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61권, 숙종 44년 1718년 3월

싸라리리 2025. 11. 30.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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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경술

혼궁 도감(魂宮都監)에서 빈궁(嬪宮)의 발인(發靷) 때문에 주정소(晝停所)를 설치할 것을 품주(稟奏)하니, 임금이 설치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이는 도리(道里)가 멀지 않기 때문이었다.

 

3월 2일 신해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가 아뢰기를,
"지난번 좌의정 권상하(權尙夏)의 상서(上書)로 인하여 주자(朱子)의 주차(奏箚)를 계속해서 강하도록 정탈(定奪)하였습니다. 옥당(玉堂)에 《주문초선(朱文抄選)》 2책이 있는데 이는 곧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이 힘을 다해 뽑아서 바친 글입니다. 지금 이 책을 가져다가 간인(刊印)하여 서연(書筵)의 진강(進講)에 대비하게 하는 것이 합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좋다고 하였다."

 

3월 3일 임자

예조에서 아뢰기를,
"실록(實錄)에 빈궁(嬪宮)의 노제(路祭)에 대한 의절(儀節)에 독축(讀祝)한 뒤 재배(再拜)만 하고 곡림(哭臨)하는 절목은 없습니다. 이미 제사를 설치하고서 전혀 곡림하지 않으면 미안할 것 같습니다. 청컨대 《오례의(五禮儀)》에 의하여 곡림하는 하나의 절목을 의주(儀註)에 첨가하여 넣도록 하소서."
하니, 세자가 좋다고 하였다.

 

3월 5일 갑인

이조(李肇)를 강원도 관찰사로 삼았다.

 

3월 6일 을묘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나의 병이 오래 묵어서 고질이 되어 이번 세자빈(世子嬪)의 초상의 염(斂)·빈(殯)에 친히 참석할 수가 없으므로 더욱 마음이 안타깝다. 이제 이어(移御)하기 전에 병든 몸을 부축하여 빈궁(殯宮)에 가서 거애(擧哀)해야겠는데, 계빈(啓殯)하기 전에 또 1차 곡림하지 않을 수 없다. 세자는 배필을 중하게 여기는 의리에 있어 발인(發靷)하고 반우(返虞)하는 날 빈궁(殯宮)과 혼궁(魂宮)에 진실로 친히 가는 것이 마땅하다. 이런 내용으로 해조(該曹)에 분부하도록 하라."
하니, 승정원과 약방(藥房)에서 병을 조심하여야 한다는 경계를 아뢰고 곡림한다는 명령을 그만두도록 청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3월 8일 정사

정언(正言) 정택하(鄭宅河)가 상서하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과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은 모두 문원공(文元公)의 적전(嫡傳)090)  으로서 함께 성조(聖祖)의 예우(禮遇)를 받았으므로, 살아서는 일세(一世)의 모범이 되었고 죽어서는 백대(百代)의 종사(宗師)가 되었습니다. 지난번 많은 선비들이 묘정에 종사(從祀)하자고 청한 것에서 오늘날 공의(公議)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저하(邸下)께서 즉시 준허(準許)하지 않는 것은 비록 신중하게 처리하는 방도에서 나온 것입니다만 사지(辭旨)가 지극히 융숭하였으니, 두 선정신(先正臣)의 도덕(道德)의 성대함을 안 것이 또한 깊고 절실하다고 이를 만합니다. 일전에 유생(儒生) 윤수준(尹壽俊)의 소장에서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를 추후 거론하여 아울러 청하였는데, 신은 이에 대해 개연한 마음이 없을 수 없습니다. 돌아보건대 박세채도 일세의 이름난 유자로서 오래도록 사림(士林)의 존경과 추모를 받았습니다. 따라서 선배들의 도덕의 고하와 학문이 깊이에 대해 신 같은 후생(後生)으로서는 진실로 감히 엿보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만, 묘정에 종사(從祀)시키는 전례는 지극히 중차대한 것입니다. 지금 두 현신(賢臣)을 종사시키자는 청은 사론(士論)이 이미 발단되었으나 아직도 세자의 준허를 받지 못하였는데, 윤수준의 무리가 선현을 존중할 줄만 알았을 뿐 사체가 지극히 엄하다는 것을 생각지 않고 갑자기 큰 논의가 정지된 뒤에 추후 발의하여 혼란스럽게 아울러 거론함으로써 사람들의 의혹을 야기시켰으니, 어찌 매우 미안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영관(瀛館)091)  의 관직은 본래 청선(淸選)이라고 일컫는데, 김취로(金取魯)는 성질과 행동이 추잡하고 더러웠는데도 이에 참여되었으므로 물정(物情)이 흡족하지 못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어찌 문벌이 빛나고 훌륭하다 하여 이런 사실을 돌아볼 겨를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소장에서 윤수준의 일을 논한 것은 의견이 없지 않다. 그러나 김취로가 영관의 관직에 선임된 것이 합당치 않다는 말은 결단코 그것이 과당(過當)함을 알겠다."
하였다. 정택하가 드디어 인피(引避)하였다. 사간(司諫) 조명겸(趙鳴謙)이 처치(處置)하기를,
"당초 영관의 관직을 선임할 때에 이미 첨의(僉議)에 따른 것이니, 비난하고 배척하는 것은 매우 타당하지 못합니다. 청컨대 정택하를 체차시키소서."
하니, 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이조 판서 송상기(宋相琦)가 면직되었다. 송상기는 전형(銓衡)의 자리에 오랫동안 있었다는 것으로 힘써 사양하고 관직에 나오지 않았다. 이때 빈궁(殯宮)의 시호(諡號)를 개정(改定)하게 되었으므로 관각(館閣)의 당상관들이 으레 마땅히 진참(進參)하여야 했으나, 송상기는 문형(文衡)의 관직을 띠고서도 하루 중에 세 번씩이나 임금의 소명(召命)을 어겼다. 임금은 그의 의도가 반드시 전형의 자리에서 체면(遞免)시켜 달라는 데 있으므로 달리 변통할 길이 없을 수 없다고 여겨 특별히 명하여 체면시킬 것을 허락하였다.

 

대신(大臣)과 관각(館閣)의 여러 신하들이 빈청(賓廳)에 모여 다시 빈궁(殯宮)의 시호를 의논하여 단의(端懿)·장순(莊順)·소정(昭定)을 결정하여 삼망(三望)으로 의망(擬望)하여 올리니, 임금이 명하여 ‘단의’라는 두 글자를 쓰도록 하였다. 처음에 빈궁의 시호를 이미 온의(溫懿)라고 정하였었는데, 그후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차자(箚子)를 올려 아뢰기를,
"‘온(溫)’자는 빈궁의 선휘(先諱)를 범하였으니, 마땅히 개정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여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였다. 판부사(判府事) 이유(李濡)·이이명(李頤命), 우의정 조태채(趙泰采)가 의논하고 나서 모두 아뢰기를,
"신리(神理)에 있어 미안한 점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명하여 고치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두 글자를 다시 정하였는데, 이는 덕성이 너그럽고 온화하고 거룩하고 착하다는 글을 취한 것이다.

