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61권, 숙종 44년 1718년 2월

싸라리리 2025. 11. 30.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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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경진

좌의정 권상하(權尙夏)가 현도(縣道)를 통하여 상서(上書)하여 사직하고, 또 아뢰기를,
"신은 지난번 궁관(宮官)이 와서 세자에게 진강(進講)할 책자를 문의하였을 적에 사부(師傅)라는 이름에 혐의스러워 감히 우러러 대답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관직을 걸면(乞免)하는 소장을 올리는 것을 인하여 신의 고루하고 촌스러운 말을 덧붙여 아뢰겠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주자(朱子)는 실로 공자(孔子) 이후에 유일한 인물인데 유도(儒道)의 전체(全體)와 대용(大用)이 《주자대전(朱子大全)》이라는 책에 자세히 기재되어 있습니다. 유학을 공부하는 과정에 절근(切近)한 것은 이 책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주자전집(朱子全集)》은 분량이 너무 많아 세자께서 시탕(侍湯)하는 겨를에 공부를 끝내기가 어려울까 합니다. 그 가운데 봉사(封事)·주차(奏箚)는 권수가 많지 않음은 물론 제왕(帝王)의 학문에 가장 절실하니, 급히 먼저 진강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책입니다. 《성학집요(聖學輯要)》도 매우 필요한 책이니, 차례로 공부를 하는 것이 매우 합당하고 좋을 것입니다."
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지난번 홍만우(洪萬遇)의 상소에서 글의 내용이 용의 주도하여 매우 위험하였으므로 통탄스런 마음을 견딜 수가 없었다. 이러한 무리들의 정상은 성감(聖鑑)의 엄정한 처분을 벗어나지 못하였고 위로하는 유시가 갖추 지극했으니, 경에게는 다시 털끝만큼도 마음이 편치 못한 단서가 없을 것이다. 경이 멀리 떠나려는 마음을 빨리 돌려서 번연(幡然)히 조정으로 나온다면 사습(士習)이 저절로 바로잡히고 간사스러운 말이 저절로 없어질 것이다. 그리고 나의 앞에 출입하면서 나로 하여금 날마다 올바른 말을 듣게 한다면 국사에 보탬이 되는 것이 반드시 적지 아니할 것이다. 이것이 내가 경의(敬意)를 다하고 예절을 다하여 경을 반드시 초치하고야 말려는 까닭이다. 상서의 말미에 아뢴 말은 진실로 너무나 간절하고 지극하다. 시강원으로 하여금 사부(師傅)와 빈객(賓客)들에게 다시 의논하게 하겠다."
하였다. 마침내 주자의 봉사(封事)를 가지고 동궁(東宮)에게 진강하였다.

 

김유경(金有慶)을 사간으로, 최석항(崔錫恒)을 판의금부사로, 조도빈(趙道彬)을 대사성으로, 유명홍(兪命弘)을 도승지로 삼았다.

 

지사(知事) 강현(姜鋧)이 청나라 사신을 접반(接伴)하고 돌아와서 관서 지방 백성들의 폐단에 대해 상소하고, 나서 도내(道內)에서 지난해에 거두어들이지 못한 것 가운데 조적(糶糴)과 신포(身布)를 막론하고 하나같이 모두 탕감(蕩減)하거나 풍년들 때까지 기한을 물려서 거두기를 청하고, 또 아뢰기를,
"이번 칙사(勅使)의 행차 때에는 연향 다담(宴享茶啖)·청마 유양(淸馬留養) 등의 일을 일체 모두 감면하여 없앴으므로 여러 고을의 폐단은 줄었으나, 역로(驛路)에서는 그 폐단을 갑절로 받았습니다. 대개 연향(宴享)을 받지 않기 때문에 길에서 지체함이 없어 길을 갑절이나 빨리 달리게 되었으며, 청마(淸馬)를 머물러 두지 아니하기 때문에 우리의 역마를 몰아서 그대로 봉황성(鳳凰城)으로 향하였으므로 따라서 역기(驛騎)가 길에서 엎어져 죽지 않으면 병이 나고 역졸(驛卒)도 많이 길에서 쓰러졌습니다. 마땅히 도신(道臣)에게 신칙하여 역로(驛路)를 구휼하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소생하여 편안하게 하소서. 양서(兩西) 지방의 여러 고을은 거듭 기근이 든 나머지 연이어 객사(客使)의 행차가 있어서 공사(公私)가 모두 탕진되었습니다. 앞으로 또 칙사의 행차가 있다면 실로 접대할 만한 형세가 못되니, 마땅히 여러 고을에 환곡(還穀)을 나누어 주어서 불시의 수용에 대비하게 하소서. 기전(畿甸) 지방의 장단(長湍)·파주(坡州)·고양(高陽)의 세 고을에서는 이러한 흉년을 당하였고 또 두 차례나 칙사의 행차를 겪었는데다가 역질(疫疾)마저 또 성행하여 마을이 모두 텅 비었으니, 금년 봄의 대동미(大同米)는 마땅히 견감(蠲減)하도록 허락하여야 합니다. 관서 지방의 직로(直路)인 정안(定安)·평양(平壤)에서는 성곽을 다시 신축하여 관방의 모양새를 갖추었으나, 황주(黃州)에 이르러서는 이곳이 요충지에 처해 있으면서도 담장이 무너지고 성첩(城堞)이 황폐하여 잡초가 무성하니, 마땅히 조정에서 각별히 유념하여 그 수선(修繕)을 책임지워야 합니다."
하니, 세자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였다.

 

충청도 각 고을의 백성들 가운데 여역(癘疫)을 바야흐로 앓고 있는 사람들이 6천 4백 85명이고, 사망한 사람이 1천 4백 54명이었는데, 도신이 보고하였다. 세자가 하령(下令)하기를,
"여역이 줄곧 치성하여 사망한 사람이 이와 같이 많으니 매우 염려스럽다. 바야흐로 병을 앓고 있는 자는 제때에 즉시 출막(出幕)030)  시켜서 전염되지 못하도록 하라. 그중에서도 가장 심하게 치성하는 고을에는 각별히 구호할 것을 신칙하도록 각도에 분부하라."
하였다.

 

2월 3일 임오

왕세자가 영소전(永昭殿)031)  에 알현하였다.

 

2월 4일 계미

안중필(安重弼)을 승지로 삼았다.

 

2월 7일 병술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정고(呈告)한 지가 달포가 지났는데 임금이 세자와 더불어 여러 차례 우악한 비답(批答)을 내리고 위유(慰諭)를 내려 돈면(敦勉)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다시 일어나 정사를 보았다.

 

도당(都堂)에서 홍문록(弘文錄)032)  을 선임하였는데, 김운택(金雲澤)·김동필(金東弼)·남일명(南一明)·김상옥(金相玉)·조상경(趙尙絅)·김취로(金取魯)·조상건(趙尙健)·윤순(尹淳)·김상윤(金相尹)·윤혜교(尹惠敎)·유척기(兪拓基) 등 11인을 뽑았다.

 

왕세자빈(王世子嬪) 심씨(沈氏)가 훙(薨)하였다. 세자빈이 이날 유시(酉時)부터 갑자기 병을 얻어 위중하였는데, 2경(二更) 1점(一點)에 임종하였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세자빈은 가계(家系)가 청송 심씨(靑松沈氏) 고(故)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孚)의 후손으로 우의정에 증직된 심호(沈浩)의 따님이었다. 어려서부터 매우 슬기로우며 예쁘고 온순하여 나이 11세에 간택(揀擇)에 뽑혀 책례(冊禮)를 행하였었다. 양궁(兩宮)을 받들어 섬기는 데에는 정성과 효도가 돈독하고 지극하였으며, 동궁(東宮)을 섬기는 데에는 반드시 공경하고 삼가서 곡진하게 예절을 갖추었다. 임금이 매우 아끼고 중하게 여겼는데, 이때에 이르러 뜻하지도 않게 상(喪)을 당하니, 임금이 통곡하고 애도하여 마지않았다.


【태백산사고본】 69책 61권 6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3면
【분류】인물(人物) / 역사-편사(編史)
사신(史臣)은 논한다. 세자빈은 가계(家系)가 청송 심씨(靑松沈氏) 고(故)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孚)의 후손으로 우의정에 증직된 심호(沈浩)의 따님이었다. 어려서부터 매우 슬기로우며 예쁘고 온순하여 나이 11세에 간택(揀擇)에 뽑혀 책례(冊禮)를 행하였었다. 양궁(兩宮)을 받들어 섬기는 데에는 정성과 효도가 돈독하고 지극하였으며, 동궁(東宮)을 섬기는 데에는 반드시 공경하고 삼가서 곡진하게 예절을 갖추었다. 임금이 매우 아끼고 중하게 여겼는데, 이때에 이르러 뜻하지도 않게 상(喪)을 당하니, 임금이 통곡하고 애도하여 마지않았다.

 

약방(藥房)에서 임금이 임어(臨御)하는 장소가 상차(喪次)와 너무 가까와서 병을 조섭(調攝)하는 절차에 방해됨이 있을까 걱정하여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어(移御)하기를 계청하였는데, 임금이 허락하였다. 마침내 4경(四更)에 내전(內殿)에서 양지당(養志堂)으로 이어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세자빈의 상사(喪事)에 대전(大殿)·중궁전(中宮殿)과 세자궁(世子宮)에서 마땅히 거애(擧哀)하는 절차가 있어야 합니다만, 성상께서 바야흐로 병환으로 조용히 조섭하는 가운데 계시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백관들은 마땅히 변복(變服)하고 곡림(哭臨)하여야 할 것인데, 《오례의(五禮儀)》와 《등록(謄錄)》에는 근거할 만한 선례가 없으므로 대신들에게 문의하였더니, 말하기를, ‘곡림하는 한 가지 예절은 그만둘 수가 없을 것 같다.’ 합니다. 마땅히 이 말에 의하여 거행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내전에서 모두 이미 거애하였으니, 의주(儀註)는 마련하지 말라. 백관들이 곡림하는 일은 허락한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대신들 이하 백관들이 천담복(淺淡服) 차림으로 빈궁의 문 밖에 나아가서 곡림하고 파하여 흩어졌다. 조관(朝官)과 관학(館學)의 학생들은 선인문(宣仁門) 밖에 나아가 곡림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빈궁의 상사(喪事)에는 고묘(告廟)하는 일이 있어야 마땅할 것 같습니다. 종묘(宗廟)·영녕전(永寧殿)·영소전(永昭殿)·경녕전(敬寧殿)의 고문(告文)을 오는 초 9일에 설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좋다고 하였다.

 

정원(政院)에서 일찍이 전에 내상(內喪)을 치를 때의 선례를 원용(援用)하여【빈궁의 상사에는 근거할 만한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신사년033) 의 왕비의 상례(喪例)를 원용했다.】 호위(扈衛)와 군중(軍中)의 현등(縣燈)·조두(刁斗) 등의 절목을 품지하니, 임금이 명하여 거행하지 말게 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빈궁의 상사에 관계되는 절목은 근거할 만한 전례가 없으니, 마땅히 소현 세자(昭顯世子) 상사 때의 등록(謄錄)에 의거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상세하게 구비하지 못한 것은 초상의 여러 가지 절목을 일일이 대신들에게 문의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좋다고 하였다.

 

이날부터 조시(朝市)를 5일 동안 정지하였다.

