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62권, 숙종 44년 1718년 7월

싸라리리 2025. 11. 30.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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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무신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진후(診候)를 마치자,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도성(都城)의 백성으로 전염병에 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 강시(殭屍)218)  가 도로에 서로 잇대어 있습니다. 그 시체의 주인이 없는 경우는 모름지기 말할 필요가 없지만, 비록 주인이 있는 경우라 하더라도 집안 사람들이 바야흐로 모두 전염되어 앓고 있으므로, 시체를 거둘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더러는 아주 내버려 두거나 더러는 짚으로 덮어둔 것이 반쯤 드러나기도 하여 더러운 냄새가 사람을 핍박하므로, 다니는 길이 거의 막히게 되었습니다. 마땅히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한 사람의 낭관(郞官) 및 부장(部將)을 정하여 전담하여 관리하도록 하고, 일일이 금지 표지 밖에다 묻게 하되, 비록 각기 무덤 모양을 만들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한 곳의 큰 구덩이에다 함께 묻는 것도 불가함은 없을 것입니다. 이른바 매예 감관(埋瘞監官) 및 군인을 각별히 모집하여 진휼청(賑恤廳)에서 요포(料布)219)  를 제급(題給)하도록 하고, 자주 단속과 경계를 가하는 것이 적당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들으니 참으로 매우 슬프다. 특별히 거듭 타일러 착실히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민진후가 또 말하기를,
"동래 부사(東萊府使) 조영복(趙榮福)이 장계(狀啓)하기를, ‘장기(長鬐)의 표류 한 사람을 데리고 온 차왜(差倭)220)  의 정상(情狀)이 놀랄 만한데, 접대하지 말고 단지 과해량(過海粮)221)  만 지급하도록 청하였으므로, 이로써 훈별(訓別)에게 명령을 전달하여 그로 하여금 차왜를 책유(責諭)하도록 하였더니, 차왜가 병신년222) 남해(南海)의 표류민을 데리고 왔을 적에 접대한 예를 인용하며 억지로 다투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칼을 빼어 표독하게 굴며 문을 굳게 닫은 채 훈별(訓別)을 붙잡아 두었다가, 닭이 운 뒤에야 비로소 내보냈습니다. 대체로 왜인은 교활하여 일마다 오로지 억지로 다투는 것을 주무(主務)로 삼는데, 조정에서는 대체(大體)를 보존하려고 힘써 매번 굽혀서 따라주었기 때문에 왜인들의 마음이 날로 더욱 교만해졌습니다. 이번에 바다를 건너가는 역관(譯官)이 들어갈 때에 따로 서계(書契)를 만들어 임술년223)  의 약조(約條)를 거듭 환기시켜 다투는 단서를 그치게 해야 합니다. 비록 이들이 당연히 접대할 차왜라 하더라도 감히 조정의 차관(差官)을 붙잡아 두고 칼을 뽑아 협박하였다면, 결단코 전례대로 접대하기 어렵다는 뜻을 각별히 서계 내용 가운데 적어 넣어 조정의 위령(威令)을 보이는 것이 진실로 사의(事宜)에 합당하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앞으로 통신사(通信使)224)  가 떠날 때에 별도로 서계를 만들어 거듭 약속을 설명하도록 하되, 그 전에는 결단코 차왜를 접대할 수 없다는 뜻을 다시 책유(責諭)하고, 단지 과해량(過海粮)만 지급하여 들여보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대신(大臣)들의 뜻도 그러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민진후가 또 말하기를,
"황해 감사(黃海監司) 이덕영(李德英)이 장계(狀啓)하여 도내(道內)에 기근(飢饉)이 든 참혹한 정상을 진달하고, 군포(軍布)225)  를 바치지 못한 사람에게 독촉하여 거두게 하는 일을 정지시켜 그들로 하여금 오로지 농삿일을 다스리는 데에만 마음을 기울일 수 있게 하기를 바란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몇 달 사이의 일에 불과하니, 신포(身布)226)  와 신공(身貢)227)  을 모두 기한을 물려서 바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7월 3일 경술

김상직(金相稷)을 승지(承旨)로, 정호(鄭澔)를 대사헌(大司憲)으로, 조명봉(趙鳴鳳)을 집의(執義)로 삼았다.

 

7월 4일 신해

중궁(中宮)의 홍진(紅疹)228)  이 평복(平復)되었으므로, 임금이 의약청(議藥廳)을 폐지하도록 명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중궁(中宮)의 환후(患候)가 평복되었다 하여 신묘년229) 두환(痘患)230)   때의 전례대로 종묘(宗廟)에 고하고 반교(頒敎)하며 진하(陳賀)하도록 청하자, 임금이 여러 도(道)에 명하여 진하하게 하고 방물(方物)은 절반을 줄이기를 하였는데, 흉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7월 5일 임자

유성(流星)이 왕량성(王良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南方)의 하늘가로 들어갔다.

 

부수찬(副修撰) 김취로(金取魯)가 상서(上書)하여 홍문관(弘文館)의 직임(職任)을 사직하기를,
"성품은 참으로 미묘(微妙)하여 알기 어렵지만, 행동에 이르러서는 사업에 드러나므로 남들이 쉽게 볼 수 있는 바입니다. 신의 성품과 행실이 과연 대간(臺諫)의 말과 같다면, 【정택하(鄭宅河)·성진령(成震齡) 두 사람의 상소이다.】  마땅히 실상(實狀)을 열거하여 사적(仕籍)231)  에서 삭제하도록 청했어야 하며, 단지 영선(瀛選)232)  에 적합하지 않다고만 말한 것은 너무 너그러워 실수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세자(世子)가 답하기를,
"이번의 영선(瀛選)은 실제로 공의(公議)를 따랐는데, 뜻밖에 나무라며 헐뜯기는 하지만 나에게 무엇이 손상되겠는가?"
하였다.