 

3월 9일 무오

임금이 명하여 윤선거(尹宣擧)의 서원(書院)을 철거하도록 하였다. 작년에 사학(四學)의 유생인 심봉위(沈鳳威) 등이 상소하여 윤선거를 향사(享祀)하는 서원을 철훼하자고 청하였는데, 소장이 해조(該曹)에 내린 지 이미 오래였으나 사람들이 많이들 핑계를 대면서 결정을 내리지 않고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판서 정호(鄭澔)가 처음으로 복주(覆奏)하기를,
"청컨대 독향(獨享)된 곳은 그 서원을 철거시키고 배향(配享)된 곳은 단지 위판(位版)만을 철거하도록 하소서."
하니, 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숙빈 최씨(淑嬪崔氏)가 졸(卒)하였다. 임금이 예장(禮葬)092)   등의 일을 예에 의하여 거행하게 하였다. 관판(棺板)을 수송하게 하고 또 제수(祭需)를 넉넉히 보내도록 명하였다.

 

3월 11일 경신

태학(太學)의 재생(齋生)들이 권당(捲堂)093)  하였다. 대개 태학에서는 언제나 대정(大政) 때를 당하면 반드시 재생 중에 관직의 제수를 감당할 만한 자를 택하여 ‘공천(公薦)’이라고 일컬어 이조에 보내면 이조에서는 즉시 이를 채용하였었다. 그러나 근년 이래 공천된 사람은 거개가 향곡(鄕曲)의 비루하고 미천한 사람들로 재임(齋任)094)  에게 부탁하고 이로 인연하여 참여하게 되었으므로, 이미 공천의 본의가 아님은 말할 것도 없고 그저 조급하게 다투면서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습속을 조장하기에만 족하였다. 이 때문에 선부(選部)에서 혹 그 법을 폐하고 쓰지 않기도 했다. 이때에 이르러 판서 송상기도 태학에서 보내온 공천인을 등용하지 않았는데, 재생 등이 ‘현관(賢關)095)  을 경멸한다.’고 일컫고 식당(食堂)에 들어가지 않았다. 임금이 본관 당상(本館堂上)을 보내어 며칠 동안 권유하니, 재생들이 그제서야 도로 들어가서 수재(守齋)하였다.

 

3월 13일 임술

심택현(沈宅賢)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이때 판서 송상기(宋相琦)가 이미 교체되었고 대정(大政)을 시작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참의 이병상(李秉常)이 여러 번 소패(召牌)를 어겼으므로 거행할 수가 없었다. 임금이 교체하라고 명하고 대신들에게 하문하여 정택현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청대(請對)하여 임금에게 아뢰기를,
"전정(田政)의 문란이 근래보다 더 심한 적이 없었습니다. 처음에 감사를 균전사(均田使)로 삼고 도사(都事)를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았던 것은 외방의 폐단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번번이 모두 핑계를 대고 미루면서 거행할 뜻이 없었으므로 일이 매우 미안스럽게 되었습니다. 지금 중신(重臣)을 특별히 양전구관 당상관(量田勾管堂上官)과 종사관으로 차임하여 감사와 더불어 상의하여 거행하도록 하고서, 때때로 종사관을 보내어 자주 경칙시킨다면 신중을 기하여 거행하게 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김창집이 또 아뢰기를,
"근래 도둑이 발생하는 변환이 없는 곳이 없는데 영남 지방이 더욱 심합니다. 이러한 때에는 영장(營將)을 진실로 각별히 선임하여 보내야 하는데, 안동 영장(安東營將) 백한상(白漢相)은 노쇠하고 혼미한 사람으로 도적을 다스리는 데 완만하니, 즉시 개차(改差)하고 일찍이 곤수(閫帥)의 직임을 거치고 명망이 있는 자를 임명하여 보내소서. 이후에도 각도의 영장(營將)에 결원이 나면 또한 병조에 신칙하여 모두 가려서 임명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좋다고 하였다.

 

3월 14일 계해

정언(正言) 성진령(成震齡)이 논하기를,
"정택하(鄭宅河)가 함부로 영관(瀛館) 선임의 잘못을 논하여 시끄럽게 하는 단서를 야기시켰습니다. 따라서 신진(新進)으로서 경솔하다는 질책을 면하기가 어렵지만 진실로 마음속에 품은 의견이 있으면 반드시 숨김없이 모두 아뢴다는 측면으로 보면 자신들의 책임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해도 되겠습니다. 본원(本院)에서 처치(處置)할 즈음에 갑자기 낙과(落科)에다 두어 과감히 말하는 기풍을 꺾어 눌렀으니, 선비들의 나약한 습성이 조장된 것이 반드시 이에서 비롯되지 않았다고 기필할 수 없을 것입니다. 관계된 바가 적지 아니하니, 사간(司諫) 조명겸(趙鳴謙)을 체차시키소서. 형조 참의 이상성(李相成)은 본래 용렬하고 비루한 무리로서 일찍이 헌관(憲官)에 있을 적에도 이미 많이 비난을 받았는데, 본직(本職)에 제수(除授)되어서는 오로지 사정(私情)에 따를 것만을 생각하였으므로 뇌물이 공공연히 행하여져 원망과 비난이 잇따랐으니,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였으나, 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유집일(兪集一)을 묘소 도감(墓所都監)의 당상으로 삼았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평안도 감사(平安道監司) 김유(金楺)가 관할하에 있는 성천 별장(成川別將)을 시켜서 공청(空靑)을 동(銅)을 채굴할 때에 구하게 하였는데, 정말로 1매(枚)를 얻어서 올려보냈으므로 약방에서 이를 쪼개어 장즙(漿汁)을 얻었었다. 이리하여 약방에서 입진(入診)하기를 청하였고 시험삼아 안부(眼部)에 몇 방울을 넣었다.

 

정호(鄭澔)를 이조 판서로, 이기익(李箕翊)·이병상(李秉常)을 승지로, 송상기(宋相琦)를 예조 판서로, 남도규(南道揆)를 대사간으로, 어유룡(魚有龍)을 정언(正言)으로, 조영세(趙榮世)를 지평(持平)으로, 조상경(趙尙絅)을 교리(校理)로 삼았다.

 

3월 15일 갑자

간원(諫院)에서 전에 계달한 것을 다시 아뢰니, 세자가 답하기를,
"무릇 처치(處置)란 논한 바의 시비(是非)를 살펴 입락(立落)을 결정하는 것으로, 대간의 사체가 그러한 것이다. 이번에 정택하(鄭宅河)가 영관(瀛館)의 선임에 대해 논하였을 때에 그것이 합당한 점을 보지 못하였다면 이를 낙과(落科)에다 두더라도 불가할 것이 뭐 있겠는가? 이상성(李相成)을 파직시키자고 청한 논의에 이르러서는 용렬하고 비루하다고도 하고 비루한 사람이라고도 하였으니, 남을 공평하게 대하는 도리가 과연 이와 같은가! 너무나 미안한 점이 있다."
하였다. 정언(正言) 성진령(成震齡)이 인피(引避)하고 물러가 대죄하니, 지평(持平) 유복명(柳復明)이 출사(出仕)하게 하라고 처치(處置)하였다.

