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기유
임금이 명하여 단오의 영상시(迎祥詩)를 정지하도록 하였다. 그때 단오가 가까와졌으므로 승정원에서 세규(歲規)에 의하여 제술관(製述官)을 뽑아서 아뢰고 주문신(主文臣)167) 을 패초(牌招)하여 운(韻)을 내어 과차(科次)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한재(旱災)가 이러하니, 이번에는 제진(製進)하지 말게 하라."
하였다.
정언(正言) 이명의(李明誼)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임금이 스스로 잘 다스릴 수는 없는 것이므로 믿는 것은 오로지 재상뿐인데, 만약 적격자를 얻지 못한다면 국가가 그 화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정승[鼎席]들 가운데 우두머리에 있는 자가 한번 사화(士禍)를 빚어낸 뒤로 스스로 사류(士類)에 용납되지 못할 줄 알고서 염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권세를 탐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널리 뇌물을 받는 길을 열어 놓았으므로 뇌물 꾸러미가 사제(私第)에 폭주하였고, 힘써 사당(私黨)을 심었으므로 벼슬 임명이 일체 그의 입에서 나왔으며, 군문(軍門)의 은화(銀貨)는 곧 위급할 때 소용되는 것인데도 연행 사신(燕行使臣)이 있을 적마다 마음대로 상인(商人)과 역관(譯官)에게 가져가도록 허락하였으며, 변방 곤수(閫帥)의 천망(薦望)에는 그 사람이 어떠한지는 따지지 않은 채 과궐(窠闕)이 나면 채수(債帥)168) 를 승진 임용하였습니다. 전리(箭里)의 진장(陳場)은 본디 친림(親臨)하여 열무(閱武)하는 곳인데도 이제는 소용이 없다고 여겨 멋대로 점거하기 위해 동소문(東小門) 밖에 남아 있는 소나무를 베어내고 날마다 교외(郊外)의 백성 수백명을 동원하여 사역시켜 보(洑)를 막아 전지를 만든 다음 이를 자기의 재물로 만들었습니다. 종남(終南)169) 의 바깥 기슭에 별장[別墅]을 새로 짓고서 부근의 부민(富民)들을 불러모아 함께 교결할 것을 약속하고는 후한 이익으로 꾄 다음 혜민국(惠民局)에 저장된 수백석의 조곡(租穀)과 2백 관의 돈[錢]을 지급해 주고서 그 이식을 취하고 본전은 납입함으로써 모리(牟利)하는 계책을 세웠습니다. 지난 가을 사관(史官)이 성상의 비답을 전하고 유시하였을 적에는 몸이 병이 났다고 핑계하면서 막중한 왕언(王言)을 외당(外堂)에 버려두고 가게 하였으므로 사관이 곧 왕언은 조복(朝服)을 입고 받아야 한다는 뜻을 인용하여 서너 차례 다시 힐난하였더니, 사관과 하인에게 질책을 가하여 돌아가게 하였으므로 사관이 끝내 왕명을 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대간에서는 전혀 사실을 모르고 도리어 사관을 논박하여 공격함으로써 한마디도 변명할 수 없게 만들었으니, 이 한 가지 일에서도 그의 기염(氣焰)이 하늘에 닿고 한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부리는 일단(一端)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아! 권요(權要)를 멀리 피하라는 것이 곧 그의 이름난 아비가 남긴 훈계인데, 다른 사람들도 이 말을 듣고 오히려 눈물을 흘렸습니다. 만약 어버이의 말과 임금의 명령이 때로 서로 어긋난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힘써 벼슬에 종사하는 것이 분의(分義)에 있어 진실로 당연한 것인데, 대위(大位)에 오르게 되어서는 국가를 병들게 하고 세도를 무너뜨리는 일을 하지 않는 짓이 없습니다. 근래 진신(搢紳)과 장보(章甫)들의 소장에서 모두 사림(士林)에게 화를 끼친 우두머리라고 배척하고 있으니, 진실로 일푼이나마 사람의 마음을 가진 자라면 망설이면서 위축되어 물러가기에도 겨를이 없어야 할 터인데, 염치를 내팽개치고 아비의 훈계도 잊은 채 더욱더 멋대로 날뛰면서 조금도 돌아보고 꺼리는 바가 없음은 물론이고 마음대로 위복(威福)을 농락함이 끝이 없습니다. 대저 정축(鼎軸)170) 의 지위에 있으면서 염치를 내팽개친다면 세도가 좀먹어 무너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사람의 자식으로서 아비의 훈계를 잊는다면 임금을 섬김에 있어 무상(無狀)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도리로써 책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국가에 있어 어떠하겠습니까? 작년에 온천의 행궁(行宮)에 행행한 것은 만부득이한 데에서 나온 것인데, 성상께서 백성들의 폐단을 곡진히 염려하여 여러가지 어선(御膳)의 종류를 일체로 모두 줄이고 감하였으니, 진실로 신자(臣子)가 된 자는 마땅히 임금의 명을 받들 것을 생각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배종(陪從)한 대소 관원들은 거개가 물건을 토색하여 일로(一路)에 짐을 실은 짐바리가 두루 서로 잇달았는데, 우사(寓舍)에 쌓아두었다가 서울의 집으로 실어 보내기도 하고 시장에서 화매(和賣)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때 본도(本道) 병마(兵馬)의 우두머리만이 【이건명(李健命)이었다.】 여러 고을에서 보내 온 물건들을 흩어서 장사(將士)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포식하였고 다투어 서로 칭송하였습니다. 따라서 뇌물을 받는 것이 절제가 없었음을 이 사실로 미루어 보아도 알 수가 있습니다. 조정은 사방의 근본인데 왕을 무시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상천(上天)이 어찌 진노하지 않겠으며 재이(災異)가 어찌 거듭 일어나지 않겠으며, 생령(生靈)들이 어찌 곤폐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조종(祖宗)의 3백 년 사직이 어찌 위기일발의 늠연(凛然)한 상황에 이르지 않을 수 있습니까? 서원(書院)을 철폐하자는 한 가지 절목에 이르러서는 더욱 전고에 없던 일인데, 저 정호(鄭澔)가 정인(正人)을 해치려는 마음을 늙어서도 오히려 뉘우치지 않고 돌연히 조정에 나와 팔을 걷어붙이고 담당하고 나서서 마침내 서원을 철폐하자고 청하였으니, 그 또한 기탄하는 마음이 너무도 없는 자입니다. 어제 대신이 성명(成命)을 정지하자고 청하였으니, 한 가닥 공심(公心)을 그래도 볼 수가 있었습니다. 더구나 옥당(玉堂)의 차자(箚子)에서는 곧 서원을 철폐하는 일을 정지하자고 청한 것이 무지개가 해를 가로지른 이변(異變)을 가져왔다고 일컬었으니, 기괴하고 가소로운 것이 어린아이들의 유치한 말과 다를 바가 뭐 있겠습니까? 이조 참판 이희조(李喜朝)는 음흉하고 사악한 성품으로 사변(詞辯)171) 의 재능을 지니고서 공교한 말과 좋은 얼굴빛으로 세상을 속이고 이름을 도둑질하였는데, 산림(山林)의 길을 걷는다고 가탁(假託)하였으면서도 외람되이 현직(顯職)에 올랐으므로 일세(一世)의 비웃음과 손가락질을 당한지 진실로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지난번 책자(冊子)를 싸서 봉진할 적에 마치 밀계(密啓)와 같이 하였으므로 물의가 분분하여 오래도록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직명이 대신(臺臣)인 사람이 이를 비호하기 위해 사관(史官)에게 내어주어 역사[汗靑]에 기록하게 할 것을 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아! 이것은 상자 속에 간수된 일개 사사로운 기록에 지나지 않는 것인데, 이것은 그 스승의 본원(本源)에 무슨 빛나는 점이 있다고 이에 감히 성조(聖朝)의 청사(靑史)를 더럽히고자 한다는 말입니까? 평안도 감사 김유(金楺)는 유문(儒門)에 발을 들여놓았다고 핑계하고 있지만 그 스승의 본지(本旨)는 전혀 몰각한 채 두찬(杜撰)하고 거짓 인용하여 오로지 시론(時論)에 아부하기만을 일삼았는데, 지난번의 상소에서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다만 그의 평생의 기량(伎倆)은 오로지 탐오에 있었으므로 일찍이 해고(海皐)172) 로 있을 때에는 부고(府庫)를 탕진시켰고, 비선(碑船)에 재화(財貨)를 실었다가 중로에 침몰되었다는 말이 여러 사람의 입에 떠들썩하게 전해졌습니다. 서관(西關)으로 관직을 옮겨서도 옛날의 습성이 더욱 고질화되어 크고 작은 각 창고가 빈 장부만 남아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양서(兩西) 지방의 풍요로운 땅을 하나같이 자기의 사복을 채우는 밑천으로 삼았으니, 신은 삼가 통탄스럽게 여깁니다. 형정(刑政)이라는 것은 왕자(王者)의 큰 권병(權柄)인 것입니다. 이사명(李師命)의 죄악은 그것이 어떠한 죄에 관계되는 것이고 성상께서 평일 통렬하게 미워하시는 것이 또한 어떠하였습니까? 그 집안의 세력으로 밤낮으로 경영하면서 감히 신원(伸冤)시킬 마음을 내지 못하였던 것은 천위(天威)를 두려워하고 국법(國法)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 지친(致親)들이 조정의 높은 관직에 도사리고 있어 권병을 더욱 오로지하고 아무 꺼리는 바가 없게 된 뒤에 이르러서는 이에 감히 때를 타고 격고(擊鼓)하였는데, 왕부(王府)의 신하들은 거실(巨室)이 있는 줄은 알면서도 국법이 있는 줄은 모른 채 어렵게 말을 만들어 사리에 어긋난 언의(讞議)를 주달하였는데도 성상께서는 오히려 이를 굽혀 따르셨기 때문에 그들이 임금의 총애만을 믿고서 더욱 마음대로 무엄한 것을 못하는 것이 없게 된 것입니다. 작년에 독대(獨對)한 잘못이 이런 계기를 열어놓은 것이 아닌가 신은 생각합니다. 지금 바야흐로 말해야 할 일이 이에 그치지 않습니다만 삼사(三司)의 반열에 있는 자들은 한 사람도 전하를 위하여 말하는 이가 없으니, 신은 삼가 통탄스럽게 여깁니다."
