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54권, 숙종 39년 1713년 8월

싸라리리 2025. 12. 1.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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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병자

유성(流星)이 북극성(北極星) 아래에서 나와 직녀성(織女星) 위로 들어갔다.

 

충청도 회덕 등 여러 고을에 큰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렸다.

 

8월 2일 정축

비변사의 계사(啓辭)로 인하여 명하기를,
"농사가 조금 잘 되기를 기다려 청주의 상당 산성(上黨山城)을 쌓으라."
하였는데, 감사(監司) 송정명(宋正明)과 병사(兵使) 심주(沈澍)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8월 3일 무인

헌납(獻納) 이택(李澤)이 논사(論事)하는 소를 올렸는데, 첫머리에 말하기를,
"가뭄 후 풍재(風災)가 참혹한데 묘당(廟堂)에서 전재(田災)를 허락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니, 청컨대 다시 상확하여 한전(旱田)에도 모두 급재(級災)하도록 하소서."
하고, 또 공척하기를,
"일전에 대신(大臣)이 갑술년468)   후에 죄를 지어 폐고(廢錮)시켰던 사람을 거두어 임용하자는 뜻을 진달하였는데, 목임일(睦林一)까지 거론해 말하였으니, 【김우항(金宇杭)이 일전에 임금의 하교 가운데 있는, ‘목임일에게는 인물(人物)을 상해(傷害)할 마음이 없었다.’ 하는 말을 인용하였었다.】  생각건대 단지 적체(積滯)를 소통시키는게 급한 것만 생각하고 대방(大防)을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고, 또 논핵하기를,
"옥서(玉署)469) 동벽(東壁)470)  의 망(望)은 해가 지나도록 주의(注擬)를 정지했던 사람을 갑자기 검의(檢擬)하였으니, 【바로 권첨(權詹)을 말한다. 참의(參議) 이대성(李大成)이 독정(獨政)하여 검의한 것이다.】  이미 정례(定例)에 맞지 않습니다. 이정제(李廷濟)는 당초에 영선(嬴選)471)  되었을 때 다른 사람의 말을 많이 듣고도 홀로 스스로 무릅쓰고 출사(出仕)하였으니, 염치가 없어 온 세상에서 비웃고 손가락질한 지 오래입니다. 지금 정관(政官)이, 동료들이 정사에 참여하지 못한 기회를 틈타 서둘러 거의(擧擬)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고, 끝에 말하기를,
"이건명(李建命)·이만성(李晩成)·윤지인(尹趾仁)을 마음대로 하향(下鄕)하게 하는 것은 미안하니, 청컨대 한결같이 모두 돌아오도록 재촉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급재(給災)하는 일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겠다. 일전에 대신이 주달한 것은 본디 거두어 임용하라는 뜻이 아니었고, 권첨(權詹)·이정재(李廷濟)를 거의(擧擬)한 것은 불가함을 모르겠으며, 직함을 지니고 하향(下鄕)한 사람은 별도로 신칙하여 올라오도록 하겠다."
하였다. 이조 참의 이대성(李大成)이 진소(陳疏)하여 대변(對辨)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너무 심한 논의는 내가 취하지 않으니, 그대 역시 혐의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우의정 김우항 또한 사직소를 올리고 인책(引責)하니, 답하기를,
"경(鄕)의 본의(本意)는 거두어 임용하라는 것이 아니었는데, 뜻밖의 대언(臺言)을 어찌 깊이 혐의하겠는가."
하였다. 이택(李澤)이 이대성의 소 때문에 인피(引避)하니, 처치하여 출사(出仕)하게 하였다.

