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경술
충청 감사 윤헌주(尹憲柱)가 연해 고을의 재해를 입은 상황을 정장(呈狀)하여 아뢰고, 이어서 지난 봄에 꾸어 준 안흥(安興)의 미곡과 강도(江都)001) 의 미곡은 모두 본고을에 거두어 유치하게 할 것과 각색의 신포(身布)는 거두는 것을 정지시킬 것과 군병(軍兵)의 대도안(大都案)은 가을까지 기다렸다가 거행할 것을 청하였는데, 비국(備局)에서 복주(覆奏)하니, 허락하였다.
평안 감사 김유(金楺)가 장계(狀啓)로서 의주(義州)의 잠상(潛商)으로 도망한 죄인 김득달(金得達)을 국경에 효수(梟首)하여 청나라 사람들에게 보이자고 청하였는데, 비국(備局)에서 복주(覆奏)하면서 같은 정상의 죄인 김현숙(金玄叔)도 한꺼번에 효수하여 저들에게 보이기를 청하니, 세자가 좋다고 하였다.
1월 2일 신해
홍계적(洪啓迪)을 응교(應敎)로, 김유경(金有慶)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이번에 나온 상칙사(上勅使)와 부칙사(副勅使)는 바로 전일에 나왔던 칙사인데, 재차 나오는 것은 반드시 곡절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전후의 장문(狀聞)한 데에는 오히려 탐문하여 치달(馳達)한 일이 없었으니, 매우 소루(疏漏)하였다. 원접사(遠接使)에게 분부하여 신속히 상세하게 탐문하여 치달하게 하라."
하였다. 후일 원접사 이건명(李健命)이 역설(譯舌)002) 을 시켜 그 사유를 탐문하게 하였더니, 대개 청나라 임금이 ‘아극돈(阿克敦) 등은 조선(朝鮮)에 갔다가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반드시 본국(本國)의 물정(物情)을 잘 알 것이고 다른 사람을 임명하여 보내면 폐단이 있을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에 그대로 아극돈 등을 명하여 오게 하였다.’고 하였는데, 이건명이 치문(馳聞)하였다.
1월 3일 임자
미시(未時)에 태백성(太白星)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이 뒤에도 자주 보였다.
우의정 조태채(趙泰采)·도승지 조도빈(趙道彬)을 보내어 홍제원(弘濟院)에서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게 하였다.
왕세자가 승정원에 하령(下令)하기를,
"우리 성상께서 백성들을 걱정하고 농사를 중하게 여기는 뜻은 더없이 극진한 데에서 나온 것으로 이에 대한 십행(十行)003) 의 윤음(綸音)을 언제나 세수(歲首)에 내리셨다. 지금 이미 해가 바뀌어 백성의 일이 바야흐로 급한 때이니, 성상의 뜻을 우러러 몸받아 특별히 방백(方伯)들을 신칙(申飭)하는 일을 늦출 수가 있겠는가? 작년에 삼남(三南)의 농사 형편이 비록 조금 좋았다고는 하나 극심한 재해를 입은 곳에는 장차 진휼(賑恤)하는 일이 있어야 할 형편이다. 서북 지방은 해마다 거듭 기근이 들었는데, 관서(關西)의 청북(淸北)004) 은 더욱 참혹하기 그지없다. 말과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괴로운 마음 견딜 수 없다. 반드시 마음을 다하여 구제한 다음에야 인명이 손상되는 참혹함을 면할 수가 있을 것이다. 또 농사는 천하의 대본(大本)이니, 농사를 권장하는 정치를 마땅히 우선으로 해야 한다. 아울러 본원(本院)에 신칙하여 모름지기 나의 뜻을 몸받아 특별히 어구(語句)를 만들어 팔도의 감사와 양도(兩都)의 유수(留守)에게 하유하라."
하였다. 이리하여 정원에서 계달하기를,
"백성을 구휼하고 농사를 중하게 여기는 뜻이 글의 내용에 넘쳐 흐르니, 비록 한문제(漢文帝)의 관대한 글005) 이라 하더라도 이에서 더할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바로 이 휘지(徽旨)에 의거 세자에게 반유(頒諭)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따랐다.