하였다. 상소가 들어갔으나 임금이 비답을 내리지 않고 특별히 명하여 우선 먼저 그를 체차(遞差)시키게 하였다. 곧바로 하교하기를,
"한재(旱災)가 더욱 극심하고 독한 여역(癘疫)이 더욱 참혹하게 번지니, 백성들이 다 죽어 없어진다면 나라는 어디에 의존하겠는가? 이러한 때를 당하여 대소 신료들이 마음을 합하여 함께 구제한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잘하지 못할까 염려스럽다. 그런데 이명의(李明誼)가 밖으로는 재이(災異)를 만난 것을 가탁하여 진언(進言)하면서 안으로는 조정을 괴란시킬 계책을 품고서 여러 신하들을 거짓말로 모함하려 꾀하는 것이 끝이 없다. 그러나 소장 전편의 정신(精神)은 오로지 영상을 헐뜯는 데에 있는데, 까닭없이 만가지 이치에 당치 않는 허다한 죄명을 만들어 내어 망칙한 죄과(罪科)에다 막바로 몰아붙이고 있다. 아아! 영상이 전후 올린 차자(箚子)의 내용은 한편으로는 성조(聖祖)를 위한 것이고 한편으로는 사문(斯文)을 위한 것이었는데, 저자가 아무리 무상(無狀)하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감히 영상을 원수처럼 질시(嫉視)하면서 윤선거(尹宣擧) 부자를 위하여 마치 절개를 세우는 것처럼 할 수가 있겠는가? 그 정상을 논하면 너무나 통분하다. 이조 참판 【이희조(李喜朝)이다.】 에게 추욕(醜辱)을 가하고 원임 대신(原任大臣) 【이이명(李頤命)이다.】 을 무함하여 헐뜯는 데에도 이르지 않는 것이 없으니, 지극히 해괴하고 통분하다. 병석에 있는 중이라 조금 골똘히 생각하면 그때마다 피곤하여 불화살이 가슴을 치받는듯이 번뇌스럽기 때문에 단락에 따라 시비를 분변하여 간파할 수가 없다. 만약 통렬히 징벌하지 않는다면 말후(末後)에 피해는 나라가 나라꼴을 이루지 못할 것이니, 이명의를 멀리 유배하라."
하였다. 이리하여 이명의를 밀양부(密陽府)에 유배하였다.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이명의(李明誼)의 상소로 인하여 도성문을 나가서 교외로 갔고, 판부사 이이명(李頤命)도 약방(藥房)의 직숙하던 집에서 사양하고 물러났다. 임금이 연달아 승지를 보내어 두 신하에게 돈유하였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진후를 끝마치자 제조 민진후(閔鎭厚)가 아뢰기를,
"지금 기근(飢饉)이 든 끝에 여역(癘疫)이 크게 치성하여 동교(東郊)와 서교(西郊)에는 병막(病幕)이 연달아 널리 있습니다. 그리고 오부(五部)173) 에서 비국(備局)에 보고한 것도 그 숫자가 이미 1만 명을 넘어섰으므로 논과 밭 사이에서 밭갈이하고 씨뿌리는 사람을 볼 수가 없다고 합니다. 설령 앞으로 다른 재해(災害)가 없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씨를 뿌리지 않고 곡식을 거둘 수가 있겠습니까? 진청(賑廳)과 강도(江都)에 저축한 식량이 이미 고갈되었고 백관들의 산료(散料)도 계속 잇대기가 어려우니, 국사(國事)를 생각하면 진실로 애통스러운데, 비단 손을 쓸 방도가 없을 뿐 아니라 조정의 의논도 갈팡질팡합니다. 게다가 정승의 자리가 일체 텅 비어 있어 전례에 따라 재감해 주는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데 오히려 어떻게 나라를 다스린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나라는 불행하게도 항상 흉년이 많은데, 전후 재해로 인하여 재감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지난해에 또 조세의 푼수를 감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지금은 이를 복구하였습니다. 이러한 따위의 일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와 각사(各司)의 문서를 상고하여 속히 변통시키는 조처를 하는 것을 그만둘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이것은 대신이 없더라도 시행할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나의 병은 지금 이미 해가 오래 되어 그 증상이 다달이 다르고 시각마다 같지 아니하다. 그런데다가 나라의 일이 내 마음을 위로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어 매양 죽어지어 아무 것도 몰랐으면 하는 생각이 들 뿐이다. 아뢴 대로 변통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민진후가 또 아뢰기를,
"비국(備局)의 공사(公事)를 대신들이 바야흐로 초안(草案)을 제출하려 할 즈음에 대간의 상소로 인하여 나아가 버렸습니다. 이미 초안이 작성된 것은 그대로 정서(正書)하여 납입하게 하소서. 외방에서 시급하게 장문(狀聞)한 것 가운데 복주(覆奏)해야 할 것은 전년도의 예에 의하여 유사 당상(有司堂上)이 대신들에게 가서 의논하고 나서 청대(請對)하기도 하고 상소하여 논하기도 하는 것이 합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좋다고 하였다.
5월 2일 경술
목성(木星)이 여귀(輿鬼)의 서북성(西北星)을 범하였다.
5월 4일 임자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면서 직명(職名)을 해임시켜 줄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승지를 보내어 유시하기를,
"경이 시사를 걱정하여 차자를 올려 시비를 크게 밝힌 뒤부터 이를 미워하는 무리들이 품은 원망이 골수에 맺혔으므로 기필코 경에게 보복하려 한 지 오래 되었다. 그러나 어찌 날조하는 수단이 대각(臺閣)에서 나와서 곧바로 경을 권간(權奸)이라고 지목할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논열(論列)한 것은 모두가 맹랑한 것으로 작년에 비답(批答)을 전할 때의 곡절(曲折)을 내가 상세히 알고 있다. 그런데도 오히려 또 명을 소홀히 하였다는 죄명을 돌리니, 이 한 가지 일을 보더라도 그가 무망(誣罔)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선인(先人)이 경계한 말을 잊었다’라는 말 같은 것은 더욱 패려스러운 것이니, 세도가 위험한 것이 어찌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다는 말인가? 이처럼 한재(旱災)를 당하여 백성들의 목숨이 곧 떨어지게 될 때를 정하여 경이 또 도성을 나가 낭묘(廊廟)가 텅 비게 되었으니, 내가 병중에 근심스럽고 답답한 마음을 구제할 방도를 알지 못하겠다. 경의 나라를 몸처럼 여기는 정성으로 어찌 생각이 여기에 이르지 못하는가? 경은 즉시 조정에 나와서 내가 겸허하게 기다리는 소망을 저버리지 말라."
하였다.
5월 5일 계축
조영세(趙榮世)를 정언(正言)으로, 황귀하(黃龜河)를 교리(校理)로, 이병상(李秉常)을 대사성(大司成)으로, 김재로(金在魯)를 특별히 발탁하여 승지로 삼았다.
판중추부사 이이명(李頤命)이 차자(箚子)를 올려 사면시켜 주기를 청하였으나, 세자가 승지를 보내어 돈유하였다.
5월 7일 을묘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할 때 제조 민진후(閔鎭厚)가 상주하였던 말로 인하여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본원(本院)의 《일기(日記)》는 다만 비국(備局)과 각사(各司)의 것을 재손(裁損)할 때의 초기(草記)만 있을 뿐이고 감(減)한 명목(名目)과 수효는 원래 기록하는 일이 없으니, 비국으로 하여금 각사에 분부(分付)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좋다고 하고, 이어 명하기를,
"이러한 따위의 일은 모두 동궁에게 품달(稟達)하도록 하라."
하였다.
제도(諸道)의 도신(道臣)이 가뭄이 심하다는 것으로 잇따라 정장(呈狀)하여 계문(啓聞)하였다.
강원도 횡성(橫城)·원주(原州) 등의 고을에 서리가 내렸다.
5월 9일 정사
임금이 하교하기를,
"나의 병이 점점 깊어가는 가운데 안질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친림(親臨)하여 계복(啓覆)174) 하는 것은 형세상 할 방도가 없다. 해마다 옥사(獄事)가 적체되면 죄인이 병이 나서 죽을 뿐인데 계복(啓覆)하는 것도 사람을 형벌하는 문제이니 사람을 형벌하는 한 가지 조목은 변통할 방도가 없을 수 없다. 대벽(大辟)에 처단하는 데 스스로 판단하기가 어려운 점이 있거든 세자가 면전에서 품지하는 것이 마땅하다. 지금부터 이후로는 무릇 사람을 형벌하는 데에 관계된 공사(公事)는 일체 동궁에게 계달(啓達)하도록 하라."
하였다.
양사(兩司)의 여러 신하들이 이명의(李明誼)의 상소로 인하여 서로 잇따라 인피(引避)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처치(處置)하여 아울러 출사(出仕)하게 하였다. 옥당(玉堂)의 여러 신하들도 이 때문에 연일 패초(牌招)를 어기면서 상소를 올리고 행공(行公)하지 않으니, 세자가 하령(下令)하기를,
"이명의의 상소에서 삼사(三司)의 신하들을 마구 헐뜯고 배척하여 그 마음 쓰는 것이 바르지 못하였기 때문에 인피(引避)한 대관들을 처치(處置)하면서 출사(出仕)하게 할 것을 청하였으니, 공의(公議)의 소재를 미루어 알 수 있다. 유신(儒臣)들은 조금도 편안치 못할 만한 단서가 없는데도 날마다 주장만을 고집하고 있으니, 사체에 미안하다. 모두 즉시 행공(行公)하도록 하라."
하였다.
5월 10일 무오
조관빈(趙觀彬)을 헌납(獻納)으로, 이기진(李箕鎭)을 검열(檢閱)로 삼았다.
