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62권, 숙종 44년 1718년 10월

싸라리리 2025. 12. 1. 0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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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을사

이유민(李裕民)을 승지(承旨)로, 박사익(朴師益)을 부교리(副校理)로, 김상윤(金相尹)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10월 2일 병오

김태수(金台壽)를 장령(掌令)으로, 조언신(趙彦臣)을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왕세자(王世子) 및 왕세자빈(王世子嬪) 어씨(魚氏)가 영소전(永昭殿)을 알현(謁見)하였다.

 

10월 3일 정미

이심(李深)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이심은 사람됨이 거칠고 비루하여 대관(臺官)의 선임(選任)에 적합하지 않았으나, 갑자기 구차스럽게 충원(充員)하였으므로 물정(物情)이 놀랍게 여겼다.

 

강원도(江原道)의 백성으로 염병(染病)에 걸려 죽은 자가 3백 80여 명이고, 온 집안 사람이 전부 죽은 집이 22가호(家戶)라고 도신(道臣)이 아뢰었다.

 

10월 4일 무신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는데,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창집(金昌集)이 함께 입시(入侍)하였다. 진후(診候)를 마치자, 김창집이 말하기를,
"민회빈(愍懷嬪)의 묘(墓)를 옮겨서 부장(祔葬)하지 말고 그대로 봉분(封墳)을 더 쌓도록 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지금 역사가 거의 마쳤는데, 강씨(姜氏) 집안 선세(先世) 및 방친(旁親)의 여러 분묘(墳墓)가 모두 화소(火巢)458)   안에 들어가게 되니, 민회빈 조선(祖先)의 여러 분묘는 당연히 그대로 보존하게 하되, 다만 묘제(墓祭)지내는 것은 금지하도록 하고, 방친(旁親)의 분묘는 진실로 당연히 그 분묘를 편편하게 만들고 묘제지내는 것을 금지시켜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사릉(思陵)  【정순 왕후(定順王后)의 능이다.】  경내(境內)의 정씨(鄭氏) 집안 분묘는 그 자손들이 석물(石物)을 철거(撤去)하고 제사는 그대로 시행한다고 합니다. 지금 이 곳의 여러 분묘가 민회빈에게는 더러 조선(祖先)이 되기도 하고, 더러 형제(兄弟)가 되기도 합니다. 70년 뒤에 깊은 원한을 깨끗이 씻게 되었으니 참으로 성덕(盛德)으로 이루어진 일인데, 같은 산 안의 여러 분묘를 더러 편편하게 만들거나 더러 제사를 금지시키게 하니, 사람의 일과 신(神)의 도리에 있어서 만족스럽지 못한 점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뜻도 역시 그러하다. 근처의 여러 분묘를 일시(一時)에 깎아서 편편하게 할 필요는 없으며, 그 자손들이 제사를 지내려고 하면 금지시키지 말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민회빈(愍懷嬪) 조선(祖先)의 분산(墳山)은 진실로 금지시키지 않도록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고, 그 나머지 국내(局內)에 보이지 않는 곳의 여러 분묘도 마땅히 그대로 보존시켜야 할 것인데, 다만 제사지내는 것만 금지시켜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금단(禁斷)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김창집이 또 말하기를,
"기전(畿甸)은 농사가 부실(不實)한데, 금천(衿川)과 같은 경우에 이르러서는 본래 쇠잔한 고을로, 또 이번에 묘소(墓所)의 역사를 맡아 민력(民力)이 다른 고을보다 갑절이나 곤궁하고 초췌하니, 각별히 돌보고 구휼하는 방법이 있어야 마땅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고을은 전후(前後)에 강화도[江都]·북한산성(北漢山城)·남한산성(南漢山城) 등처(等處)로 옮겨다 주는 곡물(穀物)이 많은 경우에는 1천여 석(石)에 이르게 되어 여러 곳의 곡식을 수송하여 들이느라 폐단이 적지 않습니다. 만약 본고을에서 거둬들인 곡식을 보관하도록 허락한다면, 폐해를 없애는 방법이 될 듯합니다. 그리고 양주(楊州) 또한 묘소의 역사 때문에 금천과 다름없이 민력(民力)이 피갈(疲竭)되었으니, 일체(一體)로 거둬들인 곡식을 보관하도록 허락함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허락하였다. 김창집(金昌集)이 또 말하기를,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희조(李喜朝)가 해를 넘겨도 오지 않는데, 초야[林下]에 있는 사람을 관작(官爵)으로 묶어 둘 수는 없습니다. 선정신(先正臣) 박세채(朴世采)가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찬선(贊善)을 겸했었는데, 그 당시에 대신(大臣)들이 진달하자 본직(本職)을 체임하도록 허락하고 불렀습니다. 지금 이희조도 우선 본직을 해임시켜 찬선(贊善)으로 돈독하게 부른다면 아마 마땅할 듯합니다. 만일 곧 바로 체임시키는 것을 어렵게 여기면 그가 사직(辭職)하는 글을 올리기를 기다렸다가 변통(變通)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뜻도 그러하다."
하였다.

 

유성(流星)이 익성(翼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다.

 

경상 감사(慶尙監司) 이집(李㙫)이 장계(狀啓)하여, 산군(山郡) 각 고을의 분재(分災)를 주고, 구적(舊糴)의 징수를 정지시켜 주고, 신적(新糴)을 절반만 징수하도록 청하였는데, 비국(備局)에서 복주(覆奏)하여 구적은 가장 많은 1년조(一年條)를 징수하도록 하고, 신적은 모두 바치도록 하며, 또 급재(給災)를 말도록 청하였다.

 

10월 6일 경술

임금이 승지(承旨) 이흥(李宖)을 보내어 친히 지은 제문(祭文)을 가지고 【제문(祭文)은 위에 보인다.】 민회빈(愍懷嬪)의 묘(墓)에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조태채(趙泰采)가 시골에 있은 지 이미 오래 되었으므로, 임금과 세자(世子)가 각기 사관(史官)과 승지(承旨)를 보내어 올라 오도록 유시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조태채가 도성 밖에 와서 상서(上書)하여 물러나기를 원하니, 세자가 말하기를,
"성상(聖上)께서 경(卿)이 도성 밖에 나올 뜻이 있다는 것을 들으시고 매우 기뻐 하시면서 심지어 병중[病裏]의 마음이 조금 위로가 된다고 하교하셨으니, 빨리 도성으로 들어오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마침내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함께 오도록 하니, 조태채(趙泰采)가 사관을 따라 도성으로 들어왔다.

