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기묘
여역(癘疫)이 치성하여 만연하였으므로 중신(重臣)을 보내어 북교(北郊)에서 여제(癘祭)를 설행하였고, 근신(近臣)을 보내어 민충단(愍忠壇)에 치제(致祭)하였다. 그리고 각도의 중심이 되는 곳과 험천(險川)·쌍령(雙領)·달천(㺚川)·금화(金化)·토산(兎山)·진주(晋州)·남원(南原)·금산(錦山)·상주(尙州)·원주(原州)·울산(蔚山) 등지의 싸움터였던 장소에는 본도의 도사(都事)를 시켜서 행사하게 하였고, 강화부에는 유수(留守)로 하여금 행사하게 하였다.
임형(任泂)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이조 판서 정호(鄭澔)가 오명준(吳命峻)이 글을 올려 지척한 것으로 인하여 상서(上書)하여 스스로 변명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오명준이 서원(書院)을 철폐하는 것은 3백 년 동안에 없었던 일이라고 하였는데, 그가 어찌 감히 이런 따위의 말로 멋대로 일월(日月)116) 을 속인단 말입니까? 서원의 설치가 비록 선비들이 공부하기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진실로 그 사람이 스승이 될 만한 선행(善行)은 없고 사도(斯道)를 해치는 잘못만 있는 경우에는 조정에서 그 원우(院宇)를 철거하라고 명하였던 것이 한두 번으로 셀 수 있는 정도가 아닙니다. 정개청(鄭介淸)과 곽시(郭詩)의 사건도 그러하였습니다. 정개청은 다만 ‘배절의(排節義)’라는 한 가지 일을 이유로 선정신(先正臣) 김장생(金長生)이 인조(仁祖)께서 중흥(中興)하던 시기에 그 사원을 철거하라고 청하였으며, 곽시는 술에 취하여 관문(官門)에서 말에서 떨어졌을 뿐인데도 연신(筵臣)들이 성조(聖祖)께서 사문을 숭상하던 시기에 그의 사당을 철거하라고 청하였습니다. 지금 윤선거(尹宣擧)가 좌죄(坐罪)된 것은 주실(周室)를 높이는 대의(大義)를 비웃고 배척하였을 뿐만 아니라 겸하여 성조(聖祖)를 침핍하고 무고한 죄가 있었으나, 이를 정개청과 곽시의 경우에 비하여 보면 죄의 경중(輕重)이 어떠하다고 하겠습니까? 지금 오명준이 조종조(祖宗朝)의 고사를 슬그머니 숨기고서 감히 이처럼 교묘하게 말을 꾸며 임금을 기만하는 일을 하였으니, 기탄(忌憚)함이 없는 짓이라 하겠습니다."
하니, 세자가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교리(校理) 조상경(趙尙絅)·부수찬(副修撰) 김상윤(金相尹) 등이 무지개의 이변[虹變]으로 인하여 차자(箚子)를 올려 진계(陳戒)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옛날부터 임금이 재이(災異)를 당하면 크게 진작하고 크게 분발하여 화를 복으로 전이(轉移)시키는 계기로 삼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 성상께서 여러 해 동안 미령하시어 천화(天和)를 회복하지 못하시니, 진작하고 분발하는 공(功)은 진실로 정양하고 조심하여 건강을 보전하시는 중에 논할 겨를이 없겠습니다. 그러나 원하건대, 서정(庶政)을 세자로 하여금 대신 보살피게 한다고 하여 마침내 재이를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생각마저 늦추지 마시고 재이가 증험이 없다고 여기지 마시고 더욱 하늘을 공경하는 정성을 돈독히 하소서. 이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면려할 뿐만 아니라 또한 하늘을 공경하는 일을 부지런히 하는 것으로 우리 저하를 면려시켜 허위(虛僞)를 물리치시고 실효를 힘써 찾도록 하신다면, 특별히 천인(天人)의 사이에 감응이 미더울 뿐만이 아니라 재이를 상서(祥瑞)로 바꾸는 공효가 저절로 순치(馴致)될 것입니다.
좌의정 권상하(權尙夏)는 선정신(先正臣) 송시열의 대통(大統)을 이어받은 적전(嫡傳)으로 한 시대의 태산(泰山)·북두(北斗)와 같은 명망을 지녔으므로 평생의 포부가 세도(世道)를 만회하기에 충분했는데도 그가 동강(東岡)117) 을 굳게 지키고 조정의 부름에 응하지 않은 것을 애석하게 여깁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상께서 더욱 정성과 예절을 극진히 하여 조정으로 불러 들인다면, 치화(治化)를 크게 빛내는 데 있어 어떠하겠습니까?
돌이켜 보건대, 지금 시폐(時弊)를 구제하는 방책이 하루가 시급한데도 낭묘(廊廟)에서 계획하는 것은 부서(簿書) 간의 일에 지나지 않고, 경연에서 의논하는 묘책은 거의 한만한 따위의 말들뿐입니다. 진품(陳稟)하거나 신구(伸救)하는 일에 이르러서도 혹 여정(輿情)에 크게 어긋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윤선거 서원의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사론(士論)이 일제히 발론되고 해조에서도 복주(覆奏)하여 곧 하나의 큰 공의(公議)를 이루었는데도 곧바로 성명(成命)을 내린 데 대해 정지하기를 청한 것은 어찌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아! 사문(斯文)의 시비(是非)가 아주 정해졌고 성상의 처분이 분명하고 정대하였습니다. 무릇 징계하고 권려하는 도리에 있어 엄절하게 하지 않은 것이 없어 ‘너는 나의 뜻을 따름에 있어 혹시라도 흔들리지 말라.’는 등의 하교로 우리 저하를 경계하고 타이르셨을 뿐만이 아닙니다. 그런데 금일의 일을 가지고 살펴보건대, 전하께서도 그 뜻을 지켜 흔들리지 말라고 한 것에 대해 점점 처음과 같지 않습니다. 작년과 금년 이래 방비가 점차 해이해져 심지어 서원을 철거하지 말라는 명을 내리시기에 이르렀으니, 또 한 번 흔들린 것입니다. 이것은 아래에 있는 자들이 그 아름다움을 받들어 따르지 못한 데서 온 소치이기는 하지만, 또한 우리 성상께서 사설(邪說)을 물리치는 뜻이 확고하지 못한 데에 연유하여 그런 것이 아니라고 기필할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재구(災咎)가 비상하니 놀랍고 두려운 마음이 바야흐로 심각하다. 진계(陳戒)한 말은 실로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어진 사람을 초청하라는 청은 더욱 깊고 간절한 마음에서 나온 말이니, 내가 마땅히 유념하겠다. 그러나 엊그제 우상(右相)이 경연에서 아뢴 것은 조정의 처분이 중도(中道)에 맞게 되도록 힘쓴 것에 불과한 것이요 결단코 그 사이에 다른 뜻은 없었다. 그런데 차자(箚子)의 끝부분에 삽입하여 드러나게 기척(譏斥)하였으니, 사체에 있어 어찌 이렇게 할 수가 있겠는가? 윤선거의 관작(官爵)을 추탈(追奪)하고 관에서 공급하는 제향을 철회하고 사액(賜額)을 없애게 한 데 대해서는 시비가 본디 분명한 것이다. 점차 처음과 같지 않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말인지 모르겠다."
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을유년118) 《등록(謄錄)》을 상고하건대, 발인(發靷)하고 반우(返虞)할 때에 백관들과 전함(前銜)의 조사(朝士)와 유생들은 모두 길 왼쪽의 제소(祭所)에서 곡림(哭臨)한다고 하였는데, 실록(實錄)과 등본(謄本)에는 기재된 것이 없습니다. 지금 이번의 빈궁(嬪宮)의 상사에 발인하고 반우할 때에 영송(迎送)하는 절차를 대신들과 의논하게 하소서."
하니, 세자가 좋다고 하였다.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등이 의논하여 아뢰기를,
"초종(初終)의 성복일(成服日)에 이미 곡림(哭臨)하는 예를 행하였으니, 앞으로 발인하고 반우할 때에도 이와 차이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니, 세자가 그 의논을 따랐다.
강화 유수(江華留守) 권성(權𢜫)이 소장을 올려 본도(本島)의 형편을 논하기를,
"갑진(甲津)의 수어(守禦)는 방책이 대강은 준비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초지(草芝) 이서(以西)와 장곶이[長串] 이남까지의 바닷가 뻘흙이 있은 땅은 조수가 밀물일 때에도 짐을 무겁게 실은 배들은 뜨기가 어려운데 장봉(長峰)과 주문(注文) 사이에 만약 향도(鄕導)가 있다면, 또한 어찌 마음을 편히 놓을 수 있을 정도뿐이겠습니까? 정포(井浦)에서 인화(寅火)·철곶이[鐵串]를 거쳐 승천보(昇天堡) 서쪽에 이르기까지 교동(喬桐)의 해로(海路)에 있는데, 그 동북쪽은 곧 경강(京江)의 하류로 설치한 것이 지극히 허술합니다. 전에 있었던 수신(守臣)들이 전의 일에 크게 징계되어 오로지 갑진(甲津)에다만 힘을 기울이느라고 서북쪽에는 돌볼 겨를이 없었는데, 고(故) 상신(相臣) 이완(李浣)이 효종[孝廟]에게 고하기를, ‘적인(敵人)들이 해빙(海氷)할 때를 당하여 삼강(三江)119) 의 배를 거두어 강의 흐름을 따라 내려온다면 승천보가 가장 염려스러운데, 어찌 갑곶이만이 적병의 요로이겠습니까?’라고 하였으니, 상신이 먼 장래를 염려하는 식견이 이와 같았습니다. 지난해 삼군문(三軍門)120) 에서 축성(築城)한 뒤에 거류(居留)하는 신하들이 차차로 축성하도록 할 것으로 일찍이 정탈(定奪)한 적이 있었습니다만 그 뒤 흉년이 들었고, 또 내성(內城)의 역사(役事)가 있었으므로 성명(成命)이 드디어 중지되었습니다. 지금 강화의 서북 지역에 축성하는 것을 한결같이 조정의 명령에 따라 동쪽 지역에서 축성한 것과 같이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만, 신의 얕은 식견은 이것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대저 장성(長城)은 가로로 축성하면 외면은 보기가 좋지만 수졸(守卒)이 단약하게 되어 여장(女墻)을 쉽게 넘게 됨은 물론이고 축성하는 데 드는 비용도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신이 듣건대, 옛부터 돈대(墩臺)를 설치할 적에는 마땅히 조밀하게 할 것이요 소루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두 돈대 사이에 시석(矢石)이 서로 미치게 만든 다음이라야 우리의 수비가 공고하게 되고 저들은 오더라도 꺼려 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강물을 타고 감히 경솔하게 나아오지 못할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해안에 올라오더라도 뚫고 지나가기가 어려울 것이니, 이것이 진실로 적을 방어하는 승산(勝算)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돈대의 간격이 넓어서 적선(賊船)이 정박하는 장소에 알맞으니 장성을 축조하지 말고 흙돈대[土墩]를 증수(增修)하되 높이를 4, 5장(丈)이 되게 한다면, 일이 줄어들어 만들기가 쉽고 수비가 온전하여 방어가 튼튼해질 것입니다. 이는 장성의 축조에 비하여 물력과 노동의 비용을 동일하게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선두포(船頭浦)의 좌우와 갈곶이[葛串]·양암(陽巖) 두 돈대에 이르러서는 한 번 포(浦)를 막아 통(筒)을 쌓은 뒤로는 포구(浦口)에 진흙뻘이 가로질러 있게 되어 큰 배들이 통행하기가 어려우므로 양암과 갈곶이 이 두 돈대는 실지로 무익하게 되니, 설치해야 할는지 혁파해야 할는지의 편의(便宜)를 중신(重臣)을 보내어 자세히 살피고서 품정(稟定)하게 하소서. 월곶이[月串] 이상에서 휴암(鵂巖) 이하까지에 축조한 성은 조수에 충격을 받아 여장(女墻)과 더불어 파괴되어 떨어져 나갔으니, 개축하거나 부서진 곳을 보완하는 일은 결단코 중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농삿일이 바야흐로 한창이어서 백성들을 동원하기가 실로 어려우니, 지금 각창(各倉)의 회계(會計) 이외의 나머지 미곡을 가지고 백성들을 모아서 역사를 일으키되, 먼저 토성(土城)을 쌓아 그것이 완고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여장(女墻)을 쌓는 것이 마땅합니다.
