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62권, 숙종 44년 1718년 9월

싸라리리 2025. 12. 1. 07:49
반응형

9월 1일 병자

정사(正使) 임창군(臨昌君) 이혼(李焜)과 부사(副使) 예조 판서(禮曹判書) 민진원(閔鎭遠)을 보내어 세자빈(世子嬪)의 납징례(納徵禮)를 별궁(別宮)에서 행하고, 승지(承旨)를 보내어 일을 관장한 여러 신하에게 선온(宣醞)을 내렸다.

 

권상유(權尙遊)를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홍만조(洪萬朝)를 우참찬(右參贊)으로, 황흠(黃欽)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조언신(趙彦臣)을 장령(掌令)으로, 심택현(沈宅賢)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황귀하(黃龜河)를 부응교(副應敎)로, 김유경(金有慶)을 부교리(副校理)로, 조태구(趙泰耉)를 한성 판윤(漢城判尹)으로 삼았다.

 

헌납(獻納) 윤석래(尹錫來)가 남쪽의 고을에서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돌아와 상서(上書)하기를,
"금년의 농사가 지난 몇 해와 비교하여 비록 조금 낫기는 하지만, 전야(田野) 사이에 황폐한 곳이 많아 실제 수확은 거의 작년만 못합니다. 그래서 남아 있는 쇠잔한 백성들은 이미 소식(蘇息)할 희망도 끊어졌으며, 해마다 환곡(還穀)403)  의 쌓인 포흠(逋欠)도 그 수량이 매우 많습니다. 그런데 지금 만약 연조(年條)를 제한하지 아니하고 전체의 수량을 내도록 독촉하여 한꺼번에 거두어 바치게 한다면, 당초에 얻어 먹던 백성들도 이제 모두 죽거나 옮겨갈 것이니, 그 형세가 친족과 이웃에 침해가 미치지 않을 수 없으므로, 한갓 백성들을 소란하게 하고 원망을 사는 데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금년에 새로 나누어 준 부분에 대해서는 의당 모두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정유년404)  에 거두어들이지 못한 것은 재해(災害)를 입었거나 충실(充實)한 고을을 구분하여 더러 기준대로 바치게 하거나 더러 절반만 바치게 하고, 오래도록 거두어들이지 못한 것에 이르러서는 가장 오래 된 연조(年條)를 특별히 탕감(蕩減)해 주도록 허락하여 조정에서 은덕(恩德)을 베푸는 뜻을 보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그리고 양전(量田)405)  하는 일은 바로 기근(飢饉)과 전염병을 만난 나머지 일시에 두루 시행하여 경요(驚擾)하여 원망하고 괴로와하는 근심을 초래(招來)하게 해서는 안 되니,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농사의 재실(災實)을 참작해서 점차 거행하되, 수년(數年)을 기한하여 역사(役事)를 마치도록 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리고 탕춘대(蕩春臺)에다 성을 쌓는 이해(利害)에 대해서는 신이 말을 다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성을 혹시 완성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비용이 만약 떨어졌다고 보고한다면 장차 어떻게 조치하겠습니까? 이러한 경우를 염려하여 바로 주전(鑄錢)하여 이익을 취하려는 계책을 삼았던 것인데, 돈의 폐해를 사람들이 모두 말하고 있으니, 이미 만든 돈을 비록 갑자기 없애기는 어려울 것이나, 그것을 더 만들어 농민(農民)에게 손해를 더 끼칠 수는 없습니다."
하니, 세자(世子)가 답하기를,
"제2건(第二件)의 일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환상(還上)을 탕척(蕩滌)하는 것은 내가 일찍이 성교(聖敎)를 들어서 그 폐해를 깊이 알고 있으나, 결단코 시행을 허락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성(城)을 쌓는 일은 국가의 큰 일이므로 지연시킬 수 없으며, 돈을 만드는 일은 경연(經筵)에서 주달(奏達)했던 본래의 뜻과 다르다."
하였다.

 

9월 3일 무인

이때 조정에서 이미 차왜(差倭)의 간청으로 인해서 신사 절목(信使節目)을 강정(講定)한다고 일컫고는 특별히 차역(差譯)을 보내었는데, 다만 동래부(東萊府)의 서계(書契)를 가지고 가도록 하였었다. 그러나 대마도(對馬島)에 이르러서는 대마도의 왜인(倭人)들이 동래부의 서계는 강호(江戶)에 전달할 수 없다고 속여서 말하고는 차역을 붙들어 두고 다시 빠른 배를 보내어 예조(禮曹)의 서계를 얻으려고 하였다. 대체로 왜인들의 마음은 교활하여 무릇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얕은 데를 말미암아 깊숙한 데로 들어가고, 한 치[寸]쯤 빌리다가 한 자[尺]를 빌려서 기필코 청하는 바를 따르도록 하고야 말았는데, 이번에 청하는 것 또한 우리 나라로 하여금 마치 그 절목을 품지(稟旨)하여 받은 것처럼 하려고 하니, 요체(要諦)는 국중(國中)에 과시(誇示)하려는 계책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묘당(廟堂)의 의논은 당초에 따르고 따르지 않는 즈음에 자세히 살피고 헤아리지 않았으므로, 국위(國威)가 점점 손상되고 왜인의 습관은 더욱 교만해지게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동래의 수신(守臣)이 그 상황을 아뢰니, 묘당에서 복주(覆奏)하여 말하기를,
"차왜(差倭)가 바다를 건너기 전에 오가면서 간청하는 것은 그래도 가하겠지만, 이미 조정의 명으로 가서 전하게 한 뒤에 또 예조(禮曹)의 서계를 추후(追後)하여 만들어 보낼 것을 청하였으니, 사리(事理)로 따져 보더라도 절대로 근거가 없습니다. 마땅히 동래부(東萊府)에서, ‘변신(邊臣)이 감히 격례(格例) 밖의 일을 가지고 조정에 진청(陳請)할 수 없다.’고 답(答)하게 하고, 책망하며 타일러서 되돌려 보내도록 하되, 차역 한후원(韓後瑗) 등은 서를 전하던 날에 잘 개유(開諭)하지 못하여 교활한 왜인으로 하여금 이렇게 억지로 청함이 있도록 하는 데 이르렀으니, 청컨대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려 잡아다 엄중히 구핵(究覈)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9월 4일 기묘

정사(正使) 임창군(臨昌君) 이혼(李焜)과 부사(副使) 예조 판서(禮曹判書) 민진원(閔鎭遠) 등을 보내어 세자빈(世子嬪)의 고기례(告期禮)를 별궁(別宮)에서 행하도록 하고, 승지(承旨)를 보내어 일을 관장한 여러 신하들에게 선온(宣醞)을 내렸다.

 

윤동형(尹東衡)을 검열(檢閱)로 삼았다.

 