1월 4일 계축
청나라 사신이 서울로 들어왔는데, 왕세자(王世子)가 서교(西郊)에 나아가서 맞이하였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서 청나라 사신을 접견하였다. 우의정 조태채(趙泰采)가 승지(承旨)·사관(史官) 등과 함께 입시(入侍)하였다. 예(禮)가 끝나자 청나라 사신이 나가고,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조태채가 아뢰기를,
"진위 겸진향사(陳慰兼進香使)를 지금 임명하여 보내야 하는데 《등록(謄錄)》을 가져다가 상고하니, 대군(大君)이나 대신(大臣)을 보내기도 하고 종반(宗班)이나 정경(正卿)을 차임하여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계묘년006) 이후에는 연달아 아경(亞卿)을 가함(假啣)으로 차임하여 보내었습니다. 지금은 정경에 사람이 부족하고 아경으로 보내는 것도 구차스러우니, 신의 생각에는 종반의 종 1품이나 정2품 중에서 차임하여 보내는 것이 사의(事宜)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좋다고 하였다. 조태채가 또 아뢰기를,
"근래 당론(黨論)이 점차 고질이 되어 선정(先正)을 무고하여 헐뜯는 데 있어 못하는 짓이 없습니다. 다행히 성상께서 호오(好惡)를 밝게 보여 주시고 시비(是非)를 굳게 정하심에 힘입어 간사한 말이 멋대로 행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사림(士林)의 더없는 다행입니다. 무릇 공의(公議)에 득죄한 자는 그 경중을 구분하여 벌을 주어 징벌과 권려를 이미 엄하게 하였습니다. 문외 출송(門外黜送)의 형벌에 이르러서는 처음에 이미 말감(末減)한 것이고 3년 동안 죄척(罪斥)당하였으니, 형벌이 이미 시행된 것입니다. 그 중에서 홍우행(洪禹行)은 바야흐로 상복을 입고 있는 중이니 지금 세수(歲首)를 당하여 문출당한 죄인 등을 특별히 석방함으로써 유신(維新)의 뜻을 보인다면, 실로 관대한 법전에 합치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여 석방하게 하였다. 청북(淸北) 감진 어사(監賑御史) 김운택(金雲澤)이 청대(請對)하니, 임금이 불러서 접견하였다. 김운택이 아뢰기를,
"청북의 재황(災荒)은 매우 참혹한데 진곡(賑穀)의 마련이 매우 적어 접제(接濟)할 곡식이 부족하니, 남한(南漢)·해서(海西)·안흥(安興)·양진(楊津) 등 여러 곳의 미곡을 각각 5천 석씩 보내주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조태채와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에게 하문하였다. 모두 아뢰기를,
"그 반만을 허락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김운택이 또 청하기를,
"관서 지방의 노비에게 미곡을 바치고 속량(贖良)하도록 허락함으로써 진제(賑濟)할 밑천을 보충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진청(賑廳)으로 하여금 품지(稟旨)하여 격식을 정하여 거행하게 하였다.
【그후 진청(賑廳)에서 복주(覆奏)하여 15세에서 30세까지는 미곡 50석을 바치고, 31세에서 40세까지는 미곡 40석을 바치고, 41세에서 50세까지는 미곡 30석을 바치고, 51세에서 55세까지는 미곡 20석을 바치고, 56세에서 60세까지는 미곡 10석을 바치게 하였다.】 김운택이 또 청하기를,
"서로(西路)의 교생(校生)과 군관(軍官) 가운데 응강(應講)하거나 시재(試才)할 수가 없는 자는 탈안(頉案)으로 조처하여 미곡을 바치게 해서 진제할 밑천을 보충하게 하며, 권분(權分)007) 에 의거 사사로이 진제한 자는 진제를 끝마치기를 기다리지 말고 그 이름을 열거해서 장문(狀聞)하게 하고, 즉시 그에 상당하는 관직을 제수하게 하소서. 서로(西路)의 각종 곡식 가운데 조[粟]가 가장 재해를 많이 입어 종자를 준비할 길이 없습니다. 청컨대, 해서(海西) 부근 고을의 모곡(耗穀) 중에서 피속(皮粟) 5, 6백 석을 나누어 주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허락하였다. 이후에도 김운택이 또 치장(馳狀)하기를,
"경기와 호서 지방에 있는 군량미·환곡미 3, 4만 석과 사군목(射軍木)의 강도목(江都木) 4, 5백 동(同)을 이전시켜 그 이식을 취하여 진제할 밑천을 보충하게 하소서."
하니, 비국(備局)에서 복주(覆奏)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아니하고 다만 포목(布木) 50동(同)만 주게 하였다.
1월 5일 갑인
청나라 사신이 내일 돌아가려 하므로 임금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유(李濡)를 보내어 청나라 사신에게 머물기를 권하였더니, 하루 더 머물 것을 허락하였다. 임금이 다시 승지와 종신(宗臣)을 보내어 머물기를 청하였다.
