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63권, 숙종 45년 1719년 2월

싸라리리 2025. 12. 1.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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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갑진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는데, 예조 판서(禮曹判書) 민진후(閔鎭厚)가 함께 들어왔다. 진후(診候)를 마치자,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말하기를,
"북사(北使)가 장차 도착할 것인데, 성상께서 환후(患候)로 정섭(靜攝)하시는 중에 있으니, 교영(郊迎) 등의 일은 진실로 거론(擧論)할 수 없으며, 비록 편전(便殿)에서 접견(接見)하신다 해도 또한 매우 어려울 듯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교영(郊迎)은 장차 동궁(東宮)으로 하여금 대신 거행하도록 하겠지만, 편전(便殿)에서의 접견은 그만둘 수가 없다."
하였다. 민진후가 말하기를,
"성상께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신 후에는 궤장(几杖)을 마땅히 만들어 바쳐야 할 것인데, 《주례(周禮)》의 그림을 보건대, 그 모양이 ‘兀’와 같고 네 모서리에 발이 있습니다. 조정(朝廷)에서 궤장을 하사하는 제도는 바로 교의(交椅)로서 옛 제도가 아니므로, 어떻게 적당한 바를 따라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교의를 어떻게 궤(几)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주례(周禮)》를 보건대, 분명히 교의는 아니었다."
하였다. 민진후가 또 말하기를,
"《후한서(後漢書)》에 이르기를, ‘천자(天子)의 옥궤(玉几)는 겨울철이면 그 위에 명주[綈綿]를 더하고, 공후(公候)의 목궤(木几)는 겨울철에 담[罽]으로 주머니를 만들어 이를 의지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은 겨울철이 아니므로 담으로 주머니를 만들어 드릴 필요가 없으나, 성상께서 고제(古制)를 쓰시고자 하면 궐내(闕內)에서 또한 만들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마땅히 궐내에서 이를 갖추어야 한다."
하였다. 민진후가 또 말하기를,
"장(杖)은 나무를 깎아 구절(九節)을 만들되, 위에는 비둘기가 있고 아래에는 소삽(小鍤)을 매답니다. 그리고 장은 주칠(朱漆)을 쓰고 비둘기는 회색을 쓸 따름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2월 2일 을사

여러 승지(承旨)들이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강화부(江華府)에서는 백성 가운데 바야흐로 염병(染病)을 앓고 있는 사람이 1천 1백 1명이고 사망한 사람이 6백 7명이며, 황해도(黃海道)에서는 바야흐로 염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1천 3백 81명이고 사망한 사람이 3백 21명인데, 수신(守臣)과 도신(道臣)이 계문(啓聞)하였다.

 

탕춘대(蕩春臺)에 성(城)을 쌓는 일을 정신(廷臣)들에게 명하여 며칠에 걸쳐 헌의(獻議)하도록 하였는데, 이날 3품의 여러 신하들이 모두 궐중(闕中)에 나아갔다. 대사성(大司成) 홍치중(洪致中)이 의논하기를,
"북한 산성(北漢山城)을 이미 완축(完築)하였고 양식의 저장도 대략 갖추었으니, 하루 아침에 폐기(廢棄)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한 군문(軍門)에 소속시켜 그들로 하여금 구관(句管)하여 수즙(修葺)하게 한다면, 도성(都城)의 사민(士民)이 난리에 임하여 진병(進兵)하는 장소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탕춘대(蕩春臺)에 성을 쌓는 데 이르러서는 경리(經理)하는 관청을 계획하지 않을 수 없으니, 곧 정파(停罷)하여 국력(國力)을 쉬게 하고, 백성의 곤고(困苦)함을 풀어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사직(司直) 어유귀(魚有龜)는 말하기를,
"북한(北漢)은 천험(天險)으로서 난리에 임하여 의뢰[依歸]할 수 있는 장소가 될만하고, 탕춘대(蕩春臺)에 성을 쌓는 데 이르러서는 대개 군향(軍餉)을 저장하여 불우(不虞)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니, 안팎으로 서로 의지하여 위급한 경우에 믿을 수 있을 것이므로 점차 쌓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고, 사과(司果) 홍계적(洪啓迪)과 전(前) 병사(兵使) 이수민(李壽民) 등 15인은 모두 말하기를,
"이것을 쌓는 것은 불편(不便)하니, 빨리 정파(停罷)함이 마땅합니다."
하고, 공조 참의(工曹參議) 유숭(兪崇)과 전(前) 병사(兵使) 이한규(李漢珪) 등 4인은 말하기를,
"계속해서 탕춘대를 쌓는 일은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병오090)  에는 2품 이상의 관원이 회의(會議)하였는데, 사직(司直)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도성(都城)과 탕춘대(蕩春臺) 두 곳은 결단코 아울러 지킬 수가 없습니다. 만약 탕춘대에 성을 쌓으려면 도성(都城)을 버려야 되고, 만약 도성(都城)을 지키려면 탕춘대에 성을 쌓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고, 이조 참판(吏曹參判) 김유(金楺)는 말하기를,
"반드시 지킬 수 있겠다고 보장하는 것으로는 도성을 수축(修築)하는 것만 못한데, 성상께서 매번 지키기가 어렵다고 하신 까닭에 감히 억지로 다투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출수(出狩)091)  하여 온 성이 황폐해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가깝게 탕춘대를 쌓아 위급한 때에 임하여 입보(入保)092)  하는 곳으로 삼아야 할 것이나, 탕춘대를 버리고서 북한(北漢)의 고한(孤寒)한 땅에 나아가는 것은 신의 보잘것 없는 생각이 미칠 바가 아닙니다. 잇달아 세 성(城)을 쌓는 데 이르러서는 고금(古今)에 들어보지 못한 말이니, 신이 본 바로는 옳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평양(平壤)에는 옛날에 내성(內城)·중성(中城)·외성(外城)이 있어 서로 연접(連接)한 모양이 호로병(葫蘆甁)의 모양과 같았으나, 옛사람은 꺼리는 바가 없었는데, 더욱이 이 성은 평양성(平壤城)처럼 평평하고 넓지 못한 것이겠습니까? 지금 반드시 도성을 지킬 것인지 지키지 않을 것인지를 먼저 정한 후에야 탕춘대를 쌓을 것인지 쌓지 않을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만약 북한 산성(北漢山城)을 대계(大計)로 삼는다면, 북한 산성은 좁고 험하여 도성 백성들을 수용(受容)할 수 없으니, 그 형편상 장차 종사(宗社)는 북한 산성에 들어가더라도 자녀(子女)와 옥백(玉帛)093)  은 모두 도성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탕춘대를 쌓지 않는다면 두 성 사이가 반드시 다투어야 할 곳이 될 것인데, 만약 적(賊)이 탕춘대를 먼저 점거하고 북한산에서 엿본다면 도성이 위태로와질 것이고, 도성 백성을 몰아서 북한 산성을 지키게 한다면 북한 산성이 위태로와질 것이니, 이로 말미암아 말한다면 탕춘대가 북한 산성보다 중요함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이 역사(役事)는 이미 해를 넘겼는데, 애초에 반복해서 상론(商論)하였으나 한 가지로 계획을 정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와서 공역(功役)과 비용이 반을 넘은 후에야 비로소 논란하여 비난하고 반박하며 중도에 정지하고자 하니, 국사(國事)가 또한 전도(顚倒)되지 않겠습니까?"
하고, 훈련 도정(訓鍊都正) 이우항(李宇恒)은 말하기를,
"북한 산성(北漢山城)은 안의 지세(地勢)가 바깥보다 도리어 험하므로 이것이 이미 지리적으로 마땅함을 잃은 것이고, 한 성의 안에 말과 군사를 수용해 둘 곳이 없으니 이것이 또 장점(長點)과 단점(短點)의 기능을 갖추지 못한 것입니다. 탕춘대는 두 성(城)의 사이에 있는데다가 지세(地勢)가 낮아서 쉽사리 적(敵)을 받게 되고 강도(江都)는 바다를 건너야 하는 근심이 있으며 남한 산성(南漢山城)은 외따로 떨어져 있는 근심이 있으므로, 모두 도성으로 보장(保障)을 삼는 것만 못합니다."
하고, 이조 판서(吏曹判書) 권상유(權尙游)는 말하기를,
"탕춘대는 성(城)을 쌓을 필요가 없습니다. 산기슭이 서로 어긋나는 곳에 나아가 대략 양마장(羊馬墻)094)  의 제도를 본떠서 작은 성을 설축(設築)하고 상평창(常平倉) 등의 여러 창고(倉庫)를 옮겨 설치하여 북한 산성(北漢山城)이 위급할 때에 드는 비용을 공급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고, 강화 유수(江華留守) 심택현(沈宅賢)·호조 참판(戶曹參判) 김덕기(金德基)·호군(護軍) 이홍조(李弘肇)는 모두 말하기를,
"북한산성은 버릴 수가 없으니 탕춘대는 쌓을 수 없습니다."
하고, 우참찬(右參贊) 신임(申銋), 훈련 대장(訓鍊大將) 이홍술(李弘述), 호군(護軍) 유성추(柳星樞)·윤헌주(尹憲柱)·장붕익(張鵬翼) 등은 도성을 주장하는 것이 이우항(李宇恒)의 의논과 대략 같았으며, 공조 판서(工曹判書) 송상기(宋相琦)·병조 판서(兵曹判書) 조도빈(趙道彬)·부사직(副司直) 허윤(許玧)·호군 신한장(申漢章)·조이중(趙爾重)은 김유(金楺)의 의논과 대략 같았다. 무신095)  에는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이 회의(會議)하였는데, 부제학(副提學) 이택(李澤)은 오로지 도성에만 마음을 쓰도록 청하였고, 부교리(副校理) 박사익(朴師益)·수찬(修撰) 김상옥(金相玉)·사간(司諫) 윤석래(尹錫來)·정언(正言) 어유룡(魚有龍) 등은 모두 말하기를,
"탕춘대는 쌓을 수 없습니다."
하고, 정언(正言) 신절(申晢)은 말하기를,
"빨리 경리청(經理廳)을 혁파(革罷)하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부교리(副校理) 김운택(金雲澤)은 말하기를,
"성을 쌓는 역사(役事)는 정지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가령 적로(賊路)의 요해처(要害處)인 창성(昌城)의 완항(緩項)과 선천(宣川)의 좌현(左峴) 등과 같은 곳에는 모두 관문(關門)을 설치하고 군사를 배치하여 그들로 하여금 오로지 경보(警報)에만 마음을 쓰게 하되, 과연 그 경보가 병자년096)  과 같이 허술하지 않다면, 먼저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도달(到達)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기필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이미 헌의(獻議)하기를 마쳤으므로 묘당(廟堂)에서 마땅히 품처(稟處)해야 하는데,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차자(箚子)를 올려 조하기(曹夏奇)를 구원한 일로 인하여 발론(發論)한 대관(臺官) 박필정(朴弼正)에게 침저(侵詆)를 받아 인입(引入)한 채 출사(出仕)하지 않았고, 다른 대신(大臣)들도 나오지 않은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우의정 이건명(李健命)이 차자(箚子)를 올려 수상(首相)이 출사(出仕)하기를 기다려 거행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이후 4월 1일 계묘에 여러 대신(大臣)들이 비로소 조당(朝堂)에 모여 의논하였는데, 영의정 김창집(金昌集)·판부사(判府事) 이이명(李頤命)·우의정 이건명(李健命) 등이 모두 말하기를,
"북한산성(北漢山城)이 비록 만전(萬全)이 못된다고는 하나, 또한 불우(不虞)에 대비(對備)할 수 있는데, 이미 쌓은 것을 도로 버린다면, 의거할 바가 없을 듯합니다. 우선 탕춘대의 역사를 정지하고, 기근(飢饉)과 여역(癘疫)이 소식(蘇息)되기를 조금 기다려 천천히 의논하여 도모하는 것이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북한산성을 쌓은 것은 진실로 뜻한 바가 있어서 대계(大計)가 이미 정해졌는데 곧 또 이를 버리는 것은 아이들 장난과 같으니, 어찌 이러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탕춘대의 역사에 이르러서는 여러 신하들이 헌의(獻議)하면서 대부분 그것이 불편(不便)하여 정지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였으므로, 이에 성 쌓는 역사(役事)가 마침내 정지되었으나, 대개 형편(形便)이 나은 것은 탕춘대가 제일이었다. 이미 도성과 이어져 있어서 서로 표리(表裏)가 될 것이니, 먼저 탕춘대를 쌓았다면 도성은 믿을 바가 있게 되어 더욱 견고(堅固)해질 것이고, 북한산성은 비록 쌓은 것이 없다 하더라도 적(賊)이 웅거할 수가 없으므로 저절로 우리의 소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유(李濡)가 계획한 것은 선후(先後)를 잃어 갑자기 별성(別城)을 쌓아서 하나의 별성이 되었으나, 도성(都城)과 중간이 단절되어 진퇴(進退)에 의뢰할 바가 없게 되었다. 곧 계책(計策)을 잘못 썼음을 깨달았으나, 마침내 재력(財力)을 이미 탕진하게 되었고, 중의(衆議)가 떼 지어 일어난 후에 다시 탕춘대를 경영(經營)하려고 하니, 세 성이 가로로 연접(連接)한다는 비난만 초래(招來)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 북한산성을 쌓은 것이 실책(失策)임을 구명(究明)하지 않고, 다만 그 일의 역사(役事)를 이미 마쳤다 하여 아직 그대로 둔 채 모두 힘껏 탕춘대의 결점을 들어 비난하면서 오로지 큰 역사가 정파(停罷)된 것만 다행으로 여기고, 나은 곳을 가리는 방도를 살피지 못하였으니, 식자가 이를 애석하게 여겼다.

