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60권, 숙종 43년 1717년 11월

싸라리리 2025. 11. 30.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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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신해

날씨가 추웠기 때문에 옷이 얇은 군사(軍士)들에게 유의(襦衣)522)  를 내리라고 명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에 진달한 것을 다시 진달하고 또 말하기를,
"이시필(李時弼)에게 상을 줄 만한 공이 없는데도 앞질러 먼저 가자(加資)한 것도 본디 물정(物情)에 만족스럽지 못한 처사였는데, 더구나 말을 잘못 전하여 시끄러운 사단을 야기시킨 죄는 법에 있어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결코 명분없는 상을 죄가 있는 사람에게 베풀어서는 안됩니다. 역관(譯官) 이추(李樞)도 자문(咨文)을 가지고 왕래한 것에 불과합니다. 하물며 의관(醫官)의 가자(加資)도 그대로 제수해서는 안되는데 이추는 그와 함께 일한 사람으로 혼자서는 외람되이 상을 받을 수 없으니, 청컨대 이시필과 이추의 가자를 모두 환수시키소서."
하였으나, 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11월 2일 임자

청사(淸使)인 상사(上使)·부사(副使)와 통관(通官)들이 한 방에 회좌(會坐)하였는데, 청사가 역관(譯官)들을 불러들여 요구하는 물품(物品) 수십 가지를 써서 붙여 보냈다. 거기에 인삼(人蔘)이 2근이고 초피(貂皮)가 2백 영(領)인데, 다른 물품도 모두 이와 같았다. 영접 도감(迎接都監)에서 진달하니, 세자(世子)가 참작하여 지급하게 하였다.

 

청사(淸使)가 내일 돌아가려고 하니, 임금이 우의정(右議政) 조태채(趙泰采)를 보내어 더 머물기를 권하였다.

 

11월 3일 계축

동지사(冬至使) 유명웅(兪命雄)·남취명(南就明)과 서장관(書狀官) 이중협(李重協)이 청국(淸國)으로 갔다.

 

청사(淸使)인 상사(上使)·부사(副使)가 출발하였다. 그들이 연도(沿途)에서 지은 시 5편(篇)을 그들이 지나가는 각처에 새겨서 걸게 하였다.

 

지평(持平) 황선(黃璿)이 상서(上書)하기를,
"지난번 연석(筵席)에서의 진달로 인하여 삼남(三南)의 개량(改量)을 한꺼번에 모두 거행할 것으로 이미 지부(地部)523)  에서 각도(各道)에 관문(關文)을 보냈습니다. 무릇 경계(經界)를 바루는 정사는 국가에 있어 급무(急務)인 것이므로 한번 이정(釐正)하는 것은 그만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호남(湖南)·영남(嶺南)의 여러 도(道)에 해마다 기근(飢饉)이 들다가 금년에는 조금 풍년이 들기는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지쳐온 끝이어서 조잔(凋殘)이 또한 심한데, 그 가운데 연해(沿海)의 고을은 큰 흉년을 면하지 못했고 산군(山郡) 가운데도 재앙을 입은 곳이 많아서 굶주려 피곤한 정상이 지난해와 다름이 없습니다. 돌아보건대, 이제 양전(量田)을 검칙(檢飭)하는 일은 역사(役事)가 크고도 긴요하여 임장(任掌)이 왕래할 즈음에 전부(田夫)들이 접대할 적에 요구에 의해 공구(供具)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입니다. 저 가까스로 살아남은 백성들이 장차 어떻게 지탱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의 우견(愚見)으로는 우선 1,2년쯤 기다렸다가 조금 풍년이 든 다음에 거행하는 것이 실로 시의(時宜)에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세자(世子)가 답하기를,
"경계(經界)를 바루는 정사는 국가에서 중히 여기는 것이므로 단연코 그만둘 수 없다."
하였다.

 

청사(淸使)가 내일 돌아가겠다고 말하였는데 요구한 물건 가운데 외방(外方)에 분정(分定)한 것이 자신들의 뜻에 차지 않는다는 것을 이유로 저물녘이 되도록 군령(軍令)을 내지 않고 있었다. 때문에 세자(世子)가 전송하러 나가려 하였으나 시각(時刻)을 맞출 수가 없었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차비 역관(差備譯官)이 잘 개유(開諭)하지 못한 탓이라는 것을 이유로 죄를 다스릴 것을 계청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11월 5일 을묘

청사(淸使)가 돌아가니, 세자(世子)가 서교(西郊)에 나가 전송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에 진달한 것을 다시 진달하고 또 말하기를,
"공청(空靑)의 장즙(漿汁)이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아서 끝내 점안(點眼)하여 시험해 볼 수 없었으므로 군신(群臣)들의 실망(失望)을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의관(醫官) 이시필(李時弼)이 감히 1차 점안(點眼)하였다는 말로 관소(館所)에 전하여 함부로 시끄러운 사단을 도발(挑發)시킴으로써 끝내 저들로 하여금 승지(承旨)가 가서 전한 임금의 분부를 믿지 못하게 만들었으니, 그가 나라를 욕되게 한 것이 어떠합니까? 약원(藥院)에 가서 불러서 물어보았을 적에도 거짓말을 꾸며 이야기하여 사실과 틀리게 전달한 자취를 숨겼으니, 이랬다저랬다 한 정태(情態)가 더욱 절통(切痛)합니다. 청컨대 해부(該府)로 하여금 엄중히 국문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세자(世子)가 따르지 않았다.

 

홍은(洪蒑)을 장령(掌令)으로, 김취로(金取魯)를 지평(持平)으로, 민진후(閔鎭厚)를 좌참찬(左參贊)으로 삼았다.

 

11월 6일 병진

밤에 번개가 쳤다.

