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일 계축
사시(巳時)와 오시(午時)에 햇무리하였다.
도목정(都目政)212) 을 행하였다. 홍석보(洪錫輔)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경상좌도 암행 어사(慶尙左道暗行御史) 이명언(李明彦)이 조정에 돌아와서 복명(復命)하였다. 인동 부사(仁同府使) 이익해(李翼海)와 전(前) 부사(府使) 이회원(李會元)은 불법을 저질렀기 때문에 나문(拿問)하였고, 안동 부사(安東府使) 이익저(李益著)·동래 부사(東萊府使) 한중희(韓重熙)·청하 현감(淸河縣監) 김만우(金萬遇)·비안 현감(比安縣監) 이이태(李以泰)는 정사에 하자가 있었기 때문에 파출(罷黜)시켰다.
경상우도 암행 어사(慶尙右道暗行御史) 윤양래(尹陽來)가 조정에 돌아와 복명(復命)하였다. 거제 부사(巨濟府使) 이봉징(李鳳徵)·함안 군수(咸安郡守) 이지빈(李之彬)·웅천 현감(熊川縣監) 김명대(金鳴大)는 불법을 저질렀기 때문에 나문(拿問)하였고, 김해 부사(金海府使) 유하(柳㵑)는 진휼(賑恤)한 곡식이 부실(不實)하였기 때문에 파출(罷黜)시켰고, 상주 목사(尙州牧使) 정사효(鄭思孝)는 진휼(賑恤)을 잘하였기 때문에 포상(褒賞)을 가하였다.
7월 2일 갑인
도목정(都目政)을 행하였다. 권변(權忭)을 대사간(大司諫)으로, 홍계적(洪啓迪)을 북평사(北評事)로, 김재로(金在魯)를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도목정은 으레 2일 동안에 행하는 것인데, 이때 임금의 기후(氣候)가 미령(未寧)하여 수응(酬應)하기가 곤란하였으므로 3일로 나누어 시행하였다.
7월 3일 을묘
황해도 암행 어사(黃海道暗行御史) 박성로(朴聖輅)가 조정에 돌아와 복명(復命)하였다. 풍천 부사(豐川府使) 성준(成儁)과 장연 부사(長淵府使) 홍이도(洪以圖)는 불법을 저질렀기 때문에 나문(拿問)하였고, 강령 현감(康翎縣監) 유붕장(柳鵬章)과 신계 현령(新溪縣令) 신치복(辛致復)은 정사에 하자가 있기 때문에 파출(罷黜)시켰고, 안악 군수(安岳郡守) 유명건(兪命健)은 진휼(賑恤)을 잘했기 때문에 포상(褒賞)을 가하였다.
7월 4일 병진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임금이 다만 박광원(朴光元)의 일만 따랐다.
약방(藥房)에서 들어와 진찰(診察)하였다. 진찰을 끝마치자,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은 죽은 지가 이미 오래 되었는데도 문집(文集)을 아직 간행하지 못하고 있으니 진실로 흠사(欠事)입니다. 지금 듣건대 그의 자손(子孫)과 문생(門生)들이 바야흐로 기궐(剞劂)213) 에 붙이려 하는데 권질(卷帙)이 너무 호대(浩大)하여 쉽사리 시공(始工)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교서관(校書館)에서 간행하게 하는 것이 사의(事宜)에 맞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전에 동춘(同春)214) 의 문집(文集)도 특명(特命)으로 간행하여 인출(印出)하게 했었다. 지금도 교서관에 분부(分付)하여 간행(刊行)하게 하라."
하였다.
광해주(光海主)의 외손(外孫)으로서 광해주의 제사를 봉행(奉行)하여 온 사람을 녹용(錄用)하라고 명하였다. 민진후(閔鎭厚)가 임금에게 건백(建白)하기를,
"연산주(燕山主)의 황음(荒淫)과 무도(無度)함은 이전의 역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가 드문데도 그의 외손(外孫)으로서 제사를 봉행하여 온 사람을 특별히 녹용(錄用)하였으니, 인후(仁厚)한 성덕(聖德)이 천고에 탁월하였습니다. 그런데 삼가 듣건대, 광해주(光海主)의 외손(外孫)으로서 제사를 봉행하여 온 사람에게는 아직껏 녹용(錄用)하는 거조가 없었다 하니, 이는 필시 우연히 살피지 못했던 소치일 것입니다. 마땅히 똑같이 녹용하는 은전(恩典)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마침내 해조(該曹)에 분부(分付)하여 녹용(錄用)하라고 명하였다.
7월 5일 정사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에 아뢰었던 것을 다시 아뢰고, 또 말하기를,
"작년에 강박(姜樸)을 먼 곳에 정배(定配)하라고 명하신 것은 그가 답통(答通)215) 을 빙자하여 선정(先正)에게 무욕(誣辱)을 가한 죄를 바로잡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 뒤 이세주(李世柱)의 정순(呈旬)216) 내용에서도 패려(悖戾)스런 말들이 또한 몹시 낭자(狼藉)하였습니다. 두 사람이 지은 죄범이 별로 다른 것이 없는데 이세주는 홀로 법망을 요행히 피하였으니, 이미 징토(懲討)하는 형벌에 어긋났습니다. 그런데 또 이번의 제배(除拜)가 물정(物情)의 밖에서 나왔습니다. 청컨대 성현 찰방(省峴察訪) 이세주(李世柱)를 파직(罷職)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다만 이세주의 일만 따랐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고, 또 말하기를,
"안주 목사(安州牧使) 권민(權慜)은 오로지 자신을 살찌우기만을 힘쓰고 간사한 아전을 신임하여 환상미(還上米)를 덜어내어 강제로 팔아서 이식(利殖)을 취하였으니, 청컨대 나문(拿問)하여 그 죄를 바로잡게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경기(京畿)의 각 고을에 지난달 20일 무렵부터 폭우(暴雨)가 연달아 쏟아지고 큰 바람까지 일어나서 육지가 바다가 되었으므로 각종 곡식이 모두 물에 잠겼다고 도신(道臣)이 보고하였다. 강화부(江華府)와 충청도(忠淸道) 도신(道臣)도 수재(水災)에 대한 보고를 하였다.
7월 6일 무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임금이 다만 권민(權慜)의 일만 따랐다.
홍만조(洪萬朝)를 한성 판윤(漢城判尹)으로 삼았다.
7월 7일 기미
예조(禮曹)에서 말하기를,
"대전(大殿)·각전(各殿)의 삼명일(三名日)217) 과 탄일(誕日)에 올리는 서울과 지방의 방물(方物) 가운데 물선(物膳)218) 과 삭선(朔膳)219) 은 전에 재황(災荒) 때문에 양감(量減)하도록 품지(稟旨)하여 봉납(捧納)을 정지해 왔었습니다. 청컨대 물선은 오는 동지(冬至)부터 복구(復舊)시키고 삭선(朔膳)은 10월부터 복구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내년 가을까지를 기한으로 우선 감면하라고 명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조상우(趙相愚)가 차자(箚子)를 진달하여 윤선거(尹宣擧)의 일에 대해 논하였는데, 말하기를,
"가만히 생각하건대, 지난 가을 현판(懸板)을 헐어낼 때 돈광(墩光)220) 의 비유와 사화(士禍)의 이야기가 날마다 장독(章牘)에 올랐었습니다. 그러나 대신(大臣)이 대변(對辨)하는 소장에서 현판만 헐어낼 뿐이요 그 사람은 죄주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돈광(墩光)의 비유와 사화(士禍)의 이야기는 대단한 무함이요 날조인 것입니다. 전하(殿下)께서도 무함이요 날조라고 하셨는데, 신(臣)도 그때 봉신(奉信)하고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설령 의심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전하께서 반드시 엄하게 내쳤을 것이고 대신(大臣)들도 제때에 구알(救遏)하여 앞서의 말을 실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근일의 처분(處分)은 매우 서로 어긋나서 추탈(追奪)하는 형벌이 지하(地下)에까지 미쳤으니, 전하께서 재위(在位)하시는 때에 이전의 역사에도 드물게 있었던 이런 거조가 있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지금의 이 추탈(追奪)은 순차적으로 응당 시행해야 하는 형벌에 불과한 것이고 나의 의견도 본디 이와 같았던 것으로 원래 승선(承宣)221) 의 소장(疏章) 때문에 비로소 깨달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 내가 엄중히 내치지 않고 대신이 구알(救遏)하지 않았다는 것을 가지고 말을 하니, 이 점은 내가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7월 9일 신유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조상우(趙相遇)의 차자(箚子) 내용으로 인하여 차자를 올려 스스로 변명(辨明)하였는데, 이르기를,
"윤선거(尹宣擧)가 임금을 핍박한 말은 용의(用意)가 매우 심각한 것으므로, 실로 우연히 전도(顚倒) 착오된 것에 견줄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신이 다만 유망(謬妄)으로 처리하고 심각하게 주벌(誅罰)하려고 하지 않은 것은 대개 충후(忠厚)한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추탈(追奪)하자는 의논은 처음부터 있어 왔는데, 어리석은 신은 홀로 ‘이는 채확(蔡確)이 선인(宣仁)을 무함한 것222) 과 흡사한데 그때 주자(朱子)가 구어(口語)로 채확을 배척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한 처사라고 했으니, 신이 윤선거를 저와 같이 처치한 것은 주자의 취지에 멀리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라고 여겼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청의(請議)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신을 구차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지금 적용한 죄벌(罪罰)이 진실로 중도에 지나친 것 같지만 또한 유안세(劉安世)223) 가 채확(蔡確)을 주벌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추탈(追奪)하는 형벌을 시행하는 것을 가지고 마치 사화(士禍)를 조성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유안세(劉安世)의 현명함으로도 유자광(柳子光)의 무리가 되는 것을 면하지 못하는 격이 됩니다. 대저 선왕(先王)을 위하여 무례(無禮)한 자들을 주벌함에 있어 그것이 혹 중도에 지나치더라도 사당(私黨)을 위하여 잘못을 숨겨주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신이 심각하게 주벌을 가하고 싶어하지 않는 뜻은 진실로 아닌게 아니라 늘 같은 마음입니다. 단지 전후 사람들의 비난을 받아 온갖 곤욕을 다 당하므로 인하여 마음에 싫증이 나고 이빨이 시릴 정도여서 항상 이의 시비(是非)에 대해서는 입에서 끊고 말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지금 이 의율(擬律)의 경중(輕重)에 대해서도 마땅히 공의(公議)에 붙일 뿐입니다. 신이 또 어떻게 한편에서 공갈 협박하는 말에 핍박하는 말에 핍박을 받아 앞장서서 간여하기를 마치 풍부(馮婦)가 수레에서 내려 범을 잡은 것224) 처럼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 일은 본디 그의 당여(黨與)들이 미쳐 날뛰는 것으로 인하여 처분(處分)이 엄중히 징계한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마땅히 스스로 반성해야 할 것이요 신을 잡고 늘어지는 것은 부당한 일인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批答)으로 위유(慰諭)하였다.
충청우도 암행 어사(忠淸右道暗行御史) 이인복(李仁復)이 조정에 돌아와 복명(復命)하였다. 태안(泰安)의 전(前) 현감(縣監) 한성흠(韓聖欽), 비인(庇仁)의 전(前) 현감(縣監) 홍석구(洪錫九)·덕산 현감(德山縣監) 이덕소(李德邵)·결성 현감(結城縣監) 유봉명(柳鳳鳴)·면천 군수(沔川郡守) 이의화(李宜華)는 모두 불법을 저질렀고 정치를 잘못하였기 때문에 나문(拿問)하였고, 공주 목사(公州牧使) 이형좌(李衡佐)·당진 현감(唐津縣監) 이운호(李耘好)는 정치를 잘하였기 때문에 포상(褒賞)을 가하였다.
7월 10일 임술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기민(飢民)을 진구(賑救)하던 끝에 독한 여역(癘疫)이 계속 치성(熾盛)하여 사망자(死亡者)가 서로 잇달아 지식(止息)될 기약이 없으니, 이보다 더한 놀라움과 참혹스러움이 어디 있겠는가? 약물(藥物)과 구료(救療) 등에 관한 일을 여러 번 하교하였으니, 특별히 서울과 지방에 신칙(申飭)하여 착실하게 봉행하게 하라. 온 집안이 모조리 다 죽은 경우에 이르러서는 더욱 참혹스럽기 그지없으니 앞으로는 특별히 품처(稟處)하여 내가 진휼(軫恤)하고 있다는 뜻을 보이라."
하였다.
함경도(咸鏡道)에 특별히 중신(重臣) 호조 판서(戶曹判書) 권상유(權尙游)를 파견하여 시재(試才)하게 하고, 평안도(平安道)에 특별히 중신(重臣) 형조 판서(刑曹判書) 민진원(閔鎭遠)을 파견하여 시재(試才)하게 하였다. 폐사(陛辭)할 적에 대제학(大提學) 송상기(宋相琦)를 패초(牌招)225) 하여 출제(出題)하여 부송(付送)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이어 두 신하를 인견(引見)하니, 권상유(權尙游)가 말하기를,
"전에 과거(科擧)를 실시할 적에는 문과(文科)를 혹은 3인을 뽑기도 하고 혹은 4인을 뽑기도 했었는데, 이번에는 몇 사람을 뽑아야 되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남도(南道)와 북도(北道)에서 각각 2인씩 뽑으라고 명하였다. 권상유가 또 말하기를,
"전에 문과(文科)의 참시관(參試官)은 감사(監司)로 차정(差定)했지만 무과(武科)의 참시관(參試官)은 병사(兵使)를 차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관서(關西)의 전례(前例)는 병사(兵使)를 무과의 참시관으로 차정하고 있습니다."
하고, 민진원(閔鎭遠)은 말하기를,
"감사를 이미 문소(文所)의 참시관으로 삼았으니 무소(武所)의 참시관도 마땅히 병사로 차정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병사로 차정하라고 명하였다. 권상유가 또 말하기를,
"북도(北道)에는 각궁(角弓)이 매우 귀하여 무과(武科)의 거자(擧子)들이 과거에 임하여 차용(借用)하는데, 간혹 세를 내어 빌어 쓰기도 하니 일이 매우 구차스럽다고 합니다. 육량시(六兩矢)를 이미 관(官)에서 지급하고 있으니, 청컨대 오군문(五軍門)과 군기시(軍器寺)의 대궁(大弓)을 각기 3,4장(張)을 가지고 가서 과장(科場)에서 거자(擧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가 시험을 끝마친 뒤에 반납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이 서로(西路)에도 가지고 가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똑같이 가지고 가도록 명하였다. 민진원이 또 말하기를,
"도내(道內)에 문과(文科)의 거자(擧子)가 매우 많은데 예조(禮曹)의 절목(節目)에 의하면 다만 시지(試紙)를 70권(卷)만 가지고 가게 되어 있으므로 수량이 반드시 부족한 것 같습니다. 청컨대 시지(試紙)를 1백 권(卷)을 더 가지고 가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게 하였다.
7월 11일 계해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고, 또 탄핵하기를,
"죽산 부사(竹山府使) 정도휘(丁道徽)는 술을 몹시 즐겨서 정무(政務)를 포기하고 재물을 탐내고 이익을 취하므로 온 고을 사람이 원망하고 미워하니, 청컨대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이조 참판(吏曹參判) 정호(鄭澔)·호조 참판(戶曹參判) 권성(權𢜫)·행 부제학(行副提學) 이의현(李宜顯)·예조 참판(禮曹參判) 조도빈(趙道彬)을 비변사 제조(備邊司提調)로 삼았다.
7월 12일 갑자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임금이 다만 정도휘(丁道徽)의 일만 따랐다.
약방(藥房)에서 들어와 진찰하였다. 진찰을 끝낸 다음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각도(各道)의 서원(書院) 가운데 법금(法禁)을 무시하고 겹쳐 설치한 것이 많으니, 청컨대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조사해 계문(啓聞)하게 하여 보존시킬 것인가 헐어버릴 것인가를 품지(稟旨)하게 하소서. 그 가운데, 윤선거(尹宣擧)의 서원(書院)은 지금 한편에서는 지하(地下)에 죄를 가하고 있는데 한편에서는 관(官)에서 제수(祭需)를 지급하고 있으니, 사리에 매우 어긋납니다. 가을 제향(祭享)부터는 관에서 제수를 지급하지 말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허락하였다. 민진후가 또 말하기를,
"외방(外方)에는 첩적자(疊籍者)226) 와 모적자(冒籍者)227) 가 많습니다. 이번 세 곳에서 별과(別科)를 보일 적에는 세 번의 식년(式年)228) 에서 잇따라 입적(入籍)된 사람만 시험에 나아갈 수 있도록 허락하소서. 입적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이 기한에 차지 않았거나 혹은 자신이 그 곳에 거주하고 있지 않은 경우에는 설혹 합격되었더라도 마땅히 모두 빼어버려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동래 부사(東萊府使) 한중희(韓重熙)가 장계(狀啓)하기를,
"문위 역관(問慰譯官)이 바다를 건너갈 적에 서계(書契)의 내용에 중연(重演)이라고 한 ‘중(重)’자는 그 전의 관백(關白)의 이름자에 촉범(觸犯)된 것이기 때문에 대마도(對馬島)의 여러 사람의 의논이 ‘감히 이것을 강호(江戶)229) 로 전송(傳送)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문자(文字)를 쓰는 가운데 ‘중(重)’자는 쓰지 않기로 신묘년230) 통신사(通信使)의 사행(使行)이 있을 적에 이미 서로 약속하였으니, 청컨대 다시 고쳐서 보내도록 허락하여 주소서."