태안 군수(泰安郡守) 안서우(安瑞羽)가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안흥진(安興鎭)에다 군향(軍餉)을 유치(留置)시켜 강도(江都)를 지원하게 한 것은 진실로 매우 치밀한 것이었으나, 지금 수만 석의 군량을 바닷가 한 모퉁이에다 유치시켜 두었는데, 본진(本鎭)의 입방(入防)한 군사는 십수 명에 불과하니 적선(賊船)이 갑자기 정박한다면 어떻게 지키겠습니까? 난리를 당하여 군량을 운반하는 때에 이르러서는 장차 진(鎭)에 딸린 약간의 군졸로서 조운(漕運)할 계책을 삼으려 하나, 선인(船人)의 무리는 흥판(興販)을 일삼아 각처로 떠돌아다니므로 평상시에도 갑자기 모우기 어려운데, 난리를 당하여 어찌 수습하기가 쉽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본진(本鎭)에 1천 석(石)을 유치시키도록 하는 외에는 바닷가 각 고을에 나누어 주어 평상시에는 조적(糶糴)하게 하고, 난리를 당해서는 조운하여 옮기도록 하면 적에게 양식을 대주는 근심은 면할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이 기필코 변개해야 할 것의 첫째입니다. 우리 나라의 전선(戰船)은 몸체가 무겁고 커서 조수(潮水)가 크게 이른 후에야 운용(運用)할 수 있으므로, 만일 적선(賊船)이 갑자기 이른다면 그것을 대적할 수 없음이 필연적인 일입니다. 또 이른바 수군(水軍)은 반드시 부근(附近)의 백성이 아니고, 평상시 점열(點閱)406)  하여 점고를 거친 자도 아주 적은데, 갑자기 위급한 상황이 있으면 어떻게 수합(收合)하겠습니까? 지금의 형세로는 전방 병선(戰防兵船)의 수군(水軍)·주사(舟師)·능로군(能櫓軍)을 모두 혁파(革罷)하고 백성들을 모아 전선(戰船)이 정박한 곳으로 이사하게 하되, 3백 명을 한정하여 모두 둔전(屯田)407)  과 급복(給復)408)  을 허락하고 근처의 어염(魚鹽) 또한 굽거나 채취하도록 허락할 것입니다. 그리고 세금을 거둬 들이지 말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떠나갈 수 없게 해서 연변(沿邊)을 지키도록 하고, 곳곳마다 15명이 각기 자기의 재물을 내어 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한 척의 배를 만들게 하되, 평상시에는 그 둔군(屯軍)으로 하여금 마음대로 사용하게 하고, 난리를 당해서는 일시에 장비를 싣고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면서 함께 진격하게 합니다. 따라서 자손(子孫) 대대로 영구히 둔군(屯軍)을 삼는다면, 각자가 그의 부모(父母)와 처자(妻子)를 돌아보아 염려하여 나아가 용감하게 대적할 것이니, 이것이 기필코 변개해야 할 것의 둘째입니다. 해서(海西)의 대흥 산성(大興山城)과 호남(湖南)의 입암 산성(笠巖山城)을 당초에 창설(創設)한 것은 대체로 요충(要衝)을 중하게 여겨서인데, 임진 왜란과 병자 호란 때 적병(賊兵)이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지경처럼 침입하였습니다. 마땅히 대흥산성과 입암 산성을 큰 진(鎭)으로 삼아 일찍이 곤수(閫帥)를 지낸 무신(武臣)을 가려서 육군 방어사(陸軍防禦使)로 차임(差任)할 것이며, 호서(湖西)의 충주(忠州)와 청주(淸州)는 삼남(三南)의 요해지(要害地)이니 두 곳 가운데 별도로 육군 통제사(陸軍統制使)를 두어 별영(別營)을 지휘하게 해서 군사를 나누어 가서 구원하도록 한 후에야 근심이 없게 됨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이 기필코 변개해야 할 것의 세째입니다. 적(敵)을 방어하는 방법은 청야(淸野)409)  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여러 고을로 하여금 각기 성(城)을 쌓게 하되, 커도 10리(里)를 넘지 않게 하고 작아도 7리를 넘지 않게 한 후에 각양(各樣)의 조적(糶糴)과 여러 군향(軍餉)을 모두 성 안으로 바치게 한다면, 백성들이 틀림없이 죽기를 각오하고 지킬 것이니, 이것이 기필코 변개해야 할 것의 네째입니다. 지금의 고치기 어려운 폐단은 이웃이나 친족을 침해하여 징수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여러 군영(軍營)의 군포미(軍布米) 및 각 보포미(保布米)를 모두 없애고, 1년에 꼭 감해야 할 수량을 계산하여 경외(京外)의 가호(家戶)에 돈으로 징수하게 하되, 위로 삼공(三公)으로부터 아래로 사(士)와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대(大)·중(中)·소(小)의 가호(家戶)로 나누어 그 돈의 수량을 올리거나 낮추게 하고, 여러 고을의 각항(各項)의 보인(保人)410)  을 원군(元軍)으로 채우게 한다면, 여러 고을에서는 군사가 없으면서 군사가 있는 것이 되고, 국가에서는 돈이 없으면서도 돈이 있을 것이 될 것이니, 이는 기필코 변개해야 할 것의 다섯째입니다."
하니, 세자(世子)가 그 소(疏)를 묘당(廟堂)에 내렸으나, 끝내 채택하여 시행한 것은 없었다.

 

9월 5일 경진

김유(金楺)를 대사헌(大司憲)으로, 박성로(朴聖輅)를 사간(司諫)으로, 김취로(金取魯)를 부교리(副校理)로, 조상경(趙尙絅)을 부수찬(副修撰)으로, 박사익(朴師益)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삼았다.

 

세자(世子)가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접(引接)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 말하기를,
"경상 감사(慶尙監司) 이집(李㙫)이 장계하여, 늦게 이앙(移秧)411)  하여 이삭이 패지 아니한 곳과 목화전(木花田)에 대하여 분재(分災)412)  를 주도록 청하였는데, 영남(嶺南)은 올해에 대체로 조금 풍년이 들었으니, 잇따라 변통(變通)할 수는 없습니다."
하니, 세자(世子)가 옳게 여겼다. 이건명(李健命)이 또 말하기를,
"여러 도(道)의 농사 형편은 듣고 본 것으로 대략 알 수가 있습니다. 삼남(三南)은 비록 조금 풍년이 들기는 했다고 하나, 각년(各年)의 거둬들이지 못한 조곡(糶穀)을 만약 한꺼번에 독촉하여 바치게 한다면, 백성들이 틀림없이 감당하지 못할 것이니, 새로 나누어 준 것은 진실로 당연히 준례(準例)대로 받아들이게 하되, 옛 포흠(逋欠)은 아무 연조(年條)의 것임을 논하지 말고 단지 그 거둬들이지 못한 것중에 가장 많은 것을 모두 군향(軍餉)으로 이전(移轉)시키고 일년조(一年條)만 거두어 들이게 하소서. 그리고 관동(關東)과 서북(西北) 지방은 흉년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금년에 받아들일 조곡(糶穀)과 군량을 이전하도록 하는 것이 아마도 적합할 듯합니다."
하니, 세자(世子)가 그대로 따랐다. 이건명(李健命)이 또 말하기를,
"헌납(獻納) 윤석래(尹錫來)가 상서하여 양전(量田)에 대한 일을 논하였습니다. 작년에 명년 가을이 되기를 기다려 거행하라는 전교가 있었으므로, 이미 분부(分付)를 하였는데, 조정의 명령은 자주 고칠 수 없습니다."
하니, 세자(世子)가 그대로 따랐다. 이건명(李健命)이 또 말하기를,
"북평사(北評事) 김운택(金雲澤)의 조모(祖母)인 서원 부부인(西原府夫人)  【바로 인경 왕후(仁敬王后)의 어머니이다.】 은 나이 80세가 넘었는데, 김운택의 두 형(兄)은 벌써 죽고 장손(長孫)이 바야흐로 시봉(侍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장차 멀리 떠나게 되었으니 정리(情理)가 불쌍히 여길 만합니다."
하니, 세자(世子)가 말하기를,
"마땅히 대조(大朝)413)  께 계품하여 처분(處分)하겠다."
하였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민진원(閔鎭遠)이 아뢰기를,
"신이 옛날에 춘방(春坊)에 대죄(待罪)하면서 6년 동안 모시고 강독(講讀)하였었는데, 그 뒤에 벌써 18년이 되었습니다. 삼가 듣건대, 예학(睿學)414)  이 장차 진보하여 성취되어 간다고 하니, 구구한 하정(下情)415)  은 솟구치는 기쁨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현명(賢明)한 사대부(士大夫)를 접견하는 때가 많고, 환관(宦官)과 궁첩(宮妾)을 가까이하는 때가 적으면, 기질(氣質)을 서서히 기르고 덕성(德性)을 닦을 수 있다.’ 하였습니다. 만약 저하(邸下)께서 이에 깊이 생각하셔서 궁료(宮僚)들을 자주 접견하여 더러 경의(經義)를 강론하거나 더러 국사(國事)를 의논하시고, 여러 재신(宰臣)들의 직무 분장에 이르러서는 만일 의논할 만한 것이 있으면, 또한 반드시 불러서 접견하여 대면해서 의논하시되, 뭇 신하 보기를 집안 사람과 부자(父子)처럼 한다면 그 보탬이 됨이 넓고 많을 것입니다."
하니, 세자(世子)가 말하기를,
"마땅히 유의(留意)하겠다."
하였다. 훈련 대장(訓鍊大將) 이홍술(李弘述)이 말하기를,
"금년의 전염병은 옛날에 없던 바로 도감(都監)의 군병(軍兵)으로서 사망한 자가 매우 많은데, 금위영(禁衞營)과 어영청(御營廳) 두 군영(軍營)의 군병이 해마다 번(番)을 정지하게 되니, 각처에 입직(入直)하는 일을 모두 도감의 군병이 혼자 담당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도감의 군병이 휴식할 시간이 없으니, 마땅히 위로하고 즐겁게 하는 일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중순(中旬)416)   시재(試才)를 내일부터 시작하려고 하는데, 많은 상포(賞布)를 장만하지 못했습니다. 청컨대 금위영과 어영청 두 군영에서 바친 정번포(停番布) 각 20동(同)을 빌어서 옮겨다 나누어 주게 하소서."
하니, 세자(世子)가 옳게 여겼다. 집의(執義) 윤봉조(尹鳳朝)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원산(元山)의 일에 대해서는 여러 신하들에게 물은 뒤에 정배(定配)하도록 하였다.

