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63권, 숙종 45년 1719년 1월

싸라리리 2025. 12. 1. 08:04
반응형

1월 1일 갑술

일식(日食)하였다.

 

어유귀(魚有龜)를 승지(承旨)로, 김상윤(金相尹)을 교리(校理)로, 박사익(朴師益)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세자(世子)가 영(令)을 내리기를,
"농사(農事)는 천하(天下)의 대본(大本)인데, 올해에는 절후(節候)가 조금 빨라서 동작(東作)001)  이 멀지 아니하니, 권과(權課)하는 정사가 마땅히 먼저 있어야 할 것이다. 혹독하게 재황(災荒)을 입은 도(道)는 또 장차 진휼(賑恤)을 베풀어야 하니, 진정(賑政)을 신칙(申飭)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해 겨울철에 접어든 이후 여역(癘疫)이 다시 치성(熾盛)하여 가라앉을 기약이 없으니, 백성들의 일을 생각하면 진실로 매우 민망스럽다. 혹 약물(藥物)을 구해 주거나 혹은 곡물(穀物)을 제급(題給)하여 구활(救活)하는 데 뜻을 두고 조금도 느슨하게 하지 않도록 하라. 본원(本院)에서는 특별히 조사(措辭)하여 팔도(八道)의 감사(監司)와 양도(兩都)002)  의 유수(留守)에게 하유(下諭)하도록 하라."
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곧바로 휘교(徽敎)003)  를 반포하도록 청하였는데, 여러 번 청해서야 이에 허락하였다.

 

1월 2일 을해

충청도(忠淸道)에서는 각 고을마다 염병(染病)을 한창 앓고 있는 백성이 1천 6백 43명이고 사망(死亡)이 2백 40명, 온 집안이 몰사(沒死)한 경우가 4호(戶)였으며, 평안도(平安道)에서는 한창 염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8천 3백 48명이고, 사망이 1천 3백 80명이었으며, 경기(京畿)에서는 한창 염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3천 1백 11명이고, 사망이 8백 69명이었으며, 황해도(黃海道)에서는 한창 염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3천 2백 명이고 사망이 3백 78명이었는데, 각도(各道)에서 장문(狀聞)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 무지개가 해를 관통한 변괴(變怪) 때문에 차자(箚子)를 올려 책면(策免)하기를 구하고, 생각한 바를 덧붙여 진달(陳達)하기를,
"저하(邸下)께서는 오늘날을 어떠한 시기라고 생각하십니까? 조정(朝廷)에 대해 말하자면, 당습(黨習)에 얽히고 사의(私意)가 고질이 되어 일진일퇴(一進一退)하면서 조정에 나란히 서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민생(民生)에 대해 말하자면, 기근(飢饉)과 역질(疫疾)이 계속되어 사망하는 사람이 잇달고 있으니, 공장(公藏)과 사축(私蓄)이 텅 비게 되었습니다. 기강(紀綱)에 대해 말하자면 백예(百隷)가 게을러진데다가 서무(庶務)는 번쇄(煩碎)하여지고 아침 저녁으로 경영하는 것이라곤 오로지 사사로움만 따르고 있습니다. 정령(政令)에 대해 말하자면, 애초에 상세히 헤아리지 아니한 채 변개(變改)하는 데 어려워함이 없어서 아침에 명령한 것을 저녁에 그만두니 백성의 뜻이 정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지금 안팎으로 직무(職務)를 게을리한 채 미봉책(彌縫策)만 쓰면서 근심할 것이 없다고 여기나, 세운(世運)의 평탄하고 기울어짐이 평소와 일정치 않고 천하의 사변(事變)이 무궁(無窮)하니, 바다를 요동시킬 바람이 잠깐 사이에 일어나지 않을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진실로 마땅히 군신(君臣) 상하가 크게 경척(警惕)을 더하여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풍습(風習)을 일소(一掃)시켜 더욱 분발하는 뜻을 힘쓰고, 사의(私意)를 없애어 민은(民隱)004)  을 근심하고, 무너진 기강을 진작(振作)시켜 교령(敎令)을 믿게 하는 등 부지런히 힘써 날로 일삼는 바가 있게 한다면 거이 조금이나마 기울어져가는 형세를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세자(世子)가 우악(優渥)한 비답(批答)을 내려 위유(慰諭)하였다.

 

1월 3일 병자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진후(診候)를 마치자,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말하기를,
"평소에 군신(群臣)은 어전(御前)에서 곡배(曲拜)005)  를 행하는데, 춘방관(春坊官)은 춘궁(春宮)의 서연(書筵) 때 직배(直拜)를 행하고 있습니다. 대리(代理)하신 후 동궁(東宮)께서 인접(引接)하실 때 2품(品) 이하의 관원은 이에 의거하여 직배하는데 대신(大臣)은 당초에 절목(節目)을 마련하지 못하였습니다. 대신이 출입할 때 동궁께서 반드시 일어나신다면, 대신도 예절(禮節)이 없을 수 없습니다. 또 대리하신 후로 동궁께서 이미 1품 이하의 관원에게 정배(庭拜)를 받았으니, 대신이 출입할 때 직배하는 것도 또한 불가(不可)할 것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대신들도 또한 직배례(直拜禮)를 행하도록 명하였다. 이이명이 또 말하기를
"양서(兩西)006)  의 별무사(別武士)로 몰기(沒技)007)  한 자가 간계(奸計)를 쓰는 폐단이 없지 않으니, 논상(論賞)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조총(鳥銃)은 제일 요긴한 것인데 별무사에게 조총을 시험하는 일이 없으니, 지금 이후로는 기예 가운데 편추(鞭蒭)008)  를 없애고, 아울러 조총을 시험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에 명하여 품처(稟處)하도록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세자(世子)의 묘소(墓所)와 혼궁(魂宮)에 3년 안에는 으레 당하관(堂下官)으로 제관(祭官)을 차임(差任)하여 보내는데, 3년 후에는 이조(吏曹)에서 차임하여 보내지 아니하고 내시부(內侍府)에서 내관(內官)을 차임하여 보내니, 사체(事體)가 마침내 미안(未安)한 데 관계된다. 지금부터는 3년 후에도 당하관으로 제관을 차임해 보내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였다. 임금이 또 금루(禁漏)를 알릴 때 더디고 빠른 것이 고르지 못하였는데, 오늘은 오시(午時)009)  를 알린 지 오래 되지 아니하여 다시 오고(午鼓)를 쳤다 하여 금루관(禁漏官)을 가두어 죄를 다스리도록 명하였다. 제조(提調)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역서(曆書)는 시헌법(時憲法)을 쓴 후부터 일식(日食)·월식(月食)의 도수(度數)가 부합(符合)하여 틀리지 않는데, 누각(漏刻)은 아직 대통법(大統法)을 쓰고 있어서 차착(差錯)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본감(本監)에서 역산(曆算)을 잘 아는 자를 누국(漏局)에 들여보내어 입회[眼同]해서 이정(釐正)하도록 하였으나, 그래도 이러한 폐단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잘 배워 정숙(精熟)하게 익힌 자는 마땅히 시상(施賞)하여 격려하고 권장하는 방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1월 4일 정축

김창집(金昌集)을 영의정(領議政)에 임명하였다.

 

약방(藥房)에서 세자궁(世子宮)에 입진(入診)하였는데, 새해의 기후(氣候)를 살피고자 함이었다. 진후(診候)를 마치자,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원조(元朝)010)  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하여 진계(陳戒)하여 평소에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혹 조금도 소홀히 여기지 말 것을 청하였다. 제조(提調) 민진원(閔鎭遠)이 잇따라 학문(學問)에 힘쓸 방도를 진달(陳達)하니, 세자(世子)가 이를 모두 가납(嘉納)하였다. 이이명이 또 말하기를,
"근래에 여역(癘疫)이 다시 치성(熾盛)하여 사망(死亡)하는 사람이 서로 잇달고 있는데, 교외(郊外)의 초막(草幕)에 나가 있는 자들이 찬 땅에 살면서 죽과 미음(米飮)을 잇대지 못하여 사망하는 자가 더욱 많다고 합니다. 청컨대, 진청(賑廳)으로 하여금 공석(空石)과 건량(乾糧)을 헤아려 주게 하소서."
하니, 세자(世子)가 이를 옳게 여겼다.

 

1월 6일 기묘

경상도(慶尙道) 각 고을의 백성 가운데 바야흐로 염병(染病)을 앓고 있는 자가 3천 1백 73명이고 사망한 사람이 3백 48명인데, 도신(道臣)이 계문(啓聞)하였다.

 

비국(備局)에서 말하기를,
"지난 겨울에 신(臣) 이건명(李健命)이 차자(箚子)를 올려 청한 것으로 인하여 경외(京外)에서 여역(癘疫)으로 온 가족이 몰사(沒死)하였는데 다 거두어 매장(埋藏)하지 못한 경우 경조(京兆)011)  와 제도(諸道)로 하여금 낱낱이 상세하게 조사하여 휼전(恤典)을 베풀고, 받은 환곡(還穀)012)  과 신포(身布)를 한결같이 감해 주도록 윤허(允許)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성부(漢城府)의 신목(申目)013)  을 보건대, 온 가족이 몰사한 경우가 많아서 1천 1백 1호(戶)에 이르고, 사망한 단호(單戶) 또한 4백 18호에 이르고 있으니, 작년에 역병이 비록 치성(熾盛)하였다고는 하나 온 가족이 몰사한 경우가 반드시 이와 같이 많은 수(數)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일을 맡아 관장(管掌)한 무리가 사정(私情)에 따라 지나치게 보고한 것이 아니라면 반드시 이와 같은 데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니, 청컨대, 한성부의 해당 당상관(堂上官)과 낭청(郞廳)을 추고(推考)하여 각별히 상세하게 조사하게 하고, 또한 이로써 외방(外方)에 분부(分付)하소서."
하니, 세자(世子)가 이를 옳게 여겼다.

 

예조(禮曹)에서 입진(入診)하였을 때 상교(上敎) 가운데 세자(世子)의 묘소(墓所)에 제관(祭官)을 차출(差出)하여 보내는 일을 대신(大臣)에게 묻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이명(李頤命)이 의논하기를,
"상제(祥祭)·담제(禫祭) 후에 내관(內官)이 묘제(廟祭)와 묘제(墓祭)를 행하는 것은 어린 나이에 일찍 졸(卒)한 대군(大君)을 수진궁(壽進宮)에 제사하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살아서는 세자(世子)의 존귀(尊貴)함을 받았지만 제사는 일찍 죽은 공자(公子)와 같이 보는 것입니다. 상례(喪禮)와 제례(祭禮)가 예를 달리하고 등위(等威)가 구별이 없으니, 성의(聖意)가 미치는 바 정문(情文)014)  이 진실로 적절히 들어맞습니다. 당하관(堂下官)을 차출하여 보내는 것은 또한 위로 능침(陵寢)과 같다는 혐의가 없으니, 특별히 의논할 것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 의논을 들어주어 제관(祭官)을 차출하여 보내도록 명하였다. 후에 예조(禮曹)에서 또 전사관(典祀官)·대축(大祝) 등 일을 집행할 사람을 계품(啓稟)하니, 임금이 아울러 차출하여 보내도록 명하고, 다만 감찰(監察)만 보내지 아니하여 능침(陵寢)과 구별하도록 하였다.

