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갑신
승지(承旨)를 전옥(典獄)에 보내어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게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경외(京外)의 여역(癘疫)이 날로 치성하여 그칠 기약이 없다 하여, 구례(舊例)에 따라 경중(京中)의 산천(山川)·성황(城隍)과 북교(北郊)에서 여제(癘祭)를 지내되, 특별히 중신(重臣)을 보내어 설행(設行)하고, 민충단(愍忠壇)에는 근신(近臣)을 보내어 제사를 설행하고, 각도의 중앙처(中央處) 및 험천 쌍령(險川雙嶺)과 김화(金化)·토산(兎山)·진주(晋州)·남원(南原)·금산(錦山)·달천(㺚川)·상주(尙州)·원주(原州)·울산(蔚山) 등처(等處)에는 본도(本道)로 하여금 도사(都事)·수령(守令) 가운데에서 가려 차출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고, 강화(江華)는 유수(留守)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가을·겨울 이후로 도성(都城)의 근래에 임자가 없는 시신(屍身)도 단(壇)을 설치하여 치제(致祭)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전라도 나주(羅州)·함평(咸平) 등 고을에 우박이 내렸다.
6월 2일 을유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권업(權𢢜)·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 이교악(李喬岳)이 폐사(陛辭)하니, 임금이 불러서 보고 칙유(飭諭)하여 보냈다.
우의정(右議政) 권상하(權尙夏)가 현도(縣道)를 통해 상소하여 신명(新命)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는데, 이르기를,
"신은 본디 재주가 없는 노학구(老學究)191) 로서 급제할 길을 잃어 꾀하는 바가 없고, 고질이 몸에서 떠나지 않아 시골에 숨어 있는데, 성상께서는 신에게서 무엇을 취하여 등용하여 백관(百官)의 위에 두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신이 수십 년 동안 여러 번 소명(召命)을 어겼던 것은 대개 종적(蹤跡)이 기구하였기 때문에 부득이 하여 그랬던 것이고 신이 즐겨서 한 것이 아닙니다. 말세의 풍속이 높이기를 좋아하므로 나아가기를 어렵게 여기는 사람으로 지목하여 헛된 명예가 융성해졌는데, 위로 임금이 잘못 알게 만든 것이 늘 부끄럽고 두려워서 드러낼 낯이 없었습니다. 오늘날 모르는 사이에 높아졌으니,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또 생각하건대, 70세에 치사(致仕)하는 것은 예법에 명확한데, 신은 80세를 처음 벼슬하는 나이로 삼고, 의정(議政)을 처음 제수하는 벼슬에 삼았으니, 사방에서 놀라 비웃는 바가 어떻겠습니까?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사대부의 사양하고 받고 나아가고 물러가는 것은 풍속의 성쇠(盛衰)에 관계된다.’ 하였습니다. 신이 비록 비천할망정 어찌 차마 전혀 명예와 절조를 돌보지 않은 채 일세(一世)의 풍교(風敎)를 손상시킬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경(卿)은 선정(先正)의 적전(嫡傳)으로서 일찍부터 유림(儒林)의 명망을 지녔는데, 이러한 시기에 삼사(三事)192) 를 경이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 내 뜻은 이공(貳公)193) 을 특별히 제수하던 날에 이미 정해졌었는데, 이번 정승을 제수할 때에 과연 어질고 덕이 있는 이를 얻었으니, 기쁜 마음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또 자신이 나라의 안위(安危)를 맡은 신하는 치사할 나이가 되어도 치사를 허락하지 않는 것은 예전부터 모두 그러하였는데, 더구나 어려움이 많은 지금이겠는가? 경은 모름지기 지극한 뜻을 본받아 나와서 정사를 논하여 위아래의 희망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6월 3일 병술
수찬(修撰) 심공(沈珙)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개록(改錄)에 관한 일은 비난이 세상에 넘쳐 입이 있으면 다 말합니다. 대개 도당록(都堂錄)은 정부(政府)에서 실로 주장하고 전관(銓官)과 관각(館閣)의 당상(堂上)은 그 유무(有無)에 따라 수를 갖추어 참여하므로, 종전에 문형(文衡)이 참여하지 않고 제학(提學)이 참여한 일이 한두 번뿐이 아닙니다. 이것을 규례를 어긴 것이라 한다면, 차출하지 않은 자는 어찌하여 차출하지 않고 외방(外方)에 있는 자는 어찌하여 변통하지 않고서 제학만을 권점(圈點)에 참여시켰겠습니까? 그 개록할 때에 발거(拔去)한 자가 많아서 열 사람이나 되는데, 태반은 항소(抗疏)하여 위아래 사람에게 미움받은 자입니다. 이진망(李眞望)이 근년에 영선(瀛選)194) 에 막혔을 때에 전하께서 아깝다고 하교(下敎)하시기까지 하였고, 지난해 초록(初錄) 때에는 맨 먼저 관직(館職)을 제수하여 반드시 권면하여 출사(出仕)시키려 하셨는데, 재록(再錄) 때가 되어서는 여러 번 상고하여 의망(擬望)하여도 끝내 한 번도 제수하지 않으셨으니, 두어 달 사이에 이진망의 문벌·명망과 재능·학문이 전후에 다름이 있어서인지 모르겠습니다. 신구(新舊)·피차를 논하지 않고 차례로 섞어 쓴다면 어찌 관직(館職)이 구차할 걱정이 있겠습니까마는, 일체 포기하고 전록(前錄)이 죄다 쓰이기 전에 신록을 청하기까지 하였으니, 자기와 뜻을 달리하는 자를 업신여겨서 그런 것입니다. 임금이 사람을 쓰는 체례(體例)가 어찌 치우치고 사사로운 논의를 부당하게 따를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일전에 승선(承宣)의 상소에 대한 비답(批答)에 윤선거(尹宣擧) 부자의 관작(官爵)을 추탈(追奪)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추탈이 얼마나 중한 벌인데, 한 척신(戚臣)의 건청(建請)에 따라 문득 이런 예사롭지 않은 명을 내리십니까? 