하였다. 비국(備局)에서 복주(覆奏)하니, 다시 지어서 보낼 것을 허락하였다.
팔도(八道)에 큰물이 졌는데 영남(嶺南)과 관동(關東)이 더욱 혹심하였다. 낙동강(洛東江) 일대(一帶)가 모두 큰 바다를 이루었고 사람이 빠져 죽은 것이 그 수효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금강산(金剛山) 봉우리 두어 개가 갑자기 저절로 무너졌다. 게다가 서북(西北) 지방의 충재(蟲灾)와 여러 도(道)의 여기(癘氣)가 한결같이 번지므로 여러 도(道)의 도신(道臣)231) 들이 잇따라 장문(狀聞)하였다.
궁인(宮人) 혜정(惠貞)·숙이(淑伊) 등을 유사(攸司)에 내려 죄를 처단하도록 명하였다. 혜정 등이 대궐(大闕)안에서 술을 빚어 사사로이 팔았는데, 임금이 그 사실을 듣고 궁금(宮禁)이 엄하지 못하다고 여겨 입진(入診)할 때에 특별히 이들을 거두어 죄를 다스리라고 명한 것이다. 다음날 또 하교(下敎)하여 혜정이 몰래 자신의 동생(同生)인 장후적(張後籍)의 4세 된 손자(孫子)를 대궐에서 길렀다는 이유로 아울러 장후적도 가두어 죄를 다스릴 것을 명하였다. 형조(刑曹)에서 언의(諺議)하기를,
"혜정은 교형(絞刑)에 해당되고, 숙이는 장(杖) 1백에 처하고 장후적은 장 1백에다 유(流) 3천리에 처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특명(特命)으로 혜정의 사죄(死罪)를 용서하여 유형(流刑)에 처하게 하였다.
7월 13일 을축
함경도(咸鏡道)의 각종 토공(土貢)을 감면시키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함경 감사(咸鏡監司) 이광좌(李光佐)가 토공 가운데 긴요하지 않은 물품은 감면시켜줄 것을 청하였는데, 임금이 비국(備局)에 명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비국에서 복주(覆奏)하면서 그 수목(數目) 가운데 긴요하지 않은 것은 주(註)를 달아서 들였는데,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또 중포문어(中脯文魚)도 헤아려 감(減)하고 대구어(大口魚)도 1백 미(尾)를 감면하도록 명하였다.
7월 15일 정묘
황해도(黃海道) 바다에 당선(唐船)232) 이 무시로 출몰하였는데, 장연부(長淵府)에서 그 가운데 육지에 상륙한 자 1인을 체포하여 본부(本府)에 수금(囚禁)하고 감사(監司)가 비국(備局)에 장문(狀聞)하였다. 비국에서 복주(覆奏)하기를,
"황력재자관(皇曆䝴咨官)233) 의 행차에 붙여 압송(押送)하고 이어 엄중히 금단(禁斷)하라는 내용을 예부(禮部)에 보내는 자문(咨文)234) 에 첨입(添入)시키소서."
하였다.
7월 16일 무진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고 또 말하기를,
"궁액(宮掖)의 금방(禁防)이 지극히 엄중한 것은 바로 내외(內外)의 한계를 확실하게 하여 난잡(亂雜)해지는 걱정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이번에 혜정(惠貞)은 감히 여항(閭巷)의 아이를 데리고 들어와 아주 엄한 대내(大內)에다 데려다 놓았으니, 그의 죄상을 논하면 아주 통분하고 놀랄 일입니다. 사형(死刑)을 용서하는 은전(恩典)이 비록 살리기 좋아하시는 인덕(仁德)에서 나온 것이지마는, 삼척(三尺)235) 은 지극히 엄한 것이므로 그 죄는 용서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청컨대 사형을 감면하라는 명을 속히 정지하시고 이어 유사(攸司)에게 명하여 형률에 의거하여 처단하게 하소서. 외인(外人)을 불러들인 죄는 비록 혜정에게 있지만, 장후적(張後籍)이 멋대로 자신의 손자(孫子)를 대궐 안으로 들여보낸 것은 그 죄범을 논한다면 또한 놀랍고 통분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따라서 유배(流配)시키는 형벌로서는 그 죄를 징계할 수가 없으니, 청컨대 절도(絶島)로 정배(定配)하소서. 궐문(闕門)에 잡인(雜人)을 금하는 것은 그 책임이 오로지 병조(兵曹)에 있는데 지금 그 여항의 아이가 몰래 액정(掖庭)에 들어온 것은 일찍이 없었던 일인 바, 이를 능히 엄중히 금지시키지 못한 책임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그 당시의 담당 당상관(堂上官)과 낭청(郞廳)은 추고(推考)하고 하리(下吏)는 유사(攸司)로 하여금 가두어 죄를 다스리게 하소서. 대내(大內)가 얼마나 지극히 엄중한 곳입니까? 나인(內人)들이 사사로이 술을 빚어 몰래 서로 매매하였으니, 일이 무엄하기로는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추조(秋曹)236) 에서 해당되는 형률이 없다는 것으로 감처(勘處)한 것이 너무 관대했습니다. 청컨대 나인(內人) 숙이(淑伊)를 정배(定配)하소서."
하니, 임금이 다만 장후적(張後籍)과 병조(兵曹)의 당상관·낭청을 추고(推考)하는 일만 따랐다.
7월 17일 기사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작금(昨今)에 눈병이 더욱 심해지고 있다. 아침에 약방(藥房)의 계사(啓辭)를 보니 글자가 분명하게 보이지 않았고, 비답(批答)은 자획(字劃)이 더 큰데도 또한 분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긴급한 공사(公事)를 제외한 그 나머지는 우선 승정원(承政院)에 보류하여 두라."
하였다.
헌납(獻納) 박성로(朴聖輅)가 상소했는데, 대략 말하기를,
"예로부터 쇠란(衰亂)의 조짐은 궁금(宮禁)이 엄하지 못한 데에서 연유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이번에 나인(內人)들이 여항(閭巷)의 아이를 데려다가 기르고 술을 빚어 매매하는 일이 있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실로 더없이 큰 변괴(變怪)인 것입니다. 그런데 엊그제 해조(該曹)의 주언(奏讞)과 성명(聖明)의 처분(處分)이 모두 너무 관대한 잘못을 범하였으니, 헌신(憲臣)이 쟁론(爭論)하는 것은 법에 있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상의 비답에 윤허를 내리지 않으시니 이는 실로 뜻밖이어서 신은 삼가 개연(慨然)한 마음입니다. 그리고 삼가 떠도는 말을 듣건대 나인(內人)의 원액(元額)237) 이외에 각방(各房)에 데리고 있는 여인(女人)이 60여 인이나 된다고 하니, 이 일이 사실이라면 이보다 더한 놀랄 만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낱낱이 조사하여 수임(首任) 나인(內人)은 모두 중률(重律)로 논하여 통렬하게 엄방(嚴防)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고, 또 말하기를,
"강계 부사(江界府使) 이상성(李相成)은 만포 첨사(滿浦僉使) 정이운(鄭以雲)과 하나의 미미한 일 때문에 서로 다투었으니 이미 자중(自重)해야 할 의리를 잃었습니다. 그런데 비국(備局)에 서장(書狀)을 보내어 죄를 논하면서 정이운(鄭以雲)은 마치 도신(道臣)이 자기 관하(管下)의 일을 논계(論啓)하듯이 하였으니, 그의 경거망동이 너무 심했습니다. 청컨대 추고(推考)하여 중형(重刑)으로 다스리소서. 문관(文官)과 무관(武官)은 체모(體貌)가 절로 구별이 되는데 정이운(鄭以雲)은 어리석은 무부(武夫)로서 처사(處事)가 패망(悖妄)스러워서 강계 부사(江界府使) 이상성(李相成)과 흔단(釁端)을 야기시켜 사체(事體)를 돌보지 않은 채 막말로 욕설을 했는가 하면 비국(備局)에 서장(書狀)을 올려 제 마음대로 비방했으니, 청컨대 파직(罷職)시키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혜정(惠貞)의 일에 대해 답하기를,
"이미 사형(死刑)을 용서하였으니,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는 것을 도로 중지할 필요는 없다."
하였다.
7월 18일 경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이상성(李相成)과 정이운(鄭以雲)을 모두 추고(推考)하라고 명하였다.
약방(藥房)에서 들어와 진찰하였다. 임금이 안질(眼疾)이 더욱 위중하여졌으므로 침을 맞았다.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가 주원(厨院)238) 에 이직(移直)하겠다고 청하였으나, 임금이 우선 며칠 동안 병세를 살펴보고 하라고 하였다. 민진후(閔鎭厚)가 또 말하기를,
"온양(溫陽)의 별과(別科) 문과(文科)의 액수(額數)를 을사년239) 에는 9인으로 하였고 병오년240) 에는 3인으로 하였으니, 지금도 그 액수를 정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마땅히 을사년의 전례를 따라 9인으로 하라."
하였다. 민진후가 말하기를,
"을사년에 9인으로 한 것은 대체로 곡절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6인으로 출방(出榜)하였으나 임금께서 온양(溫陽) 사람이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온양 사람의 시권(試券) 가운데 차등(次等)에 있는 사람의 것을 넣게 하였으므로, 드디어 9인이 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선왕(先王)께서 온양 사람이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특별히 사제(賜第)241) 할 것을 명하셨으니, 이번에 만약 참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하였다. 민진후가 아뢰기를,
"과거(科擧)의 입락(立落)은 글의 공졸(工拙)242) 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시권(試券)에다 ‘온(溫)’자를 쓰게 해서 온양 사람이 아주 빠져버리는 일이 없게 해야 한다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그렇게 하는 것은 사체(事體)가 구간(苟簡)243) 스러우니 결단코 할 수 없다고 하기도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서북 지방에 별과(別科)를 보일 적에는 시권에다 으레 남·북이라고 써서 표시하게 했으니, 이것도 그 준례에 따라 시권에 ‘온(溫)’자를 쓰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민진후가 말하기를,
"9인은 아무래도 너무 지나친 것으로 생각됩니다. 성의(聖意)로 을사년의 전례를 적용하려 하신다면 원액(元額) 6인 외에 온양 사람 1인을 더 채용하는 것이 좋을 것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8인으로 액수를 정하라고 명하였다. 다음날 좌의정(左議政) 이이명(李頤命)이 임금에게 액수가 너무 과다하다고 아뢰니, 액수를 다시 7인으로 고쳤다.
7월 19일 신미
약방(藥房)에서 들어와 진찰하였다. 도제조(都提調) 김창집(金昌集)이 병때문에 집으로 돌아가 조치(調治)한 지가 10일이 다 되었으나, 입시(入侍)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특별히 좌의정(左議政) 이이명(李頤命)에게 명하여 함께 들어오게 하였다. 경락(經絡)에 침을 맞고 나서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여역(癘疫)이 크게 번지니, 마땅히 여제(癘祭)244) 를 설행(設行)하는 일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중신(重臣)을 보내어 설행하라고 명하였다. 이이명이 말하기를,
"이달 초9일 밤새도록 폭우가 쏟아져서 시내에 물이 창일(漲溢)하였으므로 물가의 인가(人家)가 태반이 무너져 버렸고, 간혹 온 가옥(家屋)이 표몰(漂沒)된 경우도 있는가 하면 떠도는 걸인(乞人)으로서 익사(溺死)한 사람도 많습니다.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일일이 조사하게 한 다음 진휼청(賑恤廳)에 분부(分付)하여 쌀이나 돈을 제급(題給)하게 함으로써 진휼(軫恤)하는 뜻을 보이는 것이 좋을 것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이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왼쪽 안부(眼部)가 어두어서 문서(文書)를 수응(酬應)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런데 오른쪽 눈도 또 이러하니 눈앞의 걱정은 어두워 보이지 않는 데에 있을 뿐만이 아니다. 안력(眼力)을 쓰지 않으면 혹 조금 나아질 방도가 있을 것도 같은데 지금은 문서가 매양 대단히 많은 상황이니, 이와 같은 상황이 계속된다면 이는 장님이 되는 것을 재촉하는 격인 것이다. 반드시 변통시키는 방도가 있은 뒤에라야 병이 더해지는 걱정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하니, 이이명이 말하기를,
"하교(下敎)가 이러하시니 변통시킬 방도를 여러 신하가 누군들 심력을 기울여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아래에서 변통시킬 수 있는 것은 문서(文書)를 줄이는 것에 불과합니다. 신의 천박한 소견으로는 모든 입계(入啓)하는 문서를 음독(音讀)이 분명한 사람이 읽게 하시고, 계하(啓下)할 때는 혹 판부(判付)245) 를 내릴 수도 있으니, 왕세자(王世子)에게 명하여 곁에 있으면서 참견(參見)하게 함으로써 정무(政務)를 분명히 익히게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당(唐)나라 태종(太宗)도 말년에 병이 위중하게 되자 변통시킨 일이 있지 않았는가?"
하니, 이이명이 말하기를,
"고사(故事)는 갑자기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옛 고사를 인용할 필요도 없이 국조(國朝)의 일로 말하더라도 세종대왕(世宗大王)께서 편안하지 못하실 적에 문종 대왕(文宗大王)이 별전(別殿)에 나가서 대신(大臣)들과 함께 참여하여 국정(國政)을 결단하였습니다. 이는 국사(國史)에 반드시 기재되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민진후가 말하기를,
"신은 역사(歷史)를 읽은 것이 익숙하지 못하므로 당나라 태종의 일은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통감강목(通鑑綱目)》에 일이 기재되어 있지 않은가?"
하였다. 이이명이 아뢰기를,
"이 일은 지극히 중대하므로 창졸간에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성명(聖明)께서는 다시 더 생각하시어 대신(大臣)들을 불러 의논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다시 생각하여 보겠다."
하였다. 이이명은 말하기를,
"생각해 보지 않으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하고, 민진후는 말하기를,
"성의(聖意)가 우연하지 않은 듯하나, 다만 신은 평소 역사 기록에 어두울 뿐만이 아니라 조정에 벼슬한 이후로는 오랫동안 부첩(簿牒)속에 묻혀 있었으므로 서책(書冊)을 열람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제 성교(聖敎)를 받드니 아득하기만하여 대답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마땅히 물러가 상고하여 보도록 하겠습니다. 만일 시행할 수 없는 것이라면 신 등이 마땅히 극력 간쟁할 것입니다만, 시행해도 되는 일이라면 어떻게 감히 뜻을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드디어 물러 나왔다.
미시(未時)에 임금이 다시 희정당(熙政黨)으로 나가서 좌의정(左議政) 이이명(李頤命)에게 다시 입시(入侍)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이이명이 승지(承旨) 남도규(南道揆)·가주서(假注書) 이의천(李倚天)·기주관(記注官) 김홍적(金弘迪)·기사관(記事官) 권적(權𥛚)과 함께 합문(閤門) 밖으로 나아갔다. 조금 있다가 사알(司謁)이 와서 임금의 분부를 전하면서 이이명 혼자만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이이명이 창황하게 명을 받들 즈음에 남도규를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일이 상규(常規)와 다르니 승지(承旨)와 사관(史官)은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모름지기 나와 함께 들어가는 것이 옳겠다."
하고, 이에 즉시 빨리 걸어서 들어갔다. 권적(權𥛚)이 말하기를,
"성교(聖敎)가 비록 이와 같지만 우리들이 물러가 있을 수가 없다. 죄벌(罪罰)을 받더라도 함께 들어가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드디어 일어나 뒤를 따랐다. 남도규가 몇 걸음 걸아가다가 권적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성교(聖敎)에 이미 대신(大臣) 혼자만 들어오게 하였는데 우리들이 먼저 품부(稟復)하지도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바로 행하는 것이 사체(事體)에 어떠할지 모르겠다."
하고, 인하여 물러나오려 하였다. 권적이 다시 쟁론(爭論)하여 마침내 희인문(熙仁門) 판장(版牆) 밖에까지 함께 나아갔다. 권적이 한(漢)나라의 신하가 궁중의 작은 문[闥]을 밀어젖히고 바로 들어갔던 고사(故事)246) 를 인용하여 바로 들어가려고 하니, 남도규가 말하기를,
"지금 비록 들어가더라도 진실로 불가한 것이 없지만 대신이 이미 입시하였고 성상의 분부도 허락을 하지 않았으니, 승지(承旨)·사관(史官)이 들어가는 것은 마땅히 승전색(承傳色)에게 청하여 품지(稟旨)를 거친 뒤에 들어가는 것이 무방할 것 같다."
하였다. 이리하여 승전색에게 청하여 승지와 사관이 지금 바야흐로 바로 들어가려 한다는 내용으로 은밀히 품(稟)하게 하였으나 임금이 답하지 않았다. 남도규 등이 또 승전색을 시켜 승지와 사관이 결국 바로 들어가겠다는 뜻을 급히 주달하게 하고 걸음을 옮겨 나아가려 할 즈음에 임금이 비로소 입시하라고 허락하였으므로, 마침내 차례대로 나아가 부복(俯伏)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승지는 누구인가?"
하니, 이이명이 아뢰기를,
"남도규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대신이 독대(獨對)한 경우는 예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승지와 사관이 극력 쟁론하면서 함께 입시(入侍)한 것은 매우 옳은 일이다."
