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63권, 숙종 45년 1719년 4월

싸라리리 2025. 12. 1.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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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계묘

충청 감사(忠淸監司) 권업(權𢢜)이 사폐(辭陛)154)  하니, 세자(世子)가 불러서 보고, 칙유(勅諭)하여 보냈다.

 

4월 2일 갑진

여러 승지(承旨)들이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문학(文學) 유복명(柳復明)이 상서(上書)하여 지난해 북평사(北評使) 때 본 관북(關北)155)  의 사의(事宜)를 진계(陳啓)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함흥(咸興)의 본궁(本宮)은 곧 우리 태조(太祖)의 용잠(龍潛) 때 구궁(舊宮)으로서, 정전(正殿)에 사왕(四王)156)  과 태조의 신위(神位)를 봉안(奉安)하였는데, 단지 한 사람만 차출(差出)해서 수호(守護)하고 있으므로 삭망제(朔望祭) 외에 매달 한 번씩 있는 대제(大祭)가 문득 예의(禮義)에 어긋나고 구간(苟簡)하여 국체(國體)에 손상됨이 있습니다. 마땅히 본도(本道) 각릉(各陵)의 예(例)에 의거하여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참봉(參奉) 2인을 가려서 차출(差出)하게 하고, 고례(古禮)를 참고해서 향사(享祀)하는 의례(儀禮)를 작정하는 것이 진실로 사의(事宜)에 합당하겠습니다. 육진(六鎭)157)  의 백성들이 위급한 지경에 처해 있는 것은 오로지 청차(淸差)158)  에 말미암는데, 두 곳에서 개시(開市)159)  하는 것을 감당하기 어려움은 경원(慶源)보다 심할 수가 없습니다. 청인(淸人)들이 회령(會寧)에서 경원(慶源)까지 가는 데 3일의 노정(路程)이 되는데, 중간에서의 침요(侵擾)가 한이 없으니, 경유(經由)하는 변진(邊鎭)에서 만약 병화(兵火)를 만난다면, 마땅히 저들[彼中]에게 자문(咨文)을 보내어 경원부(慶源府)에서 남쪽으로 옛 무이도(無耳島)에 이르기까지 시장(市場)을 고쳐서 낮에는 교역(交易)하고 밤에는 그곳으로 돌아가게 하되, 성부(城府)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을 만부(灣府)160)  ·중강(中江)의 예와 같게 하소서. 지난번 중신(重臣)의 상소(上疏)로 인하여 무과 출신(武科出身)의 아들·사위·아우·조카는 유향(儒鄕)161)  을 논하지 말고 모두 충순위(忠順衛)에 소속(所屬)시키도록 하셨는데, 충순위의 명칭이 비록 칠반 천역(七般賤役)162)  보다 조금 낫다고는 하나, 관금(冠衿)163)  의 선비를 한결같이 예속(隸屬)시키고, 바치는 쌀이 사람마다 거의 1석(石)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북방(北方)의 출신자(出身者)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는 활을 잡고 등과(登科)한 폐해(弊害)가 아님이 없다.’하며 원망하여 울부짖는 소리가 대단합니다. 그리고 무예(武藝)를 업(業)으로 삼는 무리들이 점차 적어지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변방(邊方)의 백성을 회유(懷柔)하여 수무(綏撫)하는 도리이겠습니까? 북로(北路)의 전정(田政)은, 한결같이 정미년164)  의 양안(量案) 이후부터 양전(量田)할 때 기경전(起耕田)으로 현록(懸錄)했던 것은 설령 가끔 묵혀서 버려두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진전(陳田)으로 현록(懸錄)해 주지 않은 채 한결같이 원수(元數)에 따라 모두 수세(收稅)하게 하고, 양전(量田)하였을 때 진전(陳田)으로 현록했던 것은 추후에 도로 기경(起耕)하더라도 속전(續田)165)  으로 시행하여 단지 속포(贖布)만 징수(徵收)하고 결역(結役)166)  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전(前) 감사(監司) 이탄(李坦)이 장문(狀聞)하여 변통(變通)함에 따라 이제부터 묵혀 두고 있는 원전(元田)은 특별히 감세(減稅)하도록 허락하고, 양전하였을 때 진전(陳田)으로 현록했던 것은 도로 기경(起耕)하고 있더라도 속전(續田)을 삼은 것은 모두 원전(元田)에 붙여서 결역(結役)을 내게 하니, 새 명령(命令)이 있은 후로 백성들은 기뻐하는 자가 적고 원망하는 자가 많습니다. 대개 양전하였을 때 기경전으로 현록한 것은 원래 양전(良田)이었고, 설령 가끔 묵혀서 버려두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총계(總計)가 많지 않으므로 한결같이 8결 가운데 비록 약간 속(束)167)  의 억울함이 있다 하여도 실역(實役)에 응하는 것을 백성들이 모두 보통 일로 보고 심하게 원망하지는 않았으니, 지금에 와서 비록 구별해서 진전(陳田)으로 현록해 주자는 명령이 있을지라도 그것이 큰 은혜가 됨을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양전(量田)하였을 때 진전(陳田)으로 현록했던 것에 이르러서는 모두 사석(沙石)의 박품(薄品)이어서 실역(實役)을 책응(責應)하는 데 결코 감당할 수가 없는데, 일찍이 전에는 다만 속전(續田)의 가벼운 세(稅)로 응하였으므로 경작(耕作)하는 자가 많았으나, 지금 듣건대, 도로 원전(元田)에 소속시키자 모두 장차 다시 묵혀 버리려 한다 하니, 마땅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다시 상확(商確)하게 하소서. 성진(城津)의 앞에는 마천령(磨天嶺)의 험고(險固)가 있는데, 단천(端川)과 길주(吉州)의 사이에 끼어 있어 이로부터 남도(南道)와 북도(北道)로 나뉘어지니, 진실로 제1의 요해처(要害處)입니다. 지금 성진(城津)으로 특별히 방영(防營)을 겸하게 하여 서북(西北) 소속의 4보(堡) 가운데 긴요(緊要)하지 않은 두 보의 군졸(軍卒)을 성진에 보태 주고, 갈파(葛坡)와 탕우평(蕩于坪)의 사이에 장군파(將軍坡) 등의 두 보를 이설(移設)하여 단천(端川)·이동(梨洞)과 더불어 안팎으로 서로 응하게 한다면, 다른 날 변란(變亂)을 제어하는 양책(良策)이 될 것입니다."
하니, 세자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는데, 이후 묘당에서 복주(覆奏)하여 개시(開市)와 성진(城津)의 일 외에는 모두 그 말을 따랐다.