헌납(獻納) 조성복(趙聖復)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저하(邸下)께서 곤란하고 위태로운 시기를 당하여 정사를 대리(代理)하라는 명을 받들었으니, 진실로 분발하고 힘을 다하여 진실한 마음으로 퇴패한 기강을 진작시키고 묵은 폐단을 일소하려는 마음을 먹지 않는다면, 어떻게 위로 성상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아래로 여러 사람들의 소망에 부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천하의 모든 일의 이치와 역대의 치란(治亂)의 자취가 경전(經典)과 사서(史書)에 모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치평(治平)을 이룩하는 방도는 반드시 학문의 강론을 근본으로 삼지만, 또한 학업에 침잠(沈潛)하여 그 깊은 뜻을 찾아내고 그 이치를 자세히 이해하여 그 뜻을 꿰뚫어 보게 된 다음이라야 바야흐로 수용(受用)할 곳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신이 삼가 살피건대,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지은 《성학집요(聖學輯要)》는 경전의 요결(要訣)을 뽑아 모으고 제자(諸子)와 사서(史書)의 정화(精華)를 주워 모아서 종류별로 분류하여 모았는데, 글이 간략하고 이치가 정연하여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요점이 찬연히 구비되어 있으니, 이것은 진실로 제왕(帝王)이 입도(入道)하는 지침서입니다. 저하께서 만약 이 책을 항상 안궤(案几)에 두시고 때때로 열람(閱覽)하시면서 혹 소대(召對)할 적에 사서(史書)와 함께 하루씩 돌려가면서 강독(講讀)하게 한다면, 덕을 배양하고 학업을 닦는 데에 보탬이 있는 것이 또한 어찌 적겠습니까?
오늘날 강관(講官)의 선임 또한 널리하지 않는 것이 아니나, 경술(經術)에 능한 선비는 한 사람도 교지에 응하는 자가 없으니, 진선(進善)·자의(諮議) 등의 관직은 다만 임하(林下)의 아름다운 호칭일 뿐 필경 세자에게 강(講)을 권하는 것을 과목(科目)에 합격한 속류(俗流)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유사(儒士) 가운데 이미 강직(講職)을 제수한 자는 정성과 예절을 다하여 초치하지 아니할 수가 없는데, 익위사(翊衛司)에서도 서연(書筵)에 나아가서 배강(陪講)하는 예(例)가 있으니, 또한 반드시 경학(經學)에 능한 선비를 결원이 생기는 대로 보충하여 임명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강하는 자리에 출입하게 한다면 실효가 있게 될 것입니다.
또 부자(父子)가 동방(同榜)일 경우 아들이 아비의 아리에 있어도 오히려 나란히 선다는 혐의가 있는데, 하물며 아들이 방수(榜首)가 되고 아비가 도리어 아래에 있게 되는 경우야 말해 뭐하겠습니까? 윤리와 기강의 도치가 이보다 심할 수가 없습니다. 지난번 이유춘(李囿春) 부자에게 아울러 창방(唱榜)하는 것을 허락하였으나 이는 실로 지나친 말인데, 어찌 그대로 준행하여 상전(常典)으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신은 생각하건대, 지금부터 이후로는 정시(庭試)·알성시(謁聖試)와 별과(別科)에는 일체 함께 시험보는 것을 금지시켜 부자가 같이 부시(赴試)하지 말게 한다면, 효순(孝順)의 기풍을 기를 수 있는 것은 물론, 견철(牽掣)의 걱정을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신급제(新及第) 이형등(李馨登)은 그 아비와 아울러 문과(文科) 강경(講經)에 부시하였는데, 아비가 초시(初試)에 참여하면 그 아들은 정장(呈狀)하여 진시(陳試)008) 하는 것이 통행하여 온 전례인데, 지금 이형등은 무릅쓰고 부시하였으니 법의 뜻을 대단히 어겼습니다. 마땅히 해조(該曹)로 하여금 법전을 상세히 상고하여 즉각 바로잡도록 하소서.
백성들을 가까이하는 관직으로는 수령(守令) 같은 것이 없는데, 이를 선발함에 있어 사사로운 뜻이 너무 성하고 청탁이 너무 심하여 전관(銓官)에 취사 선택에 현란하여 사람을 정선(精選)할 겨를이 없으니, 삼가 원하건대 저하께서는 다시 엄한 신칙을 더하소서."
하였는데, 세자가 답하기를,
"반복하여 진계(陳戒)한 말은 진실로 나를 사랑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으로 모두 간절하고 지극한 말이니, 내가 심히 가상하게 여긴다. 《성학집요(聖學輯要)》를 날마다 돌려가며 강독하라는 일은, 사부(師傅)와 빈객(賓客)에게 문의하겠다. 익위사의 관직에는 반드시 경학(經學)에 능한 선비를 보임하라는 것과 수령을 엄정하게 고르라는 두 가지 조문은, 이조·병조의 전관(銓官)들에게 신칙하겠다. 그리고 부자가 동방(同榜)일 경우 같이 부시하는 것을 허락하지 말자는 것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겠다. 이형등의 일은 해조에서 품처(稟處)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였다. 이 뒤에 묘당에서 부자가 동방일 경우에 대하여 대신들에게 의논하기를 청하였다. 영의정 김창집(金昌集)과 우의정 조태채(趙泰采)가 의논하여 아뢰기를,
"세교(世敎)를 손상시키는 일이니, 같이 부시하는 것을 금하는 조치 이외에는 달리 선처할 방도가 없습니다. 이것을 사목(事目)에 첨가하여 넣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세자가 그 의논을 따랐다. 이형등의 일에 대하여는 예조(禮曹)에서 복주(覆奏)하기를,
"지금 만약 한 해가 지난 뒤에 추후하여 발거(拔去)한다면, 원통하고 억울해 하는 단서가 없지 아니할 것이니, 청컨대 자표(字標)009) 를 서로 바꾼 사람에게는 연한(年限)을 정하여 관직을 주지 아니하는 예에 의하여 이형등에게 3년을 기한으로 관직을 주지 말도록 하소서."