 

2월 3일 병오

여러 승지(承旨)들이 동궁(東宮)에게 입대(入對)하였다. 우부승지(右副承旨) 권엽(權熀)이 말하기를,
"천안(天安) 백성 윤대흥(尹大興)은 그 한 몸으로 일족(一族) 20여 인의 신포(身布)를 혼자 감당하다가, 그 곤고(困苦)함을 감내하지 못하여 마침 그 집이 실화(失火)하자, 누워서 피하지 않고 마침내 불에 타서 죽기에 이르렀습니다. 인족(隣族)를 침징(侵徵)하는 참혹(慘酷)함을 이에서 볼 수 있으니, 진실로 지극히 불쌍하게 여길만합니다. 해당 수령(守令)에게는 마땅히 경책(警責)을 더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세자(世子)가 수령은 추고(推考)하고, 윤대흥(尹大興)은 별도로 휼전(恤典)을 더하게 하였다.

 

2월 5일 무신

여러 승지들이 동궁(東宮)에게 입대(入對)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에 계달(啓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대각(臺閣)097)  의 직무(職務)는 지위가 깨끗하고 책임이 무거운데, 장령(掌令) 송만(宋墁)과 이휘진(李彙晉)은 모두 한미(寒微)한 신분에서 기용되어 전혀 명칭(名稱)이 없으면서도 외람되게 대간(臺諫)의 선발에 통하였으니, 물정(物情)이 놀라고 있습니다. 청컨대, 모두 개정(改正)하소서.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 이규성(李奎成)은 가마를 타고 다니면서 법(法)을 무시하고 교만하였으니,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
하였으나, 세자가 모두 따르지 아니하였다.

 

이병상(李秉常)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홍계적(洪啓迪)을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김재로(金在魯)를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조관빈(趙觀彬)을 지평(持平)으로, 황귀하(黃龜河)를 응교(應敎)로, 김상옥(金相玉)을 교리(校理)로, 김상윤(金相尹)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우항(金宇杭)이 병으로 인하여 조당(朝堂)의 회의(會議)에 나가지 못하였으므로, 차자(箚子)를 올려 인책(引責)하고, 인하여 탕춘대(蕩春臺)를 쌓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하였는데, 이르기를,
"서쪽 한 귀퉁이는 이미 역사(役事)를 시작하였으나, 그 나머지를 계속해서 쌓는 것은 오히려 되도록이면 중지해야 합니다. 또 청컨대, 오로지 도성(都城)에만 마음을 써서 세월을 보내며 점차 수축(修築)하도록 하고, 백성과 함께 지키겠다는 뜻을 중외(中外)에 효유(曉諭)하소서."
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마땅히 대조(大朝)께 우러러 계품(啓稟)하여 처리하겠다."
하였다.

