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62권, 숙종 44년 1718년 12월

싸라리리 2025. 12. 1. 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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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갑진

김상윤(金相尹)을 정언(正言)으로, 박사성(朴師聖)을 검열(檢閱)로, 이교악(李喬岳)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삼았다.

 

세자(世子)가 승지(承旨)를 전옥(典獄)에 보내어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도록 하고, 얇은 옷을 입은 군사들에게 유의(襦衣)를 제급(題給)하게 하였는데, 날씨가 추워졌기 때문이었다.

 

12월 2일 을사

윤봉조(尹鳳朝)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평안도(平安道) 내의 각 고을 백성으로 염병(染病)에 걸려 한창 앓고 있는 자가 4천 5백 50여 명이고, 사망(死亡)한 자는 83명이라고 도신(道臣)이 아뢰었다.

 

12월 5일 무신

설서(說書) 김진상(金鎭商)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가 예조(禮曹)에서 품의하여 결정한 의주(儀註)를 보건대, 단의빈(端懿嬪)의 연제(練祭)를 장차 이달 초7일에 설행(設行)하고, 저하(邸下)께서는 이날 변복(變服)하는 절차가 있는데, 신이 여기에서 적이 의혹(疑惑)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신이 삼가 《예경(禮經)》 상복소기(喪服小記)의 글을 상고하니, 아들이 어머니가 살아 있을 경우 처(妻)를 위하여 담제(禫祭)541)  를 지낸다는 주(註)에, ‘아버지가 살아 있으면 적자(適子)는 처(妻)를 위하여 부장기복(不杖朞服)을 입으며, 부장기복을 입는 경우엔 담제를 지내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처를 위하여 장기복(杖朞服)을 입고 담제를 지내는 것은 실로 3년상의 체제를 갖춘 것인데, 아버지가 살아 있으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아버지가 상사(喪事)를 주관하기 때문에, 아들이 그의 정(情)을 펼 수 없어서 그러한 것일 뿐입니다. 지금 단의빈(端懿嬪)의 상사(喪事)와 제사(祭祀)는 우리 전하(殿下)께서 실제로 주관하셨으므로, 저하(邸下)께서 성복(成服)함에 있어 이미 부장기복(不杖朞服)의 예제(禮制)를 적용하였습니다. 부장기복은 또 담제를 지내지 않는 것이 타당하며, 3년상의 체제를 갖추지 않아야 할 뿐이니, 대체로 연제(練祭)라는 것은 장기복(杖期服)과 담제 절차와 더불어 저절로 한결같이 연관된 일입니다. 그래서 담제가 있으면 연제(練祭)가 있고, 담제가 없으면 연제도 없으니, 연제는 지내고 담제를 지내지 않는 경우는 없으며, 또 담제는 지내지 않으면서 연제를 지내는 경우도 없으므로, 이 두 가지 〈의식은〉 서로 연관되어 나누어서 구별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예(禮)에 비록 아버지가 살아 있으면 부장기복에다 담제를 지내지 않는다고 말하나, 이미 연제를 지내지 않는다는 글이 없으니, 연제는 폐(廢)할 수 없다.’고 하나, 부장기복에는 담제를 지내지 않는 〈예제를〉 아주 알지 못하면서 유독 연복(練服)의 절차를 행하려는 경우에 예(禮) 또한 명문(明文)이 없습니다. 대체로 장기복(杖期服)과 담제는 연제(練祭)와 균일하게 3년상의 체제인데, 더러는 시행하고 더러는 시행하지 않는다면, 마침내 순수하지 못함을 면하지 못하여 미안(未安)한 데에 돌아갈 것입니다. 이로써 논한다면, 저하(邸下)께서는 연복(練服)의 절차가 없으며, 13개월에 이르러 복(服)을 벗는 것이 아마도 《예경(禮經)》의 뜻에 적합할 듯합니다."
하니, 세자(世子)가 대신(大臣)에게 의논하도록 하였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유(李濡)가 말하기를,
"아버지가 살아 있으면 어머니나 처(妻)를 위하여 비록 15개월 만에 상제(喪制)를 마친다 하더라도 실제로 3년상의 체제를 갖춘 것입니다. 그래서 11개월 만에 연제(練祭)를 지내는 것이 바로 기년(期年)의 햇수에 해당된다고 한 것이 《상례비요(喪禮備要)》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부장기복(不杖朞服)은 담제(禫祭)를 지내지 않는다는 데 이르러서는 비록 이것이 담제조(禫祭條)에 논한 바이나, 이미 연제(練祭)를 지내지 않는다는 글이 없으니, 담제를 지내지 않는다 하여 또 연제마저 지내지 않고서 마침내 3년상의 체제를 폐(廢)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하고,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이이명(李頤命)은 말하기를,
"3년상의 제사에 담제(禫祭)가 가장 가볍기 때문에, 시기를 놓치면 시행하지 않는다는 글이 있는데, 어찌 처상(妻喪)에 아버지가 살아 있는 것이 억압이 되어 가벼운 부분은 줄이고 단지 그 중요한 부분만 시행하여 3년상의 체제를 보존하려 하십니까? 예(禮)를 제정한 은미한 뜻은 이미 분명하게 알기 어려운데, 지금 어떻게 《예경(禮經)》에 언급하지 않은 예절을 의리로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하였으며, 다른 대신(大臣)들의 의논도 대략 이와 같았다. 세자(世子)가 영지(令旨)를 내리기를,
"이 일을 대조(大朝)에 우러러 아뢰었더니, 하교하시기를, ‘처상(妻喪)은 11개월만에 연제(練祭)를 지내고, 13개월 만에 대상(大祥)을 지내고, 15개월 만에 담제(禫祭)를 지내는 것은 실제로 3년상의 체제를 갖춘 것이다. 예서(禮書)에 비록 부장기복(不杖朞服)은 담제를 지내지 않는다고 하였지만, 연제(練祭)를 지내지 않는다는 글이 없는데, 지금 만약 당연히 시행해야 할 제도를 폐(廢)한다면, 3년상의 체제를 폐하는 것이니, 어찌 매우 미안(未安)하지 않겠는가? 지난번 정한 날짜에 시행하도록 하라.’고 하셨으니, 여기에 의거하여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이 뒤에 김진상(金鎭商)이 상서(上書)하여 지난번의 말을 고집하였으나, 세자(世子)가 다시 의논할 수 없다고 답하였다.