 

9월 6일 신사

예조(禮曹)에서 청하기를,
"민회빈(愍懷嬪) 묘소(墓所)의 향탄군(香炭軍)은 소현 세자(昭顯世子) 묘소의 예(例)에 의거하여 따로 5명을 정하고 각기 2명의 보인(保人)을 지급하도록 하소서."
하니, 세자(世子)가 옳게 여겼다.

 

황선(黃璿)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9월 7일 임오

달이 견우성(牽牛星) 제4성(第四星)을 범하였다.

 

김운택(金雲澤)을 교리(校理)로 삼았다.

 

9월 9일 갑신

사헌부(司憲府)에서 거듭 말하기를,
"정릉 참봉(貞陵參奉) 이명회(李明會)는 그의 아비가 직접 과옥(科獄)을 범하여 결점이 매우 중한데, 갑자기 외람되게 받아들였으므로 물정(物情)이 모두 놀라고 있습니다. 청컨대, 태거(汰去)하소서."
하니, 세자(世子)가 그대로 따랐다.

 

금위영(禁衞營) 및 어영청(御營廳)에서 모두 이홍술(李弘述)이 연중(筵中)에서 진달한 상포(賞布)를 빌리기를 청한 일로 인하여 각기 본 군문(本軍門)에 저축되어 남아 있던 것이 다 떨어져 형세가 빌려 주기를 허락하기 어렵다고 진달하자, 세자(世子)가 모두 옳게 여겼다. 이튿날 영(令)을 내리기를,
"성교(聖敎)에 이르기를, ‘그 전에 훈국(訓局)의 중순 시재(中旬試才)는 1년의 사등(四等)에 시행하였었는데, 지금은 단지 춘·추(春秋) 양등(兩等)에만 시행하고 있으나, 연달아 흉년으로 인하여 군포(軍布)를 재량(裁量)하여 감(減)해 주었기 때문에 물력(物力)이 미치지 못하여 양등(兩等)의 중순(中旬)도 시행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미 격려하고 권면하는 도리에 어긋남이 있다. 며칠 전 차대(次對)417)  에서 훈련 대장의 진달로 인하여 중순(中旬)의 상포(賞布)를 금위영(禁衞營)·어영청(御營廳) 두 군영에서 제급(題給)하도록 하였었는데, 두 군영에서 막으려 하니, 너무나 미편(未便)하다. 도성[輦下]에 있는 친위병[親兵]을 시재(試才)한 뒤에 상포(賞布)를 지급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모두 쓸쓸하게 여길 것이니 곧바로 수송(輸送)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셨으니, 성상(聖上)께서 군병(軍兵)을 불쌍하게 여기는 뜻이 지극하다. 전에 하령(下令)한 대로 수송하는 일을 두 군문(軍門)에 분부(分付)하도록 하라."
하였다.

 

9월 10일 을유

이조 판서(吏曹判書) 송상기(宋相琦)가 상서(上書)하여 겸대(兼帶)하고 있는 문형(文衡)418)  의 직임을 사임하였는데, 이르기를,
"본조(本朝)에서 수백 년 동안 오로지 서거정(徐居正) 한 사람만이 이 직임에 10년 동안 있었습니다. 지금 신은 처음 직임에 임명되어 이미 15년에 이르렀고, 다시 들어간 뒤에 또한 6, 7년이 되었으니, 어찌 그 전에 없던 큰 변괴(變怪)가 아니겠습니까?"
하니, 세자(世子)가 답하기를,
"문형(文衡)은 경솔하게 바꾸는 직임이 아니지만 상서한 내용이 이와 같으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다. 묘당(廟堂)에서 복주(覆奏)하기를,
"이와 같이 중대한 직임을 자주 체임시켜 고치는 것도 거듭 난처한 데 관계됩니다."
하였는데, 세자(世子)가 여러번 상서하여 면직(免職)되기를 바라는 것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다고 하여 체임하도록 허락하였다.

 

9월 12일 정해

신사철(申思喆)을 응교(應敎)로, 김동필(金東弼)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9월 13일 무자

정사(正使) 임창군(臨昌君) 이혼(李焜)과 부사(副使) 예조 판서(禮曹判書) 민진원(閔鎭遠)을 보내어 어씨(魚氏)를 세자빈(世子嬪)으로 책립(冊立)하게 하고, 인하여 승지(承旨)를 보내어 일을 관장한 여러 신하들에게 선온(宣醞)을 내렸다.

 

죽책문(竹冊文)에 이르기를,
"왕(王)은 말하노라. 저사(儲嗣)는 한 나라의 근본으로 오래도록 민심(民心)이 매어 있고, 비필(妃匹)은 모든 복(福)의 근원이니, 마땅히 혼례(婚禮)를 삼가서 해야 할 것이다. 길이 차례를 계승할 소중함을 생각하니, 더욱 집안을 바로잡는 방도가 시급하도다. 이미 좋은 짝을 얻었으므로, 드러나게 책립(冊立)을 반포한다. 아! 그대 어씨(魚氏)는 경사(慶事)는 벌열(閥閱)에서 이어받았고, 덕(德)은 규문(閨門)에서 길렀도다. 동지(動止)와 주선(周旋)을 예(禮)대로 준봉(遵奉)하여 어긋나거나 실수함이 없고, 온혜(溫惠)하고 숙신(淑愼)함은 천성으로 타고나 수양을 기다리지 않았도다. 대체로 아름다운 자질이 일찍 성취되어 이에 착한 행실이 모두 갖추어졌도다. 마침 원량(元良)이 바야흐로 아름다운 배필을 구하는데, 뛰어난 미녀를 간택할 것을 생각하여 경사(卿士) 서인(庶人)과 모의하되, 점[卜]의 길(吉)하다 함을 따랐도다. 〈옛날 주(周)나라 문왕(文王)이〉 배로 교량을 만들어 친영(親迎)한 예(禮)를 모방하여 거북등 무늬로 그 상서로움을 정하였도다. 진실로 뭇사람의 마음에 맞는데, 어찌 부모(父母)에게만 기쁨이 있겠는가? 이극(貳極)419)  을 잘 돕는 것은 바로 모름지지 부부(夫婦) 생활에서 시작되므로, 이에 좋은 때를 가려 아름다운 전례(典禮)를 거행한다. 정사(正使) 임창군(臨昌君) 이혼(李焜)과 부사(副使) 예조 판서(禮曹判書) 민진원(閔鎭遠)을 보내어 부절(符節)을 가지고 예를 갖추어 그대를 책립하여 왕세자빈(王世子嬪)을 삼는다. 아! 곤범(閫範)420)  은 유순(柔順)함보다 앞서는 것이 없고, 곤덕(坤德)421)  은 안정(安貞)함보다 더 귀한 것이 없다. 오로지 근신(謹愼)해야만 자신을 경계할 수 있고, 오로지 검약(儉約)해야만 풍속을 교화시킬 수 있다. 만기(萬機)를 대신 다스리는 때를 당하여 음교(陰敎)422)  에 힘입어 백세토록 본손(本孫)과 지손(支孫)이 번성하기를 송축하니, 하늘에서 내리는 복을 영원토록 누리리라. 더욱 보좌(輔佐)하는 덕을 닦아 훈계(訓誡)하는 말을 폐기하지 말라. 이에 교시(敎示)하니 마땅히 자세히 알도록 하라."
하였다.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 민진후(閔鎭厚)가 짓고, 목사(牧使) 이정신(李正臣)이 썼다.】


【태백산사고본】 70책 62권 20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37면
【분류】왕실-의식(儀式)


[註 419] 이극(貳極) : 세자.[註 420] 곤범(閫範) : 부녀자가 집안에 지켜야 할 범절.[註 421] 곤덕(坤德) : 왕비 또는 세자빈의 덕.[註 422] 음교(陰敎) : 여자의 교훈.

