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60권, 숙종 43년 1717년 10월

싸라리리 2025. 11. 30.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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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일 임오

약방(藥房)에서 들어와 진찰하였다. 임금의 두부(頭部)에 있는 찬죽(攢竹) 좌우혈(左右穴), 상양(商陽) 좌우혈(左右穴), 태충(太衝) 좌우혈(左右穴)에 침을 맞았다. 마치고 나서 도승지(都承旨) 조도빈(趙道彬)이 말하기를,
"정시(庭試)450)  를 춘당대(春塘臺)에다 변통하여 과장(科場)을 설치하였습니다. 서제(書題)451)  가 왕복하는 것이 으레 재차(再次)에 이르게 되는데 만약 승지(承旨)가 왕래한다면 일세(日勢)가 저물게 되기 쉽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승지(承旨)가 왕래하게 되면 일세가 반드시 저물게 될 것이니, 춘당대(春塘臺)에서 바로 승전색(承傳色)452)  을 청하여 입계(入啓)하라."
하였다.

 

10월 3일 계미

왕세자(王世子)의 청정(聽政)을 종묘(宗廟)·사직(社稷)에 고하고 팔방(八方)에 교서(敎書)를 반포(頒布)하였다.

 

반포한 교서(敎書)에 이르기를,
"왕은 이렇게 말하노라. 5년이 지나도록 병을 앓게 되어 오래도록 신서(臣庶)들에게 걱정을 끼쳐 왔으므로 이극(貳極)453)  에게 명하여 정사의 수고로움을 대신하게 하였다. 이에 조종(祖宗)의 전례(典禮)를 따라 이미 태묘(太廟)에 삼가 고하였고 인하여 널리 팔방(八方)에 알린다. 생각건대, 과인(寡人)은 일찍 큰 업적(業績)을 이어받아 소의 한식(宵衣旰食)454)  하여 왔으니, 어찌 감히 황녕(荒寧)455)  하기를 생각할 수가 있겠는가? 그리하여 살얼음을 밟고서 깊은 물가에 서 있는 듯 조심하면서 혹시라도 이어받은 책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했었다. 어느새 춘추(春秋)가 많아졌는데다 겹쳐 질병(疾病)도 자주 있었으므로 근본이 이미 깊어졌으니, 드디어 해를 지날수록 병세가 더욱 깊어만 갔다. 따라서 신하들의 인접(引接)이 오랫동안 없어졌으니, 이는 평소 부지런히 걱정하던 마음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더구나 생각하면 시력(視力)이 점점 곤란하여져 더욱 수응(酬應)하는 것의 괴로움을 더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루 이틀 만기(萬幾)에 지체된 것이 많으니 침상(寢狀)에 있은들 어찌 편안하겠는가? 40여 년간 누적되어온 병으로 손상된 것을 약석(藥石)으로 효험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마음을 밝게 가지고 질병을 조리하려면 사무를 줄여 번거로움을 더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돌아보건대, 저부(儲副)456)  가 현명하여 오래도록 억조 창생의 기대가 걸려 있었는데, 온화하고 문아(文雅)한 덕망은 이미 고명(高明)한 지경에 이르렀고 인자(仁慈)하고 효도하는 성문(聲聞)은 일찍부터 원근에 널리 드러나 있었다. 그리하여 문안(問安)하고 시선(視膳)하는 데 있어 도리를 극진히 하였으니, 또한 사람이 알지 못하는 도리를 깨달아 이것을 실지로 시행하여 성공시킬 재능이 있는 것이다. 여러해 동안 시탕(侍湯)하면서 잠시도 게을리하지 않는 가운데서 지극한 성품을 알 수 있었고, 조심스런 마음으로 훈계(訓戒)를 받들어 습관이 이미 자연스런 경지에 이르렀다. 깊이 부탁하는 지극한 정을 미루어 곧 고사(故事)를 조사하여 참작 결단하였다. 나의 뜻이 먼저 결정되어 있었으니 대신(大臣)들이 극력 진달하는 것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고, 국론(國論)이 다 같았으니 어찌 오래도록 시행하지 않던 전례(典禮)를 속히 거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의논이 발론되자 경사(卿士)들이 마음을 합하여 따랐고, 명령이 내려지자 조야(朝野)가 모두 기뻐하였다. 그리하여 이미 8월 1일에 세자(世子)에게 청정(聽政)하게 하였는데 의장(儀章)과 예절(禮節)에 있어서는 전례(典例)를 모방하였으나, 관작(官爵)과 병형(兵刑)이외의 일은 모두 단독으로 결재하게 부탁하였다. 오직 일신(一身)의 조양(調養)에 편함에 있어서는 또한 서무(庶務)가 오래도록 폐기되는 걱정이 없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만세(萬世)의 장계(長計)가 되는 것이니, 어찌 일시의 권의(權宜)일 뿐이겠는가? 세자에게 비지(批旨)를 특별히 내려 맨 먼저 학문에 계속 뜻을 두라고 면려하였으니 나라의 기반이 더욱 공고(鞏固)하여 질 것이고 따라서 후손을 잘 되게 하는 모유(謨猷)를 영원히 전하여지게 하는 것이다. 아! 대례(大禮)를 치르자마자 큰복이 바야흐로 이르는구나. 구가(謳歌)와 옥송(獄訟)457)  은 모두가 익대(翊戴)458)  하는 깊은 정성에서 나온 것이니, 천지 신기(神祗)가 신령스럽고 장구하게 이어갈 운수를 다같이 부지(扶持)하여 줄 것이다. 이 때문에 교시(敎示)하노니 의당 상세히 알고 있을 것이다."
하였다. 대제학(大提學) 송상기(宋相琦)의 글이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에 진달한 것을 다시 진달하고 또 말하기를,
"춘방(春坊)459)  의 직무는 학문의 강독을 권면하는 데 있는 것이니 한만(閑漫)한 일은 번거롭게 여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엊그제 소대(召對)한 적에 시강원(侍講院)의 관원(官員)이 익위사(翊衛司)의 예속(隷屬)을 더 내어 줄 것을 진달(進達)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것이 사체(事軆)에 있어 매우 미안한 일이니 청컨대 그날 입시(入侍)했던 춘방관(春坊官)을 추고(推考)하소서."
하니, 세자(世子)가 추고하는 일만을 따랐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에 진달한 것을 다시 진달하고 또 말하기를,
"충청 도사(忠淸都事) 신척(申滌)은 그의 집이 도내(道內)에 있는데 자신이 아사(亞使)460)  가 되어서 그가 사사로이 지급한 햇수가 오래된 사채(私債) 때문에 민전(民田)을 강제로 탈취하였고, 또 본주(本主)가 정소(呈訴)한 데 대해 분노하여 이수(移囚)하는 일이 있기에 이르렀습니다. 청컨대 파직시키소서."
하였으나, 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약방(藥房)에서 들어와 진찰하였다. 임금이 두부(頭部)에 있는 풍지(風池) 좌우혈(左右穴)과 수부(手部)에 있는 내관(內關) 좌우혈(左右穴)과 족부(足部)에 있는 행간(行間) 좌우혈(左右穴)에 침을 맞았다. 도제조(都提調)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지난번 평안도 감사(平安道監司)의 장본(狀本)에서 진구미(賑救米) 얻기를 청한 것으로 인하여 강화(江華)의 쌀 5천 석(石)을 이전(移轉)하는 일로 복주(覆奏)하였었습니다. 그런데 강화 유수(江華留守) 최석항(崔錫恒)이 또 장계를 올려 본부(本府)의 군량으로 현재 남아 있는 수량이 적다는 것으로 누누이 논집(論執)하였습니다. 관서(關西)는 타도(他道)와 달라서 앞으로의 형세가 진실로 절급(切急)하니, 그 소청을 들어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관서(關西)의 참혹한 재황(炎荒)이 이러하니 5천 석을 어찌 보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체로 이전(移轉)한 곡식은 반드시 일일이 환보(還報)하게 한 연후에야 위급한 때에 수용(需用)할 수 있는 것인데, 어떤 사람이 가을로 물려서 봉납(捧納)할 것을 청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본읍(本邑)에 봉납하여 유치시키기를 청하기도 하면서 매양 물린다고 핑계하여 환상(還償)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군량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내가 일찍이 이런 습관을 미워하고 있으니, 이 뒤로는 묘당(廟堂)에서 각별히 신칙하여 반드시 이전한 곡식의 수량대로 본소(本所)에 환납(還納)하게 할 것이고 전일과 같은 폐단이 없게 하라."
하였다.