 

처음에 예조 판서 민진후(閔鎭厚)가 연석(筵席)에서 아뢰기를,
"양녕 대군(讓寧大君)의 봉사손(奉祀孫) 이형(李炯)이 족인(族人)의 아들 이인망(李仁望)을 취해 후사로 삼았는데, 이형과 이인망이 죽은 후에야 비로소 그들이 형제 항렬(行列)로 잘못 부자(父子)가 된 것이 드러났으니, 이는 마땅히 바로 잡는 거조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청컨대 대신으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그 말은 위에 있다.】  이때에 이르러 판부사(判府事) 이여(李畬)가 헌의(獻議)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형과 이인망은 형제 항렬인데 부자(父子)가 되었으니, 고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이인망이 죽고 그 아들이 전중(傳重)472)   하였으니, 그 아비를 버리고 아들로 대신하는 것이 비록 미안할 듯하나 이는 죄폐(罪廢)와는 같지 않고 또 소목(昭穆)의 차례가 됩니다. 그러므로 그대로 그 아들을 이형의 후사로 삼아 이형과 이인망을 형제의 순서로 고치게 하면서 그 아들에게 있어서는 생양(生養)의 친(親)이 되게 하면 거의 양쪽이 서로 방해될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판부사(判府事) 김창집의 의논도 이여와 같았다. 우의정 김우항(金宇杭)이 말하기를,
"양부(養父)를 파하고 그이 아들로 대신하는 것도 상도(常道)에 어긋나니, 다시 다른 손(孫)으로 이형의 후사를 삼는 것이 예(禮)에 맞습니다. 또 생각하건대 단지 윤서(倫序)만 바로잡고 종사(宗祀)를 감당할 만한 자를 고르지 않으면 이것도 염려되니, 대개 두 가지가 다 어렵습니다."
하였는데, 이여의 의논을 따르도록 명하였다.

 

8월 5일 경진

강원도 각 고을에 큰 바람이 불고, 원주에는 우박이 내렸다. 이때 8도(八道)에 모두 큰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 화곡(禾穀)이 모조리 손상(損傷)되었는데, 마치 짓밟아 놓은 것 같다는 장문(狀聞)이 서로 잇따랐다.

 