 

1월 7일 경진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차자(箚子)를 올려 중복(重卜)의 명을 사양하였는데, 세자(世子)가 우악(優渥)한 비답(批答)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으니, 얼마 안되어 나아가 일을 보았다.

 

예조(禮曹)에서 단의빈(端懿嬪)의 상제(祥祭)가 2월 초7일에 있다 하여 변제(變除)015)  할 절목(節目)을 먼저 갖추어 올렸는데, 대전(大殿)·중전(中殿)·세자(世子)의 복제(服制)는 이미 다하였으므로 환궁(還宮)하여서는 상복(常服)을 입어야 하고, 수묘관(守墓官)·시묘관(侍墓官)은 천담복(淺淡服)·오사모(烏紗帽)·흑각대(黑角帶)·백피화(白皮靴)로 3년을 마치며, 혼궁(魂宮)과 묘소(墓所)에 입직(入直)하는 종실(宗室)·내시(內侍) 및 수위관(守衞官) 이하의 관원도 모두 같게 하고, 별감(別監)과 각 차비인(差備人) 또한 천담복(淺淡服)·흑두건(黑頭巾)·흑대(黑帶)를 사용하기로 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1월 8일 신사

이조 참판(吏曹參判) 김유(金楺)가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에 이르기를,
"저하(邸下)께서 시탕(侍湯)016)  하며 근심하고 계시는 중이라 강관(講官)을 가까이 하시는 일 또한 드물고, 함께 있는 자들은 환관(宦官)과 궁첩(宮妾)에 지나지 않으니, 어떤 경로를 통해 바른 일을 보시고 바른 말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을 위한 계책(計策)에 있어 만약 대리(代理)하시는 여가에 성현(聖賢)의 서적(書籍)으로 심신(心身)에 유익(有益)한 것을 쉬지 않고 보고 읽으시면서 평소 그 사람이 곁에 있어 그 말을 직접 일러 주는 것같이 하신다면, 어찌 문득 효제(孝悌)·박문(博聞)·도덕(道德)의 선발에 미치지 못하겠습니까?"
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주자어록(朱子語錄)》 10권은 기재되지 않은 어류(語類)가 많지마는, 부문별로 분류(分類)해서 기록하였으므로 학문(學問)과 치도(治道)에 가장 긴절(緊切)한 것입니다. 바라건대, 강원(講院)으로 하여금 가져다 바치게 하여 관람(觀覽)에 대비(對備)하시고, 궁(宮)에 돌아가시면 문득 반복해 강구(講究)하셔서 그 뜻을 다하도록 하소서."
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진달(陳達)한 바가 진실로 마땅하니, 강원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하였는데, 이후에 강원에서 간진(刊進)하게 하기를 청하자 세자가 이를 옳게 여겼다.

 

관상감(觀象監)에서 말하기를,
"일식(日食)과 월식(月食)이 하늘 끝에서 나타난다면 으레 반드시 높은 곳에 올라가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정월 16일 기축(己丑)에 월식이 있는데, 사편법(四篇法)으로 이를 추구(推究)해 보건대, 대명력법(大明曆法)에는 월식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으나 외편법(外篇法)에는 월식이 지하(地下)에 있다고 되어 있으며, 시헌법(時憲法)에는 유시(酉時) 초1각에 복원(復圓)017)  된다고 되어 있으나 내편법(內篇法)에는 유시 정초각(正初刻)에 복원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시헌법과 내편법으로 이를 살펴보건대, 복원되는 시각이 해가 질 때와 서로 가까우니, 달이 뜰 때에 만약 미처 복원되지 않는 모양이 있으면 본 바에 따라 구식(救食)018)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전례(前例)에 의거하여 특별히 감관(監官) 2원(員)을 정해 남산(南山)에 올라가서 살펴보게 하고, 달이 뜰 때 만약 이지러진 모양이 있으면 곧 화전(火箭)을 쏘아 서로 알려서 구식하는 바탕으로 삼게 하소서."
하니, 세자가 이를 옳게 여겼다.

 

남병사(南兵使) 이삼(李森)이 장론(狀論)하여 봉수(烽燧)가 중도에서 끊어지는 일이 많으므로 다른 길로 회봉(回烽)하기를 청하였는데, 비국(備局)에서 복주(覆奏)하기를,
"이것은 아침 저녁으로 갑자기 시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아직 경솔히 의논하기 어렵습니다. 날씨가 흐리거나 맑거나 매달 전보(塡報)하는 데 이르러서는 응당 행해야 하는 일인데도 해조(該曹)에 보고한 후에 고준(考準)하여 논죄(論罪)하는 일이 아직 없었습니다. 청컨대, 이제부터는 경기(京畿)·강원도(江原道)·함경도(咸鏡道) 등 세 도(道)에서 보고한 봉화(烽火)의 상황을 가지고 그 날짜를 고준(考準)하여 만약 혹시라도 서로 어긋나게 된다면 봉화를 올리지 않은 군장(軍將)을 죄주도록 하소서."
하니, 세자(世子)가 이를 옳게 여겼다.

 

1월 9일 임오

지평(持平) 이중협(李重恊)이 재이(災異)로 인하여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에 이르기를,
"저하(邸下)께서는 하늘로부터 예지(睿智)를 이어받으셨고 인자하고 공손하고 온화하고 순수하신 자질(資質)을 겸하여 갖추셨는데, 하지 않으신다면 그만이겠지만, 진실로 하고자 하신다면 이제 삼왕(二帝三王)019)  이 곧 분내(分內)020)  의 일이니, 이제 삼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마음을 바르게 하고 그 천성(天性)을 다한 데 지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다만 이러한 날마다 쓰는 사려(思慮)와 동작(動作)이 모두 마음에 달려 있는데, 그 나타나는 바는 공변되거나 사사로운 것과 진실되거나 망령됨의 구별이 있으니, 반드시 천리(天理)는 항상 능가하고 인욕(人慾)은 항상 물러가도록 하여 오랫동안 정숙(精熟)해져서 혼연(渾然)히 순일(純一)해지도록 해야만, 만사(萬事)를 처리하고 만물(萬物)을 다스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는 고뇌(苦惱)하여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고, 다만 나의 마음의 본래 가지고 있는 바로 인하여 뜻을 더할 따름입니다. 또 인군(人君)은 모름지기 활달(豁達)한 기상(氣像)을 가지고서 숨기고 드러내는 것을 한결같이 하고 안팎으로 환하게 통해야 하니, 송(宋)나라 태조(太祖)가 중문(重門)을 활짝 열어 놓아야 한다고 한 것이야말로 참된 왕자(王者)의 말입니다. 진실로 원하건대, 저하(邸下)께서는 서연(書筵)에서 강독(講讀)하실 적에 반드시 반복하여 토론(討論)하시고, 몸과 마음에 이르기까지 조금이라도 순수(純粹)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또한 모름지기 일일이 개설(開說)하게 하여 그 다스릴 방책을 구(求)하시며, 대신(大臣)과 군료(群僚)를 인접(引接)하실 때에는 상의(商議)할 만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여러 사람의 말을 채택하셔서 감추거나 속이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옛날 제 선왕(齊宣王)이 맹자(孟子)를 대하였을 때 여색(女色)과 재화(財貨)를 좋아한다고 직언(直言)하였는데, 선유(先儒)는 맹자가 당시 열국(列國)의 임금 가운데 제 선왕을 가장 사모한 것은 이러한 직설(直說)을 할 수 있는 영기(英氣)가 있다고 여긴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합니다. 군신(君臣)의 교제(交際)는 이와 같은 후에야 마음에 새겨두고 알게 되는 일이 실제로 효험(效驗)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국사(國事)는 진실로 조정(朝廷)의 기강(紀綱)이 크게 무너진 데에 말미암는데, 게으른 풍습을 경동(警動)하여 일변(一變)시키는 것은 그 책임이 진실로 대신(大臣)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근래에 대신은 그 권한(權限)이 가벼워지고 자신의 임무 또한 얕아서 국사(國事)를 자기가 담당할 것으로 여기지 않고 있는데, 그 부서(簿書)의 자질구레한 사무를 전례에 따라 거행(擧行)하는 일이야 비록 부지런히 하더라도 귀하게 여길 것이 못됩니다. 신은 원하건대, 저하께서는 반드시 대신을 책려(責勵)하시고, 불러서 하교(下敎)하시기를, ‘무릇 나의 과실(過失)을 충분히 말하여 광정(匡正)하도록 하고, 경대부(卿大夫)를 유능하고 무능한 데에 따라 엄중하게 출척(黜陟)을 더하여 체면과 인정에 구애받아 부동(附同)하는 일이 없도록 하며, 사사로운 청촉에 따라 그릇되게 천거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신다면, 대신 또한 반드시 감격해서 분발하여 힘쓰면서 감히 아부하여 고식적인 행위를 못하고 친히 국가(國家)의 책무(責務)를 담당하게 될 것입니다. 육관(六官)의 장관(長官)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인재(人才)를 골라서 구임(久任)시켜야 합니다. 또 관원(官員)이 봉직(奉職)하는 규례(規例)를 만들어 10일에 2일 동안 휴가를 주되, 밤에는 윤번(輪番)으로 입직(入直)하게 하고 낮에는 모두 관사(官司)에 있으면서 직사(職事)를 다스리도록 하고, 관물(官物)을 출납(出納)할 적에는 장부에 기록하고 삭제하면서 몸소 검찰(檢察)하게 하며, 또 이서(吏胥)를 옮겨 차임(差任)하는 규례를 거듭 밝히신다면, 이서(吏胥)의 간사한 짓을 금제(禁制)하여 직무를 진작(振作)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청컨대, 감사(監司)와 수령(守令)은 가려서 차임(差任)해야 하며, 육경(六卿)과 번곤(藩閫)021)  을 제배(除拜)할 때에는 반드시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 및 삼사(三司)의 신하들을 불러서 하문(下問)해 보시고 임용(任用)하도록 하소서. 국자감(國子監)과 삼사(三司)는 반드시 정밀하게 가려서 그 직임(職任)에 오래 있도록 하소서. 궁위(宮闈)022)  에 계칙(戒飭)하여 분수에 지나친 사치의 풍습을 엄중히 제거하시고, 궁인(宮人)·환시(宦寺)·액예(掖隷)의 무리로부터 어선(御膳)·복식(服飾)·기용(器用) 등의 비용(費用) 또한 모두 헤아려 줄이도록 하소서. 또 대신(大臣)·육관(六官)을 불러서 무릇 부문(浮文)·남비(濫費)에 관계된 일 및 이서(吏胥)와 도예(徒隷)가 응당 관장(管掌)해야 하는 공부(公簿)와 응당 행해야 하는 공역(公役) 외에는 혹은 그 액수(額數)를 줄이고, 외방(外方)의 음식(飮食)과 잡비(雜費) 또한 모두 신칙(申飭)하여 너무 사치스럽게 하지 못하게 하소서. 대동미(大同米)의 가정(加定)된 수량을 견감하여 당초에 10두(斗)의 제도를 회복시키소서. 쓸데없는 군사의 액수를 줄이고, 도망하였거나 죽은 사람에게 거두는 역포(役布)의 위급함을 구제하소서. 널리 직언(直言)을 구하여 절충(折衷)하소서."
하고, 마지막으로 말하기를,
"주현(州縣)에서 진휼(賑恤)을 잘했다고 일컫는 자는 판무(販貿)를 요리(料理)한 데에 지나지 않으니, 백성의 재물을 빼앗아 거의 할육충복(割肉充腹)023)  한 것과 같으며, 또 진휼을 핑계하여 사리(私利)를 꾀할 계책으로 삼은 것입니다. 조정(朝廷)에서 구획(區劃)한 바 또한 부호(富戶)로 하여금 사사로이 진휼(賑恤)하게 하고는 녹사(祿仕)024)  를 허락한 데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 공명첩(空名帖)025)  을 주어 억지로 백성들에게 팔게 하였으나, 한갖 군정(軍丁)만 잃고 단지 백성들의 원망만 더욱 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사롭게 진휼한 사람에게 벼슬을 주는 것도 미처 시행되지 못하였으므로 신의(信義)를 잃는 데로 돌아감을 면하지 못하였고, 원망과 비방이 떼 지어 일어났으니, 매우 절통(切痛)하게 여길 만합니다."
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재이(災異)를 당하여 몹시 두려워한 나머지 편안히 있을 겨를이 없었는데, 그대가 언지(言地)026)  에 있으면서 마음속에 품었던 바를 소장(疏章)으로 올려 힘써 경계(警戒)하니, 진실로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데에서 나온 것이다. 내가 매우 가상(嘉尙)하게 여기니, 유의(留意)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가운데 의논하여 처리할 만한 일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하였으나, 이후 끝내 채택하여 시행한 것이 없었다.