 

3월 16일 을축

예장 도감(禮葬都監)에서 아뢰기를,
"신사년096)   지석(誌石) 위 겉면의 중앙에 쌍행(雙行)으로 ‘유명조선국 인현왕후 명릉지석(有明朝鮮國仁顯王后明陵誌石)’이라는 열 세 글자를 크게 써서 새겼었으니, 지금도 마땅히 ‘유명조선국 단의빈 묘지석(有明朝鮮國端懿嬪墓誌石)’이라는 열 한 글자를 새기도록 하소서."
하니, 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3월 17일 병인

간원(諫院)에서 전에 계달한 것을 다시 아뢰니, 다만 이상성(李相成)을 개차(改差)할 것만을 허락하였다.

 

예조 참판 오명준(吳命峻)이 상서(上書)하여 윤선거(尹宣擧)의 서원(書院)을 철거하는 일을 정지할 것을 청하였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지난해 철거하자고 청한 상소를 성상께서 마음속으로 직접 결단할 수가 없어 해조에 명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셨는데, 여기에서 의심스럽고 어렵게 여겨 신중히 처리하려고 일체 공의(公議)에 붙이는 거룩한 뜻을 알 수 있습니다. 그뒤 여러 예관(禮官)을 거쳤지만 아직도 복주(覆奏)하는 자가 있지 않았는데, 일전에 정호(鄭澔)가 입조(入朝)하여 갑자기 회달(回達)하여 마침내 철거하기에 이르렀으니, 아아! 또한 너무나 심합니다. 정호가 윤선거의 집에 대하여 사적인 원수처럼 질투하고 사적인 분노가 있는 것 같은 정상은 성명(聖明)께서 통촉하시는 바이요 온 세상이 함께 아는 바인데, 저하(邸下)의 명철(明哲)하심으로 어찌 유독 그 정상을 통족하시지 못하십니까? 마땅히 성상께서 유학(儒學)을 숭상하고 사문(斯文)을 높이는 때를 당하여 저하께서 갑자기 이처럼 3백 년동안 없던 일을 행하여 오래도록 배향하던 위판(位版)을 철거하고 가죽띠를 띠고 글을 읽은 유생들을 쫓아내었으니, 사림(士林)의 기백을 저상사키고 후래(後來)의 비웃음을 초래하는 것이 어찌 적겠습니까?"
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해조(該曹)에서의 복달(覆達)이 진실로 매우 합당하였다. 그런데도 급급하게 상서하는 것은 진실로 해괴하도다."
하였다.

 

동지 정사(冬至正使) 유명웅(兪命雄) 등의 일행이 연경(燕京)을 출발하여 산해관(山海關)에 이르러서, 선래 역관(先來譯官)097)  을 보내어 서울에 이르렀는데, 정장(呈狀)하기를,
"신 등이 북경(北京)에 이르기 전에 황태후(皇太后)의 상사를 들었는데 그곳에 이른 후에도 별로 변복(變服)하는 예절이 없었습니다. 예부에서 통관(通官)을 시켜 말을 전하고 또 작은 종이로 의절(儀節)을 써서 보였는데, 입성(入城)할 때와 상사(賞賜)를 받을 때에는 공복(公服)을 착용하지 말고 다만 흑립(黑笠)에 청포(靑袍)를 착용하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표문(表文)과 자문(咨文)을 바치는 데 이르러서는 사체(事體)가 자별한 것이기 때문에 신 등이 여러 차례 굳게 고집하여 흉배(胷褙)만 제거하고 공복(公服) 차림으로 행례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조일(正朝日)에는 조참(朝參)을 행하지 않았고 상마연(上馬宴)과 하마연(下馬宴)도 설행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3월 18일 정묘

예조에서, 빈궁(嬪宮)의 봉구(捧柩)·식구(拭柩)와 옥백(玉帛)을 바치는 직임은 참작하여 강쇄(降殺)해야 마땅할 것 같으나 의거할 만한 전례가 없다는 것을 품주(稟奏)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대조(大朝)께 품주하니, ‘식재실관(拭榟室官)과 고계빈관(告啓殯官)은 겸행(兼行)시키게 하고, 봉구관(捧柩官)은 예장 도감(禮葬都監)의 당상관(堂上官) 중에서 한 사람을 임명하고, 진옥백관(進玉帛官)은 묘소 도감(墓所都監)의 당상관 중에서 한 사람을 임명하라.’고 하교(下敎)하였다. 이에 의하여 거행하라."
하였다. 후일 예장 도감에서 아뢰기를,
"실록(實錄)과 등본(謄本)을 가져다가 상고하니, 고계빈관(告啓殯官)은 공조 참판이라고 썼고 봉구관은 호조 참판이라고 썼으며, 식재실관(拭榟室官)은 봉구관이 겸한다고 썼고 옥백을 바치는 일은 상주(喪主)가 한다고 하였습니다. 또 을유년098)  의 《등록(謄錄)》을 상고하니, 사시(賜諡)와 계빈(啓殯)에서 하현실(下玄室)에 이르기까지의 행례(行禮)는 모두 찬성(贊成)이 한다고 되어 있으며, 또 찬성이 유고(有故)하면 참찬(參贊)이 행한다고 주석을 달았습니다. 을유년의 등록이 이미 실록이나 등본과 서로 차이가 있습니다. 이번에 예조에서 정탈(定奪)한 것도 실록이나 을유년 등록과는 같지 아니합니다."
하니, 세자가 명령하여 을유년의 예를 채용하도록 하였다.

 

조도빈(趙道彬)을 대사헌으로, 김상옥(金相玉)을 수찬(修撰)으로, 신임(申銋)을 우참찬(右參贊)으로, 민진원(閔鎭遠)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3월 19일 무진

세자가 하령(下令)하기를,
"지난해에는 지독한 여역(癘疫)으로 백성들 가운데 사망한 자가 많았는데 봄철에 들어와서 다시 치열해지고 있어 언제 그칠는지를 기약할 수가 없으니, 놀랍고 참담스러운 일로 무엇이 이보다 더 심하겠는가! 그 중에서도 가장 심한 곳에는 여제(癘祭)를 설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3월 23일 임신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침을 맞기를 끝마치자, 도제조 이이명(李頤命)은 빈궁(殯宮)에 곡림(哭臨)하는 일을 중지할 것을 청하였고 제조 민진후(閔鎭厚)도 계속하여 극력 아뢰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민진후가 또 아뢰기를,
"지난번 수상(首相)이 영남 지방의 도적을 걱정하여 영장(營將)을 체차시킬 것을 청하였습니다만, 병조 판서 최석항(崔錫恒)이 어미의 병이 매우 위중하기 때문에 차출(差出)할 수가 없습니다. 충청도 병사(忠淸道兵使)도 결원이 났지만 또한 대임을 내지 못하고 있으니, 매우 변통(變通)시킨다는 본의가 없는 처사입니다."
하니, 임금이 차관(次官)에게 명하여 판서에게 문의하여 차출하게 하였다.