 

12월 6일 기유

중궁(中宮)의 병환이 있어 수십 일 동안 낫지 않고 위독하므로 약방(藥房)에서 주원(厨院)에 옮겨 직숙(直宿)하였으며, 경은 부원군(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도 대궐 안에서 직숙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말하기를,
"황해도(黃海道)의 수영(水營)을 새로 설치하는 초기에 규모(規模)와 조획(措劃)542)  을 다른 〈수영의〉 수사(水使)가 장부를 조사하여 대신 위임하는 것과는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그런데 수사(水使) 박창윤(朴昌潤)은 단지 한 사람의 평범하고 대수롭지 않은 인물로서 전후(前後)로 벼슬살이 하면서 치적(治績)도 없었으니, 청컨대, 체차(遞差)하소서."
하였으나, 세자(世子)가 따르지 않았다.

 

성균관(成均館)의 유생(儒生)들이 권당(捲堂)하였는데, 세자(世子)가 본관(本館)의 당상관(堂上官)으로 하여금 들어가도록 권면하게 하였다. 이때 태학(太學)에서 진소(陳疏)할 일이 있어 바야흐로 소청(疏廳)543)  을 설치하려 하는데, 사서(司書) 정택하(鄭宅河)가 그 앞을 지나가면서 기꺼이 돌아가며 피(避)하지 않으므로, 여러 유생들이 전예를 끌어대어 종인(從人)을 매질하였다. 정택하가 원례(院隷)를 내보내어 태학 소속의 노복(奴僕)을 잡아다 다스리려고 하자, 여러 유생들이 다시 그 원예를 매질하였는데, 정택하가 마침내 상서(上書)하여 그 상황을 진달하기를,
"본원(本院)의 하례(下隷)는 비록 법사(法司)라 하더라도 마음대로 매질할 수 없는 것이 전예인데, 대체로 그들의 동궐(銅闕)을 드나들어 사체(事體)가 액예(掖隷)544)  와 그다지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성균관 유생[泮儒]들의 행동은 또한 매우 무엄(無嚴)합니다."
하였다. 이에 태학(太學)의 여러 유생들이 서로 뒤따라 권당(捲堂)하니, 세자(世子)가 대사성(大司成) 홍치중(洪致中)으로 하여금 권면하며 타이르게 하였는데, 여러 유생들이 마음속에 품은 바를 적어 올리기를,
"가령 액예(掖隷)가 성묘(聖廟)545)  에서 소란을 일으키면 여러 유생들이 심하게 억제시키는 것은 진실로 불가함이 없는데, 정택하가 스스로 액예에게 붙좇아 힘을 얻는 계책을 삼으려고 하니, 청조(淸朝)의 시종(侍從)하는 반열에 이렇게 비루하고 좀스러운 말이 있을 줄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정택하의 아비 정식(鄭湜)은 여러해 동안 거재(居齋)하였고, 정택하 또한 하재(下齋)에 기식(寄食)하다가, 부자(父子)가 출세한 지 수년(數年)에 지나지 않는데, 제가 어찌 감히 공공연히 추잡하게 헐뜯으며 현관(賢關)546)  을 업신여기고 짓밟기를 이와 같이 아주 심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세자(世子)가 다시 권면하고 타이르도록 하니, 여러 날 만에 여러 유생들이 비로소 도로 명륜당(明倫堂)으로 들어갔다.

 

강화부(江華府)의 백성으로 염병(染病)에 걸려 한창 앓고 있는 자가 5백 61명이고, 사망(死亡)한 자는 96명이며, 개성부(開城府)에는 한창 앓고 있는 자가 4백 40명이고, 사망한 자가 71명이라고 두 지역의 수신(守臣)이 아뢰었다.

 

12월 7일 경술

단의빈(端懿嬪)의 연제(練祭)를 행하였는데, 세자(世子)가 대궐 안에서 망곡(望哭)하였다.