신은 문수 산성(文殊山城)의 일에 대해 삼가 개탄스럽게 여기는 점이 있습니다. 이 성의 설치는 처음 임금의 계책에서 나온 것이지만 축성한 뒤에 다시 조치(措置)한 적이 없어 군병(軍兵)도 많지 않고 기계(器械)도 준비되지 않고 양향(粮餉)도 부족한 등 어느 한 가지도 믿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지금은 한정(閑丁)을 얻기가 제일 어렵기 때문에 군병(軍兵)을 첨가하여 주는 데 있어 실로 좋은 계책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천과 김포를 아울러 부평(富平)에 예속시키는 것은 크게 긴요한 데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니, 지금 김포를 통진(通津)에 이속시켜 협력하여 수비하게 한다면 일푼이나마 도움이 있을 것 같습니다. 양향에 이르러서는 조정에서 전에 지급한 것이 또한 1천여 석에 이르렀습니다만, 염산(斂散)이 마땅하게 되지 못하고 간리(奸吏)들이 용사(用事)한 탓으로 그 태반이 귀록(鬼錄)에 기입되어 있어 성에 속한 요미(料米)가 지금 바야흐로 부족한 형편이므로 형세가 숫자를 더하여 지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로지 통진에 맡긴다면 구투(舊套)를 그대로 답습할까 염려됩니다. 산성 별장(山城別將)을 각별히 선택해서 임명하고 인신(印信)을 만들어 주어 조적(糶糴)과 기계(器械)를 수리하고 보충할 수 있게 한다면 본부(本府)에서 미곡과 금전을 적당하게 헤아려 별장(別將)에게 내주고 그로 하여금 본전은 그대로 두고 이식을 취하여 요량하여 개수(改修)하게 할 수 있습니다. 화포(火砲) 등의 물건은 본부(本府)에서 참작하여 이급(移給)하는 것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그 소장을 묘당(廟堂)에 내렸는데, 묘당에서 복주(覆奏)하기를,
"흙돈대[土墩]를 더 설치하고 양암과 갈곶이를 혁파하자는 의논에 대해서는 그 유례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따로 중신을 파견하여 다시 간심(看審)하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파괴되어 떨어져나간 구성(舊城)은 더욱 급히 먼저 수리 보수해야 하는데, 이는 본부에서 수시로 살펴 선처하여 완전하고 공고하게 만들기를 도모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문수 산성에 대해 논의한 것은 진실로 의견이 있는 것이니, 마땅히 부평에 소속한 김포를 떼어내어 이속시키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리고 산성 별장(山城別將)은 병조에서 각별히 선택하여 임명하게 하소서. 인신을 만들어 주어 조적(糶糴)과 군향(軍餉)·기계(器械) 등 제반 일을 관리하게 하는 것은 모두 본부(本府)에서 선처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4월 2일 경진
헌부(憲府)에서 전에 계달한 것을 다시 아뢰고, 또 아뢰기를,
"근래 포도청(捕盜廳)에서 기찰(譏察)하는 법이 날로 더욱 해이해져서 지난번 큰 도둑이 경성(京城)의 서문 밖의 상놈의 집[常漢家]에 침입하여 칼을 빼어 사람을 찔러 바야흐로 사경에 있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사대부들 가운데 동교(東郊)의 10리 안에 우거(寓居)하는 자들도 도적들에게 참혹한 겁략을 당하여 겨우 몸만 화를 면하였다 하니, 청컨대 해당 포도 대장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종사관(從事官)은 파직시키소서. 어제 회의할 때 한성군(韓城君) 이기하(李基夏)와 훈련 대장(訓鍊大將) 이홍술(李弘述)은 거듭 소명(召命)하였어도 끝내 어명(御命)에 응하지 아니하였는데, 이홍술은 인피(引避)할 만한 혐의가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기하는 아무런 까닭없이 집에 있으면서 소명을 거듭 어겼으며, 근래 향관(享官)으로 임명되어서도 갑자기 신병(身病)이 있다고 하면서 회피하기를 도모하였으며, 보통 때 출입할 적에도 언제나 견여(肩輿)를 타고 다녔으니, 장신(將臣)들의 교만한 습성이 진실로 매우 해괴합니다. 청컨대 이기하는 파직시키고 이홍술을 종중 추고하소서.
나주 목사(羅州牧使) 이신룡(李臣龍)은 본래 병들어 쇠약한 사람으로 경기의 작은 고을도 오히려 잘 다스리지 못했다는 비방이 있는 터인데, 갑자기 관직을 옮겨 승진한 것이 물정(物情) 밖에서 나왔으니, 청컨대 개차(改差)하소서. 공주 목사(公州牧使) 이광조(李光朝)는 성품이 원래 나약한데다가 술을 좋아하니, 청컨대 개차하소서.
모든 군보(軍保)에게 포(布) 2필을 징수하는 것이 곧 항규(恒規)인데 수군(水軍)에게 3필을 징수하는 것은 실로 크게 억울한 것입니다. 더구나 그 수용(需用)이 영문(營門)에서 시사(試射)하는 밑천으로 쓰인다고 하지만, 대다수 주장(主將)의 사사로운 비용으로 들어가는 것이 많습니다. 성상께서 병과(兵戈)의 질고를 진념(軫念)하고자 하신다면 이것보다 먼저할 것이 없으니, 청컨대 수군의 군포도 다른 군보(軍保)의 예에 의하여 모두 2필로 거두게 하소서.
생사당(生祠堂)121) 에 비(碑)를 세우는 것은 더욱 근래의 병폐이니, 방백(方伯)과 수령(守令)이 된 자는 마땅히 이를 금단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비를 세우지 않는 사람이 없고 사당을 세우지 않은 곳이 없어 돌에 새기고 동(銅)으로 주조한 것이 전후 서로 잇따랐고 집을 지어 사당을 설치하는 것이 너무 심하니, 청컨대 엄하게 금단하여 일체 철거하여 혁파하도록 하소서.
영평현(永平縣)의 북면(北面)은 본래 황폐하고 외딴 곳으로 잇따라 큰 흉년을 만났으므로 작년에 다시 간심(看審)할 때에 본 고을에서 박씨(朴氏) 성을 가진 사람을 특별히 감관(監官)으로 정하여 그로 하여금 전지(田地)를 조사하게 하였는데, 가경전(加耕田)122) 으로 집복(執卜)123) 된 숫자가 전에 비하여 갑절이나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중간에서 조종하여 외람되이 징수하고 뇌물을 받았으니, 청컨대 현령 이우하(李宇夏)는 파직시키고 박씨 성을 가진 사람은 형추(刑推)하여 정배(定配)하도록 하소서.
창원 부사(昌原府使) 박정빈(朴廷賓)은 본래 양산(梁山)의 향리 출신인데 갑자기 자기집 가까운 큰 고을의 부사에 제수되었으니, 청컨대 개차하소서. 근래 대간(臺諫)에서 진달(陳達)한 것과 감사가 정장(呈狀)하여 청한 것을 으레 품처하는데 날짜를 늦추고 달이 넘게 지체시키면서 즉시 품지하여 처결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아름다운 모책(謨策)과 훌륭한 방책이 있다고 하더라도 시설(施設)할 가망이 없으니, 청컨대 묘당(廟堂)과 제사(諸司)에 신칙하여 지금부터는 공사(公事)를 품하(稟下)한 뒤 5일을 기한으로 즉시 복주(覆奏)하게 하소서.
전 장령(掌令) 이완(李浣)이 작년에 진휼을 잘한 수령(守令) 가운데 상으로 말[馬]만을 하사받은 사람은 직질(職秩)을 올리는 은전을 더하도록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근래 진휼을 잘하였다는 것으로 포상할 때에 거개 거짓과 실상이 서로 혼동되는 폐단이 많으니, 설혹 이것 때문에 직질을 올려줄 자가 있더라도 대간에서는 간쟁(諫爭)하여 고집해야 한다는 도리로 보면 환수(還收)하기를 청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마땅할 터인데, 어찌 이처럼 구차스러운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가 일의 체면을 손상시킨 것이 심하니, 청컨대 파직시키소서.
평안 도사(平安都事) 김성발(金聲發)은 호우(湖郵)와 기성(騎省)에 있을 적에 모두 물의(物議)가 있었으니, 이름난 고을의 좌막(佐幕)의 직임을 그대로 줄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파직시키소서.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 이제면(李濟冕)은 지난번 대간의 탄핵을 받고서도 끝내 자처(自處)하지 못하고 군무(軍務)를 포기한 채 오로지 사리사욕 채우기만을 일삼았으니, 청컨대 파직시키소서.
군자감(軍資監)에서 병신년124) 에 번고(反庫)125) 한 뒤에 해색(該色)126) 이 무면(無面)한 【방언에 포흠(逋欠)을 무면이라 한다.】 것이 거의 수천 석에 이르렀고, 이른바 모축(耗縮)도 9천여 석에 이르렀습니다만 곡식이 오래 되어 썩어버렸다고 핑계대었으므로 전체 수량을 탕감시켰습니다. 무면(無面)한 것에 이르러서는 독촉하여 징수하게 하였으나 3년 동안 거두어들인 것이 다만 황두(黃豆) 40곡(斛)뿐이었습니다. 청컨대, 해당 관원들을 모두 종중 추고하소서.