 

10월 7일 신해

함경 감사(咸鏡監司) 김상직(金相稷)이 폐사(陛辭)하니, 세자(世子)가 불러서 보고 칙유(勅諭)하여 보냈다.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김상옥(金相玉)과 부교리(副校理) 박사익(朴師益) 등이 가례(嘉禮)를 겨우 행하였다는 것으로 차자(箚子)를 올려 진계(陳戒)하기를,
"가만히 생각하건대, 혼인(婚姻)이란 위로 종묘(宗廟)를 계승하고 아래로 후세(後世)를 잇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군자(君子)가 그것을 중하게 여겼는데, 지금은 처음 시작하는 즈음이니 더욱 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저하(邸下)께서는 더욱 마음을 바로잡고 자신을 수양하는 일에 유념[留意]하시고, 편안하게 놀며 즐기려는 욕심을 품지 않으신다면, 집안을 다스리는 근본이 수립되어 가방(家邦)을 통치하기에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초례(醮禮)에 친히 임어(臨御)하셨을 때에 답장(踏掌) 【하각(下脚)을 의지하여 밟고 올라가도록 만든 판자(板子)를 답장(踏掌)이라고 한다.】 을 미리 배설(排設)하지 않았으니, 차지 내관(次知內官)을 문책하여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빈궁(嬪宮)이 종묘를 알현(謁見)하였을 때에 나인(內人)으로 교자(轎子)를 타고 대문으로 들어간 자는 엄중하게 잘못을 추궁해야 마땅합니다. 민회빈(愍懷嬪)은 위호(位號)를 회복시키고, 원묘(園墓)를 다스려 원통함을 펴도록 하여 신명(神明)과 사람을 위로하셨으니, 섭섭함이 없다고 말할 만합니다. 그러나 장릉(莊陵)을 추복(追復)한 것에 비교하면, 사체(事體)가 차이가 있을 뿐만이 아니니, 과거를 베풀어 취사(取士)하는 것은 마침내 너무 지나친 데 관계됩니다."
하니, 세자(世子)가 답하기를,
"유신(儒臣)의 진계(陳戒)는 진실로 충성하고 아끼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답장(踏掌)을 미리 배치하지 않은 죄는 오로지 사약(司鑰)에게 있으므로 유사(攸司)로 하여금 추문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그리고 교자를 타고 대문으로 들어간 일은 사리에 어두운 소치(所致)이므로, 대내(大內)에서 이미 중죄(重罪)로 다스렸다. 아래 조항의 일은 단지 태묘(太廟)에만 고(告)하고 중외(中外)에 반사(頒赦)하였으며, 이번에 과거를 베푸는 것은 미안(未安)함을 보지 못하겠는데, 차자(箚子)의 내용이 이와 같으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비국(備局)에서 복주(覆奏)하기를,
"성명(成命)을 이미 반포하여 팔방(八方)에 행회(行會)하였으므로, 먼 지역의 거자(擧子)들이 거의 모두 모였는데, 지금에 와서 정지시키고 그만두게 한다면 도리어 국가의 체모를 손상시킬 것입니다."
하니, 세자(世子)가 옳게 여겼다.

 

어유귀(魚有龜)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삼았다.

 

10월 8일 임자

정언(正言) 박필정(朴弼正)이 상서(上書)하기를,
"농사가 흉년이 들었으니, 청컨대, 적곡(糴穀) 가운데 병신년459)  과 정유년460)   양년조(兩年條)는 징수를 정지하고, 을미년461)   이상은 탕감(蕩減)시켜 주며, 각 고을에서 이전(移轉)하는 것은 모두 거둬들인 대로 보관하도록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고(故) 판서(判書) 김진규(金鎭圭)와 이익수(李益壽)는 청렴한 절개가 세상의 모범이 될 만하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그의 벼슬과 시호(諡號)를 추증(追贈)하게 하고, 자손(子孫)들을 녹용(錄用)462)  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의 자손으로 한 사람도 벼슬길에 나아간 자가 없으니, 조정에서 유학(儒學)을 숭상하는 본뜻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명성[名稱]이 있는 자를 가려 거두어 채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세자(世子)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10월 9일 계축