 

3월 24일 계유

약방(藥房)에서 입진하였다. 우의정 조태채(趙泰采)가 같이 들어왔는데, 임금이 침을 맞기를 끝마치자 조태채가 아뢰기를,
"지난번 예조에서 회달(回達)한 것으로 인하여 윤선거(尹宣擧)의 서원을 철폐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만, 조정에서 그 문집(文集)의 판본(板本)을 이미 없애버렸고 관작도 추탈(追奪)하였으니, 징벌하는 방도가 지극하다고 이를 말합니다. 서원이라는 것은 선비들이 사사로이 스스로 영건(營建)한 것이므로 조정에서 알 바가 아닌 것인데, 이번 일은 진실로 너무 심한 것이고 또 뒷폐단도 있게 됩니다. 지금은 그 은액(恩額)을 철거하고 관에서 제향(祭享)하던 것을 혁파할 뿐이면 이것으로서도 사의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영상(領相)이 이러한 의논을 가지고 우러러 청하려고 차자(箚子)를 갖추기에 이르렀으나 아직 실지로 올리지는 못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따랐다. 임금이 이어 하문하기를,
"강봉서(姜鳳瑞)  【즉 강석기(姜碩期)의 증손이다.】 가 격쟁(擊錚)하였으나 아직껏 복계(覆啓)하지 않고 있는데, 경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도제조 이이명(李頤命)이 아뢰기를,
"그때에 역적 김자점(金自點)이 그 옥사를 주관하여 다스렸는데, 참혹하고 지독한 형벌을 갖춰 시행하였습니다. 강석기의 아내는 일흔 살의 노부인으로 곤장 아래에서 그 고통을 참지 못하여 머리를 땅에다 짓찧다가 드디어 자복을 하였는데, 끝내 정형(正刑)을 받기에 이르렀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그가 원통하고 억울하다고 일컬었습니다. 그러나 사건이 중대한 데에 관계되니, 아래에서 어떻게 감히 신원(伸冤)시키자고 곧바로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조태채가 아뢰기를,
"듣건대 옥사를 다스릴 때에 하지 않는 고문이 없었기 때문에 연로한 부인이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였고, 또한 명백하게 자복한 일도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원통하게 여겼습니다. 또 강석기는 이미 복관(復官)이 되었으니, 남편의 직함을 따르는 뜻에 있어서도 마땅히 복작(復爵)시키는 도리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강석기의 아내가 국문(鞫問)을 받고 정형(正刑)에 처해졌으니, 비록 남편의 관직이 회복되었다고 하더라도 남편을 따라 복작시키는 의리는 없는 것 같다."
하였다. 제조 민진후가 아뢰기를,
"이런 경우에는 원래 남편의 관직을 따르는 의리는 없습니다만, 지난날 권상유(權尙游)가 금오(金吾)099)   당상관의 관직을 띠고 있을 때 회계(回啓)하지 않는 사유를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비록 원통하고 억울한 것은 알지만 사건이 국옥(鞫獄)에 관계되고 또 자복을 받은 문안(文案)이 있으니, 아래에서 신원시키기를 곧바로 청하는 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이이명은 아뢰기를,
"강서인(姜庶人)100)  의 일은 효종조(孝宗朝)에서 처분하신 것이 이미 지엄하였습니다만, 강석기의 처에 이르러서는 비록 천한 하인(下人)들까지도 그 원통함을 송변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는 창졸간에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금부(禁府)로 하여금 여러 대신들에게 문의하게 하여 처리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 사건은 복주(覆奏)하는 것을 보아가면서 처리하고 싶다. 대신이 아뢴 것이 진실로 좋다. 여러 대신들에게 문의하여 품처(稟處)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조태채가 또 아뢰기를,
"동래 부사(東萊府使) 조영복(趙榮福)이 정장하기를, ‘인삼을 무역하기를 요구하는 차외(差倭)가 서계(書契)에 대해 허락하는 회답이 없다고 하면서 가지 않고 왜관(倭館)에 머물러 있습니다. 비국(備局)에서 회답한 관문(關文)에 따라 훈도(訓導)들로 하여금 엄하게 책망하고 타일렀더니, 그 차왜가 부끄러워하고 굴복하면서,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게 죽고만 싶다.」는 말이 있기에 이르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서계를 가지고 왔으니 멀리서 온 사람을 무유(撫綏)하는 도리에 있어 우선 회답하여 보내는 것을 허락하여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인삼은 봉하여 둔 지가 이미 오래어서 흠축(欠縮)이 많다고 하니, 호조로 하여금 다시 보내게 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고, 민진후는 아뢰기를,
"무릇 왜인이 무역을 요구할 즈음에 일찍이 서계를 가지고 온 자가 없었는데, 이번에는 관백(關白)의 병 때문이라고 핑계하면서 전에 없던 법규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러나 외방의 의논은 ‘보통 때에 무역을 요구하는 것과 비교할 수가 없으니, 특별히 서계를 주어도 혹 관대히 한다는 체모에 있어 해롭지는 않을 것입니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3년 동안 왜관에 머물면서 지체하고 돌아가지 않으니 그 습성이 진실로 간악스럽다. 그러나 병 때문에 약으로 구하는 것은 다른 경우와 차이가 있으니 회답하는 서계를 보내고, 인삼도 개색(改色)101)  하여 보내게 하라."
하였다. 조태채가 또 아뢰기를,
"제주(濟州)의 진상(進上)은 조정에서 흉년으로 인하여 특별히 그 3분의 2를 감하게 하였는데, 물종(物種)의 가격이 내노비(內奴婢)의 공목(貢木)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예조의 별단(別單) 가운데에서는 내사(內司)의 노비를 거론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해사(該司)에서 평년의 전례에 의거 징납하였으므로, 저들이 이 때문에 원통하다고 일컬으면서 비국(備局)에 정소(呈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3분의 2를 감하게 하였다.

 

3월 25일 갑술

유성(流星)이 진성(軫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다.