 

대사간(大司諫) 홍계적(洪啓迪)이 상서(上書)하기를,
"성진령(成震齡)의 피사(避辭)가 비록 중도에 지나쳤다고 말하지만, 요컨대 그 주장하는 뜻은 크게 시비(是非)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대신이 연석(筵席)에서 아뢴 것을 시험삼아 두 대신(臺臣)의 글과 말로 살펴보건대, 역시 모두 착오였다고 말하니, 그 착오였다고 한 것이 바로 간관(諫官)의 말을 불러오게 한 까닭이며, 나에게 있어서 경중(輕重)을 논함이 없이 벌써 실수가 있었다고 말한다면, 말한 사람의 말이 아무리 지나치더라도 혐의스럽게 여길 수 없으며, 아무리 겸손하더라도 즐거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로써 말하건대, 간관(諫官)의 말은 원래 노엽게 여길 것이 없고, 간관을 논핵하여 배척하는 것 또한 무슨 보탬이 있겠습니까? 대신(大臣)이 용납하여 받아들이고 개의(介意)하지 않는다면 허물 듣기를 좋아한다는 도리에 해롭지 않으며, 조정에서 만약 너그럽게 용서하고 죄주지 않는다면 대신을 권면(勸勉)해서 남들에게 부지런히 공부하기를 바라는 아름다운 뜻에 해롭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삼가 처분(處分)을 보건대, 오로지 기를 꺾고 억제하는 것으로 주장을 삼았으니 돌아보건대 어떻게 대신의 마음에 편안하겠습니까? 한갓 사기(士氣)만 손상시키고 언로(言路)에 방해됨이 있으니, 조정에서 대신을 대우하고 간관을 대우하는 것이 여기에서 두 가지 모두 실수한 것입니다."
하니, 세자(世子)가 답하기를,
"성진령(成震齡)의 글과 말은 결단코 일을 맡아서 일을 논하는 공정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그대의 글 가운데 부지하고 억제하는 것이 너무나 치우치니, 실로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7월 6일 계축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 이이명(李頤命) 이하 및 의관(醫官)에게 물품을 내려 주고, 음관(蔭官)의 아들에게 자계(資堦)를 차등이 있게 올려 주었으니, 의약청(議藥廳)의 노고에 대하여 등급을 매긴 것이었다.

 

예조(禮曹)에서 진하(陳賀)할 때 음악을 연주하는 절차를 계품(啓稟)하니, 임금이 대신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이명(李頤命)이 의논하기를,
"고례(古禮)에는 기년(期年)233)  이나 대공(大功)234)  의 복(服)을 입으면 음악을 듣지 않았습니다. 성상(聖上)께서 이미 고례를 회복하시어 복제(服制)를 기년(期年)으로 준용(準用)하셨으니 지난날 30일 만에 복(服)을 벗었던 때와는 같지 않습니다. 옛날 주(周)나라 경왕(景王)이 자상(子喪)에 장례를 마치고 연회를 베풀자 숙향(叔向)235)  이 비난하였으며, 진(晉)나라 평공(平公)이 경상(卿喪)이 당(堂)에 있는데도 음악을 연주하자, 두궤(杜簣)236)  가 풍자하였으니, 예관(禮官)이 의심스럽게 여겨 다시 계품(啓稟)한 것은 실로 인정과 예의에 합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 의논을 따라 음악을 연주하지 못하게 하였다.

 