 

충청도(忠淸道) 연풍현(延豊縣) 각연사(覺淵寺) 법당(法堂)의 세 불상(佛像)이 동시에 땀을 흘렸는데 마치 비가 뿌리듯 하였으며, 솜으로 닦으면 닦는 대로 즉시 땀이 나왔다고 도신(道臣)이 아뢰었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지난번에 아뢴 것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일역(日域)547)  에 전대(專對)548)  하는 임무는 반드시 한 시대에 가장 뛰어난 인재를 선발해야 하는데, 통신 부사(通信副使) 정사효(鄭思孝)는 지난 경력(經歷)이 이미 가벼워 물정(物情)에 맞지 않으니, 청컨대, 개차(改差)하소서. 그리고 왜인(倭人)을 접대하는 차비 역관(差備譯官)이 마패(馬牌)를 받아 나갈 적에는 자연히 기한이 있는데, 대부분 사사로운 일로 인하여 해가 지나야 돌아오고, 다니는 것이 일정한 기간이 없어 역로(驛路)에 폐해를 끼치고 있습니다. 청컨대, 역관(譯官)을 발송(發送)하여 날이 찬 뒤에는 상서원(尙瑞院)에서 마패(馬牌)를 추납(推納)하게 하되, 만일 기한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종중 과죄(從重科罪)하게 하소서."
하니, 세자(世子)가 단지 끝 부분의 일만 따랐다.

 

12월 9일 임자

박사성(朴師聖)을 검열(檢閱)로 삼았다.

 

12월 10일 계축

장령(掌令) 송사윤(宋思胤)이 상서(上書)하여 청하기를,
"조령 산성(鳥嶺山城)을 증축(增築)하고, 기계(器械)를 수선 완비(完備)하게 하고, 양식을 넉넉하게 저축하도록 하소서."
하고, 또 논핵(論劾)하기를,
"충청 도사(忠淸都事) 이자(李滋)는 임지(任地)에 도착한 이후로 놀랄 만한 행동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복심(覆審)을 빙자하여 사사로운 원수를 통쾌하게 갚았으니, 삭출(削黜)함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영변 부사(寧邊府使) 장한상(張漢相)은 사람 됨됨이가 간사하고 교활하고 행실이 이미 탐욕스럽고 비루하여 장사치들과 결탁하였고, 관기(官妓)에게 고혹(蠱惑)되었으니, 청컨대, 파직(罷職)시키소서."
하고, 또 청하기를,
"초입사(初入仕)는 반드시 내관(內官)이나 외관(外官) 2품(品) 이상의 관원으로 하여금 세수(歲首)에 각기 한 사람씩 추천하게 하되, 명망과 실제가 부합되지 않은 자는 그 천주(薦主)549)  를 연좌시키게 하소서."
하였는데, 세자(世子)가 따르지 않고, 조령 산성 및 사람을 추천하는 일은 묘당(廟堂)에 내렸으나 채용(採用)한 바가 없었다.

 

세자(世子)가 영지(令旨)를 내리기를,
"부교리(副校理) 김취로(金取魯)가 한 번 정택하(鄭宅河)에게 배척당한 뒤부터 정세(情勢)를 불안(不安)하게 여겨 관직(館職)을 스스로 단념하였는데, 참혹하게 무멸(誣衊)550)  받은 것을 내가 이미 환하게 알고 있으니, 개석(開釋)하는 바가 있어야 하겠다. 그리고 부수찬(副修撰) 조관빈(趙觀彬)이 지난번 한상서는 비록 과격(過激)하였으나, 조정에서 심하게 나무란 것도 본래 부당하였다. 조관빈이 어찌 이것을 가지고 스스로 일을 폐지한 채 한결같이 자기 주장만 고집하며 공무를 집행할 의사가 없으니, 염우(廉隅)가 너무 지나친 데에 돌아가게 됨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모두 정도에 지나친 것이다. 성상의 전교가 언제나 이와 같으셨으니, 내가 감히 받들지 않겠으며, 양신(兩臣) 또한 어찌 생각을 바꾸지 않겠는가마는, 각별히 거듭 신칙하여 그들로 하여금 즉시 직무를 보살피도록 하라."
하였으나, 양신(兩臣)이 끝내 명(命)을 받들지 않았다.

 

12월 12일 을묘

토성(土星)이 저성(氐星)으로 들어갔다.

 

윤석래(尹錫來)를 헌납(獻納)으로, 이택(李澤)을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로, 이상집(李尙)을 평안도 병마 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로 삼았다.

 

충청도(忠淸道) 각 고을의 백성으로 염병(染病)에 걸려 한창 앓고 있는 자가 1천 4백 80여 명이고, 사망(死亡)한 자가 2백 60명이라고 도신(道臣)이 아뢰었다.

 

수어사(守禦使) 조태구(趙泰耉)를 체임시키고 민진후(閔鎭厚)를 대신하게 하였다. 조태구가 수어사가 된 지 여러 달이 되었으므로, 임금이 여러번 책망하는 유시(諭示)를 내려 출사(出仕)하도록 권면하였으나, 끝내 부신(符信)을 받지 않으므로, 세자(世子)가 마침내 그를 체임시켰다.

 