하니, 세자가 좋다고 하였다.
지평 유척기(兪拓基)가 상서(上書)하여 말하기를,
"상사(上司)의 각 아문(衙門)에서 혹 외방 고을에 구청(求請)하는 규례가 있기는 합니다만, 이는 사체에 있어 구차스러우니 마땅히 금년부터 혁파하소서. 당후관(堂后官)의 직책은 기주(記注)를 관장하는 것이어서 실직(實職)·가직(假職)을 막론하고 모두 청선(淸選)에 관계되는데, 일전에 정창선(鄭敞選) 등의 삼망(三望)에 대하여 물의(物議)가 분분하니, 해당 승지와 주서에게 규계(規戒)하는 방도가 없을 수 없습니다. 어제 학가(鶴駕)010) 를 교외에서 맞이할 즈음에 사간(司諫) 조명봉(趙鳴鳳)이 처음에는 마땅히 참여할 것이라고 말하였으나 시기에 당하여서는 병이라고 일컫고 끝내 그 자리에 나오지 아니하였으므로 양사(兩司)로 하여금 관원을 갖출 수가 없게 만들었으니, 그에게 경책(警責)를 가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구청(求請)하는 것을 혁파하는 일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라. 당후관의 의망(擬望)을 선택하는 데 대한 한 가지 조문은 각별히 신칙하겠다. 그리고 승지와 주서를 추고(推考)하여 경책을 가하고 조명봉은 체차(遞差)하라."
하였다.
1월 6일 을묘
강현(姜鋧)을 반송사(伴送使)로 삼았다. 원접사(遠接使) 이건명(李健命)이 반송사의 책임을 맡았으나 마침 병이 났기 때문에 비국(備局)에서 교체하자고 청함에 따라 강현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유명홍(兪命弘)을 승지로, 윤양래(尹陽來)를 사간으로, 황흠(黃欽)을 판돈녕부사로 삼았다.
1월 7일 병진
세자가 하령(下令)하기를,
"어제 도승지 조도빈(趙道彬)의 상서(上書)를 보니, 정창선(鄭敞選)은 탐라인(耽羅人)으로 문한(文翰)과 인품과 문벌이 제주도에서 가장 훌륭한 자라고 한다 하였다. 과연 글의 사연이 사실이라면 그가 당후관(堂后官)의 가관(假官)으로 임명되지 못한 것을 원통하다고 일컫는 것이 마땅하다. 공의(公議)를 채택할 것이요 다시 구애받는 것이 없게 함으로써 외진 섬에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억울하다는 탄식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대개 정창선이 당후관에 의망(擬望)011) 되었을 때 조도빈이 유척기(兪拓基)의 상서를 참여하여 들었는데, 그 뒤에 조도빈이 인구(引咎)하는 글을 올리면서 인하여 그가 원통하다는 것을 말하였기 때문에 이런 명령이 있었다. 유척기가 이로써 인피(引避)하였는데, 처치(處置)하여 출사(出仕)케 하였다.
청나라 사신이 장차 내일 돌아가려 하자, 묘당(廟堂)에서 아뢰기를,
"세자께서 교외까지 가서 전송하실 것이 없습니다."
하고, 궁관(宮官)을 시켜 관소(館所)에 가서 그 뜻을 알렸더니, 청나라 사신이 이로 인하여 성을 내어 청구한 물종(物種)과 가정(家丁) 등 받은 은자(銀子)를 일체 모두 내어 주었다. 부사(副使)는 병이라 일컫고 문을 닫고 역관(譯官)들을 만나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묘당에서 다시 동궁(東宮)이 친히 전송할 것으로 정탈(定奪)하였다.
1월 8일 정사
청나라 사신이 돌아가니, 세자가 서교(西郊)에 나아가 전송하였다. 세자는 천담복(淺淡服)을 입고 접견하였는데 배종(陪從)한 여러 신하들의 복색도 같았다. 청나라 사신이 전별연(餞別宴)을 받지 않았으므로 다례(茶禮)만을 행하고 파하였다.
