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임진
윤성준(尹星駿)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개정(開政)하라는 명이 내려진 지 여러 날이 되어도 거행하지 못하였는데, 새로 제수(除授)한 참의 유봉휘(柳鳳輝)는 외방(外方)에 있었으므로 체직하고, 또 대신(大臣)에게 물어서 윤성준으로 대신하였다.
3월 2일 계사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이명(李頤命)이 정지(情地)가 편안할 수 없어서 소(疏)를 두고 성을 나가며 물리치는 벌을 받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위유(慰諭)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3월 3일 갑오
이집(李㙫)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윤성준(尹星駿)도 여러 번 어겨서 파직(罷職)되었으므로, 이집으로 대신하였다.
태학(太學)의 유생(儒生) 김순행(金純行) 등 56인이 상소하였다. 대략 이르기를,
"대사헌(大司憲) 권상하(權尙夏)는 전하에게 예우(禮遇)받은 것이 이제까지 20년인데, 이제 《가례원류(家禮源流)》의 서문(序文)의 일로 인하여 미워하고 냉대하여 물리쳐 끊으시기에 다시는 여지가 없게 하시니, 신(臣)들은 서문이 무슨 큰 죄인지 모르겠습니다. 권상하의 소(疏) 가운데에 이른바 첫째가 스승을 저버렸다는 것은 갑자년152) 이후로 이미 정하여진 논의인데, 전하께서 시비를 전도시키고 뭇사람의 말을 힘써 꺾으신 까닭은 실로 아버지와 스승은 경중이 있다는 한 마디의 실언에서 말미암았습니다. 일전의 사학(四學)153) 의 소는 도리에 맞게 말하여 남김없이 다 아뢴 것인데, 전하께서는 한 마디 시비를 가르는 말씀도 없이 곧바로 바른 사람을 헐뜯는 것으로 죄를 삼으셨으니, 인심이 더욱 격렬하여지고 공론이 더욱 우울해 합니다. 전하께서 의리를 재량하고 시비를 명시하신다면, 신들이 그에게 무슨 쌓인 원한이 있어서 이처럼 애써 다투겠습니까?
이른바 둘째도 스승을 저버렸다는 것 또한 설명하겠습니다. 대저 《가례원류》의 강(綱)을 세우고 목(目)을 나눈 것은 실로 문충공(文忠公) 유계(兪棨)의 손에서 나왔는데, 윤선거(尹宣擧)도 참여하여 도운 단서(端緖)가 있으니, 주객(主客)의 구분은 엄폐할 수 없습니다. 유계가 무술년154) 에 윤증(尹拯)에게 글을 보내 그 일을 시작한 공(功)을 기뻐하고 죽기 전에 보기를 바랐으며, 또 갑진년155) 에 윤선거 형제에게 영결(永訣)을 고하며, 윤증에게 뜻을 전하기를, ‘부탁한 까닭은 죽은 뒤에라도 반드시 듣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유계가 이 서책에 대하여 죽을 때까지 이처럼 간절하였으므로 윤증에게 조금이라도 스승을 존경하는 마음이 있다면 본디 빨리 완성하여서 전하여 널리 펴야 할 것인데, 덮어 숨긴 채 말만 많으며 깊이 감추고 내지 않다가는 급기야 출간하라는 조정의 명을 받기에 이르렀으며, 이미 돌려주겠다고 허락하고 나서 자기 소유로 삼은 데 의거하여 스승이 임종시에 부탁한 것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으로 돌리기까지 하였습니다. 아! 누구를 속이겠습니까? 하늘을 속이겠습니까? 또 이것을 유계의 글이라 하는 것은 유계나 뒷사람의 말이 아니라, 실로 윤선거의 말입니다. 그가 지은 유계의 행장(行狀)에 ‘공(公)이 문공(文公)156) 의 《가례(家禮)》를 따라 강(綱)을 세우고 목(目)을 나누어 경전(經傳)과 선현(先賢)의 예설(禮說)을 따서 분류하여 각 조목 아래에 붙여서는 이름하여 《가례원류》라 하였다.’ 하였으니, 그 아버지가 손수 쓴 글이 저렇게 명백한데, 그 아들이 오히려 믿지 않는다면 장차 무엇에 근거하여 이 글의 주객을 말할 것입니까?
대저 이 글이 비록 유계가 지은 것이기는 하나 윤선거에게도 다듬은 공이 있으니, 윤증이 당초에 아버지와 스승이 함께 엮었다고 말하여 근일 그 무리가 말하는 것과 같았다면, 유상기(兪相基)가 혹 그 마음에 맞지는 않더라도 또한 혈전(血戰)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지 않고 도리어 대대로 전하여 온 우리 집의 글이라 하고 또 한 서책이 두 집에 속하면 사람들이 반드시 의심할 것이라는 따위 말로 감추고 말을 꾸며서 빼앗을 생각을 하였으니, 유상기의 도리로는 어찌 통탄하여 힘껏 다투지 않겠습니까? 대저 공론이 일제히 분개하여 형세가 빼앗기 어렵게 되어서야 마지못하여 비로소 함께 엮었다는 말을 하였으니, 이 한 가지 일에서도 곡직(曲直)을 가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른바 《가례집해(家禮集解)》라는 것은 《가례원류》의 초본(初本)인데, 이진유(李眞儒)는 한 자도 가감한 것이 없다고 하니 어찌 속이는 것이 심하지 않겠습니까? 《가례원류》의 마지막 편(編)에 있는 왕조례(王朝禮) 두 책은 다 유계가 손수 쓴 것인데 《가례집해》에는 왕조례가 없으므로 《가례집해》가 《가례원류》의 초본임은 이에 의거하여 알 수 있고, 《가례집해》가 《가례원류》라 개명(改名)된 것은 이미 그 전에 있었던 일인 것을 여기에서 또한 알 수 있습니다. 《둔원설화(遯院說話)》에서 윤선거의 연보(年譜)를 보더라도 그때에 모여 이야기한 사우(士友)가 다 실려 있는데 정양(鄭瀁)의 이름이 없으니, 그것이 근거 없이 함부로 지은 것이라는 것은 더욱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이 하나의 글이 무슨 관계되는 것이겠습니까마는, 그 스승의 유촉(遺囑)을 돌아보지 않고 그 아버지의 정론(定論)을 믿지 않고서 한바탕 분란을 만들어 냈으니, 윤증은 여기에서 그 스승을 부끄럽게 할 뿐더러, 또한 장차 그 아버지를 부끄럽게 할 것인데, 세도(世道)의 책무를 맡은 자로서 어찌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권상하가 서문을 짓지 않는다면 그만이겠으나, 서문을 지으면서 분명히 말하여 매우 배척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일세(一世)를 깨우치고 후래(後來)를 가르치겠습니까? 대저 말이 유현(儒賢)의 입에서 나왔고 예훈(禮訓)의 첫머리에 분명히 실려 있어 한 마디 말이나 몇몇 글자라도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 아닌 것이 없으니 백대(百代) 뒤에도 삭제되지 않을 글이라 할 만한데, 이러하여도 불사를 수 있다면 《춘추(春秋)》의 징토(懲討)한 글과 추성(鄒聖)157) 이 사설(邪說)을 물리친 글도 다 재가 되는 것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어찌 위태롭지 않겠습니까? 저번에 한두 신하 【곧 박세당(朴世堂)·최석정(崔錫鼎) 두 사람이다.】 가 글을 지어 주자(朱子)를 헐뜯었으므로 전하께서 비록 그 사람을 죄주고 그 글을 폐기하시면서도 또한 신충(宸衷)158) 에서 결단하여 요즈음 하신 것처럼 손수 불에 던지시지는 않았으니, 이는 전하께서 윤증을 존모(尊慕)하시는 것이 도리어 주자보다 더 하신 것이니, 신들은 저윽이 의혹됩니다.
고(故) 상신(相臣) 최석정은 《예기유편(禮記類編)》 가운데에서 《중용(中庸)》·《대학(大學)》을 개주(改註)하여 망령되고 도리에 어긋남이 극에 달하였는데, 윤증은 그 강론(講論)과 연마(硏磨)마저 같게 하여 권수(卷首)에 이름을 붙였으니, 주자에게 죄진 것이 또한 막대합니다. 그리고 국가에서 판본(板本)을 부순 뒤에도 끝내 명백히 스스로 밝히려 하지 않았으니, 태연하게도 그 그른 것을 몰랐다는 것을 더욱 알 만합니다. 더구나 그가 평생에 말하고 침묵하는 것과 따르고 피하는 것이 오로지 이해(利害)·화복(禍福)을 생각하는 데에서 나왔으니, 기사년159) 망극한 때를 당하여 득지(得志)하여 날뛰었고 대헌(大憲)으로 벼슬하였으나 한 마디도 명의(名義)의 중함에 대해서는 언급한 적이 없이 함부로 사감(私憾)을 끌어대어 불쌍히 여기는 뜻을 보였으니, 그 두려워하고 비굴한 꼴은 사람들로 하여금 침뱉고 욕하게 하였습니다. 선비의 도리가 또한 이러한 것입니까? 선정(先正)이라는 칭호는 상(商)나라의 보형(保衡)160) 에서 비롯되었는데, 본조(本朝)의 제현(諸賢)으로서 서거하여 이 칭호를 얻은 사람을 전하께서 시험삼아 살펴보시면, 윤증처럼 죄진 것이 지극히 중대한 자가 과연 조금이라도 여기에 방불한 경우가 있었습니까? 더구나 처음에는 유일(遺逸)161) 의 적(籍)에서 이름을 삭제하였다가 마침내는 도덕(道德)의 유(類)에 견준 것이고 보면, 성조(聖朝)의 포폄(褒貶)이 엄하지 않은 것을 더욱이 후세에 알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선정의 처의(處義)한 본말(本末)은 내가 이미 명백히 아니, 너희들이 비록 갖가지를 헐뜯더라도 될 수 있겠는가? 《가례원류》의 일도 모두 유상기를 편들고, 선정을 배척하는 것이 이미 매우 놀라운데, 후서(後序)의 글을 《춘추》의 징토한 글과 추성이 사설을 물리친 글에 견주기까지 하였으니, 무엄하다 하겠다."
하였다.
