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63권, 숙종 45년 1719년 3월

싸라리리 2025. 12. 1.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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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갑술

임금이 다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조태채(趙泰采)를 보내어 관소(館所)에 나아가 청사(淸使)에게 머물기를 청하게 하니, 청사가 하루 동안 더 머물기를 허락하였다.

 

청사(淸使)가 필(筆) 4봉(封)과 색지(色紙) 10봉을 임금에게 바치고, 또 필 6봉과 색지 6봉을 세자에게 바쳤으며, 도감 당상(都監堂上)과 원접사(遠接使)에서 각각 종이·필·묵 1봉씩을 보내었는데, 도감에서 받기를 사양할 것을 계품(啓稟)하였다.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비록 문방(文房)의 물건이라 하더라도 이는 전례가 없는 일에 관계된다."
하고, 도감에 명하여 말을 전하기를,
"진귀한 물건을 진정한 마음에서 주니 감사한 점은 있으나, 전례가 없으므로 감히 받을 수가 없소."
하였는데, 도감 당상과 원접사 또한 말을 하여 이를 물리치니, 청사가 자못 기뻐하지 않으면서 차비 역관(差備譯官)의 무리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다.

 

3월 2일 을해

별시 문과 전시(別試文科殿試) 【민회빈(愍懷嬪)의 복위(復位)를 칭경(稱慶)하는 것이다.】 를 베풀어 이성환(李星煥) 등 5인을 뽑았다.

 

청사(淸使)가 별지(別紙)를 내보이면서 황제(皇帝)의 뜻임을 일컫고, 본국(本國)에서 으레 증유(贈遺)하는 물건 가운데 그 물종(物種)을 줄여서 본국의 기민(飢民)을 진휼(賑恤)하게 하니, 임금이 대신(大臣)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이른바 정액(定額) 이외의 예물(禮物)에 있어서 이는 이전부터 응당 주던 물건인데, 비록 이번에는 잠시 면제(免除)한다는 말이 있으나 우리의 도리에 있어서 폐지(廢止)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합니다. 마땅히 답하기를, ‘지금 이 별지(別紙)에 써서 보여 준 것은 진실로 황상(皇上)께서 소방(小邦)의 재황(災荒)을 진념(軫念)하시는 지극한 뜻을 우러러 본받은 것이므로 진실로 감격(感激)하였으나, 다만 종전에 궤신(醜贐)137)  하던 예물도 본래 박략(薄略)하였는데, 이제 또 따라서 폐지(廢止)한다면 황제의 사신(使臣)을 접대(接待)하는 도리에 있어서 더욱 매몰(埋沒)하는 데 관계됩니다. 유시(諭示)하는 바가 비록 이와 같으나, 결단코 봉행(奉行)하기 어렵습니다. 재해(災害)를 입는 지방의 기민(飢民)은 마땅히 미곡(米穀)을 가지고 따로 진휼(賑恤)할 것입니다.’라고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기고, 마침내 도감(都監)으로 하여금 이런 뜻으로써 청사(淸使)에게 거듭 말하도록 하였다.

 

3월 3일 병자

청사(淸使)가 말하기를, ‘황제(皇帝)께서 국왕(國王)의 병환(病患)이 어떠한지 근심하시니, 지금 증세의 가감(加減)과 쓰고 있는 약이(藥餌)를 상세히 알아가지고 돌아가서 주달(奏達)하고자 한다.’하였는데, 영접 도감(迎接都監)에서 계문(啓聞)하니, 임금이 그 대략을 기록해서 보여주도록 명하였다.

