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62권, 숙종 44년 1718년 8월

싸라리리 2025. 11. 30.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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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정축

예조(禮曹)에서 민회빈(愍懷嬪)284)  의 묘(墓)를 옮길 때에 진향(進香)하는 일절(一節)을 가지고 아뢰자, 세자(世子)가 의정부(議政府)와 육조(六曹)에서만 진향하도록 하였다.

 

8월 2일 무인

부응교(副應敎) 윤봉조(尹鳳朝)가 조관빈(趙觀彬)의 상서한 내용으로 인해서 상서하여 스스로 변명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김상윤(金相尹)의 온유 근신하고 순후 묵묵함과 조상경(趙尙絅)의 풍치가 있고 아담하며 사리에 통달하고 민첩함은 당대의 선발에 있어서 이들을 버려 두고는 좋은 사람이 없습니다. 신은 교결(交結)했다는 사람이 누구이며 어떤 곳에 부화(附和)했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지난번 조영세(趙榮世)의 피사(避辭)는 실로 대각(臺閣)의 수치가 되었는데, 또한 어떻게 이런 말이 마침내 조관빈의 입에서 나오리라는 것을 헤아리기나 하였겠습니까? 도당록(都堂錄)의 권점(圈點)을 완료한 것이 이미 대신(大臣)의 손을 거쳤으니, 그가 이른바 입을 닫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은 진실로 자기의 도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다른 사람의 논박과 배척을 당하고서 분개함을 금하지 못하여 격렬하게 질책하는 말을 먼저 양신(兩臣)에게 언급하고, 한갓 다른 사람의 혐의를 무릅쓴다고 말하기에 급급하여 자기의 말이 도리어 혐의를 무릅쓰는 데로 돌아가는 것을 깨닫지 못하니, 또한 해이(駭異)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성진령(成震齡)의 고지식하고 순박하며 대범하고 꾸밈이 없음은 아첨하여 잘 보이려고 꾸미는 속된 모양과는 비교할 것이 못됩니다. 또 그의 문학(文學)과 경식(經識)285)  은 제우(儕友)들에게 추앙받았기 때문에, 신이 낭관(郞官)의 자리에 대죄(待罪)하였을 적에 마침 춘방(春坊)286)   참하관(參下官)의 빈 자리가 있었으므로, 여러 당상관과 상의(相議)하여 허통(許通)하였습니다. 그 뒤에 성진령이 비의(備擬)287)  된 여부(與否)는 신이 전조(銓曹)를 떠난 뒤에 있었으므로, 신이 아는 바가 아닙니다. 그런데 성진령이 정유년288)   봄에 연좌되어 파면되었다가, 겨울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서용(敍用)되었으며, 열흘도 안되어 곧바로 6품(品)으로 승진되었으니, 그 사이에 의망(擬望)을 제기할 수 없었던 것은 형세가 그러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도리어 물의를 배척하며 의망할 수 없다고 말하니, 또한 가소(可笑)롭지 않습니까? 시비(是非)와 가부(可否)는 스스로 마땅히 공의(公議)에 부쳐야 하고, 원래 논박을 당한 집안의 자제(子弟)가 참여하여 간섭할 바가 아닙니다. 더구나 지금 없는 사실을 있다고 하고 은미한 것을 가리켜 드러나게 만들며, 문득 말하기를, ‘아무개는 내가 일찍이 부족하게 여겼고, 아무개는 내가 일찍이 배척하였었다.’ 하니, 그의 말은 바로 저에게 원한을 갚아서 그 마음을 통쾌하게 하기를 바란 것입니다. 신은 아마도 이러한 길이 한 번 열리면 뒷날의 폐단에 크게 관계가 되어, 뒷날에 남을 논하는 자로서 그 누가 원한을 갚는다는 죄과에 돌아감을 면하겠으며, 일을 말하는 길이 끊어질 것입니다."
하니, 세자(世子)가 답하기를,
"며칠 전 조관빈(趙觀彬)의 글은 대체로 근심하여 강개(慷慨)하는 데에서 나왔었는데, 지금 그의 말을 없는 것을 가리켜 있다고 하는 데로 돌리니, 이미 이해할 수가 없다. 그리고 성진령(成震齡)의 경우는 심지어 고지식하고 순박하다는 등의 말로 마음을 다하여 장려하고 칭찬하는데, 일을 좋아하는 무리가 고지식하고 순박한 기풍이 있다는 것은 내가 듣지 못하였다."
하였다.

 

8월 3일 기묘

부수찬(副修撰) 황귀하(黃龜河)가 상서(上書)하여 조관빈(趙觀彬)을 파직하도록 청하였는데, 이르기를,
"그가 상서한 한 편의 주의(主意)가 극도로 위험하니, 몰래 구덩이를 파고 널리 기관(機關)을 설치하여 군부(君父)를 공동(恐動)시키려는 것입니다. 아! 유인하여 농락하느니 음험하고 악독한다느니 하는 말들이 어떠한 악명(惡名)이며, 받들어 우러르고 따라가 합세하며 체결(締結)하여 모인다느니 하는 말들이 어떠한 추잡한 행동인데, 한낱 분감(忿憾)의 단서로 인하여 갑자기 비할 데 없는 추잡하고 패악한 말로 사류(士類)들을 가리로 고기 잡듯시 헤아릴 수 없는 지경으로 밀어 넣으려고 하니, 간당(奸黨)이라는 지목이 아마도 장차 성세(聖世)에 다시 행하여질 것입니다. 그러니 비록 일망타진하려는 수단이라고 말하여도 가(可)할 것입니다."
하니, 세자(世子)가 답하기를,
"성진령(成震齡)이 대신(大臣)의 죄를 구무(構誣)한 것이 지극히 예사롭지 않은데, 홍계적(洪啓迪)의 글 가운데서는 편안하게 여기고 받아 들인다는 말은 참으로 이상스럽다. 그리고 박치원(朴致遠)이 나머지 의논을 주워 모아 대신을 무함하고 욕하는 일절(一節)을 한층 더하였으니, 조관빈(趙觀彬)이 상서하여 진달한 것은 대체로 부득이한 데서 나왔으나, 의심하고 노여워함이 너무 심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견책하여 파면하도록 청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한 의논인 듯하므로, 내가 더욱 채택하지 않겠다."
하였다.