윤증(尹拯)의 문인(門人)인 전(前) 세마(洗馬) 최석문(崔錫文) 등이 상소하였다. 대략 이르기를,
"신(臣)의 스승이 고(故) 상신(相臣) 송시열(宋時烈)과 끝내 관계를 보전하지 못한 데에는 참으로 본말(本末)이 있습니다. 신의 스승의 아버지인 윤선거(尹宣擧)는 송시열과 약관(弱冠)에 상종하여 도의(道義)의 교우(交友)를 맺어 알면 모두 말하여 버려 두고 지나친 적이 없었는데, 말년에 이르러서는 말을 신임받지 못하여 뜻을 다할 수 없는 경우가 있었으나 간절한 정성이 끊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문생(門生)·자제(子弟)가 혹 더러 멀리하라는 뜻으로 경계하면, 윤선거가 개탄하여 말하기를, ‘영보(英甫)162) 는 기질(氣質)의 병통이 있으므로 주장(主張)이 너무 지나치고 스스로 인퇴(引退)하는 것이 너무 고상하니, 어찌 매우 아깝지 않겠는가? 명도(明道)163) 가 말하기를, 「저에게 유익하지 않으면 반드시 나에게 유익할 것이다.」 하였으니, 영보가 평온한 마음으로 생각하면 어찌 내 말이 성심에서 나온 줄 모르겠는가?’ 하였습니다. 영보는 송시열의 자(字)입니다. 무신년164) 가을 송시열이 부임할 때에 윤선거가 말하기를, ‘이것도 송시열이 기해년165)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다. 능히 성실히 한다면 국사(國事)에 오히려 바람직한 것이 있을 것이다.’ 하고, 드디어 수백언(數百言)을 기초하여 보내려 하였으나 갑자기 그가 서울을 떠났다는 말을 들어서 마침내 보내지 않았습니다.
윤선거가 서거한 뒤에 신의 스승이 말하기를, ‘이것은 선인(先人)이 남기신 뜻이므로 이미 때가 지났더라도 그만둘 수 없다.’ 하고, 송시열에게 묘문(墓文)을 청할 때에 아울러 그 글을 가져가서 보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천하의 큰 근본은 본디 임금의 마음에 달려 있으며 오늘날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을 책무는 실로 집사(執事)166) 에게 달려 있으니, 우리 임금의 사의(私意)를 없애게 하려면 먼저 내 사의를 없애야 할 것이고, 우리 임금이 언로(言路)를 열게 하려면 먼저 내 언로를 열어야 할 것이다. 전에 시남(市南)167) 이 늘 말하기를, 「집사는 친구에게는 돈독하고 후하므로 정이 많은 폐단이 있고, 시기하고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지나치게 강직하므로 도량이 좁은 병통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하여는 그 악한 데를 모르는 채 또한 끌려서 따르는 것을 면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사람에 대하여는 그 선한 데를 모르는 채 또한 지나치게 살펴서 의심하는 것을 면하지 못한다. 사랑하여 무릎에 앉히고 미워서 못[淵]에 떨어뜨리며 주고 빼앗으며 높이고 낮추는 것을 모두 자기 뜻대로 하므로 총명이 엄폐되고 호오(好惡)가 전도되어도 혹 깨닫지 못하니, 물정이 싫어하는 까닭이 오로지 여기에 있다.」 하였다. 이것이 사의(私意)에서 없애야 할 것이다.
석호형(石湖兄)168) 이 일찍이 말하기를, 「선비가 출세할 때에는 마땅히 먼저 왕형공(王荊公)169) 을 참전(參前)·의형(倚衡)함이 옳다. 선비가 자기 뜻을 반드시 행하려 하다가는 자기와 뜻을 같이하는 자는 어질게 여기고 자기와 뜻을 달리하는 자는 어질지 않다고 여기는 것을 면하지 못하며, 고성(古聖)을 끌어내다가 자칫하면 잘 따르는 자는 나를 알아주는 사람으로 여기고 의심하여 물리치는 자는 알아주지 않는 사람으로 여기게 되니, 자기의 뜻이 반드시 의리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고 옛일이 반드시 지금에 적당한 것은 아니라는 것은 미처 살필 겨를이 없게 되기까지 한다. 그러므로 경박하고 자존심이 강하여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성색(聲色)은 남을 거부하는 것을 면하지 못하고, 부회(附會)하는 풍습은 면전에서 아첨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부지런히 묻기를 좋아하는 집사로서도 혹 받아들이는 것이 넓지 못한 것을 병통으로 여기는 것은 주장하는 것에 지나친 데가 있기 때문이다.」 하였다. 이것이 열어야 할 언로이다.’ 하였습니다. 시남은 고 참판(參判) 유계(兪棨)의 호이고, 석호는 윤선거의 형인 고(故) 참판(參判) 윤문거(尹文擧)의 호입니다. 그 나머지 논한 것도 모두가 그 병통을 절실하게 맞혔으므로, 송시열이 글을 보고 분노하여 말과 낯빛에 나타내기까지 하였습니다. 비문(碑文)을 지을 때에 평생을 두루 서술하였으나 총론(總論)하는 말에 있어서는 평소에 칭찬하던 것으로 하지 않았고, 논저(論著)한 것은 단지 선정신(先正臣) 박세채(朴世采)가 지은 행장의 말을 빌려서는 박화숙(朴和叔)이 말하였다고 끝맺었습니다. 화숙은 박세채의 자(字)입니다. 명(銘)에 있어서는 다시 구설(舊說)을 전하여 기술할 뿐이고 새로 짓지 않은 채 질질 끌었습니다. 진실로 그 마음에 불평을 품은 자가 아니라면 그 말이 소략하고 성실하지 않은 것이 어찌 이러하겠습니까? 신의 스승이 여러 번 왕복하여 고쳐주기를 바랐더니 송시열은 단지 두세 자를 점철(點綴)하고 말 뿐이었으므로, 신의 스승이 비로소 다시 청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내버려 두었습니다.
대저 비지(碑誌)의 체모는 결어(結語)가 중요하니 칭찬의 천심(淺深)은 마땅히 자기 뜻으로 결단하여야 할 것인데, 이제 송시열은 평생 동안 도의로 사권 사이로서 후배의 말만을 빌어 중요한 것으로 삼았으니, 신의 스승이 처음에 왕복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 청할 수 없어서 그만두게 되었다는 데 미쳐서는 신의 스승이 어찌 일찍이 둘로 갈라설 마음이 생겼겠으며, 또 어찌 끊고 끊지 않고를 논할 수 있었겠습니까? 송시열이 신의 스승이 그 실병(實病)을 논한 것을 분노하게 되어서는 문득 맹세하여 말하기를, ‘이것은 글에서 말미암은 일이다.’ 하였으므로, 그 무리가 드디어 서로 전하기를, ‘윤증이 그 스승을 끊은 것은 묘문(墓文)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하였습니다. 아! 신의 스승이 과연 묘문 때문에 그 스승을 끊었겠습니까? 또한 신의 스승이 끊지 않을 수 없게 한 데에 어찌 다른 까닭이 없겠습니까? 신들이 대략 아뢰겠습니다. 대개 송시열은 젊었을 때부터 다소 병통이 있었으니, 신의 스승이 질의(質疑)하고 경계한 것도 어찌 한두 번 뿐이겠습니까마는, 다 기질의 병으로 돌리고 말았는데, 만년에 이르러 그 언행과 일하는 것들을 익히 살펴보니 본원(本源)이 의심스로운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으로 말하면, 이유태(李惟泰)의 예설(禮說)과 목천(木川)의 일170) 의 언근(言根) 같은 것이 그 한 단서(端緖)입니다. 신의 스승이 병진년171) 봄에 장기(長鬐)에 가서 송시열에게 문안하였더니, 송시열이 말하기를, ‘그대는 초려(草廬)의 예설을 보았는가?’ 하였습니다. 초려는 고 참판 이유태의 호입니다. 미처 보지 못하였다고 대답하니, 송시열이 말하기를, ‘그 대의는 서자(庶子)와 적통(嫡統)을 말할 수 없다는 일절(一節)인데, 대략 저들이 말하는 것과 같다. 보기 바란다.’ 하고, 송주석(宋疇錫)을 시켜 찾아내게 하였으나 찾을 수 없은즉, 말하기를, ‘송상민(宋尙敏)이 초려의 조카에게서 얻었는데 크게 놀라서 와서 보였다.’ 하고, 돌아가는 길에 송상민을 만나서 찾아 얻어 보게 시키므로 돌아가는 길에 송상민에게서 찾아 얻어 보았으나 별로 변설(變說)이 있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신의 스승이 드디어 송시열에게 글로 회답하기를, ‘초장(草丈)의 예설은 대개 주로 명백히 하는 데 있을 뿐이고, 전의 소견을 바꾼 것이 아니다.’ 하였습니다.
그 뒤에 이유태가 신의 스승에게 글을 보내어 ‘갑인년172) 비암(碑庵)에 있을 때에 사우(士友)가 「조만간에 유생(儒生)이 상소하는 일이 있으면 어리둥절하여 큰 부끄러움이 되는 줄 모를 것이다.」 하므로, 몇 마디 글을 써서 보였다. 그리고 나서 생각하니, 산속에서는 서책(書冊)이 없으므로 일찍이 들은 것만을 외워서 말하였는데, 우옹(尤翁)과 차이가 있으면 다투는 단서가 생길까 염려되어 곧 그 말을 승인(僧人)에게 전위(專委)하여 만의(萬義)에 보냈더니, 우옹이 8, 90자를 더 넣어서 돌려보냈다. 무슨 까닭으로 특별히 사람을 보내 왕복할 적에는 다른 말이 없다가 이제야 비로소 말을 내는가?’ 하였는데, 말이 매우 많고 지극히 격렬하여 ‘이 때문에 나는 상심(常心)을 잃어 임종(臨終)이라도 맞게 될까 근심된다.……’고까지 하였습니다. 만의는 송시열이 있던 지명(地名)입니다. 이유태가 이어서 당초에 왕복한 본(本)을 보냈는데, 곧 송시열이 손수 고쳐 쓴 것이었으며, 이것은 송시열이 이른바 개설(改說)하였다는 것과 별본(別本)이 아니었습니다. 신의 스승이 한탄스러움을 금치 못하여 드디어 또 송시열에게 글을 써서 ‘송생(宋生)이 얻은 본은 갑인년 가을에 왕복한 본이다.……’ 하였더니, 송시열의 답서에도 ‘참으로 왕복한 일이 있다.’ 하였습니다. 그가 근거 없는 말을 변환(變幻)하여 내서 남을 망측한 죄로 떨어뜨린 형적이 드러나서 여러 사람의 눈에 엄폐하기 어려우니, 이것이 신의 스승이 그 본원(本源)을 의심하게 된 첫 째 일입니다.