1월 9일 무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인장리(仁章里)에 있는 장씨(張氏)의 묘소에 예관(禮官)이 지사(地師)를 거느리고 내려가서 간심(看審)하게 하라는 명이 내려진 뒤에 소장(疏章)을 올린 함일해(咸一海)가 대령하지 않았기 때문에 즉시 거행하지 못하고 있으니, 즉시 강릉부(江陵府)에서 그를 찾아내어 올려 보내게 하소서. 그리고 본조의 당상관(堂上官)이 함일해와 여러 지사들을 거느리고 신사년012) 에 이미 행한 선례에 의하여 조사(朝辭)를 제하고 바로 내려가서 간심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좋다고 하였다. 예조 참의 이조(李肇)가 여러 지사들을 거느리고 가서 장씨의 묘를 간심하고 돌아왔는데, 함일해가 본래 문자를 해독하지 못한다고 핑계하였기 때문에 하리(下吏)를 시켜서 그가 말한 바를 쓰게 하고 이어 여러 지사들로 하여금 각기 여기에 평론을 가하고 반복하여 논란하게 한 다음 이를 별단(別單)에 써서 들이니, 임금이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였다. 예조에서 복주(覆奏)하여 아뢰기를,
"지사 13인 가운데 전혀 하자가 없다고 한 사람은 단지 4인뿐이었고, 그 나머지는 함일해의 말과 합치하지는 아니하였으나 또한 하자가 많다고 하니, 십분 완전한 땅이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신중하게 처리하는 방도에 있어 조급하게 빨리 결정할 수는 없으니, 청컨대 다시 여러 지관들을 선택하고 나서 조관(朝官)과 사인(士人)을 막론하고 지술(地術)을 밝게 아는 자를 관상감(觀象監)으로 하여금 뽑아서 모두 함께 가서 간심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좋다고 하였다.
개성 유수(開城留守) 송정명(宋正明)이 장계(狀啓)로 민간의 가장 급박한 상황을 아뢰면서 본부 산성(山城)의 군량미와 본부 창고의 적곡(糴穀)을 거두는 것을 일체 모두 정지하고, 가을걷이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청하였는데, 비국(備局)에서 복주하니, 허락하였다.
1월 10일 기미
호조(戶曹)에서 경비로 쓸 미곡이 절핍되었다고 하면서 아산창(牙山倉)에 소속된 정유년013) 조의 전삼세(田三稅)014) 와 황해도 각 고을의 세곡을 반드시 3월 이전에 상납하기를 청하고, 아울러 혹시라도 기한이 지나면 차사원(差使員)·해운 판관(海運判官)과 해당 수령을 각별히 논죄하게 하도록 청하니, 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이때 각도에 해마다 잇따라 흉년이 들어 세입(稅入)이 크게 줄었으므로 호조의 경비가 고갈되어 백관들의 반록(頒祿)과 군병들의 산료(散料)를 모두 계속하여 지급할 수가 없었다. 이보다 앞서 이미 품계하여 선혜청(宣惠廳)과 어영청(御營廳)의 미곡을 가져다 사용하였으나 그래도 부족하였기 때문에 또 이러한 청이 있었다.
간원(諫院)에서 전에 계달한 것을 아뢰고, 또 말하기를,
"각 고을에서 연분(年分)015) 의 실수(實數)를 감정(勘定)한 뒤에도 도회관(都會官)을 정하여 그 실제 결수(結數)에 따라 문안(文案)을 만들어 해조(該曹)에 보내는 것은 전부터 제도(諸道)에서 통행하여 온 규례입니다. 지금 열 고을에서 세금을 거두는 데 있어 실수가 감축되었으니, 이는 각 고을 수령의 책임일 뿐만 아니라 그때에 도회관도 잘 검찰하지 못한 잘못을 면하기가 어려우니, 청컨대 모두 파직시키소서."
하니, 세자가 다만 정수송(鄭壽松)과 소장의 말단에 기록된 일만을 따랐다. 도회관으로서 좌죄(坐罪)되어 파직당한 자는 전 강릉 부사(江陵府使) 조명겸(趙鳴謙)·전 춘천 부사(春川府使) 신광하(申光夏)·부평 부사(富平府使) 최석필(崔錫弼)·전 수원 부사(水原府使) 이교악(李喬岳) 등 4인이었다.
1월 11일 경신
이덕영(李德英)을 황해도 관찰사로 삼았다.