 

교명문(敎命文)에 이르기를,
"왕(王)은 말하노라. 내가 생각하건대, 국가의 근본은 오직 총사(冢嗣)423)  에게 달려 있는데, 좌우(左右)에서 돕고 협력하여 왕화(王化)의 기초를 닦는 일도 또한 어진 배필에게 달려 있으니, 전책(典冊)424)  에 있는 것에서 그 뜻을 상고할 수 있다. 그래서 크게 애를 써서 이 일에 신중을 기울였다. 우리 원사(元嗣)는 총명(聰明)하고 인효(仁孝)하여 나를 대신하여 다스리며 그 정사(政事)에 힘써서 대기(大器)를 계승하려 하니, 책임이 더욱 중대하다. 내치(內治)의 도움을 어찌 하루라도 비워둘 수 있겠는가? 내가 이에 이름난 집안을 낱낱이 가려 현숙[淑哲]한 이를 얻어 우리 원사의 짝을 지어 주어 함께 우리 종사(宗事)를 돕게 할 것을 생각하였다. 아! 그대 어씨(魚氏)는 그대의 선대로부터 알려진 인물이 있어 여러 대(代)에 덕을 기르며 상서를 쌓고 복을 길렀으니, 이에 뛰어난 미녀를 두어 내가 밤낮으로 구하던 마음에 부응하였다. 완예(婉嫕)425)  하고 유순(柔順)하여 덕용(德容)이 갖추어졌으므로, 내가 특별히 마음에 두고서 간택하여 점[龜筮]을 쳐보고 경사(卿士)에게 물었더니, 모두 길(吉)하다고 하였다. 혹시라도 어김이 없기에 이에 정사(正使) 임창군(臨昌君) 이혼(李焜)과 부사(副使) 예조 판서(禮曹判書) 민진원(閔鎭遠)을 보내어, 부절(符節)을 가지고 예(禮)를 갖추어 그대를 책립(冊立)하여 왕세자빈(王世子嬪)으로 삼는다. 그대는 상복(象服)426)  에 맞도록 처신하여 부직(婦職)을 삼가며 공경으로 위를 섬기고, 은혜로 뭇 사람을 거느리고, 근면으로 뜻을 가지고, 검소로 자신을 경계할 것이며, 편안히 놀기를 즐기거나 교만하고 사치하여 의리를 해롭게 하거나 예의에 어긋남이 없도록 하라. 오직 그 지위를 어렵게 여기면 아름답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아아! 음양(陰陽)이 화합해야 만물의 화육(化育)이 이루어지고, 내외(內外)가 바르게 되어야 모든 법도가 바르게 되니, 그대는 우리 원량(元良)을 공경히 받들어 보필하고, 나의 곤정(壼政)을 도와 엄숙히 삼가서 효성으로 섬긴 아름다움이 주(周)나라에만 있게427)   하지 않도록 하라. 내가 그대를 아름답게 여길 것이니, 그대는 또한 장차 한없는 복이 있을 것이다. 바라건대 정성스럽게 이를 생각하여 나의 훈계를 욕되게 하지 말도록 하라. 이에 교시(敎示)하니 마땅히 자세히 알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대제학(大提學) 송상기(宋相琦)가 짓고, 좌참찬(左參贊) 민진후(閔鎭厚)가 썼다.】


【태백산사고본】 70책 62권 20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37면
【분류】왕실-의식(儀式)


[註 423] 총사(冢嗣) : 세자.[註 424] 전책(典冊) : 전적(典籍).[註 425] 완예(婉嫕) : 온순함.[註 426] 상복(象服) : 법복(法服).[註 427] 효성으로 섬긴 아름다움이 주(周)나라에만 있게 :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어머니 태임(太任)이 시어머니인 태강(太姜)을 효성으로 섬겼는데, 문왕의 비(妃) 태사(太姒)가 이를 본받아 왕실이 화평하니, 문왕이 내조에 힘입어 나라를 잘 다스렸다는 고사(故事).

 

9월 14일 기축

유성(流星)이 누성(婁星) 위에서 나와 실성(室星) 아래로 들어갔다.

 

강원도(江原道) 영월부(寧越府)에서 이날 유시(酉時)428)  에 불빛이 동방(東方)에서 일어나면서 별이 떨어졌는데, 소리가 있었다. 경상도(慶尙道) 영양(英陽)·안동(安東)·청송(靑松)·진보(眞寶) 등의 고을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그리고 충청도(忠淸道) 공주(公州)·직산(稷山)·단양(丹陽)·문의(文義) 등의 고을에 우박이 내렸다.

 

