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갑인
조태구(趙泰耉)를 우참찬(右參贊)으로 삼았다.
5월 2일 을묘
조성복(趙聖復)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5월 4일 정사
김재로(金在魯)를 교리(校理)로, 이의현(李宜顯)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신임(申銋)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삼았다.
5월 5일 무오
강원도 정선군(旌善郡)에 서리가 내려 초곡(草穀)이 많이 죽었다.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고, 또 논핵(論劾)하기를,
"남양 부사(南陽府使) 유술(柳述)은 전에 영광(靈光)에 있을 때에 침탈하는 정사를 일삼았고, 이어서 남원을 맡아서는 더럽고 잗달다는 비방을 많이 받았으며, 술에 취하여 직무를 폐기하여 아전이 농간을 부리고 있습니다. 풍덕 부사(豐德府使) 서몽량(徐夢良)은 호읍(湖邑)에 제수되어서는 관곡(官穀)을 함부로 썼으며, 해현(海縣)을 맡아서는 횡렴(橫斂)을 자못 일삼으니, 가는 곳마다 일을 그르쳐서 사람들의 많은 비웃음을 받았습니다. 또 두 사람은 다 수의(繡衣)의 서계(書啓) 가운데에 들었는데, 범한 것을 벌여 적은 것이 보통과 다르니, 모두 개차(改差)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여산군(礪山君) 방(枋)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臣)이 봉사(奉使)하고 돌아오다가 요동(遼東)에 이르러 역승(驛丞) 담온유(談韞瑜)의 집에 들었는데, 저녁에 담온유가 나와 신을 보고 이야기하던 차에 스스로 말하기를, ‘서달(西㺚)이 강화(講和)하는 표문(表文)을 등서(謄書)하여 이 곳을 지나는 자가 있으므로 우연히 베껴 두었다.’ 하며 스스로 내어 보였습니다. 신들은 이것은 값을 바라고 팔러 온 자와 다르다고 생각하고, 상의하여 별단(別單) 가운데에 보태어 넣었는데, 신이 복명(復命)한 뒤에 전하는 말을 들으니, 이것은 명(明)나라 말년에 유구국(琉球國)에서 강화한 표문이라 합니다. 그 글을 가져다가 상고하니 당판인본(唐版印本)이고 책명은 《연거필기(燕居筆記)》인데, 그 가운데에 자구를 더하거나 삭제하여 고친 데가 없지 않았으나, 전편(全篇)의 대체를 죄다 이 글 가운데에서 베껴 낸 것이었으니, 그 허망한 자취가 여기에서 더욱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조정에서는 허망하든 진실하든 일이 있는 대로 장문(狀聞)하도록 허락하였으나, 신이 자세히 살피지 못한 것으로 인연하여 허망한 말이 위로 천청(天聽)을 더럽히게 되었으니, 두렵고 부끄러워 몸둘 바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우연히 살피지 못하였는데 어찌 깊이 혐의하기까지 하는가?"
하였다.
진휼청(賑恤廳)에서, 전에 초록(抄錄)한 굶주리는 백성 이외에 풍문에 따라 모여 온 경기 백성을 합하여 2만 5천 2백여 명에게 흩어 준 건량(乾粮)이 8백 67석인데, 인하여 양맥(兩麥)이 거의 익게 되었으므로, 사람마다 열흘 양식을 주어 헤쳐 보내겠다고 아뢰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청국(淸國)의 어채인(魚採人)이 황해도 장연부(長淵府)에 들어와 패선(敗船)하였는데, 건져 내어 구제한 자가 17명이었다. 도신(道臣)이 계문(啓聞)하니, 관에서 의자(衣資)를 주고 차관(差官)을 정하여 청국으로 압송하고, 연유를 갖추어 자문(咨文)을 보냈다.
5월 6일 기미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니, 임금이 유술(柳述)·서몽량(徐夢良)의 일만 따랐다.
보덕(輔德) 송성명(宋成明)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臣)이 전에 선부(選部)136) 에 있을 때 마침 영권(瀛圈)137) 뒤의 전록(銓錄)을 당하여 감히 여론을 듣고 시망(時望)을 가려서 맨 먼저 신록(新錄)138) 가운데 두 사람 【이진망(李眞望)과 최상리(崔尙履)이다.】 을 섬독(剡牘)139) 에 올리고 조지(朝紙)140) 에 실었습니다. 낭관(郞官)을 의망(擬望)하는 차례는 한결같이 본천(本薦)에 따르는 것이 정조(政曹)의 바꿀 수 없는 규례인데, 그 뒤로 의망할 때에 까닭 없이 버려둔 채 전혀 거론하지 않고, 차례를 뛰어넘어 의망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니, 신은 참으로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만약 도당록(都堂錄)141) 을 이미 다시 권점(圈點)하여 전록(前錄)이 저절로 쓸데없게 되었다면, 이조(吏曹)의 기록은 으레 본관(本館)보다 뒤에 있는데, 그때 본관록(本館錄)142) 은 본디 자재(自在)하였으니, 도당(都堂)의 개록(改錄)은 관계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로 두 신하가 개록할 때에 빠졌다면 그만이겠으니, 그렇지 않고 여전히 뽑혀서 그 중의 한 사람 【이진망이다.】 은 전후에 관직(館職)에 의망할 때에도 막히지 않았으니, 지적할 만한 허물과 베풀 만한 벌이 없음을 대개 알 수 있는데, 무슨 까닭으로 버려두고 검거(檢擧)하지 않는 것입니까? 자기와 뜻을 달리하는 자를 막을 줄만 알고 정사(政事)의 격례(格例)가 마구 전도(顚倒)되는 것을 돌보지 않으니, 신은 해괴하게 여깁니다. 신이 가만히 옥당(玉堂)의 권점(圈點)의 기록을 상고하건대, 국조(國朝) 이래로 신록(新錄) 뒤에 전록(銓錄)이 없었던 적이 없었는데, 이미 기록하고도 쓰지 않는 것은 이제 처음으로 봅니다. 조정이 사체(事體)로는 결코 그만둘 수 없으니, 이것을 전조(銓曹)에 더욱 신칙(申飭)해서 처치하는 바가 있게 해야 하겠습니다. 대저 사문(斯文)에 변이 있고부터 처치가 상리(常理)에서 어긋났으므로, 오늘날 진언(進言)하는 방도는 근본을 규명해서 극진히 논하고 사실에 의거하여 명백히 분변해서 성상께서 깨달으시고 인심이 환히 알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번에 전하께서 특별히 정원(政院)에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경재(卿宰)나 선비들의 소(疏)라 하더라도 일체 번거롭게 계품(啓稟)하지 말고 곧바로 물리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방금(邦禁)이니, 신이 어찌 감히 이 일을 대하여 입을 열 수 있겠습니까마는, 임금이 말을 듣는 것은 송사를 듣는 것처럼 반드시 양편이 말을 다한 뒤에야 곡직(曲直)이 절로 드러날 것인데, 지난해 이후로 피차의 몰려든 소장(疏章)을 일제히 올렸는데, 전하께서 부억(扶抑)하는 바와 조정(朝廷)에서 조종(操縱)하는 바에는 좌지우지하는 것이 뚜렷이 있습니다. 한편의 말이 아주 도리에 어긋나 윤기(倫紀)가 없어도 아래에서는 서로 장담하고 서로 선동하고, 위에서는 즐겨 듣고 굽혀 따르십니다. 그리고 한편의 말이 대질(對質)하고 응변(應辨)하려는 데에서 나왔어도 기조(騎曹)143) 와 후사(喉司)에서 합세하여 막고, 전하께서는 또 따라서 가두고 귀양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인심과 사기(士氣)가 격하고 또 격해져서 마치 원통한 생각을 품은 사람이 호소할 길이 없어 분주하며 부르짖는 듯합니다. 전하께서는 이 영갑(令甲)을 설치해서 반드시 위세로 누르고 힘으로 금지하려 하시겠으나, 신은 전하께서 어지러운 것을 진정시키고 시끄러운 것을 그치게 하시는 방법이 마침 더 들끊게 하고 조장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이제부터 죄를 받는 진신(縉伸)·장보(章甫)가 이루 손꼽을 수 없이 많을 것이니, 진실로 태평한 세상의 형상이 아니며, 만약 유생(儒生)의 상소가 미처 등철(登徹)되기 전에 사방으로 귀양가서 북쪽 변방과 남쪽 변방에 줄을 잇는다면 이것이 어찌 조종조(祖宗朝)에서 사기(士氣)를 배양한 본의이겠습니까? 홍계일(洪啓一)이 대궐 뜰에서 이름을 함부로 부른 것에 이르러서는 망령되다 하겠으나, 이것은 젊은 유생이 경솔한 소치에 지나지 않으니, 그 부형이나 가장인 자가 꾸짖어도 가할 것인데, 도리어 어찌 번거롭게 유사(有司)가 실상을 조사해 내어 율문(律文)에 없는 죄명을 만들어 고개로 막힌 먼 지방에 귀양보낼 만하겠습니까? 더구나 홍계일에게는 승중(承重)한 할미가 있는데, 거의 죽어가며 숨이 끊어지려 할 때에 결별(訣別)하고 며칠 뒤에 부고를 들었으나, 달려가 곡할 길이막혀 중도에서 울부짖었다 합니다. 이것이 어찌 큰 죄이겠습니까? 신은 천화(天和)를 범하고 효리(孝理)를 손상시킬까 염려됩니다."