 

2월 7일 경술

단의빈(端懿嬪)의 상사(祥事)를 거행하였는데, 세자(世子)가 대궐 안에서 망곡(望哭)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에 계달(啓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었는데, 세자가 다만 송만(宋墁)·이휘진(李彙晉)의 일만 따랐다.

 

2월 8일 신해

여러 승지(承旨)들이 동궁(東宮)에게 입대하였다.

 

사직(司直) 김석연(金錫衍)·예조 참판(禮曹參判) 김연(金演)·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강현(姜鋧)·사직(司直) 이선부(李善溥) 등이 모두 병(病)으로 회의(會議)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하여 각기 상서(上書)하기를,
"북한산성(北漢山城)은 지키기 어려우니, 성 쌓는 역사(役事)를 혁파(革罷)함이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세자가 아울러 답하기를,
"마땅히 대조(大朝)께 계품하여 처리하겠다."
하였다.

 

수묘(守墓)한 노고(勞苦)의 차례를 매겨 수묘관(守墓官) 익양군(益陽君) 이단(李檀) 이하 내관(內官)·수위관(守衛官)·충의(忠義) 등을 가자(加資)하여 차등 있게 승서(陞敍)하도록 명하고, 혼궁 종신(魂宮宗臣) 여천군(驪川君) 이증(李增) 등 4인과 내관 등도 가자(加資)하도록 명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에 계달(啓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통신사(通信使)의 행차에 먼저 도중(島中)에 역관(譯官)을 보내어 절목(節目)을 강정(講定)하는 것은 진실로 백여 년 동안 내려오면서 없었던 일인데, 지난번에 경솔하게 허락하셨으니, 제어(制御)받아 뜻을 굽힌 데로 돌아감을 면하지 못합니다. 이제 이 예조(禮曹)에서 서계(書契)를 추후에 만들어 보낸다는 것은 더욱 크게 불가(不可)한 것이 있으니, 오랑캐는 교활(狡猾)하여 시험해 보는 것을 일삼는데, 이제 다시 답서(答書)를 만드는 것은 진실로 기만(欺瞞)당하는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또 더욱이 날짜를 늦추어 채우는 것도 일이 지극히 구차하니, 청컨대, 예조에서 서계(書契)를 만들어 보내도록 한 명을 정지하소서. 지금 이 왜인(倭人)이 역관(譯官)에게 답서를 요구한 것은 이미 전에는 없었던 일이므로, 변신(邊臣)이 된 자는 마땅히 사리에 의거하여 준절하게 물리쳤어야 하는데, 동래 부사(東萊府使) 서명연(徐命淵)은 엄중하게 막아 간사한 뜻을 꺾지 못한 채 도리어 말을 허비하여 장문(狀聞)하고 굽혀서 그 뜻을 따랐으니, 청컨대,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소서."
하였으나, 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2월 9일 임자

이심(李深)과 정동후(鄭東後)를 장령(掌令)으로, 이교악(李喬岳)을 승지(承旨)로, 이상열(李尙說)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여러 승지(承旨)들이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2월 10일 계축

조관빈(趙觀彬)을 헌납(獻納)으로, 김상옥(金相玉)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진후(診候)를 마치자,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말하기를,
"기로소(耆老所)의 어첩(御帖)098)   제1장에 이미 태조 대왕(太祖大王)의 휘호(徽號)를 썼으므로 2장에는 성상(聖上)의 존호(尊號)와 전하(殿下) 두 자를 써야 하는데 성상께서 비록 친히 쓰실 수 없다 하더라도 이미 세자(世子)에게 대신 쓰도록 명하셨으니, 또한 친히 쓰시는 것과 다름이 없으나, 전하(殿下)라고 일컫는 것은 사체(事體)가 미안(未安)합니다. 근년(近年)에 어진(御眞)에 표제(標題)하였을 때 존호(尊號) 아래에 한 자를 띄어서 왕(王)자를 썼으니, 지금도 이 규례(規例)를 쓰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이이명이 또 말하기를,
"태조 대왕(太祖大王)께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신 일은 실로 천고(千古)에 성대한 일이나, 문적(文籍)이 명백(明白)하지 못하여 다만 사가(私家)에서 기술(記述)한 문자(文字)만 빙고(憑考)하였으므로 이제까지 의심스럽게 가려진 단서가 없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만약 성상께서 친히 실상(實狀)을 기록하셔서 성조(聖祖)의 고사(故事)를 뒤좇아 선양(宣揚)하고, 또 오늘날 지미(趾美)의 성거(盛擧)를 기록하신다면 영구히 유전(流傳)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상의 환후(患候)가 바야흐로 미령(未寧)하신 가운데 있으니, 사신(詞臣)으로 하여금 전후의 위절(委折)을 갖추 기록해서 어첩(御帖)의 발문(跋文)을 짓게 하는 것도 혹 무방(無妨)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계달(啓達)한 바가 좋다."
하고, 마침내 대제학(大提學) 김유(金楺)에게 지어서 바치도록 명하였다.

 

2월 11일 갑인

충청도(忠淸道) 대흥(大興) 등 여섯 고을에서 지진(地震)이 있었는데, 도신(道臣)이 계문(啓聞)하였다.

 