8월 6일 신사

지평(持平)        이진망(李眞望)이 상소하여 그의 할아버지 고(故) 상신(相臣) 이경석(李景奭)을 위해 홍계적(洪啓迪)·김진규(金鎭圭)의 상소에 대해 변명하였다. 대개 이경석이 삼전도(三田渡)의 송로 문자(頌虜文字)473)                   때문에 송시열(宋時烈)의 기척(譏斥)을 받았으므로, 박세당(朴世堂)이 일찍이 이경석의 묘문(廟文)을 지으면서 송시열을 헐뜯었었다. 계미년474)                   무렵에 관학 유생(館學儒生) 홍계적 등이 송시열을 위해 신변(伸辨)하고 박세당을 대단히 공척하면서 인하여 이경석의 일에 미치게 되었는데, 그때 김진규는 대사성(大司成)으로 역시 소론(疏論)하였던 것이다. 이진망이 이로써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첫머리에 말하기를,
"올봄에 우리 성상께서 특별히 신장(宸章)을 내리셔서 신의 할아버지를 포륭(褒隆)하여 귀신이 알게 하시고 옛날의 현철(賢哲)한 보필에 견주시니, 백 번이나 엄숙하게 외면서 목이 메어 소리를 내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인하여 부득이 문자(文字)를 지어서 바친 일을 상세히 진달하기를,
"신의 할아버지가 지은 글 가운데 첫머리에 내세운, ‘바람에 추택(秋籜)475)                  이 날리고, 화로불에 기러기털을 태우듯 쉬웠다.’는 등의 귀절은 다 부견(苻堅)476)                  이 진(晋)나라를 침략할 때 스스로 과장(誇張)하던 말입니다. 오로지 이 몇 귀절에 가탁(假託)한 뜻이 매우 은미하니, 참으로 충신(忠臣)·의사(義士)가 있다면 마땅히 시상(時象)을 묵상(默想)하여 그 심사(心事)를 헤아려 알 수가 있을 것인데, 이에 이미 지나간 자취를 주워모아 망극한 말을 얽어서 조금도 돌아보아 생각지 않는 것은 또 무슨 심사(心事)입니까."
하고, 또 성언(盛言)하기를,
"김진규는 음려(陰戾) 비특(奰慝)하고 당(黨)을 위해 죽을 힘을 다하는 데에 용감하며 반드시 다른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려고 했으니, 이것이 그 일생의 기량(伎倆)입니다. ‘하간(河間)477)                  ’이란 한 귀절은          【바로 김진규의 소 가운데 있는 말이다.】         더럽고 비패(鄙悖)하며, 더욱 이것은 서적(書籍)에서는 듣지 못한 것이니, 천지 사이에 이처럼 패악(悖惡)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고, 끝에서 말하기를,
"지난번 전지(銓地)에서 신의 통색(通塞)478)                  을 인연하여 소란스런 단서가 크게 일어나 풍랑이 점차 격심해졌으나, 어찌 전에 지색(枳塞)당한 적이 있는데, 후에 무릅쓰고 나아가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아! 고(故) 상신(相臣)은 석덕(碩德)·숙망(宿望)으로 세 조정을 두루 섬겼다. 평일에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함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은 신명(神明)에게 질정할 수 있는데, 홍계적 등이 마음대로 마구 욕했으니, 어찌 몹시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그래서 연중(筵中)에서 개탄했고 또 시(詩)로 읊었던 것이다. 그대가 할아버지를 위해 원통함을 호소한 소를 보고 지색(枳塞)할 계책을 삼고자 하나, 내가 진실로 옳지 않게 여기며, 영선(嬴選)의 망(望)이 또 이에 걸려 지색을 당하니 너무 심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였다. 이 뒤에 김진규가 대변(對辨)하는 소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그때에는 사세(事勢)에 몰렸기는 하지만, 또한 어찌 말을 잘 만들 수 없었겠습니까. 그런데도 비유를 든 것이 차례를 잃어 대의(大義)에 해를 끼쳤습니다. 이는 저절로 천경 지위(天經地緯)479)                  에 관계되는데, 도리어 선정(先正)의 기폄(譏貶)에 노하여 이미 묘문(墓文)에 고하여 무훼(誣毁)하였고, 또 소장(疏章)에 드러내어 그릇되게 욕하여 자의(疵議)가 그의 조부에게 미치도록 했으니, 이것은 누구의 허물입니까. 신이 삼가 듣건대 성상께서 계미년480)                   겨울에 연석(筵席)에 임어하여 하교하시기를, ‘이경석의 삼전도(三田渡) 비문은 등본(謄本)을 가져다 보니, 왕명에 의해 지어서 바친 것은 비록 부득이하였다 하나, 크게 포양(褒揚)을 더하였으니, 어찌 미안하지 않겠는가. 송시열이 비난해 배척한 것이 옳은데, 이하성(李厦成)의          【바로 이진망(李眞望)의 숙부(叔父)이다.】         상소는          【계미년에 이진망과 연명(聯名)하여 상소하였다.】         더욱 무상(無狀)하다.’ 하셨다는데, 뜻밖에도 이진망이 감히 그의 조부를 순수하여 허물이 없는 자리에 두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이런 의리는 성명(聖明)께서 비록 이미 위에서 밝혔으나, 이런 논의가 아래에서 일어나 회매(晦昧)하고 소멸(消滅)하는 데 점점 이르게 되니, 어찌 크게 우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이진망의 상소에 무슨 노할 만한 것이 있기에 대단한 기세로 이처럼 장황한가. 자신이 척리(戚里)가 되어 조심할 생각은 않고 논의하는 데에 조급하고 분주한 바가 경 같은 사람이 없었으니, 마음속으로 늘 근심하고 탄식하고 있었는데, 어찌 다만 이를 근심할 뿐이겠는가."
하였다.