전 판서 윤지인(尹趾仁)이 졸하였는데, 나이 63세였다. 윤지인은 곧 윤지완(尹趾完)의 아우이다. 본래 재능이 없었으나 염치가 있고 간솔(簡率)하다는 평판이 있었다. 그러나 성품이 매우 음험하고 간사하여 무릇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기필코 배척하여 모함한 다음에야 그만두었다. 이여(李畬)를 헐뜯고 권상유(權尙遊)를 모함한 두 가지 사건을 보더라도 그 심술을 남김없이 알 수 있다.
5월 11일 기미
목성(木星)이 적시기(積尸氣)를 범하였다.
경기 감사 김연(金演)이 상서(上書)하여 경기의 굶주리고 곤폐한 상황을 말하고 곡식 5, 6만 곡(斛)을 옮겨다가 구제해 주기를 청하니, 세자가 비국(備局)에 내렸다. 그때 대신(大臣)들이 모두 도성 바깥에 있었기 때문에 복주(覆奏)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예조 판서 송상기(宋相琦)가 상서하여 강도(江都)·북한성(北漢城)·양진(楊津)의 창고에 있는 곡식 각각 2천 석씩과 남한성(南漢城)에 있는 미곡과 콩 7천 석을 지급하기를 청하였는데, 세자가 좋다고 하였다.
훈련 도감(訓鍊都監)에서 아뢰기를,
"군병(軍兵)들 가운데 여역(癘疫)에 걸린 자가 4백 60여 명이나 됩니다. 도감(都監)에서 전부터 포수(砲手)의 자제들을 정부에 기록하여 두었다가 나이가 차기를 기다려 처음에는 4두(斗)의 늠료(廩料)를 주고 그뒤 재주에 따라 늠료를 올려주는데, 7두(斗)에 이른 다음에야 비로소 궐중(闕中)의 숙위(宿衛)에 충당합니다. 근래 여역으로 인하여 사망하는 자가 서로 잇따라서 군사의 액수(額數)가 점차 줄어들어 번갈아 숙위하는 것도 매우 구차스러우니, 청컨대 6두(斗) 이하의 자제들도 실직(實職)에 올리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임금이 주본(奏本)을 읽어보고 즉시 의사(醫司)에 명하여 약물을 지급해서 구료하게 하고 사망한 자에게는 시체를 수습하는 물건들을 지급하게 하였다. 본 도감(本都監)에서 병자들에게는 미곡을 각각 5승(升)씩 지급하고 죽은 자에게는 포목을 각각 3단(端)씩 지급하였는데, 그 뒤 여러 군문(軍門)에서 모두 이 예(例)에 준하였다.
예조에서 청하기를,
"민회빈(愍懷嬪)을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묘궁(廟宮)에 합하여 받든 뒤에 제향(祭享)은 태묘(太廟)에 의하여 하나의 탁상을 같이 사용하는 제도로 정하소서."
하니, 세자가 좋다고 하였다.
5월 12일 경신
시강원(侍講院)의 관원들이 연명(聯名)으로 상소하기를,
"여역의 기운이 더욱 극심하니, 이를 무릅쓰고 동가(動駕)할 수 없습니다. 왕세자께서 경녕전(敬寧殿)에 전알(展謁)하는 거둥을 정지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황해도·경기·충청도 3도의 유생 권준(權踆)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과 문정공 송준길(宋浚吉)을 종향(從享)하자는 청이 호남 지방에서 일어났는데, 이승운(李升運) 등이 그 요사스러운 말을 함부로 하였으나 저하(邸下)께서 사정(邪正)의 분별을 통촉하시어 먼 곳에 내쫓는 형전을 시행하였습니다. 지난번 삼도(三道)의 유생[章甫]들이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도 아울러 종향(從享)할 것을 거론하여 같은 목소리로 진청(陳請)하였는데, 또 정택하(鄭宅河)란 자가 있어 헐뜯고 욕하는 요사스런 말을 함부로 내뱉은 것이 이승운 등과 같은 심술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도리어 그에는 따뜻한 비답을 내리시고 ‘의견이 없지 않다.’고 허락하셨으니, 사방에서 이것을 듣고서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신 등이 삼가 정택하의 글을 가져다가 반복하여 살펴본 다음에야 비로소 저하께서 범연하게 하람(下覽)하셨던 탓으로 미처 그가 마음 쓴 곳을 간파하지 못한 줄을 알았습니다. 그 글의 상단에서는 송시열과 송준길의 도덕과 학문을 추존하면서 배향하는 데에 합당하다고 하였으니, 이는 이승운의 무리들이 오로지 당론(黨論)을 일삼았던 것과는 다릅니다. 하단에는 박세채는 배향하는 데 합당하지 않다고 하였는데, 그 말이 억누르기도 하고 드높이기도 하면서 극력 공격하지 않았으니, 이는 이승운의 무리들이 괴팍한 성품으로 추욕을 가한 것과는 다릅니다. 따라서 저하의 밝으신 안목으로도 한 번 읽어보시고서는 즉시 깨달아 살피지 못한 것이 당연합니다. 대저 정택하의 질투하는 마음에 어찌 박세채를 돌아보는 것이 있어 그러하였겠습니까? 저하의 뜻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선 이와 같이 반흉 반길(半凶半吉)의 말을 하여 그것으로 한 번 시험해보려는 계책을 삼은 것인데, 과연 저하께서 그들의 술수에 빠졌습니다. 신 등이 그 정상을 변별하여 저하께서 성찰하시는 데에 대비하기를 청합니다. 그 글에서 송시열과 송준길의 자품(資品)과 도학(道學)을 논하면서 추양(推揚)한 것이 지극하였으나, 박세채에 이르러서는 말하기를, ‘도덕의 높고 낮음과 학문의 얕고 깊음을 후생으로서 감히 엿보아 헤아릴 수가 없다.’고 하였는데 이미 높고 낮음과 얕고 깊음을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가 배양하는 데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박세채의 도덕과 학문은 후생(後生)으로 알 수 없는 바가 없다고 한다면 송시열과 송준길의 도덕과 학문은 그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유독 박세채에 대해서는 후생·말학(末學)이 되는데, 송시열과 송준길에 대해서는 후생·말학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종사(從祀)하는 전례(典禮)가 얼마나 중한 것인데 이에 말속(末俗)의 사의(私意)로 그 사이에 참여하여 마치 문호(門戶)를 나누어 각기 종주(宗主)가 있는 것처럼 하니, 이것은 박세채만을 무함(誣陷)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송시열과 송준길도 무함하는 것입니다. 또 그들이 이른바 ‘갑자기 대론(大論)이 정당(停當)된 뒤에 추후하여 발의하였다.’라고 한 것은 더더욱 근거가 없습니다. 신 등은 정당(停當)된 것이란 것이 무엇이 정당된 것인지를 모르겠습니다만, 성무(聖廡)에 종사(從祀)하는 것은 지극히 엄하고도 중대한 일입니다. 따라서 일개 정택하의 가문에서 주장할 것이 아닌데, 그의 형 정민하(鄭敏河)가 처음 앞에서 아울러 거론하지 않았고 아우 정택하는 지금 또 뒤에서 저지하여 동요시키면서 스스로 정당되었다고 일컬으면서 뻔뻔스럽게도 무엄한 짓을 하니, 사람으로서 참람스럽고 요망스러운 행동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일찍이 중종[中廟] 정축년175) 에 홍문관(弘文館)에서 문경공(文敬公) 김굉필(金宏弼)을 종향할 것을 발론(發論)하여 진계(陳啓)하자 태학(太學)의 유생들이 잇따라 일어나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를 추후 거론하고 아울러 종향하기를 청하였는데, 정몽주만이 즉시 윤허를 받았습니다. 그 뒤 또 문헌공(文獻公) 정여창(鄭汝昌)·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을 추후 거론하였고 그 뒤 또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을 추후 거론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오현 종사(五賢從祀)입니다.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를 종사(從祀)하자는 청은 인조(仁祖)께서 등극하신 초기에 처음으로 발의되었는데, 그 뒤 해서(海西) 지방의 유생들이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을 추후 거론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양현 종사(兩賢從祀)입니다. 어찌 앞서 거론한 것이 정당(停當)되었다고 하여 추후 거론하는 것을 혐의스럽게 여기기를 정택하의 말과 같이한 적이 있습니까? 정여창 등 세 사람의 현인을 추후 거론하여 아울러 청할 적에 혹자가 이황에게 물었더니, 이황이 대답하기를, ‘막중한 일을 경솔하게 취사(取捨)를 정하고 우열(優劣)을 판단하는 것이 또한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이황 같은 고견(高見)으로서도 오히려 또 주저하면서 감당하지 못했는데, 저 정택하는 어떤 사람이기에 이에 감히 소매를 걷어붙이고 혀를 놀려 멋대로 우열을 정하는 것을 마치 어리석은 어린아이들이 그 조·부(祖父)의 연갑(年甲)을 비교하는 것과 같이 한단 말입니까? 참으로 망령된 것입니다. 신 등이 듣건대, 정택하는 시골의 유치하고 우매한 사람으로 전혀 글자도 모르는 자라고 합니다. 지금 이 상서(上書)는 특별히 이름을 빌렸을 뿐인 것으로 반드시 화(禍)를 좋아하고 일 만들기를 즐기는 무리가 형체를 감추고 숨어서 그를 사주하여 하게 한 것일 것이니, 우려스러운 것이 어찌 한때 한 사람으로 그칠 뿐이겠습니까? 이어 삼가 생각하건대, 박세채는 약관(弱冠)의 나이로 도학(道學)을 궁구하여 밤낮으로 부지런히 공부하였습니다. 그리고 한결같이 염낙관민(濂洛關閩)의 학문176) 을 준칙(準則)으로 삼아 수사(洙泗)177) 를 귀착점으로 삼았으므로, 덕이 성대하고 예절이 공순하여 고명(高明)한 경지에 들어가기에 이르렀는데도 산번(山樊)에서 뜻을 지키면서 스스로 만족해 하고 즐거워 하였으므로 나이 30세가 되기 전에 훌륭한 명망이 이미 드러났었습니다. 효종[孝廟] 말년에는 특별히 궁료(宮僚)의 관직을 제수하였고, 선대왕(先大王)의 조정에서는 연달아 강원(講院)과 대헌(臺憲)의 자리로 계속 초치하였으나 끝내 왕명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성상께 큰 뜻을 분발하심에 이르러 전후 돈후하게 불렀는데, 이는 지성(至誠)에서 나온 것이었으므로 감격해서 만년에야 조정에 나왔습니다. 따라서 벼슬길에 나오기는 어렵게 여기고 물러가지는 쉽게 여기는 절개와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정성은 실로 우리 성명께서 깊이 통촉하신 바이기 때문에 그가 졸(卒)하였을 적에 특별히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애도하여 말씀하기를, ‘평생의 언행은 반드시 예법을 따랐고 연석(筵席)과 장주(章奏)에는 부지런하고 간절한 것이 가슴속의 혈성(血誠)에서 유출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하였으니, 서로 뜻이 맞은 흐뭇함과 은례(恩禮)로 높여준 것이 가위 천년 동안에 두 번 없는 일이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차이가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야말로 바로 저하께서 우러러 몸받아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지난번 정택하의 글에서 진달한 문순공(文純公)의 일은 내가 범연히 본 것임을 면하지 못했던 탓으로 뜻 둔 곳을 간파하지는 못하였는데, 헌신(憲臣) 【대사헌 이택(李澤)이다.】 의 글을 보게 되어서야 비로소 내가 대답한 글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다. 지금 이 여러 선비들의 상서와 변론이 매우 명백하니, 내가 매우 가상히 여긴다. 다만 정택하의 말을 이승운과 비교할 수는 없으니, 똑같이 감처(勘處)하는 것은 처분이 지나치다."