전라 감사(全羅監司) 홍석보(洪錫輔)가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양전(量田)은 국가의 큰 일이니, 형세를 인하여 잘 인도하여 자진해서 움직이도록 격려하고 권면하는 것만함이 없습니다. 신이 물정을 널리 캐어 새로 기경(起耕)한 〈전지에 대하여〉 3년 동안 세금을 부과하지 말라는 주청을 갖추어 진달하였으나, 간혹 그 세금을 견감(蠲減)하는 것을 아깝게 여기는 중론(衆論)을 염려하여 마침내 계사년551)  의 포적(逋糴)을 보충한다는 뜻으로 논열(論列)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비국(備局)에서 다시 아뢰었으나, 청한 바를 준허(準許) 받지 못하게 됨에 이르러 신이 다시 진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조정에서 특별히 덕음(德音)을 반포하여 새로 부과한 세금을 혼쾌하게 감해 주어 즉시 거행하게 한다면, 백성들이 즐거이 나아가느라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비록 이처럼 전염병이 점차로 번지는 지역이라 하더라도 그 중 병들지 않은 자들은 틀림없이 앞으로 무리를 지어 일어나 그 일을 따를 것입니다. 이를 시행하여 실제로 효과가 없다면 신이 비록 망령되이 말한 죄로 복주(伏誅)된다 하더라도 마음에 달갑게 여길 것입니다. 그리고 본도(本道)에서 갑술년552)  에 양전(量田)한 자[尺]가 아직도 광주목(光州牧)에 있는데, 지부(地部)에서 내려 보낸 새 자[新尺]와 비교해 보았더니, 한 치[寸]가 더 길었습니다. 양전청(量田廳)에서 반드시 준수척(遵守尺)의 제도를 고쳐서 사용하려는 것은 진실로 보존하려는 바가 있으나, 다만 본도의 사세(事勢)는 일률적으로 논할 수 없는 바가 있습니다. 그 당시 양전사(量田使) 박황(朴潢)이 새로 만든 자가 옛날에 있던 자보다 한 치가 길다는 뜻으로 치계(馳啓)하자, 인조 대왕(仁祖大王)께서 특별히 대신(大臣)에게 수의(收議)하도록 명하여 새 자를 사용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옛날의 표시가 지금도 완연(宛然)한데, 갑자기 조금 짧은 새 자로 구결(舊結)을 고쳐서 측량한다면, 한 치가 더 긴 부분에 대해서는 모두 장차 세금이 불어날 것이므로, 원근(遠近)에서 놀라고 촌려(村閭)에서는 잇따라 소란스러울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다시 준수척을 고수(固守)하려고 하지 말고, 한결같이 성조(聖祖)께서 일찍이 시행한 성규(成規)를 따라 그대로 구척(舊尺)을 사용한다면, 전(傳)에 이른바, ‘선왕(先王)의 법을 따랐다가 지나친 적은 없다.’고 한 것이 아마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듯합니다."
하였는데, 세자(世子)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충청도(忠淸道)의 수신(帥臣)이 상당 산성(上黨山城)의 물력(物力)이 넉넉하지 못하다 하여 공명첩(空名帖) 수백(數百) 통(通)을 얻기를 원하니, 비국(備局)에서 복주(覆奏)하여 그대로 허락하였다.

 

12월 14일 정사

사헌부(司憲府)에서 말하기를,
"영변 부사(寧邊府使) 장한상(張漢相)은 사람됨이 간사하고 교활하여 단지 윗사람을 잘 섬기는 일로써 출세하였는데, 장사치들과 서로 결탁하였고, 관기(官妓)에게 미혹되어 정치를 뇌물로써 성사(成事)시키려고 하니, 백성들이 명령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청컨대, 파직(罷職)시키고 서용(敍用)하지 못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세자(世子)가 따르지 않았다.

 

12월 15일 무오

약방(藥房)에서 임금의 환후(患候)가 더함이 있다 하여 우선 상전 개탁(上前開拆)을 정지하도록 청하자,【해마다   전최 계본(殿最啓本)553) 은 개봉하지 않고 입계(入啓)하면 임금이 직접 뜯어서 상고하여 열람하고 내려 주기 때문에 그것을 상전 개탁(上前開拆)이라고 한다.】  임금이 포폄(褒貶)554)  은 다른 일과 차이가 있으므로, 하룻밤을 넘길 수 없다는 것으로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함경도(咸鏡道) 각 고을에 염병(染病)으로 한창 앓고 있는 자가 4천 5백 70여 명이고, 사망(死亡)한 자가 1천 2백 43명이며, 경상도(慶尙道) 각 고을에 염병으로 한창 앓고 있는 자가 2천 3백 1명이고, 사망한 자가 3백 46명이며, 소[牛]가 전염병으로 죽은 것이 1백 30여 두(頭)라고 도신(道臣)이 아뢰었다.

 