 

5도(五道)의 유생(儒生) 이만화(李萬和) 등이 상서(上書)하여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기를 청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오히려 준허(準許)를 아끼는 것은 대개 그 일이 중대한 까닭이다."
하였다

 

지평(持平) 이중협(李重恊)이 상서(上書)하여 관소(館所)에서 예(禮)를 다툰 일을 논하기를,
"피국(彼國)의 《회전(會典)》 외관상견의조(外官相見儀條)에 황제의 안부(安否)를 꿇어앉아 묻는다는 절목(節目)이 없으니, 오늘날의 일은 진실로 피인(彼人)이 창출(創出)한 말이지, 피국의 예전(禮典)은 아닙니다. 묻는 것과 답하는 것이 똑같이 황제의 기거(起居)이니, 꿇어앉는다면 모두 꿇어앉아야 하고 선다면 모두 서야 할 것인데, 어찌 꿇어앉아 묻고 서서 답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저들이 이른바 북향(北向)하여 꿇어앉아 물어야 한다는 것은 누구를 향하여 묻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마는, 장차 이러한 사리(事理)를 가지고 일일이 저들과 번역(翻繹)138)  하고, 또 말하기를, ‘사은사(謝恩使)의 행차 때 따로 주문(奏聞)을 갖춰서 예부(禮部)에 자문(咨文)을 보내어 모름지기 일정한 예(禮)를 알고자 한다.’고 하면, 저들이 반드시 그릇되고 망령되었음을 깨닫게 되고, 또 그 과실(過失)을 미봉(彌縫)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절목(節目)을 고쳐 강정(講定)해서 서서 묻는 예(禮)를 정한다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
하였는데, 세자가 답하기를,
"만약 자문(咨文)을 보낸다는 것으로 공동(恐動)한다면 쉽게 생경(生梗)139)  하게 되어서 나라를 욕되는 함이 적지 않을 것이니, 이는 생각이 깊지 못한 듯하다."
하였다.

 

경상도(慶尙道)에서는 백성 가운데 바야흐로 염병(染病)을 앓고 있는 사람이 3천 2백 30여 명이고 사망한 사람이 2백여 명이었는데, 도신(道臣)이 이를 계문(啓聞)하였다.

 

여러 승지(承旨)들이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3월 4일 정축

청사(淸使)가 돌아가는데, 기일에 앞서 세자(世子)에게 교송례(郊送禮)를 거행하지 말도록 청하였으므로, 마침내 대신(大臣) 이하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서교(西郊)에 나가 전송하게 하였다.

 

집의(執義) 이봉익(李鳳翼)이 상서(上書)하여, 관소(館所)에서 예(禮)를 다투었을 때의 과실을 논하고, 승선(承宣)140)  과 궁관(宮官)을 견파(譴罷)하고 역관(譯官)의 무리들을 엄히 다스리기를 청하니, 세자(世子)가 답하기를,
"견파(譴罷)하라는 청(請)은 너무 지나친 데 관계된다."
하였다. 이후 관소에 배종(陪從)하였던 승지(承旨) 조명봉(趙鳴鳳), 궁관(宮官) 박성로(朴聖輅)·유복명(柳復明)·김여(金礪)·홍용조(洪龍祚) 등이 모두 인책(引責)하여 체직(遞職)되었다.

 

여러 승지(承旨)들이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3월 5일 무인

김여(金礪)를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3월 6일 기묘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 이봉익(李鳳翼)이 관소(館所)에서 예(禮)를 다툰 것을 논척(論斥)한 일로 인하여 차자(箚子)를 올려 인책(引責)하였는데, 세자가 위유(慰諭)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여러 승지(承旨)들이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3월 7일 경진

여러 승지들이 동궁(東宮)에 입대하였다.

 

황해도(黃海道)에서는 각 고을의 백성들 가운데 바야흐로 염병(染病)을 앓고 있는 사람이 1천 6백여 명이고 사망한 사람이 1백 80여 명이었는데, 도신(道臣)이 계문(啓聞)하였다.

 

3월 8일 신사

여러 승지(承旨)들이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이성조(李聖肇)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예조(禮曹)에서 말하기를,
"신사년141)  에 인장리(仁章里)에 【장씨(張氏)의 묘(墓)이다.】  발인(發靷)하고 하관(下棺)하였을 때 왕세자(王世子)와 빈궁(嬪宮)께서 망곡(望哭)하신 일이 있었으니, 지금 천장(遷葬)하면서 구분(舊墳)을 허물고 발인하고 하관할 때에도 동궁과 빈궁께서 망곡하시는 의주(儀註)를 역시 마땅히 마련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3월 9일 임오

유성(流星)이 직녀성(織女星)에서 나와 문창성(文昌星) 위로 들어갔다.