 

2월 8일 정해

춘추관(春秋館)의 영감사(領監事)가 청하기를,
"사관(史官)을 강화도에 보내어 실록 중에 문종(文宗)이 동궁(東宮)으로 있을 적에 당한 빈궁의 상사와 순회 세자빈(順懷世子嬪)의 상사에 대한 절목을 고증하여 오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좋다고 하였다.

 

사직(社稷)의 대제(大祭)와 왕세자의 경녕전(敬寧殿)034)   전알(展謁)은 모두 초9일을 길일이라고 정했는데, 빈궁의 상사로 인하여 예조에서 계품하니, 임금이 명하여 정지하게 하였다. 이때 문묘(文廟)의 대제가 이날 새벽에 있었으나 상사(喪事)가 향(香)을 받은 뒤에 나왔기 때문에 그대로 설행하였다.

 

오시(午時)에 습례(襲禮)를 행하고, 술시(戌時)에 소렴례(小斂禮)를 행하였는데, 임금이 왕세자와 더불어 내전에서 거애(擧哀)하였다.

 

서종태(徐宗泰)를 빈궁 도감(殯宮都監) 도제조로, 이건명(李健命)·유집일(兪集一)을 원소 도감 당상(園所都監堂上)으로, 김석연(金錫衍)·박봉령(朴鳳齡)을 빈궁 도감 당상으로, 권상유(權尙游)·이택(李澤)을 예장 도감 당상(禮葬都監堂上)으로 삼았는데, 도감(都監)마다 각각 낭청(郞廳) 6인을 내었다. 익양 도정(益陽都正) 이단(李檀)을 수원관(守園官)으로 삼았다. 그뒤에 임금의 하교로 인하여 원소(園所)의 ‘원(園)’자와 수원(守園)의 ‘원(園)’자를 모두 ‘묘(墓)’자로 고쳤다.

 

정원(政院)에서 청하기를,
"모든 상례(喪禮)에 관계되는 절목과 시급한 변정(邊情)·군정(軍情) 이외에 대간의 달사(達辭)와 각종 문서는 모두 성복(成服)할 때까지를 한하여 받아들이지 말게 하소서."
하니, 세자가 좋다고 하였다.

 

빈궁 도감(殯宮都監)에서 계품하여, 발인(發靷)한 뒤에 혼궁(魂宮)을 설치할 장소를 경덕궁(慶德宮)의 경선당(慶善堂)에다 하도록 명하였는데, 뒤에 임금이 경덕궁으로 이어하였기 때문에 창덕궁(昌德宮)의 옛 내반원(內班院)으로 바꾸어 정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빈궁의 상사에 관계되는 제반 절목은 소현 세자(昭顯世子) 상사 때의 등록에 의거하여 거행하지만, 의주(儀註)는 근거할 만한 전례가 없으므로 내상(內喪)인 국휼(國恤)을 당하였을 때의 등록을 가져다가 마련하여 바칩니다. 을유년035)  의 등록에 의하면 의정부에서 진향(進香)하고 정원(政院)·옥당(玉堂)·시강원(侍講院)·익위사(翊衛司)·본조의 당상관들이 별생기(別省記)036)  로 입직(入直) 하였는데 지금은 을유년과 차이가 있으니, 이러한 두 조문을 거행하지 않겠습니다."
하니, 세자가 좋다고 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명정(銘旌)의 서식(書式)은 마땅히 을유년의 등록(謄錄)에 의거하여야 하는데, 붉고 넓은 직포에 금자(金字)로 ‘왕세자빈영구(王世子嬪靈柩)’라고 예서(隷書)로 쓰도록 하소서."
하니, 세자가 좋다고 하였다. 뒤에 빈궁 도감(殯宮都監)에서 실록에 기재된 사례를 인용하여 영구(靈柩)를 재실(梓室)로 고쳐 쓰자고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빈궁(嬪宮)의 상사(喪事)에 대한 대전(大殿)과 중궁전(中宮殿)의 복제(服制)를 《가례(家禮)》와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오복조(五服條)에 준하면, 장자(長子)의 처의 상사에는 기년상(朞年喪)의 복제를 입게 되어 있으며,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의 천자제후정통방기복도(天子諸侯正統旁期服圖)에 준하면, 적부(嫡婦)의 상사에는 대공(大功)의 복제를 입게 되어 있습니다. 세종조(世宗朝) 때 현덕 왕후(顯德王后)께서 빈궁의 자리에서 훙서하였을 적에 임금과 왕비 양궁(兩宮)은 대공의 복제를 입었으니, 지금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왕세자의 복제는 고례(古禮)와 국제(國制)에 모두 부장기(不杖朞)의 상복을 입었으니, 이것으로 마련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여 세종조의 전례를 채용하게 하였다.

 

2월 9일 무자

오시(午時)에 대렴례(大斂禮)를 행하였는데, 예조에서 《오례의(五禮儀)》의 국휼조(國恤條)를 들어서 【왕비의 상례조(喪禮條)에서 방인(旁引)하였다.】  그 절목을 계품하니, 임금이 명하여 옷 90칭(稱)에 대해서는 20칭(稱)을 감하게 하고, 금모(錦冒)를 현모(玄冒)로 대신하게 하고, 수불 관의(繡黼棺衣)를 금단(錦緞)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대렴(大斂)이 끝나자 임금이 세자와 더불어 내전에서 거애(擧哀)하였다. 처음에 임금이 명하여 찬궁(攅宮)을 설치하게 하였으나 그 제도를 조금 낮추게 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을유년에는 전교(傳敎)로 인하여 찬궁을 설치하지 아니하고 다만 평상(平床)·죽단(竹簞)·욕석(褥席) 등의 물건만을 그 아래에 설치하였을 뿐이었으나, 백주(白紬)로 앙장(仰帳)을 만들어 관의 위에 덮어서 먼지를 받아내는 장비로 삼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명하여 을유년의 전례를 채용하게 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빈궁(嬪宮)의 상사가 내전(內殿)에 있어서 백관들이 이미 천담복(淺淡服) 차림으로 곡림(哭臨)하였으니, 제도(諸道)의 대소 사신과 외방 관원들로 하여금 문서(文書)가 도착하는 날 변복(變服)하고 거애(擧哀)하게 할 것과 전(箋)을 바쳐 임금께 진위(陳慰)하게 하고, 또한 동궁(東宮)께도 신위(申慰)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좋다고 하였다.

 

2월 10일 기축

달이 동정(東井)에 들어갔다.

 

사시(巳時)에 성복(成服)하였다.

 

예조에서 복제(服制)에 대한 단자(單子)를 바쳤는데, 그 내용에 이르기를,
"대전(大殿)은 대공복(大功服)을 입는데 의상(衣裳) 【조금 조잡한 숙포(熟布)를 사용한다.】 ·관(冠) 【포(布)로 무(武)와 영(纓)을 만든다.】 ·수질(首絰)·요질(腰絰) 【흩어서 늘어뜨렸다가 성복(成服)한 뒤에 도로 잡아 맨다.】 ·교대(絞帶) 【교대는 포로 만든다.】 ·백피화(白皮靴)를 착용하며, 9일 만에 상복을 벗는다. 중궁전(中宮殿)은 대공복(大功服)을 입는데, 대수(大袖)·장군(長裙)·개두(蓋頭)·두수(頭𢄼)·포대(布帶) 【조금 조잡한 숙포를 사용한다.】 ·백피혜(白皮鞋)를 착용하며 9일 만에 상복을 벗는다. 왕세자는 자최 기년복(齊衰朞年服)을 입는데, 의상(衣裳) 【그 다음 등급의 거친 생포(生布)를 사용한다.】 ·관(冠) 【조금 가는 생포를 사용하여 무(武)와 영(纓)을 만든다.】 ·수질·요질 【흩어서 늘어뜨렸다가 성복한 뒤에 도로 잡아 맨다.】 ·교대 【포로 만든다.】 ·백피화를 착용하며 30일 만에 상복을 벗는다. 【13일 만에 공제(公除)하는데 복제가 끝나기 전에는 흑두면(黑頭冕)·소의(素衣)·소대(素帶)를 착용하고, 졸곡 전에는 심염옥색의(深染玉色衣)·익선관(翼善冠)·오서대(烏犀帶)를 착용하고 진현(進見)할 때에는 무양적색흑의(無揚赤色黑衣)·익선관·오서대를 착용하고, 복제가 끝한 뒤에야 비로소 시복(時服)을 착용한다.】  세자궁(世子宮)의 상궁(尙宮) 이하는 백의(白衣)·포대(布帶)를 착용한다. 【세자는 복제가 끝난 뒤에 길복(吉服)을 착용한다.】  빈궁(嬪宮)에 소속된 상궁 이하는 자최 기년복(齋榱朞年服)을 입는데, 배자 【지극히 추한 생포를 사용한다.】 ·개두·두수를 착용한다. 【조금 가는 생포를 사용한다.】  시비(侍婢) 이하는 포대(布帶)·백피혜를 착용하며, 빈궁의 내관(內官)과 별감(別監)은 자최 기년복을 입으며, 수묘관(守墓官)과 시묘관(侍墓官)은 자최 삼년복(齊衰三年服)을 입는다."
하였다.

 

대신(大臣) 이하 백관들은 천담복(淺淡服)을 입고 빈궁(殯宮)의 문 밖에서 곡림(哭臨)하였으며, 파산관(罷散官)과 관학(館學)의 유생(儒生)들은 선인문(宣仁門) 밖에 모여서 곡하였으며, 동궁(東宮)의 요속(僚屬)들은 소대(素帶)를 30일 동안 착용하고 기년(朞年) 안에 배제(陪祭)할 때와 졸곡(卒哭) 전에 입직(入直)할 때에는 천담복(淺淡服)을 착용하였다.

 

조석전(朝夕奠)에서 상식(上食)의 그릇 수를 모두 간략하게 감소하도록 명하였다. 예조(禮曹)에서 그 숫자를 작정하여 바치니, 임금이 계하(啓下)하여 준행하게 하였다.

 

2월 11일 경인

예조에서 아뢰기를,
"복제(服制)의 절목(節目) 가운데 대전(大殿)과 중궁전(中宮殿)에서 공제(公除)037)  하는 날짜를 세종조에서 이미 시행한 선례에 의거하여 5일로 마련하였는데, 왕세자의 복제도 문종(文宗)께서 동궁(東宮)으로 있을 때의 선례에 의거 마련하여 13일 만에 공제하기 전과 30일 만에 복제가 끝나기 전과 졸곡(卒哭)하기 전의 복색에 대해서는 성상께서 신사년038)  에 이미 시행한 제도가 있었으므로 바로 이것을 인용하여 의논하였으나, 감히 시행하지 못할 점이 있습니다. 공제(公除)하기 전과 복제가 끝나기 전과 졸곡(卒哭)하기 전에 임금께 진현(進見)하는 복색에 대해서는 원래 근거할 만한 전계가 없으니, 대신들에게 문의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좋다고 하였다.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의논하여 아뢰기를,
"왕세자의 복제를 전하께서 신사년에 시행한 전례에 비교하면 이미 장(杖)이 있고 장이 없는 구별이 있으니 조금 감하여 줄이는 절목이 있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신사년의 전례를 가지고 참작하여 마련하소서. 왕세자께서 공제(公除)하고 복제가 끝나기 전에는 전하께서 졸곡(卒哭) 전에 입으시던 흑두면(黑頭冕)·소관(素冠)·소대(素帶)를 착용하고, 졸곡하기 전에는 왕세자께서 상제(祥祭) 뒤와 담제(禫祭) 전에 입으시는 심렴옥색의(深染玉色衣)·익선관·흑각대를 착용할 것입니다. 진현(進見)하는 복색(服色)에 대해서는 왕세자께서 복제가 끝나기 전에는 담제 뒤와 진현할 때에 입으시는 무양적색흑의(無揚赤色黑衣)·익선관·흑각대를 착용할 것이며, 복제가 끝난 뒤에 비로소 시복(時服)을 착용한다면, 사의에 맞게 될 것 같습니다."
하고, 판중추부사 서종태(徐宗泰)가 의논한 것도 김창집의 말과 같았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영상의 헌의(獻議)가 내 뜻에 바로 합치된다. 이 말에 의거하여 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 뒤에 해조(該曹)에서 다시 세종조의 선례를 인용하여 임금의 공제를 9일로 바꾸고 모든 관계되는 문서(文書)의 출납은 공제할 때까지를 기한하여 정지하게 하였다.

