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60권, 숙종 43년 1717년 12월

싸라리리 2025. 11. 3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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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신사

세자(世子)가 전옥(典獄)에 승지(承旨)를 보내어 경죄수(輕罪囚)를 석방하였는데, 날씨가 춥기 때문이었다.

 

12월 2일 임오

반유(泮儒)567)  들에게 감귤(柑橘)을 반사(頒賜)하고 시험을 보여 수석(首席)을 한 진사(進士) 윤연(尹㝚)에게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게 하였다.

 

내의원 도제조(內醫院都提調) 김창집(金昌集)이 병 때문에 집에 돌아가 쉬면서 조리하였는데 여러 날이 되도록 낫지 않자 차자(箚子)를 올려 사퇴(辭退)하니, 임금이 체직(遞職)을 허락하고 이이명(李頤命)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이봉상(李鳳祥)을 경기 수군 절도사(京畿水軍節度使)로, 이삼(李森)을 함경 남도 병마 절도사(咸鏡南道兵馬節度使)로 삼았다.

 

부수찬(副修撰) 홍만우(洪萬遇)가 상소(上疏)했는데, 대략 말하기를,
"영부사(領府事) 윤지완(尹趾完)의 정충(精忠)은 금석(金石)도 관통할 수 있는 것인데, 전하(殿下)께서는 그가 서둘러 서울로 들어왔다고 도리어 책망하신 사지(辭旨)가 박절하시니, 이는 매우 뜻밖의 일입니다. 따라서 그 이후 놀라고 두려워하는 인심이 오래도록 진정되지 않고 있었으므로, 세자(世子)를 보호하는 도리가 극진히 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간신(諫臣)들의 상소(上疏)가 태묘(太廟)에 고하기를 청한 것도 대체로 이런 뜻에 연유된 것입니다. 성상(聖上)께서 품처(稟處)하게 하겠다는 명을 내리셨는데도 수상(首相)은 일을 빨리 처리하지 않고 미루기만 하는 뜻을 지녔으니, 동궁(東宮)께서 대신 나아가 칙사(勅使)를 영접한 것은 실로 조종조(祖宗朝)에서 이미 시행한 것인데도 당초 응당 시행할 절목(節目)을 마련하지 않고서 기필코 임금의 분부를 기다린 후에야 비로소 거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임하(林下)의 유상(儒相)568)  은 당초 상하(上下)가 걱정하고 의심하는 즈음에 한 마디 말도 없었고 또 태묘(太廟)에 고하는 데 대해 순문(詢問)할 적에 헌의(獻議)하지도 않았으니, 대신(大臣)으로서 나라를 위하는 충심(忠心)과 산인(山人)으로서 저궁(儲宮)을 보호하는 도리에 있어 이렇게 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이것이 중외(中外)의 여정(輿情)이 만족하게 여기지 못하고 있는 이유인 것입니다. 영남(嶺南)에서 과유(科儒)들이 응시(應試)를 폐기하고 봉장(封章)을 올린 것은 진실로 목을 길게 빼고 몹시 기다리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거조가 혹 정당함에 어긋났다고 하더라도 도신(道臣)의 처지에서 노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기에 장계(狀啓)에 몹시 미워하여 죄주기를 요구하는 의도를 현저하게 드러낸단 말입니까? 만여 명에 가까운 많은 선비들이 서로 이끌고 대궐을 향하여 호소한 것은 마침 성명(聖明)께서 사기(士氣)를 배양한 소치라는 것을 알 수 있으므로 칭찬하고 권장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고관(考官)은 군졸을 시켜 몰아냈고 도신(道臣)은 장계를 올려 속박하여 잡아 가두고 충군(充軍)시킨 뒤에야 그만두었으니, 신은 삼가 개연(慨然)하게 여깁니다."
하였다. 대개 영남(嶺南)의 유생(儒生)들이 파장(罷場)한 뒤에 도신(道臣) 권업(權𢢜)이 장계를 올려 그 난동을 부린 정상을 진달하였고 임금이 마침내 그 수창자(首唱者)를 적발하여 충군(充軍)하라고 명하였기 때문에 홍만우(洪萬遇)의 소장에서 언급된 것이다. 소장을 봉입하자 임금이 하교하기를,
"이제 홍만우(洪萬遇)의 상소(上疏)를 살펴 보건대 영부사(領府事)의 상소의 내용이 매우 위험(危險)스러운 것이었는데 많은 말을 허비해 가면서 영호(營護)하였다. 영상(領相)의 헌의(獻議)에는 본래 일을 빨리 처리하지 않고 미루기만 하는 뜻이 없었으니, 대신(大臣)이 나라를 위한 충심에 있어 이렇게 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말은 진실로 너무도 사리에 어긋난 말이다. 교영(郊迎)을 대신 행하는 것을 하교(下敎)를 기다려 거행한 것은 진실로 당연한 것인데 당초에 마련하지 않았다고 말한 것은 참으로 이해할 수가 없다. 처분(處分)이 이미 결정된 뒤에 향유(鄕儒)들이 소장을 올린다고 핑계하면서 난동을 부리고 파장(罷場)시킨 것은 실로 이전에 없었던 해괴한 행동이니, 도신(道臣)이 적발하여 충군(充軍)시킨 것은 법에 있어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도 도리어 이를 지척(指斥)하였으니 또한 너무나도 말할 것이 없다. 그러나 이런 등류의 일은 꼭 죄주지 않겠다. 하지만 소장에서 감히 좌상(左相)을 기척(譏斥)함에 있어 있는 힘을 다하여 업신여기는 뜻이 현저하게 있었으니 이것이 진실로 무슨 마음인가? 너무도 놀랍고 통분하다. 파직(罷職)하라."
하였다.

 

12월 3일 계미

평안도(平安道) 각 고을의 백성들이 염병(染病)으로 바야흐로 앓고 있는 사람이 3만 7천 1백 30명이고 사망(死亡)한 사람이 5백 65명이었으므로, 도신(道臣)이 이 사실을 보고하여 왔다.

 

12월 4일 갑신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우의정(右議政) 조태채(趙泰采) 등이 모두 홍만우(洪萬遇)에게 지척(指斥)받은 것 때문에 서로 잇따라 차자(箚子)를 올려 사면(辭免)을 구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批答)을 내려 위유(慰諭)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이명(李頤命)도 차자를 올려 간절히 사퇴하니, 임금이 승지(承旨)에게 명하여 돈유(敦諭)하게 하였다.

 

12월 6일 병술

미시(未時)에 태백성(太白星)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홍문관(弘文館)에서 차자(箚子)를 올려 홍만우(洪萬遇)에 대한 처분(處分)이 너무 관대하다는 것을 논하고 또 말하기를,
"좌의정(左議政) 권상하(權尙夏)는 선정(先正)569)  의 적통(嫡統)을 이어받아 일대(一代)의 종사(宗師)가 되었으므로, 성상(聖上)께서 발탁하여 태사(台司)570)  에 앉히고 장차 천직(天職)을 함께 하려 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가 사양하는 것이 더욱 굳건하여 멀리 떠나려는 마음을 돌이킬 수 없으나 그의 충군 애국(忠君愛國)하는 정성이야 어찌 초야(草野)에 있다고 차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 전일에 성상(聖上)께서 비록 잠시 미안스러웠던 전교(傳敎)가 있기는 했었습니다. 궁벽한 시골에 살고 있기 때문에 제때에 봉장(封章)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은 날에 특별한 윤음(綸音)을 내려 성의(聖意)를 열어보이셨으므로 다시 미진한 점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함부로 의심스러운 마음을 품고 남이 이간할 수 없는 처지에다 추후에 번거롭게 의논을 제기한다는 것을 실로 의리에 있어서는 당연한 처사가 아닌 것입니다. 유현(儒賢)이 일찍이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은 진실로 여기에 연유된 것입니다. 하지만 간절한 정성에 스스로 그만둘 수가 없으므로 이에 청정(聽政)하게 한 처음에 격물 치지(格物致知)와 정일집중(精一執中)에 대한 학설(學說)로써 간절하게 면계(勉戒)하였으니, 그가 세자를 인도하여 요순(堯舜)과 같은 지경으로 올려 놓으려 한 것이 적심(赤心)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태묘(太廟)에 고하기 위해 순문(詢問)할 때에 이르러 감히 헌의(獻議)하지 못했던 것은 유현(儒賢)이 새로 정승에 임명한다는 명령을 받고 나서 불안(不安)스러운 뜻이 바야흐로 간절한 상황이었으니, 그가 감히 대신(大臣)으로 자처(自處)하면서 전례에 따라 헌의(獻議)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아! 옥후(玉候)571)  가 오랫동안 미령하여 성사(聖嗣)572)  께서 정사를 대리(代理)하시니, 온 나라 백성이 애대(愛戴)하는 것이 모두가 다같이 타고 난 병이(秉彛)의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등류의 위험스런 말로 기괄(機栝)573)  을 엿보아 농락하니, 이는 은연중 사림(士林)에게 화(禍)를 전가(轉嫁)시키려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데도 가벼운 형벌에 그친다면 말류(末流)의 우환이 앞으로 끝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어제 홍만우(洪萬遇)의 상소를 살펴보았는데 전편(全篇)의 정신 쓴 것이 오로지 조정을 경함(傾陷)시키는 데 있는 것으로 좌상(左相)을 무함하고 비난함에 있어 있는 힘을 다하였다. 보내 온 사연과 마음 씀이 매우 위험스러워 너무도 놀랍고 통분스럽다. 따라서 이시척촉(羸豕躑躅)574)  의 조짐을 막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에 먼저 파직시키는 벌을 시행한 것이다. 그대들의 차자(箚子)에서 논한 것이 매우 정당하니, 홍만우의 관작(官爵)을 삭탈(削奪)하고 문외 출송(門外黜送)575)  시키라."
하였다. 이날 사간원(司諫院)에서도 홍만우(洪萬遇)가 전적으로 올바른 사람을 해치던 수단을 답습하여 화(禍)를 전가(轉嫁)시키려는 계책을 부리려 하였다는 것으로 관작을 삭탈하고 문외 출송시킬 것을 청하니, 세자(世子)가 그대로 따랐다.

 

형조 판서(刑曹判書) 조태구(趙泰耉)가 상소하여 사직(辭職)하였는데, 말하기를,
"헤아릴 수 없는 죄명(罪名)이 국정을 담당하여 용사(用事)하는 대신(大臣)에게서 거론되었으니, 신이 주책(誅責)을 면한 것만도 분수에 있어 또한 다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영진(榮進)에 마음을 둘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대개 김창집(金昌集)의 전의 상소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임금이 ‘용사(用事)’란 두 글자는 매우 심각하고 위험한 말이라는 것으로 답하고, 이어 조태구(趙泰耉)를 체직시키라고 명하였다.

 

약방(藥房)에서 들어와 진찰하였다. 임금이 면부(面部)에 있는 찬죽(攅竹) 좌우혈(左右穴), 수부(手部)에 있는 신문(神門) 좌우혈(左右穴), 족부(足部)에 있는 태충(太衝) 좌우혈(左右穴)에 침을 맞았다.

 

12월 7일 정해

민진원(閔鎭遠)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김태수(金台壽)를 장령(掌令)으로, 이덕영(李德英)을 승지(承旨)로 삼고, 특지(特旨)로 이조 참판(吏曹參判) 정호(鄭澔)를 초배(超拜)하여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삼았다. 정호는 나이 늙도록 독실히 학문을 연구하였고 또 벼슬에 나아가는 것은 어렵게 여기고 물러가는 것은 쉽게 여겼으므로 임금이 그의 강개(剛介)함을 가상(嘉尙)하게 여겨왔는데, 이때에 와서 종백(宗伯)576)  에 발탁 제수한 것이다.