 

8월 4일 경진

이때에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의 자리가 비었는데, 장차 후임자를 뽑으려 하였으나 이조(吏曹)의 당상관(堂上官)이 날마다 패초(牌招)289)  를 어기므로, 임금이 노여워하여 이조 참의(吏曹參議) 심택현(沈宅賢)을 의금부(義禁府)에 회부하고, 일찍이 이조(吏曹)를 거친 사람 가운데 이병상(李秉常)을 특별히 임명하여 참의(參議)로 삼았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유(李濡)가 차자(箚子)를 올려 심택현을 위하여 해명[救解]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조태채(趙泰采)가 면직(免職)되었다. 조태채가 처음에는 당차(堂箚)로 인하여 인입(引入)290)  하였다가 뒤에는 성진령(成震齡)·박치원(朴致遠) 등에게 배척받아 강(江) 밖으로 나갔는데, 여러 번 글을 올려 면직을 청했었다. 임금과 세자가 잇따라 승지(承旨)와 사관(史官)을 보내어 위유(慰諭)하였으나, 끝내 나오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또 상서(上書)하여 간절히 진달하자, 세자가 우악한 비답을 내려 면유(勉諭)하고, 그의 관직을 체임하도록 허락하였다. 그리고 전례대로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에 임명하고, 인하여 사관을 보내어 함께 오도록 하였다.

 

8월 5일 신사

유명홍(兪命弘)을 도승지(都承旨)로, 김태수(金台壽)를 장령(掌令)으로, 유복명(柳復明)을 정언(正言)으로, 조상경(趙尙絅)을 부교리(副校理)로, 김상윤(金相尹)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8월 7일 계미

한중희(韓重熙)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8월 8일 갑신

처녀(處女) 초간택(初揀擇)을 행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면직(免職)되었다. 김창집이 이명의(李明誼)의 상소로 인하여 여러 번 상소하여 면직되기를 원하고 또 병을 핑계대어 정고(呈告)하기를 38차례에 이르렀으나, 임금과 세자가 잇따라 승지(承旨)와 사관(史官)을 보내어 위로하고 권면하기를 매우 지극히 하였으나 끝내 나오지 아니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세자가 강박(强迫)할 수 없다 하여 위유(慰諭)하고 체임하도록 허락하였다. 그리고 전례대로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에 임명하고, 인하여 사관(史官)을 보내어 함께 오도록 하였다.

 

8월 9일 을유

신사철(申思喆)을 부응교(副應敎)로 삼고,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건명(李健命)을 특별히 임명하여 우의정(右議政)으로 삼았다.

 

전라 감사(全羅監司) 홍석보(洪錫輔)가 폐사(陛辭)291)  하자, 세자(世子)가 불러서 보고 신칙하며 유시하여 보냈다.

 

압록강(鴨綠江) 상류(上流)에서 큰물이 져서 갑자기 이르자, 중강(中江)에 살고 있던 백성으로 죽은 자가 40여 명이었으며, 희천(熙川) 등 고을에서도 수재(水災)가 똑같이 일어나서 죽은 자가 80여 명이었다. 세자(世子)가 본도(本道)로 하여금 특별히 구휼하는 은전(恩典)을 행하도록 하였다.

 

8월 10일 병술

처녀(處女) 재간택(再揀擇)을 행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유(李濡)가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재해(灾害)를 입은 고을에 분등(分等)하는 규례는 본래 세금을 고르게 하기 위해서인데, 그것이 고르지 못한 것이 도리어 심하여 세입(稅入)이 점차 줄어들고 조적(糶糴)292)  이 점점 줄어드니, 수령의 불법(不法)과 백성의 풍습이 더욱 변하는 것이 오로지 이에 말미암는 것입니다. 금년 가을을 시작으로 다시 분등(分等)하지 말고, 다만 처음에 씨앗을 뿌리지 못했거나 모내기를 하지 못한 것 및 전염병에 걸려 김을 매지 못하여 묵혀서 버려 둔 것, 그리고 간혹 수재(水災)나 충재(蟲災)를 당하여 전혀 낫을 대지 못하는 경우를 가려 전재(全災)293)  를 주도록 허락하되, 먼저 각 고을로 하여금 일일이 성책(成冊)하여 감영(監營)에 보고하도록 하고, 도사(都事)는 순찰하면서 적간(摘奸)하여 마음대로 숨길 수 없게 할 것이며, 이 밖의 각종 곡식은 급재(給災)294)  를 허락하지 않고 한결같이 전안(田案)295)  에 따라 모두 실결(實結)296)  로 만든다면, 국가에서는 잃어버리는 것이 없고 백성들은 실제로 혜택을 입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조 판서(吏曹判書) 권상유(權尙遊)가 비록 병(病)들었다 하나 가볍게 체임시키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수령을 강등시키거나 파면시켰을 경우 차출하여 보내는 것이 바야흐로 시급하니, 대정(大政)297)  을 기다릴 필요 없이 좌이(佐貳)298)  로 하여금 차출(差出)하게 해도 무방(無妨)하겠습니다."
하니, 세자(世子)가 답하기를,
"국가의 계획과 백성들의 걱정을 깊이 염려하여 이러한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논한바가 진실로 폐단(弊端)을 바로잡는 뜻에 합당하니, 그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그리고 수령(守令)을 강등시켰거나 파면시켰을 경우의 차출하는 일은 그대로 시행하도록 하되,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대한 일은 마땅히 유념(留念) 하겠다."
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창집(金昌集)이 상소(上疏)하여 서추(西樞)299)  의 직명(職名)을 해임시켜 줄 것을 원했으나, 세자(世子)가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으니, 김창집이 마침내 사관(史官)을 따라 도성(都城)으로 들어왔다.