12월 16일 기미

사헌부(司憲府)에서 지난번에 아뢴 바를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잡직(雜職)으로 일정한 달수가 차서 천전(遷轉)하는 자는 정직(正職)555)  을 임명할 수는 있으나, 이러한 무리를 이미 경사(京司)의 결송관(決訟官)이나 지방의 수령[守宰]으로 임명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각 관사(官司)에 벌여 있어 이동시킬 방법이 없는데다 점차로 승륙(陞六)556)  하는 자들이 앞뒤로 서로 잇달고 있으므로 항상 막힐 것이 염려되니, 변통(變通)하여 편리하게 소통시키는 방법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청컨대, 잡과(雜科)나 잡기(雜歧)로 승륙(陞六)한 사람은 모두 송서(送西)하여【송서(送西)하는 것은 서전(西銓)에 보내어   군함(軍銜)557) 을 부여하는 일인데, 이조(吏曹)를 동전(東銓)이라 하고 병조(兵曹)를 서전(西銓)이라 한다.】  사과(司果)를 부여하고, 동반(東班)의 정직(正職)으로는 임명하지 말도록 하소서. 그리고 요즈음에 와서 공물 연조(貢物年條)를 매매(買賣)하는 일이 많이 있는데, 심지어 진휼청(賑恤廳)과 경리청(經理廳)의 차인(差人) 또한 연조를 많이 사들여 이익을 남기는 자료로 삼고, 주모자의 이름을 바꿔가면서 책판(責辦)하는 데에 현혹되어 있습니다. 또 더러는 수삼 년의 가미(價米)를 미리 주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변통하여 바꾸게 하면서 그전의 값은 빼놓고 있으니, 청컨대, 과조(科條)를 엄중하게 세워 연조를 매매할 수 없도록 하소서. 왕정(王政)에 있어서 시급히 해야 할 바는 언제나 이익이 생기는 근원을 막는 것인데, 해마다 흉년이 들어 공사간에 텅 비었으나, 모두 이익을 취하는 것으로 업무를 삼고 있습니다. 각 상사(上司)에서는 감영(監營)·병영(兵營)과 주현(州縣)의 방납(防納)하는 이익을 잡아채고, 감영과 병영에서는 소민(小民)들의 흥판(興販)하는 이익을 잡아채며, 심지어 수령이 된 자들은 전곡(錢穀)을 민간(民間)에 나누어 주고서 이익을 늘리고 나머지를 취하는 것으로 능사(能事)를 삼고 있는데 관청의 위엄을 빙자하여 강제로 이자를 갑절이나 바치게 합니다. 청컨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사목(事目)을 명백히 반포하여 일체 금단(禁斷) 시키도록 하소서."
하니, 세자(世子)가 따르지 않고, 잡직(雜職)을 6품(品)으로 승진시키는 일 이하 3건(件)은 전조(銓曹)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이 뒤에 잡직을 송서(送西)하는 일은 과연 시행되지 않았고, 연조(年條)를 매매하는 일 및 이익을 늘리는 일은 모두 거듭 금지시켰지만, 끝내 그 폐단을 근절시킬 수가 없었다.

 

12월 17일 경신

사헌부(司憲府)에서 지난번에 아뢴 일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우림위 장(羽林衛將) 유성기(柳聖基)의 첩(妾)이 옥교(屋轎)를 탔다가 금리(禁吏)에게 잡히는 데에 이르렀습니다. 만약 엄격하게 징계하지 않으면, 기강(紀綱)을 진작시키고 명분(名分)을 엄중하게 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유성기를 파직(罷職)시켜 서용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고 유성기의 첩(妾)이 옥교를 타다가 잡힌 뒤에 감찰(監察) 조담(趙淡)이 감히 용납하여 비호할 마음을 내어 금리(禁吏)를 죄주려고 사사로이 구류(拘留)시키도록 하였습니다. 청컨대, 조담을 태거(汰去)하소서."
하였는데, 세자(世子)가 단지 유성기(柳聖基)와 조담(趙淡)의 일만 따랐다.

 

조언신(趙彦臣)을 사간(司諫)으로, 조태구(趙泰耉)를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김운택(金雲澤)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삼았다.

 

12월 18일 신유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는데,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유(李濡)가 함께 입시(入侍)하였다. 진후(診候)를 마치자, 이유가 말하기를,
"탕춘대(蕩春臺)의 성역(城役)은 이제 곧 완전히 마무리 단계에 있어서 이 뒤로 20일을 지나지 않아 일을 마칠 수 있을 것입니다. 처음에 흙으로 쌓기로 결정하였었는데, 그 곳에 잡석(雜石)이 매우 많은 것을 계산해서 돌로 쌓는 것이 더 쉽기 때문에 바야흐로 잡석으로 쌓고 있으며, 동편은 민진원(閔鎭遠)이 연중(筵中)에서 시험삼아 도성(都城)의 주맥(主脈)이라는 말로써 지사(地師)에게 물어서 흙으로 쌓아야 한다고 주청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벌써 물어 보았는가?"
하였다. 제조(提調)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여러 지사(地師)가 모두 말하기를, ‘등성마루 가장자리로 나아가 붙여서 쌓으면 조금도 주맥(主脈)을 구멍을 뚫어야 하는 염려가 없다.’고 하였으며, 흙으로 쌓으면 더욱 방해됨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흙으로 쌓도록 명하였다. 이유(李濡)가 또 말하기를,
"신(臣)이 언제나 양전(量田)을 정지하자는 의논은 불가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경우는 기근(飢饉)이 거듭된 나머지 전염병의 기운이 또 치성한데, 형세가 겨울철이 되기 전에 미처 시행하지 못하였으니, 반드시 앞으로 봄철까지 끌고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근에다 병든 백성들이 또 농사철을 만나게 되면, 폐단(弊端)을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니, 우선 양전하는 역사를 정지시키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그리고 양전청(量田廳)으로 하여금 절목(節目)을 상세하게 강구하여 가을철이 되기를 기다려 다시 거행하게 하는 것이 아마도 적당할 듯합니다."
하고,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도 잇따라 그렇게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인정(仁政)은 반드시 경계(經界)를 정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고 하였는데, 지금 개량(改量)하는 일은 남는 전결(田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다. 대체로 양전을 시행하지 않은 지 이미 오래 되어 전정(田政)이 문란하여 제때에 시행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뜻을 결정하여 먼저 삼남(三南)에다 시험하였으나, 감사(監司)와 수령(守令)으로서 한 사람도 시행하려는 자가 없으니, 비록 시절이 태평하고 농사가 풍년이 든 때라 하더라도 어찌 양전을 시행할 희망이 있겠는가? 다만 지금의 형세는 정말로 일을 성취시키지도 못하고 한갓 폐단만 있게 될 근심만 있으니, 우선 정지시키는 것이 적당하겠다."
하였다. 이이명(李頤命)이 또 청하기를,
"양전 당상(量田堂上)을 한 사람 더 차출하여 제때에 삼남(三南)에다 파견하도록 하소서."
하고, 민진원(閔鎭遠)은 말하기를,
"이보다 앞서 양전 때에는 균전사(均田使)를 모두 가선 대부(嘉善大夫) 당상관(堂上官)으로 차출(差出)하였습니다. 지금 만약 정경(正卿) 세 사람을 동시에 내보내어 오래도록 지방에 머물게 한다면, 조정의 중대한 업무를 오랫동안 폐지하게 될 것이니, 매우 염려할 만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때 가서 다시 품처(稟處)하도록 명하였다.