 

강릉(江陵)에서 사는 유학(幼學) 함일해(咸一海)가 상서(上書)하기를,
"국조(國祖) 선대(先代)의 능침(陵寢)이 삼척(三陟)의 황지(黃池)에 있어 온 지가 이제 3백여 년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도 소재처(所在處)를 분명히 알지 못하였으므로 훌륭한 후손[文孫]들의 효심(孝心)에 얼마나 아픈 감회가 많았겠습니까? 신은 대강 성가(星家)577)  에 통달하였는데, 노동(蘆洞)의 황지(黃池)에서 묘방(卯方)의 좌향(坐向)인 하나인 큰 무덤을 찾아내었습니다. 그 곳은 산형(山形)과 국세(局勢)로 보아 결단코 등한(等閑)한 분묘(墳墓)가 아니었습니다. 이야말로 억만년토록 왕업을 흥왕시킬 조짐이 매우 명백하니, 삼가 바라건대, 삼척(三陟)의 수신(守臣)으로 하여금 신과 함께 그 곳에 가서 다시 상세히 살피게 하여 주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삼가 희빈(禧嬪)578)  의 묘소(墓所)를 살펴보건대, 용맥(龍脈)은 있으나 혈(穴)이 없고 수법(水法)도 합당하지 못하여 완전한 곳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따라서 땅속의 불안함은 말할 수 없으니 또한 훌륭한 지사(地師)로 하여금 신과 참론(參論)하게 하여 길흉(吉凶)을 조사하게 한 다음 다시 길지(吉地)를 잡으소서. 그렇게 하면 다만 저하(邸下)의 지극한 정리에 유감이 없을 뿐만이 아니라 실로 국가의 끝없는 복(福)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서(上書)를 봉입(捧入)하니,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함일해(咸一海) 상서(上書)의 전편(全篇)에 깔린 주의(主意)는 오로지 아래 조항에 있는 것인데, 삼척(三陟)의 일을 핑계하여 멋대로 진달하였으니, 일이 매우 방자하다. 그리고 감히 작호(爵號)579)  를 썼으니, 또한 매우 절통(絶痛)하다. 이 상서는 도로 내어주도록 하라."
하였다.

 

약방(藥房)에서 들어와 진찰하였다. 임금이 면부(面部)에 있는 동자료(瞳子髎), 수부(手部)에 있는 합곡(合谷) 좌우혈(左右穴), 족부(足部)에 있는 행간(行間) 좌우혈(左右穴)에 침을 맞았다. 마치고 나서 우참찬(右參贊) 이건명(李健命)이 청대(請對)하니, 임금이 불러서 접견하였다. 이건명이 말하기를,
"신이 봉명 사신(奉命使臣)으로서 서도(西道)에서 백성들의 일이 더없이 급박한 것을 목견(目見)하였기 때문에 감히 이렇게 청대(請對)한 것입니다. 금년의 연사(年事)는 양서(兩西)580)  가 똑같이 흉년이 들었는데, 청북(淸北)581)  에 이르러서는 풀 한 포기가 없었습니다. 듣기로는 가을 추수 때 충재(蟲災)가 비상하여 며칠 사이에 온 도내(道內)에 가득히 퍼져 나갔는데, 무릇 명색이 곡식이라는 것은 남김없이 다 먹어 치웠으므로 가을 무렵부터 백성들이 이미 식량 곤란을 받아 어떤 사람들은 콩깎지를 가루로 만들어 먹기도 하니, 결단코 세전(歲前)까지도 살아갈 희망이 없는 실정입니다. 신이 도신(道臣) 김유(金楺)와 상의하여, 가을에 장계(狀啓)를 올려 감진 어사(監賑御史)를 보내줄 것을 청하였지만 묘당(廟堂)에서 어사(御史)가 진구(賑救)를 감독하는 것은 또한 폐단이 있다는 것으로 허락하지 않고 다만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혹은 도사(都事)를 보내든지 혹은 영비(營裨)를 보내어 왕래하면서 진구를 감독하게 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도사와 영비는 명위(名位)가 높지 않으므로 결국 어사(御史)를 특별히 보내는 것만 못합니다. 청남(淸南)582)  을 감사(監司)에게 맡기고 청북(淸北)583)  은 특별히 감진 어사(監賑御史)를 보낸 연후에야 사의(事宜)에 맞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강도(江都)의 쌀과 해서(海西)의 상정미(詳定米)를 묘당(廟堂)에서 획급(劃給)한 것이 단지 1만석뿐입니다. 의주(義州)의 기황(飢荒)은 더욱 혹독하기 때문에 본도(本道)에서 먼저 의주(義州)에 4천 석을 지급했으니, 남은 것은 6천 석뿐입니다. 따라서 경진청(京賑廳)의 쌀 5,6천 석을 얼음이 풀릴 때에 시급히 운송(運送)하게 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관서(關西)의 절박한 민사(民事)에 관해 도신(道臣)이 잇따라 올린 장계를 보건대 매우 딱하고 참혹하였다. 감진 어사(監賑御史)를 특별히 차송하고 곡물(穀物)도 더 보내도록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그 뒤 묘당에서 복주(覆奏)하여 해서(海西)의 상정미(詳定米) 3천 2백 석을 더 지급하게 하였다. 이건명(李健命)이 또 말하기를,
"관서(關西)에서 돈을 주조(鑄造)하는 일에 대해 묘당(廟堂)에서 이미 품정(稟定)하였습니다만 의논이 일치(一致)되지 않았기 때문에 도신(道臣)이 결정할 수 없었으므로, 전에 모아두었던 물력(物力)을 바야흐로 파산(罷散)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관서(關西)의 감영(監營)에 저축한 은전(銀錢)을 청남(淸南)·청북(淸北)의 각 고을에 모두 흩어주어 곡식을 사들이게 하였으므로 각 고을의 사세가 장차 주조한 돈의 반은 본전(本錢)으로 세워두어야 합니다. 따라서 백성들에게 돌아가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각 고을에서 대여(貸與)해 간 영화(營貨)584)  의 본전(本錢)은 본도(本道)에서 주조한 돈에서 남은 이익으로 상환(償還)하여 채우고 각 고을에서 대여하여 간 돈은 모두 진구(賑救)를 대비하기 위한 자본금으로 쓰게 하는 것이 백성을 구제하는 도리에 있어 편리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6개월을 기한으로 돈을 주조하게 할 것을 허락하여 이미 정탈(定奪)이 있었으니 주저할 것이 뭐 있는가? 경(卿)이 아뢴 대로 다시 분부(分付)하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8일 무자

미시(未時)에 태백성(太白星)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약방(藥房)에서 들어와 진찰하였다. 임금이 면부(面部)에 있는 사죽공(絲竹孔), 수부(手部)에 있는 후계(後谿) 좌우혈(左右穴), 족부(足部)에 있는 태충(太衝) 좌우혈(左右穴)에 침을 맞았다.

 

12월 9일 기축

달무리하였다.

 

12월 10일 경인

미시(未時)에 태백성(太白星)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김운택(金雲澤)을 평안도 청북 감진 어사(平安道淸北監賑御史)로 삼았다.

 