 

4월 3일 을사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윤석래(尹錫來)를 집의(執義)로, 이홍(李宖)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영중추부사(嶺中樞府事) 이유(李濡)가 성역(城役)을 정파(停罷)한 일로 인하여 상서(上書)하여 스스로 진술(陳述)하였는데, 이르기를,
"구구하게 어리석은 견해로 매번 말하기를, ‘이미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쌓았으면 반드시 아울러 탕춘대(蕩春臺)까지 쌓아야 훗날 만전(萬全)을 보장할 수 있다.’하였는데, 민진후(閔鎭厚)도 처음에는 비록 도성(都城)을 원접(遠接)하게 할 수가 없다고 말하였으나, 후에는 말하기를, ‘그만둘 수가 없다면 그 사이를 비워 두고 안쪽을 향해 쌓아가야 한다.’하였으니, 또한 전연 쌓을 수 없다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 또 이른바 탕춘대(蕩春臺)가 낮고 우묵하여 적(賊)이 도성에 들어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며 마치 주머니 속의 물건을 탐지(探知)하듯 할 것이라는 말은 이해할 수 없는 바가 있습니다. 대개 탕춘대를 쌓은 후에는 백악산(白岳山)·인왕산(仁王山)과 같이 우뚝 높아서 내려다보는 곳은 결코 버릴 수가 없으며, 적(敵)이 만약 중국(中國)의 제도(制度)를 써서 탕춘대와 연접(連接)한 두 산의 사이에 한 협성(夾城)을 쌓아 안팎으로 제어[控制]하며 위급한 사태를 비어(備禦)하는 곳으로 삼는다면, 내려다보는 형세는 우리에게 있지 적들에게 있지 않으니, 낮고 우묵하다는 염려는 논할 만한 바가 못됩니다. 그런데 중신(重臣)들의 말이 한 번 나오자 전후에 의논했던 것을 고집하여 좌계(左契)168)  로 삼고 문득 바꿀 수 없는 의논을 이루었으니, 이것이 어찌 신 한 사람이 변명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신이 지난해에 성(城)을 쌓자고 한 상소(上疏)를 묘당(廟堂)에 내리자, 대신(大臣)들이 복계(覆啓)하여 시행하도록 허락하시고 여러 재신(宰臣)들에게 두루 보였는데, 모두 다른 의논이 없었습니다. 성명(成命)이 이미 내려진 후 봉행(奉行)하는데 급하여 모두 심력(心力)을 기울여 서변(西邊)의 2백여 보의 땅을 설축(設築)하고 공역(功役)이 거의 완성(完成)되었는데, 이제 와서 정파(停罷)하도록 하셨습니다. 만약 일찍이 중신(重臣)의 한 마디 말이 있어서 묘당(廟堂)에서 막고 허락하지 않았더라면 또한 공사(公私)에 낭패(狼狽)되는 근심이 없었을 것인데, 신이 혼모(昏耄)한 까닭에 기미를 살피지 못하여 마침내 일을 그르친 죄과(罪科)에 빠졌습니다. 생각하건대, 저 이미 쌓은 성(城)을 허물지도 않고 완성하지도 않은 채 그대로 둔다면 장차 후세(後世)에 비난을 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니, 이것은 신의 죄(罪)입니다."
하였는데, 세자가 답하기를,
"경(卿)의 계속해서 쌓자는 청이 모두 나라를 위하는 뜻에서 나왔음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겠는가? 다만 이것은 바로 큰 일이고, 그 불편(不便)함을 많이 말하므로 이렇게 정지하라는 하교(下敎)가 있었으니, 경에게 무슨 불안(不安)해 할 단서가 있겠는가?"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이명(李頤命)·조태채(趙泰采),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 등이 청대(請對)하니, 임금이 불러 보았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성상께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신 것은 진실로 이전의 사첩(史牒)에 없던 바이니, 신들의 경축(慶祝)하는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지난번에 진실로 진연(進宴)하기를 청하였으나, 성상께서 문득 성후(聖候)가 도지고 여역(癘疫)이 지식(止息)되지 않았다 하여 윤허(允許)를 내리지 않으셨으니, 군하(群下)의 억울(抑鬱)한 마음은 말할 수 없는 바가 있습니다. 여러 기로신(耆老臣)들에게 잔치를 내려 주라는 명(命)에 이르러서는 진실로 특별한 은혜이나, 성상께서 만약 진연(進宴)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면 여러 기로신들 또한 어떻게 감히 먼저 이 잔치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잇따라 매우 힘껏 청하자, 임금이 처음에는 오히려 고집하였으나, 마침내 이를 허락하였다. 인하여 우선 앞으로 연사(年事)의 풍흉(豐凶)과 여역(癘疫)의 작헐(作歇)을 살펴보고서 다시 품정(稟定)하도록 하였다. 이건명이 또 말하기를,
"무쉬(武倅)169)  는 감찰(監察)에서 많이 나오는데, 감찰은 바로 내삼청(內三廳) 무겸(武兼)의 말사(末仕)로서 승륙(陞六)170)  한 자입니다. 당초에 본직(本職)을 추천하여 제수(除授)하였을 때 이미 뒤섞여 어지러웠는데, 그 가운데 연로(年老)해서 활을 쏘지 못하는 무리는 시사(試射)를 꺼려하여 말사(末仕)를 차지하기를 꾀하다가 동전(東銓)171)  으로 말미암아 승륙(陞六)하면 드디어 해사(該司)에서 감찰(監察)에 전보(轉補)시켜 으레 수령(守令)을 차임(差任)하니, 이와 같이하고서 수령을 가려 차임하기를 바라고자 한다면,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이제 만약 동전(東銓)에서 감찰(監察)·주부(主簿) 등의 자리는 도총부(都摠府)·훈련원(訓鍊院) 중에서 적합한 사람을 차출하여 제수(除授)하고, 도총부·훈련원의 자리는 승륙(陞六)한 관원을 옮겨서 제수한다면, 윤선(掄選)하는 방도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무변(武弁)으로서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6품에 승진(陞進)한 자는 훈련원과 도총부에서 천전(遷轉)한 지 3년이 지나지 않아서 곧바로 당상관(堂上官)으로 승진시키면, 영장(營將)과 주목(州牧)에 모두 장애(障碍)되는 바가 없으나, 관방(官方)172)  의 질서가 없음이 이와 같은 것은 없습니다. 이후로는 비록 훈련원 주부(主簿)로부터 승진하여 훈련원 정(訓鍊院正)에 이른 자일지라도 반드시 현재 겸무하고 있는 품급(品級)에 따라 수령(守令)을 시험하고, 그 치적(治績)을 살펴본 후에 그제야 승자(陞資)하도록 허락할 것이며, 그 나머지 다른 길을 경유하여 당상관(堂上官)으로 승진한 자 또한 그 사람에 따라 먼저 현읍(縣邑)을 시험해 본 후에 비로소 해당 품관(品官)으로 제수(除受)한다면, 갑자기 순서를 뛰어넘어 승진하는 근심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4월 4일 병오

한세량(韓世良)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4월 5일 정미

우박(雨雹)이 내렸다.