7월 8일 을묘

장령(掌令) 박치원(朴致遠)이 상서(上書)하기를,
"연분(年分)237)  을 각도(各道)에서 조사하여 구별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묘당(廟堂)에서 재결(災結)238)  을 참작하여 결정하므로, 도리어 오리(汚吏)에게 빌미를 주어 이를 빙자하여 가렴주구[掊克]하고 있어서 한갓 잔약한 백성으로 하여금 백지(白地)239)  에서 세금을 물게 하니, 이것을 금년에 그대로 시행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군정(軍政)의 폐단은 실로 교생(校生)·원생(院生)으로 모록(冒錄)한 자 및 각영(各營)·각청(各廳)의 공장(工匠)·군관(軍官)으로 소속된 이가 매우 많은 데에 연유되는데, 호민(豪民)240)  들이 거의 모두 투입(投入)되어 군정(軍丁)을 얻기가 어렵게 되었으니, 역시 엄격히 심사하여 추려서 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호조(戶曹)와 병조(兵曹)의 전포(錢布)로 대내(大內)에서 가져다 쓰는 것은 단지 내수(內竪)241)  의 구전(口傳)에 의거하는데, 해조(該曹)에 분부하여 가져다 쓰는 것을 명백하게 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각사(各司) 서리(胥吏)의 간두(奸蠧)242)  함도 점점 범위가 넓어지고 수단은 더욱 교활해졌는데, 이른바 관원은 다만 앉아서 서명(署名)만 하니, 오직 정액(定額) 밖에 증가한 수량은 한꺼번에 도태시키도록 삼가 청해야 합니다. 혜민서(惠民署)의 약물(藥物)은 원래 뿌리 하나, 잎 하나도 백성을 구제하는 것은 없고, 한갓 제조(提調)와 예당(禮堂)243)  을 위하여 편안하게 사용되니, 그 소비되는 것을 따지면 몇 백 곡(斛)의 쌀이 되는지 모릅니다. 그 관서를 혁파하여 진휼하는 밑천으로 보충하는 것이 적합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지난번 대신 【조태채(趙泰采)를 말한다.】 이 삭출(削黜)244)  된 여러 사람을 용서하도록 청하면서 주달(奏達)할 적에 처음에는 단지 홍(洪)  【홍우행(洪禹行)이다.】 ·황(黃)  【황초(黃草)이다.】  두 사람을 지명하여 아뢰었고, 그가 나와서 당후관(堂后官)245)  과 오가는 데 이르러서는 두 사람이 증가하여 다섯 사람이 되었으며, 이튿날 차자(箚子)로 진달하는 가운데서는 다섯 사람에다 또 보태어 여섯 사람이 되었으니, 연주(筵奏)에서 열거한 조목과 아뢴 것이 각각 달라 두 사람 여섯 사람으로 보태거나 줄이기를 마음대로 하였습니다. 또 그것을 청대(請對)하는 일이 갑자기 옥체(玉體)에 침(鍼)을 맞던 날 나왔으니, 외부에 있던 신료(臣僚)들은 시급하고 긴절한 업무가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그 연설(筵說)이 전파됨에 이르러서는 바로 윤선거(尹宣擧)의 서원(書院)을 헐지 말자는 것과 이형수(李衡秀)를 6품(品)으로 승진시키자는 일이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의 심정이 놀라고 분하게 여겼으며, 사론(士論)도 불안하게 여겼습니다. 지난번 당차(堂箚)246)  에 설령 공격하거나 핍박하는 말이 있다 하더라도 이것이 어찌 대신(臺臣)이 맞아서 공격할 것이겠습니까? 그런데 전(前) 정언(正言) 조영세(趙榮世)가 도리어 방자한 생각으로 추잡하게 욕하며 공격하여 제거한 뒤에야 그만두려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다른 사람의 일을 가로맡아 사주를 받는 무리가 되기를 달갑게 여기고, 기력(氣力)을 진작하고 성색(聲色)을 분발하여 한결같이 남을 위해 그런 일을 서슴없이 하기를 바랐으나, 그것이 스스로 간사하게 협잡하는 데 빠뜨려진다는 것을 돌아다볼 겨를도 없었습니다. 전 정언(正言) 성진령(成震齡)의 글이 비록 과격한 부분이 없지는 않으나, 성조(聖朝)의 언로(言路)를 넓히는 도리에 있어서는 장려할 만하며 저지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김만주(金萬胄)가 타당한 것을 무릅쓰고 처치(處置)한 것은 시비(是非)가 전도(顚倒)되었는데, 다만 마음대로 아첨하려 하니, 이미 지극히 해연(駭然)합니다. 낙과(落科)에 두려고 하였으나 말로 배척할 것이 없으니, 제목 밖의 말을 끄집어 내어 곧바로 틈바구니를 얼버무리려는 방향으로 돌리려 하니, 이것이 간신(諫臣) 【홍계적(洪啓迪)이다.】 이 인심이 함닉(陷溺)되는 것을 마음 아프게 여기고 언로(言路)가 막히는 것을 염려하여 그 직임을 파면하도록 청한 까닭입니다. 그리고 임형(任泂)이 염치를 무릅쓰고 출사(出仕)하여 서둘러서 멋대로 정지하게 한 것은 【임형(任泂)이 조영세(趙榮世)의 파직(罷職)을 정지하도록 아뢰었다.】  마치 승부(勝負)를 계교하고 사업(事業)을 갖추려는 듯하기는 하나, 무슨 큰 이해(利害)가 그 사이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조관빈(趙觀彬)은 당초에 신록(新錄)247)  되었을 때 여러 동료들에게 의당 일일이 나아가 의논하여 그 말을 따르겠다고 생각하였는데, 끝내는 도모한 바와 같지 않으니, 업신여김을 당하였다고 여기고 갑자기 화를 내었던 것이며, 이른바 협잡(挾雜) 등의 말은 신록(新錄)을 저지시키고 방해하여 한때의 분노를 통쾌하게 하려고 한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다가 한두 명의 신하와 의심하여 저지한 후에 이르러서는 먼저 조영세(趙榮世)의 무리를 시켜서 치고 깨물며 공격하여 쫓도록 하고, 자가(自家)의 글 내용에는 일부러 칼날을 몰래 감춘 채 모호(糢糊)하게 말하였으니, 마치 처음에는 지척(指斥)함이 있는 듯하였으나 지금은 이미 드러내 놓고 말하는 듯함이 있으니, 그 기구(崎嶇)하게 핍박하고 편파적으로 위험하게 기우는 뜻이 실로 명백하고 정대(正大)한 모습이 아닙니다."
하니, 세자(世子)가 답하기를,
"일을 좋아하는 무리들의 참독(慘毒)한 의논을 도와 우규(右揆)248)   부자(父子) 【조태채(趙泰采)·조관빈(趙觀彬)이다.】 를 자못 여지없이 극력 헐뜯었으니, 이것은 진실로 무슨 마음인가? 다른 나머지 일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박치원(朴致遠)이 마침내 인피(引避)하고, 조태채(趙泰采)를 무엄(無嚴)하다고 배척하였다. 또 말하기를,
"유신(儒臣) 【조관빈(趙觀彬)을 가리킨다.】 이 부귀(富貴)한 집안에서 생장하여 일찍이 청관 현직(淸官顯職)의 반열에 드날렸으니, 그가 교만한 것은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으나, 한 번 두 번 올린 글의 내용이 심상치 않아 사람마다 몰래 비난하며 일마다 의심을 품고서 표독하고 참혹한 칼날로 핍박하지 않는 바가 없었습니다. 아! 권력이 있는 요직은 의당 대신의 지위보다 나은 것이 없고, 추시 부세(趨時附勢)하는 것은 오늘날 보다 더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조영세(趙榮世)의 무리가 스스로 돌볼 겨를도 없으면서 도리어 남을 능멸하려고 당여(黨與)를 체결하였습니다. 유신(儒臣)이 이미 말하기를, ‘부끄러움을 안다.’고 하였으나, 도리어 지금 사리에 어긋나고 어지럽히는 무리들을 그의 집안에 모았으며, 명기(名器)를 삼가고 아낀다고 유신이 이미 스스로 힘쓸 것을 허여(許與)하고서도 채권자의 총수격인 무리가 함께 그의 집에서 나오니, 그가 부끄럽게 여기고 힘쓰겠다는 바가 진실로 이와 같은 것입니까?"
하고, 마침내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렸다.

 