 

8월 7일 임오

이만성(李晩成)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이만견(李晩堅)을 충청도 관찰사로, 이병상(李秉常)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8월 8일 계미

판부사(判府事) 김창집(金昌集)과 예조 판서(禮曹判書) 민진후(閔鎭厚)가 청대(請對)하여 어진(御眞)을 강도(江都)로 모시고 갈 때 배종(陪從)할 관원에 대한 일로 품주(稟奏)하기를,
"병조 낭관 1원(員)과 총부 당랑(摠府堂郞) 각 1원은 무진년481)  의 전려에 없던 바인데, 이번에는 더 정하였으니, 사체(事體)가 마땅히 무진년의 전례에 의거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인원을 감하라고 명하였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도감(都監)의 군졸이 마땅히 시위(侍衞)해야 하는데, 나루길을 건널 때에 닻을 올리고 닻을 내리어 행선(行船)하며 취타(吹打)하는 절목이 있으니, 무진년에는 비록 이런 전례가 없었으나 이번에는 마땅히 거둥하는 예에 따라서 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윤허하였다. 민진후가 또 호서에 흉년이 든 것 때문에 구 감사 송정명(宋正明)을 잉임(仍任)시킬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박휘등(朴彙登)을 승지(承旨)로, 홍중휴(洪重休)를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수원 부사(水原府使) 김보택(金普澤)이 상소하여 본부의 흉황(凶荒)을 진달하며 급재(給災)·분재(分災) 및 면전(綿田)의 급재를 청하고, 또 청하기를,
"공명첩(空名帖)482)   수백 장을 얻어 전매(轉賣)하여 곡물 모으는 데 보태려고 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2필(疋)의 신역(身役)은 비록 견감은 허락하였으나 1필(疋)의 신역(身役)은 일찍이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본부의 백성들은 한 번 변통한 후부터 원래 2필을 바치는 자가 없었으니, 혹은 절반(折半)이거나 혹은 3분의 1로 작량(酌量)하여 견감하는 것은 결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경내(境內) 및 가까운 고을 소재 각 아문(衙門)의 둔곡(屯穀)을 진자(賑資)로 가져다 쓰고 있으니, 비국(備局)의 무명베 4, 50 동(同)을 빌어서 각 아문에 보충하게 하소서."
하고, 또 청하기를,
"진청미(賑廳米) 1천 석(石)을 팔도록 허락하고, 본부에서 힘껏 값을 마련해 진자(賑資)에 보태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에 품처하게 하였다.

 

8월 9일 갑신

판부사(判府事) 김창집·예조 판서 민진후가 병조 당상, 승지·사관(史官)과 함께 어진(御眞)을 받들고 강도(江都)로 갔는데, 왕세자가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궐외(闕外)에서 전송하였다.

 

판부사(判府事) 이유(李濡)가 현도(縣道)를 통해 사직소를 올리니, 임금이 답하기를,
"교외의 집이 맞지않아 몸을 조섭(調攝)하기에 불편할 것이니, 빨리 올라오도록 하라."
하였다.

 

8월 10일 을유

대신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은 인견하였다. 우의정 김우항이 청하기를,
"각도의 추노 징채(備奴徵債)를 정지하고, 여러 궁가(宮家)와 각 아문의 절수(折受)483)  한 곳에 도장(導掌)484)  을 보내지 말고 본읍으로 하여금 전세(田稅)를 징수하여 송납(送納)하게 하고, 전라 감사(全羅監司) 유봉휘(柳鳳輝)는 맥추(麥秋)까지 잉임(仍任)하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비국 당상관(備局堂上官)이 각도를 분장(分掌)하고, 유사 당상(有司堂上) 4원(員) 또한 각기 양도(兩道)를 분장하게 하였는데, 유고(有故)를 만나면 소관(所管)이 아니라고 핑계하여 조검(照檢)하지 않으니, 기무(機務)가 많이 적체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유사 당상은 분장하지 말고 통합하여 관섭(管攝)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모두 옳게 여겼다. 호조 판서 조태구(趙泰耉)가 청하기를,
"강원도·평안도 및 경기 연해 고을에 적당히 헤아려 분재(分災)를 주소서."
하니, 임금이 명하기를,
"평안도, 강원도는 9분재(分災)를 주고, 경기 연해는 8분재를 주도록 하라."
하였다.

 

8월 11일 병술

남취명(南就明)·김상직(金相稷)을 승지(承旨)로, 홍치중(洪致中)을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삼았다.