 

예조에서, 사직 대제(社稷大祭)를 아직 거행하지 않았고 중월(仲月)도 아직 다 가지 않았다는 것으로 기한을 물려서 거행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다고 아뢰고 대신들에게 의논하기를 청하였다.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예기(禮記)》의 ‘빈렴(殯殮)하면서 사직(社稷)에 제사한다.’는 글을 인용하여 중월의 무일(戊日)에 거행하되 풍악을 사용하자고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을유년의 등록(謄錄)에서는, 초상(初喪)에서부터 졸곡(卒哭)에 이르기까지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를 모두 정지하였으나, 빈렴(殯殮)한 뒤에는 오로지 사직(社稷)에만 제사를 지냈는데, 이는 고례(古禮)에 같은 궁전 안에서는 비천(卑賤)한 사람의 상사가 있을지라도 3개월 동안은 이를 위해 제사를 지내지 않았으나 오직 교사(郊社)의 예(禮)만은 월불(越紼)039)  을 거행한 데서 온 것이니, 설행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종묘와 각릉(各陵)·각전(各殿)의 삭망제(朔望祭)와 대제(大祭)는 마땅히 정지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예조에서 또 아뢰기를,
"종묘와 각릉·각전과 서울과 외방의 문묘(文廟)에 비가 새어 개수하거나 고유(告由)하는 등의 일이 시급한 데 관계되는 것이면 청컨대 이를 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또 그대로 따랐다.

 

약방(藥房)에서 아뢰기를,
"중궁전(中宮殿)과 세자궁(世子宮)과 각사(各司)의 공상(供上)을 모두 소선(素膳)으로 진배(進排)하기 때문에 반드시 옥체를 손상할 염려가 있으니, 청컨대 내일부터는 상선(常膳)으로 진공(進供)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2월 13일 임진

달이 헌원성(軒轅星)을 범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을유년의 등록(謄錄)에서는, 빈궁(殯宮)의 조석전(朝夕奠)·삭망제(朔望祭)·속절제(俗節祭) 등의 제사에는 궁관(宮官)과 익위사(翊衛司)의 관원들이 배제(陪祭)하였는데, 복색(服色)은 자신에게 해당하는 복제(服制)를 입고 들어가서 참여하였었습니다. 이번에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이번에는 을유년과 차이가 있으니, 배제하는 한 가지 조문은 거행하지 말라."
하였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진후를 끝마치자,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가 아뢰기를,
"상복(喪服)에는 높이거나 낮추는 절목이 없을 수가 없는데, 빈궁(嬪宮)의 상사로 인하여 종묘(宗廟)의 대향(大享)까지 폐하기에 이른다면 미안할 것 같습니다.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를 모두 정지하는 것도 끝내 그것이 합당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대신들에게 명하여 의논하게 하였다. 이 뒤에 여러 대신들이 의논하였는데, 모두 아뢰기를,
"사전(祀典)을 한꺼번에 모두 정지하거나 폐하는 것은 미안한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마침내 그대로 따랐다.

 

2월 14일 계사

정필동(鄭必東)을 승지로 삼았다. 【공제(公除)하기 전에는 전례에 따라 정사를 볼 수가 없었으나, 승지는 긴요한 직임이기 때문에 특별히 명하여 차출(差出)하였던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69책 61권 9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5면
【분류】인사-임면(任免)

 

임금과 내전(內殿)이 세자빈을 위하여 기년복(朞年服)을 입을 것으로 개정하였다. 박봉령(朴鳳齡)  【전 예조 참판이다.】 이 상소하기를,
"신 등이 어저께 예조에서 대죄(待罪)하고 있었는데 빈궁(嬪宮)의 상사에 양전(兩殿)의 복제를 마련할 때 동료들과 상의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오복조(五服條)에 ‘장자(長子)의 처는 기년복(朞年服)을 입는다.’고 한 것과,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의 천자제후정통방기복도(天子諸侯正統旁期服圖)의 대공조(大功條)와 세종조 때 현덕 왕후(顯德王后)가 동궁(東宮)에서 훙서하였을 적에 대공복(大功服)을 입었던 것을 조목별로 열거하여 품지하였더니, 성상께서 국제(國制)에 의거하라고 하교하였습니다. 대저 《경국대전》과 세종조에서 이미 시행한 선례는 모두 국제인데, 기년복으로 할 것인지 대공복으로 할 것인지를 감히 단정하지 못하겠으므로 다시 우러러 품지하였더니, 세종조의 선례가 곧 국조(國朝)에서 이미 시행한 제도라고 하비(下批)하였기 때문에 전교(傳敎)에 따라 봉행하였습니다. 성복(成服)한 뒤에 다시 참고하였더니, 세종조에서 시행한 복제는 《경국대전》이 완성되기 전에 있었던 것입니다. 또 근래의 제도를 말씀드린다면 경신년040) 인경 왕후(仁敬王后)의 국휼(國恤)을 당하였을 때에 명성 왕후(明聖王后)께서 이미 기년복을 입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추측한다면 이번 빈궁의 상사에는 양전께서 결단코 기년복을 입어야 합니다. 당초에 계품한 것은 일이 창졸(倉卒)한 가운데에서 나왔던 탓으로 경신년에 관한 한 조문을 미처 전거(典據)로 원용(援用)하여 계품하지 못하였습니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지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처음에 해조의 계품으로 인하여 참작하고 헤아려서 판하(判下)하였는데 소장의 내용이 이와 같으니, 다시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대신들에게 문의하여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이에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의논하여 아뢰기를,
"빈궁의 상사에 있어 《경국대전》에 의하면 양전(兩殿)께서 응당 기년복을 입어야 합니다. 처음에 세종조의 대공복 제도로 할 것으로 판하하였다고 하더라도 인경 왕후(仁敬王后)의 국휼 때에는 이미 명성 왕후(明聖王后)께서 기년복을 입었던 가까운 선례가 있으니, 추후하여 바로잡는 일을 그만둘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고, 판중추부사 이이명(李頤命)은 의논하여 아뢰기를,
"고례(古禮)에 며느리는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위하여 기년복을 입었고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위하여 대공복을 입었는데, 《개원례(開元禮)》에는 며느리는 남편을 따라 3년복을 입고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는 기년복을 입는다고 고쳤습니다. 세종대왕께서 현덕 왕후(顯德王后)의 상사에 오로지 고례를 사용하였으나 그 뒤 《오례의(五禮儀)》를 완성할 적에 《개원례》를 참조 채용하였으므로 국조(國朝)에서 처음 시행한 제도와 추후하여 완성된 전례(典禮)가 서로 같지 않게 된 것은 이 때문입니다. 해조(該曹)에서 갑자기 당한 일이어서 처음에 명백하게 아뢰어 품지할 수가 없었고, 또 경신년의 가까운 선례를 고증하지도 못하였습니다. 재신(宰臣)이 살피지 못한 사실을 추후하여 깨닫고 이렇게 상소로 진달하였으니, 이번 기회에 바로잡는 것이 불가할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고, 행 판중추부사 이유(李濡)·서종태(徐宗泰)·김우항(金宇杭)과 우의정 조태채(趙泰采)는 모두 김창집과 의논이 같았다. 임금이 좌의정 권상하(權尙夏)에게 문의하도록 명하였는데, 권상하는 겸손히 사양하면서 답하지 아니하였다. 예조 참의 이조(李肇)가 상소하기를,
"성상께서 복제를 이미 대공복(大功服)으로 정하신 뒤에 또 재신(宰臣)의 요청 때문에 기년복을 가지고 외방에 있는 대신들에게 두루 문의하시니, 성명(聖明)께서 예(禮)를 좋아하시는 훌륭한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지금 대공복으로 할 것인지 기년복으로 할 것인지를 아직도 정하지 못하고 있는 중인데, 공제(公除)하는 한 가지 조문도 마땅히 복제에 따라 날짜를 진퇴(進退)해야 합니다. 그런데 반드시 외방에 있는 대신들에게 문의하여 의논을 올리기를 기다린 뒤에 비로소 결정한다면 9일 공제 전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결정이 난 것은 물론이고 비록 13일 공제 전에라도 주선하기가 어렵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기년복과 대공복을 막론하고 공제 기한의 날짜에는 모두 할 수가 없기 때문에 거행하지 못하게 되니, 진실로 미안한 점이 있습니다. 또 성상께서 이어(移御)하실 때의 복색도 장차 마련해야 하는데, 공제하기 이전과 이후에 마땅히 분별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밖에 문서를 출납하는 따위의 절목도 기한을 정해야 하는데, 지금 어느 것을 따라야 할지를 모르는 상황이어서 닿는 일마다 막히고 구애되니, 사체가 진실로 안타깝습니다. 만약 성상께서 빨리 분명한 명령을 내리시어 복제를 결정하시고 지시하는 하교를 내리신다면, 막중한 전례(典禮)가 궁박한 지경에 이르지 않을 것이고, 모든 절목도 곤란한 단서가 없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어느 것을 따라야 할지를 몰라서 거행하기에 어렵다는 것은 진실로 소장의 내용과 같다. 급히 서둘러 처분(處分)을 내리는 것을 그만둘 수 없다. 경신년의 선례가 이미 이와 같은데 대신들의 의논도 차이가 없으니, 기년복으로 개정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이에 예조에서 계품하여 공제(公除)를 13일로 하였다.

 

2월 15일 갑오

월식(月食)이 있었다.