 

헌부(憲府)에서 아뢰기를,
"지난번 이어(移御)하는 거둥이 있을 적에 어보(御寶)를 싣고 가던 말이 넘어져 막중한 보갑(寶匣)을 손상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 어보를 실은 말의 마부[牽手]는 으레 태복시(太僕寺)의 거달(巨達)들을 【거달이라는 것은 태복시의 마부를 이르는 말이다.】  정하여 세우는데, 공공연히 그 역(役)을 면하기를 도모하여서 본시(本寺)의 공물인(貢物人)의 말과 사람으로 대신시키기 때문에 말이 넘어져 쓸어지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해당 내승(內乘)은 파직하는 것으로만 그칠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잡아다가 문초하고 죄를 정하게 하고 역을 회피하기를 도모한 거달과 대신 들어간 마부도 아울러 구금하고 죄를 주도록 명하소서. 나라의 큰 일은 제사(祭祀)에 있는데, 제향하는 물품을 태상시(太常寺)에서 봉치(捧置)하는 법규가 없으므로 제사에 임하여 갑자기 공물 주인(貢物主人)에게 책임지우므로 급한 때 임하여 봉진(封進)하다 보니 외람되고 설만한 일이 많습니다. 이제부터는 본시에서 미리 날짜를 정하여 봉치(封置)해 두었다가 기일에 이르러 제때에 진배(進排)하게 하소서. 대궐에 사람들이 함부로 들어오는 폐단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습니다. 대소 관원들의 근수(跟隨)102)  는 전부터 법례(法例)가 정해져 있는데도 지금은 한 사람의 관원이 출입하는 데 대동하는 겸종(傔從)103)  이 6, 7명이나 되어 조반(朝班)에서 기거할 때에는 마치 붐비는 저자와 같으니, 특별히 신칙하여 한결같이 정한 법식대로 따르게 하소서. 만약 금법을 범하는 자가 있으면 전례에 의하여 죄를 주소서.
작년에 추천된 이덕붕(李德朋)과 김시좌(金時佐)는 이미 아무런 명망이 없고 또 학식도 부족한데도 갑자기 천장(薦章)에 올랐으니,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청컨대 천장에서 삭제하소서.
천거된 자 중에서 좌윤 이우항(李宇恒)은 3년 동안 오래도록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서 한결같이 태만하였으며, 정사를 청리할 적에도 혼매(昏昧)하여 잘못한 것이 또한 많았으니, 청컨대 파직시키소서.
안동 부사(安東府使) 유중모(柳重茂)는 아무런 재능도 없어 직임을 감당할 수가 없으므로 긴급하고 번다한 사무를 한결같이 지체시키고 있으니, 청컨대 파직시키소서.
공주(公州)는 영하(營下)의 큰 고을로 가장 다스리기가 어렵다고 일컬어졌는데, 새로운 목사(牧使) 이만선(李萬選)이 여러 번 주목(州牧)을 맡았었으나 치적(治績)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기부(圻府)에 재임하였을 적에는 관속(官屬)들이 다 흩어졌었으니, 청컨대 개차(改差)하소서.
종부시 정(宗簿寺正) 박행의(朴行義)는 일찍이 봉명 사신(奉命使臣)으로 갔을 때에 해괴한 행동과 비루한 잗단 짓을 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근래에 또 자기의 사채(私債)를 징수하기 위하여 자기 마음대로 사람을 구속하였으며 낭사(廊舍)의 이웃에다 하나의 영어(囹圄)를 지었는데, 가까운 근방에 사는 소민(小民)들이 지탱하여 감당하기가 어려운 형편이니, 청컨대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마소서.
양국(兩國)이 교제(交際)하는 일은 사체가 지극히 중한데, 일전에 재판 차왜(裁判差倭)가 동래 부사(東萊府使)와 상견(相見)할 때에 갑자기 분노를 터뜨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앞으로 나가서 맞삿대질한 것은 비상한 짓으로 우리 나라를 가볍게 여겨 모욕한 것이 심하였습니다. 훈도(訓導)와 별차(別差)가 잘 주선하여 조정시키지 못해서 이와 같이 해괴한 일이 있기에 이르렀으니, 청컨대 해당 훈도와 별차를 잡아다가 문초하고 죄를 정하소서.
강릉 부사(江陵府使) 박희진(朴熙晉)은 전후 관직에 있을 적에 명성과 치적이 모두 부족했는데, 웅부(雄府)에 재임하게 되어서는 정무를 돌보지 않는 것이 많아 아전[吏綠]들이 농간을 부리므로 백성들의 원망이 크게 일고 있으니, 청컨대 파직시키소서. 전부(典簿) 박종양(朴宗陽)은 본래 한미한 출신이고 또 명망도 부족한데, 일찍이 부관(部官)을 거쳐서 갑자기 이 직임에 올랐으니, 청컨대 개차하소서.
의주(義州)에서 호소한 사람인 주익환(朱益桓)을 효시(梟示)하자는 청을 바야흐로 간원에서 계달하였습니다. 생각건대 이 일은 실로 전고(前古)에 듣지 못하던 큰 변고(變故)로 해괴하게도 허물을 조정에 돌리면서 은혜를 바라 나라를 팔았으니, 이름이 연장(聯狀)에 오른 자는 모두 복주(伏誅)하는 것이 가합니다. 그런데 이제 간원(諫院)에서는 다만 장두(狀頭)104)  만을 효시(梟示) 하자고 청할 뿐이었으니, 이는 오히려 지나치게 관대한 데서 나온 조처입니다. 청컨대 주익환을 빨리 효시하도록 하소서.
관서(關西) 지방의 관노비(官奴婢)에게 스스로 자원하여 속미(贖米)를 바치게 하라는 명이 갑자기 뜻밖에 나왔는데, 이는 마침 관기(官妓)를 거느리고 축첩하는 자의 소원을 들어주는 격이 되었습니다. 진휼하는 데 미곡을 보탠다는 미명에 아래 곡물의 수량을 헛되이 과장한 것을 지목하여 가리키자면 이루 말할 수가 없으니, 서로(西路)의 관노비들에게 자원하여 속미를 바치라는 명을 도로 중지하소서. 장단부(長湍府)에서 잡은 사주인(私鑄人)105)  을 포도청에 이송하였는데도 포도청에서 철저히 문초하지 않고 곧바로 먼저 석방하여 보낸 것은 지극히 미안한 일입니다. 장단 부사의 직임은 토포사(討捕使)의 직임을 겸하고 있는데, 스스로 추문하여 다스리지 않고 바로 포도청으로 보낸 것도 일을 허술하게 처리한 실책을 면하기가 어렵습니다. 청컨대 해당 포도 대장(捕盜大將)과 장단 부사를 아울러 추고(推考)하여 무겁게 다스리고, 사주인을 다시 잡아 가두고 각별히 추핵(推覈)하게 하소서.