 

판결사(判決事)        이정신(李正臣)이 금정 산성(金井山城)의 이해(利害)를 상소하여 논하며 첫머리에 그 병폐를 말하고, 또 말하기를,
"금정(金井)은 지형이 비록 성을 쌓기에는 합당하지 못하지만, 진실로 적당한 사람을 가려서 보장(保障)하는 책임을 지게 하면, 위로는 길을 끊어 적을 물리칠 수 있고 아래로는 험요(險要)에 웅거해 난리를 피할 수 있습니다. 만일 이 성을 폐기하지 않는 것으로 계책을 정한다면, 남북(南北)의 성은 결코 하나는 취하고 하나는 버릴 수가 없으며, 전에 쌓은 것을 그대로 둘 수가 없는데, 만약 일시에 개축하려고 한다면 비록 한 도(道)의 힘을 다하더라도 끝마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묘당(廟堂)에서 만약 전체의 성(城)을 취하려면, 몇 단(段)씩 나누어 재력(財力)을 도신(道臣)과 수신(守臣)485)                  에게 획급(劃給)해서 잘 구획(區劃)하고, 매년 1단 씩 쌓아 점차 성축(成築)한다면 10년이 못되어 완전한 성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규봉(窺峰)486)                  이 우뚝 솟은 곳에 이르러서는 돈대(墩臺)를 설치하면 거의 적을 막는 거점(據占)이 될 것이며, 파수하는 군병(軍兵)에 이르서는 동래(東萊)·양산(梁山)·기장(機張) 세 고을에 있는 경외(京外) 각 아문의 소속 군사를 한결같이 모두 수원(水原)·광주(廣州)의 독진(獨鎭)의 예와 같이 산성에 획급하고, 또 성 안 두 사찰의 승려(僧侶)가 1백여 명이 되고, 범황사(梵皇寺) 승려 또한 3백 명에 밑돌지 않는 숫자이니, 매우 짧은 시간에 성첩(城堞)을 지킬 수가 있습니다. 또 세 고을 각 사찰의 승도(僧徒)를 합계하면 반드시 수천 여 명에 밑돌지 않을 것이니, 평시에는 다만 대오(隊伍)를 만들어 성안(成案)하고 사변이 있을 때는 모아서 사용하면 족히 첨병(添兵)하는 데 일조(一助)가 될 것입니다. 또 성의 서문(西門) 밖은 바로 양산 땅인데 감동창(甘同倉)이 그 곳에 있고, 창 밑에 사는 사람이 3백여 호(戶)나 되게 많으니, 만약 이곳에다 한 진(鎭)을 설치하고 그 창곡(倉穀) 및 민호(民戶)를 새 진에다 할당하여 소속시키며, 또 가까운 진의 둔전(屯田)을 주어 백성을 모집하여 들어가 경작하게 하되, 사변이 없을 때에는 농토를 따라 농사를 짓고 사변이 있으면 강(江)을 끊어 대항해 지키도록 하면, 뜻밖의 일에 대한 방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청하기를,
"임진 왜란(壬辰倭亂)에 창의(倡義)한 사람의 후손 가운데 재예(才藝)가 있는 자는 각별히 녹용(錄用)하고, 기타 무사(武士) 또한 서북 지방의 전례에 의거해서 과거를 베풀어 조용(調用)해서 사기(士氣)를 북돋우게 하소서."
하였는데, 소를 내리니, 비국(備局)에서 복주(覆奏)하여 승도로 대오(隊伍)를 만드는 일 및 창의(倡義)한 사람의 후손을 조용하는 두 가지 일을 윤허하였다.

 

8월 12일 정해

금성(金星)이 헌원(軒轅) 우각성(右角星) 안으로 들어갔다.

 

관무재(觀武才)487)  를 설행(設行)하지 않은 지 이미 4년에 이르렀으므로, 길일(吉日)을 가려 거행할 것을 명하자, 해조(該曹)에서 23일로 택일하여 아뢰니, 명하기를,
"기묘년488)   예에 의하여 유생(儒生)의 정시(庭試)는 마련하지 말라."
하였다.