하였다. 이때 이이명(李頤命)은 이미 물러나와 자기의 자리에 부복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날 임금 앞에서 있었던 이야기는 드디어 전하지 못하게 되었다. 임금이 이어 여러 신하들에게 밖으로 나가라고 명하고 나서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만 부르게 하였다.
신시(申時)에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가서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이유(李濡)·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좌의정(左議政) 이이명(李頤命) 등을 불러서 접견하였는데, 승지(承旨) 이기익(李箕翊)·가주서(假注書) 이의천(李倚天)·겸춘추(兼春秋) 김홍적(金弘迪)·대교(待敎) 권적(權𥛚)이 따라 입시하였다.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서종태(徐宗泰)·조상우(趙相遇)·김우항(金宇杭)은 병을 핑계하고 패초(牌招)를 어기고서 끝내 오지 않았다. 김창집(金昌集)이 나아가 임금의 병환에 대해 문후(問候)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지금 왼쪽 안질(眼疾)이 더욱 심하여 전혀 물체를 볼 수가 없고, 오른쪽 눈은 물체를 보아도 희미하여 분명하지 않다. 소장(疏章)의 잔 글씨는 전혀 자형(字形)이 없으므로 마치 백지(白紙)를 보는 것과 같고, 비망기(備忘記)의 큰 글자에 이르러서도 가까이에서 보면 겨우 판별할 수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분명히 보이지 않는다. 지금 만약 안력(眼力)을 조리(調理)한다면 그래도 장님이 되지는 않을 것 같으나 달리 할 만한 일이 없다. 대단히 변통하는 방도가 있은 다음에야 일신(一身)이 조금쯤 편안할 수 있고 국사(國事)도 걱정이 없게 되겠기에 여러 대신들을 만나보고 이 일을 의논하려고 한 것이다."
하니,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신이 외람되게 전하(殿下)를 보호하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성심을 다하여 조호(調護)하지 못한 탓으로 성후(聖候)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그 죄는 만 번 죽어 합당합니다. 그런데 다만 모르겠습니다만 하교하신 변통하는 방도에 대해 성심(聖心)에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신이 밖에 있으면서 좌상(左相)이 입시했을 때의 설화(說話)를 대략은 들었습니다만, 지극히 중대한 성교(聖敎)가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등의 일을 예로부터 군주가 쉽사리 말을 낼 수가 없는 것인데 만일 이것을 진언(進言)하는 자가 있다면, 신 등은 진실로 마땅히 죽음으로써 간쟁(諫爭)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유(李濡)가 말하기를,
"하교하신 바 변통이라는 것은 어떻게 하시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들어와 진찰할 적에 내가 이미 살며시 그 단서(端緖)를 발론(發論)하였는데, 대신(大臣)이 우리 나라의 세종조(世宗朝)의 일을 가지고 진달하였다. 그리고 당나라 태종(太宗)도 태자(太子)에 명령하여 청정(聽政)하게 한 일이 《강목(綱目)》에 기재되어 있다. 지금 나의 안질이 이렇게 오래도록 심하여 왼쪽 눈만 물체를 볼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오른쪽 눈도 장차 장님이 될 지경이므로, 결단코 제반 사무를 수응(酬應)할 수 없는 형세이다. 이런데도 억지로 사무를 수응하려 한다면 이것은 나에게 죽음을 재촉하는 결과가 된다. 세자에게 청정(聽政)하게 하는 일이 나의 본의(本意)였으니, 다시 좌상(左相)을 부른 것도 대개 이 때문이었다."
하였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춘궁(春宮)247) 의 춘추(春秋)가 한창 젊으시고 총명도 점차 진전되고 있으니, 항상 좌우(左右)에서 모시게 하면서 문서를 읽히고 서정(庶政)을 결단하게 하신다면, 앞으로 국사에 크게 이익이 있을 것이며, 또한 반드시 성궁(聖躬)을 조양(調養)하시는 방도에도 힘있는 바가 있게 될 것입니다. 구구한 어리석은 신의 소견(所見)에는 이외에 다른 도리가 없겠습니다."
하고, 이유는 말하기를,
"을유년248) 에 선위(禪位)하시려 할 적에 신이 왕세자(王世子)를 곁에 두고 참여하여 결단하게 한다면 점차 국사를 익혀 가게 할 수 있고, 성후(聖候)를 조섭(調攝)하는 방도에도 반드시 이익이 있을 것이라는 것으로 앙달(仰達)했었습니다. 지금의 신의 천박한 소견(所見)도 이와 같은 데에 불과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좌상(左相)이 입시(入侍)했을 때에 이미 나의 의견을 다 말했다. 나의 안질(眼疾)이 여러 해 누적되어 고질이 되고 말았는데, 옛날의 제왕(帝王)들이 이미 행한 일을 내가 모르는 것이 아니다. 지난 을유년(乙酉年)에 선위(禪位)하는 일을 내가 실행하려 했는데, 지금은 행하려 하여도 반드시 곤란한 단서가 있을 것 같다. 지금은 장님이 될 지경이므로 국사가 매우 안타깝다. 태자(太子)에게 명령하여 청정(聽政)하게 하는 일을 만일 행할 수 있었다면 안질이 심해지기 전에 내가 어찌 행하려 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지금은 행할 수가 없다. 내 한 몸도 진실로 안타깝기 그지 없지만 국사는 더욱 아득하기만 하다."
하였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왕세자(王世子)는 인효(仁孝)가 본디 드러나 있고 영명(英明)스러움이 남보다 뛰어나니, 청정(聽政)하는 일을 어찌 행하지 못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주상께서 결단을 내려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태자에게 명령하여 청정(聽政)하게 하는 일을 내가 행하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니지만, 일이 뜻과 같지 못한 점이 있다. 이것이 내가 하려고 하지만 할 수가 없는 이유인 것이다."
하였다. 이이명(李頤命)이 말하기를,
"들어가 진찰할 적에 신이 진달한 바가 있었고, 다시 연석(筵席)에 나아가 또 하교(下敎)를 받들었으므로 지금은 다시 진달할 말이 없습니다. 신 등이 밖에 있으면서 춘궁(春宮)께서 실덕(失德)한 일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들리는 바에 의하면 인현왕후(仁顯王后)께서 중전(中殿)에 복위(復位)되셨을 때에 효도를 다하고 뒤에 승하(昇遐)하셨을 적에 슬픔을 극진히 하였으며, 지금에 와서는 덕기(德器)가 이미 완성되어 인효(仁孝)가 더욱 드러났다고 하니, 어찌 청정(聽政)을 감당하지 못할 근심이 있겠습니까? 지금의 이 성교(聖敎)는 실로 천만 뜻밖입니다. 예로부터 국가가 난망(亂亡)하는 것은 모두 이런 등류의 처치(處置)를 잘못한 데에서 연유되어 왔습니다. 춘궁(春宮)께 서무(庶務)를 참여하여 결단하게 하신다면 신 등은 각기 스스로 정성을 다하여 보좌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국사가 어찌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을 이치가 있겠습니까? 성명(聖明)께서 이제 척연(惕然)히 의도(意圖)를 고치시어 다시 의심을 가지지 않으신다면 이것이 어찌 종사(宗社)의 복록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김창집은 말하기를,
"일찍이 춘궁께서 인효(仁孝)스러운 덕이 있다는 말을 들었고 신 등이 주연(胄筵)249) 에 입시(入侍)하였기 때문에 또한 일찍이 그 덕성(德性)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어찌 청정(聽政)을 감당하지 못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다시 세 번 생각하시어 〈춘궁이〉 곁에 있으면서 국사에 참여하여 결단하심으로써 성궁(聖躬)을 보호하시고 국가를 이롭게 하소서."
하였다. 이이명이 말하기를,
"여항(閭巷) 사람의 경우로 말하더라도 모든 사물를 점차 익혀가면 자연히 진취(進就)되기 마련인 것입니다. 춘궁(春宮)의 영명(英明)한 자질로 어찌 능히 청정(聽政)하지 못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성상의 심려(心慮)가 이러하니 이는 국가의 복이 아닙니다."
하고, 이유는 말하기를,
"예로부터 태자(太子)에게 청정(聽政)하게 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당(唐)나라와 우리 나라에서 이미 행했던 일을 분명히 고증할 수 있는데도 성교(聖敎)에 행할 수 없다고 하시니, 신 등은 진실로 성의(聖意)의 소재(所在)를 알 수가 없습니다."
하고, 이기익(李箕翊)은 말하기를,
"왕세자의 천성(天性)에서 타고 나신 성효(誠孝)는 사방에서 목을 길게 빼고 몹시 기대하고 있으며, 동궁(東宮)에서 덕을 배양하셨고 춘추(春秋)가 한창 젊으시니, 비록 청정(聽政)하게 한 고사(故事)가 없을지라도 성상의 병환이 지금과 같은 경우에는 마땅히 참여하여 결단하게 하는 방도를 강구해야 되는 것인데, 더구나 당(唐)나라 때의 고사(故事)와 조종조(祖宗朝)에서 이미 시행한 일이 있는 것이겠습니까? 주상께서 이에 의거하여 처분(處分)을 내리신다면 어찌 종사(宗社)의 끝없는 복록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나도 진실로 생각해 왔었다. 만약 청정(聽政)시킬 수 있었다면 안질(眼疾)이 악화되기 전에 어찌 행하려 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지금은 어렵기 그지없다."
하였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성상(聖上)께서 당초 행하지 않으시고 다만 어렵다고만 하교하시니 진실로 민망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다마 여항(閭巷)에서 아들을 가르치는 일로 말하여 보더라도 친절하게 잘 교유(敎誘)하여 스스로 깨닫게 하면 처음에는 글을 잘하지 못했던 사람도 글을 잘할 수 있게 되는 것이고 처음에는 일을 잘 알지 못했던 사람도 일을 잘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참여하여 서사(庶事)를 결단하게 하시고 주상께서 때때로 교도(敎導)하시다면 춘궁(春宮)의 총명하신 자질로 결단코 잘하지 못할 이치가 없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국가를 위하여 깊이 생각하시어 다른 걱정을 하지 않으신다면 국가에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
하고, 이유는 말하기를,
"을유년250) 에는, 성상(聖上)의 환후(患候)가 지금에 견줄 정도가 아니었고 춘궁의 춘추(春秋)도 아직 성장(盛壯)하지는 못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전선(傳禪)하신다는 하교가 있었기 때문에 정신(廷臣)들이 극력 간쟁한 것이고 왕세자(王世子)도 눈물을 흘리면서 간절히 진달하여 마침내 성의(聖意)를 돌리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성후(聖候)가 이러하고 사세(事勢)도 그때와는 크게 다르기 때문에 청정(聽政)하는 이외에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지금 다른 도리가 없고, 나의 병은 의약(醫藥)으로 쾌차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이유가 말하기를,
"춘궁(春宮)의 춘추(春秋)가 지금은 이미 성장(盛壯)하시었고 덕성(德性)도 전보다 더욱 향상되었으니 청정(聽政)하게 하는 일을 진실로 행해야 합니다. 주상께서 일을 과단성 있게 처리하지 못하시고 미룰 단서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나의 의도는 청정(聽政)하게 하는 것을 어렵게 여기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이유가 말하기를,
"성의(聖意)가 청정하는 것을 어렵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면 모르겠습니다만, 어렵게 여기는 것은 무슨 일입니까?"
하니, 임금이 답하지 않았다. 이이명은 말하기를,
"모든 일은 인정(人情)에 순응(順應)하면 천심(天心)에도 합치되기 마련입니다. 참여하여 결단하게 한 뒤에 설혹 조금이라도 미진(未盡)한 점이 있다면 주상께서 자주 효유(曉喩)하시고 신 등도 성심을 다하여 보좌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전하(殿下)께서 직접 정사를 처리할 때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리고 대사(大事)에 이르러서는 주상께서 또한 때때로 재결(裁決)하신다면 성후(聖候)의 여러 가지가 잘 수양(修養)되는 공을 이룰 수 있을 것이며, 왕세자께서도 점차 국사를 익혀 가게 될 것이니 어찌 달리 걱정할 일이 있겠습니까? 성명(聖明)께서 만약 이렇게 계책을 정하지 않으신다면 종사(宗社)가 이로부터 불안해질 것입니다. 예로부터 난망(亂亡)이 모두 여기에서 연유되었으니 지금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바로 국가의 대사(大事)인데 다만 신 등 몇몇 사람들과 이를 의논하시니 신 등은 정성을 다해 진달하는 외에 다시 달리 진달할 것이 없습니다."
하고, 이기익은 말하기를,
"대신들이 되풀이하여 진달하는 것은 실로 국가의 대계(大計)를 위하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전하께서 쾌히 대신들이 진달한 바를 따르고 조종조(趙宗朝)의 고사(故事)를 준행하신다면 신민(臣民)들이 모두 기뻐할 것이고 국가에도 더없는 다행이 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문종조(文宗朝)의 고사(故事)를 경(卿) 등은 알고 있는가?"
하니, 이이명이 말하기를,
"《국조보감(國朝寶鑑)》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실록(實錄)에는 반드시 상세하게 기재되어 있을 것이다. 나의 안질(眼疾)이 이러하여 사무를 수응(酬應)할 수 없으니 지금으로서는 다른 도리가 없다. 대신들의 진달이 이러하니 마땅히 조종조(祖宗朝)의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해야겠다. 문종조(文宗朝)에서 참여하여 결단할 때의 실록(實錄)을 춘추관(春秋館)의 당상관(堂上官)과 낭청(郞廳)을 파견하여 상고하여 오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내일이라도 상고하여 오게 하라."
하니, 이이명이 말하기를,
"이 일은 중대한 것이니 참결(參決)하여 청정(聽政)한다는 것을 마땅히 비망기(備忘記)로 하교하셔야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절목(節目)에 관한 일을 우선 상고하여 오게 하라. 춘추관(春秋館)의 당상관과 낭청을 반드시 내일 안으로 발송시키도록 하라. 비망기(備忘記)는 마땅히 내리도록 하겠다."
하고, 임금이 김창집(金昌集)을 돌아보면서 이르기를,
"경(卿)의 병환이 아직도 차도(差度)가 없으니, 매우 염려스럽다. 모름지기 즉시 집에 돌아가서 잘 치료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 소환(小䆠)에게 명하여 부축하고 나가게 하였다. 여러 신하들도 마침내 물러나왔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부자(父子) 사이는 다른 사람이 말하기 어려운 것이 있는데, 당일 입대(入對)한 여러 신하들은 번갈아 아뢰면서 극려 쟁론하여 정성을 다하여 광구(匡救)하였으니, 춘궁(春宮)을 사랑하여 추대하는 마음과 주상의 마음을 감동시켜 깨우친 공로가 옛사람에 견주어도 부끄러울 것이 없으며 후세에도 할 말이 있다고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저 기뻐하지 않는 사람들의 말은 사람을 의심해서는 안될 곳까지 의심하여 기필코 죄벌의 함정에 몰아넣으려 하였으니, 아! 또한 심한 처사이다."
【태백산사고본】 68책 60권 5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660면
【분류】왕실-국왕(國王)
[註 247] 춘궁(春宮) : 왕세자.[註 248] 을유년 : 1705 숙종 31년.[註 249] 주연(胄筵) : 서연(書筵).[註 250] 을유년 : 1705 숙종 31년.
사신(史臣)은 말한다. "부자(父子) 사이는 다른 사람이 말하기 어려운 것이 있는데, 당일 입대(入對)한 여러 신하들은 번갈아 아뢰면서 극려 쟁론하여 정성을 다하여 광구(匡救)하였으니, 춘궁(春宮)을 사랑하여 추대하는 마음과 주상의 마음을 감동시켜 깨우친 공로가 옛사람에 견주어도 부끄러울 것이 없으며 후세에도 할 말이 있다고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저 기뻐하지 않는 사람들의 말은 사람을 의심해서는 안될 곳까지 의심하여 기필코 죄벌의 함정에 몰아넣으려 하였으니, 아! 또한 심한 처사이다."
하교(下敎)하기를,
"5년 동안 병마에 시달려온 끝에 안질(眼疾)이 더욱 고통스러워서 물체를 보아도 더욱 희미해 수응(酬應)하기가 점차 어렵게 되었으니 국사가 걱정스럽기 그지없다. 그리하여 국조(國朝)와 당(唐)나라 때의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세자(世子)에게 청정(聽政)하게 한다."
하였다.