신유년173) 송시열이 서울에서 고향으로 돌아갈 때에 이상(李翔)이 길에 나와 만났는데, 송시열이 말하기를, ‘그대는 어찌하여 고장 사람들과 함께 일을 같이 하는가?’ 하였습니다. 이때 이상은 목천 서원(木川書院)의 원장(院長)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상이 놀라서 ‘무슨 말이냐??고 물으니, 송시열이 말하기를, ‘지난해 노서(魯西)174) 를 서원에 향사(享祀)하려 할 때에 목천의 유생이 통문(通文)한 글에 「강도(江都)에서 포로가 되었던 사람은 향사하기에 합당하지 않다.」 하였다. 사습(士習)이 매우 통탄하니, 함께 일을 같이 하여서는 안된다.’ 하였습니다. 노서는 윤선거의 호입니다. 이상이 집에 돌아가 곧 서원(書院)의 유생(儒生)을 불러서 물었더니, 서원의 유생이 또한 ‘전에 그런 일이 없었다.’ 하므로, 이상이 말하기를, ‘대로(大老)175) 가 들은 것이 없으면 어찌하여 말하였겠는가?’ 하고는, 이어서 그 허실(虛實)을 살피게 하였더니 본디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송시열에게 질문한 자가 많았는데, 답한 것이 각각 달랐습니다. 이상의 질문에는 유수방(柳壽芳)에게서 나왔다 하고, 신의 스승에게 보낸 글에는 허황(許璜)에게 물으면 알 수 있을 것이라 하였는데, 유수방은 이상과 사이가 나빠서 면대할 수 없었고, 허황을 찾았으나 경향(京鄕)에 없는 사람이어서 끝까지 찾아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당초에 송시열이 이상에게 말한 것은 겉으로는 윤선거를 존경하는 뜻에서 나온 체하면서 스스로 맹랑한 나쁜 말을 퍼뜨려서 윤선거를 망신하게 하고 어지러이 밝히고 따질 적에 한바탕 치욕이 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에 옥천(沃川)의 통문(通文)176) 이 송시열의 문하(門下)에서 나왔는데, 윤선거를 헐뜯은 것이 목천 유생의 말보다 심하여 당초에 목천의 일을 앞장서서 말한 마음의 형적이 여기에서 더욱 환히 드러났습니다. 이것이 또 신의 스승이 그 본원(本源)을 의심하게 된 둘 째 일입니다. 그 큰 것이 이러하니, 작은 언행의 의심스러운 것이야 낱낱이 말하지 않아도 충분합니다. 이에 신의 스승이 드디어 그의 학술이 《대학(大學)》의 성의(誠意)·정심(正心)하는 학문과 다른 것이 있음을 의심하여 한 번 만나서 통렬(痛烈)하게 말하려 하였으나, 마침 그때에 송시열이 바야흐로 천극(荐棘)177) 중에 있었으므로 시의(時義)가 경솔히 발설하기에 마땅하지 않은 것을 헤하려 뜻을 품은 채 염려하면서도 수년 동안 말하지 않았습니다.
대저 경신년178) 이후 송시열이 다시 세도(世道)를 맡게 되어 언론(言論)·시조(施措)가 공론에 만족스럽지 않는 것이 많으므로 신의 스승이 더욱 우려와 한탄을 금치 못하다가 드디어 긴 글 한 통을 썼는데, 그 글에 ‘전후에 받은 하교에 번번이 세도 때문에 근심하셨는데, 그 귀추를 요약하면 아니게 아니라 언론에 중요함을 돌리기는 하나, 억양(抑揚)하고 여탈(與奪)하는 즈음에 마음에 캐물어 보면 의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대개 듣건대 주자(朱子)의 가르침에 「모름지기 먼저 자신이 좋아지고 당류(黨類)도 좋아져야 바야흐로 천하(天下)·국가(國家)가 좋아질 수 있는데, 이른바 좋아진다는 것은 모두 충실하고 모두 확대되고 또 구원(久遠)하는 것이니, 자신으로부터 추진하지 않으면 미봉하고 엄폐하는 것이 비록 한때에는 구차하게 영합(迎合)하였더라도 무릇 이른바 좋아진다는 것이 다 뒷날에는 좋아지지 않은 병통의 근원이 될 것이다.……」 하였다 합니다. 참으로 그렇다면, 세도의 책임을 어찌 쉽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먼저 자신을 좋아지게 하지 못하고 단지 겉으로만 미봉하고 엄폐하려고 생각하면 내가 처신하는 넓이에 따라 나를 남모르게 보면서 표준으로 삼아서 함께 좋지 않은 데로 돌아갈 것이니, 더구나 또 이 때문에 언론을 억양하고 여탈하여 몰아대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세도를 맡는다는 것이 세도의 폐해가 되기에 알맞을 뿐입니다. 증(拯)은 외람되게 문하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간직하고 나타내시는 것을 엿볼 수 있었는데, 혹 주자가 경계한 왕도(王道)·패도(霸道)를 병용하고 의(義)와 이(利)를 병행하는 것을 면하지 못하시는 듯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아닌게 아니라 대개 내 마음에 돌이켜 꾸짖어 내 소견이 참람되고 망령된다고 생각하였는데, 근년 이래로 마음속에서 의심하는 것이 날로 더욱 심하여져서 억지로 의심하지 않으려 하여도 끝내 의심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가만히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가 문하에서 배운 것이 회옹(晦翁)179) 의 글인데 무슨 까닭으로 회옹의 글과 서로 같지 않은 듯할까?」 하였습니다. 증이 이런 생각을 품고 잊지 못한 지 오래 되었는데, 지난번 문하에 재앙이 있었을 때에는 혹 말이 누설되어서 참소(讒訴)하는 도적의 구실이 될까 염려하여 잠자코 발설하지 않다가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지체되고 성의가 없었던 것은 늘 자책하는 바이나 또한 제 소견이 잘못된 것인지 염려되어 두고 생각하느라 절로 망설여졌으니, 용서하고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대저 이른바 왕도·패도를 병용하고 의와 이를 병행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우선 한두 가지 일로 밝히고 그 간직한 바는 뒤에 논하겠습니다. 가만히 살펴보건대 문하의 도학(道學)은 한결같이 회옹을 근본삼고 사업(事業)은 오로지 대의(大義)에 달려 있으므로 처음에는 본디 순수한 것을 지켜 한결같이 천리(天理)대로 하기로 스스로 기약하는데, 어찌 패도와 이(利)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회옹의 도(道)로 자임(自任)하고 대의(大義)의 이름으로 자수(自樹)하기 때문에 주장(主張)이 지나치지 않을 수 없고 자인(自引)이 고상하지 않을 수 없으나, 주장이 너무 지나치므로 이미 마음을 비워 더욱 받아들일 수 없고 자인이 너무 고상하므로 남들이 의견을 드리면서 어려움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이에 찬동하는 자는 친애받고 찬동하지 않는 자는 소외당하며, 바로잡는 자는 환난(患難)이 있고 순종하는 자는 재난이 없으니, 이것이 큰 명성은 세상을 누르나 참된 덕(德)은 속에서 병드는 까닭입니다. 이것은 처신하는 것에 나타납니다. 일찍이 분부를 받들건대, ‘퇴도(退陶)180) 의 학문은 한결같이 회옹을 본받았으나, 강의(剛毅)하고 준절(峻截)한 데는 끝내 부족한 듯하다.’ 하였습니다. 대개 이것을 퇴도의 병폐로 삼아서 자처(自處)하면 또한 강준(剛峻)에 있어 한쪽에만 치우침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능히 용맹한 것이 굳센 것인데 이제 남을 사납게 꾸짖는 것을 굳세다 하고, 천리(天理)가 인욕(人欲)을 이기는 것이 굳센 것인데 이제 남을 복종시키려 힘쓰는 것을 굳세다 한다면, 또한 참으로 굳센 것이 아닐 것입니다. 이러므로 수작하는 사이에 나타나는 것이 사욕(私欲)을 극복하고 몸소 실행하며 실지로 힘쓰는 데에는 혹 드물게 미치고, 비난하고 풍자하여 억양하고 여탈하는 뜻은 입으로 말하고 함부로 글로 쓰는 것이 몹시 심각하니, 남을 공격하고 남을 이기려는 말이 이야기 첫머리에 끊이지 않으며, 한마디 말의 차이와 한 가지 일의 차이에 한 패가 되어 따랐다 어그러졌다 하다가 평생의 정의(情義)마저 버려진 물건처럼 내버리기까지 한다면, 또한 은서(恩恕)가 적은 신불해(申不害)·한비자(韓非子)181) 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것은 사물을 대할 때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직 이렇기 때문에 문하에 다니는 자가 모두 뜻을 받들어 부회(附會)하는 것을 어진이를 존경하는 것이라 하고, 험악하고 각박하게 무함하고 헐뜯는 것을 악한 자를 미워하는 것이라 하며, 높은 자는 그 명예를 생각하고 낮은 자는 그 이익을 탐내어 한결같이 학문을 이야기하면서도 그 성정(性情)·신심(身心)에 일용(日用)하는 인륜(人倫)은 다 멸시합니다.
이러므로 조정에 있는 자는 뜻이 같고 다른 것으로 친하고 소원(疏遠)하며 좋아하며 미워하는 것으로 저편이 되고 이편이 되어 신구(新舊)가 서로 한 편으로 기울어지고 가는 곳마다 편을 가르니, 사대부(士大夫)의 풍습이 무너지는 것이 단지 사의(私意)가 횡류(橫流)하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초야에 있는 자는 서로 세력으로 선동하고 서로 위세로 협박하며 말을 주워 모아 아첨하고 남을 헐뜯어 입신 출세(立身出世)하니, 향당(鄕黨)의 풍속이 무너지는 것이 영천(穎川)의 구거(鉤距)182) 와 같습니다. 고을에서 물건을 보내 문안하는 것이 상례(常禮)에 지나치고 사림(士林)이 받드는 것이 상정(常情)에 지나치며, 사람들이 그 위세를 두려워하고 그 덕을 생각하지 않으니, 완연히 하나의 부귀(富貴)한 문정(門庭)을 이루고 선비의 기상은 다시 없습니다. 마침내 평생의 친구 중에 한 사람도 시종(始終)하여 보전되는 자가 없고 6, 70년 동안 형제처럼 화목하게 서로 도와 학문과 덕을 닦던 곳이 하루아침에 변하여 하찮은 일로 다투는 마당이 되어 장차 후세에 웃음거리가 됨을 면하지 못하게 되면 또한 한 집안에서 싸우는 변고와 다름 없을 것이니, 그 모습이 이러하므로 그 형상을 알 만합니다. 이것은 징험(徵驗)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문장·언론에 있어서도 한결같이 회옹(晦翁)을 근본으로 삼지 않는 것이 없으니, 회옹의 말이 없으면 그 설(說)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실상을 공평하게 살피면 혹 단지 그 명목만을 얻고 그 뜻을 반드시 서로 비슷하지 않은 것이 있고, 혹 먼저 자기 뜻을 세우고서 회옹의 말을 끌어대어 겹친 것이 있고, 심한 것은 거의 천자(天子)를 끼고 제후(諸侯)를 시키듯 하는 것도 있습니다. 이러니 사람들이 다 겉으로는 항거할 수 없지만 속으로는 복종하지 않습니다. 그 문장에 나타나는 것이 이러합니다. 평생에 수립(樹立)하는 것이 실로 대의(大義)를 앞장서서 밝히는 데에 있으나, 이른바 대의라는 것은 말로 밝힐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허락한다고 반드시 그렇게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효종(孝宗) 초기에 청대(請對)한 일들처럼 다 임금의 허락을 얻어 그것에 의거하여 출처(出處)의 명분으로 삼았으되 지극한 정성으로 해 나가려는 뜻이 특히 부족하였으므로, 처음에는 인심을 깨우치고 보고 듣는 사람을 용동(聳動)하는 보람이 있었으나 조금 오래 되어서는 실속 있게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래서 이른바 내정(內政)을 닦고 외이(外夷)를 물리치며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군사를 강하게 하여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기를 도모한 것은 결국 뛰어나게 볼 만한 실제적인 일은 없으며,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단지 녹(祿)과 지위(地位)만 융숭해지고 높아지며 명성이 널리 넘치는 데 그쳤습니다. 그 사공(事功)에 나타난 것이 또한 이러합니다. 이 겉에 나타난 것으로 헤아리면 간직한 한두 가지도 혹 추측하여 말할 수 있을 것인데, 하나는 기질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이고 하나는 학문을 정성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기질을 바꿀 수 없다고 하느냐 하면, 문하(門下)의 기질을 엿보면 강덕(剛德)이 많되 그 하는 일이 천리에 순수하지 못한 것이 위에서 논한 것과 같기 때문에 도리어 이 덕의 병폐가 되니, 참으로 이른바 자기를 극복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학문을 정성으로 하지 않는다고 하느냐 하면, 기질의 병폐가 저러하여도 바로잡을 수 없으면 참된 마음으로 학문할 수 없는 것을 곧 여기에서 점칠 수 있습니다.