 

12월 19일 임술

평안도(平安道) 함종(咸從)의 절부(節婦) 소근아지(小斤阿只)를 정려(旌閭)하도록 명하였다. 소근아지는 함종의 천인(賤人)인데, 같은 고을의 임만규(任萬規)가 본래 호강(豪强)하여 소근아지의 아름다운 용모를 보고 그가 혼자 거처하는 틈을 타서 강제로 그를 핍박하자, 소근아지가 극력 항거하며 분개하여 욕하기를 그치지 않다가 마침내 그에게 살해당하였다. 도신(道臣)이 그 상황을 아뢰자, 임만규는 주살(誅殺)하고 소근아지는 특별히 정려하게 하였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민진후(閔鎭厚)가 상서(上書)하여 탕춘대(蕩春臺)에 성(城)을 쌓을 수 없음과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지킬 수 없음을 극력 말하고, 인해서 옛날에 북한산성을 쌓도록 주청한 자신을 책망하기를,
"이 일이 있은 이래(以來)로 무릇 국가의 재정(財政)을 소모시키고 국가의 체모를 떨어뜨렸으며 나라 사람들의 말이 떠들썩했던 것은 모두 거론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유독 신이 매우 부끄럽게 여기고 매우 한(恨)스럽게 여기는 것은 신이 만약 애당초 북한산성 쌓는 일을 주청하지 않았었다면, 반드시 더욱 일이 여러 갈래로 생겨 이와 같이 일을 그르치게 되는 죄를 이루어 도피할 수 없는 데 이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형장(刑章)을 시행하여 나라 사람들에게 사죄(謝罪)하게 하소서. 인하여 생각하건대 국가의 큰 계책은 벌써 그릇되었습니다. 만일 병혁(兵革)의 경보(警報)가 있더라도 결단코 종묘 사직을 받들고 북한산성으로 들어가 반드시 위태롭게 되는 길을 취할 수는 없습니다."
하니, 세자(世子)가 3품관(三品官)인 문신(文臣)과 일찍이 시종(侍從)을 지낸 무신(武臣) 및 일찍이 곤수(閫帥)를 지낸 자 이상으로 하여금 조당(朝堂)558)  에 모여 의논하게 하였다. 처음에 장차 을축일559)  에 모여 의논하려 하였는데, 임금의 환후(患候)가 마침 위중해졌으므로 마침내 그 기일을 물리게 하였다.

 

12월 21일 갑자

김진상(金鎭商)을 지평(持平)으로, 황흠(黃欽)을 판윤(判尹)으로, 박사익(朴師益)을 헌납(獻納)으로, 조명봉(趙鳴鳳)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12월 23일 병인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고, 달무리가 토성(土星)을 둘렀다.

 

장씨(張氏)560)  의 천장지(遷葬地)를 광주(廣州) 진해촌(眞海村)으로 정하도록 명하였다. 처음에 함일해(咸一海)가 상서(上書)하여 인장리(仁章里)의 묘지(墓地)는 불길(不吉)하다고 논하고, 여러 사람의 의논 또한 결점이 많다고 여겼으나, 임금이 이미 천장(遷葬)하도록 명하였었다. 예조 참의(禮曹參議)가 지사(地師)로 이름이 드러난 자 10여 인을 거느리고 길지(吉地)를 기내(畿內)에서 두루 구한 것이 1년이나 되었는데, 처음으로 수원(水原)의 청호촌(靑好村)과 광주(廣州)의 진해촌(眞海村) 두 곳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수원은 비방과 칭찬이 여러 갈래로 많았으므로, 마침내 여러 지사(地師)의 산(山)에 대한 평론(評論)을 갖추어 아뢰자, 임금이 진해촌으로 정하도록 명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초상(初喪) 때의 예에 의거하여 예장(禮葬)을 행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12월 24일 정묘