권엽(權熀)을 승지(承旨)로, 정호(鄭澔)를 대사헌(大司憲)으로, 조상경(趙尙絅)을 수찬(修撰)으로, 이인복(李仁復)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지평(持平) 이중협(李重恊)이 상서(上書)하기를,
"우리 조정에서 상례(喪禮)가 갖추어진 것은 전대(前代)보다 아주 뛰어났는데, 지난번 성상(聖上)께서 또 고례(古禮)를 단행(斷行)하여 달로 바꾸는 제도를 모두 변경시켰으니, 이는 참으로 진(秦)나라 한(漢)나라 이래로 없었던 바입니다. 그러니 예의의 풍속을 이룩하는 것이 마침내 반드시 이를 의뢰했어야 할 것인데, 다만 그 당시 예관(禮官)이 경례(經禮)463)  를 깊이 연구하지 못했기 때문에 단의빈(端懿嬪)의 복제(服制)를 모두 선왕(先王)의 예(禮)에 맞게 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신이 삼가 《의례(儀禮)》의 상복도식(喪服圖式)을 상고해 보건대, 천자 제후 정통 방기도(天子諸侯正統旁期圖)에 이르기를, ‘장자(長子)는 참최(斬衰)464)  , 적부(適婦)465)  는 대공(大功)이고, 세부(世父)466)  ·숙부(叔父)·고(姑)·자매(姉妹)·형제(兄弟)·중자(衆子)는 복(服)이 없다.’ 하였으니, 이는 이른바 천자·제후는 방기(旁期)467)  를 끓은 것입니다. 그리고 상복 대공장(喪服大功章) 적부조(適婦條)의 전(傳)에 이르기를, ‘어찌하여 대공(大功)이 되는가? 적부(適婦)에게 강복(降服)468)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였고, 소(疏)에는 이르기를, ‘부모(父母)가 적장(適長)을 위하여 3년복을 입는데, 지금 적부(適婦)를 위하여 기년복(期年服)을 입지 않는 것은 장자(長子)는 본래 위에 대하여 정체(正體)가 되므로 보태어 3년에 이르게 되나, 적부는 바로 적자(適子)의 처(妻)로서 정체의 의미가 없으므로 바로 중부(衆婦)에서 한 등급을 더한 대공(大功)일 뿐이다.’ 하였습니다. 또 살펴보건대, 상복 장기장(喪服杖期章) 위처조(爲妻條)의 전(傳)에 이르기를, ‘부모(父母)가 살아 있으면 상장(喪杖)을 짚지 아니한다.’ 하였으며, 부장기장(不杖期章) 대부(大夫)의 적자(適子) 위처조(爲妻條)의 전(傳)에 이르기를, ‘세자(世子)는 대부(大夫)의 적자와 같다.’ 하였고, 주(註)에 이르기를, ‘세자(世子)는 천자(天子)·제후(諸侯)의 적자(適子)이니 처(妻)를 위하여 역시 자최(齊衰)469)  에 상장(喪杖)을 짚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기년복(期年服)의 상사(喪事)에 있어서 천자와 제후는 단절하고, 대부는 등급을 낮추기도 하지만 재체(齊體)와 정통(正統)의 기년복이나 대공복(大功服)에 이르러서는 비록 천자·제후의 세자(世子)나 대부의 적자라 하더라도 등급을 내리지 못하는 바가 있다.’ 하였으니, 이는 바로 인정(人情)과 예문(禮文)을 갖추는 데 있어서 귀천(貴賤)의 차별이 없지만, 등위(等威)를 밝히고 융쇄(隆殺)하는 절차에 있어서는 문란시킬 수 없는 까닭입니다. 대저 의례(儀禮)의 절문(節文)은 주공(周公)에 이르러 크게 갖추어졌으니, 고례(古禮)를 회복시키기를 바라면서 의례(儀禮)를 버리고 다른 데에서 구할 수는 없습니다. 예(禮)의 근본은 진실로 인정에 인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융쇄(隆殺)하는 즈음에 저절로 선왕(先王)이 정한 제도와 경전(經傳)에 명백한 조문(條文)이 있으니, 세속(世俗)의 얕은 지식이나 사서인(士庶人)이 인습으로 행하는 예(禮)를 가지고 미루어 변개(變改)할 수는 없습니다. 이번에 의례상복도식(儀禮喪服圖式)의 상복제조(喪服諸條)를 상고하여 보니, 단의빈(端懿嬪)의 복제(服制)에 있어서 저하(邸下)께서는 부장기복(不杖期服)을 입는 것이 맞고 대전(大殿)께서는 대공복(大功服)을 입는 것이 맞는데, 신이 듣건대, 대전께서도 부장기(不杖期)의 복제(服制)를 따랐다고 하니, 이것은 지나쳐서 예(禮)에 어긋난 데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저하께서 들어가시어 대조(大朝)께 아뢰어 묘당(廟堂)에 하문[下詢]하여 의례(儀禮)를 상세히 고찰해서 선왕(先王)의 제도를 잘 준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세자(世子)가 대신(大臣)으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유(李濡)는 말하기를,
"며느리는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위하여 기년복(朞年服)을 입고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위하여 대공복(大功服)을 입는데, 이것은 바로 고례(古禮)입니다. 지금 만약 한결같이 고례를 회복시켜 시아버지와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위하여 대공복(大功服)을 입는 제도를 정한다면, 며느리가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위하여 기년복을 입는 제도를 함께 시행할 수 있겠습니까? 이미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주자가례(朱子家禮)》에서 정한 바를 따르고 본조(本朝)의 국제(國制)로 이미 시행하는 것을 준용(遵用)하는 것이 아마도 고금(古今)의 적합함을 참작하는 데 위배되지 않을 듯합니다."
하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이명(李頤命)은 말하기를,
"며느리가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위하여 기년복(朞年服)을 입는 것과 시아버지와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위하여 대공복(大功服)을 입는 것은 고례(古禮)입니다. 후세(後世)에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부자(父子)와 같다고 하여 기년(期年)과 3년으로 더한 것은 의리의 후함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자(朱子)도 그르게 여기지 않고 가례(家禮)로 정하였으며, 본조(本朝)에서는 그것을 취하여다 국제(國制)로 편찬하였으니, 다만 경신년470)  의 상례(喪禮)뿐만이 아닙니다. 세종대왕(世宗大王)께서 고례를 국제(國制)가 이루어지기 전에 시행하였으니, 성상(聖上)께서도 한결같이 방례(邦禮)를 준수하시어 마침내 대현(大賢)이 고금(古今)의 의논을 참작한 데에 맞게 하고, 시왕(時王)의 제도에 어긋나지 않으면 큰 착오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의논하는 자가 만약 말하기를, ‘의례(儀禮)는 바로 삼대(三代)471)   성왕(聖王)의 제도이고, 주공(周公)의 글인 까닭에 당(唐)나라 송(宋)나라 제유(諸儒)들의 논리로는 줄이거나 보탤 수 없으며, 천자(天子)·제후(諸侯) 정통(正統)의 복(服)은 지극히 엄격하고 중대하여 사서인(士庶人)의 가례(家禮)로는 통용하여 시행할 수 없으니, 비록 다소의 방해로움은 있다 하더라도 돌볼 수 없으며, 다만 삼고(三古)472)  의 자취만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한다면 신의 어두운 학식으로는 감히 언급할 바가 아닙니다."
하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우항(金宇杭)은 말하기를,
"적부(適婦)를 위하여 대공복(大功服)을 입는 것은 《의례(儀禮)》에 기재되어 있으며, 적부를 위하여 부장기복(不杖朞服)을 입는 것은 《주자가례(朱子家禮)》에 기재되어 있어, 국제(國制)에서 이미 시행하고 있는 바입니다. 단의빈(端懿嬪)에 대한 복제(服制)는 처음에 대공복으로 하였다가 뒤에 예관(禮官)의 말로 인하여 기년복(朞年服)으로 고쳐 정한 것은 고금(古今)을 참작해서 나온 것으로 인정과 예문의 뜻에 위배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禮)에 없는 예가 아닌데도 지금 또 재삼 변개한다면 어찌 중난(重難)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은 말하기를,
"당(唐)나라·송(宋)나라 이래로 며느리가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위하여 입는 복을 3년으로 올렸는데,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는 적부(適婦)를 위해서 기년복을 입고, 중부(衆婦)에게는 대공복을 입게 하였으며, 그 뒤에는 그대로 따랐습니다. 《주자가례(朱子家禮)》와 우리 조정의 국전(國典) 및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의 《상례비요(喪禮備要)》에도 모두 이와 같습니다. 지금 만약 곡절(曲折)을 묻지 않고 곧바로 고례(古禮)를 뒤따라 회복시키려고 한다면 이르는 곳마다 방해가 될 것이니, 경솔하게 의논하기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고,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서종태(徐宗泰)는 말하기를,
"이번의 기년복제(期年服制)는 이미 근거한 바가 있어서 의리로 일으키는 것과 같이 비교해서는 아니되니, 막중(莫重)한 복제(服制)를 지금 다시 자주 변경시킨다면 어찌 중난(重難)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김창집(金昌集)은 말하기를,
"신이 봄에 이 일로써 헌의(獻議)하면서 다만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나타난 것과 국조(國朝)에서 이미 시행한 예(例)에 의거하여 혹시라도 선조(先祖)의 뜻을 따르는 데 해롭지 않게 하였습니다. 지금 만약 전의 말을 다시 올린다면 그른 줄 알면서도 하고 말겠다는 데에 가깝고, 지금의 〈제도를〉 버리고 옛것을 구한다면 일찍이 강구(講究)한 의도가 없어지니, 어떻게 감히 참람하게 의논하여 지나치다는 비난을 초래할 수 있겠습니까? 저하(邸下)의 경우는 부장기복(不杖期服)을 입어야 한다는 설(說)은 잡기(雜記)473)  의 부모(父母)가 살아 있으면 처(妻)를 위하여 부장기복을 입는다는 것과 국제(國制)의 처를 위하여 기년복(期年服)을 입는다는 글을 가지고 참고하면 마땅할 듯합니다."
하고,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조태채(趙泰采)와 좌의정(左議政) 권상하(權尙夏)는 모두 사양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이중협(李重恊)이 다시 상서(上書)하기를,