하였다. 소가 정원에 이르자, 정원에서 아뢰기를,
"그 말을 살펴보건대, 금령(禁令)을 어기고 신변(伸辨)하려는 뜻이 뚜렷이 있으므로, 성교(聖敎)에 따라 물리쳐야 마땅하겠으나, 이 밖에 따로 벌여 적은 것이 있으므로, 봉입(捧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송성명이 전록을 핑계하여 서둘러 상소하였으나, 일편(一篇)이 정신은 오로지 시비를 어지럽히고 사당(私黨)을 구제하려는 데에 있으니, 이 소는 도로 내어 주도록 하라."
하였다.
5월 7일 경신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진후(診候)를 마치자, 도승지(都承旨) 이관명(李觀命)이 말하기를,
"옥당(玉堂)의 신록(新錄)은 비록 지난해에 만들었으나, 행공(行公)하는 자가 적어서 관직(館直)이 구차하고 어려움을 번번이 걱정하니, 신록을 다시 만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옥당관(玉堂官)이 요즈음 입시(入侍)할 일이 없어서 아뢰지 못하므로, 신이 대신하여 아룁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관직이 구차하고 어려운 것을 나도 안다. 신록은 본디 하교하려 하였으나 미처 못하였다. 비록 식년(式年)144) 이 아니라 하더라도 신록을 만든 전례가 있으니, 빨리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다섯 아들이 등과(登科)한 자에게는 살아 있으면 가자(加資)하여 해마다 쌀을 내리고, 죽었으면 증직(贈職)하여 치제(致祭)하는 것이 법이니, 사체(事體)가 매우 중대합니다. 신이 의조(儀曹)에 있을 때에 우연히 문서를 보았더니, 다섯 아들이 잡과(雜科)에 합격하였다 하여 상언(上言)하여 가자한 자가 있었습니다. 이른바 다섯 아들의 등과라는 것은 오로지 대과(大科)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므로, 생원(生員)·진사(進士)도 참여할 수 없는데, 더구나 잡과이겠습니까? 외람되기가 이보다 심할 수 없으니, 막아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소과(小科)에도 이 상을 줄 수 없으니, 잡과는 더욱 거론하는 것이 마땅하지 못하다. 이 뒤로 대과 밖에는 일체 주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5월 10일 계해
임금이 하교하기를,
"금부(禁府)·형조(刑曹)와 각도에서 계문(啓聞)한 것 가운데 형옥(刑獄)과 명화적(明火賊)이 인명을 살해한 일에 관계되는 것 따위는 근례(近例)에 따라 빈청(賓廳)에 모여서 의논하여 아뢰어 옥수(獄囚)가 오래 지체되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황해 도신(黃海道臣)이 황당선(荒唐船)이 출몰한 정상을 치문(馳聞)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황당선의 출몰이 근일처럼 잦은 적이 없었고, 32척이나 한꺼번에 나온 것은 일찍이 없던 일이므로, 지극히 염려스러우나, 예부(禮部)에 자문(咨文)을 보내는 일도 번번이 할 수가 없다. 연변(沿邊)의 각읍(各邑)·각진(各鎭)에서 군졸을 많이 거느리고 망보아 쫓게 하되,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각별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는데, 비국(備局)에서 복주(覆奏)하기를,
"이후로 정박하여 떠나지 않는 황당선은 죄다 쫓아가 잡아서 모두 육로로 청국에 압송하고, 역관(譯官)을 따로 보내되, 자문 가운데에 신칙(申飭)하여 엄금하라는 뜻을 참가해 넣으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5월 11일 갑자
이기익(李箕翊)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장령(掌令) 조성복(趙聖復)이 상소하여, 이제부터 명경과(明經科)의 초시(初試)에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고관(考官)으로 하여금 먼저 1경(經), 1서(書)를 시험하게 한 뒤에 녹명(錄名)하고 나아가도록 허락하여 대술(代述)하는 폐단을 막기를 청하고, 또 말하기를,
"인구가 날로 많아져서 과거를 보는 선비가 점점 늘어 가므로, 과장(科場)에 들어갈 때에 번번이 사람들이 짓밟힐 걱정이 있으니, 이 뒤로는 정시(庭試)145) 와 알성시(謁聖試)146) 에도 모두 초시를 설행(設行)하면 어지러운 폐단이 없고, 정밀하게 간선(揀選)하는 효과도 있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명경과의 일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정시와 알성시의 초시는 새로 설행할 수 없다."
하였다. 이 뒤에 명경과를 변통하는 일은 여러 의논이 같지 않기 때문에 마침내 시행되지 못하였다.
이조 참의(吏曹參議) 이택(李澤)이, 송성명(宋成明)이 상소하여 전록(銓錄)을 논한 일로 인하여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였는데, 이르기를,
"최상리(崔尙履)가 지난해 대관(臺官)으로 있을 때에 한 일은 매우 사리에 어긋나는데, 그가 체직(遞職)됨으로 인하여 요행히 척보(斥補)의 벌을 면하였으나, 물정이 놀라와하고 분개하는 것은 오래 되어도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또 일을 같이한 여러 사람 【구만리(具萬理)·심상정(沈尙鼎) 등 여러 사람이다.】 은 아직 죄를 받아 폐고(廢錮)147) 된 가운데 있으니, 관직(館職)과 전록을 물론하고 진실로 의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진망(李眞望)은 당초에 좌죄(坐罪)된 것 【이진망이 그 증조(曾祖)인 고(故) 상신(相臣) 이경석(李景奭)을 위하여 상소해서 변명하면서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을 매우 배척하였는데, 이 일에 좌죄되어 벼슬길이 막힌 지 오래 되었다.】 이 매우 가볍지는 않다 하더라도 세월이 이미 오래 지난 뒤인데, 관직까지 한결같이 막는 것은 마땅하지 못하므로, 상의하여 다시 의망(擬望)하였으니, 그 사이의 곡절은 이러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 전랑(銓郞)과 관직은 차이가 있으므로, 종전에 허물할 만한 일도 벌을 줄 만한 일도 없던 사람이 영선(瀛選)에 오르고도 낭청(郞廳)의 망(望)에 통하지 못한 경우는 이루 손꼽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 관직에 다시 의망한 것으로 인하여 문득 검거하지 못한 것을 허물하고, 또한 전임(銓任)에 대하여 어찌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곡절을 잘 알았다. 정조(政曹)에서는 잘못한 것이 조금도 없다. 뜻이 다른 사람을 막고 정사의 격례(格例)를 어지럽혔다는 배척은 매우 사리에 어긋난 것이다."
하였다.
5월 12일 을축
밤 1경(一更)에 유성(流星)이 천강성(天江星) 위에서 나와 동방 하늘가로 들어갔다.
조명봉(趙鳴鳳)을 사간(司諫)으로, 김상윤(金相尹)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이날 복상(卜相)148) 하였는데, 빈청(賓廳)에서 전망(前望)을 봉입(封入)하니, 임금이 다시 하도록 명하였다. 드디어 우찬성(右贊成) 권상하(權尙夏)를 우의정(右議政)으로 삼고, 이이명(李頤命)을 차례에 따라 좌의정(左議政)으로 올리고, 김창집(金昌集)을 차례에 따라 영의정(領議政)으로 올렸다.
진휼청(賑恤廳)에서 말하기를,
"서울에 여역(癘疫)이 치성하게 만연하여 사교(四郊) 근처의 피막(避幕)에 나가 있는 자가 1천 명에 가까운데, 그 가운데 가난하여 의지할 곳이 없어서 미음을 잇대어 먹지 못하는 자가 혹 나가더라도 마침내 죽게 되는 걱정을 면하지 못합니다. 지난 무자년149) ·기축년150) 에 본청(本廳)에서 양식을 주어 구제한 일이 있으니, 먼저 당부(當部)로 하여금 피막에 나가 있는 사람 가운데 가장 혹심하게 굶주리는 자를 성책(成冊)해 가지고 와서 바치게 한 뒤에 전례에 따라 참작하여 나누어 줌으로써 국가에서 돌보는 뜻을 보이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지아비를 죽인 죄인 상금(尙今)을 삼성 추국(三省推鞫)151) 하여 승복받아 그 간부(奸夫)와 아울러 죽였다.