권엽(權熀)을 집의(執義)로, 황흠(黃欽)을 판의금(判義禁)으로, 홍계적(洪啓迪)을 교리(校理)로, 김태수(金台壽)를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7월 20일 임신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기를,
"신 등이 삼가 어제의 비망기(備忘記)를 보건대, 국조(國朝)와 당(唐)나라 때의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세자(世子)에게 청정(聽政)하게 하겠다는 내용으로 하명(下命)하셨습니다. 응당 행해야 할 제반 일을 본원(本院)에서 마땅히 품지(稟旨)하여 거행해야 되는데, 세종조(世宗朝)의 실록(實錄)을 상고하여 오게 하는 일로 춘추관(春秋館)의 당상관(堂上官)과 낭청(郞廳)이 바야흐로 나가버렸으니,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의절(儀節)을 품정(稟定)한 뒤에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어제의 비망기(備忘記)에서 국조(國朝)와 당(唐)나라 때의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세자(世子)에게 청정(聽政)하게 한다는 명령이 있으셨습니다. 국조의 고사는 춘추관의 당상관과 낭청이 바야흐로 세종조(世宗朝)의 실록을 조사하여 오는 일로 출거(出去)하였습니다만, 당(唐)나라의 고사(故事)는 《강목(綱目)》에 기재된 것 이외에도 다른 책에 뒤섞여 나오는 것 가운데에서 반드시 상고할 만한 것이 있을 것이니,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널리 전례(典禮)를 상고하여 의절(儀節)을 만들게 한 다음 품정(稟定)할 때 참고하여 채용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7월 21일 계유
부제학(副提學) 이의현(李宜顯)·응교(應敎) 어유귀(魚有龜)·부응교(副應敎) 윤봉조(尹鳳朝)·교리(校理) 홍계적(洪啓迪)·부교리(副校理) 김재로(金在魯)가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어제 연중(筵中)에서 여러 대신들의 개진(開陳)으로 인하여 성상(聖上)께서 특별히 깊이 헤아려 생각하신 끝에 왕세자(王世子)에게 청정(聽政)하게 한다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이로부터 이후에는 조섭(調攝)에도 도움이 있고 사무도 정체되는 것이 없을 것이니, 종사(宗社)의 경사와 신민(臣民)의 행복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연석(筵席)은 엄중하고 비밀스러운 곳이므로 당일의 설화(說話)를 자세히 알 수는 없습니다만, 다만 들리는 바에 의하면 성상(聖上)께서 수작(酬酢)하는 즈음에 미안스런 하교가 많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생각건대 우리 왕세자(王世子)께서는 춘궁(春宮)으로 있으면서 덕을 배양하여 온 지가 30년이 되었고, 예학(睿學)이 조숙하여 어질다는 소문이 멀리 전파되었으므로 온 나라 사람들이 목을 길게 빼고 몹시 기대하면서 애대(愛戴)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따라서 전하(殿下)의 이 분부는 특별히 끝없는 인자(仁慈)한 정리에 의한 것으로 이미 성스럽게 되었는데도 더 성스럽기를 바라고 이미 착한데도 더 착하기를 책하는 것이니, 중외(中外)의 신서(臣庶)가 누군들 성의(聖意)의 소재를 우러러 깨닫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언어(言語)는 혹 잘못 전파될 수도 있고 청문(聽聞)은 현혹되기 쉬운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부탁(付托)의 지중함을 길이 유념하시고 사지(辭旨)의 경솔함을 깊이 뉘우치시어 그날 연석(筵席)의 하교 가운데 춘궁에게 관계된 것은 모두 환수(還收)하여 일기(日記)에 기록해서 원근(遠近)에 전파되지 않게 한다면, 군정(群情)이 편안하고 국가가 길이 힘입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일기(日記)에 기록하지 말라는 경(卿) 등의 말이 이러하니, 그대로 따르겠다."
하였다.
7월 22일 갑술
약방(藥房)에서 들어와 진찰하였다. 침(鍼)을 맞고 뜬 뒤에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공청(空靑)251) 을 눈에 떨어뜨려 넣은 것이 제일 기이한 효험(効驗)이 있다고 고방(古方)에 기재(記載)되어 있습니다. 조종조(祖宗朝)에서는 중원(中原)에 가서 얻어오기도 했다고 전하기는 합니다만, 전해오는 말이므로 믿을 수가 없습니다. 선조(先朝) 때에는 중국에 자문(咨文)을 보내어 구득(求得)하려 했으나 끝내 얻지 못했습니다. 부마(駙馬)들이 사행(使行)을 따라 왕래할 때에도 다방면으로 구득하려고 했었지만 진위(眞僞)를 분변하기 어려워 사가지고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제 성환(聖患)에 필요하다는 것으로 바로 예부(禮部)에서 자문(咨文)을 보내어 공사(公私) 약국(藥局)으로 하여금 매입할 수 있게 해주기를 청하면 구득하여 가지고 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의관(醫官) 가운데 종전부터 연경(燕京)에 왕래하면서 제왕(諸王)들과 친밀하게 지내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번 황당선(荒唐船)에서 체포한 사람을 압송(押送)할 적에 재자관(䝴咨官)과 함께 가서 사가지고 오게 한다면 편당(便當)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특별히 재자관(䝴咨官)을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민지후가 또 말하기를,
"경기 감사(京畿監司) 유집일(兪集一)은 다리병이 매우 고통스러워 각릉(各陵)의 가을 봉심(奉審)을 할 수 없을 지경이라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봉심(奉審)을 지체시킬 수 없다는 이유로 유집일(兪集一)의 체직(遞職)을 명하였다.
7월 23일 을해
김흥경(金興慶)을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로 삼았다.
약방(藥房)에서 들어와 진찰하였다. 뜸을 뜬 뒤에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특별히 재자관(䝴咨官)을 보내어 공청(空靑)을 사오게 할 것을 이미 품정(稟定)하였습니다. 여러 대신(大臣)들도 그 내용을 듣고 모두가 다행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의관(醫官)들이 공청(空靑)을 보지는 못하였으나 조금은 약의 성질을 이해하고 있으니 보통 사람보다는 나을 듯합니다. 이시필(李時弼)은 과거에 연경(燕京)을 왕래하였고 또 각로(閣老)252) 와도 친절한 사이입니다. 이 사람을 재자관(䝴咨官)과 함께 가게 한다면 주선하여 구득할 즈음에 반드시 유익한 점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입송(入送)시키라고 명하였다.
집의(執義) 권엽(權熀)이 상소했는데, 대략 말하기를,
"어제 대신들이 등대(登對)하였을 적에 세자(世子)에게 청정(聽政)하게 하라는 명령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성궁(聖躬)을 조양(調養)하고 국사(國事)를 걱정하는 뜻에서 나온 조처이므로 비지(備旨)가 이미 내려졌으니 신서(臣庶)들의 더없는 다행입니다. 다만 삼가 듣건대, 연석(筵席)에서 대단히 미안한 분부가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오직 우리 세자께서는 춘궁(春宮)에서 덕을 배양하여 온 지 거의 30년에 가까왔는데 예자(睿姿)가 절로 완성되어 인성(仁聲)이 드러난 지 오래 되었습니다. 생각건대 우리 인현 왕후(仁顯王后)께서는 자애가 극진하여 자신의 소생과 다름없이 대하셨고, 춘궁께서도 받들어 섬기는 효성스럽고 사모하는 정성이 상중(喪中)에 너무 슬퍼하여 용모가 수척할 때까지 갈수록 더욱 극진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양궁(兩宮)을 시봉(侍奉)함에 있어서도 조금도 실덕(失德)이 없었습니다. 5년 동안 시약(侍藥)하면서 갈수록 초조해하는 마음이 극진하였으니, 이것이 실로 온 나라의 신민(臣民)이 모두가 목을 길게 빼고 몹시 기대하면서 세자를 위하여 죽기를 원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신도 주연(胄筵)에 입시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살펴본 바로는 예학(睿學)이 이미 성취되어 경사(經史)를 두루 섭렵(涉躐)하였으니 이를 정무(政務)에 시행한다면 반드시 여유(餘裕)가 있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의 성교(聖敎)는 실로 천만 뜻밖이었습니다. 다행히도 대신(大臣)들의 광구(匡救)에 힘입어 처분(處分)이 사리에 맞게 되었습니다만, 임금의 말이 한 번 전파됨에 군정(群情)이 의혹하기 마련입니다. 만약 이 말이 잘못 전파되어 나아간다면 참으로 이른바 ‘말 한 마디가 나라를 망치게 한다.’는 것이 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근본(根本)이 견고해야 한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시어 더욱 조호(調護)하는 방도를 더하심으로써 중외(中外)의 신서(臣庶)로 하여금 환히 깨달아 의혹하는 것이 없게 한다면 종사(宗社)에 큰 다행이겠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대신들을 명초(命招)한 것은 비상한 일에 연유된 것이니 구구한 사정(私情)이나 병(病)은 돌아볼 겨를이 없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원임(原任) 삼대신(三大臣)이 모두 명초(命招)를 어긴 채 국가의 중대사를 끝내 참여하여 듣지 않았으니, 일의 미안(未安)한 것이 이보다 더 한 것은 없으므로 신은 혼자서 개연(慨然)스럽게 생각합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상소하여 진달한 내용이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정성에서 나왔으니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신이 명초(命招)를 어긴 것은 대개 사정과 병(病)에 연유한 것이니, 어찌 사체(事體)를 크게 손상시키는 지경에 이르겠는가?"
하였다.
필선(弼善) 윤석래(尹錫來)·문학(文學) 조언신(趙彦臣)·설서(說書) 조최수(趙最壽) 등이 연명(聯名)으로 상소(上疏)하여 진달하였고, 전(前) 수찬(修撰) 이인복(李仁復)·장령(掌令) 조명겸(趙鳴謙)·헌납(獻納) 박성로(朴聖輅) 등도 잇따라 상소하여 조호(調護)하는 방도에 대해 상세히 진달하니, 임금이 모두 가납(嘉納)하였다. 박성로(朴聖輅)의 상소에 독대(獨對)의 잘못에 대해 부론(附論)하였는데, 그것에 이르기를,
"임금이 신하를 접견함에 있어서 반드시 승지(承旨)와 사관(史官)을 함께 들어오게 하는 것은 그 군주의 뜻을 숨기지 않고 군주의 행동을 반드시 기록하기 위한 것이니, 그 관계되는 것이 생각건대 중대하지 않겠습니까? 옛날 효종조(孝宗朝) 때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이 독대(獨對)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함께 강구(講究)한 것은 대의(大義)에 관계된 국가의 기밀이었으니, 오늘날의 일에다 견줄 수 없는 것입니다. 전하(殿下)께서 비록 독대하라는 명령을 내렸을지라도 대신이 승지와 사관도 함께 들어가게 하도록 극력 간청하는 것이 사체(事體)에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창졸간이어서 미처 자세히 생각하지 못한 탓으로 갑자기 입대(入對)하게 되었고 마침내는 곧이어 불러들이라는 명령이 있기는 하였습니다만, 처음 곧바로 들어간 것은 끝내 경솔했다는 책망을 면할 수 없는 거조였습니다. 더구나 또 그때 승지와 사관이 당초 곧바로 들어간 것을 극력 간쟁하지 않아서 아주 중대한 인대(引對)하는 의절(儀節)에 이러한 흠결이 있게 만들었으니, 신은 이 일을 개연(慨然)스럽게 여깁니다."
하고, 조명겸의 상소 끝에도 말하기를,
"대신의 독대(獨對)는 잘못된 거조가 이보다 더 심한 것은 없습니다. 국가에서 후사(喉司)253) 와 사관(史官)을 설치한 의의가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마땅히 견책을 가하여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죄를 징계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그날 승지(承旨)가 함께 들어가기를 극력 청하였으니,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고 할 수 없다."
하였다.
7월 24일 병자
좌의정(左議政) 이이명(李頤命)이 박성로(朴聖輅)·조명겸(趙鳴謙)이 독대(獨對)한 것이 잘못임을 논한 것으로 인하여 상소(上疏)하여 스스로 변명(辯明)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그날 대궐에 나아갈 때에 중관(中官)이 와서 성교(聖敎)를 전하면서 신을 먼저 들어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신이 승선(承宣)을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이는 상규(常規)와 다르니 승지와 사관(史官)은 나를 따라서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신은 앞에서 빠른 걸음으로 가서 중정(中庭)에 이르러 뒤를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제서야 승지와 사관(史官)의 입시(入侍)를 허락하지 않아서 합문(閤門)에서 저지당하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보좌(黼座)254) 가 멀지 않고 신을 재촉하여 전상(殿上)으로 오르게 하였으므로 당황하여 주저하면서 감히 도로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곡배(曲拜)255) 를 올린 뒤에 또 승지와 사관(史官)을 불러들일 것을 청하였습니다만, 성상(聖上)께서 효종(孝宗)의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말씀하시면서 재삼 앞으로 나오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신은 황공하고 위축되어 몸둘 바를 몰랐었습니다만, 말의 단서가 바뀔 적마다 거듭 불러들일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허락을 받았는데 갑작스런 즈음에 사세(事勢)가 이러하였습니다만, 신의 마음이 황공스러운 것은 어찌 남의 말을 기다리겠습니까? 대개 역대(歷代)로 군신(君臣)이 서로 접견(接見)하는 예절은 거의가 간이(簡易)한 경우가 많았으며, 광명하고 엄정하기가 우리 조정과 같은 경우는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신에게 이르러 상전(常典)을 벗어났고 또 이것이 뒷날의 폐단에도 관계가 되니 간신(諫臣)들이 신을 책망하는 것은 옳습니다. 어찌 스스로 변명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은 천만 뜻밖에 갑자기 비상한 일을 당하고 보니 창황 전도(顚倒)되어 놀랍고 떨리는 마음이 아직도 진정되지 않고 있습니다. 실록(實錄)을 조사하기 위해서 갔던 사람들이 지금 복명(復命)하였습니다만, 신은 정신을 수습하여 의절(儀節)을 품정(稟定)할 수가 없습니다. 비록 대장(臺章)의 규탄이 없더라도 형세가 대사(大事)에 참여하여 의논하기 어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군신(君臣)은 부자(父子)와 같은 것이므로, 대신(大臣)은 군주(君主)의 고굉(股肱)인 것이다. 이번의 독대(獨對)는 불가한 것으로 볼 수 없는 일이며, 더구나 그것이 지금 처음 시행한 것이 아닌 것이겠는가? 경(卿)이 승선(承宣)을 돌아보고서 나를 따라 같이 들어가야 한다고 하였으니, 더욱 잘못된 것이 없다. 간신(諫臣)들의 말을 그다지 혐의할 필요가 없으니, 모름지기 나의 지극한 뜻을 본받아 속히 출사(出仕)하여 공무를 집행하고, 빨리 대사(大事)를 결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드디어 승지를 잇따라 보내어 돈유(敦諭)하고 인하여 함께 오라고 명하였다. 이에 이이명이 다음날 곧 출사(出仕)하여 사물을 보았다.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신임(申銋)·대교(待敎) 권적(權𥛚)이 강화부(江華府)에 가서 실록(實錄) 가운데 청정(聽政)에 대한 일을 조사하여 등서(謄書)해 가지고 돌아왔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청하기를,
"등서(謄書)하여 온 것을 홍문관(弘文館)에서 조사한 당(唐)나라 때의 전례(典禮)와 함께 의정부(議政府)로 보내어 예조(禮曹)와 함께 같이 의논하여 절목(節目)을 품정(稟政)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대교(待敎) 권적(權𥛚)이 대신(臺臣)이 상소(上疏)하여 지척한 것으로 인하여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이 19일 들어가 진찰을 마친 다음 삼가 입시한 대신(大臣)을 다시 부르는 명령이 있다는 것을 듣고 즉시 승선(承宣)과 함께 합문(閤門) 밖으로 나아갔습니다. 조금 후에 사알(司謁)이 와서 성교(聖敎)를 전하면서 대신(大臣)에게만 독대(獨對)하라고 하였으므로 신이 대신에게 말하기를, ‘지금 이 독대는 매우 상격(常格)에 벗어난 것이니, 사필(史筆)을 잡은 신하가 물러가 있을 수 없습니다. 마땅히 승선(承宣)과 함께 전례(前例)대로 따라 들어가야 합니다.’ 하니, 대신의 의견도 이를 옳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즉시 승선과 함께 전문(殿門) 밖으로 나아가서는 한(漢)나라 신하가 대궐의 작은 문을 밀치고 들어갔던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기필코 막바로 들어가기 위해 시종 다투어 논란하였습니다. 그러나 승선의 의견은 품지(稟旨)를 거친 뒤에 행해야 한다는 데에 있었으므로 서로 버티고 있는 즈음에 시각이 저절로 지연되므로 결국에는 명령을 받들어 들어갔다가 무리를 따라 나오고 말았습니다. 분명치 못한 구구한 집념으로 하여 중도에 동요됨을 면치 못하였으니, 조만간 사람들의 말썽이 있을 것을 진실로 이미 헤아리고 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문을 밀치고 바로 들어간 고사(故事)는 지금의 일과는 다른 점이 있는 것이라고 답하였다. 동부승지(同副承旨) 남도규(南道揆)도 소장을 올려 스스로 변명하였는데, 임금이 부드러운 내용의 비답(批答)을 내려 개석(開釋)하였다.
사과(司果) 최종주(崔宗周)·지평(持平) 김태수(金台壽)가 상소(上疏)하여 조호(調護)하는 방도에 대해 전달하니, 임금이 모두 옳게 여겨 받아들였다.