도목 정사(都目政事)를 장차 무진일561)  에 행하려고 하였는데, 임금의 환후가 더 위중해졌으므로, 약방(藥房)에서 조섭(調攝)하는 데 방해가 될까 두려워하여 두 차례나 아뢰어 물려서 정월(正月)에 행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지 아니하고 하교하기를,
"도목 정사(都目政事)는 지금 물려서 시행할 필요가 없으나, 3일 동안 나누어 개정(開政)하는 사이에 세자(世子)가 공사(公事)를 품정(稟定)하면, 안후(眼候)와 포만(飽滿)562)  한 증세에 매우 해로움이 있으니, 무릇 공사에 관계되는 것은 정사(政事)를 끝내는 기한까지 우선 받아들이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다는 변고(變故) 때문에 마음속에 품었던 바를 계진(啓陳)하기를,
"대소(大小)의 신공(臣工)563)  들이 각기 헛되이 세월만 보내면서 모여들어 일을 성취하는 성과는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계책이 전혀 진작(振作)되지 않아 기강(紀綱)이 무너지고 해이해지는 근심이 극도에 달했습니다. 유은(幽隱)564)  을 찾지 않으므로 인재(人才)가 엄체(淹滯)되는 탄식이 있고, 사치가 품습을 이루어 습속(習俗)이 날마다 허물어지는 폐단이 많습니다. 수령(守令)은 백성들의 기쁨과 슬픔이 관계되는데, 적합한 사람을 얻지 못하여 피해가 구석진 촌락에까지 미치고, 첨괄(簽括)565)  은 바로 군국(軍國)의 중요한 업무인데, 여러 가지로 침범하여 거두어들이므로, 원망이 여러 도(道)에 두루 퍼져 있으니, 무릇 이러한 몇 가지는 모두 하늘의 화기(和氣)를 손상시키고 하늘의 재앙을 불러 들이기에 충분합니다."
하고, 인하여 청하기를,
"한 마음에 우선하여 만사(萬事)에다 미루어 가며 춘궁(春宮)을 면려(勉勵)하여 부지런하고 공경하게 하고, 이로써 뭇 신하들을 진작(振作)시켜서 미천한 백성들이 은혜에 젖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경계를 진달한 것이 매우 절실하니, 유념[留心]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도목 정사(都目政事)를 행하여 신절(申晢)을 정언(正言)으로, 조영세(趙榮世)를 사서(司書)로, 홍현보(洪鉉輔)를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12월 26일 기사

신시(申時)566)  와 유시(酉時)567)  에 햇무리하였는데, 햇무리 위에 배(背)가 있었다.

 

도목정(都目政)을 행하여 박사익(朴師益)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삼았다.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김상옥(金相玉)과 부교리(副校理) 황귀하(黃龜河)가 무지개의 변고(變故)로써 차자(箚子)를 올려 공경과 태만한 데 대한 경계와 〈덕(德)에〉 나아가고 〈업(業)을〉 닦는 방법을 진달하고, 덧붙여 시사(時事)를 논하기를,
"모든 신하들이 공무(公務)를 게을리하여 세월만 헛되이 보내고 있습니다. 위로 숭반(崇班)에서부터 아래로 대각(臺閣)에 이르기까지 사람마다 병(病)이 났다고 말하며 부산하게 정고(呈告)하는데, 심지어 비국(備局)의 여러 재상(宰相)들은 언제나 일차(日次)를 당하면 문득 신병(身病)을 핑계대어 대부분 자리가 가지런하지 않다는 것으로 탈품(頉稟)568)  하기에 이르니, 이와 같이 하고서도 국가의 일을 경영하며 이때의 난국(難局)을 구제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후사(喉司)의 신하들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入侍)하는 것이 이미 구례(舊例)가 있으니, 이렇게 대로(代勞)하는 날을 당하여 그들로 하여금 각기 해당 문서(文書)와 크고 작은 장독(章牘)을 가지고 자주 입대(入對)하여 낱낱이 아뢰게 해서 조금이라도 지체됨이 없게 한다면, 반드시 모든 업무를 분명하게 익히는 데 한 가지 도움이 되지 않지는 않을 것입니다. 조정에서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사람에게 내리는 혜택이 아래에까지 미치지 않는 것은 실제로 백성들과 가까운 관원이 성실을 다하여 무마(撫摩)하지 못하는 데 말미암아 그러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의 현명하고 현명하지 않음은 오로지 처음 벼슬하는 사람을 가려서 보내는 데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분경(奔競)569)  을 힘쓰고 요행을 바라는 길을 막기가 어렵습니다. 청백리(淸白吏)·공신(功臣)·전쟁에서 죽은 자의 적장자(嫡長子)를 거두어다 기용하는 것은 바로 바꿀 수 없는 영갑(令甲)이나, 정조(政曹)에서 전혀 구별(區別)하지 않고 뒤섞어서 모두 의망(擬望)하므로, 인연(夤緣)하여 진출하려는 풍습이 날마다 점점 자라고 있으니, 명확하게 법식(法式)을 정하여 구투(舊套)를 엄격히 혁파해야 마땅합니다. 만약 수령으로서 십고 십상(十考十上)570)  이고 여러 차례 잇따라 포계(褒啓)571)  에 오른 자는 특별히 조용(調用)하라는 전교를 늘 전조(銓曹)에 내리지만, 마치 전례(前例)를 좇는 것으로 보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받들어 행하는 일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더러 탐오(貪汚)와 불법(不法)으로 수의(繡衣)572)  의 염문(廉問)하는 가운데에 들었던 자를 조사하여 그전처럼 기용하니, 사사로운 뜻이 너무 지나쳐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습니다. 수의(繡衣)의 염문은 진실로 수령이 두려워하여 꺼려하는 것인데 3,4년 사이에 겨우 한 차례 발송(發送)하니, 돌아온 뒤에는 여러 고을에서 문득 곧바로 해이(解弛)해져 여러 가지의 범과(犯科)가 마침내 돌아보거나 꺼려함이 없습니다. 신 등의 생각으로는 언제나 세초(歲初)에 다수(多數)를 초계(抄啓)573)  하여 한꺼번에 여러 도(道)에다 두루 보낼 필요 없이 단지 한두 고을만 골라서 불시(不時)에 파견하고, 그 복명(覆命)을 기다렸다가 다시 다른 곳으로 보내어 돌아가면서 출입(出入)하게 하고, 서로 번갈아가며 왕래(往來)하게 하여 소문이 이르는 곳에 언제나 어사(御史)가 그 경내(境內)에 있는 것처럼 하면, 여러 고을에서 두려워하며 그치는 것이 일정한 때가 없어 그만두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태복(太僕)과 지부(地部)는 경아문(京衙門)의 풍부한 곳이라고 본래부터 일컫는데, 낭관(郞官)으로 소속되었던 자가 지방의 고을로 임명을 받았을 경우 조금만 그의 뜻에 차지 않는 바가 있으면, 싫어하여 회피하고자 청촉(請囑)을 꾀해 그대로 머물러 있는 데 이릅니다. 비록 관장하고 있는 긴요한 업무가 어떠한 것인지 알지는 못하나, 자주 그대로 머물기를 청하는 것은 아마도 사체(事體)에 손상됨이 있을 듯합니다."
하자, 세자(世子)가 답하기를,
"기근(飢饉)과 전염병이 해마다 잇따라 백성들의 근심이 아주 심한데, 예사롭지 않은 재해(災害)가 또 이러한 즈음에 나타나니, 허물을 자신에게 돌려 스스로 반성하며 밤낮으로 매우 두려워하고 있다. 경악(經幄)의 신하가 경계를 진달한 것이 간절하고 지극하므로, 내가 매우 가상(嘉尙)하게 여기는데, 체념(體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가운데 의논하여 처리해야 할 일은 묘당(廟黨)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는데, 비국(備局)에서 복주(覆奏)하여 아뢰기를,
"수의(繡衣)가 염문(廉問)하는 한 가지 사항은 오로지 성상(聖上)께서 그때에 다달아 요량해서 처리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승지(承旨)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入侍)하는 것은 옛부터의 전례이며, 또 재결(裁決)하는 데 지체됨이 없어 유익(有益)하다는 것도 오로지 저하(邸下)께서 더 마음을 써서 받아들이는 데 달려 있습니다. 처음 벼슬하는 자가 분경(奔競)하는 풍습과 적장자(嫡長子)와 적손(嫡孫)을 뒤섞어서 천거하는 폐단은 전조(銓曹)에 거듭 신칙(申飭)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태복(太僕)과 지부(地部)의 낭관(郞官)은 긴요한 연고가 있지 않으면 일체 번거롭게 유임[仍任]을 품지(稟旨)하지 말도록 하는 뜻을 청컨대 두 아문(衙門)에 분부(分付)하소서."
하니, 세자(世子)가 옳게 여겼다.