 

홍우서(洪禹瑞)를 교리(校理)로, 김상옥(金相玉)을 정언(正言)으로, 서명균(徐命均)을 겸설서(兼說書)로 삼았다.

 

8월 13일 무자

홍호인(洪好人)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판부사(判府事) 김창집 등이 어진(御眞)을 봉안(奉安)하고 복명(復命)하였다.

 

8월 15일 경인

사은사(謝恩使)의 장계(狀啓)로 인하여 가지고 간 《동문선(東文選)》에 기재된 무술 주문(戊戌奏文) 가운데 있는 ‘조종(祖宗)’이란 글자는 혹은 시호(諡號)로 혹은 능호(陵號)로, 혹은 선왕(先王)의 글자로 고치고, 다른 글 가운데 있는 ‘호월(胡越)’·‘호승(胡僧)’·‘이말(夷靺)’ 등의 글자는 다른 글자로 바꾸어 급히 주자(鑄字)해 보내어 사행(使行)이 압록강(鴨綠江)을 건너가기 전에 개보(改補)하도록 했는데, 대개 피인(彼人)에게 방애됨이 있을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8월 16일 신묘

이문흥(李文興)을 집의(執義)로, 곽만적(郭萬績)을 지평(持平)으로, 박성로(朴聖輅)를 정언(正言)으로, 홍치중(洪致中)을 겸문학(兼文學)으로, 이상열(李尙說)을 필선(弼善)으로 삼았다.

 

전라도 위도진(蝟島鎭)의 군졸 1백여 명이 물에 빠져 죽으니, 휼전(恤典)을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8월 19일 갑오

이건명(李健命)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송상기(宋相琦)를 우참찬(右參贊)으로, 홍우서(洪禹瑞)를 겸문학(兼文學)으로, 홍경렴(洪景濂)을 필선(弼善)으로, 여필희(呂必禧)를 사서(司書)로 삼았다.

 

지평(持平) 곽만적(郭萬績)이 상소(上疏)하여 일을 논하면서 첫머리에 말하기를,
"금년 농사가 크게 흉년이 들었으므로 대소의 부비(浮費)를 대부분 감생(減省)하였는데, 후원(後苑)에서 시재(試才)하라는 명을 이럴 때 갑자기 내리셨습니다. 지금 비록 중지할 수는 없으나, 상여(賞與)의 절목은 십분 간략함에 따르고, 절대로 지부(地部)489)  에서 가져다 쓰지 말아야 합니다. 장전(帳殿)을 수리하는 즈음에 비록 폐파(弊破)된 것이 있더라도 모두 옛날 것을 그대로 쓰고 다시 새로 만들지 못하게 해서 절생(節省)하는 뜻을 보여야 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성체(聖體)가 평소와 같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말에 귀를 기울이며, 첫날 개장(開場)하고는 곧바로 빨리 환궁하시고, 인하여 대신(大臣)에게 명하여 남아서 시험을 마치게 하소서."
하고, 끝으로 논하기를,
"문과(文科) 1소(所)·2소(所)의 종장(終場)은 인정(人定)490)   전에 수권(收券)하면 모두 1백여 장에 불과한데, 1소는 인정 후에 시권(試券)을 모두 고찰(考察)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2소는 인정 후에는 과차(科次)491)  를 허락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1소와 2소가 비록 달리하는 단서가 없지 않으나, 조가(朝家)에서 차별없이 대하는 도리 또한 마땅히 같고 다름에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인정(人定) 후에 이미 축(軸)을 만든 것은 모두 과차(科次)하는 것이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고, 또 청하기를,
"지금부터 대과(大科)·소과(小科)는 장중(場中)에 피고(皮鼓)를 쳐서 석종(夕鍾)의 수(數)와 맞게 하여 유생(儒生)으로 하여금 시한(時限)을 분명히 알게 하고, 피고(皮鼓)의 소리가 끝나면 비록 뜰에 예백(曳白)492)  이 가득하더라도 축(軸)을 만들지 못하게 하는 일을 영구히 정식(定式)으로 삼으소서."
하니, 답하기를,
"장전(帳殿)은 원래 새로 만든 일이 없고 이들의 상전(賞典)은 스스로 구례(舊例)가 있으니, 지부(地部)에서 반상(頒賞)하는 것은 조총(鳥銃) 한 자루에 불과할 뿐이다. 하루 안에 비록 시험을 마치기 어렵더라도 이튿날에는 환궁할 수가 있으니, 대신에게 명하여 남아서 시험하게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1소, 2소의 인정(人定) 후에 수권(收券)하여 과차(科次)하는 것을 혹은 허락하고 혹은 허락하지 않은 것은 스스로 곡절(曲折)이 있을 것이니, 다시 과차를 허락하는 것은 결코 할 수가 없다."
하였다.