대저 의(義)라는 것은 천리이고, 이(利)라는 것은 인욕(人欲)이며, 천리에 순수한 것이 왕도(王道)이고, 인욕에 잡된 것이 패도(霸道)이니, 간직한 바와 나타난 바가 위에 말한 것과 같아서 순수하게 한결같이 천리에서 나왔다고 할 수 없다면 어찌 병행하고 병용한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 문하의 총명하고 강의(剛毅)한 자질과 오로지 확실하고 상세히 살피는 학문으로서 평생에 수립한 것이 뛰어났는데, 그 한결같은 정성을 세우지 못하고 자기를 극복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끝에는 점차 얻고 잃는 보람이 이렇게 되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어찌 문하의 후생(後生)만이 의지할 데를 잃을 뿐이겠습니까? 아마도 문하의 총명으로 반성하면서 또한 반드시 학문이 처음 먹은 마음을 저버렸다는 한탄이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문하의 본디 굳센 기질과 공을 쌓은 학문으로 하루아침에 분발하여 꺼림칙한 것을 씻고 성품이 모난 것을 제거하여 정성이 세워지고 온갖 뜻이 다 곧아져서 충심으로부터 말미암아 겉으로 나타나고 작은 것으로부터 큰 것에 이른다면, 언제나 천리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고, 나아가 전통(前統)을 잇고 후서(後緖)를 전하여 스스로 기약한 초지(初志)에 보답하는 것이 참으로 문지도리가 도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글을 쓴 뒤에 집안 사람들이 모두 말리므로 신의 스승은 마음에 딱하게 여겼습니다. 교하(交河)로 성묘(省墓)하러 가는 길에 박세채(朴世采)와 감로사(甘露寺)에서 만나 여러 날 동안 상의하였더니, 박세채가 크게 놀라 ‘반드시 끝없는 풍랑을 일으킬 것이다.’ 하며 간절하게 말하여 힘껏 말리므로, 신의 스승이 드디어 따르지 않기로 정하였습니다. 그 뒤에 권이정(權以錠)이 신의 스승에게 말하기를, ‘외할아버지께서 요즈음 하시는 일은 사람들이 만족하여 승복하지 않는데, 자제·문생 중에는 친절히 경계하여 바로잡아 주기를 기대할 만한 사람이 없고, 아저씨께서도 끝내 한 마디 말씀이 없으시니, 이것이 무슨 도리입니까?’ 하였습니다. 권이정은 송시열의 외손이고, 신의 스승의 처조카입니다. 신의 스승이 대답하기를, ‘내가 비로소 긴 글을 써서 소견을 바치려 하였으나, 집안 사람과 벗들이 말려서 보내지 못하였다.’ 하고, 의와 이를 병행하고 왕도·패도를 병용한다는 것과 《대학(大學)》의 성의(誠意)·정심(正心)의 학문과 같지 않다는 따위 말로 수작한 일이 있습니다. 권이정이 신의 스승의 말을 외어 송시열에게 말하니, 송시열이 그것을 듣고 크게 노하였습니다. 그 손자 송순석(宋淳錫)은 박세채의 사위인데, 그 일을 박세채에게 전하러 곧 신의 스승에게 글을 보내어 그 곡절을 물었습니다. 신의 스승이 권이정과 수작한 말을 대략 답하였는데, 그 글을 드디어 송순석이 훔쳐 갔습니다. 이 이후로 최신(崔愼)의 무리가 상소한 것이 망극하였고 마침내는 송시열이 몸소 스스로 글을 올려 윤선거를 헐뜯고 배척하였으며, 윤선거가 더러운 오랑캐에게 절개를 굽히고 적신(賊臣) 윤휴(尹鑴)를 편들었다는 따위 말로 글을 지어 중외(中外)에 유포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런 지경에 이르러 스승과 제자의 의리를 다시 어찌 논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신의 스승의 본의는 경솔히 끊으려 하지 않았으나 저쪽이 대응한 것 때문에 끊으려 하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끊어진 것입니다.
신의 스승이 일찍이 박세채의 글에 답하기를, ‘선인(先人)은 불초에게 아버지이며 스승이 되시는데, 이제 아버지와 아들사이를 논하지 않고 사도(師道)로만 말하더라도 우옹(尤翁)183) 이 스승이 되는 것과는 은의(恩義)가 현격히 다르거니와, 두 스승의 도(道)가 같지 않다면 하나를 취하고 하나를 버리는 것은 형편이 본디부터 그러한 것이다.’ 하고, 또 고(故) 장령(掌令) 나양좌(羅良佐)에게 보낸 글에 ‘갑오년184) 에 날마다 소제 서당(蘇堤書堂)에서 종학(從學)하였는데, 이것이 배우러 다닌 처음이며, 수년 동안 왕래하여 《주자대전(朱子大全)》 20여 권에서 그쳤다. 결국에 가서 졸업하지는 못하였으나, 이때부터 스승에 대한 예로 섬겼고 정의(情義)도 절로 여러 어른들과 다른 것이 있었다. 그러나 부자와 같다고 한 것은 망언이다. 스승이 모두 같지는 않다는 말은 정자(程子)·장자(張子) 이래로 이미 있었는데, 어찌 이름이 스승·제자라 하여 곧 아버지·아들과 같을 수 있을 리가 있겠는가? 증(拯)이 회천(懷川)을 대우한 본말이 이러할 뿐이나, 예전 일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끌려 슬픈 생각이 나니, 실로 장래에 나를 구실삼는 수치가 있을 것이다.……’ 하였으니, 여기에서 보면 신의 스승의 처의(處義)를 알 수 있습니다.
《가례원류(家禮源流)》의 일로 말하면 이미 지엽적인 일이고 또 유규(柳奎)의 소와 유신(儒臣)의 말에 대략 아뢰어 드러낸 것이 있으므로 다시 의논할 필요가 없습니다만, 이제 유상기(兪相基)가 고집하여 혼자 엮었다는 증거로 삼는 것이 윤선거가 지은 유계의 행장(行狀)이고, 고집하여 보유(補遺)를 부탁하였다는 증거로 삼는 것은 유계의 무술년185) 과 갑진년186) 의 두 글인데, 그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행장에서 유계에게 돌린 까닭은 윤선거가 당초에 함께 엮었기 때문에 유계의 행장을 위하여 사양하여 유계에게 돌린 것이니, 이것은 스스로 차지하려 하지 않은 뜻입니다. 이른바 무술년의 글이라는 것은 유계가 신의 스승에게 답한 것인데, 그 글에 ‘《가례원류》가 시작되어 매우 기쁘다. 정신을 쏟고 힘을 써서 대편(大編)을 성취하고 내가 죽기전에 볼 수 있게 하기를 바란다.……’ 하였고, 신의 스승이 유상기에세 보낸 글에 ‘그때 단지 선인이 본책(本冊)에 첨보(添補)할 것이 많다 하므로 불초가 글씨를 베껴쓰는 일을 맡았기 때문에 여쭈었는데, 선생이 힘써서 일을 마친 이였기 때문이다.’ 하였으니, 이것이 그 실상입니다.
이른바 갑진년의 글이라는 것은 유계가 임종시에 윤선거에게 글로 영결하면서 끝에 신의 스승에게 언급한 것인데, 그 글에 ‘인경(仁卿)이 종전에는 기력이 약하여 두루 미칠 수 없었으나, 부탁한 까닭은 죽은 뒤에라도 반드시 들을 것이라고 생각해서이다.……’ 하였습니다. 인경은 신의 스승의 초자(初字)입니다. 신의 스승이 유상기에게 보낸 글에 이른바 ‘존선공(尊先公) 형제와 서로 돕고 정성스레 선도(善導)를 권면한 가르침처럼 유독 임종시에 부탁한 일을 위하여 반드시 《가례원류》에 돌리려 하지 않았겠는가?’ 하였으니, 이것이 그 실상입니다. 글을 써서 유상기의 사위 편에 부쳤는데, 유상기가 남에게 글을 보내어 무함하여 욕한 것이 윤선거에게까지 미쳤으니, 의리가 당연히 끊어야 하겠기에 도로 찾고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 글이 아직도 있으니,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너희들이 신변(伸辨)하는 것은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으며 선정(先正)이 처의(處義)한 본말(本末)은 더욱 상세히 알게 되었는데, 종래 분부한 대의(大義)에 과연 조금도 어그러지지 않는다."
하였다.
3월 4일 을미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는데, 도제조(都提調) 서종태(徐宗泰)가 말하기를,
"어제 수만 마디의 유소(儒疏)가 한꺼번에 아울러 들어와서 성후(聖候)를 더치게 하였으니, 청컨대 이 뒤로는 정원(政院)을 시켜 대신(大臣)의 소차(疏箚)일지라도 혹 지리(支離)하고 말이 많으면 혹은 받아서 두거나 혹은 여쭙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일전에 대사성(大司成) 민진원(閔鎭遠)의 소(疏)는 오로지 윤봉오(尹鳳五)를 신구(伸救)하려는 데에서 나왔고 말이 틀리고 어그러진 것이 많으므로 매우 온당하지 못하니, 체차(遞差)하라."