 

선혜청(宣惠廳)에서 말하기를,
"지난해 흉년이 든 탓으로 호서(湖西)·호남(湖南)·영남(嶺南)의 감영(監營)에 관청(官廳) 수요(需要)를 모두 8분의 1을 감하였고 각종 응하(應下)524)  할 것도 8분의 2를 감하였으므로, 경기(京畿) 감영(監營)의 잡비(雜費)도 8분의 2를 감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연사(年事)가 조금 넉넉해져 신결(新結)의 전세(田稅)도 이미 받았으니, 청컨대 이제 10월부터 복구(復舊)할 것을 알리게 하소서."
하니, 세자(世子)가 그렇게 하게 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에 진달했던 것을 다시 진달하니, 세자가 이시필(李時弼)의 일만 따랐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에 진달하였던 것을 다시 진달하고 또 말하기를,
"장령(掌令) 홍은(洪蒑)은 노쇠(老衰)하고 아둔 용렬하여 그전에도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는 비난이 있었는데 이제 새로 임명한 데에 이르러 물정(物情)이 모두 놀라고 있으니, 청컨대 개정(改正)하소서. 전형(銓衡)의 직임은 곧 인재(人才)를 헤아리는 것입니다. 봉상정(奉常正) 김만주(金萬胄)는 대직(臺職)에 적합하지 않다는 말이 수차 대평(臺評)에서 발론되어 여러 해 동안 저지되어 오던 끝에 갑자기 장헌(掌憲)525)  에 의망(擬望)되었으니, 청컨대 이조(吏曹)의 해당 당상관(堂上官)을 추고(推考)하소서."
하였으나, 세자(世子)가 따르지 않았다. 그 뒤 지평(持平) 김취로(金取魯)가 상서(上書)하기를,
"홍은(洪蒑)이 나이가 비록 늙기는 하였으나 아둔 용렬한 부류는 아닌데 동료(同僚)가 쉽사리 구단(句斷)526)  하였으니, 이는 실로 평윤(平允)527)  하게 하는 도리가 아닌 것입니다."
하니, 발계(發啓)한 장령(掌令) 조명겸(趙鳴謙)이 말이 믿음을 받지 못하였다는 것을 이유로 인피(引避)하자 김취로(金取魯)도 또한 인피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조명겸은 체차시키고 김취로는 출사(出仕)하게 하라고 처치(處置)하였다.

 

11월 7일 정사

천둥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에 진달한 것을 다시 진달하고 또 말하기를,
"객사(客使)가 나왔을 적에 의주(義州)의 백성들이 모두 모여 길을 막고 기황(饑荒)이 특별히 극심하니 기황을 구제하게 하여 줄 것과 환자곡[還上穀]과 신역(身役)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등의 말을 가지고 객사(客使)에게 호소하자, 객사가 말을 머물러 세우고 위로한 다음 돌아가 황상(皇上)에게 주문(奏聞)하겠다고 대답하였다 합니다. 이는 실로 전고에 없었던 변괴이니 본도(本道)로 하여금 수창인(首唱人)을 조사해 내어 형률에 의거하여 처단하게 하소서. 의주(義州)를 맡긴 의도가 본디 범연한 것이 아닌데 이러한 전일에 없던 변괴가 발생했으니 그 백성들을 잘 단속하지 못한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청컨대 해당 지방관(地方官)을 파직시키소서. 그리고 이번 공청(空靑)을 가지고 온 것에 대해 백성들이 사사로이 치사(致謝)할 수 없는 것인데, 황주(黃州)·송도(松都)의 백성들이 길가에 모여서 객사(客使)에게 치사(致謝)하였다고 합니다. 일이 놀랍고 한탄스럽기가 이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청컨대 양도(兩道)로 하여금 수창인(首唱人)을 찾아내어 형률에 의거하여 죄를 매기게 하소서."
하니, 세자(世子)가 의주(義州)의 백성들의 일에 대해 답하기를,
"전일에 듣지 못하던 일이므로 진실로 매우 놀라운 일이다. 수창인(首唱人)을 본도(本道)로 하여금 조사하여 신문(申聞)하게 한 다음 품처(稟處)케 하라."
하고, 나머지는 따르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에 진달한 것을 다시 진달하고 또 말하기를,
"남부(南部)의 참봉(參奉) 봉반(奉盤)은 외람되이 사적(仕籍)에 통하였으므로 물정(物情)이 비웃고 손가락질하였는데, 지금 방역(坊役)을 고르게 하지 못하여 백성들의 원망이 떼 지어 일어나고 있으니, 청컨대 태거(汰去)시키소서."
하였으나, 세자(世子)가 따르지 않았다.

 

지평(持平) 김취로(金取魯)가 상서(上書)하기를,
"이번 객사(客使)가 규정 밖에 요구한 물품의 수량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외방(外方)의 네 곳에 별도로 요청한 물품에 이르러서는 강제로 도감(都監)으로 하여금 행문 이첩(行文移牒)하게 하였으니, 이는 더욱 전에 없던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이런 경우 차비 역관(差備役官)들이 당연히 전례에 의거 개유(開諭)하여 안에서 저지시켰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도리어 붓대를 잡고 써내어 방자하게 와서 보였고, 이 때문에 이미 정해진 기일(期日)을 물리게 함으로써 학가(鶴駕)528)  로 하여금 나가려 하다가 또 그에 따라서 도로 정지하게 하였으니, 일이 통탄하고 놀랍기가 이보다 더할 수 없습니다. 전례에 따라 죄를 매기는 것은 마땅하지 않으니, 원컨대 각별히 무겁게 죄를 매기게 하소서."
하고, 끝에 가서 말하기를,
"부자(父子)가 동방(同搒)이 되는 것은 윤기(倫紀)에 손상이 있게 되고, 양익표(梁益標)를 바로 석방하는 것은 법의(法意)에 어긋납니다."
하니, 세자(世子)가 답하기를,
"역관(譯官)에 대한 일은 마땅히 원정(原情)을 살펴보고서 조처하겠다. 부자(父子)가 동방(同榜)이 된 것과 양익표의 일은 어제 진달한 내용에 대한 하답(下答)에서 이미 말하였다."
하였다.