그 무면한 것이 더욱 심한데도 바치지 못하는 자는 법에 의하여 죄를 주소서. 대동 군향(大同軍餉)을 상납(上納)할 때에 선인(船人)의 무리들이 물을 타는 폐단이 근래에 특별히 심한데, 전후 조정의 명령으로 신칙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나 언제나 허투(虛套)로 돌리고 소홀히 하여 거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청컨대 지금부터 선인 가운데 물을 탄 자는 일일이 적발하여 법에 의하여 효시(梟示)하고, 해당 관원과 색리(色吏)와 고자(庫子)는 그 경중을 따져 죄를 주소서. 근래 전포(錢布)를 가지고 있는 각사(各司)에서 서울과 외방의 사대부와 중서(中庶)와 상인(商人)들에게 대출(貸出)해 준 숫자가 천만 석이나 되지만 여러 해 동안 거두어 들이지 못한 채 빈 장부만을 가지고 있으니, 청컨대 각별히 신칙하고 준봉(準捧)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해당 당상관(堂上官)과 낭관(郞官)을 경중을 따져서 논죄하소서."
하니, 세자가 포도 대장을 파직시키고 큰 도적을 찾아서 체포하는 일과 생사당에 비를 세우는 것을 거듭 금지시키는 일과 이우하(李宇夏)를 파직시키는 일만 따랐다. 이기하(李基夏)는 이홍술(李弘述)과 더불어 일체로 추고(推考)하도록 하고, 수군의 포(布)를 감하는 일은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고, 각 창고의 무면(無面)된 일과 선인들의 물을 타는 일과 채무를 징수하는 일은 모두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였다. 공사(公事)는 5일 동안을 기한으로 복주(覆奏)하게 한 일에 대해 답하기를,
"모든 공사의 복주는 긴급히 거행할 것도 있고 조용히 강구할 것도 있으니, 기한을 정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자의(諮議) 박필주(朴弼周)가 상소하여 직명(職名)을 환수할 것을 청하였으나, 세자가 우악하게 비답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4월 3일 신사
유성이 천봉성(天棓星) 위에서 나와 건방(乾方)으로 들어갔다.
간원(諫院)에서 전에 계달한 것을 다시 아뢰고, 또 아뢰기를,
"평산 부사(平山府使) 이복휴(李復休)는 정령(政令)이 전도되고 청단(聽斷)이 혼미하여 잘못되고 있습니다. 연분(年分)을 정하면서 급재(給災)할 때에 결수(結數)를 많이 얻어냈으나 처음에는 1파(把)·1속(束)도 백성들에게 혜택이 미치지 않았으며 중간의 비용 때문에 징렴(徵斂)을 더욱 혹독하게 하였으니, 청컨대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였으나, 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헌부(憲府)에서 전에 계달한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세자가 김성발(金聲發)의 일만을 따랐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이 같이 들어왔는데 임금이 침맞기를 끝마치자, 김창집이 아뢰기를,
"헌신(憲臣)이 제물(祭物)의 물종(物種)을 미리 봉류(捧留)해 두자는 일을 논달(論達)하여 준하(準下)받았었는데, 대저 제물을 미리 받아들여 창고에 납입할 수 없는 것은 그 물종이 상하거나 변질되기 때문입니다. 대간에서 말한 것이 이와 같지만, 이는 이미 증험해 본 일입니다. 다만 1개월을 기한으로 삼아 미리 받아서 창고에 납입해 두는 것이 사의에 맞을 것 같습니다."
하고, 제조 민진후(閔鎭厚)는 아뢰기를,
"제물을 미리 봉류(捧留)할 경우 시일이 조금 오래되면 상하거나 부패하게 되는 일이 많습니다. 편포(片脯)와 건시(乾柿)와 같은 물건을 이르러는 색깔과 맛이 더욱 쉽게 변하는데, 비록 1개월을 기한으로 삼더라도 또한 반드시 난처한 걱정이 있게 될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기한을 정하지 말고 다만 기일보다 며칠 앞서 골라서 봉진(封進)하게 함으로써 임시하여 구차스레 충당하는 걱정을 면하게 하는 것이 가장 적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좋다고 하였다. 김창집이 또 아뢰기를,
"통신사(通信使)를 지금 차출(差出)하여야 하는데 연로(沿路)에서 접대(接待)하는 것이 다른 사객(使客)에 비하여 지극히 우대하기 때문에 작은 고을에서 들어가는 경비도 수백 냥에 이르니, 마땅히 감생(減省)하는 방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고 민진후는 아뢰기를,
"통신사(通信使)가 지나가는 곳은 마치 난리를 겪은 것과 같으니, 지금 경비를 감생하더라도 또한 반드시 풍성하고 사치스러워질 것입니다."
하고, 도제조 이이명(李頤命)은 아뢰기를,
"통신사의 노자(奴子)도 삼중(三重)으로 된 자리를 깐다고 하니 그밖의 것은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바다를 건너는 사행(使行)은 실로 사생(死生)과 관계되기 때문에 이처럼 사치스럽게 접대하는 예가 있는 것이다. 신묘년127) 에도 경비를 억제하여 줄이자는 청이 있었으나 끝내 허락을 받지 못하였던 것은 또한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신들의 계달이 이와 같으니, 경비를 감생하도록 분부하되 너무 매몰한 지경에 이르지 말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동지 정사(冬至正使) 유명웅(兪命雄)·부사(副使) 남취명(南就明)·서장관(書狀官) 이중협(李重協)이 청나라에 돌아오니, 임금이 인견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황제의 조서(詔書) 내용이 황잡하여 귀일되는 점이 없으니, 태자가 복위(復位) 될리가 없다."
하니, 남취명이 아뢰기를,
"돌아올 때에 황제가 지은 가사(歌詞)를 얻어 보았는데, 그 말이 매우 처량하여 지기(志氣)가 쇠모(衰耗)한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고, 유명웅은 아뢰기를,
"신이 올 때에 들으니, 태후를 장사지낸 뒤에 마땅히 건저(建儲)128) 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심양(瀋陽)에 이르러 건저 때문에 회의하는 일이 있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고, 이중협은 아뢰기를,
"황제가 구경(九卿)에게 명하여 회의하게 하였는데, 태자를 복위하기를 청하는 내용으로 주청(奏請)하였다고 합니다."
하였다. 유명웅은 아뢰기를,
"신 등이 옥하관(玉河館)129) 에 도착하여 방물(方物)을 간심(看審)하니 손상된 것이 많았으나, 바깥으로 봉(封)한 것은 완연하여 손상된 곳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봉과(封裹)할 때 물건을 정하게 고르지 않았던 소치이니, 청컨대 이제부터 신칙하여 각별히 골라서 마련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같은 일이 계속되면 앞으로 일이 생길 것이 틀림없다. 각별히 물건을 골라서 마련하라는 내용으로 각사(各司)에 신칙하게 하라."
하였다.
4월 4일 임오
헌부에서 전에 계달한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세자가 이신룡(李臣龍)·이광조(李光朝)의 일만을 따랐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침을 맞기를 끝마치자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아뢰기를,
"을유년130) 의 《등록(謄錄)》에서는 금정(金井)131) 을 열고 발인(發靷)할 때에 승지를 파견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상례와 견주어 융쇄(隆殺)해야 할 절목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발인할 때에는 마땅히 승지를 보내어 따라가게 하는 일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승지에게 명하여 발인할 때에 따라가게 하였다.
4월 5일 계미
헌부에서 전에 계달한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세자가 박정빈(朴廷賓)·이제면(李濟冕)의 일만 따랐다.
이중협(李重協)을 지평으로, 김재로(金在魯)를 헌납(獻納)으로, 김상원(金相元)을 부응교(副應敎)로, 조상경(趙尙絅)을 부교리(副校理)로, 김상윤(金相尹)을 교리로 삼았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빈궁(嬪宮)의 발인이 있을 때에 백관들은 천담복(淺淡服) 차림으로 먼저 도성문 바깥으로 나아가 동서로 나누어 차례대로 서며, 전함 재추(前銜宰樞)·기로(耆老)·유생(儒生)들은 소복(素服) 차림으로 도성 바깥의 길옆에 차례대로 서는데, 혼백거(魂帛車)와 영어(靈轝)가 장차 이르면 부복(俯伏)하여 곡하고 재배(再拜)합니다. 반우(反虞)할 때에도 이와 같습니다."
하니, 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4월 8일 병술
달무리가 목성(木星)을 둘러 싸고, 유성이 저성(氐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다.
임금이 소현 세자빈(昭顯世子嬪) 강씨(姜氏)의 위호(位號)를 회복하게 하였다. 임금이 이미 강빈(姜嬪)의 옥사를 가지고 대신(大臣)과 2품 이상에게 의논하게 하였는데 모두 그 일이 원통하다고 하였다. 또 외방에 있는 대신들에게 물으니, 좌상 권상하(權尙夏)도 자신의 스승인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이 효종[孝廟]에게 아뢰었던 말을 인용하여 대답하였다. 임금이 드디어 하교하기를,
"내가 강빈의 옥사에 대해 마음속으로 슬퍼해 온 지가 오래 되었다. 작년에 조목별로 열거하여 개서(改書)해서 하교하였던 것은 그 단서를 열기 위해서였다. 금일에 이르러 경연에서 하교하여 자세히 말하였고, 친히 지은 세 절구(絶句)를 잇따라 내어 보여 조정에 있는 신하들로 하여금 나의 뜻을 다 알게 하였으니, 또한 미진한 남은 회포가 없다. 아! 하교 가운데 ‘은미한 뜻[微意]’이라는 두 글자는 우리 성조(聖祖)께서 측은하고 불쌍하게 여기시던 마음을 일찍이 잊은 적이 없었으므로 내가 ‘우러러 알고 있다[仰認]’라고 한 것이다. 아아! 원통함을 알고서도 그 억울함을 씻어주지 않는다면 이것이 옳은 일이겠는가? 나의 뜻이 먼저 정해지자 공의(公議)도 이와 대동(大同)하니, 신원(伸冤)하는 은전과 차례로 응당 행하여야 할 일을 빨리 유사(有司)로 하여금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리하여 예조께서 계청하기를,
"시호(諡號)와 길일(吉日)을 선택하고 예장 도감(禮葬都監)과 묘소 도감(墓所都監)의 당상관·낭관을 차출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초상 때와 다른 점이 있다고 하여 묘소 도감을 봉묘 도감(封墓都監)이라 고치고, ‘예장(禮葬)’이라는 두 글자를 고쳐 복위 선시 도감(復位宣諡都監)이라 하게 하였다.