"신이 참람하고 망령됨을 헤아리지 않고서 감히 경전(經傳)의 명문(明文)을 뽑아서 서술하여 아뢰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저하(邸下)께서 비루하고 막혔다고 여기지 않으시고 대신(大臣)에게 하문하셨는데, 여러 대신들이 모두 당(唐)나라·송(宋)나라 이래로 개정(改定)한 시아버지·시어머니의 며느리에 대한 복제(服制) 및 《주자가례(朱字家禮)》와 우리 나라의 국전(國典)을 인용하여 고례(古禮)를 갑자기 시행할 수 없다고 말하였으므로, 신이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다시 언급하려 하는데, 이는 신의 말이 아니고 바로 삼대(三代) 성왕(聖王)의 제도이고 주공(周公)의 글입니다. 대저 당나라·송나라 이래로 개정(改定)한 시아버지·시어머니가 며느리에 대항여 복(服)의 등급을 올려 후(厚)한 것을 따른 제도는 신 또한 상고하고 조사한 바가 있어서 기필코 《의례(儀禮)》를 가지고 말하려는 것입니다. 대체로 상복도식(喪服圖式)에 이미 오복도(五服圖)를 나열하고, 또 별도로 천자(天子)·제후(諸侯)의 정통(正統)과 방기도(旁期圖)를 만들었는데, 부모(父母)에게는 참최(斬衰) 3년과 자최(齊衰) 3년이고, 장자(長子)에게는 참최, 적부(適婦)에게는 대공(大功)이며, 중자(衆子)와 중부(衆婦)에게는 복(服)이 없으며, 적손(嫡孫)에게는 자최 기년(齊衰期年)이며, 또 말하기를, ‘적자에게는 있으나 적손에게는 없다.’ 하였으니, 비록 적손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전중(傳重)474)  한 뒤에야 복(服)이 있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상고해 보건대, 복도(服圖)에 복(服)을 올리고 낮추는 뜻은 아들고 며느리는 그 복이 당연히 한 등급을 낮추어야 하는데, 아들은 반드시 3년을 올리고 며느리는 그 복이 당연히 한 등급을 낮추어야 하는데, 아들은 반드시 3년을 올리고 며느리는 대공(大功)에 그치도록 한 것은 아들은 정체(正體)의 구별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비록 장자(長子)라 하더라도 더러는 3년복을 입기도 하고 더러 기년복을 입기도 하지만, 며느리는 정체의 의리가 없으니, 아들과 같은 복을 입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로지 적부(適婦)이어야만 대공복을 입고 적부가 되지 못하면 논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말하기를,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의 복(服)이 기년(期年)이기 때문에 며느리의 복은 대공이 되고,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의 복은 3년이 된다면, 며느리의 복도 당연히 기년이 되어야 한다.’ 한다면, 이것은 의리로 보복(報服)475)  을 입는 것이니, 복도(服圖)에 이른바 중부(衆婦)에게는 복이 없다고 하지만 어떻게 보복(報服)이 없겠습니까? 만약 말하기를, ‘천자(天子)와 제후(諸侯)는 방계(旁係)의 복을 끊기 때문에 중부(衆婦)에게는 복이 없다.’고 한다면, 당연히 입어야 할 정복(正服)에 이르러서는 사서인(士庶人)과 다름이 없으니, 적손(嫡孫) 정복(正服)에 되는데, 적자(適子)에게는 복이 있고 적손에게는 복이 없으니 또한 어떻게 정복(正服) 없겠습니까? 이것은 천자와 제후의 예(禮)는 등급의 구분이 지극히 엄격하여 사서인(士庶人)과는 판연하게 차이가 있으므로, 주자(朱子)가 일찍이 《의례(儀禮)》를 순서를 따라 편찬하면서 경전(經傳)의 집주(集註)는 문인(門人)인 황간(黃幹)에게 위촉하여 그 일을 마무리짓기는 하였지만, 진실로 당(唐)나라·송(宋)나라의 제유(諸儒)들이 개정(改定)한 학설은 감히 참고로 활용하지 못했습니다. 《주자가례(朱子家禮)》 한 책에 이르러 비로소 참작하여 덜거나 보탠 글이 있지만, 역시 천자와 제후의 예(禮)는 감히 참여하여 논하지 못했으니, 그 뜻을 알 만합니다. 그러므로 신이 논한 바는 반드시 정통 복도(正統服圖)를 위주로 하고, 기타 오복주설(五服註說)과 상복소기(喪服小記)의 제설(諸說)은 취하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 만약 의례 정통 복도(儀禮正統服圖)의 제도를 시행할 수 없다고 하여 다만 후대(後代)에 개정한 사서인(士庶人)이 공통으로 시행하는 제도를 답습하여 시행한다면, 제유(諸儒)의 주설(註說)에는 정체(正體)에 4종(種)의 학설이 있으며, 아들과 며느리의 복(服)이 같지 않다는 글이 있습니다. 진실로 예(禮)라는 것은 천지(天地)의 대경(大經)이니, 털끝만한 사사로운 뜻으로 그 사이에서 이리저리 굽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은 뒤에야 바야흐로 체의(體意)를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신은 모르기는 합니다만, 오늘날의 예를 한결같이 삼대(三代) 성왕(聖王)의 제도와 주공(周公)의 글을 잘 따르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니고 후대에 개정한 제도를 그대로 활용하고, 제유(諸儒)가 주소(註疏)한 학설을 참고하여 예의(禮意)를 바로잡았다고 한다면 그것도 아니니, 아마도 처음에는 정성껏 하다가 중도에 그만두어 성취시키지 못하는 데로 돌아가게 됨을 면하지 못할 듯합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천자(天子)와 제후(諸侯)의 예는 저절로 사서인(士庶人)과 차이가 있으니, 다만 마땅히 《의례(儀禮)》의 정통 복도(正統服圖)를 표준으로 삼아야만 여러 학설의 갈래가 많은 것이 저절로 하나로 통일될 것이라 여깁니다. 삼가 바라건대 저하(邸下)께서 예를 아는 인사(人士)에게 널리 물으시어 기필코 고례(古禮)를 회복시키소서."
하니, 세자(世子)가 좌의정[左相] 권상하(權尙夏) 및 예(禮)를 아는 여러 유신(儒臣)들에게 다시 묻도록 하였다. 행부호군(行副護軍) 정제두(鄭齊斗)가 말하기를,
"고례(古禮)에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위하여 기년복(期年服)을 입는 경우와 며느리를 위하여 대공복(大功服)과 소공복(小功服)을 입는 경우가 있었는데, 당(唐)나라 개원(開元)476)   때부터 제도를 만들어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위해서는 3년으로, 며느리를 위해서는 기년(期年)과 대공(大功)으로 늘리어 송(宋)나라와 명(明)나라 그리고 우리 나라에 이르기까지 모두 적용하여 일정한 제도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주자(朱子) 같은 대현(大賢)도 그것을 편찬하여 일정한 예(禮)로 삼아 이미 후왕(後王)의 한 가지 법(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지금 논한 바는 반드시 정통 복일도(正統服一圖)를 주장으로 삼고 그밖의 도설(圖說)은 모두 논하지 않았다 한다면, 이는 다만 군주 높이는 것을 위주로 말을 한 것이며, 예(禮)의 전체를 통하여 의논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상복(喪服) 가운데 그밖의 복도(服圖)는 유독 《의례(儀禮)》의 글이 아니겠습니까? 그 처(妻)가 부당(夫黨)477)  을 위하는 복도(服圖)에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위하여 부장기복(不杖期服)을 입는다는 것도 바로 주공(周公)의 경문(經文)입니다. 그러니 만일 후왕(後王)으로 예법을 제정하고 음악을 제작하려는 이가 있으면, 반드시 근원을 따라 이해하여 먼저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의 복을 정한 후에야 며느리의 복을 뒤따라 결단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보복(報服)하는 법이 달라지고 임금과 신하의 3년복의 예가 달라질 것이니, 성왕(聖王)이 제작한 뜻은 아마도 이와 같지는 않을 듯합니다. 그리고 적자(適子)에게는 〈복(服)이〉 있고 적손(適孫)에게는 없다고 여긴 학설은 유독 왕자(王者)의 예에서 취한 것이며, 인군(人君)이 대공복(大功服)을 입어야 한다고 여긴 학설은 아마도 그 뜻을 상고하지 못한 듯합니다. 또 저하(邸下)께서는 당연히 부장 기복(不杖期服)을 입어야 한다고 여긴 한 부분은 임금의 세자(世子)나 대부(大夫)의 적자(適子)는 모두 처(妻)를 위하는 복(服)에 압강(壓降)478)  하여 부장기복(不杖期服)으로 한 것이니, 여러 전기(傳記)와 고례(古禮)에 모두 명문(明文)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의논한 자가 논한 바를 바꿀 수 없습니다."
하고, 좌의정(左議政) 권상하(權尙夏)는 말하기를,
"《의례(儀禮)》에 천자(天子)와 제후(諸侯)는 방계(旁系)의 기년복(期年服)은 끊고 오로지 정통(正統)에게만 복을 두었는데, 대개 아들에게는 기년복, 며느리에게는 대공복(大功服)이 바로 정복(正服)입니다. 만약 3세(世)로 전중(傳重)한 아들이 참최 3년복(斬衰三年服)을 입는다면 이것은 복을 더한 것이며, 며느리에게는 복을 더하는 글이 없기 때문에 의례도(儀禮圖)에 대공(大功)으로 기술한 까닭이 이것입니다. 후세(後世)에 위징(魏徵)479)  이 주의(奏議)한 것으로 인하여 올려서 기년(期年)으로 하였는데, 지금까지 인습(因襲)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가(私家)의 예(禮)이기 때문에 왕조(王朝)의 고례(古禮)와는 차이가 있으니, 신과 같이 어리석은 학문으로는 억측하여 판단할 수 없습니다."
하고, 전(前) 우윤(右尹) 이세필(李世弼)·찬선(贊善) 이희조(李喜朝)·집의(執義) 김간(金榦)·전 지평(持平) 김창흡(金昌翕)은 모두 사양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세자(世子)가 하령(下令)하기를,
"이 일을 대조(大朝)에 아뢰었더니, 고금(古今)을 참작하여 기년복제(期年服制)를 정하였으므로, 변개(變改)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하다고 하교(下敎)하셨다. 따라서 다시 의논할 수 없다."
하였다. 처음에 이중협(李重恊)의 상서(上書)는 의도가 고례(古禮)를 바로잡아 회복시키려는 데 있었는데, 여러 신하들이 모두 송시열(宋時烈)의 기해년480)  의 예론(禮論)이 마침내 화태(禍胎)481)  가 되었음을 경계삼아 한 사람도 분명하게 말하거나 바로 대답하는 자가 없었으므로, 식견이 있는 자는 몰래 탄식하였다.