 

인장리(仁章里)에서 영구(靈柩)가 발인(發靷)하여 진해촌(眞海村) 신산(新山)으로 향하였는데, 세자가 경현당(景賢堂)에서 망곡(望哭)하고, 세자빈(世子嬪)도 궐내(闕內)에서 망곡례(望哭禮)를 거행하였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경현당(景賢堂)은 곧 동궁(東宮)이 명(命)을 받아 정사(政事)를 청단(聽斷)하는 정당(政堂)이므로, 사체(事體)의 엄중(嚴重)함이 법전(法殿)과 차이가 없다. 더욱이 성상의 환후(患候)가 낫지 않고 오래 끌어 상하(上下)가 근심하여 두려워 하고 있는 날에 이곳에서 사친(私親)을 위해 거애(擧哀)하였으며, 궁관(宮官)이 조애(助哀)하고 백료(百僚)가 문후(問候)하여 공조(公朝)173)                          에서 응당 거행해야 하는 대예절(大禮節)과 같이 하는 바가 있고 조금도 슬픔을 억제하여 드러내지 않고 참는 뜻이 없었으니, 이는 예절이 지나친 것이었다. 이제 만약 금중(禁中)의 별당(別堂)에서 조금이나마 사사로운 슬픔을 펴고 말았다면, 정리(情理)와 예의(禮義)에 있어서 두 가지가 모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예관(禮官)의 계청(啓請)과 대신(大臣)의 의논이 일찍이 이에 미치지 못하였으니, 견식이 있는 이는 이를 한탄하였다.


【태백산사고본】 71책 63권 25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62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역사-편사(編史)


[註 173]              공조(公朝) : 공공(公共)의 조정(朝廷).
사신(史臣)은 논한다. 경현당(景賢堂)은 곧 동궁(東宮)이 명(命)을 받아 정사(政事)를 청단(聽斷)하는 정당(政堂)이므로, 사체(事體)의 엄중(嚴重)함이 법전(法殿)과 차이가 없다. 더욱이 성상의 환후(患候)가 낫지 않고 오래 끌어 상하(上下)가 근심하여 두려워 하고 있는 날에 이곳에서 사친(私親)을 위해 거애(擧哀)하였으며, 궁관(宮官)이 조애(助哀)하고 백료(百僚)가 문후(問候)하여 공조(公朝)173)                          에서 응당 거행해야 하는 대예절(大禮節)과 같이 하는 바가 있고 조금도 슬픔을 억제하여 드러내지 않고 참는 뜻이 없었으니, 이는 예절이 지나친 것이었다. 이제 만약 금중(禁中)의 별당(別堂)에서 조금이나마 사사로운 슬픔을 펴고 말았다면, 정리(情理)와 예의(禮義)에 있어서 두 가지가 모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예관(禮官)의 계청(啓請)과 대신(大臣)의 의논이 일찍이 이에 미치지 못하였으니, 견식이 있는 이는 이를 한탄하였다.

 

헌납(獻納) 이봉익(李鳳翼)이 상서(上書)하여, 다만 성역(城役)만 정지하고 경리청(經理廳)을 혁파(革罷)하지 않는 것의 그른 점을 논하였는데, 이르기를,
"이 경리청(經理廳)에서 원망을 불러들이고 재물(財物)을 소모(消耗)하며, 나라를 병들게 하고 백성을 해치는 실상은 비록 일월(日月)과 같은 임금의 밝음을 가지고서도 오히려 죄다 굽어살필 수 없는 바가 있습니다. 중개인[駔僧]의 무리와 좀도둑[狐鼠]의 무리가 혹은 급료(給料)의 판비(辦備)를 핑계대기도 하고 혹은 남는 것을 가져간다고 핑계대기도 하면서 팔로(八路)에 횡행(橫行)하며 여러 방면으로 침범하여 빼앗는데, 공가(公家)에는 보탬이 없고 다만 개인의 주머니만 넉넉하게 되니, 소민(小民)은 이로 말미암아 이익을 잃게 되고 국가의 저축은 이로 말미암아 탕진(蕩盡)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오늘날의 급무(急務)를 논한다면 경리청의 혁파(革罷)를 마땅히 먼저 해야 하고, 탕춘대(蕩春臺)를 쌓는 역사(役事)를 정지하는 것은 다만 제2건의 일이 됩니다."
하니, 세자(世子)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였다.

 

4월 7일 기유

진해촌(眞海村)에서 【장씨(張氏)를 옮겨 장사한 신산(新山)이다.】  하관(下棺)하니, 세자(世子)와 세자빈(世子嬪)이 망곡례(望哭禮)를 거행하였다.

 

4월 8일 경술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에 계달(啓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고, 또 논핵(論劾)하기를,
"광주 부윤(廣州府尹) 이정신(李正臣)은 전후로 관직(官職)에 있으면서 이미 치적(治績)이 없었고, 또 청렴(淸廉)하다는 명성도 없었는데, 본부(本府)의 직임(職任)을 제수하시니, 물정(物情)이 크게 놀라고 있습니다. 충주 목사(忠州牧使) 조태과(趙泰果)는 조금도 볼 만한 정적(政績)이 없고 삼가지 않는다는 비난만 많이 있습니다. 청컨대, 모두 파직(罷職)하소서."
하였으나, 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4월 9일 신해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에 계달(啓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었는데, 세자가 다만 이정신(李正臣)의 일만 따랐다.

 

여러 기로신(耆老臣)들에게 잔치를 내려 줄 날이 며칠밖에 남지 않았는데, 갓 졸(卒)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서종태(徐宗泰)의 관(棺)이 아직 빈소(殯所)에 있으므로, 부응교(副應敎) 황귀하(黃龜河)와 부교리(副校理) 김운택(金雲澤)이 차자(箚子)를 올려 두궤(杜蕢)174)  의 말을 인용하면서 대조(大朝)에게 계품(啓稟)하여 대신(大臣)의 상(喪)이 발인(發靷)한 후에 물려서 길일(吉日)을 가릴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예조(禮曹)에서도 이를 말하자 임금이 물려서 거행하도록 명하였는데, 이에 18일로 고쳐서 좋은 날을 가렸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4월 10일 임자

달이 태미 동원(太微東垣)으로 들어갔다.

 

신방(申昉)을 검열(檢閱)로 삼았다.

 