5월 13일 병인
공조 판서(工曹判書) 조태채(趙泰采)가 상소하기를,
"박상극(朴象極) 등 세 사람은 죄를 진 것이 무겁기는 하나, 한 해가 지나도록 멀리 귀양가 있으므로 그 죄를 조금 징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도리에 어그러지기는 하나 명색이 유생(儒生)이니, 특별히 방환(放還)하도록 허락해도 관대한 은전(恩典)에 해롭지 않을 것입니다. 홍계일(洪啓一)이 선정(先正)의 성명을 함부로 부른 것도 하나의 세변(世變)입니다마는, 그 범한 것을 살펴보면 이미 상(喪)을 당하기 전의 일이니, 이것으로 관용하여 풀어 주어도 불가(不可)할 것이 없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네 사람은 죄를 진 것이 매우 무거우므로, 쉽사리 용서하여 풀어 주는 것은 마땅하지 못하나, 경(卿)이 상소한 대의(大意)가 또한 좋으니, 놓아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어제 진청(賑廳)의 초기(草記)152) 를 보건대, 사교(四郊)에 염병으로 피막(避幕)에 나가 있는 자가 1천 명에 가깝다 하니, 매우 염려스럽다. 서울 백성은 더욱 진휼(軫恤)해야 마땅하니, 의사(醫司)로 하여금 따로 의원(醫員)을 정하여 상당한 약으로 각별히 구료(救療)하게 하고, 마침내 많이 구제하여 살린 자는 본아문(本衙門)에서 계품(啓稟)하여 논공(論功)하게 하라."
하였다.
5월 14일 정묘
예조(禮曹)에서 말하기를,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을 문묘(文廟)에 승배(陞配)하는 일을 중외(中外)에서 일시에 거행해야 마땅할 듯한데, 팔도의 지방은 원근(遠近)이 같지 않고 드는 모든 제구도 갑자기 장만하기 어려울 것이니, 외방(外方)의 향교(鄕校)에서는 올 가을 석채(釋菜)153) 때에 고유(告由)154) 하고, 봉안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이민영(李敏英)을 승지(承旨)로, 황흠(黃欽)을 지중추(知中樞)로, 원휘(元徽)를 황해도 병마 절도사(黃海道兵馬節度使)로 삼고, 송상기(宋相琦)를 겸판의금(兼判義禁)으로 특제(特除)하였다.
5월 15일 무진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 조태로(趙泰老)가 관(官)에서 졸서(卒逝)하였다. 임금이 세 도(道)에 명하여 담군(擔軍)을 주어 호송하라고 명하고, 이어서 묘당(廟堂)에 명하여 그 대신할 사람을 빨리 천거하여 며칠 안에 사조(辭朝)시키게 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이정익(李禎翊)이 대관(臺官)이었을 때에 낸 사직 단자(辭職單子)를 대청(臺廳)에 나아가 행공(行公)한 이튿날에 봉입(捧入)하였고, 전 사서(司書) 유척기(兪拓基)가 제배(除拜)되고 사은(謝恩)한 지 겨우 두어 날이 지나서 자신이 금중(禁中)에 입직(入直)하였을 때에 병을 핑계하여 곧 사직 단자를 냈는데 부당하게 그 뜻을 따라 서둘러 봉입(捧入)하였습니다. 이 길이 한 번 열리면 뒷 폐단을 막기 어려우므로, 경책(警責)하는 방도가 없을 수 없으니, 전후의 해당 승지(承旨)를 모두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도록 명하고, 인하여 후사(喉司)에 경계하여 입직 중에 정고(呈告)155) 하는 폐단을 막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단의 일만 따랐다. 이어서 특교(特敎)를 내리기를,
"유척기는 젊은 신진(新進)으로서 이미 병이 없는데, 은명(恩命)에 숙사(肅謝)한지 오래지 않아 곧 사직 단자를 내었다. 입직 중에 정고한 것에 이르러서는 일찍이 듣지 못하던 일이니, 봉입한 승지만을 추고할 수는 없다. 봉입한 승지와 유척기를 종중 추고하라."
하였다.
5월 16일 기사
평안도 성천부(成川府)에 얼음과 우박이 섞여 내렸는데, 큰 것은 거위 알만 하였다. 여러 가지 곡식이 참혹하게 그 해를 받았다.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재신(宰臣)들을 인견(引見)하였다.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일전에 매복(枚卜)하여 이미 어질고 덕이 있는 사람을 얻었으니, 실로 조야(朝野)의 바람에 부응한 것입니다. 지난번 온양의 행궁(行宮)에서 특별히 명하여 인접(引接)하셨을 때에 은례(恩禮)가 특이하였으나, 마침 아들의 병 때문에 앞질러 돌아갔습니다. 이제 지극한 정성으로 불러 함께 현시의 어려움을 구제한다면, 나라의 일이 다행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온양에 있을 때에 그 아들의 병으로 인하여 문득 돌아갔으므로 반드시 오게 하려는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나, 이번에 매복한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되니, 반드시 오게 하고야 말려 한다."
하였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올 가을에는 과거(科擧)가 겹쳤으므로 가을 농사가 혹 잘 되더라도 과장(科場)을 설치하는 폐단이 적지 않을 것이니, 중시(重試)156) 의 대거(對擧)인 별시(別試)157) 를 정시(庭試)로 고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정시로 설행(設行)하라고 명하였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서북(西北)의 별과(別科)를 이미 올 가을로 물려 정하였고, 호서(湖西)의 과거에 시관(試官)을 보내어 시취(試取)하는 일도 이미 정탈(定奪)하셨으므로, 세곳의 과거가 병행될 형세입니다. 서북의 시관은 반드시 7월까지 내려보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좌의정(左議政) 이이명(李頤命)이 말하기를,
"근일에 장령(掌令) 조성복(趙聖復)이 상소하여 정시(庭試)·알성시(謁聖試)에 초시(初試)를 설행하기를 청하였으나, 성상께서 윤허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이 의논은 유래가 이미 오래 되었고, 근래에 과장의 혼란이 갈수록 심해져서 임진년158) 과거 때에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대개 수행하는 사수(寫手)를 많이 데리고 들어가서 소치이니, 초시를 설행하는 것이 편호(便好)할 듯합니다. 무과(武科)는 정시·알성시에 모두 초시가 있는데, 문과(文科)·무과가 달라서는 마땅하지 못합니다. 이제 3소(所)에서 각각 1천 인을 뽑는다면, 글 한 편(篇)을 이룬자 이상을 죄다 뽑을 수 있고, 전정(殿庭)이 어지러운 폐단도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알성시는 한사(漢史)에, ‘교문(橋門)을 둘러싸고 관광하는 자가 억만(億萬)을 셀만큼 많았다.’한 말을 보면, 예전부터 관광하는 자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하였다. 좌참찬(左參贊)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알성 때에 거자(擧子)가 많기 때문에, 춘당대(春塘臺)에서 과거를 설행한 일이 잦았습니다. 정시도 이 전례에 따라 춘당대에서 설행하면, 아마도 혹 마땅할 듯합니다."
하고, 김창집도 말하기를,
"수행하는 사수를 금단하는 방도로는 초시를 설행하는 것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알성시는 정시와 다르므로 초시를 새로 설행할 수 없으나, 정시는 변통하여도 무방하니, 초시를 설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그 뒤에 민진후가 연중(筵中)에서 임금에게 방애되고 불편한 것이 많다고 아뢰었으므로, 원임 대신(原任大臣)에게 의논을 거두었는데, 마침내 초시는 그만두고 다만 춘당대에서 설행하게 하였다.】 이이명이 말하기를,
"온양 과거는 이미 친림(親臨)하셨을 때에 설행하지 못하였으니, 시소(試所)를 반드시 온양에 정할 것 없이 따로 도회(都會)를 정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시소는 공주(公州)에 정하고, 시관은 양계(兩界)의 규례에 따라 중신(重臣)을 차출하여 보내라고 명하였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진정(賑政)159) 을 파한 뒤에 외방 고을의 굶주리는 백성이 본토로 많이 돌아갔으나, 간혹 경중(京中)에 남아 의지할 데가 없어 길가에서 곤경을 겪는 자가 있으니, 진청(賑廳)에 분부해서 죽을 마련하여 먹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죽을 마련하는 것과 건량(乾粮)을 나누어 주는 것은 어느 것이 나은가?"
