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60권, 숙종 43년 1717년 8월

싸라리리 2025. 11. 30. 10:44
반응형

8월 1일 임오

밤에 유성(流星)이 문창성(文昌星) 위에서 나와 간방(艮方)의 하늘 끝으로 들어갔다.

 

왕세자(王世子)가 청정(聽政)하였다. 진시(辰時)에 시민당(時敏堂)에 나가 앉아 백관(百官)의 조참(朝參)을 받았다. 이에 앞서 예조(禮曹)에서 청정에 대한 의절(儀節)을 올렸는데,
"1. 처소(處所)는 시민당(時敏堂)으로 정하고 조참(調參)과 인접(引接) 등의 일은 모두 이 시민당에서 행한다.
1. 청정할 때의 좌향(坐向)은 역대(歷代)와 본조(本朝)의 전례에 의거하여 서향(西向)하도록 한다.
1. 처음 청정할 적에 조참(朝參)은 한 차례하고 상참(常參)은 일이 없을 적에 간간이 한다. 군신(群臣)의 배례(拜禮)는 세종조(世宗朝)에서 정한 바에 따라 종친(宗親)과 문무(文武) 군신(群臣) 1품 이하의 관원은 뜰 아래서 재배(再拜)하게 하되 세자(世子)는 답배(答拜)하지 않는다. 다만 종실(宗室)의 백숙(伯叔)과 사부(師傅)는 먼저 당(堂)에 올라가서 재배(再拜)하고 세자가 답배(答拜)를 한다. 또 예조(禮曹)에서 품의(稟議)한 바 대로 대신의 사체(事體)는 절로 구별이 되는 것이니 사부(師傅)와 똑같이 먼저 당(堂)에 올라가서 재배(再拜)하게 한다. 빈객(賓客)은 조하(朝賀) 때에는 뜰 아래서 절하게 하고 서연(書筵) 때에는 구례(舊例)에 따라 행하도록 한다.
1. 제향(祭享)은 세종조(世宗朝)에서 정한 바에 따라 종묘(宗廟)와 산릉(山陵)에는 세자가 모두 대행(代行)한다. 또 예관(禮官)이 품한 바에 따라 행제(行祭)할 때의 모든 일은 한결같이 임금이 친히 제사지내는 예(例)에 의거하도록 하고 축문(祝文)은 섭행(攝行)하는 의식(儀式)에 따라 ‘삼가 보낸다[謹遣]’라고 쓴다.
1. 5일마다 있는 빈청(賓廳)의 일차(日次)에는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이 시민당(時敏堂)에서 입대(入對)한다. 해방(該房) 승지(承旨)는 서연(書筵)에 수참(隨參)하는 이외에도 청정(聽政)하는 날 인견(引見)할 적에 승지도 또한 진참(進參)한다. 승지가 진참할 때에는 한림(翰林)·주서(注書) 각 1원(員)이 수입(隨入)한다. 춘방관(春坊官)이 춘추관(春秋官)을 겸하는데 청정하는 날의 당직인(當直人)이 또한 입시(入侍)하여 기사(記事)한다.
1. 정무(政務)는 세종조(世宗朝)에 의거하여 용인(用人)·용병(用兵)·형인(刑人)은 주상이 친히 결단하고 그 나머지 서무(庶務)는 모두 세자에게 재결(裁決)하게 한 전례에 따라 거행하게 한다. 모든 상장(上章)과 삼사(三司)의 차계(箚啓)와 번신(藩臣)304)  의 장문(狀聞)과 각사(各司)의 계사(啓辭)는 전부 동궁(東宮)으로 올리게 하되, 그 가운데 일이 중대한 데에 관계되어 스스로 결단하기 어려운 것은 상전(上前)에 품재(稟裁)한다."
하였고, 또 예조(禮曹)에서 품계(稟啓)하기를,
"1. 소계(疏啓)에서 논한 여러 가지 조항 가운데 용인(用人)·용병(用兵)·형인(刑人) 등에 관계되는 것은 점출(拈出)하여 따로 써서 들이게 하되 모든 내외관(內外官)의 체직·파직은 모두 입계(入啓)하게 한다. 그리고 양전(兩銓)305)  의 제배(除拜), 대소 관원의 체개(遞改), 의금부(義禁府)·형조(刑曹)의 대벽(大辟)306)  에 관한 처결(處決) 및 병조(兵曹)의 소관인 경외(京外) 군병(軍兵)의 상번(上番)과 조습(操習), 세초(歲抄)에 숙위(宿衛)에 대한 체대(遞代), 군호(軍號)의 생기(省記)307)  , 궁성(宮城)과 도성(都城)의 문을 여닫는 등의 일에 대해서는 모두 입계(入啓)한다.
1. 교령(敎令)을 출납(出納)하는 것은 세종조의 전례를 따라 청정하는 날부터 세자의 명령은 승정원(承政院)에서 주관한다. 시강원(侍講院)에서 일찍이 거행하던 것을 본원(本院)에서 거행하는데 하령(下令)은 휘지(徽旨)라고 칭하고 계의윤(啓依允)은 달의준(達依準)으로 고치고, 계사(啓辭)는 달사(達辭)라 칭하고 장계(狀啓)는 달(達)이라 칭하고, 계본(啓本)은 신본(申本)이라고 칭하고 계목(啓目)은 신목(申目)이라고 칭하고, 상소(上疏)는 상소(上書)라고 칭하고 백배(百拜)는 재배(再拜)라고 고친다. 무릇 문서(文書)를 입달(入達)하여 거행하는 일은 승정원(承政院)에서 매달 삭망(朔望)에 초록(抄錄)하여 계문(啓聞)한다. 연례(年例)로 응당 행해야 할 일을 한꺼번에 써서 들이면 예람(睿覽)을 번거롭게 할 것이니, 이는 천천히 하도록 한다.
1. 조하(朝賀) 등의 의주(儀註)는 예조(禮曹)로 하여금 세종조에서 정한 것을 빙거(憑據)하여 고금의 사례를 참작한 다음 새로 법식을 만든다. 의장(儀仗)과 숙위 군사(宿衛軍士)는 병조(兵曹)로 하여금 세종조에서 정한 것을 빙거하여 평상시에 비교하여 수효를 더 정하게 한다."
하였다.

 

임금이 승정원(承政院)에 하교(下敎)하기를,
"이제 세자(世子)에게 청정(聽政)하도록 하라는 분부는 국조(國朝)의 고사(故事)를 따른 것으로 처분이 사의(事宜)에 알맞아 진실로 말할 것이 없다. 만일 당초의 연석(筵席)에서 있었던 분부 때문에 마음 속에 품은 것이 있어 진달하려고 한다면 조용히 진달하면 되는 것인데 그 누가 옳지 않다고 하겠는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윤지완(尹趾完)은 병이 위독한 사람으로서 서둘러 서울에 들어와 마치 국가의 안위(安危)가 아주 짧은 시간에 박두한 것처럼 하였으니, 거조가 이미 극도로 이상하였다. 그리고 임금에게 고하는 말을 또한 가려서 하지 않았고 좌의정(左議政)에 대해서는 곧바로 사신(私臣)이라고 일필(一筆)로 단정하여 헤아릴 수 없는 죄과로 몰아 넣었으니, 이것이 진실로 무슨 마음이란 말인가? 아! 대신(大臣)의 독대(獨對)는 오늘날 새로 만든 것이 아니니, 좌의정이 당한 일이 조금이라도 대신(大臣)308)  이 말한 것과 근사한 점이 있는가? 이런 등류의 배척하고 경알(傾軋)하는 계책이 도리어 기로대신(耆老大臣)에게서 나왔으니, 오늘날의 세도(世道)는 다시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지경이다. 어찌 통분하고 개탄스럽지 않겠는가? 분명히 말하여 드러내어 지척하지 않을 수 없으니 승정원(承政院)에서는 자세히 알아야 한다."
하니, 이에 윤지완(尹趾完)이 성문 밖으로 나갔다.

 

승정원(承政院)에서 말하기를,
"크고 작은 소장(疏章)에는 모두 피봉(皮封)이 있는데 상전 개탁(上前開拆)이라고 쓰는 것이 바로 상규(常規)인 것입니다. 지금부터 춘궁(春宮)에 입달(入達)하는 상서(上書)는 마땅히 세자궁 개탁(世子宮開拆)이라고 써야 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승지(承旨) 안중필(安重弼)이 좌의정(左議政) 이이명(李頤命)에게 돈유(敦諭)하고 돌아와 그의 말로 아뢰기를,
"예로부터 신하로서 군주의 사신(私臣)이 된 자가 나라에 재앙을 끼치고 집안에 재앙을 끼치지 않은 경우가 없습니다. 지금 신이 임금을 보필(輔弼)하는 지위에 있으면서 이런 이름을 가지고 있으니 장차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성명(聖明)께서 차마 하루아침에 형벽(刑辟)을 가할 수 없어 과중한 예우(禮遇)를 더하시니, 이는 앞으로 사인(私人)이라는 의혹을 도리어 깊게 하여 풀리기 어렵게 만드는 것으로 성덕(聖德)에 더욱 누(累)를 끼치게 되고 신의 죄도 더욱 더해지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삼가 듣건대 일을 함께 하였던 두 대신(大臣)이 청정(聽政)에 대해 간쟁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지척받은 것 때문에 소장을 올리고 죄벌을 기다린다고 합니다. 이 죄는 신에게도 있는 것입니다. 들어가 진찰할 적에 성교(聖敎)에서 수응(酬應)하기가 점차 어려워진다고 상세히 분부했는데, 입시했던 여러 신하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또 당(唐)나라의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변통(變通)하겠다는 뜻을 드러내어 보이셨는데, 그때 신은 본조(本朝) 영묘(英廟)309)   때에 참여하여 결단하게 하였던 성전(盛典)을 들어 더 상의하여 의정(議定)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세 번째 입시하였을 적에야 여러 신하들의 말을 따라 비로소 성명(成命)이 있었던 것입니다. 처음 미안(未安)하다는 분부가 있었던 것은 다만 섭행(攝行)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며, 뒤에 간언(諫言)을 쉽사리 따르시는 아름다움을 바라서 청한 것은 준허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으니, 모르겠습니다만 어떻게 하여야 죄벌이 없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다시 특교를 내려 안중필(安重弼)에게 명하여 가서 유시(諭示)하기를,
"경(卿)이 창황히 도성(都城)을 나간 것은 전적으로 영부사(領府事)의 소장 때문인데, 내가 경을 면려하는 것이 어찌 고유(誥諭)를 많이 하는 데 있겠는가? 아! 경을 나의 사신(私臣)이라고 하는데 지금이 어떠한 때인데 그런 말을 한단 말인가? 그런 말은 절대로 논리에 맞지 않는 말이다. 참으로 이런 등류의 말이 대신(大臣)의 입에서 나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영묘(英廟)께서 수교(手敎)를 내릴 적에 위복(違覆)한 사람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옛날의 대신(大臣)은 오늘날의 사람들만 못해서 그렇게 한 것인가? 간쟁하지 않았다고 한 이야기는 더욱 이해할 수가 없다. 되풀이해서 생각하여 보아도 조금도 불안해 할 단서가 없다. 경이 나라를 한몸처럼 여기는 정성에 있어 어찌 나의 지극한 뜻을 알아주지 않고 한결같이 멀리 떠나려고만 하는가? 경은 국사를 깊이 생각하여 조속히 멀리 가려는 마음을 되돌려 곧 이날로 도성(都城)에 들어 오도록 하라."
하였으나, 이이명(李頤命)이 끝내 명(命)을 받들지 않았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왕세자(王世子)에게 상서(上書)하기를,
"성명(聖明)께서 국가와 휴척(休戚)을 함께 하는 지중(至重)한 부탁을 하셨고, 신서(臣庶)들이 사랑하여 추대하는 정성에 있어 기대하는 바가 바야흐로 간절합니다. 따라서 저하(邸下)께서 사물(事物)을 응접함에 있어 삼가 근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릇 남의 윗사람이 되어서 학문을 하지 않으면 만사(萬事)를 다스려 나아갈 수 없는 것이고 국가의 존망(存亡)도 여기에 연유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전하(殿下)께서 제일 먼저 이것으로 경계하신 것입니다. 신은 원컨대, 저하(邸下)께서 이 훈계를 잘 준행하시어 시종 학문에 뜻을 두시고 기필코 성실하여 거짓이 없기를 힘쓰소서. 그리하여 선을 좋아하는 것을 여색(女色)을 좋아하는 것처럼 하시고 악을 싫어 하는 것을 악취(惡臭)를 싫어하는 것처럼 하소서. 이것은 진실로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를 이루는 권요(權要)인데, 지덕(至德)과 요도(要道)를 효보다 숭상해야 할 것은 없으니, 예로부터 제왕(帝王)이 효도를 잘하는데도 그 나라를 교화(敎化)시키지 못했다는 말을 신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저하(邸下)께서는 인효(仁孝)가 일찍이 드러나셨으니 어찌 신의 구구한 말을 기다릴 것이 있겠습니까마는, 그래도 더욱더 면려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행동을 예(禮)에 의거하여 문왕세자(文王世子)310)  를 모범으로 삼아 조정에 나가서는 일을 결단하고 궁중에 들어와서는 시탕(侍湯)하며 아침저녁 부드러운 안색으로 문안하고 뜻을 잘 받들어 어김이 없게 하기를 우리 문종(文宗)께서 세종 대왕(世宗大王)께 하셨듯이 하소서."
하니, 세자(世子)가 답하기를,
"상서(上書)에서 진계(陳戒)한 내용은 나라 일을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므로 내가 매우 감탄하고 있다. 어찌 마음에 새겨 실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시강원(侍講院)의 관원(官員)들이 상서(上書)하기를,
"비교(批敎)를 잘 준행하시어 늘 생각을 여기에 두소서. 그리하여 공경하는 마음에 조금이라도 간단이 있게 되면 태만한 마음이 발동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심으로써 순일(純一)하여 그침이 없는 지경에 이르도록 하소서."
하고, 상서(上書)의 끝에 학문에 힘쓰는 방도에 대해 진달하였는데 세자가 옳게 여겨 받아들였다.

 

황해 감사(黃海監司) 김유(金楺)가 장계(狀啓)를 올리기를,
"황당선(荒唐船)311)  을 살피는 요망군(瞭望軍)이 장차 농사를 폐기하고 식량을 싸가지고 나가므로 파산(破産)하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 청컨대, 그 중에 오래 근무한 사람을 기록하여 사로(仕路)를 허통(許通)시켜 주고, 또 상정 여미(詳定餘米)로 급료를 지급하게 하여 주소서."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비국(備局)에서 복주(覆奏)하기를,
"급료를 지급할 것을 허락하고 향장관(鄕將官)의 예(例)에 의거하여 50개월이 차면 계문(啓聞)하여 천전(遷轉)하게 하소서."
하니, 세자(世子)가 그대로 따랐다.

