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62권, 숙종 44년 1718년 11월

싸라리리 2025. 12. 1. 0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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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일 병자

이유(李濡)를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김상윤(金相尹)을 수찬(修撰)으로, 심정보(沈廷輔)를 특별 임명하여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삼았다. 심정보는 숙명 공주(淑明公主)505)  의 아들로서, 주색(酒色)을 좋아하고 용렬하여 식견이 없었으나, 임금이 효종(孝宗)의 외손(外孫)으로 남아 있는 자는 심정보 뿐이라 하여 특별히 배옥(緋玉)506)  에 승진시키도록 명하고, 또 어제시(御製詩) 3장(章) 및 장복(章服)507)  을 내려 주어 은총을 베풀었다.

 

11월 4일 무인

수찬(修撰) 김상옥(金相玉)이 상소(上疏)하기를,
"국가의 관작(官爵)은 헛되게 임명해서는 마땅하지 못합니다. 심정보(沈廷輔)는 이미 기록할 만한 공로도 없는데, 다만 척속(戚屬)의 신하라 하여 갑자기 배옥(緋玉)의 반열(班列)에 발탁하셨으니, 가자(加資)하라는 명(命)을 거두심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수령(守令)을 자주 체임시키는 것은 실제로 백성을 고달프게 하는 단서인데, 요즈음 읍재(邑宰)를 다른 도(道)의 수령으로 의망(擬望)하여 임명하는 경우가 한두 사람만이 아닙니다. 더구나 삼남(三南)은 또 전지를 조사하는 때를 당하여 천전(遷轉)시켜 서툰 솜씨에게 맡길 수는 없습니다. 새로 임명된 해주 판관(海州判官) 김두벽(金斗璧)과 충주 목사(忠州牧使) 조태과(趙泰果) 등은 모두 전임(前任)으로 유임시키게 하소서. 그리고 이번에 거자(擧子) 80여 인이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한강(漢江) 나루를 건너다가 일시(一時)에 빠져 죽었습니다. 그 배가 뒤집혀 빠졌을 때 애절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강언덕에 퍼져 차마 들을 수가 없었는데, 진선(津船)의 별장(別將) 및 사격(沙格) 【수수(水手)를 일컫는다.】 의 무리가 끝내 구제(救濟)할 뜻이 없었으니, 정상(情狀)이 절통(絶痛)합니다. 유사(攸司)로 하여금 각별히 엄중하게 구핵(究覈)하고 형신(刑訊)해서 정배(定配)시키게 하소서. 먼 지방의 많은 선비가 함께 경축(慶祝)하는 과거에 응시하였다가, 고향으로 돌아갈 적에 물에 빠져 죽는 근심을 면하지 못하였는데, 더러 숙질(叔姪)과 형제(兄弟)가 함께 배를 탔다가 함께 빠져 죽은 자도 있을 것이니, 원통하게 맺힌 기운이 위로 하늘의 화기(和氣)를 범하기에 충분합니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별도로 치제(致祭)하여 그 영혼을 위로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비답(批答)하기를,
"심정보(沈廷輔)를 서추(西樞)508)  의 직질(職秩)에 승진시키도록 한 명(命)은 뜻한 바가 있어서인데 도로 거두라고 하니,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그리고 다른 도(道)의 수령을 옮겨서 임명하지 말라는 말은 참으로 좋기는 하지만, 더러 명성과 공적을 가지고 가끔 옮겨서 임명하는 것도 무슨 방해될 것이 있겠는가? 1백에 가까운 거자(擧子)가 일시에 물에 빠져 죽었으니, 참으로 매우 놀랍고 참혹하다. 사격(沙格) 무리의 정상이 절통하니, 잘못을 엄중하게 구핵하는 일은 모두 상소한 내용대로 시행하도록 하되, 치제(致祭)하는 한 가지 사항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해조(該曹)에서 복주(覆奏)하기를,
"1백에 가까운 거자(擧子)가 물에 빠져 죽은 것은 실로 드물게 듣는 사건이니, 치제(致祭)하는 것이 불쌍히 여기는 은전(恩典)에 적합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기고, 마침내 강가에 단(壇)을 설치하여 제사지내게 하였다.

 

11월 5일 기묘

유명웅(兪命雄)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이관명(李觀命)을 이조 참판(吏曹參判) 겸홍문관 제학(兼弘文館提學)으로 삼았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기를,
"5월 무렵에 성상의 전교에 형인(刑人)에 대한 공사(公事)는 일체(一體) 동궁(東宮)에게 진달하라는 명(命)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매년(每年)의 계복(啓覆)509)  은 반드시 겨울 전에 하였으며, 이미 형인(刑人)에 대하여 변통(變通)하라는 전교가 있었으니, 계복도 마땅히 동궁께 아뢰어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동궁(東宮)에게 아뢰어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11월 6일 경진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어제 정사(政事)에서 형조 판서(刑曹判書)는 수망(首望)으로 의망(擬望)된 자에게 낙점(落點)510)  하였었다. 그런데 유명웅(兪命雄)이 사조(辭朝)511)  한 것은 근간(近間)의 일이니 자주 체임시키는 것이 염려스럽다. 그러니 그를 유임[仍任]하도록 하고 그를 대신할 사람은 내일의 정사(政事)에서 차출(差出)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그것은 대체로 유명웅이 바야흐로 개성 유수(開城留守)의 임무를 맡았기 때문이었다.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관명(李觀命)이 바야흐로 비변사 당상(備邊司堂上)의 직임을 겸대(兼帶)하고 있었는데, 동생 이건명(李健命)이 정승의 지위에 있게 되어 형제(兄弟)가 함께 중요한 권력을 관장한다는 것으로 혐의스럽게 여겨 비국(備局)의 좌석에 언제나 나아가 참석하지 않으니, 세자(世子)가 하령(下令)하기를,
"형제(兄弟)가 주사(籌司)에 출입한 경우는 스스로 근거할 만한 고사(故事)가 있으니, 다시 혐의스럽게 여기지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나와 참석하도록 하는 일을 분부(分付)하라."
하였다.

 

11월 7일 신사

사헌부(司憲府)에서 또 논핵하기를,
"연기 현감(燕歧縣監) 김유(金維)는 타고난 성품이 도리에 어긋나고 망령되고 사리에 어두워 일을 판단하지 못하면서 밤낮으로 경영(經營)하는 것은 다만 자신을 살찌게 하는 것뿐이니, 청컨대, 파직(罷職)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여주 목사(驪州牧使) 한세량(韓世良)은 사람됨이 용렬하고 비루하며 심술(心術)이 바르지 못하고 교활합니다. 애당초 자신이 진출한 것도 오로지 윗사람을 잘 섬긴 데서 나왔는데, 평생의 장기(長技)가 오로지 가렴주구(苛斂誅求)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큰 전장(田庄)을 사서 두고, 중개인[駔儈]과 체결(締結)하여 매매(買賣)를 주장하도록 하여 이익을 불린 것이 거만(巨萬)이나 되니, 청컨대, 파직(罷職)시키소서."
하였으나, 세자(世子)가 모두 따르지 아니하였다.