 

약방(藥房)에서 들어와 진찰하였다. 임금이 면부(面部)의 동자료(瞳子髎)와 수부(手部)에 있는 신문(神門) 좌우혈(左右穴)과 족부(足部)에 있는 태충(太衝) 좌우혈(左右穴)에 침을 맞았다.

 

11월 8일 무오

강원 감사(江原監司) 김상직(金相稷)이 장계(狀啓)를 올려 회양(淮陽)·금성(金城) 두 고을의 흉참(凶慘)스러움을 진달하고 대동세(大同稅)를 감면해 줄 것을 청하였다. 또 상평청(常平廳)·진휼청(賑恤廳)의 모곡(耗穀)을 획급(劃給)해 주기를 청하였다. 비국(備局)에서 복주(覆奏)하기를,
"청컨대 호조(戶曹)의 모곡(耗穀) 8백 석을 금성(金城)에 획급하고, 회양(淮陽)에는 전세(田稅)와 대동세(大同稅)를 반감(半減)하게 하소서."
하니, 세자(世子)가 그대로 따랐다.

 

11월 9일 기미

민진후(閔鎭厚)를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삼았다.

 

11월 10일 경신

식년 전시(式年殿試)를 베풀어 문과(文科)에 유복명(柳復明) 등 42인과 무과(武科)에 김세정(金世鼎) 등 1백 93인을 뽑았다.

 

약방(藥房)에서 들어와 진찰하였다. 임금이 면부(面部)에 있는 찬죽(攢竹) 좌우혈(左右穴), 수부(手部)에 있는 전곡(前谷) 좌우혈(左右穴), 족부(足部)에 있는 삼리(三里) 좌우혈(左右穴)에 침을 맞았다. 도제조(都提調)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평안 감사(平安監司) 김유(金楺)의 장계(狀啓)에 의하면 서도(西道)에 재황(災荒)이 매우 심하니 돈을 주조(鑄造)하여 진구(賑救)에 보태게 해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묘당(廟堂)의 의논들이 어떤 사람은 ‘지방은 경중(京中)과 달라서 돈의 주조를 허락해도 해로울 것이 없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만일 돈을 통행하게 하려면 돈이 이렇게 귀하니 더 주조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호조 판서(戶曹判書) 권상유(權尙游)만은 유독 곤란하다고 하고, 원임 대신(原任大臣)은 말하기를, ‘지금 돈은 귀하고 은(銀)은 천하니 변통시키는 일이 없을 수 없다.’ 하였는데, 전에 주상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으므로 감히 앙품(仰稟)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전의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돈에 대한 폐단이 매우 많았다. 우리 나라도 돈을 통행시킨 지가 이미 오래 되어 폐단이 점차 생기기 때문에 봄 사이에 대신들이 차자(箚子)를 올려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관서(關西)에서 장계를 올려 청한 것이 또 이와 같으니, 우선 시험삼아 서도(西道)에서 주조하게 하여 그 이해(利害)를 살펴보는 것도 또한 무방하겠는가?"
하였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우의정(右議政) 조태채(趙泰采)의 의견도 경중(京中)에는 폐단이 있을 것이니 지방에서 시험해 보는 것이 마땅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지방은 경중(京中)과 다르니, 우선 주조를 허락한다."
하였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이미 주조를 허가하셨으면 의당 달수에 기한을 두어야 하는 일이 있어야 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6개월을 기한으로 주조를 허가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였다. 김창집이 또 말하기를,
"지난번 연석(筵席)에서 신이 각종 신포(身布)를 전례에 따라 항식(恒式)으로 정함에 있어 돈 2냥 반을 한 필 값으로 절정(折定)하자는 내용으로 품정(稟定)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뒤 충청 감사(忠淸監司) 윤헌주(尹憲柱)가 장계를 올려 그것이 너무 과하다고 말하였는데, 요즘 전라 감사(全羅監司) 홍치중(洪致中)도 장계를 올려 2냥으로 대봉(代捧)하게 해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당초 품정(稟定)할 적에는 목면(木綿) 1필(疋)이 거의 돈 3냥에 이르렀는데, 근래에는 값이 떨어져서 돈 2냥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지방 민정(民情)의 억울하다고 일컫는 것은 그 형편이 그렇게 되기 마련이니 변통하는 방도가 없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일이 민원(民怨)과 관계가 되니 도로 전례에 따라 항식(恒式)을 정하되, 각종 신포(身布)를 돈 2냥으로 그 값을 절정(折定)토록 하라."
하였다.

 

