들이 물러가고 나서 임금이 어영 대장(御營大將) 김석연(金錫衍)  【임금의 외삼촌이다.】 을 불러 보고, 돌아갈 생각이 매우 바쁘다고 말하고 옥체(玉體)를 진찰하고 물러가게 하였다. 4경(四更) 이후에야 비로소 자못 편안해졌다.

 

3월 25일 경진

찬선(贊善) 권상하(權尙夏)가 어제 저녁에 비로소 행궁(行宮)밖에 이르렀는데, 이날 사관(史官)이 아뢰었다. 권상하가 또 상소하기를,
"외람되게 두 벼슬을 아직 차지하고 있으니, 나아가기 어려운 단서가 전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명하여 두 벼슬을 모두 해면하고, 곧 들어오게 하였다. 권상하가 드디어 조정에 나아가니, 임금이 명하여 인견(引見)하였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니, 우의정(右議政) 이이명(李頤命)이 함께 입시(入侍)하였다. 진후(診候)를 마치자, 도제조(都提調)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전(前) 찬선(贊善) 권상하(權尙夏)를 인견하신다는 명이 있었는데, 신들이 이제 바야흐로 입시(入侍)하여 있으니, 같이 들어오게 하시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주서(注書)에게 명하여 나가서 인도하여 들어오게 하였다. 권상하가 나아가 엎드리니, 임금이 유시(諭示)하기를,
"경(卿)은 산림(山林)에서 덕을 닦아 일찍부터 유림(儒林)의 중망(重望)을 받으므로, 반드시 오게 하여 아침 저녁으로 가르침을 받으려는 뜻을 조금도 늦춘 적이 없었으나, 정성과 예우가 천박하여 멀리하려는 마음을 돌리지 못하여 늘 결연(缺然)하였다. 한 번 온천에 거둥하기를 정한 뒤부터 경이 사는 곳이 멀지 않음을 알고 한 번 보려는 마음이 속에 더욱 간절하였는데, 경이 상소하여 직명 때문에 사양하였으므로, 경을 오게 하기에 급한 나머지 마지못하여 모두 체임(遞任)하도록 윤허하였으니, 매우 결연(缺然)하다."
하였다. 권상하가 말하기를,
"신이 보잘것 없는 사람으로서 은혜를 융숭하게 받았으므로 몸이 문드러지고 뼈가 부서지더라도 갚을 수 없습니다마는, 직명을 생각하면 아주 근사(近似)하지 못하므로, 끝내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성상께서 깊이 헤아려 직명을 체임하도록 윤허하였으니, 신이 참으로 감격하여 삼가 이렇게 왔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돈소(敦召)한 뜻은 본디 행궁(行宮)에서 한 번 보고 말려는 것이 아니라, 환궁(還宮)할 때에 함께 가려는 것이었다. 지금 재이(災異)가 거듭되고 기근이 눈에 가득하니, 함께 간다면 도움이 어찌 적겠는가?"
하였다. 권상하가 말하기를,
"신은 나이가 80에 가깝고 깊이 병들어 진실로 거의 죽게 된 형편이므로, 길에서 쓰러지면 신에게는 수치가 되고 국가에 누를 끼치는 것도 적지 않을 것이니, 결코 대가를 따라갈 희망이 없습니다."
하고, 권상하가 이어서 천안(天顔)을 우러러보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이명이 말하기를,
"30년 동안 예우하여 불러 이제야 비로소 여기에 왔으니, 생각하는 바를 아뢰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드디어 권상하에게 묻기를,
"재이가 거듭 이르러 기근이 눈에 가득하니, 장차 무슨 방책으로 구제해야 하겠는가?"
하자, 권상하가 말하기를,
"신은 본디 혼모(昏耄)하여 아는 바가 없습니다마는, 천하의 온갖 일은 하나도 인주(人主)의 한 마음에 근본하지 않는 것이 없고, 마음을 닦는 방도는 성의(誠意)·정심(正心)이 가장 긴요한 것이라 합니다. 예전에 효종 대왕(孝宗大王)께서 늘 경연(經筵)에 나오셔서 매번 성의·정심의 학문을 강구하셨으니, 이것은 전하의 가법(家法)입니다. 주자(朱子)가 별세하기 사흘 전에 문인(門人)에게 말하기를, ‘천자가 만물을 생육하는 방법과 성인이 만사에 응하는 방법은 ‘직(直)’자 하나일 뿐이다.’ 하였고, 신의 스승인 송시열(宋時烈)도 일찍이 이것을 문인에게 가르쳤는데, 대개 ‘직’자의 뜻은 포함하는 것이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사람이 생리(生理)는 곧다.’ 하였고,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곧음으로 길러서 해치는 것이 없다.’ 하였는데, 《대학(大學)》의 성의·정심과 《중용(中庸)》의 성일(誠一)이 다 이 뜻입니다. 천고(千古)의 성인이 심법(心法)을 서로 전한 것도 이 ‘직’자에서 벗어나지 않는데, 성조(聖祖)께서 이미 위에서 발휘하셨고, 신의 스승도 일찍이 아래에서 계옥(啓沃)하였으니, 지금 전하의 도리에 있어서는 이 의리를 천명(闡明)하셔야 할 뿐입니다. 신에게 어찌 다른 말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것이 다 격언(格言)·지론(至論)이다. 내가 불민하기는 하나 각별히 지키며 잊지 않겠다."
하였다. 권상하가 또 말하기를,
"성인의 공은 본디 《춘추(春秋)》보다 큰 것이 없고, 《춘추》의 의리는 또 존왕(尊王)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진실로 이 의리가 없으면,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여 짐승의 지경에 들어갈 것입니다. 지금 천하의 풍속이 더러운데, 우리 동방만이 예의를 잃지 않은 것은 효종(孝宗)의 공(功)이 아닌 바가 없습니다. 효종께서는 임어(臨御)하신 10년 동안 하루도 이 의리를 잊으신 적이 없고, 신의 스승은 평생 동안 이 의리를 지켜 반드시 몸을 바치려 하였으므로, 임금과 신하가 덕을 같이한 것이 이제까지도 사람들의 이목을 비추니, 전하께서도 반드시 효종의 마음을 근본삼고 이것을 첫째 의리로 삼으셔야 할 것입니다. 지금 세도(世道)가 날로 떨어져 원수를 갚아 원한을 씻는 것은 진실로 갑자기 시행하기 어려우나, 전하께서 과연 효종의 마음을 추모하여 늘 잊지 않으신다면, 계술(繼述)하는 효성은 이보다 더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위무공(衛武公)은 나이 90에도 오히려 억계(抑戒)109)  를 지어서 스스로 경계하였습니다. 이제 전하께서도 춘추가 높으시기는 하나, 무공에 비하면 오히려 차이가 있으니, 큰 뜻을 분발(奮發)하셔서 그치지 않고 힘쓰신다면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며, 무슨 공인들 이루지 못하시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춘추》의 의리는 늘 유의하고 있으나, 이뢴 것이 더욱 절실하고, 위무공의 비유에 이르러서는 더욱 감탄스러우니, 스스로 힘쓰겠다."
하였다. 권상하가 이어서 성후(聖候)가 위급한지 덜한지를 묻고 이어서 물러가겠다고 청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세도가 불행하여 화(禍)가 문하(門下)에서 일어났으나, 내가 이미 통촉하여 시비가 크게 정해졌으니, 이 뒤로는 혹 선비의 추향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수 있을 것이다."
하니, 권상하가 말하기를,
"성덕(聖德)이 광명(光明)하여 시비를 환히 가리셨으니, 사림(士林)의 행복이 어찌 이보다 큰 것이 있겠습니까? 신이 시골에서 성교(聖敎)를 들을 때마다 저도 모르게 느껴 울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어서 명하여 앞으로 나오게 하였는데, 권상하가 나아가 상(床) 아래에 엎드리니, 임금이 손을 잡고 한참 동안 자세히 보고서 말하기를,
"끝내 얼굴을 알아볼 수 없으니, 참으로 답답하다. 이번에 머무르기를 바라는 것은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으니, 멀리 하려는 마음을 빨리 돌려서 함께 돌아가기를 바랄 뿐이다."
하자, 권상하가 물러가서 글로 아뢰겠다고 청하였다. 이이명이 말하기를,
"권상하가 물러간 뒤에는 반드시 다시 사면(辭免)할 것이니, 참으로 경례(敬禮)를 다시 다하여 반드시 함께 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내 뜻도 바로 그러하다."
하였다.