한 번 추탈하라는 명이 내린 뒤부터 천신(薦紳)·장보(章甫)를 막론하고 모두 놀라 어쩔 줄 모르고, 하인·부녀자 같은 비천한 사람까지도 모두 서로 돌아보며 놀라와하니, 또한 인심이 대개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저 두 신하는 일찍이 한 번도 세로(世路)에 나온 적이 없고 헌면(軒冕)195) 을 지나가는 뜬구름처럼 여겼을 뿐만이 아니었으니, 이번의 추탈은 본디 이미 죽은 사람에게는 손익(損益)이 없고 성덕(聖德)에 허물이 될 뿐입니다. 인하여 생각하건대, 변명하는 상소는 일체 막고, 속여서 헐뜯는 상소는 막지 않고 봉입(捧入)함에 따라 그 시비·곡직(曲直)이 죄다 임금에게 등철(登徹)되지 못하게 하여 공평하게 듣고 아울러 보는 도리에 크게 어긋나는 바가 있으니, 신은 이제부터 금령(禁令)을 거두어 옹폐(壅蔽)하는 허물을 끼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신은 이사명(李師命)을 복관(復官)하라는 명에 대하여 더욱 개탄하는 바가 있으니, 대개 이사명 자신이 중죄를 졌는데, 혼동하여 복관하는 것은 실로 근거할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무인년196) 에 연중(筵中)에서 특별히 엄중하게 하교(下敎)하시기를, ‘이사명은 스스로 권력을 탐내고 세력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을축년197) 에 훈장(訓將)을 체차(遞差)하고 스스로 이를 대신하고자 하여 김도연(金道淵)으로 하여금 내관(內官)편에 글을 보내기까지 하였으니, 어찌 신하로서 사경(私逕)을 인연하여 병권을 차지하려 꾀하는 자가 있다는 것인가?’ 하셨습니다. 이 한 가지만으로도 넉넉히 사죄(死罪)가 되므로 사지(辭旨)가 매우 엄격하셨으므로, 당초에 죄상이 사람들의 이목을 더럽혔으나, 이 뒤부터 그 사당(私黨)까지도 감히 부당하게 비호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금오(金吾)198) 의 복계(覆啓)에는 시비를 전혀 무시하고 근거없는 말로 시험하여 은밀하게 신리(伸理)하려는 뜻이 있었고, 성비(聖批)에도, ‘그 공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하셨으니, 신은 그 공이라는 것이 무슨 공인지 모르겠습니다. 아아! 전하께서 번번이 국면(局面)을 진퇴(進退)하실 때에 전일의 처분은 거의 변개(變改)하는 것이 많았으나, 오로지 이 일에 대해서만은 이미 회복하셨다가도 곧 거두어 끝내 굳게 지키셨는데, 오늘날 수십 년 뒤에 전의 소견을 갑자기 바꾸어 형정(刑政)이 어긋나고 공론이 답답하게 하셨습니다. 직임(職任)이 삼사(三司)에 있는 자는 빨리 반한(反汗)199) 하라는 청을 올려야 할 것인데, 당비(黨比)가 고질이 되고 이해(利害)에 끌려서 이제까지 여러 날 동안 고요하여 한 마디 말이 없으니, 신은 통탄하게 여깁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개록한 일과 신록을 청한 데에는 모두 의거할 만한 전례가 있는데, 장황하게 침범하여 배척한 말에 어긋나는 바가 많다. 이번의 추탈은 내 뜻으로 먼저 결단하여 처분이 이에 이르러 이미 시비(是非)가 밝혀졌으니, 단지 굳게 지켜야 마땅할 것이다. 영호(營護)하는 상소는 결코 봉입하도록 허가할 수 없다. 이사명의 일은 대개 공을 생각하는 데에서 나왔고 깨끗이 벗어났다는 것이 아니니, 관대한 법에 해롭지 않을 것이다. 금오에서 아뢴 말에는 별로 다른 뜻이 없는데 억지로 시험한다고 지목하였으니, 참으로 놀랍다."
하였다. 이 뒤에 심공이 여러 신하가 상소하여 변명한 것으로 인하여 다시 상소하여 전에 말한 것을 거듭 말하였으나 정원(政院)에서 이를 물리쳤으므로, 패초(牌招)를 어기고 파직되었다.
황해도 곡산부(谷山府)에 불이 나서 불탄 민가가 2백 20호이고, 타 죽은 자가 2인인데, 도신(道臣)이 계문(啓聞)하니, 임금이 각별히 휼전(恤典)을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경기 각 고을의 백성으로 염병을 앓고 있는 자가 1천 1백 30명이고, 전라도에서는 앓고 있는 자가 2천 2백 50여 명이고 죽은 자가 6백 52명이며, 충청도에서는 앓고 있는 자가 1천 1백 명이고 죽은 자가 2백 30명이며, 경상도에서는 앓고 있는 자가 4천 7백 명이고 죽은 자가 6백 75명이며, 황해도에서는 앓고 있는 자가 3백 20여 명인데, 각각 그 도신(道臣)이 계문(啓聞)하였다.
6월 4일 정해
전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홍우녕(洪禹寧)이 미처 교귀(交龜)하기 전에 영중(營中)에서 죽었는데, 임금이 지나가는 세 도(道)에서 담군(擔軍)을 내어 주어 상구(喪柩)를 호송하라고 명하였다.
판의금(判義禁) 송상기(宋相琦)·지의금(知義禁) 권상유(權尙游) 등이 이사명(李師命)의 복관(復官)에 관하여 회계(回啓)한 것이 심공(沈珙)에게 배척당하였다 하여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였는데, 이르기를,
"의주(議奏)하는 체례(體例)는 중죄에 관계되면 으레 감히 아래에서 곧바로 결단할 수 없으므로, 대개(大槪)를 대략 논하고, 진품(陳稟)하여 재결을 받는 것이 사체(事體)에 마땅할 것입니다. 이제 신들이 복계(覆啓)한 것도 이러하였을 뿐이니, 어찌 그 사이에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복계한 말은 이사명에게 죄가 없다고 한 것이 아니고, 내가 특별히 복관을 허락한 것도 공을 생각하여 탕척(蕩滌)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심공의 소 가운데에 있는 시험한다는 말은 매우 근거가 없으니, 어찌하여 반드시 혐의해야 하겠는가?"
하였다. 삼사(三司)의 신하들도 심공의 소에 있는 당비(黨比)와 이해(利害) 등의 말로 인하여 잇따라 상소하고, 피혐(避嫌)하며 여러 날 끌다가 직사(職事)에 나아갔다.
6월 5일 무자
도승지(都承旨) 이관명(李觀命)이 전일 아뢰어 신록(新錄)을 청한 것이 심공(沈珙)에게 배척당하였다 하여 상소하여 사직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당의(黨議)의 배척을 어찌하여 반드시 깊이 혐의해야 하겠는가?"
하였다.