하였다.
오명준(吳命峻)을 도승지(都承旨)로, 이정제(李廷濟)를 사간(司諫)으로, 박희진(朴熙晉)을 헌납(獻納)으로, 황이장(黃爾章)을 장령(掌令)으로, 송진명(宋眞明)을 정언(正言)으로, 정식(鄭栻)을 응교(應敎)로 삼았다. 이때 정관(政官)이 인퇴(引退)하였기 때문에 오래 개정(開政)하지 못하였고 이조 참의(吏曹參議) 이집(李㙫)도 무릅쓰기 어려운 혐의가 있었는데, 갑작스레 출사(出仕)하여 사당(私黨)을 등용하더니, 삼사(三司)에 벌여 두고서 맨 먼저 정론(正論)을 지키는 대사간(大司諫) 이만견(李晩堅)·지평(持平) 김취로(金取魯)를 탄핵하여 내쫓고 하루도 공격하지 않는 날이 없으므로, 사류(士流)가 모두 비었다.
3월 5일 병신
태학(太學)의 유생(儒生) 김순행(金純行) 등이 엄한 비답(批答)을 받고 감히 식당(食堂)에 들어가지 못하니, 임금이 본관(本館)의 당상(堂上)을 시켜 들어가도록 권하게 하였는데, 김순행 등이 생각하는 바를 써서 바치기를,
"사람의 대륜(大倫)으로 임금·스승·아버지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 윤증(尹拯)은 한 몸으로 전에는 송시열(宋時烈)을 저버리고 뒤에는 유계(兪棨)를 저버렸으니, 사도(師道)가 아주 없어진 것은 이미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비록 임금과 아버지를 섬기는 것으로 말하더라도 그 아비는 강도(江都)에서 죽지 않은 것을 자폐(自廢)하는 단서(端緖)로 삼아 번번이 사죄(死罪)라 칭하여 벼슬하지 않고 재취하지 않았으니, 일세(一世)에서 추대하는 것이 실로 이 때문인데, 윤증은 죽지 않은 것을 지극한 도리로 여겨 의리에 죽은 사람을 배척하기까지 하였으므로, 그 아비가 평소에 자정(自靖)하던 것이 죄다 헛된 겉치레로 돌아가고 숨은 허물까지 남김없이 세상에 드러나게 하였으니, 이것을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기사년187) 망극한 변을 당하여 신하라면 당연히 눈물을 머금고 머리가 부서지도록 간쟁하여야 할 것인데, 선비라 이름하며 몸이 언책(言責)이 있는 지위에 있으면서도 일찍이 한 마디 말이 없었고 명의(名義)가 중대한 일에 언급하여서는 다만 사감(私感)을 끌어대어 가엾은 뜻을 보였으니, 이것이 임금에게 충성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윤증의 처의(處義)가 터무니 없는 것은 오직 스승을 저버린 한 가지만이 아니라 임금·스승·아버지에게서 생육된다는 의리로 헤아려도 다 볼 만한 것이 없는데, 이제 전하께서는 오히려 선입견을 주장하여 처분이 날로 더욱 전도되어 여지 없이 선정(先正)을 배척하고 유현(儒賢)을 죄주기까지 하시니, 사문(斯文)은 망하고 오도(吾道)는 끊어졌습니다. 신(臣)들은 곧바로 옷자락을 찢고 관(冠)을 부수고 미친 듯이 부르짖으며 통곡하고 싶으나 그럴 수 없습니다."
하고, 드디어 성묘(聖廟)에 절하여 하직하고서 재사(齋舍)를 비우고 나가니, 임금이 노하여 하교(下敎)하기를,
"김순행 등이 선정을 헐뜯는 것이 모두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현관(賢關)188) 의 사습(士習)으로서 어찌 이럴 수 있겠는가? 매우 놀랍고 한탄스럽다. 상소에 참여하지 않은 유생을 불러들이라."
하였다.
3월 6일 정유
헌부(憲府)에서 탄핵하기를,
"전 부제학(副提學) 정호(鄭澔)는 본디 편벽하고 괴팍한 성질로서 멋대로 그 이리처럼 비뚤어진 기질을 부리다가 근년에 귀양간 뒤로 더욱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권상하(權尙夏)와 서로 화창(和唱)하며 《가례원류(家禮源流)》의 발문(跋文)을 빙자하여 선정(先正)을 무함하고 욕하기를 그지없이 하면서 해칠 계책을 부렸습니다. 이미 그 글을 없애고 특명으로 그 벼슬을 파면한 것은 실로 성덕(聖德)이 빛나는 것이니, 이같은 선정을 헐뜯는 무리는 가벼운 벌로 징계할 수 없는 것이니, 청컨대 멀리 귀양보내소서. 전 정언(正言) 조상건(趙尙健)은 괴귀(怪鬼) 같은 무리로서 대성(臺省)189) 의 벼슬에 근거하여 한 소(疏)를 바쳐서 선정을 무함하고 욕하였는데, 말을 쓴 것이 아주 도리에 어긋나서 《가례원류》의 서발(序跋)보다 더하였으며, 또 이른바 아버지와 스승에 경중이 있다면 반드시 임금과 아버지 사이에서도 경중을 가려야 할 것이라는 따위 말은 더욱이 매우 흉참(凶慘)하므로 삭출(削黜)190) 하는 벌로는 엄하게 징계할 수 없으니, 청컨대 멀리 귀양보내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이날 장령(掌令) 황이장(黃爾章)이 예대(詣臺)하여 두 계(啓)를 발의하였는데, 사람들이 황이장은 성은 황이고 마음은 검고 수염은 희고 옷은 붉되 논의는 퍼렇다. 【우리말로 준열한 것을 퍼렇다고 한다.】 하여 ‘오색 대간(五色臺諫)’이라 하였다.
3월 7일 무술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평안도 강동현(江東縣)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고, 정호(鄭澔)는 관작(官爵)을 삭탈하고 문밖으로 내치라고 명하였다.
유봉휘(柳鳳輝)를 승지(承旨)로, 조익명(趙翼命)을 지평(持平)으로, 이세최(李世最)를 대사간(大司諫)으로, 권첨(權詹)을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3월 10일 신축
간원(諫院)에서 탄핵하기를,
"전 대사성(大司成) 민진원(閔鎭遠)은 자신이 폐부(肺腑)191) 라서 처지가 절로 다른데, 조정의 논의를 주장하며 마음대로 당(黨)을 이뤄 공격하였습니다. 저번에 윤봉오(尹鳳五) 등이 생각하는 바를 써서 바쳐 선정(先正)을 무함하고 욕하였으나, 정거(停擧)하여 가볍게 벌한 것은 실로 너그러운 은전인데, 민진원은 서둘러 상소하여 힘껏 해명하며 진가(眞假)의 논의를 권장하고 추켜세워 현혹시키는 바탕을 만들려 하였고 조금도 거리낌없이 성의(聖意)를 거슬러 억측하였으니, 청컨대 관작(官爵)을 삭탈하여 문밖으로 내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조태채(趙泰采)가 면직되었다. 조태채가, 이진유(李眞儒)가 상소하여 배척하였기 때문에 성밖으로 물러 나가서 여러번 상소하여 해직을 청하고 또 병을 끌어대어 정고(呈告)하니, 임금이 체직하도록 윤허하였다.
3월 11일 임인
윤덕준(尹德駿)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김시혁(金始㷜)을 정언(正言)으로, 유봉휘(柳鳳輝)를 부제학(副提學)으로, 이세근(李世瑾)을 교리(校理)로, 이진유(李眞儒)를 수찬(修撰)으로, 김치룡(金致龍)을 승지(承旨)로, 홍중하(洪重夏)를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삼았다.
3월 16일 정미
좌의정(左議政) 김창집(金昌集)이 면직되었다. 김창집이 성을 나가서 잇따라 글을 올려 면직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관례에 따라 비답(批答)한 것 밖에는 끝내 위유(慰諭)하는 말이 없었는데, 정고(呈告)한 지 겨우 열 한 번 만에 곧 체직하도록 윤허하니, 사류(士類)가 저윽이 한탄하였다.
부제학(副提學) 유봉휘(柳鳳輝)·응교(應敎) 정식(鄭栻)이 상차(上箚)하였다.