하였다.
5월 13일 신유
예조에서 민회빈(愍懷嬪)에게 시호(諡號)를 내린 뒤에 교서(敎書)를 반포하는 것이 마땅한지의 여부를 품주(稟奏)하였는데, 세자가 명하여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였다. 판부사(判府事) 이유(李濡)가 의논하여 아뢰기를,
"당시 처분(處分)하였을 때 【화(禍)를 당하였을 때를 가리킨다.】 에 이미 교서를 반포하였었으니, 지금 신원(伸冤)하고 복위(復位)한 때에 이르러 다시 교서를 반시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니, 세자가 그의 의논을 따랐다.
간원에서 전에 계달한 것을 다시 아뢰고, 또 아뢰기를,
"삼도감(三都監)의 잡물(雜物)을 각 고을에 분정(分定)하였는데, 그 숫자가 지나치게 많습니다. 그런데 각 고을에서 수납(輸納)할 적에 도감의 하리(下吏)들이 한결같이 퇴짜를 놓고 모두 전화(錢貨)로 거두어 받는데, 심지어는 아령(鵝翎) 몇 편의 값으로 10여 냥의 전화를 징수하기에 이르고 날배[生梨] 1개의 값으로 혹 2, 3냥의 전화를 받기도 합니다. 해당 낭청(郞廳)이 한결같이 조종(操縱)하는 것을 그대로 맡겨두었으니, 직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죄를 면하기가 어렵습니다. 청컨대 해당 낭청은 파직시키고 하리들을 엄하게 핵문하여 처단하소서. 충훈부(忠勳府)에서 향을 바칠 때에 각도에 관문(關文)을 보내어 부조(扶助)라고 일컬으면서 전포(錢布)와 시탄(柴炭) 등의 물건을 요구하였는데, 각 왕릉의 참봉(參奉)에 대해서도 강제로 징수하였습니다. 향을 바치고 남은 나머지 재물은 도리어 당상관(堂上官)과 낭청(郞廳)이 사사로이 나누어 가졌습니다. 청컨대 충훈부의 당상관·낭청은 모두 아울러 파직시키소서."
하였으나, 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평안도 감사 김유(金楺)가 이명의(李明誼)의 상소 때문에 상서(上書)하여 스스로 변명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이명의가 신을 ‘선사(先師)의 본지(本旨)를 전혀 몰각하였다.’라고 하면서 심지어 신의 스승이 고 참판 임영(林泳)에게 준 글을 인용하여 증거하였는데, 이는 좌우에서 바로잡고 일의 시비(是非)에 따라 반드시 크게 괴탄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 신의 스승의 당초 뜻이었습니다. 윤증(尹拯)의 잘못을 논한 것으로 말한다면 또한 비유가 과중한 것이 있기는 했지만 이는 모두 기사년178) 이전의 말이었습니다. 신의 스승이 이 일의 시비(是非)를 분명히 보인 것이 기사년 이후에 있었으니, 이명의 등이 어찌하여 기사년 이후의 글을 인용하여 증거하지 않고, 이에 도리어 단편적인 말들을 주워모아 사리에 어긋나게 말한단 말입니까? 신이 일찍이 윤증 문하(門下)의 사기(私記)를 보니, 신의 스승을 모함하고 헐뜯은 것이 매우 낭자하였습니다. 그 글에 말하기를, ‘현장(玄丈) 【박세채(朴世采)의 호가 현석(玄石)이다.】 이 지금은 명재(明齋) 【윤증의 자호(自號)이다.】 와 소견을 같이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유상(柳相) 【유상운(柳尙運)을 가리킨다.】 이 명재를 청망(淸望)에 천거하였는데 현장이 이를 그르게 여겼다. 그 규모는 회천(懷川) 【송시열(宋時烈)이 회덕(懷德)에 살았다.】 의 복철(覆轍)을 한결같이 답습하고 있다.’라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현장이 끝에 가서는 도리어 회천을 추대하였으므로 끝내 도봉 서원(道峰書院)에 합향(合享)하도록 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글을 보더라도 윤증이 신의 스승에 대하여 과연 시종 서로 틈이 없이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도 신이 만들어 낸 것이겠습니까? 이명의 등이 그들이 존경하는 스승의 말을 젖혀두고 기필코 말을 멀리 돌려 스스로 신의 스승을 가탁하여 하나의 공증(公證)으로 만들고자 하였는데, 신의 글이나 말이 그들의 기휘(忌諱)하는 바를 적중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깊이 노여워하여 비난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들이 신에게 탐오하다는 죄목을 함부로 가한 것 같은 것은 말하기에도 추잡한 것이 여기에 이르러 극에 이르렀습니다. 전곡(錢穀)의 출입은 모두 문서가 있는 것이고, 신관(新官)과 구관(舊官)이 교대할 때는 모두 중기(重記)179) 가 있는 것이고, 재화(財貨)의 관장(管掌)은 모두 감색(監色)이 있는 것이고, 부고(府庫)에 저장된 것은 모두 숫자가 있는 것이니, 지금 한 번 안핵(按覈)하신다면 그들의 말이 진실인가 거짓인가가 절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또 신은 이에 대하여 삼가 의혹되는 점이 있는데, 윤증 문하(門下)의 사기(私記)에서 그들이 원수로 여기는 선정신(先正臣) 【송시열을 말한다.】 을 헐뜯고 욕함에 있어 참독함이 너무도 지독하여 사람의 도리로서는 있을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재물을 탐낸다고 말한 것에 이르러서는 신이 일찍이 이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면서 마음 아파하였습니다. 지금 이명의가 그 방법을 이어받았는데, 곧 윤증을 돕지 않는 자는 공격하여 배척하는 것으로도 부족하여 일체 아울러 탐오하다는 이름을 가하여 창피를 주는데, 이것은 사람의 염치와 탐오가 반드시 윤증 집안과 원한이 있느냐 없느냐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하였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진맥을 끝마치자, 제조 민진후(閔鎭厚)가 아뢰기를,
"광주 부윤(廣州府尹) 오명항(吳命恒)이 모친의 병 때문에 정장(呈狀)하여 체직시켜 주기를 청하였는데 대신들이 허락하고 글을 초기(草記)180) 에 기록하여 두었으나 대신들의 출성(出城)으로 인하여 미처 계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오명항은 스스로 교체된 관원이라고 자처하면서 사무를 보지 않고 있으니, 마땅히 체직하는 것을 허락하고 교체되기 전에는 그대로 본주(本州)의 일을 관장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좋다고 하였다. 민진후가 또 아뢰기를,
"수원 부사(水原府使) 어유귀(魚有龜)가 경기 도사(京畿都事) 이진망(李眞望)과 원혐(怨嫌)이 있었는데, 이진망의 사장(辭狀)에 ‘속리(屬吏)에게 쫓겨나게 되었다.’라는 말이 있으니, 어유귀는 형세상 부임하기가 어렵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어유귀를 교체하게 하고 이진망은 파직하게 하였다.
술시(戌時)에 임금의 병환의 여러 가지 증세가 갑자기 심해져서 약방(藥房)에서 다시 입진하였다.
5월 14일 임술
약방(藥房)에서 입진하였다. 도제조 이이명(李頤命)이 이명의(李明誼)의 상소에서 자신을 배척하였다는 것을 이유로 도성문을 나아가 여러 번 소장을 올려 해직시켜주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임금이 세자와 연달아 승지와 사관(史官)을 보내어 극진히 위유(慰諭)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의 병환이 더하였기 때문에 도로 직숙하는 곳으로 나아가 입시(入侍)하였다.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상소하여 면직시켜주기를 청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선인(先人)이 경계하였다.’고 한 것은 당초 없었던 사실을 거짓말로 속인 것이 아니니, 실로 신에게 있어서는 깨우쳐 주는 지극한 말이었는데, 신이 살피지 못한 것입니다. 은명(恩命)에 핍박되어 초지(初志)를 굳게 지키지 못하였고 필경에는 승진하여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방관하는 사람들이 이를 잊어버렸다고 질책한 뒤에 이르러서는 부끄러워하고 뉘우치기에 겨를이 없어야 마땅한데, 어찌 감히 다시 인순(因循)하기를 일삼은 채 스스로 반성하여 그 길을 고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으나, 세자가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5월 15일 계해
김상원(金相元)을 승지로 초배(超拜)하고, 김진옥(金鎭玉)을 수원 부사(水原府使)로 삼았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김진옥은 유가(儒家)의 자손으로 재능과 명망이 있었는데, 묘당(廟堂)에서 천거하여 기보(圻輔)의 중진(重鎭)의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명성이 고을을 다스릴 적보다 상당히 떨어졌다. 또 청렴하지 못하다는 비방까지 있었으므로 논하는 자들이 이것을 단점으로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69책 61권 40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20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사신(史臣)은 논한다. 김진옥은 유가(儒家)의 자손으로 재능과 명망이 있었는데, 묘당(廟堂)에서 천거하여 기보(圻輔)의 중진(重鎭)의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명성이 고을을 다스릴 적보다 상당히 떨어졌다. 또 청렴하지 못하다는 비방까지 있었으므로 논하는 자들이 이것을 단점으로 여겼다.