 

10월 4일 갑신

밤에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홍계적(洪啓迪)을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삼았다. 조태채(趙泰采)를 우의정에 제배(除拜)하고, 권상하(權尙夏)를 순서에 따라 좌의정에 승진시켰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에 진달한 것을 다시 진달하니, 세자(世子)가 정담(鄭擔)과 신척(申滌)의 일만 따랐다.

 

약방(藥房)에서 들어와 진찰하였다. 임금이 면부(面部)에 있는 동자료(曈子髎) 좌우혈(左右穴)과 수부(手部)에 있는 신문(神門) 좌우혈(左右穴)과 족부(足部)에 있는 태충(太衝) 좌우혈(左右穴)에 침을 맞았다. 마치고 나서 임금이 이르기를,
"진선(進善)461)  을 오래도록 차출(差出)하지 않았는데, 합당한 사람이 있는가?"
하니, 도제조(都提調) 김창집(金昌集)이 대답하기를,
"신은 누가 합당한지 모르겠습니다. 이미 차출하라는 명이 있었으면 전조(銓曹)에서 스스로 가려서 차출할 것입니다."
하고,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는 말하기를,
"의망(擬望)462)  할 만한 사람이 적어서 삼망(三望)을 갖출 수 없기 때문에 차출하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단망(單望)으로 한 때는 없었는가?"
하니, 민진후가 말하기를,
"단망(單望)으로 한 전례가 진실로 있기는 합니다만, 임금의 명령이 없을 것 같으면 해조(該曹)에서 감히 단망으로 주의(注擬)하지 못할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뒷날의 정사(政事) 때에 단망(單望)으로 차출하라고 명하였다.

 