 

1월 10일 계미

전(前) 직장(直長) 이집(李楫)이 상서(上書)하기를,
"공손히 생각하건대, 우리 주상 전하께서 즉위(即位)하신 지 이제 45년이 되었는데, 보력(寶曆)이 면면히 이어져 오며 춘추(春秋)가 부성(富盛)하시니, 전의 사첩(史牒)에서 보지 못하던 바이고 열성조(列聖朝)에도 드물게 있는 바입니다. 신민(臣民)의 기쁨과 종사(宗社)의 경행(慶幸)이 어떠하겠습니까? 더욱이 명년(明年)은 육순(六旬)이 되는 시기입니다. 이에 생각하건대, 우리 태조 대왕(太祖大王)께서는 을해년027)  에 탄강(誕降)하셔서 갑술년028)  에 기로소(耆老所)029)  에 들어가셨는데, 이는 국사(國史)에 있고 또한 《선원보략(璿源譜略)》에도 기록되어 있어 오늘날까지 명백하게 상고할 수 있으니, 어찌 제왕(帝王)의 성절(盛節)이 아니겠으며, 후사(後嗣)가 본받을 만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생각하건대, 우리 성상(聖上)께서는 명년(明年)이 곧 태조 대왕의 갑술년에 해당됩니다. 본소(本所)의 구규(舊規)에는 무릇 당상관(堂上官)에 새로 들어갈 때에는 문득 정월(正月) 초1일에 임용하여 선생안(先生案)030)  에 입록(入錄)하나, 본소에서는 미리 섣달 그믐에 그 이튿날 마땅히 들어갈 자를 고지(告知)하는 것이 또한 3백 년 동안 전해져 내려온 전례입니다. 올해의 세말(歲末)에는 반드시 본소에서 장차 받들어 청하는 자가 있을 것이나, 다만 생각하건대, 자식으로서 어버이를 섬기며 그 어버이의 나이가 혹은 회갑(回甲)에 이르거나 혹은 회혼(回婚)의 해에 이르게 되면 애일(愛日)031)  하는 마음에 지체하여 기다릴 수가 없는데, 해당되는 달이 되려면 반드시 그해의 맹추(孟陬)032)  까지 기다려야 하지만, 빨리 성대하게 잔치를 거행하는 것 또한 지극한 정리(情理)의 소재(所在)를 볼 수 있으니, 신자(臣子)가 군부(君父)에 대해서도 오히려 이러합니다. 이제 신정(新正)을 맞아 생각하건대, 유사(有司)의 신하라면 반드시 장차 전례(前例)를 끌어대어 마땅히 시일을 앞당겨 거행할 것을 청해야 할 것인데, 여러 날 동안 경청(傾聽)하여도 지금까지 조용하므로 답답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어 죽음을 무릅쓰고 우러러 진달(陳達)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저하께서는 대조(大朝)033)  께 계품(啓稟)하시고 빨리 본소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세자가 답하기를,
"생각하건대, 우리 태조 대왕께서 춘추(春秋) 60세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신 것은 진실로 드물게 있는 성절(盛節)이었다. 이제 성상의 춘추도 59세가 되셨으니, 자식으로서 기쁜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바야흐로 전례를 끌어대어 우러러 청하려 하였는데, 그대의 상서(上書)를 보고 그대의 정성을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빨리 본소(本所)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복수(復讎)한 사람 김만기(金萬己)를 용서하였다. 강원도(江原道) 백성인 김만기는 숙부(叔父) 김석업(金石業)이 동향인(同鄕人) 준발(俊發)에게 살해되자, 김만기가 마침내 10년 동안 경영(經營)하다가 끝내 준발을 죽이고 관가(官家)에 자수(自首)하였다. 본도(本道)에서 그 옥사(獄事)를 상주(上奏)하여 계복(啓覆)하였을 때 여러 신하들이 대부분 말하기를, ‘사유(事由)가 복수한 것이면 마땅히 죽음을 용서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자, 세자가 다시 본도로 하여금 상세하게 조사하도록 명하였다. 본도의 사장(査狀)에 과연 복수한 실상에서 나왔음을 거듭 진달(陳達)하였고, 형조(刑曹)에서 복주(覆奏)하기를,
"김만기는 숙부를 위해 복수하고 자수하여 죄를 청하였으니, 정상이 용서할 만합니다."
하니, 세자가 감사(減死)하여 유배(流配)하도록 명하였다.

 

1월 11일 갑신

박필정(朴弼正)을 지평(持平)으로, 어유룡(魚有龍)을 정언(正言)으로, 이홍(李宖)을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이휘진(李彙晉)을 장령(掌令)으로, 김운택(金雲澤)을 부교리(副校理)로, 조관빈(趙觀彬)을 교리(校理)로, 김상옥(金相玉)을 부수찬(副修撰)으로, 권성(權𢜫)을 판윤(判尹)으로, 김흥경(金興慶)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삼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에 계달(啓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추삭(追削)034)  한 죄인 윤선거(尹宣擧)는 평생의 본말(本末)이 죄다 남김없이 드러났는데, 벼슬은 이미 삭탈(削奪)하였으나 유독 서원(書院)은 허물지 않았으니, 고금 천하(古今天下)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당초에 그 서원을 세우도록 허락했던 것은 한 가지 일을 개과(改過)함으로 해서 어질게 여긴 데 지나지 않았는데, 훗날 윤선거가 허물이 없다고 자처(自處)하였고, 그 아들 또한 그 아비가 애초에 죽을 만한 의리가 없었다고 여겼으니, 이는 원래 개과(改過)한 데 대해 논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다만 한 번 절개(節介)를 잃어 허물을 입은 귀신이 어떻게 외람되게 조두(俎豆)의 향사(享祀)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판본(板本)을 때려 부수는 일에 이르러서는 이미 말하기를, ‘그 글은 성조(聖祖)를 무망(誣罔)하고 비방하여 어의(語意)가 매우 패려(悖戾)하다.’ 하였으니, 모두 마땅히 물이나 불에 던져 영구히 그 근본을 단절시켜야 할 것입니다. 설령 깨뜨려 부순 몇 개의 판본 외에는 모두 하자(瑕疵)가 없더라도 또한 돌아보아 애석하게 여겨 남겨 둘 수가 없는데, 더욱이 그 외의 문자(文字)가 놀랄 만한 말이 아닌 것이 없으니, 세도(世道)를 무너뜨리고 인심(人心)을 병들게 하는 바가 진실로 작은 근심이 아닙니다. 청컨대, 윤선거의 서원을 허물지 말라고 하신 명을 빨리 정지하시고, 이어서 본도(本道)로 하여금 그 문집(文集)의 판본(板本)을 모두 깨뜨려 부수게 하소서."
하였으나, 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1월 12일 을유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진후(診候)를 마치자,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말하기를,
"옛날에 제왕(帝王)으로서 장수(長壽)한 이가 매우 드문데, 우리 조정(朝廷)으로 말하면 태조(太祖)께서 향년(享年)이 70세가 넘으셨으니, 하늘이 사람에게 주신 복록(福祿)이 무한한 까닭으로 장수를 누린 것이며, 근고(近古)에 없던 일입니다. 60세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셨다고 비록 유전(流傳)하는 말이 있으나 의거할 만한 명문(明文)이 없었는데, 그후 고(故) 상신(相臣) 심희수(沈喜壽)가 기로소 선생안(先生案)의 서문(序文)을 지으면서 어필(御筆)로 서쪽 누각(樓閣)에 제명(題名)035)  하신 일을 기록하였고, 고(故) 상신(相臣) 김육(金堉)의 서문에도 기록한 것이 있으며, 《선원보략(璿源譜略)》에도 그 일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또 본소(本所)에서 유전하는 말을 듣건대, 서쪽 누각의 제명하신 곳에 사등롱(紗燈籠)을 설치하여 봉안(奉安)하였는데, 임진란(壬辰亂) 후에 인몰(湮沒)되고 남아 있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심희수는 임진란의 일들을 이미 두루 보았으니, 그 기록은 반드시 의거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지금 전(前) 직장(直長) 이집(李楫)이 상서(上書)하여 동궁(東宮)께서 기로소의 일을 품의(稟議)하여 시행하라는 명이 있었으니, 예조(禮曹)에서는 마땅히 절목(節目)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태조(太祖) 때 기로소의 여러 신하들은 반드시 대부분 태조께서 잠저(潛邸)036)  에 계실 때 옛 친구들로서 반린부익(攀鱗附翼)037)  한 사람들이므로, 태조께서도 위세(威勢)와 존엄(尊嚴)을 낮추어 어필(御筆)로 제명(題名)하시기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천고(千古)에 성대한 일이 되었습니다. 지금 성상께서 보령(寶齡)이 거의 60에 찼으니, 기로소에 입록(入錄)하는 것이 어찌 성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 왕세자께서 기뻐하면서도 두려워 하는 심정을 생각지 않을 수 없으니, 마땅히 밝은 전교(傳敎)를 내려 유사(有司)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본래 병(病)이 많아서 50세도 스스로 기약할 수 없었는데, 이미 50세가 넘었으니, 일찍이 태조 대왕께서 60세에 기로소에 들어가셨던 일을 생각해 보건대, 내 나이 만약 60세가 되어 자손(子孫)으로서 태조의 아래에 제명(題名)한다면 또한 성대한 일일 것이다. 비록 조정의 신하로서 이를 말하더라도, 70세에 으레 기로소에 들어가는 것은 또한 사면(辭免)할 일이 없으니, 이 일은 원래 겸양(謙讓)할 만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집(李楫)이 상서(上書)하기 전에 세자가 이미 이를 청하였고, 이집의 상서가 나온 후에 또 이를 청하였으니, 내가 그 기뻐하면서도 두려워하는 심정을 생각하여 이미 이것을 허락하였다. 이로써 전교(傳敎)하여 거행하도록 함이 마땅하겠다."
하였다. 부제학(副提學) 유명홍(兪命弘)이 말하기를,
"전 첨지(僉知) 서내익(徐來益)·유이겸(柳以謙) 등은 나이 90세가 되었고, 고(故) 주부(主簿) 김세정(金世楨)의 처(妻)는 나이 93세가 되었고, 고(故) 영양군(嶺陽君)의 부인(夫人)은 나이 95세가 되었으니, 마땅히 진자(進資)하고 가봉(加封)하는 일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이이명이 잇따라 이를 말하니, 임금이 여러 사람에게 승자(陞資)하되 김세정의 처에게는 봉작(封爵)을 특별히 더하도록 하였고, 영양군의 부인은 거듭 봉작을 더할 수 없다 하여 특별히 의자(衣資)와 식물(食物)을 주도록 명하였다. 제조(提調)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서흥(瑞興) 사람 기서익(奇瑞益)은 올해 나이 99세로서, 아들 9형제를 낳았는데 한 사람도 요절(夭折)한 이가 없다고 합니다. 또한 마땅히 본도(本道)에 사문(査問)하게 하여 노인을 우대(優待)하는 은전(恩典)을 특별히 베푸소서."
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민진원이 또 말하기를,
"신이 서관(西關)에 대죄(待罪)038)  하였을 때 병자년039)   이후의 문서(文書)를 상고해 보았더니, 칙사(勅使)의 행차가 서로 잇달아 책응(策應)하기가 매우 어렵자, 부민(富民)을 모집(募集)하여 칙사의 행차 때 칙사를 지공(支供)하는 여러 수용(需用)을 담당해서 갖추어 바친 자에게는 혹 가자(加資)를 허락하거나 혹은 변장(邊將)을 제수(除授)하였습니다. 지금 서관의 형세가 병자년과 다름이 없으니, 훗날 칙사의 행차 때 만약 이러한 전례(前例)를 써서 부민(富民)을 모집한다면 민력(民力)을 조금이나마 펴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기로소에서 이집(李楫)이 상서(上書)한 것으로써 복주(覆奏)하기를,
"공손히 생각하건대, 태조 대왕(太祖大王)께서는 춘추(春秋) 60세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셨는데, 이제 우리 주상 전하께서는 명년(明年)이 바로 태조 대왕께서 성대한 일을 거행하신 춘추에 해당됩니다. 이는 진실로 태조 대왕 이후 3백여 년 동안 없었던 큰 경사(慶事)이니, 온 나라 신민(臣民)으로서 누군들 흠앙(欽仰)하여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본소(本所)의 선생안(先生案)에는 다만 태조 대왕께서 60세에 본소(本所)에 들어가셨다는 것만 기록되어 있고, 선배(先輩)의 서기(序記) 가운데에 또 태조 대왕께서 서루(西樓)의 벽(壁) 위에 어휘(御諱)를 친히 쓰셨다는 말이 있으나 오래 된 일이어서 달리 상고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지금 저하(邸下)께서 대리(代理)하시는 날을 당하여 모든 거행해야 할 의절(儀節)은 전과 구별이 있어야지 아무렇게나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신 등이 바야흐로 서로 의논하려고 하니,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미리 품의(稟議)하여 결정해야 한다는 뜻으로 들어와 계달(啓達)하게 하소서. 지금 이 집의 서장(書狀)에 올해에 전례(前例)를 끌어대어 받들어 청할 것이라는 말이 있었고, 하답(下答)하는 휘지(徽旨)에 또 품행(稟行)하라고 하교(下敎)하셨으니, 실로 군하(群下)의 큰 바람에 부응(副應)하신 것으로서 진실로 경행(慶幸)이 될 것입니다. 청컨대, 응당 거행해야 할 절목(節目)을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의(稟議)하여 결정하게 하소서."
하니, 세자가 이를 옳게 여겼다.