7월 11일 무오

장령(掌令) 조언신(趙彦臣)이 상서(上書)하여 세 가지 일을 조목별로 논하였는데, 첫째 군정(軍政)을 바로잡는 것이고, 둘째 백성들의 재물을 아끼게 하는 것이며, 세째는 조정을 바로잡는 것이었다. 그 조정을 바로잡는 데 대하여 이르기를,
"대신(大臣) 【조태채(趙泰采)이다.】 의 연주(筵奏)는 단지 뒷날의 폐해를 염려하는 뜻에서 나왔는데, 재상(宰相)은 옳다고 하고 간관(諫官)은 옳지 않다고 하지만, 진실로 이것은 아름다운 일이니, 이것을 논척(論斥)하여 누가 불가하다고 말하겠습니까? 그러나 이제 그의 평생을 구단(句斷)하고 그의 심적(心迹)을 억제시켜서 차고 밟으며 다시 여지 없이 꾸짖어 욕보였으나, 대신은 편안하게 이를 받아들였는데, 온 조정에서 감히 그르다고 하는 이가 없으니, 아! 역시 해이(駭異)합니다. 박치원(朴致遠)의 글은 내용의 심각(深刻)함이 점차 한층 더하였으니, 그 의도(意圖)는 대신을 제거하려는 것일 뿐만 아니라, 반드시 그 세력을 도와서 속히 궤열(潰裂)되게 한 뒤에야 그만두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지난번 한 대관(臺官) 【정택하(鄭宅河)이다.】 이 나이가 젊고 식견이 어두운 사람으로서 감히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를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는 일을 윤허받지 못한 데 대해 말하면서 경솔하게 짧은 한 편의 문장으로 논단(論斷)하였는데, 글귀 내용 사이에 드러나게 업신여기는 뜻이 있었으니 풍습(風習)의 아름답지 못함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김취로(金取魯)의 지망(地望)과 재화(才華)는 세상에서 모두 인정하는 바인데, 성품고 행실이 거칠고 사나와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흡족하지 않다는 등의 말로 느닷없이 멋대로 능멸하였고, 심지어 기세에 눌린 말이라고 하니, 의도는 겸제(箝制)249)  하는 데 있습니다."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조상경(趙尙絅)이 엄명(嚴命)을 여러 번 어겨서 감옥에 나아가는 데 이르렀으니, 염우(廉隅)의 일절을 진실로 이미 다한 것인데, 탄핵을 참으면서 부끄럼이 없다는 배척 【조영세(趙榮世)의 피사(避辭)이다.】 이 갑자기 본정(本情) 밖에서 나왔습니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헌신(憲臣) 【황선(黃璿)이다.】 의 글 가운데 제함(擠陷)하였다는 등의 말 또한 가려서 했다고는 할 수 없으며, 견파(譴罷)하라는 주청은 진정(鎭定)시키는 방법으로는 너무 부족합니다. 그런데 박치원(朴致遠)이 지금 또 잇따라 일어나 사주(使嗾)받았다는 등의 말로 대각(臺閣)의 신하에게 더하는 데에 이르렀으니, 어찌 그 말의 사리에 어긋나고 망령되며 차례가 없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김만주(金萬胄)가 처치(處置)하는 가운데 혐의스러움을 무릅썼다는 말은 바로 한 세대에서 듣지 못한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박치원이 시골 구석에 살면서 간혹 혼자 듣지 못한 바가 있다고 하겠지만, 임형(任泂)이 염치를 무릅쓰고 공무를 집행하였다고 배척한 것과 같은 일은 참으로 가소롭습니다. 탄핵 뒤에 처음으로 임명되어 의기 양양하게 즉시 출사(出仕)한 자도 간혹 있으니, 【박치원(朴致遠)이 지난해에 탄핵을 당한 뒤 이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장령(掌令)에 임명되어 즉시 출사(出仕)하였기 때문에, 조언신(趙彦臣)이 의도적으로 이 일을 지목하였다.】 임형이 두 번이나 대직(臺職)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출사한 것은 오히려 염우(廉隅)가 대단히 뛰어나다고 말할 만한데, 지금 그의 말의 틀려 어긋남이 어찌 한결같게 이와 같이 심합니까? 신이 진달한 군정(軍政)을 바로잡고 백성들의 재산을 넉넉하게 하는 것은 실로 당세의 시급한 업무이나, 만약 선비들의 공론을 진정시켜 조정의 기상을 화목하게 하지 않는다면, 이 두 가지 일 또한 바로잡아 개혁하지 못할 것이니, 이것이 신이 더욱 조정을 바로잡는 도리에 대해 잊지 못하고 돌보게 된 까닭입니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천하의 모든 일이 하나라도 인주(人主)의 한 마음에 근본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조정의 화합하고 화합하지 않는 것은 오직 저하(邸下)의 한 마음이 올바르고 올바르지 않은 데 달려 있습니다."
하니, 세자(世子)가 답하기를,
"그대가 직접 언관(言官)의 지위에 있으면서 깊이 국사(國事)에 대해 걱정하니, 참으로 매우 절실하여 내가 가상(嘉尙)하게 여긴다. 세 번째 논한 것은 많은 사단이 생겨 편안할 기약이 없다는 데 대해 더욱 감개(感慨)하는 바가 있으니, 그 말이 아주 훌륭하다. 내가 마땅히 유념하겠다. 그리고 군정(軍政)을 바로잡고 백성들을 넉넉하게 하는 일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당시 박치원(朴致遠)이 인피(引避)하였으나, 아직 처치(處置)하지 않았는데, 조언신(趙彦臣)의 상소가 나오자, 여러 대신(臺臣)들이 모두 인피하여 기꺼이 처치를 담당할 자가 없었다. 조언신은 또 동료 대신[僚臺]의 피사(避辭)로 감히 가부(可否)를 말하지 못하고 인피하자, 처치가 옥당(玉堂)으로 돌아갔다. 부제학(副提學) 이관명(李觀命)이 차자(箚子)를 올려 여러 대신(臺臣)들을 출사(出仕)시키도록 청하고, 박치원(朴致遠)과 조언신(趙彦臣)의 일은 별도로 논하여 말하기를,
"요즈음 대각(臺閣)에서 대신(大臣) 부자(父子)의 일로 시끄러운 말들이 잇따라 나와 한 바탕의 논의(論議)한 것으로 만들어서 더러 거리낌없이 말한 것을 자부하기도 하고, 더러는 조정(調停)하였다고 일컫지만, 돕거나 억제시키는 것이 너무 치우쳐서 시비(是非)가 결정되지 않았는데, 자세히 그 시초를 캐보면 근거 없는 의논에 격동한 데 불과할 뿐입니다. 대체로 대신의 연주(筵奏)가 참으로 공의(公議)에 맞지 않는 것이 있으면, 쟁론(爭論)하여도 충분할 것이다. 그런데 근거 없는 의논이 이에 편승하여 심지어 그 평생을 구단(句斷)하여 의심이 심적(心迹)에 미치기까지 하는 것은 또한 지나쳤습니다. 또 조관빈(趙觀彬)은 젊은 나이에 함부로 행동하였으니 물의(物議)를 불러들이게 된 것은 당연하지만, 지금 그를 배격하기에 부족하여 채권자의 총수격인 자가 그의 집안에서 많이 나왔다는 말로 【박치원(朴致遠)의 피사(避辭)이다.】  위로 그 어버이에게 누(累)가 되게 하였으니, 어떻게 그 말을 가려서 하지 않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 조영세(趙榮世)가 지난번 피사(避辭)에서 별난 말을 부연해 내어 듣는 이들을 크게 놀라게 하였으나, 일을 논하는 신하들이 너무 지나칠 정도로 용서하였습니다. 말의 의미가 모순(矛盾)됨이 이와 같은데도 적당히 조절하려고 한다면 과연 인심을 복종시킬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논의(論議)를 만약 엄하게 억제를 가하지 않는다면 장차 근거 없는 의논이 태산(泰山)보다 중하게 여겨져 국사(國事)가 날마다 분열되는 데 이를 것이니, 청컨대, 모두 체차(遞差)시키소서."
하니, 세자(世子)가 그대로 따랐다.