공조 판서 민진원(閔鎭遠)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본청(本廳)에 【민진원이 바야흐로 진휼청(賑恤廳) 당상관의 관직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본청이라고 말한 것이다.】 본디 저장되어 있던 12만 곡(斛)의 미곡을 작년의 진휼(賑恤)에서 다 허비하였으므로 그 나머지는 단지 1만 7천여 곡뿐입니다. 그러나 지금 도하(都下)의 기근의 참상은 작년과 다를 바가 없어 이번 달에 들어선 뒤로는 집집마다 끼니를 잇지 못하여 사람들마다 굶주림을 호소합니다. 게다가 여역(癘疫)까지 크게 성행하여 사망하는 사람이 잇따랐으니, 보고 듣기에 진실로 슬프고도 가슴아픈 일입니다. 그러나 제 자신이 정승의 직임에 있으면서도 소매에 손을 넣은 채 멀뚱히 보고만 있으면서 우리 성상의 적자(赤子)들이 물과 불 가운데 빠져 아우성치는데도 이를 구제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신의 죄입니다. 작년에 진휼하는 정사를 베풀 때 매순차 때마다 발매(發賣)하는 곡식이 으레 6, 7천 곡이 듭니다. 지금 한 차례 발매하였으나 남은 것이 1만여 곡이니 이것은 후일 시급할 때의 수용에 대비할 수 있습니다. 사대부의 집들 가운데 더욱 심하게 굶주리는 자들에게는 또한 어떤 곡물이든지 미루어 옮겨다가 1천 곡을 한정하여 나누어서 대여해 준다면 급한 사정을 조금이나마 풀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본청에서는 원래 응당 받아들여야 할 세미(稅米)가 없기 때문에 미곡을 모으는 방도가 매우 어렵습니다. 십여 년 이래 삼남(三南)의 월과미(月課米)의 값을 받기를 청하여 그 잉여곡을 가져다가 진휼할 곡식으로 보충해 온 것이 매년 수천 곡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난번 대신이 아뢴 차자(箚子)로 인하여 훈국(訓局)에 빼앗겼으므로 본청에서는 이것을 잃은 뒤에 더욱 손을 쓸 방도가 없습니다. 진휼할 밑천의 중요함도 군수(軍需)에 못지 않은 것인데 더구나 지금은 피차에 완급(緩急)이 다르니, 진휼청에 환속시키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니, 세자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였다.
4월 9일 정해
왕세자가 하령(下令)하기를,
"지난해 역질(疫疾)이 치성하였을 때 경중(京中)에서 바야흐로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성상께서 특별히 진념(軫念)하시어 의사(醫司)에 명하여 의원(醫員)을 따로 정하고 약물(藥物)을 넉넉히 주어 구료하게 하였다. 지금도 이에 의하여 거행할 것으로 분부하고 또한 제도(諸道)에 신칙하여 각 고을로 하여금 상당한 약물을 지급하고 각별히 구료하게 하라."
하였다.
진사 서종손(徐宗遜) 등이 상소하여 윤선거(尹宣擧)의 서원을 철거하라는 명을 중지하도록 청하였는데, 소장이 승정원에 이르자 승정원에서 금령이 있다는 것으로 품달하고 물리쳤다.
황선(黃璿)을 지평(持平)으로, 황귀하(黃龜河)를 부수찬(副修撰)으로, 홍석보(洪錫輔)를 전라도 관찰사로 삼았다.
정언(正言) 성진령(成震齡)이 상서하였는데, 이르기를,
"신은 일개 신진(新進)으로서 경력(經歷)이 매우 적어 내외관(內外官) 가운데 누가 현명하고 누가 불초(不肖)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관(內官)을 논한다면, 혹 용렬한 무리들이 뒤섞여 있어 심지어 행동이 추잡하고 더러운 자들이 일찍이 아장(亞長)의 반열(班列)을 더럽히기도 하였습니다. 서연(書筵)의 관직은 양사(兩司)를 거친 자이면 모두 할 수가 있는데, 이들이 어찌 모두 세자를 보도(輔導)할 수 있는 재능을 지겠습니까? 은대(銀臺)132) 의 직임은 당상관으로 오르는 자이면 의망(擬望)을 거치지 않은 경우가 적은데, 어찌 이들이 모두 출납(出納)의 중책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육조(六曹)의 장관과 차관을 재주와 기량이 적당한지를 살피지 않는데, 전선(銓選)을 맡은 자가 모두 군사를 맡을 수 있고 예(禮)를 맡은 자가 또한 형벌을 맡을 수 있으니, 진실로 그들이 능통한 재능을 지니지 않았다면 어찌 일을 그르치는 탄식이 없겠습니까? 일반 관사의 직책에 이르러서도 스스로 고상하게 여기는 자는 멋대로 노니는 것만을 숭상하여 전혀 일을 살피지 않고 있고, 용렬한 자는 자품(資品)의 높고 낮음과 뇌물의 유무만을 헤아리므로 서리(胥吏)들은 이를 인연하여 농간을 부림에 있어 못하는 짓이 없습니다.
오늘날 나라일의 한심스러움이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는데, 묘당(廟堂)에서 우모(訏謨)를 논하는 지위에 이르러서도 보궤(簠簋)133) 의 비난이 있는 자와 임금의 뜻에 영합(迎合)한다는 기롱을 받은 자들이 도리어 높은 자리를 버젓이 차지하고 앉아서는, 바야흐로 그럭저럭 얼버무리는 것을 재상의 직업으로 여기고 당론을 조정(調停)하는 것을 집안을 보전하는 계책으로 삼고 있으니, 여러 가지 정사가 번잡하게 엇갈리고 온갖 법도가 바르게 되지 못하는 것이 뭐가 괴이하겠습니까? 외방의 수령(守令)들을 논한다면 적격자가 아닌 사람이 많아서 오로지 사리 사욕을 채울 방도만을 생각하고 있고, 변장(邊將)과 진수(鎭帥)들은 탐욕스럽기가 더욱 극심합니다. 수령을 출척(黜陟)하는 권한은 방백(方伯)134) 에게 있고 변장을 통솔하는 책임은 곤수(閫帥)135) 에게 있는데, 그들이 자신을 제재하고 일을 행하는 것이 수령이나 변장들과 그리 다르지 않으니, 또한 어떻게 출척하는 도리를 밝히고 통솔하는 방법을 극진히 할 수가 있겠습니까? 문신(文臣) 가운데 옥관자(玉貫子)를 띤 자는 모두 관찰사로 천거될 수 있고 무부(武夫)로서 품계가 높은 자는 모두 곤수[閫寄]의 중책에 제수될 수 있으니, 수령과 변장에 적격자가 없는 것은 또 괴이하게 여길 것도 없습니다.
성지(城池)의 설치는 나라를 튼튼히 하고 변환(邊患)을 방비하기 위한 것이지만, 인화(人和)가 최상이고 지리(地理)가 그 다음인 것입니다. 북한산성(北漢山城)은 설립하던 초기부터 사람들이 모두들 ‘바깥은 비록 험조(險阻)하지만 안은 여러 사람을 수용하여 보호하고 지킬 만한 형세가 못된다.’고 하였는데, 지금 탕춘(蕩春)을 증축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지만 만일 위급한 일이 발생하여 적이 도성(都城)으로 들어와 점거할 것 같으면,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마치 성벽(城壁) 사이에 들어가 있는 것과 같게 되니, 이는 자멸하는 방술인 것입니다. 비록 축조한 뒤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불편한 것을 깨달았다면 단연코 이를 포기하는 것이 옳은데, 지금은 이를 경영(經營)하기를 그만두지 않음으로써 재물을 손상시키고 백성들을 괴롭혀 거듭 인화(人和)를 잃게 하고 있으니, 신은 진실로 그 뜻은 정성스럽지만 계책이 졸렬한 것을 슬퍼합니다.
우리 나라의 전정(田政)은 소루한 점이 많은데, 삼남(三南) 지방에 양전(量田)하라는 명을 내린 것은 이러한 데서 나온 조처인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 흉년이 든 끝에 백성들이 정상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으니, 조용히 배양해도 오히려 보전하기가 어려울까 두려운데 거듭 번잡하고 소란스럽게 하기에 이르니, 실로 편안하게 하는 방도가 못됩니다. 계묘년136) 에 양전할 때만 해도 인심이 예스러웠는데도 등급을 매기는 데 있어 적당하게 하지 못한 폐단이 있었는데, 하물며 지금은 인심의 교활함이 계묘년보다도 더한데야 말해 뭐하겠습니까? 뇌물이 분분하고 청탁이 잇따라 부민(富民)과 호족(豪族)의 전지는 비옥한데도 척박하게 만들고 넓은데도 좁게 만드는 반면, 빈민(貧民)과 잔호(殘戶)의 전지는 하등을 혹 상등으로 만들고 작은 것을 혹 크게 만드니, 그 폐단이 양전(量田)하지 않을 때보다 더하지 않을 것이라고 기필할 수 없습니다. 저하께서는 위로 성상께 품지하고 아래로 신하들에게 하문하시어 자세히 살피소서."
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상서(上書)에서 대소 관원이 침핍받지 않은 이가 없었는데, 혹 명백한 구별이 부족하기도 하고 혹 칭정(稱停)이 부족하기도 하였다. 보궤(簠簋)의 비난 등에 이르러서는 비웃고 배척하는 말이 허다하였는데, 이것은 오로지 우상(右相)을 지목한 것이다. 그런데 말의 뜻이 지극히 심각하여 기필코 공격하여 제거하고자 하였으니, 진실로 괴이하고 놀랍다. 양전을 갑자기 시행하기가 어렵다는 말 또한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겠다. 북한산성의 일은 성상께서 신충(宸衷)으로 결단하시어 마침내 대계(大計)를 정한 것이고 이어 대신들에게 명하여 그 일을 관장하도록 하였으니, 금일의 신자(臣子)가 된 자로서 어떻게 감히 이것을 혁파하자는 말을 입에서 꺼낼 수가 있겠는가? 일이 한심하기가 이보다 심한 것이 없다."
하였다.
우의정 조태채(趙泰采)가 옥당(玉堂)의 차자(箚子)에서 자기를 비난하는 말이 있었다는 것으로 연달아 병이라고 핑계하고 정고(呈告)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도성 바깥으로 피하여 나갔는데, 길을 바꾸어 과천(果川)으로 향하였다.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을 보내어 세자빈에게 ‘단의(端懿)’라는 시호를 내렸다고 태묘(太廟)에 고하였다.
4월 10일 무자
김창집(金昌集)을 복위 선시 도감 도제조(復位宣諡都監都提調)로, 권상유(權尙遊)·김흥경(金興慶)을 제조로, 민진원(閔鎭遠)·유명웅(兪命雄)을 봉묘 도감 제조(封墓都監提調)로 삼고, 각 도감에서 낭청(郞廳) 6인을 차출하였다.