진선(進善) 김간(金幹)이 현도(縣道)를 통하여 상서(上書)하여 해직(解職)시켜 줄 것을 청하고 소회(所懷)를 첨부하여 진달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효도는 백행(百行)의 근원인 것입니다. 무릇 남의 아들이 된 사람은 이를 버리고 서는 아들된 직분을 다할 수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효자(孝子)가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 극진하게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를 확충(擴充)시켜 미루어 넓혀 간다면 임금에게 충성할 수 있고 어른을 공경할 수 있고 어린이를 사랑할 수 있고, 또 백성에게 인덕(仁德)을 베풀고 모든 사물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한 몸에 수련하는 상태에서 사위(事爲)에 옮겨 실행하는 것이 효도로부터 나오지 않는 것이 없으니, 그 공효가 돌아보건대 크지 않겠습니까? 지금 저하(邸下)께서는 성후(聖候)가 오랫동안 미령(未寧)하심을 당하여 곁에서 모시고 봉양하면서 애태우며 근심하는 것은 이것이 지성에서 나온 까닭입니다. 〈주(周)나라〉 문왕(文王)이 걸어갈 적에 신발을 바로 신지 못하고529)  , 무왕(武王)은 문왕이 한 번 밥먹으면 따라서 한 번 먹고 두 번 밥먹으면 따라서 두 번 먹는다는 것을 이미 실행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실행하는 방법은 학문(學問)이라는 범주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저하(邸下)의 한 몸은 조종(祖宗)께서 돌보아 사랑하는 바이고 신(神)과 사람이 생각하여 떠받드는 바이니, 시종 학문에 뜻을 두어 힘써 덕업(德業)을 닦음으로써 종묘 사직의 중함을 받들고 국가의 무궁한 경사(慶事)를 열도록 하소서. 이것이 또 효도 가운데에서 큰 것입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제왕(帝王)의 효도는 필부(匹夫)와는 다르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진실로 저하(邸下)의 인효(仁孝)한 마음이 하늘에서 타고 나신 것이고 계속하여 밝혀 나가는 공부가 광명(光明)한 경지에 이를 것을 알고 있습니다만, 그런데도 이것을 가지고 말을 하는 것은 야인(野人)이 미나리를 바친 정성530)  에서 나온 것입니다. 바라건대, 저하께서는 면려(勉勵)하소서."
하니, 세자(世子)가 답하기를,
"지금 이 신명(新命)은 실로 공의(公議)를 따른 것인데 지나친 말을 할 것이 뭐 있겠는가? 상서(上書)의 끝에 면계(勉戒)한 것은 진실로 지극히 절실한 것이므로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기고 있으니,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약방(藥房)에서 들어와 진찰하였다. 임금이 수부(手部)에 있는 신문(神門) 좌우혈(左右穴), 족부(足部)에 있는 임읍(臨泣) 좌우혈(左右穴)에 침을 맞았다. 마치고 나서 도제조(都提調)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근년 이래 잇따라 성후(聖候)가 미령했던 관계로 겨울철의 계복(啓覆)531)  을 오랫동안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주상께서 병을 무릅쓰고 억지로 하시겠다고 분부(分付)하셨기 때문에 그 당시 군신(群臣)들의 마음이 매우 안타깝고 절박하였지만 봉승(奉承)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금년에는 문서(文書)가 많지만 지금 안질(眼疾)이 이러하므로 사세가 거행하기 어려우니, 정지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김창집이 또 말하기를,
"금년에 삼남(三南)의 농사가 풍년이 들기는 하였으나 신구(新舊)의 환상(還上)을 한꺼번에 독촉하여 받아들인다면 소란이 일어날 폐단이 있을까 두려움으로 구환상(舊還上)은 모두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충청 감사(忠淸監司) 윤헌주(尹憲柱)가 장계(狀啓)을 올려 조금 부실(富實)해진 고을의 구환상(舊還上) 가운데 병신년532)   조는 징봉(徵捧)하게 해줄 것을 청하였기 때문에 복계(覆啓)하자 허락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 도(道)의 구환상을 이미 모두 징봉을 정지하게 하였으니, 호서(湖西)도 마땅히 다르게 해서는 안됩니다. 똑같이 징봉을 정지하겠다는 것으로 다시 분부(分付)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전(前) 판서(判書) 윤덕준(尹德俊)이 졸(卒)하였는데, 나이 60세이다. 윤덕준은 젊어서 과거(科擧)에 급제하여 화관 현직(華官顯職)을 두루 역임하면서 높은 직질(職秩)에 올랐으나, 기록할 만한 공적은 없고 탐독(貪黷)하다는 비난만 있었다. 병신년533)  에 판의금(判義禁)이 되어서는 과옥(科獄)을 조사할 적에 다그쳐 만들어 낸 일이 많았으므로 임금이 노하여 특별한 전교를 내려 삭직(削職)시켰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그를 위하여 직첩(職牒)을 돌려 줄 것을 청하고 또 부의(賻儀)와 조제(弔祭) 등의 은전(恩典)을 전례에 따라 행할 것을 청하였다.

 

11월 13일 계해

정필동(鄭必東)을 승지(承旨)로, 정동후(鄭東後)를 장령(掌令)으로, 유척기(兪拓基)를 지평(持平)으로, 조태구(趙泰耉)를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이건명(李健命)을 좌참찬(左參贊)으로, 심택현(沈宅賢)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삼았다.

 

11월 14일 갑자

약방(藥房)에서 들어와 진찰하였다. 임금이 면부(面部)에 있는 사죽공(絲竹孔), 수부(手部)에 있는 합곡(合谷) 좌우혈(左右穴), 족부(足部)에 있는 해계(解谿) 좌우혈(左右穴)에 침을 맞았다.

 

한성부(漢城府)에서 금년의 호구(戶口)의 총수(摠數)를 올렸다. 경도(京都) 오부(五部)534)                  의 원호(元戶)는 3만 4천 1백 91호이고 인구(人口)는 남녀를 합쳐 23만 8천 1백 19명이다. 경기(京畿)의 호수(戶數)는 12만 8천 7백 91호이고 인구는 56만 1천 44명이다. 강원도(江原道)의 호수는 6만 7천 3백 83호이고 인구는 28만 2천 2백 41명이다. 황해도(黃海道)의 호수는 11만 3백 80호이고 인구는 45만 7천 7백 17명이다. 경상도(慶尙道)의 호수는 37만 9천 6백 61호이고 인구는 1백 62만 8천 7백 54명이다. 전라도(全羅道)의 호수는 28만 7천 9백 14호이고 인구는 1백 10만 9천 5백 56명이다. 충청도(忠淸道)의 호수는 22만 9천 2백 82호이고 인구는 97만 4천 3백 80명이다. 함경도(咸鏡道)의 호수는 9만 3천 9백 72호이고 인구는 50만 9천 5백 54명이다. 평안도(平安道)의 호수는 22만 6천 1백 35호이고 인구는 1백 7만 8천 4백 6명이다. 경성(京城)의 오부(五部)와 팔도(八道)의 호수총계(戶摠)는 54만 7천 7백 9호535)                  이고 인구총계(口摠)는 6백 82만 9천 7백 71명536)                  이다.