 

김유(金楺)를 이조 참판(吏曹參判) 겸양관 대제학(兼兩館大提學)으로 삼고, 이관명(李觀命)을 특별히 임명하여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삼았다.

 

11월 8일 임오

경상도(慶尙道)의 유생(儒生) 성덕징(成德徵) 등이 상서(上書)하여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과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도록 청하니, 세자(世子)가 아직 지난(持難)하고 있는 것은 그 의도가 신중을 기하는 데 있다고 답하였다. 전라도(全羅道)의 유생(儒生) 정국장(鄭國章) 등이 양신(兩臣)을 〈문묘에〉 종사(從祀)할 것을 거듭 청하였으나, 세자(世子)가 허락하지 않았다.

 

경리청(經理廳)에서 말하기를,
"탕춘대(蕩春臺)의 성(城) 쌓는 역사의 고포(雇布)는 진실로 조치하여 마련하기가 어렵습니다. 금위영(禁衛營)에서 빌려 쓴 포목 2백 동(同)은 밑천을 세울 것을 제외하고는 나머지가 거의 없으니, 청컨대, 본청(本廳)의 쌀 6, 7백 석(石)을 호조(戶曹)에 이송(移送)하고, 해서(海西)의 전세미(田稅米)를 돈으로 환산하여 거둬들이게 하소서. 그리고 이번 정시(庭試) 무과(武科)의 제방미(除防米)도 북한산성(北漢山城)에서 가져다 쓰게 하소서."
하니, 세자(世子)가 이를 허락하였다.

 

11월 9일 계미

총융청(摠戎廳)에서 이번 12월부터 본청(本廳) 12초(哨)의 군병(軍兵)을 전례대로 전부 상번(上番)시키도록 청하니, 임금이 이때에 상번시키는 것은 그 형세가 참으로 어렵다 하여 특별히 번(番)을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11월 10일 갑신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는데,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 함께 입시(入侍)하였다. 진후(診候)를 마치자, 이건명이 말하기를,
"민진후(閔鎭厚)가 세 번이나 패초(牌招)하였으나 나오지 않았으니, 사체(事體)를 손상시키는 바가 있었으므로, 신이 차자(箚子)를 올려 파직(罷職)시키도록 청하였습니다. 민진후가 국사(國事)에 마음을 다한 것은 성명(聖明)께서도 아시는 바이고, 현재 비국(備局)에는 할 일이 많은데 담당할 사람이 없으니, 그를 서용(叙用)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허락하였다. 이건명이 또 말하기를,
"황해 감사(黃海監司) 이덕영(李德英)이 장계(狀啓)하여 소강 첨사(所江僉使)를 승진시켜 수사(水使)를 삼도록 청하였습니다. 또 지난번에 최진한(崔鎭漢)이 일찍이 소강 첨사를 지낸 사람으로서 주강(晝講) 때에 〈수사(水使) 설치의〉 편리하고 좋은 정상(情狀)을 상세히 말하였는데, 이제 충청 수사(忠淸水使)로서 또 상소(上疏)하여 해방(海防)이 소홀함을 논(論)하며 황해 수사(黃海水使)의 설치를 청하였습니다. 옹진(瓮津)의 백성들 또한 상서(上書)하여 이 청을 거듭하였으므로, 본도(本道)에다 물었더니, 이덕영의 말이 또 이와 같았습니다. 첨사(僉使)는 권한이 가볍고 높지 않고, 또 여러 도(道)에는 모두 수사(水使)가 있지만 유독 해서(海西)에만 없으니, 이번에 옹진(瓮津)에다 수사를 설치하는 것은 아마도 불가함이 없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입시(入侍)한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제조(提調) 조도빈(趙道彬) 등 여러 신하들에게 낱낱이 하문(下問)하였는데, 모두 옳다고 하자,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도승지(都承旨) 유명홍(兪命弘)이 말하기를,
"내일 계복(啓覆) 관계로 인접(引接)하실 때에 6승지(承旨)가 당연히 입시(入侍)하여야 하는데, 이렇게 약원(藥院)에서 함께 당직(當直)하는 때를 당하여 도승지가 약원 부제조(藥院副提調)가 되어 잠시도 떠날 수 없으며, 본원(本院)도 역시 모두 비워둘 수 없으니, 마땅히 변통(變通)하는 도리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도승지(都承旨)는 약방(藥房)에 머물면서 직숙(直宿)하고, 승지 한 사람은 본원(本院)에 머물도록 할 것이며, 그 나머지는 나아가 참여하도록 명하였다. 이건명(李健命)이 말하기를,
"지금 각릉(各陵)과 각전(各殿)의 제사가 매우 많으므로, 한식(寒食)·동지(冬至) 등의 각 절일(節日)에 문관(文官)·남행(南行)512)  으로 재직(在職)하는 자가 매우 적어서 피폐(疲弊)한 종반(宗班)과 순장(巡將)으로 액수(額數)를 채우곤 하지만, 이 무리들은 기솔(騎率)513)  과 장복(章服)이 없으며, 절하고 꿇어앉는 절차 또한 제대로 모양을 이루지 못하니, 일이 공경스럽지 못한 데 관계됩니다. 만약 다섯 군문(軍門)의 10명의 별장(別將)으로 보충시켜 임명하게 한다면 참으로 편하고 마땅하겠습니다. 간혹 군문(軍門)은 바로 뜻밖의 변고를 기다리는 곳이므로 멀리 제관(祭官)으로 뽑아 보내는 것이 적당하지 않다고 여겨지나, 이 무리들이 사사로이 휴가를 받는 자일 경우 비록 열흘이 걸리는 노정(路程)이라 하더라도 구애될 바가 없는데, 유독 능침(陵寢)의 제향(祭享)으로 하루 밤 자는 곳에 어떻게 내보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훈국(訓局)의 경우는 비록 모두 군사를 거느려야 한다고 하겠지만, 그 나머지 네 군문에서 돌아가며 제관을 차송(差送)하는 것은 아마도 불가함이 없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각영(各營)에서 두 명에 한하여 차송(差送)하도록 명하였다.

 

함경도(咸鏡道) 각 고을의 백성으로 염병(染病)에 걸려 한창 앓고 있는 자가 6천여 인(人)이고 사망(死亡)한 자가 1천여 인이라고 도신(道臣)이 아뢰었다.

 

11월 11일 을유

왕세자(王世子)가 경현당(景賢堂)에 좌기(坐起)하여 경외(京外) 사수(死囚)의 초복(初覆)을 행하였는데, 날이 저물어 우선 파(罷)하였다. 헌납(獻納) 조언신(趙彦臣)이 지난번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세자(世子)가 따르지 않았다. 장령(掌令) 조명겸(趙鳴謙)이 본부(本府)에서 한세량(韓世良)에 대하여 파직(罷職)시키도록 청한 의논은 실상(實狀)이 아닌 것이 많으므로, 따라서 참여할 수 없다고 하며 인피(引避)하였다. 이튿날 논의가 일어나자, 장령(掌令) 이심(李深) 또한 동료들의 의논이 같지 않다 하여 연중(筵中)에서 인피(引避)하였는데, 사헌부(司憲府)에서 이심은 체임시키고 조명겸은 출사(出仕)시키도록 처치하였다.