10월 5일 을유

대사헌(大司憲) 이희조(李喜朝)가 현도(縣道)를 통하여 상소(上疏)했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이 삼가 격쟁(擊錚)한 사람인 이세덕(李世德)의 공사(供辭)를 보건대,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을 모욕한 것이 너무도 낭자하여 거의 못하는 말이 없었습니다. 신이 일찍이 선정(先正)을 사사(師事)했었으므로 평일 스스로 선정의 심사(心事)를 깊이 알고 있다고 여겨왔는데, 지금 만약 한 마디 말도 하지 않는다면 이는 신이 크게 선정을 저버린 것이 됩니다. 그가 말한 수천만 마디의 말은 모두가 꾸며낸 것으로 그 대지(大旨)를 요약하여 보면 이러합니다. 대개 선정이 윤휴(尹鑴)에 대해 본디 그가 주자(朱子)를 배척한 것을 가지고 죄목을 삼은 것이 아니라서 스스로 진선(進善)에 의망(擬望)한 것인데, 기해 예론(己亥禮論)463)  이 발론된데 이르러서야 그가 자신을 살해(殺害)할 것으로 여겨 비로소 공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며, 윤선거(尹宣擧)에 대해서도 또한 그가 윤휴(尹鑴)를 도운 것을 가지고 그르다고 한 것이 아니므로 극력 찬미(贊美)하여 왔었는데 계축년464)  에 이르러 기유 의서(己酉擬書)465)  를 보고 나서 비로소 그가 규계(規戒)한 것 때문에 노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진실로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윤선거(尹宣擧)의 연보(年譜) 계사년466)  조에 무엇 때문에 ‘선정(先正)이 윤휴를 이단(異端)이라 했고 윤선거를 겉으로는 배제하면서 속으로는 돕고 있다고 했다.’ 하였으며, 그의 공사(供辭)에 또한 무엇 때문에 ‘윤선거가 선정에 대해 자처(自處)하기를 최주평(崔州平)이 서원직(徐元直)에게 일생 동안 규계(規戒)한 것467)  과 같은 말로 부지런하고 정성스럽게 했기 때문에 선정(先正)은 윤선거가 사망한 뒤에도 극력 찬미하였다.’고 했습니까? 대저 윤휴를 이단(異端)이라고 공격한 것은 그가 주자(朱子)를 배반한 것을 죄목으로 삼은 것이 분명하고, 윤선거를 겉으로는 배제하면서도 속으로는 돕고 있다고 한 것은 그가 윤휴를 도운 것을 그르다고 한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더구나 윤선거가 평일에 이미 선정을 위하여 간절하게 규계하였는데도 선정이 오히려 그를 극력 찬미하였다면 규계한 것 때문에 노하지 않은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미 평일에 규계한 것 때문에 노하지 않았다면 기유 의서(己酉擬書)를 비록 보았을지라도 오히려 무슨 노할 일이 있겠습니까? 대개 윤선거(尹宣擧)에게는 강도(江都)의 일468)  과 윤휴(尹鑴)의 일이 있었는데 선정(先正)이 윤휴의 일에 대해서는 시종 윤휴를 도왔다는 것을 그르다고 했는데 그가 윤휴를 진선(進善)에 의망(擬望)한 것은 비록 윤선거의 핍박에 의해 마지못해서 한 것이지마는, 조근(趙根)에게 보내는 답서(答書)에서 입각(立脚)이 확고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자책(自責)하였습니다. 예송(禮訟)이 발론되는데 이르러 윤선거가 또 처음에 윤휴의 의논을 주장하고 나섰으나, 또 반드시 화심(禍心)이 없다는 것을 극력 변명하였기 때문에 선정(先正)이 심지어 ‘윤선거는 차라리 정자(程子)·주자(朱子)는 배반할 수 있을 망정 감히 윤휴는 배반하지 못한다.’고까지 했던 것입니다. 뒤에 윤선거가 처음의 의견을 바꾸었고 또 윤휴를 음(陰)·흑(黑)·소인(小人)에 견주면서 스스로 교도(交道)를 이미 단절했다고 했기때문에 이제야 선정이 드디어 믿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윤선거의 초상(初喪) 때 제문(祭文)에 성심으로 칭찬한 것입니다. 뒤에 그의 아들 윤증(尹拯)이 윤휴의 전뇌(奠誄)469)  를 받았다는 말을 듣게 되자 또 문득 의심을 내게 되었고 따라서 초기(初朞)의 제문(祭文)에 대략 언급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계축년470)  에 이르러 기유 의서(己酉擬書)를 얻어 보게 되었는데, 거기에 윤선거가 윤휴를 참적(讒賊)·독석(毒螫)이라 여기지 않고서 우선적으로 기용할 것을 권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전일에 음양(陰陽)과 흑백(黑白)을 가지고 논한 내용과 아주 달랐기 때문에 드디어 그의 의심이 더욱 깊어져 깨뜨릴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혹 믿기도 했고 혹 의심하기도 했던 것이니, 사세(事勢)상 으레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었을 적에는 칭찬하게 되고 의심할 때에는 배척하게 되는 것도 또한 사리(事理)에 있어 필연적인 것입니다. 강도(江都)의 일에 대해서는 선정(先正)이, 윤선거(尹宣擧)가 호란(胡亂)이 일어나기 전에 노사(虜使)471)  를 목베자는 것을 청한 일절(一節)이 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그를 위하여 조호(調護)하면서 주사(注射)가 호담암(胡澹庵)을 비난한 시(詩)472)  로 견주어 주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윤선거가 스스로 폐인(廢人)을 자처하고 학문을 연구하려 한 데에 이르러서는 또 그것이 넉넉히 허물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인정했기 때문에 비록 윤휴의 일에 대해서는 의심을 품고는 있었지만 본가(本家)의 요청을 기다리지도 않고 스스로 《삼학사전(三學士傳)》 뒤의 발문(跋文)에 언급하면서 전란이 지난 뒤 몸을 깨끗이 하여 의지(意志)를 지켰다고 칭찬하였습니다. 대개 이것은 여러 사람들의 비방속에서 그의 선행(善行)을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 실은 선정의 지극히 공평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뒤에 윤증(尹拯)이 사국(史局)에 보낸 서한이 나왔는데 거기에 의하면 윤선거의 강도(江都)에서의 일은 십분 도리에 맞는 것으로 원래 죽어야 할 의리가 없다고 하였고, 또 윤선거의 이른바 사죄신(死罪臣)이라고한 것은 임금의 소명(召命)에 달려가지 못한 일 때문에 나온 것이라고 하면서 이어 윤선거의 무술년473)  과 기해년474)  의 두 통의 상소(上疏)로써 이를 입증하였습니다. 그리고 절의(節義)로 죽은 권순장(權順長)과 김익겸(金益兼) 등을 배척하면서 반드시 죽어야 할 의리가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때에는 윤증이 선정을 헐뜯어 비난하는 서한이 발출(發出)된 지가 이미 오래 되었는데도 선정은 오히려 윤선거(尹宣擧)를 위하여 변명하면서 심지어 윤증이 윤선거의 선행(善行)을 엄몰(掩沒)시킨다고 인정하고서 그것을 윤증의 망령된 말로 돌려버렸습니다. 그러다 윤선거의 무술년(戊戌年)과 기해년(己亥年)의 두 상소(上疏)를 가져다가 상고해 보게 되자, 그것이 과연 윤증의 말과 같았기 때문에 드디어 무연(憮然)한 마음으로 그가 속임을 당한 것을 스스로 탄식하면서 그가 십분 도리에 맞는다는 것과는 상반(相反)되는 것임을 통렬하게 말한 것입니다. 이렇게 앞서는 용서하고 뒤에는 배척하게 된 것은 사세(事勢)와 도리에 있어 그만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가 인용한 바 선정신(先正臣) 송준길(宋浚吉) 선정신 박세채(朴世采)가 이러저러하다[云云]고 한 것은 또한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무릇 송준길(宋浚吉)과 선정(先正)은 뜻이 같고 도가 합치되어 진퇴(進退)를 함께 하였고 임종(臨終)할 때에 이르러서는 ‘고산앙지(高山仰止)’라는 네 글자를 써서 선정(先正)475)  을 칭찬했으니, 그를 존상(尊尙)한 것이 극진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선정을 가리켜 모두가 기관(機關)이라고 했을 이치가 있겠습니까? 