1월 12일 신유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정고(呈告)한 것이 16차례에 이르렀으나, 세자가 승지를 보내어 돈유(敦諭)하였다. 김창집이 다시 차자(箚子)를 올려 간절한 마음을 아뢰었으나, 세자가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려 위유(慰諭)하였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진후를 끝마치자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가 아뢰기를,
"세수(歲首)에 태묘(太廟)에 전알(展謁)하는 것은 이미 동궁에게 품지(稟旨)하라고 명하였습니다만, 금년은 바로 세자께서 청정(聽政)하는 초년이니, 비록 시탕(侍湯)하는 중이라고 하더라도 거행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나의 뜻과 바로 합치하니, 거행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였다. 민진후가 또 아뢰기를,
"이미 태묘에 알현한다면 문묘(文廟)에 알성(謁聖)하는 것도 마땅히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입니다. 또 지난해에 겨우 종사(從祀)하는 전례(典禮)를 행하였는데, 일찍이 임술년016) 에도 종사한 후에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 또한 마땅히 알성(謁聖)의 예를 행해야 한다는 뜻으로 진달(陳達)하였다고 하였으니, 지금도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혹자는 ‘알성례(謁聖禮)를 행한 뒤에는 으레 시사(試士)하는 것인데 바야흐로 상약(嘗藥)하시는 때를 당하여 일에 난편(難便)함이 있을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고사(古事)에도 알성한 뒤 시사(試士)할 적에는 단지 거수인(居首人)만을 취하였을 뿐이니, 이와 같이 한다면 더욱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좋다고 하였다. 이 뒤에 예조에서 시사(試士)하는 한 가지 조목에 대해 청하니,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였다. 판중추부사 이이명(李頤命)이 의논하여 아뢰기를,
"시학(視學)하고 취사(取士)하는 것을 비록 대조(大朝)017) 께서 임행할 때처럼 똑같이 할 수는 없지만 또한 전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만약 작헌(酌獻)한 뒤 며칠 안에 특별히 성지(聖旨)를 내려 관원을 명하여 시사(試士)하게 하되 반궁 별제(泮宮別製)018) 의 예와 같이 한다면, 사의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여 그 의논을 채용하게 하였다. 또 인하여 우의정 조태채(趙泰采)가 차자(箚子)를 올려 아뢰기를,
"바야흐로 상약하시는 중이니, 시학(視學)하는 성대한 거사를 무고할 때로 물려서 행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니, 세자가 그 말을 따랐으므로 마침내 잠정적으로 이 일을 정지시켰다.
1월 15일 갑자
충청도 각 고을의 백성들 가운데 전염병을 바야흐로 앓고 있는 사람이 2천 1백 40명이었고 사망한 사람이 6백 42명이었는데, 도신(道臣)이 이를 보고하였다.
1월 17일 병인
김상옥(金相玉)을 지평으로, 윤양래(尹陽來)·어유귀(魚有龜)를 승배(陞拜)하여 승지로 삼았다.
1월 19일 무진
벼락과 번개가 치고 달무리가 졌다.
동래 부사(東萊府使) 조영복(趙榮福)이 장계로 말하기를,
"대소 차왜(差倭)들이 우리 나라에 나올 적에 먼저 하선연(下船宴)을 행하여 먼길을 온 것을 위로하는데, 왜인들은 즉시 초량(草梁)에 와서 전패(殿牌)019) 에 숙배(肅拜)하고 방물(方物)을 봉진(封進)하면 이어서 하선연을 행하고 왜관(倭館)에 머물게 하여 기한이 찬 다음에는 또 상선연(上船宴)을 행하여 돌려보내는 것이 왜인을 접대하는 변함없는 규칙입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저들이 흥판(興販)하는 여러 가지 일들을 급선무로 삼은 나머지 돌아갈 때에 임박하여서야 방물을 봉진하여 바치니, 조정을 업신여기는 것이 저절로 그 가운데 있게 됩니다. 지금부터는 마땅히 다시 법식을 정하여 먼저 진상(進上)하고 숙배(肅拜)하는 등의 예절을 행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국(備局)에서 복주(覆奏)하여 이에 의하여 법식을 정하자고 청하니, 세자가 좋다고 하였다.
장령(掌令) 이완(李浣)이 상소하여 청하기를,
"계사년020) 이전에 회부한 환곡(還穀)과 각색 잡곡(雜穀)을 허위로 기록한 것은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일일이 조사하여 탕감(蕩減)하게 하고, 양정(量政)021) 의 기일을 조금 물려서 농사가 풍년이 들어 백성들이 소생할 때까지 기다리게 하소서. 그리고 수령 가운데 진휼(賑恤)을 잘 하는 자는 모두 직질(職秩)을 올려주는 은전을 내리소서."
하였는데, 세자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니, 묘당에서 이는 채택해서 시행할 것이 없다고 복주하였다.
1월 20일 기사
박성로(朴聖輅)를 사간(司諫)으로, 조상경(趙尙絅)을 정언으로, 오중주(吳重周)를 삼도 수군 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삼았다.
