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59권, 숙종 43년 1717년 4월

싸라리리 2025. 11. 30.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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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을유

미시(未時)에 대가(大駕)가 진위(振威)를 떠나 저녁에 수원 행궁(水原行宮)에서 유숙(留宿)하였다.

 

사은사(謝恩使) 겸동지사(兼冬至使) 여산군(礪山君) 방(枋)·이대성(李大成)과 서장관(書狀官) 권엽(權熀) 등이 돌아와 수원(水原)에서 복명(復命)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여 청국(淸國)의 사정을 물었다. 방이 말하기를,
"진상의(陳尙義)가 다시 모반(謀叛)한 일을 연로(沿路)에서 번갈아 수소문하였더니, 다들 말하기를, ‘모반하여 떠난 뒤로 종적이 아득하나, 그 소굴이 중국에서는 멀고 조선에서는 가까우니, 조선에서 약탈할 걱정이 있을 듯하다.’ 하는데, 그 허실(虛實)이 과연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신이 여러 번 사행(使行)을 겪었는데, 전에는 저 나라에 사람이 매우 많아서 관문(關門)을 메웠는데, 지금은 관문 밖의 인가를 허문 곳이 많이 있고, 관문 안에도 사람이 자못 드물었습니다. 따라서 말이 매우 귀하여 더러 암 노새를 타고 가기도 하였습니다. 대개 서달(西澾)110)  을 정토(征討)하기 때문에 이처럼 조폐(凋弊)해졌다고 합니다."
하고, 권엽이 말하기를,
"서달은 몽고 부락(蒙古部落)이라 하는데, 길에서 함거(檻車)에 남녀를 실어 보내는 것을 만나 이를 물어 보았더니, 서정(西征)에 나아가지 않은 자의 처자는 심양(瀋陽)으로 보내거나 영고탑(靈古塔)으로 보낸다 합니다. 또 저들의 당보(塘報)111)  를 보니, 13성(省)의 문서에 양향(粮餉)을 나르고 군사를 징발하는 것을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또 죄 때문에 파직된 무리 가운데 혹 은자(銀子)나 양식을 바치기를 원하는 자도 더러 있고 싸움에 나아가기를 스스로 원하는 자도 더러 있다 하는데, 이말이 믿을 만하다면 정토에 괴로와하는 것을 알 만합니다. 서달이 있는 곳은 감보(甘甫)에서 가장 가까운데, 바로 장성(長成)의 서쪽 부근으로 산천이 매우 험하다 합니다. 해적(海賊)의 일은 관소(館所)에 머물러 있을 때에 모반하여 떠난 곡절을 상세히 물었더니, 당초 초안(招安)112)  한 뒤에 금주 수사영(金州水師營)에 유치(留置)하였으나, 주장(主將)이 은자·양식을 삭감하였기 때문에, 굶주림에 못 견디어 곧 배반하여 떠났으며, 간 곳은 알지 못하나 출몰하여 약탈할 걱정이 없지 않다 합니다. 통주(通州)의 강에 정박한 배가 전에는 앞뒤를 서로 잇대었으나, 이제는 그 곳의 배 외에 강남(江南)의 배는 아주 드물다고 합니다. 혹 해금(海禁)이 매우 엄한 탓이라고 말하나, 실로 알 수 없습니다."
하고, 이대성이 말하기를,
"서적(西賊)은 아직 우리 나라에서 근심할 것이 아니나, 해적은 실로 염려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구득(購得)한 내각(內閣)의 문서 가운데에 조선이 근심스럽다는 등의 말이 두세 가지나 있으므로, 어떤 자는 이것으로 우리 나라를 경동(驚動)하는 계책을 삼으려 하는데, 해방(海防)을 신칙(申飭)하는 일은 그만둘 수 없을 듯하니, 소강 첨사(所江僉使)같은 무리는 가려서 차출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고, 방이 말하기를,
"신들이 요동(遼東)에 이르렀을 때 숙소 주인이 성명은 담온유(談韞瑜)이고 스스로 오삼계(吳三桂)의 막하(幕下)이고 나이가 이제 80여 세라 하는데, 말이 서달의 일에 미치니, 그가 상자 안에서 서달의 표문(標文)을 내어 보이며 말하기를, ‘서달의 이름은 택왕아뢰포탄(澤旺阿蒲坦)이고 병세(兵勢)가 매우 성한데, 호황(胡皇)이 여러 번 정토하였으나, 중간에 있는 7백 리의 땅에는 물과 풀이 없으므로, 오래 머무르지 못하여 군사를 물리면 곧 다시 와서 침범하니, 중국이 자연히 피폐해진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구득하지 않았는데 내어 보인 것이니, 진짜인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서달은 실로 저 나라의 큰 근심거리이다. 태자(太子)는 아직 갇혀 있는가?"
하자, 방이 말하기를,
"혹 말하기를, ‘태자의 아들이 매우 어질기 때문에, 차마 다른 아들을 세우지 못하나 아직 폄출(貶黜)되어 있다.’ 합니다."
하였다.

 

충청 감사(忠淸監司) 윤헌주(尹憲柱)가 도내의 폐막(弊瘼)을 조목조목 아뢰고, 청하기를,
"외방(外方)의 간사한 사람이 오래 추심(推尋)하지 않는 전민(田民)113)  을 궁가(宮家)에 투매(投賣)하고 궁가에서 억지로 측량하게 한 것은 먼저 본관(本官)에게 물어 그 허실(虛實)을 알아서 아직 결송(決訟)하지 않았거나 오래 되어 기한이 지난 것은 모두 시행하지 말게 하고, 포민(浦民)이 배를 가지고 여러 상사(上司) 또는 사옹원(司饔院)에 입속(入屬)하였는데, 세월이 오래 되어 부패(腐敗)한 것은 낱낱이 조사해 내어 곧 탈안(頉案)을 허락하게 하고, 기병(騎兵)·보병(步兵)이 정월·2월에 당번(當番)인데 아직 바치지 않은 포(布)는 다른 군포(軍布)의 예(例)에 따라 물려서 받아들이고, 공주(公州)의 을미년114)  조 대동미(大同米)를 포(浦)가에 노적(露積)하였다가 물에 잠긴 것은 탕감하소서."
하였는데, 비국(備局)에서 복주(覆奏)하니, 윤허하였다. 대개 임금이 온양 행궁(溫陽行宮)에서 윤헌주를 인견(引見)하였을 때에 물러가서 도내의 폐막을 갖추어 아뢰라고 명하였는데, 윤헌주가 아뢴 것은 간략한 두어 가지에 지나지 않아서 대단한 것이 아주 없었다.

 

4월 2일 병술

햇무리하였는데, 햇무리 위에 관(冠)이 있었다.