 

10월 10일 갑인

양전청(量田廳)에서 말하기를,
"개량(改量)할 때에 사용하는 땅을 재는 자[尺]는 호조(戶曹)에서 한결같이 준수(遵守)하는 책(冊)의 견본[見樣]에 의거하여 새로 만들어 삼남(三南)에 보냈는데, 이것은 임인년482)  의 경기(京畿) 양전(量田) 때 사용한 자 모양과도 다름이 없습니다. 지난번 전라 감사(全羅監司)가 보고한 것을 보건대, 본도(本道) 여러 고을에 갑술년483)  의 양전 때 사용한 자가 있는데, 이번에 내려보낸 새 자[新尺]와 대조하여 보니, 그전의 자[舊尺]가 새 자보다 한 치[寸]가 긴 까닭에 지금 만약 짧은 자로 개량(改量)한다면 반드시 백성들의 원망이 많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본도에 있는 그전의 자에 쓰기를, ‘포백척(布帛尺) 2척(尺) 2촌(寸) 2푼(分) 6리(釐)를 기준하였다.’고 하였는데, 법전(法典) 안의 1등 양척(量尺)은 으레 포백척 2척 1촌 2푼 6리로 하였으므로, 그전의 자가 2척 2촌여(寸餘)가 되는 것은 제도에 위배됨을 면하지 못하니, 이는 당초 제작할 때에 혹히 상세하게 살피지 못해서 이루어진 듯합니다. 그리고 임인년 경기(京畿)에서 개량할 때에 이미 준수척(遵守尺)을 사용하였으니, 지금 삼남(三南)에서 개량하는 때에 자 모양의 장단(長短)에 다름이 있으면 마땅하지 못합니다. 청컨대, 호조(戶曹)에서 새로 만들어 내려 보낸 자로 개량하게 하는 일을 삼남(三南)의 감사(監司)에게 분부(分付)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10월 11일 을묘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과 예조 판서(禮曹判書) 민진원(閔鎭遠)이 청대(請對)하여 말하기를,
"작년(昨年)의 정시(庭試)는 춘당대(春塘臺)에서 베풀고 과차(科次)484)  는 인정전(仁政殿)에서 매겼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시어소(時御所)와 춘당대와의 거리가 너무 멀고 일조(日照) 시간도 짧으니, 제목을 써서 왕래(往來)하는 즈음에 일이 실제로 편리하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시어소(時御所)의 숭정전(崇政殿)에서 베풀도록 명하였다. 이튿날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여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숭정전(崇政殿)의 뜰은 좁아 많은 선비들을 수용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다시 예전대로 춘당대(春塘臺)에서 베풀도록 명하였다.