 

평안도(平安道)에서는 각 고을의 백성들 가운데 바야흐로 염병(染病)을 앓고 있는 사람이 4천 3백 50여 명이고 사망한 사람이 9백 20여 명이었다.

 

여러 승지(承旨)들이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3월 11일 갑신

김진상(金鎭商)을 지평(持平)으로, 이택(李澤)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23차례에 이르도록 정고(呈告)하였는데, 세자(世子)가 특별히 유시(諭示)하기를,
"경(卿)이 조섭(調攝)하겠다고 휴가를 청한 지 거의 30일이나 되었다. 옛날의 질병(疾病)이 오늘날 거의 나았는데도 한결같이 인입(引入)한 채 사양하는 간독(簡牘)을 23번에 이르도록 많이 올렸으니, 더욱 몹시 놀라서 유시(諭示)할 수가 없다. 더욱이 지금 성상의 환후(患候)가 더하여 상하(上下)가 근심하며 두려워하고 있으니 그것이 출사(出仕)하지 않을 수 없는 첫 번째 까닭이고, 성상의 마음과 생각이 갈수록 더욱 절박(切迫)해지고 있으니 그것이 출사하지 않을 수 없는 두 번째 까닭이고, 간우(艱虞)함이 눈에 가득한데 정석(鼎席)142)  이 갖추어지지 못하였으니 그것이 출사하지 않을 수 없는 세 번째 까닭이다. 경(卿)의 체국(體國)하는 정성으로 생각이 이에 미친다면 반드시 마음을 바꾸어 계획을 고칠 것이다."
하고, 인하여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함께 오도록 하였다.

 