 

사관(史官)을 성균관(成均館)에 보내어 유생(儒生)의 도기(到記)040)  를 고찰(考察)하게 하고, 이어서 대궐 안에서 시강(試講)하도록 명하였는데, 수위(首位)를 차지한 유학(幼學) 박태휘(朴泰彙)·송징현(宋徵賢)에게 급제(及第)를 내렸다.

 

1월 14일 정해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진후(診候)를 마치자,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말하기를,
"오늘 개정(開政)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주상의 환후(患候)에 곤뇌(困惱) 등의 증세가 매우 위중(危重)하니, 형편이 거행하기 어렵겠습니다. 청컨대, 우선 조금 늦추소서."
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인하여 이후로 크고 작은 공사(公事)와 소장(疏章)은 여러 승지(承旨)들이 동궁(東宮)에게 가지고 들어가서 품의(稟議)하여 결정하도록 명하였다.

 

1월 15일 무자

세자(世子)가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접(引接)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 말하기를,
"양근(楊根)·지평(砥平)은 도둑에 대한 근심이 근래에 또 특히 심해졌습니다. 상납(上納)하는 군포(軍布)와 전설사(典設司)에 바치는 물건을 도둑들에게 약탈(掠奪) 당해 모두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이 두 고을의 수령(守令)은 마땅히 무변(武弁)을 차출(差出)해 보내야 하니, 양근 군수(楊根郡守)를 먼저 경관직(京官職)에 체임(遞任)시켜 임명하고, 그 대신할 사람을 가려서 보내어 그로 하여금 더욱 엄중하게 수포(搜捕)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세자가 이를 옳게 여겼다. 부교리(副校理) 김운택(金雲澤)이 말하기를,
"옥당(玉堂)041)  의 신록(新錄)042)  은 으레 식년(式年)043)  에 이를 임용해야 하는데, 만약 혹시라도 구간(苟簡)044)  한다면 또한 식년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규례(規例)가 있습니다. 근래에 행공(行公)하는 자가 적어서 윤직(輪直)이 매우 구간(苟簡)하여 모양을 이루지 못하고 있고, 장관(長官) 또한 까닭없이 행공(行公)하고 있으니, 시기에 맞추어 신록(新錄)을 시행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세자가 이를 옳게 여겼다. 승지(承旨) 권엽(權熀)이 말하기를,
"어제 입진(入診)하였을 때 여러 승지(承旨)들에게 공사(公事)를 가지고 동궁(東宮)에게 들어가 품의(稟議)하라는 일은 이미 성교(聖敎)가 있었으니, 마땅히 오늘부터 거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에 대간(臺諫)이 대각(臺閣)에 나아가 혹 상치(相値)045)  할 경우에는 또한 함께 들어가서 거듭 계달(啓達)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세자가 말하기를,
"상치할 경우에는 함께 입대(入對)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는데, 이건명이 말하기를,
"하루에 혹 여러 차례 입대(入對)하면 너무 번거로운 데 관계됩니다. 모든 공사(公事)를 죄다 수합(收合)하여 하루에 한 차례씩 〈입대하는 것을〉 정식(定式)으로 삼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세자가 이를 옳게 여겼다. 보덕(輔德) 박성로(朴聖輅)가 말하기를,
"승지가 입대할 때 궁관(宮官)046)   1원(員)도 마땅히 입시(入侍)해야 합니다."
하니, 세자가 이를 옳게 여겼다. 정언(正言) 어유룡(魚有龍)이 전에 계달(啓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듣건대, 기로소(耆老所)의 하인(下人)을 약방 색구(藥房色丘)라고 일컫는데, 사사롭게 차비문(差備門) 밖에서 문안(問安)한다고 하니, 외람되고 잗단 일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습니다. 사체(事體)가 있는 바 경책(警責)하는 도리(道理)가 없을 수 없는데, 해소(該所)의 당상관(堂上官) 또한 검찰하지 못한 과실(過失)을 면하기 어려우니, 청컨대, 기로소의 하인은 수금(囚禁)하여 과죄(科罪)하고, 해당 당상은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소서."
하니, 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형조 판서(刑曹判書) 이관명(李觀命)이 말하기를,
"각사(各司)의 하인(下人)들이 사사롭게 문안(問安)하는 것은 지극히 외람되고 잗단 일이니, 대간(臺諫)의 말이 진실로 옳습니다. 다만 무지(無知)한 무리가 올봄에 성상께서 본소(本所)에 들어가신다는 것을 듣고 기뻐하는 마음에 귀천(貴賤)의 차이가 없이 곧 이러한 일이 있었으니, 용서하는 도리가 없지 않습니다. 대조(大朝)께 계품(啓稟)하여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는데, 세자(世子)가 말하기를,
"마땅히 대조께 들어가 계품해서 대간에게 답을 고쳐 내려야 할 것이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은 이미 물러가고 이날 저녁에 세자가 명령을 내리기를,
"사간원(司諫院)에서 새로 계달(啓達)한 가운데 기로소(耆老所)의 약방(藥房) 등의 일을 대조(大朝)께 계품하였더니, 이것은 과죄(科罪)할 일이 아니며, 당상관(堂上官) 가운데 세 대신(大臣)을 추고(推考)하기를 청한 논의가 있는 것은 더욱 경솔한 데에 관계된다고 하셨다."
하니, 이에 어유룡 등이 엄교(嚴敎)를 받았다 하여 인피(引避)하였으나, 출사(出仕)시키도록 처치(處置)하였다.

 

여러 승지(承旨)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동궁(東宮)에게 입대(入對)하였는데 대개 어제 입진(入診)하였을 때의 상교(上敎)를 따른 것이다. 이날부터 여러 승지들이 각각 해방(該房)의 공사를 가지고 사관(史官) 2원(員), 춘방관(春坊官) 1원과 함께 입시(入侍)하고, 승지가 가지고 있는 공사와 소장(疏章)의 진독(進讀)하기를 마친 다음 비답(批答)을 써서 판부(判付)047)  하고 물러나곤 하였는데, 매일 이와 같이 하였으며, 더러 소장(疏章)이 뒤미처 이르면 하루에 두 번 입대(入對)할 때도 있었다.

 

1월 16일 기축

월식(月食)하였는데, 달무리가 목성(木星)을 둘렀다.

 

1월 18일 신묘

여러 승지(承旨)들이 동궁(東宮)에게 입대(入對)하여 공사(公事)를 계품(啓稟)하기를 마치자, 승지 조명봉(趙鳴鳳)이 말하기를,
"설서(說書) 성도형(成道亨)은 이인 찰방(利仁察訪)으로서 본직(本職)에 제배(除拜)되었는데, 미처 올라오지 못하고 임소(任所)에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집안이 매우 빈한(貧寒)하여 운구(運柩)할 수가 없다 하니, 진실로 불쌍히 여길 만합니다. 청컨대, 경유할 양도(兩道)에 분부하여 담여군(擔轝軍)을 넉넉히 주게 하소서."
하니, 세자가 이를 옳게 여겼다.

 

평안도(平安道) 각 고을의 백성 가운데 바야흐로 염병(染病)을 앓고 있는 사람이 3천 3백 39명이고 사망한 사람이 1천 9백 4명이며, 전라도(全羅道)에서는 바야흐로 염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1만 3천 6백 84명이고 사망한 사람이 2천 1백 1명이었는데, 도신(道臣)이 계문(啓聞)하였다.