 

비국(備局)에서 평안 감사(平安監司) 이조(李肇)의 장본(狀本)으로 인하여 복주(覆奏)하고 청하기를,
"군포(軍布) 및 각종의 노비 신공(奴婢身貢)은 〈재해가〉 더욱 심한 고을은 절반을 감하여 주고, 그 다음 고을은 3분의 1을 감하여 줄 것이며, 비국(備局)에서 맡아 관리하는 포목(布木)으로 오래 저장하였던 것은 은(銀)으로 환산하여 팔도록 허락하고, 사복시(司僕寺)의 목장(牧場) 및 경리청(經理廳)에서 관찰하는 덕지통(德池筒)의 곡물(穀物)도 팔도록 허락하소서. 그리고 가선 대부(嘉善大夫)와 통정 대부(通政大夫)의 공명첩(空名帖) 3백 장(張)을 만들어 보내도록 하고, 정배 죄인(定配罪人)은 명년 가을까지를 기한하여 본도(本道)의 재해가 더욱 심한 고을에 정배시키지 말도록 하고, 수령은 맥추(麥秋)까지 기한하여 유임[仍任]시키게 하소서."
하고, 또 강원 감사(江原監司) 이기익(李箕翊)의 장본(狀本)으로 인하여 청하기를,
"〈재해가〉 더욱 심한 고을의 세폐(歲幣)485)  와 훈국(訓局)의 내궁방(內弓房)에 바치는 궁삭목(弓槊木)과 월과 군기(月課軍器)486)  , 월과미(月課米)487)  를 감해 주고, 정유년488)   첩가(帖價) 【조정에서 흉년에 가자(加資)한 공명첩(空名帖)을 팔거나 쌀과 바꾸는데, 그것을 첩가미(帖價米)라 한다.】 로 미곡(米穀)을 나누어 지급하게 한 것은 특별히 탕감(蕩減)하여 주도록 하소서."
하니, 세자(世子)가 모두 그대로 따랐다.

 

10월 12일 병진

김여(金礪)를 정언(正言)으로, 황귀하(黃龜河)를 부응교(副應敎)로, 김상옥(金相玉)을 부교리(副校理)로, 김상윤(金相尹)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말하기를,
"박진량(朴震亮)은 신분이 낮고 미천한데도 의랑(儀郞)489)  과 직강(直講)으로 막힘 없이 옮겨 승진되었으니, 청컨대 도태시키소서. 그리고 혜랑(惠郞)490)  은 임무가 전적으로 전곡(錢穀)을 관장하는 것인데, 심현(沈玹)은 벼슬살이하여 직무를 맡아 보면서 본래 청렴하고 검소함이 부족하다고 일컬어지고 있으며, 자신의 행동과 일의 처리에 비굴(鄙屈)하다는 책망이 많으니, 청컨대 개차(改差)하소서."
하였으나, 세자(世子)가 모두 따르지 아니하였다.

 

10월 13일 정사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는데,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유(李濡)가 함께 입시(入侍)하였다. 진후(診候)를 마치자,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말하기를,
"지난해에는 흉년이 이미 극심하였고, 올해에 이전에 없던 전염병으로 더러 온 가족이 모두 죽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요즈음에는 시기(時氣)491)  가 상도(常道)를 잃어 전염병이 다시 치성해지고, 삼남(三南)의 농사 또한 앞으로 풍년이 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번곤(藩閫)492)  의 순력(巡歷)과 경차관(敬差官)의 검전(檢田)이 모두 같은 시기에 있고, 환상(還上)·대동(大同)·신포(身布)를 바치는 것도 모두 가을과 겨울에 있으므로,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거의 죽게 된 백성들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침범하여 어지럽히고 있는데, 거기에다 또 양전(量田)의 역사(役事)를 더하게 되니, 그 노동과 비용으로 원망하고 괴로와함이 틀림없이 지극할 것입니다. 우선 풍년이 들어 백성들이 안정되기를 기다려 다시 거행하는 것이 아마도 적당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大臣)이 진달한 바가 옳다.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이이명(李頤命)이 또 말하기를,
"고(故) 유생(儒生) 윤유(尹愈)의 처(妻)는 그의 지아비가 전염병으로 죽자, 그가 바야흐로 임신중이었으나, 초종(初終)493)  의 모든 일을 손수 처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끝까지 그 널[柩]을 지키며 집안 사람들을 따라 피접하지 않았습니다. 몇 달 뒤에 병(病) 때문에 낙태(落胎)하자, 마침내 아비(兒婢)를 시켜 음식물에 사용한다고 핑계대고 염수(鹽水)를 사오게 하여 마시고 즉사(卽死)하였습니다. 죽기 전에 글을 지어 부모(父母)와 시아버지·시어머니 그리고 여러 친척에게 이별을 고하였는데, 대체로 처음에는 유복자(遺腹子)를 위하여 기필코 태아(胎兒)를 보호하려고 하였으나, 이미 보전할 수 없게 되자, 곧바로 자결(自決)하였습니다. 그리고 죽고 사는 즈음에 조용히 처신한 것은 더욱 대수롭게 여길 일이 아니니, 정려(旌閭)하여 포상(褒賞)하는 일이 있어야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정려(旌閭)하도록 명하였다. 이유(李濡)가 또 말하기를,
"탕춘대(蕩春臺)에 성(城)을 쌓는 역사는 국가의 큰 계책인데, 대간(臺諫)이 어지럽게 말한 것으로 인하여 즉시 거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역사를 시작한 것이 이미 늦었는데다가 일조(日照) 시간 또한 짧아 쌓은 바가 겨우 절반이 넘었으니, 명년 봄에야 거의 완전히 쌓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밖에 동북(東北) 편에 빠뜨려진 곳인 창의문(彰義門) 안에서부터 인왕산(仁王山) 일대(一帶)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잇따라 쌓은 후에야 바야흐로 흠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에 소요되는 양식은 대략 갖추었습니다마는, 고포(雇布)494)  는 보충하여 쓸 수가 없으니, 청컨대, 금위영(禁衛營)과 어영청(御營廳) 두 영(營)의 포목 2백 동(同)을 빌어서 옮겨 쓰도록 허락하소서. 그리고 총융청(摠戎廳)을 탕춘대(蕩春臺)에다 영(營)을 설치하는 일은 일찍이 이미 정탈(定奪)하셨는데, 본영(本營)의 물력(物力)이 넉넉지 못해서 역사를 거행하기는 어려우니, 서로 구제하게 하는 도리가 없을 수 없습니다. 듣건대 본영(本營)의 기부전(記付錢) 1만여 냥(兩)이 있다고 하니, 그것을 경리청(經理廳)으로 이송(移送)하여 더러 저축해 둔 쌀과 바꾸어 지급하고, 더러 별도로 처리하게 해서 남는 것을 가져다 보충해서 돕게 하는 것이 일에 편리하고 적합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허락하였다.