권무(勸武)106)  는 곧 인재를 뽑아서 장수의 후보자로 배양하려는 것입니다. 근래 인물과 문지(門地)의 높낮음을 막론하고 이것이 과정(科程)의 지름길임을 요행으로 여겨 사람들이 온갖 계책으로 투입하여 들어오지만, 이들은 모두 쓸데없는 잡류들입니다. 청컨대 각 군문(軍門)에 신칙하여 합당치 못한 자는 일체 모두 도태(陶汰)시키게 하소서."
하니, 세자가 다만 내승과 제향의 물품에 대한 일만을 그대로 따랐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침을 맞기를 끝마치자 임금이 이르기를,
"어제 경연(經筵)에서 강봉서(姜鳳瑞)가 격쟁(擊錚)한 사건 때문에 대신들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으나, 아직도 미진한 뜻이 있으므로 다시 이와 같이 하교하는 것이다. 내가 평일 강빈(姜嬪)의 옥사(獄事)에 대해 마음으로 항상 측은하게 여겼었다. 《주역(周易)》의 곤괘(坤卦)에 말하기를, ‘선을 쌓는 집안은 반드시 남는 경사가 있고, 불선을 쌓는 집안은 반드시 남는 재앙이 있다.’고 하였는데, 임창군(臨昌君)은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혈손으로 그 자손의 번창함이 옛날 분양(汾陽)107)  에 견줄 만했으니, 적선한 집안이 복을 받고 불선한 집안이 화를 받는 이치가 과연 분명히 증험되었다. 이명한(李明漢)의 문집(文集)을 읽다가 강석기(姜碩期)의 시장(諡狀)에 이르러서야 그가 현명한 재상이라는 것을 알고 감탄하였다. 이 일은 임진년108)   여름철에 있었다. 또 경덕궁(慶德宮)의 높은 곳에서 소현 세자의 사당을 바라보면서 그 신도(神道)가 홀로 외로울 것을 생각하니, 내 마음이 매우 서글펐다. 이러한 세 가지 일로 인하여 슬픈 감동을 받았으므로 마침내 세 절구(絶句)를 지었던 것이다. 작년에 수상 【김창집(金昌集)이다.】 이 마침 복관(復官)시키자고 청한 것이 바로 나의 뜻에 부합되었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그 말을 들은 것을 매우 기뻐하면서도 오히려 망설이면서 다 말할 수 없는 점이 있었으므로 단지 복관시킬 것만을 허락하였었다. 강봉서가 이 판부(判付)로 인하여 비로소 원통함을 호소하기에 이르렀는데, 금오(金吾)에서 아직도 복주(覆奏)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어제 경연에서 하교한 것이다. 강석기의 처가 화를 입은 것은 다른 사건에 연좌된 것이 아니라 다만 그의 딸 때문이었다. 나의 뜻은 단지 이처럼 원통한 것을 신원(伸冤)만 시켜주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하교가 있었던 것이다. 헌의(獻議)하는 대신들은 나의 본의(本意)를 알지 아니할 수가 없다. 김홍욱(金弘郁)의 죽음은 갑오년109)  에 있었는데 을미년110)   사이에 연신(筵臣) 이단상(李端相)이 김홍욱의 원통함을 극력 아뢰었으나 효종 대왕(孝宗大王)께서는 한숨쉬고 탄식하면서 ‘그 일은 선조(先朝)에 관계되기 때문에 감히 논의하지 못한다.’고 하교하셨으니, 이로써 미루어보면 또한 성조(聖祖)의 깊은 뜻을 상상할 수 있다. 그 뒤 결국 김홍욱의 관직을 회복시켰는데, 김홍욱이 과연 역적을 비호한 사람이라면 비록 억울함을 신원시키자는 청이 있었다 하더라도 어찌 관직을 회복시켰을 리가 있었겠는가? 선정신(先正臣)111)  이 독대(獨對)하였을 때에도 이 일을 언급한 적이 있었다."
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아뢰기를,
"강서인(姜庶人)이 무슨 죄를 지어서 화가 부모에게까지 미쳤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공의(公議)가 지금까지 원통해 하고 가슴 아파합니다."
하고,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는 아뢰기를,
"성상의 뜻은 강서인을 신원(伸冤)시키는 일도 아울러 대신들에게 문의하는 중에 포함시키고자 하는 것입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하교한 말을 가지고 본다면 나의 뜻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강석기의 처가 형벌을 당한 것은 실로 그의 딸 때문이었다. 여러 대신들로 하여금 이 사실을 알고서 헌의하게 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민진후가 아뢰기를,
"이것은 진실로 한 조목의 사건인데 강봉서의 격쟁으로 인하여 대신들에게 문의(問議)하는 가운데 첨가하여 넣는다면, 사체로 보아 미안한 것 같습니다. 금일 성상께서 하교하실 적에 특별히 조목별로 거론하여 문의하는 것이 사의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좋다고 하였다. 이이명이 이어 세 절구(絶句)를 밖으로 내려서 여러 사람들로 하여금 성상의 뜻을 밝게 알도록 하자고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다음날 드디어 어제(御製)를 승정원에 내렸는데, 제목은 ‘소현 세자의 사당을 바라보면서’라고 되어 있었고, 내용은,
"혼령 모신 사당을 돌아보니 더욱더 처연하구나.
세월은 흘러 광음은 칠십여 년인데,
궁주를 어찌하여 아울러 받들지 못하는고?
세상 사람 그 누가 마음으로 항상 가련하게 여기는줄 알리오."
하고, 또 ‘백주(白洲)  【이명한(李明漢)의 호이다.】 의 문집을 읽다가 강석기의 시장을 보고 느낀 바가 있어서’라는 제목의 시는,
"이 시장을 보니 그가 어진 줄을 알겠도다.
절혜(節惠)의 은전112)  을 그 누가 참람하다 하겠는가?
그 덕이 이처럼 큰데 보답은 어쩌면 그리 적은가?
사람들로 하여금 측은한 마음이 들게 함을 깨닫지 못하게 하도다."
하고, ‘소현 세자의 자손들을 기린다’라는 제목의 시는,
"임창군  【즉 소현세자 손자 임창군 혼(焜)이다.】 은 자손이 많으나 모두 탈이 없네.
옛날 분양인들 여기에 견줄 수 있을까?
복은 본디 문이 없는 것으로 사람들이 자초하는 법
밝고 밝은 이러한 이치 고금에 빛나도다."
하였다.