9월 15일 경인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는데,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도 함께 들어왔다. 진후(診候)를 마치자, 이건명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진휼청 당상(賑恤廳堂上) 민진원(閔鎭遠)이 전주(全州)의 건지산(乾止山)을 진휼청에 소속시킬 것을 청하였었는데, 전라 감사(全羅監司)        홍석보(洪錫輔)가 장계(狀啓)하기를, ‘옛날부터 금양(禁養)429)                  하는 지역은 절수(折受)430)                  할 수가 없습니다.’ 하면서 도로 정지시키기를 극력 청하였습니다. 그 뒤에 민진원이 다시 연중(筵中)에서 진달하여 그전처럼 절수하기를 청하였고, 홍석보도 지금 또 상소하여 다투고 있습니다. 대체로 이 산은 바로 풍패(豊沛)431)                  의 주맥(主脈)으로 북방(北方)을 가리고 있는데, 전주(全州)는 진전(眞殿)432)                  이 있는 곳일 뿐만 아니라, 영부(營府)433)                  의 백성들이 살고 있는 곳이므로, 저절로 대도회(大都會)가 되었으니, 이 산은 금양(禁養)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진휼청에서 그것의 절수를 청하는 것은 그 의도가 산의 높은 곳은 금지시킬 만하지만, 평지(平地)는 경작을 금지시킬 필요가 없다고 여겨서입니다. 그리고 근래에 진휼청의 저축을 죄다 써버렸으므로, 진휼청에 소속시켜 세금을 거둬 들이는 바탕으로 삼는다면 그 곡식을 모으는 방법에 있어서 보탬이 없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건지산(乾止山)은 본고을의 사용(私用)으로 삼는 데 불과하고, 그 평지의 개간할 만한 곳에는 간사한 백성으로서 함부로 경작하는 자가 영원히 자기 소유물로 만들려 하니, 비록 진휼청에 돌리지 않더라도 귀속시키는 곳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만약 타량(打量)하여 경계를 정해서 경작할 만한 곳은 원장(元帳)에서 떼어내어 호조(戶曹)에다 붙이되, 영남(嶺南)의 화전(火田) 사례(事例)에 의거한다면, 민전(民田)에 비하여 그 세금을 갑절로 징수할 수 있으니, 백성들이 간혹 세금이 많은 것을 싫어하여 묵히고 버려두는 데 이르더라도 해로울 것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大臣)의 진달한 바가 참으로 옳다. 금지시킬 만한 곳은 금지시키고, 금지시키기에 마땅하지 않은 곳은 경작하도록 허락하되, 지부(地府)에 돌려서 영남(嶺南)의 화전(火田) 사례에 의거하여 세금을 거두는 것이 적당하겠다."
하였다. 이건명(李健命)이 또 말하기를,
"지금 우려할 만한 단서는 많고 인재(人才)는 모자라서 위저(位著)434)                  가 갖추어지지 못했습니다. 대신(大臣)의 거취(去就)와 같은 데 이르러서는 다른 일과 저절로 다르니, 원임 대신(原任大臣)은 비록 직사(職事)가 없다 하나, 만약 경련(京輦)에 있으면 국가에서 의지하고 믿을 수 있으며, 온갖 업무도 물어볼 수 있습니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서종태(徐宗泰)는 별로 편안치 못한 단서가 없는데, 오래도록 도성(都城) 밖에 살고 있으며, 판중추부사        조태채(趙泰采)는 정승에 임명[爰立]된 지 오래 되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도성 밖으로 나가 그대로 고향의 집에 머물고 있으면서 끝까지 올라오지 않고 있으니, 마땅히 이 두 대신에게 돈소(敦召)하는 일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서 판중추부사(徐判中樞府事)는 원래 대단하게 인혐(引嫌)할 일도 없었으며, 조 판중추부사(趙判中樞府事) 또한 대관(臺官)의 말로 인하여 물러갈 뜻을 결정하고 끝내 들어 오지 않으니 어찌 지나치지 않겠는가? 대신(大臣)이 진달한 바가 옳다."
하였다. 이건명이 또 말하기를,
"근래에 부유한 백성들의 이식(利殖)을 늘리는 방법이 갑리(甲利)에 이르러서 지극합니다. 이식을 늘리는 것이 한정과 절제가 없어 더러 달마다 그 이식(利殖)을 받아들여 한 해가 되지 않아 갑절에 이르게 되는데, 심지어 곡식이 귀(貴)할 때에는 한 말[斗]의 쌀이 돈으로 환산하여 한 냥(兩)인데, 가을에 이르러 두 냥을 돌려받아 쌀로 계산하면 거의 5, 6갑절이 되니, 소민(小民)이 어떻게 곤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부터 제도를 정하여 관화(官貨)인 경우에는 은전(銀錢)을 논할 것 없이 경외(京外)의 각 아문(衙門)에서 일체로 환상(還上)의 예(例)를 따라 10분의 1로 이식(利殖)을 늘리게 하고, 민간(民間)의 경우에 미곡(米穀)은 10분의 5를 적용하고, 은전(銀錢)과 포(布)는 10분의 2를 적용하여 이식을 늘리도록 하소서. 만일 어기는 자가 있으면 관리(官吏)는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435)                  로 논죄(論罪)하고 사가(私家)는 장(杖) 1백 대의 율(律)을 시행하게 하여 갚을 자로 하여금 관(官)에 나아가 스스로 신고하도록 한다면, 가난한 백성이 거의 지탱하며 보전할 수 있을 것이고, 법령(法令)은 균등하고 공평해질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9월 16일 신묘

임금이 대전(大殿)에 나아가 초계(醮戒)하였다. 왕세자(王世子)가 빈(嬪) 어씨(魚氏)를 별궁(別宮)에서 친영(親迎)하여 대궐로 돌아와 동뢰례(同牢禮)를 행하였다.

 

9월 17일 임진

왕세자빈(王世子嬪) 어씨(魚氏)가 양궁(兩宮)에 조현례(朝見禮)를 행하였다. 임금이 자애(慈愛)한 빛이 얼굴에 넘쳐 말하기를,
"내가 눈 병이 이와 같으니 비록 신부(新婦)의 얼굴을 보고 싶어도 어떻게 볼 수 있겠는가?"
하고, 인하여 서글퍼하니, 이날 궁중(宮中)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백관(百官)이 진하(陳賀)하고, 반사(頒赦)·반교(頒敎)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왕(王)은 말하노라. 중명(重明)436)  이 위(位)를 바로잡으니 온 나라가 모두 원량(元良)을 떠받들고 대혼(大婚)을 친히 이루니 만복(萬福)이 융성한 의식에서 터전을 잡았다. 드디어 환한(渙汗)의 호령(號令)을 반포하여 경사를 기뻐하는 회포를 보이여 한다. 영원히 생각하건대, 풍속과 교화의 근원은 배필(配匹)을 잘 맞이하는 데 달려 있다. 훌륭한 아들과 훌륭한 며느리는 사책(史冊)에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하도록 하고, 집안을 화목하게 하여 시인(詩人)의 칭송하는 글에 전파되도록 하라. 이는 성인(聖人)이 소중하게 여겼으므로, 역대(歷代)에서 항상 이를 말미암았다. 내가 적당히 인재를 얻어 부탁하려던 일을 생각하고, 총사(冢嗣)가 대기(大器)를 주장할 수 있음을 힘입었도다. 만기(萬機)를 대리(代理)하면서부터 모든 정무(政務)가 바야흐로 새로워졌는데, 마침 이곤(貳壼)437)  의 자리가 잠시 비게 되어 부덕(婦德)을 갖춘 처녀를 뽑으려고 서둘렀도다. 이는 진실로 종사(宗社)를 위한 계책이니, 어찌 부자(父子) 사이의 인정뿐이겠는가? 왕세자빈(王世子嬪) 어씨(魚氏)는 선행(善行)을 쌓은 이름난 집안에서 아름다운 자질을 지니고, 유순하다는 좋은 소문은 일찍이 규합(閨閤)438)  의 칭찬에서 드러났으며, 정숙하고 현숙하다는 명성은 다시 궁중의 경사를 잇게 하였도다. 이에 합근(合巹)439)  의 번거로운 전례(典禮)를 닦아 왕세자의 훌륭한 짝을 짓게 되었도다. 거북점이 빠르게 순종(順從)하여 이미 길(吉)하다고 했는데, 법복(法服)이 이렇게 갖추어졌으니, 어찌 그 빛이 나타나지 않으랴? 잠자리에서 계명(鷄鳴)440)  을 알리고, 삼조(三朝)에 화순[愉婉]한 모습으로 화목하게 하며, 자손을 위하여 좋은 계책 물려 주어 백세(百世)토록 본손(本孫)과 지손(支孫)이 끊임 없이 하라. 이것은 집안과 나라의 큰 경사이니 어찌 하늘과 땅의 큰 의리가 아니겠는가? 음교(陰敎)로 도와 내명부(內命婦)를 다스리는 공(功)을 이룰 것이며, 부직(婦職)을 경건히 닦아 인륜(人倫)의 시초인 올바른 부부의 교화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진실로 나 한 사람의 사사로운 기쁨이 아니니, 기꺼이 너희 사방의 백성들과 함께 즐기려 한다. 죄인을 석방시키는 은혜를 미루어 성대하게 은택을 두루 미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본월(本月) 17일 매상(昧爽) 이전의 잡범(雜犯)으로서 사죄(死罪) 이하는 모두 용서해 주고, 관직에 있는 자는 각기 한 자급(資級)씩 올려 주되, 자궁(資窮)인 자는 대가(代加)하게 하라. 아! 홍범(洪範)441)  에서는 황극(皇極)의 복(福)을 거두어 펴서 서민(庶民)에게 주었고, 관저(關雎)442)  에서는 인지(麟趾)443)  의 인덕(仁德)에 대응하여 함께 만물을 양육하였었다. 이에 교시(敎示)하니, 마땅히 자세히 말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대제학(大提學) 송상기(宋相琦)가 지어 올렸다.】


【태백산사고본】 70책 62권 22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38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인사-관리(管理) / 사법-행형(行刑)


[註 436] 중명(重明) : 해와 달. 왕세자와 세자빈을 비유한 말.[註 437] 이곤(貳壼) : 왕세자빈(王世子嬪).[註 438] 규합(閨閤) : 규방(閨房).[註 439] 합근(合巹) : 혼례(婚禮).[註 440] 계명(鷄鳴) : 왕비가 임금이 정사(政事)에 부지런히 힘쓰도록 내조(內助)하는 것을 말함. 《모시(毛詩)》에 의하면, 제(齊)나라 애공(哀公)이 황음(荒淫)하자, 현비(賢妃)가 새벽에 닭이 울고 동녘이 밝았으니 정청(政廳)에 나아가라고 권고할 데에서 나온 말임.[註 441] 홍범(洪範) : 《서경(書經)》의 편명(篇名).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殷)나라를 쳐서 멸(滅)하고 기자(箕子)를 찾아 천도(天道)를 물었을 때, 기자가 천지(天地)의 대법(大法)을 진달하기 위해 서술(敍述)한 것이라 함. 홍(洪)이란 크다는 뜻이고 범(範)이란 법(法)이란 뜻으로, 대법(大法)이란 말임.[註 442] 관저(關雎) : 《시경(詩經)》 국풍(國風) 주남(周南)의 편명(篇名). 《모시집전(毛詩集傳)》에 의하면, 후비(后妃)의 덕(德)을 노래한 것이라 하였음.[註 443] 인지(麟趾) : 《시경(詩經)》 주남(周南)의 편명(篇名)으로, 후비(后妃)가 덕이 있어 자손(子孫)이 많음을 칭송한 것. 여기서는 왕가의 자손을 지칭한 것임.