정축년476)  의 서한의 경우는 신이 듣건대 송준길의 자손이 기사년477)   이후 수년 뒤 비로소 옛 서한 가운데에서 얻은 것이므로 이에 앞서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송준길의 문집(文集)을 감정(勘定)할 때에 선정(先正)이 산제(刪除)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진실로 공격하지 않아도 저절로 간파(看破)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 서한이 있는 뒤로 3,40년 사이에 송준길이 일언반구(一言半句)도 가정(家庭)에서 거론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자손들이 들어서 아는 것이 없다고 하였으니, 그것이 송준길의 정론(定論)이 아니라는 것을 또한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를 인용하여 선정(先正)을 공척(攻斥)하는 자부(資斧)로 삼을 수가 있겠습니까? 박세채(朴世采)는 스승〈송시열(宋時烈)〉과 제자 〈윤증(尹拯)〉 사이에 변(變)이 발생하였을 처음에 조정하여 보합(保合)시키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에 비록 선정에 대해서 때때로 면계(勉戒)한 것이 있었지만, 그가 윤증을 배척하는 입장은 본디 스스로 매우 중하였다는 것이 왕복한 서한에서 많이 나타났을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나양좌(羅良佐)·조득중(趙得重) 등이 박세채(朴世采)의 기사년478)  ·갑술년479)   뒤의 일을 기록하여 한 권의 책을 만들었는데, 나양좌는 그 가운데에서 ‘박세채(朴世采)가 선정(先正)이 대의(大義)를 제기했다가 사화(士禍)에 죽었다는 것을 이유로 하여 선정(先正)을 공격하는 사람들을 소인(小人)으로 만들려 하였다.’고 했고, 또 박세채가 선정(先正)을 추대하여 마침내 도봉 서원(道峯書院)에 병향(並享)하게 하였다고 지척(指斥)하였습니다. 조득중은 그 가운데에서 ‘박세채가 선정을 위하여 사설(師說)을 만들어 세도(世道)를 그르쳤다.’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박세채가 전조(銓曹)에서 윤증을 청직(淸職)에 의망(擬望)한 것은 잘못이라고 했다.’ 하였습니다. 이에 의거하여 본다면 그들이 박세채의 후래(後來)의 의논(議論)에 대해 모르는 것이 아니었는데도 지금 완전히 덮어 숨겨버리고 도리어 그것을 원용(援用)한 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이밖에도 만들어 낸 말이 진실로 한 둘이 아닙니다만, 그 가운데 큰 것을 가지고 말하여 본다면, 선정이 기해년480)  의 대상(大喪)481)  이 있은 뒤 정적(情跡)이 매우 난안(難安)482)  한 점이 있었으나 특별히 인산(因山)483)  이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괴로움을 꾹 참고 견디며 기다리고 있다가 12월 10일 무렵에 마침내 서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제 말하기를, ‘선정이 스스로 영안궁(永安宮)의 조칙(詔勅)484)  을 받지 않았다고 하고 국장(國葬)이 끝나기도 전에 바로 나갔다.’ 하면서 인하여 허다한 설화(說話)를 날조하였습니다. 대저 선정의 거류(去留)에 대한 날짜는 이미 여러 사람들이 눈으로 보아서 아는 것이고 또 국승(國乘)에도 기재되어 있으니, 만약 조사하여 오게 명하면 자연히 분변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근거없는 말을 날조하여 공공연히 멋대로 모욕을 가하고 있으니, 이외에 사사(私事)로서 문서(文書)에 없는 것이야 또 어찌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병인년485)   윤4월에 지금의 이조 판서(吏曹判書) 신(臣) 송상기(宋相琦)가 사관(史官)으로서 성상(聖上)의 명을 받들어 선정의 저술인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를 찾으러 갔다가 그 책이 다른 곳에 있었기 때문에 송상기가 다시 그곳까지 가서 가져다 바쳤습니다. 이는 사세(事勢)가 진실로 그러했던 것인데 무릇 어찌 왕인(王人)486)  을 마음대로 부렸다는 것과 근사한 점이 있습니까? 그런데도 이제 그의 말이 이와 같습니다. 그리고 병인년(丙寅年)을 정묘년(丁卯年)이라고 하고 차의(箚疑)를 어찰(御札)이라고 했으니, 그의 허망(虛罔)함이 너무도 심합니다. 당시 선정(先正)과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비록 선정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말이 있었던 것으로 인하여 선정에게 대죄(待罪)하기를 권하였지마는, 그들은 바로 고(故) 상신(相臣) 김수항(金壽恒)과 이선(李選) 등 여러 사람이었는데, 그것이 어찌 놀랍게 여겨 탄식할 일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이제 아울러 선정의 글 4,5행(行)과 함께 공공연히 근거없는 말을 날조해 지어내어 임금에게 고하기에 이르렀으니,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 글 가운데 ‘어찰(御札)’이란 두 글자를 가지고 본다면 그것이 위찬(僞撰)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계축년487)   천릉(遷陵)할 때의 서사(書辭)를 전수(全數) 베껴 들였으니, 그 의도는 실로 기미년488)  에 흉당(凶黨)들이 선정(先正)을 살해하려 했던 계책을 답습한 것입니다. 그러나 저하(邸下)께서 이미 깨달으시고 통렬하게 배척하셨으니, 다시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효종조(孝宗朝)의 독대(獨對) 때 있었던 설화(說話)는 임금과 신하가 마음이 합치되어 성심을 다하여 대의(大義)를 이루기 위한 뜻에 나온 것으로 성조(聖祖)489)  께서 마음을 개시(開示)하였고 선정이 그에 대해 대양(對揚)490)  한 것이니, 성대한 일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결점이 있기에 또한 억지로 흠점을 찾기 위해 성조(聖祖)께서 특별히 하문하신 종사(從祀)에 대한 한 조항을 가지고 선정(先正)이 먼저 발론한 데에 연유하여 나온 것이라고까지 합니까? 아! 이런데도 거짓말을 하고 있으니 다른 것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삼가 생각하건대 피차(彼此) 다투고 있는 가운데 저절로 참으로 옳고 참으로 그른 것이 있기 마련이니, 만약 문적(文迹)을 조사하여 일일이 감정(勘定)하지 않는다면 비록 이명(离明)491)  께서 살펴보시더라도 그 실상을 다 알아내기는 보장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신이 삼가 선정(先正)의 문고(文稿) 가운데 윤휴(尹鑴)와 윤선거(尹宣擧) 부자(父子)·이유태(李惟泰) 등의 일에 대해 논한 것을 골라서 한결같이 연월(年月)의 차례에 따라 기록해 내었습니다. 또 봉사(封事) 가운데 대의(大義)에 대해 진달한 것을 가져다가 합쳐서 2책으로 만들고 책 이름을 《송문정문초(宋文正文抄)》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한두 가지 문자(文字) 가운데 성조(聖祖)492)  의 지사(志事)를 드러내어 알릴 수 있는 것을 봉사(封事)의 권말(卷末)에 붙였고, 효종조(孝宗朝) 때 독대(獨對)했던 설화까지 합하여 이것을 감히 낭봉(囊封)하여 바쳤던 고사(故事)를 적용하여 아들 이종신(李宗臣)을 시켜 직접 승정원(承政院)에 바치게 함으로써 누설을 방지하도록 했습니다. 만일 저하(邸下)께서 상세히 성람(省覽)하여 주신다면 선정(先正)의 의논의 본말(本末)과 그의 행위가 주자(朱子)가 대의(大義)를 밝힌 것을 본받아 효종(孝宗)에게 충성을 다한 것을 반드시 통촉하시게 될 것입니다."
하니, 세자(世子)가 답하기를,
"경(卿)의 진변(陳辨)이 명백하다고 할 만하다. 인하여 진달한 책자(冊子)에 기록된 선정(先正)의 논의에 대한 본말(本末)을 열람하여 보니, 대의(大義)를 밝히고 성조(聖祖)493)  께 충성을 다한 것이 빠짐없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독대(獨對)할 때의 설화는 나로 하여금 감상(感想)을 일으키게 했으니, 유의(留意)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10월 6일 병술