평안 감사(平安監司) 김유(金楺)가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臣)이 정배(定配)된 죄인 이세덕(李世德)의 공사(供辭)를 얻어 보니,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을 무함하고 헐뜯는데 있어 못할 짓이 없이 다하였는데, 신의 스승인 선정신(先正臣) 박세채(朴世采)의 말을 많이 인용하여 뜯어 맞추고 화려하게 꾸며서 그가 말한 것을 고쳐 놓았으므로, 신은 삼가 놀라게 되었습니다. 신의 스승인 박세채(朴世采)가 윤선거(尹宣擧)의 행장(行狀)을 지은 것이 계축년585)  이었고 윤증(尹拯)이 송시열(宋時烈)에게 묘명(墓銘)을 청한 것도 그 해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년 동안 왕복하면서 고쳐줄 것을 청하는 가운데 시기와 혐의가 몰래 누적되었으므로 다른 사람은 알 수가 없습니다. 신의 스승은 그 행장을 지었기 때문에 걸핏하면 관여한 탓으로 유독 먼저 참여하여 알게 된 것입니다. 신이 을묘년586)   6월에 양근(楊根)의 우사(寓舍)에 있는 스승을 찾아가 보았었는데 하루는 윤선거(尹宣擧)의 호(號)를 부르면서 묻기를, ‘군은 평상시 노서(魯西)587)  의 일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하기에 신은 나이가 젊어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스승께서 강도(江都)에서의 일을 거론하여 한바탕 상세하게 설명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선생님의 말씀과 같다면 노서(魯西)는 존중할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자, 신의 스승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 일로써 우장(尤丈)588)  과 자인(子仁)589)  이 장차 큰 혐극(嫌隙)이 이루어질 것 같아 매우 우려가 된다.’ 하였습니다. 우장(尤丈)은 송시열(宋時烈)을 가리킨 것이고 자인(子仁)은 윤증(尹拯)의 자(字)입니다. 신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선생님께서 장문(狀文)을 어찌하여 그렇게 과하게 지었습니까?’ 하니, 신의 스승이 말하기를, ‘옛날 주자(朱子)가 위공(魏公)590)  의 행장(行狀)을 지으면서 다만 남헌(南軒)591)  의 문자(文字)만을 따라 지었기 때문에 과한 곳이 있음을 면치 못하였다. 그래서 뒤에 후회하는 말을 많이 하였는데 나도 바로 그 경우와 같다.’ 하였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신의 스승이 윤증(尹拯)에게 준 서한에서 말하기를, ‘참여하여 안 사이에 죄가 많아졌다.’ 하였고, 임영(林泳)에게 준 서한에서는 말하기를, ‘이 일은 노장(魯丈)592)  의 행장(行狀)을 너무 과하게 지은 데에서 시작된 것이다.’ 하였고, 유회일(兪晦一)에게 준 서한에서는 말하기를, ‘노장(魯丈)의 행장을 지은 뒤 참여하여 안 사이에 나의 죄가 많아졌다.’ 하였습니다.
정사년593) 윤증에게 준 서한에서는 말하기를, ‘이른바 아버지와 스승 사이에는 경중(輕重)이 있다고 한 것은 진실로 도(道)가 본래 같지 않다는 것을 말할 것인데, 이것을 가지고 드러나게 서로 공격한다면 사세가 양립(兩立)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의 경우에는 의심하는 것은 단지 후사(後事)에 대한 한 가지 조항인데 그에 대해 찬차(撰次)한 것이 비록 한결같이 작자(作者)의 뜻에서 나온 것은 아니지만 완전하고 좋은 방향으로 정정(訂正)하여 다시 비평할 것이 없게 되었다. 그리고 명사(銘辭)를 별도로 서술하였고 총론(總論)을 다시 고쳤으니 또한 추허(推許)한 것이 중대하고 따른 것이 곡진했다고 할 수 있다.’ 하였는데, 이것이 초두(初頭)의 사실입니다. 정사년(丁巳年)과 계축년(癸丑年) 사이는 5년도 안되는데 윤증이 이미 아버지와 스승 사이에는 경중(輕重)이 있다는 말을 창도(倡導)하여 스스로 갈라설 계책을 세웠으므로 신의 스승이 이렇게 깨우친 것입니다. 무오년594)  에 준 서한에서 말하기를, ‘이 일은 윤리(倫理)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진실로 작은 일이 아니니, 아주 통절하게 잘 생각하여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임술년595)   5월에 신의 스승이 윤증과 송도(松都)의 감로사(甘露寺)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는데, 만나고 돌아온 뒤 그때 있었던 이야기들을 대략 신에게 말하기를, ‘자인(子仁)이 우장(尤丈)에게 장문(長文)의 서한(書翰)을 올려 비간(比干)596)  을 본받으려 하기에 내가 왕촉(王蠋)597)  을 본받으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자인(子仁)이 말하기를, 「부자(父子)는 천륜(天倫)이고 군신(君臣)과 사생(師生)598)  은 의리(義理)로 합한 것인데, 걸주(桀紂)599)  와 탕무(湯武)600)  의 일을 가지고 헤아려 본다면 스승과 제자 사이는 혹은 끊을 수가 있는 것이다.」고 했다. 내가 우장(尤丈)에게는 걸주(桀紂)의 포악이 없고 존형(尊兄)에게는 탕무(湯武)의 공덕이 없다고 말하고서는 드디어 왕면(王勉)의 말을 인용하여 나무랬지만 그 뜻을 잘 깨우치지 못한 것 같아 매우 우려가 된다.’ 하였습니다. 그 뒤 윤증이 송시열(宋時烈)의 외손(外孫)과 사적으로 스승의 허물에 대해 논란한 사설(辭說)이 분분하였는데, 신의 스승이 그 말을 듣고 놀란 나머지 서한을 보내어 윤증에게 문의하였더니, 윤증의 서한에서 그 말을 다시 부연하며 왕도(王道)와 패도(霸道)를 다같이 썼고 의리(義理)와 사리(私利)를 나란히 행했다는 등의 말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끝내는 갑자년601)  에 대신(大臣)이 연석(筵席)에서 주달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신의 스승이 여기에서도 윤증을 위하여 더욱 간절하게 충고(忠告)하였는데, 그 서한에 말하기를, ‘보내온 서한에서 사생(師生)과 군신(君臣)은 모두 의리로 합쳐진 사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나의 의견도 그렇게 여기고 있다. 그래서 임금에게 진언(進言)하는 데는 범안(犯顔)602)  을 주로 삼는데, 중한 경우에는 죄를 얻고 가벼운 경우에는 추방(追放)을 당하지만 그러나 군신(君臣)의 의리는 끝내 폐기할 수가 없는 것이다. 스승에게 질의(質疑)함에 있어서는 범안(犯顔)하는 것도 없고 숨기는 것도 없는 것을 주로 삼는데 중한 경우에는 절교를 하고 가벼운 경우에는 소외당하게 되지만, 그러나 사생(師生)의 의리는 끝내 폐기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른바 의리로 합쳤다는 것은 부자(父子) 사이가 천성(天性)이라는 것을 상대하여 말한 것에 불과한 것이요, 군신(君臣)과 사생(師生) 사이에 죄를 받거나 절교를 당하면 그것이 곧 대의(大義)를 폐기하는 것에 해당된다는 것을 말한 것은 아니다.’ 하였습니다. 그 뒤의 서한에서 또 말하기를, ‘형(兄)이 극단적인 말로 주장하는 어의(語意)가 심각하고도 절박하여 다시 돌아볼 것이 없이 대등한 처지 이하에도 감내하기 어려운 말을 함장(函丈)에게 행하면서 낱낱이 곧바로 지척(指斥)하는 것이 절교를 알리는 서한과 다름이 없었으니, 사리가 이 지경에 이르면 잘못된 것이 작지 않다.’ 하였고, 송시열(宋時烈)에게 보낸 서한에서는 ‘옛말에도 있듯이 얼킨 뿌리와 엉클어진 마디를 만나지 않으면 어떻게 예리한 기구(器具)임을 구별할 수 있겠느냐?’고 하였습니다. 신의 스승이 또한 ‘진실로 역경(逆境)을 잘 처리(處理)하지 못한다면 어찌 군자(君子)를 구별할 수 있겠느냐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락(河洛)의 법문(法門)에도 고인(故人)의 후한 인정 때문에 형칠(邢七)을 감히 의심하지 않는 것603)  으로 대처하였으니, 엎드려 원하건대 선생께서도 화평한 마음으로 잘 처리하여 용서할 만한 것은 용서하고 나무랄 만한 것은 나무라서 그로 하여금 문하(門下)에 출입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했습니다. 윤증은 대신(大臣)이 연석(筵席)에서 주달한 일이 있은 뒤 마침 논의(論議)가 둘로 갈라져 조정(朝廷)이 조용하지 못한 시기를 당하게 되자, 윤증이 드디어 시의(時議)와 서로 야합하여 하나의 편당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을축년604)  에 신의 스승 박세채(朴世采)가 윤증에게 준 서한에서 말하기를, ‘형의 서한이 바로 한쪽의 소류(少流)들이 우옹(尤翁)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공격할 수 있는 꼬투리를 얻지 못하고 있을 때를 당하여 장자(長者)605)  에게 공공연히 멋대로 후욕(詬辱)을 가하였으니, 형의 덕의(德義)를 미루어 보건대 전현(前賢)들이 하지 않던 일을 한 것 같다. 그리하여 의논이 질서가 없이 떠들어서 하나의 난장판을 이루었으므로 여기에 저촉되거나 부딪히는 것은 부서지거나 깨어졌으니, 비록 맹자(孟子)로 하여금 담당하게 하더라도 그 광란(狂瀾)606)  을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나같이 비루하고 용렬한 사람이야 말해 뭐하겠는가? 오직 다만 마땅히 면려(勉勵)하고 삼가서 사의(私意)의 구렁에 빠져서 국가의 끝없는 화(禍)를 조성(助成)하는 일이 없기 바란다.’ 하였습니다. 윤증의 과오가 드러나기 전에 말하는 것이 이와 같았으니, 이것이 과연 윤증을 편들고 송시열을 배척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세덕(李世德)이 또 말하기를, ‘윤증의 본심(本心)은 오직 박세채(朴世采)만이 알기 때문에 비문(碑文)과 의서(擬書)를 나누어 두 건의 일로 만들었다.’고 하였는데, 이것도 또한 실상이 아닙니다. 신의 스승이 윤증에게 보낸 서한에서 말하기를, ‘형(兄)이 아버지와 스승 사이의 역경(逆境)을 당하여 천하의 대의(大義)를 처리함에 있어 바로 경전(經傳)의 뜻을 상고하고 현인(賢人)들의 정법(正法)을 본받아서 스스로 그 후덕(厚德)한 것을 행하고 그 박정(薄情)한 것은 행하지 않았어야 하는데 끝내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의논하는 사람들이 이 논의가 다른 사람의 경우에는 그래도 될 수 있지마는 아무에게 있어서는 사혐(私嫌)이 있으나 사분(師分)이 있으니 더욱 불가한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비록 자신은 생각하기를, ‘본원(本原)에서 발달된 것이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다고 여겼지만 또한 어떻게 그것이 한결같이 천리(天理)에서 흘러나온 것을 따랐다는 것을 모두 보장할 수 있겠는가?’ 하였으니, 이 서한을 본다면 그가 과연 나누어 두 건의 일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이른바 갑자년607)  의 상소(上疏)에 대해서는 대개 할 말이 있다고 하였으나, 신의 스승은 그때까지도 그가 뉘우쳐 깨달아 크게 무너뜨려지는 지경에 이르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에 여러모로 규면(規勉)한 것이 한두 번 뿐만이 아니었고 윤증도 간혹 스스로 뉘우치는 뜻을 보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의 스승이 윤증에게 보낸 서한에서 말하기를, ‘벗들이 찾아와서 모두들 「형의 글을 보니 허물을 깊이 뉘우친 것이 정중(鄭重)한 정도 뿐만이 아니었다」 하였는데, 나는 그 말을 듣고 한편 놀라고 한편 기쁜 마음을 견딜 수 없었다.’ 하였습니다. 그의 말을 믿은 것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장독(章牘)에 드러난 것이 그렇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가 인용한 문경공(文敬公) 김굉필(金宏弼)의 일을 살펴본다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가 유회일(兪晦一)에게 답한 한 서한에서 말하기를, ‘당초에 사우(師友) 사이에 잘 조화시켜 선처(善處)하게 하려고 했기 때문에 상소의 내용과 서한의 뜻이 모두 극진히 하기를 힘썼는데, 양가(兩家)를 왕복(往復)한 뒤에 이르러서는 다시 손을 대어 구정(救正)한 것이 없었다.’ 했으니, 그 의도가 있었던 것을 여기에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윤증에게 준 서한에 이르러서는 그의 학문(學問)과 심술(心術)로부터 가향(家鄕)에서 있었던 여러 가지 비방에 이르기까지 모두 나열하여 그의 평생을 거론하여 말하였으니, 이것이 비록 규잠(規箴)이라고는 하지만 실은 비난 배척한 것입니다. 무릇 규잠(規箴)이 아니라 실은 비난 배척한 것이라는 설(說)은 신의 스승이 이미 말하였으니, 성교(聖敎)에서 이른바 조절(操切)한 것이 많았다고 한것에서도 더욱 그 실정을 알았다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세덕(李世德)이 스스로 모두 근거가 있다고 한 것이 이미 이러하니, 그 나머지는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정자(程子)가 스승을 위한 복제(服制)를 만들면서 3년, 1년, 9개월, 5개월, 3개월의 차이를 두었다고 한 말에 이르러서는 이것이 이세덕이 말이 아니고 바로 윤증이 평소에 한 말입니다. 신의 스승은 이를 두려워한 나머지 ‘사우고증(師友攷證)’이라는 한 편의 글을 저술하여 그 뜻을 매우 분명히 밝혀 두었습니다. 그리고 일찍이 말하기를, ‘군신(君臣)의 복(服)은 귀천(貴賤)에 따라 등급이 있는 것이니 어찌 복(服)의 경중을 가지고 군신(君臣)의 대의(大義)까지 강쇄(降殺)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는데, 이 말이 이미 십분 그 말을 타파하고도 남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세덕은 오히려 자기 스승의 의론을 답습하고 있으니, 또한 어찌 예의(禮義)에 있어 근심스러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의 스승이 전후 윤증에게 보낸 서한에서 말하기를, ‘나의 구구하고 우직한 생각은 진실로 이 일이 심하게 궤열(潰裂)되기 전에 이미 다 이야기하였다. 그것이 심하게 궤열된 데 이르러서는 다만 형(兄)만이 나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나도 형을 위해 충심으로 의논할 수가 없었다.’ 하였습니다. 이는 대개 신의 스승이 윤증에 대해 처음에는 그 실정을 헤아려 그 낭패되는 것을 구제하려 하였기 때문에 그가 처변(處變)하는 도리와 스승을 섬기는 의리에 대해 경훈(經訓)을 인용하여 증거하였고 거기에다 자신의 의견을 부연하여 조목별로 열거행서 효유(曉諭)하였으니, 이는 지성(至誠)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윤증이 사원(私怨)에 끌려 끝내 의혹을 되돌리지 않고 갈수록 더욱 낭패한 지경에 이르러 수습할 수 없이 괴란(壞亂)되고 말았습니다.
기사년608)  에 이르러서 사정(邪正)이 판결(判決)나고 시비(是非)가 결정되었으니, 평생의 원망하고 미워함이 조금은 화평해질 수 있었는데도 윤증이 원한을 축적하고 원망을 부리는 것이 갈수록 더욱 극심하여졌으므로, 신의 스승이 개연(慨然)한 마음을 품고 누차 언사(言辭)에 표현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송시열(宋時烈)을 위하여 3개월 동안 소대(素帶)를 하라고 하니 윤증이 예봉(銳鋒)을 스승에게로 옮겨 공격하였으므로 경상(景象)이 아름답지를 못하였습니다. 신의 스승처럼 바른 말을 하되 따지지 않는 인품을 지닌 분이 아니면 어찌 세도(世道)에 일대 변란이 발생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갑술년609)  에 조정에 나아가서도 한 마디도 윤증을 기용(起用)하는 데 대해 다시 말하지 않았으니, 신의 스승이 윤증에게 대처한 것이 엄격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신의 스승이 돌아가시자 윤증이 뇌문(誄文)에서 자신의 의도를 드러내어 보였고, 윤증 문내(門內)의 사기(私記)에서도 신의 스승을 무함하고 비방하는 데 있어 또 있는 힘을 다하였으니, 그가 사심을 부려 정인(正人)을 해친 것이 또한 너무 심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세덕(李世德)이 세력이 있는 사람에게 의뢰(依賴)하는 일이 뚫어진 구멍이 되자 도리어 신의 스승에게 권위(權威)를 의뢰하려고 하였으니, 진실로 웃을 만한 일입니다. 신은 이세덕이 이른바 대의(大義)는 허가(虛假)라는 말에 대해 더욱 통분스러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제 언급된 것으로 인하여 그 내용을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아! 《춘추(春秋)》의 대의(大義)에 대한 논설은 그것이 세도(世道)에 도움을 준 것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인조 대왕(仁祖大王)께서 후원(後苑)에서 망곡(望哭)610)  한 마음은 종사(宗社)를 위하여 굽히는 것을 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화란(禍亂)을 당한 나머지 인심이 크게 변하여 존주(尊周)611)   대의(大義)가 거의 없어지게 되었는데, 만일 효종 대왕(孝宗大王)이 위에서 창도하고 한둘의 선정(先正)이 아래에서 천명(闡明)하지 않았다면 예의(禮義)의 나라가 하마터면 오랑캐가 될 뻔하였습니다. 비록 하늘이 순리(順理)를 돕지 않아서 갑자기 승하(昇遐)하심에 따라 큰 뜻을 펴지도 못하고 깊은 수치를 씻지 못하였습니다만, 남기신 풍절(風節)과 공렬(功烈)은 또한 인심을 바로잡고 천리를 밝히기에 충분하였으니, 이것이 과연 누구의 힘이겠습니까? 신이 젊었을 적에 보니 조정(朝廷)의 진신(搢紳)들이 서로 만나면 대부분 대의(大義)를 언급하면서 감분(感奮)하고 강개(慷慨)한 마음을 스스로 금하지 못했으며, 연경(燕京)에 사신(使臣)으로 가는 것도 수치스럽게 여겼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이런 풍습이 점차 쇠미해져서 ‘대의(大義)’라는 두 글자를 사대부(士大夫)들의 입에 올려 부르지 않은 지가 오래 되었으니, 이것이 우리 성상(聖上)께서 연석(筵席)에 임하여 탄식을 하게 된 이유인 것입니다.
지난번 공공연히 대의(大義)를 배척하여 공언(空言)이요 고론(高論)이라고 한 것이 갑자기 거실(巨室)612)  의 글에서 발론이 되었으니, 신은 또 놀라고 두려워하면서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하다가 지난 봄 윤증의 신유 의서(辛酉擬書)613)  가 나온 뒤에야 비로소 그것이 모두 전수(傳受)된 데가 있는 것이므로 단시일(短時日)에 발생된 것이 아닌 이유를 알았습니다. 아! 이런 논설(論說)을 창조하는 사람은 바로 온 세상을 깜깜한 어둠 속으로 몰아넣고 인류를 금수(禽獸)의 지경으로 밀어 넣으려는 것이니, 그 또한 너무도 불인(不仁)한 처사입니다. 예로부터 성현(聖賢)들은 당세(當世)에 공을 베풀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이를 언어(言語)와 문자(文字)에 기재(寄載)하여 놓았었는데, 주공(周公) 이하의 성현(聖賢)들이 모두 그렇게 하였습니다. 만일 공을 이룬 것이 없다고 하여 허위(虛僞)라고 말한다면 《춘추(春秋)》의 저작이 난적(亂賊)을 주멸(誅滅)시킬 수가 없으며, 양묵(楊墨)614)  을 물리친 것이 하우(夏禹)에 비견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신은 이 말이 시행된다면 그 말류(末流)의 폐해가 다만 홍수(洪水)와 맹수(猛獸)의 피해615)  에 그칠 뿐만이 아닐 것으로 여겨집니다. 아! 세대가 오래되고 훌륭한 사람이 없어지자 대의(大義)가 점점 쇠미하여져서 근근히 잇닿아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은데, 이러한 시기에 산림(山林)의 현자(賢者)라고 호칭되는 사람이 그 사이에서 이런 논설을 주창하면서 정색을 하고 배척하여 말하기를, ‘이는 가탁(假托)이요 공언(空言)이요 고론(高論)이라.’고 하자, 온 세상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면서 쓸리듯이 따르고 있으니, 기강(紀綱)이 폐지되고 법이 무너지는 화(禍)가 어찌 성명(聖明)한 세상에서 멋대로 행해질 줄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신의 집안은 전에 윤휴(尹鑴)와 서로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으므로 그의 죄상이 드러나기 전에는 절교를 하지 않았었습니다. 윤휴가 처음 뜻을 얻어 조정에 있을 때 그의 아비의 분묘(墳墓)에 성묘차 갔다가 신의 집에까지 들렀는데, 송시열(宋時烈)을 무함하고 비방하는 것이 극도로 참혹하고 심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시론(時論)이 바야흐로 극률(極律)에 처하려고 하고 있다.’ 하였습니다만, 그의 공은 없앨 수 없습니다. 대의(大義)를 창명(倡明)한 공을 어떻게 무함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그의 공은 없앨 수 없다는 이유인 것입니다. 아! 그 뒤로 윤휴가 송시열을 모해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계책을 빠뜨린 것이 없었으나, 그래도 감히 대의(大義)를 허가(虛假)라고 하지는 못하였는데 윤증은 차마 이 말을 하였습니다. 아! 나라가 작고 힘이 약하여 구우(區宇)를 깨끗이 씻어내어 황도(黃道)616)  를 주선하여 볼 수 없었다고 하여 대의(大義)에 대한 논설을 마음에 지니지 못하고 입으로 말하지 못한다면, 윤증이 이른바 진실(眞實)이라는 것이 과연 무슨 일입니까? 애석하게도 그가 80년 동안 공부하여 얻을 것이 대의(大義)는 허가(虛假)라는 논설을 만들어 내어 세도(世道)를 그르친 것뿐이었습니다. 비록 그러나 윤증의 본심이야 어찌 대의(大義)를 해치려고 했겠습니까? 또한 송시열(宋時烈)을 미워하다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송시열이 대의(大義)를 주장하면서 그의 아비617)  가 강도(江都)에서 죽지 않은 것을 비평하게 되니 그제야 아울러 대의(大義)까지 가탁(假托)이라고 하면서 배척했고, 송시열이 주자(朱子)를 존숭(尊崇)하면서 그의 아비가 윤휴와 절교하지 않은 것을 책망하게 되니 그제야 주자까지 협령(挾令)618)  한 것으로 귀결시켜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을 살펴보면 비록 두 갈래인 것 같으나 그 마음을 궁구하여 보면 다 같이 한 근원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도 윤증에서 빌붙는 자들을 그의 마음은 알아보지도 않고 다만 그의 말만을 따라 조금도 돌보아 꺼리는 것이 없이 드러내어 배척하면서 비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세덕(李世德)과 같은 자가 어깨를 서로 스치고 발꿈치를 잇닿아 계속적으로 나아와서 그 귀추는 장차 사람들로 하여금 입을 열어 주자(朱子)를 일컫거나 대의(大義)를 말하지 못하게 하고야 말 것입니다. 그것이 마음에서 발생되어 결국 일을 해치게 되는 폐단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근일 언자(言者)들이 첫 번째도 스승을 배반했다고 하고 두 번째도 스승을 배반했다고들 하고 있지만, 신만은 이것이 윤증에게 있어서는 제이(第二)에 해당되는 일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유독 그가 말한 대의(大義)를 허가(虛假)라고 한 이것이야말로 천하 만세에 화(禍)를 끼칠 말인 것입니다. 옛날 진(晋)나라 때 범영(范寧)이 말하기를, ‘왕 ·하(王何)619)  의 죄는 걸주(桀紂)보다 더하다. 걸주의 죄악은 당시에 그쳤지만, 왕 ·하(王何)의 화(禍)는 만세토록 전해갈 것이기 때문이다.’ 하였는데, 이 말이 충분히 오늘날의 단안(斷案)620)  이 될 것입니다. 신의 스승이 일찍이 윤증에 대해 논하기를, ‘안으로는 부자(父子)라는 사정(私情)에 핍박되고 밖으로는 식견(識見)이 투철하지 못한 데에 걸렸으니, 득실(得失)을 헤아리다가 그렇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였는데, 신의 스승의 이 말도 또한 그의 의서(擬書)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단지 사생(師生)의 의리에 교분(交分)에 의해서만 말했던 것입니다. 신의 스승의 대의(大義)를 부식(扶植)시키는 근엄함으로 그의 의서(擬書)를 보았다면 말을 해서 물리친지가 이미 오래 되었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저하(邸下)께서는 지사(志事)를 계술(繼述)하는 것을 우러러 생각하시고 세도(世道)의 박해(迫害)를 굽어살피시어 사신(詞臣)으로 하여금 특별히 대고(大誥)와 다방(多方)같은 한 편의 글을 지어 대의(大義)를 천명해서 원근(遠近)에 게시(揭示)함으로써 이미 회색(晦塞)된 인심을 다시 밝히게 하소서."
하니, 세자(世子)가 답하기를,
"스승을 위하여 신변(伸辨)한 것이 매우 상세하다. 따라서 이세덕(李世德)이 무함하고 비방한 정절(情節)이 더욱 명백하게 드러났으니, 진실로 통분스러운 일이다. 특별히 한편의 글을 지어 원근에 게시하는 일은 비록 갑자기 행하기는 어렵겠지마는, 논한 것은 좋았다."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김유(金楺)의 상소는 그 내용이 수천언(數千言)에 달하였는데, 이세덕(李世德)이 무함하고 비방한 정절(情節)을 명백하고도 통쾌하게 간파(看破)하여 다시 미진한 점이 없었다. 그가 대의(大義)에 대해 논한 사의(辭意)는 비분 강개하여 사람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였다. 그리고 대고(大誥)를 지어 원근에 게시하자고 청한 것도 또한 세교(世敎)를 부지(扶持)시키려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애석하게도 당시에 이를 꺼려하였기 때문에 시행되지 못한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68책 60권 56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685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사상-유학(儒學) / 사법-탄핵(彈劾) / 역사-사학(史學) / 윤리(倫理)