대략 이르기를,
"문경공(文敬公) 윤선거(尹宣擧)는 고(故) 상신(相臣) 송시열(宋時烈)과 처음에 도의로 사귀는 사이였으므로 윤선거가 죽게 되자 그 아들 선정신(先正臣) 윤증(尹拯)이 송시열에게 묘문(墓文)을 청하면서 윤선거의 의서(擬書)192) 를 보였는데, 그 글이 송시열의 병통을 절실하게 맞혔습니다. 송시열이 글을 본 뒤에 그 묘문을 지었는데, 자기 뜻으로 손을 대거나 칭찬하지 않고 다만 행장(行狀)을 지은 사람에게 의탁하여 비평하고 깎아내리는 뜻이 뚜렸하였습니다. 윤증이 비록 왕복한 일이 없지는 않으나 다시 고쳐주기를 청할 생각은 하지 않았고, 도리어 평소의 언행 사이에서 본원(本源)의 심술(心術)에 의심스러운 것이 있음을 엿보았으나 정의(情意)가 이미 막혀서 경계하여 도울 길이 없었습니다. 다만 제(齊)나라 사람의 처첩(妻妾)이 중정(中庭)에서 헐뜯었다는 뜻193) 으로 뜻을 같이하는 선비와 수작한 일이 약간 있었는데, 송시열은 묘문을 고쳐 주고 고쳐 주지 않는 것은 우선 내버려 두고 혹 유언(流言)을 핑계삼아 무함하여 욕하기도 하고 혹 스스로 글을 보내어 헐뜯고 배척하기도 하여 효자의 마음을 몹시 상하게 하였으니, 이것은 아버지와 스승은 경중이 있다는 말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대저 사람은 임금·스승·아버지에게서 생육되므로 한결같이 섬긴다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다 알되, 임금을 아버지에 비하면 본디 차이가 있는데, 이러한 의리가 당초에 어찌 어두워서 알기 어렵겠습니까? 다만 행 대사헌(行大司憲) 권상하(權尙夏)는 젊어서 과거 공부에 종사하였으나 성취하지 못하다가 늦게야 비로소 송시열의 문하에 출입하고 그 의지하는 곳을 빙자하여 외람되게도 예우(禮遇)받는 줄에 끼었으므로, 한결같이 섬긴다는 의리를 중시하여 반드시 선정(先正)에게 제 마음대로 한 것은 그 유래가 오래 되었는데, 마침 유상기(柳相基)가 반복(反覆)하는 기회를 만나자 《가례원류(家禮源流)》를 마치 기화(奇貨)를 얻은 듯이 여기고는 형칠(邢七)의 낭패라는 말을 후서(後序)의 글에 끼워서 논하여 성의(聖意)를 시험하려 하였으나 그 간사한 정상이 깊으신 통촉 아래에서 피하지 못하므로 죄벌(罪罰)이 먼저 발문을 지은 사람에게 미치게 되니, 드디어 인책한다는 핑계로 한 소(疏)를 바쳐 위로는 성총(聖聰)을 속이고 아래로는 선정을 무함하였습니다. 이제 전하께서 이미 그 말을 배척하고 또 그 글을 불사르셨고 정호(鄭澔)·조상건(趙尙健) 등 부화 뇌동(附和雷同)하여 선정을 헐뜯은 무리도 다 차례로 논죄(論罪)하였으나, 유독 권상하에게만은 오히려 허례(虛禮)로 매어 두시어 처분이 구차하므로 경중이 거꾸로 놓이는 것을 면하지 못하니, 청컨대 권상하를 빨리 파직(罷職)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교리(校理) 홍계적(洪啓迪)이 상소(上疏)하여 근일의 처분이 마땅하지 않음을 극진히 말하였다. 그 소에 대략 이르기를,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의 도학(道學)·기절(氣節)은 실로 우리 동방의 도통(道統)이 유지(維持)되도록 해 주는 것이고, 전하께서 국가에는 기강이 있게 하고 사림(士林)에는 삼가 본보기로 삼도록 평소에 의지하시는 것이니, 전하의 호오(好惡)가 올바름을 사람들이 누구인들 우러르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바가 또 선정과 배치(背馳)되던 사람에게 있으니, 초야의 선비들이 본디 이미 깊이 근심하였습니다. 대개 사도(斯道)에는 두 갈래의 길이 없고 공론에는 두 가지 옳은 것이 없으므로 전하께서 비록 양쪽을 좋아하시더라도 이세(理勢)는 끝내 양쪽을 용납할 수 없으니, 이에 부억(扶抑)이 점점 치우치고 소장(消長)이 상승(相乘)하여 진퇴(進退)하고 여탈(與奪)할 적에 번번이 사욕(私慾)이 이기고 천리(天理)가 없어지는 것을 염려하였는데, 오늘날의 처분에 이르러서는 호오(好惡)·시비(是非)가 다시는 조금이라도 공정한 데에 가까운 것이 없어졌으니, 아! 이것이 무슨 거조(擧措) 입니까? 전하께서 유현(儒賢)에 대하여 일찍이 사랑하고 예우하신 것이 과연 어떠하였습니까? 지난날에는 그 스승을 대우하는 예(禮)라 하여 그 사람을 불러 위로하더니 이제는 그 말이 그 스승을 위하여 변명하는 것이라 하여 그 글을 불사르셨으니, 처분이 전도되는 것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대간(臺諫)이 사주(使嗾)를 받았다는 분부도 대간을 대우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전하께서 저번에 어떤 놈이냐고 분부하신 데에 대하여 이미 그 실언을 뉘우치셨는데, 한 가지 말의 잘못을 겨우 뉘우치시고서 또 한 가지 말의 잘못이 있으시니, 어찌 두 번 잘못하지 않는다는 성인의 가르침에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헌납(獻納) 신정하(申靖夏)의 소(疏)에 대한 비답(批答)에 있어서는 사기(辭氣)가 박절하여 대덕(大德)을 매우 손상하였고, 신정하의 사람됨을 또한 아부하는 자라 하셨으니, 이번 분부가 또한 신하를 아시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무릇 이러한 언동은 전하께서 한쪽에 치우친 가운데 나온 것이 아니더라도, 대저 대신(大臣)의 차자(箚子)와 같이 곧바로 근심하는 정성은 참으로 그 선지(先志)를 이어받은 것인데, 미안한 비답이 도리어 이미 지난 일을 허물하는 데에 있었으니, 그 효리(孝理)의 누(累)가 되는 것이 또한 어찌 한때의 실언일 뿐이겠습니까? 사문(斯文)이 불행하여 사화(士禍)가 장차 임박했는데도 현관(賢關)의 선비가 오히려 능히 생각하는 바를 죄다 드러내어 소란스러운 가운데에서 정론(正論)을 지켰으므로 그 말이 이미 엄하고 그 기개가 숭상할 만한데, 참언(讒言)이 한 번 들어가자 특별히 정거(停擧)하라는 명이 문득 내려졌으니, 민진원(閔鎭遠)은 벼슬이 사유(師儒)의 직임에 있으므로 한 소를 올려 쟁론(爭論)하는 것이 본디 그 책무이거늘, 간신(諫臣)이 서둘러 공격하여 제거한 것은 과연 무슨 뜻입니까? 대개 그 계(啓)의 말이 바로 그 소에서 규간(規諫)한 말인데 죄명(罪名)을 구성(構成)하였으니, 이것은 참으로 잗단 꼴입니다."
하고, 끝에 말하기를,
"신(臣)이 소를 써서 올리려 할 즈음에 옥당(玉堂)의 차자를 얻어 보니, 대사헌 권상하를 파직하기를 청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이 이에 절로 심담(心膽)이 다 써늘하여졌습니다. 아! 차자의 개요는 모두 흉악한 자의 손발이 되어 움직이는 데에서 나왔는데, 그 기세를 보건대 바로 하나같이 기사년194) 에 어진이를 죽인 무리였습니다. 생각건대 저 명의(名義)를 없애고 화심(禍心)을 감춘 무리가 분을 풀고 독을 내뿜어 사류의 화를 빚어낸 것이 본디 일조일석의 일은 아니나 백료(伯寮)의 참소195) 는 또한 감히 함부로 행하여질 수 없으니, 생각건대 사문은 하늘이 없애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 천도(天道)가 불운(不運)한 때를 당하여 놀라운 기회가 갑자기 나타나서 관리의 임명을 천거할 즈음에 삼사(三司)에 의망(擬望)한 자가 황이장(黃爾章) 같은 자가 아니면 번번이 오래 침체되어 유감을 품은 사람이고, 나라를 욕되게 하고 의리를 잃은 사람이 아니면 번번이 명의(名義)를 원수처럼 여기는 무리입니다. 서로 화응(和應)하여 사설(邪說)을 선동하고 견책하여 파직하라는 청이 끝내 유문(儒門)에 미쳤으니, 분서 갱유(焚書坑儒)196) 의 참화가 장차 눈앞에 있게 될 것이고 나라의 위망(危亡)은 조짐이 보일 뿐만이 아닙니다. 아! 통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엄하게 비답하여 매우 꾸짖었다.
이조 참의(吏曹參議) 이집(李㙫)이 교리(校理) 홍계적(洪啓迪)에게 배척당한 것으로 인해 상소(上疏)하여 사직하니, 임금이 ‘유신(儒臣)의 소어(疏語)는 매우 공평하지 않은데 어찌하여 반드시 혐의하여야 하겠느냐’고 답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집의 아버지인 고(故) 판윤(判尹) 이광하(李光夏)는 애초에 권상하·민진하(閔鎭夏)와 교의(交誼)가 매우 돈독하고 반상(泮庠)197) 에 함께 유학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낙중 삼하(洛中三夏)198) ’라 하였다. 이집이 이로 말미암아 권상하를 섬기는 것도 지극하여 그 아버지의 묘문(墓文)을 청하기까지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전수(銓首)로 있으면서 유봉휘(柳鳳輝) 등을 등용하여 그 사사로운 당벌(黨伐)을 구제하므로 공론이 준열하게 공박하니,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였는데, 말이 또한 교활하게 책임을 회피하므로, 사람들이 다 놀라와 한탄하였다."
【태백산사고본】 65책 57권 29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580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 역사-사학(史學)
[註 197] 반상(泮庠) : 성균관(成均館).[註 198] 낙중 삼하(洛中三夏) : 서울 안의 세 하(夏)란 뜻.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집의 아버지인 고(故) 판윤(判尹) 이광하(李光夏)는 애초에 권상하·민진하(閔鎭夏)와 교의(交誼)가 매우 돈독하고 반상(泮庠)197) 에 함께 유학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낙중 삼하(洛中三夏)198) ’라 하였다. 이집이 이로 말미암아 권상하를 섬기는 것도 지극하여 그 아버지의 묘문(墓文)을 청하기까지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전수(銓首)로 있으면서 유봉휘(柳鳳輝) 등을 등용하여 그 사사로운 당벌(黨伐)을 구제하므로 공론이 준열하게 공박하니,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였는데, 말이 또한 교활하게 책임을 회피하므로, 사람들이 다 놀라와 한탄하였다."
3월 18일 기유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말하기를,
"전 헌납(獻納) 신정하(申靖夏)는 고(故) 상신(相臣) 이경석(李景奭)의 외손으로서 전에 그 자손들과 함께 변명하는 상소에 참여하였는데, 저번에 《가례원류(家禮源流)》의 일로 한 소(疏)를 바친 것은 그 존앙(尊仰)하는 정성이 도리어 전에 원수로 여기던 곳에 있으므로, 마침내 스스로 도리에 어긋나는 지경에 빠졌으니, 청컨대 관작(官爵)을 삭탈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간원(諫院)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논하기를,
"전 교리(校理) 홍계적(洪啓迪)이 한 소(疏)를 바쳤는데, 장황한 말이 위로는 천청(天聽)을 어지럽히고 아래로는 선정(先正)을 헐뜯었습니다. 어진이를 무함하는 무리가 힘을 내어 신구(伸救)하고 바른 것을 지키는 논의를 마음대로 배격하여 결국에 귀착하는 곳은 모두 전조(銓曹)를 쳐 흔들고 한 번 찔러서 모두 맞혀서 흠이 없는 사람이 없게 하려는 데에 있으니, 청컨대 파직하여 서용(敍用)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단지 말단의 일만을 따랐다.
3월 19일 경술
삼일 반제(三日泮製)199) 를 물려서 설행(設行)하여 으뜸을 차지한 유학(幼學) 박필기(朴弼夔)에게 급제(及第)를 내렸다.
이동암(李東馣)을 승지(承旨)로, 박필명(朴弼明)을 대사헌(大司憲)으로, 김창집(金昌集)을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로 삼았다.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고, 신정하(申靖夏)는 파직하여 서용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신정하(申靖夏)는 고(故) 상신(相臣) 신완(申琓)의 아들인데, 젊은 나이에 청요직(淸要職)에 올랐으며 평소에 뜻이 고요하고 소박하며 문장에 능하여 명망이 자자했는데, 한 번의 상소가 임금의 뜻을 거슬러 파직당하고 배척당하여 얼마 안되어 죽으니, 한때의 명류(名流)가 모두 매우 아까와하였다.