 

11월 12일 병술

왕세자(王世子)가 경현당(景賢堂)에 좌기하여 경외(京外) 사수(死囚)의 초복(初覆)을 행하였다. 초복을 마치자,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 말하기를,
"며칠 전 경리청(經理廳)에서 금년 무과(武科)의 제방미(除防米)를 얻으려고 청하였는데 서로(西路)는 해마다 거듭 흉년이 들어 진구(賑救)할 계책이 없으니, 평안도(平安道)의 출신(出身) 제방미는 감사(監司)에게 넘겨주어 청북(淸北)514)  의 〈재해가〉 더욱 심한 고을에 진구하는 밑천으로 보충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평산(平山)의 태백 산성(太白山城)은 대로(大路)의 요충(要衝)에 있는데, 헐리고 무너진 것은 애석하게 여길 만합니다. 신이 지난해 서도(西道)를 순행(巡行)한 뒤에 즉시 품달(稟達)하여 본도(本道)로 하여금 고쳐 쌓도록 분부(分付)하셨는데, 재력(財力)이 넉넉지 못하여 아직도 거행하지 못하였으니, 해서(海西) 출신(出身)의 제방미(除防米)는 역시 평산(平山)에다 나누어 주어 그들로 하여금 성(城) 쌓는 역사에 보충하여 쓰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세자(世子)가 옳게 여겼다. 헌납(獻納) 조언신(趙彦臣)이 지난번에 아뢴 것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금년의 전염병은 옛날에도 드물었던 바로 넘어져 죽은 시체가 들판에 내버려져 있어 그런 현상이 매우 참혹합니다. 조정에서 특명(特命)으로 매장하도록 하셨으니, 이는 실로 마른 뼈와 썩은 살을 덮어주고 묻어주는 은덕을 베푸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수구문(水口門) 밖에는 유해(遺骸)와 후골(朽骨)이 수레바퀴와 말발굽 사이에 아직도 내버려져 있는 것이 많습니다. 청컨대, 경조(京兆)로 하여금 거듭 오부(五部)에 신칙하여 이를 빨리 거두어다 묻게 하소서. 겨울철에 들어온 이래로 전염병이 날로 치성(熾盛)하여 감염(感染)시키는 기운이 서로 번져서 전파되어 앓는 이가 더욱 많은데, 간혹 병(病)이 든 사람을 활인서(活人署)에서 내보내는 경우가 있으면, 본서(本署)의 고지기[庫直]가 오직 뇌물을 요구하는 것만 주무(主務)로 삼고 전적으로 구료(救療)하지 않아서 죽게 되는 경우가 더욱 많으므로, 도성(都城)의 백성들이 보기를 죽는 곳으로 여겨 기꺼이 가서 머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혜민서(惠民署)의 구료관(救療官)이 약값만 받아내고 〈약은〉 병든 사람에게 이르지 않게 하니, 일이 매우 놀랍습니다. 청컨대 거듭 오부(五部)에 신칙하여 병든 사람을 내보낸 활인서의 관원을 적발하게 하며, 호조(戶曹) 및 각창(各倉)에 분부하여 발자(茇資)515)  를 수송(輸送)하게 하고, 혜민서의 구료관 및 활인서의 고지기는 모두 가두어 과죄(科罪)하도록 하소서."
하니, 세자(世子)가 다만 거두어다 묻게 하는 일과 끝 부분의 일만 따랐다.

 

11월 13일 정해

달이 필대성(畢大星)을 범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단의빈(端懿嬪)의 연제(練祭)516)   때 절목(節目)을 당연히 마련해야 하는데, 국조(國朝)의 고사(故事)에 모든 기년복(期年服)은 모두 30일 만에 복을 벗었기 때문에 연제 때 변복(變服)은 의거할 만한 전례(前例)가 없습니다. 그래서 《의례(儀禮)》 경전(經傳)을 가져다 상고해 보았더니, 이르기를, ‘기년상(期年喪)은 11개월 만에 연제(練祭)를 지낸다.’ 하였고, 그 주(註)에 이르기를, ‘이는 아버지가 살아 있고 어머니를 위하는 경우를 말한다.’ 하였으며, 상복소(喪服疏)에 이르기를, ‘처(妻)를 위해서도 펴게 하고, 나머지 친족(親族)은 13개월에 이르러 상복을 벗으며, 연복(練服)517)  은 입지 않는다.’ 하였으니, 이것으로써 살펴본다면 대전(大殿)과 중전(中殿)은 변제(變除)518)  하는 절차가 없을 듯하니, 다만 왕세자(王世子)의 변복(變服)만 마련하여 들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11월 16일 경인

민진후(閔鎭厚)를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이봉익(李鳳翼)을 장령(掌令)으로, 이태좌(李台佐)를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로, 이병상(李秉常)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조관빈(趙觀彬)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11월 17일 신묘

왕세자(王世子)가 경현당(景賢堂)에 좌기(坐起)하여 경외(京外) 사수(死囚)의 삼복(三覆) 【재복(再覆)은 으레 형조(刑曹)에서 문안(文案)을 수정(修正)하여 들여보낼 뿐이고, 임어(臨御)하여 결정하는 일은 없었다.】 을 행하여 죄인(罪人)으로 율(律)대로 한 자가 9인(人)이고, 사형을 감(減)한 자가 4인이었다. 녹수(錄囚)519)  를 마치자, 사간(司諫) 박성로(朴聖輅)와 지평(持平) 이중협(李重恊)이 지난번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세자(世子)가 모두 따르지 아니하였다.

 

11월 18일 임진

이조 판서(吏曹判書) 송상기(宋相琦)가 상소(上疏)하기를,
"《선원보첩(璿源譜牒)》을 봉안(奉安)하는 길에 적상 산성(赤裳山城)을 보았는데, 실로 하늘이 만든 요새(要塞)이었으니, 결단코 대수롭지 않게 여겨 버려둘 곳이 아닙니다. 성첩(城堞)이 군데군데 허물어진 곳이 많았는데, 본읍(本邑)에서 으레 민정(民丁)을 징발(徵發)하여 보수(補修)하였으나, 잘 쌓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부역(赴役)에도 폐단이 있습니다. 그러니 양사(兩寺)의 승군(僧軍)을 사용하여 인구(人口)를 따져 양식을 지급하고 허물어지는 대로 보수하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 그리고 승도(僧徒)로 부지런하고 성실하여 사리(事理)를 잘 아는 자를 가려서 승장(僧將)으로 임명하고, 승도(僧徒) 역시 대오(隊伍)로 만들어 마음대로 모이거나 흩어질 수 없도록 하며, 산성(山城)의 별장(別將) 역시 가려서 임명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호남(湖南)의 진금(珍錦)·용담(龍潭)과 호서(湖西)의 옥천(沃川) 등의 고을에 도적의 무리가 몰래 발동하는 근심이 다른 지역에 비교하여 더욱 심합니다. 청컨대, 무신(武臣)으로 지위와 명망이 있는 자를 각별히 가려서 보내소서."
하니, 세자(世子)가 묘당(廟堂)에 내렸다. 이 뒤에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 연중(筵中)에서 아뢰니, 그 청을 모두 따랐다.