3월 12일 을유

지평(持平) 김진상(金鎭商)이 상서(上書)하기를,
"삼가 예조(禮曹)의 초기(草記)143)  를 보건대, 인장리(仁章里)에서 구분(舊墳)을 허물어 발인(發靷)하고 개장(改葬)할 때에 저하(邸下)와 빈궁(嬪宮)께서 세 번 망곡(望哭)하는 절목(節目)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신은 적이 지나치다고 생각합니다.
옛날에 백어(伯魚)144)  가 어머니가 죽은 지 1년이 넘어서도 오히려 곡(哭)을 하므로, 공부자(孔夫子)가 이를 듣고 말하기를, ‘아아, 심하구나!’하니, 백어가 이를 듣고 마침내 그만두었습니다. 아! 성인(聖人)은 인륜(人倫)이 지극하셨으니, 성인을 본받지 않고 누구를 본받겠습니까? 기년(朞年)이 되어도 오히려 곡(哭)할 수 없다 하는데, 하물며 개장(改葬)할 때이겠습니까? 더욱이 왕조(王朝)의 예(禮)는 필서(匹庶)145)  와 다른 것이겠습니까? 대저 예(禮)란 것은 명분(名分)을 바로잡아 혐의(嫌疑)를 구별해야 하니, 가령 익릉(翼陵)146)  ·명릉(明陵)147)   같으면 천개(遷改)하는 예가 있어야 하겠지만, 저하께서 이미 친히 흠위(廞衛)148)  를 따를 수 없다면 소복(素服)으로 망곡(望哭)하는 데 지나지 않을 뿐인데, 또 어떻게 그 예(禮)를 더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이 망곡은 진실로 등급(等級)을 높이고 내리는 절차를 밝히는 바가 못됩니다."
하자, 세자가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는데, 해조에서 대신(大臣)에게 의논하기를 청하니,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유(李濡)가 말하기를,
"헌신(憲臣)의 말은 그 합당함을 보지 못하겠으나, 바야흐로 병들어 엎드려 있는 가운데 있으니, 감히 헌의(獻議)하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은 말하기를,
"개장(改葬)하는 예절(禮節)을 한결같이 처음 장사지내는 의례(儀禮)에 준거(遵據)한다면 저하(邸下)께서 망곡하는 절차는 진실로 정리상 그만둘 수가 없으니, 헌신(憲臣)이 인용한 백어(伯魚)의 일은 오늘날에 합당함을 보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조태채(趙泰采)는 김창집의 의논과 같았다. 판중추부사 이이명(李頤命)은 말하기를,
"예(禮)에 있어서 아들은 아버지의 후사(後嗣)가 되지만 사친(私親)에게 스스로 예를 다할 수 없는 것은 조종(祖宗)을 공경하고 종묘(宗廟)를 존중하기 때문이니, 곧 예의 대방(大防)으로서 왕가(王家)에서 더욱 엄중(嚴重)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헌신(憲臣)이 망곡(望哭)하는 절목(節目)에 대해 의심스러워하는 것은 대개 혹시 예의(禮意)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용한 백어(伯魚)의 일은 정례(情禮)가 반드시 오늘날과 똑같지는 않으나, 저하께서 만약 사친(私親)의 개장(改葬) 때에 장차 제복(制服)을 만들어 곡장(哭葬)한다면 진실로 예에 벗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시구(尸柩)를 땅에서 꺼내었다가 다시 묻는데 오히려 멀리서 바라보고 한 번 곡하지도 못한다면, 생육(生育)한 은혜가 도리어 길가는 사람과 같을 것이니, 성상께서 전후로 예관(禮官)이 청한 망곡(望哭)을 허락하신 것은 진실로 예방(禮防)에 혐의가 없고, 인정상 차마 하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일찍이 처음 장사지냈을 적에 거행하였으니, 지금은 다른 의논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하고,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은 말하기를,
"개장(改葬)이 비록 초장(初葬)과는 다르더라도 무릇 예절(禮節)은 한결같이 초장(初葬)의 의례(儀禮)를 준수(遵守)해야 하니, 헌신(憲臣)이 인용한 성훈(聖訓)이 장례(葬禮) 때를 위해 나온 것이 아니라면 해조(該曹)에서 품정(稟定)한 것이 옳은 듯합니다."
하니, 세자(世子)가 전에 정한 바에 의거하여 망곡례(望哭禮)를 거행하도록 하였다.

 

전라도(全羅道)에서는 각 고을의 백성들 가운데 바야흐로 염병(染病)을 앓고 있는 사람이 6천 8백 60여 명이고, 사망한 사람이 7백 70여 명이었는데, 도신(道臣)이 계문(啓聞)하였다.

 

여러 승지(承旨)들이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3월 13일 병술

여러 승지들이 동궁에 입대하였다.

 

대제학(大提學) 김유(金楺)가 졸(卒)하였는데, 나이는 67세이다. 김유는 고(故) 상신(相臣) 김구(金構)의 아우로서, 박세채(朴世采)에게 수학(受學)하였는데, 문학(文學)으로 당시에 칭찬을 받았다.

 

3월 14일 정해

정호(鄭澔)를 판윤(判尹)으로, 조언신(趙彦臣)을 사간(司諫)으로, 남일명(南一明)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송필항(宋必恒)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여러 승지(承旨)들이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는데, 지평(持平) 김진상(金鎭商)이 함께 입대하여 전에 계달(啓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었으나, 세자(世子)가 따르지 않았다.

 