6월 6일 기축
처음에 좌의정(左議政) 이이명(李頤命)이, 대관(臺官) 조성복(趙聖復)이 상소한 말로 인하여 연중(筵中)에서 아뢰어 알성시(謁聖試)·정시(庭試)에도 모두 초시(初試)를 설행(設行)하여 선비가 어지러이 모여드는 폐단을 막기를 청하니, 임금이 정시의 초시만을 설행하라고 명하였었다. 그 뒤에 민진후(閔鎭厚)가 임금에게 초시에는 막히는 단서가 많이 있다고 말하니, 임금이 드디어 그날 입시(入侍)하지 않은 대신(大臣)에게 문의하라고 명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예조(禮曹)에서 비로소 대신들에게 의논하니,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이유(李濡)는 말하기를,
"과장(科場)의 폐단은 임진년200) 의 정시에 이르러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크게 경동(警動)하여 지난날을 돌아보며 뉘우치고 뒷날을 삼가도록 꾀하지 않아서는 안되는데, 변통하는 방책으로는 실로 초시를 설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비록 거자(擧子)로 하여금 손수 쓰게 하더라도 시관(試官)이 필적을 식별하면 더욱 걱정스러워질 것입니다. 시관이 된 자가 마음을 지극히 공정하게 갖지 못한다면, 반드시 필적을 식별하지 못하더라도 어찌 달리 간사한 짓을 행할 방법이 없겠습니까? 근래에 거자가 모두 사수(寫手)를 대동하나, 그 가운데에는 스스로 쓰는 자도 많이 있습니다. 스스로 쓰지 말고 반드시 대신 쓰게 하는 것은 본래 조령(朝令)이 아니니, 스스로 쓰는 자를 어찌 일체 금단하여 식별하는 길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과연 이것을 혐의스럽게 여긴다면, 2천 장을 역서(易書)201) 하는 것은 1백 명의 서리(書吏)가 하루에 할 수 있는 일이어서 역서한 뒤에는 책을 끼고 사수를 대동하는 폐단이 저절로 없어질 것입니다. 초시의 역서에 설령 비용을 허비한다 하더라도 수십 석의 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을 전정(殿庭)에서 난잡한 폐단이 허다한 것에 비하면 그 경중과 득실을 어찌 똑같이 말할 수 있겠습니까? 춘당대(春塘臺)에 옮겨 설행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신은 매우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수종(隨從)하는 잡류(雜類)를 전정에 들일 수 없기 때문에 옮겨 설행하는 일을 시작한다면, 이 또한 임의로 책을 끼고 들어가거나 사수를 대동하게 하고 다시는 금단하지 않는 뜻을 보이는 것입니다. 들일 수 있고 들일 수 없는 것을 논할 것 없이 나라의 체모를 생각하면 어찌 이럴 수 있겠습니까?"
하고, 행 판중추부사 김우항(金宇杭)은 말하기를,
"이번 별시(別試)를 정시로 고친 것은 오로지 폐단을 줄이기 위한 것입니다. 정시의 초시를 경외(京外)에서 와서 보는 거자가 반드시 수만 명에 밑돌지는 않을 것이니, 3소(三所)로 나누어 시취(試取)하더라도 수일 안에는 결코 출방(出榜)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또 역서하자는 의논이 있으나, 그렇게 하면 응당 비용을 장만해야 하는 폐단이 별시보다 많을 것이니, 폐단을 줄이는 뜻이 아주 없습니다. 알성시는 응당 반궁(泮宮)에서 설행해야 하는 과거인데, 춘당대에서 선비를 시취하는 것이 이미 근래의 규례가 되었으니, 이 뒤로는 정시 또한 춘당대에서 시취하고, 시권(試券)을 거두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과차(科次)202) 를 매기는 것이 변통하는 방도에 맞을 듯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이제부터 정시는 춘당대에서 설행하라고 명하였다.
6월 7일 경인
임방(任埅)을 대사간(大司諫)으로, 남도규(南道揆)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좌의정(左議政) 이이명(李頤命)이, 심공(沈珙)이 상소하여 그 형인 이사명(李師命)의 복관(復官)을 배척한 것으로 인하여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였는데, 이르기를,
"이제 은명(恩命)이 다시 내려져 지하에 다시 비쳐서 마치 죽은 사람이 다시 양계(陽界)에 나오는 것을 보는 듯하여 온 집안이 감읍(感泣)하여 하늘을 바라보고 성덕(聖德)을 경축하니, 이때의 이 정(情)은 한밤에 귀신도 반드시 신(臣)을 위하여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말하는 자는 생각해 낸 것이 매우 깊고 말을 하는 것이 더욱 혹독하여 연충(淵衷)203) 에서 헤아려 처분하신 것과 성명(聖明) 아래에 억울한 죄를 푼 것을 모두 헛된 것으로 돌아가게 하려 합니다. 때가 지나고 일이 지나서 애증(愛憎)이 구원(九原)에서 이미 끊어졌으나, 고집하는 것은 다만 신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 이른바 삼사(三司)에서 말하지 않고 이해(利害)에 끌린다고 한 것은 뜻이 더욱 위험합니다. 십수 년 동안 조정에서 신의 집안을 위해 말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는데, 이제 무슨 기력이 있어서 남을 이롭게 하거나 해롭게 할 수 있다고 사람으로서 하는 말이 이 지경에 이르는 것입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이해(利害)라는 말은 마음 쓴 것이 매우 깊으므로, 나도 실로 놀랐으나, 어찌 혐의할 만하겠는가?"
하였다.
6월 9일 임진
진휼청(賑恤廳)에서 상교(上敎)로 인하여 오부(五部)에서 여역(癘疫)을 앓는 자를 뽑아 내어 피막(避幕)에 나가게 하고, 의탁할 데 없는 자 3천여 명에게 사람수를 헤아려 양식을 주었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진후(診候)를 마치자, 임금이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환자곡[還上穀]204) 은 급할 때에는 군향(軍餉)이 되고, 흉년이 당하면 진자(賑資)가 되므로 관계되는 바가 매우 중대한데, 근래에 수령(守令)들은 조금 곡식이 잘된 때에도 기준대로 받아들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가려서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이제 경기 어사(京畿御史)의 서계(書啓)를 보건대, 한 고을에서는 적곡(糴穀)을 받아들일 때에 일일이 정밀하게 가리므로 백성이 자못 괴로와하나 받아 먹을 때에는 도리어 다행하게 여기는데, 한 고을에서는 적곡을 받아들일 때에 전혀 정밀하게 가리지 않으므로 받아먹는 백성이 도리어 관가(官家)에서 당초에 정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원망한다.’ 하였으니, 이로써 보건대, 환자곡을 정밀하게 가려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도제조(都提調)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신이 일찍이 철원(鐵原)을 맡았을 때 ‘날이 저물어 양주(楊州)의 촌가에 투숙하였는데, 주인이 아직 밥을 짓지 못하고 환자곡을 받아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밤이 깊은 뒤에야 환자곡이 비로소 왔는데, 그 곡식을 보니 다 빈껍데기이므로, 할미가 울며 관가를 욕하였습니다. 그 뒤에 송정규(宋廷奎)가 목사(牧使)이었을 때에 신이 또 양주를 지나는데, 마침 춘궁기(春窮期)를 당하여 들에 보리가 익어가고 있었으나 베어 먹지 않으므로 괴이하게 여겨서 물었더니, ‘이 고을에서는 지난해에 환자곡을 잘 받아들였으므로, 온 경내가 이에 힘입어 굶지 않아서 보리를 그대로 두고 익기를 기다릴 수 있다.’ 하였습니다. 적곡을 받아들이는 정사는 정밀하게 가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고,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적곡을 받아들이는 것이 정밀하지 못한 것은 오로지 칭찬을 바라는 고식적(姑息的)인 정사에서 말미암습니다."