 

예조 좌랑 성진령(成震齡)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가 본조(本曹)의 등록(謄錄)을 가져다가 보건대, 그 가운데 기년복(朞年服)과 대공복(大功服)·소공복(小功服)·시마복(緦麻服)의 공제(公除)에 관한 한 조목에 대하여 마음에 의혹되는 바가 없지 않습니다. 삼가 《예경(禮經)》을 살펴보건대, 모든 상복(喪服)은 참최(斬衰)·자최(齊衰)에서 대공·소공·시마에 이르기까지 모두 응당 공제해야 하는 달수[月數]가 있습니다만, 신분의 귀천(貴賤)에 따라 차이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니, 지금 이른바 5일·9일·13일에 최복을 벗는다고 하는 것은 또한 무슨 전례입니까? 선왕(先王)의 예제(禮制)에 반드시 이러한 복제가 있었던 연후에야 명분이 있는 법인데, 지금 기년복이라고 이름 붙이고서 13일 만에 자최를 벗고 대공·소공이라고 이름 붙이고서 5일·9일 만에 상복을 벗지만, 이것은 이미 옛날 경전(經典)의 유훈(遺訓)이 아닙니다. 그리고 왕세자는 최복을 벗은 뒤에 또 이른바 ‘복이 끝나는[服盡]’ 절목이 있는데, 금일의 제도로 말한다면 13일 만에 최복을 벗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복이 이미 여기에서 끝난 것인데, 오히려 다시 끝날 복이 있겠습니까?
지금 왕세자가 빈궁(嬪宮)의 상사에 연제(練祭)·상제(祥祭)041)  의 절목이 있어야 마땅한데, 연제라는 것은 관(冠)을 연포(練布)로 만드는 것이고 상제라는 것은 장차 다시 길복(吉服)을 입는다는 것입니다. 13일 만에 최복을 벗는다면 연제에 이르러서도 입을 연복(練服)이 없으며, 30일 만에 복제가 끝난다면 상제에 이르러서도 다시 회복할 길복(吉服)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연제와 상제의 절목은 쓸데없이 헛문구로 설치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옛날 천자(天子)는 경(卿)·대부(大夫)의 상사에 있어 또한 최복을 벗고 임어하였으니, 전하께서 빈궁(嬪宮)의 계빈(啓殯) 등의 절차에 있어 혹 임어하실 경우에는 전하의 복제는 이미 벗었는데 또 무슨 복제를 입고서 보시겠습니까? 삼가 생각하건대, 공제(公除)하는 절목은 임금이 정사를 보는 것을 위해 설치한 것인데, 이것으로 인하여 아주 복제를 벗기에 이른다면 매우 의의가 없는 것입니다. 《오례의(五禮儀)》에서 졸곡(卒哭)한 뒤에 정사를 보는 복제는 또한 미길복(微吉服)의 제도를 채용하였으니, 최복을 제거하지 않은 것입니다. 기년복·대공복의 상사에는 9일 혹은 13일 후에 반길복(半吉服)이나 순길복(純吉服)의 복제를 입고 정사를 보는데, 혹 상차(喪次)에 일이 있게 되면 그 복제를 입고서 임어하니, 반드시 달수를 기다렸다가 상복을 벗는 것이 어찌 성인(聖人)이 예제를 정한 뜻에 합치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상소하여 복제를 논한 일은 두루 물어보고 처리하지 않을 수 없다.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대신들과 의논한 뒤에 품처하게 하라."
하였다. 판중추부사 이유(李濡)가 의논하여 아뢰기를,
"우리 조정에서 통용되는 상례(喪禮)는 삼대(三代)의 올바른 제도를 능히 회복하였는데, 오로지 기년복과 대공복의 복제에 대해서만은 아직도 역월(易月)의 제도042)  가 존속하니, 진실로 흠전(欠典)입니다. 예랑(禮郞)043)  이 논한 바 ‘공제(公除)하는 절목은 임금이 정사를 듣기 위해 설치한 것인데, 이로 인하여 아주 복제를 벗는다면 매우 의의가 없는 처사임은 물론이고, 혹 상차(喪次)에 일이 있을 경우에는 그 복제를 입고서 임어하게 될 것이므로 반드시 달수를 기다렸다가 복제를 벗어야 합니다.’ 한 것은 성인께서 예를 만든 본뜻에도 합치될 것 같습니다."
하고, 행 판중추부사 서종태(徐宗泰)·영의정 김창집(金昌集)·행 판중추부사 이이명(李頤命) 등의 의논도 이유의 의논과 대략 같았다. 우의정 조태채(趙泰采)가 의논하여 아뢰기를,
"열성조(列聖朝)에서는 모두 역월(易月)의 제도를 써 왔고, 수백년 동안 아직 바로잡지 못하고 있는 것을 지금에 이르러 고치는 것은 선조(先祖)를 따른다는 뜻에 어긋나는 점이 있으니, 가볍게 의논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우리 조정에서 통용되는 상례(喪禮)는 고례(古禮)에 의거 결정하여 시행함에 따라 잘못된 것을 일체 고쳤는데, 유독 기년복과 대공복의 복제에 대해서는 역월(易月)의 제도가 아직도 존속되고 있으니, 진실로 흠전이다. 경신년044)  ·신사년045)  에 국휼을 당했을 때의 복제는 국제(國制)를 준용하였는데, 이는 선조의 뜻을 따른다는 의의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그 뒤 계사년046)  에 이르러 내가 《예기(禮記)》에서 증자(曾子)가 최질(衰絰)의 복제를 물었던 것에 대하여 느낀 바가 있어 단연코 결정해서 시행하였다. 큰 것은 이미 잘못된 것을 고쳤으니, 작은 것에 대해서도 그대로 따르는 것은 마땅치 않기 때문에 아울러 바로잡고자 한지가 오래 되었다. 지금 성진령(成震齡)은 미관 말직의 낭관으로서 문득 예법을 준행하는 뜻을 붙여 상소하여 상례(喪禮)를 논하였는데 그 뜻이 복고(復古)에 있으니, 그 말이 지극히 옳아서 실로 나의 뜻에 합치된다. 지금 상례를 정함에 있어 마땅히 이번 상례부터 시작하여야 하니, 의조(儀曹)에서 잘 알아서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리하여 해조(該曹)에서 최질을 벗는 단자(單子)를 고치고, 또 임금과 세자가 기년이 되기 이전에 정사를 보는 복색(服色)은 근거할 만한 전례가 없다고 품주(稟奏)하니, 임금이 명하여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였다. 정부의 서벽(西壁)047)  과 유신(儒臣), 이조 참판 이희조(李喜朝), 전 좌윤(左尹) 이세필(李世弼), 전 승지 정제두(鄭齊斗), 집의 김간(金幹), 전 지평 김창흡(金昌翕) 등과 좌의정 권상하(權尙夏)가 아뢰기를,
"이런 등등의 소소한 절목은 당초 명문(明文)이 없었으니, 다만 성상께서 참작하여 법식을 정하여 한 왕조의 제도로 삼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지존(至尊)의 복색은 상사에 임할 때가 아니면 저절로 보통 때와 같이하는 것이 마땅하며, 동궁께서 정사를 볼 때의 복색도 전적으로 흰색의 상복을 착용할 수는 없습니다. 대저 곡림(哭臨)할 때에는 흉복(凶服)을 착용하고 진현(進見)할 때에는 길복(吉服)을 착용하며, 보통 연거(燕居)하실 때에는 미흉복(微凶服)을 착용하고 정사를 보실 때에는 미길복(微吉服)을 착용하는 것이 사의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하고, 그 나머지 여러 신하들은 어느 한 가지를 지목하여 논한 바가 없었고, 혹은 겸손히 사양하며 대답하지 않기도 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권상하의 의논을 채용하게 하였다.

 