 

전라 감사(全羅監司)        김보택(金普澤)이 장계(狀啓)로 청하기를,
"본도(本道)의 사찰(寺刹) 가운데 여러 궁가(宮家)의 원당(願堂)312)                  이나 각 아문(衙門)에 절수(折受)되어 들어간 것을 일체 혁파(革罷)하소서."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비국(備局)에서 청한 대로 따르라고 복주(覆奏)하니, 세자가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8월 2일 계미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기를,
"조신(朝臣)의 패초(牌招)에는 으레 명자(命字)가 새겨진 주패(朱牌)를 사용하는데 지금은 계달(啓達)·교령(敎令) 등의 글자를 모두 고치는 절차가 있으니, 이 뒤로는 동궁(東宮)의 패초에 명자패를 그대로 써야 합니까? 아니면 분패(粉牌)에다 영자(令字)를 새겨서 써야 합니까?"
하니, 임금이 분패에다 영자를 새기라고 명하였다.

 

사직(司直) 이대성(李大成)·김연(金演)·이야(李壄), 전(前) 참의(參議) 이동암(李東馣)·박태항(朴泰恒)·이사상(李師尙)·이세최(李世最)·조태억(趙泰億)·유명응(兪命凝), 군수(郡守) 권첨(權詹), 전(前) 보덕(輔德) 송성명(宋成明), 전(前) 사간(司諫) 이정제(李廷濟), 부사과(副司果) 심상윤(沈尙尹)·안시상(安時相), 전(前) 현감(縣監) 박내정(朴乃貞)·정찬선(鄭纘先)·구만리(具萬理), 전(前) 정언(正言) 이명언(李明彦), 전(前) 정랑(正郞) 윤성시(尹聖時)·윤혜교(尹惠敎), 좌랑(佐郞) 정석삼(鄭錫三), 전(前) 현감(縣監) 권익관(權益寬), 부정자(副正字) 정석오(鄭錫五)·한사맹(韓師孟)·이명의(李明誼)·김홍석(金弘錫)·이광보(李匡輔) 등이 연명(聯名)으로 상소(上疏)했는데, 대략 말하기를,
"저군(儲君)은 나라의 근본입니다. 그 근본이 한번 흔들리게 되면 나라가 위태롭게 되지 않는 경우가 없습니다. 오직 우리 춘궁 저하(春宮邸下)께서는 위호(位號)가 일찍 정하여지셨고 인성(仁聲)이 멀리 전파되었으며, 양궁(兩宮) 사이의 자효(慈孝)에 결점이 없었으므로 온 나라 사람들이 기대를 걸어온 지가 이미 오래 되었으니, 국본(國本)이 공고하고도 안정되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과거 갑술년313)   초에 전하(殿下)께서 특별히 하교(下敎)하시기를, ‘감히 국본을 동요시키는 자가 있으면 역률(逆律)로 논죄하겠다.’고 하셨는데, 신사년314)  의 변고가 있은 이후로 보호(保護)하는 방도를 더욱 가중시키셨으니, 전하의 깊은 생각과 원대한 염려가 지극했다고 할 만합니다만, 지금 와서 연석(筵席)에서의 분부가 한번 나오자 국본이 동요되지 않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다행히도 오늘의 처분(處分)이 이러하였으니, 바로 이는 전하께서 힘을 써서 보호해야 할 기회인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생각하소서. 아! 일국의 정사를 주창인(主鬯人)315)  에게 위임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국가의 대사(大事)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에 대한 처분은 당연히 광명 정대(光明正大)하게 하여 온 나라의 신서(臣庶)들에게 성의(聖意)의 소재(所在)를 환히 알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유독 한 명의 대신(大臣)과 더불어 사람을 물리치고 사사로이 말을 하였으니,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 분부한 것이 어떤 내용이었으며, 대신이 대답한 것은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마침내는 청정(聽政)하게 하라는 명령이 연석(筵席)에서 미안한 분부가 있었던 끝에 나오기는 하였습니다만 그 사이의 곡절은 상세히 알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따라서 여러 신하들의 마음이 놀라 의혹하고 여러 사람들의 말이 떠들썩한 것은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그 뒤 기록하지 말게 한 것은 특히 이 세 번째의 면대(面對) 때 사관(史官)이 입시했을 적의 설화(說話)입니다. 독대(獨對)할 때의 일에 이르러서는 곧 사관(史官)이 일찍이 기록하지 않은 것이니, 기록하지 말라는 명을 환수(還收)하라고 한 속에 마땅히 들어가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개석(開釋)시켰다고 하는 것이 일찍이 독대(獨對)했을 때의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여러 신하들의 마음에 의심이 풀리지 않는 이유인 것입니다. 지금 마땅히 독대했을 때의 일을 명백히 개석(開釋)하여 상하(上下)로 하여금 환히 드러나 의심이 없게 해야 합니다. 아! 춘궁(春宮)의 아름다운 덕과 지극한 행실은 진실로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다만 좌우의 신하들이 일찍이 눈으로 직접 보고서 마음으로 감복했던 것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명릉(明陵)316)  의 국휼(國恤)을 당했을 때 가슴을 치고 부르짖으며 너무도 슬퍼하여 초췌해진 용모를 보고 국인(國人)들이 모두 감열(感悅)하였으며, 근일 시탕(侍湯)할 적에 걱정으로 애를 태우는 정성은 5년동안 한결같이 게을리함이 없었으니, 백행(百行)의 근원인 효도에 이러한 것이 있었습니다. 일찍이 서연(書筵)에 나가신 적이 있었는데, 그때 궁관(宮官)이 묻기를, ‘저하(邸下)께서는 스스로 어떤 사람이 되기를 기약하고 계십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나의 소원은 순(舜)은 어떤 사람이고 나는 어떤 사람인가?317)  한 말로 기약하고 싶다.’ 하였습니다. 곧 이 한 마디의 말로써도 진덕(進德)·수업(修業)하기 위해 스스로 기약하는 것이 넓고도 원대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일찍이 전하를 따라서 태묘(太廟)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낸 적이 있었는데, 그때 신색(神色)이 매우 좋지 않으셨는데 한참 있다가 말씀하시기를, ‘성궁(聖躬)께서 직접 제사를 지내셨는데도 신령의 감응이 아직도 더디다. 백성들의 일을 생각하니 구제할 바를 모르겠다.’ 하였습니다. 이 한 마디 말로서도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백성을 위안(慰安)하는 성의(誠意)가 독실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매양 대가(大駕)를 수행하여 태묘(太廟)에 가는 날을 당하여 걷기에는 약간 먼 거리인데도 소여(小輿)를 타지 않았습니다. 궁관(宮官)과 사부(師傅)가 굳이 청하여도 허락하지 않으면서 말씀하시기를, ‘엄숙하고 공경스런 자리에서 감히 스스로 편안하게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일찍이 경덕궁(慶德宮)으로 이어(移御)할 적에 막차(幕次)에서 궁관(宮官)을 불러 말하기를, ‘성후(聖候)가 편안하지 못하셔서 다른 때와는 다르다. 내가 먼저 들어가서 문후(問候)하고 나와서 곤궁(坤宮)318)  을 영접하도록 하겠다.’고 하였으니, 창졸간에 주선(周旋)하는 것이 이처럼 정리(情理)에 합당하였습니다. 그날 뜰에 있던 신하로서 누군들 흠모하고 칭송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근년에 선위(禪位)하겠다는 명령은 나라를 부탁하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인데도 춘궁(春宮)께서 을야(乙夜)319)  에 궁관(宮官)을 접대(接待)하고서 놀라움과 걱정으로 어찌할 줄을 모르시면서 성의(聖意)를 돌이킬 방책에 대해 물으셨습니다. 그때 성체(聖體)가 편안하지 못한 것을 걱정하고 대명(大命)320)  이 비상한 것을 안타깝게 여긴 나머지 수작(酬酢)하는 즈음에 눈물이 얼굴을 덮었습니다. 그리하여 심지어는 ‘울면서 청해도 되지 않으면 소장을 올려 진달하고 소장을 올려 진달해도 되지 않으면 궁문(宮門)을 나가겠다.’는 분부까지 하였습니다. 두 번째 올린 소장에 대한 비답(批答)이 내렸을 적에는 궁문을 나가 한데에 앉아 기도(祈禱)하면서 눈이 쌓인 금정(禁庭)에서 유막(帷幙)을 제거하라고 명하였으니, 그 간절하고 절박한 정성은 신명(神明)이 살피고 계십니다. 금년 봄 온양(溫陽)에 전하께서 거둥하실 적에 강가에서 공손히 전송[祗送]하면서 한동안 우러러 바라보며, 근심스런 빛이 얼굴에 나타났습니다. 그리하여 성상의 우모(羽旄)가 멀어지고 나서야 돌아오는데도 오히려 걸음을 더디게 하였습니다. 이날 이를 구경한 사람들은 누군들 두 손을 모아잡고 찬탄(贊歎)하지 않았겠습니까? 이것이 모두 우리 춘궁(春宮)의 조그마한 지절(志節)이긴 하나 이에서 살펴보더라도 또한 그의 실덕(實德)과 이행(履行)이 마음 속에 보존되었다가 밖으로 발로된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다만 이렇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신민(臣民)들은 ‘우리 임금의 아드님이 이러하니 근심이 없을 분은 우리 임금님이다.’고 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 청정(聽政)을 함에 있어 이미 길일(吉日)을 택(擇)하였습니다. 성궁(聖躬)을 조섭(調攝)하는 데 적의(適宜)하고 만기(萬機)의 지체도 걱정이 없게 되었으니 국사를 위해서는 진실로 크게 다행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신 등이 오히려 간절하게 면려하기를 그치지 않는 것은 진실로 오늘날의 일이 매우 중대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다만 바라건대, 전하(殿下)께서는 신민(臣民)의 마음에 아직도 미심쩍은 것이 다 풀리지 못한 점이 있다는 것을 깊이 살피시어 보호하는 방도를 생각함에 있어 극진하지 않은 것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먼저 전대(前代)의 치란(治亂)에 대한 근원을 살피고 성인(聖人)이 기미(幾微)에 대해 경계한 것을 상세히 살펴 비망기(備忘記)로 이미 개석(開釋)했다고 하지 마시고 남김없이 다 드러내어 보이시며, 독대(獨對)가 오늘날 새로 만든 것이 아니라고 하지 마시고 통렬히 뉘우침을 더하시어 청정(聽政)한 뒤에도 더욱 조호(調護)하는 방도에 힘쓰소서. 그리고 모든 정령(政令)에 대해서도 일에 따라 잘 이끌어 주고 잘 지도하여 줌으로써 궁정(宮庭) 안의 기상(氣像)이 날로 화평하여지게 되면, 일을 재결(裁決)하여 가는 즈음에 정사(政事)를 저절로 환하게 습득(習得)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대사(大事)가 이미 결정되었고 개석(開釋)도 이미 극진히 했으니 지금에 와서는 논할 것이 없으므로, 이제는 중지하도록 하라. 독대(獨對)와 개석에 대한 이야기에 이르러서는 용의(用意)가 위험(危險)하니, 매우 놀랄 만하다."
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원량(元良)321)  에게 정사를 대리(代理)하게 하였으니 부탁이 지극히 중대하다.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이미 지극히 개석(開釋)했으니, 다시 할 말이 없다. 그런데도 계속 소장을 올리고 있으니 진실로 이해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근일의 소장을 살펴보건대 간혹 말을 가려서 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또 인유(引喩)가 사리에 맞지 않는 것도 있었다. 바야흐로 닥쳐오는 걱정을 기어이 이 일에다 핑계하여 조정을 괴란(壞亂)시키려 하고 있으니, 이 뒤로는 이런 등류의 소장(疏章)은 봉입(捧入)하지 말게 하라."
하였다. 뒷날 승정원(承政院)에서 일이 춘궁(春宮)에 관계된 것이므로 중대한 것이 있으니 전례에 따라 봉입(捧入)하게 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8월 3일 갑신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에 진달[達]한 것을 다시 아뢰고,  【청정(聽政)한 뒤 계(啓)를 달(達)로 고쳤다.】  또 말하기를,
"해미 현감(海美縣監) 조정기(趙鼎期)는 사람됨이 용렬하여 전혀 사무를 알지 못하고, 남원 현감(南原縣監) 조명정(趙命禎)은 사람됨이 흐릿하여 일에 임하여 과오가 있으며 전례에 따른 문서(文書)도 격식을 맞추지 못하는 것이 많으니, 모두 개차(改差)하소서."
하였으나, 세자(世子)가 따르지 않았다.

 

임금이 특지(特旨)를 내려 우의정(右議政) 권상하(權尙夏)에게 유시(諭示)하기를,
"이번 태사(台司)322)  를 가려 뽑는 것은 진실로 여망(輿望)에 흡족하므로, 내 마음의 기쁨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이런 어려운 시국을 당하여 현상(賢相)을 얻어 함께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으니 오늘날의 국사(國事)에 또한 기대할 점이 있게 되었다. 전후 겸손한 글을 올린 것은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을 다 쏟아 놓은 내용이었는데, 나의 성례(誠禮)가 미진하여 멀리 떠나려는 마음을 되돌릴 수가 없었으니, 더욱 놀랍고 뒤이어 부끄럽기 그지없다. 아! 나의 병이 오래 계속되고 있는데다 안질(眼疾)까지 겹쳐 사무가 적체되어도 수응(酬應)하기가 매우 어렵다. 이에 국조(國朝)의 고사(故事)에 따라 이미 지난달 초 길일(吉日)에 세자(世子)에게 정사를 대리(代理)할 것을 명하였으니, 이러한 때 연석(筵席)을 출입하면서 춘궁(春宮)을 보익(輔翼)하는 데는 경(卿)과 같은 숙덕(宿德)과 중망(重望)을 지닌 사람이 아니면 그 누가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내가 깊고 간절하게 생각하여 기필코 불러오게 하고야 말겠다고 한 이유인 것이다. 경이 나라를 내 몸처럼 여기는 정성과 나라의 휴척(休戚)323)  을 함께 하려는 의리에 있어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나의 말을 기다릴 것도 없이 반드시 마음을 돌려 오게 될 것이다. 이에 사관(史官)을 보내어 나의 지극한 뜻을 유시(諭示)하니, 경은 모름지기 이런 뜻을 알고서 속히 달려와서 겸허하게 기다리는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주서(注書) 조진희(趙鎭禧)가 상소(上疏)했는데, 대략 말하기를,
"지난번 대신(大臣)이 독대(獨對)한 것은 이미 항상 있는 거조(擧措)가 아닌 것인데도 승지(承旨)와 사관(史官)이 모두 입참(入參)하지 못하였으므로, 성상(聖上)께서 하문하신 내용과 대신(大臣)이 우러러 대답한 내용이 하나도 기록이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보고 듣는 사람들이 의혹을 일으켰고 이것이 전문(轉聞)되면서 망령되이 헤아려 아무렇게나 한 이야기가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의당 그 당시에 입시(入侍)했던 대신으로 하여금 연석(筵席)에서 있었던 설화(說話)를 한 통 등서(謄書)하게 한 다음 위의 예람(睿覽)을 거치고 이어 사관(史官)에게 부송(付送)해서 일록(日錄)에 갖추어 기재하게 한 다음에야 여러 사람의 의혹도 확풀리게 되고 여러 사람의 마음도 진정이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설화(說話)를 갖추어 기재하라는 말에 대해서는 내가 실로 이해할 수 없다."
하였다.