약방(藥房)에서 들어와 진찰하였다. 임금이 면부(面部)에 있는 찬죽(攅竹) 좌우혈(左右穴)과 수부(手部)에 있는 합곡(合谷) 좌우혈(左右穴)과 족부(足部)에 있는 곤륜(崑崙) 좌우혈(左右穴)에 침을 맞았다. 마치고 나서 도제조(都提調)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북병사(北兵使) 이휘(李暉)는 그전에 회령 부사(會寧府使)로 있을 적에 수의(繡衣)494)  의 서계(書啓)에 들어 있었습니다만, 지금의 무변(武弁)은 연로(年老)한 사람도 있고 혹은 노친(老親)이 있는 사람도 있어 보낼 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북곤(北閫)495)  에 의망하여 제수했습니다. 그러나 유신(儒臣)으로서 이것을 말하는 사람이 있으니 억지로 부임(赴任)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개체(改遞)하라고 명하였다.

 

10월 7일 정해

약방(藥房)에서 들어와 진찰하였다. 임금이 면부(面部)에 있는 사죽혈(絲竹穴)과 수부(手部)에 있는 통간(通間) 좌우혈(左右穴)과 족부(足部)에 있는 임읍(臨泣) 좌우혈(左右穴)에 침을 맞았다.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서울과 지방에서 요행히 초시(初試)에 합격은 하였으나 과업(科業)에 지식이 모자란 사람은 빈번이 기복(朞服) 중에 있다느니 장사(葬事)를 지내지 않았다느니 하면서 진시 공문(陳試公文)을 낼 것을 꾀합니다. 흔히 서삼촌(庶三寸)이나 서형제(庶兄弟)가 죽었다고 하면서 가짜 이름을 날조하고 있으니, 일이 매우 통탄스럽고 놀랍습니다. 청컨대 지금부터 각 고을에서 공문(公文)을 만들어 보낼 적에 죽은 사람이 살았던 마을·호수 및 죽은 월일(月日)을 낱낱이 상세히 기록하게 한 다음 예조(禮曹)에서 이를 한성부(漢城府)로 이송(移送)하면 한성부에서 장적(帳籍)과 대조하여 조사하고 나서 진시(陳試)를 허락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혹 속인 자가 있을 경우에는 10년을 기한으로 정거(停擧)하게 하고, 그런 문서(文書)를 만들어 준 수령(守令)은 파직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이에 의거하여 항식(恒式)을 정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도승지(都承旨) 조도빈(趙道彬)이 말하기를,
"충청도(忠淸道) 별과(別科)의 장원(壯元)인 이유춘(李囿春)의 아비 이성채(李星彩)도 그 방(榜)에 참여되었습니다. 부자(父子)가 동방(同榜)이 된 것은 예전에는 있지 않았던 것인데 특별히 동방(同榜)에 붙이라고 분부하셨습니다. 단지 한때 사람들을 위열(慰悅)시키려는 방법에서 나온 것이므로 마땅히 원용하여 준례로 삼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엊그제 함경도(咸鏡道)의 별과(別科)인 무과(武科)에서 부자(父子)가 함께 참여된 자가 3인이었는데 병조(兵曹)에서 이성채(李星彩)의 일을 원용하여 말을 하였고 또 이에 홍패(紅牌)496)  를 지급하라는 명이 있었으니, 마침내 미안스러운 데 관계가 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호서(湖西)497)  의 과거(科擧)는 아들이 장원(壯元)이 되었으니 신은(新恩)의 정례(政例)로서는 으레히 6품으로 초승(超陞)시켜야 하는데 후방(後榜)으로 퇴부(退付)하는 것은 일이 매우 온편치 못하였기 때문에 동방(同榜)에 붙이라고 한 것이다. 북도(北道)의 무과(武科)는 병조(兵曹)에서 이미 홍패(紅牌)에 기록했다고 말했기 때문에 또 그대로 지급하라고 명한 것인데, 승지(承旨)의 말도 역시 옳은 듯하다. 이후로는 항식(恒式)으로 정하여 아들이 장원(壯元)이 된 경우에는 퇴부(退付)시키지 말되, 그 아들이 장원이 아닌 경우에는 아들을 후방(後榜)으로 퇴부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였다.

 

남양 부사(南陽府使) 홍호인(洪好人)이 상소하기를,
"본부(本府)에 해일(海溢)이 더욱 심하여 연사(年事)가 흉년이 들었으니, 원컨대 전결(田結)에 급재(給災)하여 주소서."
하고, 또 청하기를,
"금년 봄 진구(賑救)를 설시할 적에 옮겨온 각처의 미곡(米穀)을 모두 본부(本府)에 봉납(捧納) 유치(留置)하게 하여 주소서."
하였다. 비국(備局)에서 복주(覆奏)하기를,
"절서(節序)가 늦은 뒤에 계속적으로 급재(給災)하는 것은 반드시 모람(冒濫)된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단지 남한 산성(南漢山城)의 미곡만 봉납하여 본부(本府)에 유치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에 진달한 것을 다시 진달하고, 또 말하기를,
"과장(科場)에서 부자(父子)가 상피(相避)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선왕조(先王朝)의 영갑(令甲)498)  이 있습니다. 정시(庭試) 등의 별과(別科)에는 부자(父子)가 함께 응시하는 것을 허락은 하지만 만일 함께 참방(參榜)되었을 경우에는 그 아들을 으레 후방(後榜)으로 퇴부시킨 것은 대체로 윤기(倫紀)를 밝히고 효순(孝順)을 장려하기 위한 것입니다. 지난번 온양(溫陽)의 별과(別科)에서 이유춘(李囿春) 부자(父子)를 모두 출방(出榜)하도록 허락한 것은 실로 이는 전일에 없었던 거조였습니다. 그 뒤 함경도(咸鏡道)의 무과(武科)에서 이춘정(李春禎) 등 부자(父子)를 함께 방방(放榜)한 것도 이유춘(李囿春)의 전규(前規)를 준행한 것이므로 식자(識者)들의 놀라움과 개탄이 극심하였습니다. 엊그제 들어와 진찰할 적에 이 뒤로는 부자(父子)가 동방(同榜)이 된 자가 있을 경우 아들은 후과(後科)로 퇴부시키라는 명령이 있으셨는데, 성상께서 또 아들이 장원(壯元)이 된 경우에는 이번의 예(例)에 따라 모두 방방(放榜)할 것을 허락하는 분부가 있었습니다. 아들은 장원이 되었는데도 아비가 방하(榜下)가 되는 것은 윤기(倫紀)가 도치(倒置)되는 것이므로 구애되는 것이 더욱 대단히 큽니다. 따라서 풍교(風敎)를 손상시키고 뒷날의 폐단을 열어주는 것에 어떠하겠습니까? 성명(成命)을 정지하고 다시 항식(恒式)을 정하소서. 지난번 연석(筵席)에서 대신(大臣)의 진달로 인하여 이배(移配)할 죄인 양익표(梁益標)를 방송(放送)시키라는 명이 있으셨습니다. 양익표는 사람됨됨이가 흉한(凶悍)하고 일을 저지르는 것이 광패(狂悖)스러웠으므로 처음에 토호(土豪)가 무단(武斷)한 형률(刑律)에 의거하여 감등(减等) 유배(流配)시켰는데, 구악(舊惡)을 고치지 않고 폐단을 부리는 것이 더욱 극심합니다. 심지어 민인(民人)들이 시관(試官)에게 정소(呈訴)하는 일이 있기에 이르렀으니, 악인(惡人)을 징계하고 폐해를 제거하는 도리에 있어 진실로 엄중히 금지시키고 엄격히 다스려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이제 이배(移配)하는 즈음에 그가 가는 곳마다 행패부리는 것을 우려하여 바로 석방(釋放)하였습니다. 가령 이 뒤에는 양익표(梁益標)와 같은 자가 중죄를 지고서도 이런 전례가 있는 것을 보고 고의로 폐단을 부린다면, 장차 금즙(禁戢)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모두 용서하겠습니까? 청컨대 방송시키라는 명을 환수(還收)하소서."
하였으나, 세자(世子)가 따르지 않았다. 대개 양익표(梁益標)는 본디 무뢰한(無賴漢)으로서 무과(武科)에 참방(參榜)되었다. 일찍이 술에 취하여 그 고을의 수령을 구타한 적이 있는데 여기에 좌죄(坐罪)되어 관서(關西)에 유배(流配)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도신(道臣)이 본도(本道)에 흉년이 들었다는 것을 이유로 장계(狀啓)를 올려 도내(道內)의 여러 죄수들을 타도(他道)로 옮겨 줄 것을 청하였는데,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양익표(梁益標)가 죄를 짓고 귀양간 지가 이미 1년이 지났고 그가 가는 곳마다 폐단을 일으켜 백성들이 그 고통을 감내하지 못하고 있으니, 마땅히 이배(移配)하는 것으로 인하여 방송해야 하겠습니다.’ 하여, 드디어 완전히 석방되었기 때문에 대관(臺官)이 여러 달을 간쟁하였으나 끝내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에 진달한 것을 다시 진달하고, 또 말하기를,
"금교 찰방(金郊察訪) 김홍보(金弘寶)는 말을 훈련시키는 정사를 전폐하고 오직 자신을 살찌우기만을 힘썼으며, 역비(驛婢)들 가운데 조금 자색(姿色)이 있는 사람이면 문득 꾀어다가 음행(淫行)을 저질렀으므로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스스로 목매어 죽기에 이르렀으니, 청컨대 나문(拿問)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였으나, 세자(世子)가 따르지 않았다.