2월 17일 병신

예장 도감(禮葬都監)에서 아뢰기를,
"이번에 도감(都監)의 모든 일은 실록(實錄)과 을유년048)  의 의궤(儀軌)를 참고하여 거행하는데, 그 가운데 시책(諡冊) 이하 여덟 가지를 뒤에 조목별로 열거하여 세자께서 휘람(徽覽)하시는 데에 대비할까 합니다. 또 한두 가지 품지하여 결재할 단서가 있으면 마땅히 하령(下令)이 있기를 기다려 거행하겠습니다. 길흉(吉凶)의 의장(儀仗)·복완(服玩)·명기(明器)에 이르러서는 실록과 을유년·신사년049)  의 의궤 중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여 서로 같지 아니하므로, 도감에서 그 숫자를 마음대로 정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기 때문에 모두 별단(別單)을 만들어 열거하여 기록하고 주석을 달아서 바치니, 청컨대 예조로 하여금 품지(稟旨)하게 하고 참작하여 정하여서 분부하시면 거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별단에 열거하여 기록한 것은 이러합니다.
시책(諡冊) 【애책(哀冊)도 같습니다. 실록과 등본(謄本) 가운데에는 시책과 애책이 있다고 되어 있으나 대나무[竹]를 사용하거나 옥(玉)을 사용한다고 말하지는 않았는데, 을유년의 의궤에서는 대나무를 사용한다고 하였으니, 지금도 이를 준용해야 합니다.】  시인(諡印) 【실록과 등본 가운데에는 시인이 있다고 되어 있으나 금·은·옥을 사용한다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을유년의 의궤에 처음에 은을 사용하여 주조하도록 정탈(定奪)하였지만 뒤에 내상(內上)의 인이라는 것으로 옥으로 새겼기 때문에 남양(南陽)의 옥을 사용하도록 고쳤으니, 지금도 이를 준용해야 합니다. 또 시인(諡印)의 척도(尺度)에 대해서는 을유년의 의궤에서는 사방이 3촌 5푼이고 두께가 7푼이고 귀부(龜趺)의 높이가 1촌 5푼이었습니다만, 병자년 가례(嘉禮) 때의 의궤를 가져다가 상고하니, 옥인(玉印)은 사방이 3촌 6푼이고 두께가 8푼 5리이고 귀부의 높이가 2촌 1푼이었습니다. 이번의 시인은 길이·너비·높이·두께를 가례 때의 옥인과 같게 하면 생시(生時)를 상징하는 뜻에 합치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체가 중대하여 감히 마음대로 결단하지 못하겠으니, 어떻게 조처해야 할는지를 감히 품지합니다.】  증옥(贈玉) 【실록과 등본 가운데에는 증옥이 있다고 되어 있는데 을유년 의궤에는 증옥은 단천(端川)의 심청옥(深靑玉)을 사용하였으니, 지금도 이를 준용해야 합니다.】  증백(贈帛)【실록과 등본 가운데에는 증백으로 검정색 6필과 분홍색 4필이라고 되어 있는데 을유년 의궤에는 증백은 검은 대단(大緞) 6필과 붉은 대단(大緞) 4필을 사용하였고 각각 길이가 18척이었으며 척수(尺數)는   조례기척(造禮器尺)050) 을 사용하였으니, 지금도 이를 준용해야 합니다.】  삽선(翣扇) 【실록과 등본 가운데에는 보삽(黼翣) 2부, 불삽(黻翣) 2부, 화삽(畫翣) 2부를 사용하게 되어 있고 을유년 의궤에서도 이와 같았으니, 지금도 이를 준용해야 합니다. 신사년 의궤에서도 행상(行喪)에 삽선 6부가 있었는데, 첫번째 습의(習儀)할 때를 비롯해 산릉(山陵)에까지 배열하여 두었다가 하현궁(下玄宮)한 뒤에는 불에 태워버렸으니, 지금도 이를 준용해야 합니다.】  만장(輓章) 【실록과 등본 가운데에는 발인 반차(發靷班次)에서 만사 30장을 좌우에 나누어 세우게 되어 있는데, 을유년 의궤에는 80장을 사용하였습니다. 지금은 만장의 많고 적은 숫자를 어떻게 정해야 할는지 감히 품지합니다.】  우주(虞主) 【을유년 의궤에는 예조의 계사(啓辭)로 인하여 우주(虞主)는 뽕나무를 사용하고 연주(練主)는 밤나무를 사용할는지의 여부를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였는데, 우주에 바로 밤나무를 사용하기로 정하였으며, 우주의 법식은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거하였습니다. 또 종묘의 제도에 의하여 분면(粉面)은 설치하지 아니하였고 먹으로 쓴 글씨 위에 칠을 사용하여 장식을 더하였는데, 지금도 이를 준용해야 합니다.】  지석(誌石) 【을유년 의궤에는 지석이 2편이었는데 길이가 4척 2촌 4푼이고 너비가 2척 9촌 5푼이고 두께가 5촌 9푼으로 조례기척(造禮器尺)을 사용하였으니, 지금도 이를 준용해야 합니다.】 "
하였다. 세자가 하령(下令)하기를,
"길흉에 관한 의장(儀仗) 따위의 일은 예조로 하여금 품지하게 하여 참작해서 정하자는 한 가지 조문은 계달한 대로 하도록 하라. 그 나머지 일은 대조(大朝)께 품지하였더니, 말씀하시기를, ‘세자빈을 책봉(冊封)할 때에 책문(冊文)은 대나무를 사용하였고 글자를 쓰는 데에는 금을 사용하였고 인(印)은 옥을 사용하였는데 옥은 으레 남양(南陽)의 옥을 채용하였으니, 지금 이 시책(諡冊)에서도 대나무를 사용하고 금으로 글자를 쓰도록 하라. 애책(哀冊)도 대나무를 사용하고, 시인(諡印)은 옥을 사용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국휼(國恤) 때에 애책(哀冊)은 붉은 글자를 썼는데 지금은 푸른 글자를 쓰는 것이 의심스러운 것 같다. 만장(輓章)은 실록과 등본(謄本)에 의해 30장으로 정하고 시인(諡印)의 척도(尺度)는 가례(嘉禮) 때의 옥친(玉印)과 같게 하는 것이 또한 마땅하다. 이밖에 여러가지 조문은 계달한 내용에 의하여 그대로 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교(下敎)하셨으니, 이에 의거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그 뒤에 예장 도감에서 계달한 내용에 따라 애책은 을유년의 예에 의하여 붉은 글씨로 쓰고 만사(輓詞)는 50장으로 고쳐서 정하였다.】  그 뒤에 예조에서 또 예제를 서로 참고하여 참작해서 정한 다음 별단(別單)으로 열거하여 썼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길의장(吉儀仗)에 들어가는 것은 오장(烏仗) 【을유년 의궤에 의하여 14개를 사용하였다.】 ·백택기(白澤旗) 【실록에 의하여 2개를 사용하였다.】 ·금등자(金鐙子)·은등자(銀鐙子)·금립과(金立瓜)·은립과(銀立瓜)·모절(旄節) 【을유년 의궤에 의하여 각각 2개씩을 사용하였다.】 ·금장도(金粧刀)·은장도(銀粧刀) 【을유년 의궤에 의하여 각각 1개씩을 사용하였다.】 ·작선(雀扇) 【실록에 의하여 2개를 사용하였는데 그뒤에 예조에서 계달한 내용으로 인하여 4개로 바꾸어 사용하였고 청선(靑扇)은 2개를 사용하였다.】 ·청개(靑蓋) 【을유년·신사년의 의궤에 의하여 2개를 사용하였다.】 ·청양산(靑陽繖) 【실록과 을유년 의궤에 의하여 1개를 사용하였다.】 ·마궤(馬机) 【을유년·신사년의 의궤에 의하여 2개를 사용하였다.】 ·홍촉롱(紅燭籠)·청촉롱(靑燭籠)·백촉롱(白燭籠) 【실록과 을유년·신사년 의궤에 의하여 각각 2개씩을 사용하였다.】 ·금횡과(金橫瓜)·은횡과(銀橫瓜) 【신사년 의궤에 의하여 각각 1개씩을 사용하였다.】 ·은교의(銀交椅)·각답(脚踏)·좌자(坐子)·의자(倚子) 【신사년 의궤에 의하여 각각 1개씩을 사용하였다.】 이고, 흉의장(凶儀仗)에 들어가는 것은 우보(羽葆) 【실록과 을유년·신사년 의궤에 의하여 1개를 사용하였다.】 ·화철롱(火鐵籠) 【실록과 을유년 의궤에 의하여 20개를 사용하였다.】 ·방상씨(方相氏)  【실록과 을유년 의궤에 의하여 4개를 사용하였다.】 ·죽산마(竹散馬) 【을유년·신사년 의궤에 의하여 2개를 사용하였다.】 ·죽안마(竹鞍馬) 【실록과 을유년·신사년 의궤에 의하여 4개를 사용하였다.】 ·청수안마(靑繡鞍馬)·자수안마(紫繡鞍馬) 【실록에 의하여 각각 2개씩을 사용하였다.】 입니다. 복완(服玩)과 수식(首飾)은 【신사년 의궤에 의하여 1개를 사용하였다.】 ·홍릉겹장삼(紅綾裌長衫)·남라겹상(藍羅裌裳)·백릉겹말군(白陵裌襪裙)·백저포태의(白苧布笞衣)·수건·백포말(白布襪)·분홍단자동화(粉紅段子同靴) 【실록과 신사년 의궤에 의하여 각각 1벌씩을 사용하였다.】 ·온혜(溫鞋) 【실록에 의하여 분홍단을 1벌 사용하였다.】 ·남단자리(藍段子履) 【신사년 의궤에 의하여 1벌을 사용하였다.】 ·홍단자의(紅段子衣) 1벌, 【신사년 의궤에 의하여 홍저사(紅苧紗) 1벌을 사용하였다.】 ·홍단자대(紅段子帶) 【실록에 의하여 1벌을 사용하였다.】 ·홍단자(紅段子) 5벌, 지수(指手) 1벌, 【신사년 의궤에 의하여 백초수의(白綃手衣)를 사용하였다.】  분홍저사수보로(粉紅苧絲繡甫老) 1벌, 고비롱(高飛籠) 1개, 【신사년 의궤에 의하여 이를 사용하였다.】 ·자칠목잠채(紫漆木簪釵)·황칠목잠채(黃漆木簪釵) 각각 1개씩 【신사년 의궤에 이하여 흑칠잠(黑漆簪) 1개를 사용하였다.】 ·소함(梳凾) 【실록에 의하여 1개를 사용하였다.】 ·토등상자 【신사년 의궤에 의하여 1개를 사용하였다.】 ·간자(竿子) 【신사년 의궤에 의하여 흑칠 1개를 사용하였다.】 ·거울[鏡] 【신사년 의궤에 의하여 구대갑(具台匣) 1개를 갖추었다.】 ·지분통(脂粉筒) 【신사년 의궤에 의하여 1개를 사용하였다.】  입니다. 명기(明器)는 소(筲) 【실록에 의하여 5개를 사용하였다.】 ·영(甖) 【을유년·신사년 의궤에 의하여 3개를 사용하였다.】 ·무(甒) 【실록에 의하여 1개를 사용하였다.】 ·와조(瓦竈) 【실록에 의하여 1개를 사용하였다.】 ·와정(瓦鼎) 【실록에 의하여 4개를 사용하였다.】 ·와부(瓦釜) 【실록에 의하여 1개를 사용하였다.】 ·와증(瓦甑) 【실록에 의하여 1개를 사용하였다.】 ·포작(匏勺) 【실록에 의하여 1개를 사용하였다.】 ·자배(磁杯) 【을유년·신사년 의궤에 의하여 3개를 사용하였다.】 ·변(籩)·두(豆) 【실록에 의하여 각각 10개씩을 사용하였다.】 ·보(簠)·궤(簋) 【실록에 의하여 각각 10개씩을 사용하였다.】 ·준(樽) 【을유년 의궤에 의하여 사준(沙樽) 3개를 사용하였다.】  입니다. 식발(食鉢)은 갱발(羹鉢)·시접(匙楪) 【실록에 의하여 각각 1개씩을 사용하였다.】 ·소채포해접(蔬菜脯醢楪) 【실록에 의하여 7개를 사용하였다.】 ·적접(炙楪) 【실록에 의하여 1개를 사용하였다.】 ·찬접(饌楪) 【신사년 의궤에 의하여 9개를 사용하였다.】 ·주견(酒甄) 【을유년·신사년 의궤에 의하여 1개를 사용하였다.】 ·식탁(食托)·숟가락[匙]·젓가락[筯]·식탁(食卓)·관반(盥盤)·관이(盥匜)·향합(香盒) 【실록과 의궤에 의하여 각각 1개씩을 사용하였다.】 ·향완(香椀) 【을유년·신사년 의궤에 의하여 향로(香爐) 1개를 사용하였다.】 ·타우(唾盂)·혼기(溷器)·수기(溲器) 【을유년·신사년 의궤에 의하여 각각 1개씩을 사용하였다.】  입니다. 와종(瓦鍾)·와경(瓦磬) 【실록에 의하여 각각 4개씩을 사용하였다.】 ·와훈(瓦壎)·소(簫)·생(篪)·지(篪)·축(祝)·어(敔)·금(琴)·슬(瑟)·우(竽) 【실록과 신사년 의궤에 의하여 각각 1개씩을 사용하였다.】 ·목경(木卿)·당악인와(唐樂人瓦) 【실록에 의하여 10인을 사용하였다.】 ·특종와(特鍾瓦)·특경와(特磬瓦)·방향(方響)·관(管)·당적(唐笛)·당필률(唐觱栗)·향필률(鄕觱栗)·대금(大琴)·당비파(唐琵琶)·향비파(鄕琵琶)·현금(玄琴)·가야금(伽倻琴)·대쟁(大箏)·아쟁(牙箏)·박화(拍和)·절고(節鼓)·장고(杖鼓) 【신사년 의궤에 의하여 각각 1개씩을 사용하였다.】 ·목안마(木鞍馬)·목산마(木散馬) 【을유년 의궤에 의하여 각각 1개씩을 사용하였다.】 ·목노(木奴)·목비(木婢) 【을유년 의궤에 의하여 각각 40인씩을 사용하였다.】  입니다."

 

2월 18일 정유

관상감 제조(觀象監提調)가 예조의 당상관(堂上官)과 빈궁(嬪宮)의 무덤을 쓸 산이 합당한 곳인지를 간심(看審)하고 나서 열거하여 써서 품지(稟旨)하였는데, 임금이 하교하기를,
"명릉(明陵)051)  과 익릉(翼陵)052)   두 능 사이의 간좌(艮坐)의 혈(穴)에 대하여 일찍이 경연(經筵)에서 수서(手書)로 내어보였고, 이어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사관(史官)이 쓴 여러 가지 일기(日記)들을 두루 살펴보라고 하교한 것이 정녕(丁寧)할 뿐만이 아니었는데, 이번에 산을 간심할 때에도 혼동하여 거론하니, 사체에 있어 미안하다."
하였다.

 

2월 19일 무술

영의정 김창집(金昌集)과 우의정 조태채(趙泰采)가 관각(館閣)의 당상관과 빈청(賓廳)에 모여 빈궁의 시호를 의논하고, 단혜(端惠)·온의(溫懿)·순정(順靖)의 세 가지를 의망(擬望)하여 바치니, 임금이 ‘온의’라는 두 글자에 낙점하여 쓰도록 하였다.

 

2월 20일 기해

임금과 중궁이 경덕궁(慶德宮)으로 이어(移御)하였다. 임금이 익선관(翼善冠)과 담청색포(淡靑色袍)·오서대(烏犀帶) 차림으로 출궁하였는데, 세자의 지송(祗送)하는 복색도 그와 같았다. 이는 기복(期服) 중에 있으면 길복(吉服)을 착용하지 아니하기 때문인데, 대신들이 의논하여 정한 것이다.