하자, 이이명이 말하기를,
"진청으로 하여금 편의에 따라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그 뒤에 진청에서 회계(回啓)하여 10일을 한정하여 건량을 주었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근래에 공조 판서(工曹判書) 조태채(趙泰采)가 상소함에 따라 임상극(林象極) 등 세 사람을 놓아보내라는 명이 있었고, 홍계일(洪啓一)도 상을 당하기 전에 범한 것이라 하여 석방되었습니다. 다른 선비는 신이 혐의스러워서 감히 논할 수 없습니다마는, 홍계일은 금중(禁中)에서 선정(先正)의 이름을 함부로 부른 것이 매우 명백할 뿐만 아니므로, 논죄(論罪)하며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조태채가 송성명(宋成明)의 여론(餘論)을 주워모아 문득 석방하기를 청하였으므로, 물정이 이 때문에 답답해 하였는데, 삼사(三司)에서는 오히려 논쟁하는 일이 없으니, 신은 참으로 개탄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공판(工判)의 상소에도 의견이 있으므로 모두 용서하게 하였는데, 주워 모았다고 말하는 것이 지나치다."
하였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고(故) 급제(及第) 강석기(姜碩期)는 인조(仁祖) 때의 명상(名相)이고, 선정신(先正臣) 김장생(金長生)의 고제(高弟)입니다. 예절로 자신을 단속하고, 충성으로 임금을 섬겼으나, 불행하게도 죽은 뒤에 그 집이 화를 당하여 추탈(追奪)하자는 논의가 지하에까지 미쳤습니다. 그때 대간(臺諫)의 논계(論啓)에 대한 비답(批答)에 ‘처음부터 끝까지 청렴하고 근신한 것을 내가 매우 아름답게 여기는데, 그 처자의 죄 때문에 차마 이미 죽은 뒤에 죄줄 수는 없다.’고 하교하시다가, 여러 번 논계하고서야 비로소 윤허하셨으니, 성조(聖祖)께서 신하를 아는 것이 깊으셨음을 우러러 알 수 있습니다. 예전에 한(漢)나라의 곽광(霍光)은 그 아내 곽현(霍顯)이 죄를 지어 죽은 뒤에도 오히려 그 자신이 죽은 뒤에 뒤미처 죄받는 것을 면하였습니다. 이제 강석기는 충성스럽고 근실한 것이 평소에 드러났는데, 그가 죽은 지 4년 뒤에 집안의 화가 빚어졌으므로 물정이 지금까지도 불쌍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성상께서 만약 성조께서 차마 죄줄 수 없다 하신 덕음(德音)을 생각하여 복관(復官)하는 은전(恩典)을 특별히 베푸신다면, 어찌 성덕(聖德)이 빛나지 않겠습니까?"
하고, 이이명이 이어서 그 억울함을 매우 힘써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이명한(李明漢)의 문집(文集)에서 강석기의 시장(諡狀)을 보았는데, 참된 재상(宰相)이었다. 마침내 감동하여 세 절구(絶句)를 지었는데, 이것이 임진년160) 여름의 일이다. 그때 내가 강석기가 추탈(追奪)된 가운데에 들어 있는 것을 알았더라면, 반드시 그 관작(官爵)을 회복시켰을 것이다. 오늘 대신이 아뢴 것이 마땅하니, 특별히 복관하도록 하라."
하였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건명(李健命)이 말하기를,
"양역(良役) 가운데 충장위(忠壯衛)의 명목은 전사(戰死)한 자의 자손에 대한 것입니다. 해마다 베[布] 한 필을 바치고 증손 이하는 군역(軍役)에 채우는데, 지난번 승지(承旨) 윤행교(尹行敎)의 계달(啓達)로 인하여 군역에 충정(充定)하지 않기로 정식(定式)하였다 합니다. 대저 조정에서 음덕(蔭德)을 적용하는 데에는 각각 대수(代數)가 있습니다. 그 아들과 손자는 충장위가 되고 베 한 필을 바치는데, 증손은 이미 충장위에 들어가지 않고, 또 군역에 충정하지 않는다면 그 음덕이 도리어 아들과 손자보다 더할 것이니, 어찌 도치(倒置)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3대로 한정하라고 명하였다. 사간(司諫) 조명봉(趙鳴鳳)·장령(掌令) 조성복(趙聖復)이, 임상극(林象極) 등 네 사람의 일을 쟁집(爭執)하지 않는다고 대신(大臣)에게 배척받았다 하여 인피(引避)하여 퇴대(退待)하였다. 응교(應敎) 어유귀(魚有龜)가 말하기를,
"임상극·권필형(權弼衡) 등의 소어(疎語)와 공사(供辭)는 아주 사리에 어긋나고 윤기(倫紀)가 없으니, 결코 한 해가 지났다 하여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5월 17일 경오
지평(持平) 김상윤(金相尹)이 임상극(林象極) 등을 석방하라는 명에 대하여 쟁집(爭執)하지 않았다고 대신에게 배척받았다 하여 인피(引避)하여 퇴대(退待)하였다. 이튿날 헌부(憲府)에서 처치하여 사간(司諫) 조명봉(趙鳴鳳)·장령(掌令) 조성복(趙聖復)을 모두 체차(遞差)하였다.
안중필(安重弼)을 승지(承旨)로, 김유(金楺)를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삼았다.
이조 참판(吏曹參判) 정호(鄭澔)가 현도(縣道)를 통해 상소하여 사직하고, 아울러 덧붙여 진계(陳戒)하였는데, 이르기를,
"예전에 주자(朱子)도 만년에 안질이 있었는데, 반숙도(潘叔度)161) 에게 보낸 글에 이르기를, ‘정력이 더욱 떨어지고 안력이 아주 약해져서 문자를 볼 수 없다. 눈을 감고 한가하게 앉아 있으면, 도리어 방심(放心)을 수습할 수 있어서 전일에 빗나갔던 것을 깨닫는 것이 적지 않다.’ 하였습니다. 아아! 주자 같은 대현(大賢)으로서 어찌 문득 실상이 없는 큰 소리로 잠시 스스로 위안하는 임시 방편의 말을 하겠습니까? 대저 천도(天道)를 즐기로 천명(天命)을 아는 마음과 고요히 안정하고 편안히 생각하는 공(功)으로 안에 거둬들이고 만나는 데에 따라 안정하여 정신이 정수(精粹)하고 심기가 화평하였으니, 대개 평소에 외면으로 빗나가는 병통에 대하여 징계하는 바가 있어서 그러한 것입니다. 신(臣)이, 의원(醫員)이 전하는 것을 듣건대, 성명(聖明)의 안질을 담화(痰火)가 빌미가 되어 그것이 오르내림에 따라 어두워지고 밝아지고, 때때로 심해지거나 덜해지는 듯하다 합니다. 대개 화가 병이 되는 것은 흔히 마음에서 비롯되므로, 화를 누르는 방도는 마음에 달려 있을 뿐이니, 성명의 평소 학력(學力)을 바로 오늘 나타내시기 바랍니다. 화를 누르고 마음을 지키는 공부를 시험해 보시려면, 반드시 주자가 만년에 처신한 것을 본받아 외면으로 빗나가는 생각을 끊어서 천도를 즐기고 천명을 아는 지경에 이르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화가 내려서 시력이 밝아지고 심기가 화평하여 크고 작은 모든 증세가 차례로 편안하게 회복될 것이며, 사무에 응하는 데에 이르러서도 저절로 그 도리가 있게 될 것입니다. 예전에 연평(延平) 이동(李侗)이 주자에게 말하기를, ‘대단히 걱정을 물리쳐 버리지는 못하더라도 다만 옛사람이 당한 크게 감당하지 못할 경우가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여 스스로 견주는 마음을 갖는다면, 조금은 안정할 수 있다.’ 하였는데, 주자가 처음에는 그 말을 매우 비루하게 여겨, ‘어찌 이와 같은 데 이르겠느냐?’ 하였으나, 뒤에 일에 임하여 도리어 힘을 얻은 데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로써 보건대, 주자가 말년에 스스로 안정한 것이 연평의 가르침에서 힘을 얻은 것이 아닐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성명께서도 연평의 말을 비루하게 여기지 마시고, 주자가 당하고 처신한 것으로 스스로 견주는 마음을 가지신다면, 또한 반드시 힘을 얻는 데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진계한 말은 내가 마땅히 유의하겠다."
하였다.