세자(世子)가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접(引接)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 말하기를,
"지난날 영상(領相)이 올린 차자(箚子) 가운데에서 군문(軍門)을 변통(變通)할 일을 논하였는데, 근래에 양역(良役)의 폐해는 이미 갑자기 변통할 수가 없으니, 구급(救急)하는 방도는 다만 한 군문을 혁파(革罷)하여 도고(逃故)175)  를 채우게 하는 데 있습니다. 일찍이 전에 금위영(禁衛營)을 혁파하고자 하였으나, 의논이 일치(一致)하지 않아서 겨우 혁파하자마자 곧 복구(復舊)하였으니, 이는 갑자기 결정(決定)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저하(邸下)께서 시탕(侍湯)하시는 여가에 대조(大朝)께 우러러 계품(啓稟)하시고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신 다음 조용히 강구하셔서 변통하는 바탕을 삼으심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세자가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권상유(權尙游)가 말하기를,
"근래에 수령(守令)들이 명예를 구하는 폐단(弊端)은 진실로 지난날 수상(首相)의 차자(箚子)와 같습니다. 서울의 각사(各司)에서 응당 상납(上納)해야 하는 여러 가지의 미포(米布)를 혹은 견감(蠲減)해 주기도 하고 혹은 기한을 늦추어 주기도 하면서 백성의 칭찬을 요구하고는 미처 수습(收拾)하지 못한 채 빨리 체차(遞差)되어 돌아가기만 꾀하므로, 월등(越等)176)  으로 법식(法式)을 정하여 이 폐단을 막고자 하였는데, 일찍이 전에 사맹삭(四孟朔)177)  으로 1등을 삼았을 때에는 수령(守令)들이 척념(惕念)하여 거행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번 근년에 봉료(俸料)를 반급(頒給)한 후부터 월등(越等)하는 것을 매달 등급에 준거(準據)하므로 사람들이 모두 가볍게 범하고 있으니, 이제부터 이후로 전의 사맹삭에 등급을 계산하던 것에 의거하면 반드시 징외(懲畏)하는 방도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김창집·이건명이 모두 권상유(權尙游)의 말이 옳다고 칭찬했으나, 세자가 따르지 않고, 그대로 전에 매달 등급을 계산하던 것에 의거하도록 하였다. 이건명이 또 말하기를,
"헌납(獻納) 이봉익(李鳳翼)이 상서(上書)하여, 경리청(經理廳)을 혁파하고 일을 맡았던 사람을 논죄(論罪)하도록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설축(設築)하려 하였을 때 세 군문(軍門)에 나누어 맡겨 서로 통섭(統攝)이 되지 않았으므로 경리청을 설치하여 대신(大臣)으로 겸대(兼帶)하게 하였습니다. 아문(衙門)이 존엄(尊嚴)하지 못하면 세 군문을 호령(號令)할 수 없으니, 경리청의 명호(名號)는 혁파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그리고 봉료(俸料)를 판비(辦備)한다는 한 절목(節目)에 이르러서는 일을 맡은 사람이 잘 봉행(奉行)하지 못하여 원망을 불러들이고 재물을 소모시켰다고 사람들의 말이 퍼져 소란하므로 진실로 일체 정파(停罷)함이 마땅하나, 일을 맡았던 사람을 만약 갑자기 가두어 죄를 다스린다면 이미 흩어진 재물을 수습(收拾)할 수 없을 것이니, 본청(本廳)에서 기한을 정하여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아마도 무방(無妨)할 듯합니다."
하니, 세자가 말하기를,
"경리청은 혁파하지 말고, 차인(差人)의 봉료(俸料)를 판비하는 일은 일체 정파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건명이 또 말하기를,
"영상(領相)의 차자(箚子) 가운데 이르기를, ‘대간(臺諫)의 출입(出入)이 일정하지 아니하여 하직(下直)하는 수령(守令)이 여러 번 찾아가도 만나지 못해서 길 떠나는 기한을 여러 차례 늦추니, 청컨대, 신칙(申飭)을 더하도록 하고, 명함을 두고 부임(赴任)하도록 윤허하소서.’ 하였는데 대간(臺諫)이 만일 이 차자를 보면 반드시 경칙(警飭)하는 도리가 있을 것이니, 따로 정식(定式)을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수령의 하직은 뜻한 바가 있으나 여러 번 찾아가도 만나지 못하여 그 폐단이 매우 많으니, 삼사(三司)에서 만약 이 폐단을 알고서 다시 과실을 책망하지 않는다면 좋겠습니다."
하니, 세자가 말하기를,
"옳다."
하였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근래에 수령이 명예를 구하는 것이 풍습(風習)을 이루어 응당 받아들여야 할 물건을 일체 받아들이지 않으며, 심한 경우는 대동 전세(大同田稅)까지도 또한 제때에 봉납(捧納)하지 않고서 혹 관청(官廳)에서 방납(防納)하여 이로써 명예를 구하고 있어 민속(民俗)이 날로 변하고 있으나, 어사(御史)의 염문(廉問)하는 서계(書啓)에 포장(褒奬)하는 말은 도리어 이것을 앞세우니, 그 전해 내려온 폐단(弊端)이 적지 않습니다. 지금부터는 수령의 치적(治績)은 다만 칠사(七事)만 논하고, 그밖의 명예를 구하는 정사(政事)는 서계(書啓)에 거론(擧論)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진실로 합당합니다."
하니, 세자가 이를 옳게 여겼다. 이건명이 말하기를,
"양전 도감 당상(量田都監堂上)을 처음에 민진원(閔鎭遠)과 권상유(權尙游)로 차하(差下)하고, 두 사람으로 하여금 세 도(道)를 나누어 관장(管掌)하게 하였는데, 구간(苟簡)함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청컨대, 호조 판서(戶曹判書) 송상기(宋相琦)를 또한 양전 당상(量田堂上)으로 차임(差任)하소서."
하니, 세자가 이를 옳게 여겼다. 이건명이 말하기를,
"영상(領相)이 올린 차자(箚子) 가운데에 무과(武科)에서 간계(奸計)를 쓰는 차비관(差備官)과 거자(擧子)의 일을 논열(論列)한 바가 있습니다. 근래에 강정(降定)178)  한 수군(水軍)의 무리를 시험에 나아가 참여할 수 있게 되면 탈하(頉下)179)  하도록 허락하셨으므로, 간사한 폐단을 막기가 어렵게 되었으니, 영상의 말에 의거하여 거자는 본죄(本罪) 외에 영구히 정거(停擧)시키고 차비관은 본죄 외에 영구히 벼슬을 임용하지 않게 하는 것이 진실로 합당합니다."
하였는데,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들이 모두 옳다고 하니, 세자가 이를 옳게 여겼다.
이건명이 또 말하기를,
"영상의 차자 가운데 또 논하기를, ‘경중(京中) 각사(各司)의 포폄(褒貶)이 다만 문구(文具)로 돌아가고, 엄중하게 밝히는 뜻이 전혀 없다.’고 하였으니, 이제부터 이후로 경중의 전곡 아문(錢穀衙門)이나 사송 아문(詞訟衙門)의 포폄(褒貶)의 등제(等第)는 한결같이 외방(外方)의 전례에 의거하여 출척(黜陟)하는 바탕을 삼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는데, 공조 판서(工曹判書) 유집일(兪集一)이 말하기를,
"외방(外方)의 전례에 의거하여 모두 제목(題目)으로 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세자가 이를 옳게 여겼다. 지평(持平) 김진상(金鎭商)이 전일에 계달(啓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었으나, 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정언(正言) 어유룡(魚有龍)이 전일에 계달했던 것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군위 현감(軍威縣監) 박태진(朴泰鎭)은 종일 술에 몹시 취하여 일을 처리하는 것이 전도(顚倒)되고 망령되었으며, 총애하는 기생(妓生)과 마주 춤추기까지 하여 마침내 인근 고을에서 비웃음을 샀으니,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
하였으나, 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진후(診候)를 마치자, 제조(提調)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겸무하고 있는 진휼청(賑恤廳)에서 오래 된 저축을 탕진[蕩竭]하였으므로 올해 정월(正月) 이후로 응당 치러야 할 공물(貢物)을 헤아려 주지 못하고 있으니, 일이 지극히 민망스럽습니다. 일찍이 계해년180)  에 선신(先臣)181)  과 고(故) 상신(相臣) 이단하(李端夏)가 명(命)을 받들어 공물을 헤아려 줄이면서 너무 지나친 것은 약간 줄이고 부족(不足)한 것은 헤아려 증가시켜 그 수량(數量)을 통계(通計)해 보니, 전에 견주어 줄인 것이 1만여 석(石)이나 되었는데, 별단(別單)을 계하(啓下)하여 준행(遵行)하였으므로 본청(本廳)에서 잇대어 쓸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기사년182)  에는 상신(相臣)과 주관(主管)했던 사람이 도민(都民)을 위로하여 기쁘게 한다고 핑계하고서 죄다 복구(復舊)시켰는데, 또 근래에 잇따라 흉년(凶年)을 만나 세입(歲入)이 크게 줄었고, 새로 창출(創出)해 낸 공물마저 각처의 제향(祭享)과 응사(鷹師) 등의 명목(名目)이 또 매우 많았으니, 어찌 군색(窘塞)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만약 묘당(廟堂)에서 계해년의 별단(別單)을 가져다가 참작하여 재생(裁省)해서 시행한다면 거의 수용(需用)에 보탬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에 명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4월 11일 계축