 

10월 10일 경인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에 진달한 것을 다시 진달하였으나, 세자(世子)가 김홍보(金弘寶)의 일만 따랐다.

 

약방(藥房)에서 들어와 진찰하였다. 임금이 수부(手部)에 있는 삼간(三間) 좌우혈(左右穴)에 침을 맞았다. 마치고 나서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열성(列聖)의 지장(誌狀)499)  을 개간(改刊)하는 일에 대해 이미 성명(成命)이 있었습니다. 효종(孝宗)의 지문(誌文)은 처음에는 내용이 누설될 것을 우려하여 상재(上梓)500)  하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공사(公私)의 문적(文籍)에서 그다지 기휘(忌諱)하지 않고 있습니다.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의 문집(文集)도 장차 간행하려 하고 있으니, 이 지문(誌文)도 마땅히 그 속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유독 열성(列聖)의 지장(誌狀)만 끝내 재록(載錄)하지 않아서 성조(聖祖)의 지업(志業)으로 하여금 일체(一體)로 만대(萬代)에 환하게 빛나게 하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대단히 흠결(欠缺)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지금 개간(改刊)할 적에 모두 입록(入錄)시키는 것을 그만둘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주달(奏達)한 말이 매우 옳다. 모두 입간(入刊)하게 하라."
하였다.

 

10월 11일 신묘

약방(藥房)에서 들어와 진찰하였다. 임금이 면부(面部)에 있는 거료(巨髎)와 신문(神門)의 좌우혈(左右穴)에 침을 맞았다.

 

10월 12일 임진

조명겸(趙鳴謙)을 장령(掌令)으로, 어유귀(魚有龜)·황귀하(黃龜河)를 부교리(副校理)로, 백시구(白時耉)를 함경북도 병마 절도사(咸鏡北道兵馬節度使)로 삼았다.

 

10월 13일 계사

청(淸)나라에서 정사(正使) 일강관 기거주 한림원 시독 학사(日講官起居注翰林院侍讀學士) 아극돈(阿克敦)과 부사(副使) 난의위치의정 겸좌령(鑾儀衛治儀正兼佐領) 장정매(張廷枚)를 보냈는데, 패문(牌文)501)  이 먼저 도착하였다. 의주(義州)의 수신(守臣)과 평안도(平安道)의 도신(道臣)이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이는 우리 나라의 재자관(䝴咨官) 이추(李樞) 등이 이미 연경(燕京)에 이르렀는데, 예부(禮部)에서 우리 나라의 자문(咨文)502)  에 ‘임금의 건강이 편안하지 못한 탓으로 공청(空靑)503)  이 필요하여 사신을 차견하여 무역(貿易)하게 하여줄 것을 청한다.’ 한 내용을 주문(奏聞)하니, 청나라 임금이 즉시 아극돈 등을 보내어 어부(御府)에 있는 공청(空靑) 1매(枚)를 가져다 주게 한 것이다. 아극돈 등의 일행(一行)이 이달 기해일(己亥日)에 압록강(鴨綠江)을 건넜다.

 

민진원(閔鎭遠)을 원접사(遠接使)로, 송상기(宋相琦)를 관반(館伴)으로 삼았다.

 

정시(庭試)를 설행(設行)하여 문과(文科)에 이거원(李巨源) 등 5인과 무과(武科)에 박지흥(朴枝興) 등 68인을 뽑았다.

 

임금이 특별히 분부를 내려 우의정(右議政) 조태채(趙泰采)에게 유시(諭示)하기를,
"전후 소장(疏章)에 대한 비답(批答)에서 이미 지극한 뜻을 다 말하였다. 지금 객사(客使)의 패문(牌文)이 나왔는데 묘당(廟堂)이 텅 비었으니, 이는 더욱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경(卿)은 즉일(卽日)로 나와서 시사(視事)함으로써 나의 기대에 부응(副應)토록 하라."
하였다. 조태채(趙泰采)가 다시 상소(上疏)하여 사면(辭免)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批答)을 내려 위유(慰諭)하고 이어 사관(史官)과 함께 올 것을 명하였다. 조태채가 마침내 출사(出仕)하여 시사(視事)하였다.

 

옷이 얇은 군사들에게 유의(襦衣)504)  를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이명(李頤命)이 오랫동안 도성(都城) 밖에 있었는데 임금이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함께 오게 하고, 잇따라 특별한 분부를 내려 돈소(敦召)하니, 이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도성으로 들어왔다.

 

10월 14일 갑오

조상경(趙尙絅)을 정언(正言)으로, 홍만조(洪萬朝)를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삼았다.

 

10월 15일 을미

유명홍(兪命弘)·안중필(安重弼)을 승지(承旨)로, 김유경(金有慶)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10월 16일 병신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칙사(勅使)가 홍제원(弘濟院)에 도착했을 때에는 으레 영상(領相)과 도승지(都承旨)가 나가는 것이 준례이다. 지금 비록 약원(藥院)에 직숙(直宿)하고 있지마는 모두 전례에 따라 나가는 일로 분부하라."
하였다.

 

10월 19일 기해

밤 5경(五更)에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10월 20일 경자

심택현(沈宅賢)을 승지(承旨)로, 김석연(金錫衍)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홍만우(洪萬遇)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이희조(李喜朝)를 찬선(贊善)으로, 김간(金幹)을 진선(進善)으로 삼았다.

 

10월 21일 신축

유성(流星)이 규성(奎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의 하늘가로 들어갔다.

 