[註 585] 계축년 : 1673 현종 14년.[註 586] 을묘년 : 1675 숙종 원년.[註 587] 노서(魯西) : 윤선거의 호(號).[註 588] 우장(尤丈) : 우암(尤庵) 송시열.[註 589] 자인(子仁) : 윤증의 자(字).[註 590] 위공(魏公) : 남송(南宋)의 추밀사(樞密使) 장준(張浚), 위국공(魏國公)의 봉작을 받았음.[註 591] 남헌(南軒) : 남송(南宋)의 유학자 장식(張栻). 세상에서 남헌 선생(南軒先生)이라 일컬음. 장준(張浚)의 아들이고 주자(朱子)의 친우(親友)임.[註 592] 노장(魯丈) : 윤선거(尹宣擧)를 가리킴.[註 593] 정사년 : 1677 숙종 3년.[註 594] 무오년 : 1678 숙종 4년.[註 595] 임술년 : 1682 숙종 8년.[註 596] 비간(比干) : 은(殷)나라의 충신(忠臣)으로, 주왕(紂王)의 숙부(叔父)인데 주왕의 악정(惡政)을 간하다가 죽음을 당하였음.[註 597] 왕촉(王蠋) : 제(齊)나라의 획읍(劃邑)사람으로, 제왕(齊王)이 간언(諫言)을 듣지 않자 물러가 농사지으며 살았음.[註 598] 사생(師生) : 스승과 제자.[註 599] 걸주(桀紂) : 하(夏)나라의 걸왕(桀王)과 은(殷)나라의 주왕(紂王).[註 600] 탕무(湯武) : 은(殷)나라의 탕왕(湯王)과 주(周)나라의 무왕(武王).[註 601] 갑자년 : 1684 숙종 10년.[註 602] 범안(犯顔) : 임금이 싫어하는 안색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간(諫)함.[註 603] 하락(河洛)의 법문(法門)에도 고인(故人)의 후한 인정 때문에 형칠(邢七)을 감히 의심하지 않는 것 : 하락(河落)은 중국(中國) 하남성(河南省) 낙양인(洛陽人)을 뜻하는 것으로, 송(宋)나라 철종(哲宗) 때의 정이(程頤)를 지칭(指稱)한 것임. 정이가 소성(紹聖) 4년(1097)에 부주(涪州)로 귀양가게 되었는데, 문인 사양좌(謝良佐)가 "이 귀양길은 제가 그 유래를 아는데, 곧 족질 정공손(程公孫)과 형서(邢恕)의 소위입니다." 하니, 정이는 "족질은 어리석어서 꾸짖을 것조차 없고, 고인(故人)은 정이 두터워서 감히 의심하지 못한다." 하였음. 형서는 정이의 문인으로 나중에 정이를 배반하였음. 형칠(邢七)은 형서(邢恕).[註 604] 을축년 : 1685 숙종 11년.[註 605] 장자(長者) : 우암을 가리킴.[註 606] 광란(狂瀾) : 거센 세파(世波)를 뜻함.[註 607] 갑자년 : 1684 숙종 10년.[註 608] 기사년 : 1689 숙종 15년.[註 609] 갑술년 : 1694 숙종 20년.[註 610] 망곡(望哭) : 명나라쪽을 바라보며 통곡함.[註 611] 존주(尊周) : 명(明)나라를 높임.[註 612] 거실(巨室) : 세력이 있는 가문(家門).[註 613] 신유 의서(辛酉擬書) : 숙종(肅宗) 7년(1681) 윤증이 송시열에게 보내려고 썼던 글. 송시열이 평생 높이고 따른 사람이 바로 주자(朱子)인데, 송시열의 행사(行事)가 주자의 가르침과 다르다는 것을 들어 그의 본원(本源)과 학술(學術)에 대해 공박한 내용임.[註 614] 양묵(楊墨) : 주(周)나라 말기의 학자인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말함. 양주는 극단의 이기설(利己說)을 주장하였고 묵적은 극단의 겸애설(兼愛說)을 주장했는데, 이들은 모두 맹자(孟子)에게 이단(異端)으로 배척 받았음.[註 615] 홍수(洪水)와 맹수(猛獸)의 피해 : 이단(異端)의 피해는 홍수와 맹수의 피해보다 더하다는 뜻. 《맹자(孟子)》 등문공(滕文公) 하(下)에 "옛날 우왕(禹王)이 홍수를 억제하여 다스리니 천하가 태평하였고, 주공(周公)이 이적(夷狄)을 겸병(兼倂)하고 맹수를 몰아내어 백성들이 편안하였다."한 데에서 인용한 말임.[註 616] 황도(黃道) : 명나라 황제의 행차를 가리킴.[註 617] 그의 아비 : 윤선거.[註 618] 협령(挾令) : 천자(天子)를 끼고 제후(諸侯)를 호령함.[註 619] 왕·하(王何) : 왕필(王弼)과 하안(何晏)을 이름. 이 두 사람은 노장(老莊)의 학설(學說)을 세상에 퍼뜨려 해독을 끼쳤음.[註 620] 단안(斷案) : 옳고 그름을 딱 잘라서 판단함.
사신(史臣)은 말한다. "김유(金楺)의 상소는 그 내용이 수천언(數千言)에 달하였는데, 이세덕(李世德)이 무함하고 비방한 정절(情節)을 명백하고도 통쾌하게 간파(看破)하여 다시 미진한 점이 없었다. 그가 대의(大義)에 대해 논한 사의(辭意)는 비분 강개하여 사람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였다. 그리고 대고(大誥)를 지어 원근에 게시하자고 청한 것도 또한 세교(世敎)를 부지(扶持)시키려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애석하게도 당시에 이를 꺼려하였기 때문에 시행되지 못한 것이다."