 

충청도(忠淸道) 유생(儒生) 박세형(朴世炯) 등이 상소(上疏)하여 효종[孝廟]의 휘호(徽號)를 더하고,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을 효종 묘정(孝宗廟庭)에 추배(追配)하기를 청하자, 임금이 종묘(宗廟)의 일은 한 사람이 감히 혼자서 의논할 바가 아니라고 비답하였다.

 

11월 19일 계사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진후(診候)를 마치자, 제조(提調) 조도빈(趙道彬)이 말하기를,
"금위영(禁衞營)과 어영청(御營廳) 양 영(兩營)의 군사는 이달 20일 뒤에 상번(上番)하도록 하셨는데, 겨울철에 들어온 뒤로 전염병이 다시 치성하여 행장을 꾸려 머물게 하거나 보내는 것이 너무나 불쌍히 여길 만합니다. 또 총융청(摠戎廳)과 달리함이 없어야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외(京外)에 전염병이 다시 치성해지는데, 이러한 시기에 향군(鄕軍)을 상번(上番)하게 하면 틀림없이 병을 앓거나 사망(死亡)할 근심이 많아질 것이다. 총융청(摠戎廳)의 군사는 이미 상번(上番)을 정지하게 하였으니, 금위영(禁衞營)과 어영청(御營廳) 양 영(兩營)의 군사들도 일체(一體)로 상번을 정지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20일 갑오

전염병이 몹시 만연(蔓延)되고 있다 하여 중신(重臣)을 파견하여 산천(山川)에 치제(致祭)하도록 하고, 임금이 친히 성황 발고제(城隍發告祭)의 축문(祝文)을 지어 내렸는데, 그 내용에 이르기를,
"아주 독한 전염병이 예전에 없었던 바이니, 병든 마음 어찌 편안하겠습니까? 다시 얕은 정성 다하여 교단(郊壇)에서 제사를 지냅니다. 신(神)의 힘이 아니면 어찌 뭇 신(神)을 모으겠습니까? 먼저 그 까닭을 고하면서 경건히 제사를 받듭니다."
하였다.

 

11월 21일 을미

충청 감사(忠淸監司) 김흥경(金興慶)이 장계(狀啓)하기를,
"도내(道內)에 전염병이 다시 치성하여 사망(死亡)하는 사람이 서로 잇달으니, 청컨대, 금년의 세초(歲抄)는 물고(物故)를 제외한 잡탈(雜頉)은 모두 정지시켜 주소서."
하였는데, 비국(備局)에서 복주(覆奏)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경상 감사(慶尙監司) 이집(李㙫)이 장계하여 도내(道內)에 〈재해가〉 더욱 심한 고을과 그 다음 고을에 대하여 구적(舊糴)을 모두 바치는 것을 정지하도록 청하였는데, 비국(備局)에서 복주(覆奏)하니, 다만 더욱 심한 고을에만 바치는 것을 정지하도록 허락하였다.

 

대제학(大提學) 김유(金楺)를 패초(牌招)하여 반궁(泮宮)520)  의 유생(儒生)들에게 감귤을 내리고, 인하여 선비들을 시험하여 수석(首席)을 차지한 김민택(金民澤)에게 급제(及第)를 내리도록 명하였다.

 

11월 22일 병신

송사윤(宋思胤)을 장령(掌令)으로, 황선(黃璿)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11월 23일 정유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신사년521)  의 등록(謄錄)을 가져다 상고해 보았더니, 경녕전(敬寧殿)522)  의 연제(練祭) 뒤에 조석 상식(朝夕上食) 및 산릉 상식(山陵上食)에 모두 곡례(哭禮)를 그대로 시행하였습니다. 지금 이번의 혼궁(魂宮)과 묘소(墓所)에도 연제(練祭) 뒤에 역시 마땅히 이에 의거하여 거행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니, 세자(世子)가 옳게 여겼다.

 