5월 18일 신미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임상극(林象極)·권필형(權弼衡)의 소어(疏語)와 공사(供辭)는 뜻이 음흉하고 참혹하며, 박사제(朴師悌)가 소란을 일으킨 거동은 아주 도리에 어긋납니다. 그리고 홍계일(洪啓一)에 이르러서는 감히 금정(禁庭)의 지엄한 곳에서 선정(先正)의 성명을 함부로 부르며 방자한 뜻으로 욕하였으므로 본디 조금도 용서할 만한 단서가 없는데, 모두 용서한 것은 징계하는 법에 어긋나니, 석방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승지(承旨) 이성조(李聖肇)를 보내어 증(贈) 영의정(領議政)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의 사당에 유고(諭告)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왕은 말하노라. 임금이 정학(正學)을 표창하는 것은 선비의 추향을 정하기 위함이고, 성묘(聖廟)에 선현(先賢)을 올리는 것은 도통(道統)을 밝히기 위함인데, 욕례(縟禮)를 거행하려 하니, 공론이 다 같았다. 내가 생각하건대, 본조(本朝)에서는 치도(治道)에 유술(儒術)을 숭상하여 학교(學校)·상서(庠序)를 크게 갖추니, 문도(文道)가 개선되어 총명(聰明)한 호걸(豪傑)이 잇달았고 명세(名世)가 이어 나왔는데, 인문(人文)의 극성(極盛)을 더한 것은 선조(宣祖) 때에 이르러 더욱 융성하였다. 경(卿)을 생각하건대, 일찍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대현(大賢)에게 배우니, 그 넓고 깊은 것으로 말하면 땅이 만물을 지고 바다가 만물을 적시는 기상이고, 그 독실함을 말하면 남보다 백배 힘쓰는 공부이었다. 처음에는 스스로 간절히 물어서 근사(近思)하다가, 마침내 아래로 인사(人事)를 배워서 위로 천리(天理)에 통달하니, 성명(性命)의 정미(精微)한 온오(蘊奧)가 큰 근본을 환히 알고 이기(理氣)의 선후(先後)하는 분별은 끼친 뜻을 더욱 밝혔다. 나이가 더욱 높아지면서 덕이 밝아지고, 체(體)가 서고 나서는 용(用)이 행해지니, 탐구하고 강론(講論)한 공(功)은 멀고 가까운 곳에서 감화(感化)되었고, 완책(玩幘)하고 침잠(沈潛)한 보람은 날로 고명(高明)해졌다. 뜻이 깊은 예절과 의심스러운 글에 대해서도 자세히 분석한 것이 많고, 길흉(吉凶)의 상례(常禮)·변례(變禮)에 대해서도 뭇 논설을 절충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크고 작고 높고 낮은 사람들이 다 훌륭한 은혜를 입었으니, 한 세상에서 태산(泰山)·북두(北斗)처럼 뛰어났으며, 어두운 거리에서 해·별처럼 밝았다. 그래서 성조(聖祖)께서 불러서 나라 사람들의 긍식(矜式)을 삼게 하시니, 정심(正心)·성의(誠意)의 학문은 임금을 바르게 하는 일을 먼저 하였고, 천덕(天德)·왕도(王道)의 요체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어려움이 없었다. 아아! 포부를 다하지 못하였어도 전형(典型)은 남아 있으나, 숙속(菽粟)162) 의 맛과 포백(布帛)163) 의 무늬가 귀한 줄 아는 자가 드물다고 말하지 말라. 강수(江水)·한수(漢水)에 빨고 가을 볕에 쬐었다 한 데에서 덕을 사모하는 것이 깊었음을 알 수 있다. 공문(孔門)의 사과(四科)164) 에서는 덕행(德行)이 십철(十哲)165) 중에서 으뜸을 차지하고, 증자(曾子)의 삼성(三省)166) 에서는 충서(忠恕)가 일관하여 전해졌으니, 그 공은 옛것을 이어서 뒤를 열었고, 그 교화는 세상에서 표준이 되어 풍속을 투텁게 하였다. 영재(英才)를 즐겨 길러 큰 문하에서 많은 선비가 나왔고, 정도(正道)를 크게 밝혀 후학(後學)이 모두 모범을 우러렀으니, 어찌 한 나라에서만 본받겠는가? 또한 백대(百代)의 사종(師宗)이다. 이증(貤贈)은 다시 더할 수 없는데 숭보(崇報)는 미처 그 실상에 맞지 못하니, 또한 성무(聖廡)에 종향(從享)하는 예(禮)가 모두 마땅하다고 한다. 대개 문정(文正)167) 이 높인 논의가 어찌 좋아하는 바에 아첨한 것이겠는가? 뭇사람의 뜻이 3기(紀) 동안 답답해 하였고, 뭇사람의 호소가 팔방에서 더욱 조급해 하였는데, 조정의 의논을 널리 묻기 전에 이미 내 뜻이 먼저 정해졌으니, 어진 사람을 무함하고 바른 사람을 헐뜯는 버릇이 그에게 무슨 손상이 되겠는가? 도(道)를 지키고 유(儒)를 높이는 정성을 지금 다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경을 문묘(文廟)의 곁채에 종사(從祀)하여 통서(統緖)를 전철(前哲)에 잇고, 위서(位序)를 문성(文成)168) 의 다음에 둔다. 음풍농월(吟風弄月)169) 한 것이 의연(依然)함은 석담(石潭)의 함장(函丈)이고, 승당입실(升堂入室)170) 하여 황연(怳然)히 행단(杏壇)171) 에 섭제(攝齊)하였으니 큰 덕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누가 여기에 낄 수 있겠는가? 아마도 하늘의 뜻이 선택하였을 것이다. 아름다운 모습을 대하지 못하므로 구원(丘原)에서 일어날 수 없는 것이 한스러우나, 향사(享祀)는 길이 보존되므로 가묘(家廟)에서 조천(祧遷)하지 않도록 다시 명하고, 성화(聖化)를 창명(彰明)하여 군심(群心)을 위답(慰答)한다. 아아! 공이 큰 자는 그 보답이 반드시 클 것이고 덕이 두터운 자는 그 미치는 것이 반드시 요원할 것이니, 영령(英靈)이 잠잠히 도우면 국맥(國脈)의 연장을 이룰 것이고, 문교(文敎)가 성하게 일면 세도(世道)의 형태(亨泰)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교시(敎示)하니, 잘 알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대제학(大提學) 송상기(宋相琦)가 글을 지었다.
5월 19일 임신
민진후(閔鎭厚)를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홍우녕(洪禹寧)을 대사간(大司諫)으로, 권엽(權熀)을 사간(司諫)으로, 조명겸(趙鳴謙)을 장령(掌令)으로, 김여(金礪)를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5월 20일 계유
증(贈) 영의정(領議政)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을 문묘(文廟)의 서무(西廡)에 종사(從祀)하고, 팔방에 반교(頒敎)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왕은 말하노라. 하늘이 이름 높은 참선비를 내어 통서(統緖)가 이미 전철(前哲)에 이어졌고, 나라에 종사(從祀)하는 성대한 전례(典禮)가 있어 제사가 방금 반궁(泮宮)172) 에서 거행되었으니, 여론에 따라 널리 알린다. 내가 생각하건대, 성묘(聖廟)의 제사는 실로 도학(道學)의 연원(淵源)을 위한 것이니, 친히 가르침을 받거나 사숙(私淑)한 어진이에 대한 예(禮)는 본디 모두 질서에 따라 다해야 하거니와, 학업을 받고 도(道)를 전한 선비의 공도 한 경서(經書)에만 통달한 이를 폐기하지 않았다. 우리 열성(列聖)께서 서로 이어오며 뭇 어진이가 배출되었는데, 문(文)을 숭상하여 교화를 일으킨 것은 참으로 배양(培養)한 방도에 힘입었고, 후학(後學)을 계도(啓導)하고 전철을 빛내어 아름답고 밝은 정치를 크게 도왔으니, 여기에서 하늘의 뜻을 알 수 있으며, 그러므로 오도(吾道)가 길이 전해졌다. 이 철인(哲人)을 보건대, 성세(盛世)에 나서 현사(賢師)의 깊은 뜻을 잘 지키면서 간절히 물어 자신을 돌이켜 보며 생각하였고, 성학(聖學)의 근원에 마음을 깊이 두어 널리 배워서 예(禮)로 자신을 단속하였는데, 오로지 참으로 안 것이라야 실천하였다. 그래서 덕이 성취되고 도(道)가 높아지니, 상서로운 해와 온화한 바람에 만물이 화평하여 기상이 크고 두터운 데에 이를 수 있었다. 상세하게 뭇 사리가 밝혀져서 조예가 높고 깊은 데에 저절로 이르니, 홍의(弘毅) 순독(醇篤)한 모습에 충실하고 빛나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사리를 깊이 생각한 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예가(禮家)를 고구(考究)한 것이 더욱 상세하였다. 고금에 손익(損益)한 마땅한 것을 참작하여 바른 것을 얻어 길흉(吉凶)의 상례(常禮)·변례(變禮)를 남김없이 모두 통달하니, 성현(聖賢)에게 질정해도 의심스러운 것이 없었다. 그 본말(本末)을 말하면 모두 갖추어져 관중(關中)의 선비들이 예절로 가르치는 횡거(橫渠)173) 에게 앞다투어 나아가고, 수사(洙泗)174) 의 바른 전통이 마침내 질박한 증자(曾子)에게 돌아간 것과 같았다. 나이가 더욱 높아져서 태산(泰山)·북두(北斗)처럼 우러러보았는데, 자취는 물러갔을망정 교화가 나라에 두루 미쳐서 소식을 듣고 덕을 본 무리가 크건 작건 할 것 없이 모두 우러르니, 세상을 맑게 하고 풍속을 바로잡은 효험이 어찌 살아 있을 때나 죽었을 때나 다름이 있겠는가? 어찌 문헌(文獻)을 밝힐 수 있을 뿐이겠는가? 또한 공렬(功烈)이 더욱 높다. 전해 주고받은 것이 명백하여 문성(文成)175) 의 정통을 친히 이어받았고, 규모가 근엄하여 위로 고정(考亭)176) 의 정맥(正脈)을 이었으니, 문묘에 종향(從享)하자는 의논은 온 나라에서 함께 하는 말이었다. 뭇사람의 뜻에 대하여 한 번 윤허를 아낀 것은 처음에 신중히 하는 뜻 때문이었으나, 유편(遺編)을 여러 번 보고 높이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였다. 한(漢)나라 선비가 전주(箋注)한 공에 비하여 이것이 더 크니, 공문(孔門)의 우익(羽翼)의 반열에 둔들 누가 감히 비난하겠는가? 더구나 선비의 추향이 여러 가지로 갈라져서 사도(斯道)의 일통(一統)을 밝혀야 할 이때이겠는가? 숭보(崇報)하여 표창하는 일이 진실로 나에게 달려 있고, 고무하여 진작하는 방도도 여기에 말미암을 것이니, 어찌 한 사람의 사사로운 뜻으로 함부로 백세(百世)의 정론(定論)을 삼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달 20일에 증 영의정 문원공 김장생을 문묘의 서무에 종사한다. 아아! 유선(儒先)의 도학(道學)이 더욱 빛나고, 국가의 원기(元氣)가 절로 굳건해지니, 갱장(羹牆)177) ·강한(江漢)은 많은 선비의 끝없는 사모를 위로하고 역복(棫樸)·청아(菁莪)는 한 세상의 크게 변하는 교화를 기대할 것이다. 그러므로 교시(敎示)하니, 잘 알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대제학(大提學) 송상기(宋相琦)가 글을 지었다.