 

세자(世子)가 얇은 옷을 입은 군사(軍士)들에게 유의(襦衣)를 제급(題給)하고, 공석(空石)495)  을 숙위(宿衛)하는 군사들에게 지급하도록 하였으니, 날씨가 춥기 때문이었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번에 진달한 것을 거듭 아뢰었는데, 세자(世子)가 다만 박진량(朴震亮)과 심현(沈玹)의 일만 따랐다.

 

비국(備局)에서 함경 감사(咸鏡監司) 이탄(李坦)의 장본(狀本)으로 인하여 복주(覆奏)하여 청하기를,
"여러 가지의 신역(身役)을 재해가 더욱 심한 고을에는 절반을 감하여 주고, 다음의 고을은 3분의 1을 감해 줄 것이며, 삼수(三水)·갑산(甲山)과 육진(六鎭)의 갖가지 모양의 부역(賦役)도 절반을 감하여 주소서. 그리고 세초(歲抄)496)  는 단지 물고(物故)한 자만 대신 정하게 하소서."
하니, 세자(世子)가 옳게 여겼다.

 

10월 14일 무오

박성로(朴聖輅)를 사간(司諫)으로, 조명겸(趙鳴謙)을 장령(掌令)으로 삼고, 이정주(李挺周)를 승지(承旨)로 승진 임명하였다.

 

복위 선시 도감(復位宣諡都監)의 도제조(都提調)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창집(金昌集) 이하 여러 신하에게 위로하고 차례를 매겨 물품을 내려 주고, 자급(資級)을 올려 주었는데, 차등이 있게 하였다.

 

10월 16일 경신

비국(備局)에서 황해 감사(黃海監司) 이덕영(李德英)의 장본(狀本)으로 인하여 청하기를,
"군포(軍布)·군보미(軍保米) 및 각사(各司) 노비 신공(奴婢身貢)으로 옛날의 미수(未收)는 받아들이는 것을 정지하게 하고, 당년조(當年條)는 단지 재해가 더욱 심한 고을에 3분의 1을 감하여 주도록 할 것이며, 환상미(還上米)는 다른 곡식으로 미루어 대신 바치게 하되, 환상 모곡(還上耗穀)은 재해가 더욱 심한 고을에 나누어 주어 진휼하는 자본으로 보충하게 하소서. 그리고 세초(歲抄)는 물고(物故)한 자를 대신 정하는 외에는 모두 정지시키도록 하고, 공명첩(空名帖)은 5백 장(張)을 한정하여 만들어 보내게 하소서."
하니, 세자(世子)가 옳게 여겼다.

 

비국(備局)에서 북병사(北兵使) 백시구(白時耉)·남병사(南兵使) 이삼(李森) 등의 장본(狀本)으로 인하여 청하기를,
"마천령(磨天嶺)의 사잇길은 일제히 모두 막도록 하고, 산중턱 이상은 경작을 금하도록 신칙할 것이며, 영애(嶺阨)에는 수목(樹木)을 기르되 각별히 금양(禁養)하도록 하소서."
하니, 세자가 옳게 여겼다.

 

이때 정시(庭試)를 명일(明日)에 베풀려고 하는데, 대제학(大提學)과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모두 미처 차임(差任)하지 못하였으며,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 민진후(閔鎭厚)는 신병(身病)으로 나오지 못하니, 임금이 승정원(承政院)에 하문(下問)하기를,
"일찍이 과거(科擧) 때에 양관(兩館)497)  의 제학(提學)이 없어도 과거를 보인 사례가 있었는가?"
하자, 승정원(承政院)에서 말하기를,
"그전의 망단자(望單子)498)  를 가져다 보니 모두 실직(實職)으로 써 넣었고, 양관(兩館)의 제학(提學)을 겸무(兼務)한 여부(與否)는 상고해 낼 수가 없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일찍이 제학(提學)을 거친 대신(大臣)으로 시험을 주장하게 할 수 있다."
하였다. 그것은 대체로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 일찍이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을 거쳤기 때문이었다. 이건명을 마침내 명관(命官)499)  으로 삼았다.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희조(李喜朝)가 현도(縣道)를 통해 상서(上書)하여 사직(辭職)하니, 세자(世子)가 체임하도록 허락하고 유시(諭示)하여 안심하고 올라오게 하였다.

 

10월 18일 임술

동·서·남(東西南) 세 곳의 교외(郊外)에다 단(壇)을 설치하고 근신(近臣)을 보내어 전염병에 죽은 주인 없는 영혼에게 제사지내도록 하였다.

 

10월 19일 계해

춘당대(春塘臺)에서 정시(庭試)를 베풀어 【중궁(中宮)과 왕세자(王世子)의 홍진(紅疹)이 회복되고 가례(家禮)를 행하는 두 가지 경사가 겹쳤다.】 홍현보(洪鉉輔) 등 13인(人)을 뽑았다.

 

조상경(趙尙絅)을 수찬(修撰)으로, 이희조(李喜朝)를 찬선(贊善)으로 삼았다.

 

10월 20일 갑자

이교악(李喬岳)을 승지(承旨), 황귀하(黃龜河)를 부교리(副校理)로, 박사익(朴師益)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10월 21일 을축

이심(李深)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10월 22일 병인

달무리가 목성(木星)을 둘렀다.