왕세자가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을 불러서 접견하였다. 우의정 조태채(趙泰采)가 아뢰기를,
"경기 수사(京畿水使) 장한상(張漢相)이 장계로 말하기를, ‘군민(軍民)들이 심한 기근에 시달려 도중(島中)이 바야흐로 끼니를 잇지 못하는 가운데 있으니, 청컨대 강도(江都)의 개색미(改色米) 1천 석을 얻고자 합니다.’ 하니, 마땅히 청한 바에 따라야 합니다. 황해 병사(黃海兵使) 원휘(元徽)가 장계로 말하기를 ‘칙사(勅使)의 행차가 계속되므로 책응(策應)을 감당하기가 어려우니, 병사(兵使)의 과한(瓜限)022) 2주년 안에 있어서는 한 번의 칙사에 대한 수요(需要)는 본영(本營)에서 요리하게 하되, 혹은 두 번 세 번의 칙사가 있게 되면 상정 여미(詳定餘米)023) 로 회감(會減)하게 하여 주소서.’ 하였는데, 이는 본영이 목(牧)으로 나누어진 뒤로 물자와 인력이 조폐(凋弊)한 탓이니, 또한 마땅히 허락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한번 칙사에 들어가는 비용은 감영(監營)으로 하여금 참작하여 정하여 지급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세자가 모두 따랐다. 우참찬 이건명(李健命)이 아뢰기를,
"신이 새로 관서(關西)에서 왔는데, 이미 연로(沿路)에서 들은 바가 있어서 감히 이와 같이 우러러 진달합니다. 관서의 관방(關防)이 폐이(廢弛)된 지가 오래 됩니다. 지난번 북로의 자문(咨文)에 마음을 기울여 방수하라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평양과 정주(定州)는 모두 이미 신축(新築)하였습니다. 황해의 병영 또한 수축하도록 하였으나 물자와 인력이 조잔(凋殘)하여 능히 거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병사 원휘(元徽)가 말하기를, ‘본영의 지세가 앞으로는 평야를 끼고 있어 방어에 어려운 점이 있으니, 먼저 극성(棘城)을 쌓는 것이 가장 적당할 것 같습니다’ 하였으니, 마땅히 수신(帥臣)과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서로 상의하여 긴요한 곳에다 금년 가을까지 기다렸다가 역사(役事)를 시작하게 하소서."
하니, 세자가 좋다고 하였다. 이건명이 또 아뢰기를,
"해서 지방 다섯 곳의 산성(山城)이 모두 외따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 다만 피난하는 장소로서는 좋습니다. 오직 평산(平山)의 태백 산성(太白山城)은 부치(府治)에서 가깝고 형세가 험하여 일로(一路)의 요충지이지만 폐기된 지가 이미 오래어서 매우 애석합니다. 그리고 평산 한 고을은 양향(糧餉)은 대흥산성(大興山城)에 두고 군기(軍器)는 재령 산성(載寧山城)에 두었으니, 위급할 때에 이를 믿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태백 산성을 수축하고 군기와 영향을 모두 거기에다 둔다면 일이 매우 편하고 좋을 것입니다."
하니, 세자가 조태채에게 문의하였다. 조태채가 아뢰기를,
"신도 서로(西路)를 왕래할 적에 이 성을 보았는데 대로(大路) 변에 있습니다. 고려의 장수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의 철상(鐵像)이 여기에 있고, 그 기지(基址)도 완연합니다. 평산의 물자와 인력으로 수축할 수가 있다면 조용하게 조치하여 해를 기다렸다가 거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세자가 이르기를,
"계달한 것이 옳다. 이에 의하여 분부하라."
하였다. 대사간 이기익(李箕翊)이 전에 계달한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세자가 따르지 아니하였다. 장령 이완(李浣)이 전에 계달한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세자가 따르지 아니하였다. 응교 홍계적(洪啓迪)이 아뢰기를,
"작년에 옥당(玉堂)에서 대조(大朝)께 품지하여 열성(列聖)의 지장(誌狀)024) 을 한결같이 실록(實錄)에 기재된 것에 의하여 개간(改刊)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만 지장의 구본(舊本)이 실록의 등본(謄本)도 빠진 것이 있으니, 무엇을 따라야 할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조태채는 아뢰기를,
"조종(祖宗)의 성훈(聖訓)이 지장(誌狀)에 기재된 것을 실록에 기재하지도 않고 삭제하여 없앨 수는 없습니다."