 

묘소 도감(墓所都監)에서 청하기를,
"을유년053)  의 《등록(謄錄)》에 의하여 각도의 승군(僧軍) 1천 명을 조발하되, 양식을 스스로 준비하여 1개월동안 부역(赴役)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좋다고 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인장리(仁章里)에 있는 장씨(張氏)의 묘소(墓所)를 다시 간심(看審)한 뒤에도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처음에 간심하였을 때와 다름이 없습니다. 함일해(咸一海)의 말과 같이 하자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한두 사람뿐만이 아닙니다. 당초 대신들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이미 국법(局法)에 어긋나는 점이 있으니, 마땅히 속히 변통(變通)하여야 합니다.’라고 하였고, 또 《의례(儀禮)》에 이른바 달자(達子)의 뜻으로 우러러 품지하였었습니다. 지금에 이르도록 이의(異議)가 이러하니 여러 대신들에게 문의하소서."
하니, 임금이 좋다고 하였다. 이뒤에 임금이 행 판중추부사 이유(李濡)의 의논을 채용하여 예조에 명하여 여러 지사(地師)들을 불러모아 무덤을 천장(遷葬)하는 것이 마땅한지의 여부를 묻게 하였었는데, 예조에서 그들에게 물어보고 나서 임금에게 아뢰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여러 지사들 가운데 하자가 있다고 말하는 자가 많기 때문에 세자(世子)가 다른데로 천장(遷葬)하기를 간절히 원하니, 따르지 않을 수가 없다."
하였다.

 

2월 21일 경자

세자가 경덕궁(慶德宮)으로 이차(移次)하였다. 임금과 중궁 양전(兩殿)은 이미 어제 이어하였으나, 관상감에서 세자는 이날에 이차하는 것이 길하다고 하였기 때문에 그 말을 따른 것이다.

 

2월 23일 임인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도제조 이이명(李頤命)이 아뢰기를,
"국휼(國恤)의 초상 때에는 사대부가 혼취(婚娶)할 수가 없기 때문에 금하지 아니하더라도 스스로 금하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복제(服制)가 없기 때문에 혼취가 분분한데 만약 금단(禁斷)하는 일이 없다면 앞으로 간택(揀擇)할 때에 사대부 집안의 처녀들이 반드시 남아 있는 자가 없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여 금단하게 하였다.

 

2월 24일 계묘

묘소 도감(墓所都監)에서 빈궁(嬪宮)을 장사지낼 땅을 택점(擇占)하였는데, 모두 세 곳이었다. 그 도형(圖形)을 바치자 임금이 명하여 숭릉(崇陵)054)   안의 유좌(酉坐)의 언덕에 쓰도록 정하였다.

 

예장 도감(禮葬都監)에서 빈궁(嬪宮)의 지문(誌文)을 시기보다 앞서 찬진(撰進)해야 하였는데, 경신년055)  과 신사년056)   의궤에 모두 임금이 행록(行錄)을 써서 내렸던 일이 있었다고 계품(啓稟)하니, 세자가 드디어 빈궁의 행실(行實)을 써서 정원에 내렸다. 그 글에 이르기를,
"빈(嬪)의 성(姓)은 심씨(沈氏)인데, 가계(家系)는 청송(靑松)이다.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는 개국(開國)의 원신(元臣)으로 바로 13대 선조이다. 영의정 안효공(安孝公) 청천 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沈溫)은 곧 청성의 소출로 바로 12대 선조이다. 영의정 충혜공(忠惠公) 심연원(沈連源)은 바로 8대 선조이고, 영의정 익효공(翼孝公) 심강(沈鋼)은 곧 충혜공의 소출로 7대 선조이다. 영의정 충정공(忠靖公) 심열(沈悅)은 5대 선조이다. 홍문관 교리 심희세(沈熙世)는 고조부인데, 청양군(靑陽君) 심의겸(沈義謙)의 손자로서 충정공의 후사가 되었다. 관찰사 심권(沈權)은 증조부이고, 의금부 도사 심봉서(沈鳳瑞)는 목사 심추(沈樞)의 아들로서 관찰사의 후사가 되었다. 아비는 첨정(僉正) 심호(沈浩)이고, 어미는 고령 박씨(高靈朴氏)인데, 아비는 군수 박빈(朴鑌)이고, 조부는 이조 판서 증 영의정 문효공(文孝公) 박장원(朴長遠)이고, 증조부는 직장(直長) 증 이조 판서 박훤(朴烜)이다.
을축년057)  에 관찰사가 가족을 거느리고 양근(楊根)에 있는 선영 아래에 가서 살았는데, 그해 8월 충정공의 무덤에서부터 거주하던 동리 밖에 이르기까지 밤마다 연달아 빛이 있어 십리 정도까지 뻗쳤으므로 동리가 대낮처럼 환히 밝아서 산 위의 새와 짐승을 모두 볼 수가 있었다. 그 다음날 어떤 중이 용문산(龍文山)에서 와서 말하기를, ‘이 곳에 날마다 연달아 서기(瑞氣)가 있으니, 어떤 이상한 일이 있을는지 모르겠다.’라고 하였었다. 이달부터 그 어미가 비로소 임신하여 문득 연달아 꿈을 꾸었는데, 달빛이 환하게 비추고 오색의 상서로운 구름이 현란하여 마치 비단과 같았고 또 여러 마리 봉황새가 쌍쌍이 하늘로 날아 올랐었다.
병인년058)   5월 21일에 이르러 회현동(會賢洞) 우사(寓舍)에서 탄생하였는데, 어려서부터 빼어나게 슬기롭고 의젓하고 유순하였으며 아직 첫돌을 지나기 전에 능히 말을 하였다. 비록 유희(游嬉)하는 일이라도 반드시 법도가 있었고 일찍이 섬돌 아래로 내려와 마당을 밟지 아니하였다. 겨우 3세에 조모 정씨(鄭氏)를 공양하는데 정성과 효도가 돈독하고 지극하여서 능히 어른[長者]의 기색을 살필 줄을 알았고, 뜻보다 먼저 받들어 모셨고, 기뻐하거나 노여워하는 것을 함부로 드러내지 아니하였고, 언어는 반드시 단정하고 조심스럽게 하였다. 모든 물건을 처음 보면 희귀한 것이 아니더라도 반드시 어른에게 먼저 바쳤고, 어른이 먹으라고 명하지 아니한 음식은 먹지 않았다. 매양 아침에 일어나면 반드시 부모가 계신 곳에서부터 증조모가 계신 곳과 조모가 계신 곳까지 문안한 다음에 비로소 물러났다. 5세 때에 관찰사가 여름철을 당하여 술에 취하여 자면서 그로 하여금 부채를 잡고 파리를 쫓게 하였더니, 명령을 따라서 오로지 부지런히 부쳐 저녁 때가 되도록 끝내 감히 그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그가 깨기를 기다렸으므로 관찰사가 매우 기특하게 여기고 사랑하여 항상 가인(家人)들에게 이것을 말하였다고 한다. 천성이 간소한 것을 좋아하여 남이 좋고 호화로운 옷을 입는 것을 보고 일찍이 흠선하거나 부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비록 호화롭고 아름다운 물건을 얻더라도 반드시 여러 아우들에게 모두 나누어주고 담담하게 물욕(物欲)에 대한 관심이 없었고, 구차스레 얻으려고 하는 마음도 없었다. 오로지 어버이를 사랑하고 친족에게 화목하게 하는 데에만 돈독하였었는데, 이것은 모두 타고난 것이요 억지로 꾸며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었다.
11세에 처음으로 간택(揀擇)에 참여하였다가 귀가한 뒤에 문득 비감한 말을 하고 손수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집안 여러 사람들에게 두루 먹였다. 두 번째 간택하던 때에 이르러서는 종일토록 눈물을 흘렸는데, 부모 곁을 길이 떠나는 것을 슬퍼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때 마침 본집을 피하여 떠나게 됨에 사묘(私廟)에 하직하지 못함을 더욱 한스럽게 여겨 부모에게 청하여 가서 하직하려 했으나 집안이 부정(不淨)하였기 때문에 끝내 그 소원대로 할 수가 없었다. 별궁(別宮)에 들어와 거처하게 되자 하루 종일 단정하게 앉아서 잠시라도 함부로 기대거나 나태한 모양을 짓지 아니하였고, 시녀들이 혹시 유관(遊觀)하기를 청하더라도 선선히 따르지 않았으며, 《소학(小學)》을 가져다가 책상 위에 두고 항상 애독하였다. 대례(大禮)하던 날에 이르러 복통이 갑자기 심하여 부모와 친족들이 모두 황급하여 어찌할 줄을 알지 못하였으나 문득 말하기를, ‘어찌 제 병 때문에 대례(大禮)를 그르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고, 드디어 힘써 스스로 견디면서 탈이 없이 행례(行禮)하였는데, 혼례가 파하자 복통의 증세가 다시 처음과 같이 아팠으나 이미 대내(大內)에 들어오자 문득 능히 스스로 힘써 예로 뵈어 위로 대전과 중궁 양전(兩殿)을 받들어 모심에 지극히 즐겁고 기뻐하는 모습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해이하지 않았다. 나를 섬기는 데에 반드시 공경하고 반드시 조심하였다. 불행히도 기이한 질병에 걸려 신사년059)  에 이르러 병이 위독했는데, 병이 조금 나아지자 매양 인현 왕후(仁顯王后)의 상사에 병 때문에 예를 다하지 못한 것을 매우 애통해 하였다. 갑오년060)  에 성상의 환후가 미령하여 상하가 초조하고 황급했을 적에는 빈(嬪)이 음식을 폐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밤낮으로 자기 몸으로 대신하기를 원했고, 작년 온천에 행차할 때에는 더욱 연모하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정성과 효도로 사람들을 감동시킨 것이 이와 같았으니, 아! 천도(天道)는 선한 자에게 복을 주는 것이므로 빈의 덕으로서는 반드시 오래 살아야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한 번 질병에 걸려 갑자기 사람의 세상을 하직하였으니, 어찌 도리가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는가? 이것이 내가 통곡하고 슬퍼하는 까닭이다."
하였다.

 

2월 25일 갑진

행 판중추부사 이이명(李頤命)이 차자(箚子)를 올려서 아뢰하기를,
"3월 초길(初吉)에는 해마다 황단(皇壇)에 일이 있습니다. 삼가 듣건대, 예관(禮官)이 바야흐로 세자께서 섭행(攝行)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의절(儀節)을 강(講)하고 있다 하는데, 저하께서 바야흐로 시탕(侍湯) 중에 계시고 문묘(文廟)의 제례도 이미 도로 정지하도록 결정하였습니다. 이 일도 마땅히 하루를 지내야 하는 것이므로 모두 거행하기가 어렵겠습니다. 또 황단(皇壇)에는 재실(齋室)이 없으니, 형세가 창덕궁(昌德宮) 안에서 치재(致齋)해야 마땅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상사(喪事)가 같은 궁궐 안에 있게 되어 청결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번 봄의 향사(享祀)는 우선 전례에 의하여 대신으로 하여금 섭행하게 하는 것이 사의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세자가 따랐다. 대개 대보단(大報壇)의 매년 봄철 향사에는 임금이 반드시 친행(親行)하였는데, 임금이 미령한 뒤부터는 대신을 보내어 거행하기 때문에 한 말이다. 세자가 청정(聽政)하게 되자 모든 여러 가지 제향(祭享)을 전부 세자에게 품지하였었다. 그러나 대보단의 향사가 장차 임박하였고 예관은 바야흐로 세자에게 섭행하는 의절을 강하고 있기 때문에 이이명이 차자를 올려 언급하였던 것이다.