 

8월 11일 정해

김상원(金相元)을 승지(承旨)로, 최석항(崔錫恒)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민진후(閔鎭厚)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강원 감사(江原監司) 이기익(李箕翊)이 폐사(陛辭)하니, 세자가 불러다 보고 신칙하며 유시하여 보냈다.

 

8월 13일 기축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 상소(上疏)하여 새로 임명된 것을 사임하자,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려 면유(勉諭)하니, 이건명이 세 차례 상소한 뒤에야 정사(政事)를 살폈다.

 

8월 16일 임진

조태구(趙泰耉)를 판윤(判尹)으로, 김취로(金取魯)를 부교리(副校理)로, 김유경(金有慶)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8월 19일 을미

사옹원(司饔院)에서 번소(燔所)300)  를 양근군(楊根郡) 우천(牛川) 강가로 옮겨서 설치하도록 청하였다. 인하여 본원(本院)의 시장(柴場)301)  과 세미(稅米)를 갈라서 분원(分院)302)  에 소속시키되, 절반은 시목(柴木)을 바꾸어 번역(燔役)을 돕도록 하고 절반은 공장(工匠)의 급료(給料)로 지급하며, 공장이 받는 여정포(餘丁布)303)  는 본원에서 받아들여 사용하도록 해서 운반하는 노고를 없애도록 청하니, 세자(世子)가 이를 허락하였다.

 

옥당(玉堂)의 여러 신하들이 인혐(引嫌)하는 이가 많아 오랫동안 공무를 집행하지 않으니, 임금이 특별히 전교(傳敎)하기를,
"정택하(鄭宅河)의 글은 사리에 어긋나고 잘못된 것이 심하였었다. 그러나 전후(前後)의 서면으로 답하여 또한 벌써 용서하였으니, 김취로(金取魯)가 한결같이 소명을 어기고 있는 것은 분수와 의리로 헤아리건대, 실로 미안(未安)한 데 관계된다. 조상경(趙尙絅)은 당한 바가 비록 편안하게 여기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이 때문에 옥서(玉署)304)  에 방해가 된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으니, 공의(公議)를 볼 수 있는데도 인혐(引嫌)하고 출사하지 않은 채 기필코 스스로 그만두려고 하니, 역시 지나친 것이 아닌가?"
하고, 모두 즉시 패초(牌招)하였으나, 두 신하는 그래도 명(命)을 받들지 아니하였다.

 