 

진시(辰時)에 대가(大駕)가 수원(水原)을 떠나 사근천(沙斤川)에서 주정(晝停)하고 저녁에 과천 행궁(果川行宮)에서 유숙하였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진후(診候)를 마치자, 도제조(都提調)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주방(酒房)의 청주(淸酒)와 소주(燒酒)를 각각 50병 가져왔으나, 모두 도로 싣고 가게 되었으니, 청컨대, 군사에게 나누어 주소서."
하니, 임금이 투료(投醪)의 뜻으로 금군(禁軍)과 도감(都監)의 군사와 마병(馬兵) 등에게 나누어 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또 이번에 온천에 거둥하였을 때 호서(湖西) 백성의 노고와 폐해가 지극하였다 하여 미처 상납하지 못한 대동미(大同米)를 모두 가을로 물려받으라고 명하였다.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가 서울로 돌아간 뒤에도 이어서 주원(廚院)115)  에서 직숙(直宿)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물러가 본원(本院)에서 직숙하라고 명하였다. 김창집이 또 말하기를,
"거둥 때에 가는 길에 거처하시는 관사(館舍)에 사객(使客)이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라는 하교가 있었는데, 지금도 이 분부대로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직산(稷山)의 영소정(靈沼亭)과 천안(天安)의 화축관(華祝館)은 곧 선조(先朝)에서 온천에 거둥하실 때에 지은 것이니, 이 밖의 관사는 모두 사객이 유숙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4월 3일 정해

진시(辰時)부터 유시(酉時)까지 사방이 컴컴하여 마치 먼지가 내리는 듯하였다.

 

진시(辰時)에 대가(大駕)가 과천(果川)을 떠나 사시(巳時)에 강을 건너 진두(津頭)에서 주정(晝停)하니, 왕세자가 서울에 머문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지영(祗迎)하고, 관학 유생(館學儒生)과 도성(都城)의 사민(士民)이 모두 길가에서 맞이하여 수십 리에 잇달았다. 미시(未時)에 창덕궁(昌德宮)에 환어(還御)하였다.

 

4월 4일 무자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4월 5일 기축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말하기를,
"관학 유생(館學儒生)이 강가에서 대가(大駕)를 맞아하려고 반열(班列)을 정하여 늘어앉은 뒤에 감찰(監察)의 하인(下人)이 불쑥 들어와 자리를 배설(排設)하므로, 유생이 조리에 따라 꾸짖어 물리쳤더니, 감찰이 이로 인해 발노(發怒)하여 수복(守僕)을 결박하고 여러 선비를 능멸하였습니다. 듣는 자 가운데 놀라지 않는 이가 없으니, 청컨대, 수창(首倡)한 감찰을 태거(汰去)하소서."
하니, 임금이 태거하는 일만 따랐다.

 