3월 15일 무자

세자(世子)가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접(引接)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 말하기를,
"강화 유수(江華留守) 심택현(沈宅賢)이 장계(狀啓)하기를, ‘몇 해 전에 최석항(崔錫恒)이 유수(留守)가 되었을 때 장청(狀請)하여 수령(守令)으로서 갚지 않고 이전(移轉)한 자를 정조(政曹)로 하여금 검거(檢擧)하지 말도록 하였는데, 해조(該曹)에서 받들어 시행하지 않고 있으니, 바라건대, 이후부터는 그 명령(命令)을 거듭 신칙(申飭)하소서.’ 하였는데, 일이 새로 시작되는 데 관계되어 여러 사람의 의논이 모두 과중(過重)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적곡(糴穀)을 바치지 않은 것에 견주어 죄 1등(等)을 더하고, 말(末)에 있는 자는 나문(拿問)하며, 그 다음은 장형(杖刑)을 집행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였는데, 예조 판서(禮曹判書) 민진후(閔鎭厚)·호조 판서(戶曹判書) 송상기(宋相琦) 또한 옳게 여기니, 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이건명이 또 말하기를,
"남한산(南漢山)의 수목(樹木)은 작벌(斫伐)하지 못한다는 금령(禁令)이 지극히 엄중하므로, 지난번 광주 부윤(廣州府尹) 윤양래(尹陽來)가 칙사(勅使)가 왔을 때 가져다 쓰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윤양래가 금령을 준수(遵守)하지 않고 제멋대로 베어다 썼으니, 만약 논죄(論罪)하지 않는다면 뒷날의 폐단을 막기 어려울 것입니다. 윤양래는 마땅히 먼저 파직(罷職)한 후에 추고(推考)하는 율(律)을 시행하소서."
하니, 세자가 이를 옳게 여겼다. 장령(掌令) 정동후(鄭東後)가 전에 계달(啓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3월 16일 기축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인입(引入)한 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임금이 허락하지 않으며 여러 번 위유(慰諭)를 더하고, 세자가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함께 오도록 하니, 이때에 이르러 나와서 정사(政事)를 보았다.

 

여러 승지(承旨)들이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한이원(韓以原)을 장령(掌令)으로, 이중협(李重恊)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3월 17일 경인

여러 승지(承旨)들이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3월 18일 신묘

여러 승지들이 동궁에 입대하였다.

 

3월 21일 갑오

김간(金榦)을 승지(承旨)로, 유집일(兪集一)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삼았다.

 

3월 22일 을미

동지 정사(冬至正使) 유집일(兪集一)·부사(副使) 이세근(李世瑾)·서장관(書狀官) 정석삼(鄭錫三) 등이 연경(燕京)에서 돌아왔는데, 세자가 불러서 보니, 유집일이 말하기를,
"피국(彼國)은 형세가 날로 축박(蹙迫)해지고 기강(紀綱)이 해이해져서 수습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서달(西㺚)이 불화(不和)를 일으킨 까닭에 전쟁이 잇따라 일어나 재력(財力)을 탕진하였고, 황후(皇后)와 태자(太子)의 자리가 빈 지 오래 되었으나, 지금까지 건립(建立)할 뜻도 없이 날마다 사냥[佃獵]과 정벌(征伐)을 일삼고 있습니다. 황제가 생존(生存)할 때에는 겨우 지탱할 것이나, 그 사람이 죽은 후에는 반드시 변란(變亂)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세자가 머리를 끄덕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에 계달(啓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살펴보건대, 지금 양전(兩殿)의 환후(患候)가 더욱 위중해져서 약원(藥院)에서 옮겨 직숙(直宿)하고 있으니, 이는 바로 신자(臣子)로서 길을 가더라도 돌아다니지 않고 웃더라도 이를 드러내어 웃지 않아야 할 때인데, 이번에 신은(新恩)149)  을 창방(唱榜)150)  한 후 풍악을 베풀며 유가(遊街)151)  한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 문과(文科)에 장원(壯元)한 이성환(李星煥)과 무과(武科)에 급제한 홍준인(洪俊人)·김치구(金致久) 등은 곧 신이 듣고 보았는데, 홍준인은 어버이의 상(喪)을 당하여 스스로 최질(衰絰)을 입고 있으면서 이러한 예절(禮節)을 무너뜨리고 풍속(風俗)을 손상시키는 일을 하였습니다. 청컨대, 이성환은 파직(罷職)시키고, 홍준인 등은 유사(攸司)로 하여금 가두어 두고 경중(輕重)에 따라 과죄(科罪)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세자가 단지 이성환 등의 일만 따랐다.