 

7월 12일 기미

남도규(南道揆)를 승지로, 이중협(李重恊)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태학생(太學生)이 3일 동안 권당(捲堂)250)  하다가 도로 들어갔다. 당초 재유(齋儒) 등이 전부(銓部)에서, 태학에서 추천한 사람을 등용하지 않았다고 노여워하여 권당을 하기에 이르렀는데, 사람들이 그것은 혐의를 멀리할 수 없다고 비웃었으며, 박치원(朴致遠)은 그 일을 논하는 글에서 이를 비난하여 말하기를,
"가만히 앉아서 양현(兩賢)이 무함받는 것을 보고서도 끝내 한 마디도 변파(辨破)한 것이 없었는데, 한갓 벼슬하는 대수롭지 않은 부분에서는 구구하게 군다."
하니, 유생(儒生)들이 다시 권당하였다. 국자 당상(國子堂上)이 영(令)을 받들어 들어 가도록 권하니, 제생(諸生)이 처음으로 명을 받아들였는데, 식견이 있는 자는 잠깐 나갔다가 금방 들어오는 것은 뜻이 〈현재의 지위를〉 잃어버릴까 근심하는 데 있으며, 이 한 번의 일로도 현관(賢關)251)  에 부끄러움을 끼치기에 충분하다고 여겼다.

 

7월 13일 경신

중궁(中宮)의 환후(患候)가 평복(平復)되었다 하여 반사(頒赦)하고 반교(頒敎)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왕(王)은 말하노라. 때마침 중궁이 병에 감염되어 바야흐로 깊이 근심하는 마음이 간절했는데, 상천(上天)에서 내려 준 은혜를 받아 이에 병이 나음을 보게 되었으니, 이는 진실로 드물게 보는 경사인데 어찌 널리 알리는 글이 없겠는가? 생각하면 내가 임어(臨御)한 지 여러 해인데 잇따라 내전(內殿)을 주장하면서 어진 도움이 있었다. 그래서 집안을 본보기로 나라를 다스리는 왕화(王化)의 근본이 터를 잡았고, 춘추(春秋)의 제사를 받드니 종사(宗事)의 중대함을 함께 하였도다. 아름다운 칭호는 이미 혜순(惠順)으로 더하였고, 후한 덕은 모두 인자하다고 우러렀다. 요즈음 시기(時氣)252)  의 유행(流行)으로 인하여 나쁜 병이 치성(熾盛)하게 되었는데, 비록 여염(閭閻)의 크고 작은 부류도 면하는 자가 많지 않았었다. 돌아보건대, 궁금(宮禁)의 엄숙한 가운데서도 혹시 이르지 않을까 염려했었는데, 어찌 감염의 징후가 바로 왕비의 거처를 침범할 줄을 생각했겠는가? 침선(寢膳)253)  이 평상시보다 조금 줄어들었으니 어찌 해가 있지 않겠으며, 아프고 가려운 것이 온 몸에 상관이 되니 어찌 편안할 수 있었겠는가? 왕세자가 시탕(侍湯)하느라 거의 하루에 세 번씩 약을 달이고, 약원(藥院)254)  에서는 옮겨 숙직하며 모든 관료와 함께 허둥지둥 근심하였도다. 다행히 신명(神明)의 도움을 힘입어 병이 빨리 낫게 됨을 볼 수 있었도다. 천화(天和)255)  가 점차 회복되는데 어찌 약쓰는 일을 번거롭게 할 것인가? 정신과 원기가 더욱 편안해지니 문득 상제(床第)256)  로 온당하게 돌아올 줄을 깨닫게 되었도다. 열흘 동안 애태우며 염려했던 것이 도리어 온 나라의 기쁜 마음을 일으키게 되었도다. 뒷날의 은우(隱憂)를 잊게 되었으니, 유쾌함은 상상할 만하며, 지난해 홍역을 치른 것과 비교하면 기쁨이 어찌 다르겠는가? 온 몸이 벌써 편안한 데 이르렀다 하더라도 경계하는 일념(一念)을 어떻게 느슨히 하겠는가? 새벽임을 알리고 잠을 깨워 임금의 자리로 조회 받으러 나아가게 하였으며, 왕비의 의장을 갖추고 중궁전을 지키니, 갈담(葛覃)257)  의 교화가 다시 밝아졌도다. 남모르는 교화가 이로부터 더욱 드러나 나라의 운수가 창성해질 것을 징험하겠도다. 경사스러움은 종묘[宗祧]에 관계되는데, 어찌 한 사람만의 사사로운 기쁨이겠는가? 칭송이 원근에서 비등하니 모든 순리가 함께 이름을 볼 수 있도다. 태묘(太廟)에 정성스런 제사를 받들어 공경히 선대 선후(先后)에게 고하고 넓은 뜰에서 왕명을 선포하여 여러 지방에 널리 알리며, 이에 피아(彼我)의 차별없이 같이 사랑하는 은혜를 미루어 마침내 사면하는 은전(恩典)을 내린다. 본월(本月) 13일 이전부터 잡범(雜犯)으로서 사죄(死罪) 이하는 모두 용서하여 면제시켜 주고, 벼슬에 있는 자는 각기 한 자급을 올려 주되, 자궁(資窮)258)  인 자는 대가(代加)259)  하도록 하라. 아! 건곤(乾坤)이 서로 잘 조화가 되니 크고 작은 죄를 모두 생성(生成)하는 이치로 용서하고, 위엄과 은혜가 가득하니 저지른 잘못들을 모두 씻어 주는 데로 돌아가게 한다. 그래서 이를 교시(敎示)하니, 모두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대제학(大提學) 송상기(宋相琦)가 지어 올렸다.】