정원(政院)에서 말하기를,
"병신년116)   윤3월 일기(日記) 가운데에 관학 유생(館學儒生) 이시정(李蓍定) 등의 소(疏)의 조어(措語)를 빠뜨리고 쓰지 않은 것이 많아서 20여 군데에 이르니, 그때의 가주서(假注書) 구명규(具命奎)를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곧 개수(改修)하여 바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진사(進士) 이상채(李相采)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문묘(文廟)에 승부(陞祔)하여 선성(先聖)에 배식(配食)하는 것은 사문(斯文)의 성대한 전례(典禮)이므로, 진실로 도(道)가 순일(純一)하고 덕이 갖추어져 백세(百世)의 사표(師表)가 되는 자가 아니면 감히 의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도(世道)가 더욱 떨어져서 변괴가 거듭 일어나고 있는데도 고(故) 참판(參判) 김장생(金長生)을 종사(從祀)하려는 청이 또 일어났습니다. 아아! 김장생은 본래 보통 속류(俗流)로서 음관(蔭官)으로 등용되어 발신(發身)하였는데, 사부(師傅)로 선임할 때에는 청의(淸議)에 지색(枳塞)당하였고, 낭서(郞署)로 의망(擬望)할 때에는 엄교(嚴敎)를 특별히 부지런히 하셨습니다. 80세에 훈귀(勳貴)에 인연하여 차서를 뛰어넘어 재상(宰相)의 반열에 이르러 문득 당세의 은사(隱士)에 억지로 채워졌으나, 문재(文才)가 짧고 견식이 어두워서 보통 서간도 오히려 남들만 못하였습니다. 일생의 사업은 다만 《가례(家禮)》의 분수(分數)에 있었으나, 이른바 《비요(備要)》117)  와 《집람(輯覽)》118)  은 본디 지은 사람이 있었으며, 《의례(疑禮)》119)  라는 글이 본디 하치않은 것인데도 크게 칭찬을 받았으나 혹 경서(經書)의 뜻을 잘못 풀이하거나 그릇된 소견을 섞어 넣었으므로 본디 식자의 비난이 많았습니다. 더구나 그 문답한 것은 의장(儀章)의 품식(品式)에 관한 말단과 명물도수(名物度數)에 관한 잗단 것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천인(天人)·성명(性命)의 본원(本原)과 성의(誠意)·정심(正心)·격물(格物)·치지(致知)의 학문에 대하여는 막연하여 그것이 무슨 일인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당돌한 향사(鄕社) 또한 참람한 것이었습니다. 어찌 성무(聖廡)에 제사하는 줄에 끼어 의논될 만하겠습니까마는, 지난번 조겸빈(趙謙彬)·윤현(尹俔) 등이 도학(道學)의 문자를 모아서 크게 칭찬하였는데, 종이에 가득히 장황한 것이 자가(自家)의 안면(顔面)은 전혀 없습니다. 이것으로 사방의 귀를 속이고 한 세상을 속여서 올라서는 안될 곳에 굳이 올리려 하였습니다. 더구나 그 일편(一篇)의 정신은 본디 뜻의 소재(所在)가 있고, 김장생은 하나의 효시(嚆矢)일 뿐이니, 신들은 이에 대하여 저절로 웃음이 나옵니다. 또 그 소(疏)에 김장생의 원류(源流)를 성대히 말하여 연평(延平)120)  ·회암(晦庵)121)  을 끌어대어 견주기까지 하였습니다. 아아! 그 원(源)을 논하면 이(理)를 기(氣)로 아는 학문이 선유(先儒)에 배치(背馳)되고, 그 유(流)를 말하면 예(禮)를 무너뜨리고 적통(嫡統)을 어지럽힌 신하로서, 죄가 선조(先朝)에 관계되니, 연평·회암에게도 이러한 병통과 이러한 오류(汚流)가 있었습니까? 아아! 김장생이 평생 동안 존중하고 사사한 자는 주인을 배반한 천얼(賤孽)이고, 친근하여 귀부(歸附)한 자는 어진이를 죽인 거간(巨奸)입니다. 자기와 뜻을 달리하는 명유(名儒)를 헐뜯어 완전한 사람이 거의 없고, 원통하게 죽은 어진 선비를 근거 없이 더럽혀서 사우(祠宇)를 헐기를 청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심술이 이처럼 매우 편벽되고 논의가 이처럼 어그러졌으나, 다만 그 문하에서 심법(心法)을 이어받은 사람이 한때의 큰 권세를 잡았기 때문에 형세에 몰려 흑백이 거꾸로 놓여 혹 창도하고 혹 화답하여 앞뒤가 서로 응하고 차차로 밀어 물리쳐서 마침내 이에 이르렀습니다. 대성인(大聖人)을 제사하는 곳이 얼마나 중대한 곳이며, 여러 제자를 승배(陞配)하는 예(禮)가 얼마나 중대한 예인데, 전하께서는 대신(大臣)에게 의논하지 않고 삼사(三司)에 묻지않고, 당세의 비웃음을 당하는 것을 돌보지 않고, 후세에서 비난하여 조소할 것을 헤아리지 않고, 거둥하여 갑작스러운 때에 서서 이야기하는 사이에 문득 윤허하셨습니까? 이제부터 저들이 성묘(聖廟)를 마치 사당(私黨)의 원우(院宇)처럼 생각하여 오늘 한 사람을 올리고 내일 한 사람을 올리곤 하여 차례로 탐내어 다시는 꺼리는 것이 없어서 당당한 부자(夫子)의 사당이 한 사당의 뜰이 될 것이니, 통분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진사(進士) 양명하(梁命夏)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종사(從祀)는 사체(事體)가 지극히 중대하므로, 성도(聖道)의 적통(嫡統)을 이어 사문(斯文)에 큰 공이 있지 않으면 가볍게 의논할 수 없습니다. 김장생(金長生)은 한낱 자애(自愛)하는 선비일 뿐이고 학문에 뜻을 가진 적도 없습니다. 도리어 그 자품(資稟)이 둔체(鈍滯)하고 식견이 고루(固陋)하여 그 독서(讀書)하고 강학(講學)한 공부에 있어서는 통한 것이 문자에 지나지 않고 본 것이 의리 밖에 없으니, 이제 그 저술한 것에는 전혀 견해(見解)가 없어서 이따금 구어(句語)를 이루지 못한 것을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그 재주가 이미 도학에 나아가기에는 부족하였으며, 또 세속적인 선비의 학업도 닦으려 하지 않은 채 오로지 예경(禮經)을 공부하여 일생의 가계(家計)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이동(異同)을 고교(考校)하고 잗단 것을 초록(抄錄)하는 것은 궁리(窮理)·치지(致知)하는 것처럼 대단히 힘을 쓰는 것이 아니었으나, 사장(詞章)을 기송(記誦)하는 학문에 견주었으니, 차이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학문한 대강입니다. 그 평생의 언론이 당습(黨習)에 물드는 것을 면하지 못하여 공평한 기상이 매우 부족한 것으로 말하면 본원(本源)의 병통을 식자가 의심하는데, 이제 김장생에게 편드는 자는 《상례비요(喪禮備要)》·《의례문해(疑禮問解)》 따위 글이 마치 유문(儒門)의 큰 사업인 듯이 말하나, 그 또한 쓸쓸할 뿐입니다. 그러나 사대부 중에 취하는 자가 있는 것은 다만 상을 당하여 급작스러울 때에 시골의 글이 없는 곳에서 상고하여 열람해 보는 데 편리하기 때문일 뿐입니다. 이제 글을 지을 줄 아는 선비로 하여금 예서(禮書)를 모아서 자료를 찾아 모으고 한두 해 동안 공부하게 한다면 누가 흔쾌히하지 못하겠습니까? 그 수립한 것을 논하면 뛰어난 행실이 없고, 그 학문을 말하면 어리석다는 비평이 있고, 그 전문한 공을 들면 약간의 책 내용을 분류하여 모은 것에 지나지 않는데, 이 때문에 배향하는 줄에 올리는 것은 또한 외람되지 않겠습니까? 김장생이 평소에 유자(儒者)로 자처하지 못하고 세상에서도 김장생을 유현(儒賢)으로 처우한 적이 없는데, 이제 좋아하는 바에 아첨하는 논의는 그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차서를 중시하여 받들어 높이려고 마땅히 견주지 않아야 할 곳에 견주었으니, 대개 그 마음에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의발(衣鉢)은 전할 것이 없고 연원(淵源)은 비롯되는 바가 없어서 세상에 과시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전하께서 어찌 참으로 그 말을 반드시 옳아서 의심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셨겠습니까? 아아! 이들의 말이 어찌 믿을 만하겠습니까? 전하께서만 호유(湖儒)가 이상(李翔)을 칭송하는 것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이상의 일은 전하께서 친히 보셨어도 감히 찬미하는 말을 만들어 천청(天聽)을 속이고 어지럽혔는데, 더구나 김장생이 죽은 것은 이미 1백 년 가까이 되어 영향이 점점 희미해지고 일의 자취도 징험할 것이 없으니, 터무니 없는 것을 찾아내어 뜻대로 펼쳐서 전하 앞에서 현혹시키는 짓을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하였다. 두 소가 함께 이르렀는데 정원(政院)에서 처음에는 물리쳤으나, 이상채 등이 또 소 끝에 정원을 헐뜯었으므로 정원에서 계품(啓稟)하여 봉입(捧入)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문원공(文元公)의 도덕과 학문은 내가 존앙(尊仰)하는 바이다. 처분이 이미 정해졌고 성대한 의례가 장차 거행될 것인데, 이상채·양명하 등이 각각 상소해서 한없이 헐뜯어 욕하였으며, 이상채의 소는 지극히 도리에 어그러지니, 일이 통탄스럽기가 무엇인들 이보다 심하겠는가? 이처럼 바른 사람을 해치는 무리는 엄중하게 징계하고 통렬하게 배척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상채는 극변(極邊)에 정배(定配)하고 양명하는 변원(邊遠)에 정배하라. 그리고 이후로 이러한 소장(疏章)은 일체 봉입하지 말라."
하였다. 그래서 이상채를 의주(義州)에 정배하고 양명하를 장흥(長興)에 정배하였다. 이후 지평(持平) 송필항(宋必恒)이 상소하여 이상채의 배소(配所)는 너무 편하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다시 경원(慶源)에 정배하고, 형조(刑曹)의 해당 당상(堂上)을 추고(推考)하게 하였다.

 

4월 6일 경인

어사(御史)로 뽑힌 홍정필(洪廷弼)·박성로(朴聖輅)·조상경(趙尙絅)·최상리(崔尙履)·김재로(金在魯)·이인복(李仁復) 등을 패초(牌招)하여 각도에 나누어 보냈다.

 

통제사(統制使)가 거제부(巨濟府)의 염한(鹽漢) 곽기연(郭己延) 등 5명이 산 소나무를 함부로 벤 것을 가지고 장계(狀啓)하여 사목(事目)에 따라 경상(境上)에서 효시(梟示)하기를 청하였는데, 좌의정(左議政) 김창집(金昌集)이 연중(筵中)에서 임금에게 아뢰기를,
"당초의 의율(擬律)이 너무 엄준하니, 청컨대, 모두 감사(減死)하여 정배(定配)하고, 이 뒤로는 차율(次律)로 고쳐 정하여 준행(遵行)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4월 8일 임진

가주서(假注書) 임징하(任徵夏)가 상교(上敎)를 가지고 가서 권상하(權尙夏)에게 전하고, 그 말을 치주(馳奏)하기를,
"신이 갑자기 천한 자식의 병이 심하다는 말을 듣고 밤새워 달려가서 겨우 집에 이르니, 두어 마디 말을 끝내기 전에 문득 그 목숨이 다하였습니다. 신이 어버이가 된 사정(私情)에 몰려 뜻대로 물러간 죄가 매우 크므로 견벌(譴罰)을 기다렸는데, 뜻밖에 열 줄의 윤발(綸綍)122)  에 사지(辭旨)가 간절하고 선사(先師)가 성조(聖祖)를 섬긴 것을 신에게 기대하시기까지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난장이로 하여금 구정(九鼎)123)  을 메게 하는 것과 다르겠습니까? 이것은 모두 신이 헛된 이름을 잘못 외람되게 차지하여 임금을 속인 소치이니, 신의 죄는 만 번 죽어야 합니다. 편협하고 천박한 성정이 눈앞의 아픔도 감내하지 못하는데, 묵은 증세와 새 병이 한꺼번에 심해져서 조금도 기동할 형세가 없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하교하기를,
"찬선(贊善)에게 한 아들이 있을 뿐인데, 겨우 슬픈 상(喪)을 당하였으므로, 정리(情理)로 참작하여도 곧 돌아오기 어려울 것이니, 지금 강박(强迫)하는 것은 아랫사람을 헤아리는 도리에 흠결이 있는 것이다."
하고, 드디어 사관(史官)은 이제 우선 올라오라고 명하였다.