 

정동후(鄭東後)를 장령(掌令)으로, 이봉익(李鳳翼)을 정언(正言)으로, 송상기(宋相琦)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증 영의정(贈領議政) 이식(李植)은 문정(文靖)으로, 증 판서(贈判書) 이지함(李之菡)은 문강(文康)으로, 완산 부원군(完山府院君) 이축(李軸)은 안양(安襄)으로 시호(諡號)를 내렸다.

 

9월 18일 계사

승지(承旨)를 보내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서종태(徐宗泰)·판중추(_)부사 조태채(趙泰采)에게 돈유(敦諭)하였으나, 두 신하가 모두 사정과 병(病)으로 사양하고 이르지 않았다.

 

예조(禮曹)에서 말하기를,
"등록(謄錄)을 가져다 상고해 보았더니, 병자년444)   8월에 하교(下敎)하기를, ‘사가(私家)에서는 신부(新婦)가 사당(祠堂)에 알현(謁見)하는 규례가 있지만, 종묘(宗廟)는 대궐 안과 다르니, 진실로 거론하는 것이 부당(不當)하다. 영소전(永昭殿)445)  은 바로 대궐 안에 있으니, 왕세자(王世子)가 전알(展謁)할 때에 일체(一體)로 전알하는 것이 인정과 예의에 방해됨이 없을 듯하다.’고 하셨는데, 뒤에 대신(大臣)의 헌의(獻議)로 특별히 거행하도록 명하셨습니다. 또 중궁전(中宮殿)에서 묘현(廟見)446)  할 때에 세자빈(世子嬪)도 일체로 묘현하게 하셨습니다. 이번 가례(嘉禮) 뒤에도 그런대로 거행하는 것이 적당하며 경녕전(敬寧殿)447)  에도 일체로 마련하는 것이 적합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9월 19일 갑오

이중협(李重恊)·어유룡(魚有龍)을 지평(持平)으로, 김간(金榦)을 집의(執義)로 삼았다.

 

함경도(咸鏡道) 각 고을의 백성으로 염병(染病)을 한창 앓고 있는 자가 1천 4백 70명이고, 사망(死亡)한 자는 2백 30여 명이라고 도신(道臣)이 아뢰었다.

 

책례 도감 도제조(冊禮都監都提調) 이건명(李健命) 이하 정사(正使)·부사(副使)·제조(提調)·낭관(郞官) 등에게 물품을 내려주고, 각각 차등있게 자급(資級)을 올려 주도록 명하였다.

 

9월 20일 을미

충청 감사(忠淸監司) 김흥경(金興慶)이 폐사(陛辭)하니, 세자(世子)가 불러 보고 칙유(勅諭)하여 보냈다. 김흥경이 말하기를,
"금년 여름의 전염병은 호서(湖西)가 더욱 참혹하니, 양전(量田)의 정사는 조금 충실한 곳에 우선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며, 더욱 심한 고을에 이르러서는 서둘러서 거행할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대조(大朝)에 품지(稟旨)해서 묘당(廟堂)에 하순(下詢)하여 조처하도록 하소서."
하니, 세자(世子)가 이를 허락하였다.

 

9월 21일 병신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금년의 전염병은 거의 병선(兵燹)448)  과 같이 온 집안 사람이 한꺼번에 모두 죽는 경우가 간혹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모두 거두어다 매장하지 못한 자가 많으니, 경조(京兆)449)   및 여러 도(道)도 하여금 일일이 정밀하게 조사하여 구휼하는 은전(恩典)을 베풀게 하고, 거둬들이는 조곡(糶穀) 및 신포(身布)로 당연히 바쳐야 할 것도 모두 감(減)해 주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세자(世子)가 답하기를,
"진달한 바가 실로 나의 뜻과 부합되니, 그대로 시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경기(京畿)의 각 고을에 염병(染病)을 한창 앓는 자가 2천 7백 50명이고, 사망(死亡)한 자가 1천 3백 84명이라고 도신(道臣)이 아뢰었다.

 

9월 24일 기해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진후(診候)를 마치자, 제조(提調) 조도빈(趙道彬)이 말하기를,
"군문(軍門)의 복마군(卜馬軍)450)  은 행군(行軍)하는 사이에 짐바리 운반에 활용하는 데 불과하므로, 원래 출역(出役)시키는 규정이 없습니다. 지난번 봉묘 도감(封墓都監)에서 재목(材木)을 운반하여 들일 때에 출역시킬 뜻을 초기(草記)하여 달하(達下)하셨는데, 이는 일이 급박한 데 달려 있어 어쩔 수 없이 내보내기는 하였으나 숙위 군병(宿衛軍兵)을 여러 날 동안 강을 사이에 둔 지역에 내보낸 일은 참으로 미안(未安)합니다. 이 뒤로는 규정을 정하여 아무리 긴급하게 출역시켜야 할 곳이 있더라도 절대로 출역시키지 말도록 하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 뒤로는 출역(出役)시키지 말도록 명하였다.

 