 

임금이 종묘(宗廟)를 알현하였는데, 단지 판위(板位)에 사배(四拜)만 행하고, 다리병 때문에 우의정 김우항에게 명하여 전내(殿內) 봉심(奉審)을 섭행(攝行)하게 하였다.

 

전교하기를,
"일전에 하교(下敎)하면서 이미 연하(輦下)의 장사(將士)에 대해 말하였고, 또 초시(初試)를 면제하는 인원을 말하였으니, 5군문(五軍門)의 장관(將官)은 저절로 초시를 면제하는 가운데 있는 것이다. 갑신년493)   별시재(別試才) 때 수어청(守禦廳)·총융청(摠戎廳)의 장관(將官)들도 또한 누락된 일이 없었는데, 이번 단자(單子) 가운데 무단히 빼어버려 낙심하는 한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실로 하교한 본의에 어긋나니, 전례에 의거하여 써 들이도록 하라. 조가에서 대장(大將)을 대우하는 사체(事體)가 자별(自別)하여 전에 있던 관무재(觀武才) 때에는 들어와 쏘도록 특명(特命)했지마는, 단자에 섞여 쓴 예가 없었으니, 이기하(李基夏)·윤취상(尹就商)은 쓰지 않는 것이 좋다고 아울러 해조(該曹)에 분부하라."
하였다.

 

8월 21일 병신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이언강(李彦綱)을 판윤(判尹)으로, 여광주(呂光周)를 부수찬(副修撰)으로, 남도규(南道揆)를 지평(持平)으로, 곽만적(郭萬績)을 필선(弼善)으로, 홍우서(洪禹瑞)를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삼았다.

 

8월 23일 무술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무재(武才)를 시험하였는데, 초시(初試)를 면제한 자를 먼저 들어와 쏘도록 명하고 다음에 초시에 입격(入格)한 자가 잇따라 쏘도록 명하였다. 집의(執義) 이문흥(李文興)이, 유혁연(柳赫然)·이원정(李元禎)를 복관(復官)을 환수(還收)하도록 아뢴 데 대해 의견이 같지 않아 이론을 제기하고 인피(引避)하였다. 【후에 처치하여 체차(遞差)하였다.】  임금이 명하기를,
"친림(親臨)하여 시재(試才)하는 것이 비록 끝나지 않더라도 명일의 잡과(雜科)는 전일에 의해 설행하고, 태백산에 《선원보략(璿源譜略)》을 봉안하는 행차는 명년을 기다리라."
하였는데, 《선원보략》을 봉안하는 행차를 일시에 거행하는 것은 민진후(閔鎭厚)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8월 24일 기해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무재(武才)를 시험하고 환궁(還宮)하여 명하기를,
"입격(入格)한 사람들에게 수령(守令)·변장(邊將)을 차등 있게 제수하라."
하였다.

 

평안도 의주 등지에 우박과 눈이 뒤섞여 내리고, 철산(鐵山) 땅에는 눈이 1자 남직이나 쌓여 3일이 되도록 녹지 않았으며, 황해도 곡산(谷山) 등지에는 산 중턱 이상에 눈이 내렸다.