 

약방(藥房)에서 들어와 진찰하였다. 임금이 수부(手部)에 있는 내관(內關) 좌우혈(左右穴), 족부(足部)에 있는 임읍(臨泣)·내정(內庭) 좌우혈(左右穴)에 침을 맞았다.

 

12월 11일 신묘

미시(未時)에 태백성(太白星)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호조(戶曹)에서 말하기를,
"병신년621)  의 우도(右道)의 수세안(收稅案)을 본조(本曹)에서 계산하여 고험(考驗)하여 보니, 경기(京畿)·강원(江原) 두 도(道)의 열 고을에 대한 재결(災結) 이외에 실결(實結) 가운데에서 감록(減錄)된 것이 1백여 결(結)이나 되니, 청컨대 그 수령(守令)을 파직시키소서."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조태채(趙泰采)가 뒷날 연석(筵席)에서 임금에게 건백(建白)하기를,
"수령(守令)들 가운데 죄과(罪科)를 범한 사람이 10인에 이르고 있는데 그 가운데에는 바야흐로 감사(監司)의 직임을 맡고 있는 사람도 있으니, 한꺼번에 갑자기 파직시키는 것은 또한 매우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추고(推考)하라고 명하였다.

 

이희조(李喜朝)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홍만조(洪萬朝)를 판윤(判尹)으로, 박사익(朴師益)·조관빈(趙觀彬)을 부교리(副校理)로, 홍석보(洪錫輔)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12월 13일 계사

미시(未時)에 태백성(太白星)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달이 필성(畢星)의 제일성(第一星)을 범하였다.

 

이건명(李健命)을 대사헌(大司憲)으로, 황귀하(黃龜河)를 교리(校理)로 삼았다.

 

정언(正言) 김여(金礪)가 상서(上書)하여 더욱 성례(誠禮)를 돈독하게 해서 유상(儒相)을 초치(招致)할 것을 청하고, 또 말하기를,
"홍만우(洪萬遇)는 삭출(削黜)시킨 형벌로는 그의 죄를 징계할 수는 없으니, 먼 변방으로 귀양보내는 형벌을 시행해야 합니다."
하니, 세자(世子)가 답하기를,
"상서(上書)의 내용이 매우 간절하고도 지극하여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기고 이다. 홍만우(洪萬遇)를 삭출시킨 형벌은 또한 넉넉히 그의 죄를 징계시킬 수가 있다."
하였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이광적(李光迪)이 졸(卒)하였다. 광적은 인품이 근후(謹厚)하여 장자(長者)의 풍도가 있었다. 일찍이 과거(科擧)에 급제하여 삼조(三朝)를 두루 섬겼는데, 직무의 봉행을 근실하게 하였고 나이가 아주 노쇠한 지경에 이르러서도 조알(朝謁)을 폐하지 않았다. 그리고 국가에 대사(大事)가 있을 적마다 반드시 상소(上疏)하여 득실(得失)을 논하였다. 늙도록 오래 살았다는 것으로 품계를 올려 주어 숭정 대부(崇政大夫)까지 이르렀는데, 이때에 와서 졸(卒)하니 나이 90세였다.

 

12월 14일 갑오

약방(藥房)에서 들어와 진찰하였다. 임금이 수부(手部)에 있는 신문(神門), 족부(足部)에 있는 행간(行間)·신맥(神脈) 좌우혈(左右穴)에 침을 맞았다.

 

12월 16일 병신

송진명(宋眞明)을 접위관(接慰官)으로 삼았다.

 

충청도(忠淸道) 각 고을의 백성들이 바야흐로 염병(染病)을 앓고 있는 사람이 8백 76명이고 사망한 사람이 4백 16명이었는데, 도신(道臣)이 이와 같은 사실을 보고하여 왔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권상유(權尙游)가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당년의 수세미(收稅米)가 13만 석(石)에 불과한데, 1년의 경비(經費)도 거의 이와 맞먹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여러 도(道)에 큰 흉년이 들어 세입(稅入)이 크게 줄어든 탓으로 단지 5만 8천여 석(石)이 있을 뿐이므로 앞으로 지급[支下]할 방도가 아득하기만 할 뿐 대책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금년의 연사(年使)는 풍년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지난해에 비하면 대단히 좋고 각종 재명(災名)도 지난해처럼 많지 않으니, 세입(稅入)의 수량은 당연히 넉넉하리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황해도(黃海道)·강원도(江原道)·경기(京畿)·충청도(忠淸道)의 대체적인 상황을 보니 증가된 데도 있고 감손된 데도 있었으며, 호서(湖西)에 이르러서는 소문에 의거 참작해 보면 지난해와는 현격하게 다르다고 할 수 있는데도 실결(實結)의 감축이 지난해에 비하여 그다지 다른 것이 없으니, 이점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대저 전지(田地)를 검점(檢點)할 적에 수령(守令)들이 간혹 구차스럽게 명예를 얻으려는 마음이 없지 않고 또한 간리(奸吏)에게 속아 은폐(隱蔽)를 당하는 경우도 많은데, 도신(道臣)이 이를 잘 검칙(檢飭)하지 않기 때문에 실결(實結)의 누락이 많게 되는 것입니다. 양남(兩南)622)  도 다시 이와 같이 된다면 앞으로 국가의 모양을 이룰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금년에는 이미 경차관(敬差官)을 보내지 않았고 답험(踏驗)623)  하는 정사를 수령(守令)에게 전적으로 위임하였으니, 마땅히 연분(年分)이 거의 끝나갈 때를 기다려 어사(御史)를 파견하여 각 고을의 급재(給災)된 곳으로 가서 특별히 적간(摘奸)하게 한 다음 잘못이 드러나는 대로 무거운 쪽으로 과죄(科罪)함으로써 징계하고 격려하는 터전을 만들게 하소서."
하니, 세자(世子)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총융청(摠戎廳)에서 말하기를,
"소속된 관하의 임진도(臨津渡) 별장(別將)이 모집하여 얻은 양초(兩哨)624)  의 군사가 모두 소지할 총검(銃劒)이 없습니다. 청컨대 호조(戶曹)에 납입할 영남(嶺南)의 염세(鹽稅)와 선세(船稅)를 환납(換納)하게 하여 거기서 남은 이익으로 기계(器械)를 준비하여 임진(臨津)에서 모집해 얻은 군졸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소서."
하니, 세자(世子)가 그렇게 하였다.

 

12월 18일 무술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에 진달한 것을 다시 진달하고, 또 말하기를,
"삼가 듣건대, 주사(籌司)625)  의 회달(回達)로 인하여 의주(義州)에서 객사(客使)에게 호소(呼訴)한 수창인(首唱人)인 주익환(朱益桓)을 원배(遠配)하라는 명이 있었다고 하는데, 신은 개연(慨然)한 마음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의주의 민정(民情)은 타도(他道)와 달라서 방한(防限)을 엄중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익환 등이 감히 기황(飢荒)이 특별히 극심하다는 것으로 구제하여 살려주기를 바란다는 등류의 말로 객사에게 호소하였으니, 그 죄범(罪犯)을 논하면 부탁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청컨대 특명을 내려 국경(國境)에서 효시(梟示)하게 하소서. 홍만우(洪萬遇)가 올린 한장의 상소는 그 내용이 매우 참혹했습니다. 대신(大臣)이 헌의(獻議)할 적에 곤란하게 여기는 것을 드러내어 보였고, 산인(山人)이 세자를 조호(調護)함에 있어 이렇게 해서는 안 될 것 같다고 한 말은 한없는 화심(禍心)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엄중히 방지하지 않는다면 진신(搢紳)들을 화(禍)에 얽어넣고 유현(儒賢)들을 해치는 무리들이 반드시 잇따라 일어나게 될 것이니, 청컨대 멀리 귀양보내소서."
하였으나, 세자(世子)가 따르지 않았다.

 

좌의정(左議政) 권상하(權尙夏)가 현도(縣道)를 통하여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삼가 듣건대, 홍만우(洪萬遇)의 소장(疏章)에서 신의 죄상을 거론한 것이 매우 위파(危怕)스러웠다고 하니, 신은 오정(五情)626)  이 아득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이 거처하고 있는 곳은 궁벽한 시골이어서 아주 뒤에야 성상(聖上)께서 연석(筵席)에서 미안한 분부가 있었다는 말을 삼가 들었습니다. 곧이어 동궁(東宮)에게 청정(聽政)하게 한다는 명이 곧바로 내렸습니다. 일식(日食)·월식(月食)이 곧 복원(復元)되듯 주상의 개과(改過)가 곧 있게 될 것인데, 신이 어떻게 감히 초야(草野)의 미천한 종적으로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해 이론(異論)을 제기하고 처분(處分)이 이미 결정된 뒤에 논열(論列)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신은 국가의 크고 작은 일에 대해 감히 한 마디도 말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대개 이는 몸은 나가지 않았으면서 말만 한다는 것은 옛사람의 경계를 범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태묘(太廟)에 고하는 것에 대한 수의(收議)에 이르러서는 이에 대신(大臣)들에게 수의한다고 이름하였으니, 이는 신이 더럽히고 있는 것과는 천만 가당찮은 것이었으므로 명령을 받들 길이 없어 주야로 황공스러운 마음이었습니다. 따라서 어떻게 감히 대신(大臣)으로 자처(自處)하면서 헌의(獻議)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이 성세(聖世)에 살고 있는 것이 저 강호(江湖)의 한 마리 오리나 기러기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말하거나 침묵하는 것이 조정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 단지 헛된 명성으로 임금을 속여 은혜로운 총애가 너무 융숭했기 때문에 귀신의 미움과 사람의 분노를 사게되어 업화(業禍)가 이르게 되었으니, 이 모두가 운명입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아! 국가가 어려울 때를 당하였으므로 어질고 덕이 있는 선비를 얻어 삼사(三事)627)  의 직임에 앉히려 하고 있으니, 소자(小子)628)  가 경(卿)에게 기대하는 것이 과연 어떠하겠는가? 더구나 세자(世子)가 정사를 대리(代理)하게 되어 부탁이 지중(至重)하니, 세자를 보좌할 책임을 큰 덕망이 있는 대신(大臣)에게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런데 성의가 미덥지 못한 탓으로 조정에 나을 기약이 갈수록 아득하기만 하니, 놀랍고 부끄러운 탄식을 이미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리고 경이 홍만우(洪萬遇)의 상소(上疏)로 인하여 이런 진장(陳章)이 있은 것인데, 이 일은 변파(辨破)하기가 어렵지 않다. 전일에 미안한 분부가 있기는 하였으나 경은 멀리 외방에 있었기 때문에 즉시 듣고 알지 못한 가운데 특지(特旨)를 즉시 내려 처분(處分)을 확정하였으니, 이것이 경이 다시 논의를 제기하지 않고 바로 춘궁(春宮)에게 면계(勉戒)를 진달한 이유인 것이다. 경은 본직(本職)에 대해 바야흐로 지나치게 겸양(謙讓)하고 있는데 이것이 태묘(太廟)에 고하는 데 대해 순문(詢問)할 적에 헌의(獻議)할 수 없었던 이유인 것이다. 각각 경우에 따라 당연한 것이므로 원래 털끝만큼도 미진한 것이 없는데도 홍만우(洪萬遇)가 이간시킬 계책을 부리기 위해 위협하고 무함함이 하지 않는 짓이 없었으니, 현인(賢人)을 무함하고 정인(正人)을 해치는 정상이 너무도 통분스럽다. 그래서 이미 삭출(削黜)시키는 형벌을 시행하였다. 그러니 이런 등류의 위험스런 말은 입에 올릴 것이 뭐 있겠는가? 경은 안심하고 사퇴하지 말 것이며 속히 올라와서 세자(世子)를 보좌하여 주기 바란다."
하였다.