판부사(判府事) 김우항(金宇杭)이 전일 패초(牌招)를 어긴 것 때문에 대소(臺疏)에 지척받은 것을 이유로 차자(箚子)를 올려 인구(引咎)하고 겸하여 마음속에 품은 바를 부기(附記)하였는데, 이르기를,
"춘궁(春宮)께서는 위호(位號)를 일찍 정하시었고 우아한 태도가 날로 성취되어 사람을 접대하는 데 대한 가르침을 우러러 본받고, 부모(父母)를 봉양하는 효도를 극진히 하여 인성(仁聲)이 멀리까지 드러났고 실덕(失德)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일국의 많은 백성들이 기대해온 지가 이제 30년이고 전하께서 평일에 돌보아 아끼는 정의와 부탁의 소중함으로 볼 때 반드시 결점을 지적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연석(筵席)의 분부가 갑자기 중외(中外)에 전파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경혹(驚惑)시켰으니, 국가의 안위(安危)에 대한 기틀이 여기에 달려 있지 않다고 기필할 수 없습니다. 지금 한 번 덕음(德音)을 발표하여 환히 열어보임으로써 원근(遠近)의 사람들로 하여금 성심(聖心)의 감회(感回)를 분명히 알게 하고 또 대개 도와서 조호(調護)하는 방도에 대해 더욱 유념(留念)하지 않으신다면, 인심(人心)을 다시 진정시킬 수 없고 국세(國勢)를 다시 진기(振起)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진달한 차자(箚子)의 내용이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니, 유념(留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도승지(都承旨) 이관명(李觀命)·우승지(右承旨) 이덕영(李德英)·좌부승지(左副承旨) 이기익(李箕翊) 등이 연명(聯名)하여 상소(上疏)했는데, 대략 말하기를,
"지금 성상(聖上)께서 조종조(祖宗朝)에서 이미 시행한 전례(典例)를 잘 준행하시어 왕세자(王世子)에게 청정(聽政)하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성체(聖體)가 유유자적(悠悠自適)하실 수 있고 서사(庶事)가 정체되는 일이 없을 것이니, 이는 진실로 종사(宗社)와 신민(臣民)의 행복입니다. 그런데 연대(筵對)에서의 미안(未安)한 분부로 인하여 여러 신하들의 심정(心情)이 걱정과 의혹에 젖어 있어 아직도 시원하게 풀어지지 않는데다가 장주(章奏)가 부산하게 올려진 탓으로 도리어 조양(調養)에 방해로움이 있게 되었으니, 신 등은 진실로 민망한 마음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날의 연석(筵席)에서 있었던 미안한 분부는 사랑하는 마음이 지나쳐 염려로 인한 의심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연석(筵席)의 말은 비밀스러운 것이고 유언(流言)은 와전되기 쉬운 것이니, 걱정하고 의심한 나머지 면계(勉戒)하는 말이 어찌 몰려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 가운데 혹 성교(聖敎)를 환수(還收)하고 일록(日錄)에 기재하지 말 것을 청하기도 하였는데 그 말이 진실로 소견(所見)이 있었습니다만, 신 등의 어리석은 소견은 이것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전하께서 당초엔 비록 미안한 분부가 있었지마는, 곧 대신(大臣)들의 정성을 다한 진달(陳達)로 인하여 이러한 지당한 처분(處分)이 있었으니, 일록(日錄)에 기록하는 것을 조금도 숨길 의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기록하지 말게 하여 마치 숨기는 것같이 한다면, 세상에 전파된 말을 빙신(憑信)할 데가 없게 되어 없는 것을 있다고 작은 것을 부연시켜 큰 것을 만들어 장차 못하는 짓이 없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시키려고 한 방법이 도리어 의혹을 한층 더하게 하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신 등의 의견은 구구하게 일록(日錄)에 기재되고 기재되지 않는데 있는 것은 아닙니다. 특별히 윤음(綸音)을 내리셔서 뉘우치고 있다는 성상의 마음을 깊이 개진(開陳)하여 부탁하는데 아무런 걱정이 없다는 것을 신속하게 보이셔서 팔방(八方)의 민서(民庶)들로 하여금 분명히 성의(聖意)를 알게 하신다면 여러 사람들의 의혹은 풀리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저절로 풀릴 것이고 여러 사람들의 마음은 진정시키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저절로 진정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경(卿) 등의 말이 이러하니, 내가 마땅히 유의(留意)하겠다."
하였다.
7월 25일 정축
하교(下敎)하기를,
"엊그제 연석(筵席)에서의 분부에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는가? 자애(慈愛)스런 마음에서 춘궁(春宮)으로 하여금 더욱 면려(勉勵)하게 하려는 뜻에 불과한 것일 뿐이었다. 지금 국조(國朝)의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청정(聽政)하라는 명을 내렸으니 이제부터는 조용히 조섭(調攝)할 수가 있을 것이고, 사무가 지제되지 않아서 거조(擧措)가 마땅하게 되어 여러 사람들의 심정(心情)이 모두 기뻐하게 될 것이다. 이러니 내가 다시 걱정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중앙과 지방의 신서(臣庶)들은 모두 나의 뜻을 알라."
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의정부(議政府)로 하여금 하교(下敎)를 팔도(八道)에 알리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사직(司直) 이세필(李世弼)이 상소(上疏)했는데, 대략 말하기를,
"삼가 생각건대 왕세자(王世子)께서는 인자와 효성이 모두 지극하시고 학문도 일찍 성취되었으므로 온 나라의 백성들이 모두 목을 길게 빼고 몹시 기대하면서 세자를 위하여 죽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전에 인현 왕후(仁顯王后)께서 승하하신 뒤에 해창위(海昌尉) 오태주(吳泰周)가 신에게 말하기를, ‘세자(世子)께서 빈소(殯所)에서 거상(居喪)하실 적에 눈물을 비오듯 흘리시며 슬퍼하셨으므로 곁에 있는 사람도 감동이 되었고 이로 인하여 감동하고 흠모하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신은 이 말을 듣고 목이 메었습니다. 이어서 매우 기쁘고 다행스럽게 여기기를, ‘효도는 백행(百行)의 근본이니 여기에 더해야 할 성덕(聖德)이 무엇이겠는가?’ 하였습니다. 그리고 생각하건대 신사년256) 이후 동궁(東宮)의 처지가 매우 말하기 어려운 지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궁중(宮中)에는 화목한 즐거움이 흡족하였고 여항(閭巷)에는 기미(幾微)에 대한 말이 끊겼으니, 이야말로 지극한 덕과 순수한 행실이 실로 다른 사람들보다 크게 뛰어난 점이 있습니다. 서울과 지방의 신서(臣庶)들이 더없이 감동하여 기뻐하는 이유가 더욱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러저러하다 하시는 분부가 갑자기 천만 뜻밖에서 나왔으니, 군하(群下)의 놀라움과 인심(人心)의 동요가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무릇 우리 동궁(東宮)께서 타고난 인효(仁孝)와 남보다 뛰어난 행의(行誼)가 저러한데 우리 전하(殿下)께서 지인(至仁)으로 감싸시고 지명(至明)으로 살펴보심에 있어 그 사이에 어찌 다른 염려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언어(言語)의 전파는 와전되기가 쉬운 것이어서 전하께서 이에 있어서 실언(失言)을 하셨던 것입니다. 이제 다행히 대신(大臣)들의 말을 받아들여 이미 비망기(備忘記)로 성명(成命)을 내렸고 전례를 참고하여 거행할 시기가 곧 하루도 못되어 있게 되었습니다. 그 참여하여 결단하고 승품(承稟)할 즈음에 너그럽게 대하여 지성으로 계우(啓佑)함으로써 억만년토록 끝없이 뻗어갈 기반을 다지소서."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批答)으로 가납(嘉納)하였다.
약방(藥房)에서 들어와 진찰하고 간유(肝兪)의 좌우혈(左右穴)에 침을 맞았다. 임금이 이르기를,
"엊그제 대신을 독대(獨對)할 적에 승지(承旨)와 사관(史官)이 희인문(熙仁門) 판장(板場) 밖에까지 나와서 함께 들어갈 것을 극력 간청하였다. 승전색(承傳色)이 이것을 가지고 와서 고하였으나 내가 우선 발락(發落)257) 할 뜻이 없다는 것으로 환보(還報)하게 하였다. 옛날에도 독대(獨對)한 일이 있었으니, 〈한(漢)나라 신하가 대궐의〉 작은 문을 밀치고 바로 들어간 것을 오늘날의 경우에 끌어다가 견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극력 간쟁(諫爭)한 일이 있으니 실로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잘못은 없다. 대간(臺諫)의 상소에서 그르다고 지척(指斥)한 것은 그런 곡절을 알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이런 뜻으로 분부(分付)하여 조속히 직무를 수행하게 하라."
하였는데, 대개 승지(承旨) 남도규(南道揆)와 사관(史官) 권적(權𥛚)이 대간(臺諫)의 상소가 있은 뒤에 연일 사직(辭職)했기 때문에 한 말이다. 도승지(都承旨) 이관명(李觀命)이 말하기를,
"엊그제 연석(筵席)에서 있었던 분부가 한번 전파되자 여러 신하들의 마음이 놀라 의혹하고 있으므로, 신 등은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정성을 견딜 수 없어 연명(聯名)으로 상소(上疏)하여 진달하였던 것입니다. 삼가 비망기(備忘記)를 보건대, 정년코 의혹을 풀어주시어 서울과 지방의 인심이 저절로 환히 깨달을 것이니, 구구한 흔행(欣幸)을 어찌 이루 다 진달할 수 있겠습니까? 청정(聽政)하는 절목(節目)은 지금 당장 마련하도록 하겠습니다만, 왕세자(王世子)의 춘추(春秋)가 한창 젊으시니, 전학(典學)의 공부가 하루가 시급합니다. 서무(庶務)를 참여하여 결단하는 여가에 마땅히 자주 강학(講學)하여 총명(聰明)을 개도(開導)해야 하겠습니다. 당(唐)나라 때의 고사(故事)에도 10일에 한 번씩 강학하는 법규가 있었으니, 이 한 조항을 절목(節目)중에 첨입(添入)해야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진달(陳達)한 바가 매우 옳다."
하였다.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성후(聖候)가 여러 해를 병환에 시달리던 끝에 안질(眼疾)이 근래 또 첨중(添重)되어 이러한 큰 거조(擧措)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연석에서의 분부 때문에 서울과 지방에서 놀라고 당황하여 소장(疏章)이 몰려 오고 있습니다만, 구구한 신의 우려를 그래도 감히 늦출 수가 없습니다. 즉시 비망기(備忘記)를 보건대 전하께서 마음을 돌리셨으니 누군들 흠앙(欽仰)하지 않겠습니까? 청정(聽政)에 관한 절목(節目)은 신조(臣曹)에서 마땅히 마련하겠습니다. 세종조(世宗朝)의 고사(故事)를 가져다 조사하여 보니 대사(大事)는 주상께서 직접 결단하였고 그 나머지 서무(庶務)는 일체 동궁(東宮)에게 위임하여 재결(裁決)하도록 하였습니다. 지금 마땅히 이에 의거하여 품정(稟定)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성상께서 임어(臨御)하신 이래 심후(深厚)한 인택(仁澤)이 널리 인심에 흡족하였으므로 신민(臣民)이 40년을 하루같이 애대(愛戴)하여 왔는데 하루아침에 이러한 한가한 데에 나아가는 거조가 있으시니, 여러 신하들의 마음이 서운해 하는 것은 진실로 다 진달할 수가 없습니다. 비록 왕세자(王世子)의 정리(情理)로써 말하더라도 창졸간에 이러한 비상한 명령을 받들었으니, 반드시 놀라고 근심하여 불안하게 여길 것입니다. 신의 의견으로는 을유년258) 에 이미 성명(成命)이 있었다가 도로 중지되었으니, 지금도 청정(聽政)으로 명칭(名稱)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모든 대소(大小) 사무를 곁에 있으면서 참여하여 결단하게 한다면 문침(問寢)·시선(視膳)·서연(書筵) 등의 일에 저절로 방해로움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성궁(聖躬)도 수응(酬應)하는 노고를 덜게 되고 동궁(東宮)께서도 불안한 단서가 없게 되어 저절로 국사를 분명하게 익히는 이익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비록 조종조(祖宗朝)의 고사(故事)를 가지고 보더라도 임금이 병환을 앓고 있으면 세자가 청정(聽政)하는 것이 예절(禮節)이었다. 더구나 지금은 안질(眼疾)이 있어 세종조(世宗朝) 때와는 다른 점이 있으니, 청정하게 하는 일은 의도가 있는 것이다."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이이명(李頤命)과 예조 판서(禮曹判書) 민진후(閔鎭厚)가 청대(請對)하니,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서 불러 접견하였다. 이이명이 말하기를,
"신이 뜻밖에 비상한 거조를 만나 대장(臺章)의 지척을 받았는데, 정적(情迹)을 밝히기가 어려워 소장을 올려 스스로 논열(論列)하였습니다. 갑자기 근시(近侍)의 돈유(敦諭)를 받들건대 나라에 대사(大事)가 있다고 하였기 때문에 소명(召命)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만 황공스럽기 그지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 일에 대해서는 전일에 이미 말하였다. 경(卿)이 입시(入侍)한 뒤 누차 승지(承旨)와 사관(史官)을 함께 들어오게 하기를 청하였으니, 경에게는 별로 혐의될 것이 없다."
하였다. 이이명이 말하기를,
"왕세자의 청정(聽政) 절목(節目)에 대하여 사관(史官)이 강화(江華)에 있는 실록(實錄)을 등서(謄書)하여 오고 옥당(玉堂)에서 당(唐)나라의 의절(儀節)을 널리 참고하도록 계하(啓下)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만, 대신(大臣)들의 문의(問議)를 기다리느라고 시일이 점차 늦어지고 있습니다. 부득이 절목을 초정(草定)하여 이미 단자(單子)에 기록하였으니 신이 읽어 보겠습니다. 승지(承旨)에게 황첨(黃籤)259) 을 붙이게 하고 계자(啓字)를 찍어 판하(判下)하여 시행하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매우 좋으니, 즉시 그렇게 하라."
하였다. 이이명이 단자(單子)를 읽기를,
"당(唐)나라에서는 태자(太子)에게 하루씩 걸러 동궁(東宮)에게 청정(聽政)하게 하였고, 청정을 그치면 들어와 시약(侍藥)하고 시선(侍膳)하게 하여 좌우(左右)를 떠나지 않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침전(寢殿) 곁에 별관(別館)을 설치하고 태자를 그곳에 거처하게 하였습니다. 본조(本朝)에서는 건춘문(建春門) 안에 따로 왕세자의 조당(朝堂)을 건립하고 ‘계조당(繼照堂)’이라 명명하였는데, 지금의 시민당(時敏堂)이 동궁의 외당(外堂)이었습니다. 청정(聽政)과 조참(朝參)260) 등의 일을 이곳에서 하게 해야 합니까, 아니면 특별히 다른 곳에서 하도록 명하실 것입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시민당에서 하라."
하였다. 이이명이 또 읽기를,
"청정·조참 때의 좌향(坐向)은 역대(歷代)와 본조(本朝)에서 모두 서향(西向)하도록 하여 왔는데 지금도 이에 의거하여 정해야 합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이이명이 말하기를,
"조하(朝賀)261) 는 당(唐)나라에서는 태자가 조하를 받는 예법(禮法)이 없습니다. 본조(本朝)에서는 세종조(世宗朝) 때 종실(宗室)과 문무관(文武官) 1품 이하의 관원은 뜰아래에서 재배(再拜)하였고, 세자는 답배(答拜)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종실(宗室)의 백숙(伯叔)과 사부(師傅)가 먼저 당(堂)에 올라와서 배례(拜禮)를 하면 세자가 답배하였는데, 지금도 이에 의거하여 시행해야 합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이이명이 말하기를,
"조참(朝參)과 상참(常參)262) 은 조종조(祖宗朝) 이래 반드시 일이 없을 적에만 하였었습니다. 비록 근일의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성후(聖候)가 편안하지 못할 때에는 조참과 상참을 모두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청정(聽政)하는 처음이니 하는 것이 마땅할 것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대신(大臣)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였다. 이이명이 말하기를,
"청정(聽政)할 처음에는 조참(朝參)은 일차 거행하고 상참(常參)에 이르러서는 일이 없을 적에 하는 것이 사의(事宜)에 맞을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좋다. 이에 의거하여 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이명이 말하기를,
"제향(祭享)은 당(唐)나라에서는 태자가 태학(太學)에 석채례(釋菜禮)263) 를 거행했는데, 본조(本朝)에서는 종묘(宗廟)·산릉(山陵)·태학(太學)에 모두 왕세자가 대행(代行)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미 이런 전례가 있으면 그렇게 하라."
하였다.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섭행(攝行)264) 해야 합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세종조(世宗朝)에서 정한 대로 따라서 하라."