 

10월 23일 정묘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조정의 기강(紀綱)이 해이(解弛)해지고 국가의 체모가 존엄(尊嚴)하지 않아 패초(牌招)를 어기는 폐단이 요즈음에 와서 더욱 심해졌습니다. 며칠 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 민진후(閔鎭厚)가 대정(大庭)에서 선비를 시험하는 날을 당하여 의리상 사양할 만한 일이 없고, 또 밤이 새도록 수응(酬應)하느라 병침(丙枕)500)  이 불안(不安)하였는데, 어찌 염려하지 않고 자기 뜻만 굳게 지키는 것입니까? 세 번이나 부르는 전지(傳旨)를 어겼으므로, 성상께서 하교하여 엄하게 책망하였는데도, 끝내 명을 받들지 않았으니, 분의(分義)와 사체(事體)가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저하(邸下)께서는 들어가 대조(大朝)에 아뢰어 빨리 견파(譴罷)를 내리소서."
하니, 세자(世子)가 답하기를,
"이번에 차자로 논한 것은 무너진 기강을 진작시키고 국가의 체모를 높이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민진후(閔鎭厚)를 파직시켜 경책(警責)하는 뜻을 보이게 하라."
하였다.

 

10월 24일 무진

조상경(趙尙絅)을 교리(校理)로, 김상옥(金相玉)을 수찬(修撰)으로, 조태구(趙泰耉)를 수어사(守禦使)로 삼았다.

 

전라 감사(全羅監司) 홍석보(洪錫輔)가 상서(上書)하여 양전(量田)에 대한 일을 논(論)하기를,
"양전(量田)은 대체로 인정(仁政)이 경계(經界)에서 시작된다고 한 뜻에서 나왔는데, 대소(大小)의 백성들이 싫어하고 꺼려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만약 백성들의 마음을 용동(聳動)시키는 일이 없으면 아마도 완전히 마칠 때가 없을 듯합니다. 지금 만약 양전(量田)한 뒤에 새로 기경(起耕)한 것을 덜어내어 한결같이 3년 동안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 전례를 도로 일으켜 거둔 것을 옮겨서 계사년501)  에 포조(逋糶)로 보충한다면, 지금의 싫어하고 꺼려하는 마음이 반드시 장차 용동되는데 겨를이 없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공사(公私) 간에 모두 편리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전지를 조사할 때에 다소(多少)의 차인(差人)에 대하여 관(官)에서 늠료(廩料)를 잇대게 한 규정은 대체로 백성을 위하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인데, 비록 본도(本道)에서 벌써 시행한 것으로 말하더라도 봄 사이에 먼저 양전한 것은 다만 3천여 결(結)인데, 소비된 바는 쌀 1백여 석(石)에 이르렀으니,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그 수량이 틀림없이 앞으로 1만 석을 넘을 것입니다. 신이 삼가 갑인년502)  에 넘겨준 것을 근거로 먼저 양전하였을 때 새로 기경(起耕)한 계산하고, 또 계사년의 포조(逋糶)와 개량(改量)하였을 때의 비용을 계산해 보았더니, 특별히 양전한 뒤에 새로 더 기경한 전지에 대하여 3년 동안 부과할 세금을 덜어서 신의 감영(監營)에다 넘겨 준다면, 거의 미루어 보충이 되어 공가(公家)에서 저축한 것이 감손되거나 백성들의 원망을 사는 데에 이르지는 않을 것이며, 3년 이후에 들어오게 될 공세(公稅)로 이전에 비하여 저절로 넉넉할 것입니다."
하니, 세자(世子)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는데, 마침내 시행되지 않았다.

 

10월 27일 신미

평안도(平安道) 백성으로 염병(染病)을 한창 앓고 있는 자가 2천 3백 14인(人)이고, 사망(死亡)한 자가 5백 48인이라고 도신(道臣)이 아뢰었다.

 

비국(備局)에서 아뢰기를,
"해서(海西)는 무인(武人)이 가장 많으나, 바닷가에는 역시 우려할 만한 단서가 많습니다. 청컨대 관서(關西)의 별무사(別武士) 전례에 의거하여 감영(監營)과 병영(兵營)에서 각각 3백 명을 선발하고, 방영(防營)에서 2백 명을 선발하되, 양반(兩班)으로 유업(儒業)을 일삼지 않거나 중인(中人)과 서얼(庶孽)로 한가하게 노는 자 중에서 무재(武才)가 있는 자를 가려 숫자를 채워 시재(試才)하고, 시상(施賞)하는 일을 한결같이 관서(關西)의 절목(節目)에 의거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그리고 해서(海西)는 잇따라 흉년이 들었으니, 병사(兵使)의 습진(習陣)·조련(操鍊)과 수군(水軍)의 조련을 모두 정지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10월 28일 임신

전라도(全羅道) 전주부(全州府)에 천둥이 쳤다.

 

고향으로 돌아가던 거자(擧子)503)   80여 인(人)이 한강(漢江)을 건너는데, 날이 저물어 배를 먼저 타려고 다투다가 너무 많이 타서 배가 뒤집혀 거자(擧子)와 함께 탄 자가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10월 29일 계유

전일(前日)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이명(李頤命)이 입진(入診)했을 때 임금에게 삼남(三南)에 양전(量田)하는 역사는 풍년이 들기를 기다려 거행하도록 아뢰어 청하자, 임금이 묘당(廟堂)에 품처하도록 명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묘당에서 복주(覆奏)하기를,
"양전(量田)하는 일은 1백 년이 가깝도록 폐치(廢置)해 두었던 나머지 인순(因循)하여 지체하고 실제로 거행한 적은 없었습니다. 조령(朝令)을 자주 고치는 것은 실제로 요즈음의 고질화된 폐단인데, 지금 만약 갑자기 영을 내려 정지하게 한다면, 국가의 체모가 어지럽게 됨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청컨대, 지난번의 성명(成命)을 인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우선 전염병이 치성하지 않은 곳을 따라 차례로 개량(改量)하도록 하여 봄철 경작(耕作) 이전으로 기한을 하되, 만일 혹시라도 모두 완전히 마치지 못하면 명년 가을이 되기를 기다려 양전을 마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비국(備局)에서 경상 감사(慶尙監司) 이집(李㙫)의 장본(狀本)으로 인하여 복주(覆奏)하여 청하기를,
"군포(軍布)와 공목(貢木)504)  은 조금 충실한 고을은 당년조(當年條) 및 그전의 미수(未收) 1년조를 전부 바치게 하고, 재해가 더욱 심한 고을은 다만 당년조만 바치게 하며, 재해가 더욱 심한 고을의 조곡(糶穀)은 절반을 감해 주도록 하소서."
하니, 세자(世子)가 그대로 따랐다.

 

10월 30일 갑술

황해도(黃海道) 백성으로 염병(染病)에 걸려 한창 앓고 있는 자가 1천 7백여 인(人)이고 사망(死亡)한 자가 1백 20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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