우의정 조태채(趙泰采)가 물러가 한강 밖에 있으면서 상서(上書)하여 스스로 죄명을 열거하고 해임시켜 주기를 청하였다. 세자가 승지(承旨)를 보내 특교(特敎)를 가지고 가서 유시하게 하였는데, 그 내용에 이르기를,
"성진령(成震齡)이 대신에게 추욕을 가한 것이 너무도 참람하고 독살스러워 천고의 소인들의 죄목을 모두 모아서 멋대로 말을 만들어 내는 것을 여지없이 하였으니 해괴하고 개탄스러운 일이 무엇이 이보다 심하겠는가? 아! 경은 성상께 특별한 지우(知遇)를 받아 권우(眷遇)의 융성함이 심상한 데에서 뛰어났었으니, 경이 보답하려고 꾀하는 정성을 신명(神明)에게 질정할 수 있다. 그러나 참소하고 무고하는 말이 끝이 없었으므로 창황히 서울을 떠나갔는데, 어찌 나의 마음만이 언짢겠는가? 실로 국가의 불행이다. 그렇지만 성명(聖明)께서 위에 계시어 경이 참혹한 무고와 경멸을 당한 사실을 남김없이 통촉하고 계시니, 이런 따위의 음험한 말들은 괘념할 것도 없다. 아아! 나라의 걱정이 말할 수 없이 많은데, 묘당(廟堂)은 텅텅 비었다. 국사를 생각하면 밤중에도 잠이 오지 않는데, 나라를 몸처럼 여기는 경의 정성으로 어찌 생각이 여기에 이르지 않는다는 말인가?"
하였다.
이조 판서 정호(鄭澔)가 현도(縣道)를 거쳐 상서하여 사직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이명의(李明誼)의 말에 서원(書院)을 철거하는 것은 전고에 없던 일이라고 지목하였습니다만, 기억하건대 옛날 인조(仁祖)와 효종(孝宗)의 양 조정 때에 특별히 명하여 정개청(鄭介淸)·팽영(彭齡) 등을 배향하는 서원을 철거하게 하였는데, 서원을 철거할는지의 여부는 오로지 그 사람이 선한지 악한지를 보아서 조처하였습니다. 어찌 철거하고 철거하지 않는 것을 가지고 시비(是非)를 정할 수 있겠습니까? 이명의의 이러한 말은 실로 일전에 경연(經筵)에서 주품(奏稟)한 것 【조태채(趙泰采)가 계달하였다.】 이 어긋나고 잘못된 데에서 나온 것인데, 이것이 저들로 하여금 빌미를 만들어 죄를 꾸며내는 화(禍)를 야기시켜 일망타진하는 계책을 순치(馴致)시키게 함으로써 인주(人主)의 형세가 날로 고립되게 하고 조정의 논의가 날로 허물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왕증(王曾)181) 이 이른바 ‘은혜는 자기에게 돌아가게 하고 원망은 누구에게 감당하게 하는가?’라는 것은 진실로 귀신을 울리게 하는 말입니다."
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우상이 경연에서 주품한 것은 조정의 처분으로 하여금 중도에 맞도록 하려고 힘쓴 데에 불과한 것이다. 본 사건의 시비는 혹시라도 흔들릴 수가 없는 것인데 지금 이명의의 상서는 오로지 우상만을 허물하면서 말한 것이 매우 각박하지 않은 것이 없다. ‘인주의 형세가 날로 고립되게 한다.’는 따위의 말에 이르러서는, 바로 인신(人臣)의 극죄(極罪)를 가하는 말이다. 이것이 진실로 무슨 마음인가? 내가 실로 개탄하는 바이다."
하였다.
5월 17일 을축
임금이 왕자 연잉군(延礽君)182) 을 기복(起復)시키라고 명하였다. 이때 숙빈(淑嬪)의 상(喪)이 이미 졸곡(卒哭)이 지났었다. 임금이 약원(藥院)에서 함께 숙직하는 때에 왕자가 외방에 오래도록 있을 수가 없다고 하여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의례(儀禮)》와 경전(經傳)을 가져다가 상고하니, 글에서 이르기를, ‘공자(公子)는 어머니를 위하여 연관(練冠)에 전연(縓緣)을 착용하는데 장사지내면 제(除)한다.’라고 했고, 그 주(註)에 말하기를, 제후의 첩자(妾子)가 아버지에게 압존(壓尊)되어 권한을 펼 수가 없는 경우인데, 이러한 상복을 만드는 것은 은혜를 빼앗지 않기 위한 것이다’ 하였으며, 전(傳)에 이르기를, ‘임금이 상복을 입지 않으면 아들도 감히 상복을 입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고례(古禮)로 말씀드린다면, 초상 중에 있더라도 마땅히 연관(練冠)·마의(麻衣)의 복계를 착용해야 하지만, 장사를 지냈으면 아울러 이것과 함께 벗어야 합니다. 지금 연잉군의 초상 상복은 고례를 사용하지 않았으나, 지금 이미 장사를 지냈으니 곧 상복을 벗어버리는 것이 마땅하며, 기복에 대해서는 논할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궐내를 출입할 때에는 한결같이 보통 때의 복색에 의거하더라도 예의 뜻에 방해됨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미 상복을 벗었다고 하더라도 3년을 심상(心喪)하는 뜻이 있으니, 또한 무단히 즉시 길복(吉服)을 입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대략 종전에 기복(起復)하던 예에 의하여 양사(兩司)에 이첩(移牒)한 뒤에 봉행하게 하소서."
하고,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고(故) 상신(相臣) 정태화(鄭太和)를 기복할 때에 양사(兩司)의 성상소(城上所)183) 를 패초(牌招)184) 하여 말하여 보낸 예가 있습니다만, 왕자의 심상(心喪)과 대신의 삼년상(三年喪)과는 차이가 있으니,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특별히 패초(牌招)해서 말하여 보내게 하였다. 예조에서 또 임금의 하교로 인하여 그 복색에 대해 의논하여 아뢰기를,
"궐외(闕外)에서는 마땅히 예문(禮文)의 심상조(心喪條)에 의하여 백포(白布)·직령의(直領衣)·참포립(黲布笠)·흑대(黑帶)를 착용하고 공적인 모임에서는 공복(公服)을 착용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명하여 그 의논을 따르게 하였다.
5월 18일 병인
훈련 도감(訓鍊都監)에서 아뢰기를,
"봉묘 도감(封墓都監)에서 본영(本營)의 미곡 2백 석과 포목 5동(同)을 얻기를 청하였는데, 포목은 이미 수송하였지만 미곡은 경비가 넉넉지 못하니, 다른 관사로 옮겨서 배정하게 하소서."
하니, 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이때 큰 역사가 너무 자주 있어서 나라의 저축이 고갈되었다. 훈국(訓局)은 본래 경비의 풍부하기가 여러 군문(軍門)에서 최상이라고 일컬었는데, 근래 장수가 적격자가 아니어서 쓸데없는 비용을 많이 허비한 탓으로 군수 물자가 크게 모자라 2백 곡(斛)의 미곡도 준비하지 못할 지경이었으므로 식자들이 한심하게 여겼다.
조명봉(趙鳴鳳)을 사간(司諫)으로, 이정주(李挺周)를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지평(持平) 황선(黃璿)이 전에 계달한 것을 다시 아뢰고, 또 아뢰기를,
"금오(金吾)의 나졸(羅卒)들이 죄인을 잡아오는 일 때문에 광주(廣州)에 갔는데, 본부(本府)의 중군(中軍) 정습(鄭習)이 범마(犯馬)하였다고 일컬으면서 이들을 잡아들여 곤장을 때렸습니다. 왕부(王府)의 아문(衙門)은 사체가 지극히 엄중한데, 정습이 어찌 일개 장교(將校)로서 멋대로 왕부(王府)의 명을 받든 사람에게 곤장을 때릴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잡아다가 문죄하소서."
하였으나, 세자가 따르지 않고, 정습의 일은 단지 파직만 시키도록 하였다.