 

장령(掌令) 한이원(韓以原)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우리 효종 대왕(孝宗大王)께서 천지가 무너지는 참변을 통분하게 여겨 《춘추(春秋)》의 대의(大義)를 주장할 적에 중대한 기밀에 대한 모유(謨猷)에 참여하여 밤낮으로 국사를 경영한 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 뿐이었습니다. 그 초구(貂裘)의 밀지(密旨)와 연석(筵席)에서의 독대(獨對)는, 비록 소열 황제(昭烈皇帝)가 제갈 공명(諸葛孔明)에게 하였던 것일지라도 이보다 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 소열 황제와 제갈 공명이 서로 잘 만났다는 것은 나라 사람들과 부로(父老)들 또한 모두 알고 있었으므로 천인(薦禋)061)  할 때 따라서 배향(配享)하였고, 후인(後人)들이 ‘군신(君臣)은 한 몸이므로 제사하기를 함께 한다.’라는 시구(詩句)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효종 대왕의 묘정(廟庭)에 아직도 송시열을 배향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대저 임금과 신하가 서로 잘 만났던 것이 이와 같이 성대하였는데, 오히려 효종의 묘정에 배향하지 못하고 있으니, 궐전(闕典) 가운데 큰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또 청하기를,
"공경을 다하고 예절을 다하여 권상하(權尙夏)를 돈독하게 초빙하여 빈사(賓師)로 삼고, 또 이희조(李喜朝)와 김창흡(金昌翕) 두 신하를 초치하여 보익(輔翼)으로 삼도록 하소서."
하고, 상서의 말미에 수령(守令)을 잘 고르지 못한 데 대한 폐단을 말하였는데, 세자가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도목정(都目政)062)  을 행하였다. 조관빈(趙觀彬)을 부교리로, 김유경(金有慶)을 교리로, 최창대(崔昌大)를 대사성으로, 황귀하(黃龜河)를 이조 정랑으로, 조명겸(趙鳴謙)을 사간으로, 홍석보(洪錫輔)를 교리로, 유척기(兪拓基)·김상윤(金相尹)을 부수찬으로, 김취로(金取魯)·조상경(趙尙絅)을 수찬으로 삼았다.

 

2월 26일 을사

경기·황해도·충청도 3도의 유생(儒生) 윤수준(尹壽俊) 등이 상서하여,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문정공 송준길(宋浚吉)·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를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송시열은 산하(山河)의 간기(間氣)063)  를 타고났고 천지(天地)의 순강(純剛)함을 지녔으며, 연원(淵源)의 정맥(正脈)은 멀리 고정(考亭)064)  에 접하였으므로 그 규모가 정대(正大)하여 광명한 경지를 수립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마치 청천백일(靑天白日)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모두 바라보고 태산(泰山)·교악(喬嶽)같이 사방이 모두 우러릅니다. 그는 평생 스스로 기약하여 말하기를 ‘차라리 성인(聖人)을 배우다가 그 경지에 이르지는 못할지언정 스스로 소성(小成)하는 데에 편안할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고, 천인(天人)의 성명(性命)의 오묘함과 경전(經傳)의 심오한 뜻을 거의 모두 함양하고 꿰뚫어서 이것을 체득하여 여러 가지 일에 반영하였기 때문에 그의 언론과 저술은 남보다 뛰어나고 적확(的確)하였습니다. 의리(義理)와 왕도(王道)·패도(霸道)의 구별에 있어 털끝만큼도 착오되는 것이 없었으며, 행장(行藏)과 진퇴(進退)에는 각각 사의에 알맞게 행하였고 이론과 실행을 함께 갖추었으므로 얼굴과 온 몸에 학덕(學德)이 넘쳐흐르기에 이르렀는데, 더욱 올바른 학문[正學]을 밝히고 이단(異端)을 배척하는 데에 엄하였습니다. 성조(聖祖)065)  를 만나서는 은밀히 대의(大義)를 도왔으니, 그가 주실(周室)을 높이고 이적(夷狄)을 배척한 공은 족히 천하 후세에 칭송받을 만합니다. 이분이야말로 정말 이른바 백세(百世)의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송준길은 자품이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마음속은 쇄락(洒落)하여 빙호(氷壺)·옥수(玉樹) 같고 화풍(和風)·경운(慶雲) 같았습니다. 스승의 말씀을 돈독하게 믿고 학문을 좋아하고 힘써 행하였으므로 행동과 언어에 있어 한결같이 법도를 존중하였으며, 지조를 굳게 지킨 근엄함은 ‘혼자 처해 있을 적에도 부끄러운 짓을 않는다’는 데에 부끄럽지 않았으며, 효도하고 우애하는 행실은 신명(神明)에 통할 만하였습니다. 평생 학업을 닦음에 있어 의리와 욕심의 구분, 선과 악의 분별에 더욱 뜻을 기울였으므로 일찍이 순(舜)임금처럼 착한 사람과 도척(盜跖)066)   같은 악한 무리를 논할 적에 전석(前席)에서 털끝만한 의리의 차이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의 기미(幾微)를 분석한 것이 더없이 정밀하였습니다. 위미 정일(危微精一)067)  의 학문을 가지고 정성스런 마음으로 임금에게 책임지우기를 마지않았으나, 선한 말을 아뢰고 어려운 일을 행하도록 권한 뜻이 아! 또한 지극하였습니다. 그리고 서연(書筵)에 출입하면서 동궁(東宮)을 보도(輔導)하였으므로 효종께서 일찍이 면대해서 유시하기를, ‘세자가 학문에 진력하는 것은 경의 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몸소 좨주(祭酒)의 직임을 맡아서 많은 선비를 인도하여 경전(經典)의 뜻을 설명하여 선비의 기풍을 크게 변화시켰습니다. 사변(事變)에 임하여는 의리로 결단하여 확연히 동요되지 않았으며, 권간(權奸)이 멋대로 방자하게 굴던 때를 당하여는 화복(禍福)이 목전에 있었으나 올바른 말로 막바로 배척하였는데, 그 뒤 증험하여 보면 모두가 명확하게 맞았습니다. 이것은 모두 평생의 학문에서 유출된 것이니 진실로 재주가 뛰어난 훌륭한 유사(儒士)요 석덕(碩德)이요 대현(大賢)이라고 이를 말합니다.
박세채는 천품(天稟)이 매우 훌륭하고 재덕(才德)이 완전히 갖추어져서 통명(通明)하고 쇄락(洒落)하고 충후스럽고 낙이(樂易)하고, 학덕이 얼굴과 온 몸에 넘쳐흐르고 의리에 통철하여 하자가 없었으므로 그를 바라보면 상서로운 구름이 일고 상서로운 해가 돋아나는 것 같았습니다. 약관(弱冠) 때부터 과거를 보기 위한 학업을 포기하고 용기 있게 사학(斯學)으로 귀의하여 생각을 정밀하게 깊이 연구하면서 진실을 알아 실천하였으므로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서도 학문의 큰 근본을 통찰하여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정자(程子)의 가르침인 ‘경(敬)’자를 공부하는 것을 제일의 뜻으로 삼아 이기(理氣)와 심성(心性)의 오묘함과 공사(公私)·의리(義利)의 구분과 왕도(王道)·패도(霸道), 성실·거짓의 구분과 고금의 상례(常禮)·변례(變禮)를 모두 원류를 따져 밝혔는데, 드러난 데에서 은미한 데로 이르게 했습니다. 예학(禮學)이 향방(向方)을 모르는 것을 민망히 여겨 《교법요지(敎法要旨)》를 저술하였고, 기성(箕聖)068)  이 남긴 학문이 인멸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범학전편(範學全編)》을 저술하였고, 동방의 도통(道統)이 혹시라도 문란해질까 염려하여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을 지었고, 후세의 사도(師道)가 크게 무너질까 걱정하여 《사도고증(師道考證)》을 지었고, 《심학지결(心學至訣)》과 《육례의집(六禮疑輯)》과 같은 책은 규모가 이미 방대하고 조목 또한 세밀하였으므로, 서산(西山)069)  의 《심경(心經)》과 주자(朱子)의 《통해(通解)》 같은 책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훌륭합니다. 그 밖에 《이서요해(二書要解)》·《가어외편(家語外編)》·《춘추보편(春秋補編)》·《성현유모(聖賢遺模)》·《연원속록(淵源續錄)》·《계치록(稽治錄)》·《논경요지(論敬要旨)》 등과 같은 책은 경전의 뜻을 드러내기도 하고 사문(斯文)을 옹호하기도 하고 학문하는 차례를 논하기도 하고 지치(至治)를 이루는 데에 중요한 일을 말하기도 하는 등 지난 자취를 잇고 앞길을 열어놓은 공적은 실로 우리 동방의 제유(諸儒)로서는 하지 못했던 점입니다. 임술년070)  에 한 번 나온 것이 실로 조정에 벼슬하게 된 시작이었는데, 하나의 수차(袖箚)071)  는 주실(周室)을 높이는 대의(大義)를 게시한 것이었습니다. 만년에 임금의 사랑을 받아 발탁되어 삼사(三事)072)  의 자리에 올랐는데, 개연히 세도(世道)를 만회하고 시국의 어려움을 구제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습니다. 조정의 여론이 두 가지로 갈라질 때를 당하여서도 성색(聲色)이 동요되지 않았고 앉아서 조정을 진정시켰는데, 거조가 사의에 맞았습니다. 그리하여 시비가 비로소 정하여졌고 그에 따라 선비의 추향이 의지할 데를 알게 되었으며 인심이 함닉(陷溺)되는 것을 면할 수 있었으니, 가히 백세(百世)의 공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언소(萬言疏)에 이르러서는 대강(大綱)과 세목(細目)이 잘 갖추어졌고 다스리는 방법이 상세히 구비되어 있었으며, 대고서(大誥書)에 이르러서는 무편무당(無偏無黨)하여 황극(皇極)이 다시 밝아졌으니, 또한 조치를 베푼 대략을 볼 수가 있는 것은 물론 진실로 성대(聖代)의 순후한 유자(儒者)입니다.
아아! 지금 이 세 현신(賢臣)의 언행과 사적을 보건대, 기미(氣味)와 지업(志業)이 서로 같아서 마치 송조(宋朝)의 정명도(程明道)·정이천(程伊川)·장횡거(張橫渠)가 동시대에 아울러 살면서 함께 사문(斯文)의 종주(宗主)가 되어 후학들이 존경하고 추앙한 것과 같으니, 어찌 앞뒤와 피차의 구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아울러 종묘에 배향하는 전례를 거행하여 같이 성무(聖廡)에서 조두(俎豆)를 흠향하게 하는 것은 백세(百世) 뒤에도 의혹되지 않을 것입니다. 지난번 호남(湖南) 지방의 많은 선비들이 와서 종사(從祀)하기를 청하였는데, 그때는 두 사람의 선정(先正)만을 거론하고 문순공(文純公)은 언급하지 않았으니, 어찌 북방의 유생[章甫]들이 주자를 존중하는 것이 남방의 유생들이 주자를 존중하는 것만 못했던 까닭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멀리 외방에 있는 유생(儒生)들이 자기가 사는 고을이 조금 외져서 친자(親炙)하는 훈도(薰陶)의 덕택을 받지 못해서 그런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였는데, 세자가 답하기를,
"세 현인(賢人)을 종사(從祀)하자는 청은 진실로 공의(公議)에서 나온 줄을 알겠다. 이러한 일은 사체가 중하니 준허(準許)할 수 없다."
하였다.