기로소 당상(耆老所堂上)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어첩(御帖)을 배진(陪進)하니, 임금이 흥정당(興政堂)에 나가서 이를 받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책자(冊子)의 첫줄에는 마땅히 어떻게 써야 하겠는가?"
하니, 김창집이 말하기를,
"각사(各司)의 제명록(題名錄)을 모두 선생안(先生案)이라고 일컫는데, 이것은 선생안이라고 일컬을 수가 없으니, 기소 어첩안(耆所御帖案)이라고 쓰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는데, 승지(承旨) 신사철(申思喆)이 말하기를,
"기(耆)자 아래에 마땅히 노(老)자가 있어야 하며, 이미 첩(帖)이라고 말하였으니 안(案)자는 중첩(重疊)되는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기로소 어첩(耆老所御帖)이라고 쓰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세자(世子)가 마침내 명(命)한 대로 대신 쓰고, 인하여 임금의 휘호(徽號)를 쓰기를 마치자, 바쳐서 어람(御覽)을 거치고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들 또한 받들어 열람(閱覽)하였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우선 마땅히 서루(西樓)의 구감(舊龕)에 봉안(奉安)해야 하는데, 감실(龕室)의 벽(壁)이 허물어져 오랫동안 봉안할 수 없을 것이니, 청컨대, 특별히 한 누각(樓閣)을 종부시(宗簿寺)의 선원각(璿源閣)처럼 지어서 이를 봉안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를 윤허(允許)하였다. 김창집이 또 탄일(誕日)에 본소(本所)에서 물찬(物饌)을 봉진(封進)하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이에 승지(承旨)·사관(史官)이 기로소 당상(耆老所堂上)과 함께 어첩(御帖)을 받들어 기로소에 봉안하였다. 어첩의 발문(跋文)에 이르기를,
"기영회(耆英會)는 고례(古禮)가 아니지만 실로 당(唐)나라 백거이(白居易)로부터 시작하여 그후에 계승하였으므로 이를 거행한 자는 셀 수가 있을 정도이나, 군주(君主)가 신료(臣僚)와 더불어 결사(結社)하였다는 것은 대개 듣지 못하였다. 생각하건대, 우리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獻大王)께서 창업(創業)하신 지 3년이 지난 갑술년099)  에 보령(寶齡)이 60세가 되었다 하여 기로소(耆老所)에 굽혀 나아가셔서 친히 서루(西樓)의 벽(壁) 위에 어휘(御諱)를 쓰시고 사등총(紗燈寵)으로 보호하게 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임진년100)  의 난리 때에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고(故) 의정신(議政臣) 심희수(沈喜壽)·김육(金堉) 등의 선생안(先生案)의 서문(序文)과 고(故) 부원군(府院君) 유근(柳根)이 지은 문충공(文忠公) 이원익(李元翼)에게 궤장(几杖)을 하사(下賜)하였을 때의 서문(序文) 가운데 그말이 갖추 기록되어 있는데, 심희수·유근·이원익이 모두 임진란(壬辰亂) 전에 벼슬살이했던 사람들이니, 이는 반드시 자세하고 확실하여 허망(虛妄)한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 전하(殿下)께서는 영명(英明)하시고도 신성(神聖)하심이 태조(太祖)와 똑같이 부합(符合)하셔서 즉위(即位)하신 지 45년이 되는 기해년에 보령(寶齡)이 또한 59세가 되셨다. 그래서 우리 춘궁 저하(春宮邸下)께서 애일(愛日)하는 정성으로 여러 번 태조(太祖)의 고사(故事)를 쓰도록 청하였으나 성상께서는 일부러 겸양(謙讓)하시며 차지하지 않으셨는데, 마침 전(前) 직장(直長) 이집(李楫)이란 자가 상서(上書)하여 청하였고, 춘궁(春宮)께서도 전과 같이 간절하게 아뢰었다. 그리고 연신(筵臣) 또한 이를 말하니, 성상께서 헤아려 실록(實錄)을 상고하도록 기꺼이 명하셨는데, 돌아와서 실상(實狀)이 없다고 말하자, 성상께서 이에 말씀하시기를, ‘믿을 만한 사책(史冊)에 증거가 없는데 경솔하게 거행함은 마땅하지 못하니, 그만 두도록 하라.’고 하셨다. 종신(宗臣) 밀창군(密昌君) 이직(李樴) 등과 동선군(東善君) 이병(李炳) 등과 연잉군(延礽君) 등이 모두 먼저 소장(疏章)을 올려 증거를 끌어대어 매우 상세하게 말하기를, ‘국초(國初)의 사첩(史牒)에는 누락(漏落)된 부분이 많으므로, 오늘날에 준거(準據)할 수가 없습니다. 선조(宣祖) 말년(末年)에도 일찍이 이를 본받아 육순(六旬)을 기다려 고사(故事)를 뒤좇아 계승하려고 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였으니, 또 족히 증거를 삼을 수 있습니다. 이제 전하께서 태조의 성대한 일과 아름다운 자취를 좇아 본받지 않으신다면 장차 세상에서 영구히 민멸(泯滅)될 것입니다.’ 하니, 성상께서 그 말에 감동하셔서 마침내 시행하도록 윤허(允許)하셨다. 이에 예부(禮部)의 신하가 건의(建議)하기를, ‘마땅히 한 첩자(帖子)를 만들어, 춘궁(春宮)께서 친히 태조(太祖)의 존호(尊號)와 몇년 몇월 며칠에 들어가셨다는 것을 쓰고 그 아래에 우리 전하의 존호와 몇년 몇월 며칠에 들어가셨다는 것을 쓰고 나서 승지(承旨)에게 의장(儀仗)을 갖추어 본소(本所)에 봉안하게 하소서.’ 하니, 성상께서 이를 옳게 여기셨다. 예부의 신하가 다시 건의하기를, ‘마땅히 고묘(告廟)하고, 모름지기 경축(慶祝)해야 합니다.’ 하자, 성상께서 또 이를 옳게 여기셨다. 3백 년 동안 두 번 있는 성대한 의식을 이제 흔쾌하게 볼 수 있게 되었으므로, 천지(天地)는 은혜를 베풀어 도우시고 신민(臣民)은 기뻐 뛰며 만세(萬世)에 태평(太平)할 것이니, 이제부터 유신(維新)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신이 분수에 넘치게 태사(太史)101)  의 관직에 있다 하여 발문(跋文)을 지어 전말(顚末)을 상세하게 기록하도록 명하셨습니다. 신은 명을 받들고 두려워 떨며 삼가 생각해 보건대, 전하께서 이 일을 한 번 거행하심으로 해서 삼선(三善)102)  이 갖추어질 것이니, 뜻을 이어받아 일을 계승하는 것이요, 노인(老人)을 공경하고 존숭하는 것이요, 상하(上下)가 함께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태조(太祖)께서 이미 거행하신 법을 따라 선조(宣祖)께서 미처 미치지 못하셨던 뜻을 이루셨으니 효(孝)가 이보다 클 수가 없고, 고귀하면서도 낮출 수 있고 존귀하면서도 굽힐 수 있으니 공경함을 이보다 숭상할 수 없으며, 오로지 자기만을 사랑하지 않고서 팔방에 널리 은혜를 베푸시니 인자하심이 이보다 성대할 수는 없습니다. 효(孝)로 교회(敎誨)하여 친척(親戚)을 친애(親愛)하는 도리가 번창하게 하시고, 경(敬)으로 교회하여 영구히 이어질 풍속(風俗)을 일으키시고, 인(仁)으로 교회하여 화락(和樂)한 습속(習俗)을 이루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노(魯)나라 애공(哀公)이 공자(孔子)에게 묻기를, ‘두세 대부(大夫)가 과인(寡人)에게 나이 많은 이를 공경하도록 권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임금의 말씀이 이에 미치니 장차 천하(天下)가 이를 힘입게 될 것입니다. 옛날에 유우씨(有虞氏)103)  는 덕망(德望)을 소중히 여기면서 노인을 존경하였고, 하우씨(夏禹氏)는 관작(官爵)을 소중히 여기면서 노인을 존경하였으며, 은(殷)나라 사람은 부(富)를 소중히 여기면서 노인을 존경하였고, 주(周)나라 사람은 친족(親族)을 소중히 여기면서 노인을 존경하였으니, 천하(天下)에서 노인을 존귀하게 여긴 지 오래 되었습니다.’ 하였습니다. 아! 우리 성조(聖祖)께서 노인을 존경하는 뜻을 대개 이에서 체득(體得)하셨는데, 우리 전하께서도 진실로 이를 준수(遵守)하였으니, 전성(前聖)과 후성(後聖)께서 그 도리가 모두 같습니다. 더욱이 몸소 삼선(三善)을 행하시며 백성들을 교회(敎誨)하셔서 백성들이 이를 본받게 되었으니, 춘대 수역(春臺壽域)104)  이 영원 무궁하기를 삼가 두 손을 마주잡고 기다리겠습니다. 이것으로 발문(跋文)을 씁니다."
하였다 【대제학(大提學) 김유(金楺)가 짓고, 예조 판서(禮曹判書) 민진후(閔鎭厚)가 썼다.】


【태백산사고본】 71책 63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57면
【분류】왕실-국왕(國王)


[註 099] 갑술년 : 1394 태조 3년.[註 100] 임진년 : 1592 선조 25년.[註 101] 태사(太史) : 나라의 법규(法規). 기록을 맡은 벼슬.[註 102] 삼선(三善) : 세 가지 착한 일. 즉 부자(父子)의 도(道), 군신(君臣)의 의(義), 장유(長幼)의 예절.[註 103] 유우씨(有虞氏) : 순(舜) 임금을 이름.[註 104] 춘대 수역(春臺壽域) : 성세(盛世).

 