충청 감사(忠淸監司) 한지(韓祉)가 상서(上書)하여 김진상(金鎭商)을 배척하였는데, 이르기를,
"임술년305) 김익훈(金益勳)이 터무니 없는 말로 죄 없는 사람을 무고 하여 옥사(獄事)를 일으켰을 때를 당하여 나라 사람들이 일제히 분개하여 공의(公議)가 격렬하게 일어났습니다. 그때 신의 아비 고(故) 참판(參判) 신(臣) 한태동(韓泰東)이 마침 대관(臺官)의 지위를 담당하여 실제로 그 의논에 참여하고 인하여 가율(加律)306)  하기를 청하였는데, 한때의 청의(淸議)를 지닌 자는 누군들 김익훈을 몹시 미워하지 않았겠습니까마는, 엄절하게 논척(論斥)하기는 선신(先臣)이 제일이었습니다. 김진상(金鎭商)의 말은 오로지 원독(怨毒)에서 나온 것으로, 조금도 꺼리는 바가 없었으며, 심지어 말하기를, ‘불행(不幸)히 시배(時輩)가 사정(私情)을 두고 터무니 없는 말로 남을 속였다.’ 하였으니, 마치 그의 조부(祖父)가 깨끗하여 허물이 없는 몸으로 본래 죄받을 만한 일이 없었는데, 당시의 사류(士類)가 사사로운 뜻으로 협잡(挾雜)하여 구허날무(構虛揑無)한 듯함이 있습니다. 신의 마음이 몹시 한탄스러운 것은 우선 버려 두고 논하지 않더라도 천일(天日)이 위에 계신데, 그가 어찌 감히 그런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대저 김익훈의 죄상(罪狀)은 당일의 소계(疏啓)에서 상세하게 논하였는데, 온 나라 공론이 낭자(狼藉)하여 부녀자와 어린이도 모두 그 이른바 효자(孝子)·자손(慈孫)이라도 백세(百世)토록 고칠 수 없다고 말하였으니, 만약 범(犯)한 것을 진실로 엄하게 징계하지 않는다면 나라가 나라 구실을 못하게 될 것입니다. 대각(臺閣)의 신하가 원망을 받으면서 들추어 내어 논하는 것은 오로지 세상의 도덕을 부지시키고 국가의 기강을 세우기 위한 데에서 나왔으니, 그가 비록 자기 조부의 일을 호소하기에 급급할지라도 어찌 감히 멋대로 날조하여 말하기를, ‘사정(私情)을 두었다느니 터무니 없는 말을 꾸며서 속였다.’느니 하면서, 은밀히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계획을 삼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인하여 병(病)을 핑계로 삼아 번임(藩任)을 체직하도록 청하였으나, 세자(世子)가 그의 사임을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처음에 김진상(金鎭商)이 과거에 합격하여 분관(分館)307)  할 때를 당하여 괴원(槐院)308)  에 있던 관원들이 김진상을 좋게 여기지 않는 이들이 많았었는데, 그의 할아버지 김익훈(金益勳)을 허물로 삼아 김진상의 괴원 분관을 막았었다. 이때에 이르러 김진상이 사임하는 글 가운데 옛일을 돌이켜 분변하였는데, 그 당시 의논을 주장하여 김익훈을 죄주도록 한 한태동(韓泰東) 등 여러 사람을 배척하여 말했다. 한지(韓祉)는 한태동의 아들인데, 마침내 상서(上書)하여 스스로 변명하니, 이튿날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임술년309)  의 허새(許璽)·허영(許瑛)의 옥사(獄事)는 역적 모의한 절차가 환히 드러났으므로, 요사스런 내란을 주동한 중심 인물과 괴수는 나라의 법으로 통쾌하게 복주(伏誅)되었는데, 오늘날 신자(臣子)된 자로서 어떻게 감히 역적을 비호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어제 충청 감사(忠淸監司) 한지(韓祉)의 서본(書本)을 보니, 주서(注書) 김진상(金鎭商)이 사임하는 글 가운데, ‘시배(時輩)들이 사정(私情)을 두고 터무니 없는 말을 꾸며서 속였다.’는 말에 발노(發怒)하여 그의 조부(祖父) 김익훈(金益勳)을 한없이 추잡하게 욕하고, 그의 아비 한태동(韓泰東)의 올바르지 못한 의논을 조술(祖述)하여 왕가(王家)에 공로가 있는 신하를 터무니 없는 말을 만드는 죄과(罪科)에 곧바로 몰아 넣었는데, 임술년의 옥사(獄事)를 터무니 없이 만들었다고 말한다면, 이는 허새(許璽)와 허영(許瑛)을 역적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으로서 흉악한 역적을 아끼고 비호하는 것이니, 몹시 한탄스럽다. 이러한데도 버려 둔다면, 장차 이남(李柟)310)  과 허견(許堅)을 역적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니, 엄중하게 미리 막지 않을 수 없다. 한지(韓祉)를 삭탈 관작(削奪官爵)하여 문외 출송(門外黜送)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진상(金鎭商)이 다시 상서(上書)하기를,
"경신년311)  에 역적을 다스린 뒤에 남은 잔당이 아직도 모두 제거되지 않았으므로, 원훈(元勳)인 고(故) 청성 부원군(淸城府院君) 김석주(金錫胄)가 이를 우려하였었는데, 미처 그들의 종적(蹤迹)을 살피지 못한 채 마침 장수(將帥)의 임무를 벗고 상부(相府)로 들어오면서 마침내 신의 조부(祖父)에게 부탁하여 염탐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신의 조부는 스스로 훈척(勳戚)의 신하로서 군사를 통솔하는 임무를 맡고 있어서 의리상 사양할 수 없었으므로, 김환(金煥) 등을 시켜 허새(許璽)·허영(許瑛) 등이 역적 모의를 한 정상(情狀)을 캐내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장차 고발하려고 하는 때에 또 전익대(全翊戴)란 자가 남의 반역 정상을 보고 자신이 고하지 않고 신의 조부에게 와서 고하였는데, 신의 조부가 여러 대신(大臣)에게 묻고 의논하였더니 대신들이 직접 아뢰도록 요구하였기 때문에, 신의 조부가 부득이 직접 계달(啓達)했던 것입니다. 허새와 허영은 역적 모의한 일이 환히 드러나 이미 나라의 형법으로 바로잡았지만, 전익대의 경우에 이르러서는 당초 신의 조부가 염탐하도록 시킨 것이 아니고 그가 직접 와서 고하였으니, 그 말의 허실(虛實)은 미리 헤아릴 바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장수의 임무를 맡고 있으면서 사람들의 흉모(凶謀)를 들었으면 대신(大臣)에게 의논하여 조정(朝廷)에 아뢰고 그 허실을 조사하여 조치하는 일은 그만둘 수 없는 바가 있었던 것이니, 어떻게 고변(告變)한 바가 결국에는 실상이 없다 하여 허물을 신의 조부에게 돌릴 수 있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가령 신의 조부가 정말 말한 사람의 말처럼 유인하여 무고(誣告)하게 하였다면, 전익대(全翊戴)가 연좌되어 사형당하던 날에 어떻게 신의 조부에 대하여 원망하지 않겠으며, 끝까지 한 마디도 허물이 되는 언급이 없었겠습니까? 