 

유성(流星)이 규성(奎星) 아래에서 나와 서방(西方)으로 들어갔다.

 

도목 정사(都目政事)를 행하여 조관빈(趙觀彬)을 부교리(副校理)로, 조상경(趙尙絅)을 부수찬(副修撰)으로, 김취로(金取魯)를 수찬(修撰)으로, 신사철(申思喆)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송만(宋墁)을 장령(掌令)으로, 황선(黃璿)을 헌납(獻納)으로, 이택(李澤)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이야(李壄)를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로, 이희조(李喜朝)를 좨주(祭酒)로 삼았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송만(宋墁)은 늙어서 이미 정신이 매우 혼미하고, 지위와 명망 또한 가벼운데, 외람되게 대간(臺諫)의 선발에 통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놀랍게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70책 62권 42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48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 인물(人物)
사신(史臣)은 논한다. 송만(宋墁)은 늙어서 이미 정신이 매우 혼미하고, 지위와 명망 또한 가벼운데, 외람되게 대간(臺諫)의 선발에 통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놀랍게 여겼다.

 

12월 28일 신미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진후(診候)를 마치자, 제조(提調)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외방이 각 고을에서 진휼청(賑恤廳)에다 당연히 납부해야 할 전곡(錢穀)을 관문(關文)을 보내어 재촉하였으나, 한 고을도 거행하는 자가 없습니다. 청컨대, 전화(錢貨)는 두 달을 기한하고, 미곡(米穀)은 넉 달을 기한하되, 수송(輸送)하지 않는 경우 해당 감색(監色)574)  을 영문(營門)에서 엄중하게 형벌을 가하고, 수령(守令)은 파출(罷黜)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말하기를,
"성(城)을 쌓는 데 대한 회의(會議)는 성상의 환후(患候)가 조금 차도가 있기를 기다려 해가 바뀐 뒤에 거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런데 3품(品) 이상의 관원이 1백여 인(人)에 이르도록 많으니, 하루 동안에 마음에 품은 바를 적어 올리면 수응(酬應)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니, 지금 만약 날짜를 나누어 행하여 첫날에는 3품의 관원이 헌의(獻議)하고, 다음날에는 2품 이상의 관원이 헌의한다면, 편리하고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12월 30일 계유

황해 감사(黃海監司) 이덕영(李德英)이 상소(上疏)하여, 본도(本道)의 기근(飢饉)과 전염병의 상황을 말하고, 진휼청(賑恤廳)의 돈 3, 4만 냥(兩)과 호조(戶曹)의 공물가미(貢物價米)를 얻어서 요리하여 진휼(賑恤)에 보충하기를 원하고, 또 본도의 상정미(詳定米)는 절반을 돈으로 대신 바치게 할 것을 청하자, 세자(世子)가 묘당(廟堂)에 내렸는데, 묘당에서 복주(覆奏)하니, 다만 재령(載寧)·신천(信川)·봉산(鳳山) 등 세 고을의 재해가 더욱 심한 곳의 적곡(糴穀)만 절반으로 감하도록 허락하고, 나머지는 모두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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