 

1월 19일 임진

윤석래(尹錫來)를 사간(司諫)으로, 조관빈(趙觀彬)을 지평(持平)으로, 황흠(黃欽)을 좌참찬(左參贊)으로, 신임(申銋)을 우참찬(右參贊)으로, 조영복(趙榮福)을 승지(承旨)로, 심택현(沈宅賢)을 강화 유수(江華留守)로 삼았다.

 

여러 승지들이 동궁(東宮)에게 입대(入對)하였다.

 

1월 20일 계사

여러 승지들이 동궁에게 입대하였는데, 지평(持平) 박필정(朴弼正)·정언(正言) 어유룡(魚有龍)이 함께 입대하였다. 박필정이 전에 계달(啓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금천 군수(金川郡守) 이국형(李國馨)은 사람됨이 광망(狂妄)하여 백성들을 가렴 주구(苛斂誅求)해서 제 이익만 채우고 촌녀(村女)를 겁간(刦奸)하는 등 거조(擧措)가 매우 패악(悖惡)하니, 청컨대, 파직(罷職)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하고, 어유룡 또한 전에 계달했던 것을 거듭 아뢰었으나, 세자가 모두 따르지 않았다.

 

궁궐의 담장을 넘은 죄인 차원(次元)을 용서하였다. 처음에 서소(西所)에서 입직(入直)하던 군사(軍士) 차원이 집에 돌아가서 양식을 가지고 궐문(闕門)에 도착하였는데, 궐문이 이미 닫혔으므로 취한 김에 몰래 궁성(宮城)을 넘다가 다른 군졸(軍卒)에게 붙잡혔던 것이다. 형조(刑曹)에서는 대벽(大辟)048)  에 해당된다고 하였으나 세자(世子)는 그 범한 바가 술에 몹시 취하여 인사 불성(人事不省) 상태에서 나왔다 하여 특별히 감사(減死)하여 유배(流配)시키도록 하였다.

 

1월 21일 갑오

변방의 백성 주익환(朱益桓)을 주살(誅殺)하였다. 주익환이 몸은 굶주리고 신역(身役)은 무겁다고 북사(北使)에게 하소연하자, 대간(臺諫)이 주살하기를 계청하여 해를 넘기도록 다투어 논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세자가 비로소 대간의 말을 따라 마침내 의주(義州)의 경계(境界) 위에서 참수(斬首)하게 한 것이다.

 

1월 22일 을미

햇무리하였는데, 오른쪽에 귀고리가 있고, 햇무리 위에는 관(冠)이 있고, 아래에는 신[履]이 있었으며, 무지개 같은 백기(白氣)가 오른쪽 귀고리에서 나와 햇무리 북쪽으로 구불구불하게 햇무리 가장자리를 가로질러 갔다.

 

여러 승지(承旨)들이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는데, 지춘추(知春秋) 민진후(閔鎭厚)가 함께 입대하였다. 대개 태조(太祖)가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을 때의 사실을 상고해 내기 위하여 조정(朝廷)에서 춘추관(春秋館)의 당상(堂上)과 낭청(郞廳)을 보내어 강화도(江華島)에 소장된 실록(實錄)에서 상고해 내도록 하였는데, 민진후가 명(命)을 받들고 가서 이를 상고하고 돌아와 입대를 청한 것이다. 민진후가 말하기를,
"신이 사각(史閣)에 도착하여 《태조실록(太祖實錄)》을 받들어 꺼내 놓고 첫째 권(卷)부터 세종(世宗)기해년049)  까지 모두 34책을 상세히 고열(考閱) 하였으나 끝내 출처(出處)를 볼 수가 없었으니, 헛걸음으로 돌아옴을 면하지 못하게 되어 탄식(歎息)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지난날 절목(節目)을 의논하여 정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실록(實錄)에는 이미 의거할 만한 것이 없고, 다만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군주(君主)가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는 것은 진실로 이전에는 없던 성대한 일이니, 특별히 일소(一所)를 설치하는 것이 혹시 옳을 수도 있으나, 군하(群下)의 기로소에 낮추어 들어가실 수는 없으며, 아래에서 들어가시도록 청하는 경우는 더욱 외람된 데에 관계됩니다. 실록에 기재된 것을 보건대, 혹은 대신(大臣)에게 잔치를 내려준 때가 있었고 혹은 승지(承旨)와 육조(六曹)에 잔치를 내려준 때가 있었으며, 또 의정부(議政府)와 백관(百官)에게 잔치를 내려준 때도 있었습니다. 이제 만약 날씨가 따뜻해지기를 조금 기다려 편전(便殿)에서 진연(進宴)하게 한다면 좋을 듯합니다. 또 중궁전(中宮殿)의 환후(患候)가 이미 차도(差度)가 있어 회복되어 가는 지경에 있으니, 저하(邸下)께서 만약 한 잔치를 베풀어 양전(兩殿)께 헌수(獻壽) 하신다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는데, 세자가 말하기를,
"명백하게 상고해 보았는가?"
하자, 민진후가 말하기를,
"신이 검열(檢閱) 박사성(朴師聖)과 밤낮으로 쉬지 않고 함께 상고해 보았으니, 어찌 빠뜨릴 리가 있겠습니까? 이 일은 갑작스럽게 결정하기 어려우니, 대조(大朝)께 품의(稟議)하여 전교(傳敎)가 다시 내려진 후에 예관(禮官)이 절목(節目)을 거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세자가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는데,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예조 판서(禮曹判書) 민진후(閔鎭厚)가 함께 입시(入侍)하였다.
진후(診候)를 마치자, 김창집이 말하기를,
"태조(太祖)께서 춘추(春秋) 60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셨다는 말은 모두 세상에 전해진 것으로서, 고(故) 상신(相臣) 심희수(沈喜壽)·김육(金堉)도 오래 되지 않은 때에 그 일을 서문(序文)에 갖추 기재했으니, 반드시 끌어대어 증거로 삼을 만한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실록(實錄) 가운데에는 기재된 것이 없다 하니,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태조조(太祖朝)에는 기로소(耆老所)의 여러 신하들이 모두 잠저(潛邸)에 계실 때의 옛 친구들이었으므로 기영회(耆英會)050)  를 베풀었을 때 성조(聖祖)께서 들어가시고자 하는 하교(下敎)가 있어서 인하여 유전(流傳)된 것이겠습니까? 대저 지존(至尊)으로서 기로소에 들어가시는 것은 위세(威勢)와 존엄(尊嚴)을 낮추어 굽히는 것을 면하지 못하므로 신하로서 감히 우러러 청할 수가 없으며, 오로지 성상께서 상량(商量)하여 하교(下敎)하시기에 달려 있습니다."
하고, 이건명·민진후가 잇따라 사체(事體)가 미안(未安)함을 진달(陳達)하였다. 민진후가 이어서 말하기를,
"이제까지 여러 차례 진연(進宴)한 후 다시 설행(設行)하지 않았으므로 군하(群下)의 진헌(進獻)하는 정성을 칭탁할 수 있는 바가 없으니, 왕세자(王世子)께서 기뻐하면서도 두려워하는 심정 또한 반드시 결연(缺然)하실 것입니다. 만약 일기(日氣)가 화창하고 따뜻해진 다음 성상의 환후에 조금 차도가 있을 때 특별히 진연하도록 허락하시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고,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은 말하기를,
"태조 대왕(太祖大王)께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신 일은 《선원보략(璿源譜略)》에 기록된 것이 있으므로 외간(外間)에서 모두 반드시 고사(故事)가 있을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임금을 존숭(尊崇)하는 예(禮)와 다르므로 대소 정신(大小廷臣)들이 처음부터 감히 우러러 청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성상께서 만약 성대한 일을 뒤좇아 계승하시고자 하여 기로소의 선생안(先生案)을 바치도록 명하시고, 친히 제명(題名)하신다면 군하(群下)는 다툴 만한 의리가 없으니, 오로지 성상께서 상량(商量)하여 처리하시기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선원보략(璿源譜略)》에 이미 기록된 바가 있어서 세자가 이를 청하였고, 경(卿)들 또한 계달(啓達)한 바가 있으므로, 지난번에 원래 혐의할 만한 일이 아니라고 하교(下敎)하였는데, 지금 실록(實錄)을 상고해 보았으나 의거할 만한 전례(前例)가 없다고 하니, 사체(事體)가 입록(入錄)할 수 없겠다."
하였는데, 김창집·이건명이 서로 잇따라 진연(進宴)하기를 청하고, 이이명이 말하기를,
"지금 실록에 기재되지 않은 것 때문에 의심하여 도로 정지하라는 명이 있으니, 세자의 기뻐하면서도 두려워하는 심정(心情)과 군하(群下)가 크게 바라는 정성이 어찌 결연(缺然)하지 않겠습니까? 기쁜 경사를 알리는 한 가지 일조차 전혀 없을 수는 없습니다. 이제 만약 여러 기로신(耆老臣)들을 모이도록 명하시고 친히 임어(臨御)하셔서 잔치를 내리신다면, 여러 노신(老臣)들은 세상에 드문 은영(恩榮)을 입을 것이고, 유전(流傳)하여 후세(後世)에 성대한 일이 될 것이니, 이 또한 고사(故事)를 뒤좇아 계승하는 뜻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판부사(判府事)가 계달(啓達)한 잔치를 내리라는 말이 좋다."
하고, 인하여 날짜를 가려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바다를 건너 역관(譯官)을 들여 보낼 때 왜인(倭人)들이 반드시 예조(禮曹)의 서계(書契)051)  를 얻고자 하는데, 막은 전례(前例)가 없다 하여 차왜(差倭)가 지금까지 간청하여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조정(朝廷)의 사체(事體) 또한 손상되는 바가 없으니, 한결같이 지난(持難)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하였는데, 민진후가 말하기를,
"처음에는 동래(東萊)에 서신(書信)을 보낸 후 예조(禮曹)의 서계(書契)를 얻기를 청하였다가, 또 날짜를 물려서 채우기를 청하였는데, 당당(堂堂)한 국가(國家)에서 어떻게 날짜를 물려서 채우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러 의논이, ‘바다를 건너갔던 역관(譯官)이 이미 들어갔다가 돌아왔으니, 이러한 소절(小節)은 서로 다툴 필요가 없다.’고 할 따름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으니, 예조의 서계를 만들어 보내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였다. 민진후가 또 말하기를,
"이전부터 통신사(通信使)의 행차 때에는 예단(禮單)으로 응자(鷹子) 20연(連)과 집정 경윤(執政京尹)에게 각각 응자 1연씩을 들여 보냈는데, 임술년052)  에 응자 10연과 저포(苧布) 등의 물건을 감제(減除)하고 표피(豹皮)·색사(色紗)를 대신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도해 역관(渡海譯官)053) 한후원(韓後瑗)이 가지고 온 절목(節目)에는 응자가 도로 22연이 되었고 표피 등의 물건 또한 감제(減除)된 것이 없으니, 한후원의 소행(所行)은 진실로 매우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이제 마땅히 또 한 번의 도해 역관의 행차가 있어야 하니, 그대로 한후원을 차출(差出)해 보내어 그로 하여금 다시 강정(講定)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이이명이 말하기를,
"성상의 대덕(大德)의 성수(聖壽)가 이미 육순(六旬)에 가까왔으니, 신민(臣民)의 경행(慶幸)에 어찌 그 한정이 있겠습니까? 성상께서는 일에 싫증이 났다고 말씀하지 마시고, 비록 정섭(靜攝)하시는 가운데 있을지라도 항상 청명(淸明)이 몸에 있으면 지기(志氣)가 신(神)과 같이 된다는 말을 생각하시어 더욱 힘껏 반성(反省)하시며 저군(儲君)054)  에게 평안(平安)을 남겨 주시려는 계책(計策)과 군하(群下)를 칙려(飭勵)하시는 방도로 도리를 다하지 않으심이 없어야 하니, 이것이 신들의 소망(所望)입니다. 옛날에 위 무공(衞武公)은 나이 90세에 오히려 자신을 억제하는 경계(警戒)를 지으셨고, 진 목공(秦穆公)은 말하기를, ‘내 마음속의 근심은 세월이 덧없는 것이다.’ 하였으며, 한(漢)나라 소열제(昭烈帝)는 말하기를, ‘세월은 흐르는 물 같은데 공업(功業)을 세우지 못하였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효종 대왕(孝宗大王)께서는 일찍이 신의 조부(祖父)인 고(故) 상신(相臣) 이경여(李敬輿)에게 말씀하시기를, ‘날은 저물고 길은 머니, 지극한 아픔이 마음속에 있다.’ 하셨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이를 생각하고 마음에 두셔서 춘추(春秋)가 원만(晼晩)하다 하여 조금이라도 계술(繼述)하려는 생각을 그치지 마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계달(啓達)한 바가 좋으니, 유념(留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1월 23일 병신

여러 승지(承旨)들이 동궁(東宮)에게 입대(入對)하였다.