하니, 임금이 각별히 외방(外方)에 신칙(申飭)하여 흉년을 당하더라도 반드시 정밀하게 가려서 받아들이게 하라고 명하였다. 도승지(都承旨) 이관명(李觀命)이 말하기를,
"무릇 사람은 병이 심하여 쇠약해진 때라도 마음이 맞는 사람을 만나 조용히 수작하면, 가슴이 트여서 병이 몸에서 떠나는 듯한데, 성상께서는 구중(九重)에 깊이 계시어 좌우에는 근습(近習)뿐이고, 정원(政院)의 문서는 큰 물과 가뭄에 관한 장문(狀聞)에 지나지 않을 뿐이니, 수응(酬應)하면서 근심하는 외에는 트여서 화락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성학(聖學)이 고명(高明)하여 고금의 치란(致亂)을 환히 아시므로 본디 자문에 의지할 것이 없으나, 때때로 유신(儒臣)을 인접(引接)하되, 그 예수(禮數)를 간략히 하여 침전 안에 불러들여 혹 고사(古事)를 묻거나 시정(時政)을 물으시고, 또한 승지(承旨) 한두 사람으로 하여금 각각 해방(該房)의 문서를 가지고 들어와 읽어 아뢰게 하고 판하(判下)하시면, 정신을 수양하고 답답한 마음을 푸는 방도에 유의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것이 자못 좋으니, 유의하겠다."
하였다.
6월 10일 계사
대사간(大司諫) 임방(任埅)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당비(黨比)가 날로 심해져서 일의 시비를 논하지 않고 혈전(血戰)만 꾀하고 있는데, 전 수찬(修撰) 심공(沈珙)에 이르러서는 그 말하는 바가 더욱 무엄합니다. 하인이나 아녀자가 어찌 윤증(尹拯) 부자가 추탈(追奪)된 시비를 알겠습니까마는, 감히 ‘또한 모두들 서로 돌아보고 놀라 의아하지 않는 이가 없다.’ 하였으니, 어찌하여 감히 임금을 이처럼 속일 수 있다는 것입니까? 이에 대해 발노(發怒)하여 분박(噴薄)하는 말을 다할 수 없는 바가 있는데, 잇따라 다른 일을 끌어대어 이진망(李眞望)을 임용하고 버린 것을 가지고 임금을 몹시 힐책(詰責)하여 꾸짖는 듯하였으니, 그 정상이 아주 통탄스럽습니다. 이 말에 따르면, 이는 임금이 어진이를 쓰고 변변치 못한 자를 물리치는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사명(李師命)의 일에 이르러서는 경신년205) 에 염탐한 공을 본디 기록할 만한 것이 아니라 하였으니, 이는 곧바로 견(堅)·남(柟)이 죄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시비를 논의하는 것이 어찌 그리 도리이 어긋나십니까? 개록(改錄)·신록(新錄)의 일에 이르러서는 아직 차출하지 않았거나 외방(外方)에 있는 자와 시임(時任)으로 경중(京中)에 있는 자가 어찌 서로 다르지 않겠습니까마는, 구별하지 않아야 한다고 한 것은 모두 사리에 맞지 않는 말입니다. 신록의 전례는 한둘뿐이 아닌데, 반드시 막으려고 불쑥 끼어들어 방자하게 간사한 말을 부정히 따르는 말을 하니, 어찌 당류를 비호하고 뜻을 달리하는 사람을 배척하는데 급급하여 시비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심공의 상소에는 가리지 않은 말이 많고, 모두 시비를 어지럽히고 사당(私黨)을 치우치게 비호하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니, 통탄스러움을 금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6월 12일 을미
병조(兵曹)에서 함경·평안 두 도의 별과 무과(別科武科)의 액수를 계품(啓稟)하니, 임금이 함경도는 3백 인을 뽑고, 평안도는 1백 50인을 뽑으라고 명하였는데, 대개 평안도의 거자(擧子)는 으레 다 경시(京試)에 나아가기 때문이었다.
6월 13일 병신
유척기(兪拓基)를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6월 15일 무술
간원(諫院)에서 전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전 장령(掌令) 박치원(朴致遠)은 시골에 있으면서 사직할 때에 연전에 탄핵받은 일을 뒤미처 제기하여 사진(仕進)하기 어려운 단서로 삼았으나, 도리어 언자(言者)를 꾸짖으며 어긋난 말이 많았으니, 맑은 조정에서 서로 공경하는 풍습을 크게 잃었습니다. 그 사람을 이미 체차(遞差)하고 그 상소를 중도에서 거두었다 하여 버려두고 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파직(罷職)하소서. 박치원의 사직하는 소장(疏章)이 서울에 이른 뒤에 진신(搢紳) 사이에서 전하는 말이 매우 많으니, 박치원이 그 소장의 초안을 고쳐서 그 족숙(族叔)인 병조 좌랑(兵曹佐郞) 박필정(朴弼正)에게 보내고, 고쳐서 바치도록 요구하였습니다. 박필정은 이에 기성(騎省)에서 입직(入直)하였을 때에 원본을 가져가고 종이를 바꾸어서 써서 바쳤습니다. 외방에서 올린 대소의 소장 가운데 현도(縣道)를 통해 봉계(封啓)하여 올려보낸 것은 사체가 가볍지 않는데 박필정이 경솔하게 고쳐서 바쳤습니다. 비록 사체를 알지 못한 소치에서 나오기는 하였으나, 듣기에 놀랍습니다. 파직하소서. 대소의 소장은 정원(政院)에 받아 둔 뒤에는 정원 문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는 것이 고례(古例)입니다. 더구나 대신(臺臣)의 소장은 사체가 더욱 다른데, 박치원의 소장은 정원에 온 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도 승지(承旨) 이성조(李聖肇)가 마음대로 내어 주고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파직하소서. 밀부(密符)206) 의 체납(替納)은 사체가 엄중한 것입니다. 평안 감사(平安監司) 조태로(趙泰老)가 졸서(卒逝)한 뒤 밀부를 가져오는 군관(軍官)은 밤낮으로 빨리 달려와서 곧바로 정원에 바쳐야 할 것인데, 길을 떠난 지 나흘 만에야 서울에 이르렀고, 먼저 제 집에 가서 한나절 동안 지체하고서야 비로소 더디게 바쳤으니, 사람이 미천하다 하여 버려둘 수 없습니다. 유사(攸司)로 하여금 가두고 각별히 과죄(科罪)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박치원 이하 네 가지만 따랐다.