이것으로 신의 조부가 성실하여 딴 마음이 없었음이 더욱 밝혀졌으며, 시배(時輩)들이 터무니 없이 죄를 얽어 죽인 정상(情狀)을 이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대체로 그렇게 터무니 없이 꾸며서 속이는 것은 저절로 연유한 바가 있으니, 지난 경신년에 하늘이 종팽(宗祊)을 돕고 성상의 결단이 대단하여 이남(李柟)과 허견(許堅)이 국법에 복주(伏誅)되고, 뭇 소인들이 쫓겨나 경화(更化)의 정치가 마치 해가 중천(中天)에 있는 듯하였는데, 신의 종숙(從叔) 고(故) 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 신(臣) 김만기(金萬基) 및 김석주(金錫胄)가 실로 천토(天討)를 도왔고, 신의 조부 또한 참여한 공로가 있었으니, 흉당(凶黨)이 신의 집안에 대하여 기필코 복수하려는 것을 대체로 알 수 있습니다. 당시에 역란(逆亂)이 겨우 평정되었으나, 남은 잔당들이 오히려 번성하여 여윈 돼지가 뛰듯이 하였으니,312)   이는 멀지 않은 장래의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일종(一種)의 시배(時輩)로 이익(利益)만 알고 뒤를 돌아보는 자들은 뒷날 흉당이 다시 득세(得勢)하면 사화(士禍)가 엄청날 것임을 생각하고, 고(故) 상신(相臣) 김수항(金壽恒)이 역적의 옥사(獄事)를 다스릴 적에 화복(禍福)의 말로 달래거나 위협하기를 많이 하였지만, 김수항이 의연하게 사마광(司馬光)의, ‘하늘이 만약 송(宋)나라를 복되게 한다면 반드시 이런 일이 없을 것이다.’는 말로 마음을 삼고, 범순인(范純仁)의, ‘몰래 뒷날 스스로 보전할 계책을 삼는다.’는 것으로 경계를 삼으면서 끝내 동요되지 않았었습니다. 시배(時輩)들의 계책이 이미 이루어지지 않자, 기필코 훈구(勳舊)에게 두 마음을 품은 채 흉당에게 잘 보이려고 바라 음모(陰謀)와 잠계(潛計)로 틈을 엿보다가 마침 임술년의 옥사를 만났으므로, 흉당이 신의 집안과 원수를 맺은 것은 전보다 갑절이나 더했으니, 마침내 기회를 틈타 참소와 무고를 일으키다가 한태동(韓泰東)의 무리가 출현하였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추고(推考)하도록 청하다가 마침내 헤아릴 수 없는 지경으로 빠뜨렸으니, 그들이 자기 마음으로 남을 헤아려 구허날무(構虛揑無)한 정상은 그 속마음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아! 저들 또한 어떻게 참으로 신의 조부가 죄가 있다고 여겨 죄줄 만하다고 여겼겠습니까? 다만 이것을 빙자해서 흉당에게 아첨하여 뒷날의 지위를 보전하기 위해서일 뿐이었습니다. 기사년313)  의 화(禍)를 어찌 차마 말하겠습니까? 흉당이 신의 조부를 터무니 없는 죄를 얽어 죽인 것은 한결같이 한태동 무리의 말을 따랐던 것인데, 한태동의 무리가 이미 죽어 식보(食報)가 미치지 않자, 흉당이 포증(褒贈)을 청하는 데 이르렀고, 또 그 처자[妻孥]들에게 늠록(廩祿)을 주도록 청하였으니, 그 무리가 흉역(凶逆)을 돕고 선류(善類)를 해치려는 자취가 또한 더욱 환하게 드러나 가릴 수가 없습니다."
하니, 세자(世子)가 답하기를,
"성상(聖上)께서 한지(韓祉)가 역적을 비호하는 정상(情狀)을 매우 미워하셔서 엄정(嚴正)하게 처분(處分)하셨으니, 다시 정세(情勢)를 말할 것은 없다."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대체로 김익훈(金益勳)은 유가(儒家)의 자제(子弟)로서, 재물을 탐하고 세력에 붙좇아 행동이 이미 무뢰(無賴)함이 많았으니 그가 화(禍)를 입은 것은 진실로 역시 스스로 불러들인 것이다. 그러나 사형[刑死]를 당하게 된 것은 그의 죄가 아니었다. 식견(識見)이 있는 자들은 그의 인품에 볼 만한 것이 없지만, 그가 사형당한 것은 원통하게 여길 만하다고 여겼었다. 마침내 한태동(韓泰東)·조지겸(趙持謙)의 무리가 사류(士類)들이 도륙(屠戮)되는 즈음에 포증(褒贈)받는 데 이르렀으니, 김진상(金鎭商)의 말이 이와 같은 것은 당연하다. 다만 한지(韓祉)의 상서 또한 허새(許璽)와 허영(許瑛)을 아끼고 비호하는 데 뜻을 둔 것이 아니고, 그 아버지의 논죄한 바가 올바르다고 한 데 불과하였을 뿐이다. 그런데 성상의 하교가 역적을 비호하는 것으로 곧바로 판단하였으니, 지나친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70책 62권 8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31면
【분류】사법-치안(治安) / 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註 305] 임술년 : 1682 숙종 8년.[註 306] 가율(加律) : 형벌을 더 함.[註 307] 분관(分館) : 조선조 때 새로 문과(文科)에 급제한 사람을 승문원(承文院)·성균관(成均館)·교서관(校書館)의 삼관(三館)에 배치시켜 권지(權知)라는 이름으로 실무를 익히게 하던 일.[註 308] 괴원(槐院) : 승문원(承文院)의 별칭.[註 309] 임술년 : 1682 숙종 8년.[註 310] 이남(李柟) : 복창군(福昌君).[註 311] 경신년 : 1680 숙종 6년.[註 312] 여윈 돼지가 뛰듯이 하였으니, : 《주역(周易)》 구괘(姤卦) 초육(初六)의 효사(爻辭)로서, 여윈 돼지가 뛰려는 생각을 품고 있다는 말인데, 이는 소인(小人)이 올바르지 못한 마음으로 군자(君子)를 해치려는 생각을 품고 있음을 비유한 것임.[註 313] 기사년 : 1689 숙종 15년.
사신(史臣)은 말한다. 대체로 김익훈(金益勳)은 유가(儒家)의 자제(子弟)로서, 재물을 탐하고 세력에 붙좇아 행동이 이미 무뢰(無賴)함이 많았으니 그가 화(禍)를 입은 것은 진실로 역시 스스로 불러들인 것이다. 그러나 사형[刑死]를 당하게 된 것은 그의 죄가 아니었다. 식견(識見)이 있는 자들은 그의 인품에 볼 만한 것이 없지만, 그가 사형당한 것은 원통하게 여길 만하다고 여겼었다. 마침내 한태동(韓泰東)·조지겸(趙持謙)의 무리가 사류(士類)들이 도륙(屠戮)되는 즈음에 포증(褒贈)받는 데 이르렀으니, 김진상(金鎭商)의 말이 이와 같은 것은 당연하다. 다만 한지(韓祉)의 상서 또한 허새(許璽)와 허영(許瑛)을 아끼고 비호하는 데 뜻을 둔 것이 아니고, 그 아버지의 논죄한 바가 올바르다고 한 데 불과하였을 뿐이다. 그런데 성상의 하교가 역적을 비호하는 것으로 곧바로 판단하였으니, 지나친 것이다.