 

3월 26일 을해

헌부(憲府)에서 전에 계달한 것을 다시 아뢰니, 세자가 다만 근수(跟隨)의 일과 이만선(李萬選)·박행의(朴行義)·박종양(朴宗陽)·포도 대장·장단 부사(長湍府使)·권무(勸武) 등의 일은 따랐으나, 훈도(訓導)·별차(別差)는 본도(本道)의 수사(水使)로 하여금 곤장을 때리게 하였다.

 

간원(諫院)에서 전에 계달한 것을 다시 아뢰고, 또 아뢰기를,
"윤선거(尹宣擧)의 평생 행적이 모두 남김없이 드러났는데, 그의 참람하고 속이고 그릇되고 망령된 짓은 관계된 바가 매우 중합니다. 많은 선비들이 소장을 올려 서원을 철폐하자고 청하였고 해조(該曹)에서 품신(稟申)하여 시행하도록 허락받았는데, 이는 사전(祀典)을 엄하게 하고 음사(淫邪)를 폐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따라서 저하께서 특별히 준허하신 것은 또한 성상의 교지를 우러러 몸받으시고 공의(公議)를 통쾌하게 펴시려는 성대한 뜻에서 나왔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대신의 진청(陳請)에 의거 철폐하지 말고 그대로 존속시키라는 명을 내리기에 이를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당초에 서원을 설치한 것을 조정에서 몰랐다면 그만이지만 이미 은액(恩額)을 선사(宣賜)하였습니다. 지금 죄과가 드러난 뒤에 이르러서는 걸어 놓은 액자만을 철거하게 하고 원우(院宇)는 그대로 존속시킨다면, 처분에 일관성이 없고 사체가 전도된 것이 이보다 심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청컨대 빨리 윤선거의 서원을 철폐하지 말라는 명을 중지시키소서. 일전에 경연(經筵)에서 대신들의 진달(陳達)로 말미암아 전 참군(參軍) 이형수(李衡秀)를 승륙(陞六)113)  시키라는 명이 있었는데, 대저 승륙되지 않고 파면된 자는 혹 관직에 제수되더라도 상중(喪中)에 있는 자 이외에는 전의 사일(仕日)을 통산해서 계산할 수가 없는 것이 금석(金石)같은 법전입니다. 지금 이형수는 경조(京兆)에 재직했을 적에 거듭 대간의 탄핵을 받아 도태당하였는데, 대간의 계본(啓本)에서 탄핵하여 열거한 바를 보면 모두 불법하고 비루한 잗단 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만(仕滿)되었다고 핑계하고 막바로 승륙(陞六)시키기를 마치 노고에 보답하고 그 공로를 보상하는 것처럼 하고 있으니, 이것은 실로 전에 없던 일입니다. 청컨대 승륙시키라는 명을 빨리 중지하소서."
하였으나, 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침 맞기를 끝마치자,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가 아뢰기를,
"어제 삼가 성상의 하교를 들었는데, 무릇 청문(聽聞)한 사람이면 누구인들 감탄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신의 의견은 이 일이 중대하므로 범연하게 수의(收議)하는 것은 끝내 미안한 데에 관계되니, 2품 이상과 삼사(三司)로 하여금 조당(朝堂)에 모여서 의논하게 하는 한편 외방에 있는 대신들에게는 사관(史官)을 보내어 문의(問議)하게 하는 것이 사체를 중히 여기는 도리에 합치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에게 하문하였는데 이이명도 옳다고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3월 27일 병자

흰 무지개가 해를 가로질렀다.

 

역질(疫疾)이 치열하게 만연되었기 때문에 중신(重臣)을 보내어 경도(京都)의 산천(山川)과 성황당(城皇堂)에 제사지내게 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에 계달한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세자는 박희진(朴熙晉)·유중무(柳重茂)와 훈도(訓導)·별차(別差) 등의 일만을 따랐고, 다만 이우항(李宇恒)을 체차시키게 하였다.

 

약방(藥房)에서 입진하여 임금이 침을 맞았다.

 

홍계적(洪啓迪)을 사간(司諫)으로, 이건명(李健命)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3월 28일 정축

우박이 내렸다.

 

승정원에서 무지개가 해를 가로지른 이변(異變)으로 인하여 진계(陳啓)하기를,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전에도 여러 번 이러한 재변이 있었는데도 목하(目下) 명확하게 증험할 만한 일이 없었다는 것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마시고 더욱 두려워하고 조심하여 감히 태만하거나 소홀히 하지 마소서. 비록 철따라 조섭(調攝)하는 즈음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속임없이 진실한 도리로 스스로를 면려하셔야 할 것입니다. 여러 가지 정령(政令)과 사무를 보시는 사이에도 깊이 생각하고 부지런히 하는 공부로 우리 저하를 면려하여 관료들의 기풍을 떨쳐 쇄신시키게 하고, 소민(小民)들을 따뜻이 보살펴 큰 은택에 감화되게 하는 정치가 온 세상[八區]에 두루 미치게 된다면, 재앙이 사라지고 상서(祥瑞)가 모여서 저절로 천지가 화태(和泰)한 경지에 이를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어제 병중에 홀연히 서운관(書雲官)의 주달(奏達)을 듣고는 놀랍고 두려워서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이번의 진언(陳言)은 실로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아끼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매우 가상하다. 내가 마땅히 유념할 것이고 또한 세자에게도 경계하고 면려시키겠다."
하였다.

 