하였다. 이이명이 말하기를,
"정무(政務)는 당(唐)나라에서는 처음에는 군국(軍國)의 기무(機務)까지 모두 태자에게 위임하여 처결(處決)하도록 조서(詔書)를 내렸습니다. 그런데 또 제사(祭祀), 표소(表疏), 번객(番客), 병마(兵馬), 숙위(宿衛), 어계(魚契)265) 를 행하는 것, 역마(驛馬)를 지급하는 것, 5품 이상의 벼슬을 제수하는 것과, 제해(除解)266) , 사죄(死罪)를 결단하는 것은 모두 계문(啓聞)하고, 그 나머지는 황태자(皇太子)에게 위임하라고 조서를 내렸습니다. 본조(本朝)에서는 세종 대왕(世宗大王)께서 처음에는 ‘용인(用人)·형인(刑人)·용병(用兵)에 대해서는 내가 직접 청단(聽斷)하겠다. 그 나머지 서무(庶務)는 모두 세자에게 재결(裁決)을 받으라.’ 명하셨고, 또 ‘모든 제수(除授), 과전(科田)의 절급(折給), 제향(祭享)과 재상(災祥), 타국(他國)의 사신을 응접하는 특별한 일, 군병(軍兵)을 조발(調發)하는 일과 변경(邊警), 크고 작은 형옥(刑獄), 토목공사(土木工事)를 크게 일으키는 등의 일은 일체 새로 만든 조장(條章)을 따를 것이요, 그외의 서무(庶務)는 모두 세자로 하여금 결단하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승정원(承政院)에 명하여 국가의 서무(庶務)를 다시 세자에게 결단(決斷)하게 하고 도승지(都承旨) 이외의 나머지 다섯 승지(承旨)는 각기 자기가 관장하고 있는 일을 가지고 세자에게 나아가 재처(裁處)하여 신품(申稟)하여 시행하게 하였습니다. 지금도 국가의 기무(機務) 가운데 군병을 조발(調發)하고 조련(操練)시키는 것, 숙위(宿衛)와 양전(兩銓)267) 의 제배(除拜), 의조(儀曹)268) 의 제향(祭享)과 예제(禮制), 지부(地部)269) 의 경비(經費), 선혜청(宣惠廳)의 대동미(大同米), 추조(秋曹)270) 의 형옥(刑獄), 공조(工曹)의 영선(營繕), 삼사(三司)의 차계(箚啓)271) , 백관(百官)과 사서(士庶)의 상장(上章), 팔도(八道) 번수(藩帥)272) 의 장문(狀聞), 직계(直啓)하는 아문(衙門)의 계목(啓目)과 초기(草記), 객사(客使), 변보(邊報) 등 각 항목(項目) 가운데 주상께서 청단(聽斷)하실 것과 동궁(東宮)에게 재결하라고 명할 것을 일일이 구별하여 하교하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세종조(世宗朝) 때의 전례에 의거하여 용인(用人)·형인(刑人)·용병(用兵)은 직접 결단하고, 그 나머지 서무(庶務)는 모두 세자에게 재결을 받아 거행하게 하라. 그리고 상장(上章), 삼사(三司)의 차계(箚啓), 번수(藩帥)의 장문(狀聞), 각사(各司)의 계사(啓辭)는 모두 동궁으로 올리게 하고, 그 가운데 일이 중대한 데에 관계되어 스스로 결단하기 어려운 것은 상전(上前)에 품재(稟裁)하게 할 것으로 승정원(承政院)에 내려 시행하게 하라."
하였다. 이이명이 말하기를,
"명령을 출납(出納)한 것에 대해서는 당(唐)나라에서는 준거(準據)할 만한 일이 없습니다. 본조(本朝)에서는 세종조(世宗朝) 때 집현전(集賢殿)에서 올린 소장(疏章)에서 ‘명령을 출납하는 데에는 이미 승정원(承政院)이 있는데, 서무(庶務)를 자품(咨稟)하기 위해 첨사원(詹事院)을 두는 것은 호령(號令)에 두 개의 문(門)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 의정부(議政府)와 육조(六曹)에서 아뢴 계본(啓本)을 이제 첨사원(詹事院)으로 하여금 동궁에게 품신(稟申)하게 한 것은 대체(大體)에 어긋나는 점이 있습니다. 크고 작은 공사(公事)를 모두 계목(啓目)과 계본(啓本)으로 승정원(承政院)에 올리게 하고, 승지(承旨)로 하여금 큰 일은 주상께 계달(啓達)하게 하고 작은 일은 동궁에게 품신하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정령(政令)이 한군데서 나오게 되어 의리에 합치될 것입니다.’ 하니, 세종(世宗)께서 이르시기를, ‘경(卿) 등이 그 폐단을 남김없이 말하였다. 나도 승정원으로 하여금 세자에게 품신하게 하려 했었다.’ 하셨습니다. 또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세자께서 서무(庶務)를 재결함에 있어 명령을 휘지(徽旨)라고 일컫고, 제사(諸司)에서 신달(申達)하는 글에는 신본(申本)·신목(申目)이라고 칭하여 모두 승정원(承政院)으로 올리게 한 다음 승지(承旨)가 출납(出納)하여 신달(申達)하게 하소서. 서함(署銜)에 있어서는 신본(申本)의 경우에는 모조(某曹)의 일임을 알려 갖추어 서함(署銜)하게 하고, 신목(申目)의 경우에는 단지 모조(某曹)의 일이라고만 일컫게 하소서. 승지(承旨)는 모두 신(臣)이라고 칭하지 말게 하소서. 신본과 신목을 행이(行移)273) 한 일에 대해서는 승정원이 매달 삭망(朔望)에 초록(抄錄)하여 계문(啓聞)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르셨습니다. 지금도 마땅히 세종조(世宗朝)에서 정한 법제를 일체 따라야 하겠지만, 첨사원(詹事院)은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이미 그 관직(官職)이 없어졌는데, 이것이 아마도 시강원(侍講院)의 처음 이름인 것 같습니다. 평일에는 세자의 명령을 시강원에서 출납(出納)을 맡고 있었는데 역시 전일에 거행하던 것을 행할 뿐입니다. 무릇 청정(聽政)할 때 관계되는 명령은 승정원(承政院)에서 주관하되 입계(入啓)하고 입달(入達)하는 공사(公事)는 이를 구별한 뒤에 입달할 것은 계본(啓本)을 신본(申本)으로, 계목(啓目)을 신목(申目)으로 하고, 문서(文書)의 규식(規式)도 세종조(世宗朝)에서 정한 바에 따라 계의윤(啓依允)274) 은 달의준(達依準)275) 으로 고치소서. 중세(中世) 이후에는 대신(大臣) 이하의 관원이 모두 동궁(東宮)에게 신(臣)이라고 칭했고 문서를 입달(入達)할 적에도 승지(承旨)가 또한 신이라고 칭했는데, 지금에는 논할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일일이 세종조의 법제를 따라서 하라."
하였다. 민진후가 말하기를,
"용인(用人)·형인(刑人)·용병(用兵) 같은 세 가지 큰일 이외에는 모두 동궁에서 결단하게 해야 합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이이명이 말하기를,
"정조(正朝)·동지(冬至) 등의 절목(節目)에 세자궁(世子宮)에서의 조하(朝賀)하는 의절(儀節)도 두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당연히 두어야 한다."
하였다. 민진후가 말하기를,
"의절(儀節)은 고쳐야 될 것 같습니다."
하고, 이이명이 말하기를,
"조하(朝賀) 등의 의주(儀註)에 예조(禮曹)로 하여금 세종조(世宗朝)에서 정한 것을 빙거(憑據)하여 고금의 사례를 참작한 다음 새로 법식(法式)을 만들게 하소서. 의장(儀仗)과 시위(侍衛)하는 군사도 병조(兵曹)로 하여금 세종조에서 정한 것을 빙거하여 평상시에 견주어 수효를 더 많게 하도록 절목(節目)을 만들게 하소서. 이를 모두 계하(啓下)하여 이에 의거하여 시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이이명이 말하기를,
"왕세자께서 청정(聽政)하는 날짜는 해조(該曹)로 하여금 특별히 길일(吉日)을 택(擇)하게 해야 합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다음달 초승으로 길일(吉日)을 택하도록 하라."
하였다. 민진후가 말하기를,
"왕세자가 청정(聽政)하기 전에 승정원(承政院)에 봉류(捧留)되어 있던 문서(文書)는 대조(大朝)276) 에 입계(入啓)해야 합니까?"
하니, 임금이 동궁(東宮)에게 입달(入達)하도록 명하였다. 이이명(李頤命)이 말하기를,
"기사(記事)는 당(唐)나라 때에는 준거(準據)할 만한 일이 없습니다. 본조(本朝)에서는 세종조(世宗朝) 때 사관(史官)이 서연(書筵)에 입시(入侍)했었으니, 지금도 승지(承旨)가 진참(進參)할 때 한림(翰林)·주서(注書) 각 1원(員)씩 따라 들어오게 하소서. 그리고 춘방관(春坊官)에게 아울러 춘추관(春秋官)을 겸하게 하고 청정(聽政)하는 날의 당직인(當直人)도 또한 입시(入侍)하여 기사(記事)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이이명이 이어 말하기를,
"지금 계절이 한더위인데 형옥(刑獄)에 정체된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판의금(判義禁) 황흠(黃欽)은 나이가 늙고 병이 많아서 사세(事勢)가 공무를 집행하기가 어렵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체직(遞職)시키라고 명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서종태(徐宗泰)가 전일 명초(命招)를 어긴 것 때문에 대소(臺疏)의 지척을 받은 것으로 인하여 상소(上疏)하여 사면(辭免)하고 겸하여 소회(所懷)를 진달하기를,
"생각건대 우리 왕세자께서는 저궁(儲宮)에서 덕을 배양하여 온 지가 이제 30년이 되었는데, 총명한 자질은 숙성하여 온화하고 문아(文雅)한 학문은 이미 통달하여 흡족한 지경에 이르렀으며 가정(家庭)에서의 효도(孝道)는 신명(神明)을 감동시켰습니다. 이는 서울과 지방에서 다같이 듣는 것으로 신(神)과 사람의 기대가 걸려 있는 것이고, 팔역(八域)277) 이 다같이 애대(愛戴)하여 종사(宗社)의 무궁한 경사로 모두가 축하하고 있습니다. 성상(聖上)께서 평일 교도(敎導)하고 보호(保護)하시는 방도가 매우 깊고 독실하였습니다만 사랑하는 정으로 인하여 기대하는 것이 끝이 없어서 이미 성스러운데도 더 성스럽기를 요구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신서(臣庶)가 누군들 성의(聖意)를 우러러 깨닫지 못하겠습니까만, 먼 외방에서 듣기에는 놀라고 의혹하기 쉬운 법이니 이보다 더한 걱정스러움이 어디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사어(辭語)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시고 부탁(付托)의 중대함을 더욱 돈독히 하시어 참여하여 결단하는 일을 모두 고실(故實)278) 과 같게 하여 중심(衆心)을 안정시킴으로써 온 나라의 기대에 부응하게 하소서."
하였다. 판부사(判府事) 조상우(趙相愚)도 대소(臺疏)의 지척으로 인하여 상소(上疏)하여 사면(辭免)을 진달하고, 이어 윤음(綸音)을 발표하여 서울과 지방에 명백히 알려서 자애로운 마음을 더욱 돈독히 하여 마음속에 구애되는 뜻을 머물어두지 말 것을 청하니, 임금이 모두 답하기를,
"소장에서 진달한 말은 진실로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니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미 비망기(備忘記)를 특별히 내렸으니 서울과 지방의 신서(臣庶)들로 하여금 나의 뜻을 분명히 알게 하라."
하였다.
교리(校理) 조관빈(趙觀彬)이 속히 명지(明旨)를 내려 서울과 지방의 의혹을 풀어줄 것을 청하고, 이어 서종태(徐宗泰)·조상우(趙相愚)·김우항(金宇杭) 등이 명초(命招)를 어긴 잘못을 지척하면서 아뢰기를,
"여러 대신들을 명초(命招)한 것이 상례(常例) 밖에서 나왔으니, 국가에 일이 있다는 것은 추측하여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비록 구구한 정병(情病)이 있었더라도 마땅히 다른 것은 돌볼 것 없이 깜짝 놀라 일어서 조정으로 나아가기에 겨를이 없어야 하는데도, 한꺼번에 명초(命招)를 어기고 태연히 물러가 있으면서 마치 수수 방관(袖手傍觀)하는 사람처럼 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이며, 이것이 무슨 분의(分義)이겠습니까? 성상(聖上)께서 의지하여 신임하는 것이 어떠한 것이었는데 대신(大臣)이 국가에 기쁨과 걱정을 함께 한다는 의리는 생각하지 않고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런 정승을 장차 어디에다 쓰겠습니까? 이런데도 만약 책벌(責罰)을 엄중하게 가하지 않는다면 신은 뒷날에 혹은 급한 사변이 발생했을 경우 한 사람도 국가를 위하여 앞장을 서서 담당할 사람이 없을까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지금 이 소장에서 진달한 것은 진실로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아침에 특별히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나의 뜻을 분명히 보였다. ‘저런 정승을 어디에다 쓰겠느냐?’는 등의 말은 진실로 너무 정도에 지나친 말이고, 바로 견벌(譴罰)을 가할 것을 청한 것은 더욱 미안스러운 데에 관계되는 것이다."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당일 임금이 국가의 대사(大事)를 의논하기 위하여 특별히 대신들을 부르는 명이 있었으니, 신하된 사람은 어떻게 감히 소소한 정병(情病)을 이유로 사양할 수가 있겠는가? 그런데도 이 세 신하는 자기 집에 편안히 누워 있으면서 조금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저 조상우(趙相愚)의 무리야 불학 무식(不學無識)한 사람으로 자리만 채운 녹록(碌碌)한 자들이니 말할 것도 못되지마는, 유독 서종태(徐宗泰)만은 평일에 글을 읽어 조금 인망(人望)이 있었는데도 일에 임하여 교묘하게 피한 것이 이와 같았으니, 그가 이해(利害)만을 돌아보고 국사는 생각하지 않은 죄를 이루 다 주벌(誅罰)할 수가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68책 60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664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왕실-국왕(國王) / 사법-탄핵(彈劾) / 역사-사학(史學)
사신(史臣)은 말한다. "당일 임금이 국가의 대사(大事)를 의논하기 위하여 특별히 대신들을 부르는 명이 있었으니, 신하된 사람은 어떻게 감히 소소한 정병(情病)을 이유로 사양할 수가 있겠는가? 그런데도 이 세 신하는 자기 집에 편안히 누워 있으면서 조금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저 조상우(趙相愚)의 무리야 불학 무식(不學無識)한 사람으로 자리만 채운 녹록(碌碌)한 자들이니 말할 것도 못되지마는, 유독 서종태(徐宗泰)만은 평일에 글을 읽어 조금 인망(人望)이 있었는데도 일에 임하여 교묘하게 피한 것이 이와 같았으니, 그가 이해(利害)만을 돌아보고 국사는 생각하지 않은 죄를 이루 다 주벌(誅罰)할 수가 있겠는가?"
특별히 이조 참의(吏曹參議) 이택(李澤)을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제수하였다.
사간(司諫) 이정익(李禎翊), 정언(正言) 유척기(兪拓基)·정동후(鄭東後), 지평(持平) 김상옥(金相玉), 판윤(判尹) 홍만조(洪萬朝), 지사(知事) 강현(姜鋧), 사직(司直) 오명준(吾命峻) 등이 서로 잇따라 소장을 올려 진달하여 더욱더 조호(調護)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모두 가납(嘉納)하였다. 전(前) 부수(副率) 김재해(金載海)가 상소(上疏)하여 한무제(漢武帝) 때의 일을 인용하여 말을 하고, 또 말하기를,
"신사년279) 강세구(姜世龜)의 상소(上疏)는 소견(所見)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한무제의 일을 가지고 인유(引喩)한 것은 정당한 데에 어긋나는 것이고, 소견이 없지 않다고 한 것은 더욱 이해할 수 없다."
하였다.
보덕(輔德) 조명봉(趙鳴鳳)이 상소(上疏)하여 권상하(權尙夏)를 돈소(敦召)하여 춘궁(春宮)을 보도(輔導)하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批答)을 내려 가납(嘉納)하였다.
형조 참의(刑曹參議) 임순원(任舜元)이 상소(上疏)하여 서연(書筵)에 소대(召對)하는 일차(日次)를 시강원(侍講院)으로 하여금 품지(稟旨)하여 거행하게 하라고 청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그 뒤 사부(師傅) 김창집(金昌集)과 빈객(賓客) 민진후(閔鎭厚)가 아뢰기를,
"세자(世子)께서 바야흐로 시약(侍藥)하고 계시니 전례와 같이 개강(開講)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청컨대 참여하여 결단하는 여가에 수시로 요속(僚屬)을 인견(引見)하여 함께 경사(經史)를 강론하고 고금의 치란(治亂)을 토론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7월 26일 무인
판부사(判府事) 이유(李濡)·좌의정(左議政) 이이명(李頤命)·예조 판서(禮曹判書) 민진후(閔鎭厚)·참의(參議) 유숭(兪崇)이 빈청(賓廳)에 모여 어제 연석(筵席)에서 품정(稟定)한 바에 따라 청정(聽政)에 대한 의절(儀節)을 만들어 별단자(別單子)에 써서 들였다. 예조(禮曹)에서 8월 초하루를 왕세자가 청정(聽政)하는 길일(吉日)로 택정(擇定)하여 아뢰었다.
약방(藥房)에서 들어와 진찰한 다음 간유(肝兪)의 좌우혈(左右穴)에 침(鍼)을 맞았다.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왕세자가 청정(聽政)한 다음 종묘(宗廟)에 대제(大祭)를 지낼 적에 섭행(攝行)하는 의절(儀節)에 대해 어제 앙품(仰稟)하였는데 세종조(世宗朝)에서 정한 대로 친제(親祭)하는 의절(儀節)로써 행하도록 명하였습니다. 따라서 축문(祝文)에도 사손(嗣孫)이라고 일컬을 수 없으니, ‘삼가 세자 아무를 보낸다.’고 내용을 만들어야 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진달한 바가 옳다. 축문에는 ‘삼가 세자 아무를 보낸다.’고 써야 된다."