 

부수(副率) 박필모(朴弼謨)가 상소(上疏)했는데, 대략 말하기를,
"전하(殿下)께서 춘궁(春宮)에 대해 미안(未安)하게 여기는 것이 과연 어떠한 일인지 감히 알 수가 없습니다만, 평소 자애(慈愛)하는 마음에 있어 갑자기 이러한 뜻밖의 분부가 있었습니다. 비록 마음을 돌려 깨달아 성의(聖意)를 분명히 보이시기는 했습니다만, 아직도 뒷날 다시 단서(端緖)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보장하기가 어렵습니다. 더구나 뉘우쳐 개석(開釋)한 뜻이 아직도 확 트이게 명백하지가 않았으니, 조금이나마 미안(未安)하게 여기는 마음이 전하의 심중(心中)에 남아 있는 것을 면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오늘날 청정(聽政)하는 명령이 다만 춘궁(春宮)의 마음에 불안한 단서를 가중시키고 간인(奸人)이 참소하는 문을 열게 할 뿐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殿下)께서는 다시 덕음(德音)을 내려 지난번 독대(獨對)한 일은 언급하시면서 한편으로는 ‘이것이 진실로 무슨 마음에서였는가?’ 하고, 또 한편으로는 ‘뉘우쳐도 미칠 수가 없다.’고 하소서. 그리하여 척연[怵然]히 상심(傷心)하고 유연(油然)히 개석(開釋)시켜 온 나라의 신민(臣民)들로 하여금 마치 구름을 헤치고 푸른 하늘을 보듯이 환히 알게 한 다음에야 여러 사람의 의심이 통쾌히 풀릴 수 있고 나라의 근본의 길이 튼튼해질 수 있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이미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명백하게 개석(開釋)하였는데도 그대의 소장(疏章)에서 말한 것은 가리키는 뜻이 매우 심각하니, 진실로 놀랍기 그지없다."
하였다.

 

8월 4일 을유

김유경(金有慶)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에 진달한 것을 거듭 아뢰니, 세자가 다만 조정기(趙鼎期)와 조명정(趙命禎)의 일만 따랐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에 진달한 것을 다시 아뢰고, 또 말하기를,
"사관(史官)이 가서 성비(聖批)를 내릴 적에는 대신(大臣)이 으레 직접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로 실병(實病)이 있어서 억지로 하기가 어려우면 안상(案床)을 설치하고 그 위에 봉치(奉置)하는 것이 이미 전해 내려오던 법규가 있어 선배(先輩)들도 많이 그렇게 행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겸춘추(兼春秋) 정석삼(鄭錫三)이 영상(領相)에게 비답(批答)을 전할 적에 병세(病勢)가 심히 위중하여 기동(起動)할 수가 없었으니, 중당(中堂)에다 안상(案床)을 설치하고 봉치(奉置)했어야 했는데도 핍박해서 나와서 직접 받으라고 했는가 하면 말이 패만(悖慢)스러운 것이 많았고 마침내는 비답을 전하지 않은 채 경솔히 되돌아왔으니, 청컨대 파직시키소서.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 이제면(李濟冕)은 군정(軍政)은 완전히 포기하고 탐욕만을 일삼았으므로 호령(號令)이 시행되지 않아서 일이 통서(統緖)가 없게 되었으니, 청컨대 파직시키소서."
하니, 세자(世子)가 다만 정석삼(鄭錫三)의 일만 따랐다. 처음에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병으로 인하여 차자(箚子)를 올려 진달했었는데, 정석삼(鄭錫三)이 사관(史官)으로서 비답(批答)을 가지고 가서 전하게 되었다. 김창집(金昌集)이 병으로 인하여 도저히 나와서 받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중당(中堂)에 안상(案床)을 설치하고 거기에 봉치(奉置)할 것을 청하였다. 대개 대신(大臣)에게 실병(實病)이 있는 경우에는 이 예(例)를 쓴 일이 많았는데도 정석삼(鄭錫三)은 김창집이 직접 나와서 지수(祗受)324)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계속 쟁론하다가 끝내 비답을 전하지 않은 채 돌아와서 승정원(承政院)에 고하였다. 승정원에서 이 사실을 아뢰니 임금이 도로 가지고 가서 안상을 설치한 곳에다 전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대관(臺官)이 탄핵하였다. 그 뒤 김창집(金昌集)이 이 일로써 인구(引咎)하면서 사면(辭免)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위유(慰諭)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좌참찬(左參贊) 조태구(趙泰耉)가 현도(縣道)를 통하여 상소(上疏)했는데, 대략 말하기를,
"우리 세자(世子)께서는 타고난 자질이 아름다우시고 위호(位號)를 일찍 정하시어 춘궁(春宮)에서 덕을 배양하여 온 지가 이제 30년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인심의 기대를 모아온 지가 이미 오래 되었고 사방(四方)에서 목을 길게 빼어 동정(同情)하고 있었습니다. 명릉(明陵)을 위하여 복상(服喪)할 적에는 슬퍼하는 것이 법제에 지나쳤고 중간에 변고(變故)를 만나서는 그런 기미(幾微)를 밖으로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양궁(兩宮)을 받들어 섬김에 있어 성효(誠孝)에 간단이 없어 아예 털끝만큼도 잘못된 것이 없었는데, 지금 갑자기 뜻밖의 비상(非常)한 분부가 있었으므로 여러 신하들의 마음이 놀라고 의혹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동궁(東宮)께서 5년 동안 애태우며 시탕(侍湯)하던 끝에 그 황공하고 두려워하면서 잠시도 편할 겨를이 없는 마음이 더욱 마땅히 어떠하였겠습니까? 신은 이때가 안위(安危)의 기미가 갈라지는 시점이어서 극력 간쟁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겨 창황히 길에 올라 한마디 말씀을 진달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경기(京畿) 지역에 도착하여 비로소 개석(開釋)하는 성교(聖敎)를 내려 본지(本旨)를 명백히 보였는데, 부자(父子)사이의 천륜(天倫)의 정이 열 줄 성교(聖敎)에 온화하게 넘쳐 흘렀고 춘궁(春宮)의 상소(上疏)에 대한 비답에는 부탁하는 뜻과 훈계하는 말이 너무도 옛 성인(聖人)이 전수(傳授)하는 심법(心法)을 체득한 것을 보고서는, 신은 걱정스러웠던 마음이 기쁜 마음이 되어 저도 모르게 감격의 눈물이 옷깃에 가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신은 쟁론(爭論)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마는, 구구한 신의 바람은 다만 성상(聖上)께서 기왕의 잘못을 깊이 징계하시어 조호(調護)하는 방도를 더욱 극진히 함으로써 양궁(兩宮) 사이에 그지없이 화락한 기운이 넘쳐 아무도 이간할 수 없게 되는 그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동방(東方)의 끝없는 복록(福祿)이 여기에서 터전을 잡게 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영부사(領府事) 윤지완(尹趾完)은 너무 늙어 죽음에 임박한 사람으로서 병을 무릅쓰고 서울에 올라와 충언(忠言)을 진달하였는데, 이미 미안한 비답(批答)을 내렸으며 계속하여 절책(切責)하는 전지(傳旨)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시상(時相)325)  을 위안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어찌 노성(老成)한 신하를 업신여기지 말라는 의리에 불만(不滿)이 있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누누이 진계(陳戒)한 것은 실로 나라 일을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원임 대신(原任大臣)의 상소 내용은 너무도 사리에 벗어난 것이었으니, 분명히 말하여 드러내어 배척하는 것을 어떻게 그만둘 수 있겠는가? 경(卿)의 소장에서 한 말을 나는 실로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여(李畬)가 현도(縣道)를 통하여 상소(上疏)했는데, 대략 말하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춘궁(春宮)께서는 아름다운 자질을 천성에 타고나서 저위(儲位)에 있은 지 30년 동안에 착한 소문이 서울과 지방에 드러났으므로 온 나라의 신서(臣庶)들이 모두 세자를 위하여 죽기를 원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성상(聖上)께서 부모로서 자애하는 마음에 있어 돌보아 사랑하고 의지하고 믿는 것이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그런데 대계(大計)를 결정하고 경명(景命)326)  을 신칙하시는 즈음에 내리신 성교(聖敎)가 여러 신하들의 마음에 크게 어긋났습니다. 이는 바라는 것이 중하기 때문에 면려(免勵)하는 것이 깊고 책임지운 것이 크기 때문에 경계하는 것이 절실하여 춘궁(春宮)으로 하여금 경척(警惕)하는 바가 있도록 하고 휴척(休戚)의 기미(幾微)에 대해 더한층 부연 강조하다가 보니 스스로 사어(辭語)가 지나치게 되는 것을 깨닫지 못하여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국가의 위망(危亡)이 결정된 것입니다. 신은 스스로 한번 죽을 각오를 하고 대궐에 달려가 아뢰려 하였으나 반걸음도 움직일 수가 없기 때문에 다만 땅에 엎드려 슬피 울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계속하여 또 삼가 듣건대 특별히 성지(聖旨)를 내려 천충(天衷)327)  을 열어보임으로써 여러 신하들의 의혹을 풀어주었다고 하니, 과연 여러 신하들의 지나친 염려가 천지(天地) 같은 큰 도량을 모른 데에서 나온 것이었음을 알겠습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군주의 사령(辭令)의 착오는 관계되는 것이 지극히 중대한 것입니다. 옛날 순제(舜帝)가 우왕(禹王)에게 천하를 전수(傳授)하면서도 ‘오직 입은 우호(友好)를 만들 수도 있지만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다.’ 하였는데, 더구나 후세에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성상(聖上)께서 비록 다른 뜻이 없었음을 스스로 믿고 계시지만 사어(辭語)를 잘못하신 실수가 큰 편입니다. 사방의 지극히 어리석은 백성들은 의혹되기는 쉽지만 깨닫기는 어려운 것이므로 혹시 조금이라도 틈이 있게 되면 모두가 망령되어 임금의 마음을 헤아려 문득 의심하여 동요되는 일이 있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국가가 받는 손실이 어찌 조그마한 걱정이라고 하겠습니까? 지금 성상(聖上)께서는 다만 말로 유시(諭示)하실 뿐만이 아니라 반드시 마음속으로 반성하시어 연석(筵席)에서의 분부를 조금이라도 마음에 머물러두지 않음으로써 천성(天性)의 사랑을 돈독히 하소서. 무릇 가르쳐야 되고 면려해야 될 일이 있으면 조용히 교도(敎導)하여 성인(聖人)이 은혜를 손상시켜서는 안된다고 한 경계에 실수가 없게 하셔서 후손(後孫)에게 잘 되도록 하는 좋은 모책(謀策)을 남겨 주신다면, 방명(邦命)328)  이 저절로 영원히 미덥게 되고 인심(人心)은 저절로 기뻐하여 복종될 수 있을 것입니다. 천신(賤臣)이 크게 축하(祝賀)하는 정성은 다만 여기에 있을 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나라 일을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하여 면려(勉勵)하고 경계하는 것이 참으로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으니, 내가 매우 감탄하고 있다.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대사간(大司諫) 권변(權忭)도 시골에 있으면서 상소(上疏)하기를,
"청컨대 조속히 윤음(綸音)을 내리시어 뉘우친다는 뜻을 보이소서. 그리고 세자(世子)로 하여금 아침저녁으로 곁에서 모시게 하여 시종 청정(聽政)하게 하고 재결(裁決)할 즈음에는 일에 따라 교도(敎導)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비망기(備忘記)를 가까스로 내렸는데도 소장(疏章)에서 조속히 윤음(綸音)을 내리라고 청한 것은 반드시 미처 듣고 알지 못해서 그런 것일 것이다."
하였다.

 

전(前) 평안 감사(平安監司) 조태로(趙泰老)가 장계(狀啓)를 올리기를,
"당아 산성(螳蛾山城)은 형세가 대단히 험준하고 또 벽동(碧潼)·창성(昌城)·삭주(朔州) 등 세 고을의 교차점에 위치하고 있어 강변(江邊)을 통하여 입구(入寇)하는 적(賊)을 막을 수가 있습니다. 청컨대 이제 수축(修築)하여 군량과 무기를 저축하고 한 사람의 별장(別將)을 차임(差任)하여 지키게 하여 주소서."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비국(備局)에서 복주(覆奏)하니, 윤허하였다.

 

8월 5일 병술

문묘(文廟)의 배위(配位)와 동서무(東西廡)의 종향(從享)에 오서(誤書)된 곳을 다시 고쳐 썼다. 처음 문묘(文廟)에 종향(從享)된 위판(位版)의 작호(爵號)와 명자(名字) 가운데 오자(誤字)가 있는 것이 모두 16위(位)였다. 현종조(顯宗朝)에 이미 정탈(定奪)329)  이 있었으므로 당연히 이정(釐正)했어야 하는데 구습(舊習)에 따라 실행하지 못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예조 판서(禮曹判書) 민진후(閔鎭厚)가 임금에게 건백(建白)하기를,
"일이 중대한 데에 관계되니 다시 대신(大臣)들과 의논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는데,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유(李濡)·김우항(金宇杭) 등이 모두 의논하기를,
"선조(先朝)에서 정탈(定奪)한 일을 한결같이 미루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이제 예관(禮官)의 품정(稟定)에 따라 제때에 고치는 것이 진실로 사의(事宜)에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석채례(釋菜禮)가 명일(明日)이기 때문에 드디어 이날 먼저 고쳐 쓰는 일을 거행하였다.

 

지평(持平) 김태수(金台壽)가 상서(上書)하기를,
"청컨대 성헌(成憲)을 우러러 준수하여 나태하지 말고 폐기(廢棄)하지 마소서. 오로지 거경(居敬) 공부에 정신을 기울여 마음을 다스리는 근본으로 삼고 학문을 힘쓰는 방도에 유의(留意)하여 치지(致知)의 요령(要領)으로 삼으소서."
하니, 세자(世子)가 옳게 여겨 받아들였다.