3월 20일 신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여(李畬)가 최석문(崔錫文) 등의 소(疏)에서 배척당하였기 때문에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기를,
"이제 이른바 그 신유년200) 의 의서(擬書)201) 라는 것을 보건대, 그 말이 근사(近似)한지 여부는 논할 것 없이, 속박하고 조절(操切)202) 하며 심문(深文)203) 하여 교묘하게 비방한 것이 단련(鍛鍊)하는 옥리(獄吏)보다도 심하므로 오직 빠져들지 않을까 두려워하였으니, 이것이 과연 스승과 제자 사이의 학문을 논하는 마음입니까? 선정(先正)의 일생의 언행은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전파되어 온 나라가 함께 알기에 본디 윤증(尹拯) 한 사람의 말이 근거 없이 요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백세(百世) 뒤에나 시비가 정하여질 수 있지 지금 자꾸 여러 말로 떠들 것이 못되는데, 윤증의 심적(心迹)으로 말하면 참으로 엄폐하려 할수록 도리어 드러나는 것이 있습니다. 윤증이 어버이를 현양(顯揚)하려는 마음이 너무 크다보니 사의(私意)가 가려서 미혹하였다면 오히려 핑계할 만한 것이 있겠으나, 이제 그 유감(遺憾)까지 숨기려고 하여 그 마음은 오로지 스승을 위하여 규간(規諫)하려는 데에 있었다고 스스로 말한 것은 그가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는 것이 심한 것을 더욱 보여줍니다. 어찌 각별한 죄과가 있다고 평생을 끊고도 오히려 다시 스승과 제자 사이라고 마음 먹는 것이겠습니까? 윤증이 선정을 따른 것이 아주 오래 되었고 최석문 등도 윤증이 갈문(碣文)의 일 이전에는 그 행동이 의심스러운 것을 일찍이 보인 적이 없다고 하며 실로 태산(泰山)·북두(北斗)처럼 우러러보는 것이 있었다고 일컫기까지 하였으니, 그 마음이 열복(悅服)한 것을 알 수 있는데, 갑자기 그 뒤에 의견이 아주 달라져서 판이하게 두 사람이 되었으니, 이것이 무슨 까닭입니까? 그것이 유감(遺憾)에서 나타났다는 것을 어찌 엄폐할 수 있겠습니까? 어제 또 삼가 보건대 옥당(玉堂)의 차자(箚子)에 종전에 예우(禮遇)하던 유신(儒臣)을 파직하라니, 관직의 여탈(與奪)이 도리어 어찌 임하(林下)204) 의 사람에게 영욕(榮辱)이 되겠습니까마는, 그것이 성조(聖朝)의 과실이 되는 것으로 말하면 전에는 거의 듣지 못하던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이번 일의 시비는 본디 가리기 어려운 것이 아니어서 굳게 정한 뜻은 끝내 흔들어 빼앗을 수 없다. 아! 아버지와 스승은 경중이 있다는 분부는 명백할 뿐만이 아니므로 그 이후로 감히 다시 논의를 제기하지 못하더니, 한 번 서발(序跋)이 나오고부터는 떼 지어 일어나 화응(和應)하여 반드시 시비를 어지럽히고야 말려 하니, 이것이 과연 공정한 마음에서 나온 것인가?"
하였다.
3월 21일 임자
하절사(賀節使)의 군관(軍官) 장문익(張文翼)이 명나라 신종 황제(神宗皇帝)의 어필 인본(御筆印本)을 바치니,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전에 여러 번 구하였으나 얻지 못하였는데, 마침내 이 지극한 보배를 얻었으니, 기쁜 느낌이 얽혀 서린다."
하고, 특별히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홍우행(洪禹行)을 지평(持平)으로, 이의만(李宜晩)을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3월 22일 계축
각궁(角宮)205) ·전죽(箭竹)206) ·치우(雉羽)207) 따위 물건을 내삼청(內三廳)의 무신(武臣)에게 내리고, 임금이 선전관(宣傳官) 등에게 하교(下敎)하기를,
"내가 평소에 무사(武士)를 사랑하여 돌보므로 봄·가을에 반드시 친림(親臨)하여 시재(試才)하며 격려하고 권장하였는데, 한 가지 병이 지리하게 오래 끌어 여러 해 동안 거행하지 못하였으니, 평일의 내 뜻에 특히 어그러진다. 이제 활과 전죽(箭竹) 따위 물건을 내리니, 무예를 포기하지 말라. 앞으로 조금 낫게 되면 불러 보고 시재하겠다."
하니, 무사들이 감격하여 흐느끼지 않는 이가 없었다.
3월 23일 갑인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여(李畬)가 정적(情迹)이 불안하여 도문(都門) 밖으로 나갔는데, 임금이 하유(下諭)하기를,
"일전에 비답(批答)하여 이른 것은 내 뜻을 명시한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이제 듣건대 경(卿)이 성밖으로 나갔다 하니, 참으로 처음에 생각이 미친 바가 아니므로 절로 놀라와 좌우의 손을 잃은 듯하다. 저번에 두 대신이 근교로 나간 것도 본디 이미 너무 지나쳐서 장차 차례로 소환하려 했는데, 경이 또 어찌하여 거취를 스스로 가벼이 하는가? 모름지기 지극한 뜻을 본받아 안심하고 들어오라."
하였다.
3월 25일 병진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말하기를,
"임진년208) 과옥(科獄)의 사단(事端)은 두 가지가 있는데, 첫 째는 궐문(闕門)의 개폐(開閉)에 관한 일이고, 둘째는 거자(擧子)의 집을 두루 찾아다닌 일입니다. 대저 궐문은 높고 커서 거리를 굽어보므로 그 여닫는 것을 어찌 보아 알기 어렵겠습니까마는, 증거로 삼은 사람이 혹 변사(變辭)하여 의심스러운데도 덮어두고 핵실(覈實)하지 않았으며, 문을 지키던 군사가 혹 사실에 의거한 것이 자명(自明)한데도 위협하여 승복받았습니다. 두루 찾아다닌 일로 말하면 이미 해조(該曹)에서 두 번 살펴서 아뢰었으나 어그러진 단서가 일치하지 않아 실상(實狀)에 변환(變幻)이 많으니 비록 저번에 대신 【곧 김우항(金宇杭)이다.】 의 차사(箚辭)만 보더라도 공론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있는데, 하물며 전에 명부(命婦)209) 의 줄에 있던 자가 대궐 아래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슬피 부르짖었으니, 지극히 원통한 일이 없으면 반드시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돈(李墩)의 아내 안씨(安氏)가 당직 상언(當直上言)한 열 두 조목은 다시 살펴서 결정(決正)하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금오(金吾)210) ·추조(秋曹)211) 에 명하여 다시 궐문의 개폐와 거자를 두로 찾아다닌 두 가지 일을 곧 명백히 살펴서 처치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부응교(副應敎) 신사철(申思喆)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진유(李眞儒)의 소(疏)는 시기를 보면서 속셈으로 헤아린 것이 본디 오래 되었거니와, 겉으로는 《가례원류(家禮源流)》의 시비를 핑계삼으면서 속으로는 무함하여 죄에 빠뜨릴 음계(陰計)를 부려 역노(蜮弩)212) 의 독(毒)이 먼저 보호(保護)213) 하는 곳에 미쳤습니다. 대저 삼사(三司)의 소를 정원(政院)에 머물러 두기를 청한 것은 실로 지성(至誠)으로 충애(忠愛)하기에 극진하여 마지않는 뜻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비록 근일 약원(藥院)214) 에서 청한 것을 보더라도 대신(大臣)의 차자(箚子)까지 머무르게 하기를 청하였으니, 그 전후에 여쭌 것이 다 깊이 근심하고 지나치게 염려한 데에서 나온 것인데, 이진유가 이것으로 헐뜯고 죄를 꾸민 것이 교묘하고 참혹한데다가, 그가 정지(政地)를 논한 것으로 말하면 억지로 근거 없이 모욕하여 모두 비우고 말았는데, 근일 정조(政曹)에서 취사(取舍)한 것이 과연 인심을 만족시킬 수 있겠습니까? 옥서(玉署)215) 의 장(長)이 어떠한 지체와 명망의 자리인데, 반드시 명의(名義)에 죄를 얻고 화(禍)를 좋아하고 당(黨)을 위하여 죽을 힘을 다하는 유봉휘(柳鳳輝) 같은 자와 나라를 욕되게 하고 의리를 잃고 재물을 탐내어 만족할 줄 모르는 조태억(趙泰億) 같은 자를 혼자서 천거하여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서둘러 불러들이되 미치치 못할까 염려하듯이 합니까? 대개 그 뜻은 유봉휘 같은 강퍅한 성질이 아니면 어진이를 제거하는 논의를 담당할 수 없고, 또 조태억 같이 사람을 무함하는 수단이 아니면 화(禍)를 떠넘길 계책을 급격하게 만들 수 없어서 그랬을 것입니다. 당여(黨與)를 등용하여 그 손을 빌어 배격하니, 공(功)을 바라는 자로 하여금 용맹을 부려서 먼저 오르게 하고 유감을 품은 자로 하여금 어금니를 갈면서 잇따라 일어나게 하여 오늘 한 계(啓)를 내고 내일 한 계를 내어 거의 하루도 빠짐 없이 좌우에서 때리고 찔러 어진이를 무함하는 차자가 나오게까지 하였으니, 세도(世道)의 변괴(變怪)가 지극합니다.