 

11월 16일 병인

홍석보(洪錫輔)를 접위관(接慰官)으로, 이정익(李禎翊)을 승지(承旨)로 어유귀(魚有龜)를 부응교(副應敎)로, 조도빈(趙道彬)을 교리(校理)로 삼았다.

 

11월 17일 정묘

이홍(李宖)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약방(藥房)에서 들어와 진찰하였다. 임금이 수부(手部)에 있는 상양(商陽) 좌우혈(左右穴), 족부(足部)에 있는 곤륜(崑崙) 좌우혈(左右穴)과 태충(太衝) 좌우혈(左右穴)에 침을 맞았다. 마치고 나서 도승지(都承旨) 조도빈(趙道彬)이 말하기를,
"서원(書院)을 첩설(疊設)537)  하는 것이 실로 근래의 고질적인 폐단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예안(禮安)과 경주(慶州)의 유생(儒生)들이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송시열(宋時烈)을 위하여 서원을 창건하게 하여 달라는 것으로 연일 소장을 올리고 있습니다만, 본원(本院)에서는 조정의 금령(禁令)이 있기 때문에 감히 봉입(捧入)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영남(嶺南)은 본디 문헌(文獻)의 고장이라고 일컬어진 곳인데 근래 유화(儒化)가 점점 쇠퇴하여 선비들의져 추향(趨向)이 올바름을 잃고 있으니, 선현(先賢)들이 학문을 강마하던 곳에다 원우(院宇)를 지을 것을 허락하여 많은 선비들의 긍식(矜式)할 곳으로 만들게 한다면 아마도 교화를 일으키는 방도에 도움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서원(書院)의 폐단이 요즈음보다 더 심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 폐단을 방지하기 위하여 첩설(疊設)을 금한 것인데, 그 사이에는 경중(輕重)과 긴헐(緊歇)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금령(禁令)을 신명(申明)시킨 다음 잇따라 이를 고친다면 그 폐단을 막기가 어려울 것이니, 그 소장은 봉입(捧入)하지 말라."
하였다. 조도빈(趙道彬)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이 뒤로는 문묘(文廟)에 승배(陞配)된 대현(大賢)의 경우에도 원우(院宇)를 첩설(疊設)할 수 없다는 것을 항식(恒式)으로 정하여 시행해야 합니까?"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11월 19일 기사

미시(未時)에 태백성(太百星)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김간(金幹)을 집의(執義)로, 김유경(金有慶)을 장령(掌令)으로, 황흠(黃欽)을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로, 황귀하(黃龜河)를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홍계적(洪啓迪)을 응교(應敎)로 삼았다.

 