 

8월 20일 병신

이인복(李仁復)을 수찬(修撰)으로, 박사익(朴師益)을 교리(校理)로, 김흥경(金興慶)을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삼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말하기를,
"경상 좌수사(慶尙左水使) 민원중(閔遠重)이 방포(防布)314)  에 관한 일로 인하여 본도(本道)의 감사(監司)와 서로 논쟁(論爭)하고 비국(備局)에 정장(呈狀)315)  하였는데, 헐뜯고 욕하는 것이 종이에 가득하였습니다. 이러한데도 그대로 버려둔다면, 무인[武弁]들의 교만하고 사나운 풍습을 장차 징계할 수 없을 것이니,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 그리고 북도 백성들의 풍속에 동지(僮指)316)  를 가장 중하게 여기는데, 그 값이 내지(內地)에 비교하여 몇 갑절이나 되므로 일종의 모리배(牟利輩)가 경외(京外)의 양민(良民)과 떠돌아다니며 빌어먹는 공천(公賤)·사천(私賤)의 부류들을 유인하여 속여 데리고 가서 그대로 권장(券狀)317)  을 만들어 마음대로 팔고 사고 하는데, 이와 같이 하여 그치지 않는다면 내지(內地)의 인민(人民)이 날마다 줄어들고 흩어질 것이니, 청컨대 본도(本道)로 하여금 일일이 쇄환(刷還)하도록 하고, 판 장사꾼은 조사 신문하게 하여 엄중히 추궁하게 하소서."
하니, 세자(世子)가 단지 끝 부분의 일만 따랐다.

 

8월 21일 정유

황귀하(黃龜河)를 교리(校理)로, 조상경(趙尙絅)을 부교리(副校理)로, 김상윤(金相尹)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8월 23일 기해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는데,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유(李濡)가 함께 들어갔다. 진후(診候)를 마치자 이유가 말하기를,
"북한 산성(北漢山城)은 바로 국가의 대계(大計)를 보존하는 곳이고, 탕춘대(蕩春臺)가 그 밖에서 보호하는 격이 되니, 성을 쌓는 것은 형세로 보아서 그만둘 수 없습니다. 원컨대 성상께서 신충(宸衷)으로 결단하시어 다른 의논에 흔들리지 마시고, 빨리 대신(大臣)과 장신(將臣)에게 명하시어 가서 성지(城址)를 살펴보도록 한 뒤에 기한을 정하여 역사를 시작하게 하소서. 그리고 경리청(經理廳)에서 판비(辦備)한 역사에 필요한 식량은 대강 지용(支用)할 만하나, 전포(錢布)가 부족하니, 청컨대 금위영(禁衛營)과 어영청(御營廳) 두 곳의 영(營)에 저축된 포(布) 및 비국(備局)에서 관할하는 영남(嶺南)의 사군목(射軍木)318)   합계 3, 4백 동(同)을 빌리도록 하고, 겸하여 돈을 만들어 재력(財力)을 보충하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탕춘대(蕩春臺)를 경기 감영(京畿監營)으로 옮겨 설치하도록 이미 성명(成命)이 있었는데, 아직도 거행하지 않고 있으니 거듭 신칙(申飭)함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리고 총융청(摠戎廳)이 소격동(昭格洞)에 있어 창의문(彰義門)과 거리가 편리하게 가까우니, 탕춘대·수문(水門) 일대를 총융청의 신지(信地)로 정하여 총융청으로 하여금 전적으로 관리하며 수호(守護)하게 하는 것이 진실로 편리하고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가 구획(區劃)한 것이 적합하다고 권장하고 모두 허락하였다. 이유(李濡)가 또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1년의 세입(稅入)이 본래 1년의 경비로 쓰기에 부족하므로, 급할 때 믿는 것은 다만 각 고을의 조곡(糶穀)인데, 흉년을 만날 경우에는 그것을 진자(賑資)로 삼고, 병란(兵亂)을 만날 경우에는 군향(軍餉)319)  으로 삼았었습니다. 그런데 근년에는 재해(災害)를 입은 고을에 분등(分等)하는 규정으로 인하여 혹 받아들이거나 정지하는 것 또한 재실(災實)의 등급을 비교하는데, 그 구년조(舊年條)의 받아들이는 시기를 늦춘 것은 저절로 끌어 미루게 되어 마침내 탕감(蕩減)해 주는 데로 돌아가게 되니, 국가의 곡식이 이로 말미암아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이제 만약 먼저 각 고을의 민호(民戶)와 곡물(穀物)의 수량을 가지고 그것을 골고루 알맞게 배정한 뒤에 연조(年條)의 신구(新舊)를 구분하지 않고, 오로지 바치는 것의 근만(勤慢)을 비교하여 수령의 출척(黜陟)을 시행한다면, 포흠(逋欠)의 염려는 없을 것입니다. 신이 임진년320)  에 정승의 직임에 대죄(待罪)하면서 한 책자(冊子)를 만들어 품재(稟裁)를 거치려 하였으나, 미처 하지 못하였습니다. 청컨대 비국(備局)에 보내어 참작하고 규정을 정하여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제조(提調) 조도빈(趙道彬)이 바야흐로 병조 판서(兵曹判書)의 직임을 맡고서 진달하기를,
"본조(本曹)는 물력(物力)이 조잔(凋殘)한데, 군색 낭관(軍色郞官)으로 삼사(三司)에 드나드는 자가 많아 옮기거나 임명하는 일이 일정함이 없어 수습(收拾)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구임(久任)321)  시키는 규정을 정하여 그 성과를 책임지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 뒤로는 병조 판서(兵曹判書)가 해당 낭관을 자벽(自辟)322)  하여 3, 4년을 한정해서 옮기지 못하게 하되, 만약 거의(擧擬)를 면하지 못하면, 군색(軍色)으로 주(註)를 달아 들여보내도록 명하였다. 이 뒤로 성을 쌓는 의논이 일치하지 않아 이미 시작하였다가 도로 중지시켰으며, 돈을 만들고 영(營)을 옮기는 등의 일도 모두 점차로 중지하는 방향으로 돌아가고, 조곡(糶穀)을 균등하게 배정하는 일 및 병조 낭관(兵曹郞官)을 구임(久任)시키는 일도 시행되지 않았다.