정언(正言) 성진령(成震齡)이 어제 미안한 비답(批答)이 있었다 하여 인피(引避)하면서 아뢰기를,
"오늘날 대신(大臣)들이 여망(輿望)에 부응(副應)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식자(識者)를 기다리지 않고서도 알 수 있습니다. 보궤(簠簋)와 영합(迎合)에 관한 비난은 경재(卿宰)로 있을 때부터 이미 나라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았었습니다. 그랬는데 태보(台輔)의 자리에 올라 작의(爵位)가 이미 극도에 이르렀는데도 나라를 바로 잡을 계책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한 몸만 보호할 방도를 생각하여 온갖 계책을 헤아린 끝에 혹 후일 국면이 번복(飜覆)될 것을 염려하여 어물어물하는 작태를 연출하여 흑백(黑白)의 구분을 미란(迷亂)시키기도 하고 곡진하게 석방시킬 것을 청하여 한쪽편 사람에게 아첨하기도 하였습니다. 서원(書院)을 철거하는 일을 정지하자고 청한 데에 이르러서는 그의 정적(情跡)이 다 드러났는데, 신이 이른바 가부를 얼버무리고 당론을 조정한다고 한 것은 이것을 가리킨 것입니다. 아! 얼버무리는 것은 원만하고 후덕한 것 같고 조정하는 것은 공평(公平)에 가까운 것 같지만, 이익을 추구하고 손해를 피하려는 사심(私心)을 미루어 보건대, 반드시 권세가 군자(君子)에게 있게 되면 군자에게 빌붙을 것이고 권세가 소인(小人)에게 있게 되면 소인에게 빌붙을 것이니, 이렇게 이합(離合)하고 반복(反覆)할 즈음에 국기와 세도(世道)에 해를 주는 것이 이루 말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당초 복상(卜相)137) 할 때도 물정(物情)이 이미 해괴하게 여겨 탄식하였습니다만 아직 한 사람도 이를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소문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는 성대한 세상의 수치가 되는 것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신이 한 몸의 화복(禍福)을 헤아리지 않고 망령스럽게 논열(論列)한 것은 국가와 세도를 위하는 데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이해(利害)는 조야(朝野) 공공의 논의에서 나온 것입니다. 아장(亞長)과 관찰사에 대해서는 정말로 지척할 자들이 있습니다. 저하께서 반드시 듣고자 하신다면, 이정주(李挺周)처럼 추악하고 더러운 자가 일찍이 아장(亞長)의 직임에 의망(擬望)되었었고 홍호인(洪好人)처럼 경망한 자가 일찍이 관찰사에 의망되었던 것이 그것이니, 외람되고 난잡한 폐단을 어찌 면할 수 있겠습니까? 양전(量田)을 시행하기 어렵다는 말은 곧 삼남(三南) 지방의 번거롭고 소란스러운 폐단을 염려한 것이니, 우선 서서히 늦추어 행하더라도 또한 백성들을 휴양시키는 방책에 어긋나지 않을 것입니다. 저하께서 깊이 몸받아 궁구하신다면 또한 신의 말이 망령스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세자가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으나, 성진령은 물러가서 물론(物論)을 기다렸다. 이리하여 양사(兩司)의 대관(臺官)들이 성진령의 소장에 ‘대간의 기풍이 위축되었다.’고 논급(論及)된 것을 이유로 서로 잇따라 인피(引避)하면서 출사(出仕)하여 처치(處置)하려고 하지 않은 것이 무릇 10여 일이나 되었다. 장령(掌令) 김만주(金萬胄)가 비로소 처치(處置)하기를,
"혐의로 무릅쓰고 논열하면서 오로지 괴란(壞亂)시키기를 일삼았으니, 공의(公議)에 있어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성진령을 체직시키고 여러 대관은 모두 출사(出仕)하게 하소서."
하니, 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 신임(申銋)을 보내어 세자빈(世子嬪)에게 시책(諡冊)을 내렸는데, 시책문에 이르기를,
"동궁[承華]이 내조(內助)의 상을 당하니 애도하는 마음 바야흐로 간절하고, 절혜(節惠)의 은전은 옛날부터 있었던 떳떳한 전장(典章)이니 의당 속히 표창하여 드러내야 한다. 이에 시책(諡冊)을 드러내는 일을 거행하여 아름다운 칭호(稱號)를 내린다. 생각건대 그대 세자빈은 타고난 성품이 아름다워 일찍이 세자의 빈(嬪)이 되었다. 일문(一門)에서 양후(兩后)의 성대한 덕을 이어받으니 휘음(徽音)을 잘 계승하였고, 큰 혼인[大婚]은 만복의 근원이니 진실로 아름다운 부인[佳婦]에 걸맞도다. 궁궐에 들어온 이후로부터 더욱 예절을 따르는 데 어김이 없음을 알았다. 가정에서 어버이를 섬기던 정성을 미루어 삼가 양전(兩殿)을 봉양하였고, 군자(君子)가 처음 시작할 때 조심하는 뜻을 몸받아 삼가 한 몸을 신칙하였다. 덕행을 숨기고 바깥 사람에게 드러내보이지 않았으나 아름다운 행동이 저절로 평상시에 드러났다. 자화(慈化)를 도와서 숙옹(肅雍)의 아름다움에 이르게 했고, 음교(陰敎)를 도와서 절검(節儉)하는 기풍을 밝혔도다. 효도는 어버이의 안색을 살피는 데 돈독하니 사랑이 용색(容色)에 나타났고, 시탕(侍湯)하면서 깊이 근심하니 정성이 또한 궁정(宮庭)에 미더웠도다. 중한 병을 여러 해동안 앓았으나 주야로 조심하여 해이한 적이 없었다. 은혜가 아래에까지 미쳤으나 아직 사알(私謁)을 행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고, 아름다운 덕이 마음속에 있으니 어찌 내전(內殿)을 바르게 다스리기가 어려웠겠는가? 종사(宗事)를 훌륭하게 돕기를 바라고 복리(福履)를 끝까지 누리기를 기대하였더니, 어찌 상천(上天)은 믿기가 어려운 것이어서 갑자기 숙질(淑質)138) 이 서거(逝去)할 줄이야 생각이나 했겠는가? 하루 저녁 창황한 가운데 유명(幽明)을 달리하여 세 번 이름불러 초혼[皐復]하니 마치 꿈속인 것처럼 아련하도다. 목숨이 길고 짧은 것은 운수가 정해져 있는 것이니, 어찌 의원의 기술이 좋지 아니한 탓이겠는가? 빈렴(殯斂)하는 데에 친림(親臨)하지 못하니, 더욱 병든 마음의 아픔을 억제하기 어려움을 깨닫도다. 더구나 종사(螽斯)의 경사(慶事)139) 를 거두기를 바랐으니, 동궁[鶴禁]이 그 슬픔을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목숨을 맡은 권한을 누가 주관하는가? 선한 사람에게 복주는 이치를 헤아리기가 어렵도다. 아침저녁으로 침전에 문안하는 번화하고 성대한 의절(儀節)을 다신 보지 못하겠는데, 시일이 정해졌으므로 어언 광중[窀穸]에 하관하는 일이 있게 되었다. 진실로 역명(易名)140) 하여 사실을 기록하지 아니한다면 어찌 유택(幽宅)을 꾸미고 방명(芳名)을 전할 수 있겠는가? 행실을 말한다면 예의(禮義)로 스스로를 부지했고 덕을 말한다면 온유(溫柔)함을 근본으로 삼았다. 이에 의정부 우참찬 신임을 보내어 그대의 시호(諡號)를 ‘단의(端懿)’라고 내리노라. 아아! 비록 의형(儀形)은 이미 없어져 천경(泉扃)에까지 따라갈 수 없지만 징거할 수 있는 행적은 길이 간책(簡策)에 남으리로다. 정령(精靈)이 앎이 있거든 총명(寵命)을 흠향하도록 하라. 아아! 슬프도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敎示)하노니, 잘 알지어다."
하였다. 【대제학 송상기(宋相琦)가 찬하고, 형조 판서 이건명(李健命)이 썼다.】
【태백산사고본】 69책 61권 30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15면
【분류】왕실-궁관(宮官)
[註 138] 숙질(淑質) : 세자빈을 가리킴.[註 139] 종사(螽斯)의 경사(慶事) : 왕자(王子)를 탄생하는 경사임, 《시경(詩經)》 주남(周南) 종사장(螽斯章)을 말한 것으로, 문왕(文王)의 비(妃)인 태사(太姒)가 덕이 많고 시기심이 없어 왕손이 종사처럼 번성한 것을 노래한 것임. 종사는 여치과에 속하는 곤충으로 알을 많이 낳음.[註 140] 역명(易名) : 시호를 내림.
4월 11일 기축
임금이 하교하기를,
"소현 세자빈(昭顯世子嬪)의 위호(位號)를 이미 회복시켰으니, 시책(諡冊)을 선포하고 묘(墓)를 봉하는 일을 일시에 거행하는 것이 사체에 진실로 마땅하다. 그러나 여역(癘疫)이 바야흐로 치성하고 풍재(風災)와 한재(旱災)가 또 극심한데다가 삼도감(三都監)에서 대역(大役)을 치렀으니 백성들의 일을 생각하면 실로 불쌍하고 애처롭다. 따라서 참작하여 변통(變通)하는 방도가 없을 수가 없으니, 시호를 선포하는 전례는 먼저 즉시 길일(吉日)을 택하여 하고, 묘를 봉하는 역사(役事)는 가을을 기다려 거행하라. 정자각(丁字閣)을 세우기 전에는 절기의 제사는 장궁(帳宮)을 설치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우의정 조태채(趙泰采)가 과천(果川)에 있으면서 녹사(錄事)를 시켜 명소패(命召牌)를 봉하여 바치니, 임금이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되돌려 주게 하였다. 세자가 승지를 보내어 유시하기를,
"내가 하찮은 몸으로서 만기(萬機)를 대신하여 다스리고 있으므로 주야로 전전긍긍하면서 편안하게 거처할 겨를이 없다. 더구나 지금은 재이(災異)가 거듭 이르러 백성들의 걱정이 더욱 심하니,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다시 어떠하겠는가? 이러한 때에 도움받아 정사를 이룰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대신에게 있는 것인데, 나라를 몸처럼 여기는 경의 정성에 있어 협보(夾輔)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고 갑자기 대간의 과격한 말로 인하여 기필코 몸을 받들어 은퇴하고자 하니, 이것이 어찌 내가 경에게 바라던 바이겠는가? 그때 경연(經筵)에서 아뢴 것은 다른 뜻이 없었다는 것을 성상께서 이미 통촉하셨으니, 더욱 마음 편치 못할 단서가 될 것이 없다. 또 성진령(成震齡)의 상서(上書)에서 지척한 말도 진실로 비상한 것이었는데다가 인피(引避)하는 글도 더욱 돌아볼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그가 있는 힘을 다하여 능멸을 가함으로써 기필코 공격하여 제거한 뒤에야 그만두고자 하니, 진실로 해괴하다. 그가 없는 사실을 날조한 것은 성상께서도 모두 통찰하셨으니, 어찌 마음에 두고 전전 반측(輾轉反側)하면서 불안해 할 것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결연히 서울을 떠나려고 하니 더욱 서운하다."
하였다.
윤봉조(尹鳳朝)를 응교(應敎)로, 연령군(延齡君) 이헌(李憲)을 도총관(都摠管)으로, 유명웅(兪命雄)을 우참찬으로 삼았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고(故) 상신(相臣) 강석기(姜碩期)의 부인 신씨(申氏)를 복작(復爵)시키고 상신에게는 치제(致祭)하게 하라. 강문명(姜文明) 등도 모두 복관(復官)시키라."
하였다.
4월 13일 신묘
달이 토성(土星)을 범하였다. 달무리가 목성(木星)을 둘러쌌다.