 

약방(藥房)에서 들어와 진찰하였다. 임금이 구고혈(九顧穴)에 뜸을 떴다. 마치고 나서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엊그제 성례(盛禮)를 잘 넘겼는데 덕용(德容)을 우러러 바라보니 하정(下情)의 기쁜 마음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수하(受賀)할 때에는 특별히 음악(音樂)을 정지하게 하고, 청정(聽政)한 뒤에는 서무(庶務)에 정체된 것이 없으니, 더없이 성대한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머리를 끄덕였다. 민진후(閔鎭厚)가 또 말하기를,
"왕세자(王世子)가 청정(聽政)한 뒤 문서(文書)에 근계(謹啓)·계문(啓聞)·교지(敎旨)·품지(稟旨)·상재(上裁)·전지(傳旨)·소(疏)·차(箚) 말단의 규식(規式) 및 판하(判下)·판부(判付) 등의 문자(文字)에 마땅히 개칭(改稱)하는 일이 있어야 될 것 같습니다. 이것도 또한 의정부(議政府)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해야 합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근계(謹啓)는 근달(謹達)로 고치고 계문(啓聞)은 신문(申聞)으로 고치고 교지(敎旨)·전지(傳旨)는 휘지(徽旨)로 고치고 품지(稟旨)는 품령(稟令)으로 고치고 상재(上裁)는 휘재(徽裁)로 고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민진후가 또 말하기를,
"선무사(宣武祠)330)  의 축문(祝文)에 피국(彼國)331)  의 연호(年號)를 쓰고 있다고 하는데 두 경리(經理)332)  는 모두 황조(皇朝)333)  에서 흠차(欽差)334)  한 분들이니, 대보단(大報壇)335)  의 예(例)에 따라 피국(彼國)의 연호를 쓰지 말게 하소서. 외방에 천장(天將)336)  의 묘우(廟宇)가 있는 곳에도 쓰지 말게 하는 것이 사의(事宜)에 맞을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이이명(李頤命)이 상소(上疏)했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臣)이 소홀하고 어리석은 것을 어찌 스스로 모르겠습니까? 외람되이 자리를 더럽힌 것이 이미 극도에 이르러 질시(嫉視)를 받은 것이 치우치게 많아서 위험한 함정 위에 발을 딛고 예(羿)337)  의 활 앞에 몸을 세워 놓은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십전구도(十顚九倒)338)  의 지경에 허덕였습니다만, 이제까지 이르게 된 것은 특별히 망극한 은혜를 입은 덕분이어서 차마 곧 결별(訣別)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과연 발을 잘못 디뎌 이러한 구덩이로 떨어지고 말았으니 이는 처신을 슬기롭게 하지 못한 탓인 것으로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그렇지만 신이 나라를 위해 한번 죽기로 스스로 맹세했는데 뜻밖에 악명(惡名)을 입고 세화(世禍)를 잘못 만났으니, 실로 그런 의리도 없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정성을 다했는데도 의심을 받았으니 어찌 더욱 억울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난번 신이 전후 입대(入對)하여 지성껏 반복하여 아뢰고 충심(忠心)을 다 아뢴 것은 스스로 생각해도 상경(常經)에 위배되지 않았다고 여깁니다. 신명(神明)과 하늘은 능히 말하지 못하니 오히려 속일 수가 있겠습니다만, 성명(聖明)께서 이미 굽어 통촉하고 계시는데 속일 수가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일월(日月)같은 성명(聖明)을 우러러 믿고 스스로 의심하지 않은 채 오직 대사(大事)가 이루어지기만을 바라 한결같은 마음으로 성사되기를 도왔던 것입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옛날의 대신들은 이런 경우에 처하여 의리상 어떻게 했겠습니까? 독대(獨對)하라는 명에 이르러서는 신이 유독 불행하게도 그 일을 당하였습니다. 만일 신이 의연(毅然)한 자세로 명을 받들지 않고 합문(閤門) 밖에서 굳이 사양하였더라면 처사(處事)를 잘했다고 할 수 있었겠습니다. 그러나 창황(蒼黃) 중 전도(顚倒)되어 미처 자신을 위한 계책을 세우지 못하고 이러한 시끄러움을 야기시켜 위로 성덕(聖德)에 누(累)를 끼쳤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부끄럽고 황송하기 그지없습니다. 효종(孝宗) 때 일찍이 이런 거조가 있었는데 그때에도 이미 잘못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더구나 지금 세상에야 말할 것이 뭐 있겠으며, 더구나 신 자신이 당하였는데야 말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다만 그때는 사인(私人)이니 사신(私臣)이니 하는 말로 상하(上下)를 의심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신하된 사람으로서 이런 제목(題目)을 얻으면 사형(死刑)을 받지 않을 경우에는 마땅히 먼 변방으로 축출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성명(聖明)께서 비록 그것이 억울하다는 것을 살피시어 차마 사지(死地)에 두지 않으시더라도, 어떻게 다시 은례(恩禮)를 내려 그런 제목을 씻어주시고 이내 백료(百僚)의 위에 그대로 둠으로써 사인(私人)이라는 의심을 실증하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전후 개석(開釋)한 것이 여간 간절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사양하는 것이 더욱 굳고 조정에 나올 기약은 더욱 아득하니, 놀랍고도 부끄러운 마음을 비할 길이 없다. 아! 독대(獨對)는 옛날에도 있었는데, 사인(私人)이니 사신(私身)이니 하는 악명(惡名)을 지금처럼 억지로 가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이는 모두가 세도(世道)가 날로 더욱 위험스러워져가는 데서 오는 것으로 통분스러움을 견딜 수 있겠는가? 더구나 독대(獨對)할 때 경(卿)이 정성을 다하여 광구(匡救)한 것은 신명(神明)에게 질정(質正)할 수가 있으니, 대신(大臣)339)  의 말에 대해 경이 어찌 원통함이 없을 수 있겠는가? 오직 마땅히 반복해서 돈면(敦勉)하여 떠나려는 마음을 되돌릴 것을 기대하고 있으니, 윤허할 이치는 절대로 없을 것이다. 모름지기 이렇게 지극한 뜻을 본받아 즉일(即日)로 도성(都城)에 들어오도록 하라."
하였다.

 

8월 6일 정해

밤에 유성(流星)이 천창성(天倉星) 밑에서 나와 동방(東方)의 하늘 끝으로 사라졌다.

 

8월 7일 무자

약방(藥房)에서 들어와 진찰하였다. 임금이 구고혈(九顧穴)에 뜸을 떴다.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평안도 어사(平安道御史) 김운택(金雲澤)의 서계(書啓)에 ‘강변(江邊) 일곱 고을의 수령(守令)은 문관(文官) 가운데서 가려서 보내기를 청합니다’ 하였는데, 이번 전최(殿最)340)  에 이산(理山)이 하등(下等)에 있으니 문관(文官)으로써 차송(差送)하는 것이 적당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이이명(李頤命)이 거듭 소장을 올려 사직(辭職)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지금 경(卿)이 당한 일이 너무도 억울하다는 것을 내가 환히 알고 있기 때문에 엊그제 후원(喉院)341)  에 내린 분부는 실로 참설(讒說)을 미워하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 군신(君臣) 사이는 서로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 귀한 것이다. 내가 이미 남김없이 개석(開釋)하였으니 경에게 대해 어찌 털끝만큼인들 혐의스런 단서가 있겠는가? 나라를 내 몸처럼 생각하는 경의 깊은 정성에 있어 반드시 나를 버리고 멀리 떠나지 않으리라고 여기고 있다. 그런데 사본(辭本)을 또 올려 한결같이 떠나려고만 하니, 이는 단지 정지(情志)가 미덥지 못한 데서 온 소치인 것으로 어찌 부끄러움을 견딜 수 있겠는가? 나의 뜻은 굳게 정하여졌으니 힘써 출사(出仕)하는 이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경은 이런 사실을 알고 즉시 나와서 정사를 논하도록 하라."
하였다.

 

부제학(副提學) 이의현(李宜顯) 등이 홍문록(弘文錄)342)  을 행하여 김운택(金雲澤)·조상건(趙尙健)·윤혜교(尹惠敎)·정운주(鄭雲柱)·조상경(趙尙絅)·김취로(金取魯)·이덕수(李德壽)·윤순(尹淳)·김상윤(金相尹)·유척기(兪拓基) 등 10인을 뽑았다. 다음날 부수찬(副修撰) 조관빈(趙觀彬)이 상서(上書)하기를,
"완록(完錄)의 법규는 관직(館職)에 있는 사람은 유고(有故)·무고(無故)를 막론하고 반드시 사사로이 서로 의논하여 모두 이의(異議)가 없은 다음에야 비로소 회좌(會坐)하는 것인데 지금은 유독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신의 체직(遞職)이 완의(完議)하는 날에 있었는데도 취사(取捨)의 정조(精粗)와 다과(多寡)에 대해 끝내 의논하지 않은 채 서둘러 변통하여 일방적으로 완료시키기를 마치 놓치기 어려운 기회와 숨겨야 될 단서가 그 사이에 들어 있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비록 어떠한 협잡(挾雜)의 뜻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관규(館規)를 휴손(虧損)시키고 녹체(錄體)343)  를 전도시킨 것이 다시 여지(餘地)가 없게 되었습니다."
하니, 세자(世子)가 답하기를,
"이번의 관록(館錄)은 원래 협잡의 뜻이 있지 않았는데 공공연히 시끄러움을 야기시키는 것은 나로서는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응교(應敎) 어유귀(魚有龜)·부응교(副應敎) 윤봉조(尹鳳朝)가 연명(聯名)으로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요신(僚臣)이 외방에서 들어온 뒤 여러 번 서신을 보내어 출사(出仕)하여 관록(館錄)에 참여하도록 권면하였으나 그때마다 정세(情勢)를 가지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조참(朝參)하는 날 출사하여 숙배(肅拜)할 적에 이르러 춘방(春坊)에서 서로 만났는데 그때에도 관록(館錄)하여 참여하라고 권면하였으나 혐의가 있어 참섭(參涉)하기가 곤란하다고 답하였습니다. 한번 회좌(會坐)하라는 명령이 내린 뒤에 또 소패(召牌)를 받들고 와서 회좌할 것을 권면하였지만 끝내 소패를 어기고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신 등이 동료(同僚)를 대우한 것이 지극했는데 업신여겼다는 것은 과연 무슨 일입니까? 취사(取捨)의 다과(多寡)에 대해 진실로 주장(主張)할 의견이 있으면 처음에 무엇 때문에 주춤거리면서 나아오지 않다가 이에 일이 지나간 뒤에 와서야 갑자기 노여움을 발하여 한갓 사람을 모욕하는 것입니까?"
하니, 세자(世子)가 답하기를,
"처음에는 인혐(引嫌)하다가 끝에 가서 주장하려고 하여 이에 조리에 맞지 않는 말로써 도리어 비난하고 지척(指斥)하니, 매우 미안스러운 일이다. 어찌 혐의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그 뒤 부제학(副提學) 이의현(李宜顯)·교리(校理) 홍계적(洪啓迪)도 조관빈(趙觀彬)에게 지척을 받았다는 것으로 상서(上書)하여 스스로 변명하니, 세자가 모두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8월 8일 기축

남취명(南就明)을 승지(承旨)로, 김재로(金在魯)를 교리(校理)로, 조관빈(趙觀彬)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충청도(忠淸道)에 특별히 중신(重臣) 조태채(趙泰采)를 보내어 시취(試取)한 시권(試券) 가운데 합격자의 것 일곱 장을 봉진(封進)하니, 임금이 대제학(大提學) 송상기(宋相琦)에게 명하여 빈청(賓廳)에 나와 등제(等第)를 정하게 한 다음 출방(出榜)하여 이유춘(李囿春) 등 7인에게 급제(及第)를 내렸다. 출신(出身) 이유춘의 아버지 이성채(李星彩)도 또한 방중(榜中)에 참여되었는데, 승정원(承政院)에서 부자(父子)가 동방(同榜)이 된 것은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써 계품(啓稟)하니, 임금이 특명으로 다같이 창명(唱名)하게 하였다. 대신(大臣)들이 아들을 방두(榜頭)로 삼고 아버지를 방하(榜下)로 하는 것은 윤기(倫紀)를 손상시키는 것이 된다하여 쟁론하였으나 되지 않았다. 임주국(林柱國)·박순우(朴淳愚)·이해(李瀣) 등 3인은 호적(戶籍)에 누락되었는데 속이고 응시(應試)하였다는 이유로써 방중(榜中)에서 빼내어 버렸다. 그리고는 예차(預差)한 시권(試券) 두 장을 병과(丙科)로 올려 합격시키도록 명하였다. 그 뒤 고관(考官) 조태채(趙泰采)가 상서(上書)하여 임주국(林柱國)은 대대로 도내(道內)에 거주하였다고 아뢰니, 임금이 복과(復科)시키라는 특명(特命)을 내렸다.

 

절부(節婦) 옥례(玉禮)에게 정려(旌閭)344)  하였다. 옥례는 민가(民家)의 여자로 자색(姿色)이 있었는데 호민(豪民) 장업동(張業同)이 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강제로 덮치려고 칼을 위협하였으나 옥례는 힘을 다해 항거하면서 따르지 않았다. 죽을 지경에 이르러서는 말이 더욱 사나웠는데 어린 딸도 같이 죽었다. 뒤에 일이 발각되어 장업동이 자복(自服)했으므로 사형(死刑)에 처하였다. 임금이 옥례는 먼 지방 상한(常漢)의 딸로서 죽기를 맹서하고 절개를 지켰다는 것으로 예조(禮曹)에서 명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예조(禮曹)에 정려(旌閭)하기를 청하니, 세자(世子)가 그대로 따랐다.

 

대사헌(大司憲) 이희조(李喜朝)가 상서(上書)하여 학문에 힘쓸 것을 진계(陳戒)하니, 세자가 우악한 비답(批答)을 내려 가납(嘉納)하였다. 본서(本書)는 유중(留中)345)  하였다.

 

8월 9일 경인

약방(藥房)에서 들어와 진찰하였다. 임금이 등쪽의 신유(腎腧) 좌우혈(左右穴)에 뜸을 떴다.

 

여러 도(道)에서 물에 빠져 죽고 불에 타서 죽고 범에게 물려서 죽은 자들을 보고하여 온 것이 전후 5백 90명이었는데, 세자(世子)가 본도(本道)로 하여금 특별히 휼전(恤典)을 내리게 하였다.

 

경상 좌우도(慶尙左右道) 감시(監試)346)  의 초시(初試)가 파장(罷場)347)  이 되었다. 영남(嶺南) 우도(右道)의 유생(儒生)들이 지난번 연석(筵席)에서의 분부가 비상(非常)했었다는 말을 듣고서 태연히 과거(科擧)에 응시할 수 없다고 여겨 소장(疏章)을 올려 대궐(大闕)에 아뢰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개장(開場)하기 수일(數日) 전에 수백 명이 무리를 지어 곧바로 녹명청(錄名廳)으로 들어가서 도록(都錄)을 탈취하였고, 설장(設場)한 다음날에는 관사(館舍)의 정청(正廳)에 소장(疏章)을 올렸다. 그 가운데 시장(試場)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이 있으면 혹은 능장(稜杖)을 가지거나, 혹은 돌을 마구 던지며 가로막아서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또 성문(城門)의 네 모퉁이에 모여 있으면서 성문 밖의 과유(科儒)들로 하여금 성내(城內)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였다. 좌도(左道)의 유생(儒生)들도 개장(開場)한 다음날 상소(上疏)하려고 하여 시소(試所)에다 마음에 품은 바를 써서 바치고는 시장(試場)으로 나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양도(兩道)의 고관(考官)이 임금이 내린 비망기(備忘記)를 게시(揭示)하고 처분이 올바르게 되었다고 효유(曉諭)하면서 분란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고 하였으나 끝내 듣지 않았으므로, 드디어 파장(罷場)하였다.