중신(重臣)을 파견하여 여제(癘祭)523)  를 북교(北郊)에서 행하도록 하고, 임금이 친히 제문(祭文)을 지어 내렸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옛날 극성(棘城) 여제(癘祭)의 제문(祭文)은 바로 우리 문종 대왕(文宗大王)께서 친히 지으셨는데, 규장(奎章)524)  이 두루 비치고 지극한 정성이 신(神)을 감동시켜 나쁜 기운이 저절로 없어지니, 백성들이 바로 안정되게 살게 되었었다. 문종 대왕께서 지으신 글 가운데 정(情)이 없는 것은 음양(陰陽)이고 정이 있는 것은 귀신(鬼神)이라고 비유한 것과 같은 데 이르러서는 곡진(曲盡)하게 형용하여 전대(前代)의 성왕(聖王)이 표현하지 못했던 부분을 표현했다고 말할 수 있다. 아! 귀신은 정이 있으니, 이치로 깨닫게 할 수 있다. 지금 우리 백성들은 큰 액운의 때를 만났으니, 바야흐로 이러한 시기에 신(神)에게 빌지 않고 어디에 빌겠는가? 이에 내가 민망하고 측연(惻然)하게 여겨 아픔이 마치 내 몸에 있는 듯하니, 번거롭게 고하는 것을 어찌 피하겠는가마는, 극진하게 하지 않음이 없었으나, 신(神)의 들어줌은 갈수록 더욱 멀게 느껴진다. 신이 어찌 어질지 않아서이겠는가? 내가 실제로 정성이 부족해서이다. 자신을 반성해 보니 부끄러워할 줄 몰랐던 점이 부끄럽다. 아! 내가 본래 덕(德)이 없는 자질로 욕되게 임금의 자리에 올라 마음은 비록 간절하게 구원하려 하였으나, 정성이 신명(神明)을 감동시키지 못하였다. 극성(棘城)에서의 감응(感應)이 빨랐던 사례를 감히 오늘날에 바라지는 못하겠지만, 저 적자(赤子)525)  들은 바로 조종(祖宗)의 적자로서, 조종께서 남기신 은택이 백성들에게 스며든 것이 깊은데, 신명께서는 어찌 생각하지 않으시는가? 더구나 이번의 전염병은 팔도[八域]가 모두 똑같아 해서(海西) 한 도(道)만 비교할 것이 아닌데, 억만(億萬)의 무고(無故)한 백성들의 생명을 신명께서는 어찌 가엽게 여기지 않으시는가? 아! 지금의 혹독한 전염병은 옛날의 기록에도 보기드문 바이니, 들을 태우는 불처럼 맹렬한 기세를 멈추게 하거나 막을 수 없다. 잠깐 그쳤다가 다시 성해지기를 전후하여 3년 동안 계속되니, 전염되지 않은 집이 없고 앓지 않은 사람이 없다. 경외(京外)에서 한 조각 전염되지 않은 깨끗한 곳이 없으니 살아남기를 도모할 희망마저 끊어져 아무런 계책없이 죽기만을 기다리는 실정이다. 아! 병화[兵燹]는 아무리 참혹하다 하나 그래도 병화를 당하지 않는 곳이 있고, 흉년은 아무리 심하다 하나 이곳보다 저곳이 낫다는 구별이 있는데, 어찌 유독 전염병의 재해(災害)만이 이와같이 아주 혹독할 수가 있겠는가? 여름철이 되어서는 농사(農事)를 폐지하여 황폐한 이랑이 눈에 가득히 보였는데, 겨울철이 되어서는 한데서 거처하여 굶주림과 추위가 살을에는 듯하여 더러 온 집안 사람이 모두 죽은 경우도 있고, 더러 〈시체를〉 거두어 묻어줄 주인도 없어 쌓인 시체가 서로 잇대어 있으니, 마을이 텅 비게 되었다. 만약 이와 같이 그치지 않는다면, 인류(人類)가 모두 없어질 것인데, 인류가 이미 모두 없어진다면 나라가 무엇을 의지할 것이며, 신(神) 또한 누구를 의탁할 것인가? 아아! 참혹하도다. 차마 더 말하겠는가? 병든 가운데 초조하게 근심하니 내 마음이 타는 듯하도다. 차라리 나 자신이 이를 당하여 갑자기 죽어서 아무것도 모르고 싶다. 아! 오래된 병이 점차로 고질화되어 수응(酬應)하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으므로 이에 세자(世子)에게 명하여 만기(萬機)를 대리(代理)하게 하였으니, 이 또한 하나의 시초이다. 마땅한 사람을 얻어 부탁하자, 신명(神明)과 사람이 서로 즐거워하니, 바로 마땅히 천지(天地)의 화기(和氣)를 펴도록 인도하여 만물로 하여금 각기 제 위치를 얻게 해야 할 것인데, 어찌 차마 적자(赤子)들이 일찍 죽어가는 것을 보고서 구휼하지 않겠는가? 재해(災害)의 급박함이 눈썹이 타는 것처럼 매우 위급하여 느슨한 음성으로 말할 겨를이 없다. 이에 근신(近臣)을 보내고, 직접 제문을 지어 나의 간절한 마음을 고한다. 정성이 이르는 곳에는 금석(金石)도 뚫을 수 있는데, 더구나 귀신(鬼神)의 덕(德)이 그토록 성(盛)한 경우이겠는가? 신명(神明)은 살피고 헤아려 내가 드리는 제물[觴豆]에 흠향하여 음산한 요기(妖氣)를 깨끗하게 씻기를 마치 바람이 구름을 걷어 버리듯이 해서 사경(四境)으로 하여금 탄식하며 신음하는 소리가 끊어지게 하여 나라가 편안한 복(福)을 누리도록 한다면, 이는 신명의 은혜이니 어찌 이런 큰 소망을 감당하겠는가? 빨리 명명(冥冥)한 가운데에 도움을 내려서 신명에게 욕됨이 없도록 바라노라."
하였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아! 지극하도다. 성상(聖上)께서 백성을 염려하는 덕(德)이여! 성상의 옥체가 불편하신 지 7, 8년에 이르러 모든 정무의 번거로움을 이미 모두 세자[貳極]에게 위임하였으니, 문자(文字)를 구성(構成)하는 데 이르러서는 결단코 밤이 늦도록 신음하는 가운데 유념[留心]할 바가 아니었다. 오로지 아주 독한 전염병이 거듭 참혹함을 민망하게 여기고, 적자(赤子)가 모두 죽어가는 것을 마음 아프게 여겨 이미 정성을 쌓아 재해를 물리치도록 기원하면서 신에게 거행하지 않은 의식이 없었다. 또 친히 신명에게 제사지내는 글을 지었는데, 누누이 수백 마디가 애통(哀恫)과 참달(參怛)의 뜻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그 지극한 정성과 진심(眞心)에서 나온 간절함은 넉넉히 금석(金石)을 꿰뚫고 귀신(鬼神)을 올릴 만한 것이었다. 아! 우리 성상(聖上)의 백성을 근심하는 지극한 덕(德)이 아니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70책 62권 34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44면
【분류】보건(保健) / 풍속(風俗) / 역사-편사(編史)


[註 523] 여제(癘祭) : 나라에 역질(疫疾)이 돌 때에 지내던 제사. 봄철에는 청명(淸明)에, 가을철에는 7월에, 겨울철에는 10월 초1일에 지냈음.[註 524] 규장(奎章) : 제왕(帝王)의 시문(詩文).[註 525] 적자(赤子) : 임금의 치하(治下)에서 은택을 받는 백성을 가리킴.
사신(史臣)은 논한다. 아! 지극하도다. 성상(聖上)께서 백성을 염려하는 덕(德)이여! 성상의 옥체가 불편하신 지 7, 8년에 이르러 모든 정무의 번거로움을 이미 모두 세자[貳極]에게 위임하였으니, 문자(文字)를 구성(構成)하는 데 이르러서는 결단코 밤이 늦도록 신음하는 가운데 유념[留心]할 바가 아니었다. 오로지 아주 독한 전염병이 거듭 참혹함을 민망하게 여기고, 적자(赤子)가 모두 죽어가는 것을 마음 아프게 여겨 이미 정성을 쌓아 재해를 물리치도록 기원하면서 신에게 거행하지 않은 의식이 없었다. 또 친히 신명에게 제사지내는 글을 지었는데, 누누이 수백 마디가 애통(哀恫)과 참달(參怛)의 뜻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그 지극한 정성과 진심(眞心)에서 나온 간절함은 넉넉히 금석(金石)을 꿰뚫고 귀신(鬼神)을 올릴 만한 것이었다. 아! 우리 성상(聖上)의 백성을 근심하는 지극한 덕(德)이 아니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는가?

 

왕세자(王世子)가 경현당(景賢堂)에 좌기(坐起)하여 사수(死囚)의 삼복(三覆)을 행하였다. 대체로 초복(初覆)한 뒤에 먼 도(道)의 죄인(罪人)으로 승복하는 자가 있으면 초복을 삼복하는 전일에 추가로 행하는데, 이날에 이르러 삼복을 다시 행하여 율(律)에 의거하여 감단하였다. 일을 이미 마치자, 장령(掌令) 이봉익(李鳳翼)이 지난번에 아뢴 것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평안 병사(平安兵使) 이택(李澤)은 나이가 많은데다가 또 병이 들어 정력(精力)이 이미 쇠약해졌습니다. 관방(關防)은 중요한 지위이니, 그대로 맡겨둘 수 없습니다. 청컨대, 체차(遞差)하소서."
하였으나, 세자(世子)가 따르지 않았다.

 

11월 24일 무술

한성군(韓城君) 이기하(李基夏)가 졸(卒)하였다. 이기하는 이여발(李汝發)의 아들인데, 중외(中外)를 드나들면서 일컬을 만한 명성과 공적이 없었지만, 군사를 거느린 지 20년에 공명(功名)으로 한평생을 마쳤으니, 남들이 복(福)이 있는 장수로 지목하였다.

 

윤각(尹慤)을 총융사(摠戎使)로 삼았다.