김상직(金相稷)을 승지로, 이택(李澤)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4월 14일 임진
예조에서 아뢰기를,
"전에 단종 대왕(端宗大王)과 정순 왕후(定順王后)를 복위(復位)시키고 그 시호(諡號)를 의논한 뒤에 옛 신주(神主)를 그대로 사가(私家)에 모시는 것은 미안하다는 것으로 대신들에게 의논하여 시민당(時敏堂)으로 옮겨 봉안(奉安)하고 이어 새로 신주를 고쳐서 쓰게 하였습니다. 이번 소현 세자빈(昭顯世子嬪)도 이미 복위시켰으니, 옛 신주를 사가에 그대로 모실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시호를 내리고 신주를 고쳐 쓸 장소를 어디로 정하여 거행하여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이현궁(梨峴宮)은 지금 공가(公家)에서 관리하는 궁(宮)으로 되어 있으니, 옛 신주를 그 곳으로 옮겨 봉안(奉安)하였다가 시호를 내리고 신주를 고쳐 쓴 뒤에 마땅히 소현궁(昭顯宮)에 합쳐 모셔야 할 것이다. 이에 의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제조 민진후(閔鎭厚)가 아뢰기를,
"고 감사 김홍욱(金弘郁)은 사람들이 어렵게 여기는 것을 말하다가 원통한 죽음을 당하는 데에 이르렀기 때문에 효종 대왕(孝宗大王)께서 특별히 그 관작(官爵)을 회복시켜 주었던 것입니다. 지금 강빈(姜嬪)을 복위(復位)시킨 뒤에도 포상하고 추증(追贈)하는 은전을 베풀어야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도제조 이이명(李頤命)에게 하문하였는데, 이이명이 아뢰기를,
"효종께서 그가 원통하게 죽은 것을 불쌍히 여기시어 이미 관작을 회복시키도록 허락하셨으니, 지금 이 일을 신원(伸冤)시키는 때에도 증직(贈職)하는 방도가 있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여 정 2품의 관직에 추증하게 하였다. 이이명이 또 아뢰기를,
"강빈(姜嬪)을 장사지낸 산이 금천(衿川)에 있는데, 당시 일이 창졸한 가운데에서 나왔으므로 미처 좋은 땅을 가리지 못하였기 때문에 장지가 안온(安穩)한지의 여부를 이미 알 수가 없습니다. 또 그 혈(穴)의 앞이 매우 짧아 상석(象石)을 설치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자손들의 말을 들으니 ‘비록 소현 세자의 무덤에 합장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쌍분(雙墳)으로 만든다면 신도(神道)를 위안할 수가 있고 따라서 나라의 힘을 감하여 줄일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합부(合祔)한다면 신리(神理)에 있어 진실로 편안할 것이지만, 폐단을 줄이는 방도도 어찌 편리하고 좋지 않겠는가? 다만 세월이 73년이나 오래 되어 지하의 일을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망설였었다. 도감(都監)으로 하여금 두 무덤을 봉심(奉審)한 뒤에 품처하게 하라."
하였다. 이이명이 아뢰기를,
"고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권전(權專)은 곧 현덕 왕후(顯德王后)의 아비입니다. 장릉(莊陵)141) 이 복위된 뒤에 특별히 권전의 관직도 회복하였는데, 그 묘표(墓表)에 판 중추원사로 쓰여 있었기 때문에 비석에 쓴 것에 따라서 관직을 회복시켰습니다. 소릉(昭陵)을 복위시킨 뒤에는 마땅히 부원군(府院君)으로 증직하여야 하는데, 그 자손들이 영락(零落)하여 선조들의 사직을 상세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다만 비에 새긴 것에 따를 뿐이라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여 부원군(府院君)으로 증직하게 하였다. 이이명이 또 아뢰기를,
"성진령(成震齡)이 우상(右相)을 배척하는 글에서 말하기를 ‘매복(枚卜)142) 할 때에 물정(物情)이 이를 해괴하게 여겼습니다.’고 하였는데, 신도 당초 매복할 때 참여하였으니, 대간의 말이 이와 같다면 어찌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우상이 평일 나라를 몸처럼 여기는 정성을 나도 자세히 알고 있다. 중간에 낙복(落卜)143) 한 것도 나는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어찌 매복(枚卜)에 합당하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그런데 성진령이 너무도 여지없이 능멸하였으니, 사체에 있어 어찌 이럴 수가 있겠는가? 경에게는 조금도 불안해 할 단서가 없다."
하였다. 이이명이 아뢰기를,
"작년에 신이 창졸한 가운데 명을 받든 죄를 신도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영부사(領府事) 윤지완(尹趾完)이 소장을 올려 논열하였는데, 이것은 행적만 보았을 뿐 본심을 헤아리지 못한 소치에 지나지 아니합니다. 지난날 경연(經筵)에서 우상이 월름(月廩)을 수송(輸送)하자고 청하였으나 준청(準請)을 받지 못하였다고 하는데, 윤지완은 나이 80세가 넘었습니다. 조정에서 은혜롭게 돌봐줄 남은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를 대우하는 것을 마땅히 박절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성상께서 명하여 월름을 지급하게 하면 실로 성덕(聖德)에 빛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때 여러 신하들 가운데 소장을 올린 자가 많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다. 나이가 어린 자들이 과격한 말을 하는 것은 진실로 괴이할 것도 없겠으나, 영부사는 백발이 성성한 대신으로서 곧 조정을 괴란시킬 계책을 가졌었다. 사신(私臣)이라고 배척한데 이르러서는 더욱 말을 가려서 하지 않은 것이므로 나도 옳지 않게 여기고 있다. 그러나 대신의 말이 이와 같으니, 월름을 수송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고 상신(相臣) 강석기(姜碩期)의 아들들이 태반은 비명에 죽었고 그 손자 강후망(姜後望)은 나이가 곧 80세가 됩니다. 그런데 이런 날을 만나게 되었으니, 어찌 천운(天運)이 아니겠습니까? 그가 죽기 전에 그에게 일명(一命)144) 의 벼슬을 내리신다면 실로 성대(聖代)의 아름다운 일이 될 것입니다. 고 감사(監司) 김홍욱(金弘郁)은 이미 관작이 회복되었다고 하지만 이처럼 본일을 신원(伸冤)하는 때에 이르러 특별히 사제(賜祭)하도록 명하고 인하여 관작과 시호를 추증함과 아울러 종손(宗孫)을 수록(收錄)하여 표장(表章)하는 뜻을 보이시는 것이 또한 합당할 것 같습니다. 또 삼가 생각하건대, 우상(右相)이 당한 것은 진실로 망극하기가 그지없는 일입니다. 대저 대신[大僚]을 거론하여 비난하는 것은 사체가 또한 본디 가볍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지적한 사실이 없이 범연하게 보궤(簠簋)라느니 영합(迎合)이라느니 하는 따위의 말을 하면서 일필(一筆)로 단정하여 곧바로 소인이라고 지목하고서도 조금도 의심하거나 어려워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돌아보건대, 지금 재황(災荒)이 극심하여 어려운 일이 매우 많은데 낭묘(廊廟) 사이에는 늙고 병든 한 사람의 미신(微臣)이 있을 뿐이니, 국사(國事)를 생각하면 절로 탄식이 납니다. 마땅히 돈면(敦勉)하여 기필코 되돌아오게 하소서. 그가 서원(書院)을 철거하자는 의논을 정지하도록 청하였을 적에 신도 실제로 참여하여 들었는데, 지금 동료 정승이 이 때문에 자리를 물러간다면 신도 어찌 감히 태연하게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말한 바가 합당하다. 어찌 그 말에 따라 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김홍욱을 정경(正卿)에 추증하는 일에 대해서는 이미 성명(成命)이 있었으니 사제(賜祭)하는 것과 종손을 수록(收錄)하는 일도 모두 해조(該曹)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 성진령이 인피하는 글에서 우상을 여지없이 배척하였으니, 공격하고 동요시키려는 계책이 매우 놀랍다. 따라서 그가 없는 사실을 날조한 것을 내가 이미 통촉하였으니, 오로지 힘써 우상을 출사(出仕)하게 하도록 기약하겠다."
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유(李濡)가 북성(北城)의 일로 인하여 성진령의 상소에서 배척당하였다는 것을 이유로 상서(上書)하여 면직시켜 줄 것을 청하였으나, 세자가 우악한 비답을 내려 위유(慰諭)하였다.
4월 15일 계사
왕세자가 빈궁(殯宮)에 나아가 곡림(哭臨)하였다.
단의빈(端懿嬪)의 빈궁(殯宮)에서 계빈례(啓殯禮)를 행하였다.
4월 16일 갑오
축시(丑時)에 단의빈(端懿嬪)의 발인(發靷)을 행하였다.
애책문(哀冊文)에 이르기를,
"조전(祖奠)을 단사(丹戺)에서 행하니 뜰에는 소복(素服)한 호위(護衛)가 나열되었고, 새벽에 동궁[鶴關]을 바라보니 신이(蜃轜)145) 가 먼저 출발할 준비를 하고 있도다. 생각건대 우리 주상 전하께서 빛나는 의표(儀表)가 그친 것을 슬퍼하고 전성(前星)146) 이 짝을 잃은 것을 애도하여 자애로운 성정(聖情)에 답답하게 여긴 나머지 의범(懿範)이 가리워질까 염려하였으므로 이에 전책(典冊)를 상고하여 널리 보이기를 도모한다. 그 사(詞)의 내용은 이러하다. 상제(上帝)께서 우리 동방(東方)을 돌아보아 돈독하게 원량(元良)을 태어나게 하였는데 도지(塗摯)147) 의 가문이 있어 운봉(雲鳳)의 상서로움을 바치니, 하늘이 정해 준 배필이라 정말로 좋은 짝이었다. 타고난 마음이 효우(孝友)스럽고 자품이 온순하고 부드러웠다. 즐겁게 이궁(二宮)148) 을 받듦에 있어 삼조(三朝)149) 의 예법을 경건히 했도다. 나태한 용모를 짓지 아니하니 검소한 덕이 더욱 빛났고, 화한 마음을 품고 꽃다운 덕을 쌓으니 뜻은 겸양하는 데 있도다. 시(詩)를 묻고 예(禮)를 익힘150) 에 있어서 규범을 따랐고, 20년 동안 공경하고 근신하기를 하루같이 하였다. 비록 병환에 걸렸으나 아름다운 법도는 어긋남이 없었으며, 성후(聖后)께서 승하하셨을 때는 통절한 마음으로 깊이 사모하였도다. 옥후(玉候)가 미령하시자 깊은 정성에 자신이 대신하고자 하였으니, 온갖 행동의 근원은 전의 역사에서도 보기가 드물었도다. 동궁이 정사를 대리(代理)하자 사방에서 눈을 닦고 세자빈이 음교(陰敎)를 도와 우리 왕화(王化)의 기반을 다져 주기를 바랐는데, 신명(神明)이 돕지 아니하여 흉한 소문이 갑자기 전파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아침에 괜찮다고 하더니 저녁에 위중하여 일찍이 시각을 넘기지 못하매 탕약을 베풀기도 어려우니, 유부(兪跗)와 편작(扁鵲)151) 의 의술도 소용없도다. 아아! 슬프도다. 천리(天理)에 혹 잘못이 있어도 하늘에 물을 수가 없도다. 궁독(弓韇)152) 이 징험이 없어 난계(蘭桂)153) 가 떨어지니 관대(觀臺)154) 에서 갑자기 흉한 조짐을 고하도다. 선로(仙路)155) 가 멀어서 따라갈 수 없는데, 의상(衣裳)은 완연하여 살아 있는 것 같고, 환패(環珮)를 맡긴 것이 마치 잃어버린 것만 같으니, 아아! 슬프도다. 청춘(靑春)을 쉽게 버리시고 먼 후일을 기약하니, 경대에는 먼지가 끼고 집안의 유악(帷幄)에는 향기가 그쳤도다. 동위(銅闈)156) 가 고요하니 달빛이 희미하고, 해곡(薤曲)157) 이 처량하니 바람이 슬프도다. 궁관(宮官)들이 비오듯이 눈물을 흩뿌리는 것은 무궁한 뒷날의 사모를 붙인 것이로다. 아아! 슬프도다. 저 새로운 무덤이 오릉(五陵)의 가운데에 있으니, 신도(神道)가 화협하고 지리(地理)가 상쾌하도다. 다행히 열성조(列聖祖)와 서로 가까와서 부드러운 아름다운 기운을 접하게 되었도다. 아! 현궁(玄宮)의 빗장을 한번 닫으니, 긴긴 밤에 새벽이 오지 않는 것을 슬퍼하도다. 아아! 슬프도다. 현기(玄機)는 도는 것이고 화운(化運)이 옮기는 것이어서 오래 살고 일찍 죽는 것은 일정하지 않으나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이 함께 돌아가는 것이다. 생각건대 하늘에서 낸 아름다운 법도를 지녔으니 궁양(穹壤)158) 에서도 폐지되지 아니할 것이로다. 동관(彤管)159) 에게 부탁하여 슬픈 사연을 적게 하여 아름다운 유모(猷謀)를 내세(來世)에 남기는 바이다. 아아! 슬프도다."