 

8월 24일 경자

가례 도감(嘉禮都監)에서 가례(嘉禮) 때 당연히 준비해야 할 물품을 차례로 적어 아뢰니, 임금이 그 가운데 재량하여 줄이도록 한 것이 많았는데, 흉년이 든 때문이었다.

 

김상직(金相稷)을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로, 홍은(洪蒑)을 장령(掌令)으로, 민진원(閔鎭遠)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삼았다.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김태수(金台壽)가 탄핵하기를,
"전(前) 수찬(修撰) 조관빈(趙觀彬)은 나이가 젊고 기개가 날카로운 사람으로 지론(持論)이 자못 편벽되어 일을 처리하는 데 공정하지 못했었는데, 한때의 사감(私憾)으로 인해서 의심하고 노여워함이 점점 심해져 처음에는 머리를 감춘 채 몰래 헐뜯다가, 끝내는 몸을 뽐내면서 드러내어 욕을 하였습니다. 그가 논한 두 유신(儒臣)에 대한 일은 그가 처음부터 지목하여 배척한 것이 오늘날 말한 것과 같다는 것은 듣지 못했지만, 그의 혐의와 원한이 이미 드러난 뒤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새로운 말을 마련하여 기필코 남을 경함(傾陷)하려고 덫이나 함정을 설치하여 남을 상(傷)하게 하지 않음이 없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사원(私怨)은 펴겠지만 공의(公議)는 굽혀지게 되었습니다. 청컨대 파직(罷職)시키고 서용하지 마소서. 그리고 부사과(副司果) 최창대(崔昌大)가 전(前) 감사(監司) 김유(金楺)에게 배척을 당하였을 적에 【김유(金楺)가 이명의(李明誼)의 상소로 인하여 뒤에 상서(上書)하여 최창대(崔昌大)의 아버지 최석정(崔錫鼎)이 지은 윤증(尹拯)에 대한 제문(祭文) 가운데 대의(大義)를 배척한 부분을 끌어다 언급하면서 거리낌없이 말하며 변파(辨破)하였는데, 최창대 또한 상서하여 대답하며 분변한 말의 내용이 매우 사리에 어긋났었다. 그리고 새로 개성 유수(開城留守)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부임하지 않았다가 체임되었다.】  대답하여 분변하는 글을 올려 선정(先定) 【송시열(宋時烈)이다.】 을 꾸짖어 욕하며 조금도 돌아보아 꺼려함이 없었으며, 오로지 시호(諡號)를 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곧바로 성자(姓字)를 빼어버렸으니, 그의 업신여기고 짓밟는 형상은 이미 지극히 도리에 어긋났습니다. 더구나 한편의 주의(主意)가 오로지 대의(大義)를 공격하면서 심지어 ‘오늘날의 대의(大義)는 물고기를 잡는 통발이나 토끼를 잡는 올가미처럼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이 되었다.’고 말하였으니, 말의 차례가 없음이 어찌 이토록 극도에 이르렀습니까? 청컨대 삭탈 관작(削奪官爵)하소서."
하였으나, 세자(世子)가 따르지 않았다.