약방(藥房)에서 들어와 진찰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조태채(趙泰采)도 함께 들어와 진찰하였는데, 진찰을 끝낸 뒤에 도제조(都提調)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왕세자(王世子)의 청정 절목(聽政節目)은 한결같이 세종조(世宗朝)의 전례에 따라 용인(用人)·형인(刑人)·용병(用兵) 외의 서무(庶務)는 모두 세자에게 재결(裁決)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객사(客使)와 변보(邊報) 등에 관한 일은 처음에 명백하게 판하(判下)하지 않았으니, 의당 정탈(定奪)505)  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객사(客使)와 변보(邊報)는 저절로 서무(庶務)에 들어 있는 것이니, 모두 동궁(東宮)에게로 입달(入達)하라."
하였다. 김창집이 아뢰기를,
"성후(聖候)가 〈편안하지 못하여〉 바야흐로 조섭중(趙攝中)에 계시는 까닭에 교영(郊迎)506)  하는 절차는 사세(事勢)상 할 수가 없겠습니다. 그런데 이를 왕세자(王世子)에게 대신 행하게 하는 것은 저들이 발언(發言)하기 전에 경솔히 먼저 행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조태채에게 하문하였다. 조태채가 대답하기를,
"이번 칙사(勅使)의 행차는 전과는 다름이 있습니다. 따라서 춘궁(春宮)께서 대신 행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정축년507)   이후 인조조(仁祖朝)에서는 아예 교영(郊迎)한 적이 없었고, 효종(孝宗)께서 춘궁(春宮)으로 계실 적에는 매양 대신 행하였으니 지금도 또한 대신 행하게 하는 것이 불가할 것이 없을 것 같다. 칙사(勅使)가 홍제원(弘濟院)에 도착한 뒤에 대신(大臣)이 먼저 대신 행하게 하겠다는 뜻을 말하도록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그전에 인정전(仁政殿)에서 칙서(勅書)를 선포(宣布)할 때에는 칙서(勅書)를 받아 보고 나서 안상(案上)에 올려놓은 뒤 행례(行禮)했었다. 지금은 의당 편전(便殿)에서 접견(接見)해야 하는데, 다만 안질(眼疾)이 이러하여 칙서를 볼 수가 없다. 그렇다고 배례(拜禮)만 행하는 것은 좀 수상(殊常)한 데에 관계될 것 같으니, 다른 사람을 시켜 읽게 한 뒤에 비로소 행례하는 것이 사의(事宜)에 맞을 것 같다."
하니,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편전(便殿)에서 접견할 때 동궁(東宮)도 나와서 참여해야 됩니까?"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이미 교영(郊迎)을 하였으면 또한 나와서 참여하여야 할 것이다."
하였다. 조태채가 말하기를,
"이는 칙서(勅書)를 선포(宣布)하는 것과는 달라서 봉칙관(奉勅官)은 편정에 들어오게 할 수 없습니다. 예방 승지(禮房承旨)에게 선독(宣讀)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예방 승지(禮房承旨)로 하여금 칙서를 읽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칙사(勅使)의 일행이 서울에 들어온 뒤에 사은사(謝恩使)를 즉시 차출(差出)하여야 되는데 지금 종반(宗班) 가운데 늙고 병든 사람을 제외하고는 적합한 사람이 없으니, 의당 대신(大臣)을 차송(差送)해야 하겠습니다."
하고, 조태채는 말하기를,
"이번에는 의당 별도의 치사(致謝)하는 거조가 있어야 하니, 대신을 차송(差送)하는 것이 진실로 사의(事宜)에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대신 가운데 행공(行公)하는 사람이 매우 적으니, 의빈(儀賓) 가운데에서 뽑아 보내게 하되 12월 안에 배표(拜表)508)  하도록 하라."
하였다. 조태채가 말하기를,
"국가에서 권무청(權武廳)을 설립한 것은 무재(武才)를 배양하기 위한 조처였는데 근래에는 전혀 사람을 가리지 않기 때문에 거개가 구차스럽게 충원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등과(登科)한 뒤에 심지어 선전관(宣傳官)에 막힘을 당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는 창립한 본뜻에 매우 어긋나는 일이니 이 뒤로는 궐원(闕員)을 보충할 적에 의당 현보(懸保)509)  하게 해야 합니다. 또 사조(四祖)510)  의 단자(單子)를 받아 가지고 그 문지(門地)511)  를 살펴본 뒤에 예속시키는 것을 허락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권무청(權武廳)을 설치한 때에는 의도가 있는 것인데 모람(冒濫)된 것이 이와 같으니, 대신의 진달한 말이 옳다. 이에 의거하여 신칙(申飭)하도록 하라."
하였다. 민진후가 말하기를,
"수어청(守禦廳)과 총융청(摠戎廳)의 군병(軍兵)을 두루 돌면서 점열(點閱)하는 일에 대해서는 이미 정탈(定奪)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칙사(勅使)의 행차를 만나 곤란한 일이 많으니 내년 봄을 기다려 다시 계품(啓稟)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게 하였다.

 

10월 22일 임인

박성로(朴聖輅)를 헌납(獻納)으로, 윤양래(尹陽來)를 사간(司諫)으로 삼았다.

 

10월 23일 계묘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건명(李健命)이 면직(免職)되었다. 이건명이 본병(本兵)512)  에 있은 지 이미 오래 되었으나 정무(政務)를 너그럽게 하려고 힘썼기 때문에 사졸들이 편안하게 여겼다. 이때에 이르러 병을 핑계하여 정고(呈告)하자 드디어 면직되었다.

 

최석항(崔錫恒)을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삼았다.

 

10월 24일 갑진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기를,
"근래 칙사(勅使)가 나오게 되어도 오랫동안 편전(便殿)에서 접견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어전(御前)에 입시하는 관원(官員)이 생소한 나머지 의절(儀節)에 실수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내일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의식(儀式)을 미리 배워 익히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10월 25일 을사