이덕영(李德英)을 승지(承旨)로, 이병상(李秉常)을 대사간(大司諫)으로, 김상윤(金相尹)을 지평(持平)으로, 김재로(金在魯)를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조태구(趙泰耉)를 충청도 별견 시관(忠淸道別遣試官)으로, 송상기(宋相琦)를 함경도 별견 시관(咸鏡道別遣試官)으로, 민진원(閔鎭遠)을 평안도 별견 시관(平安道別遣試官)으로 삼았다. 【그 뒤에 송상기가 이이명(李頤命)이 차자(箚子)를 올린 것으로 인하여 체임(遞任)되기를 청하니, 권상유(權尙游)로 대신하였고, 조태구는 정세가 편안하지 못하다 하여 체임하여 조태채(趙泰采)로 대신하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67책 59권 46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654면
【분류】인사-임면(任免)
6월 17일 경자
간원(諫院)에서 전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여기(癘氣)가 날로 치열하여 죽는 자가 잇달고 있습니다. 도성(都城) 밖 아주 가까운 곳에는 고빈(藁殯)·병막(病幕)이 잇달아 널려 있고, 마음에 잇닿아 길을 끼고 이어 있으니, 전염이 더욱 번지는 것은 진실로 이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또 장마가 한 달 동안 이어져 물이 불어서 강언덕이 무너졌기 때문에 거적도 많이 드러나고 병자도 이따금 압사하고 있으니, 제부(諸部)에 신칙(申飭)하여 금성(禁城)에 매우 가깝거나 인가에 매우 가까운 것은 곧 옮겨 묻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단의 일만 따랐다.
6월 20일 계묘
평안도 암행 어사(暗行御史) 김운택(金雲澤)이 조정에 돌아와 복명(復命)하였다. 전 증산 현감(甑山縣監) 박태적(朴泰迪)·희천 군수(熙川郡守) 박진규(朴震圭)는 청렴하고 간명하다 하여 포상하고, 전 창성 부사(昌城府使) 김석보(金錫保)·철산 부사(鐵山府使) 허양(許樑)·함종 현령(咸從縣令) 이제(李濟)·용강 현령(龍岡縣令) 안정(安鉦)·태천 현감(泰川縣監) 신겸제(申兼濟)는 함부로 사람을 죽이고 법을 어겼다 하여 나문(拿問)하였다.
6월 21일 갑진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일찍이 종묘서(宗廟署)의 첩보(牒報)로 인하여 제향(祭享)에 쓰는 준뢰(樽罍)·변두(籩豆)에 담는 제물 중에서 《오례의(五禮儀)》의 도식(圖式)에 어긋나는 데가 있는 것은 낱낱이 바로잡아 본서(本署)와 봉상시(奉常寺)에 나누어 주어 살펴서 장만하게 하는 일을 입계(入啓)하고 분부하였는데, 곧 이어서 봉상시에서 신보(申報)한 것을 보았더니, ‘변두에 담는 제물 여덟 가지 안에서 대조(大棗)·율황(栗黃)·진자(榛子)를 다른 과실로 대용하는 것은 이미 품재(稟裁)를 거쳤고, 능인(菱仁)·검인(芡仁)을 다른 과실로 대용하는 것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 되었으며, 녹포(鹿脯)는 봄·가을 양등(兩等)에 포를 만들 소[牛]의 값을 호조(戶曹)에서 준다. 백병(白餠)·흑병(黑餠)·구이(糗餌)·분자(粉餈) 네 가지 안에서 흑병은 도식에서 교분(蕎粉)으로 만든다고 하였으나 지금은 당서미(唐黍米)로 만들고, 구이는 도식에서 건미(乾米)·건맥(乾麥)으로 만든다고 하였으나 지금은 미말(米末)로 만들고 진말(眞末)을 섞어 끓인다. 두에 담는 제물 열 두 가지 안에서 여러 가지를 합하여 끊이는 삼식(糝食)과 잘게 썰어 회[齏]를 만드는 돈박(豚拍)은 본디 막히는 것이 없으므로 곧 마땅히 봉행(奉行)할 것이다. 담해(醓醢)는 도식에서 먼저 건어(乾魚)를 포로 뜬 뒤에 잘게 썰어서 양국(梁麯)과 소금을 섞어 담그고, 좋은 술을 발라서 항아리 안에 1백 일 동안 두면 만들어진다고 하였으나, 지금은 돼지 고기로 담그고 도미(稻米)로 밥을 지어 그 위에 바르는데, 호조에서는 해식중미(醢食中米)라 일컬어 공안(貢案) 가운데에 기록하니, 그 유래가 반드시 이미 오래 되었을 것이다. 이식(酏食)은 도식에서 도미(稻米)를 반죽하고 낭촉고(狼臅膏)를 작게 잘라 도미와 된 죽을 쑤어 만든다. 이른바 낭촉고란 이리 배꼽 속 기름이라고 하였으나, 지금은 미분(米粉)으로 풀을 쑤어 만든다. 준뢰에 담은 제물에 이르러서는 축사(祝辭) 가운데에 생폐 예제(牲幣醴齊)라고 일컬어, 초헌(初獻) 때에는 예제(醴齊)를 따르고 아헌(亞獻) 때에는 앙제(盎齊)를 따른다는 것이 《오례의》에 분명히 실려 있으나, 지금은 삼헌(三獻) 때에 모두 청주(淸酒)를 따른다. 울창(鬱鬯)은 《오례의》에는 흑서(黑黍)를 빚어서 술을 만들고 울금(鬱金)을 쌓아서 끓여 섞는다고 하였으나, 지금은 도미로 술을 빚고 참으로 울금을 섞는다. 형갱(鉶羹)은 《오례의》에는 오미(五味)를 고루 맞추고 규(葵)·환(荁)·모(芼)를 더하여 부드럽게 한다고 하였으나, 지금은 미나리나 무우에 육편(肉片)을 섞어서 쓴다. 오미는 어떤 물건을 써야 하는지 모르겠고, ‘환(荁)’ 자는 《예기(禮記)》의 주(註)에 제비꽃을 닮았는데 잎이 크다고 풀이하였으나, 또한 그것이 무슨 나물인지 모르겠다. 대개 이러한 일은 당초에 반드시 감히 아래에서 마음대로 정할 수 없었을 것인데, 상고할 만한 문적(文籍)이 없다. 그런데 갑자기 옛 규례로 복귀하면 방애되는 일이 많을 것이니, 다시 널리 상고해서 품정하여 때를 당해서 다급한 폐단을 면하게 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오례의》의 제향도식(祭享圖式)은 다 《주례(周禮)》 가운데에서 가려내어 만들었는데, 중간에 이처럼 대용한 것은 《오례의》의 주 가운데에, ‘무릇 신명에게 제사하는 물건 중에서 그때에 없는 것은 그때에 있는 물건으로 대신하고, 외방(外方)에서는 또 토산물이 아니면 비슷한 것으로 채운다.’ 