 

8월 10일 신묘

수찬(修撰) 김유경(金有慶)이 현도(縣道)를 통하여 상소(上疏)하여 독대(獨對)의 잘못에 대해 논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글을 보내는 즈음에 대신을 침핍(侵逼)한 것은 전연 이해할 수 없다."
하였다.

 

수찬(修撰) 홍정필(洪廷弼)이 상소(上疏)했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이 듣건대, 근일 승정원(承政院)에 내린 비망기(備忘記)에 ‘근일의 상소(上疏)에 간혹 말을 가려서 하지 않고 끌어대 비유하는 것이 사리에 어긋나는가 하면 바야흐로 닥쳐올 걱정을 기필코 이 일에다 핑계하여 조정을 괴란(壞亂)시키려 하고 있으니, 이 뒤로는 이런 등류의 상소는 봉입(捧入)하지 말라.’고 하셨고, 그 뒤 승정원(承政院)에서 진계(陳啓)하기를 ‘춘궁(春宮)에 관계된 일은 중요한 바가 있습니다.’고 하는 등류의 말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는 사체(事體)에 당연한 일일 뿐만이 아니라 진실로 깊이 근심하고 장래를 걱정하는 데서 나온 것이었는데, 전하(殿下)께서 끝내 반한(反汗)348)  하지 않았다고 하였으니, 신은 삼가 전하를 위하여 애석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대저 군주가 청납(聽納)하는 도리는 다만 그 말이 어떠한가만을 살펴보고서 호오(好惡)를 분명히 보여야 하는 것이요, 진실로 먼저 자신의 자존심만을 주장하는 기색을 보임으로써 천리 밖에서 오는 사람을 막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 일은 관계되는 바가 매우 중대한데도 관섭(關涉)되는 말이 있으면 번번이 막게 하고 있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이며, 이것이 무슨 사체(事體)입니까?"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대사(大事)가 이미 결정되었고 개석(開釋)하는 전지(傳旨)를 또 내렸으니, 지금은 말할 만한 단서가 없다. 결단코 봉입(捧入)을 허락할 수 없다."
하였다.

 

8월 11일 임진

이정익(李禎翊)을 승지(承旨)로, 윤석래(尹錫來)를 장령(掌令)으로, 조명봉(趙鳴鳳)을 사간(司諫)으로, 이규성(李奎成)을 경상우도 병마 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로 삼았다.

 

절부(節婦) 예진(禮眞)과 효자(孝子) 성귀봉(成貴奉) 등에게 복호(復戶)349)  하라고 명하였다. 경기(京畿) 암행 어사(暗行御史)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양천(陽川)의 사비(私婢) 예진(禮眞)은 절개를 잘 지켜 효도를 극진히 하였고, 인천(仁川) 백성 성귀봉(成貴奉)은 효도로 어버이를 섬겼으므로 두 사람 모두 뛰어난 행실이 있으니, 포장(褒奬)하여 칭찬하는 은전(恩典)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복주(覆奏)하여 복호(復戶)할 것을 청하니, 세자(世子)가 그대로 허락하였다.

 

약방(藥房)에서 들어와 진찰하였다. 임금의 등쪽에 있는 신유(腎腧)의 좌우혈(左右穴)에 뜸을 떴다. 마치고 나서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의 군사들에 대해 지난해 흉년이 들었던 탓으로 번상(番上)을 정지했었습니다. 금년에는 농사가 조금 나은 편이니 아주 중요한 숙위(宿衛)의 번상(番上)을 계속 정지할 수는 없습니다. 전례에 따라 징번(徵番)하는 것이 적당할 것입니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병 때문에 입시(入侍)하지 못하고 신에게 말을 전하여 보내면서 신에게 대신 주달하여 달라고 요구했기에 아룁니다."
하니, 임금이 10월부터 징번(徵番)하라고 명하였다.

 

8월 12일 계사

약방(藥房)에서 들어와 진찰하였다. 임금의 등쪽에 있는 신유(腎腧)의 좌우혈(左右穴)에 뜸을 떴다. 마치고 나서 제조(提調) 민진후(閔眞厚)가 말하기를,
"여러 도(道)의 수군(水軍)·육군(陸軍)의 조련(操練)을 모두 정지하고 있습니다. 전일에 조련을 정지했을 적에 수어청(守禦廳)·총융청(摠戎廳)의 경우는 으레 종사관(從事官)이나 혹은 당상(堂上)인 장관(將官)을 보내어 소속된 각 고을을 순행하면서 점검(點檢)하게 하였고, 외방(外方)의 경우는 영장(營將)·우후(虞候)·수성장(守城將)이 순행하게 하였습니다. 이런 등류의 일은 전례에 따라 거행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신에게 말을 전하면서 대신 주달하여 달라고 했기에 아룁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순행하는 등의 일까지도 정지하는 것은 너무 소홀한 조처이니 거행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였다.

 

8월 14일 을미

약방(藥房)에서 들어와 진찰하였다. 임금의 수부(手部)에 있는 상양(商陽)의 좌우혈(左右穴)과 족부(足部)에 있는 대돈(大敦)의 좌우혈(左右穴)과 용천(湧泉)의 좌우혈(左右穴)에 침을 맞았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윤지완(尹趾完)이 상소(上疏)했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은 임금을 섬김이 무상(無狀)한 탓으로 90세가 되어 거의 죽어가는 나이에 다른 사람을 참소했다는 것으로 군부(君父)의 의심을 받았으니, 장차 무슨 면목(面目)으로 다시 인간 세상에 설 수가 있겠습니까? 신이 진달한 것은 종사(宗社)의 앞날을 위한 지극한 계책인데도 전하(殿下)께서는 깊이 생각하여야 될 일을 소홀히 여겨 조금도 성납(省納)하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신을 의심하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삼가 전하의 이런 마음이 끝내는 나라를 망치게 하는 근본이 될까 두렵습니다. 신이 일전에 정목(政目)350)  을 얻어 보았는데 거기에 의하면 이정익(李禎翊)을 승지(承旨)로 발탁 임명하였습니다. 신은 이에 있어서 더욱 놀라고 의혹되어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정익(李禎翊)이 올린 과거의 소장(疏章) 한 통을 가지고 임금을 무시하려는 마음을 지녔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만, 온 세상의 지목(指目)을 받아온 것은 오래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청환직(淸䆠職)을 허통시켰으니 정사(政事)의 잘못은 큽니다. 더구나 이렇게 승진 발탁한 것은 도대체 무슨 명분에서입니까? 조정이 위의(危疑)스럽고 민심이 동요될 즈음을 당하여 전하(殿下)께서 비록 은미한 조짐을 막음에 있어 극진하게 하지 않은 것이 없더라도 오히려 근심할 일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온 세상이 지목하고 있는 사람을 마침내 승진 발탁하기에 이르렀으니, 신은 삼가 통분스럽게 여깁니다. 잇따라 상신(相臣)들의 상소(上疏)를 보건대, 그 내용에 하늘에서 타고 나신 자질을 지니셨다고 하였고, 성상(聖上)께서도 정성을 다하여 광구(匡球)하라고 분부하였습니다. 상신(相臣)들이 참으로 이런 뜻을 확충시켜 마음을 다해 보호함으로써 끝내 이필(李泌)이 부지시켜 편안하게 한 것과 같은 공을 이루게 된다면 신은 ‘충신(忠臣)’이라는 두 글자를 증여(贈與)하는 것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어찌 다시 사신(私臣)이라는 지목을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시종 조호(調護)할 책임이 오로지 상신(相臣)에게 달려 있는 것이니, 오늘날의 소망이 또한 절실합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엊그제 비지(批旨) 가운데 참설(讒說)을 미워하기 위해서라는 분부는 실제로 한 말이었다. 감히 협잡(挾雜)한 뜻이 없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상소(上疏)의 내용에서 진실로 이런 뜻을 확충시키라는 데서부터 ‘어찌 다시 사신(私臣)이라는 지목을 하겠습니까.’라고 한 데까지의 39글자는 모두가 좌상(左相)351)  을 지적한 것으로 어의(語意)가 더욱 위험(危險)스러웠다. 아! 그날 대신(大臣)의 광구(匡救)는 신명(神明)에게 질정(質正)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러 대간(臺諫)의 상소(上疏)도 또한 나라 일을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광구(匡救)하는 정성이 유독 경(卿)에게는 없단 말인가? 이정익(李禎翊)을 승지(承旨)에 승진 발탁한 것은 원래 이상한 일이 아닌데 이것을 가지고 말하는 것은 매우 괴이하고 놀랍다. 아! 경이 머리가 허연 나이에 조정을 괴란(壞亂)시킬 마음을 품고 있으니, 내가 실로 통한스럽게 여기는 바이다."
하였다. 윤지완(尹趾完)이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8월 16일 정유

월식(月食)이 있었다.

 

김재로(金在魯)를 교리(校理)로, 황귀하(黃龜河)를 부교리(副校理)로, 김유경(金有慶)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경상도(慶尙道) 각 고을의 백성들 가운데 염병(染病)으로 앓는 사람이 9백 60여 명이고 사망(死亡)한 사람은 9백 15명이었는데, 도신(道臣)이 장문하였다.

 

약방(藥房)에서 들어와 진찰하였다. 제조(提調) 김창집(金昌集)이 신병(身病)으로 인하여 연일 귀가(歸家)하여 휴식(休息)하고 있다가 이날 비로소 다시 입직(入直)하였는데, 이어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소부(少府)의 좌우혈(左右穴)과 대도(大都)의 좌우혈(左右穴)과 협계(夾谿)의 좌우혈(左右穴)에 침을 맞았다. 이때 임금이 숭릉(崇陵)352)  의 기신(忌辰)이 다음날이었기 때문에 바야흐로 소식(素食)을 행하고 있었다.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성상(聖上)께서 춘추(春秋)가 이미 높으신데다가 질환(疾患)이 더욱 위중하신데 더구나 근래 잇따라 침을 맞았으니, 청컨대 단지 정일(正日)353)  에만 소식(素食)을 행하소서."
하고,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가 계속하여 여러번 청하니, 임금이 이에 힘써 따랐다. 김창집(金昌集)이 또 말하기를,
"양군문(兩軍門)354)  의 군병(軍兵)들을 이미 징번(徵番)했습니다만, 총융군(摠戎軍)은 양영(兩營)과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비록 상번(上番)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숙위(宿衛)에 방해가 있는 데에 이르지 않습니다. 기근(飢饉)과 여역(癘疫)에 시달린 나머지 실로 식량을 싸가지고 상번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으니, 마땅히 정번(停番)하게 해야 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금오(金吾)355)  에 죄수가 적체되어 있는데 판의금(判義禁) 송상기(宋相琦)가 말미를 받아 외방에 나가 있으니, 제반 언의(讞議)에 대한 일을 마땅히 차관(次官)으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렇게 하게 하였다.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경기(京畿)의 해방(海防)이 소홀하고 또 연혁(沿革)에 대한 의논이 있기 때문에 신이 지난해 이기하(李基夏)를 보내어 살피게 하도록 하는 내용으로 진달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마침 흉년을 만나 주전(厨傳)356)  의 폐해를 우려하여 우선 정지했었습니다. 지금 이기하가 비록 체직되었으나 해방(海防)을 주관하는 임무는 이미 한 시대의 무관이 종주(宗主)가 되었으니 마땅히 심찰(審察)하는 일을 시행해야 됩니다. 기전(畿甸)357)  의 농사가 또한 조금 나아졌으니 수일 안에 보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병조(兵曹)에서 청하기를,
"호련대(扈輦隊)의 보인(保人) 2천 5백 37명 가운데 다시 1천 2백 명을 액수(額數)로 정하며 여정(餘丁)을 덜어내고 금보(禁保) 7백 49명을 더하여 1만 명의 수효를 채우소서, 그리고 보직(袱直) 1백 99명을 더하여 2천 명의 수효로 채우고 그 나머지 2백 89명은 우선 여정(餘丁)으로서 본조(本曹)에 소속시켜 번포(番布)를 거두어들임으로써 비용에 보태게 하소서. 금보(禁保)·보직(袱直)의 원액(元額) 가운데 잡탈(雜頉)이 생긴 자는 각기 그 고을로 하여금 궐원(闕員)에 따라 대정(代定)하게 한 다음 모두 세초(歲抄)358)   때에 궐액(闕額)을 조사하여 번포(番布)를 거두어들이지 못한 고을은 해유(解由)359)  의 구애(拘礙)가 있도록 정군(正軍)과 일체로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처음 갑오년360)   봄 사이에 군제(軍制)를 변통시킬 적에 묘당(廟堂)에서 금군(禁軍)의 1년 수용(需用)이 매우 많았는데 금보(禁保)·보직(褓直)은 단지 6천 9백여 명뿐이어서 접응(接應)을 할 수가 없었으므로 금보를 1만 명으로, 보직(袱直)을 2천 명으로 증가시켜 병조(兵曹)의 여정(餘丁)과 장인(匠人) 등 각 색목(色目)으로 충정(充定)시킬 것을 청하였지만 오히려 부족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병조에서 구획(區劃)하여 이런 정탈(定奪)이 있게 된 것이다.