정언(正言) 조영세(趙榮世)가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조 참판 이희조(李喜朝)는 이름있는 아비의 아들로서 일찍이 가정의 교훈을 이어받고 선정(先正)의 문하에 나아가 심원한 정학(正學)을 전수받아 산림(山林)에서 덕을 배양하면서 오로지 도학(道學)에 뜻을 두었습니다. 모든 조정의 논의에는 간섭한 것이 없는데, 이명의(李明誼)가 맨먼저 공교한 말로 아첨을 한다는 따위의 말로 날조하여 악명(惡名)을 얽어 맞추었고, 또 몰래 숨어서 헤아린다는 따위의 죄목을 머리를 감추면서 억지로 가하여 기필코 모함하여 해치고자 하였으니, 마음 쓰는 것이 교묘하고 치밀하며 말하는 것이 위태롭고 음험한 것이 어찌 이처럼 극도에 이를 수 있단 말입니까? 원로 대신(元老大臣) 【김창집(金昌集)이다.】 이 참혹한 비난과 무고를 당한 것은 실로 위판(位板)을 헌 일에서 비롯되었는데, 별장[別墅]과 진장(陳場)이라는 등의 말은 모두가 억지로 잘못을 꼬치꼬치 캐낸 것입니다. 대신의 집에 청백(淸白)을 전해 오는 것은 세상이 함께 아는 것으로 조그마한 땅과 몇 개의 서까래도 증익(增益)시킨 것이 없으니, 그가 날조한 바가 모두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약원(藥院)의 대신(大臣) 【이이명(李頤命)이다.】 이 독대(獨對)한 일은 성상께서 통촉하시고 곡진히 변석(辯釋)하심에 따라 언자(言者)들이 말이 궁해지자 새로운 화제를 만들어 내어 자기 형(兄)의 복관(復官)은 그 자리에서 아뢴 것이라고 하면서 기필코 이것을 핑계하여 빈틈없는 계략을 널리 펴려 했습니다. 평안도 감사 김유(金楺)는 문학과 재주로 사우(士友)에게 추대받았고 성상의 지우(知遇)를 받아 직임이 바야흐로 높은데, 기세(氣勢)가 등등하다는 비방을 당한 뒤로부터 【성진령(成震齡)의 피사(避辭)에서 김유의 아들 김취로(金取魯)가 크게 서용된 사실을 논하면서 기세에 눌려 아무도 말하는 자가 없다고 하였다.】 이미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많은데, 지금 이명의가 탐오하다는 죄목을 억지로 가하였습니다. 그가 해서(海西)의 감영에 있을 때 선조를 위하여 비(碑)를 새겨 본도(本道)에 부쳤는데, 중도에 배가 패몰하였으므로 이를 듣는 자들은 탄식하고 애석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재화를 배에 실어보내다가 패몰되었다고 무고하니, 이것이 어찌 인정상 차마 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우상(右相) 【조태채(趙泰采)이다.】 의 평일 말하고 의논할 적에 본디 준엄하게 결단하는 것이 부족하였지만, 흑백이 뒤바뀌는 때를 당하면 오로지 자기의 견해만을 지키면서 사설(邪說)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시비(是非)가 크게 밝혀진 뒤에 이르러서는 이를 힘써 너그럽고 온화한 태도를 취하여 일을 처리할 때에 혹시라도 중도에 지나칠까 두려워하였으니, 정말 이른바 ‘세상 사람에게는 상도(常道)가 없지만 서공(徐公)에게는 상도(常道)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당차(堂箚)185) 가 핍박하는 것을 면치 못하였고 논박하는 계문(啓文)에서 사용한 말들은 한층 더 준엄하고 과격하여 한결같이 마음대로 배격하면서 조금도 돌아보고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이 이로 인하여 낭패된 것은 진실로 한스러운 일인데, 이명의가 이를 빙자하여 말하였으니, 또한 가소롭지 않습니까? 이명의가 한탁주(韓侂胄)와 정인홍(鄭仁弘)186) 이라는 것으로 복주(覆奏)한 중신(重臣) 【정호(鄭澔)이다.】 을 비난하였는데, 그 말이 너무나 패려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중신은 도리어 화(禍)를 꾸며낸다는 것으로 경연(經筵)에서 품주한 대신 【조태채(趙泰采)이다.】 에게 탓을 돌렸으니, 교격(矯激)스럽다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옛날의 군자(君子)는 노여움을 다른 사람에게 옮기지 아니한다는 도리에서도 이렇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전 참판 오명준(吳命峻)은 지위가 아경(亞卿)의 반열에 있으면서 가동(家僮)들을 인도하여 술과 국수를 판매하게 하였는가 하면 사채를 주고 모리(牟利)하면서 가혹한 짓을 이웃 마을에 두루 행하였습니다. 그가 관직에 있을 때나 집에 있을 때의 행신과 처사에 대해서는 말하면 입이 더럽고 들으면 귀가 더러워집니다. 그런데도 감히 사론(士論)에 간여하여 흑백을 변란시킴으로써 후일 공을 구하려는 계책으로 삼고 있으니, 간사한 정상과 간특한 작태는 차마 바로 볼 수가 없습니다. 관직을 삭탈하고 길이 서용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이명의의 상소는 오로지 진신(搢紳)들을 모함하려는 계책에서 나왔기 때문에 마음 쓰는 것이 음험하였는데, 지금 그대의 글을 보니 변별한 것이 명백하다. 오명준의 일은 사람을 논할 때에는 잘 살피지 않을 수 없으니, 상세하게 살펴서 처리하라."
하였다.
5월 19일 정묘
허윤(許玧)·남취명(南就明)·이홍(李宖)·이징귀(李徵龜)를 승지로 삼았다.
민회빈(愍懷嬪)에게 시책(諡冊)을 선포하는 예(禮)를 행하였다. 도감(都監)에서 18일에 시책을 내전(內殿)에 바쳤는데, 이날 시책을 선포하고 제주(題主)를 고치는 예를 행했다. 시책문(諡冊文)에 이르기를,
"구천(九天)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 추후하여 위호(位號)를 회복시켰고 두 글자의 ‘절혜(節惠)187) 를 올림은 진실로 이장(彛章)을 따랐다. 나의 마음으로 결단하여 저 여러 사람들의 소망을 위로하였다. 생각하건대, 소현 세자빈(昭顯世子嬪)께서는 친히 묘선(妙選)에 응해 일찍이 원량(元良)의 배필이 되었다. 훌륭한 아버지의 훈사(訓辭)를 받들어 몸에 밴 거룩한 행실이 있었으므로 가인(家人)의 정위(正位)에 자리하매 안팎이 서로 화목하게 되었다. 즐겁고 온유한 마음으로 양궁(兩宮)을 오래도록 받들었는데, 경계(警戒)를 어찌 하루라도 잊었겠는가? 그 사이에 오랑캐들이 침입하여 핍박하던 때를 만나서 갑자기 국운(國運)이 창황(蒼黃)하게 되자, 종묘 사직을 따라 강도(江都)로 가서 온갖 험난한 일을 겪었으며 심관(瀋館)188) 에 볼모가 되어서는 여러 성상(星霜)을 보내었다. 학가(鶴駕)가 나라로 되돌아오게 되어서는 아울러 세자빈께서도 무양하였었는데, 어찌 고생하다가 편안하게 된 지 얼마되지 아니하여 갑자기 불행한 일이 잇따랐다. 신세(身世)가 미망인이 된 것을 애통해 하여 그저 피눈물을 흘렸고 하늘이 불쌍하게 여기지 아니함을 원망하니, 의지할 데가 없는 것 같았도다. 아아! 나라의 운수가 더욱 불행하여 거듭 궁액(宮掖)189) 의 변고가 있게 되었도다. 요사스러운 것을 어찌 빈이 스스로 하였겠는가? 참소하고 이간하는 짓이 더욱 심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일이 말하기가 어려운 점이 있으므로 끝내 은혜와 사랑을 보존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슬프게도 모자(母子)가 운명을 함께 하였고 참혹하게도 형제가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외로운 무덤이 오래도록 소나무의 가래나무 숲에 의지하여 있으니 이미 부묘(祔墓)를 하지 못하였고, 사묘(私廟)에서 겨우 향화(香火)를 이어 왔으니 어찌 정문(情文)에 합치되는 일이겠는가? 도로의 사람들이 이 때문에 탄식하고 슬퍼하니, 부인과 아들들도 가슴 아파하고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도다. 옥사(獄事)를 날조한 흉악한 역적들이 형벌을 받았으니, 족히 천도(天道)는 되돌리기를 좋아하는 것을 징험하는 것이로다. 그 원통함을 호소하던 강직한 신하도 다시 복관(復官)시켰으니, 성조(聖祖)의 은미한 뜻을 알 수가 있도다. 문정(文貞)190) 의 아름다운 업적을 열람하니 세덕(世德)을 알 수 있고, 영경(永敬)의 남아 있는 사당을 바라보니 감회가 더욱 절실하도다. 온 집안의 억울함을 모두 씻어버리니 왕세자 배필의 자리가 더욱 빛나도다. 의장(儀章)을 한결같이 새롭게 하여 추후 진저(震邸)의 예에 견주었고, 물채(物采)가 모두 갖추어진 것은 경실(京室)에 있을 초기와 같게 하였다. 나라의 예전(禮典)이 이로부터 마땅함을 얻게 되었으니 신리(神理)도 응당 유감이 없을 것이다. 삼가 태묘(太廟)에 고함에 있어 어찌 선조(先祖)에서 하지 못한 것을 혐의할 것이 있겠으며, 별궁(別宮)으로 옮겨 봉안하니 다행히 오랫동안 폐기되었던 예전(禮典)이 잘 거행됨을 보게 되었도다. 삼가 신(臣)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 유명웅(兪名雄)을 보내어 아아! 단서(丹書)191) 의 구적(舊籍)을 삭제시켜 외로운 혼령을 위로하고, 동관(彤管)192) 의 신사(新詞)에 의탁하여 영원한 후세에 전하기를 바라노라. 아아! 슬프도다."
하였다.
간원에서 전에 계달한 것을 다시 아뢰고, 또 아뢰기를,
"부사직(副司直) 오명준(吳命峻)은 간사한 성품으로 아첨하는 작태를 지니고 양생법(養生法)이라 핑계대고 곁의 사람들을 함부로 부리면서 번갈아 먹고 입게 해주었습니다. 지위가 아경(亞卿)의 반열에 있으면서도 가동(家僮)들을 인도하여 술과 국수를 판매하도록 하고 사채(私債)를 주어 모리(牟利)하게 하면서 이웃 마을에 가혹한 짓을 두루 자행하였습니다. 먹고 남은 음식이라고 성을 내어 가혹한 형벌을 원례(院隷)에 가하였으며, 외방의 아전 가운데 경사(京司)에 일이 있는 자가 사적으로 촉탁하면 대신 인정의 뇌물을 받게 하였으므로 낭저(廊底)193) 가 곧 저가(邸家)194) 를 이루었으며, 경사(京司)의 아전들 가운데 그 부(府)의 소속된 자들에게 혼인·제사라고 일컫고 물품을 징수하였으므로 하인배들이 원망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똑같은 말을 하면서 침을 뱉고 욕하지 아니하는 자가 없으니, 청컨대 사판(仕板)에서 삭제시키소서. 양익표(粱益標)를 석방한 은전도 이미 대단한 실형(失刑)인데 탄장(彈狀)에 먹물이 마르기도 전에 갑자기 장관(將官)의 계하(啓下)하는 일이 있으니,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짐이 여기에 이르러 더욱 심해졌고 대각(臺閣)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다시는 말할 여지가 없게 되었으니, 청컨대 어영 대장(御營大將) 김석연(金錫衍)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소서. 이명의(李明誼)를 먼 곳에 유배할 적에 금오(金吾)에서 처음 창녕(昌寧)으로 정하였습니다만, 마침 국기(國忌)를 당하여 단자(單子)를 간원에 이틀동안 머물러 둔 뒤에 다시 밀양(密陽)으로 바꾸어 정하였습니다. 왕부(王府)에서 갑자기 정배할 장소를 바꾸고 후사(喉司)에서 단자를 바꾸어 바쳤으니, 모두 사체가 뒤바뀐 죄를 면하기가 어렵습니다. 청컨대 의금부의 당상관과 해당 승지를 아울러 추고하게 하소서."