조영복(趙榮福)을 승지(承旨)로, 조상경(趙尙絅)을 수찬(修撰)으로 삼고, 황귀하(黃龜河)를 승진시켜 승지(承旨)로 임명하였다.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도승지(都承旨) 임방(任埅)은 지금 나이 80세인데, 사람이 중수(中壽)183)  하는 것은 옛부터 드물게 있는 일이다. 여러 기로신(耆老臣)들에게 친히 나가서 잔치를 내려 줄 기일이 가까와졌는데, 특별히 지중추(知中樞)를 제수(除授)하여 함께 잔치에 참여하게 하는 것도 하나의 좋은 일이니, 서전(西銓)184)  에 말하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말하기를,
"진해촌(眞海村)의 청룡(靑龍)185)  안에 종반(宗班)의 묘(墓)가 1백여 보 안에 있고 민전(民田)이 많이 있으니, 청컨대, 임오년186)  의 전례에 의거하여 종반(宗班)의 묘(墓)를 파서 옮기게 하고, 민전은 값을 주고 묵혀서 농사를 폐지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에 계달(啓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었는데, 세자가 다만 박태진(朴泰鎭)의 일만 따랐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에 계달했던 것을 거듭 아뢰었는데, 세자가 다만 조태과(趙泰果)의 일만 따랐다.

 

통신 정사(通信正使) 홍치중(洪致中)·부사(副使) 황선(黃璿)·종사관(從事官) 이명언(李明彦) 등이 하직하고 일본(日本)으로 떠나는데, 세자가 불러 보았다. 홍치중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 사람이 표류(漂流)하다가 대마도(對馬島)에 이르면 왜인(倭人)들이 내보낼 때 차왜(差倭)를 보내어 폐단이 많이 있었으므로, 예조 판서(禮曹判書) 민진후(閔鎭厚)의 계달(啓達)로 인하여 통신사(通信使)의 행차에 따로 서계(書契)를 만들어 약조(約條)를 개정(改定)하도록 명하셨습니다. 다만 서계란 곧 예조 참의(禮曹參議)의 서계이니, 사신이 가지고 가는 것은 사체(事體)가 미안(未安)하고, 역관(譯官)이 가지고 가는 것은 섬에 도착한 후 왜인들이 다투어 고집한다면 형편이 내버려 두기가 어려울 것이며, 사신의 행차에 앞서 가서 체류(滯留)하게 하는 것은 중난(重難)합니다. 이번에는 서계를 쓰지 말고 사신(使臣)이 도주(島主)에게 말하도록 하고, 서계는 훗날 만들어 보내는 것이 아마도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세자가 이를 옳게 여겼다. 홍치중(洪致中)이 말하기를,
"동래(東萊)의 왜인에게 지공(支供)하는 쌀이 매번 화수(和水)187)  의 폐단이 있음을 왜인들이 여러 번 말하였는데, 신 등의 행차에 저들이 또 반드시 신칙(申飭)하기를 요구할 것이니, 또한 저들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조정(朝廷)에서 거듭 금제(禁制)한다면 저들도 반드시 감동하여 기뻐할 것입니다."
하고, 이명언이 말하기를,
"공작미(公作米)188)  를 거두지 않는 폐단을 저들이 또한 매번 말하는데, 이는 대개 동래부(東萊府)에서 그 수표(手標)를 사서 봉료(俸料)를 판비(辦備)하는 밑천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며, 동래부 뿐만 아니라 경상 감영(慶尙監營)과 경아문(京衙門)에서도 또한 그러하므로, 이로 인하여 폐단이 되었다고 하니, 또한 마땅히 금단(禁斷)을 가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세자가 이를 허락하고, 이내 유시(諭示)하기를,
"수로(水路)가 험하고 먼데, 무사히 갔다 오도록 하라."
하였다.

 

승지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4월 12일 갑인

유명홍(兪命弘)을 도승지(都承旨)로 삼았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유(李濡)가 이봉익(李鳳翼)이 상서(上書)하여 경리청(經理廳)의 일을 논하면서 침범하여 꾸짖는 말이 많았다는 것으로 인하여 도성(都城) 밖으로 나갔는데, 승정원(承政院)에서 이를 아뢰니, 세자가 승지(承旨)로 하여금 돈유(敦諭)하게 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에 계달(啓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경산 현감(慶山縣監) 심수준(沈壽俊)은 관비(官婢)에게 고혹(蠱惑)되어 관아(官衙) 안에서 데리고 살다가, 관비가 죽자 친히 호상(護喪)하였으니, 청컨대, 파직(罷職)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하니, 세자가 이를 옳게 여겼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4월 13일 을묘

황해도(黃海道) 옹진부(瓮津府)의 민가(民家)에서 소가 송아지를 낳았는데, 다리가 다섯 개, 발이 여섯 개, 꼬리가 두 개, 머리가 하나였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4월 15일 정사