하였으므로, 수시로 변통한 일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삼식·돈박은 다 막히는 것이 없으므로, 한결같이 《오례의》의 숙설(熟設)대로 따르라고 우선 분부하되, 대조·율황을 다른 과실로 대용하는 것이 이미 품재(稟裁)를 거쳤으므로 본디 논할 것이 없고, 능인·검인을 다른 과실로 대용하는 것은 그 유래가 또한 오래 되었고, 녹포를 우포(牛脯)로 대용하는 것과 해식 증미가 공안에 실려 있는 것은 밝힐 만한 문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전례를 그대로 써야 할 듯합니다. 흑병은 도식에서 비록, ‘교분(蕎粉)으로 만든다.’고 하였으나, 《주례》에서, ‘벼는 희고, 기장은 검다.’고 하였으니, 지금 당서(唐黍)를 쓰는 것은 고례(古禮)에 어긋나지 않을 듯합니다. 그래서 흑병은 이미 《주례》의 글을 인용하여 당서를 쓰니, 울창도 당서로 술을 빚고 울금을 타서 닳이는 것이, ‘토산물이 아니면 비슷한 것으로 채운다.’는 말에 맞을 것인데, 더구나 본디 토산물이 아닌 울금이겠습니까? 이렇게 변통하면 마땅할 듯합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 구이병(糗餌餠)도 도식의 주에, ‘구이는 건미(乾米)·건맥(乾麥)이다. 찧어서 이(餌)를 만드니, 대개 먼저 빻아서 가루를 만든 뒤에 반죽한다. 자(餈)는 도병(稻餠)이다. 쌀로 밥을 지어 찧는다. 분자(粉餈)는 콩으로 가루를 만들어 자 위에 묻힌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다 《예기》 내칙(內則)에 있는 글이고, 《주례》에 있는 수변지실(羞籩之實)207) 이라는 글의 주에도, ‘구(糗)는 콩과 쌀을 볶은 것이다. 분(粉)은 콩가루이다. 자(餈)는 건이병(乾餌餠)이다. 정현(鄭玄)은, 「이 두 물건은 다 도미(稻米)·서미(黍米)를 가루로 만든 것이데, 합하여 찐 것을 이(餌)라 하고 반죽하여 찐 것을 자(餈)라 한다. 구(糗)는 볶은 콩을 빻아 가루낸 것인데 반죽하여 찐 자(餈)가 끈끈하기 때문에 가루를 묻히는 것이다.」하였다.’ 하였습니다. 《예기》·《주례》에 논한 것이 대개 서로 같으니, 이에 의거하여 고치지 않아서는 안되겠습니다. 담해(醓醢)는 도식의 주에 기록한 것이 본개 《주례》에 있는 글이고, 《주례》에 또, ‘저해(菹醢)는 다 기미(氣味)로 상성(相成)하는 것이다.’ 하였는데, 지금 생육(生肉)을 담그고, 쌀밥을 그 위에 바르는 것은 진실로 예의(禮意)에 어긋나므로, 이것도 마땅히 고쳐야 하겠습니다마는, 이른바 양국(梁麴)이라는 것이 좁쌀로 누룩을 만든 것을 가리키는지, 좁쌀과 누룩 두 물건을 말하는지, 문세(文勢)를 분간하여 알 수 없으니, 억측하여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이식(酏食)은 도식에 기록한 것도 《예기》·《주례》의 글과 서로 같습니다마는, 《주례》의 주에, ‘정 사농(鄭司農)208) 이, 「이식은 술과 이(酏)209) 로 병(餠)을 만든 것이다.」하였다.’ 하였는데, 낭촉고(狼臅膏)는 이미 우리 나라에서 나는 것이 아니니, 정사농의 말에 의거하여 술과 죽으로 병을 만들어도 무방할 듯합니다. 오제(五齊) 가운데에서 예제(醴齊)·앙제(盎齊)만을 쓰고 삼주(三酒) 가운데에서 청주(淸酒)만을 쓰는 것은 이미 도식에 실려 있는 것이니, 그 나머지 삼제(三齊)와 이주(二酒)를 쓰지 않는 것은 거론할 필요가 없겠으나, 지금은 예제·앙제도 모두 없애고 더운 철에는 청주도 자주(煮酒)로 대용하니, 어찌 또한 당시에 없는 것은 그때에 나는 물건을 쓴다는 뜻이겠습니까? 형갱(鉶羹)은 이른바 오미(五味)라는 것이 과연 어떤 물건인지 모르겠고, 환채(荁菜)도 알 수 없으니, 이제 도식에 따라 여름에 규(葵)를 쓰고 고례(古禮)에 따라 겨울에 근(菫)을 쓰되 시고 짠맛을 탄다면, 예의에 크게 어긋나지는 않을 듯합니다. 그러나 도식을 따르기도 하고 고례를 따르기도 하는 것은 반박(斑駁)을 면하지 못하고, 시고 짠 두 가지 맛만으로는 또한 오미를 갖추지 못하니, 다 틀린 곳이 많아서 가볍게 의논하기 어렵습니다. 대신(大臣)에게 의논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이유(李濡)가 말하기를,
"이식(酏食)은 도미(稻米) 가루로 풀을 쑤어 두(豆)에 담으니, 그 뜻에 매우 어긋납니다. 낭촉고(狼臅膏)는 이미 얻기 어려운 물건이니, 녹포(鹿脯)를 다른 것으로 대용하는 예와 같이 닳여서 기름을 낸다는 글에 의거하여 기름으로 대용하여도 무방하겠습니다. 형갱(鉶羹)은 환(荁)이 어떤 물건인지 상고하여 옛것을 회복하되, 혹 그대로 미나리·무우를 쓰더라도 반드시 고깃국을 주로 하고 짠맛과 신맛을 섞으면,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듯합니다. 신명과 교감(交感)하는 도리는 울창(鬱鬯)을 따르고 소(蕭)를 사르는 두 가지 일보다 중대한 것이 없으니, 잘 갖춘 뒤에야 강림하여 흠향하기를 바랄 수 있습니다. 대개 거서(秬黍)로 술을 빚고 울금을 닳여 타서 그 향기가 짙은 것을 취하는 것인데, 지금은 도주(稻酒)로 곧바로 울금을 닳이고, 소(蕭)를 쓰는 것도 그 향기를 취하고 기름을 합하여 사르는 것인데, 지금은 사르는 것이 소가 아니고 애(艾)이니, 모두 신명을 강림하게 하는 뜻에 어긋납니다. 소는 전에 이미 그 잘못을 바로잡았으니, 울창도 본방(本方)에 의거하여 고치지 않아서는 안되겠습니다. 담해(醓醢)는 이른바, 양국(梁麴)이라는 것을 잘 알 수는 없으나, 반드시 그 담가 만드는 방도를 구명하여 그 마땅한 것에 맞추어 만들어 냄새가 고약한 기가 없게 해야 실로 공경을 다하는 도리에 맞을 것입니다."