 

4월 9일 계사

밤에 달무리가 토성(土星)을 둘렀다.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아산 현감(牙山縣監) 심필현(沈弼賢)은 두 해 동안 벼슬살이하였으나 볼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고, 온천에 거둥하셨을 때에 공어(供御)하는 물선(物膳)의 값을 억지로 배로 거두고 교활한 서리(胥吏)가 농간하여 제 주머니를 불렸으니, 파직(罷職)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4월 10일 갑오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가주서(假注書) 구명규(具命奎)는 관학 유생(館學儒生) 이시정(李蓍定) 등의 상소를 베낄 때에 그 말이 긴절(緊切)한 곳은 문득 모두 삭제하여 수십 군데나 되도록 많습니다. 막중한 기주(記注)의 일을 어찌 감히 한 당후(堂后)의 사사로운 뜻으로 마음대로 환롱(幻弄)하여 이처럼 방자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때의 주서 구명규를 나문(拿問)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구명규의 일만 따랐다. 구명규가 치대(置對)하니, 금오(金吾)에서 죄를 살펴 법률에 비추어 그 고신(告身)을 삭탈하였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진후(診候)를 마치자, 도승지(都承旨) 이관명(李觀命)이 말하기를,
"선정신(先正臣) 김장생(金長生)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는 일은 실로 국가의 성대한 전례(典禮)인데, 이상채(李相采)·양명하(梁命夏) 등이 감히 성대한 의례가 장차 거행되려 할 때에 공공연하게 함부로 헐뜯어 욕하였으니, 도리에 어그러지고 음흉한 꼴은 차마 바로 볼 수 없었습니다. 성감(聖鑑)이 매우 밝아 특별히 귀양보내는 법을 베푸셨으니, 무릇 듣고 보는 자가 누구인들 공경하여 우러르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들은 그 마음이 사악에 빠져서 한때의 위압으로는 뒷날에 일어날 폐단을 끊기 어렵습니다. 반드시 전하께서 어진이를 높이고 도(道)를 즐기는 정성이 처음부터 끝까지 끊임없어서 이들로 하여금 엿볼 마음을 끊게 한 후에야 이시부척촉(羸豕孚蹢躅)124)  의 길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의 말이 옳다. 각별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도제조(都提調)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수의(繡衣)가 갈 때에 전에는 군무(軍務)도 아울러 염찰(廉察)하게 하였으나, 이번에는 따로 검칙(檢飭)해야 할 듯한데, 성상께서 처분이 어떠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 수령(守令)의 치적(治績)만 염찰하게 한다면, 융정(戎政)에 관한 일을 다시 따로 하유(下諭)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에는 봉서(封書) 가운데에 진정(賑政)·치적만 염찰하게 하고, 관방(關防)·군정(軍政) 등의 일은 거론하지 않았으니, 이것을 따로 각도의 어사에게 하유하라."
하였다.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일찍이 김장생(金長生)을 종사(從祀)할 때에 봉사손(奉祀孫)을 뒤를 이은 아들로서 제직(除職)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마는, 그 봉사손이 나이가 매우 어려서 벼슬살이를 감당할 수 없다 합니다."
하고, 김창집이 충정공(忠貞公) 윤집(尹集) 봉사손의 전례를 적용하여 그 낳은 아비를 벼슬시키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4월 11일 을미

진사(進士) 이윤신(李潤身)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세도(世道)는 늘 태안(泰安)하지 못하여 때때로 비색하고, 사문(斯文)은 늘 형통하지 못하여 때때로 막힙니다. 바야흐로 비색하고 막힐 때에는 반드시 아첨하는 말과 간사한 말이 방자하게 유행하는데, 혹 조리에는 차이가 있더라도 모두 사문을 해치는 것입니다. 가만히 살펴보건대, 근래에 세도가 변하여 변괴가 갖가지로 나타나서 사림(士林)이 억울하게 여긴 지 오래 되었는데, 뜻밖에 이제 또 이상채(李相采)·양명하(梁命夏) 등이 문묘(文廟)에 종향(從享)하는 일로 인하여 각각 상소한 바 그 말이 매우 도리에 어그러집니다.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은 일생의 언행을 예(禮)로 스스로 경계하여 스승에게 배운 것이 바르고 마음을 단속한 것이 돈독하여, 진실로 이는 사림의 우러러보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가 저술한 《예서(禮書)》는 정문(情文)이 모두 지극하고 조리가 다 갖추어 있으므로, 사람들이 급작스러울 때에 견문(見聞)이 좁은 가운데 책을 펴면 환히 알 수 있게 하였으니, 세교(世敎)에 보탬이 있는 것이 큽니다. 이것이 어찌 글을 지을 줄 아는 선비가 한두 해 동안 수집하는 공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아아! 종사(從祀)는 참으로 중대한 전례(典禮)이니, 만약 일을 어렵게 여기고 신중히 여겨 마땅히 급급하게 하지 않는다면, 혹 가하겠지만, 감히 이로 인하여 거리낌없이 헐뜯어 욕하였습니다. 또 이상(李翔)이 음옥(淫獄)을 무증(誣證)한 것이 얼마나 추악하고, 그 무리가 시기를 틈타 신구(伸救)한 것이 얼마나 방자한 것인데, 감히 억지로 끌어대어 증거로 대답하며 반드시 침범하여 더럽힐 계책을 이루고자 하였으니, 그 정상이 더욱 매우 놀랍습니다. 그러나 신이 개연(慨然)하게 여기는 것은 말세에 세도(世道)가 무너져 어지럽고 인심이 험하고 투박하여 어진이를 무함하고 바른 사람을 해치는 말이 습속(習俗)을 이루었으니, 한 도덕이 고명(高明)하고 학술이 순정(純正)한 자  【윤선거(尹宣擧) 부자를 가리킨 것이다.】 를 반드시 온갖 계책으로 구무(構誣)하여 훼손하고야 만 것입니다. 근일의 시비는 혹 전도(顚倒)된 것이 많고, 백년의 정론(定論)도 침요(侵撓)당하는데, 이것이 어찌 오로지 이들을 허물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전하께서 어진이를 높이고 도(道)를 지키는 정성에 미진한 바가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전하께서 덕을 지키는 것이 견고하지 못하고 뜻을 지키는 것이 독실하지 못하셔서 총욕(寵辱)·여탈(與奪)이 수시로 변경되므로, 전도(顚倒)되고 착란(錯亂)하여 일정한 방향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들도 거조(擧措)가 이러한 것을 엿보고, 거짓말을 가지고 어지럽힐 수 있다고 생각하여 동시에 함께 일어나 요행히 혹 계책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니, 신은 통분합니다."
하였다. 소가 이르자 정원(政院)에서 처음에는 물리쳤으나, 이윤신 등이 소 끝에 또 정원을 욕하여 배척하였다. 그래서 정원에서 사연을 꾸며 품계(稟啓)하여 봉입(捧入)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이윤신 등이 어진이를 위해 무함을 변명한다고 핑계하여 사의(私意)로 협잡(挾雜)하여 공정하지 못한 말이 많으므로 볼만한 것이 없으니, 이 소를 도로 내어 주도록 하라."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윤신의 소가 어진이를 위하여 무함을 변명하는 것이라고 명분을 삼았으나, 일편(一篇)의 정신은 오로지 뜻을 기울인 것이 있다. 은연중에 성상이 윤가(尹家)부자를 처분한 바를 사문이 크게 재앙을 만난 것으로 돌려 장차 시비를 어지럽히고 천청(天聽)을 어지럽히려 한 것이니, 그 계책이 또한 교묘하였다. 성명(聖明)께서는 그 심술을 간파하여 엄한 말로 통렬하게 배척해야 마땅할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67책 59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645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사상-유학(儒學)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윤신의 소가 어진이를 위하여 무함을 변명하는 것이라고 명분을 삼았으나, 일편(一篇)의 정신은 오로지 뜻을 기울인 것이 있다. 은연중에 성상이 윤가(尹家)부자를 처분한 바를 사문이 크게 재앙을 만난 것으로 돌려 장차 시비를 어지럽히고 천청(天聽)을 어지럽히려 한 것이니, 그 계책이 또한 교묘하였다. 성명(聖明)께서는 그 심술을 간파하여 엄한 말로 통렬하게 배척해야 마땅할 것이다."