하니, 세자가 다만 말단의 일만을 따랐다.
정언(正言) 조영세(趙榮世)가 인피(引避)하였는데, 대략에 이르기를,
"삼가 수찬(修撰) 조상경(趙尙絅)에게 되돌려준 서본(書本)을 보건대, 신의 일전에 글 중에서 ‘밀치고 핍박하고 배격한다.’는 따위의 말을 인용하면서 깊이 혐의하여 크게 기롱하고 배척하여 심지어 신을 가소롭다고까지 하였으니, 신은 해괴하고 의혹스러운 마음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우상(右相)이 경연(經筵)에서 아뢴 것이 구원해주기를 꾀하려는 본의(本意)는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한 마디 말의 착오된 죄는 면화기가 어려우니, 본원에서 도로 거두라는 청은 사체에 맞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차(堂箚)195) 【조상경·김상윤(金相尹)이 연명(聯名)하여 바친 차자이다.】 가 대간에서 계달한 뒤와 무지개의 재변(災變)이 일어난 나머지에 잇따라 나왔는데, 거기에 재변을 풀 수 있는 두 가지 방책을 제시한 바 하나는 현명한 사람을 초치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서원(書院)을 철폐하는 것이었습니다. 현명한 사람을 초치하는 것은 진실로 섭리(燮理)하는 일을 위한 것이지만 서원을 철폐하는 것이 재앙을 없애는 방술에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차자의 내용은 오로지 우상(右相)을 질책하는 것이었는데, 곧 국정을 병들게 하고 세도를 해친다는 것으로 말을 하였으니, 신의 글 중에서 당차의 말과 뜻은 미루고 핍박하는 것을 면치 못하였다고 한 것은 또한 너무 경솔한 말을 구사하여 트집 잡을 단서를 염려한 것에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배격한다고 말한 것에 이르러서는 곧 아간(亞諫)이 논박한 계문(啓文) 【곧 김만주(金萬胄)의 계문이다.】 이 준엄하고 과격하였기 때문인데, 유신(儒臣)196) 들이 기필코 몸을 떨치고 일어나 홀로 이를 감당하고 나서는 것은 무슨 의도란 말입니까? 그리고 유신들이 탄핵을 견디면서 부끄러워하지 않은 지가 또한 오래 되었습니다. 당초 조관빈이 홍문록(弘文錄)에 협잡(挾雜)이 있다는 기롱이 있을 적에는 특별한 사람에게 양여(讓與)하고 깊이 혐의하지 않은 채 한 차례 취리(就理)197) 하고는 곧 명을 받들었습니다. 지난번 이명의(李明誼)가 어린아이처럼 가소롭다는 배척을 하였을 적에는 겨우 영어(囹圄)에서 벗어나 평인과 같았는데, 한 통의 답장을 받고는 편안한 마음으로 직임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신의 글 가운데 평범하게 말한 네 글자[挨逼挑擊]에 대해서는 조금도 참지 못하고 서장(書狀)을 올려 도리어 너무도 방정한 것 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아아! 오늘날 삼사(三司)의 반열에 있는 자들은 하나같이 어쩌면 가소로운 자가 그리고 많습니까? 옥당(玉堂)에는 저와 같이 가소로운 옥당이 있고 대각(臺閣)에는 신과 같이 가소로운 대각이 있으니, 신이 진실로 스스로 비웃고 있는데 어찌 남의 비웃음을 기다리겠습니까?"
하고, 드디어 물러가 물론(物論)을 디다렸다. 다음날 정언 임형(任泂)이 처치(處置)하기를,
"상서(上書)의 내용에 대략 언급한 것은 본래 깊은 뜻이 없었던 것으로 뜻밖에 침핍을 당하였으나 혐의스러워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청컨대 조영세를 출사(出仕)하게 하소서."
하니, 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이 뒤에 지평 황선(黃璿)이 상서하기를,
"조영세의 인피(引避)하는 말은 유신(儒臣)들이 아직 올리지 않은 상서(上書)에 대하여 분노를 발한 것으로 피를 머금어 남에게 뿜은 것이므로 말이 매우 사리에 어긋났습니다. 지난번 홍문록(弘文錄)의 일을 인용하여 남을 모함하는 계책으로 삼았으니, 이것이 무슨 거조(擧措)이며 이것이 무슨 구업(口業)198) 입니까? 그가 한말과 뜻이 사리에 근거하여 변명하는 데에 있지 않고 오로지 남을 헐뜯고 욕하는 것만을 일삼아 기필코 사단(事端)을 도발하여 거듭 분란을 일으켰으니, 마땅히 파직시켜 후일의 사람들을 징계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임형이 조영세를 입과(立科)에 둔 것은 정당하지 아니합니다."
하니, 세자가 조영세는 파직하게 하고 임형은 체직시켰다.
5월 21일 기사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가 아뢰기를,
"통신사(通信使)를 보낼 때 역관(譯官)을 보내는 데 대한 절목을 강정(講定)하였으니 옛부터 그런 전례가 없습니다. 지난번 차왜(差倭)가 구전(口傳)하여 우리 나라에서 먼저 역관(譯官)을 보낼 것을 요구하였기 때문에 지난번 묘당에서 그들의 서계(書契)를 기다려 보내는 것을 허락하자는 뜻으로 복주(覆奏)하여 행회(行會)하였습니다. 지금 그 서계가 정말로 왔는데 전의 말을 바꾸고자 한다면 성실성이 너무나 결여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여 역설(譯舌)을 보내게 하였다. 도제조 이이명(李頤命)이 아뢰기를,
"세자께서 탄생하신 것이 무진년199) 이었는데 그때 성상의 춘추는 30세가 차지 않았는데도 상하 모두가 걱정하고 황급해하는 마음을 가졌었습니다. 지금 동궁(東宮)의 춘추가 이미 30세를 넘었으나 아직 종사(螽斯)의 경사가 없는데 빈궁(嬪宮)께서 뜻밖에 서거하시니 국가의 불행이 심합니다. 변례(變禮)에 대해서는 아랫사람들이 감히 우러러 청할 바가 아니나 국가에서 전부터 이미 시행해 온 전례가 있습니다. 금일의 사세로선 하루가 급하니, 청컨대 여러 대신들에게 두루 하문하소서."
하니, 임금이 좋다고 하였다.
민회빈(愍懷嬪)의 신주를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묘사(廟祀)에 합봉(合奉)하였다.
5월 22일 경오
민회빈(愍懷嬪)을 복위(復位)하고 시호(諡號)를 선포하였다고 하여 백관들이 하례하였다. 임금이 교서를 팔방(八方)에 반포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왕은 말하노라! 유계(幽界)의 원통한 사정을 불쌍히 여겨 잘못된 옥사(獄事)를 신원한 것은 온 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따른 것이고, 옛 작호(爵號)를 회복하고 욕의(縟儀)를 갖추어 여러 세대 폐기되었던 성대한 전례(典禮)를 행하였다. 이에 밝은 명을 내리어 나의 깊은 마음을 유시하노라. 생각건대 을유년200) 과 병술년201) 사이의 일은 바로 국가가 백륙(百六)202) 의 액운(厄運)을 만나 원량(元良)이 서거하니, 나라의 형세가 늠연(凛然)하여 걱정이 많았고 거활(巨猾)들이 방자하게 날뛰니 은연(狺然)한 화심(禍心)을 몰래 품게 되었다. 그리하여 참소하는 말이 안팎으로 어지럽게 나돌았고 흔단이 드디어 궁정(宮庭)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옥사(獄事)의 정상이 애매했으니 맹감(盟坎)의 계책과 무엇이 다르겠으며, 천위(天威)가 엄중하였으니 복분(覆盆)의 원통함을 밝히기가 어려웠도다. 신생(辛生)의 경우처럼 날조하고 무함하는 일이 있기에 이르자 간사한 자들이 더욱 단련(鍛鍊)하여 형벌을 마음대로 하였으니, 온 집안이 화를 입은 참상에 대해 온 세상이 같이 슬퍼하였도다. 성조(聖祖)께서 고혼(孤魂)을 불쌍히 여긴 것을 은미(隱微)한 뜻에서 볼 수가 있는데, 두세 사람의 신하들이 말씀을 올린 것이 간절하였으나 70년 동안 한을 품은 것이 끝이 없었다. 사람들의 마음은 오래도록 울적하게 되면 반드시 통해지는 법이어서 일에 기다림이 있는 것 같았으며, 천도(天道)는 다시 오지 않는 법이 없는 것이어서 그 이치를 또한 징험할 수 있도다. 이에 여러 신하들의 의논을 모아 드디어 세자빈[貳壼]의 자리에 추후 복위할 것을 정하였다. 이에 이달 21일 민회빈(愍懷嬪) 강씨(姜氏)를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묘사(廟祠)에 합봉하였다. 단서(丹書)203) 의 오래된 원통한 사정을 씻어주고 이에 부모 형제에게까지 은혜를 미쳤으며, 청궁(靑宮)의 유사(遺祠)에 배향하고 이어 함께 향사(享祀)하여 분향하였다. 이름을 높이는 것은 행적에서 드러나는 것이며 사당을 설치하여 침원(寢園)에 다시 합하게 하노라. 예수(禮數)를 모두 거행함에 있어 어찌 나라의 전례에 부족함이 없게 했을 뿐이겠는가? 구천(九泉)의 길을 다시 밝히니, 또한 신리(神理)가 편안함을 얻게 되었도다. 이에 보기 드문 아름다운 전장(典章)을 베푸니, 어찌 길상(吉祥)의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이달 22일 새벽 이전에 모반 대역(謀叛大逆)·모반(謀叛)과, 자손으로서 조부모나 부모를 모살(謀殺)하거나 구타하거나 욕한 것과, 처첩(妻妾)으로서 지아비를 모살한 것과, 노비(奴婢)로서 주인을 모살한 것과, 모고 살인(謀故殺人)한 것과, 염매(魘魅)·고독(蠱毒)과 국가의 강상(綱常)에 관계된 죄와 장오(贓汚)·강도·절도를 제외하고, 도형(徒刑)·유형(流刑) 이하의 범죄로 부처(付處)·안치(安置)·충군(充軍)된 자는 이미 배소(配所)에 이르렀거나 배소에 이르지 아니하였거나 이미 발각되었거나 아직 발각되지 아니하였거나 이미 죄를 결정하였거나 아직 죄를 결정하지 아니하였거나를 막론하고 아울러 모두 사유(赦宥)하여 면죄한다. 감히 유지(宥旨)가 있은 이전의 일을 가지고 서로 고하여 말하는 자는 그 죄로 죄를 주겠다. 관직에 있는 자에게는 각각 한 자급(資級)씩 가자(加資)하되 자궁자(資窮者)는 대가(代加)하라. 아아! 이에 널리 고하기 위해 십행(十行)의 윤음(綸音)을 내리니 모두 유신(維新)에 참여하여 온 나라 사람이 다같이 경사스럽게 하라. 인정(仁政)을 베풀고 은택(恩澤)을 널리 펴는 데 이미 살고 죽은 것에 차이가 없이 하였으니, 허물을 씻어주는 데 있어 원근(遠近)에 미치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하노니, 자세히 알도록 하라."