 

홍문관(弘文館)에서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 전 찬선(贊善) 권상하(權尙夏)에 대하여 존신(尊信)하시는 것이 끝까지 변하지 않아서, 행전(行殿)에서 윤음(綸音)을 내려 반드시 오게 하고야 마셨고, 전석(前席)에서 은총으로 인접(引接)하여 광명(光明)한 덕에 부합하였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명철(明哲)하셔서 이미 그 높은 조예와 큰 온포(蘊抱)를 살피셨으니, 자나깨나 잊지 않던 생각을 푸시고, 힘써 돕는 아름다움을 바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바로 비운(否運)을 돌이켜 태운(泰運)으로 만들고 위태함을 돌려서 편안함을 가져올 큰 기회이니, 조정에서 기뻐하고 경하하는 것과 사림이 기뻐하여 용동(聳動)하는 것이 엄청할 뿐만이 아닙니다. 다만 듣건대, 유현(儒賢)이 연대(筵對)하였을 때에 오히려 곧고 굳은 절조를 지켜 겸손하여 물러갈 뜻을 깊이 품는다 하니, 비록 전하께서 깊이 모열(慕悅)하여 부지런히 위로하여 면려(勉勵)하시더라도 오히려 그 뜻을 만류하여 그 책무를 부탁할 수 없을 것이고, 오직 목마르듯 한 염원이라야 마침 내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도리어 어찌 신하의 한두 마디 말을 기다리겠습니까마는, 지금 거둥하실 준비를 갖추었으니, 뒷 수레를 멈추기 어려워서 멀리하는 마음을 돌이키지 않아도 은사(隱士)를 막기 쉬울 것입니다. 이때에 더욱 정성과 예우를 더하여 수레에 실어서 데려가지 못하면, 전하께서 평일에 사모하여 불러서 오게 하려던 것이 마침내 허문(虛文)에 돌아가게 됨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전라도 각 고을의 백성으로서 염병을 앓고 있는 자가 5백 명이고 죽은 자가 1백 30명인데, 도신(道臣)이 계문(啓聞)하였다.