 

이중협(李重協)을 지평(持平)으로, 어유귀(魚有龜)를 수찬(修撰)으로, 권업(權𢢜)을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삼았다.

 

4월 12일 병신

임금이 하교하기를,
"지난번에 승지(承旨)의 말을 듣건대, 호중(湖中)에 학문에 뜻을 둔 선비가 많이 있다 하므로, 드러난 사람을 찬선(贊善)에게 물으려 하였으나, 행궁(行宮)에서 인견(引見)하였을 때에 갑자기 잊어서 아직도 묻지 못하였으니, 따로 사관(史官)을 보내어 찬선에게 묻도록 하라."
하였다. 사관이 권상하(權尙夏)에게 가서 물으니, 권상하가 이이근(李頤根)이 도신(道臣)의 천거에서 빠졌다고 대답하였는데, 임금이 이이근에게 벼슬을 제수하고 명하였다.

 

4월 13일 정유

연경(燕京)에 갔던 역관(譯官)이 《황명태조황제어제어필(皇明太祖皇帝御製御筆)》을 얻어 와서 바치니, 임금이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이의현(李宜顯)을 대사헌(大司憲)으로, 권엽(權熀)을 사간(司諫)으로, 김재로(金在魯)를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는데, 임금이 심필현(沈弼賢)의 일만 따랐다.

 

교리(校理) 박사익(朴師益)이 부모가 다 70세에 가까운데 집이 본디 가난하여 맛있는 음식을 공양(供養)할 수 없다 하여, 상소하여 한 고을을 얻어 봉양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그 소를 이조(吏曹)에 내렸는데, 이조에서 복주(覆奏)하니, 윤허하여 드디어 강서 현령(江西縣令)에 제수하였다.

 

4월 14일 무술

경기 교하(交河)의 유생(儒生) 박태문(朴泰文)이, 이상채(李相采) 등이 선현(先賢)을 근거 없이 욕한 말을 변명한다고 핑계하여, 윤선거(尹宣擧)의 시호(諡號)를 삭제하고 원우(院宇)를 헌 일을 덧붙여 논하고, 좌의정(左議政) 김창집(金昌集)을 헐뜯어 욕하였다. 또 정원(政院)에서 그 소를 봉입(捧入)하지 않은 것으로 인하여 상소하여 정원을 한없이 배척하였다. 그래서 김창집과 승지(承旨)들이 다 물러가서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임금이 박태문의 음험한 말은 입에 담을 것도 못된다 하여 여러 번 특교(特敎)를 내려 김창집에게 위유(慰諭)하니, 김창집이 드디어 도로 약원(藥院)에 입직(入直)하고, 승지들도 비답(批答)을 받은 뒤에 직무를 보러 나아갔다.

 

4월 15일 기해

평안도 벽동군(碧潼郡)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4월 17일 신축

진사(進士) 조선(趙銑) 등이 상소하여, 윤선거(尹宣擧) 부자를 위해 수천 마디 말을 크게 떠벌여 신변(伸辨)하고, 송시열(宋時烈)을 한없이 헐뜯어 욕하였는데, 정원(政院)에서 계품(啓稟)하니, 임금이 봉입(捧入)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조선 등이 정원에서 계품한 것에 발노(發怒)하여 정원의 문안으로 곧바로 들어와 승지(承旨)들에게 욕하며 행동이 패악(悖惡)하였으며, 대궐 문이 닫히려 하는데도 물러가지 않으므로, 정원에서 다시 이것을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습(士習)이 매우 해괴하다. 빨리 물러가게 하라."
하였다.

 