전라도(全羅道) 유생(儒生) 정민하(鄭敏河) 등이 상서(上書)하여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시켜 줄 것을 청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은 천지의 순수하고 강직한 정기(正氣)를 타고났으며 하악(河嶽)의 맑고 깨끗한 정영(精英)이 모여 있습니다. 학문은 정학(正學)에 연원(淵源)을 두고 있어 멀리 고정(考亭)538)  에 연접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을 엄숙하고 씩씩한 정일(精一)함의 가운데에 두고, 이러한 이치를 학문(學問)과 사변(思辯)하는 즈음에서 궁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천서(天敍)·천질(天秩)539)  의 경례(經禮)와 위의(威儀)·의문(疑文)의 변절(變節), 그리고 경전(經傳)과 제서(諸書)의 미언(微言)과 오의(奧義)에 이르기까지 연구(硏究)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깊이 생각하고 잘 이해하여 관통(貫通)한 다음 이를 자신에게 돌이켜 하늘에서 타고난 하나의 직(直)자를 삼가 지키는 것으로 근본을 삼았으므로, 굉대(宏大)한 강목(綱目)이 모두 잘 시행되어 주편(周遍)하게 되었습니다. 도덕(道德)이 완전히 구비됨에 따라 덕기(德氣)가 온몸에 넘쳐 흘렀으므로 멀리서 바라보면 근엄하기가 태산(泰山)·교악(喬嶽)과 같고, 가깝게 다가가면 온화하기가 화풍(和風)·경운(慶雲)과 같았습니다. 아! 공맹(孔孟)의 도통(道統)을 전하고 군현(群賢)들의 학문을 집대성(集大成)한 사람이 주자(朱子)인데, 선정(先正)께서 주자에 대해 성심(誠心)으로 열복(悅服)한 것이 70제자가 공자(孔子)에게 열복한 정도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도 모두 주자를 본받았고 출처(出處)와 진퇴(進退)에 있어서도 어느 것 하나 주자의 법문(法門)에서 얻어 내어 공맹(孔孟)의 도(道)를 발명(發明)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또 병자540)  ·정축541)  의 호란(胡亂)을 당하여서는 《춘추(春秋)》의 대의(大義)를 강명(講明)하였고 효종 대왕(孝宗大王)께서 큰 일을 하려는 뜻을 비밀히 도왔습니다. 그런데 성조(聖祖)542)  께서 중도에 승하(昇遐)하셨으므로 갑자기 영릉(寧陵)543)  의 만사(挽詞)를 남기게 되었는데, 거기에도 주자(朱子)가 애용해 하면서 지었던 운(韻)을 써서 지었습니다. 따라서 두 분 대로(大老)544)  의 궁천(窮天)의 한은 전후가 일반인 것입니다. 아! 대업(大業)을 비록 당시에 성취시키지는 못하였지만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을 바룬 대의(大義)는 갠 하늘의 태양처럼 찬란하게 빛나고 있어 우리 동토(東土)의 사람들로 하여금 군신(君臣)·부자(父子)의 대륜(大倫)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여 이적(夷狄)·금수(禽獸)가 되는 것을 면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충성을 다해 국가에 보답하려는 일념(一念)을 잠시도 잊지 않고 또 성조(聖祖)545)  의 당일의 의지를 가지고 성자 신손(聖子神孫)546)  들에게 면려(勉勵)하였습니다. 그러나 몸이 늙어 이 세상에서 그 소망을 이룰 수 있는 기대가 끊기자 드디어 차자(箚子)를 올려 효종(孝宗)께서 지녔던 백세(百世)가 되어도 변할 수 없는 의리를 밝혔으니, 이는 바로 주자(朱子)가 효종 황제(孝宗皇帝)의 성덕(盛德)을 누구보다도 깊이 알고서 찬송(贊頌)하였던 그런 뜻이었습니다. 선정신(先正臣) 송준길(宋浚吉)은 천자(天姿)가 정금(精金)·미옥(美玉)처럼 순수하였고 흉금(胷襟)은 광풍(光風)·제월(霽月)처럼 깨끗하였으므로 그의 문하에 나아가 덕(德)을 직접 본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심취(心醉)되어 열복(悅服)하였습니다. 그의 높고 깊은 덕업(德業)과 넓고 원대한 수립(樹立)은 당세(當世)를 찬란하게 비추고 후세에 밝게 전하기에 충분하였으니, 또 어찌 도통을 전하는 유종(儒宗)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일찍이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 유학(遊學)하였는데, 《소학(小學)》을 독신(篤信)하여 오로지 내향(內向)의 공부만을 힘썼기 때문에 훌륭하게 덕을 이룬 군자(君子)가 된 것입니다. 인조조(仁祖朝)에도 누차 소명(召命)을 받았었습니다만, 효종 대왕(孝宗大王)께서 즉위한 처음에 바야흐로 큰 일을 하시려는 뜻을 두신 데에 이르러서야 선정(先正)께서 생각하시기를, ‘이런 때에 나아가 마음과 힘을 다해 성덕(盛德)을 보필하지 않는다면 장차 천고에 한을 남기게 됨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하고 드디어 나아가 소명에 응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경연관(經筵官)·주연관(胄筵官)547)  을 겸임하고 날마다 강석(講席)에 입시(入侍)의 경의(經義)를 천발(闡發)하고 임금이 마음을 개도(開導)하면서 극진히 하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매양 천리(千里)와 인욕(人欲)의 구분에 대해 더욱 정성스럽게 마음을 다하여 반복해서 분명하게 밝히고 정미(精微)로운 부분을 예리하게 분삭하였으므로, 효종(孝宗)께서 송탄(悚歎)하며 하답(下答)하심에 있어 사지(辭旨)가 깊고도 간절하였습니다. 임금과 신하가 잘 만난 성대함과 밝은 마음이 서로 합하게 된 것은 참으로 천년에 한 번 있을 그런 것이었습니다. 효종(孝宗)께서 선정(先正)을 찬선(贊善)에 제수하시자 선정께서는 세자(世子)를 보도(輔導)하는 일에 정성과 힘을 끝까지 다 했는데, 현종(顯宗)께서도 겸허한 자세로 따르셨습니다. 효종께서 일찍이 면대(面對)하여 유사하시기를, ‘세자(世子)가 학문에 부지런하게 된 것은 실로 찬선(贊善)의 공력에 힘입은 것이다.’ 하셨습니다. 아! 그의 도덕과 공효가 남보다 뛰어난 것이 이러하였습니다. 과거에 역적 김자점(金自點)이 용사(用事)할 적에는 그들의 당여(黨與)가 조정에 가득 깔려 있어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르는 듯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들 두려워서 감히 한 마디 말도 꺼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정(先正)이 제일 먼저 탄핵하는 글을 올려 준절히 논핵(論劾)하자 간당(奸黨)들이 흩어져 그들의 간계를 부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 허적(許賊)548)  이 국권을 쥐고 멋대로 휘두를 적에도 선정이 혼자서 한 통의 소장(疏章)을 진달하여 그 죄상을 논열(論列)하고, 그가 사림(士林)에게 화(禍)를 떠넘기고 종묘 사직을 위태롭게 하려 한다고 바로 지척(指斥)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경신년549)  에 이르러서야 선정의 말이 과연 증험되었습니다. 따라서 주상께서 그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을 추념(追念)하시어 치제(致祭)라는 일이 있기까지 하였으니, 여기에서 그의 화복(禍福)에 대해 회피(回避)하지 않고 곧은 절개를 지닌 평생의 정력(定力)550)  은 다른 사람이 따를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송시열(宋時烈)과는 한세상에 같이 살았고 뜻이 같고 도(道)가 합치되었으므로 사업(事業)도 같았고 진퇴(進退)도 함께 하였습니다. 송시열이 일찍이 송준길(宋浚吉)의 광지(壙誌)를 지으면서 ‘옛날 온공(溫公)551)  이 경인(景仁)552)  에게 성(姓)이 다른 형제(兄弟)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나는 공(公)과 성도 같다. 다만 부모(父母)만 다를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교계(交契)가 깊고도 친밀한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그래서 온 나라의 선비들이 두 분 선정(先正)을 크게 우러러보는 것이 마치 태산(泰山)·북두(北斗)와 같아서 말만하면 반드시 ‘두 송선생(宋先生)’이라고 하였으며, 우리 성상(聖上)께서도 직접 원액(院額)553)  을 써서 내리시어 특별히 포숭(褒崇)하셨으니, 또한 두 분 선생에 대해 차별이 없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무(聖廡)554)  에 배향하는 성전(盛典)에 이르러서도 어찌 다른 점이 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이명(离明)555)  께서는 특별히 성무(聖廡)에 종사(從祀)하는 것을 허락하심으로써 도통(道統)의 소재를 시원스럽게 보이소서."
하니, 세자(世子)가 답하기를,
"지금 두 분 선생을 종사(從祀)시켜 달라고 청하는 것은 이것이 진실로 선현(先賢)을 높이는 성심에서 나온 것임을 알겠으나, 이는 사체(事體)가 중대한 것이므로 준허(準許)할 수가 없다."
하였다.