9월 25일 경자

김취로(金取魯)를 북평사(北評事)로, 한이원(韓以原)을 장령(掌令)으로, 조관빈(趙觀彬)을 부교리(副校理)로, 조상경(趙尙絅)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삭녕 군수(朔寧郡守) 조명정(趙命禎)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 임술년451)   무렵에 신의 아비 고(故) 부제학(副提學) 신(臣) 조지겸(趙持謙)이 온 나라의 공의(公議)를 채취(採取)하여 김익훈(金益勳)의 죄상(罪狀)을 논열(論列)하였었습니다. 전번에 김익훈의 손자 김진상(金鎭商)이 상서(上書)하여 그 조부(祖父)의 원통함을 호소하면서 심지어 시배(時輩)들이 사정(私情)을 두고 구무(構誣)하였다는 등의 말이 있기에 이르렀었는데, 신은 처음에 듣고서 진실로 매우 놀라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러다가 한지(韓祉)가 글을 올린 데 대하여 한지를 삭출(削黜)하라는 비망기(備忘記)에 이르러서는 사지(辭旨)가 매우 엄중하였고, 심지어 임술년의 옥사(獄事)를 꾸며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셨으니, 이는 허새(許璽)와 허영(許瑛)을 역적이 아니라고 하는 전교가 됩니다. 신은 이에 깜짝 놀라고 의혹하였는데, 성상의 하교(下敎)가 무엇 때문에 이에 미치게 되었는지 몰랐습니다. 아! 허새와 허영의 역절(逆節)과 흉모(凶謀)는 신문하고 추국하는 데에서 죄다 드러나 상형(常形)으로 통쾌하게 처벌되었으므로 신명(神明)과 사람이 서로 기뻐하였는데, 자신이 병(病)으로 본심을 잃어버린 자가 아니고서야 그 누가 허새와 허영을 역적이 아니라고 말하는 자가 있겠습니까? 애당초부터 선신(先臣)이 진백(陳白)하고 대부(臺府)에서 논핵(論劾)한 것은 전적으로 김익훈(金益勳)이 아방(兒房)452)  에서 전익대(全翊戴)가 고발한 유명견(柳命堅)의 일을 은밀하게 아뢴 데 있었을 따름이니, 이 일이 허새·허영의 옥사(獄事)와 어떻게 털끝만큼이라도 서로 관계되겠습니까? 전익대가 이미 무고(誣告)한 것으로 복주(伏誅)되었으니, 그 옥사가 무옥(誣獄)이 되었던 것은 변설(辨說)을 기다리지 않아도 명백한데, 김진상(金鎭商)은 바로 한지(韓祉)가 상서한 내용 가운데 ‘무옥(誣獄)’이란 두 글자를 가지고 허새와 허영의 사건에다 귀착시켰습니다. 아! 이 사건은 이미 3기(紀)가 지나 세월(歲月)이 자못 오래 되었고, 또 한지가 상서한 내용이 이미 분변(分辨)해 밝히기에 부족한데다가 김진상이 바꾸어 허물을 감추려고 꾸미고 왜곡되게 말을 조리를 이루었으므로, 남이 듣기에 의혹시켜 어지럽히기에 충분하였으니, 진실로 비망기(備忘記) 가운데 사지(辭旨)에 이러한 부분이 있게 되었음은 마땅합니다. 대체로 당초에 김익훈이 김환(金煥)과 기밀(機密)을 은밀하게 모의하여 빈틈이 없이 포치(布置)했다가, 허새와 허영을 고변(告變)하는 전날 밤에 김익훈이 군뢰(軍牢)와 영기(令旗)를 내어주고, 김환을 전익대의 집에 보내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유혹하고 위협하며 끌어다 사사로이 공초를 받고 사사로이 구류(拘留)시켰으며, 인하여 다시 여러 날 동안 덮어 두었다가 국청(鞫廳)을 설치한 얼마 뒤에 비로소 전익대가 공술(供述)한 유명견의 일을 아방(兒房)에서 은밀하게 아뢰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고변한 바가 모두 실상이 없는 데로 돌아가고 유혹하고 위협한 실상이 전익대와 김환을 대면시켜 신문할 때에 모두 드러났습니다. 이런 사실은 전부 여러 공안(公案)의 문자에 등재되어 있고 한 세상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퍼져 있어서 속일 수가 없습니다. 그가 분수에 지나친 일을 바라 터무니 없는 사실을 꾸며 속인 흔적은 남김 없이 밝게 드러나 공의(公議)가 일제히 분개하고 온나라 사람들의 말이 들끓었습니다. 선신(先臣)이 마침 후사(喉司)에 들어가 전석(前席)에서 진백(陳白)하였는데, 승정원의 규례에 구애되어 다만 추고(推考)하기만 청하였었습니다. 그러나 또 김익훈은 탐욕스럽고 방자하여 조금도 돌아다 보거나 꺼려함이 없이 사제(私第)를 넓게 지어 극도로 크고 사치스럽게 하였고, 심지어 군문(軍門)의 많은 재물을 소비하였으며, 궁가(宮家)를 차지하여 군관청(軍官廳)을 만들려고 도모했으므로, 선신(先臣)이 이에 다시 사실에 의거하여 들추어 논핵하면서 물리치기를 바랐었습니다. 그 뒤에 대계(臺啓)가 격렬하게 일어나고 공의(公議)도 막기 어렵게 되었으며, 여러 대신(大臣) 김수항(金壽恒)·민정중(閔鼎重)도 또 합사(合辭)하여 진청(陳請)하니, 이에 삭출(削黜)하라는 명령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곧 소결(疏決)453)  로 인하여 갑자기 석방하도록 명하시자, 그날 연중(筵中)에서 선신(先臣)이 또 그가 범(犯)한 실정을 진달하고 도로 거두도록 극력 청하였으니, 이것이 선신이 전후(前後)하여 김익훈을 논핵한 개요(槪要)입니다. 그런데 지금 김진상이 말하기를, ‘사정(私情)을 두고 구무(構誣)하였다.’ 하였습니다. 대저 선신은 일생 동안 공정하게 처신하고 사정은 돌보지 않았으며, 또 김익훈과는 털끝만큼도 미워하여 원망하는 일이 없었던 것은 온 나라 사람들이 아는 바입니다. 김진상이 스스로 그 조부(祖父)의 죄범(罪犯)이 명백하여 벗어날 만한 말이 없음을 알고, 이렇게 사리에 맞지 않는 거짓말을 하여 남의 귀와 눈을 가리려고 하였으나, 그날 밤 김환을 보내어 전익대를 유혹하고 위협하면서 이미 군뢰(軍牢)를 빌고, 또 영기(令旗)를 주고, 사사로이 공초를 받아 여러날 동안 구류(拘留)시킨 등의 여러가지 정절(情節)은 일체 빼거나 숨겼습니다. 신이 감히 알지는 못하겠지만, 김익훈이 김환을 보내어 유혹하고 위협하지 않았고, 또한 영기(令旗)와 군뢰(軍牢)를 보내지도 않았는데, 저 전익대란 자가 공연히 자진하여 온 것이겠습니까? 김익훈은 반드시 전익대로 하여금 스스로 고변(告變)하게 하려고 하였었는데, 여러 대신(大臣)들이 억지로 김익훈을 시켜서 대신 고변하게 한 것이었습니까? 김익훈은 그날 고변을 발설하려고 하였는데, 여러 대신들이 반드시 지체하여 여러 날 기다리도록 한 것이겠습니까? 그 빙자하여 핑계대면서 왜곡시켜 벗어나려고 하는 실상은 진실로 가소(可笑)롭습니다. 그리고 또 고(故) 상신(相臣) 김석주(金錫胄)가 연중(筵中)에서 주대(奏對)한 일로써 살펴보건대, 김익훈이 전익대와 유명견의 문답(問答)한 말을 김석주에게 전달한 것이 이미 국청(鞫廳)을 설치하기 전에 있었으니, 곧 전익대가 말한 것을 김익훈은 일찍이 이미 상세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대체로 김익훈과 김환은 두 사람이면서 마음은 똑같았습니다. 김환과 전익대는 또 서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으니, 영기(令旗)를 주어 김환을 보낸 자는 김익훈이고, 영기를 가지고 전익대를 불러들인 자는 김환이며, 마지막에 전익대를 대신하여 발고(發告)한 자 또한 김익훈입니다. 안팎으로 서로 관통하여 이와 같이 정상(情狀)이 명백한데도 지금 말하기를, ‘전익대의 거짓과 실상은 미리 헤아릴 바가 아니다.’ 하니, 그가 누구를 속이려는 것입니까, 하늘을 속이려는 것입니까? 가령 전익대가 김익훈에게 극력 권하여 대신 고변하게 하였다면, 당당(堂堂)한 장신(將臣)을 보잘것 없는 한낱 전익대가 몰아서 시킬 수 있는 바가 아니니, 전익대로 하여금 스스로 하도록 하는 것이 옳았을 것이며, 혹시 김환으로 하여금 허새를 고변하던 날에 함께 고변하도록 하는 것이 옳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 두가지 방법을 버려두고 기필코 남의 일을 대신 담당하여 직접 고변하였겠으며, 또 어떻게 사사로이 구류(拘留)시킨 채 여러 날 동안 관망(觀望)하다가 비로소 아방(兒房)에서 아뢰었겠습니까?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김익훈은 이익을 탐하고 공로를 움켜 잡아 일이 이루어지면 자신에게 돌리려 하고, 일이 실패하면 전익대에게 떠맡기려 한다.’고 하였으니, 그 말은 모두 근거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당초에 억지로 이유를 끌어대어 지나치게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비록 김진상의 집안으로 하여금 한 번 입을 놀리게 하더라도 장차 무슨 말로 스스로 해명하겠습니까? 아! 자신이 요직(要職)에 있으면서 국가의 중임(重任)을 맡아 일을 처리함이 무상(無狀)하여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성주(聖主)의 이목(耳目)을 위임받은 자가 말을 분명히 하여 의논을 바로잡지 않고서 허물어뜨려 무롱하는 것을 일임(一任)할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김익훈을 죄줄 만하다고 하는 것은 온 나라의 공통된 의논이며, 전후(前後)하여 삼사(三司)에 출입(出入)한 자로서 김익훈의 인척·친족과 서로 앞장서고 서로 죽기를 각오한 사람이 아니면 다만 기름때가 남을 더럽힐까 두려워하여 혹시라도 대론(大論)에 이의(異議)를 제기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고(故) 상신(相臣) 이숙(李䎘)·김구(金構) 및 고(故) 유수(留守) 신(臣) 신양(申懷)과 같은 여러 사람은 김익훈과는 모두 본래부터 미워하거나 원망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나, 더러 연명(聯名)하여 죄주기를 계청하기도 하고, 더러 처치(處置)하여 입락(立落)하기도 하면서 조금도 자신을 돌보는 이가 없었습니다. 고(故) 상신(相臣) 김수항(金壽恒)·민정중(閔鼎重)은 김익훈을 귀양보내자는 계청이 처음 발의되었을 때를 당하여 대신(臺臣) 박태유(朴泰維)·유득일(兪得一) 등을 배척하여 바닷가 고을에 보임(補任)하자, 청대(請對)하여 극력 구원하면서 말하기를, ‘대신(臺臣)만의 견해가 아니다.’ 하며 되풀이해서 개진(開陳)하여 마침내 원래의 직임으로 되돌아오도록 하는 데 이르렀습니다. 그 뒤에 두 대신(大臣)이 김익훈을 죄주도록 청할 적에 말하기를, ‘한두 명의 대관(臺官)뿐만이 아니고 나이 젊은 명관(名官)의 말이 모두 그렇지 않음이 없으니 억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삭출(削黜)하는 데 이르렀습니다. 김익훈이 석방되기에 이르러서는 두 대신이 또 왕명(王命)을 도로 거두도록 청하면서 힘써 말하기를, ‘석방한 뒤에 신 등이 만약 물의(物議)가 이 지경에 이를 줄을 알았더라면, 진실로 정지하도록 청하는 데 겨를이 없이 하였겠지만, 전혀 물의에 어두워 끝내 한 마디 말도 없었으니, 이것은 실로 신 등의 잘못입니다.’ 하였습니다. 그 뒤에 대신(臺臣) 한태동(韓泰東)이 상소하여 김익훈의 일을 분변하다가 견책(譴責)받아 쫓겨날 적에 두 대신이 또 그날로 청대(請對)하여 도로 거두도록 극력 청하였는데, 대체로 두 대신은 김익훈에 대하여 사사로이 미워함이 있어서가 아니고, 여러 신하들에 대하여 사사로이 비호함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들이 전후(前後)에 대신(臺臣)을 구원하고, 김익훈을 죄주도록 한 것이 이와 같다면, 그것이 한세대의 공의(公議)가 됨을 여기에서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김진상이 그 조부(祖父)가 한 짓은 대신(大臣)에게 물어서 결정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말하였고, 심지어 함께 일하였다고 말하였으나, 대신이 김익훈에게 처리한 것은 도리어 이와 같았으니, 그가 또 무슨 말로 자신을 변명하겠습니까? 아! 선신(先臣)의 뛰어난 충성과 곧은 도리는 옳게 여기는 바를 시행하되, 오로지 의리(義理)가 있는 것만 알고 이해(利害)가 있는 것은 몰랐으며, 오로지 국가(國家)가 있는 것만 알고 권귀(權貴)가 있는 것은 몰랐었습니다. 그러다가 갑인년454)   뒤에는 간당(奸黨)에게 저촉되어 해를 입었었고, 경신년455)  에 이르러서는 훈신(勳臣)과 척신(戚臣)을 거슬러 원한을 맺었다가, 마침내 이 때문에 꺾여 실패하였으나 순수하게 충성하는 절개는 죽음에 이르러서도 후회함이 없었으며, 지극히 청렴한 지조는 곤궁한 처지에 있으면서도 더욱 드러났으니, 다만 온 세상에서 추앙(推仰)하여 심복할 뿐만 아니라 상제(上帝)께서 감시하며 내려다 보실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利)로 유혹하여 뒤를 돌아다보며 흉당(凶黨)에 아첨하고 식록(食祿)의 보답이 〈이르지 않는다는〉 등의 말로 까닭 없이 구함(構陷) 하려고 하니, 이것이 백이(伯夷)456)  를 가리켜 도척(盜跖)457) 이라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으며, 신이 또한 어떻게 말을 허비하면서 변명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서(上書)가 들어가자, 하령(下令)하기를,
"성상(聖上)께서 한지(韓祉)를 죄주도록 한 비망기(備忘記)의 내용이 엄중하여 남김 없이 분별하고 분석하였는데, 조명정(趙命禎)이 거듭 분변한다는 것을 핑계대고 어찌 감히 방자하게 글을 올리는가? 참으로 매우 놀랍다. 이 글을 도로 내주도록 하라."
하였다.