 

8월 25일 경자

시재(試才)한 군병 등에게 숭정전(崇政殿) 앞에서 반상(頒賞)하였는데, 어제 환궁할 때 날이 저물어 거행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8월 27일 임인

평안 감사 민진원(閔鎭遠)을 인견하고 면유(勉諭)하여 보냈다. 민진원이 청하기를,
"먼저 정주(定州)에 성을 쌓는 모든 일을 조치(措置)하였다가 때를 기다려 비로소 쌓는 바탕으로 삼고, 영애(嶺隘)의 요해처(要害處)에는 나무를 길러서 급할 때를 당해 설책(設柵)하고 의병(疑兵)을 설치하는 장소로 대비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범월(犯越)한 죄인 이만건(李萬建) 등은 감사(減死)하여 정배(定配)하였는데, 또 도망한 것을 붙잡아 도로 정배할 적에 그의 도당이 총과 창을 지니고 약탈하여 갔으니, 국가에 만약 기강(紀綱)이 있다면 어찌 감히 이렇게 하겠습니까. 이는 다른 도적과는 다르니, 비록 한 사람만 잡거나 지휘하여 붙잡는 사람도 모두 가자(加資)를 허락하여 특별히 구모(購募)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김석연(金錫衍)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이관명(李觀命)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권수(權𢢝)를 집의(執義)로, 이택(李澤)을 교리(校理)로, 홍중휴(洪重休)를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부교리(副校理) 홍중휴(洪重休)가 상소하여 유혁연(柳赫然)·이원정(李元禎)을 원척(冤斥)한 대계(臺啓)가 잘못이라고 논했는데, 대략 말하기를,
"오늘날 정신(廷臣)으로서 이 옥안(獄案)을 아는 것이 남김없이 통촉(洞燭)하신 성감(聖鑑)만 못한데, 오히려 또 반 년이나 쟁집(爭執)하여 반드시 준청(準請)하고야 말려고 하니 당습(黨習)이 고질화됨이 심합니다."
하고, 인하여 청하기를,
"성지(聖志)를 더욱 견고히 하시어 부의(浮議)에 흔들리지 마소서."
하니, 답하기를,
"복관(復官)하라는 명은 진실로 공심(公心)에서 나왔으니, 결단코 요개(撓改)할 이치가 없다."
하였다.

 

8월 28일 계묘

교리(校理) 이택(李澤)이 상소하여 홍중휴(洪重休)의 소를 공척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추안(推案)을 고출(考出)하라는 전교는 대개 옥정(獄情)을 다시 상고(詳考)하는 뜻에서 나왔는데, 다시 지체하여 기다리지 않고 도로 전지(前旨)를 준행하라고 명하셨으니, 거듭 발계(發啓)하는 것은 바로 대례(臺例)의 당연한 바이며, 왕법(王法)의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홍중휴는 오로지 사당(私黨)을 굽혀서 비호할 생각만 품고, 공의(公議)가 지극히 엄중함을 두려워함이 없이 함부로 상소하여 조금도 기탄하지 않았으니, 이는 제방(隄防)이 점차 해이해짐을 기뻐하여 음계(陰計)를 시험해 보려는 데 불과하니, 금일의 세도(世道)가 참으로 한심합니다. 신은 거듭 발계한 사람으로서 결코 편안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였는데, 예비(例批)를 내렸다. 대사간 조도빈(趙道彬)과 정언(正言) 박성로(朴聖輅)도 또한 홍중휴의 소척(疏斥)으로 인피(引避)하였는데, 후에 처치하여 출사(出任)시켰다.

 

8월 29일 갑진

우의정 김우항을 명초(命招)하여 복상(卜相)494)  하여 김창집(金昌集)을 좌의정에 임명하고, 홍치중(洪致中)을 부응교(副應敎)로, 이택(李澤)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권상하(權尙夏)를 대사헌(大司憲)으로 삼았다.

 

판부사(判府事) 이유(李濡)가 현도(縣道)를 통해 사직소를 올리니,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함께 오게 한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전유(傳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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