 

12월 19일 기해

약방(藥房)에서 들어와 진찰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차자(箚子)를 올려 사면(辭免)을 청한 것이 열 번이 넘었다. 임금이 세자와 함께 잇따라 승지(承旨)와 사관(史官)을 보내어 위유(慰諭)하기를 그치지 않았는데, 이날에야 비로소 입직(入直)하였고 이내 입시(入侍)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조태채(趙泰采)도 함께 입시(入侍)하였다. 진찰이 끝난 다음 조태채(趙泰采)가 말하기를,
"함일해(咸一海)의 상서(上書) 가운데 아래 조항에 이른바 용맥(龍脈)에 혈(穴)이 없고 수법(水法)이 합치되지 않는다고 한 등의 말은 그것이 어떠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당초 성교(聖敎)로 인하여 예조(禮曹)의 당상관(堂上官)이 지사(地師)들을 데리고 가서 간심(看審)하였고 금천군(錦川君) 지(榰)도 따라가서 택정(擇定)한 것이니 만일 조금이라도 이의(異義)가 있었다면 어찌 완정(完定)했을 이치가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이미 흠결이 있다는 말이 있으니 그 신중히 한다는 도리에 있어 한번 가서 살펴보고 이에 대한 시비(是非)를 막지 않을 수가 없겠습니다. 다시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지사(地師)들을 데리고 가서 함일해와 함께 반복하여 논란하게 하여 그의 말이 과연 허망(虛妄)한 것이라면 죄를 주고 혹시 국법(局法)에 어긋난 것이 있다면 의당 속히 변통시켜야 할 것입니다. 여러 사람의 의논이 모두 이와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이명(李頤命)에게 하문하였다. 이이명도 조태채의 말을 옳다고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12월 20일 경자

강원 감사(江原監司) 김상직(金相稷)이 장계(狀啓)를 올려 본도(本道)의 재해를 입은 상황을 진달하고 영동(嶺東)에서 호조(戶曹)에 납입할 염세(鹽稅)와 선세(船稅)를 받아서 유치(留置)시켜 진구(賑救)에 보태게 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비국(備局)에서 복주(覆奏)하니, 임금이 그대로 허락하였다.

 

12월 21일 신축

집의(執義) 김간(金幹)이 현도(縣道)를 통하여 상서(上書)하여 사직(辭職)하였다. 그리고 스승의 무함에 대해 변명(辨明)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이세덕(李世德)의 공사(供辭)를 보니 신의 스승인 선정신(先正臣) 박세채(朴世采)의 갑자년629)   상소와 서한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 많았는데, 대부분 자기의 뜻에 따라 마음대로 버리고 취(取)하였으므로 신의 스승의 본의(本意)와는 크게 어긋난 것이었으니, 어찌 간략하게나마 변명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윤증(尹拯)이 자신의 스승인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과 혐의진 일이 있었는데, 그 조짐이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중간(中間)에 또 의서(擬書)에 대한 한 가지 일이 있게 되자 신의 스승은 그것이 사생(師生) 사이의 의리(義理)를 손상시킬까 염려하여 윤증에게 경사(傾謝)하도록 권하였고, 윤증도 처의(處義)하는 방법에 대해 문의하였으므로 또한 서한으로써 신의 스승과 왕복했었습니다. 그때 최신(崔愼)이란 자가 갑자기 한 장의 상소를 올려 극력 비난하고 배척하였기 때문에 신의 스승이 사직소(辭職疏)의 끝에다 그 일의 시종(始終)에 대한 것을 상세히 말했던 것인데, 이른바 갑자년(甲子年) 상소라는 것이 이것입니다. 이때에는 양가(兩家)630)  의 구흔(構釁)631)  이 그렇게 깊지 않았습니다만, 신의 스승은 이 일이 끝내는 반드시 세도(世道)에 큰 화(禍)를 끼치게 될 것을 우려한 나머지 드디어 양쪽을 조정하여 화해시킬 계획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이제 본소(本疏)를 가지고 고찰(考察)하여 보겠습니다. 본소(本疏)에 ‘윤증이 장서(長書)를 올리려 하였으므로 신이 만났을 적에 이를 말린 것이 두세 번 정도가 아닙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먼저 송시열(宋時烈)에게 대의(大意)를 통보한 데 대해서는 신이 또 너무 경솔한 데 관계되는 것임을 애석히 여겼습니다.’ 하였는데, 이는 규계(規戒)한 말입니다. 또 말하기를, ‘그의 장점은 남의 말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데 있으니 다시 서로 개익(開益)시켜 의리(義理)의 가늠대를 극진하게 할 수 있었다면 반드시 이런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했는데, 이는 화해시키기 위해서 한 말입니다. 결어(結語)에 ‘신이 송시열에게 비록 수업(受業)을 청한 일은 없습니다만 그의 문장(門墻)을 출입한 지가 20여 년입니다. 그리고 윤증에 대해서도 그의 선인(先人)632)   때부터 종유(從遊)한 우의(友義)가 매우 깊었습니다. 따라서 기필코 피차 사생(師生) 사이를 화해시켜 보합(保合)하게 하려고 번번이 그의 장서(長書)를 중지시켰습니다. 그런데 갈수록 더욱 잘못됨이 깊어져 또 다른 병패(病敗)가 발생한 것이 이처럼 극도에 이르러 사람을 부끄럽고 한스럽게 만들어 스스로 변명할 수 없게 만들 줄을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서찰(書札)에 이르러서는 윤증에게 규계(規戒)한 것이 계축년633)  에서 기사년634)  에 이르기까지 거의 수십 번에 이르렀는데, 의리(義理)의 충정(衷情)으로 논하고 사생(師生)의 분의(分義)로 책망한 것이 누누이 수천언(數千言)이나 되었습니다. 그리고 백세(百世) 뒤의 공론(公論)이 두렵다는 뜻으로 기어이 감오(感悟)시키기 위해 부지하고 간절스럽게 이야기했으니, 붕우(朋友) 사이에 충고(忠告)한다는 뜻에 있어 지극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송시열에게는 이런 뜻으로 미루어 고하면서 번번이 정자(程子)가 문인(門人)에 대해 조처한 것과 주자(朱子)가 양자직(楊子直)·노덕장(路德章)을 대우한 일을 인용하여 화평한 마음으로 잘 처리할 것을 권하였습니다. 신의 스승이 문인(門人)에게 보낸 답서(答書)에서 말하기를, ‘당초에는 사우(師友) 사이를 화해시켜 잘 처리하게 하려고 했었기 때문에 상소와 서한의 내용에서 모두 곡진히 하기를 힘썼다.’고 하였는데, 이는 위와 같은 과정을 말한 것입니다. 따라서 스승이 두 사람 사이를 권면(勸勉)시킨 것은 모두가 성실하고 안타깝게 여기는 것이 대공지정(大公至正)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의 스승의 이 일은 모두 기사년(己巳年) 이전에 있었던 것입니다. 기사년 이후에는 일이 너무 심각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선정(先正)635)  이 후명(後命)636)  을 받게 되어서는 신의 스승이 윤증에게 망곡(望哭)하고 시마복(緦麻服)을 입기를 권하였고 또 별도로 제문(祭文)을 지어 충곡(衷曲)을 갖추어 개진한 다음 분묘(墳墓) 앞에서 일곡(一哭)하고 고(告)하여 유명(幽明)의 원한을 풀도록 하였으니, 이렇게 주선(周旋)하면서 선도(善導)하려는 뜻이 정성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만, 그 말이 끝내 시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뒤로 신의 스승의 뜻이 전일과 다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스승이 좌우(左右)를 경중(輕重)한 뜻과 피차(彼此)를 부억(扶抑)시킨 일이 지구(知舊)들에게 보낸 서한과 문인(門人)들과 문답(問答)한 말에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스승이 만년(晩年)에 저술한 ‘사우고증(師友攷證)’에서도 그 미의(徵意)637)  의 소재를 알 수가 있습니다. 애석한 일입니다. 윤증이 신의 스승의 말을 갑자년638)   무렵에 받아들였다면 반드시 사림(士林)이 붕궤되는 화(禍)가 없었을 것이고, 기사년(己巳年)에 받아들였다면 어찌 만년에 허다한 낭패가 있었겠습니까? 스승이 윤증의 원노(怨怒)가 그리 깊어 지기 전에는 정성을 다하여 화해시키려 하였고 혐의가 너무 깊어진 뒤에는 의리에 의거하여 드러내어 배척하였는데, 이것은 모두 일에 따라 중도에 맞게 하고 각각 충정(衷情)에 적합하게 하는 도리에서 나온 조처인 것으로, 심사(心事)가 갠 하늘에 밝은 해와 같아서 털끝만큼도 사심(私心)에 치우친 것이 없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세덕(李世德)은 그러한 뜻은 모두 없애버리고 신의 스승의 공평하고 정대한 마음을 아주 어둡게 하여 밝히지 않았습니다. 이는 자기 스승을 위하여 신변(伸辨)하기에 성급하여 그렇게 된 것이긴 하겠지만, 그의 용의(用意)가 치우치고 내용을 공교하게 꾸며 신의 스승의 본심(本心)을 엄폐시킨 것은 환히 드러나 숨기기가 어렵습니다. 신이 글을 지어 올리려 할 즈음에 평안 감사(平安監司) 김유(金楺)의 서본(書本)을 얻어 보았는데, 거기에 이 일의 전말(顚末)이 상세히 기재되어 있고 곡절이 환히 드러나 있었으므로 신이 다시 중첩되게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의 의리에 있어서는 시종 침묵을 지키고 있을 수 없기에 참람스러움을 잊고 간략하게 개요(槪要)를 진달하는 바입니다."
하니, 세자(世子)가 우악한 비답(批答)을 내렸다.

 

12월 22일 임인

김연(金演)을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로, 김흥경(金興慶)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이기익(李箕翊)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조명봉(趙鳴鳳)을 사간(司諫)으로 조성복(趙聖復)을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12월 25일 을사