2월 12일 을묘

임금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니 왕세자(王世子)가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진하(陳賀)하였다. 반사(頒赦)하고 반교(頒敎)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왕(王)은 말하노라. 국가(國家)의 영장(靈長)한 기업(基業)이 오늘날까지 아름다운데, 군주(君主)의 기수(耆壽)를 칭송(稱頌)하는 것은 선대의 법이 있었으니, 이에 광전(曠典)을 거행하여 사방에 고하노라. 보잘것 없는 내가 큰 기업을 이어받아 보력(寶曆)이 이미 4기(紀)가 지났으니, 진실로 전사(前史)에 드문 바이다. 나이가 또 육순(六旬)에 이르렀으되 처음부터 나의 바람이 미칠 바도 아니었고 신명(神明)이 나에게 내린 목숨도 아니니, 하늘로부터 복록(福祿)을 받음을 스스로 다행스럽게 여긴다. 생각하건대, 우리 태조 대왕께서 나라를 다스리시며 영명(永命)을 크게 받아 그 기신(耆臣)들과 함께 결사(結社)하셨으니, 전해져 내려오면서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었다. 군주(君主)는 이순(耳順)105)  을 따르고 신하는 희년(稀年)106)  을 따라야 하므로 이미 등위(等威)의 확실한 구별이 있는데, 수한(手翰)107)  을 보내어 가석(嘉錫)108)  을 펴신 것은 또한 비상(非常)한 총례(寵禮)이니, 누가 존귀(尊貴)함을 굽혔다 하여 조금이나마 혐의하겠는가? 이는 노인(老人)을 존경하는 성대한 뜻에서 나온 것이다. 나의 나이를 돌아보건대, 거의 화갑(花甲)109)  이 되어가니, 당일(當日)에 견주어 단지 한 살의 차이가 있기는 하나, 열조(烈祖)110)  께서 이미 거행하신 규례(規例)를 펴는 것은 후사(後嗣)의 아름다운 법칙(法則)이며, 또한 선조(宣祖)께서 미처 펴지 못하신 뜻을 마땅히 오늘날에 와서 뒤좇아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문헌(文獻)이 상세하지 못하므로 반신반의(半信半疑)하여 결정하지 못했는데, 한두 신하의 실사(實事)를 기록한 저작(著作)에 의뢰하였더니 넉넉히 참고할 만한 증거가 되었다. 이는 3백 년 동안 보기 드문 의례(儀禮)이므로 흔쾌하게 두 번째의 거행(擧行)을 허락하였으니, 정성을 다해 간절하게 진달(陳達)하여 세자(世子)는 애일(愛日)하는 심정을 폈고, 여러 번 소장(疏章)을 올려 일제히 제창(提唱)하여 종신(宗臣)은 천의(天意)를 돌이키는 소원을 이루었다. 선조(先祖)를 따르는 뜻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드러나고, 노인을 숭상하는 풍속(風俗)이 이로부터 다시 나타날 것이다. 사방(四方)에서 모두 기뻐하고 백료(百僚)가 서로 기뻐함은 진실로 종사(宗社)의 영령(英靈)께서 묵묵히 위에서 도우신 때문이지, 어찌 과매(寡昧)한 덕(德)으로 전성(前聖)과 짝할 만한 데 연유했겠는가? 마침내 명인(明禋)111)  을 닦아 태묘(太廟)에 삼가 고하고, 비로소 욕례(縟禮)를 일으키며 큰 호령(號令)을 내어 탄부(誕敷)한다. 이에 함께 경축(慶祝)하는 때를 당하여 특별히 허물을 탕척(蕩滌)하는 정사(政事)를 펴니, 이달 12일 매상(昧爽)112)   이전부터 잡범(雜犯)으로서 사죄(死罪) 이하는 모두 용서하고, 관직(官職)에 있는 자에게는 각각 한 자급(資級)씩 더하되 자궁(資窮)113)  인 자는 대가(代加)114)  하도록 하라. 아! 상하(上下)가 소중히 여기는 것은 함께 즐기는 것이니, 혜택(惠澤)이 먼저 널리 미쳐야 할 것이다. 억만 년 동안이 무궁(無窮)할 것이니, 어찌 한 사람의 경사(慶事)에 그칠 것이며, 홍범 구주(洪範九疇)115)  의 오복(五福)에서 첫째로 ‘수(壽)’를 말하였으니, 영구히 팔역(八域)에서 함께 장수하기를 기약(期約)하노라. 그러므로 이에 교시(敎示)하니, 자세히 알도록 하라."
하였다. 【대제학(大提學) 김유(金楺)가 지어서 바쳤다.】


【태백산사고본】 71책 63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58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사법-행형(行刑) / 인사-관리(管理)


[註 105] 이순(耳順) : 60세.[註 106] 희년(稀年) : 70세.[註 107] 수한(手翰) : 서한(書翰).[註 108] 가석(嘉錫) : 훌륭한 상사(賞賜).[註 109] 화갑(花甲) : 환갑.[註 110] 열조(烈祖) : 공훈이 있는 큰 조상. 곧 태조(太祖)를 이름.[註 111] 명인(明禋) : 맑고 깨끗하게 하여 제사지냄.[註 112] 매상(昧爽) : 날이 새려고 먼동이 틀 무렵.[註 113] 자궁(資窮) : 당하관(堂下官)의 품계(品階)가 다시 더 올라갈 자리가 없게 되었다는 뜻으로, 당하 정3품(正三品)이 됨을 말함.[註 114] 대가(代加) : 품계(品階)를 올려 줄 사람을 대신하여 그 아들·사위·동생·조카들에게 대신 그 품계를 올려 주던 일.[註 115] 홍범 구주(洪範九疇) : 홍범(洪範)은 《서경(書經)》의 편명으로 세상의 큰 규범이라는 뜻이고, 구주(九疇)는 아홉 조목이라는 뜻. 곧 기자(箕子)가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물음에 응답한 천하(天下)를 다스리는 아홉 조목의 대법(大法).

 

유숭(兪崇)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2월 13일 병진

달무리가 졌는데, 목성(木星)을 둘렀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말하기를,
"어제 백료(百僚)가 헌하(獻賀)한 것은 실로 3백 년 동안 두 번 있었던 경사(慶事)입니다. 오늘 기로소(耆老所)의 여러 신하들이 소장(疏章)을 올려 진연(進宴)하기를 청하려 하는데, 대소 정신(大小廷臣)들 또한 모두 이를 원하고 있으니, 따르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당초에 허락하지 않았던 것은 내가 뜻한 바가 있어서이니, 윤종(允從)할 수 없다."
하였다. 이이명이 거듭 청하여 마지 않았고, 제조(提調) 민진원(閔鎭遠)·도승지(都承旨) 유명홍(兪命弘)이 잇따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잔치를 베푸는 뜻은 대개 한때 소창(疏暢)116)  하기 위해서인데, 지금 다리가 마비되어 일어나 움직일 수가 없고 눈이 어두워 물건을 보지 못하고 있으니, 장차 어떻게 소창하겠는가? 이를 생각하면 불현듯 마음이 좋지 못하게 되니, 다만 겸양(謙讓)하여 허락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이이명이 또 말하기를,
"지금 드물게 있는 경사(慶事)를 맞아 마땅히 노인(老人)을 우대(優待)하는 은전(恩典)이 있어야 하니, 추은(推恩)117)  하는 도리는 상규(常規)에 비해 조금 더 우악(優渥)하게 하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조관(朝官) 70세 이상과 사서인(士庶人) 80세 이상에게 모두 한 자급(資級)씩 올려주도록 명하였다.

 

여러 승지(承旨)들이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기로소 당상(耆老所堂上)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유(李濡),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우항(金宇杭), 좌참찬(左參贊) 황흠(黃欽),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강현(姜鋧), 사직(司直) 홍만조(洪萬朝)·이선부(李善溥), 대사헌(大司憲) 정호(鄭澔), 우참찬(右參贊) 신임(申銋) 등이 연명(聯名)하여 상소(上疏)하기를,
"바라건대, 신 등에게 잔치를 내려주라는 명(命)을 빨리 정지하시고, 특별히 예관(禮官)의 진연(進宴)의 청(請)을 허락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내 나이 거의 육순(六旬)이 되었으므로 태조조(太祖朝)의 고사(故事)를 뒤좇아 계승(繼承)하여 친히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니, 기구(耆舊)들을 모아 잔치를 베풀어 즐기게 하는 것은 이로부터 선정(善政)에서 그만둘 수 없는 바이다. 경(卿) 등은 나의 노인(老人)을 공경하여 높이는 뜻을 본받아 안심(安心)하고 사양하지 말도록 하라. 진연(進宴)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근일에 연중(筵中)에서 나의 뜻을 면유(面諭)하였으니, 경들이 거듭 간절히 청하더라도 끝내 윤허(允許)하기 어렵다."
하였다. 이유 등이 재차 상소(上疏)하여 거듭 청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전라도(全羅道) 각 고을의 백성 가운데 바야흐로 염병(染病)을 앓고 있는 사람이 3천 6백 28명이고 사망(死亡)한 사람이 9백 47명인데, 도신(道臣)이 계문(啓聞)하였다.

 

사직(司直) 홍만조(洪萬朝)가 병(病)으로 회의(會議)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하여 상서(上書)하여 체임(遞任)을 청하고, 인하여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일을 논하며 탕춘대(蕩春臺)를 쌓는 역사(役事)를 정지하기를 청하니, 세자(世子)가 답하기를,
"마땅히 대조(大朝)께 계품(啓稟)하여 처리하겠다."
하였다.

 

2월 14일 정사

여러 승지(承旨)들이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종신(宗臣)으로 70세 이상된 사람은 일체 가자(加資)하는 일을 분부(分付)하라."
하였다.