 

8월 18일 기해

약방(藥房)에서 들어와 진찰하였다. 임금이 소부(少府)의 좌우혈(左右穴)과 대도(大都)의 좌우혈(左右穴)과 협계(夾谿)의 좌우혈(左右穴)에 침을 맞았다. 마치고 나서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감시(監試)의 회시(會試)가 멀지 않았는데 승보 학제(陞補學製)361)  의 과제(課題)를 보이지 않은 수효가 아직껏 많습니다. 대사성(大司成)과 사학(四學) 겸교수(兼敎授)의 궐원(闕員)을 대체시키는 것을 내일의 정사(政事)362)  에서 차출하고 이어 과제(課製)를 독촉하게 하는 것이 사의(事宜)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도제조(都提調)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신 등이 젊었을 때의 본 바에 의하면 대사성(大司成)이 유고(有故)하면 지관사(知館事)·동지관사(同知館事)가 대신하여 과제(課製)를 행했기 때문에 절로 미루어지는 폐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대사성이 전적으로 주관하기 때문에 매양 적체되고 있으니, 이 후로는 대사성이 유고하면 지관사(知館事)가 외방에 나가 있다해도 동지관사(同知館事)에게 시켜 설행(設行)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미 전례가 있으면 진달한 바에 의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금년의 감시(監試)에 영남(嶺南)의 좌우도(左右道)가 모두 파장(罷場)이 되었다. 심지어 우도(右道)에서는 소란을 일으킨 유생(儒生)들이 문을 막고서 들어가려는 다른 유생들까지도 쫓아버렸다 하니, 이런 등류의 사습(士習)은 매우 놀랄 만한 일이다."
하니, 민진후가 말하기를,
"먼 지방의 사습(士習)은 이미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서울의 경우로 말하더라도 일전에 유생(儒生)들이 소거(疏擧)363)  를 핑계하여 궐내(闕內)에서 소란을 일으키기도 하고 옥문(獄門)을 두드려 부수기도 했습니다. 세도(世道)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대체로 영남(嶺南)은 먼 외방이라서 소문이 전하여지는 사이에 사실과 어긋나기가 쉽기 때문에 이런 일이 있기에 이르렀습니다만, 고관(考官)이 이미 비망기(備妄記)를 게시(揭示)한 뒤에도 끝내 시장(試場)에 나오지 않았으니, 매우 놀랄 만한 일입니다."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이미 효유(曉諭)하고 난 뒤에도 시종 난동을 일으켰으니 참으로 매우 통분스럽고 놀랍다."
하였다. 그뒤 경상 좌우도(慶尙左右道)의 유생(儒生)들이 도(道)를 나누어 소장(疏章)을 올려 연석(筵席)에서 있었던 미안한 분부에 대해 논하였다. 그 소장이 승정원(承政院)에 도착하였으므로 승정원에서 계품(啓稟)하니, 임금이 받아들이지 말라고 명하였다.

 

8월 19일 경자

좌의정(左議政) 이이명(李頤命)이 병을 핑계하고 네 차례 정고(呈告)하니, 세자(世子)가 답하기를,
"목마르게 기다린다는 전지(傳旨)를 세 번이나 내렸는데도 사양하는 글이 계속 이르고 있으니, 성의(誠意)가 미덥지 못한 것이 부끄러워 나도 모르게 놀라고 있다. 아! 지금이 어떠한 시기인가? 천재(天災)와 민우(民憂)에 대해 조금이나마 믿을 수 있는 형세가 없어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근심하고 두려워하면서 조처할 바를 알지 못하고 있으므로, 내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대신(大臣)에게 있을 뿐이다. 더구나 대신의 진퇴(進退)는 국가의 안위(安危)에 관계되는 것이니, 비록 건강에 조금 이상이 있더라도 신명(神明)이 도와주어 약을 쓰지 않는 기쁨이 있게 되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사람에게 말을 들은 것은 그것이 비상(非常)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참소를 미워한다는 성교(聖敎)가 엄정(嚴正)하고 개석(開釋)하는 비유(批諭)가 친절하였으니, 경(卿)에게는 털끝만큼도 곤란한 단서가 없다. 이런 때를 당하여 내가 경을 버릴 수가 없으니 경도 차마 나를 버리지 못할 것이다. 경은 대조(大朝)께서 돌보아 대우한 것이 융중(隆重)하였음을 본받아 조속히 사양하는 글을 중지하고 즉시 나와서 시사(視事)한다면 나의 바람에 부응하고 시국의 어려움을 구제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

 

어유룡(魚有龍)를 정언(正言)으로, 이관명(李觀命)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조도빈(趙道彬)을 도승지(都承旨)로 삼았다. 좌참찬(左參贊) 홍무적(洪茂績)에게 충정(忠貞)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고, 예조 판서(禮曹判書) 권극지(權克智)에게는 충숙(忠肅)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증(贈) 병조 판서(兵曹判書) 박영신(朴榮臣)에게는 충장(忠莊)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동부승지(同副承旨) 이정익(李禎翊)이 윤지완(尹趾完)의 상소(上疏) 내용으로 인하여 상서(上書)하여 스스로 변명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이 과거에 올렸던 한 통의 상소(上疏)는 《정원일기(政院日記)》에 기재되어 있으나, 지금도 그 소장을 안핵(按覈)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당시에 흉역(凶逆)인 두 수자(竪子)는 왕법(王法)에 있어 반드시 주참(誅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대신(大臣)이  【남구만(南九萬)과 유상운(柳尙運)이다.】  전후에 용대(容貸)한 것은 그 심사(心事)를 추적하여 보면 여러 사람들의 눈을 속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은혜를 팔고 복을 구하는 마음에서 외람되이 깊이 걱정하고 지나치게 우려한 것이라고 허여(許與)했으니, 그 누구를 속일 수 있겠습니까?’라고 운운(云云)했는데, 신이 그 소장에서 은(恩)과 복(福)이라는 두 글자에 대해 논한 것은 곧 두 대신(大臣)이 국면(局面)이 자주 바뀌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자신들의 화복(禍福)을 계교(計較)하여 뒷날 간흉(奸凶)들의 당여(黨與)에게 은혜를 팔아 복을 구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이것은 두 대신의 심적(心跡)을 사실대로 지척한 것에 불과한 것인데, 어찌 조금이라도 임금을 핍박한 말이 있습니까? 그런데도 김일경(金一鏡)이 도리어 문의(文意)를 번복시켜 말하기를, ‘은혜는 누구에게서 나오는 것이고 복은 어디에서 생기는 것인가? 이런 은혜를 어디에다 팔고 복을 어느 때에 구하려는 것인가?’ 하면서 은연 중 감히 논의할 수 없는 지경으로 귀착시켰습니다. 김일경의 이 말이 있은 이래로 명의(名義)에 죄를 얻은 무리들이 계속 신을 지척하였는데 흉잠(凶潛)364)  에 이르러 그 무패(誣悖)가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대신의 소장에서 멋대로 논단(論斷)하여 은연중 사람을 임금을 무시하는 마음을 품었느냐 품지 않았느냐 하는 사이에다 올려 놓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막수유(莫須有)365)  ’라는 세 글자가 끝내 사람을 죽이는 죄안(罪案)이 된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니, 세자(世子)가 답하기를,
"대신의 소장에서 임금을 무시하는 마음을 먹었다는 등의 말은 매우 위험스러운 것으로 마치 급서(急書)를 올려 곧바로 망측(罔測)한 지경으로 몰아넣는 것과 같은데, 이것이 성상(聖上)께서 통분하게 여긴 이유인 것이다. 그대는 실로 죄가 없으니 조속히 나와서 직무를 수행하라."
하였다.

 

지평(持平) 김태수(金台壽)가 상소(上疏)하기를,
"윤선거(尹宣擧) 부자(父子)는 이미 추삭(追削)366)  하는 중률(重律)을 받았으니 그의 아들이  【윤행교(尹行敎)을 말한다.】  된 사람은 의당 청선(淸選)에 구애되는 점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근일의 정안(政眼)에 매양 은대(銀臺)367)  의 망(望)에 주의(注擬)되고 있으니, 어찌 그 아비를 죄인(罪人)으로 대우하면서 그 아들을 청관(淸官)으로 대우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그대의 말이 옳다. 마땅히 전조(銓曹)에 신칙하게 하겠다."
하였다.

 

황해도(黃海道) 각 고을의 백성 가운데 염병(染病)으로 앓고 있는 사람이 바야흐로 2백 20여 명이고 사망(死亡)한 사람이 44명인데, 도신(道臣)이 장문(狀聞)하였다.

 

8월 20일 신축

좌의정(左議政) 이이명(李頤命)이 다시 상소(上疏)하여 사면(辭免)을 청하였는데, 이르기를,
"인정(人情)은 그다지 서로 차이(差異)가 나는 것이 아니므로 내가 차마 못하는 것이면 남도 차마 못하는 것입니다. 신이 처음 원임 대신(原任大臣)의 상소(上疏)를 보고 생각하기를, ‘갑자기 듣고 경황이 없어 말을 비록 가려서 하지 못하였겠지만, 추후 사실(事實)을 상세히 알게 되면 끝내는 반드시 깨우칠 것이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제와서 살펴보건대 신이 실로 그가 신을 의심한 것에 대해 잘못 헤아린 것이 너무 깊었습니다. 신이 구천(九天)을 가리키며 정당하다고 한 것과 성명(聖明)께서 신명(神明)에게 질정(質正)할 수 있다고 분부한 것을 본 뒤에는 바야흐로 신을 이해나는 한 가닥 길이 희미하게 열리는 것 같았습니다만, 그의 말이 그렇다고 하는 것인지 의심하는 것인지 막는 것인지 모호한 수단을 부리고 있어 포착할 수가 없었으니 아! 또한 너무 심합니다. 그리고 신이 사신(私臣)이 되거나 충신(忠臣)이 되거나 하는 것은 스스로 천부(天賦)와 공론(公論)이 있는 것인데, 어찌 대신(大臣)이 여탈(與奪)을 마음대로 하는 권한을 기다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전후에 돈면(敦勉)한 것이 근간(懃懇)한 정도뿐이 아니었는데도 잇따라 소장을 올려 급급히 청하면서 기필코 사면하려고 하니, 이것이 어찌 보상(輔相)에게 기대하던 것이겠는가? 스스로 성의가 천박한 것이 부끄러워 차라리 말하지 않고 싶을 뿐이다. 아! 영부사(領府事)368)  의 처음 소장의 내용도 이미 극도로 통분스러웠는데 두 번째의 소장을 보니 경(卿)을 의심하고 경을 탓하는 것이 갈수록 더욱 깊어져서 기필코 망측(罔測)한 지경에 몰아넣어 나의 조정(朝廷)을 괴란(壞亂)시키려 하고 있으니, 비록 일 만들기를 좋아하는 연소배(年少輩)일지라도 남을 무함하는 수단이 이것보다 더할 수는 없다. 그 참소(讒訴)를 미워하는 도리에 있어 결코 대신(大臣)이라고 해서 돌보아 아끼는 바가 있을 수는 없다. 그리고 일종의 괴귀(怪鬼)한 무리들이 소장을 진달한다고 핑계하면서 소란을 일으켜 파장(罷場)한 것은 실로 전에 없던 큰 변고로서 더욱 절통한 일이다. 어찌 입에 올릴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이조 참판(吏曹參判) 정호(鄭澔)가 시골에 있으면서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삼가 생각건대 우리 성상(聖上)께서 5년 동안 병고(病苦)에 시달려 온 끝에 하루에도 만기(萬幾)369)  를 보살피느라 조섭(調攝)에 방해가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야 멀리는 당우(唐虞)370)  의 법전을 상고하고 가까이는 조종(祖宗)의 법규를 준행하여 의심없이 단행하였고 걱정없이 부탁하였습니다. 따라서 저하(邸下)께서는 간고(幹蠱)371)  의 효도가 이보다 더한 것이 없고 짊어지신 책임도 또한 중한 것입니다. 성상(聖上)께서 비유(批諭)를 내리면서 고계(告戒)한 것은 한결같이 정일(精一)372)  로써 서로 전하던 심법(心法)에서 나온 것이고, 여러 신하들이 장독(章牘)을 올려 권면한 것도 모두가 옛날의 모훈(謨訓) 가운데 지언(至言)이었습니다. 진실로 그 뜻을 우러러 생각하여 봉승(奉承)하는 것에 굽어살펴 받아들이신다면 성상께서 책면(責勉)하신 뜻을 위로하고 신민들이 상망(想望)하는 정에 부응(副應)될 것입니다. 그리고 신이 듣건대 《춘추(春秋)》의 대의(大義)는 만고에 멸절(滅絶)되지 않는 도리(道理)라 했습니다. 우리 나라의 황명(皇明)373)  에 대해서는 실로 부모(父母)와 같은 은혜가 있는데, 병자년374)  ·정축년375)  의 일은 대의(大義)를 잊고 원수를 섬긴 것이 됨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다행히도 인조 대왕(仁祖大王)께서 천지(天地)가 뒤집어지는 때를 당하여서도 만절 필동(萬折必東)376)  의 뜻을 면려하여 매양 성절(聖節)을 당하면 반드시 공북(拱北)377)  의 정성을 다하였으니, 그 지의(旨意)가 분명하여 백세(百世)에 질정(質正)할 수가 있습니다. 효종 대왕(孝宗大王)에 이르러서는 한쪽 모퉁이의 조그마한 나라로서 홀로 천하의 대의(大義)를 떠맡았는데, 이에 덕을 같이하는 신하가 있어 비밀히 성지(聖志)378)  를 도와 복수 설치(復讎雪恥)한다는 것을 십중팔구는 기대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송(宋)나라를 돕지 않아서379)   대왕께서 승하(昇遐)하셨으므로 지사(志士)와 인인(仁人)들의 통분이 여기에서 더욱 깊어졌습니다. 그 뒤부터 성자(聖子)와 신손(神孫)이 계승(繼承)하여 오면서 효종(孝宗)의 일을 계술(繼述)의 대본(大本)으로 삼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 성상(聖上)께서는 더욱 비풍(匪風)380)  의 생각을 천명(闡明)하시어 망룡의(蟒龍衣)의 제서(題書)에 그 뜻이 애연(藹然)히 넘쳐 흘렀고 제사지내어 보답하는 전례(典禮)가 황단(皇壇)381)  을 축조하는 데에서 극치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이런 대의(大義)를 표장(表章)할 수 있는 것은 거행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니, 삼가 저하(邸下)께서도 반드시 아침저녁 문안하시면서 익히 느껴왔을 것입니다. 바야흐로 국세(國勢)가 미약함이 인조(仁祖)·효종(孝宗)에 견주어 볼 때 전혀 짝할 수 없는 상황이니, 참으로 급작스럽게 무슨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 지사(志事)까지 잊어버리는 지경에 던져버린다면 어찌 이적(夷狄)이나 금수(禽獸)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저하께서는 여기에 더욱 유의하시어 세도(世道)를 부지하고 인기(人紀)를 확립하는 기반을 다지소서."
하니, 세자(世子)가 답하기를,
"상서(上書)의 내용이 격절(激切)하여 사람을 감동시키니 내가 민첩하지는 못하지만 크게 반성(反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8월 21일 임인

밤 2경(更)에 화성(火星)이 남두(南斗)의 제3성(第三星)을 범하였다. 5경(更)에는 달무리가 필성(畢星)을 둘렀다.