하고,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은 말하기를,
"우리 나라 《오례의(五禮儀)》의 제향 도식(祭享圖式)은 역대(歷代)의 제도를 본떴으나, 그 근본은 다 《주례(周禮)》 가운데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변(籩)·두(豆)에 담는 제물을 낱낱이 고례(古禮)를 따르지 못하고, 혹 대용하는 물건이 있는 경우에는 대개 만드는 방법도 고례(古禮)를 전혀 모르고 물건도 토산이 아니기 때문에 부득이 때에 따라 변통하여 지금에 이른 것이니, 문득 예의(禮意)에 어긋난다 하여 두루 바로잡으려 하면 옛것이 얽매이는 혐의가 있고, 도리어 틀리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번에 해조(該曹)에서 청한 그대로 둘 것과 고쳐야 할 여러 조목 가운데 문적(文籍)에서 밝힐 수 있고 또한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 있으면, 이에 따라 거행하는 것이 사체(事體)가 마땅하겠습니다. 그러나 막혀서 거행하기 어렵거나 분간하여 알 수 없는 경우에 이르러서는 억측으로 단정할 수 없는 것이니, 경솔히 의논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하고, 좌의정(左議政) 이이명(李頤命)은 말하기를,
"그 지방에서 나는 물건은 사방이 다 같지 않고 제물을 바치는 방법도 고금의 풍습이 다르므로, 이미 《오례의》를 처음 정할 때에 고례를 죄다 따르지 못하고 당시에 나는 물건으로 대용하도록 허용한 것은 대개 부득이한 데에서 나왔을 것입니다. 그 뒤에 대조(大棗)·율황(栗黃)·능인(菱仁)·검인(芡仁)을 대용한 것은 토산인데도 오히려 이러하였는데, 더구나 얻기 어려운 낭촉(狼臅)과 알 수 없는 환채(荁菜)이겠습니까? 거서(秬黍)와 당서(唐黍)는 이미 같은 물건이 아니니, 비슷한 것을 취하여 통용하는 것은 구차함을 면하지 못합니다. 형갱(鉶羹)의 오미(五味)와 같은 것은 오히려 염매(鹽梅) 따위로 조화할 수 있겠으나, 담해(醓醢)의 양국(梁麴)은 어떤 물건인지 자세히 알지 못하며, 그 가운데 명백하여 쉽게 고칠 수 있는 것은 삼식(糝食)·돈박(豚拍)과 구이(糗餌)·예제(醴齊)·앙제(盎齊)뿐입니다. 그래도 고금의 예(禮)를 섞여 쓰므로 마침내 엇갈리게 되었는데 고칠 수 있는 것은 적고 고칠 수 없는 것은 많습니다. 또 이런 것으로 제향한 지 또한 이미 오래 되었으니, 낱낱이 바로잡는 것이 아니라면 갑자기 의논하여 정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예기(禮記)》에, ‘선왕이 바치는 것은 먹을 수 있으나, 즐겨 먹을 수는 없다.’ 하였으니, 그 중요한 것은 냄새에 있고 맛에 있지 않음을 알 수는 있으나, 물건을 바치고 뜻을 취하여 신명(神明)에게 교감(交感)하는 것에 이르러서는 알 수 없는 바가 있는데, 이제 어찌 억측으로 그대로 두고 고치는 것을 단정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제향하는 예에 먼저 고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다면, 특별히 옥당관(玉堂官)에게 명하여 전례(典禮)를 널리 상고하여 고금의 차이를 분변하게 하고, 예를 아는 유신(儒臣)에게 하문하여 예경(禮經)과 선유(先儒)가 논한 바와 시왕(時王)의 제도를 참작하여 논정(論定)하되, 토산인데도 대용하는 과실은 옛것을 도로 회복하고 녹포(鹿脯)·낭촉도 마땅히 사냥해야 하며, 거서·환채·양국 등은 앞으로 절사(節使)가 갈 때에 연경(燕京)에서 그 종자를 사거나 그 형색(形色)과 만드는 방법을 살펴 오게 하여 태묘(太廟)에 고하고, 낱낱이 그 잘못된 물건을 바꾸어야 향례(享禮)에 거의 유감이 없게 될 것입니다. 신은 여기에서 또 일찍이 의심한 것이 있습니다. 자성(粢盛) 가운데 서(黍)·직(稷)이 가장 중요하므로, 예서(禮書)에 서를 향합(薌合)이라 하고, 직을 명자(明粢)라 하는데, 우리 나라에서 쓰는 서·직은 눈앞에서 사람들이 많이 의심하여 ‘중국에서 이른바 서·직이라는 것과 같지 않다.’ 하고, 저설(著說)한 자까지 있으니, 만일 의심하는 자의 말과 같다면 신명에게 바치기 위한 자성을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연경에서 제향에 쓰는 것과 중국의 구례(舊禮)를 답습한 것이니, 또한 절사가 갈 때에 이 두 가지 곡식을 사 오면 제사에 쓰는 것에 대한 의심을 풀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영상(領相)의 의논에 의거하여 시행하되, 좌상(左相)의 헌의(獻議)한 것 중에서 끝에 붙여 아뢴 두 가지 곡식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이 뒤에 민진후(閔鎭厚)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오례의(五禮儀)》의 제향 도식(祭享圖式)에는 준뢰 상탁(罇罍床卓)에 울창(鬱鬯)·예제(醴齊)·앙제(盎齊)·청주(淸酒)를 배설하되, 예제·앙제는 명수(明水)로 대설(代設)하고, 청주는 현주(玄酒)로 대설하는데, 지금은 명수·현주를 모두 쓰지 않고 빈 뇌(罍)만을 배설합니다. 어느 때부터 이렇게 하였는지 모르겠으나, 예제·앙제는 청주로 대용하더라도 이로 인하여 명수도 아울러 폐지하는 것은 실로 의의가 없습니다. 명수는 월중(月中)에서 음감(陰鑑)으로 취한 것이라 하나, 《오례의》에도 ‘음감수(陰鑑水)가 없으면 정화수(井華水)로 대용한다.’ 하였으니, 대용하여도 혹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비국(備局)에서 영남(嶺南)·호서(湖西)의 각읍(各邑)·각진(各鎭)의 환상(還上)·군향(軍餉)을 받아들였거나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것을 아뢴 계본(啓本)을 살펴서 말위(末位)를 차지한 곤양 군수(昆陽郡守) 한날(韓㻋)·비인 현감(庇仁縣監) 홍석구(洪錫九)·결성 현감(結城縣監) 유봉명(柳鳳鳴) 등은 사목(事目)에 따라 결장(結杖)하고, 그 다음은 추고(推考)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6월 23일 병오
정동후(鄭東後)를 정언(正言)으로, 조관빈(趙觀彬)을 교리(校理)로 삼았다.