승정원(承政院)에서 청하기를,
"편전에서 칙사(勅使)를 접견할 적에 영의정(領議政)·도승지(都承旨)·예방 승지(禮房承旨)와 한림(翰林)·주서(注書) 각 1원(員)씩과 어전 통사(御前通事) 및 청역(淸譯)513)   1인을 입시(入侍)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우상(右相)도 입시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10월 26일 병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도승지(都承旨) 조도빈(趙道彬)을 보내어 홍제원(弘濟院)에 가서 청사(淸使)를 맞이하게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권상하(權尙夏)가 현도(縣道)를 통하여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이 이세덕(李世德)의 공사(供辭)를 얻어보니, 신의 스승인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을 무욕(誣辱)한 것이 끝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없는 것을 가리켜 있다 하고 흰 것을 가리켜 검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이른바 ‘귀신이 한 수레에 실린 것514)  이라.’고 할 만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처분(處分)이 명쾌하여 즉시 투비(投畀)515)  의 형벌을 실시하여 귀역(鬼蜮)같은 간괴(奸魁)로 하여금 태양 아래에서 그 계책을 부리지 못하게 하였으니, 사문(斯文)과 세도(世道)가 영구히 힘입을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가 허위의 사실을 날조하여 한 말에 대해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해명할 수는 없습니다. 신은 문정(文正)의 문인(門人)으로서 당연히 한 통의 상소(上疏)로써 변명해야 하는데, 대사헌(大司憲) 이희조(李喜朝)의 상소에서 그 가운데 뚜렷이 드러나 신언(伸言)해야 할 것에 대해 이미 다 밝혔고 또 특별한 감납(鑑納)을 받았으니, 신이 어찌 감히 다시 번독(煩瀆)스럽게 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그렇지만 옛사람은 자기의 스승이 남에게 비난을 받으면 감히 소명(召命)을 받들어 달려가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세덕(李世德)이 신의 스승에게 추욕(醜辱)을 가한 것은 비난하는 정도뿐만이 아니므로, 이것이 또 신이 나아가기 곤란한 하나의 단서인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저하(邸下)께서는 지극한 정성을 굽여 살피시어 속히 명하여 직질(職秩)을 환수(還收)하시면 공사(公私)가 모두 다행스럽겠습니다. 신이 상소(上疏)를 완성한 다음 신의 스승의 계축년516)   5월의 서찰을 조사하여 보았는데, 그때의 정승인 김수흥(金壽興)이 처음 의정부(議政府)에 들어가서 서찰로 임금을 찬양(贊揚)하는 모책(謨策)에 대해 문의하니, 신의 스승이 답하기를, ‘마땅히 어떤 일과 어떤 일로써 임금 앞에서 진달하여 그른 것은 제지하고 옳은 것은 시행하게 해야 합니다.’ 하였습니다. 이는 그 당시 신의 스승이 대죄(待罪)하고 있는 중이어서 감히 소장을 진달하지 못하고 충성을 바치고 싶은 일은 당시의 정승에게 촉탁한 것입니다. 그 원서(元書)에는 ‘오늘날 조용히 임금을 계도하여 성심(聖心)을 깨우치게 하는 그 책임이 집사(執事) 〈김수흥(金壽興)에게〉 있지 않습니까?’ 하였고, 별지(別紙)에 또 말하기를, ‘오늘날 계도하여 성심(聖心)을 깨우치게 할 책임이 전적으로 집사에게 있으니, 새로 중임(重任)을 맡았다는 것으로 머뭇거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하였습니다. 이것을 살펴보면 일편단심으로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세덕(李世德)은 이 몇 마디 말을 완전히 빼버리고서는 마치 아무 까닭도 없이 발언(發言)한 것처럼 하였으니,  【곧 이세덕(李世德)의 공사(供辭)에서 인용한 바 온천(溫泉)에 거둥한다는 등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이 일은 이미 휘찰(徽察)을 받아 심지어 ‘실상 기미년517)  에 흉당(凶黨)들이 선정(先正)을 살해하려는 계책을 답습한 것이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처분이 이러하니 다시 변명할 것이 없습니다. 때문에 이희조(李喜朝)의 상소(上疏)에서도 상세히 진달하지 않았으며 신은 또 일이 오래 전에 있었던 것이므로 저하(邸下)께서 신의 스승의 본심(本心)이 이와 같았다는 것을 혹시 상세히 모르실까 염려한 나머지 이와 같이 감히 우러러 폭로(暴露)하는 것입니다. 삼가 굽어 살피시기 바랍니다."
하니, 세자(世子)가 답하기를,
"전후 서본(書本)에 대한 하답(下答)에서 근간(懃懇)한 뜻을 다 갖추 일렀다. 더구나 지금은 직위가 중태(中台)518)  의 자리요 또 사부(師傅)를 겸무하고 있으니, 내가 존신(尊信)하면서 도와서 완성시켜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욱 다시 어떠하겠는가? 도(道)를 논하고 나라는 다스리는 그 책임이 지극히 무거우니, 임금을 보좌하는 도리에 있어 결코 한결같이 겸손하고 사양함으로써 목마른 듯이 기다리는 나의 생각을 저버려서는 안된다. 이세덕(李世德)의 공사(供辭) 가운데 선정(先正)을 끝없이 무욕하였으니, 이보다 더 놀랍고 통분스러운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상서(上書) 끝에 진달한 내용에서 더욱 선정의 나라 일을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정성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이세덕이 허위의 사실을 날조한 정상이 더욱 통분스럽다."
하였다.

 

10월 27일 정미

청(淸)나라의 사신(使臣)이 서울에 들어오니 왕세자(王世子)가 서교(西郊)에 나가서 맞이하였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서 칙사(勅使)를 접견하였는데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 우의정(右議政) 조태채(趙泰采), 도승지(都承旨) 조도빈(趙道彬), 우승지(右承旨) 심택현(沈宅賢) 등이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방 안의 이석(離席)519)  으로 나아가니 심택현이 황제의 지의(旨意)를 낭독했는데, 그 내용에 이르기를,
"황제가 행궁(行宮)520)  에 주필(駐蹕)하고 있으면서 한림 학사(翰林學士) 아극돈(阿克敦)과 치의정(治儀正) 장정매(張廷枚)를 불러들여서 유시하기를, ‘조선왕(朝鮮王)이 안정된 가운데 법을 잘 봉행하여 백성들이 40여 년 동안 애대(愛戴)하여 왔으니, 나라 안에서 태평을 누린 복이 이렇게 오래인 경우는 아직 있지 않았다. 따라서 짐(朕)이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예부(禮部)에서 주청(奏請)한 내용을 열람하여 보건대 「조선왕이 병으로 인하여 공청(空靑)을 구매(購買)하게 하여 줄 것을 대신 아뢰어 달라」라 하였다. 짐은 왕이 병을 앓고 있다는 말을 듣고 매우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공청(空靑)은 짐이 있는 곳에 있으므로 즉시 행재소(行在所)521)  에서 특별히 그대들을 선발하여 가지고 가서 하사하게 하겠다. 이는 격외(格外)의 은전(恩典)에 관계되는 것이니 모든 예절(禮節)을 그대들이 도착하였을 적에 왕으로 하여금 성례(成例)에 구애되는 일이 없게 하라. 처지에 따라 만나보고 이런 내용을 전유(傳諭)하도록 하라."
하였다. 다 읽고 나자 임금이 배례(拜禮)를 행하고 나서 칙사(勅使)와 다례(茶禮)를 행하고 파하였다. 칙사가 나가고 나자 약방 제조(藥房提調) 민진후(閔鎭厚)도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공인(工人)을 불러 공청(空靑)을 가져와서  【그 모양은 둥글고 크기는 은행(銀杏)만 하였다.】  구멍을 뚫어보니 습기(濕氣)가 있는 듯하였으나 장즙(漿汁)은 전혀 없었다. 안부(眼部)에 떨어뜨려 넣었으나 속눈썹만 조금 적셨을 뿐이었다. 이날 여러 신하들이 실망(失望)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10월 28일 무신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원접사(遠接使) 민진원(閔鎭遠)은 겨우 특별히 시관(試官)으로 파견되어 관서(關西)에 갔다가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빈접(儐接)의 임무를 맡기셨습니다. 그 곳을 갔다오는 즈음 노고가 쌓여 병이 났으니, 의당 체직해야 합니다. 그리고 따로 반송사(伴送使)를 차출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0월 29일 기유

비국(備局)에서 의관(醫官) 이시필(李時弼)을 나문(拿問)할 것을 계청(啓請)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공청(空靑)을 시험해 보고 나서 이시필(李時弼)에게 명하여 청사(淸使)에게 말하게 하였는데, 이시필이 잘못 말하기를, ‘장즙(漿汁)이 겨우 한 번 점안(點眼)할 정도를 얻었다.’고 하였다. 다음날 임금이 승지(承旨)를 보내어 치사(致謝)하면서 전혀 장즙이 나오지 않아서 실지로 접안하지 못하였다고 말하니, 청사(淸使)가 전후 전하는 말이 같지 않은 이유로써 사실이 아닌가 의심했기 때문에 누차 왕복하게 되었다. 그래서 비국(備局)에서 이시필(李時弼)이 사실과 틀리게 전달한 것을 이유로 죄줄 것을 청하였다.

 

중시(重試)를 베풀어 문과(文科)에 권세항(權世恒) 등 5인과 무과(武科)에 이만상(李萬相) 등 10인을 뽑았다.

 

10월 30일 경술

유성(流星)이 동정성(東井星) 아래에서 나아와 손방(巽方)의 하늘가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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