심택현(沈宅賢)을 승지(承旨)로, 홍정필(洪廷弼)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태학(太學)의 유생(儒生) 박두익(朴斗益) 등 1백여 인이 상서(上書)하여 이세덕(李世德)이 선정(先正)639)  을 무함한 죄를 변척(辨斥)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이세덕(李世德)의 공사(供辭)에 ‘선정(先正)이 찬술한 윤선거(尹宣擧)의 묘문(墓文)에 조금 억양(抑揚)이 있었던 것은 기유 의서(己酉擬書)가 노여움을 촉발시킨 데에 연유한 것입니다.’ 하였는데, 이는 참으로 속이는 말입니다. 무릇 선정(先正)이 윤증 부자(父子)에게 의심을 가지게 된 것은 오로지 역적 윤휴(尹鑴)의 일에 연유된 것입니다. 선정(先正)이 애타게 극력 나무라면서 기필코 윤휴에게서 구제하여 내려고 하였는데도 윤선거(尹宣擧)는 더욱더 그를 존신(尊信)하면서 끝내 머리를 돌리지 않고 말았으니, 이 또한 하나의 역적 윤휴인 것입니다. 이리하여 선정이 《춘추(春秋)》에 먼저 당여(黨與)를 다스려야 한다는 의리에 의거하여 윤휴를 버려두고 윤선거를 배척한 것입니다. 그런데 을사년640)   동학사(東鶴寺)의 모임에 이르러서 윤선거가 비로소 은밀히 검은 마음을 품은 소인(小人)을 참여시켰다는 것으로 윤휴를 배척하였고, 스스로 교도(交道)를 이미 끊었다고 말하였으므로 선정이 매우 기뻐하였고 다시는 의심을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뒤 갑자기 서한을 보냈는데 그 내용에 앞서 했던 말이 상당이 바뀌어 있었으므로 선정이 그의 말이 모호(模糊)한 것을 괴이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윤선거(尹宣擧)가 죽었는데 윤증이 윤휴의 전뢰(奠酹)641)  을 받았으니, 윤선거가 스스로 윤휴와 절교했다고 한 것이 불성실한 말이었음이 절로 입증된 것입니다. 기유 의서(己酉擬書)가 나온 데 이르러서는 그 내용에서 윤휴를 참적(讒賊)으로 결단한 것은 불가한 것임을 극언(極言)하였으니, 윤선거가 시종 윤휴와 두텁게 교결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비록 의심하지 않으려고 한들 되겠습니까? 따라서 이미 의심했다면 묘문(墓文)을 지으면서 지나치게 칭찬할 수 없는 것은 도리상 당연한 것입니다. 윤증이 갑자기 원독(怨毒)을 품고 왕복하는 즈음에 구속(拘束)하고 억압함에 있어 못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이는 화(禍)는 피하고 복(福)은 취택하려는 마음에서 본디 선정(先正)을 배반하려고 했던 차에 이 묘문(墓文)에 대한 일이 발생하자 이를 패병(欛柄)642)  으로 삼은 데에서 나온 조처인 것입니다. 이제 이세덕(李世德)은 윤선거가 윤휴에 대해 조처한 것에 관해서는 전혀 의논을 제기하지 않은 채 단지 말하기를, ‘의서(擬書) 때문에 노여움이 촉발된 것이다.’ 하였고, 그 노여움이 촉발된 것은 그 내용 가운데 선정(先正)이 잔을 규경(規警)한 것에 대한 노여움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공사(供辭)에서 이미 말하기를, ‘윤선거가 선정에 대해 일생토록 근간(懃懇)하게 규계(規戒)했다.’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선정이 윤선거를 찬양(讚揚)했다.’고 하였는데, 무릇 일생 동안 규계했는데도 찬양하였다면 더구나 그가 죽은 뒤에 나온 유찰(遺札)에 대해 무엇이 노여워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는 또 선정이 지은 제문(祭文)의 내용에 들어 있는 구어(句語)와 《삼학사전(三學士傳)》의 서문(序文)에서 찬미한 말을 인용하여 강도(江都)에서 있었던 일이 윤선거에게 하자(瘕疵)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 것은 더더욱 가소롭기 그지없습니다. 무릇 한때에 제현(諸賢)들이 윤선거를 버리지 않은 것은 식경보의(息黥補劓)643)  하는 뜻이 있었기 때문이었지 어찌 죽지 않은 것이 누(累)가 되지 않는다고 한 적이 있었습니까? 이제 제문에 와전(瓦全)644)  이란 등등이 말과 서문에 ‘일은 비록 같지 않지만……’이라고 한 것을 살펴본다면 선정(先正)의 미의(微意)를 또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른바 뜻을 지키고 몸을 깨끗이 한다는 등등의 말은 진실로 윤선거가 난후(亂後)의 자폐(自廢)한 일에 대해 허여(許與)한 것인데, 윤증이 자기 아비가 스스로 죄로 여긴 것은 강도(江都)에서의 일 때문이 아니라고 하고 도리어 거기서 죽지 않은 것이 십분 도리에 맞는다고 한 데에 이르러서는 선정이 허여하고 용서한 것은 대체로 그에게 기만을 당했으니, 따라서 놀랍고 통분하여 폄척(貶斥)하는 것을 어찌 이미 죽었다고 해서 그만둘 수가 있겠습니까? 그의 공사(供辭)에 또 윤증에 대한 묘문(墓文)의 일이 있기 이전에 송시열이 헌체(獻替)645)  하여 준 적이 있는데, 이는 윤선거가 책선(責善)하여 준 것에 연유한 것으로, 거듭 말해주고 싶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또 묘문(墓文)의 일이 있기 전에는 선정(先正)의 기질(氣質)에 병통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사도(師道)가 단절되지 않았기 때문에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을 도모하는 것으로 부탁하였는데, 선정의 본원(本源)의 심술(心術)에 대해 의심한 것은 바로 정의(情義)가 어긋나고 난 뒤에 있었던 것이라고 했습니다만, 이 또한 가소롭기 그지없는 말입니다. 선정에서 진실로 말할 만한 잘못이 있었다면 그의 아비가 이미 다 책선(責善)했다는 것을 핑계하고서 의견을 제시하지 않고 오로지 유락(唯諾)만을 일삼고서 그의 마음을 거스르지 않았다는 것이 도리에 맞는 말이겠습니까? 또 그의 말처럼 묘문(墓文)이 이미 나온 뒤에야 본원(本源)의 병통을 알아 사도(師道)를 끊었다고 한다면, 그런 상황에서도 한편으로는 애걸(哀乞)하며 고쳐서 지어줄 것을 바랐고 또 한편으로는 비난하면서 자신의 분노를 마구 부린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반드시 이점에 대해 변별(辨別)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또 그의 공사(供辭)에서 선정신(先正臣) 박세채(朴世采)의 전후 서한과 갑자년646)   상소의 구어(句語)를 끌어 내다가 멋대로 뜯어 맞추어 시비를 현란시킨 무망(誣罔)에 대해서는 박세채(朴世采)의 문인(門人)들이 이미 모두 조목별로 변명(辨明)하였으니, 이제 누누이 번거롭힐 필요가 없습니다. 대개 당초에는 박세채(朴世采)가 윤증의 심중을 통찰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래도 조정(調停)하려는 기대가 있었습니다만, 그 뒤로 윤증의 심적(心迹)이 남김없이 다 드러나고 선정(先正)이 참혹하게 화고(禍故)를 당하고 나서는 윤증이 옳지 못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더욱 선정(先正)의 선견지명(先見之明)에 감복하여 시마복(緦麻服)을 입게 하였으며, 갑술년647)  에 조정에 들어가서도 끝내 한 번도 윤증을 부르자고 청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그에 대한 전조(銓曹)의 의망(擬望)을 저지시키기까지 하였으니, 그가 두 사람 사이에서 처신한 것이 명백할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조정(調停)시킬 때의 언의(言議)를 인용하여 좌계(左契)648)  로 삼으면서 만년(晩年)의 정론(定論)을 폐기할 수 있겠습니까? 윤선거의 문자(文字)가 참람스럽고 망령된 것은 이세덕(李世德)이 아무리 공교하게 주각(註脚)을 내고 곡진한 해설을 덧붙인다 해도 그 말이 난삽하고 어색하며 지리하고 구차스러워서 조리에 맞지 않기 때문에 현명한 사람은 한 번 보면 그것이 무망(誣罔)인 것을 알 수가 있으므로, 사설(辭說)을 허비하며 변명할 필요가 없이 무망(誣罔)인 것을 알 수가 있으므로, 사설(辭說)을 허비하여 변명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아! 선정의 조예(造詣)가 천심(淺深)한 것은 진실로 신 등 같은 말학(末學)으로서는 감히 엿보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정대(正大)한 기운은 순강(純剛)한 덕과 부합이 되고 엄의(嚴毅)한 모습은 산악(山岳)의 형상과 같습니다. 두려워하여 조심하면서 자기 지조를 지키는 것은 더욱 근엄하고 더욱 공경한다는 심법(心法)인 것입니다. 지식[知]과 행위[行]를 아울러 연마한 것은 박문(博文)·약례(約禮) 두 가지를 지극하게 하기 위한 규모(規模)인 것입니다. 많이 배우고 널리 표현하여 어디든지 구애되는 것이 없는 것은 사물(事物)을 접응(接應)함에 있어 무궁한 용(用)이 되는 것입니다. 도(道)를 위하여 몸을 바쳐도 끝내 원망과 뉘우침이 없었던 것은 사변(事變)을 겪고 험난(險難)을 당하여도 변하지 않는 조수(操守)인 것입니다. 출처(出處)·어묵(語默)·문장(文章)·사공(事功)에 이르기까지도 어느 것 하나 고정(考亭)649)  의 성헌(成憲)에 근본하여 지순(持循)650)   봉행(奉行)하기를 장수가 병부(兵符)를 가진 것처럼 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니, 신 등이 이른바 주자(朱子)를 본받았다고 하는 것을 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옛날 우리 효종 대왕(孝宗大王)께서 10년 동안 와신상담(臥薪嘗膽)651)   하면서 뜻을 가다듬어 수치를 씻으려고 할 적에 제일 먼저 선정(先正)을 임용하였고 온 나라가 그를 따르니, 이때 강론한 것은 내수 외양(內修外攘)의 지극한 계책이었고 지킨 것은 《춘추(春秋)》의 대의(大義)였습니다. 비록 하늘이 송(宋)나라를 돕지 않아서 갑자기 효종(孝宗)께서 승하(昇遐)하심에 따라 목마(木馬)·철장(鐵杖)652)  을 갖춘 채 천고에 한을 남기게 하고 말았습니다. 지금 사람들이 모두 절의(節義)를 사모하고 구차하게 사는 것이 부끄러운 것임을 알아서 무지한 오랑캐가 되는 것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당시의 군신(君臣)이 천리를 밝히고 인심을 바로잡은 공에 의한 것이니, 어떻게 여기에 대해 이론(異論)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윤증을 편드는 무리들은 품은 원한이 골수에 사무쳐서 선정이 잡아 지켰던 대의(大義)까지도 아울러 실상이 없는 공언(空言)으로 귀결시켜 버렸는데, 그것이 이세덕(李世德)의 공초(供招)에 이르러 극도에 달했습니다. 이것은 선정의 현명(賢明)을 비방 손상하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 자못 장차 영고(寧考)의 성덕(盛德)과 대업(大業)까지도 아울러 모호하게 만든 것이니, 어찌 통분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때문에 독대(獨對)했을 대의 설화(說話)를 실제로 실행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고 하면서 멋대로 방자하게 비방하는 것에 이르러서는 더욱 절통하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아! 묘당(廟堂)에서 토론하는 것은 현명한 임금과 어진 정승이 서로 만났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고, 더구나 이 복수하여 수치를 씻는 의리는 바로 선정이 일찍부터 담당하였던 것인데, 어찌 거기에 퇴탁(退托)하는 의사는 털끝만큼인들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반드시 먼저 제갈양(諸葛亮)이 대업을 이루지 못한 것과 국가의 복망(覆亡)이 걱정스럽다는 것을 진달한 것은 이야말로 성상(聖上)의 뜻을 견고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이것이 어찌 이세덕(李世德)같이 미련한 무리들이 감히 엿보아 헤아릴 수가 있는 것이 있겠습니까? 선정이 대상(大喪)이 있은 뒤에 서울을 떠난 일을 효종(孝宗)에게 불충(不忠)한 증거로 삼는 것은 더욱 형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 참소를 근심하고 시기를 두려워하여 의리에 있어 당연히 떠나야 하는 것이면 비록 갑작스럽고 급박한 즈음에 있더라도 나아가기는 어렵게 여기고 물러나기는 쉽게 여기는 지조를 잃지 않았으니, 군자의 출처(出處)가 정당(正當)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인산(因山)653)  이 지나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참고 견디며 시일을 미루다가 국장(國葬)이 끝나기를 기다려서야 비로소 결단을 내려 떠났으니, 지성스럽고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이 그 가운데 병행(並行)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마음대로 억제(抑制)하여 터무니없는 사실을 날조함으로써 기필코 하고 싶은 대로 하려고 하였으니, 다른 것이야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신 등은 또 홍만우(洪萬遇)의 상소에 대해 더욱 놀랍고 통분한 것이 있습니다. 그의 말은 몇 구(句)의 글귀에 불과하지만 그 가운데는 끝없는 화심(禍心)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아! 참소하는 말이 어쩌면 이러한 극도에 이를 수가 있겠습니까? 지난번 미안스런 분부가 〈모두들 세자에 대해〉 목을 길게 빼고 몹시 기다리는 때에 갑자기 내렸기 때문에 중외(中外)의 사람들이 의혹에 잠긴 것은 진실로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임하(林下)에 있는 신하는 궁벽한 산골에 살고 있었으므로 제일 뒤에야 서울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는데, 그날 연석(筵席)에서 있었던 분부와 그 뒤 청정(聽政)하게 한 명령을 동시에 함께 들었으니, 이미 처분(處分)이 결정된 뒤에 추급해서 말할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하지만 나라 일을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정성에 있어서 그만 둘 수 없었기 때문에 이에 요순(堯舜)의 심법(心法)에 대한 말을 가지고 정성스럽게 면계(勉戒)하면서 저하(邸下)께서 가법(家法)을 잘 계승해 가기를 바랐었으니, 이른바 조호(調護)라고 하는 것이 어찌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태묘(太廟)에 고하는 논의에 이르러서는 조정에서 대신(大臣)의 직위에 있는 사람에게 준례에 따라 하문하신 것인데, 유현(儒賢)654)  은 바야흐로 누차 소장을 올려 사면(辭免)하였으므로 대신(大臣)으로 자처(自處)하고 있지 않았으니, 이것이 하문이 있었어도 감히 대답할 수 없었던 이유인 것입니다. 전후 처신(處身)한 것이 각각 적당한 바가 있어 의리가 명백하기 때문에 진실로 알기가 어려운 것이 아닌데도 죄안(罪案)을 날조하고 있으니, 기사년655)  에 현인(賢人)을 해치던 화(禍)가 눈앞에 있게 될까 두렵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저하(邸下)께서는 그들의 간사한 정상을 명백히 통촉하시어 이들에게 동요되어 미혹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서리가 내리면 얼음이 언다는 경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저하께서는 죄벌(罪罰)을 이미 시행했다고 여기지 마시고 더욱 악인을 징계하는 형벌을 가하여 이들 시기하고 무함을 일삼는 무리로 하여금 발꿈치를 이어 일어나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세자(世子)가 답하기를,
"사의(辭意)가 엄정(嚴正)하고 의리가 광명(光明)하였다. 홍만우(洪萬遇)에 대한 말도 명쾌(明快)하였다."
하였다.