 

11월 25일 기해

충청 감사(忠淸監司) 김흥경(金興慶)이 장계하여 양전(量田)하지 않은 여러 고을은 명년 가을이 되기를 기다려 양전을 마치도록 청하였는데, 비국(備局)에서 복주(覆奏)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11월 26일 경자

강원도(江原道)의 각 고을 백성으로 염병(染病)에 걸려 사망(死亡)한 자가 1천 30여 인(人)이며, 전라도(全羅道)는 염병이 조금 그치기는 했으나 사망한 자는 그래도 1백여 인이라고 도신(道臣)이 아뢰었다.

 

의성 현령(義城縣令) 이진망(李眞望)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영남(嶺南)은 금년에 비록 조금 풍년이 들었다고 말하나, 상도(上道)의 여러 군(郡)은 재해(災害)를 입은 것이 모두 혹독합니다. 의성(義城)이 조금 충실한 편에 들어가지만, 실제로는 역시 흉년입니다. 그러나 신이 생각하건대, 백성들을 비록 구휼해야 한다 하더라도 국가를 풍족하게 하는 수용(需用)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적곡(糴穀)을 받아들이고 세금을 징수하며 밤낮으로 독촉하고, 굶주리고 야윈 이들에게 차마 채찍을 가하지는 못하고 위엄과 협박을 억지로 가하여 전지의 소출과 집안의 것을 모두 내게 하니, 소에 싣거나 사람이 지고서 넘어지는 온갖 형성은 눈에 보이는 것이 걱정스럽고 참혹합니다. 대체로 여기에서 관아와 민간의 심력(心力)이 모두 바닥이 났는데, 옛날의 환상(還上)을 추가하여 바치라는 영(令)을 또 내렸습니다. 신이 초가을 고을에 부임하여 언제나 길가에 파종(播種)하지 않은 전지가 있는 것을 보고 물었더니, 그 전지의 주인이 죽었다고 말하였으며, 파종하고서 김을 매지 않은 것이 있어 물었더니, 그 주인이 병이 들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산마루에 시체를 거적에 싸서 장사지낸 것과 도랑과 구렁에 버려진 시체 등과 전야(田野)와 마을에서 신음하는 부류와 고아(孤兒)·과부(寡婦)가 가슴을 치며 우는 소리는 비록 전쟁으로 살해한 참화(慘禍)라 하더라도 이처럼 혹독한 적은 있지 않았습니다. 저 백성들은 죽지 않았으면 병이 들었으니, 경작하거나 파종한 자는 진실로 10명에 3, 4명도 되지 못하고, 그것도 가뭄에 마르거나 큰물에 잠겨서 그 자신도 먹을 수 없는데, 더구나 조세[征搖]와 부역(賦役)이겠습니까? 금년의 조세와 부역도 오히려 장만할 수 없는데, 더구나 구년(舊年)의 묵은 포곡(逋穀)이겠습니까? 지금 전염병 기운이 다시 발생하여 곳곳에서 치성하므로 이임(里任)이 병자(病者)를 보고하는 글과 상사(上司)에서 포곡을 독촉하는 관문(關文)이 좌우(左右)로 번갈아 이르니, 돌아보건대 어느 사람에게 물으려 하겠으며 어느 곳에다 책임지우려 하겠습니까? 그리고 또 각양(各樣)의 신포(身布)나 여러해 동안의 포세(逋稅)526)  는 이와 같은 것이 매우 많으므로, 여러 고을에서의 첩소(牒訴)와 여러 도(道)에서의 장문(狀聞)이 절실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 묘당(廟堂)의 여러 신하들이 일체 막고 있습니다. 저 묘당의 신하들 역시 일찍이 수령(守令)이 되고 감사(監司)가 되었었는데, 어떻게 백성들의 어려움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면서도 그렇게 못하는 것은 실제로 국가의 경용(經用)을 위해서입니다. 이 때문에 유사(有司)가 된 자는 오로지 토산물을 다 바치지 않아서 백성이 재력(財力)이 여유가 있을까 두려워하여 백성의 단속을 강도(强盜)보다 엄중하게 하고, 포흠(逋欠)의 독촉을 풍화(風火)보다 급하게 합니다. 그래서 옛날 송(宋)나라 사람이 그 임금에게 고(告)하기를, ‘풍년(豐年)이 흉년(凶年)만 못합니다.’고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슬퍼하고 괴로와하는 말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특별히 영지(令旨)를 내려 독촉하는 옛날의 환상(還上)을 맨 먼저 탕감(蕩減)해 주도록 하고, 그 나머지 여러 도(道)의 여러 해 동안 쌓인 포곡(逋穀)을 점차로 덜어 주어 나라의 근본을 튼튼하게 하소서. 양전(量田)은 옛날의 경계(經界)를 정하는 정치로서, 맹자(孟子)가 왕도(王道) 정치를 논함에 있어 반드시 경계를 우선으로 삼는다고 하였으며, 주자(朱子)가 군(郡)을 다스리면서 역시 일찍이 양전법(量田法)을 시행하도록 의논하였으니, 양전하는 법을 누가 감히 의논하겠습니까? 그러나 법이 훌륭하지 않은 것이 아니고, 그것을 행하는 데에 방법이 있어야 합니다. 그 방법은 마땅한 사람을 얻는 데 달려 있는데, 마땅한 사람을 얻는 것이 오히려 적당한 시기를 얻는 것만 못합니다. 어떤 경우를 마땅한 사람을 얻었다고 말하겠습니까? 사람은 반드시 총명하게 사물을 관찰하고 인자하게 남을 용서하는 두 가지 덕(德)을 구비(具備)한 후에야 일을 성취할 수 있고, 소루하고 잔인하여 각박한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기 같은 것은 또한 반드시 천재(天災)가 일어나지 않고 농사가 자주 풍년이 들어서 사방의 백성들이 모두 편안하게 지내며 무사(無事)한 후에 큰 역사를 일으켜 시행해야만 뒷날의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신이 감히 조정에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을 알지는 못하나, 명(命)을 받아 주관(主管)하는 자를 진실로 마땅한 사람을 얻었다고 하겠습니까? 여러 해 동안 큰물과 가뭄이 든 나머지에다 해마다 전염병을 겪은 뒤이므로, 경작하고 파종하는 일을 할 수 없었고, 생산[生殖]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집집마다 한 해 동안의 식량을 내놓아야 하고, 집집마다 갑절이나 되는 이자 돈을 내놓아야 하는데, 더러 죽은 사람을 염습(斂襲)하여 장사지내거나 더러 병든 사람을 구료(救療)해야 하니, 말을 하려면 눈물이 흐릅니다. 그러나 일을 집행하는 자는 도리어 함부로 큰 역사를 일으켜 사방을 거듭 소란스럽게 하며 굶주린 남은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분명(奔命)527)  하는 데에서 괴롭히고, 귀록(鬼錄)528)  에 빠져 헐떡이는 이를 다시 가혹하게 침탈하는 데에서 피곤하게 하니, 마음으로써 말한다면 어질지 못한 데 가깝고 일로써 말한다면 상서롭지 못한 데 관계되지 않겠습니까? 신에게 천식(賤息)529)  이 있는데, 일찍이 매우 어여쁘게 여겼으나, 불행하게도 금년에 모두 독한 전염병에 걸려 지금까지 근육과 뼈가 완전하지 못하고, 기혈(氣血)이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신이 감히 그들에게 괴로운 낯빛을 보이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근심하고 놀라 편안하지 못할까 두려워서이고, 감히 큰 소리로 꾸짖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두려워하여 안정하지 못할까 두려워서이고, 감히 중한 노역(勞役)을 요구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피로하여 불안(不安)해 할까 두려워서이니, 근심하면서 언제나 그들이 죽음의 지역으로 다시 떨어질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지금 사방에서 굶주려 야위고 병들어 쇠약한 것이 어찌 신의 자식과 다름이 있겠으며, 조정에서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또한 어찌 신이 천식(賤息)을 사랑하는 것과 다르겠습니까? 