충청·전라 두 도의 유생(儒生) 김도기(金道基) 등이 상소하여 이상채(李相采) 등이 근거 없이 헐뜯은 말을 변명하였는데, 그 상소에 대략 이르기를,
"인조(仁祖)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부터 선정신(先正臣) 김장생(金長生)의 도덕을 익히 들어서 평소에 존중하셨으므로, 개기(改紀)하여 곧 수교(手敎)를 내려 징소(徵召)하셨는데, 저들이 어찌 이것을 몰라서 훈귀(勳貴)에 인연하였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아아! 저들이 계해년178) 의 훈귀를 어떠한 훈귀로 여기는 것입니까? 조여우(趙汝愚)가 주자(朱子)를 천거하였는데, 한탁주(韓侂胄)의 당류(黨類)는 도학(道學)과 권신(權臣)이 결탁하여 당을 위하여 죽을 힘을 다한다고 논하였고, 공문중(孔文仲)은 이천(伊川)179) 이 귀신(貴臣)을 두루 알현하였다고 무함하였으니, 어쩌면 간사한 소인의 말은 천고(千古)에 한 입에서 나온 듯합니까? 장남헌(張南軒)180) 은 음덕(蔭德)으로 보직(補職)되었고, 유병산(劉屛山)181) 도 아버지의 음덕으로 보직되었는데, 음사(蔭仕)를 천시할 만하다고 여겼다면, 주자가 어찌 병산에게 배우고 남헌에게 벗하려 하였겠습니까? 더구나 김장생이 천거에 의한 벼슬을 받으려 하지 않고 음관(蔭官)으로 자처한 것은 바로 조광조(趙光祖)가 효행(孝行)으로 벼슬을 받으려 하지 않고 부거(赴擧)한 것과 같으니, 더욱 그 독실한 심학(心學)을 알 수 있는데, 도리어 이것을 허물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자장(子張)은 벗인데도 증자(曾子)가 최복(衰服)으로 조문(弔問)하였는데, 더구나 이이(李珥)에게 스승과 제자 사이가 되는 김장생이겠습니까? 이것은 스스로 선거(選擧)를 막는 자가 예(禮)를 읽지 않은 소치입니다. 또 남의 말을 듣고나서 스스로 그 잘못을 깨달았으니, 이들이 오히려 이것을 청의(淸議)로 여기겠습니까? 낭서(郞署)로 의망(擬望)한 데에 이르러서는 엄한 분부를 내리게까지 하였다는 것은 대개 그때 이산해(李山海)의 무리가 성총(聖聰)을 현혹시켜 성혼(成渾)이 성조(聖祖)께 신임받은 일을 가지고도 오히려 뜻밖에 당적(黨籍)에 걸리게 하였는데, 더구나 지취가 소원(疏遠)하고 벼슬이 낮은 김장생이겠습니까? 말단인 문예(文藝)는 본래 도학의 경중(輕重)을 삼을 것이 못되어, 안자(顔子)·민자(閔子)의 덕행(德行)은 자유(子游)·자하(子夏)의 문학을 겸할 필요가 없었으며, 정자(程子) 또한 스스로 자후(子厚)182) 만한 필력(筆力)이 없다 하였고, 화정(和靖)183) 윤씨(尹氏)는 모든 조정(朝廷)에 들이는 문자(文字)를 문인(門人) 여본중(呂本仲) 등으로 하여금 대신 짓게 하였으니, 선정(先正)이 문사(文辭)에 대하여 간략하고 질박하기를 힘쓰고 문채(文采)를 일삼지 않은 것이 어찌 그 병통이 될 만하겠습니까? 《상례비요(喪禮備要)》는 신의경(申義慶)에게서 비롯하였으나, 선정의 손에서 상세히 증명되고 가감되었으니, 이 때문에 본디 지은 사람이 있다고 하는 것은 이미 그 사실에 어긋납니다. 더구나 《가례집람(家禮輯覽)》은 선정이 스스로 편수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주장한 것이겠습니까? 대저 천인(天人)·성명(性命)의 본원은 인륜(人倫)에서 도피할 수 없고, 성의(誠意)·정심(正心)·격물(格物)·치지(致知)의 학문도 인륜을 다하는 데에서 찾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인데, 이들이 군신(君臣)·모자(母子)의 윤리에 죄를 얻은 자로서 무슨 도덕과 학문을 안다고 감히 이에 대하여 말하는 것입니까? 송익필(宋翼弼)은 이이(李珥)·성혼(成渾) 두 유현(儒賢)이 더불어 도의(道義)로 교유하였는데, 선정이 송익필에게 배운 것이 도리어 무슨 허물이겠습니까? 정개청(鄭介淸)은 정여립(鄭汝立)에게 당부(黨附)한 자이고, 정철(鄭澈)은 정여립을 안치(按治)한 자인데, 이들은 정개청을 가리켜 현사(賢士)라 하고, 정철을 욕하여 거간(巨奸)이라 하며 변함없이 전습(傳襲)하여 대대로 그 악을 이루니, 어찌 송익필이 능히 그 아비의 허물을 덮은 것보다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아아! 이들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그 유래가 멉니다. 정여립·정인홍(鄭仁弘)의 당류가 왕세충(王世充)·두건덕(竇建德)의 원수184) 를 갚으려고 충청(忠淸)하고 강직한 정철을 곧바로 함정에 몰아넣었는데, 그 기세에 눌려서 온 세상에서 휩쓸려 따랐습니다. 성문준(成文濬)은 바로 성혼의 아들인데도 정철을 허물하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다른 사람은 오히려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선정만이 의연히 스스로 도리를 지켜 바른 것은 돕고 간사한 것을 누르고 은밀히 국맥(國脈)을 부지하여 성조(聖祖)의 중흥(中興)을 융성하게 하였으니, 그가 착한 것을 좋아하고 악한 것을 미워한 공효(功效)가 여기에서 나타났습니다. 윤선거(尹宣擧)는 성문준의 생질인데, 자기의 허물을 씻기에 바빠서 선정의 아들인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의 문하에 귀의(歸依)하였으나, 그는 선정에 대하여 본디 속에 가득히 불평을 가진 자이므로, 마침내 윤휴(尹鑴) 등과 표리가 되어 친하게 사귀었고, 그 아들인 윤증(尹拯)은 윤휴의 아들인 윤의제(尹義濟)의 벗의 사위이고 윤추(尹推)는 이유(李𣞗)의 사위이니, 이 한 가지 단서를 보아도 그 소굴에서 부탁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근년에 종사(從祀)에 관한 수의(收議)하였을 때 윤증은 바라지 않은 뜻을 약간 보였으나, 남구만(南九萬)은 앞장서 논의하여 힘껏 막았습니다. 남구만은 윤증의 마음으로 허여한 벗인데, 언의(言議)가 사나와서 번번이 명의(名義)와 서로 배치(背馳)되니, 그 말이 어찌 사문(斯文)의 경중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이상채는 이것을 가리켜 다른 말이라 하는 것입니까? 아아! 종사하는 전례(典禮)는 사체(事體)가 중대하니, 우리 동방의 일을 두루 헤아려 보건대, 본조(本朝)보다 성대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른 것이 있으면 간사한 것이 있고 옳은 것이 있으면 그른 것이 있으니,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이 바르고 옳다면 임사홍(任士洪)·유자광(柳子光)이 간사하고 그르며, 조광조(趙光祖)가 바르고 옳다면 남곤(南袞)·심정(沈貞)이 간사하고 그르며, 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이 바르고 옳다면 이기(李芑)·이양(李樑)·윤원형(尹元衡)·정순붕(鄭順朋)이 간사하고 그르며, 이이·성혼이 바르고 옳다면 정여립·정인홍이 간사하고 그른 것입니다. 사정(邪正)·시비(是非)는 서로 대립되니, 김굉필·정여창이 이송(二宋)185) 에게 전한 것이 바른 것이고, 임사홍·유자광이 윤휴·윤선도(尹善道)에게 전한 것이 간사한 것입니다. 이상채·양명하(梁命夏) 등은 태어날 때부터 음흉하고 편벽되어 심술이 몹시 막혔습니다. 