 

송상기(宋相琦)를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이병상(李秉常)을 승지(承旨)로, 권변(權忭)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김상옥(金相玉)을 교리(校理)로, 김동필(金東弼)·김취로(金取魯)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병(病)을 끌어대어 정고(呈告)하니, 세자(世子)가 승지(承旨)로 하여금 돈유(敦諭)하게 하였다. 김창집이 전일(前日)에 차자(箚子)를 올려 조하기(曹夏奇)가 나치(拿致)된 억울함을 논하였는데, 발론(發論)했던 대관(臺官) 박필정(朴弼正)이 그 피사(避辭)에서 힘껏 침범하여 배척하면서 가리지 않은 말이 많았으므로, 김창집이 이로 인하여 사직(辭職)하였다. 그러나, 그 무렵에 임금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는 일로 인하여 잠깐 출사(出仕)하여 그대로 축하하는 반열(班列)에 참석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다시 인입(引入)하니, 박필정(朴弼正)을 잠시 황해 도사(黃海都事)로 출보(出輔)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조관(朝官)으로 70세 이상된 사람과 사서인(士庶人)으로 80세 이상된 사람을 가자(加資)하라는 명은 마침내 너무 외람(猥濫)된 데에 관계됩니다. 지금 만약 조신(朝臣) 4품 이상은 70세로 한정하고 5품 이하에서 사서인에 이르기까지는 80세로 한정한다면, 상전(常典)에 견주어 등급(等級)을 올려주는 데에 구별이 있게 되어 거의 분수에 넘칠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전(前) 지평(持平) 박필정(朴弼正)은 피사(避辭)에서 수상(首相)을 침공(侵攻)하면서 조금도 자중[顧藉]함이 없었으니, 정조(政曹)에서는 마땅히 책벌(責罰)하는 도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수상이 당초에 인입(引入)했던 것은 자처(自處)하는 바가 너무 지나쳤는데, 이제 다시 정고(呈告)하였으니, 어찌 도리어 국체(國體)가 손상되지 않겠습니까? 아울러 원하건대, 뜻을 더해 돈면(敦勉)하셔서 국사(國事)가 오랫동안 폐지되지 않게 하소서."
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지금 이 성례(盛禮)는 진실로 드물게 있는 큰 경사(慶事)이니, 추은(推恩)하는 은전(恩典)이 전례에 견주어 마땅히 특별해야 할 것인데, 차사(箚辭)가 이와 같으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대신(大臣)에게 물어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아래 조항의 진달(陳達)한 바는 나의 뜻과 바로 부합(符合)하니, 유의(留意)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이후 가자(加資)하는 일을 여러 대신(大臣)들에게 수의(收議)하여 임금이 마침내 이건명의 말을 따랐다.

 

2월 15일 무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진후(診候)를 마치자,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어제 의관(醫官)이 입시(入侍)하였을 때 미안(未安)한 하교(下敎)가 있었다 하여 중벌(重罰)로 감죄(勘罪)받기를 원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청죄(請罪)까지 하는 것은 진실로 너무 지나친 데 관계된다."
하였다. 대개 어제 임금이 의관(醫官)을 불러 보고, 근래에 여러 증후(症候)가 더욱 위중(危重)해졌는데도 여러 신하들이 공사(公事)가 매우 번거로와서 수응(酬應)하느라 다른 병이 겹치게 되었음을 알지 못한다 하여 누누이 하교(下敎)하였으므로, 이이명이 이로써 인죄(引罪)한 것이다. 이이명이 말하기를,
"춘궁(春宮)께서 대리(代理)하신 이후로 오히려 공사(公事)를 많이 품재(稟裁)했던 것은 진실로 편리하고 좋은 방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고, 제조(提調)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정사(政事) 때 한만한 차제(差除) 또한 성상의 청문(聽聞)을 번거롭게 하여 수응(酬應)하는 일이 많게 되었습니다. 이후에는 큰 제배(除拜) 외에 한만한 차제(差除)는 모두 동궁(東宮)께 입대(入對)하여 낙점(落點)118)  받게 한다면,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백병(百病)이 번갈아 침범하여 진실로 감내(堪耐)하기 어려운데, 전부터 수응이 번거로와지면 포만(飽滿)함이 반드시 더하였다. 근래에도 수응이 조금 지나치면 가슴이 답답하고 코에서 열이 나며, 또 오줌에 피가 나오는데, 점점 첨가(添加)되니 어찌 절급(切急)한 근심이 아니겠는가?"
하고, 이이명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제조(提調)의 말은 어떠한가?"
하자, 이이명이 말하기를,
"당(唐)나라·송(宋)나라 제도에 3품 이상의 관원은 재상(宰相)이 추천하여 제수(除授)하고 그 이하의 관원은 이부(吏部)에서 이를 주관(主管)하였는데, 만약 이러한 사목(事目)을 의방(依倣)하여 몇 품 이상의 관원은 대조(大朝)께서 제배(除拜)하시고 몇 품 이하의 관원은 동궁(東宮)께서 제수(除授)하신다면 수응을 혹 간략하게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와 같이 하면 좋겠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여러 대신(大臣)들에게 문의(問議)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민진원이 또 말하기를,
"승지(承旨)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할 때 중대한 소장(疏章)은 동궁(東宮)께서 스스로 결단(決斷)하지 못하시고 대조(大朝)께 들어가서 품의(稟議)하시므로 수응이 많게 되었습니다. 지금부터는 입대할 때 대신(大臣)이 함께 입시(入侍)해서 서로 의논하여 재단(裁斷)함으로써 대조(大朝)의 청문(聽聞)을 번거롭게 하지 말도록 하소서. 그 가운데 지극히 중대한 데 관계된 것은 비록 대조께 품의하여 재결하지 않을 수 없으나, 이와 같은 상소(上疏)는 반드시 많지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니, 임금이 대단한 일이 있으면 대신(大臣)이 날마다 입대하되 평소에는 하루 걸러서 입대하고, 시임(時任)이 연고(緣故)가 있으면 원임(原任)이 입참(入參)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이튿날 제배(除拜)하는 일은 여러 대신에게 문의하여 3품 실직(實職) 이상과 삼사(三司) 외에는 모두 동궁에게 입대하여 낙점(落點)을 받는 것으로 정하였는데, 대신이 입대하는 일은 마침내 시행되지 않았다.

 

여러 승지(承旨)들이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에 계달(啓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었는데, 세자(世子)가 다만 박휘등(朴彙登)의 일만 따랐다.

 

2월 18일 신유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도승지(都承旨) 유명홍(兪命弘)이 말하기를,
"정사(政事)의 절목(節目)을 겨우 강정(講定)하였는데, 낙점(落點)한 후에 으레 관교(官敎)119)  에 안보(安寶)120)  하는 규례(規例)가 있으니, 동궁(東宮)께서 낙점하시는 관교는 동궁의 인(印)을 찍어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동궁의 인(印)을 쓰도록 명하였다.

 

여러 승지(承旨)들이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이홍(李宖)을 승지(承旨)로, 이중협(李重恊)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개성부(開城府)에서는 백성 가운데 바야흐로 염병(染病)을 앓고 있는 사람이 1백 47명이고 사망한 사람이 65명이며, 함경도(咸鏡道)에서는 바야흐로 염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2천 6백 61명이고 사망한 사람이 4백 92명인데, 수신(守臣)과 도신(道臣)이 이를 계문(啓聞)하였다.

 

2월 19일 임술

여러 승지(承旨)들이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공사(公事)를 품주(稟奏)하기를 마치자, 승지(承旨) 조영복(趙榮福)이 말하기를,
"3품 이하 관원의 제배(除拜)는 이제 마땅히 동궁(東宮)께서 낙점(落點)하셔야 하는데, 춘방(春坊)의 관원(官員)을 차출(差出)할 때 만약 계청(啓請)할 일이 있으면 마땅히 승언색(承言色) 【대전 내관(大殿內官)은 승전색(承傳色)이라 하고, 춘궁 내관(春宮內官)은 승언색(承言色)이라 한다.】 을 청하여 계달(啓達)하게 해야 하겠지만, 춘방의 관원은 마땅히 조정(朝廷)에서 문안(問安)할 때의 예(例)에 의거하여 정청(政廳)에 나가야 하겠습니까, 승지(承旨)가 이미 정청에 나아갔으니 또한 장차 계청하는 일을 겸행(兼行)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세자(世子)가 승지로 하여금 겸행하게 하였다.