승정원(承政院)에서 말하기를,
"왕세자(王世子)께서 거둥하실 때에는 으레 승지(承旨)와 사관(史官)이 배시(陪侍)하였습니다. 이제 친히 나가서 잔치를 내려 주실 때에는 여러 승지들이 다 마땅히 대조(大朝)께 입시(入侍)해야 할 것이나, 그 가운데 승지·사관 1원씩은 또한 마땅히 전례에 의거하여 동궁에게 배시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진후(診候)를 마치자,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말하기를,
"내려주는 잔치의 의주(儀註)에 여(輿)에 오르고 내리는 절차(節次)가 있는데, 그 사이에 지세(地勢)가 평평하지 못한 곳이 있으니, 이러한 절목(節目)은 제거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대내(大內)에서 연소(宴所)로 옮겨가야 할 것이다."
하니, 이이명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고취(鼓吹)189)  는 경현당(景賢堂)에 먼저 들어가 출어(出御)하시기를 기다려 합작(合作)해야 하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밖에서 이차(移次)190)  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마땅히 양덕당(養德堂) 전문(前門)에서 경현당으로 나갈 것이니, 고취는 문 밖에서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이명이 말하기를,
"영부사(領府事) 이유(李濡)는 평일에 나라를 위해 부지런히 일하였는데, 지금 경리청(經理廳)의 일로 인해 많은 허물이 그에게로 몰려 야외(野外)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지금 내려주는 잔치는 천고(千古)의 성대한 일인데, 이유는 기로소(耆老所)의 반수(班首)이기 때문에 참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상께서 혹시 친히 하교(下敎)하시거나 혹은 동궁(東宮)에게 명하여 각별히 출사(出仕)하도록 권면하게 하시는 것이 아마도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세자(世子)가 승지(承旨)를 보내어 특교(特敎)를 가지고 가서 영부사(領府事) 이유(李濡)에게 유시(諭示)하게 하기를,
"경(卿)이 평일(平日)에 나라를 다스린 순수한 정성은 내가 환히 알고 있다. 지금 북한산성(北漢山城)은 이미 대계(大計)를 정하여 경에게 주관(主管)하도록 명하였는데, 경기(經紀)하는 즈음에 비록 논의(論議)는 같지 않은 바가 있었으나 첫째도 국사(國事)이고 둘째도 국사이다. 일을 맡았던 자가 근신하지 않은 경우는 더욱 경(卿)이 알 바가 아니므로 조금도 불안(不安)해 할 단서가 없는데, 도성(都城) 밖으로 물러가서 들어올 기약이 없으니, 성상께서 섭섭하게 여기는 사상(思想)이 어찌 한정이 있겠는가? 더욱이 지금 친히 나가서 잔치를 내려주시는 것은 진실로 드물게 있는 성대한 일이니, 경은 기로소(耆老所)의 반수(班首)로서 결단코 물러가 있을 수 없음이 명백하다."
하고, 인하여 함께 오도록 하니, 이유가 마침내 도성으로 들어왔다.

 