 

11월 21일 신미

태백성(太白星)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정언(正言) 조상경(趙尙絅)이 상서(上書)하기를,
"양전(量田)하는 역사(役事)를 갑자기 거행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으니, 청컨대 먼저 몇 고을에 시험하여 그 공효를 살펴보소서. 이전(移轉)한 곡식을 본소(本所)에 수송하여 납입하게 하는 것은 실로 먼 지방 백성에게 폐단이 되니 우선 본 고을에다 봉납(捧納)하여 유치(留置)하게 하소서."
하니, 세자(世子)가 매양 고식적(姑息的)인 정사를 행할 수 없다는 것으로 답하였다.

 

이조(吏曹)에서 김운택(金雲澤)을 홍문록(弘文錄)에 초선(抄選)하였다.

 

11월 22일 임신

미시(未時)에 태백성(太白星)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한량(閑良) 윤필은(尹弼殷)이 상서(上書)하기를,
"해서(海西)의 관방(關防)은 한 진(鎭)에서 지키는 영애(嶺隘)가 많은 것은 네다섯 곳이나 되고 작은 것은 서너 곳이나 되는데 소속된 군졸은 많아야 4,5초(哨)를 넘지 못하니, 결단코 나누어 지킬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진졸(鎭卒)이 먼 곳으로 나가 있으니, 의당 진졸을 더 모집하여 먼 곳에 거주하는 사람은 부근에 있는 진(鎭)으로 서로 교환시켜야 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동선령(洞仙嶺)은 바로 관방(關防)의 중요한 지역인데 수목(樹木)이 하나도 없으니, 매우 한심한 일입니다. 정방 산성(正方山城)은 동선(洞仙)과 산극(蒜棘) 사이에 있는데 병영(兵營)에서 성장(城將)을 차송하기 때문에 기강(紀綱)이 확립되지 못한 것은 물론 군향(軍餉)과 군기(軍器)도 허술한 점이 많습니다. 정방(正方)의 별장(別將)은 마땅히 구례(舊例)에 따라 낙점(落點)하여 임명하는 자리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또한 겸하여 대소 동선(大小洞仙)의 금양(禁養)556)  하는 정사를 수행하게 해야 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변장(邊將)이 황당선(荒唐船)557)  을 구축(驅逐)하는 것은 바로 우리 나라의 허술한 상황을 황당선(荒唐船)에게 보이는 것이 됩니다. 연변(沿邊) 일대에 수졸(水卒)을 배치하여 특별히 그 곳에 사는 백성들을 비호(庇護)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후망(候望)558)  을 설치하기도 하고 봉화대(烽火臺)를 세우기도 해서 급할 적에는 군대를 동원하여 방어하고 급하지 않을 적에는 경보(警報)를 울려 위협을 가하게 해야 합니다. 황당선(荒唐船)이 와서 정박(停泊)한 경우에는 몇 사람을 체포하고 그들이 채취(採取)한 해물(海物)을 빼앗아 물에 던진 다음 쫓아버리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황주(黃州)의 읍성(邑城)은 위급할 적에 믿을 만한 곳인데 성첩(城堞)이 무너졌으니, 의당 수축(修築)해야 합니다."
하였다. 비국(備局)에서 복주(覆奏)하기를,
"청컨대 본도(本道)의 도신(道臣)559)  과 수신(帥臣)560)  으로 하여금 상의하여 그 가운데 시행할 만한 것은 장계(狀啓)로 아뢰어 변통(變通)시키게 하소서."
하니, 세자(世子)가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경상 감사(慶尙監司) 권업(權𢢜)이 상서(上書)하여 양전(量田)하는 정사를 정지하게 해줄 것을 청하였는데, 말하기를,
"도내(道內)에서 그대로 예전에 양전(量田)한 것을 적용하여 온 지가 거의 1백년이 가까왔으니, 전정(田政)이 문란하고 부역(賦役)이 고르지 못한 것은 진실로 대신(大臣)이 진달한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조정에서 구습(舊習)에 따라 시행한 지가 오래되었는데도 아직껏 다시 검칙(檢飭)하지 않고 있는 것은, 어찌 해마다 흉년이 들어 백성들을 소란시킬 것을 우려하여 행하지 않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80여 년 사이에 어찌 한두 번쯤 풍년든 때가 없었겠습니까마는, 그래도 행하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인심이 옛날과 같지 못한 탓으로 간사한 길을 막기가 어려워 잘 변통시킬 수 없어서 감히 경솔하게 의논을 내지 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세자(世子)가 답하기를,
"지금 다시 양전(量田)하는 것은 진실로 그만둘 수가 없는 일이니, 조속히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약방(藥房)에서 들어와 진찰하였다.

 

임금이 수부(手部)에 있는 합곡(合谷) 좌우혈(左右穴)과 족부(足部)에 있는 행간(行間) 좌우혈(左右穴), 곤륜(崑崙) 좌우혈(左右穴)에 침을 맞았다. 마치고 나서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이른바 향화인(向化人)561)  은 본디 다른 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조정(朝廷)에서 특별히 고휼(顧恤)하여 역사(役事)를 부과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충청도(忠淸道) 연해(沿海)의 고을에 거주하는 사람으로서 선척(船隻)이 있는 자들에게 예조(禮曹)에서 매년 사람을 보내어 어속(魚束)을 받아가지고 오고 있습니다. 근래에 듣기로는 이런 유례가 점차 번성하고 있기 때문에 외방(外方)에서는 혹은 군역(軍役)에 충정(充定)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이 뒤로는 모든 향화인(向化人)에 대해 본조(本曹)에서 문안(文案)을 작성하여 비치해 두고 유청군(有廳軍)562)  의 예(例)에 따라 장정(壯丁) 1인당 베 1필(疋)씩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그리고 이미 군역에 충정된 사람은 또한 탈하(頉下)563)  로 처리한다면, 조정에서 이들을 단속하는 방법과 그들을 보존시키는 도리에 있어 양쪽이 모두 온편한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11월 24일 갑술

미시(未時)에 태백성(太白星)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약방(藥房)에서 들어와 진찰하였다. 임금이 수부(手部)에 있는 후계(候谿) 좌우혈(左右穴), 족부(足部)에 있는 협계(俠谿) 좌우혈(左右穴), 신맥(申脈) 좌우혈(左右穴)에 침을 맞았다.