 

병조 참의(兵曹參議) 이상성(李相成)이 성진령(成震齡)이 상소(上疏)한 내용을 뒤따라 제기해서 상서(上書)하여 스스로 변명하고, 성진령을 배척하여 흉당(凶黨)의 남은 부류라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지난해 겨울에 강계(江界)에서 체임되어 올 때에 고양(高陽)의 전사(傳舍)323)  에 투숙(投宿)하게 되었었는데, 성진령이 찾아와서 보고 처음으로 그 전의 잊지 않고 생각하던 뜻을 폈으며, 인하여 늙어가며 가난한 정상을 이모저모 길게 말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떠났습니다. 신은 천리 길을 돌아오느라 주머니[囊]가 비었으므로, 옷감이라도 찢어주어 그가 찾아와준 뜻에 부응할 수는 없었는데, 그는 그런 줄을 몰랐을 터이니 원한을 가질 것은 당연합니다. 처음에는 친하게 지내려고 하다가 마침내 스스로 구무(構誣)하고, 이에 단두(簞豆)를 가지고 본심을 드러내는 얼굴324)  로 갑자기 전일 양(羊) 고기를 주지 않은 앙갚음325)  을 하려 하니, 그 자취를 알 만합니다. 모두 그 마음을 미워하는데 이를 어떻게 계교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세자(世子)가 답하기를,
"대관(臺官)의 말이 정도에 지나치다 하여 어찌 깊이 혐의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8월 25일 신축

금성(金星)이 헌원 대성(軒轅大星)을 범(犯)하고, 금성과 목성(木星)이 서로 범하였다.

 

8월 27일 계묘

사헌부(司憲府)에서 전번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세자(世子)가 따르지 않았다. 최창대(崔昌大)와 조관빈(趙觀彬)을 모두 파직(罷職)하도록 하였다.

 

8월 28일 갑진

이조 판서(吏曹判書) 권상유(權尙遊)를 면직(免職)시켰다. 권상유가 병(病)이 있어 굳이 사직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체임시켰다.

 

송상기(宋相琦)를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조태구(趙泰耉)를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유집일(兪集一)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김재로(金在魯)를 대사간(大司諫)으로, 김상옥(金相玉)을 교리(校理)로 삼았다.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민회빈(愍懷嬪)을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묘(墓)에 부장(祔葬)하는 일은 신(神)의 도리와 사람의 마음에 유감(遺感)이 없다고 말할 만하다. 다만 병술년327)  에서 지금까지 80년이나 되었으니, 천묘(遷廟)하는 일이 실로 대단히 어렵고, 옛 묘(墓)를 판 뒤에 만약 재실(梓室)328)  을 고쳐야 할 일이 있게 되면 더욱 중대한데 관계가 되니, 내가 처음부터 지난(持難)했던 것은 진실로 이 때문이었다. 복위(復位)하고 합봉(合奉)하는 예(禮)를 이미 이루었고, 이제 또 원묘(園墓)를 고쳐서 손질한다면 조금도 흠전(欠典)은 없을 것이니, 천봉(遷奉)하는 한가지 절차는 정지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그것을 해조(該曹)로 하여금 대신(大臣)과 의논해서 품처(稟處)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유(李濡)와 서종태(徐宗泰)는 말하기를,
"사대부(士大夫) 집안에서 이장(移葬)할 때 간혹 1백 년에 가깝게 되었는데도 관곽(棺槨)에 아무런 탈이 없는 경우가 있으니,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염려를 미리 가지고서 기필코 시행해야 할 예(禮)를 도로 중지시키는 것은 아마도 신(神)의 도리와 사람의 마음에 만족스럽지 못한 점이 있을 듯합니다."
하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이명(李頤命)·김우항(金宇杭),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은 말하기를,
"80년 가깝도록 안봉(安奉)한 묘(墓)를 특별한 환난이나 연고 없이 단지 신의 도리와 사람의 마음에 유감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경솔하게 천동(遷動)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다시 하교(下敎)하기를,
"비록 국가에서 이미 시행한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왕후(王后)의 여러 능(陵)은 반드시 모두 부장(祔葬)하지는 않았다. 장릉(莊陵)329)  과 같은 경우에 이르러서는 당초의 장사(葬事)가 틀림없이 예(禮)대로 못했을 터이니, 복위(復位)한 뒤에 어찌 천봉(遷奉)하려고 하지 않았겠는가마는, 오래된 능침(陵寢)을 천동(遷動)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기 때문에 그대로 더 봉축(封築)하도록 했으니, 이것으로 논한다면 비록 옮겨서 부장(祔葬)하는 예(禮)를 정지하더라도 대단하게 흠전(欠典)에는 이르지 않을 듯하다. 부장 도감(祔葬都監)과 천묘 도감(遷墓都監)을 혁파하고, 봉묘 도감(封墓都監)으로 개칭(改稱)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진선(進善) 김간(金榦)이 상서(上書)하여 나이 70세에 이른 것을 스스로 진달하고 휴치(休致)330)  를 내려 주기를 원하고, 글의 끝 부분에 또 이르기를,
"신이 삼가 내려주신 《주문초선(朱文抄選)》 두 책자를 받아 삼가 이 책을 보았더니, 뽑은 것은 몇 편(編) 안되지만 무릇 아름다운 계책과 사리에 맞는 이론 그리고 굉대(宏大)한 강유(綱維)는 스승으로 삼을 만하고 본받을 만한 것이 아님이 없었고, 그 가운데 세밀하고 전일한 법과 복수 설치[復雪]하는 의리는 더욱 오늘날의 요긴한 도(道)이며 시급한 업무입니다. 신이 듣건대, 이 초선(抄選)은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에게서 나왔는데, 성상께서 특명(特命)으로 인출(印出)하여 서연(書筵)에서 강독(講讀)하도록 하셨으니, 성의(聖意)가 있는 바를 거의 우러러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뒤로 계술(繼述)하는 책임은 돌아보건대, 우리 저하(邸下)에게 있지 않겠습니까?"
하니, 세자(世子)가 답하기를,
"내가 바야흐로 불러 들이려고 기약하고 있었으니, 물러나 쉬겠다는 청은 결단코 허락할 수 없다. 그리고 상서 끝 부분에 진달한 것은 내용이 매우 간절하고 지극하니, 유념(留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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