하였다. 민진후가 말하기를,
"용인(用人)·형인(刑人)·용병(用兵) 이외의 것은 모두 세자의 재결(裁決)을 받도록 이미 정탈(定奪)하였습니다. 소장(疏章)·장계(狀啓) 가운데는 제반 일을 뒤섞어 논하기 마련인데, 그 중 용인·형인·용병에 대해 언급된 것은 마땅히 전소(全疏)로써 입계(入啓)해야 합니까? 아니면 그 조항만 점출(拈出)하여 따로 기록해서 대조(大朝)에 들여야 합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점출하여 써서 들이라."
하였다. 민진후가 말하기를,
"실록(實錄) 가운데에는, 왕세자의 조참(朝參) 때 문무관(文武官) 1품은 모두 뜰아래에서 재배례(再拜禮)를 행하게 되어 있고 세자는 답배(答拜)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오직 사부(師傅)와 이사(貳師)만이 당(堂)에 올라가 재배(再拜)하면 세자가 답배(答拜)하게 되어 있습니다. 비록 사부(師傅)를 거치지 않았다 하더라도 대신(大臣)의 경우는 사체(事體)에 있어 절로 구별이 있으니, 다같이 당(堂)에 올라가 행례(行禮)하게 해야 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대신은 사체에 있어 구별이 있으니, 당(堂)에 올라가 행례하게 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민진후가 말하기를,
"조참(朝參) 때에는 2품 이상의 관원은 뜰 아래에서 행례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빈객(賓客)도 마땅히 그 가운데에 들어가게 됩니다. 서연(書筵) 때에는 상례(常禮)에 따라서 세자와 서로 배례(拜禮)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卿)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였다. 민진후가 말하기를,
"세자가 빈객을 대우함에 있어 우례(優禮)를 쓰는 것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조회(朝會) 때 2품 이상의 관원과 함께 같이 행례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것이지만, 서연(書筵) 때에는 그대로 상례(常禮)를 쓰는 것이 무슨 방해될 것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서연 때에는 상례를 따라 마주보고 배례(拜禮)하도록 하라."
하였다. 민진후가 말하기를,
"용인(用人)은 대조(大朝)께서 직접 결단할 것으로 판하(判下)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치통감(資治通鑑)》의 태종기(太宗紀)를 가져다 상고하여 보니 5품 이상 관원의 임명과 제해(除解)에는 모두 아뢰게 하였는데, 그 주석(注釋)에 의하면 제해는 관원의 해제(解除)를 말한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대소 관원의 체직(遞職)에 대한 한 조항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해직(解職)과 용인(用人)은 똑같이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왕세자(王世子)가 상소(上疏)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臣)은 천만 무상(無狀)한 자질로 동궁(東宮)에 대죄(待罪)하고 있는 지가 이미 30년에 이르렀는데, 항상 두려운 마음을 품고 있어 마치 깊은 못과 깊은 골짜기에 떨어지는 것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게다가 신은 성효(誠孝)가 천박(淺薄)하여 5년 동안이나 시탕(侍湯)하였습니다만, 성후(聖候)가 한결같이 편안하지 못하여 아직도 건강을 회복할 기약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애태우며 용납될 데가 없는듯이 하여 왔는데, 천만 뜻밖에 갑자기 감히 감당할 수 없는 성지(聖旨)를 받들었습니다. 신은 명(命)을 듣고 나서 놀랍고 황공하여 더욱 몸둘 곳을 몰랐습니다. 신은 재질이 노둔하여 일을 감당할 수가 없으니 진실로 이 임무는 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성명(聖明)께서 비록 노고를 대신시키려 하십니다만, 신은 도리어 걱정을 끼치는 것이 전일의 배가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신은 백방으로 생각을 해봐도 결단코 명령을 받들어 감내할 수가 없으므로 이에 감히 무릅쓰고 진심을 우러러 사룁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자(聖慈)께서는 특별히 세 번 생각하시어 조속히 성명(成命)을 정지시키시어 국사를 중하게 하시면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승지(承旨)에게 명하여 선비(宣批)하기를,
"소장의 내용은 모두 알았다. 오랫동안 병고(病苦)에 시달려 왔는데 이제 안질(眼疾)이 또 극심하여 수응(酬應)하기가 매우 어려워 사무(事務)가 더욱 침체되고 있다. 병중(病中)에 걱정하던 끝에 너에게 노고를 대신시킬 것을 명한 것인데, 이는 곧 국조(國朝)의 고사(故事)이다. 네가 어찌 사양할 수 있겠는가? 아! 부탁(付託)이 지극히 중한 것이며 너의 책임도 지극히 크다.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혹시라도 나태(懶怠)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공경과 태만의 구분에서 나라의 흥륭(興隆)과 상망(喪亡)이 판가름나는 것이니 참으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서경(書經)》에도 ‘생각을 시종(始終) 학문에 두라.’고 하였으니, 마땅히 힘써야 될 것이다."
하였다.
7월 27일 기묘
왕세자(王世子)가 또 상소(上疏)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이 감히 지극한 정성을 가지고 신청(宸聽)을 우러러 번독(煩瀆)스럽게 했는데도 성비(聖批)를 받드니, 윤허를 내리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사지(辭旨)가 온화 친절하여 계회(誡誨)가 갖추어 지극했습니다. 신의 불초(不肖)한 몸이 어떻게 이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황송한 마음이 배로 더해짐에 잇따라 감격의 눈물이 흘러내려 실로 이 마음을 만에 하나도 우러러 아뢸 수가 없는 지경입니다. 성후(聖候)가 편안하지 못하시어 오랫동안 위중하던 끝에 또 안질(眼疾)까지 첨중(添重)되어 오늘의 분부가 있기에 이르렀으니, 신이 비록 무상(無狀)할지라도 어찌 그런 사정을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삼가 생각하건대, 신은 재질이 노둔하고 학식이 어두워 진실로 부탁하시는 지극한 뜻을 우러러 본받을 수가 없으니, 이것이 신이 주저하고 망설이면서 조처할 바를 모르는 이유인 것입니다. 아! 이것이 얼마나 중한 일이고 이것이 얼마나 중대한 책임입니까? 그런데도 더없이 무상(無狀)한 신이 태연히 받들어 담당하기를 마치 참으로 감내할 수 있는 사람인 것처럼 할 수가 있겠습니까? 짧은 글을 함부로 올려 우러러 찰납(察納)해 주기를 바랐는데, 성상(聖上)의 일월(日月)같은 밝으심으로 어찌 그 정상을 살펴 간절한 정성을 이루어 주지 않으십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자(聖慈)께서는 신의 지극한 심정은 겉치레로 사양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양찰(諒察)하시어 성명(成命)을 회수하여 주시면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승지(承旨)를 보내어 선비(宣批)하기를,
"소장의 내용은 모두 살펴보았다. 어제의 비지(批旨)의 내용에서 훈계(訓戒)한 말을 너는 잘 흠승(欽承)할 것이다. 다시 사양하지 말라. 그리고 근일의 일은 처분(處分)이 정대(正大)하고 시비(是非)가 분명하여 백세(百世)뒤에도 의혹스러울 것이 없다. 일이 사문(斯文)280) 에 관계되는 것이니, 돌아보건대 중대하지 않은가? 그래서 특별히 말하는 것이다. 나의 뜻을 네가 준행(遵行)하여 혹시라도 동요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대사헌(大司憲) 이희조(李喜朝)가 현도(縣道)를 통하여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왕세자(王世子)에게 청정(聽政)하도록 한다는 명은 실로 전하(殿下)께서 국사를 걱정하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제부터 만기(萬幾)의 번거로움이 반드시 감소될 것이고 정섭(靜攝)할 시간이 반드시 많아질 것이니, 무릇 군하(群下)에 있어 누군들 기뻐하여 축하(祝賀)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삼가 도로(道路)에서 전하는 말을 듣건대, 지난번 여러 대신(大臣)들이 입시(入侍)했을 적에 전하께서 미안스런 분부를 많이 내렸다고 하는데, 알 수가 없지마는 전하께서는 무엇 때문에 이런 실언(失言)을 하셨습니까? 생각건대 우리 왕세자께서는 총명하고 효성스럽고 우애롭고 덕망과 학문이 날로 성취되어 어질다는 성문(聲聞)이 사람들에게 들린 지 오래되었으므로 사방(四方)에서 목을 길게 빼고 몹시 기대하면서 왕세자를 위하여 죽기를 원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대저 성의(聖意)에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마는, 왕언(王言)이 한번 전파되자 듣는 사람들이 놀라고 의혹하였습니다. 비록 옥당(玉堂)의 계청(啓請)에 의하여 즉시 환수(還收)되기는 하였습니다만, 어찌 애당초 이런 일이 없었던 것과 같겠습니까? 신은 삼가 전하를 위하여 개연(慨然)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간절히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더욱 전일의 일을 징계하고 뒷날을 경계할 방도를 생각하시어 확연(廓然)히 깨우치는 통연(洞然)히 풀어주심으로써 상하의 사이에 다시 조금이라도 의심하는 걱정이 없게 하소서. 신은 또 이 일로 인하여 아뢸 말이 있습니다. 신이 일찍이 송(宋)나라의 신하인 주희(朱熹)가 효종(孝宗)무신년281) 을 당하여 봉사(封事)282) 를 올려 태자(太子)를 보익(補翼)하라는 말을 극진히 진달하였는데, 그 내용에 ‘신이 삼가 지난번의 성조(聖詔)를 보건대 황태자(皇太子)에게 서무(庶務)를 참여하여 결단하게 하였으니, 여기에서 성념(聖念)이 심오하여 앞으로 황태자에게 수시로 국가 정사(政事)의 득실(得失)을 습지(習知)시키려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신은 정사를 습지시키는 것이 수덕(修德)을 면려(勉勵)하는 것만 못하게 여겼기 때문에 신이 삼가 보양(補養)이 지극하지 못했다고 논한 것인데, 이는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폐하(陛下)로 하여금 다시 성의(聖意)를 여기에 두기를 바라서인 것입니다.’ 했습니다. 대개 그 뜻은 서무(庶務)를 참여하여 결단하는 여가에 학문을 강론하고 덕을 수양하는 공부를 더욱 극진히 하기를 바라서였던 것이니, 참으로 이른바 약석(藥石)과 같은 가모(嘉謨)인 것입니다. 다시 원컨대 전하(殿下)께서는 주자(朱子)의 본문(本文)을 가져다가 열람하여 보시고 더욱 본받아 실행하는 데에 뜻을 두어 보익(補翼)하는 도리를 극진히 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소장에 진달한 말은 진실로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므로 매우 가상(嘉尙)하게 여긴다.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7월 28일 경진
박봉령(朴鳳齡)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송상기(宋相琦)를 판의금(判義禁)으로 삼았다.
예조(禮曹)에서 왕세자(王世子)의 청정(聽政)에 대한 절목(節目)을 팔방(八方)에 반포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삼가 춘추관(春秋館)에서 실록(實錄)을 참고하여 온 별단자(別單子)를 보건대, 거기에 ‘예조(禮曹)의 정계(呈啓)에 아뢰기를, 「이보다 앞서 조참(朝參) 때의 고취악(鼓吹樂)은 어좌(御座)에 올라갈 때에는 당악(唐樂)283) 의 성수무강(聖壽無彊)284) 을 연주하고, 군신(群臣)이 절할 때에는 당악의 태평년(太平年)285) 을 연주하고 환궁(還宮)할 때에는 당악(唐樂)의 보허자(步虛子)를 연주하였습니다. 지금 세자(世子)가 조참(朝參)을 받을 때의 고취(鼓吹)는 양감(量減)하여 다음과 같이 정하소서. 출궁(出宮)할 때에는 당악(唐樂)의 오운개서조(五雲開瑞朝)를 쓰되 뒷부분만을 쓰고, 군신(群臣)이 절할 때에는 당악의 수룡음(水龍吟)을 연주하고 입궁(入宮)할 때는 당악의 낙양춘(洛陽春)을 연주하게 하소서. 그리고 악기(樂器)와 악공(樂工)의 수효는, 방향(方響)286) 은 본래 둘인데 그전대로 쓰고 당비파(唐琵琶)는 본래 여섯인데 둘을 감하고, 통소(洞簫)·아쟁(牙箏)·대쟁(大箏)은 각기 둘인데 그전대로 쓰고, 필률(觱篥)287) 은 여섯인데 둘을 감하고, 당적(唐笛)은 넷인데 둘을 감하고, 대금(大笒)도 넷인데 둘을 감하고, 장고(杖鼓)는 여덟인데 넷을 감하고, 고(鼓)는 하나인데 그전대로 쓰고, 공인(工人)은 악기(樂器)의 수효에 따라 25인을 쓰고 복색(服色)은 또한 그전대로 하소서. 그리고 전에는 고취(鼓吹)할 때 아부(雅部)의 금슬(琴瑟)은 각기 둘을 섞어 연주하였습니다만, 아악(雅樂)을 속악(俗樂)에 섞어 연주할 수는 없으니, 이 다음부터 섞어 연주하는 것을 허락하지 마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마땅히 이에 따라서 거행하여야 하겠습니다만, 다만 지금 전하(殿下)의 거둥 때에는 당비파(唐琵琶)를 둘만 쓰고 대쟁(大箏)은 원래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로써 계산해 본다면 악공(樂工)의 수효는 단지 21인입니다. 청컨대 이것으로써 장악원(掌樂院)에 분부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뒷날 왕세자가 말하기를,
"바야흐로 시탕(侍湯)하면서 걱정으로 마음을 태우고 있는 중인데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미안하다."