그런데도 말하는 자가 오히려 ‘상심(傷心)할 것이 없다.’고 말하니, 신은 매우 미혹됩니다. 호적(戶籍)에 편입된 백성은 생활하는 도리가 본래 박(薄)하여 그들이 공사(公私) 간에 출납(出納)의 비용과 처자(妻子)의 의복과 음식의 모두를 계산하면, 대개 결복(結卜)530)   사이를 넘지 않는데, 만에 하나라도 차질(蹉跌)이 생겨 높은 등급에 잘못 들게 된다면 열 식구의 목숨은 끝이 나는 것입니다. 전부(田夫)와 농부(農夫)에게 어찌 왕도(王道) 정치에서의 경계(經界)를 정하는 뜻과 맹자(孟子)·주자(朱子)의 글을 모두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침탈하게 되면 원망하고, 동요시키면 비방하고, 격앙(激昻)하면 갑자기 노하는 것은 돌아보건대, 사람마다 모두 잘하는 바입니다. 당(唐)나라 개원(開元)531)   무렵에 배관(裵寬) 등을 나누어 보내어 천하의 전호(田戶)를 조사하게 하였는데, 백성들의 원망이 크게 일어났고, 잇따라 안녹산(安祿山)의 난(亂)532)  이 일어났으며, 송(宋)나라 선화(宣和)533)   말기(末期)에 일찍이 사신을 보내어 하북(河北)과 연경(燕京) 동서로(東西路)의 민전(民田)을 조사 정리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정강(靖康)의 화(禍)534)  가 일어났으며, 도종(度宗) 때에 또 제로(諸路)의 민전을 개량(改量)하였었는데 그때 원(元)나라 군사가 이미 악주(卾州)와 번성(樊城)을 넘어 양양(襄陽)을 포위하였었습니다. 그래서 ‘다만 산하(山河)를 가지고 조각조각 측량한다.’는 말이 지금까지 사람의 마음과 뼈골을 슬프게 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옛날의 군자(君子)는 장차 일을 행하고자 하면, 법제(法制)의 훌륭하고 훌륭하지 않은 것을 논하지 않고, 반드시 먼저 시기와 형세가 적당한가 적당하지 않은가를 살폈던 것입니다. 신이 감히 양전법(量田法)을 헐뜯는 것이 아니며 또한 양전을 시행할 수 없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원하건대, 국가에서 정직한 사람을 거용(擧用)하고 바르지 못한 사람을 물리치며, 시기를 헤아리고 형세를 살펴 장관(長官)이 청렴하고 태수(太守)가 훌륭하여 농사는 풍년이 들고 백성의 살림이 풍족하게 된다면, 그 후에 양전법과 같은 것이 비록 천백(千百) 가지의 조목으로 멋대로 의논하는 자가 행하려고 하는 바를 행한다 하더라도 실제로 방해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천하에서 지극히 고통스러운 것은 인족(隣族)의 부역(賦役)을 대신하는 것보다 더 심한 것이 없으며, 천하에서 지극히 원통한 것은 백골(白骨)의 징포(徵布)보다 더 지나친 것이 없습니다. 대체로 군병(軍兵)이 도망하면 만 10년, 시노비(寺奴婢)가 도망하면 만 15년이 되어야 비로소 징수하지 말도록 허락하는 것이 국가의 정해진 법입니다. 신이 호서(湖西)의 〈재해(災害)를〉 조사하러 나갔을 때에 일찍이 군병으로 도망한 자들을 위하여 연한(年限)을 줄이도록 청하였지만, 사람이 보잘것 없고 언론이 가벼운 까닭에 채택하여 시행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이 고을로 옴에 이르러 시노비(寺奴婢)의 원통하고 고통스러움이 특히 심한 것을 보고, 신이 신의 고을 인구(人口)를 조사해 보니 모두 5만 6천 남짓한데, 그 가운데 2만 1천여 구(口)가 모두 시노비였습니다. 그리고 2만 1천여 구(口) 가운데 또 수천구(數千口)가 모두 유리(流離)하거나 도망하여 인족(隣族)으로 하여금 〈부역을〉 대신 감당하게 하는 자였습니다. 그러니 이 고을 인구의 절반이 시노비이고, 시노비의 인족이 되는 자가 또한 고을 인구의 절반이 되니, 온 고을이 시노(寺奴)의 구실에 시달리지 않는 자가 대체로 얼마 안 됩니다. 그래서 언제나 관문(關文)이 빠르게 하달되면 온 고을이 소문을 듣고 두려워하며 수령이 된 자는 해유(解由)535)  하는 데 끌리고, 아전들은 추론(推論)하는 데 겁을 내어 새벽에 일어나 안찰하고 열람하는 것은 모두 시노(寺奴)의 장부를 조사하고 마감하는 일이며, 뜰에 가득하게 채찍으로 매질하는 것은 모두 시노(寺奴)들의 구실을 징수하도록 독촉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다시 그 한 사람이라도 혹시 빠뜨릴까 두려워하여 엄중한 관문이 다시 이르게 되면, 그 유리(流離)했거나 도망한 자의 호적에서 그 파계(派系)와 친족을 상고하여 그 인보(隣保)536)  를 추포(追捕)하게 하니, 굶주리고 추위에 얼어 병들고 야윈 형상은 귀물(鬼物)과 같습니다. 그 자신은 옷이 없으면서 손에는 면포를 가지고 겹겹으로 뜰아래 나열하여 꿇어앉아 있는데, 힐문(詰問)해 보면 더러 처당(妻黨)의 인척(姻戚) 집안이거나, 더러 며느리의 먼 친척이기도 하고, 더러 성명(姓命)은 모르지만 십수 년(十數年)전에 마침 같은 동리(洞里)에 살았던 자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소민(小民)들은 본래 예의(禮義)가 없어서 그들의 공시(功緦)537)  이하의 친족인 경우 얼굴도 알지 못하는데, 지금 바로 처당(妻黨)의 인척 집이나 며느리의 먼 친척과 10년 전에 마침 같이 살았던 동리의 사람을 위해서 부당한 비용을 거듭 갚은 것이 15년이나 오래 되기에 이르렀으니, 그 고통은 이미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모두 오래 살 수 없으니, 사람이 태어나 늙고 병들어 죽는 사이에 강건(强健)하게 힘껏 일할 수 있는 시기를 계산해 보면, 15년의 햇수를 잘 채울 수 있는 자가 많이 없습니다. 이는 일생 동안 다른 사람을 위해 애써 부지런히 일하여 대신 부역하는 것이니, 그 원통함 또한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 또 무고(無故)한 평민(平民)이 아닌 양인(良人)은 반드시 군적(軍籍)에 예속되고, 천인(賤人)은 반드시 사적(私籍)에 계속(係屬)되는 것과 부처(夫妻)와 자녀(子女)가 모두 공천(公賤)이나 사천(私賤)이 된 자가 매우 많습니다. 그래서 굶주림과 추위를 참아가며 빛을 내고 이자를 빌어 그의 신포(身布)538)  는 이미 다행히 판비(辦備)하면, 그 처자(妻子)에 대한 구실의 징수가 잇따라 이르게 되고, 처자에 대한 구실을 이미 마치면 인족에 대한 몫의 침탈이 또 어지럽게 일어나게 되니, 전지(田地)가 있는 자는 전지를 팔게 되고, 소[牛]가 있는 자는 소를 팔게 되며, 전지와 소를 이미 다 팔고 나면 문득 버리고 다른 지경으로 가게 됩니다. 그러면 고을의 아전이 또 부득이 그 사람의 구실까지 그 이웃과 친족에게 옮기고, 서로 그 기한을 언급하되, 또 15년으로 합니다. 그리고 처음에 조정에서 징수하는 바는 단지 한 사람의 인족에게 하였는데, 그것이 끝에 가서는 한 지경에 거의 미치게 되었으며, 처음에 조정에서 기한한 것은 15년에 지나지 않았은데, 끝에 가서는 장차 수백 년에 걸쳐 끝이 없게 되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저하(邸下)께서는 특별히 숨겨진 폐단을 진념(軫念)하셔서 무릇 인족으로서 침해를 당하는 자에 대해 비록 하루아침에 모두 개혁(改革)시킬 수는 없겠지만, 우선 그 연한을 줄여 다시 10년으로 정하여 한 푼이라도 조금 너그럽게 하는 바탕을 삼으소서."
하였는데, 세자(世子)가 그 글을 묘당(廟堂)에 내렸으나, 끝내 채택하여 시행한 일이 없었다.