대저 유현(儒賢)의 도학(道學)은 성명(聖明)이 존상(尊尙)하는 바이고 사림(士林)이 숭앙(崇仰)하는 바인데, 시기하는 무리가 성의(聖意)를 엿보아 헤아려서는 기회를 타서 분을 부려 말을 극진히 하여 근거 없이 헐뜯고 맨 끝에 맺는 말에는 더욱이 화심(禍心)을 감추고 시험해 보는 꼴이 있어 곧바로 살해하고야 말려고 하였으나, 전하께서는 조금도 금지하시지 않을 뿐더러 도리어 권장하셨으니, 조야(朝野)가 놀라 두려워하고 기상(氣象)이 비참합니다. 아! 그래도 차마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홍계적(洪啓迪)이 상소하여 논척(論斥)한 것은 말이 엄하고 뜻이 바른데, 꺾어버리는 비답(批答)이 내려지자 탄핵하는 논계(論啓)가 뒤따라 나왔습니다. 그 형 【송진명(宋眞明)의 형 송성명(宋成明)이다.】 이 남을 무함한 죄목으로 홍계적에게 논박받아 탄핵당한 글의 먹이 미처 마르지도 않았고 죄명이 아직 있는데, 그 아우인 자가 감히 버젓이 보복하기를 이처럼 빨리 하니, 방자하여 꺼리는 것이 없다 하겠습니다. 신정하(申靖夏)가 시배(時輩)에게 질시(嫉視)받은 지 여러 해가 되었으므로 반드시 원한을 풀려 하리라는 것은 참으로 괴이할 것이 없으나, 나타난 것이 없는 데에서 죄를 찾아내어 망측한 죄로 모니, 이러한 헐뜯고 죄를 꾸미는 버릇이 어찌 매우 미워하여야 할 만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대간(臺諫)의 논계(論啓)가 이미 전달된 뒤에는 본래 율명(律名)을 바꾸는 규례가 없는데, 처음에는 시원히 헐뜯으려고 사판(仕版)에서 삭제하기를 청하였다가 도로 또 남의 입김을 받아서는 관작(官爵)을 삭탈하는 것으로 고쳐, 조지(朝紙)에 써 낸 것이 잠시 사이에 바뀌어 체례(體禮)가 손상되게 하였으니, 참으로 놀랍습니다, 가만히 근일의 처분을 살피건대, 억양(抑揚)하고 여탈(與奪)하는 것이 한결같이 호오(好惡)의 사의(私意)에서 나와 조금이라도 어기는 일이 있으면 문득 꾸짖고 노하시므로, 바로잡는 말은 두려워서 감히 나오지 못하게 하시고 순종하는 무리는 뜻대로 하여 꺼리는 것이 없게 하시니, 장차 공론이 막히고 참소하고 아첨하는 자가 날로 등용되어 위망(危亡)할까 하는 근심이 뒤따라 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엄히 비답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평(持平) 조익명(趙翼命)이 상소(上疏)하여 판부사(判府事) 이여(李畬)·김창집(金昌集)의 전후 차사(箚辭)를 헐뜯어 배척하고, 끝에 이돈(李墩)의 일을 논하기를,
"이번에 고관(考官)을 함문(緘問)하라는 명이 내려진 뒤에 김창집은 시험을 주관한 대신(大臣)으로서 곧바로 소견에 따라 즉시 차자(箚子)를 올려야 할 것인데, 잠자코 앉아서 보기만 하고 한 마디도 분별하여 밝히지 않았습니다. 여러 사람의 함답(緘答)이 각각 다르고 누구나 다 명관(命官)216) 에게 책임을 돌려 증거로 삼게 되어서는 말하지 않으려 하더라도 그만둘 수 없는 형세인데도 고집하여 굳이 입을 다물었으니, 반드시 그 까닭이 있었을 것입니다. 유신(儒臣)이 상소하여 핍박하게 된 뒤에야 비로소 부지런히 힘써 차자를 올렸으나 가시를 삼킨 듯이 군색하게 피하여 전혀 말이되지 않으며 ‘일이 이미 끝장 났으니 뒤미처 말할 필요가 없다.’ 하였습니다. 아!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 아직 가려지지 못한 가운데에 있어서 원래 끝장 난 일이 없는데, 끝내 성상을 위하여 분별하여 말해서 의심나고 답답한 것을 모두 풀지 않았습니다. 대개 이돈을 끌어들여 합고(合考)에 참여한 사람 가운데에 넣으려면 실로 근거 없이 날조하기 어려운 것이 있을 것이고, 그가 참여하지 않은 것을 명백히 말하려면 요로(要路)에 있는 사람들에게 죄를 지게 될까 염려되기 때문에 이런 분명하지 않은 말을 하여 본심을 저버리는 것을 꺼리지 않고서 위로 임금을 속였으니, 불충(不忠)하고 부직(不直)한 것이 누군들 이보다 심하겠습니까? 아! 임금이 힘입는 것은 오로지 대신에게 있는데, 전하의 오늘날의 대신은 오리어 정론(正論)을 배척하고 사설(邪說)을 편들며 사당(私黨)을 비호하면서 임금의 총명을 가리어 성상께서 믿고 대우한 뜻을 저버리니, 그 어진이를 무함하고 임금을 속이는 정상[狀] 【초본(初本)은 곧 죄(罪) 자였다.】 을 어찌 엄폐[掩] 【초본은 곧 환(逭) 자였다.】 할 수 있겠습니까? 소유(疏儒) 김순행(金純行)·윤득화(尹得和) 등이 선정(先正)을 꾸짖어 욕보인 것은 실로 변괴이므로 그 죄를 논하면 견벌(譴罰) 【초본은 곧 ‘투비(投畀)’ 두 자였다.】 을 주어야 합당한데 아직 처분이 없으시니, 신은 저윽이 의아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김 판부사의 소어(疏語)는 다 매우 미안하니, 명관 때의 일도 말이 모호하고 특히 분명하고 솔직하지 않으며, 이 판부사가 두 번 차자(箚子)를 올려 논한 것은 마땅하지 않으나 대신의 사체(事體)는 다른 경우와 절로 구별되니, 단지 마땅히 그 말을 채용하지 않을 뿐이다. 김순행·윤득화는 모두 정거(停擧)하는 벌을 주었다."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조익명은 이정(李楨)217) ·이남(李柟)218) 의 생질로서 사류(士流)에 끼지 못하고 청직(淸職)에 오르는 길이 막혔으므로 원한이 뼈에 사무쳤다. 이때에 이르러 때를 타서 독을 부려 이르지 않은 데가 없었는데, 신정하(申靖夏)를 탄핵할 때에 처음에는 사판(仕版)에서 삭제하기를 청하였다가 계(啓)를 전달한 뒤에 다시 관직을 삭탈하는 것으로 고쳤다. 이 소가 정원(政院)에 이르렀을 때에 마침 재계(齊戒) 때문에 이틀 동안 머물러 두었는데, 남의 교사에 따라 문득 다시 가져가서는 귀양보내는 것으로 고쳐서 바쳤다. 대간(臺諫)의 체모가 떨어지고 손상된 것을 사람들이 다 놀라와하였다."
【태백산사고본】 65책 57권 32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581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사법-행형(行刑) / 사법-탄핵(彈劾) / 인사-선발(選拔) / 사상-유학(儒學)
[註 216] 명관(命官) : 특별히 과거를 보는 경우, 임금이 과장(科場)에 친림(親臨)하여 직접 임명하는 시관(試官).[註 217] 이정(李楨) : 복창군(福昌君).[註 218] 이남(李柟) : 복선군(福善君).
사신(史臣)은 말한다. "조익명은 이정(李楨)217) ·이남(李柟)218) 의 생질로서 사류(士流)에 끼지 못하고 청직(淸職)에 오르는 길이 막혔으므로 원한이 뼈에 사무쳤다. 이때에 이르러 때를 타서 독을 부려 이르지 않은 데가 없었는데, 신정하(申靖夏)를 탄핵할 때에 처음에는 사판(仕版)에서 삭제하기를 청하였다가 계(啓)를 전달한 뒤에 다시 관직을 삭탈하는 것으로 고쳤다. 이 소가 정원(政院)에 이르렀을 때에 마침 재계(齊戒) 때문에 이틀 동안 머물러 두었는데, 남의 교사에 따라 문득 다시 가져가서는 귀양보내는 것으로 고쳐서 바쳤다. 대간(臺諫)의 체모가 떨어지고 손상된 것을 사람들이 다 놀라와하였다."
3월 26일 정사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말하기를,
"사문(斯文)이 불행하여 변괴가 거듭 일어납니다. 《가례원류(家禮源流)》의 서문(序文)이 한 번 나오자 바른 사람을 해치는 말이 방자하게 행하여져서 선정(先正)을 근거 없이 욕하는 것이 끝이 없는데, 그래 대각(臺閣)에는 엄한 위풍이 사라지고 이러니저러니 하는 소문만 구차하여져서 권상하(權尙夏)처럼 사리에 어긋나는 말을 앞장서서 하여 시비를 어지럽히는 자는 버려둔 채 논하지 않고, 정호(鄭澔)·민진원(閔鎭遠)으로 말하면 권상하에게 아부하는 자에 지나지 않는데 번갈아 견벌(譴罰)을 청하면서도 죄를 성토하고 감률(勘律)을 청하는 법이 유독 나쁜 선례를 만들며 어진이를 무함하는 사람에게만은 미치지 않았습니다. 머뭇거리고 책임을 전가하면서 일을 미룬 지 여러 날이므로 만일 옥당(玉堂)의 차자(箚子)가 아니었더라면 거의 시비가 밝혀지지 않을 뻔하였으니, 그 대각의 수치가 되는 것이 어떠하였겠습니까? 청컨대 장령(掌令) 황이장(黃爾章)·헌납(獻納) 박희진(朴熙晉)을 체차(遞差)하소서."
하니, 임금이 전에 아뢴 조상건(趙尙健)의 일과 과옥(科獄)을 다시 사핵(査覈)하는 일을 아울러 모두 따랐다.
전 정언(正言) 조상건(趙尙健)을 울산부(蔚山府)에 귀양보냈다. 당초 조상건이 상소하여 윤증(尹拯)을 배척하려 할 때에 말리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조상건이 유예하여 결단하지 못하였는데, 그 어머니 정씨(鄭氏)가 듣고 꾸짖기를, ‘네 아버지가 날마다 짚신을 신고 걸어서 아침에 나갔다가 저물어서 돌아오시기에 어디에 다녀오는지를 물으면 반드시 우옹(尤翁) 【송시열(宋時烈)의 호가 우재(尤齋)이다.】 을 뵈었다 하였는데, 너는 어찌하여 이 말을 하기를 꺼리느냐? 너는 나를 생각하지 말라.’ 하니, 조상건의 뜻이 드디어 결정되어 봉장(封章)하였다가 죄를 입었다. 사람들이 누구나 다 그 어머니를 어질게 여기고 혹 유책(遺策)을 외어 권면한 것에 견주기도 하였다.
3월 29일 경신
임금이 해창위(海昌尉) 오태주(吳泰周)에게 어제시(御製詩)를 내려 화답(和答)하여 바치게 하였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삼월 언뜻 지나가고
내일은 또 윤달일세.
제비가 돌아오매 봄 기운이 따르고
꽃이 피어 세월을 재촉하누나.
북쪽 섬돌 오히려 볼 만하거니
동쪽 동산 더구나 알 만하도다.
마을마다 농사일이 바쁜 때인데
때맞추어 비내려 밭을 어루만지네."
이때 봄가뭄이 이미 오래 이어져 비를 바라는 마음이 바야흐로 간절하므로 임금이 앓아 누운 가운데에서도 백성의 근심을 깊이 진념(軫念)하는 것이 시가(詩歌)를 읊는 데에 나타나기까지 하니, 뭇 신하가 누구나 다 용동(聳動)하여 탄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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