6월 24일 정미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지난해 과거(科擧) 때에 관한 사문(査問) 때에 이원곤(李元坤)과 임건원(任健元)이 변명하고 다툰 일은 참으로 집안의 변괴인데, 호조 참의(戶曹參議) 임방(任埅)은 아들과 사위 사이에서 선처(善處)하지 못하였습니다. 처음에 이미 사람이 많은 자리에서 말을 전하고, 도리어 뒷날에는 미봉하려고 한결같이 이원곤의 애걸에 따라 면대하여 서찰(書札)을 만들어 그 사실을 현혹시켜 마침내 속게 되었으니, 【이원곤이 말이 퍼진 뒤에 임방에게 소문과 전한 말이 같지 않다는 뜻으로 마치 이원곤에게 답장을 보낸 것처럼 한 서찰을 지어 달라고 청하였는데, 임방이 그 말에 따라 써서 주었더니, 그 뒤 금오(金吾)에서 대질할 때에 이원곤이 이 서찰을 가지고 증거로 삼았으므로, 임방이 어려움을 당하고 그 실상을 밝혔음.】 우습고도 놀라운 일로서, 금오의 의계(議啓)에 나타나기까지 하였습니다. 저 속이고 반복한 이원곤은 말할 것도 못되나, 임방은 나이와 지위가 어떠한데, 일이 전도되고 망령되게 만든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파직(罷職)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임방의 일만 따랐다.
정언(正言) 유척기(兪拓基)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권설(權卨)이 말을 지어 내어 뭇사람을 현혹시켰습니다. 하(河)210) 가 제 아들211) 을 죽인 것은 왕법(王法)이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니, 성조(聖調)의 악을 징계하는 정사에 있어서 빨리 대의(臺議)를 윤허하여 정형(典刑)을 보이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번에 종향(從享)을 명하신 것은 진실로 어진이를 높이는 성덕(聖德)을 빛낸 것인데, 요즈음 영남 사람들이 간사한 당류(黨類)를 불러 서로 상소하고 있습니다. 그 소(疏)의 대개를 베껴서 전한 것을 보았더니, 말의 뜻이 아주 사리에 어긋난 바가 이상채(李相采)·양명하(梁命夏)보다 자못 더합니다. 왕명을 출납하는 도리에 있어서 진실로 조사(措辭)하여 계품(啓稟)하고, 처분을 우러러 청해야 할 것인데, 전례에 따라 물리친 것은 출납을 오직 합당하게 한다는 의리에 매우 어긋나니, 신은 저윽이 개연(慨然)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聖明)께서는 그 소를 가져다 보시고 엄중하게 징계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두 사람의 일을 처음에 이미 참작하여 처치하였으므로, 줄곧 쟁집(爭執)할 것 없다. 이러한 소장(疏章)을 일체 봉입(捧入)하지 말라는 것은 이미 성명(成命)이 있었으니, 후사(喉司)에서 물리친 것은 명을 받드는 데에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 이때 영남 사람 김여릉(金汝錂) 등 10여 인이 상소하러 대궐에 나아가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을 꾸짖어 헐뜯었는데, 말이 아주 사리에 어긋나므로, 정원(政院)에서 10여 일 동안 서로 버티다가 마침내 물리쳤으므로, 유척기가 상소하여 언급한 것이다.
6월 25일 무신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고, 또 논핵(論劾)하기를,
"내자 봉사(內資奉事) 박광원(朴光元)은 사람됨이 어리석어 관원이 모양을 갖추지 못하였습니다. 전에 재랑(齋郞)을 맡아서 비루하고도 잗단 일이 많이 있었으니, 태거(汰去)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충청 좌도 암행 어사(忠淸左道暗行御史) 조상경(趙尙絅)이 조정에 돌아와 복명(復命)하였다. 청주 목사(淸州牧使) 이징하(李徵夏)·청양 현감(靑陽縣監) 신철(申晢)은 진휼(賑恤)을 잘하였다 하여 포상하고, 전 충청 병사(忠淸兵使) 유성추(柳星樞)·천안 군수(天安郡守) 최창연(崔昌演)·문의 현령(文義縣令) 이덕수(李德壽)·직산 현감(稷山縣監) 김동익(金東翼)은 법을 어기고 다스리지 못하였다 하여 나문(拿問)하거나 파직하였다.
6월 27일 경술
전라우도 암행 어사(全羅右道暗行御史) 조영복(趙榮福)이 조정에 돌아와 복명(復命)하였다. 함평 현감(咸平縣監) 이단장(李端章)·장흥 부사(長興府使) 김하정(金夏鼎)을 잘 다스리지 못하였다 하여 파직하였다.
6월 29일 임자
도목정(都目政)을 거행하였다. 박성로(朴聖輅)를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전라좌도 암행 어사(全羅左道暗行御史) 홍계적(洪啓迪)이 조정에 돌아와 복명(復命)하였다. 전 곡성 현감(谷城縣監) 김만직(金萬敵)·보성 군수(寶城郡守) 김석하(金錫夏)·창평 현령(昌平縣令) 정중해(鄭重海)·장수 현감(長水縣監) 임선(任敾)·제주 목사(濟州牧使) 홍중주(洪重周) 등은 잘 다스리지 못하고 법을 어겼다 하여 나문(拿問)하거나 파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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