【태백산사고본】 70책 62권 4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29면
【분류】왕실-비빈(妃嬪) / 사법-행형(行刑) / 인사-관리(管理)


[註 252] 시기(時氣) : 시절(時節).[註 253] 침선(寢膳) : 침식(寢食).[註 254] 약원(藥院) : 내의원(內醫院)의 별칭.[註 255] 천화(天和) : 사람의 원기(元氣).[註 256] 상제(床第) : 규방(閨房).[註 257] 갈담(葛覃) : 《시경(詩經)》 국풍(國風) 주남(周南)의 편명으로, 후비(后妃)의 근본을 노래한 것임. 곧 후비가 여자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다한 것을 칭송하였음.[註 258] 자궁(資窮) : 당하관(堂下官)의 품계가 더 올라갈 자리가 없이 된다는 뜻으로, 당하 정 3품을 말함.[註 259] 대가(代加) : 자궁(資窮) 등의 이유 때문에 자급(資級)이 오를 당자를 갈음하여 아들·사위·아우·조카 등에게 자급을 올려 주는 것.

 

이택(李澤)을 대사간(大司諫)으로, 황선(黃璿)을 지평(持平)으로, 이건명(李健命)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삼았다.

 

예조(禮曹)에서 중궁(中宮)의 병이 나아 회복된 뒤에 경과(慶科)260)  를 베풀도록 아뢰자, 임금이 정시(庭試)를 베풀도록 명하였다.

 

7월 15일 임술

권엽(權熀)을 사간(司諫)으로, 민진원(閔鎭遠)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이관명(李觀命)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삼고, 이건명(李健命)을 특별히 제수하여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7월 17일 갑자

평안도(平安道) 산군(山郡)에 누리의 피해가 있었다. 감진 어사(監賑御史) 김운택(金雲澤)이 아뢰고 포제(酺祭)261)  를 행하도록 청하자, 세자(世子)가 옳게 여겼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진후를 마치자,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통제사(統制使) 오중주(吳重周)가 장계(狀啓)하기를, ‘농사가 흉년이 들어 군사와 백성이 모두 곤궁하니, 수군의 조련(操鍊)을 물리도록 바랍니다.’고 하였는데, 허락하는 것이 마땅하며, 다만 우후(虞候)로 하여금 각 고을을 순찰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평안 병사(平安兵使) 조이중(趙爾重)이 장계하기를, ‘잇따라 칙사(勅使)의 행차를 맞아 접대하느라 물력(物力)이 쇠잔하고 피폐하여 주전(鑄錢)하는 한 가지 일을 거행하기 어려운 형세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조이중은 임기가 차서 체임될 날도 멀지 않았으나, 우선 정지하게 함이 마땅하겠습니다. 지난번 암행 어사(暗行御史) 김운택(金雲澤)의 서계(書啓)로 인하여 청북(淸北)262)  의 수령(守令)은 문관·무관을 번갈아가며 차임(差任)하도록 청했었는데, 그때 묘당(廟堂)에서 복주(覆奏)하여 이조(吏曹)로 하여금 문관을 보내야 적당한 고을을 가려서 아뢰도록 하였으나, 아직까지 거행하지 않고 있으니, 독촉하여 가려서 들이도록 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옳게 여겼다. 민진후가 또 해마다 거듭 기근(飢饉)이 들어 저축했던 곡식이 모두 떨어져 국가(國家)의 형세가 대단히 위태로운 지경에 처해 있다고 상세히 진달하고, 더욱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절약하고 검소한 정치를 힘써 행하되, 이로써 춘궁(春宮)을 인도하여 하늘의 큰 명(命)을 맞아 계속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당시 대신(大臣)으로 공무를 집행하는 이가 없었는데, 민진후(閔鎭厚)가 비국 당상(備局堂上)으로 매번 입진(入診)하여 한두 가지 시급한 공사(公事)를 품정(稟定)하였으나, 사체(事體)의 구간(苟簡)함과 기무(機務)의 번잡함이 심하였다.

 

7월 18일 을축

어유귀(魚有龜)·송사윤(宋思胤)을 장령(掌令)으로, 김취로(金取魯)을 교리(校理)로, 조관빈(趙觀彬)·조상경(趙尙絅)을 수찬(修撰)으로, 황귀하(黃龜河)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신임(申銋)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삼았다.

 

예조(禮曹)에서 지난해 흉년으로 인해 헤아려 감(減)한 여러 도(道)의 방물(方物)·물선(物膳)을 회복시키도록 청하니, 임금이 모두 명년 가을을 기한하여 우선 감해 주도록 명하였다.

 

7월 19일 병인

문학(文學) 유복명(柳復明)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저하(邸下)께서 인접(引接)할 때에 매번 연묵(淵默)하셔서 강독하고 설명하는 즈음에도 너무 고문(顧問)하는 일이 부족하니, 궁관(宮官)이 된 자도 몇 군데의 글 뜻을 한 번 강독하는 외에는 말을 감히 스스로 다하지 못하고, 뜻을 스스로 펴지 못한 채 책을 덮고 물러나니, 이는 글을 대하였다는 일정한 숫자만 채우고서 그치는 데 불과할 뿐입니다. 어찌 조금이라도 효과나 보탬이 있겠습니까?"
하고, 또 좌의정(左議政) 권상하(權尙夏)를 성의를 다하여 불러 들이고, 찬선(贊善) 이희조(李喜朝) 같은 여러 사람은 유일(遺逸)로서 직임이 궁료(宮僚)에 소속되어 있는데, 그들도 모두 이연(离筵)263)  에 불러 들여 강론(講論)을 돕게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청하니, 세자(世子)가 가납(嘉納)하였다.

 

7월 21일 무진

김상원(金相元)을 승지(承旨)로, 김여(金礪)를 지평(持平)으로, 윤봉조(尹鳳朝)를 부응교(副應敎)로 삼았다.