 

11월 28일 임인

전(前) 참의(參議) 이상성(李相成)과 전(前) 정언(正言) 성진령(成震齡)을 의금부(義禁府)에 회부하였는데, 조금 있다가 석방하였다. 이상성이 이미 성진령의 탄핵 상소를 받고 상서(上書)하여 스스로 변명하면서 성진령을 배척하여 흉당(凶黨)의 여얼(餘孽)이라고 하자, 성진령이 격고(擊鼓)539)  하여 원통함을 호소하였다. 이에 두 사람이 의금부에 나아가 대질(對質)하였는데, 이상성의 공사(供辭)에는, ‘성진령의 아비 성인동(成麟童)이 일찍이 경신년540)   옥사(獄事)에 들었으며, 상진령의 고조부(高祖父) 성진선(成晉善)은 이들로 하여금 광해조(光海朝) 때 모후(母后)를 폐(廢)하는 흉소(凶疏)에 참여하게 하였으니, 모두 흉당(凶黨)이다.’ 하였으며, 성진령의 공사(供辭)에는, ‘아비가 당초 옥당의 실정에 간섭한 일이 없었고, 성진선의 아들 성하연(成夏衍)이 몰래 가서 흉소에 참여하였던 것은 성진성이 몰랐었다.’고 말하였다. 금오(金吾)에서 옥사(獄事)를 평의(評議)하여 아뢰기를,
"성진령(成震齡)의 공사(供辭)를 살펴보건대, 그의 아비 성인동(成麟童)과 그의 고조부(高祖父) 성진선(成晋善)의 부자(父子)를 흉당(凶黨)이라고 하는 말을 온갖 말로 원통하다고 하소연하였습니다. 그래서 본부(本府)에 간직한 이유정(李有湞)의 추안(推案)을 가져다 상고해 보았더니, 성인동이 이유정의 종에게 고소당하여 과연 체포되었고, 한 차례 형신(刑訊)을 받은 뒤에 석방되었습니다. 그리고 형조(刑曹)의 문안(文案)을 가져다 상고해 보았더니, 성인동이 이유정과는 같은 통내(統內)의 사람으로 기찰(譏察)하지 않았고 즉시 고발하지 않은 죄로 장(杖) 1백 대에 도(徒) 3년에 처해졌다가 일차로 석방되었으니, 당초에 실정을 알았던 사실이 없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의 장배(杖配) 또한 통내(統內)라 하여 여러 사람과 함께 연좌시켰으니, 그가 원통하다고 하소연한 것은 근거가 없지 않습니다. 성진선의 일은 관직(官職)에 임명된 연월일(年月日)이 오래 된 일이므로 확실히 알기 어려운 바가 있고, 성하연이 흉소에 맨 앞장을 섰는데 자신이 엄부(嚴父)가 되어 금지시키지 못하였으며, 신익성(申翊聖)의 일기(日記) 가운데 이이첨(李爾瞻)과 한찬남(韓纘男)의 두 원흉(元凶)과 함께 그의 자질(子姪)이 앞장서서 흉서(凶書)를 만든 것을 열서(列書)하였으니, 이것이 이상성의 말을 불러 들이게 된 까닭입니다. 성진선은 이미 직접 범한 사건이 없으니, 혼조(昏朝)의 청환(淸宦)을 그의 아들이 흉소에 참여한 일로써 흉당(凶黨)으로 돌려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상성은 맞서서 변명하는 글로 인하여 분개한 감정을 이용하여 남의 감추어진 일을 들추어 내었으므로, 매우 놀랄 만한 데 관계되지만, 그가 한 말이 전혀 근거없는 상태에서 새로 만들어낸 것과는 차이가 있으니, 역시 남을 모함한 율(律)로 결단할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함께 석방하소서."
하니, 세자(世子)가 옳게 여겼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진찰을 마치자, 제조(提調)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이번에 친히 지으신 여제문(癘祭文)은 내용이 몹시 슬퍼서 귀신(鬼神)을 감동시킬 수 있었으니, 무릇 그 내용을 듣고서 누군들 감탄하지 않았겠습니까? 다만 문종조(文宗朝)의 극성(棘城)의 제문(祭文) 또한 〈문종께서〉 친히 지으신 것인데, 여러 신하들을 나누어 보낸다는 말이 있었으니, 이는 극성 한 곳에만 그치는 것이 아님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번의 치제(致祭) 또한 다만 북교(北郊)에서만 제사지낼 필요가 없으니, 마땅히 내리신 어제 제문(御製祭文)을 가지고 여러 도(道)에 관원을 보내어 나누어 제사지내게 하되, 삼남(三南)은 합쳐서 한 곳에서 하고, 양서(兩西)도 합쳐서 한 곳에서 하고, 관동(關東)과 관북(關北)도 합쳐서 한 곳에서 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11월 29일 계묘

황해도(黃海道) 여러 고을의 백성으로 염병(染病)에 걸려 한창 앓고 있는 자가 2천 3백여 명이고, 사망(死亡)한 자가 3백여 명이라고 도신(道臣)이 아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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