 

2월 20일 계해

세자(世子)가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접(引接)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 말하기를,
"전(前) 강화 유수(江華留守) 권성(權𢜫)이 돈대(墩臺)가 희소(稀疏)하다 하여 열 네 군데에 더 쌓을 것을 장청(狀請)한 바 있는데, 일찍이 전에 토성(土城)을 쌓을 때 한 유수(留守)로 하여금 5리를 쌓도록 하였으니, 지금도 한 유수로 하여금 한 돈대(墩臺)를 쌓게 할 경우 14명의 유수를 거치면 완축(完築)할 수가 있습니다. 청컨대, 이로써 분부(分付)하소서. 장흥(長興)의 적량도(赤梁島)는 여러 번 절수(折受)121)  를 거쳤는데, 도신(道臣)의 장문(狀聞)으로 인하여 혁파(革罷)하였습니다. 그런데 사학(四學)122)  에서 장차 절수(折受)할 것이라고 핑계하고는 먼저 차인(差人)을 보내어 그로 하여금 수세(收稅)하게 하였다 하니, 일이 매우 놀랍습니다. 해당 학관(學官)을 마땅히 먼저 파직(罷職)한 후 추고(推考)하게 하소서."
하니, 세자가 모두 옳게 여겼는데, 전라 감사(全羅監司) 김재로(金在魯)·경상 감사(慶尙監司) 홍계적(洪啓迪)이 모두 그때의 학관(學官)에 연좌되어 파직(罷職)당했다. 판의금(判義禁) 송상기(宋相琦)가 말하기를,
"금오(金吾)123)  의 죄수(罪囚) 가운데 왜학(倭學) 이송년(李松年)·정한익(鄭翰益) 등은 도해 역관(渡海譯官)으로서 대마도(對馬島)에 들어가서 서계(書契)를 전해 준 후 사사로이 그 서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그 집안에 감추어 둔 채 조정(朝廷)에 고지(告知)하지 않았습니다. 후에 정한익의 정소(呈訴)로 인하여 비로소 발각(發覺)되었으나, 세 차례 형신(刑訊)을 받고도 끝내 실정(實情)을 말하지 않으니 달리 알아낼 도리가 없습니다. 마땅히 작처(酌處)하는 방도가 있어야 할 듯합니다."
하였는데, 이건명이 잇따라 말하기를,
"이송년은 죽여도 애석할 것이 없으나, 다만 이 일은 왜인(倭人)과 함께 모의(謀議)하여 간계(奸計)를 쓴 일과는 같지 않으니, 참작해서 감사(減死)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세자(世子)가 감사(減死)하여 정배(定配)하도록 명하였다.

 

2월 21일 갑자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서종태(徐宗泰)가 졸(卒)하였는데, 나이는 68세이다. 서종태는 사람됨이 겸손하고 공손하며 고상하고 정제(整齊)하였으니, 문학(文學)으로 지위가 태사(台司)124)  에 이르렀다. 비록 정승으로서 일컬을 만한 업적은 없었으나 지론(持論)이 과격(過激)하지 않았고, 자신을 단속하여 청렴(淸廉)하고 검소(儉素)하였으므로 문하(門下)에 잡빈(雜賓)이 없었으니, 사람들이 이로써 칭찬하였다.

 

2월 22일 을축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여섯 번째 정고(呈告)하였는데, 세자(世子)가 승지(承旨)로 하여금 돈유(敦諭)하게 하였으나, 김창집이 차자(箚子)를 올려 거듭 사양하며 명(命)을 좇지 않았다.

 

2월 23일 병인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진후(診候)를 마치자,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말하기를,
"동궁(東宮)의 춘추(春秋)가 이미 30세를 넘었는데, 아직 종사(螽斯)125)  의 경사(慶事)가 없습니다. 혹 근력(筋力)이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으면, 약물(藥物)로써 자양(滋養)하는 도리가 없지 않으니, 청컨대, 명일(明日)에 여러 의관(醫官)을 거느리고 동궁께 입진(入診)하여 약이(藥餌)를 의논해 정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제조(提調)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선인(船人)으로서 화수(和水)126)  한 자는 강가에서 효시(梟示)하는 것이 그 사목(事目)이었는데, 국가(國家)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을 어렵게 여겨 형조(刑曹)에 이송(移送)하게 하고, 그 시일이 오래되면 마침내 소석(疏釋)하게 되므로, 선인의 무리는 징계(懲戒)되는 바가 없습니다. 청컨대, 이제부터 이후로 발각되는 자는 형조에 보내지 말고 곧바로 효시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를 윤허(允許)하고, 인하여 대동목(大同木)127)  의 품질이 거칠어 나쁜 것도 아울러 신칙(申飭)하게 하였다.

 

한중희(韓重熙)·조명봉(趙鳴鳳)을 승지(承旨)로, 정호(鄭澔)를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이희조(李喜朝)를 대사헌(大司憲)으로, 김운택(金雲澤)을 교리(校理)로, 조상경(趙尙絅)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2월 24일 정묘

약방(藥房)에서 동궁(東宮)에 입진(入診)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말하기를,
"저하(邸下)의 춘추(春秋)가 이미 30세가 넘었는데, 아직 후사(後嗣)를 잇는 경사(慶事)가 없으니, 신민(臣民)의 근심이 어찌 그칠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근력(筋力)이 미치지 못한다면 약물(藥物)로 자양(滋養)하는 방도가 없지 않으니, 명백(明白)히 하교(下敎)하더라도 진실로 불가(不可)함이 없을 것입니다. 혹 노의(老醫)를 머물러 두고 상세하게 병증(病證)을 의논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제조(提調)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이는 바로 종사(宗社)의 대계(大計)이니, 한때 부끄러워 머뭇거리면서 숨긴 채 묵묵히 계셔서는 안됩니다."
하였다. 이이명이 말하기를,
"태산(胎産)은 때가 있어 오로지 근력(筋力)에 말미암지는 않으나, 만약 근력이 미치지 못한다면 마땅히 물러가서 여러 의관(醫官)들과 의논하여 약물(藥物)을 바쳐야 할 따름입니다"
하였는데, 세자가 말하기를,
"원기(元氣)가 부족(不足)한 증후(症候)는 처음과 다름이 없다."
하자, 이이명이 말하기를,
"성상을 문안(問安)하고 대리(代理)하시느라 진실로 여가가 없겠지만, 약물을 진어(進御)하는 것 역시 어찌 드실 때가 없겠습니까? 약을 복용(服用)하는 도리는 평상시에 항상 정해 놓고 중간에 끊어지지 않아야만 바야흐로 효험을 얻을 수 있을 따름입니다."
하니, 세자가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2월 25일 무진

이봉익(李鳳翼)을 집의(執義)로, 홍현보(洪鉉輔)를 정언(正言)으로, 신사철(申思喆)을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오명항(吳命恒)을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임방(任埅)을 도승지(都承旨)로, 이문흥(李文興)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부수찬(副修撰) 김동필(金東弼)이 현도(縣道)를 통해 상서(上書)하여 사직(辭職)하고, 생각한 바를 덧붙여 진달(陳達)하기를,
"신록(新錄)을 두 번 행한 지 이미 4년이 지났으나, 아직 한 번도 본직(本職)을 지내지 못한 자가 7인에 이를 만큼 많은데, 대개 이제껏 홍문록(弘文錄)128)  은 구록(舊錄)에서 연거푸 시행되어 태반(太半)이 미처 임용(任用)되지 못한 자들이니, 이미 지극히 해괴(駭怪)합니다. 재록(再錄)에 미쳐서는 모두 전후로 뽑힌 자들인데, 까닭없이 속각(束閣)129)  해 둔 채 이제 또 갑자기 신록(新錄)의 일로써 번거롭게 청하고, 사체(事體)를 돌아보지 않으며 오로지 자기와 의논이 다른 자는 배척하고 사당(私黨)을 배치(排置)하는 것으로써 계책을 삼고 있습니다. 아! 옥서(玉署)130)  의 녹용(錄用)은 이것이 국가(國家)의 공선(公選)인데, 애초에 만약 재주가 없다 하여 버렸다면 그만이겠지만 이미 뽑은 후에 뒤따라 물색(物色)131)  을 더하여 공공연하게 배척해서 버려두고 있으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하니, 세자(世子)가 답하기를,
"옥당(玉堂)의 행공(行公)하는 관원이 근래에 매우 구간(苟艱)하다면 신록(新錄)을 행하도록 청하는 것은 조금도 불가할 것이 없는데, 이제 의논이 다른 자는 배척하고 사당(私黨)을 배치한다는 등의 말로 오로지 취모멱자(吹毛覓疵)132)  를 일삼고 있으니, 진실로 놀랄 만하다. 본직(本職)을 개체(改遞)하도록 허락한다."
하였다. 이에 전후의 전관(銓官)과 홍문록(弘文錄)을 주관했던 여러 신하들이 모두 인혐(引嫌)하고 상서(上書)하여 변명하니, 세자(世子)가 아울러 우악(優渥)한 비답(批答)을 내렸다.