4월 16일 무오

비국(備局)에서 말하기를,
"통신사(通信使)가 등대(登對)하였을 때 계달(啓達)한 바는 소루(疏漏)한 것이 없지 않았습니다. 대개 임술년191)  에 통신사(通信使)가 왜인(倭人)과 정당(停當)192)  하였을 때 파선(破船)하여 운명(殞命)한 외에는 별차(別差)를 보내지 않는다는 것을 서로 약속하였는데, 왜인(倭人)은 파선(破船)과 운명(殞命)을 나누어 두 건으로 만들었습니다. 차왜(差倭)의 별송(別送)이 제한이 없으니, 이번에 사신의 행차가 대마도(對馬島)에 도착한 후에 파선하여 운명한 것은 1건이 되고 두건이 아니라는 뜻을 반복해서 책유(責諭)하여 강정(講定)하고 오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이 뜻을 통신사에 분부(分付)하소서."
하니, 세자가 이를 옳게 여겼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4월 17일 기미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세자(世子)가 영(令)을 내리기를,
"영상(領相)의 차자(箚子) 가운데 금위영(禁衛營)을 혁파(革罷)하라는 일을 대조(大朝)께 우러러 계품(啓稟)하였더니, ‘이 일은 경솔하게 단정(斷定)할 수가 없다. 또 일찍이 임술년193)   무렵에 광주 유수(廣州留守)를 차출(差出)하여 수어사(守禦使)를 겸하게 하고, 부윤(府尹)을 부사(副使)로 삼도록 했었는데, 내 생각에는 부윤을 폐지하고 단지 경력(經歷)만 차출하며, 유수(留守)로 수어사를 겸하게 하여 심도(沁都)194)  의 예와 같게 한다면, 편호(便好)한 데 관계되는 듯하다. 이 일까지 다른 대신(大臣)과 묘당(廟堂)의 여러 신하들에게 문의(問議)하여 처리하도록 하라.’고 하교(下敎)하셨으니, 이에 의거하여 거행(擧行)하도록 하라."
하였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4월 18일 경신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여러 기로신(耆老臣)들에게 잔치를 내려 주었다. 왕세자(王世子)의 좌석(座席)을 어좌(御座) 왼쪽에 설치하고, 기로(耆老)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유(李濡)·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우항(金宇杭)·행 지중추부사(行知中樞府事) 황흠(黃欽)·강현(姜鋧)·행사직(行司直) 홍만조(洪萬朝)·이선부(李善溥), 한성 판윤(漢城判尹) 정호(鄭澔)·우참찬(右參贊) 신임(申銋)·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임방(任埅)이 잔치에 참여하였다. 이날 사시(巳時)에 임금이 익선관(翼善冠)과 곤룡포(袞龍袍)를 갖추고 소여(小輿)를 타고 숭덕문(崇德門)을 거쳐 나가니, 고취(鼓吹)가 시작하여 여민락(與民樂)을 연주하였다. 여(輿)에서 내려 경현당(景賢堂)에 나가니, 내시(內侍)가 궤장(几杖)을 받들어 어좌(御座) 곁에 두고 상서관(尙瑞官)이 어보(御寶)를 받들어 안(案)에 놓았다. 근시(近侍)와 시위(侍衛)하는 장사(將士)들이 각각 자리에 나아가고, 왕세자(王世子)가 여러 기로신들을 거느리고 모두 네 번 절하고 자리에 나아갔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민진후가 말하기를,
"이번에 석연(錫宴)195)  의 음악 절차는 한결같이 진연(進宴) 때의 예에 의거하였는데, 다만 진연 때에는 제1작(第一爵)과 2작(二爵) 때 탕(湯)을 바치는 절차가 없이 단지 만두(鏝頭)만 바치고 2작을 마친 후에야 비로소 탕을 바치는 절차가 있었으나, 이번에는 여러 신하들을 위하여 내려주는 잔치이므로 1작(爵)부터 5작(爵)까지 잇따라 탕을 다섯 차례나 바치도록 하였으며, 음악 절차는 당초에 장악원(掌樂院)에서 마련한 것과 조금 다르게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옹원 제조(司饔院提調)가 주기(酒器)를 바치자 음악이 시작되고, 왕세자 이하의 관원들이 자리를 나란히 하여 부복(俯伏)하였다. 바치기를 마치자 음악이 그쳤다. 제조가 휘건함(揮巾函)을 받들어 어좌(御座) 앞에 나아가자 음악이 시작되고, 내시(內侍)가 꿇어앉아 휘건(揮巾)을 바치기를 마치자 음악이 그쳤다. 제조가 찬안(饌案)를 바치자 음악이 시작되었는데, 또 별행과(別行果)를 바쳤다. 집사자(執事者)가 여러 기로신(耆老臣)들의 찬탁(饌卓)을 배설(排設)하니 음악이 그쳤다. 임금이 시위(侍衛)하는 여러 장수에게 자리를 내려주도록 명하였다. 근시(近侍)가 화반(花盤)을 받들어 어좌(御座) 앞으로 나아가자 음악이 시작되었다. 왕세자 이하의 관원들이 자리를 나란히 하여 부복(俯伏)하고 내시(內侍)가 꽃을 바치기를 마치니 음악이 그쳤다. 제조가 염수(鹽水)를 바치자 음악이 시작되고, 제조가 공안(空案)을 찬안(饌案)의 오른쪽에 놓으니 음악이 그쳤다. 왕세자 이하의 관원들이 도로 자리에 돌아갔다. 제조가 공안을 왕세자의 오른쪽에 놓고, 보덕(輔德)이 왕세자에게 꽃을 올리고, 집사자(執事者)가 여러 기로신(耆老臣)들에게 꽃을 나누어 주었다. 내시가 교지(敎旨)를 선포하기를, ‘전내(殿內)의 시위(侍衛)에게 모두 자리를 내려 주도록 하라.’하였다. 제조가 소선(小饍)을 바치자 음악이 시작되고 왕세자 이하의 관원들이 자리를 나란히 하여 부복하였으며, 바치기를 마치니 자리에 돌아갔다. 부제조(副提調)가 왕세자에게 선(饍)을 올리고 집사자(執事者)가 여러 기로신(耆老臣)들에게 선(饍)을 베푸니 음악이 그쳤다. 내시가 교지(敎旨)를 선포하기를, ‘별운검(別雲劍) 이하의 관원에게 자리를 내려주어 보검(寶劍)을 체대(遞代)하게 하라.’하였다. 전악(典樂)이 창(唱)하기를, ‘악장(樂章)을 존숭(尊崇)하라.’하여 유천지곡(維天之曲)을 마치자, 제조가 제1작(爵)에 술을 따르고 내시가 전해 받들어 안(案)에 놓으니, 음악을 천년만세(千年萬歲)를 연주하고 무동(舞童)이 들어와서 춤을 추었다. 부제조가 왕세자에게 술을 올리고 집사자가 여러 기로신들에게 술을 돌리자 임금이 술잔을 들어 세 번 마셨다. 제조가 나아가서 작(爵)을 받아 점(坫)에 놓으니 음악이 그쳤다. 제조가 고기를 베어 꿇어앉아 찬안(饌案)의 오른쪽에 바치자 음악은 오운개서조(五雲開瑞朝)를 연주하고, 왕세자 이하의 관원이 자리를 나란히 하여 부복하였다. 제조가 만두(饅頭)를 바치기를 마치자 음악이 그치고, 왕세자 이하의 관원이 자리에 돌아갔다. 제조가 탕(湯)을 바치자 음악이 시작되고 왕세자 이하의 관원이 자리를 나란히 하여 부복하였다. 바치기를 마치자, 음악이 그치고 왕세자 이하의 관원이 자리에 돌아갔다. 제2작·제3작·제4작을 바칠 때 탕을 바치는 의식(儀式)은 모두 전과 같게 하였는데, 제2작 때에는 음악을 정읍만기(井邑慢機)를 연주하고 아박무(牙拍舞)를 무동(舞童)이 들어와서 추었으며, 탕(湯)을 바치자 음악은 청평곡(淸平曲)을 연주하였다. 제3작 때에 음악은 보허자령(步虛子令)을 연주하고 향발무(響鈸舞)를 무동이 들어와서 춤추게 하였으며, 탕을 바치자 음악은 하운봉(夏雲峰)을 연주하였다. 제4작 때 음악은 천년만세(千年萬歲)를 연주하고 무고(舞鼓)를 무동이 들어와서 추었으며, 탕을 바치자 음악은 낙양춘(洛陽春)을 연주하였다. 마침내 어좌(御座) 앞에 푸른 휘장을 내리고 임금이 조금 쉬었다가, 잠시 후에 휘장을 걷어치웠다. 내시가 한 은배(銀杯)를 받들어 내놓고 임금의 교지(敎旨)를 선포하기를,
"제5작은 이것으로 술을 돌리고, 인하여 술잔을 기로소(耆老臣)에 내릴 것이니, 술잔 가운데에 ‘사기로소(賜耆老所)’ 네 글자를 새기도록 하라."
하자, 여러 기로신들이 돌려가며 구경하고 머리를 조아려 사례하였다. 제조가 제5작을 바치자, 음악은 여민락(與民樂)을 연주하고 광수무(廣袖舞)를 무동이 들어와서 춤추었다. 바치기를 마치자 제조가 소선(少饍)을 물리고 대선(大饍)을 바치니, 음악은 태평년(太平年)을 연주하고, 인하여 여민락(與民樂)을 연주하였는데, 처용(處容)이 들어와서 춤을 추었다. 무릇 술잔을 바치고 탕을 바치면 왕세자 이하의 관원이 자리를 나란히 하여 부복하고, 바치기를 마치면 자리에 돌아갔다. 제조가 임금 앞에 탕(湯)과 선(饍)을 바치고, 부제조가 왕세자에게 탕과 선을 올렸다. 집사자가 여러 기로신들의 찬탁(饌卓)을 거두어 치우기를 마치자, 예조 판서(禮曹判書)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중궁(中宮)의 환후(患候)가 이미 완쾌(完快)되셨으니, 마땅히 경사(慶事)를 치르는 절목(節目)이 있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전(內殿)의 환후(患候)는 이미 의약청(議藥廳)을 설치하지 않았으니, 고묘(告廟)하고 반사(頒赦)하는 절차를 거행함은 마땅하지 못하다."
하였다. 여러 기로신들이 마침내 어전(御前)에 나아가 각각 감축(感祝)하는 말을 올리니, 임금 또한 위로하고 면려하기를 매우 우악(優渥)하게 하였다. 기로(耆老)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아뢰기를,
"오늘은 성상께서 특별히 은혜를 베푸셨으니, 여러 기로신(耆老臣)들은 다시 내려주신 은배(銀杯)를 가지고 기로소의 작은 모임에 나아가 남은 기쁨을 다하여 성상의 은혜를 자랑하고자 합니다. 이원(梨園)196)  의 법악(法樂)은 감히 청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지만, 다시 한 번의 승사(勝事)를 도모하고자 할 따름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악부(樂部)를 데려가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물러나 자리에 돌아가자, 왕세자 이하의 관원이 모두 네 번 절하였다. 통례(通禮)가 예(禮)를 마쳤음을 아뢰자, 공인(工人)이 축(柷)을 두드리고 음악이 시작되었다. 통례가 여(輿)에 오르기를 계청(啓請)하고 내시(內侍)가 궤장(几杖)을 받들어 따르자, 공인(工人)이 어(敔)를 두드리고 음악이 그쳤다. 임금이 숭덕문(崇德門)을 지나 궐내(闕內)로 돌아오니, 고취(鼓吹)가 여민락(與民樂)을 연주하였다. 왕세자 이하 여러 신하들이 모두 나가니, 해엄(解嚴)197)  하고 의장(儀仗)을 해산하였다.