하였다.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 이건명(李健命)이 찬하고, 여성군(礪城君) 이집(李楫)이 썼다.】
【태백산사고본】 69책 61권 32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16면
【분류】왕실-의식(儀式)
[註 145] 신이(蜃轜) : 세자빈의 상여(喪與).[註 146] 전성(前星) : 세자를 가리킴.[註 147] 도지(塗摯) : 도(塗)는 도산씨(塗山氏)의 여와(女媧)를 가리키는 말로 우(禹)임금의 비(妃)이고, 지(摯)는 지중씨(摯仲氏)인 태임(太妊)을 가리키는 말로 문왕(文王)의 아버지인 왕계(王季)의 비(妃)임.[註 148] 이궁(二宮) : 대전과 궁중전.[註 149] 삼조(三朝) : 하루 세 번 문안하는 것.[註 150] 시(詩)를 묻고 예(禮)를 익힘 : 심기(心氣)를 화평하게 하고 덕성(德性)을 굳게 한다는 뜻으로, 《논어(論語)》 계씨편(季氏篇)에 나오는 말임. 공자(孔子)가 아들 백어(伯魚)에게 "시(詩)를 배우지 않으면 말을 할 수 없고 예(禮)를 배우지 않으면 행세할 수 없다."고 한 데에서 인용했음.[註 151] 유부(兪跗)와 편작(扁鵲) : 유부는 황제(黃帝) 때 있었다는 유명한 의원(醫員)이고, 편작은 전국 시대(戰國時代) 때 있었던 용한 의원임.[註 152] 궁독(弓韇) : 기도드리는 것을 말함.[註 153] 난계(蘭桂) : 세자빈을 가리킴.[註 154] 관대(觀臺) : 관상감을 가리킴.[註 155] 선로(仙路) : 저승길을 말함.[註 156] 동위(銅闈) : 세자빈의 궁전을 가리킴.[註 157] 해곡(薤曲) : 상여가 떠날 때 부르는 노래.[註 158] 궁양(穹壤) : 저승을 말함.[註 159] 동관(彤管) : 사관(史官)을 가리킴.
4월 17일 을미
정석오(鄭錫五)를 검열(檢閱)로 삼았다.
임금이 명하여 2품 이상을 빈청(賓廳)에 불러 의논하게 하여 소현 세자빈(昭顯世子嬪) 강씨(姜氏)의 시호를 ‘민회(愍懷)’라고 정하였는데, 이는 백성들로 하여금 그가 지위를 잃고 죽은 것을 슬퍼하고 가슴아파하게 만들었다는 내용의 글에서 취한 것이다.
4월 18일 병신
단의빈(端懿嬪)의 장례를 행하였다. 이날 반우(返虞)할 적에 세자가 빈궁(殯宮)에 곡림하였다.
전라도 감사 홍치중(洪致中)이 정장(呈狀)하기를,
"도내의 동복현(同福縣)과 옥과현(玉果縣)에 대해 처음에는 풍토병으로 인하여 그 과기(瓜期)160) 를 줄였었는데 지금은 수토(水土) 때문에 병이 생기지 아니하니, 청컨대 다시 6년을 과기로 정하소서."
하였는데, 비국(備局)에서 복주(覆奏)하니, 허락하였다.
충청도 각 고을의 백성들 가운데 여역(癘疫)으로 사망한 사람이 3천 68명이었는데, 도신(道臣)이 보고하였다.
4월 20일 무술
임금이 하교하기를,
"숙빈(淑嬪)의 장지를 간심(看審)할 때 내관(內官) 장후재(張厚載)가 범연히 광주(廣州)의 경내에서 묘산(墓山)을 얻었다고 진달(陳達)함으로써 은연중 법금을 무시하고 명선 공주(明善公主)·명혜 공주(明惠公主)의 묘산(墓山) 내의 청룡(靑龍)의 터에 입장(入葬)하려는 계책을 세웠으니, 일이 해괴하기가 이보다 심할 수가 없다. 파직시키고 관원을 더 정하라. 그들로 하여금 우선 들어오도록 하고 다른 산을 바꾸어 구하게 하라."
하였다.
비변사(備邊司)에서 민진원(閔鎭遠)·권상유(權尙游)를 양전 구관 당상(量田勾管堂上)으로, 김동필(金東弼)·박사익(朴師益)·김재로(金在魯)를 종사관으로 삼았다.
4월 21일 기해
김만주(金萬胄)를 장령(掌令)으로, 조상경(趙尙絅)을 부수찬(副修撰)으로, 김상윤(金相尹)을 수찬으로 삼았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판부사(判府事) 서종태(徐宗泰)가 같이 들어와서 임금의 수부(手部)에 있는 어제(魚際)와 족부(足部)에 있는 연곡(然谷)의 좌우혈(左右穴)에 침을 맞기를 끝마치자, 서종태가 아뢰기를,
"빈궁(嬪宮)의 상사(喪事) 때에 대소 목물(木物)을 동협(東峽)·해서(海西) 지방에 나누어 정한 숫자가 많았는데, 민간이 몹시 가난하고 또 여역을 만났으므로 벌목(伐木)하고 운반하여 내려올 즈음에 백성들의 힘이 지쳐 능히 지탱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 소문을 들으니 실로 너무도 슬프고 불쌍합니다. 앞으로 또 복호 도감(復號都監)의 역사(役事)가 있을 터인데, 묘소를 옮기고 묘소를 봉하는 것을 장차 어떻게 정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일이 이와 같으니, 많은 숫자를 분정(分定)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지금 묘소에 소용되고 남은 잡물(雜物) 가운데 그대로 머물러둔 것이 상당히 많은데, 목물(木物) 가운데 옮겨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이미 기록하고 납입시켰습니다. 그러나 모든 여러 가지 분정(分定)한 물종(物種)도 반드시 수량을 참작하여 납입하게 함으로써 절약하고 줄이도록 힘쓰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고, 제조 민진후(閔鎭厚)는 아뢰기를,
"물종(物種)을 외방에 분정하는 것이 구례(舊例)이긴 합니다만, 수납할 즈음에 폐단이 많으니, 만약 호조에서 바로 무역(貿易)하여 사용하게 하고 거기에 드는 가본(價本)을 각 고을에 분정한다면, 폐단을 줄이는 효과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도감에 명하여 품처하게 하였는데, 그뒤 도감에서 서울에서 무역하여 사용하도록 복주(覆奏)하였다. 민진후가 또 아뢰기를,
"지금 여역과 기근이 겸하였는데 도성에도 길거리에서 굶주려 죽는 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저축한 곡식이 바닥이 나서 구제할 방도가 없으니, 매우 슬프고 가련합니다. 비록 진휼청을 설치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지난해의 예에 의해서 여역을 앓는 사람에게만이라도 지급한다면, 그 숫자가 매우 많지 않을 것이어서 준비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4월 22일 경자
김상원(金相元)을 부응교(副應敎)로, 남일명(南一明)을 교리(校理)로 삼았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는데, 임금이 침을 맞았다.
4월 23일 신축
경상도 각 고을의 백성들 가운데 여역을 앓다가 사망한 사람이 2천 3백 87명이고, 전라도에는 사망한 사람이 4백 60여 명이었는데, 도신(道臣)이 이를 보고하였다.
봉묘 도감 도제조(封墓都監都提調) 김창집(金昌集)과 제조 민진원(閔鎭遠)이 청대(請對)하니, 임금이 불러 보았다. 김창집이 아뢰기를,
"신 등이 먼저 금천(衿川)에 있는 강빈(姜嬪)의 묘소에 가서 간심(看審)하였더니, 보토(補土)해야 할 일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당초 땅을 고를 겨를이 없어 강씨 집안 분산(墳山)의 남은 산기슭을 사용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지사(地師)들도 하자가 상당히 많다고 하였으며, 또 그대로 봉축(封築)한다면 민전(民田)이 또 많이 폐기될 터이니, 이 또한 불편합니다. 이어 고양(高陽)에 있는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묘소로 가서 간심하였더니, 좌우에 모두 남은 땅이 있어서 쌍분(雙墳)의 제도를 만들기에 충분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당초 금천에 장사지낸 산은 이미 택점(擇占)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소현 세자의 묘소에 남은 땅이 있어 쌍분을 만들 만하다니, 신리(神理)와 인사(人事)로 헤아려 보더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진실로 편리하고 좋겠다."
하였다. 김창집이 또 아뢰기를,
"예비(預備)하는 방도에 있어 내재실(內梓室)161) 을 모두 새로 준비하여 대기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여 내재실과 외재실(外梓室)162) 을 모두 새로 만들어서 대기하게 하였다. 민진원이 아뢰기를,
"소현 세자의 분묘의 제도는 너무 높고 커서 매년 장마를 당하면 붕괴될 염려가 있는데, 개수(改修)하는 역사를 해마다 하지 않은 해가 없게 되었습니다. 민회빈(愍懷嬪)의 새 분묘를 만약 옛 분묘의 척도(尺度)에 의거 봉축(封築)한다면 또한 붕괴하여 무너질 염려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앞으로 역사를 시작할 때에 소현 세자의 묘소에 고제(告祭)를 행한 다음 조금 감삭(减削)하고, 민회빈(愍懷嬪)의 새 분묘의 척도도 높이와 너비가 같게 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소현 세자의 묘소를 본 적이 있는데 과연 높고 컸었다. 계달한 바가 좋도다."
하였다.