 

약방(藥房)에서 들어와 진찰하였다. 임금이 수부(手部)에 있는 후계(後谿) 좌우혈(左右穴)과 족부(足部)에 있는 임읍(臨泣) 좌우혈(左右穴), 경골(京骨) 좌우혈(左右血)에 침을 맞았다. 마치고 나서 도제조(都提調)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근일 옥당(玉堂)에서 여러 신하들의 신록(新錄)이 있은 뒤 조관빈(趙觀彬)이 시끄러움을 야기시킨 것으로 인하여 인혐(引嫌)하면서 불안스런 단서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명패(命牌)를 어기고 금추(禁推)382)  하는 일에 아직껏 행공(行公)하지 않고 있으니, 매우 미안스럽습니다. 신이 일찍이 옥당(玉堂)의 동벽(東壁)383)  에 재직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에도 신록(新錄)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신은 다른 직책에서 갑자기 응교(應敎)로 옮겨 왔는데 명패(命牌)를 받고 대궐에 들어가니 장관(長官)과 여러 관원들이 이미 나와 회좌(會座)하여 바야흐로 신록(新錄)에 적합한 사람을 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은 미리 들은 것도 없이 갑자기 당하여 상의(相議)가 완료되었습니다. 지금 조관빈(趙觀彬)은 미리 통지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시끄러움을 야기시키기까지 하였습니다만, 당사자(當事者)들은 별로 잘못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공공연히 지척(指斥)을 받았으니 정세(情勢)가 편안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누차 명패(命牌)로 불렀는데도 계속 거부하는 것은 매우 미안스런 처사인 것입니다. 마땅히 신칙(申飭)하는 거조가 있어야 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조관빈(趙觀彬)이 처음에 이미 인혐(引嫌)했는데도, 끝에 가서 주장(主張)하려고 하여 무단히 시끄러움을 야기시켰으니 매우 옳지 못한 처사이다. 그리고 옥당(玉堂)의 여러 신하들이 한결같이 거부하는 것도 너무 지나친 데에 관계되는 일이니, 조속히 행공(行公)하게 하도록 하라."
하였다.

 

8월 23일 갑진

김상윤(金相尹)을 지평(持平)으로, 조관빈(趙觀彬)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유명홍(兪命弘)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약방(藥房)에서 들어와 진찰하였다. 임금이 수부(手部)에 있는 소택(少澤) 좌우혈(左右穴)과 족부(足部)에 있는 지음(至陰) 좌우혈(左右穴)에 침을 맞았다. 마치고 나서 도제조(都提調)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평안도(平安道) 별과(別科)의 시관(試官) 민진원(閔鎭遠)이 무기(武技)의 입격자(入格者)가 1백 인에도 차지 않는다는 것을 이유로 장계(狀啓)를 올려 변통(變通)하기를 청하면서 ‘유엽전(柳葉箭)의 시험에 변(邊)을 두 번 맞힌 사람들과 육냥전(六兩箭) 시험에서 입격(入格)된 사람들의 분수(分數)를 계산하여 허부(許付)한다면 1백 50인의 정액(定額)을 채울 수 있겠습니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초에 이미 규정(規定)을 정해놓고 나서 이제 액수(額數)가 부족하다는 것을 이유로 규정 이외의 방법으로 뽑는다면 뒷날의 폐단이 있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평안도는 당초의 정액(定額)이 북도(北道)384)  에 견주어 이미 절반 밖에 안되는데 이제 또 입격(入格)된 약간인(若干人)만을 출방(出榜)한다면 어찌 쓸쓸하지 않겠는가? 장계(狀啓)에서 말한 대로 액수(額數)를 채우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였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북도(北道) 시관(試官)의 장계(狀啓)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데, 그곳도 원액(元額)이 차지 않으면 형편상 또한 이 예(例)를 적용해야 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서도(西道)385)  와 북도(北道)는 마땅히 달리할 수가 없으니, 의당 이 예(例)에 의거하여 하게 하라."
하였다.

 

8월 24일 을사

전생서 직장(典牲署直長) 황순승(黃順承)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아! 임진난(壬辰亂) 때 국가를 재조(再造)하여 준 은혜를 차마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신종 황제(神宗皇帝)가 혁연(赫然)히 노하시어 동방(東方)을 돌아보시고 천하의 군대를 동원하여 우리의 강토(疆土)를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그때 명령을 받들고 와서 싸운 천장(天將)386)   가운데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과 같은 사람들의 그 공렬(功烈)이 어찌 위대하고 빛나지 않았겠습니까마는, 그래도 경리(經理) 양호(楊鎬)가 우리 나라의 일에 혈성(血誠)을 기울인 것만은 못합니다. 남성(南城)의 사당(祠堂)과 사현(沙峴)의 비석(碑石)은 대개 떠난 다음에도 잊지 못하는 마음에서 만든 것입니다. 연은문(延恩門)의 길 북쪽에 있는 비석은 또 특별히 황상(皇上)387)  의 덕의(德意)를 기록한 것이므로 그 일의 체모(體貌)가 진실로 중한 것이니, 또한 우리마 소홀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비석이 북쪽 길가에 있는데다 다만 한 칸의 작은 비각(碑閣)만 설치하였을 뿐이어서 마을 아이들과 목동(牧童)들이 마구 훼손시켜도 금하는 바가 없습니다. 당시 비석을 세워 덕의를 칭송한 그 뜻이 어찌 여기에 그쳤겠습니까? 이제 그대로 더 개수(改修)하여 그 제도를 조금 갖추고 단청(丹靑)을 하여 면모를 일신시킴으로써 길 가는 사람들이 다시 우러러보고 나라 사람들이 귀를 쫑긋거리고 듣게 한다면 이렇게 대의(大義)가 어두워져가는 때를 당하여 족히 세도(世道)의 만분에 일이라도 도움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세자(世子)가 그 상서(上書)를 예조(禮曹)에 내렸는데 예조에서 개수(改修)할 것으로 복주(覆奏)하였다.

 

8월 25일 병오

달이 귀성(鬼星)을 범하였다.

 

약방(藥房)에서 들어와 진찰하였다. 임금이 수부(手部)에 있는 척택(尺澤) 좌우혈(左右穴)과 족부(足部)에 있는 음곡(陰谷) 좌우혈(左右穴)에 침을 맞았다.

 

8월 26일 정미

달무리가 목성(木星)을 둘렀다.

 

약방(藥房)에서 들어와 진찰하였다. 임금이 족부(足部)에 있는 양릉천(陽陵泉) 좌우혈(左右穴)과 계중(季中) 좌우혈(左右穴)에 침을 맞았다.

 

8월 27일 무신

이기익(李箕翊)을 승지(承旨)로, 조상경(趙尙絅)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고(故) 증 판서(贈判書) 신점(申點)에게 충경(忠景)이란 시호(諡號)를, 우참찬(右參贊) 신희복(愼希復)에게 장정(莊靖)이란 시호를, 증(贈)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성부(李聖符)에게 충장(忠莊)이란 시호를, 증(贈) 병조 판서(兵曹判書) 윤정준(尹廷俊)에게 충민(忠愍)이란 시호를, 증(贈) 함녕군(咸寧君) 이항(李沆)에게 경무(景武)라는 시호를 내렸다.

 

함경도 암행 어사(咸鏡道暗行御史) 최상리(崔尙履)가 조정에 돌아와서 복명(復命)하였다. 단천 군수(端川郡守) 오명희(吳命犧)·경흥(慶興)의 전(前) 부사(府使) 이장(李樟)·회령(會寧)의 전 부사(府使) 이홍조(李弘肇)는 모두 불법(不法)한 짓을 저질렀기 때문에 나문(拿問)하였고, 홍원 현감(洪原縣監) 박건(朴謇)·부령(富寧)의 전 부사(府使) 민주헌(閔周憲)은 정사를 잘 다스리지 못하였기 때문에 파출(罷黜)하였다.

 

우의정(右議政) 권상하(權尙夏)가 현도(縣道)를 통하여 상서(上書)하여 사면(辭免)을 청하고, 또 말하기를,
"신이 듣건대, 저하(邸下)께서 성지(聖旨)를 우러러 받들고 국정(國政)을 청단(聽斷)한다고 하니, 이는 진실로 저하의 초정(初政)인 것입니다. 신이 듣기로는, 요제(堯帝)·순제(舜帝)·우왕(禹王)이 나라를 서로 전함에 있어 전수(傳授)한 요점은 정일집중(精一執中)에 불과하였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간략하지만 포함하고 있는 뜻은 광대한 것이므로 비록 널리 은혜를 베풀어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이라도 이를 버리고 어찌하겠습니까? 대개 정(精)이란 것은 《대학(大學)》에서 이른바 치지(致知)의 공부가 그것이요, 일(一)이란 것은 성의(誠意)의 공부가 그것이요, 집중(執中)이란 것은 지선(至善)에 도달하는 공효가 그것입니다. 이는 진실로 천고(千古)의 성현(聖賢)이 서로 전수하여 온 지결(旨訣)인 것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 인조(仁祖)께서 효종(孝宗)에게 부탁한 지의(志意)가 오로지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성비(聖批) 가운데 경(敬)자나 학(學)자는 그 호명(號名)은 다르지만 실상은 같은 맥락의 일이니, 이것이 곧 저하(邸下)의 가법(家法)인 것입니다. 진실로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할 수 있다면 성인(聖人)이 되고 현인(賢人)이 되는 것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니,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우리 동방(東方)의 억만 백성들의 복록이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세자(世子)가 답하기를,
"내가 외람되이 비상(非常)한 명을 받들고부터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편안하게 있을 겨를이 없었다. 이런 때에 도와주기를 바랄 데는 오직 보상(輔相)뿐인데, 더구나 경(卿)은 석덕(碩德)과 중망(重望)으로써 사림(士林)의 숭앙(崇仰)을 받으니, 나의 존신(尊信)이 다시 어떠하겠는가? 기필코 정성을 다하여 멀리 떠나려는 마음을 되돌리려 한다. 경(卿)도 국가의 휴척(休戚)을 함께 한다는 의리에 있어 어찌 차마 조금도 근심이 없이 대할 수가 있겠는가? 상서(上書)에서 경계한 내용이 매우 간절하고 근실하여 나라 일을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정성이 말하는 표면에 넘쳐 흘렀으므로 내가 매우 감탄하고 있다. 따라서 마음에 새겨 실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경(卿)은 모름지기 대조(大朝)께서 시종 경례(敬禮)를 극진히 한 뜻을 본받아 겸양(謙讓)을 고집하지 말고 즉일(卽日)로 출발하여 내가 목마르게 기다리는 성의에 부응토록 하라."
하였다.

 

8월 28일 기유

약방(藥房)에서 들어와 진찰하였다. 임금이 수부(手部)에 있는 어제(魚際) 좌우혈(左右穴)과 족부(足部)에 있는 내정(內庭) 좌우혈(左右穴), 웅곡(熊谷) 좌우혈(左右穴)에 침을 맞았다. 마치고 나서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고(故) 평사(評事) 이목(李穆)은 젊어서 태학(太學)에서 유학(遊學)할 때 성종 대왕(成宗大王)께서 마침 병환(病患)이 있었으므로 대비(大妃)께서 여무(女巫)를 시켜 반궁(泮宮)388)  의 벽송정(碧松亭)에다 음사(淫祀)를 설행(設行)하게 했었는데, 이목이 그 여무를 몽둥이로 때려서 내쫓았습니다. 대비(大妃)께서 매우 노하시어 성종(成宗)의 병환에 차도가 있기를 기다렸다가 알리니, 성종께서 성낸 체하고는 그 당시 유생(儒生)들의 이름을 기록하여 들이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러자 유생들을 다투어 도망하여 숨었는데, 이목(李穆)만은 홀로 남아 있었습니다. 성종께서 곧이어 대사성(大司成)을 불러서 ‘사습(士習)이 올바른 데로 귀착된 것을 권장하여 내가 가상하게 여긴다.’ 하시고는 특별히 술을 내렸습니다. 윤필상(尹弼商)이 정승이 되어 용사(用事)할 적에 마침 가뭄이 극심하자 이목이 상소(上疏)하여 말하기를, ‘윤필상(尹弼商)을 팽형(烹刑)에 처하여야 하늘이 비를 내려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윤필상이 은밀히 임금에게 부처를 숭봉하도록 권하자 이목이 여러 유생들을 거느리고 소장(疏章)을 올려 윤필상을 간귀(奸鬼)라고 지척하고 주참(誅斬)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드디어 공주(公州)로 귀양갔습니다만, 그 뒤 문과(文科)에 장원(壯元)으로 급제(及第)하여 평사(評事)가 되었습니다. 그때 나이 28세였습니다. 무오 사화(戊午士禍)389)  를 당하여 윤필상이 없는 죄를 씌워 살해하였는데, 갑자 사화(甲子士禍)390)   때 화(禍)가 천양(泉壤)에까지 미쳤습니다. 같은 시대에 화를 입은 김일손(金馹孫) 등 여러 현인(賢人)들은 모두 이미 역명(易名)391)  의 은전(恩典)이 내렸는데도 이목(李穆)의 경우는 그의 후손(後孫)인 이기혁(李基赫)이 상언(上言)하여 증직(贈職)을 얻는 데 그쳤을 뿐 아직 시호(諡號)를 내리는 것을 그만둘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증시(贈諡)할 것을 명하였다.