 

예조(禮曹)에서 말하기를,
"신사년055)  의 《등록(謄錄)》을 가져다 상고해 보았더니, 경녕전(敬寧殿)의 상제(祥祭) 후에 삭망전(朔望奠)에는 단지 단헌(單獻)만 거행하고, 조석 상식(朝夕上食)은 다만 한 잔만 올리되 곡례(哭禮)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명릉(明陵)은 삭망전과 상식 때 그대로 3작(三酌)을 거행하고, 곡례(哭禮)가 있었습니다. 이제 단의빈(端懿嬪)은 상제(祥祭) 후에 혼궁(魂宮)과 묘소(墓所)의 제례(祭禮)를 마땅히 이에 의거해서 거행해야 할 듯한데, 《오례의(五禮儀)》에 이미 곡(哭)을 그친다는 글이 있으므로 묘소(墓所)에서의 삭망제(朔望祭) 때 헌관(獻官)이 연제(練祭)056)   이후 곡을 그쳤으니, 그대로 곡례를 정지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세자(世子)가 이를 옳게 여겼다.

 

1월 24일 정유

여러 승지들이 동궁(東宮)에게 입대(入對)하였다.

 

예조(禮曹)에서 말하기를,
"단의빈(端懿嬪)의 복제(服制)는 저하(邸下)께서 이미 부장기(不杖期)057)  의 제도를 쓰셨습니다. 부장기는 담제(禫祭)를 지내지 않는 것이 바로 고례(古禮)이니, 상제(祥祭) 이후부터 삭망제(朔望祭) 때 혼궁(魂宮)과 묘소(墓所)의 헌관(獻官) 이하는 모두 흑단령(黑團領)으로 일을 거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세자가 이를 옳게 여겼다.

 

밀창군(密昌君) 이직(李樴)·낙창군(洛昌君) 이탱(李樘)·서평군(西平君) 이요(李橈)·양평 도정(陽平都正) 이장(李檣) 등이 상서(上書)하기를,
"생각하건대, 우리 태조 대왕(太祖大王)께서는 춘추(春秋) 60세에 기로소(耆老所)에 입록(入錄)하시고, 인하여 본소(本所)의 서루(西樓) 위에 어필(御筆)로 제명(題名)하셨으므로, 3백 년 이래로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띠어 고(故) 상신(相臣) 심희수(沈喜壽)는 그 일을 서문(序文)에 기록하였고, 고 상신 김육(金堉)은 그 후 발문(跋文)에 썼으며, 《선원보략(璿源譜略)》에는 쓰기를, ‘춘추 60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셨다.’ 하였으니, 오늘날 마땅히 취신(取信)할 것으로 이보다 나은 것이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다시 대조(大朝)께 계품(啓稟)하여 빨리 해조(該曹)로 하여금 전의 하교(下敎)에 의거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세자가 답하기를,
"성상께서 나의 기뻐하면서도 두려워하는 심정을 생각하셔서 기로소에 들어가시는 것을 허락하셨으므로 기쁨을 금치 못하였는데, 어제 연중(筵中)에서 신사(信史)에 증거가 없다 하여 갑자기 성명(成命)을 정지하도록 하셨으니, 기뻐하던 끝에 결연(缺然)함이 마땅히 어떠하겠는가? 그래서 다시 곧 정성을 다해 거듭 청하였으나 번번이 실록(實錄)에 기재되어 있지 않다 하여 허락하지 않으시니, 결망(缺望)함이 더욱 심하여 답답한 마음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다."
하였다. 이튿날 동선군(東善君) 이병(李炳)·동창군(東昌君) 이정(李炡) 등이 또한 상서(上書)하여 진청(陳請)하였으나, 세자의 답이 직(樴) 등에게 내린 비답(批答)과 같았다.

 

1월 25일 무술

여러 승지(承旨)들이 동궁(東宮)에게 입대(入對)하였다.

 

세자(世子)가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접(引接)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평안 감사(平安監司) 이조(李肇)가 의주 부윤(義州府尹) 김유경(金有慶)의 문보(文報)로 인하여 책문 후시(柵門後市)058)  하도록 고쳐 허락하기를 청하였습니다. 팔포(八包)059)  의 수(數)를 정한 이후 개시(開市)하고도 수세(收稅)할 길이 끊어져 관청(官廳)의 용도(用度)는 구간(苟艱)하고 백성들은 이득(利得)을 잃고 있는데, 이제 만약 이를 허락한다면 본부(本府)에는 보탬이 없지 않을 것이나 잠상(潛商)의 폐단은 금할 수가 없을 듯합니다."
하였는데,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조 참판(吏曹參判) 김유(金楺)가 모두 말하기를,
"경솔히 허락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세자가 허락하지 말도록 하였다. 이건명이 계청(啓請)하기를,
"경외(京外)에서 온 가족이 여역(癘疫)에 몰사(沒死)하였으나, 미처 거두어 장사하지 못한 경우 호(戶)마다 곡식 1석(石)씩을 주소서."
하니, 세자(世子)가 이를 옳게 여겼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지난번 실록(實錄)을 보았더니, 국초(國初)에는 도성(都城)을 다 쌓은 후 각문(各門)에 모두 누각(樓閣)을 지었는데, 이름이 ‘수구문(水口門)’이라는 구호(舊號)가 있었으니, 바로 광희문(光熙門)입니다. 그러니 각 해당 군문(該當軍門)에 분부하여 그 액호(額號)를 써서 걸게 하고, 서소문(西小門) 앞에는 누각(樓閣)을 설치한 후 또한 액호를 걸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세자가 이를 옳게 여겼다. 훈련 대장(訓鍊大將) 이홍술(李弘述)이 말하기를,
"근래에 각궁(角弓)060)  은 종자가 멸절(滅絶)되어 각 군문(軍門)의 군기(軍器)와 궁자(弓子)061)  를 만들 수가 없으니, 청컨대, 통신사(通信使)의 행차 때 금령(禁令)을 늦추어 그로 하여금 많은 수량을 무역해 오게 하소서."
하니, 세자가 이를 허락하였다. 지평(持平) 박필정(朴弼正)이 전에 계달(啓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상주 목사(尙州牧使) 박휘등(朴彙登)은 본래 치적(治蹟)이 없으며, 또 농병(聾病)이 심하여 아전이 이로 인해 농간(弄奸)을 부렸으나 전혀 깨달아 살피지 못하였으니,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 태안 군수(泰安郡守) 김덕중(金德重)은 밤낮으로 경영(經營)하여 침탈(侵奪)하지 않는 일이 없었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감찰(監察) 고우추(高友樞)는 지의(地位)가 본래 한미(寒微)하여 공의(公議)가 이를 놀라와하니, 청컨대, 태거(汰去)하소서."
하였으나, 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1월 26일 기해

여러 승지(承旨)들이 동궁(東宮)에게 입대(入對)하였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송상기(宋相琦)가 사면(辭免)하였다.

 

권상유(權尙遊)를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조태구(趙泰耉)를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신사철(申思喆)을 승지(承旨)로, 송상기(宋相琦)를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로, 조상경(趙尙絅)을 교리(校理)로, 김상윤(金相尹)을 수찬(修撰)으로, 권업(權𢢜)을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삼았다.

 

충청도 각 고을의 백성 가운데 바야흐로 염병(染病)을 앓고 있는 사람이 2천 4백 20여 명이고 사망한 사람이 3백 명인데, 도신(道臣)이 계문(啓聞)하였다.

 