 

관동(關東)의 세공삼(歲貢蔘)264)  을 감하도록 명하였다가 얼마 되지 않아 그전대로 환원시켰다. 관동은 모두 산(山)이어서 삼(蔘)이 생산되는 것으로 나라 안에 이름이 났으며, 봄·가을 및 납약재(臘藥材)로 바쳐지는 인삼(人蔘)의 합계가 60근(斤)이나 되었다. 중세(中世)로 내려오면서 화전(火田)을 경작하는 일이 점차로 성해졌는데, 태우고 난 지역에는 인삼이 문득 나지 않아 묘종(苗種)이 점점 드물게 되어 채취하기가 아주 어렵게 되었다. 여러 군(郡)에서는 어쩔 수 없이 밭에서 수확되는 값을 계산하여 상인(商人)에게 부탁하여 사다가 바치게 되니, 인삼 값은 날마다 오르게 되고 백성들의 세금은 해마다 증가되어 한 도(道)의 큰 폐단이 되었었다. 그러다가 무자년265)  에 어사(御史)의 서계(書啓)로 인하여 봄·가을에 바칠 인삼 합계 15근(斤)을 감하도록 허락하였는데, 관동의 백성들은 그래도 명령(命令)을 감당하지 못했었다. 내의원 제조(內衣院提調) 민진후(閔鎭厚)가 일찍이 연중(筵中)에서 그 상황을 갖추 진달하여 먼저 납약재인 인삼 10근을 감하게 하고, 뒤에 또다시 5근을 감하도록 청하자, 단지 봄·가을로 각기 15근만 남겨두게 하였는데, 임금이 처음에는 어렵게 여기다가 억지로 청한 뒤에야 비로소 허락하였다. 얼마 있다가 특교(特敎)를 내리기를,
"어약(御藥)으로 쓰이는 다소(多小)는 미리 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관동의 인삼은 감해 준 그 수량이 이미 적지 않은데, 제조(提調)가 또 감해 주기를 청하니, 일이 미안(未安)한 데 관계된다. 그대의 거조(擧條)266)  는 효주(爻周)267)   하도록 하라. 또 침(鍼)을 맞은 뒤에 생맥산(生脈散)268)  을 달여서 들인 지 오래 되었다. 제조(提調)를 지낸 사람이 몇 사람이었지만 감해 준 적이 없었는데, 지난해에 제조의 말로 인해서 감해 주었으니, 역시 온당(穩當)하지 못하였다. 이 뒤로는 그전대로 달여서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처음에 민진후(閔鎭厚)가 침법(鍼法)은 경락(經絡)269)  을 소통(疏通)시키는데, 생맥산(生脈散)은 인삼(人蔘)이 들어가서 주로 〈원기(元氣)를〉 보충하므로, 의학(醫學)의 이론상 어긋남이 있다고 여겨, 그 규정을 제거하도록 청하여 없앤 지 여러 해가 되었으나, 인삼을 감하는 일로 인하여 갑자기 옛날대로 회복하도록 명하였다. 대체로 내국(內局)에서 약재(藥材)를 내주거나 받아들이는 일이 단지 장의(掌醫)와 서리(胥吏)의 손에 달려 있으므로, 용도(用度)가 지나치게 잡다하여 제한과 절도가 없었다. 그런데도 도제조(都提調) 이하가 그 수량을 물어 보지도 않았고, 심지어 납약재인 인삼은 아예 창고에 들이지도 않은 채 곧장 수의(首醫)270)  의 개인 주머니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해마다 상례(常例)가 되었으며, 만약 국용(國用)이 부족하면 번번이 상례로 바치는 외에 더 징수하도록 했던 것이다. 민진후가 그 폐단을 깊이 알고 맨 먼저 납약재로 바치는 인삼을 없애도록 하고, 새로운 규정을 정하여 인삼·우황(牛黃) 등속은 사용하는 대로 회계(會計)하여 매월 그믐에 임금에게 아뢰도록 하니, 의원과 서리의 무리가 그들의 간사함을 용납할 데가 없어 원망과 비방이 대단히 시끄러웠는데, 액정(掖庭)271)  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책망하는 내용의 전지(傳旨)를 받고 오래되지 않아 제조에서 해임되었으므로, 물정(物情)이 성조(聖朝)를 위하여 애석하게 여기는 자가 많았었다. 그 뒤에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조용히 임금에게 아뢰기를,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백성이 화합하지 못함은 보잘것 없는 음식으로 허물을 삼는다.’ 하였습니다. 이미 임시로 감하여 준다는 뜻을 본도(本道)에 행회(行會)272)  하였으므로, 백성들이 모두 이미 감해 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금 갑자기 그전대로 회복시킨다면 실신(失信)을 면하지 못하니, 금년에는 지난번의 하교(下敎)에 의거하여 감하도록 허락하고, 예전대로 회복하는 것은 천천히 의논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말하기를,
"수령(守令)의 연한(年限)은 실로 국조(國朝)에서 공포하여 실행하는 법입니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할 때에 어의(御醫) 유상(柳瑺)을 수령에 임명하라는 명(命)이 있었는데, 유상은 공로가 진실로 많아서 전후(前後)로 은상(恩賞)이 넉넉했을 뿐만 아니라, 수령으로 임명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올해에 와서는 연한이 이미 지났고, 병(病)으로 잔약함이 너무 심한데, 격식 밖에 벼슬에 임명하는 예를 두는 것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청컨대 수령으로 임명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세자(世子)가 그대로 따랐다.

 

7월 22일 기사

장령(掌令) 송사윤(宋思胤)이 상소(上疏)하여 사직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송사윤(宋思胤)은 사람됨이 거칠고 용렬하여 사자(士子)의 모습이 전혀 없었다. 일찍이 한미(寒微)한 문벌(門閥)의 범상한 인품으로 대관(臺官)의 선임에는 적합하지 않았으므로, 조관빈(趙觀彬)에게 탄핵을 당했었다. 이때에 이르러 다시 임명되자, 한 차례 글을 올려 관례대로 사양하였다가 오래되지 않아 함부로 출사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비웃었다.


【태백산사고본】 70책 62권 5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29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 인물(人物)
사신(史臣)은 논한다. 송사윤(宋思胤)은 사람됨이 거칠고 용렬하여 사자(士子)의 모습이 전혀 없었다. 일찍이 한미(寒微)한 문벌(門閥)의 범상한 인품으로 대관(臺官)의 선임에는 적합하지 않았으므로, 조관빈(趙觀彬)에게 탄핵을 당했었다. 이때에 이르러 다시 임명되자, 한 차례 글을 올려 관례대로 사양하였다가 오래되지 않아 함부로 출사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비웃었다.