그 고조·증조·할아비·아비 때부터 첫 번째 이이와 적이 되어 정여립을 빚어내고, 두 번째는 성혼과 적이 되어 정인홍을 빚어내고, 세 번째는 송시열·송준길과 적이 되고 윤휴·허적(許積)을 빚어냈습니다. 국가에서 은혜를 너그럽게 하여 미처 죄다 주멸(誅滅)하지 않았더니, 감히 흉악한 무리를 불러 모아 스스로 선비들이라 일컬어 거만하게 뽐내며 명륜당(明倫堂)에서 논열(論列)하니, 이 일이 어찌 국가의 크게 수치수러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는 이윤신(李潤身)과 조선(趙銑) 등이 후원이 되었으므로, 믿는 것이 있어서 대낮에 함부로 혀를 놀리는 것일 뿐입니다. 아아! 군자는 옳은 듯하면서 그른 것을 미워하거니와, 《춘추(春秋)》에는 ‘난신(亂臣)·적자(賊子)를 칠 때에는 먼저 그 당여(黨與)를 다스린다.’ 하였습니다. 이상채·양명하의 정상은 알기 쉬우나 이윤신·조선은 알기 어려운데, 알기 쉬운 자는 그 해독이 적으나 알기 어려운 자는 그 해독이 큽니다.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시비의 근원을 깊이 구명(究明)하고, 더욱 엄중하게 사정(邪正)을 구분하셔서 사문과 세도(世道)를 위하여 뜻을 더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선정을 위하여 무함을 변명한 것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으므로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소(疏) 끝에 아뢴 것은 더욱이 좋으니 유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5월 21일 갑술
함경도 영흥부(永興府)의 생원(生員) 주태하(朱泰夏)가 상소하기를,
"임진년 병란 때에 준원전(濬源殿)의 수복(守僕)들이 영정(影幀)을 모시고 부(府)의 서쪽에 있는 요덕산(耀德山)으로 피하여 겨우 위험을 면하였고, 병자년의 난리 때에는 본부(本府)의 유생(儒生) 박효남(朴孝男)이 말응도(末應島) 안에 있는 뱃사공의 집에 수용(晬容)을 옮겨 모셔서 다행히 보전하여 무사하였으니, 환난(患難)을 미리 막은 도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의 서쪽 60리 되는 곳에 옛 성이 있는데, 천 길의 돌벼랑이 사면으로 깎아지른 듯하고, 그 가운데에 수십인을 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하맥(下脈)이 말응도가 되니, 청컨대, 더 수축하여 작은 암자를 두어 중들로 하여금 살게 하고, 말응도에는 두어 간의 집을 두어 백성을 옮겨 살게 함으로써 난리를 당하여 임시로 모시는 곳으로 삼으소서. 또 성조(聖祖)께서 탄생하신 터가 전(殿)에서 동쪽으로 2리쯤 되는 곳에 있는데, 곧 흑석리(黑石里)라는 곳입니다. 한준겸(韓浚謙)이 방백(方伯)이었을 때 친히 봉심(奉審)하고, 더욱 경작을 금하게 하여 오히려 황폐한 땅이 되었으니, 그 터에 단(壇)을 쌓고 담을 두르고 돌을 세워 일을 기록하여 영구히 보전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그 소를 예조(禮曹)에 내렸다. 예조에서 복주(覆奏)하기를,
"함흥 본궁(咸興本宮)은 열성(列聖)의 위판(位版)을 봉안(奉安)한 곳인데도 병란을 피할 곳을 미리 설치하지 않았으니, 이제 이 성을 쌓고 집을 세우자는 말은 지나친 생각인 듯합니다. 성조께서 탄생하신 터는 비록 도신(道臣)이 백성에게 경작을 금하였더라도 세월이 오래 되어 황폐한 것은 참으로 흠결이 되는 일이니, 도신으로 하여금 친히 봉심하여 그 곳을 확실히 안 뒤에 단을 쌓고 비석을 세우게 하여 표지하는 곳으로 삼으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5월 22일 을해
김보택(金普澤)을 승지(承旨)로, 심공(沈珙)을 수찬(修撰)으로, 홍계적(洪啓迪)을 교리(校理)로, 조언신(趙彦信)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5월 25일 무인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고, 또 논핵(論劾)하기를,
"금천 군수(金川郡守) 전시원(田始元)은 본디 평범한 무변(武弁)으로서 본디 이력이 없는데, 다만 금영(禁營)의 자벽(自辟)으로 말미암아 갑자기 외람되게 제수되었으니, 개차(改差)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이희조(李喜朝)를 대사헌(大司憲)으로, 이정익(李禎翊)을 사간(司諫)으로, 김상옥(金相玉)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5월 26일 기묘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니, 임금이 전시원(田始元)의 일만 따랐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좌의정(左議政) 이이명(李頤命)과 형관(刑官) 및 삼사(三司)에서 빈청(賓廳)에 모여 경기(京畿)·호서(湖西)의 시수 죄인(時囚罪人)과 형조의 시수 죄인(時囚罪人)과 각도의 형옥(刑獄)에 관한 계본(啓本) 중에서 해조(該曹)에서 이미 회계(回啓)하였으나 정원(政院)에 머물러 두고 아직 입계(入啓)하지 않은 자와 새로 도착하여 아직 회계하지 않은 자를 모두 검토하여 경중을 나누어 감단(勘斷)하여 아뢰었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진후(診候)를 마치자, 도제조(都提調)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북한(北漢)은 국가의 보장(保障)의 땅인데 규모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탕춘대(蕩春臺) 또한 창고를 설치하여 곡식을 저축하고, 또 수문(水門)을 만드는 일을 등한히 버려둘 수 없습니다. 북한은 벼슬이 높은 무신(武臣)을 별장(別將)의 직임으로 차출하였으나, 탕춘대에 이르러서는 아직 주장하는 자가 없으니, 경기 감영(京畿監營)을 여기에 옮겨 설치하여 모든 일을 주관하게 하면, 급할 때에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 뒤에 조정의 의논이 한결같지 않아서 옮겨 설치하는 일을 수행하지 못하였다.】 김창집이 또 말하기를,
"경기·호서의 소결(疏決)을 어제 비로소 거행하였는데, 그 가운데에 하나의 의옥(疑獄)이 있으므로 품정(稟定)하려 합니다. 무신 이영한(李榮漢)의 아들인 이곤(李坤)이 그 아비의 비첩(婢妾)인 귀단(貴丹)을 간음하였다는 말을 이곤의 오촌숙(五寸叔)인 이승한(李承漢)이 주창하였는데, 이곤의 사촌인 이균(李均)과 이곤의 서제(庶弟) 이금동(李衿同)과 이곤이 아들 이우춘(李遇春)과 이곤의 아내 조녀(趙女)가 함께 상의하여 이곤과 귀단 세 모녀(母女)를 하룻밤 사이에 때려 죽였다 합니다. 그런데 이곤의 지친(至親)들이 모두 모의를 같이하였으므로, 끝내 발장(發狀)하는 자가 없어서 검시(檢屍)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만엽(李萬葉)이 이곤의 매우 친한 벗으로서, 진고(進告)한 뒤에야 비로소 추핵(推覈)하였으나, 의심스러운 단서가 갖가지로 나오고 죄인이 저항하여 승복하지 않으므로, 열 달이 지난 뒤에야 도신이 아뢰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니, 홍만조(洪萬朝)가 감사(監司)이었을 때의 일이다."