 

비국(備局)에서 경기 감사(京畿監司)의 장본(狀本)으로 인하여 복주(覆奏)하기를,
"금년에는 기근(飢饉)이 들고 전염병을 만난 나머지 국역(國役)이 거듭되었으니, 마땅히 진휼(賑恤)하는 도리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청컨대 지난해 온천(溫泉)에 거둥하셨을 때의 전례에 의거하여 봄철 대동미(大同米) 6두(斗) 가운데 2두(斗)를 감(減)하여 주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세자(世子)가 옳게 여겼다.

 

9월 26일 신축

경상 감사(慶尙監司) 이집(李㙫)이 장계(狀啓)하기를,
"거듭 흉년을 겪은데다 잇따라 혹독한 전염병을 만나 사망(死亡)한 참혹함이 거의 병화[兵燹]와 같습니다. 이러한 즈음에 양전(量田)하는 큰 역사는 결단코 적당한 시기가 아니니, 청컨대 백성들이 조금 소복(蘇復)되기를 기다려 천천히 거행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국(備局)에서 복주(覆奏)하기를,
"지방에서 언제나 탈(頉)을 핑계대는 것으로 기한을 물려서 시행하는 것을 허락할 수 없습니다."
하니, 세자(世子)가 옳게 여겼다.

 

양서(兩西) 및 관북(關北)의 진정(賑政)을 고과(考課)하여 용천 부사(龍川府使) 김익상(金翊相)·평양 서윤(平壤庶尹) 성수웅(成壽雄)·숙천 부사(肅川府使) 유취장(柳就章)·수안 군수(遂安郡守) 신경필(申慶弼) 등은 진휼을 잘하였다는 것으로 자급(資級)을 올려 주게 하고, 정주 목사(定州牧使) 유정장(柳貞章)·금천 군수(金川郡守) 이정좌(李鼎佐)·상원 군수(祥原郡守) 이경화(李景華)·단천 군수(端川郡守) 김윤해(金潤海)·명천 부사(明川府使) 신경여(申慶汝)·문천 군수(文川郡守) 김기지(金器之) 등은 승진시켜 서용하도록 명하였다.

 

9월 27일 임인

신사철(申思喆)을 승지(承旨)로, 박사익(朴師益)을 헌납(獻納)으로, 황귀하(黃龜河)를 사간(司諫)으로 삼았다.

 

9월 28일 계묘

왕세자(王世子) 및 왕세자빈(王世子嬪) 어씨(魚氏)가 종묘(宗廟)에 알현(謁見)하였다.

 

병조(兵曹)에서 말하기를,
"상궁(尙宮)이 교자(轎子)를 타고 종묘(宗廟)의 대문(大門)으로 들어가므로, 수직(守直)하던 부장(部將)이 꾸짖으며 금지시켰으나 따르지 않았습니다. 청컨대 그 차지 내관(次知內官)을 추고(推考)하게 하소서."
하니, 세자(世子)가 그대로 따랐다.

 

9월 29일 갑진

평안도(平安道) 여러 고을의 백성으로 염병(染病)에 걸려 한창 앓고 있는 자가 1천 7백 70여 명이고, 죽은 자가 4백 명이라고 도신(道臣)이 아뢰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