 

7월 23일 경오

경기(京畿)·충청(忠淸) 두 도(道)의 유생(儒生) 한택규(韓宅揆) 등이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희조(李喜朝)를 위해 상서(上書)하여 이명의(李明誼)가 헐뜯어 무함한 정상(情狀)을 분변하여 밝히자, 세자(世子)가 후하게 답하였다.

 

7월 24일 신미

세자(世子)가 영(令)을 내리기를,
"지난번 대관(臺官)의 글 가운데 김취로(金取魯)를 영선(瀛選)에 적합하지 않다고 배척하였는데, 이는 참으로 매우 사리에 어긋난 것으로서, 공의(公議)도 모두 그르다고 하였다. 그러나 일전에 글로 답을 하여 이미 용서하였는데, 날마다 자신의 주장만 고집하며 아직 공무를 집행하지 않고 있으니, 실로 너무 지나친 데 관계된다. 그로 하여금 즉시 출사하도록 하여 명(命)을 엄숙히 하게 하라."
하였는데, 김취로(金取魯)가 상서(上書)하여 거듭 사임하니, 세자(世子)가 답하기를,
"글로써 답한 특별 유시에서 이미 나의 뜻을 다 말하였으니, 다시 말할 것이 없다."
하였다.

 

이정주(李挺周)를 사간(司諫)으로, 김상옥(金相玉)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7월 26일 계유

수찬(修撰) 조관빈(趙觀彬)이 상서(上書)하여 스스로 변명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볼품 없는 소년(少年)으로서 세속에서 숭상하는 당시의 격식을 일찍이 배우지 못하고 망령되게 고도(古道)273)  를 〈준수해 보겠다고〉 스스로 기약하였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건대, 사류(士類) 가운데 별도로 일종의 풍습이 있었으니, 선진(先進)274)  인 자는 권세와 이익으로 유인(誘引)하여 농락(籠絡)하되, 무릇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자기 마음대로 지시하여 부리는데, 조금이라도 어김이 있으면 혹시라도 용서하지 못하므로 후진(後進)인 자 또한 받들어 좇아가 합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밤낮으로 이익을 추구하면서 감히 스스로 다른 뜻을 갖지 못하고, 스스로 권투(圈套)275)  를 이루게 되어 타파(打破)하지 못하니, 제1의 고질적인 폐단이 되었습니다. 신이 마음속으로 그러한 것들을 매우 미워하고 또 매우 부끄럽게 여겨 다른 사람을 대하여 발언(發言)하면서 간혹 풍자한 적이 많았는데, 이것이 실로 비방을 불러들이고 원망을 산 아주 요긴한 관건입니다. 지난번 관록(館錄)276)   때 신을 싫어하고 꺼려하며 신에게 비밀로 숨긴 것도 반드시 이러한 데서 말미암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신록(新錄) 가운데 김상윤(金相尹)은 취할 만한 인품이 없고 인망 또한 본래 가벼웠는데, 특별히 권력있는 지위의 사람에게 부화(附和)277)  하여 극선(極選)에 참여하였으므로, 신이 과연 말한 바가 있었습니다. 조상경(趙尙絅)이 승핍(承乏)278)  하여 신록에 참여하는 것과 같은 경우는 그다지 이상하지 않으나, 아주 널리 교결(交結)하면서도 염정(恬靜)이 부족하다는 것은 신이 일찍이 수작(酬酢)하는 사이에서 언급하였습니다. 그래서 친구 가운데 역시 이런 일을 신에게 질문한 자가 있었는데, 신은 번번이 이런 내용으로 답을 하였으니 이것도 또한 맨 처음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도당록(都堂錄)279)  의 권점(圈點)280)  을 완료한 뒤에 이르러서는 신의 아비가 이미 권점하는 자리에 참여하였으므로, 신도 입을 닫고 말하지 않았으니 어찌 순종하면서도 일 없이 하려는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즐겁게 여기지 않은 자가 많아 서로 선동(煽動)하다가, 한 번 연주(筵奏)한 것을 기화(奇貨)로 삼아 필경에는 당차(堂箚)281)  가 마침 두 사람의 손에서 나와, 이미 추삭(追削)을 늦춘 데 대하여 갑자기 서원(書院)을 허물도록 준엄하게 하면서 어떤 사건에 나아가 사건을 논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남에게 의혹(疑惑)을 사도록 하니, 어찌 그가 스스로 취한 바가 아니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성진령(成震齡)을 참하관(參下官)282)  인 청선(淸選)에 의의(擬議)할 적에 신이 전랑(銓郞)  【윤봉조(尹鳳朝)이다.】 을 대하여 그의 인품과 문벌이 볼품 없다고 배척하여 말하였으며, 그가 온천(溫泉) 행재(行在)283)  에서 논박을 당함에 이르러, 신이 또 사사로이 좋아한다는 말로 인해서 반드시 탄핵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보였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더러 이것을 가지고 신의 박절(迫切)함을 병통으로 여기기는 하지만, 비록 극력 불식(拂拭)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물의(物議)를 물리치고 의망(擬望)할 수는 없으니, 그가 신에게 유감을 쌓은 것은 진실로 평소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신을 버려 두고 신의 아비를 욕하기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상정(常情)으로는 헤아릴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성진령 한 사람이 스스로 처리한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틀림없이 음휼(陰譎)하고 험독(險毒)한 사람이 암암리에 주장하여 그의 원망스럽고 노여워하는 마음을 돋우어 배격하는 형세를 도와, 더러는 먼저하게 하기도 하고 더러는 나중에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단지 이 한 가지 기미 만으로 신이 이른바 몰래 음흉하게 멋대로 하는 경우가 행해진다는 것이니, 어찌 조종하는 바가 없이 발로되는 것이겠습니까?"
하니, 세자(世子)가 답하기를,
"요즈음 일을 좋아하는 무리가 서로 잇따라 일어나 떠들썩하게 조정의 기강을 허물어뜨리고 문란시키니, 그 풍습은 미워할 만하여 마음속으로 늘 놀랍게 여겼다. 그대의 글 내용을 살펴보건대, 오늘날의 사건은 오로지 원한을 풀려는 데에서 나온 것으로 세상의 도덕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더욱 염려스럽고 한탄스러움을 금하지 못하겠다. 끔찍하도록 혹독한 의논은 혐의스럽게 여길 것이 없으니, 그대는 사임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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