 

8월 29일 경술

홍계적(洪啓迪)을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약방(藥房)에서 들어와 진찰하였다. 임금이 수부(手部)에 있는 신문(神門) 좌우혈(左右穴)과 족부(足部)에 있는 임읍(臨泣) 좌우혈(左右穴), 태계(太谿) 좌우혈(左右穴)에 침을 맞았다. 마치고 나서 도제조(都提調)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북도 암행 어사(北道暗行御史) 최상리(崔尙履)가 서계(書啓)에 추생(抽栍)392)  한 외의 고을인 명천 부사(明川府使) 신린(申潾)이 탐욕스럽고 불법을 저지른 것과 덕원 부사(德源府使) 장진병(張震炳)이 정사를 잘 다스리지 못한 정상을 논하였습니다. 이것이 비록 추생한 외의 고을이기는 하지만 죄상이 이미 드러났으니, 그대로 둘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신인은 나문(拿問)하고 장진병은 파출(罷黜)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8월 30일 신해

윤봉조(尹鳳朝)를 응교(應敎)로, 어유룡(魚有龍)과 홍계적(洪啓迪)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왕세자(王世子)가 시민당(時敏堂)에 앉아서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접(引接)하였다.           【대신(大臣)이 당(堂)에 올라가 절할 때에는 세자(世子)는 기립(起立)하고 대신이 자리에 부복(俯伏)했을 적에는 세자는 앉는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충청 감사(忠淸監司)        윤헌주(尹憲柱)가 장계(狀啓)를 올려 도내(道內)의 폐해에 대해 논하였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양호(養戶)393)                  에 관한 일입니다. 1결(結)에 납입해야 하는 대동미(大同米)가 12두(斗), 세미(稅米)와 삼수미(三手米)394)                  가 6두(斗)정도, 기타 잡비(雜費)가 2두(斗)정도, 본읍(本邑)의 치계가(雉鷄價)가 3두(斗), 사등(四等)395)                  의 시초(柴草)와 탄거(炭炬)의 대가(代價)가 1두(斗)정도로 통틀어 계산하면 1결(結)에서 1년에 내야 하는 전세(田稅)는 쌀 24두(斗)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양호(養戶)가 다른 사람들의 결부(結負)396)                  를 취합(聚合)하여 스스로 호수(戶首)가 되고 결내(結內)의 경작자들이 납입해야 할 쌀을 거두어들입니다. 그리하여 많은 경우에는 수십여(數十餘)의 팔결(八結)의 것을 취합하고 작은 경우에도 십여(十餘)의 팔결(八結)을 밑돌지 않게 되는데 1결(結)에서 정조(正粗)로 1백 두(斗)를 징수하고 있습니다. 양호(養戶) 가운데, 더욱 심한 자들은 1백 두의 예(例)를 적용하지 않고 전세(田稅)·대동미(大同米)·관수(官需)·시초(柴草)·거탄(炬炭)·치계(雉鷄)·빙정(氷丁) 등의 대가(代價)라고 핑계하고서 그들의 침학(侵虐)하는 방법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조종조(祖宗朝)에서 요역(徭役)을 가볍게 하고 세금(稅金)을 헐하게 하였던 정치를 도리어 토호배(土豪輩)들이 백성을 수탈하여 자신들의 자산을 불어나게 하는 데 도움이 되게 하는 결과를 만들고 말았습니다. 대개 듣기로는, 호조(戶曹)에서 ‘무세(無稅)한 복호(復戶)를 감안하여 1결(結)마다 정한 항식(恒式)이 쌀 25두(斗)에 불과하니, 지금도 이 예(例)에 의거하여 25두를 항식으로 정하고 인하여 팔결(八結)의 규정을 폐지하소서. 그리고는 한결같이 마을의 순서와 가좌(家座)의 위치에 따라 일률적으로 2,3결(結)씩을 1부(夫)로 만들어 토호(土豪)와 간리(奸吏)들이 실결(實結)에서 취합(聚合)하는 폐단을 방지하게 하소서. 25두(斗)를 거두어들인 뒤에는 전수미(田需米)와 삼수량(三手粮)을 계산하여 납입하게 하고 그 나머지는 각 고을에 지급하여 치계(雉雞)와 잡물(雜物)을 판비(辦備)하는 데에 쓰게 한다면 실로 편리하겠습니다.’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큰 고을은 이렇게 변통(變通)시키면 되겠지만 잔읍(殘邑)은 반드시 불편한 단서가 있게 될 것이다.’ 하니, 본도(本道)로 하여금 각 고을에 순문(詢問)하게 해서 좋은 쪽을 채택하여 변통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건명(李健命)은 말하기를,
"치계(雉鷄)와 시빙(柴氷)을 대가(代價)로 거두어들일 경우 고을의 대소(大小)와 전결(田結)의 다과(多寡)가 같지 않기 때문에 거두어들이는 쌀도 반드시 균일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조정에서 어떻게 일례(一例)로 항식(恒式)을 정할 수가 있겠습니까? 양호(養戶)의 폐해에 이르러서는 감사(監司)가 적발하여 엄중히 징계하게 한다면 폐단이 고쳐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세자(世子)가 옳게 여겼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또 한 가지는 전정(田定)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다시 양전(量田)한 지가 이미 오래 되어 전지(田地)의 형태에 누차 변함에 따라 옛날에 진황전(陳荒田)이던 것이 지금에는 경식(耕食)하는 것이 많기 때문에 양전할 당시의 실결(實結)에 따라 출역(出役)하게 하기는 곤란합니다. 그리고 급재(給災)397)                  할 적에 허실(虛實)이 혼동되기가 쉬운데, 감사(監司)나 수령(守令)이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직접 점검할 수 없고 경차관(敬差官)의 행정에서도 두루 살펴보기가 어렵기 때문에, 매양 그 전의 실결(實結)을 지금의 총수(摠數)에다 견주어 반드시 그 전의 수량에 맞게 할 뿐입니다. 그리고 해조(該曹)에서 결수(結數)의 감손(減損)을 우려하여 비록 전담의 곡식이 모두 흉황(凶荒)일 때를 당하더라도 급재(給災)의 명목(名目)은 성천 포락(成川浦落)398)                  이 된 곳 등을 불과합니다. 수령이 된 사람은 아무 까닭없이 전세(田稅)를 징수하기는 곤란하여 처음부터 씨를 뿌리지 않아서 전혀 낫을 댈 수 없는 경우에는 간혹 성천 포락(成川浦落)이라고 현탈(懸頉)399)                  하기도 하는데, 이것이 일단 마감(磨勘)을 거치면 인하여 영원히 현탈(懸頉)되고 맙니다. 그리하여 실결(實結)이 해마다 감축(減縮)되는 것은 대개 여기에서 연유되는 것입니다. 금년의 풍흉(豐凶)에 대해서는 진실로 미리 헤아릴 수 없겠습니다만, 만일 상풍년(上豐年)400)                  이 들면 그 전의 상풍년의 실결(實結)에 의하고 중년(中年)이나 하년(下年)이 들면 역시 그 전의 중년이나 하년의 실결에 의하여 십분 상세하게 결정한다면, 거의 위로는 지나치게 감손되는 데에 이르지 않을 것이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침학하는 데에 이르지 않게 될 것입니다. 급재(給災)의 명목(名目)에 대해서는 본도(本道)로 하여금 실상에 따라 구별하게 하고 이어 수령에게 엄중히 신칙하여 영원히 현탈(懸頉)된 재전(災田)과 혼동하여 절대 함부로 급재(給災)하지 말게 한다면 오재(誤災)로 영원히 현탈되는 폐단을 조금은 줄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입대(入對)한 여러 신하들에게 하문하여 조처하는 것이 아마도 사의(事宜)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하고, 예조 판서(禮曹判書)        민진후(閔鎭厚)는 말하기를,
"이는 오래도록 양전(量田)을 폐기한 소치에서 연유한 것이므로 성상(聖上)께서 이를 걱정하여 이미 다시 양전을 하라는 명령이 계셨습니다. 금년에는 감사(監司)로 하여금 형세를 상세히 살피게 하여 만일 사목(事目) 가운데 변통시킬 것이 있으면 그때마다 즉시 신문(申聞)하게 하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
하고, 이건명(李健命)은 말하기를,
"연분(年分)401)                  에 대한 사목(事目)은 이미 반포하였으므로 지금에 와서는 변통시키기가 곤란합니다. 성천포락(成川浦落)이라고 과람(過濫)하게 하지 말라는 내용으로 다시 엄중히 신칙(申飭)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세자(世子)가 각별히 신칙(申飭)하라고 명하였다. 김창집(金昌集)이 또 말하기를,
"또 한 가지는 신역(身役)에 대한 일입니다. 베[布] 2필(疋)을 바쳐야 하는 경우 만약 풍년을 당하면 쌀 20여 두(斗)를 내어야만 그제야 2필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한집안에서 혹 부자(父子) 3,4인이 베를 바치게 될 경우 내어야 하는 쌀이 많으면 혹은 6석(石)이나 되니, 지친 백성들이 어떻게 목숨을 보존하여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쌀 12두(斗)를 바치는 것은 베를 바치는 신역가(身役價)에 비하여 보면 매우 경한 것입니다. 그래서 뇌물을 줄 수 있는 부민(富民)은 쌀을 바치는 헐한 신역에 투속(投屬)되는가 하면 혹 그 해로 즉시 공문(公文)을 내주기 때문에 탈루(脫漏)되어 한가히 노닐고 있습니다. 그러나 뇌물을 줄 수가 없는 잔민(殘民)들은 모두 베를 바치는 괴로운 신역(身役)에 편입되어 끝내는 살 곳을 잃고 떠돌다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사망(死亡)합니다. 그리고 도망(逃亡)하거나 물고(物故)한 실상을 또한 상세히 조사해 내지 못하고 있는데 이것이 군적(軍籍)의 태반이 허위가 되고 있는 이유이고 백골(白骨)에 대한 징세(徵稅)와 인징(隣徵)·족징(族徵)의 폐단이 생기게 되는 까닭인 것입니다. 지금 만약 어떠한 형태의 신역(身役)이라도 구애하지 말고 사람마다 각기 베 1필과 쌀 6두(斗)를 항식(恒式)으로 정한다면 편중(偏重)되는 폐단이 없을 것이니, 모름지기 자세히 강구(講究)하여 조처하시기 바랍니다."
하고, 민진후는 말하기를,
"전일에 이정청(釐整廳)의 절목(節目)에 의하면 전(錢)과 포(布)를 반반씩으로 하도록 명백하게 항식(恒式)으로 정해져 있는데, 그 뒤 전(錢)이 귀하면 순목(純木)으로 받아들이고 포(布)가 귀하면 순전(純錢)으로 받아들였으니, 쌀과 포목을 반반씩으로 하는 것이 또한 이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더구나 병조(兵曹)에서는 원래 쌀을 쓸 곳이 없는데 기병(騎兵)·보병(步兵)의 신역(身役)을 쌀로 받아들이니, 어찌 제지(制止)되는 폐단이 없겠습니까?"
하였다. 김창집이 이어 이 일은 우선 보류하여 두었다가 다시 의논하기로 하자고 청하니, 세자(世子)가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저하(邸下)께서는 춘추(春秋)가 한창 젊으시고 이미 고금의 치란(治亂)에 대한 자취를 익히 아시고 또한 대조(大朝)께서 재결(裁決)하는 즈음에 자신도 모르게 젖어들어 분명하게 익히신 지 이미 오래이니,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지난번 공경·태만과 시종 학문에 뜻을 두라고 하신 성비(聖批)는 실로 옛 성왕(聖王)들이 전수(傳授)하였던 지결(旨訣)인 것입니다. 경(敬)이란 것은 마음을 한군데 집중하여 잡념(雜念)을 버리는 일인데, 마음을 조존(操存)하고 성찰(省察)하는 데 있어서는 모두 경(敬)을 근본으로 삼는 것입니다. 따라서 태만하거나 소홀하는 마음이 혹시라도 끼어들게 되면 나라의 존망(存亡)도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敬)을 지니고 마음을 바루는 공부를 힘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배우는 것은 독송(讀誦)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마음으로 깨달아 알고 경험에 의해서 확인한 뒤에야 온갖 사리에 밝아져서 사무를 명백히 처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하(邸下)께서는 이 두 가지에 대해 더욱 유의하여 힘써 행한다면 국가의 복록을 이루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세자(世子)가 이르기를,
"갑자기 비상(非常)한 명령을 받들었으므로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근심하고 두려워하면서 편안히 거처한 겨를이 없다. 진달한 내용이 매우 좋으니, 마땅히 두려워하여 유념하겠다."
하였다. 민진후가 말하기를,
"사람이 일을 잘 완성시킨다는 것은 반드시 입지(立志)를 우선으로 삼는 것입니다. 성인(聖人)에 뜻을 두면 성인이 되고 현인(賢人)에 뜻을 두면 현인이 되고 왕도(王道)에 뜻을 두면 왕도를 이루고 패도(霸道)에 뜻을 두면 패도를 이루는 것이므로, 모두 스스로 기약하는 것이 어떠한가에 연유되는 것입니다. 항상 삼대(三代)402)                  를 표준으로 삼은 다음에야 바야흐로 성취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지(意志)가 비록 확립(確立)되었더라도 군주로서는 혼자서 나라를 다스릴 수는 없는 것이니 반드시 덕을 같이하는 대신(大臣)을 얻어 위임(委任)한 다음 성취를 책임지우고, 널리 준예(俊乂)를 불러 여러 직위(職位)에 포열(布列)시켜 놓은 연후에야 모든 법도가 올바르게 되어 태평의 아름다움에 이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미 적임자를 얻고 나서는 또 반드시 정사에 근면하여야 합니다. 주(周)나라        문왕(文王)은 성인인데도 오히려 해가 기울도록 밥먹을 겨를도 없이 근면하였습니다. 무일편(無逸篇)403)                  은 모두가 부지런히 힘써야 한다는 내용이니 여기에서 살펴보면 얼마나 근면하여야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멀리 옛날을 본받을 필요없이 지금 성상(聖上)께서 정사에 근면하시는 덕의(德意)를 저하(邸下)께서 직접 눈으로 보셨으니, 삼가 바라건대 반드시 성상(聖上)으로 모범을 하소서. 그리고 만약 학문(學問)을 하지 않으면 비록 입지(立志)를 하려고 해도 지향할 방향을 잡지 못하게 되고 비록 적임자를 얻으려 해도 현사(賢邪)의 관찰이 혼동되게 되고 비록 정상에 근면하려고 해도 형석(衡石)의 일과(日課)404)                  에 돌아가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상께서 특별히 학문에 뜻을 두라는 훈계를 게시(揭示)하여 자상하게 분부하신 이유인 것입니다. 따라서 학문을 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반드시 경(敬)에 근본해야 되기 때문에 경태(敬怠)의 구분에 대해 면계(勉戒)하신 것입니다. 요제(堯帝)·순제(舜帝)·우왕(禹王)이 서로 전해준 심법(心法)도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니, 진실로 항상 여기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하니, 세자(世子)가 이르기를,
"진달한 내용이 진실로 좋다. 각별히 유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건명이 말하기를,
"옛사람의 말에 ‘삼대(三代) 때를 본받으려고 한다면 먼저 조종(祖宗)을 본받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지난번 성상(聖上)께서 경태(敬怠)와 학문에 뜻을 두라고 하신 훈계는 진실로 절실(切實)한 것이었습니다. 저하(邸下)께서 일동일정(一動一靜)의 사이에 면계(勉戒)하신 훈계를 잘 본받아 실행한다면 멀리 요순(堯舜)에게서 찾을 필요가 없이 궁정(宮庭) 안에서 모범(模範)을 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니, 세자(世子)가 이르기를,
"진달한 내용이 좋다. 마땅히 유의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교리(校理)        황귀하(黃龜河)·보덕(輔德)        윤양래(尹陽來)·설서(說書)        조최수(趙最壽) 등이 계속해서 학문에 힘쓰라는 경계를 진달하니, 세자가 모두 옳게 여겨 받아들었다. 집의(執義)        권엽(權熀)이 전일에 진달한 것을 다시 진달하고 또 말하기를,
"통제사(統制使)        이상집(李尙)은 재주가 본디 용렬한데다 나이도 70에 이르렀습니다. 영좌(嶺左)의 병곤(兵閫)405)                  에 대한 정사(政事)406)                  가 갈수록 더욱 거칠고 혼몽(昏瞢)하였는데 갑자기 수곤(首閫)407)                  을 체이(遞移)시켰으므로 물정(物情)이 놀라고 있으니, 청컨대 체차(遞差)시키소서. 남원 현감(南原縣監)        정혁선(鄭赫先)은 관직에 있으면서 가혹(苛酷)하고 괴팍하여 처사가 사리에 어긋났으니, 청컨대 체차시키소서."
하였으나, 세자(世子)가 모두 따르지 않았다. 사간(司諫)        조명봉(趙鳴鳳)이 전일에 진달했던 것을 다시 진달하였으나, 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