하였다. 【대제학 송상기(宋相琦)가 지어 바친 글이다.】
【태백산사고본】 69책 61권 43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22면
【분류】왕실-궁관(宮官) / 왕실-의식(儀式) / 사법-행형(行刑) / 인사-관리(管理)
[註 200] 을유년 : 1645 인조 23년.[註 201] 병술년 : 1646 인조 24년.[註 202] 백륙(百六) : 재액을 당할 나쁜 운수를 가리키는 말로, 여기서는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죽음을 가리킴.[註 203] 단서(丹書) : 죄안(罪案).
이봉익(李鳳翼)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5월 25일 계유
왕세자가 하령(下令)하기를,
"지금 이 가뭄 또한 심하기가 지독하다. 봄철부터 여름철까지 큰비가 내린 적이 없고 간혹 이슬비가 내리기는 하였으나 금방 그쳐 버렸으며, 바람이 서늘하고 햇빛이 쨍쨍하니 비가 올 가능성이 더욱 아득하다. 보리도 이미 실농하였고 파종(播種)도 시기를 어겼는데 절기의 차서가 더욱 늦어져 가고 있다. 지금 비가 오지 않으면 나의 적자(赤子)들의 시체가 장차 구렁을 메우게 될 것이 슬프다. 게다가 지독한 여역(癘疫)이 날로 번성하여 제로(諸路)가 모두 같은 현상이어서 사망한 자를 헤아릴 수가 없는 것이 마치 병란을 입은 것과 같으니, 놀라운 마음과 참혹한 광경을 차마 말로 형언할 수가 없다. 음식을 먹어도 맛이 없고 잠자리에 들어도 잠이 오지 않는다. 더구나 내가 만기(萬機)를 대리(代理)한 이후부터 한재(旱災)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걱정과 두려움이 배로 더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나는 문사(文辭)가 짧고 치졸하여 능히 내 마음을 시원하게 드러내지 못하겠으니, 승지는 대신 글을 초잡아서 널리 직언(直言)을 구하여 나의 미흡한 점을 보필하게 하라. 말이 중도에 맞지 않더라도 내가 너그럽게 수용하겠다. 근일의 일과 같은 것에 대해서라면, 성상께서 밝게 결단하시어 그 시비(是非)를 크게 밝혔으며 작년에 나의 두 번째 상소에 대한 비지(批旨)가 정녕(丁寧)할 뿐만 아니니, 성지(聖旨)에 응한다고 가탁하여 흑백을 변란시키는 자가 있다면 단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아! 그대 대소 신료(大小臣僚)들은 나의 겨를이 없이 애쓰는 뜻을 몸받아서 한결같이 마음을 다하여 직사(職事)를 삼가고 부지런히 함으로써 조금이나마 하늘의 견책에 보답하도록 하라. 감선(減膳)하고 철악(撤樂)하고 금주(禁酒)하는 따위의 일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
하니,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십행(十行)의 사지(辭旨)가 정녕하고 간측하시어 한재를 만나 도움을 구하시는 뜻이 문자 사이에 차고 넘칩니다. 신 등은 문사(文辭)가 짧고 졸렬하여 만분의 일도 잘 드러내어 선양하지 못하겠습니다. 곧바로 이 영지(令旨)를 가지고 중외(中外)에 널리 포고하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세자가 허락하지 않았다. 재차 청하니, 비로소 따랐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지독한 가뭄이 이같이 참혹하니 백성들의 일이 너무나 가련하다. 동궁이 이제 영지(令旨)를 내려 구언(求言)하고 있으니, 나도 금일부터 정전(正殿)을 피하고 감선(減膳)할 것을 해조로 하여금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세자가 하령하기를,
"한재(旱災)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소결(疏決)하는 일을 조금도 늦출 수가 없다. 의금부와 형조의 현재 옥수(獄囚)와 편배(編配)할 죄인들을 아울러 내일 아침에 입대(入對)하여 소결(疏決)할 것으로 분부(分付)하도록 하라."
하였다.
5월 26일 갑술
김흥경(金興慶)을 도승지로, 이교악(李喬岳)을 승지로, 정동후(鄭東後)·어유룡(魚有龍)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평안도 감사 김유(金楺)가 소장을 올려 사면하기를 청하고, 이명의(李明誼)가 상소한 내용을 가지고 빨리 조사할 것을 청하였는데, 세자가 답하기를,
"경이 당한 일이 지극히 원통하다는 것은 조사하여 밝히기를 기다리지 아니하더라도 성명(聖明)께서 이미 통촉하고 계시니, 조금도 마음이 편안치 못할 단서가 없다."
하였다.
5월 27일 을해
박성로(朴聖輅)·김태수(金台壽)를 장령으로 삼았다.
간원에서 전에 계달한 것을 다시 아뢰었는데, 오명준(吳命峻)의 일은 다시 삭출(削黜)하게 하였으나, 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민진후(閔鎭厚)가 일찍이 경연(經筵)에 임금에게 아뢰기를,
"국기(國忌) 때 소선(素膳)을 바치는 것에 6시(時)와 3시의 구분이 있습니다. 기년상(朞年喪)·대공(大功)·소공(小功)·시마(緦麻)에서도 마땅히 이러한 예를 채용하여 소선(素膳)하는 일수를 정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예조에 명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예조에서 청하기를,
"기년상·대공은 6시로 하고 소공과 시마는 3시로 하는 것으로 법식을 정하소서."
하니, 임금이 좋다고 하였다.
5월 28일 병자
왕세자가 현재의 옥수(獄囚)와 유배할 죄인을 소결(疏決)하였는데, 가뭄을 걱정하였기 때문이다. 시임 대신(時任大臣)들은 모두 정세(情勢)에 있어 편안치 못하다고 하여 입시(入侍)하지 않았다. 원임 대신(原任大臣) 판중추부사 이유(李濡)가 의금부·형조의 당상관과 삼사(三司)의 관원들을 거느리고 입시하였다. 의금부의 현재 옥수와 유배할 죄인들 가운데 석방된 자가 19인이었고 죄의 등급을 감면한 자가 1인이었으며, 형조의 현재 옥수와 유배할 죄인 가운데 석방된 자가 10인이었다. 해가 졌기 때문에 우선 파하였다.
5월 29일 정축
왕세자가 유배할 죄인을 소결(疏決)하였다. 판중추부사 이이명(李頤命)이 아뢰기를,
"소결(疏決)은 사령(赦令)과 다르니, 반드시 무슨 죄까지라고 한정할 것이 없습니다. 비록 그 죄가 중한 자라도 의심스러운 단서가 있으면 마땅히 가벼운 형전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서울과 외방에 적체되어 갇혀 있는 자가 매우 많은데, 어떤 사람은 7, 8년에 이르도록 옥에 갇혀서 1백여 차례나 형문(刑問)을 받았으니, 그 원통하고 억울한 기운이 족히 하늘의 화기(和氣)를 우러러 간범하였을 것입니다. 가령 그 죄가 사형에 해당하더라도 즉시 구결(究決)하지 아니하고 오래도록 감옥에 있으면서 지독한 매를 맞고 울부짖으며 죽음을 청하여도 죽을 수 없는가 하면, 더구나 반드시 모두 사형에 해당하는 자가 아니라면 더욱더 재앙을 불러들이는 한 가지 단서가 아닐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서울과 외방에서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관리들에게 신칙하여 오래도록 갇혀 있는 중죄인은 일차(日次)에 구애받지 말고 뜻을 다하여 끝까지 신문(訊問)하여 속히 판결함으로써 적체되지 말고 소통되게 하소서."
하니, 세자가 가납(嘉納)하였다. 이날 각도의 죄인 가운데 석방된 자가 1백여 인이었으며 죄의 등급을 감한 자가 수십인이었다. 날이 저물자 우선 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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