 

도목정(都目政)을 행하였다. 유복명(柳復明)을 지평(持平)으로, 성진령(成震齡)을 정언(正言)으로, 이집(李㙫)을 경상도 관찰사로, 한지(韓祉)를 충청도 관찰사로, 권변(權忭)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어유봉(魚有鳳)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2월 27일 병오

도목정(都目政)을 행하였다. 조관빈(趙觀彬)을 헌납(獻納)으로, 박필주(朴弼周)를 자의(諮議)로, 김운택(金雲澤)을 부교리(副校理)로, 오명항(吳命恒)을 강원도 관찰사로 삼고, 조도빈(趙道彬)을 특별히 발탁하여 형조 판서로 삼았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빈궁(嬪宮)의 상례에 관계되는 모든 절목은 을유년073)  의 《등록(謄錄)》에 의하여 거행합니다만, 지금은 을유년과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진향(進香)하는 한 가지 절목은 거행할 수 없다는 뜻으로 일찍이 이미 달하(達下)하였습니다. 그러나 실록(實錄)을 가져다가 상고하건대, 의정부·육조·충훈부(忠勳府)에서 모두 진향한다고 되어 있으니, 지금 상례에서도 이에 의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을유년에는 종친부(宗親府)에서도 진향하였으니, 일체로 똑같이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2월 28일 정미

경상도 각 고을의 백성들 가운데 바야흐로 여역(癘疫)을 앓고 있는 사람이 2천 4백 24명이고 사망한 사람이 2백 97명이었다. 충청도에서는 바야흐로 앓고 있는 사람이 2천 5백 28명이고 사망한 사람이 5백 95명이었다. 평안도에서는 바야흐로 앓고 있는 사람이 2만 5천 1백 60명이고, 황해도에서는 바야흐로 앓고 있는 사람이 3백 60명이었다. 전라도에서 바야흐로 앓고 있는 사람이 6백 50명이고 사망한 사람이 2백 40명이었다. 각기 도신(道臣)이 보고하였다.

 

2월 29일 무신

전라도 유생 이승운(李升運) 등이 상서(上書)하여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 등 두 신하를 종사(從祀)하자는 논의를 비방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작년에 김장생(金長生)을 문묘(文廟)에 배향하였으나, 이는 성문(聖門)의 더없는 치욕이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이번에 본도(本道)의 유생 정민하(鄭敏河) 등이 또 한 통의 상서를 올려 감히 죄를 받고 죽은 신하 송시열(宋時烈)과 고 판서 송준길(宋浚吉)을 아울러 성무(聖廡)에 종사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정민하 등이 감히 패륜스럽기 짝이 없는 말을 하여서 우리 이명(離明)074)  을 속였으니, 어찌 천지 귀신(天地鬼神)이 감림(監臨)하는 것을 이토록 두려워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아아! 생각하건대, 우리 효종 대왕(孝宗大王)께서 와신상담(臥薪嘗膽)하는 뜻이 밝기가 해와 별 같았는데, 송시열이 은밀히 성상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헤아려서 주실(周室)을 높이는 의리를 가탁(假托)하여 임금의 총애를 견고하게 하려는 계책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일찍이 한 가지 방책도 우러러 성모(聖謨)를 도운 적이 없었고 전석(前席)에서 독대(獨對)하게 되어서는 임금께서 비밀히 큰 계책을 자문하시니 도리어 오현(五賢)의 종사(從祀)에 정밀한 취사(取捨)를 할 것과 강빈(姜嬪)의 옥사(獄事)075)  와 김홍욱(金弘郁)이 원통하게 죽은 것076)   등의 말을 하여 동문서답(東問西答)을 함으로써 완전히 어진 신하에게 겸허하게 자문하려는 성상의 뜻을 저버렸습니다.
또 송시열은 일찍이 남한산성(南漢山城)에 포위되어 있던 중에는 항상 칼고 노끈을 가지고 다니면서 짐짓 반드시 죽을 각오를 한 것처럼 했습니다만, 성이 함락되는 지경에 이르자 구차스럽게 목숨을 도둑질하였습니다. 이에 동료들의 질책하는 글에 대하여 도리어 ‘청성(靑城)077)  에서는 죽는 것이 마땅하지만 남한산성에서는 죽는 것이 마땅치 않다.’는 말을 만들어 냈으니, 그가 허성(虛聲)으로 대갈(大喝)하여 한 세상을 철저히 속인 것이 이에서 남김없이 환히 드러났던 것입니다.
계축년078) 산릉(山陵)의 변079)  은 오로지 일을 맡아 보았던 여러 대신들의 죄인데도 송시열은 자기 당파를 보호하려는 데에 급급하여 김수흥(金壽興)에게 준 글에서 말하기를, ‘경자년080)  에 성상께서 산릉을 친심(親審)하실 때 개봉(改封)하지 아니하고 인하여 허물어져 틈이 난 곳을 보수하게 한 것은 진실로 성단(聖斷)에서 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금일에 이르러서는 곧 털끝만큼도 스스로 반성하는 말은 없고 오로지 여러 대신들만 탓하고 있으니, 임금과 신하가 의논할 즈음에 어찌 자가구(子家駒)가 소공(昭公)에게 대답한 뜻081)  에 의거 은밀히 규계(規戒)를 올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고, 또 말하기를, ‘경자년 이후 성상께서 전릉(展陵)하는 예를 폐하였으나 온천에는 해마다 행차한다.’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당초에 성상의 뜻은 홍제동(弘濟洞)이 멀기에 쓸 수 없다고 여겼다.’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이 말과 같다면 또 할 말이 있습니다. 〈효종의〉 영릉(寧陵)이 가까운 데 있는데도 전하께서 능을 전성(展省)하지 아니한다고 할 터인데, 이 말이 영릉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아아!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송시열도 선왕의 신하인데 어찌 차마 이런 따위의 말을 마음에 품고서 입으로 발설할 수가 있겠습니까?
또 송시열은 효종의 은혜를 받은 것이 천고에 매우 드문 일인데, 효종이 승하(昇遐)한 때를 당하여 인산(因山)이 지나기도 전에 갑자기 국문(國門)을 나서면서 이에 말하기를, ‘나는 영안(永安)의 조서(詔書)를 받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만사(輓詞)를 지으라는 어명을 받고서도 스스로 지으려고 아니하여 남을 시켜서 자기 대신 글를 짓게 하였으니, 조금도 충실하고 간절한 정성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글에다가 도리어 가필하여 자기가 지은 글로 만들어 자기를 과장하는 밑천으로 삼았으니, 또한 그 마음 쓰는 것이 무상(無狀)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을사년082)  에 올린 한 통의 상소는 인용한 것이 사리에 어긋났으니 그 진심은 은폐하기 어려운 것으로 천지 사이에 도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갑술년083)  에 다시 복직(復職)시킨 것은 허물을 용서하는 성상의 뜻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옳지 아니하다는 하교가 있었으니, 성상께서도 이때에 또한 어찌 통쾌하게 씻어버리고 그를 완전하게 용서한 것이겠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아비를 폐하도록 가르쳐 이륜(彛倫)을 퇴패시켜 끊어지게 하였고 자부(子婦)를 핍박하여 죽게 하여 골욕(骨肉)을 잔멸(殘滅)하게 하였으니, 사람의 도리가 이에 이르러 기강이 모두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바야흐로 그가 입조(入朝)하던 초기에는 겉으로 청의(淸議)를 가탁하여 임금의 친족을 힘써 배척하였는데, 이는 오로지 알력 다툼에서 나온 계책이었습니다만 중간에 실세(失勢)하게 되어서는 뼈에 사무치도록 실수를 징계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조정에 들어가게 되자 안면을 바꾸어 그들에게 투탁(投托)하여 힘을 합쳐 하나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비밀히 모의하고 은밀히 사찰하는 것을 참여하여 알지 못한 것이 없었습니다. 사람을 상해(傷害)하는 성품이 노년에 이를수록 더욱 심하여져 당쟁의 의논이 더욱더 치열하게 되었으니, 의리가 땅에 떨어지고 인심과 세도가 날로 쇠란한 지경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은 모두가 이 사람이 조장한 것이었으니, 홍수(洪水)와 맹수(猛獸)의 피해084)  인들 어찌 이처럼 심하였겠습니까?
그리고 송준길의 노둔함과 지리 멸렬함은 다만 송시열의 그림자로서 당인(黨人)의 숭배를 받았을 뿐입니다. 그는 논한 만한 학술도 없고 또 취할 만한 식견도 없음은 물론이고 일생 동안의 언행(言行)과 동정(動靜)은 한결같이 송시열이 하는 것을 보고서 그대로 따랐습니다. 무릇 논변할 때에는 송시열이 옳다고 하면 송준길도 옳다고 하였고 송시열이 그르다고 하면 송준길도 그르다고 하는 등 일찍이 자기의 견해를 한 번도 나타낸 적이 없었습니다. 만년에 이르러서야 스스로 송시열의 권자(圈子)085)  에 빠진 줄을 알고 나서는 조금 스스로 갈라서서 견해를 달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모두가 기관(機關)086)  이다.’라는 따위의 말로 은연중 비난을 가하였습니다만, 그래도 드러내 놓고 끊지는 못하였으니, 그가 주재(主宰)가 없었던 것을 이것으로서 알 수가 있습니다. 향사(鄕社)의 제향에서도 남우(濫竽)087)  라고 하였는데, 이번에는 아울러 묘정(廟庭)에 올리자고 청하였으니, 이 어찌 너무나 통탄스런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상서가 승정원에 이르자 승정원에서 소장의 내용에 멋대로 입을 놀려 무욕(誣辱)을 가하였고 문장의 조어(造語)가 흉패스럽다는 뜻으로 진달(陳達)하고 봉입(捧入)하니, 세자가 하령(下令)하기를,
"지금 이승운 등의 상서(上書)를 보건대, 먼저 문원공을 묘정에 올려 배향하자는 일을 문제로 제기하면서 성문(聖門)의 수치라고 말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미 더없이 통탄할 일이다. 그런데 또 정민하 등이 두 선정(先正)을 문묘(文廟)에 종사시키자고 청한 것으로 인하여 두 현신(賢臣)에게 무욕(誣辱)을 가함에 있어 말할 수 없는 비난을 퍼부어 패려스럽기 짝이 없다. 더구나 우리 성상께서 서원(書院)의 액자(額字)를 친히 쓰시고 교지(敎旨)를 특별히 내리신 것은 진실로 현인을 존경하고 사도를 지키려는 성대한 뜻에서 나온 조처인 것이다. 이런 음흉한 무리들을 귀양보내는 법전을 빨리 시행함으로써 선비들로 하여금 정도(正道)를 따르게 하고 사설(邪說)을 그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서두(書頭)088)  인 이승운은 극변(極邊)에 정배(定配)하라."
하였다. 이리하여 이승운 등을 경흥부(慶興府)에 유배시켰다.

 

2월 30일 기유

왕세자가 대신(大臣)들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상들을 인접(引接)하였다.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아뢰기를,
"함경도 감사 이탄(李坦)의 장본(狀本)에 ‘내시(內寺)089)  의 노비들에게 바치고 면천(免賤)하게 하여 그 곡식을 진제(賑濟)할 밑천에 보충하게 해 주소서.’ 하였으니, 그 청을 허락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강원도 감사 김상직(金相稷)의 장본에 ‘지금 진휼하는 정사가 바야흐로 확장되고 있으니, 잠시 울릉도(鬱陵島)를 연례로 수토(授討)하는 것을 정지시켜 주소서.’ 하였으니, 또한 허락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동래 부사(東萊府使) 조영복(趙榮福)의 장본에 통신사(通信使)를 시기에 맞추어 차출(差出)하라는 내용으로 호소하였으니, 마땅히 해조(該曹)에 분부하소서. 그리고 우선 접위관(接慰官)의 보고서를 기다렸다가 사신(使臣)을 차출하게 하소서."
하니, 세자가 모두 그대로 따랐다. 사간(司諫) 조명봉(趙鳴鳳)이 전에 계달한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장령(掌令) 한이원(韓以原)이 전에 계달한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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