대신(大臣)과 2품 이상과 삼사(三司)를 불러 빈청(賓廳)에 모이게 하여 강빈(姜嬪)을 신원시킬 일을 의논하게 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유(李濡)·서종태(徐宗泰),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판중추부사 이이명(李頤命), 우의정 조태채(趙泰采) 등이 아뢰기를,
"신 등이 명을 받들고 와서 대궐에 이르러 2품 이상과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과 모여서 의논하였습니다.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황흠(黃欽)·형조 판서 이건명(李健命)·공조 판서 민진원(閔鎭遠) 등은 말하기를, ‘당초 이 일은 내전(內殿)에서 나왔고 또 근거할 만한 옥안(獄案)도 없으니, 신 등과 같은 후생(後生)들이 어떻게 감히 망령스럽게 논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으며, 좌참찬(左參贊) 민진후(閔鎭厚)는 말하기를, ‘이 일이 있은 이래 70여 년 사이에 국인들이 불쌍하게 여기고 가슴 아파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지금 다행히 성상께서 그 원통함을 깊이 알고 특별히 측은히 여기는 하교를 내리고 신원하는 은전을 베풀고자 하시니, 위로 우러러 감탄해 마지않는 이외에 달리 별다른 의논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으며,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강현(姜鋧)은 말하기를, ‘성교(聖敎)의 개석(開釋)이 이와 같고 간절하고 측은히 여기는 것이 또 이와 같으니, 신이 어찌 감히 그 사이에 다른 의견을 낼 수 있겠습니까?’ 하였으며, 행 예조 판서(行禮曹判書) 송상기(宋相琦)·호조 판서 권상유(權尙游) 등은 말하기를, ‘일이 내전에서 나왔고 옥안(獄案)을 증험할 수가 없으니, 이미 외정(外廷)의 신료들로서는 감히 알 수 있는 일이 못됩니다. 그리고 사체를 논하더라도 또 강석기(姜碩期)의 처를 왕부(王府)114)  에서 안핵하여 다스린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김홍욱(金弘郁)을 복관(復官)시키라는 명에서 우러러 성상의 뜻을 헤아릴 수 있기는 합니다만, 그를 복관시킨 것은 그가 본래 역적을 비호할 마음이 없었으므로 그의 죽음이 원통하다고 여긴 데서 나온 조처인 것입니다. 그러나 본 사건에 대해서는 또한 드러나게 신원시킨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 없었는데다가, 지금 햇수가 오래된 뒤인데 어떻게 아래에서 가볍게 의논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으며, 판윤(判尹) 홍만조(洪萬朝)는 말하기를, ‘강씨(姜氏)의 사건은 나라사람들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불쌍하게 여기고 있습니다만, 아무도 감히 내놓고 말하지 못하였던 것은 진실로 당초의 처분이 지엄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성상께서 순문(詢問)하시는 아래에서 어찌 이의(異議)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으며, 우참찬 신임(申銋)은 말하기를, ‘강서인(姜庶人)을 사사(賜死)한 것에 대해 온 나라 사람들이 원통하고 불쌍하게 여긴다는 말이 지금까지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김홍욱을 복관시킨 것도 성조(聖祖) 때에 있었는데, 성유(聖諭)에 ‘과연 역적을 비호한 사람이었다면 어찌 복관시켰을 리가 있었겠는가?’라는 하교는 진실로 천고(千古)의 단안(斷案)이라 하겠습니다. 신은 이에 대해 다시 천박한 견해를 아뢸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으며, 대사헌(大司憲) 조도빈(趙道彬)은 말하기를, ‘선배들이 억울하다고 송변(訟辯)한 것이 전후 서로 잇따랐고 나라 사람들의 탄식이 지금까지 그치지 않고 있는데 성상께서 순문(詢問)하시니 누가 감히 이의를 제기하겠습니까? 그러나 신원하는 일은 사체가 지극히 중하니, 오로지 성명께서 널리 물어보시고 잘 살펴서 처리하기에 달려 있습니다.’라고 하였으며, 예조 참판 김흥경(金興慶)은 말하기를, ‘신의 증조(曾祖)인 감사(監司) 신(臣) 김홍욱(金弘郁)이 일찍이 이 사건 때문에 상소하여 아뢴 바가 있었던 것은 성명께서 이미 상세히 알고 경연에서 교유(敎兪)하셨으니, 이번의 순문에는 신의 사사로운 뜻으로는 감히 여러 사람들을 따라서 앙대(仰對)하지 못할 점이 있습니다.’라고 하였으며, 공조 참판 이택(李澤)은 말하기를, ‘측은하게 여기는 성지(聖旨)가 있었고 이어서 신충(宸衷)의 글을 널리 보이라는 명이 있었으며 성조(聖祖)의 은미한 뜻을 상상할 수가 있다는 하교가 있기에 이르렀으니, 무릇 이것을 청문(聽聞)하는 자는 누구인들 흠모하고 감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성상께서 순문하시는 데 누가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신원하는 것은 사체가 지극히 중하니, 오로지 두루 물어보고 잘 살펴서 처리하기에 달려 있습니다.’라고 하였으며, 대사간(大司諫) 남도규(南道揆)는 말하기를, ‘경연에서 측은하게 여기는 하교가 있었고 신충의 글을 밝게 보이시어 성조(聖祖)의 은미한 뜻을 알 수 있다고 하교하시기에 이르렀으니, 무릇 이것을 청문한 사람은 누구인들 흠모하고 우러르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으며, 사간(司諫) 홍계적(洪啓迪)은 말하기를, ‘성상의 하교에 슬퍼하고 측은하게 여기는 뜻이 넘쳐 흘렀는데, 이는 신인(神人)을 감격시키고 눈물을 흘리게 하기에 족하였습니다. 따라서 이번에 순문하는 데 어찌 이의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으며, 지평(持平) 유복명(柳復明)은 말하기를, ‘옥사의 정상이 끝내 원통하고 억울한 데 관계되었으므로 온 나라 사람들이 불쌍하고 애처로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공의(公議)가 오랫동안 답답하게 여기고 인정(人情)은 대체로 같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가 있습니다. 성상께서 순문하시는 데 누가 감히 이의를 제기하겠습니까?’라고 하였으며, 지평(持平) 조영세(趙榮世)는 말하기를, ‘지금 신충(宸衷)으로 결단하시어 그 원통함을 밝게 씻어준다면 선조(先朝)의 흠전(欠典)이 거행되게 될 것이고 답답했던 공의(公議)도 펴질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며, 교리(校理) 박사익(朴師益)·부수찬(副修撰) 유척기(兪拓基)는 말하기를, ‘지난번 경연에서 특별히 이 사건을 거론하셨는데 사지(辭旨)에 성상의 뜻이 애연히 넘쳐 흘렀으니, 무릇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그 누구인들 흠모하고 우러르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으며, 교리 조상경(趙尙絅)·부수 찬 김상윤(金相尹)은 말하기를, ‘당초의 옥사는 오로지 역적 김자겸이 단련(鍛鍊)한 데에서 나온 것인데, 그 뒤 고(故) 감사 김홍욱의 상소에서 단락에 따라 변명한 것이 모두 근거가 있었습니다. 이번 성상께서 순문하시는 데 어찌 이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으며, 정언(正言) 어유룡(魚有龍)은 말하기를, ‘70년 이래 공의가 민멸되지 않았었지만 특별히 나라의 금령이 엄하고 두려웠기 때문에 다시 이에 대해 말하는 자가 없었던 것입니다. 금번 성명(聖明)께서는 신충(宸衷)에서 발로되어 추후 신원시킬 것을 생각하셨으니, 이는 진실로 성대한 덕사(德事)입니다. 신 등이 삼가 생각하건대, 당시의 일은 이미 궁액(宮掖)에 관계되므로 바깥 사람들이 상세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긴 합니다. 그러나 삼가 효종(孝宗)의 하교를 보건대,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과 고상(故相) 신(臣) 민정중(閔鼎重) 같은 사람은 이렇게 된 사유를 알고 있었던 것이고 따라서 측은하게 여기는 뜻은 일찍이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더구나 언자(言者)를 너그러이 용납하여 죽은 사람을 깨끗하게 신원시켰으니, 또한 성조(聖祖)의 덕스러운 뜻이 진실로 성상의 하교와 같았다는 것을 상상할 수가 있습니다. 외간(外間)의 물정(物情)으로 말씀드린다면, 70년 이래 공의가 민멸되지 않았지만 억울하고 원통한 사정을 신리하지 못하였으므로 아직도 슬프고 애처로와 하는 뜻이 있어 왔습니다만, 특별히 나라의 금령이 엄하고 두려웠기 때문에 다시 이것을 말하는 자가 없었던 것입니다. 성명께서 마음으로 결단하여 추후 신원시킬 것을 생각하였는데 그 간절하고 측은하게 여기는 사지(辭旨)가 임금의 전교에 밝게 드러났으니, 이것은 진실로 성대한 덕사(德事)입니다. 조정에 있는 신료(臣僚)들로서는 어찌 이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선조에서 처분하신 것이어서 사체가 지극히 중하여 아랫사람들이 감히 가볍게 마땅한지의 여부를 의논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이번 여러 신하들이 헌의(獻議)한 데에서 공의는 대동(大同)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수의(收議)가 모두 도착한 뒤에 바야흐로 처분하겠다."
하였다.

 

3월 29일 무인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우의정 조태채(趙泰采)가 무지개의 이변 때문에 차자(箚子)를 올려 책면(策免)시켜 하늘의 견책에 답하게 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위유(慰諭)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예조에서 청하기를,
"빈궁(嬪宮) 묘소의 수호군(守護軍)은 을유년115)  의 예에 의하여 원호(元戶) 30명을 병조로 하여금 충정(充定)해서 입역(立役)하게 하소서."
하니, 세자가 좋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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