하였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문서를 상고해 보았더니, 이곤의 관을 열어 보고 두 번이나 검시하였으나 때려 죽인 자취가 없고, 이승한에게 이곤과 귀단 세 모녀를 때려 죽인 절차를 엄히 신문하였으나, 줄곧 승복하지 않았습니다. 이곤의 피살(被殺)이 과연 이만엽의 말과 같다면, 아내가 지아비를 죽이고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아우가 형을 죽여 삼강오륜을 일시에 멸절(滅絶)될 것이니, 고금에 없는 변괴입니다. 귀단 세 모녀는 이곤이 죽은 밤에 간 곳이 없다 하니, 달아났다면 찾아 잡아야 할 것이고, 살해당하였다면 시신(屍身)을 찾은 뒤에 감단(勘斷)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만약 지난번 영남(嶺南) 박녀(朴女)의 옥사(獄事)의 예에 따라 포청(捕廳)의 군관(軍官)을 보내어 엿보아 잡은 자를 논상(論賞)한다면, 그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홍만조(洪萬朝)를 좌참찬(左參贊)으로 삼았다.
이사명(李師命)의 관작(官爵)을 회복시키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온천(溫泉)에 거둥하였을 때 호남(湖南)의 유생(儒生)으로서 상소하여 이시명을 위하여 억울함을 하소연한 자가 이사명이 전라도 관찰사이었을 때의 치적(治績)과 그의 죽음이 참혹하였음을 극진히 말하였고, 이사명의 아들 이희지(李喜之)가 어가(御駕) 앞에서 상언(上言)하여 그 아버지의 억울함을 하소연하기를,
"아비가 참혹한 화를 당한 까닭의 하나가 임금을 속여 부도(不道)하였다는 것이고 하나는 남을 악역(惡逆)으로 무함하였다는 것인데, 임금을 속였다는 것은 들어서 전한 것에 지나지 않고, 남을 무함하였다는 것은 그 사람이 마침내 악역으로 복법(伏法)되었으니, 이 때문에 반좌(反坐)186) 의 율(律)을 받은 것은 아주 원통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금부(禁府)에 내렸다. 금부에서 복주(覆奏)하기를,
"이사명은 당초에 죄명이 매우 중하였으나, 두 번째 극형을 받은 뒤부터 사람들이 다 불쌍히 여겼습니다. 갑술년187) 복관(復官) 때에 고(故) 상신(相臣) 남구만(南九萬)이 아뢴 말을 보더라도 그 공을 완전히 버려 둘 수는 없다 하였고, 또 역적 항(杭)이 이미 복법되었으니, 남을 무함하였다는 일은 더욱 논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의심스러운 것도 풀렸으니, 공으로 허물을 갚기를 바랄 수도 있겠습니다."
하고, 인하여 임금의 재결을 청하니, 임금이 드디어 그 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하여 복관하도록 명한 것이다.
5월 27일 경진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과 금부(禁府)의 당상(堂上)이 빈청(賓廳)에 모여 금부의 시수 죄인(時囚罪人)에 대하여 그 경중을 검토하여 감처(勘處)해서 아뢰었다.
5월 28일 신사
강원도 강릉부(江陵府)에 날마다 잇따라 서리가 내려 그 두께가 눈과 같았다.
이정주(李挺周)를 헌납(獻納)으로, 홍은(洪蒑)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5월 29일 임오
윤선거(尹宣擧)·윤증(尹拯) 부자의 관작(官爵)을 추탈(追奪)하라고 명하였다. 동부승지(同副承旨) 김보택(金普澤)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생각하건대, 우리 성상께서는 유(儒)를 숭상하고 도(道)를 존중하셔서 도량이 백왕(百王)보다 월등하시고,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여 해와 달처럼 밝으시므로, 사문(斯文)의 시비를 크게 정하여 백세(百世)에 미혹되지 않을 수 있으나, 그래도 공의(公議)와 사론(士論)에 죄다 흡족하지 못한 것이 있으니, 이것은 뭇신하가 잘 받들지 못한 죄입니다. 윤선거는 자신이 씻기 어려운 허물을 지어 스스로 세상에 낄 수 없음을 분별하고, 어진이들 사이에 몸을 의탁하여 겉으로 스스로 새로워지려는 뜻을 보였으나, 실은 본디 뉘우쳐 자책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술한 글에 감히 성조(聖祖)를 끌어대어 스스로 견주고, 또 역적 윤휴(尹鑴)의 말을 자중(藉重)188) 하여 말하기를, ‘내가 허물이 있다면 성조께도 허물이 있을 것이다.’ 하고 ‘두거(杜擧) 운운’189) 이라는 말까지 하여 스스로 제 몸을 허물이 없는 곳에 두고 성조를 벌할 만한 허물이 있다 하였으니, 그 무훼(誣毁)한 것이 무엇인들 이보다 심하겠습니까? 이제 엄중히 배척하고 통렬하게 징계하지 못하고 판본(板本)을 헐도록 하였을 뿐이니, 어떻게 오르내리시는 성조의 영(靈)을 위안하시겠습니까? 윤증은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에 대하여 의리로서는 스승과 제자일자라도 은혜는 실로 아버지와 아들과 같은데, 그 포장(包藏)한 마음을 세상에서 아는 자가 없었으나, 세사(世事)가 변천하고 당습(黨習)이 치열(熾烈)해지자, 드디어 배반할 생각을 결정하여 선정(先正)을 원수보다 심하게 견주었습니다. 마침내 선정이 간흉(奸凶)에게 무함당하여 죽으니, 윤증은 기세가 올랐는데, 사림(士林)이 분통하게 여기는 것은 윤증에게 있고 간흉에게 있지 않습니다. 이제 이미 유현(儒賢)이란 이름을 삭제하였으니, 한낱 스승을 배반한 죄인일 뿐입니다. 미관(微官)·서직(庶職)도 그 몸에 둘 수 없는데, 더구나 정승의 직임으로 높일 수 있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 두 사람의 관작(官爵)은 결코 추탈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깁니다. 조정(朝廷)에 있는 신하 가운데 그의 사당(私黨)이 아니라면 누가 감히 추탈하자는 논의를 옳지 않다 하겠습니까마는, 대각(臺閣)에서는 고요하여 계문(啓聞)하는 바가 없습니다. 근래에 시비를 밝히고 선비의 추향을 정한 일이 다 성상의 특교(特敎)에서 나왔으므로, 이것도 특교를 기다리느라 그러한 것이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오늘날 대각에는 대양(對揚)190) 하는 아름다움이 전혀 없고 돌아보는 근심만이 있는 듯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근일의 일은 시비가 크게 밝혀져서 백세에 미혹되지 않을 수 있는데, 일종의 괴귀(怪鬼)같은 무리가 공의와 죽을 힘을 다해 싸우고, 사당(死黨)을 좋아서 따르니, 이것은 다름 아니라 처분에 오히려 엄하지 못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관작을 그대로 둘 수 없으므로, 연중(筵中)에서 한 번 하교하려 하였다. 그대의 소(疏)가 마침 이르렀는데 바로 내 뜻에 맞는다. 모두 관작을 추탈하도록 명한다."
하였다.
경기 암행 어사(京畿暗行御史) 김재로(金在魯)가 복명(復命)하였다. 염문(廉問)한 전 풍덕 부사(豐德府使) 송규현(宋奎炫)·교하 현감(交河縣監) 성의석(成義錫)은 모두 법을 어겼다 하여 나문(拿問)하고, 인천 부사(仁川府使) 이유수(李有壽)·안성 군수(安城郡守) 이명관(李明觀)은 진정(賑政)이 정실(精實)하고 치적(治績)이 현저하다 하여 포상하였다.
충청도 각 고을의 백성으로서 염병을 앓는 자가 7천 2백 34명이고, 죽은 자가 1천 2백 19명이며, 온 가족이 다 죽은 것이 9호(戶)인데, 도신(道臣)이 계문(啓聞)하였다.
5월 30일 계미
임금이 하교하기를,
"어제 경기 암행 어사(京畿暗行御史) 김재로(金在魯)의 서계(書啓)를 보건대, 여역(癘疫)이 치성하여 죽는 자가 잇달고 있다고 하니, 매우 놀랍고 슬프다.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각 고을에 신칙(申飭)하여 상당한 약으로 각별히 구료(救療)하고, 앓는 자는 또한 곧 피막(避幕)에 나가서 전염하게 되지 않게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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