4월 18일 임인

임금이 정원(政院)에 하교(下敎)하기를,
"윤선거(尹宣擧)·윤증(尹拯)의 일은 국가의 처분이 마땅하고 시비가 이미 밝혀졌으므로, 이는 한때 억지로 정한 것에 견줄 바가 아니니, 본래 말할 만한 단서가 없다. 이러한데도 한 번 요개(撓改)한다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할 것이다. 이뒤로는 경재(卿宰)나 선비들일지라도 신변(伸辨)을 핑계한 소(疏)는 정원에서 다시 번거롭게 계품(啓稟)하지 말고, 곧바로 물리쳐서 붕당(朋黨)을 위하여 죽을 힘을 다하는 무리가 바른 사람을 해칠 계책을 이루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4월 19일 계묘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진후(診候)를 마치자, 도제조(都提調)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전라도 함열(咸悅)의 유생(儒生)들이 중국에서 전래(傳來)되어 1백여 년 동안 내려온 공자(孔子)의 화상(畫像)이 있다고 일컬으며 사우(祠宇)를 세워 봉안하기를 청하므로, 도신(道臣)이 장문(狀聞)하고 해조(該曹)에서 복주(覆奏)하여 이미 윤허를 내리셨다 합니다. 근래에 외방(外方)에서 산천(山川)의 이름이 옛 성현(聖賢)이 살던 곳과 우연히 같다 하여 문득 청하여 사우를 세운 것이 자못 많은데, 연천(漣川) 고정(考亭)의 사우와 용담(龍潭) 양정(兩程)의 원우(院宇)가 그것입니다. 이때부터 모두들 본받아 정주(定州)는 별호가 신안(新安)이기 때문에 그 곳의 선비가 주자(朱子)의 화상을 본떠 그린 다음 사우를 세워 봉안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또 함열의 일이 있는데, 이제 이 함열의 산곡담동(山谷潭洞)이라는 이름은 부회(傅會)한 정상이 있는 듯합니다. 부자(夫子)는 대성(大聖)으로서, 만국(萬國)에서 함께 높여 제사하는 바이므로, 사체(事體)가 후성(後聖)과 견줄 수 없으니, 그 산천의 이름이 우연히 같은 것으로 인하여 문득 다 사우를 세울 수는 없습니다. 또 그 화상이 과연 7분이라도 참된 것인지 어찌 알겠습니까? 이제 성명(成命)을 도로 거두시고 본도(本道)에 분부하여 향교(鄕校) 옆에 따로 한 사우를 세워 그 화상을 임시로 봉안하게 하신다면, 사체가 마땅하겠습니다. 그리고 이후로 이처럼 사우를 세우기를 청하는 것은 또한 헤아려서 처치해야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것이 옳다. 향교 옆에 사우를 세워 봉안하게 하라. 산천의 이름이 우연히 맞는다 하여 사우를 세우는 것은 이 뒤로 헤아려 처치하겠다."
하였다. 김창집이 또 말하기를,
"모든 직임은 반드시 구임(久任)125)  해야 성효(成效)를 요구할 수 있는데, 장임(將任)은 더욱 자주 체임(遞任)해서는 안되므로, 군사를 거느리는 직임을 띤 자는 혹 10여 년이나 되도록 구임시키기도 하나, 금위영(禁衛營)만은 그렇지 않습니다. 대개 병판(兵判)이 대장(大將)을 겸하므로, 자연히 그 직임에 오래 있을 수 없는데, 장수는 군사를 모르고 군사는 장수를 모르는 폐단이 있게 되니, 그 사이에 군무(軍務)가 허술한 것이 대단히 많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병판으로 하여금 겸대(蒹帶)하게 하지 말고 따로 대장을 내어 구임시키면, 일이 착실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라고 명하였는데, 그 뒤에 여러 의논이 일정하지 못하여 시행되지 않았다. 김창집이 또 말하기를,
"공신(功臣)을 사묘(私廟)에서 조천(祧遷)하지 않는 것이 법입니다마는, 태묘(太廟)·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한 사람까지도 다 조천하지 않는데, 이것은 반드시 공신의 예(例)에 비춘 것이겠으나 상고할 만한 명문(明文)이 없습니다.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은 이미 친진(親盡)126)  하였으므로 최장방(最長房)으로 옮겼는데, 이제 문묘에 승부(陞祔)할 때에 대종(大宗)에 도로 봉안하고 이어서 천조하지 않는 신위(神位)로 삼아야 마땅할 듯하나, 그 자손이 법전에 명백히 근거할 만한 글이 없기 때문에 감히 할 수 없다 하니, 우러러 아뢰어서 재정(裁定)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공신은 공이 일세(一世)에 있고 대현(大賢)은 공이 백대(百代)에 전하니, 이것으로 논하면 대현이 공신보다 중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천하지 않는 신주로 삼아야 마땅할 듯하다."
하였다.

 

4월 20일 갑진

강원 감사(江原監司) 이만견(李晩堅)이 어버이의 병이 바야흐로 위급하다 하여 상소하여 돌아가 구호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에 명하여 의논해서 처치하게 하였다. 묘당에서 고(故) 상신(相臣) 신완(申琓)·고 판서(判書) 김진귀(金鎭龜)가 방백(方伯)이었을 때에 교귀(交龜)127)  를 기다리지 않고 돌아가 병든 아버이를 돌본 전례를 원용하여 체임(遞任)시켜 돌보아 구호하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4월 21일 을사

동부승지(同副承旨) 안중필(安重弼)이 병 때문에 경출(徑出)128)  하니, 임금이 그 벼슬을 갈도록 윤허하였으나, 곧 병 때문에 경출한 것은 매우 온당하지 못하다 하여 특별히 가두어 추문(推問)하도록 명하고, 여러 날 만에야 풀어 주었다.

 

정필동(鄭必東)·정도복(丁道復)을 승지(承旨)로, 박치원(朴致遠)을 장령(掌令)으로, 김유(金揉)를 대사간(大司諫)으로, 김상직(金相稷)을 강원 관찰사(江原觀察使)로 삼았다.

 

장령(掌令) 이정익(李禎翊)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박태문(朴泰文)·조선(趙銑)의 소(疏)는 미처 예람(睿覽)을 거치지 않았으나, 장황한 사설로 선정(先正)을 한없이 무욕하였습니다. 그리고 봉입(捧入)하지 말라는 명을 내리신 뒤에 그 무리를 거느리고 망문(望門) 【망문이란 정원의 중문(中門)이다.】  안으로 불쑥 들어와 그 무리가 금중(禁中)의 넓은 마당 가운데에서 선정(先正)의 성명을 함부로 헐뜯어 욕하며 이르지 않는 바가 없었으니, 사람으로서 윤기(倫紀)가 없고 패만(悖慢)한 것이 어찌 이토록 지극합니까? 이제 그 소를 물리치기만 하고 엄히 징벌하지 않으면, 간사한 자를 돕고 바른 사람을 헐뜯는 무리를 장차 두려워 움츠리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박태문·조선 등의 소는 윤기가 없고 패만하여 결코 그 소를 물리치는 것으로 그칠 수 없으니, 모두 멀리 귀양보내도록 하라. 이미 소두(疏頭)를 죄주고 나면, 함부로 부른 자들이 매우 통탄스럽기는 하나, 적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였다. 그래서 박태문은 김해(金海)에 정배(定配)하고, 조선은 가산(嘉山)에 정배하였다. 그 뒤에 우의정(右議政) 이이명(李頤命)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다만 정원(政院)에 바친 개략을 가지고 상달되지 않은 말에 대하여 죄를 성토하여 귀양보내는 것은 알맞은 형정(刑政)이 아닐 듯합니다. 선정의 이름을 함부로 부른 자에 이르러서는 금중의 아주 가까운 곳에서 방자하게 패만하여 무엄하였으니, 이미 듣고 본 사람이 많고 정상이 분명한데, 버려두고 묻지 않는 것은 도리어 너무 너그럽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 말을 받아들여 박태문·조선을 용서하고, 송시열(宋時烈)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며 헐뜯어 욕한 홍계일(洪啓一)을 찾아내어 멀리 귀양보냈다. 그런데 그 뒤에 공조 판서(工曹判書) 조태채(趙泰采)의 상소로 인하여 임상극(林象極) 등 세 사람과 함께 한꺼번에 용서받았다.

 

4월 22일 병오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무릇 서로 송사하는 규례로서는 일이 60년 전에 있었던 것과 잇따라 두 번 이긴 것은 청리(聽理)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 변하지 않는 법인데,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져 사람들이 법을 지키지 않고 거의 사사로운 청탁에 따라 억지로 송사를 받게 하는 일이 흔히 있으니, 청컨대, 경외(京外)에 엄히 신칙(申飭)하여 법을 벗어나 청리하는 자가 있으면 송자(訟者)와 송관(訟官)을 엄중히 논죄(論罪)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단의 일만 따랐다.