4월 24일 임인
병조 판서 최석항(崔錫恒)을 면직시키고, 조도빈(趙道彬)을 병조 판서로, 송상기(宋相琦)를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4월 25일 계묘
사간(司諫) 홍계적(洪啓迪)이 전에 계달한 것을 다시 아뢰고, 또 아뢰기를,
"일전에 정언(正言) 성진령(成震齡)은 일개 신진(新進)으로서 국권을 맡아 보는 대신을 논핵하였는데, 그 말은 지나쳤으나 그 기상은 가상합니다. 더구나 그가 인혐(引嫌)한 말은 오로지 경연(經筵)에서 품주(稟奏)한 것을 지척한 것이고 따라서 서원(書院)을 철폐하자는 일이었으니, 사문(斯文)을 위해 걱정하고 개탄하는 정성에 훌륭한 점이 있습니다. 정도를 부식(扶植)시키는 도리에 있어 진실로 권장하고 칭찬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터인데, 장령(掌令) 김만주(金萬胄)가 공의(公議)를 무시하고 과감히 배척하여 기강을 괴란시킨다는 죄목을 논사(論事)하는 신하에게 억지로 가함으로써 사림(士林)의 시비를 변란시키고 과감하게 발언하는 대간의 기풍을 꺾어 눌렀으니, 대각(臺閣)의 수치가 이미 말할 수 없는 지경입니다. 그리고 ‘혐의를 무릅쓰고 논열하였다.’는 등의 말은 더욱 차마 바로 볼 수가 없었습니다. 청컨대 장령 김만주를 파직시키소서."
하였으나, 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단의빈(端懿嬪)의 상장(喪葬) 때에 역사를 감독한 노고에 대한 상사(賞賜)가 있었다. 도제조 김창집(金昌集)과 서종태(徐宗泰) 이하 당상(堂上)·낭청(郞廳) 등에게 물품을 하사하고 차등 있게 자급(資級)을 올려 주었다.
4월 26일 갑진
예조에서 아뢰기를,
"단종 대왕(端宗大王)과 정순 왕후(定順王后)를 태묘(太廟)에 부묘(祔廟)할 때 승지와 사관의 시위(侍衛)한 예(例)가 있었으니, 이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이번 민회빈(愍懷嬪)의 신위(神位)를 이현궁(梨峴宮)에서 소현 세자의 묘당으로 옮겨 봉안(奉安)할 때에도 마땅히 시강원(侍講院)·익위사(翊衛司)의 관원들이 배종(陪從)하는 일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지금 실관(實官)을 정하여 보내는 것은 역시 미안할 것 같으니, 청컨대 해조로 하여금 분시강원(分侍講院)·분익위사(分翊衛司)의 관원을 각각 1명씩 차출하여 그들로 하여금 배종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좋다고 하였다.
4월 27일 을사
이명의(李明誼)·임형(任泂)을 정언(正言)으로, 김상원(金相元)을 사간으로 삼았다.
복위 선시 도감(復位宣諡都監)에서 아뢰기를,
"민회빈(愍懷嬪)의 신주를 만드는 제도는 소현 세자 신주의 몸체와 큰 차이가 없으니, 청컨대 성교(聖敎)대로 개조하지 마시고 방제(旁題)와 함중(陷中)163) 만 깍아내고 고쳐쓰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좋다고 하고 이어 고쳐쓰게 하였다. 소현 세자의 묘당에 합쳐 봉안할 때 임창군(臨昌君) 이혼(李焜)이 같이 나아가서 참여하였다.
4월 28일 병오
헌부에서 전에 계달한 것을 다시 아뢰고, 또 아뢰기를,
"어제 양 도감(兩都監)의 도청(都廳)과 제주관(題主官)·봉폐관(封閉官)에게 가자(加資)하라는 명이 계셨는데, 홍계적(洪啓迪)은 준직(准職)을 거쳤다고 하나 아직 자궁(資窮)에 이르지는 않았으며, 황귀하(黃龜河)·서명균(徐命均)·김태수(金台壽)는 아직 준직도 거치지 않았고 또한 자궁되지도 않았는데 지금 이처럼 직질을 승진시켰으니, 상격(常格)을 어겼다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청컨대 네 사람에게 가자하라는 명을 도로 정지하소서. 묘소 도감(墓所都監)의 감조관(監造官) 김세연(金世衍)은 한 가지 미미한 일로 인하여 도청(都廳)에게 분노를 터뜨려 사무를 중단한 채 집으로 돌아가버렸는가 하면 중간에 묘소 근처로 갔었으나 역사(役事)를 감독하려는 뜻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당랑(堂郞)164) 들이 역사를 끝마친 날에도 복명(復命)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에 이르러서 직질을 승진시키는 은전을 결코 혼란스럽게 시행할 수 없으니, 청컨대 김세연에게 상을 주는 은전은 도로 거두소서."
하였으나, 세자가 따르지 않고 황귀하·서명균·김태수에게는 준직을 주도록 명하고 김세연의 일은 그대로 따랐다.
대사헌 이택(李澤)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에 이르기를,
"선정신(先正臣)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는 타고난 자질이 매우 높고 도덕이 순수하며 평생토록 거경(居敬)하는 데 돈독하여 잠시도 해이하지 않았습니다. 책을 저술하고 교육을 확립시켜 후학들에게 훌륭한 은혜를 베풀었고, 언행(言行)과 출처(出處)165) 가 광명하고 정대하여 실로 일세(一世)의 진유(眞儒)요 백대(百代)의 종사(宗師)였습니다. 사문(斯文)의 변란(變亂)이 있던 초기에는 스승과 제자의 윤리를 천명(闡明)하였고, 윤이(倫彝)가 끊어지려는 즈음에는 명의(名義)를 중히 여기는 기풍을 부식(扶植)하여 퇴폐한 세도를 지금까지 지탱하여 유지시켰으니, 그 공이 우(禹)임금에 못지 않다고 해도 되겠습니다. 이것이 삼도(三道)의 유생(儒生)들이 소장을 올려 기필코 두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이다.】 과 함께 성무(聖廡)에 올리고자 했던 까닭인 것입니다. 지난번 대간(臺諫)의 소장에서는 【정택하(鄭宅河)의 상소이다.】 바로 자기의 뜻으로 함부로 입을 놀려 평론하여 선현(先賢)들을 등급매겨 억양(抑揚)을 드러내어 보였고, 사전(祀典)에 대해 가부(可否)함에 있어 조금도 의심스러워하거나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또 감히 박세채에 대해서는 유독 ‘선정(先正)’이란 칭호를 삭제함으로써 능멸하는 작태가 있었으니, 그들의 잘못되고 망령스러운 짓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아아! 세상의 교화가 무너져 해이해짐에 따라 시속의 숭상이 투박해지기는 했지만 간신(諫臣)처럼 묘연(渺然)한 나이 어린 자들이 선현(先賢)의 도덕에 대하여 번리(藩籬)도 엿보지 못하였으면서 제마음대로 온 세상에서 존경하는 처지에 있는 분을 깎아내렸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이고 이것이 무슨 풍습입니까? 세도가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한심스럽습니다. 이런 따위의 의논에 대해 특별한 제재를 가하지 않는다면 그 말류(末流)의 폐단은 이루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니, 어찌 크게 두려워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대각(臺閣)에서 사람을 논하는 도리는 그 대상이 서관 말료(庶官末僚)라 할지라도 반드시 사실을 지적하여 진술하고 명백하게 죄를 정한 연후에라야 바야흐로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가 있는 것인데, 하물며 대신[大僚]에 대하여는 체모가 절로 다른데야 말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마구 주워모아 죄안(罪案)을 만들어 비난을 가하는 것만을 통쾌하게 여긴 채 조금도 살펴 근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삼가 성진령(成震齡)이 우상(右相)을 논하여 배척한 글을 보니, 뜻하고 지적한 바가 비상하여 추욕을 가한 것이 말할 수 없었습니다. 대신의 본말(本末)과 장단점에 대해서는 저하께서 밝게 통찰하고 계시는데 과연 언관이 말할 것과 근사한 것이 있습니까? 그 소장의 수미(首尾)를 통하여 하자를 지적한 것이 매우 많은데, 음양 흑백(陰陽黑白)의 설에 이르러서는 마치 따로 표방(標榜)하는 것 같은 점이 있으니, 신은 실로 세도를 위하여 매우 우려됩니다. 당초 정택하(鄭宅河)가 성품과 행위로 사람을 논한 것은 실로 아무런 근거가 없었기 때문에, 성진령이 간신(諫臣)을 논박하여 체직시킬 적에 또한 영관(瀛官)의 선임에 대해 망령스럽게 논한 것은 경솔하다는 말을 면하기가 어렵다는 것으로 그르다고 배척하는 뜻을 밝게 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인피(引避)할 적에 이르러는 갑자기 앞서 한 말을 바꾸어 극구 추장(推奬)하면서 ‘시세를 틈탄다.’라는 따위의 말을 탄핵을 받은 사람에게 함부로 가하여 스스로 위력을 과시하기에 이르렀으면서도 옆에서 보는 이들이 자기를 어리석다고 비웃은 줄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또 소장에서 ‘행신(行身)이 추잡하고 더러우면서도 아장(亞長)의 관직에 임명되었다.’고 하였는데, 그가 인피(引避)하기에 이르러서는 곧 일찍이 비난받은 적이 없는 아직 아장(亞長)의 관직을 거치지 아니한 이정주(李挺周)를 해당시켰습니다. 전후 언의(言議)의 전도가 이와 같은데 이런 언론이 무슨 권장하고 칭찬할 만한 단서가 되겠습니까? 어제 간원(諫院)에서 논박한 계본을 보건대 기필코 그 의논을 높이고 장려하려 하였으니, 기상이 점차 아름답지 못한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어찌 너무도 개연(慨然)스런 일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경이 근일의 일을 걱정하고 개탄하는 지론(持論)이 공평하니, 내가 가상히 여긴다. 어찌 유념하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4월 29일 정미
이때 숙빈(淑嬪)의 장지(葬地)를 택하였는데 호상 내사(護喪內使)와 본방(本房)의 직임을 맡은 자들이 처음에는 명혜 공주(明惠公主)와 명선 공주(明善公主)의 묘산(墓山) 근처에 택점(擇占)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고 명하여 다른 곳으로 바꾸어 정하게 하였다. 또 선릉(宣陵)166) 근처로 택점하였는데, 임금이 그 곳이 선릉과 서로 바라보는 곳이란 말을 듣고는 예조에 명하여 적간(摘奸)하게 하였다. 예조에서 계달(啓達)하기를,
"사성(沙城) 위에 올라가서 바라보니 능소(陵所)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니, 세자가 이것으로 임금에게 품하자 임금이 하교하기를,
"사성은 하나인데 전에는 왕후의 능이 바라보였고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고 하니, 알 수 없는 일이다. 혈처(穴處)는 한가지인데, 다른 사람에게 있어서는 장사지내는 것을 금하고 후정(後庭)에 있어서는 장사지내는 것을 허락하였으니, 조정의 처분(處分)이 심히 공정하지 못하다. 다른 산으로 바꾸어서 택점하는 것이 낫겠다."
하였다.
4월 30일 무신
예조에서 가뭄 기운이 너무 심하다는 것으로 5월 초3일부터 경도(京都)의 산천에 기우제 지내기를 청하니, 세자가 허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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