 

11월 25일 을해

세자(世子)가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접(引接)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조태채(趙泰采)가 말하기를,
"함경 감사(咸鏡監司) 이탄(李坦)이 장계를 올려 본도(本道)의 흉년에 대해 진달하면서 진곡(賑穀)을 판출할 길이 없으니 공명첩문(空明帖文)564)  5, 6백 장을 보내 줄 것을 청하여 왔습니다. 의당 해조(該曹)로 하여금 만들어 보내게 해야 하겠습니다. 경상 감사(慶尙監司) 권업(權𢢜)의 장본(狀本)에 목화(木花)에 대한 급재(給災)를 더 해달라고 청하였습니다만, 이제 이미 절서(節序)가 늦었으니 추후에 더 급재할 수는 없습니다. 전라 감사(全羅監司) 홍치중(洪致中)의 장본(狀本)에는 진청(賑廳)에서 대출하여온 돈 2만 냥과 쌀 7천 석을 우선 물려서 봉납하게 해줄 것을 청하였고, 전에 미수(未收)된 군포(軍布)는 봉납을 중지할 것과 면전(綿田)에 급재해 줄것을 진청(陳請)하였으니, 쌀은 우선 내년 가을로 물려서 봉납하게 하소서. 돈은 본청(本廳)에서 바야흐로 쌀을 사들이려 하고 있으니 구처(區處)하여 상환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에 미수된 것은 이미 봉납을 중지할 것을 허락하였으니, 이제 거론할 필요가 없습니다. 면전의 급재는 처음에는 거론하지 않고 있다가 다른 도에서 청하여 허락을 얻게 된 다음에야 장계를 올려서 청하였으니, 그것이 그다지 긴절(緊切)하지 않은 것을 상상할 수가 있습니다. 허락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세자(世子)가 모두 그대로 따랐다. 조태채가 또 말하기를,
"저하(邸下)께서 청정(聽政)하던 처음에 성상(聖上)께서 ‘경(敬)‘이라는 글자 하나로 면려(勉勵)하셨습니다. 무릇 경(敬)이란 마음을 한군데에 집중하여 잡념(雜念)을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비록 필부(匹夫)일지라도 수신(修身)하는 공부에는 반드시 경(敬)을 주로 삼는 것인데, 더구나 제왕(帝王)이겠습니까? 송(宋)나라의 신하인 진덕수(眞德秀)는 말하기를, ‘경(敬)에 의거하는 마음을 지니는 것이 수신(修身)에 있어 제일의 급선무이다.’ 하였습니다. 대개 선악(善惡)과 사정(邪正)의 구분과 안위(安危)·치란(治亂)의 단서(端緖)가 실은 이 마음이 경(敬)한가 불경(不敬)한가 어떠한가에 달려 있는 것이니, 경(敬)에 대한 공부는 반드시 학문을 강론한 뒤에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전일에 내린 성비(聖批)에 생각을 시종 학문에 두라고 하셨는데, 이는 삼대(三代)565)   때 성왕(聖王)들이 경(敬)을 지닌 요점이고 저하(邸下)께서 전하여 가야 할 가법(家法)인 것입니다. 아무리 시탕(侍湯) 중이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자주 궁료(宮僚)들을 인접하시어 경전(經傳)을 강론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혀 진리를 탐구해서 체행(體行)하신다면 학문에 나아가는 방법에 있어 이보다 더 나은 것은 없을 것입니다."
하니, 세자(世子)가 이르기를,
"대신(大臣)이 상세히 진달하는 것이 진실로 너무도 간절하고 지극하다. 마땅히 유념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권상유(權尙游)·병조 참판(兵曹參判) 이관명(李觀命)·응교(應敎) 홍계적(洪啓迪) 등이 잇따라 경(敬)을 지니는 것과 학문에 나아가는 요점에 대해 진달하니, 세자(世子)가 모두 옳게 여겨 받아들였다. 대사간(大司諫) 심택현(沈宅賢)이 전일에 진달한 것을 다시 진달하고 또 말하기를,
"당초 공청(空靑)에 구멍을 뚫을 적에 이시필(李時弼)이 전혀 장즙(漿汁)이 떨어지지 않은 것을 보았는데도 도리어 1차 점안(點眼)하였다고 청사(請使)에게 전설(傳說)함으로써 승지(承旨)가 가서 전한 말과 서로 어긋나게 만들어 결국 그들로 하여금 시끄러움을 야기시키게 하였습니다. 더구나 그의 공사(供辭)를 보면 오로지 공교하게 꾸미기만을 힘썼으니 더욱 간악(奸惡)하기 그지없습니다. 청컨대 극변(極邊)에 정배(定配)하소서."
하였으나, 세자(世子)가 따르지 않았다.

 

11월 26일 병자

미시(未時)에 태백성(太白星)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안중필(安重弼)을 승지(承旨)로, 김여(金礪)를 지평(持平)으로, 김유경(金有慶)을 수찬(修撰)으로, 이의현(李宜顯)을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로 삼았다.

 

11월 27일 정축

미시(未時)에 태백성(太白星)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유성(流星)이 천원성(天苑星) 위에서 나아와서 서쪽 하늘가로 들어갔다.

 

11월 28일 무인

강원도(江原道) 영월부(寧越府)에 천둥하였다.

 

김만주(金萬胄)를 장령(掌令)으로, 민진후(閔鎭厚)를, 우참찬(右參贊)으로 삼았다.

 

11월 30일 경진

해에 좌이(左珥)566)  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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