왕자(王子) 연잉군(延礽君) 이금(李昑)과 연령군(延齡君) 이훤(李昍)이 여러 종신(宗臣)들을 거느리고 연명(聯名)하여 상소(上疏)하기를,
"기로소(耆老所)에 휘(諱)를 쓴 것이 태조조(太祖朝)의 고사(故事)가 있다면 이를 계승하여 거행하는 것은 더욱 세상에 드문 성대한 일이 될 것이니, 이는 우리 춘궁(春宮)께서 쌓인 정성으로 거듭 청하셨고 성명(聖明)께서도 곧 윤허(允許)를 내리셨던 까닭입니다. 그런데 근래에 사책(史策)을 상고하러 갔던 사람이 겨우 돌아오자마자 갑자기 성명(成命)을 도로 정지하셨으니, 중외(中外)의 군정(群情)이 누군들 억울해 하지 않겠습니까? 신 등이 일찍이 듣건대, 국초(國初)에는 제도(制度)를 처음으로 만들면서 사관(史官)들이 일을 기록함에 있어서 소략(疏略)하게 한 것이 매우 많았으므로, 전에도 국가(國家)에 일이 있을 경우 실록(實錄)에서 상고해 내고자 하였으나 국초의 일에는 매번 증거가 없음을 근심하였다 하니, 이 일 또한 누락(漏落)된 것으로서, 진실로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고(故) 상신(相臣) 심희수(沈喜壽)는 임진란 전에 벼슬하였으므로, 서문(序文)은 반드시 귀로 듣고 직접 눈으로 본 바에 의거하여 기록하였을 것이니, 고사(故事)의 신실(信實)한 것을 전한 것이나 의심스러운 것을 전한 것과 같은 데에 견줄 바가 아닙니다. 이외에 덕망(德望)을 쌓은 명신(名臣)들이 기술(記述)한 말에도 또한 많이 있지만, 그 징험(徵驗)할 만한 문헌(文獻)으로 어찌 선생안(先生案)보다 나은 것이 있겠습니까? 이 3백 년 후에야 비로소 성대한 모임이 있게 되어 3백 년 전 성조(聖祖)의 아름다운 일을 뒤좇아 계승하게 되었으니, 당초에 성교(聖敎)에, ‘애초에 겸양[撝謙]할 일이 아니었다.’고 이르신 것은 진실로 지당(至當)하여 도리(道理)에 닿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만약 원래 소루(疏漏)한 사첩(史牒)에 중점을 두어 성례(盛禮)를 빠뜨리고 거행하지 않는다면, 장차 태조 대왕(太祖大王)의 성대한 일과 빛나는 치적(治蹟)까지 후세(後世)에 영구히 민멸(泯滅)될 것인데, 전하께서는 또한 어찌 이에 생각이 미치지 않으십니까? 신 등이 또 일찍이 삼가 듣건대, 선조(宣祖) 말년(末年)에도 거의 육순(六旬)이 된 것에 견주어서 태조조(太祖朝)의 고사(故事)를 뒤좇아 계승하고자 하였으나 미처 거행하지 않았더니, 일에 참여했던 신료(臣僚)로서 뒤에 한스러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합니다. 지금 다행히 영장(靈長)하신 성수(聖壽)가 특별히 장수(長壽)하시어 이미 육순(六旬)이 되었는데, 성대한 일을 끝내 거행하지 않는다면 어찌 국가(國家)의 흠전(欠典)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이 일은 본래 겸양(謙讓)할 만한 것이 아니기에 이미 세자(世子)의 청(請)을 윤허(允許)하였는데, 그후 성명(成命)을 도로 정지한 것은 실록(實錄)에 기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세자(世子)가 결연(缺然)하게 여겨 거듭 청함이 갈수록 더욱 간절하고, 그대들과 여러 종신(宗臣)들의 말 또한 이와 같으며, 인하여 또 태조 대왕(太祖大王)께서 서루(西樓)에 어휘(御諱)를 쓰신 일을 생각해 보건대, 심희수(沈喜壽)가 기로소(耆老所) 선생안(先生案)의 중수 서문(重修序文) 가운데 기록한 것이니, 지금 이 문자(文字)는 결코 두찬(杜撰)이 아닐 것이다. 또 선조조(宣祖朝)가 지난 지 오래 되지 않았는데, 만년(晩年)에 또한 일찍이 거의 육순(六旬)이 되어가는 데 견주어 태조(太祖)의 고사(故事)를 뒤좇아 계승하려 하였다면 더욱 명백(明白)한 것이다. 그리고 소장(疏章) 가운데 아울러 태조의 성대한 일까지도 후세(後世)에 영구히 민멸(泯滅)될 것이라고 하였는데, 매우 옳은 말이다. 전에 하교(下敎)한 바에 의거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청(淸)나라에서 정사(正使)인 내각 학사(內閣學士) 겸예부 시랑(兼禮部侍郞) 덕음(德音)과 부사(副使)인 치의정(治儀正) 장정매(張正枚)를 보내 왔는데, 황태후(皇太后)를 부묘(祔廟)062)  하였다 하여 반사(頒赦)하는 일이었다. 기마 패문(起馬牌文)이 먼저 도착하였다고 의주 수신(義州守臣)과 평안도 도신(平安道道臣)이 계문(啓聞)하였다.

 

이관명(李觀命)을 원접사(遠接使)로 삼았다.

 

1월 27일 경자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과 예조 판서(禮曹判書) 민진후(閔鎭厚)가 청대(請對)하니, 임금이 불러서 보았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태조 대왕(太祖大王)께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신 일은 유전(流傳)된 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실록(實錄)에 기재되어 있지 않은 까닭에 성명(成命)을 정지하시기에 이르렀으므로 왕세자(王世子)께서 억울(抑鬱)해 하시는 마음과 군하(群下)의 결망(缺望)된 마음이 지극하였습니다. 이에 두 왕자(王子)와 여러 종신(宗臣)들의 상소(上疏)로 인하여 다시 거행하도록 허락하셨으니, 신민(臣民)의 경행(慶幸)이 마땅히 다시 어떠하겠습니까? 영장(靈長)하신 성수(聖壽)에 지미(趾美)063)  의 성사(盛事)는 진실로 3백 년 이래로 없던 성대한 일이니, 펼쳐서 크게 경축(慶祝)하는 일을 결단코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하고, 민진후가 말하기를,
"이 일은 비단 우리 조정(朝廷)에서 3백 년 이래로 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전고(前古)의 사적(史籍)에도 없던 일이니, 기뻐하는 마음에 어찌 그 끝이 있겠습니까? 다만 절목(節目) 사이에 상고하여 의거할 만한 것이 없으나, 기로소(耆老所)의 선생안(先生案)을 봉안(奉安)할 곳을 먼저 수리(修理)하고, 책자(冊子)를 새로 만들어 정교하게 장황(粧潢)064)  을 가하고, 특별히 길일(吉日)을 가려서 승지(承旨)와 본소(本所)의 당상관(堂上官) 1원으로 하여금 받들어 나아가 바치게 한 다음 마땅히 어필(御筆)로 존호(尊號)를 쓰셔야 합니다. 전하(殿下)께서 몇년 몇월 며칠에 들어가셨다고 쓰셔야 하는데, 성상께서 바야흐로 눈병을 앓고 계셔서 친히 쓰시기가 어려울 듯하니, 대신 쓸 사람도 잘 쓰는 조사(朝士)로 계하(啓下)하소서. 그리고 이미 쓰신 후에는 의장(儀仗)을 갖추어 본소(本所)에 봉안(奉安)하시고, 또 길일(吉日)을 가려서 고묘(告廟)하고 진하(陳賀)해야 합니다. 과거(科擧)를 베푸는 것이 또 다음 차례의 일인데, 무릇 경과(慶科)는 혹 증광시(增廣試)를 베풀거나 혹은 별시(別試)를 베풀어야 할 것이니, 이번에는 무슨 과거로써 거행해야 하겠습니까? 진연(進宴)하는 데 이르러서는 더욱 그만둘 수가 없으니, 또한 길일을 가려서 다시 계품(啓稟)하게 하소서. 여러 기로신(耆老臣)들에게 잔치를 내려주는 것은 진연(進宴)하기 전에 마땅히 거행해야 하겠습니까?"
하였는데, 김창집이 말하기를,
"선생안(先生案)은 태조조(太祖朝)에 어필(御筆)로 친히 제명(題名)하신 원본(原本)인데, 이미 병화(兵火)로 소실(燒失)되었고, 그후 추후로 써서 봉안(奉安)하였습니다. 지금 새로 만드는 책자(冊子)에 태조 대왕(太祖大王)의 묘호(廟號)를 쓰고 그 아래에 삼가 존호(尊號)를 쓰신다면 어찌 우리 조정의 아름다운 사적(史蹟)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민진후가 말하기를,
"이는 한때의 일이 아니므로 수장(首張)에 잇따라 쓰는 것은 마땅하지 못한 듯합니다. 삼가 태조(太祖)의 존호(尊號)를 쓰고, 제2장에 당저(當宁)065)  의 존호를 쓰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봉안(奉安)하는 곳을 수리하는 일과 새 책에 쓰는 일 및 의장(儀仗)을 갖추어 봉안하는 일은 진실로 마땅하나, 나의 눈병이 이와 같으니 어떻게 친히 쓸 수 있겠는가?"
하였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춘궁(春宮)께서 대신 쓰신다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마는, 아래에서 감히 청할 수 없을 따름입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춘궁(春宮)으로 하여금 대신 쓰게 함이 마땅할 것이다."
하였는데, 민진후가 말하기를,
"세자(世子)께서는 마땅히 성상 앞에서 쓰셔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또, 고묘(告廟)하고 진하(陳賀)하는 등의 일도 거행하도록 하고, 과거(科擧)는 별과(別科)를 베푸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였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몇 해 전에 즉위(即位)하신 지 30년이 되었다 하여 경사(慶事)를 기뻐하면서도 오히려 증광시(增廣試)를 베풀었는데, 더욱이 오늘날의 경사는 그때에 비하여 중대(重大)할 뿐이겠습니까? 별시(別試)는 너무 가벼운 듯합니다."
하고, 민진후도 잇따라 이를 말하자, 임금이 증광시를 베풀도록 명하였다. 김창집이 또 진연(進宴)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는 것은 진실로 좋은 일이나, 백성들의 기근(飢饉)과 여역(癘疫)이 이와 같은데, 무슨 마음으로 잔치를 받겠는가? 또 안질(眼疾)을 앓아 고통스럽고 물건을 볼 수도 없는데, 비록 잔치를 베푼다 하더라도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다만 여러 기로신(耆老臣)들에게 잔치를 내려주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김창집이 또 말하기를,
"서로(西路)의 백성들이 기근(飢饉)과 여역(癘疫)으로 시달리는 가운데 또 객사(客使)를 만나게 되어 보존(保存)할 길이 없으니, 청컨대, 진청(賑廳)의 곡식 5천석을 관서(關西)에 획급(劃給)하여 고휼(顧恤)하는 뜻을 보이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김창집이 또 말하기를,
"기로소(耆老所)에는 으레 절일(節日)의 식물(食物)이 있고 매달 약값·토세(土稅)·어선(魚鮮)을 나누어 쓰는 규례(規例)가 있는데, 이는 외람되고 잗달아서 감히 진상(進上)하지 못하겠으나 낙죽(酪粥)·전약(煎藥)·제호탕(醍醐湯)은 마땅히 봉진(封進)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1월 28일 신축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태조 대왕(太祖大王)께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신 후 궤장(几杖)을 만들어 드린 일이 오늘날까지 유전(流傳)되고 있는데, 이 한 가지 조항을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는데, 예조(禮曹)에서 말하기를,
"신 등이 고루(孤陋)하여 전혀 들어서 아는 것이 없습니다. 성교(聖敎)가 이와 같으시니, 마땅히 책자(冊子)를 봉진(封進)할 때 궤장(几杖) 또한 정교하게 만들어 들이도록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김창흡(金昌翕)을 지평(持平)으로, 송상기(宋相琦)를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김상옥(金相玉)을 수찬(修撰)으로, 박사익(朴師益)을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게 입대(入對)하였다.

 

1월 29일 임인

통신 정사(通信正使) 홍치중(洪致中)·부사(副使) 황선(黃璿)·종사관(從事官) 이명언(李明彦) 등이 청대(請對)하자, 세자(世子)가 불러 보았는데, 홍치중이 말하기를,
"옛부터 통신사(通信使)의 행차에는 으레 충주(忠州)·안동(安東)·경주(慶州)에서 잔치를 베푸는 일이 있었는데, 을미년066)  ·임술년067)  ·신묘년068)  의 행차 때에는 모두 흉년이 들어 세 곳에서 모두 잔치를 정지하였으나, 동래(東萊)는 저 사람들에게 보였으므로 유독 잔치를 베풀었다 합니다. 영남(嶺南)은 해마다 잇따라 흉년이 든 나머지 여역(癘疫)이 다시 치성(熾盛)하니, 비용을 허비하여 폐해(弊害)를 끼치는 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동래 외에 세 곳은 모두 정감(停減)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세자가 이를 허락하였다. 황선이 말하기를,
"훈련 대장(訓鍊大將) 이홍술(李弘述)이 지난번에 흑각(黑角)을 무역해 오는 일을 진달(陳達)하였습니다. 흑각은 바로 금지하는 물건이므로 사신(使臣)이 돌아올 때 왜인(倭人)들이 으레 수검(搜檢)하는 일이 있다 하는데, 만약 혹시라도 드러난다면 일이 지극히 난처(難處)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무역해 오라는 명령(命令)을 정지하소서."
하니, 세자가 이를 옳게 여겼다. 이명언(李明彦)이 말하기를,
"잠상(潛商)으로 현장에서 붙잡힌 자는 자연히 그 죄(罪)가 있는데, 그 가운데 정범(情犯)이 더욱 무거운 자는 청컨대 곧바로 효시(梟示)하고 추후에 계문(啓聞)하게 하소서."
하니, 세자가 이를 허락하였다.