 

4월 23일 정미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당후(堂后)의 일기(日記)는 곧 사초(史草)이므로, 비록 한만(閑漫)한 문자(文字)에 관계된다 하더라도 반드시 상세히 기록하여 고신(考信)에 갖추어야 하는데, 구명규(具命奎)는 유소(儒疏)의 긴요한 말을 삭제한 것이 많아서 수십 군데나 됩니다. 사정(私情)을 품고 공론을 없애어 후세의 이목을 가리려 한 것을 엄폐할 수 없으니, 청컨대, 먼곳에 정배(定配)하소서. 일기를 삭제한 죄가 율문(律文)에는 없으나, 남의 손을 빌어서 쓰면 편배(編配)로 감죄(勘罪)하는 것은 대개 사체(史體)가 엄중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써서 삭제한 것은 관계가 더욱 중한데, 금오(金吾)의 의언(議讞)은 자세히 살피지 못하였음을 면할 수 없으니, 금부(禁府)의 당상(堂上)들을 추고(推考)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고, 구명규와 금부의 당상에 관한 일에 답하기를,
"국가에서 법을 적용하는 데에는 알맞게 하는 것이 귀중하니, 멀리 귀양보내기를 청한 것은 매우 지나치다. 구명규의 죄는 남의 손을 빌어 일기를 쓴 것과는 차이가 있으니, 금오의 의언이 마땅하지 못한 줄 모르겠다."
하였다. 그래서 논계(論啓)를 발의한 대관(臺官) 이중협(李重協)이 인피(引避)하고, 대략 말하기를,
"명색이 사관(史官)이 되어 기주(記注)할 때에 마음을 써서 변환(變幻)한 자가 이 마음을 미루어 나아가 못하는 짓이 없다면, 멀리 귀양보내기를 청한 것을 너무 너그럽다 하여도 가할 것입니다. 일기를 마음대로 삭제한 것은 예전에 듣지 못하던 일이니, 왕부(王府)129)  에서는 본디 견줄 율(律)이 없겠으나, 죄를 논하여 우러러 아뢰는 것은 또한 불가(不可)할 것이 없으니, 또한 어찌 의언(議讞)을 자세히 살펴서 하지 않은 죄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손을 빌어 일기를 쓰는 것은 혹 솜씨가 졸렬하거나 병이 심하기 때문인데, 이것은 오히려 공죄(公罪)로서, 일기를 변란(變亂)하여 뒷사람의 이목을 가린 것보다 가볍습니다. 그런데 성교(聖敎)에는 도리어 구명규의 죄를 남의 손을 빌어 쓴 것과 차이가 있다 하셨으니, 신은 더욱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드디어 퇴대(退待)하였는데, 헌부에서 처치하여 출사(出仕)시켰다.

 

관학 유생(館學儒生) 이종신(李宗臣) 등 2백여 인이 상소하여 이상채(李相采) 등이 상소한 말이 도리에 어그러진 것을 변명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선정신(先正臣) 김장생(金長生)은 순수하고도 신중하여 성실한 자질로 일찍부터 사문(師門)의 요지를 전해 받고 성현의 성법(成法)을 독실하게 믿어 덕이 이루어지고 행실이 높아져서 사림(士林)의 종사(宗師)가 되었는데 저술한 예서(禮書) 여러 편은 모두 성경(聖經)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 없어서 오도(吾道)에 크게 공이 있었으니, 성묘(聖廟)에 배향(配享)하는 데에 이를 버리고 그 누구로 하겠습니까? 그런데 이상채·양명하(梁命夏) 등이 근거 없는 패언(悖言)을 만들어 내어 감히 이미 정해진 공론을 막으니, 아아! 또한 통탄합니다. 대저 김장생의 도학(道學)은 일찍부터 사우(師友)에게 존중되었으므로, 선조(宣祖)께서 무인년130)  에 유일(遺逸)을 찾으라고 명하시자, 맨 먼저 성경(聖經)에 침잠(沈潛)한 것으로 등용되고 이어서 침랑(寢郞)에 제배(除拜)되었으니, 그때의 인망이 추천한 바를 이에 의거하여 알 수 있습니다. 이른바 음관(蔭官)으로 등용되어 발신(發身)하였다는 것이 무슨 근거에서 나온 것입니까? 선정신 이이(李珥)의 상(喪)에 김장생이 상복을 입은 것은 황간(黃幹)이 주자(朱子)의 상을 입은 전례에 따라 건대(巾帶)를 갖추고 따라간 것인데, 시배(時輩)로서 시기하는 자가 이것으로 사부(師傅)의 의망(擬望)을 막으려 하였으나, 그 동류로서 전석(銓席)에 있는 자는, ‘증자(曾子)가 상을 당하여 자장(子張)에게 가서 조문하였습니다. 벗 사이에도 그러한데 더구나 스승이겠습니까?’ 하였으니, 당시의 공론을 여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청의(淸議)에 막혔다 하니, 또한 거짓이 아니겠습니까? 이른바 낭서(郞署)로 의망하여 엄교(嚴敎)를 초래하였다는 것은 판전(判銓) 신(臣) 유성룡(柳成龍)이 김장생을 판조랑(版曹朗)131)  에 의망하니, 선조께서 하교(下敎)하시기를, ‘김장생은 음관이므로 낭관(郞官)이 될 수 없다.’ 하셨으나, 대개 한때의 성교(聖敎)는 정주(政注)하는 사이의 격례(格例)에 지나지 않았고, 곧 낭관에 제배되어 등용하는 데에 막히는 것이 없었으니, 이것이 어찌 성덕(盛德)의 허물이 되겠습니까? 훈귀(勳貴)에 인연하여 외람되게 청로(淸路)에 통하였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더욱 아주 사리에 어긋납니다. 인조(仁祖)께서 용잠(龍潛)132)  에 계셨을 때부터 본래 존모(尊慕)하셨으므로, 개기(改紀)한 초기에 특별히 수교(手敎)를 내려 포상(褒尙)하고 맨 먼저 대직(臺職)을 제수하였다가, 마침내 경반(卿班)에 발탁하셨습니다. 전후의 은례(恩禮)는 진실로 남달리 잘 아시는 데에서 나온 것이데, 이제 훈귀에 인연하였다고 하며 마치 사경(私逕)을 매개로 진출한 듯이 말하니, 어찌 그리 어진이를 무함하는 데 급급하여 이처럼 도리에 어긋난 말을 하는 것입니까? ‘은사(隱士)에 채워졌다[充隱]’는 두 자는 스스로 출처(出處)가 있는데, 방자하게 조금도 자중(自重)하지 않았으니, 아아! 방자하고 무엄하기가 심합니다. 이른바 자기와 뜻을 달리하는 명유(名儒)와 억울하게 죽은 현사(賢士)는 과연 누구를 가리키는지 모르겠으나, 김장생이 평소 통렬하게 배척한 것은 이산해(李山海)·정인홍(鄭仁弘) 등이고, 허물기를 청한 것은 정개청(鄭介淸)·곽시(郭詩)의 서원(書院)이었으니, 저들이 이른바 명유·현사가 어찌 이들을 가리켜 그러하였겠습니까? 송익필(宋翼弼)의 학술은 여러 어진이에게 추앙받았는데, 주인을 배반하였다고 욕하고, 정철(鄭澈)이 강직(剛直)은 청의(淸議)에 존숭받았는데 어진이를 죽였다고 지목하였습니다. 이들이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이 이처럼 이치에 어긋나니, 진실로 어떻게 더불어 확실하게 분변(分辨)하려고 필설(筆舌)을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 아아! 김장생이 일생 동안 힘쓴 것은 더욱 예설(禮說)의 여러 글에 있는데, 온 세상이 존신(尊信)하여 비난하는 사람이 없으니, 저들이 교묘하게 헐뜯고 비난하여 배척하는 경우에 있어서도, ‘본디 지은 사람이 있다.’느니, ‘의장(儀章)의 도수(度數)에 관한 말단의 것이다.’느니 하는 데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저 《비요(備要)》·《집람(輯覽)》은 진실로 신의경(申議慶)과 강확하여 편차(編次)하였고, 《문해(問解)》도 자제(子弟)·문생(門生)의 감정(勘正)을 거쳤는데, 예전부터 선유(先儒)의 저서(著書)에는 이러한 것이 매우 많았습니다. 주자(朱子)의 《의례통해(儀禮通解)》는 문인에게 나누어 주어 성편(成編)하였고, 이황(李滉)의 《천명도설(天命圖說)》은 처음에 정지운(鄭之雲)이 지은 것에 따라 삭제하고 보충하여 바로잡았는데, 어찌 이 때문에 《의례통해》·《천명도설》이 주자·이황의 글이 아니라 할 수 있겠습니까? 또 김장생이 지은 《경서변의(經書辨疑)》·《근사석의(近思釋疑)》 등의 글을 모두 성명(性命)의 깊은 뜻을 천발(闡發)하고, 성의(誠意)·정심(正心)의 지극한 공(功)을 추명(推明)한 것입니다. 저들이 일찍이 만분의 일이나마 귀로 듣지 못하였으나, 도리어 선정(先正)의 정미(精微)한 온오(蘊奧)133)  를 의심하여 번번이 자성(資性)이 둔체(鈍滯)하고 문자(文字)가 단졸(短拙)한 것을 김장생의 병통이라 하니, 또한 가소롭습니다. 예전부터 성질이 노둔하면서도 도(道)를 전한 자는 공문(孔門)에 있어서는 증자(曾子)이고, 정문(程門)에 있어서는 윤씨(尹氏)134)  입니다. 김장생의 성질이 노둔한 것이 또한 천재(千載)에 똑같이 부합(符合)하나, 능히 남보다 백배 힘쓰는 공으로 깊이 극치에 들어가고 실천하는 덕을 이루었으니, 이것이 어찌 후학(後學)이 본받아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문예(文藝)에 이르러서는 유자(儒者)에게 말단의 일일 뿐이니, 공자(孔子)는 문사(文辭)에 대하여 통달(通達)한 것을 취하였을 뿐이고, 정자(程子)도 스스로 자후(子厚)135)  만한 문필의 역량이 없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기망생이 실덕(實德)을 힘쓰고 부화(浮華)를 힘쓰지 않은 것은 근본을 힘쓰는 학문을 하는 데에 해롭지 않은데, 더구나 그가 지은 소장(疏章)·논설(論說) 등이 글이 명백하고 진실하여 가슴속의 온오(蘊奧)를 곧바로 써서 혼연(渾然)히 문장을 이룬 것이겠습니까? 남의 허물을 주워 모아 억지로 허물을 들추어 낸 다음 반드시 헐뜯어 해치고야 마려는 것에는 헤아릴 줄 모른 것이 많이 보이는데, 가장 통탄스러운 것은 이윤신(李潤身)의 소에 있습니다. 무함을 변명한다고 핑계대어 몰래 사의(私意)를 성취하고자 하여, 뜻은 실로 조(趙)나라에 있으나 초(楚)나라를 위한다 하고, 말은 바른 것을 돕는 듯하나 간사한 것을 돕는 데로 돌아가며, 말마다 사의를 품고 구절마다 마음을 쓰고도 스스로 어진이를 위하여 무함을 변명한다 하니, 사람들이 누구인들 믿겠습니까? 아아! 귀양보내는 법이 이미 엄중히 시행하여 이상채의 죄를 이제 이미 바로잡았는데, 도로 주라는 명을 또 내리시니, 이윤신의 소에서 또 배척받았습니다. 우리 성상께서 도를 지키고 사(邪)를 물리치시는 정성이 사문(斯文)을 빛내고 후세에 전할 수 있으니, 신들은 진실로 다시 말할 일이 없습니다마는, 나쁜 나무는 살기 쉽고 흐린 그늘은 사라지게 하기 어려우니, 깊은 근심과 지나친 염려를 오히려 그만둘 수 없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聖明)께서는 항상 어진이를 높이는 정성을 돈독하게 하고 간사한 자를 물리치는 마음을 더욱 굳게 하시어 군자는 펴고 소인은 굽히며 정론(正論)은 성하고 사의(邪議)는 사라지게 하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아아! 인심이 떨어지고 의리가 아주 막혀서 괴귀(怪鬼)같은 무리가 낯을 바꾸어 잇따라 나와 뜻대로 헐뜯어 욕하며 못하는 짓이 없으니, 마음에 늘 해괴하고 통탄스럽게 여겼다. 그대들이 수선(首善)의 지위에 있으면서 선정(先正)을 위해 상소하여 무함을 변명하되 말이 매우 명쾌하니, 내가 매우 아름답게 여긴다. 늘 돈독하게 하고 더욱 굳게 하라는 말을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4월 24일 무신