라고 하령(下令)하여 진설(陳設)만 하고 연주하지는 않았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윤지완(尹趾完)이 시골에서 도성(都城)으로 들어와서 상소(上疏)하기를,
"신(臣)이 병상(病狀)에 누워 숨이 장차 끊어지려는 가운데 삼가 듣건대, 성상(聖上)께서 연석(筵席)에서 이러저러한 분부를 춘궁(春宮)에 언급하셨는데 온 조정(朝廷)이 두려워 떨고 있으며 여러 사람의 마음이 소란하여 평온하지 못하다고 하니, 이것이 진실로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이것이 진실로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노신(老臣)이 죽지 않은 탓으로 이런 소식을 듣게 되니 심담(心膽)이 떨려 단지(丹墀)288) 에 나아가 머리를 부수고 죽고만 싶으나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춘궁(春宮)께서는 예질(睿質)이 자연히 성취되어 영문(令聞)이 일찍 드러났습니다. 그리하여 성후(聖后)를 받들어 섬김에 있어 지극한 효성으로 간단(間斷)이 없었으며, 무릇 기뻐하도록 모시고 슬픈 마음으로 거상(居喪)하는 의절에 있어 신료들이 이를 눈으로 직접 보고 감읍(感泣)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중간에 변고(變故)를 만났을 적에는 지극히 난처한 상황이었습니다만, 털끝만큼도 그러한 기미(幾微)를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덕을 배양하여 온 30년 동안 전혀 한 가지의 잘못도 말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온 나라의 모든 백성이 목을 길게 빼고 몹시 기대하면서 세자(世子)를 위하여 죽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종사(宗社) 억만년의 큰 복이므로 바야흐로 전하를 위해 두 손을 모아잡고서 묵묵히 축하드리려 하고 있었는데, 어찌 오늘날 이런 일이 있을 줄 생각했겠습니까? 왕언(王言)이 한번 전파되자 온 나라가 의혹에 젖어 있으니, 아! 전하의 성명(聖明)으로 어찌하여 이러한 분부를 내리셨습니까? 예로부터 쇠망(衰亡)하는 세상에서는 항상 음사(陰邪)한 마음을 품은 불령(不逞)한 무리들이 그 사이에 움터서 남의 집과 나라를 패망시켜 왔습니다. 지난 갑술년289) 초에 특별히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이르시기를, ‘강신(强臣)·흉얼(凶孽)로서 감히 국본(國本)290) 을 동요(動搖)시키는 자가 있으면 역률(逆律)로 논죄하겠다.’ 하였는데, 신이 등대(登對)하는 날 우러러 진달하기를, ‘국본을 동요시키면 이것은 곧 역적인 것이니, 따로 금령(禁令)을 제정하는 것은 매우 사체(事體)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감히 환수(還收)할 것을 청합니다.’ 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성상께서도 반드시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때의 대신(大臣) 남구만(南九萬)이 기미(幾微)에 대한 마음으로 먼 장래를 우려한 것은 한덩어리 애타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매양 위구(危懼)스런 때를 당할 적마다 곡진한 마음으로 막아 지켰고 정성을 다하여 조호(調護)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사직(社稷)의 안위(安危)에 대한 기미가 진실로 여기에 달려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남구만(南九萬)은 이미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이 되었고, 당시의 구신(舊臣) 가운데 단지 늙어빠져 거의 죽어가는 하찮은 신만이 남아 있을 뿐인데, 성의가 천박(淺薄)하여 천의(天意)291) 를 감동시켜 돌리기를 바라기가 어렵겠으며 지망(地望)이 가벼워 또 인심도 진복(鎭服)시킬 수가 없습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심골(心骨)이 함께 떨립니다. 아! 시사(時事)가 변천되어 세도(世道)가 누차 바뀌었는데 우리 춘궁(春宮)께서는 이미 명릉(明陵)292) 의 보살펴 주시는 자애(慈愛)를 잃었고 계속해서 신사년293) 에 뼈를 깎는 아픔을 당하였으니,294) 감싸주고 조호해 주기를 우러러 의지할 데는 다만 우리 전하에게 있을 뿐입니다. 설령 춘궁(春宮)에게 미세한 과오가 있었을지라도 반드시 성자(聖慈)의 너그러운 포용력에 의해 아침이나 낮에 시측(侍側)하였을 적에 계도(啓導)하여 주셔야 되는 것이요, 마땅히 기꺼워하지 않는 안색을 보여서는 안됩니다. 이제 갑자기 사지(辭旨)에 드러내어 마침내 연석(筵席)에서 발론하시었으니, 신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는지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군주의 부자(父子)사이에 처하여 속마음을 다 드러내어 말하고 비밀스런 이야기를 남김없이 논한 경우는 이필(李泌)이 당(唐)나라 덕종(德宗)에게 고(告)한 것295) 과 같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가 기미(幾微)를 막고 은의(恩義)를 보존시킨 것은 실로 ‘이런 뜻을 드러내지 말라.’고 경계한 데에 있었던 것입니다. 대개 이는 군주 측근의 근습(近習)296) 들 사이에 간혹 불령(不逞)한 무리들이 있어 상황을 엿보아 화단(禍端)을 순치(馴致)시키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니, 위의(危疑)스러운 즈음에 대해 신밀(愼密)을 기하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殿下)께서는 이에 도리에 어긋난 분부가 있었고 이것이 이미 원근(遠近)에 전파되었으니, 지금 일이 일어나기 전에 할 걱정은 다만 이필(李泌)이 우려(憂慮)한 정도뿐만이 아닙니다. 진실로 성명(聖明)께서 이 점에 대해 더욱 유념이 있을 줄 알고 있기는 합니다만, 노신(老臣)의 지나치게 우려하는 정성에 있어 또한 스스로 그만둘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현재 성상의 환후(患侯)가 오랫동안 회복되지 않고 안질(眼疾)까지 더 겹쳐지게 되니, 신민(臣民)들의 마음은 주야로 초조하게 애태우고 있는데, 국사(國事)를 생각하는 걱정과 같은 것은 단연코 신충(宸衷)으로부터 이극(貳極)297) 에게 참여하여 결단하게 함으로써 수고로움을 대신할 것을 명하셨으니, 이는 온당한 처분(處分)이었습니다. 대저 무슨 이의(異義)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미안(未安)한 분부가 내리자마자 계속해서 청정(聽政)하라는 명이 있었으니, 오늘날 세자의 심정과 처지는 생각건대 반드시 떨리고 송구스러워 편안하지 못하여 갑자기 명령을 받들기가 곤란할 것입니다. 그리고 전하(殿下)의 자애스런 마음으로써 말하더라도 어찌 간곡히 개도(開導)하여 위로하는 도리에 불만족스러움이 있지 않겠습니까? 노신(老臣)의 천박한 소견에는, 우선 억지로 하기 어려운 명을 천천히 하도록 하고 세자로 하여금 항상 측근에 모시게 하여 문안하고 시탕(侍湯)하는 여가에 정사(政事)에 참여하게 한 다음 큰 일은 품정(稟定)하게 하고 작은 일은 재결(裁決)하게 하신다면 성궁(聖躬)께서 수응(酬應)하는 번거로움을 덜게 되고 국사가 지체되는 걱정이 없게 될 것이니, 그 위안(慰安)하는 방도와 훈도(訓導)하는 의리가 둘 다 마땅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청정(聽政)하는 일에 이르러는 천천히 논의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은 삼가 가슴속에 개연(慨然)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날 등대(登對)했던 대신은 진실로 이치에 의거하여 간쟁(諫爭)함으로써 기어이 명령을 환수하게 했어야 하는데도 계획은 이에서 나오지 않고 도리어 참여하여 결단하게 할 것을 청하였으니, 신은 삼가 애석하게 여깁니다. 원임 대신(原任大臣)이 명초(命招)를 어긴 것은 진실로 사기(事機)와 경중(輕重)을 알아야 한다는 원칙에 부족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독대(獨對)한 일에 이르러서는 상하(上下)가 서로 잘못했다는 것을 면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어떻게 상국(相國)298) 을 사인(私人)으로 삼을 수가 있으며 대신(大臣)도 또한 어떻게 여러 사람들이 바라보는 정승의 지위를 임금의 사신(私臣)으로 만들 수가 있겠습니까? 중외(中外)가 놀라 의혹하고 국언(國言)이 떠들썩한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신이 병을 치료하느라 돌아다니는 즈음에 삼가 계속해서 내린 비망기(備妄記)에 특별히 성의(聖意)의 소재를 보여 연석(筵席)에서의 분부에 다른 뜻이 없었다는 것을 보고서야 신은 비로소 처음에 우려한 것이 지나친 망상(妄想)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다만 사지(辭旨)에 그래도 미진한 뜻이 있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더욱 세자의 생각을 유념하시어 다시 명명(明命)을 내려 크게 뉘우치고 있다는 뜻을 신속히 보임으로써 온나라의 신서(臣庶)로 하여금 더욱 성심(聖心)에 의심이 없다는 것을 환히 알게 하여 주시면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이제 경(卿)이 진달한 내용은 비록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지마는, 내가 보기에는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이 많이 있다. 아! 나의 병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변통(變通)시키는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다. 이는 진실로 이미 마음속에 정하고 있던 것으로 세자(世子)에게 청정(聽政)하게 하겠다는 분부를 내가 먼저 발론하고 대신들이 봉승(奉承)하였으니, 세종조(世宗朝)의 고사(故事)와 자연히 부합된 처사였다. 그때 수교(手敎)를 내릴 적에도 간쟁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는데, 이제와서 간쟁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대신을 책망하는 것은 내가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이제 나의 안질(眼疾)이 이미 십분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러서 조금도 수응(酬應)할 수 있는 가망이 없으니, 세자에게 노고를 대신시키는 것은 한 시각이 시급한 일인데도, 경(卿)은 우선 청정(聽政)을 천천히 하자고 말을 하니, 그 또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독대(獨對)에 이르러서는 지금에 새로 만들어 행한 것이 아닌데도 경이 좌규(左揆)299) 를 지척한 것은 어의(語意)가 심상(尋常)하지 않았고, 특별히 비망기(備妄記)를 내려 명백하게 풀어주었는데도 경은 다시 명령을 내리라고 청하였으니,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이이명(李頤命)이 윤지완(尹趾完)의 상소 내용 때문에 성외(城外)로 달려 나아가 그가 차고 있던 소명부(召命符)를 풀어서 녹사(錄事)에게 맡겨 대신 바치게 하였다. 임금이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환수(還授)하게 하고 이어 특별한 분부를 내려 승지(承旨)를 보내어 유시(諭示)하기를,
"대신(大臣)의 독대(獨對)는 비록 늘 있었던 일이 아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오늘날 새로 만들어 행한 것은 아니다. 어제 영부사(領府事)300) 의 상소에 독대에 대해 말하면서 말을 만든 것이 너무 심각했는데, 그 의도는 실로 경(卿)을 축출시키려는 데 있었다. 어찌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있겠는가? 경이 이 일로 인해 불안하게 여긴 나머지 도성문 밖으로 달려 나아갔고 이어 명소부(命召符)를 봉납(奉納)하여 왔으니, 나도 모르게 좌우의 손을 잃은 것처럼 깜짝 놀라는 마음이었다. 아! 세자의 청정(聽政)이 곧 있게 되었는데 낭묘(廊廟)가 거의 텅 비었으니, 국사를 생각하건대 병중(病中)에 어찌 편안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이 일은 천만 뜻밖의 것으로 경에게는 털끝만큼도 어렵게 여기거나 불안하게 여길 단서가 없는데, 어찌하여 나를 버리고 이렇게 거침없이 가버린단 말인가? 이에 승지(承旨)를 보내어 나의 지극한 뜻을 유시(諭示)하고 또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소명부(召命符)를 환수하게 하였으니, 경은 안심하고 영수(領受)하여 곧 이날로 도성(都城)에 들어와서 목마르게 기대하는 나의 마음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7월 29일 신사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기를,
"신 등이 삼가 절목(節目)의 내용을 살피건대 모든 내외관(內外官)의 체직·파직을 모두 입계(入啓)하라고 운운(云云)하였는데, 그 뒤 연석(筵席)에서 해직(解職)과 용인(用人)은 일체 똑같이 해야 된다고 분부하였습니다. 무릇 외방(外方)의 파출(罷黜) 이상의 죄를 청하는 장계(狀啓)와 삼사(三司)의 개차(改差) 이상의 죄를 논하는 차계(箚啓)나 본원(本院)에서 전지(傳旨)를 받드는 등의 일을 모두 대조(大朝)에 품재(稟裁)해야 합니까? 이 밖에 신료(臣僚)들의 사소(辭疏)·사단(辭單)도 해직(解職)에 연계시켜 똑같이 시행해야 합니까? 대계(臺啓) 가운데 용인(用人)·형인(刑人)·용병(用兵)에 관계되는 세 가지 일은 당연히 대조(大朝)에게 입계(入啓)하겠습니다만, 이 세 가지 이외의 일은 마땅히 동궁(東宮)에게 입달(入達)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한 명의 대관(臺官)이 양궁(兩宮)301) 에 나누어 아뢴다는 것은 또한 미안한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일은 모름지기 품정(稟定)한 뒤에야 봉행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예관(禮官)이 품한 바 한 통의 소계(疏啓) 가운데 논한 여러 조항 중에 용인(用人)·형인(刑人)·용병(用兵) 등에 대한 일은 점출(拈出)하며 따로 써서 들이도록 판하(判下)하셨는데, 어느 관사(官司)에서 써서 들이라고 말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것은 본원(本院)에게 시키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승정원(承政院)의 직책은 오로지 문서(文書)를 출납(出納)하는 데 있으니, 타인(他人)의 장소(章疏)를 점출하여 등서(謄書)하는 것은 이미 본래의 직무가 아닙니다. 그리고 한 통의 소계(疏啓)를 나누어서 둘로 만들로 각각 비답(批答)을 내리는 것은 매우 미안한 데에 관계됩니다. 따라서 본원(本院)에서는 결국 봉행하기가 곤란하니, 청컨대 의정부(議政府)로 하여금 다시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게 하였다. 청정(聽政)하는 날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양사(兩司)에서 입달(入達)하는 내용을 따를 것인가 따르지 않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반드시 상전(上前)에 직접 품한 다음에 조처할 것으로 세자(世子)가 직접 하교를 받았다. 따라서 이는 특별히 의정부(議政府)에서 품처(稟處)할 것이 없다."
하였다. 그 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절목(節目)에 이미 내외관(內外官)의 체직·파직은 모두 입계(入啓)할 것으로 마련하였으니, 외방관(外方官)의 파출 이상의 죄를 청하는 장계와 삼사(三司)의 개차(改差)이상의 죄를 논하는 소차(疏箚)는 승정원(承政院)에서 응당 파직시킬 인원에 대해 전지(傳旨)를 받드는 일은 모두 마땅히 입계(入啓)해야 합니다. 그러나 신료(臣僚)들의 사소(辭疏)·사단(辭單)이 비록 해직(解職)에 관계되는 것이지마는, 이것을 일체 입계하는 것은 자못 변통시켜 번거로움을 덜게 한다는 의의가 없게 됩니다. 그러니 이를 모두 입달(入達)하게 하여 동궁(東宮)에서 전례에 따라 답서를 내리게 하고 체직시켜야 할지 안 시켜야 할지 불분명한 것만 대내(大內)에서 품재(稟裁)하게 하소서. 형인(刑人)·용인(用人)·용병(用兵)에 관계된 외방(外方)의 장문(狀聞)과 일을 논한 장(章)·소(疏)·단(單)은 이 일에 관계된 것은 모두 입계(入啓)하게 하서서. 대계(臺啓)에서 논한 바는 이미 전교(傳敎)가 있었으니 이제 와서 논할 것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승지(承旨) 안중필(安重弼)이 임금의 하교(下敎)를 가지고 가서 좌의정(左議政) 이이명(李頤命)에게 유시하고 돌아와서 그의 말로 아뢰기를,
"군주의 사신(私臣)이 되는 것은 천고의 소인(小人)들 가운데에서도 드물게 있었던 일입니다. 신의 충신(忠信)이 평소 미더웠었다면 사람들의 지척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 그날 창졸간에 비상한 일을 당하고 급박하고 창황한 가운데 저절로 전도(顚倒)된 것인데 사신(私臣)이 되기를 구하는 마음이 어느 겨를에 생겼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의심과 모욕이 이 지경에 이르렀고 또 망측한 지경으로 몰아넣으면서 다시 사람의 도리로 서로 대우해 주지 않으니, 신은 심골(心骨)이 함께 떨려 죽을 것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오늘날의 일은 전하의 신하된 자로서 누군들 놀라고 근심하지 않겠습니까? 어찌 반드시 머리가 허연 신하만이 이 의리에 밝겠습니까? 이제 대신(大臣)이 자신은 깊이 걱정하는 것으로 자처하면서 남에 대해서는 악명(惡名)을 의심없이 가하고 있으니, 이는 노성(老成)한 사람의 충서(忠恕)하는 도리가 아닌 것같습니다. 신의 애타는 마음과 진심에서 나오는 정성은 태양(太陽)이 굽어 살피고 있으니, 이제 다시 무슨 말을 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다시 가서 돈유(敦諭)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윤지완(尹趾完)의 소장에서 청정(聽政)하는 일에 대해 굳이 간쟁하지 못했다고 지척한 일 때문에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말하기를,
"처음 신 등이 급하게 여긴 것은 단지 천심(天心)302) 을 돌이켜 깨우치게 하는데 있습니다. 또 청정(聽政)하게 하여 참여 결단하는 일에 대해 이론이 있을 것을 누가 알겠습니까? 《국조보감(國朝寶鑑)》에 이르기를, ‘문종 대왕(文宗大王)께서 서무(庶務)를 참여하여 결단하게 하였다.’ 했는데, 실록(實錄)을 조사하여 보니 바로 지금의 청정(聽政)과 같았습니다. 이런데 이 두 경우에 무슨 다른 것이 있겠으며, 대신(大臣)이 전의 것을 옳게 여기고 지금 것은 그르게 여기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신 등은 단지 조종(祖宗)의 좋은 법규에 의거해서 준행해야 된다는 것만 알았을 뿐 간쟁해야 된다는 것은 몰랐습니다. 대신이 의거하고자 하는 것이 유독 무슨 의리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선조(先朝)에서 이미 시행한 전례(前例)를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작은 일은 재결(裁決)하고 큰 일은 품정(稟定)하도록 한다면 비록 외당(外堂)에서라도 이렇게 하는 데에는 방해로울 것이 없으므로 절목(節模)에 갖추어 기재한 것입니다. 반드시 전하의 측근에 있으면서 참여하여 일을 보게 한다면 더욱 번거롭기만 하여 고요히 조섭(調攝)하는 데 방해만 있을 뿐입니다. 그 노고(勞苦)를 대신하게 한다는 의의가 어디 있겠습니까? 진실로 대신의 말처럼 신 등이 간쟁하였다면 또 장차 말하기를, ‘어찌하여 청정(聽政)시키라고 청하지 않았는가?’라고 하면서 죄를 성토하는 것이 더욱 컸을 것이니, 또한 곤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신이 일기(日記)를 산개(刪改)하게 한 일에 대해 대단히 불가하게 여겼습니다. 성교(聖敎)가 처음에는 미안스러웠습니다만, 멀지 않아 돌이켰으니 어찌 숨겨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이는 소장(疏章)이나 비지(批旨)와는 다르니, 또한 어찌 추개(追改)할 것이 있겠습니까? 주상의 분부를 한 번 고치게 되면 군하(群下)가 위복(違覆)303) 한 말이 모두 내력(來歷)이 없게 되는데 그렇다고 따라서 모두 산개(刪改)하면 어떻게 미더움을 전하는 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후세의 군주들이 허물이 있을 적마다 사초(史草)를 번번이 산개(刪改)한다면 신은 오늘날의 이 일이 구실(口實)이 될까 두렵습니다. 여러 승지(承旨)들이 이른바 ‘사람들의 의혹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 그저 의혹을 더 불어나게 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근일의 장소(章疏)에서 증험할 수가 있습니다. 신은 원하건대 조속히 승지들의 말을 따르시어 성명(成命)을 도로 중지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영부사(領府事)의 상소 내용은 말을 가려서 하지 않은 것이 많다. 따라서 그가 지척(指斥)한 것도 조리에 맞지 않으니, 나도 옳게 여기지 않고 있는데 경(卿)이 어찌 인혐(引嫌)할 것이 있겠는가? 차자(箚子)의 끝에 진달한 일은 경의 말이 매우 옳다. 도로 중지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판부사(判府事) 이유(李濡)도 윤지완(尹趾完)의 상소로 인하여 차자(箚子)를 올려 사면(辭免)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려 위유(慰諭)하였다.
강원도 암행 어사(江原道暗行御史) 홍정필(洪廷弼)이 조정에 돌아와 복명(復命)하였다. 원주(原州)의 전(前) 목사(牧使) 박휘등(朴彙登)과 평강 현령(平康縣令) 김양겸(金養謙)은 불법한 짓을 저질렀기 때문에 나문(拿問)하였고, 홍천 현감(洪川縣監) 조도보(趙道輔)는 문서(文書)에 흠결이 있었기 때문에 파출(罷黜)시켰고, 안협 현감(安峽縣監) 최창민(崔昌敏)과 낭천 현감(狼川縣監) 김두규(金斗奎)는 진구(賑救)를 잘했기 때문에 포상(褒賞)을 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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