하니, 세자가 좋다고 하였다. 흥계적이 또 아뢰기를,
"근래 시기(時氣)가 절후를 여겨 번개가 치고 비가 오는 것이 여름철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리고 서울과 외방에 역질(疫疾)이 날로 성하니, 저하께서 이처럼 정사를 대리하는 때를 당하여 하늘을 대하는 마음이 마땅히 다시 어떠하겠습니까? 옛날 우리 문종 대왕(文宗大王)께서 청정(聽政)할 때를 당하여 상약(嘗藥)025) 과 시선(視膳)026) 을 반드시 모두 몸소 행하셨고 그 사이에 빈우(賓友)를 불러들여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강론하였는데, 하루도 잠시나마 거른 적이 없었으니, 이것은 문종의 훌륭한 덕이 천고에 아주 뛰어났던 까닭입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너의 열조(烈祖)를 본받아 언제나 평안하고 게으르지 말라.’고 하였으니, 삼가 원하건대, 저하께서는 반드시 문종을 사표(師表)로 삼아 대조(大朝)께서 나라를 걱정하고 정치에 부지런했던 생각을 몸받도록 하소서."
하니, 세자가 이르기를,
"계달한 바가 옳다. 마땅히 각별히 유의하겠다."
하였다.
1월 21일 경오
왕세자가 태묘(太廟)에 알현하였다. 이날 눈이 내렸는데, 정원(政院)과 시강원(侍講院)에서 세자가 눈을 무릅쓰다가 옷이 젖을 염려가 있을까 하여 기일을 조금 물리도록 청하였으나, 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곤룡포(袞龍袍)와 익선관(翼善冠) 차림으로 출궁(出宮)하여 재궁(齋宮)에 들어가서 면복(冕服)을 갈아 입고 태묘(太廟)027) 에 나아가 사배례(四拜禮)를 행한 뒤에 전(殿)에 올라가서 봉심(奉審)하였다. 이어 영녕전(永寧殿)028) 에 나아가서 행례(行禮)하기를 또한 이와 같이 하였다.
간원(諫院)에서 전에 계달한 것을 다시 아뢰니, 세자가 재결(災結)로 감축한 수령을 논죄(論罪)하자는 일만 그대로 따랐다.
1월 22일 신미
행 판중추부사 이여(李畬)가 졸(卒)하였는데, 나이 74세였다. 이여는 판서 이식(李植)의 손자였는데, 약관(弱冠)에 이미 문명을 떨쳤다. 처음 벼슬하여 사국(史局)에 천거되어 들어갔으며 이어 옥당(玉堂)에 선임되어 호당(湖堂)에서 사가(賜暇)029) 하였다. 화직(華職)을 두루 거쳐 여러 번 전관(銓官)의 자리에 들어갔는데, 선인의 경계를 인용하여 힘써 사양하였으나 체직이 되지 않았다. 태사(台司)에 올라와서 더욱 경계하고 조심하여 마음을 편하게 가지지 아니하고 항상 국세(國勢)를 진작시키고 조정을 화합시키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언제나 당론(當論)이 나라의 화가 될 것을 걱정하여 일찍이 과격하거나 각박한 의논을 한 적이 없었다. 전후 상소하여 아뢴 것이 명백하고도 적절하여 간략하게 설득하는 뜻을 깊이 체득했다. 사문(斯文)의 큰 시비를 당하여서는 또 의연하게 의논을 정립하여 조금도 흔들리거나 의혹되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그 학력(學力)을 증험하게 되었다. 지위가 공상(公相)에 올랐으나 몸가짐은 한결같이 포의(布衣)의 선비처럼 하였으며, 거주하는 집이 좁고 누추하였으나 거처하는 데에 여유가 있었다. 임종할 즈음에는 온화하여 마치 편안히 잠자는 것 같았는데, 다음날에 이르러서도 얼굴색이 조금도 변하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1월 23일 임신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정고(呈告)한 것이 26차례에 이르렀으나, 세자가 승지를 시켜 돈유(敦諭)하였다.
1월 24일 계유
약방(藥房)에서 입진하였다. 진후를 끝마치자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가 아뢰기를,
"수어청(守禦廳)과 총융청(摠戎廳) 양청에서 순력(巡歷)하는 것은 지난번에 봄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품지하자는 내용으로 진달하였습니다. 그러나 겨우 칙사(勅使)의 행차를 겪게 되어 경기의 백성들이 곤폐(困弊)하기가 너무나 심합니다. 이러한 때에 순력하는 일을 거행하는 데에는 곤란한 점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여 정지하게 하였다.
1월 25일 갑술
경상도 각 고을의 백성들 가운데 전염병을 바야흐로 앓고 있는 사람이 3백 5명이고 사망한 사람이 75명이며, 충청도에는 전염병을 바야흐로 앓고 있는 사람이 1천 9백 70명이고 사망한 사람이 4백 13명이었는데, 도신(道臣)이 보고하였다.
1월 26일 을해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어제 세자의 돈유(敦諭)를 받들고 차자(箚子)를 올려 간절한 마음을 아뢰었다. 이어 상름(常廩)을 사양하였으나 세자가 위유(慰諭)하고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1월 28일 정축
황해도 각 고을의 백성 가운데 전염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5백 30명이고 물고(物故)된 사람이 17명이었는데, 도신(道臣)이 보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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