 

세자(世子)가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접(引接)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조태채(趙泰采)가 말하기를,
"충청 병사(忠淸兵使) 오중주(吳重周)가 장계(狀啓)를 올리기를, ‘상당 산성(上黨山城)은 장차 내년 봄부터 역사를 시작하려 하는데 본영(本營)의 물력(物力)이 조잔(凋殘)하여 힘써 일할 수가 없습니다. 온양(溫陽) 별과(別科)의 출신(出身)들에게서 받을 제방미(除防米)를 조정에서 본성(本城)의 군향(軍餉)으로 쓰게 하였습니다. 청컨대 먼저 이 쌀 1천 4백 석과 그 전에 대여(貸與)해 주었던 안흥(安興) 쌀 1천 석을 성역(城役)에 헤아려서 쓰게 하되. 입본(立本)656)  하여 도로 상환하게 해서 군향으로 쓰는 것이 실제로 편의(便宜)하겠습니다.’ 하였으니, 마땅히 허락하여야겠습니다. 그리고 도내(道內)에 기근(飢饉)이 든 나머지 역질(疫疾)이 또 치성(熾盛)한 탓으로 결코 백성을 동원하여 성을 수축하기가 곤한하다고 하니, 도내(道內)의 승군(僧軍)을 징발하여 식량을 지급하고 역사(役使)시키는 것이 아마도 사의(事宜)에 맞을 것 같습니다."
하니, 세자(世子)가 모두 옳게 여겼다. 지평(持平) 유척기(兪拓基)가 전일에 진달하였던 것을 다시 진달하였으나 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정언(正言) 김여(金礪)가 전일에 진달하였던 것을 다시 진달하고, 또 말하기를,
"평안 도사(平安都事) 구익형(具益亨)은 본디 지망(地望)이 가벼워 물정(物情)이 놀라고 있으니, 청컨대 개차(改差)하소서. 충청 수사(忠淸水使) 정수송(鄭壽松)은 군무(軍務)를 포기한 채 유희(遊嬉)만을 일삼고 있는가 하면 과외(科外)의 침탈(侵奪)을 자행하기 때문에 원성(怨聲)이 길에 가득하니, 청컨대 파직(罷職)시키소서."
하였으나, 세자(世子)가 따르지 않았다.

 

장령(掌令) 정동후(鄭東後)가 상서(上書)하기를,
"호남(湖南)의 충재(蟲災)·우박(雨雹)과 호서(湖西)의 강가의 수해(水害)는 가을이 되기 전에 이미 큰 흉년이 들 것이 판가름 났었으니, 조정에서 진구(賑救)하는 방도에 있어 의당 극진하게 하지 않는 것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도 강도(江都)에서 이전(移轉)하여 온 쌀을 아직 독징(督徵)하고 있는데 보장(保障)을 중히 여기고 위급(危急)을 구제하는 생각에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만, 더욱 극심한 고을에 이르러서는 경상(景象)의 참혹함이 지난해의 곱절이나 됩니다. 무룻 이미 지난해에 옮겨다가 진구(賑救)하였으니 금년에 도로 독징(督徵)한다는 것은 조정에서 백성을 구활(救活)하는 의도에 있어 시종(始終)이 어긋나는 처사입니다. 원컨대 봉납(捧納)을 정지시켜 그 은혜를 끝까지 마무리 짓게 하소서. 양전(量田)에 대한 정사는 이를 구획(區劃)하고 조치(措置)함에 있어 반드시 먼저 상의하여 상세히 강론한 다음 살펴서 실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흰 눈이 들판을 뒤덮고 있어 전묘(田畝)를 구분할 수 없는데, 눈이 녹기를 기다린다면 또 농사철이 급박하게 됩니다. 신의 어리석은 소견에는 봄 전에는 우선 거행하지 말고 충분히 잘 강정(講定)하여 미리 먼저 그에 대한 절목(節目)을 여러 도(道)의 각 고을에 반포하였다가 내년 추수(秋收)가 끝난 뒤에 한꺼번에 거행한다면, 일을 하는 것이 순서가 있게 되어 전정(田政)에도 마땅하게 될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니, 세자(世子)가 답하기를,
"강도(江都)의 쌀을 절봉(折捧)하는 데 대한 한 가지 조항은 허락하기가 곤란하다. 양전(量田)에 대한 일은 우선 삼남(三南) 가운데 조금 충실한 고을에 거행할 것으로 묘당(廟堂)에서 이미 복계(覆啓)하였다."
하였다.

 

12월 26일 병오

사은 정사(謝恩正使) 박필성(朴弼成)·부사(副使) 이관명(李觀命)·서장관(書狀官) 이정주(李梃周)가 청국(淸國)으로 갔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에 진달한 것을 다시 진달하고, 또 말하기를,
"연분(年分)에 대한 사목(事目)은 지극히 엄하고도 중대한 것이므로 수령(守令)이 재상(災傷)에 대한 착오를 범한 것이 10부(負) 이상이면 파직(罷職)시키고 30부(負) 이상이면 나문(拿問)하게 되어 있는 것이 전부터 있어온 금석(金石)의 법전(法典)입니다. 지금 경기(京畿)·강원도(江原道)의 열 고을의 분재(分災) 가운데 실결(實結)의 감축(減縮)이 많은 경우에는 1백여 결(結)에 이르고 있는데 이것이 현발(現發)된 뒤에는 단지 문비(問備)657)  하는 가벼운 벌만을 시행하였기 때문에 당초 법을 정한 의도가 문득 하찮은 것으로 귀결되고 말았습니다. 청컨대 사목(事目)에 의거하여 논죄(論罪)하소서 엊그제 최태보(崔台輔)의 상서(上書)로 인하여 저쪽658)  의 곡물(穀物)을 편의한 대로 사오는 것을 통렬히 금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반드시 무역(貿易)을 허락할 것도 없다는 것으로 비국(備局)에 달하(達下)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무릇 피차(彼此)에 교역(交易)하는 물품은 전부터 정례(定例)가 있어 왔는데 이제와서 이런 일을 시작해놓았으면 이는 크게 뒷날의 폐단에 관계되는 일입니다. 더구나 일이 허락할 만한 것이면 허락해야 하는 것이고 금지시켜야 할 것이면 금지시켜야 하는 법이니, 당당(堂堂)한 조정의 명령이 마땅히 이렇게 구차스러워서는 안될 것입니다. 청컨대 이제부터 항식(恒式)을 정하여 엄중히 금단(禁斷)하소서."
하니, 세자(世子)가 홍만우(洪萬遇)와 구익형(具益亨)의 일만 따랐다. 이리하여 홍만우를 울산부(蔚山府)에 정배(定配)하였다. 최태보(崔台輔)는 의주(義州)의 상서(商胥)인데 상서(上書)에서 아뢴 것은 모두가 모리(牟利)를 노린 계책에서 나온 것이었다. 저쪽에서 곡물(穀物)을 사다가 칙수(勅需)659)  에 보태게 하자는 것은 바로 그의 상서 가운데의 일설(一說)이었다. 세자(世子)가 이를 비국(備局)에 내렸는데 복주(覆奏)에 별로 건백(建白)한 내용이 없었기 때문에 대관(臺官)이 논한 것이다.

 

평안 감사(平安監司) 김유(金楺)가 상서(上書)하여 주전(鑄錢)의 불편한 점에 대해 논했는데, 말하기를,
"이 일은 처음 신의 장청(狀請)에 의하여 발설된 것이었으므로 이제 와서 마땅히 다시 뒷말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곧바로 들리는 바에 의하면 같이 의논할 적에 모순(矛盾)된 사설(辭說)이 자못 많아서 어떤 이는 ‘주전(鑄錢)을 정지한 지가 오래 되었으나 동철(銅鐵)이 매우 귀한 상황인데 이제 야소(治所)를 설치하게 되면 때를 이용하여 값이 폭등하므로 그 비용을 보상할 수 없게 될 것이고, 기타의 폐단도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다.’고 하기도 합니다. 조정의 의논도 이미 저러하고 혹자(或者)의 말은 또 이러한데 신은 이런 등류의 일에 대해 본래 오활하여 그 이해(利害)를 분명히 알 수가 없으니, 쉽사리 경솔하게 시험하기에는 곤란한 점이 있습니다. 이익이 있으리라고 여겨 장청(狀請)하였지만 폐단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 주전(鑄錢)의 정지를 청하는 것이니, 전후의 의견에 각기 주견(主見)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 그것이 불편하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도 앞서 청했다는 것에 구애되고 조정의 명령에 핍박되면서도 그래도 억지로 시행한다는 것은 잘못임을 알면서 이를 실행하고야 마는 것과 같으므로, 역시 성실하게 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니, 세자(世子)가 답하기를,
"조정에서 이미 달수를 정했고 또 속히 거행하라는 명이 있었으니, 마땅히 봉행해야 할 것이다. 다시 주전(鑄錢)의 정지를 청하는 것은 전도(顚倒)된 일인 것 같다."
하였다.

 

12월 27일 정미

미시(未時)에 태백성(太白星)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청국(淸國)의 황태후(皇太後)가 붕조(崩殂)하였다. 청(淸)나라에서 사신 아극돈(阿克敦)·장정매(張廷枚)를 파견하여 부음(訃音)을 알렸다. 아극돈 등이 연경(燕京)으로 돌아간 지 3일 만에 다시 사신이 나온다는 패문(牌文)이 먼저 도착하였는데, 의주(義州)의 수신(守臣)과 평안도(平安道)의 도신(道臣)이 이 사실을 보고하여 왔다.

 

세자(世子)가 하령(下令)하기를,
"서도(西道)의 재황(災荒)이 매우 참혹한데, 객사(客使)의 패문(牌文)이 또 나왔으니, 백성들의 일을 생각하면 매우 안타까운 마음 그지없다. 원접사(遠接使)를 즉시 차출하여 밤낮을 헤아리지 말고 내려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이건명(李健命)을 원접사(遠接使)로, 송상기(宋相琦)를 관반(館伴)으로 삼았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병을 핑계하여 정고(呈告)한 것이 네 번에 이르렀다. 세자(世子)가 유시(諭示)하기를,
"이렇게 어렵고 걱정스러움이 눈앞에 가득 찬 때를 당하여 불민(不敏)한 내가 만기(萬機)를 대신 다스리게 되었으므로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걱정스럽고 두려운 마음으로 구제할 바를 모르고 있다. 아! 내가 도와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은 실로 두세 명의 보필(輔弼)하는 신하들에게 있으니, 나를 버리고 멀리 떠나 국사를 관심없이 보아서는 안 될 것이 분명하다. 전후 남의 말에  【이세덕(李世德)과 홍만우(洪萬遇)의 일이다.】  이르러서는 용의(用意)가 대단히 음험하였지만 경(卿)과 같은 너그러운 도량으로 어찌 개의(介意)할 것이 있겠는가? 경은 성상(聖上)께서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본받고 옛사람이 국사를 위하여 몸을 바친 것을 생각하여 다시는 정병(情病)을 이유로 사퇴(辭退)하지 말고 속히 나와서 시사(視事)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창집(金昌集)이 다시 차자(箚子)를 올려 거듭 간청하였으나, 세자(世子)가 위유(慰諭)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약방(藥房)에서 들어와 진찰하였다. 진찰이 끝난 뒤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왕세자(王世子)의 청정(聽政)에 대한 절목(節目)을 마련할 적에 소루(疏漏)한 것이 없지 않습니다. 태묘(太廟)에 전알(展謁)하는 것은 반드시 세수(歲首)에 취품(取稟)660)  해야 하는데, 왕세자가 이 태묘의 향사(享祀)를 섭행(攝行)하였으니, 세수(歲首)의 전알은 또한 마땅히 동궁(東宮)에게 취품하여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영소전(永昭殿)과 경녕전(敬寧殿)의 전알(展謁)과 각릉(各陵)의 춘추(春秋)의 전알, 영희전(永禧殿)에 3년에 1차씩 하는 전알에 대해 모두 취품하여야 되는데 바야흐로 주상의 시탕(侍湯) 중에 계시므로 비록 행하기가 어려우나 마땅히 마련(磨鍊)해야 될 듯 싶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12월 28일 무신

진시(辰時)에서 미시(未時)까지 햇무리하였다. 신시(申時)에 겹으로 햇무리하였는데, 안쪽 햇무리에는 양이(兩珥)가 있었고 햇무리 위에는 관(冠)이 있었다.

 

예조(禮曹)에서 전부터 부음(訃音)을 전하는 칙사(勅使)의 행차에 대해서는 나례(儺禮)661)  와 연향(宴享)을 진설하지 않았고 음악은 진설만 하고 연주하지 않았으니, 지금도 이 전례에 의하여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진품(陳稟)하였는데, 세자가 그렇게 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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