충청도 홍산(鴻山) 등 스물 여섯 고을에서 염병(染病)으로 앓는 자가 3천 4백여 명이고 죽은 자가 1천 4백 22명인데, 도신(道臣)이 계문(啓聞)하였다. 임금이 특별히 도신에게 명하여 각 고을에 더욱 신칙(申飭)해서 각별히 구료(救療)하되 앓는 자는 피막(避幕)에 나가 있게 하여 전염되지 않도록 하게 하고, 또 명하여 그 가운데에서 가장 치성한 고을에는 의사(醫司)에서 약을 넉넉히 보내게 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이교악(李喬岳)을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황선(黃璿)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만성(李晩成)이 면직되었다. 이만성이 어머니의 병 때문에 인입(引入)한 지 이미 오래 되었고, 여러 번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니, 임금이 억지로 직임을 보살피게 하기 어렵다 하여 체임(遞任)하도록 윤허하였다.

 

4월 26일 경술

송상기(宋相琦)를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이만성(李晩成)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어유귀(魚有龜)를 응교(應敎)로, 홍정필(洪廷弼)을 수찬(修撰)으로, 조관빈(趙觀彬)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윤양래(尹陽來)를 집의(執義)로 삼았다.

 

간원(諫院)에서 전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고, 또 논핵(論劾)하기를,
"해주 판관(海州判官) 김우집(金宇集)은 3년 동안 벼슬살이하면서 좋은 정상이 하나도 없으며, 진자(賑資)를 근거 없이 불리고 부유하다는 소문이 조금 있는 자에게는 허다한 돈을 억지로 거두어 가산을 탕진하고 유산(流散)한 자까지 있으며, 관에서 복호(復戶)를 팔고 소출을 갑절로 거두었으니, 파직(罷職)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4월 28일 임자

간원(諫院)에서 전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니, 임금이 김우집(金宇集)의 일만 따랐다.

 

비국(備局)에서 별천(別薦)할 천주(薦主)를 의논하여 정하고,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육조(六曹)·삼사(三司)의 장관(長官)과 일찍이 이조(吏曹)·병조(兵曹)의 판서(判書)를 지낸 인원과 각도의 감사(監司)로 하여금 학문에 뜻을 둔 한두 사람을 각각 천거하게 하되, 경중(京中)은 30일, 외방(外方)의 가까운 도는 40일, 먼 도는 50일 안에 천거하여 아뢰게 하여 다 이르기를 기다려 묘당(廟堂)에서 검토하여 취사(取捨)해서 등용할 바탕으로 삼기를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4월 29일 계축

전라 감사(全羅監司) 홍치중(洪致中)이 폐사(陛辭)하니, 임금이 불러서 보고 칙유(飭諭)해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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