 

여러 승지들이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나라의 치란(治亂)은 서관(庶官)069)  에게 달려 있습니다. 여러해 이래로 별천(別薦)된 사람들이 또한 많은데, 비록 반드시 모두 출륜(出倫)한 무리는 아니지만 인아(姻婭)의 잗단 무리보다 현명한 것은 서로 멀 뿐만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전조(銓曹)에서는 많이 수습(收拾)하지 않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조정(朝廷)에서 널리 인재(人才)를 구하는 뜻이겠습니까? 중외(中外)에서 보궤불식(簠簋不飾)070)  의 책망이 날로 심해지고 극성(極盛)해지고 있으니, 어사(御史)의 서계(書啓)와 대신(臺臣)의 탄장(彈章)에 오른 자로서 사적(事迹)이 현저한 자는 마땅히 양전(兩銓)에 특별히 하교(下敎)하여 조용(調用)하지 못하게 하셔서 장리(贓吏)로 하여금 징계(懲戒)하는 바를 알게 하소서. 경사(京司)의 포폄(褒貶)071)  이 문득 문구(文具)072)  만 이루고 있으므로, 각사(各司)의 관원들 가운데 근신(謹愼)하지 않는 자들이 많습니다. 공물 아문(貢物衙門)에 이르러서는 백성을 침탈(侵奪)하는 폐단(弊端)으로 비루하고도 잗단 일을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으니, 마땅히 각 관사(官司)로 하여금 전최(殿最)073)  의 법(法)을 거듭 엄중하게 하여 한결같이 외관(外官)과 같게 하도록 하소서. 기강(紀綱)이 해이해져서 감사(監司)는 조정(朝廷)의 명을 행하지 않고 수령(守令)은 상사(上司)의 명령을 준수(遵守)하지 않고 있습니다. 비록 양전(量田)하는 일로써 이를 말해 보더라도, 수령은 사사롭게 누락된 결복(結卜)을 쓰는 것에 욕심을 내고 호우(豪右)074)  는 그 재실(災實)을 현란(眩亂)시키는 것을 이롭게 여기는데, 수령의 훼예(毁譽)075)  가 호우의 입에서 나오므로, 호우가 불편(不便)하다고 하면 수령은 이를 편들어 감사(監司)에게 보고하고, 또 뒤따라 치계(馳啓)하면서 갖가지로 추탁(推託)하여 일부러 지연[遷延]시키고, 마지막에는 양척(量尺)의 장단(長短)과 민간(民間)의 여역(癘疫) 때문이라고 핑계를 삼고 있으니, 신은 처음부터 일을 피한 감사를 견책(譴責)해서 파직(罷職)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수령은 도리(道理)를 어기고 명예를 구하면서 오로지 포상(褒賞)을 희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불법(不法)을 많이 행한 것으로 말미암아 백성들이 자기를 비난할까 두려워하므로, 간활(奸猾)함을 만나도 감히 그 입락(立落)을 밝히지 못하고, 응당 받아들여야 할 물건도 감생(減省)하는 것을 덕색(德色)076)  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전에 어사(御史)가 서계(書啓)하여 조정(朝廷)에서 논상(論賞)한 것이 대동(大同)077)  ·전세(田稅)의 방납(防納)078)  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며, 꿩·닭·시초(柴草)079)  을 견감하여 받아들이는 등 사람들마다 이를 좋아하는 종류였으니, 이는 국가에서 그 명예 구하는 것을 권장(勸奬)하고 있는 탓입니다. 이후 어사의 봉서(封書)는 칠사(七事)080)  를 위주로 하여 염문(廉問)할 때 수령에게 비록 떠도는 비방이 있다 하더라도 그 정도(正道)를 얻은 자는 특별히 초탁(超擢)하고, 비록 순수한 명예를 얻었다 하더라도 조금이라도 명예를 구한 흔적이 있는 자는 상전(賞典)을 더하지 않는다면, 사대부(士大夫)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알게 하여 하지 않게 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과장(科場)의 중요함이 문과(文科)·무과(武科)에 어찌 다름이 있겠습니까마는, 근래에 무과(武科)에서 사정(私情)을 쓰는 일이 낭자하여 세력(勢力)도 없고 뇌물(賂物)도 없는 자는 비록 재주가 있다고 일컬어져도 대부분 낙방(落榜)을 면하지 못하고 있으니, 일의 놀라움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만약 드러나는 자가 있으면 전례(前例)에 의거하여 충군(充軍)081)  하고, 거자(擧子)는 영구히 부거(赴擧)를 허락하지 말 것이며 차비관(差備官)은 영구히 서용(敍用)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일을 사목(事目)에 첨가해 만들어서 법식(法式)을 정하여 시행한다면, 혹 징계(懲戒)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근일에 대간(臺諫)들이 매번 정사(呈辭)082)  하는 것을 일삼아 다시(茶時)083)  에서의 전계(傳啓)를 변모(弁髦)084)  와 같이 보고, 정원(政院)에서 날마다 청하여 불러도 패초(牌招)085)  를 어기고 있으며, 또 어지럽게 편복(便服)으로 드나들며 가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제일 큰 일은 하직(下直)하는 수령이 여러번 가도 만나지 못하여 행차의 시기를 여러 차례 늦추므로 인부와 말이 오랫동안 지체하게 되어 그 폐해(弊害)가 크니, 마땅히 신칙(申飭)을 더하고, 처음 수령에 제수(除授)된 자 외에 일찍이 수령을 지낸 사람이라면 여러번 가서 만나지 못할 경우에는 명함을 두고 부임(赴任)하게 하여 행차가 지체되어 직무(職務)를 게을리하는 걱정이 없게 하소서. 야금(夜禁)은 비상(非常)을 형찰(詗察)하는 것인데, 근래에 조사(朝士)와 유생(儒生)은 우선 버려두고 논하지 않더라도 액정(掖庭)과 상사(上司)의 소속(所屬) 및 재상(宰相)·명관(名官)의 겸종(傔從)086)  에 이르러서는 횡행(橫行)함이 더욱 심합니다. 그리고 나졸(邏卒)이 한 번 묻는 일이 있으면 또 문득 꾸짖어 욕하며 구타(毆打)하니, 이후로는 비록 액정이나 상사(上司)의 소속이라 하더라도 진래(進來)를 【각사(各司)에서 상사(上司)의 소속을 다스리려면, 반드시 그 상사에 신보(申報)해야 하는데, 이를 진래라 한다.】  적용하지 말고, 직접 해당 군문(軍門)으로 하여금 법(法)에 의거하여 곤형(棍刑)을 집행하게 하소서. 지난날 금성(金城)의 적(賊)이 융복(戎服)을 입고 관문(官門)에 진격(進擊)하여 방자하게 접전(接戰)하였는데, 그 무리들의 공초(供招)에 또 매우 흉악한 모계(謀計)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후의 감사(監司)가 지나치게 평번(平反)087)  을 더하고, 대신(臺臣)은 또 따라서 그 수령(守令)을 탄핵(彈劾)하였으니, 수령은 마땅히 공(功)이 있어야 하는데도 미문(微文)에 반좌(反坐)088)  되었고, 적도(賊徒)는 마땅히 주살(誅殺)되어야 하는데도 도리어 살리자는 의논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적을 토벌하여 잡은 사람을 【조하기(曹夏奇)이다.】  굴복시켜 욕보이고 흉당(凶黨)을 위해 원수를 갚은 것이니, 이후 비록 극적(劇賊)이 있다 하더라도 누가 기꺼이 나아가 죽을 힘을 다해서 나라를 위해 근심을 제거(除去)하겠습니까? 신이 생각하건대 감사는 경책(警責)이 없을 수 없고 적당(賊黨)은 포도청(捕盜廳)에 나치(拿致)하지 않을 수 없으니, 특별히 좌우 포도 대장(左右捕盜大將)으로 하여금 일제히 모여서 엄중하게 신문(訊問)하여 그 법을 바로잡게 할 것이며, 해당 수령은 논상(論賞)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겨집니다. 인하여 가만히 생각하건대, 국가(國家)가 승평(昇平)한 지 80여 년이 되었으므로 태어나는 사람은 날로 늘어가나, 토지(土地)는 한정이 있어서 생계(生計)의 간고(艱苦)함이 갈수록 더욱 심해지고 있는데, 더욱이 위에 있는 자들은 또 거듭하여 침삭(侵削)하고 있으니, 저 항심(恒心)이 없는 무리들이 무엇을 의뢰하여 도둑이 되지 않겠습니까? 근래에 군문(軍門)을 증설(增設)한 것이 조종조(祖宗朝)에 비하여 무릇 몇 곳이나 더 되니, 이 때문에 포(布)를 거두고 쌀을 거두는 길이 날로 넓어져서 억지로 빼앗는 참상(慘狀)과 근심하여 한탄하는 원성(怨聲)이 화기(和氣)를 감상(感傷)시키기에 넉넉합니다. 수렴(收斂)한 후에 미쳐서는 또 수입(收入)을 헤아려 지출(支出)하지 않으므로 백성의 고혈(膏血)을 짜내어 쓸데없는 곳에 새어 나가게 하니, 국가(國家)는 날로 위망(危亡)한 지경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상하(上下)는 편안하게 여긴 채 각오(覺悟)함이 없으니, 신은 가만히 이를 통한(痛恨)해 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저하(邸下)께서는 성상(聖上)께 계품(啓稟)하시어 쓸데없는 비용을 엄중하게 줄여서 힘써 간략하게 하도록 하시되, 포위된 성 안에 있듯이 빨리 애통(哀痛)해 하는 교지(敎旨)를 내리시어, 특별히 군문(軍門)을 혁파(革罷)한 다음 그 군정(軍丁)을 다른 군문의 궐액(闕額)에 옮겨 보충해서 굳게 인심(人心)을 결집(結集)시키고 하늘에 영명(永命)을 기구(祈求)하는 근본(根本)으로 삼으소서."
하고, 사사롭게 도살(屠殺)의 금제(禁制)를 범하는 것의 남잡(濫雜)함과 여가(閭家)를 빼앗아 들어가는 분운(紛紜)함을 말하니, 세자(世子)가 우악(優渥)한 비답(批答)을 내려 가납(嘉納)하고,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상의(商議)하여 복계(覆啓)하도록 하였다. 이후에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 김창집(金昌集)의 차자(箚子) 가운데 양남(兩南)089)  의 감사(監司)가 양사(量事)를 추탁(推托)한 일을 논급(論及)하였는데, 전라 감사(全羅監司) 홍석보(洪錫輔)가 바로 생질(甥姪)인 까닭에 복주(覆奏)하여 차자를 올릴 수 없다고 하니, 세자가 특별히 양남의 감사를 파직(罷職)하도록 명하였다.

 

1월 30일 계묘

삼경(三更)에 남별궁(南別宮) 【북사(北使)를 접대하여 유숙시키는 장소이다.】 에서 실화(失火)하여 40여 간(間)이 연소(延燒)되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