 

2월 26일 기사

여러 승지(承旨)들이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2월 27일 경오

여러 승지들이 동궁(東宮)에 입대하였다.

 

청사(淸使)가 홍제원(弘濟院)에 이르렀는데,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도승지(都承旨) 임방(任埅)을 보내어 영접(迎接)하게 하였다.

 

2월 28일 신미

청사(淸使)가 도성(都城)에 들어오니, 세자(世子)가 서교(西郊)에 나가서 맞이하였다.

 

청사(淸使)가 대궐(大闕)에 나아갔다. 사간(司諫) 윤석래(尹錫來)가 선칙관(宣勅官)133)  으로서 장차 예(禮)를 행하려 하는데, 청사가 선칙관의 지위가 낮다 하여 대신(大臣)과 중신(重臣)으로 하여금 칙서(勅書)을 받들게 하므로, 승지(承旨) 이교악(李喬岳)이 역관(譯官)을 책망하여 전의 규례(規例)를 가지고 힘껏 다투게 하니, 청사가 마침내 이를 허락하였다.

 

임금이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 청사(淸使)를 접견(接見)하였는데,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조태채(趙泰采) 및 약방(藥房)의 세 제조(提調)가 입시(入侍)하였다. 청사가 장차 들어오려 하니, 먼저 임금이 병이 들어서 일어나 움직일 수 없다는 뜻을 청사에게 말하자, 청사가 답하기를,
"국왕(國王)의 병환(病患)을 우리들이 아는데, 어떻게 일어나 움직일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에 청사가 들어오자, 임금이 곁에서 부축받은 채 나란히 앉아서 청사에게 황제(皇帝)의 기거(起居)를 묻고, 다례(茶禮)를 거행한 후 파(罷)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에 계달(啓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오늘 칙서(勅書)를 선포하였을 때 객사(客使)가 갑자기 봉칙관(奉勅官)의 벼슬이 낮다고 말하고, 반드시 지위(地位)가 높은 사람을 차출(差出)해서 정하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은 전에 없던 일인데, 역관(譯官)의 무리가 예(禮)에 의거하여 효유(曉諭)하지 못하고 이에 감히 경솔하게 앞질러 번거롭게 계품(啓稟)하였으니, 일의 놀라움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해당 수역(首譯)은 객사(客使)가 돌아가기를 기다려 나문(拿問)하여 죄를 정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2월 29일 임신

청사(淸赦) 【태후(太后)를 부묘(祔廟)하고 반사(頒赦)한 것이다.】 로 인하여 구례(舊例)에 따라 나라 안에 반교(頒敎)하고 반사(頒赦)하였다.

 

왕세자(王世子)가 관소(館所)에 나아가 청사(淸使)를 보고 문후(問候) 【황제(皇帝)의 안부(安否)를 묻는 것이다.】 하는 예(禮)를 거행하였다. 세자가 자리에 나아가 두 손을 마주잡고 선 채로 청사를 향해 황제(皇帝)의 기거(起居)를 물으니, 상칙사(上勅使)가 말하기를,
"문후(問候)는 마땅히 꿇어앉아 물어야 합니다."
하므로, 시신(侍臣)이 세자에게 계품(啓稟)하였는데, 세자가 답하기를,
"꿇어앉아 문후(問候)하는 것은 전례(前例)가 없소. 정유년134)  ·무술년135)  에도 일찍이 부왕(父王)을 대신해서 예를 거행하였으나, 꿇어앉아 문후(問候)하는 예가 없었는데, 이제 무엇 때문에 처음 거행하려 하는 것이오?"
하고, 오랫동안 다투자, 청사(淸使)는 성기(聲氣)가 폭려(暴戾)하여 끝내 돌이켜 들어주지 않았다. 세자가 두 손을 마주잡고 서 있은 지 이미 오래 되었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세자를 받들어 도로 막차(幕次)에 들어간 다음 궁관(宮官)을 임금에게 보내어 계품(啓稟)하게 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들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는데,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 말하기를,
"꿇어앉아 문후하는 것이 심하게 강굴(降屈)136)  하는 뜻은 없으니, 잠시 꿇어앉아 문후하는 것이 무방(無妨)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에 꿇어앉아 문후하도록 명하였다. 궁관이 돌아와 아뢰자, 세자가 장차 꿇어앉아 문후하려 하는데, 청사가 또 북쪽을 향해 꿇어앉아 문후하되 마땅히 욕석(褥席)을 거두기를 요구하므로, 궁료(宮僚)가 이를 다투어 말하기를,
"어제 칙사(勅使)를 영접할 때에도 오히려 자리를 폈는데, 지금 어떻게 거둘 수가 있겠오?"
하니, 청사가 발끈 화를 내며 일어나 나갔다가, 잠시 후에 말을 전하기를,
"국왕(國王)께서 만약 자리를 배설(排設)하기를 청한다면 우리들도 마땅히 이를 허락하겠소."
하였다. 세자가 다시 궁관(宮官)을 임금에게 보내어 계품(啓稟)하게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욕석(褥席)은 결단코 거둘 수 없다."
하고, 인하여 대신(大臣)에게 명하여 관소(館所)에 나아가 사리에 맞음을 말하도록 하였는데, 궁관이 먼저 돌아와서 보고하자 청사가 이를 듣고는 비로소 자리를 배설(排設)하도록 허락하였다. 세자가 자리에 나아가 북쪽을 향해 꿇어앉아 기거(起居)를 묻고, 인하여 연례(宴禮)를 거행한 다음에 파(罷)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조태채(趙泰采)가 임금의 명을 받고 이르렀는데, 욕석(褥席)을 펴는 예를 이미 강정(講定) 했으므로 관소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향례(饗禮)를 마치자 물러갔다.

 

조태구(趙泰耉)를 좌참찬(左參贊)으로 삼았다.

 

2월 30일 계유

보덕(輔德) 박성로(朴聖輅)·필선(弼善) 황선(黃璿)·문학(文學) 유복명(柳復明)·사서(司書) 김여(金礪)·설서(說書) 홍용조(洪龍祚) 등이 연명(聯名)하여 상소(上疏)하기를,
"어제 관소(館所)에 거동(擧動)하셨을 때 객사(客使)가 소란을 일으킨 것은 진실로 전에 없던 변괴(變怪)인데, 다투어 고집하지 못하여 새 규례(規例)를 처음 거행하였으니, 지금까지 이를 생각하면 심담(心膽)이 모두 떨어지는 듯합니다. 신 등이 배종(陪從)하는 반열(班列)에 있으면서 주선(周旋)하는 힘을 다하지 못하여 마침내 더할 수 없이 큰 수치를 끼치게 되었으니, 직무(職務)를 감당하지 못한 죄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바라건대, 신 등을 파직(罷職)하소서."
하였는데, 세자가 사직(辭職)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청사(淸使)가 우리 나라의 화약(火藥)을 합제(合劑)하는 방법을 알고자 하므로 영접 도감(迎接都監)에서 계문(啓聞)하니, 기록해서 내주어 보내도록 하였다.

 

청사가 장차 명일(明日)에 돌아가겠다고 하였는데, 임금이 승지(承旨) 유숭(兪崇)을 보내어 청사에게 머물기를 청하게 하니, 하루 동안 머물기를 허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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