 

3월 24일 정유

세자(世子)가 이날 장씨(張氏)의 묘(墓)를 판다 하여 빈궁(嬪宮)과 대궐 안에서 망곡례(望哭禮)를 거행하였다.

 

3월 25일 무술

여러 승지(承旨)들이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어유룡(魚有龍)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3월 26일 기해

관상감(觀象監)에서 말하기를,
"인장리(仁章里)의 천장(遷葬)하는 일은 애초에 함일해(咸一海)의 진서(陳書)에서 나왔는데, 이르기를, ‘땅속의 불안(不安)함은 말할 수 없는 바가 있다.’하였고, 양익도(梁益燾)가 산에 대해 논하기를, ‘황무충(黃霧蟲)·백무충(白霧蟲)·수화기(水火氣)가 가운데 있고, 나무 뿌리가 생기고, 물이 통하는 듯하고, 얼음이 수포(水泡)같다.’고 하였으니, 마침내 황백이(黃白茸) 등의 요망(妖忘)한 말이 되었습니다. 조정에서는 경동(驚動)하여 그대로 이장(移葬)하는 의논을 정하였는데, 지금 묘(墓)를 파헤친 후에 여러 지사(地師)의 수본(手本)을 얻어 보았더니, 광(壙) 안에 습기(濕氣)가 있는 듯하나 특별히 대단한 사고(事故)는 없다 하였으니, 함일해·양익도가 한 전일의 말은 모두 허망(虛妄)한 데로 돌아갔습니다. 요망한 말로 많은 사람들을 현혹시켰으니, 그 율(律)이 지극히 무겁습니다. 더욱이 군부(君父)를 경동(驚動)하여 더할 수 없는 큰 일이 있게 하였으니, 이 사람들의 죄는 주살(誅殺)하는 것으로도 용서되지 않습니다. 또 함일해는 직접 글을 보고서도 알지 못하므로 당초의 진서(陳書)는 그의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님이 명백하여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 지주(指嗾)하여 만들어 준 자를 또한 구핵(究覈)해서 감죄(勘罪)하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해조(該曹)로 하여금 함일해·양익도를 거두어 엄중하게 추문(推問)하고, 지주(指嗾)하여 만들어 준 자와 아울러 감처(勘處)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여러 승지(承旨)들이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3월 27일 경자

황선(黃璿)을 집의(執義)로, 홍계적(洪啓迪)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이봉익(李鳳翼)을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여러 기로신(耆老臣)들에게 잔치를 내려 주는 것은 노인(老人)을 공경하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앞으로 증후(症候)에 조금 차도가 있을 때가 또한 없지 않을 것이므로, 천기(天氣)가 매우 더워지기 전에 이를 좇아 해야 마땅할 듯하니, 다음달로 좋은 날을 가려서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예조(禮曹)에서 4월 13일을 길일(吉日)로 가려서 아뢰었다.

 