 

3월 26일 신사

민진원(閔鎭遠)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김수(金洙)를 전라도 병마 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로, 이정익(李禎翊)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전 찬선(贊善) 권상하(權尙夏)가 아들의 병이 위중하다는 말을 듣고 상소하고 앞질러 돌아갔는데, 그 소에 대략 이르기를,
"신(臣)이 어제 연석(筵席)에 나아가 청광(淸光)을 가까이하여 다행히 평생의 소원을 이루었는데, 입은 은수(恩數)가 천고에 아주 드문 것이었으니, 신은 이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습니다. 죽어서 은혜를 갚더라도 하늘처럼 높고 땅처럼 두터운 은혜를 갚을 수 없을 것입니다. 늙어 꼬부라져서 거의 죽게 되었으므로, 속차(屬車)뒤에서 배종(陪從)하지는 못하나, 진실로 연하(輦下)에 체류하였다가 길가에서 우모(羽旄)를 지송(祗送)하여 견마(犬馬)의 정성을 조금이나마 펴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가인(家人)이 달려와서 신의 아들의 병이 위중하여 죽고 사는 것이 순간에 달려 있는데, 꿈속에서 헛소리하는 것이 오히려 부자가 서로 영결하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고 합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사정(私情)을 참을 수 없어서 이에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슬피 하소연하고 일찍 돌아가니, 큰 은혜를 저버린 죄는 만 번 죽어도 갚기 어렵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덕용(德容)을 친히 보고서 매우 기쁘고 위안이 되어 병이 몸에서 떠나는 듯하였다. 어진이를 얻어 나라를 함께 다스리는 것이 국가에서 먼저 힘써야 하는 일임은 태평한 때에도 오히려 그러한데, 더구나 이처럼 어려운 때이겠는가? 정성을 다하여 누누이 돈독하게 권면하였을 뿐이 아닌데도 마치 몸을 더럽힐까 떠나려는 뜻을 돌리지 못하였으니, 매우 결연(缺然)하여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바야흐로 거듭 진심을 펴 보여서 멀리 떠나려는 마음을 반드시 돌리려 하였는데, 지금 경의 소를 보니 이 어찌하여 정지(情志)가 미쁘지 않은 것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경은 선정(先正)의 적전(嫡傳)으로서 사림(士林)의 모범이 되었으니, 선사(先師)가 평소에 우리 효종(孝宗)을 섬기던 것처럼 나를 섬기는 것을 내가 경에게 기대하는 것이었는데, 어찌 한결같이 겸손하여 물러가서 내 지극한 뜻을 저버리려 하는가?"
하고, 이어서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함께 오게 하였다.

 

진휼청(賑恤廳)에서 말하기를,
"근래 걸인이 회란(回鑾)할 날짜가 정해졌다는 말을 듣고 도로 다시 모여 와서 살려 주기를 바라는 자가 1천여 명이나 되므로, 다시 배로 날라 온 쌀을 가져다가 인구를 셈하여 나누어 주고, 남은 쌀 68석은 전에 정탈(定奪)한 대로 감영(監營)에 옮겨 주어 살 곳을 잃은 걸인에게 거저 주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연유를 갖추어 아룁니다."
하였다.

 

3월 27일 임오

사초(巳初)에 대가(大駕)가 온양(溫陽)을 떠나 저녁에 천안 행궁(天安行宮)에서 유숙(留宿)하였다.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 어유귀(魚有龜)·정언(正言) 조상경(趙尙絅)이 전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고, 하(河)를 엄중하게 형신(刑訊)하여 정상을 알아내도록 계청(啓請)을 다시 냈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3월 28일 계미

사시(巳時)에 대가(大駕)가 천안(天安)을 떠나 저녁에 직산 행궁(稷山行宮)에서 유숙하였다.

 

3월 29일 갑신

사시에 대가가 직산을 떠나 소사(素沙)에서 주정(晝停)하고, 저녁에 진위 행궁(振威行宮)에서 유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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