장령(掌令) 정동후(鄭東後)가 상서(上書)하여 일을 논하였는데, 그 사목(事目)이 다섯 가지가 있었다. 그 첫 번째 사목에 이르기를,
"강경(講經)과 토론(討論)에 힘입어 성학(聖學)을 밝히셔야 하니, 청컨대, 중용(中庸)의 상세하게 생각하고 명확하게 분변(分辨)하는 것을 급무(急務)로 삼으소서. 위로는 순(舜) 임금과 우(禹) 임금이 주고받은 교훈(敎訓)과 공자(孔子)·증자(曾子)·자사(子思)·맹자(孟子)의 글로부터 아래로 송(宋)나라 여러 현인(賢人)들의 글에 이르기까지 모두 서로 참고하여 심역(尋繹)152)  하지 않음이 없이 철저하게 연구하고 사색(思索)하되, 통철(通徹)하지 못하는 곳이 있으면 곳에 따라 차기(箚記)해 두었다가 매번 강연(講筵)할 때에 문제를 내어 토론하소서."
하고, 그 두 번째 사목에 이르기를,
"성례(誠禮)를 다하여 유현(儒賢)을 불러 들여야 하니, 청컨대, 좌의정(左議政) 권상하(權尙夏)를 초치(招致)하는 것을 헛된 겉치레가 되게 하지 마시고, 더욱 성례(誠禮)를 돈독하게 하여 간절히 출사(出仕)하기를 권면(勸勉)하시되, 친히 엄어하시겠다는 뜻으로 유시(諭示)하시고, 반드시 이른 후에야 그만두소서."
하고, 그 세 번째 사목에 이르기를,
"성실하게 수성(修省)하여 천재(天災)를 그치게 해야 하니, 청컨대, 어버이를 섬기는 마음을 능히 헤아려 하늘을 섬기는 방도를 다하시되, 무릇 정사(政事)를 거행하고 법령(法令)을 시행하는 것을 반드시 삼가고 조심하여 효자(孝子)가 어버이를 섬기듯이 하소서."
하고, 그 네 번째 사목에 이르기를,
"간위(奸僞)를 막아서 재용(財用)을 넉넉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 도(道)의 각 고을에서 상납(上納)하는 것으로써 말하건대 경사(京司)의 할리(黠吏)가 중간에서 환롱(幻弄)하여 정세(精細)한 것을 바꾸어 추략(麤略)한 것을 바치고, 또 창고에 들인 후에도 따라서 도둑질하고 있으니, 마땅히 미포 아문(米布衙門)으로 하여금 색낭청(色郞廳)을 구임(久任)시키도록 하고, 신관(新官)과 구관(舊官)이 교체(交替)할 때에는 반드시 함께 관아(官衙)에 나아가 앉아서 번고(反庫)153)  하여 관장(管掌)하던 것을 전하게 하소서."
하고, 그 다섯 번째 사목에 이르기를,
"변경(邊境)을 튼튼하게 하여 전수(戰守)에 대비(對備)하는 것이니, 청컨대, 동래(東萊) 범어사(梵魚寺)의 구성(舊城)을 쌓게 하고, 경성(鏡城)의 6보(堡)를 철파(撤罷)하고, 각 고을의 군기(軍器)와 화약(火藥)을 신칙(申飭)하여 수선하게 하소서."
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진계(陳戒)한 바가 지극히 긴절(緊切)하니, 유의(留意)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의논하여 처리할 만한 일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는데, 묘당에서 복주(覆奏)하기를,
"미포 아문(米布衙門)의 색낭청(色郞廳)을 구임(久任)시키는 것을 정식(定式)으로 삼고, 군기(軍器)와 화약(火藥)을 수선(修繕)하도록 열읍(列邑)에 특별히 신칙(申飭)하고, 범어사의 구성(舊城)을 쌓고, 6보(堡)를 철파(撤罷)하기를 청하였으니, 청컨대, 본도(本道)의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그 편부(便否)를 상세히 살펴서 장문(狀聞)하게 한 후 처리하소서."
하니, 세자(世子)가 이를 옳게 여겼다.

 

3월 28일 신축

예조 판서(禮曹判書) 민진후(閔鎭厚)가 청대(請對)하니, 임금이 불러 보았다. 민진후가 잔치를 내릴 곳을 품의(稟議)하니,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서 베풀도록 명하였다. 민진후가 말하기를,
"왕세자(王世子)께서 마땅히 잔치에 배석(陪席)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민진후가 말하기를,
"이 일은 오로지 여러 기로신(耆老臣)들을 위하여 베푸는 것이니, 비록 대신(大臣)과 약방(藥房)의 여러 신하들일지라도 입참(入參)함은 마땅하지 못한데, 승지(承旨)와 같이 시위(侍衛)하는 여러 신하들도 상전(床前)에 늘어서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민진후가 말하기를,
"잔치에 참여하는 여러 신하들은 나이에 차이가 있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것도 선후(先後)가 있는데, 지금 이 잔치에서의 좌석의 차례는 마땅히 작질(爵秩)에 중점(重點)을 두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작질로 차례를 매기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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