 

4월 19일 신유

중궁(中宮)의 환후(患候)가 완쾌(完快)되었다 하여 약방(藥房)에 명하여 본원(本院)에 물러가 직숙(直宿)하게 하였다.

 

조상건(趙尙健)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에 계달(啓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청주 목사(淸州牧使) 이우겸(李宇謙)은 고을 안의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법금(法禁)을 무릅쓰고 사당을 창건(創建)하였으며, 사람들이 빽빽이 모인 공회(公會) 가운데에서 유상(儒相) 【곧 권상하(權尙夏)이다.】 의 성명(姓名)을 함부로 불렀으니,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 입직(入直)한 별파진(別破陣)에서는 【군병(軍兵)의 부대(部隊)의 이름이다.】  몰래 여염집에 가서 칼을 빼들고 소란을 부렸으니, 청컨대, 입직(入直)했던 별장(別將)과 장관(將官)을 모두 태거(汰去)시키소서."
하였는데, 세자가 다만 말단(末端)의 일만 따랐다.

 

4월 20일 임술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4월 21일 계해

김민택(金民澤)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내전(內殿)이 미령(未寧)하였을 때 시약(侍藥)한 노고의 차례를 매겨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 이하의 제조(提調)와 의관(醫官) 등에게 차례대로 물품을 내려 주고 차등있게 승자(陞資)하였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4월 22일 갑자

김여(金礪)를 정언(正言)으로, 홍계적(洪啓迪)을 부제학(副提學)으로, 김상옥(金相玉)을 부교리(副校理)로, 홍정필(洪廷弼)을 교리(校理)로 삼았다.

 

경상 감사(慶尙監司) 오명항(吳命恒)이 폐사(陛辭)하니, 세자가 불러 보고 칙유(飭諭)하여 보냈다.

 

예조 좌랑(禮曹佐郞) 임익빈(林益彬)이 상서(上書)하여 칙사(勅使)가 왔을 때 관소(館所)에서 예(禮)를 다투다가 받은 치욕(恥辱)에 대해 극론(極論)하고, 자강책(自强策)을 강구(講求)하기를 원하였다. 또 서로(西路)의 영애(嶺隘)198)  에 성지(城池)를 쌓고, 연로(沿路)에 책보(柵堡)를 설치하고, 군기(軍器)를 수칙(修飭)하고, 전폐(錢弊)199)  를 엄중히 제거할 것을 청하니, 세자가 이를 묘당(廟堂)에 내렸는데, 마침내 채택하여 시행한 것이 없었다.

 

4월 23일 을축

어유봉(魚有鳳)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4월 24일 병인

전라 감사(全羅監司) 신사철(申思喆)이 폐사(陛辭)하니, 세자가 불러서 보았다. 신사철이 말하기를,
"본도(本道)의 양전(量田)은 가을을 기다려 거행하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갑술년200)  의 양전(量田) 때에는 조정(朝廷)에서 특별히 양전사(量田使)를 보내어 감사(監司)와 함께 일체로 양전을 감독하도록 하였었는데, 만약 양전사가 없으면 신과 같이 재주 없는 자가 어떻게 혼자 일을 맡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세자가 말하기를,
"균전사(均田使)를 마땅히 내려 보내도록 하겠다."
하였다.

 

4월 25일 정묘

비국(備局)에서 차대(次對)201)  하였는데, 당상관(堂上官)이 일제히 모이지 않은 것으로 인하여 잇따라 차례로 계품(啓稟)을 정지하니, 세자가 신칙(申飭)을 더하도록 하였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판윤(判尹) 정호(鄭澔)가 상서(上書)하여 생각한 바를 진달(陳達)하고, 계청(啓請)하기를,
"성학(聖學)에 힘쓰셔서 군덕(君德)을 닦으시고, 공도(公道)를 넓혀서 기강(紀綱)을 세우시고, 사치한 풍속(風俗)을 개혁하여 국용(國用)을 넉넉하게 하시고, 부역(賦役)을 고르게 시행하여 도탄(塗炭)을 구제하시고, 감사(監司)를 신칙(申飭)하여 출척(黜陟)을 엄중하게 하시고, 실지의 혜택으로 백성을 도와서 덕의(德意)를 아래에 미치게 하소서."
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상세히 진달(陳達)한 말이 나라를 근심하는 정성에서 나왔으니, 유의(留意)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4월 26일 무진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에 계달(啓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을 수원(水原)에 귀장(歸葬)202)  하자, 고(故) 참의(參議) 심수량(沈壽亮)은 가서 장례(葬禮)에 참여하고 소반(素飯)203)  만 먹으며 복(服)을 입고는 문인(門人)으로 자처(自處)하였는데, 그 아들 심공(沈珙)은 근년에 한 통의 소장(疏章)에서 윤선거(尹宣擧) 부자(父子)를 편들어 온갖 말로 어질다고 칭찬하면서 현혹시키는 계책을 썼으니, 청컨대, 삭거 사판(削去仕版)하소서. 통제사(統制使) 김중기(金重器)는 망령되고 패악한 성품으로 간활(奸猾)한 술책을 써서 본직(本職)을 제수(除授)받자 거만하게 가마를 타고 다녔으며, 동래부(東萊府)의 대상(大商)과 결탁하여 심복(心腹)을 삼고는 수천 금의 재화(財貨)를 내주어 식리(殖利)한 것이 셀 수가 없는데, 간 곳이 분명하지 않으니, 청컨대, 파직(罷職)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하였는데, 세자가 다만 이우겸(李宇謙)의 일만 따랐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당시의 여러 장수들이 김중기(金重器)와 윤취상(尹就商)이 가장 교만하고 탐욕이 많아서 법에 어긋난다고 계문(啓聞)하였는데, 김중기(金重器)는 통곤(統閫)204)  의 지위에 나아간 후 교만하고 외람됨이 더욱 심해져서 기탄(忌憚)하는 바가 없었다. 그래서 대간(臺諫)이 사실에 의거하여 탄핵(彈劾)하였으나 끝내 윤허하여 따르지 않으니, 시론(時論)이 이를 한스럽게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71책 63권 29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64면
【분류】역사-편사(編史)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사상-유학(儒學)


[註 202] 귀장(歸葬) : 타향에서 죽은 사람을 고향으로 운구(運柩)하여 장사지냄.[註 203] 소반(素飯) : 고기 반찬이 없는 밥.[註 204] 통곤(統閫) : 통제사.
사신(史臣)은 논한다. 당시의 여러 장수들이 김중기(金重器)와 윤취상(尹就商)이 가장 교만하고 탐욕이 많아서 법에 어긋난다고 계문(啓聞)하였는데, 김중기(金重器)는 통곤(統閫)204)  의 지위에 나아간 후 교만하고 외람됨이 더욱 심해져서 기탄(忌憚)하는 바가 없었다. 그래서 대간(臺諫)이 사실에 의거하여 탄핵(彈劾)하였으나 끝내 윤허하여 따르지 않으니, 시론(時論)이 이를 한스럽게 여겼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4월 27일 기사

정도복(丁道復)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에 계달(啓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사직(司直) 심단(沈檀)은 전후에 죄를 범한 것이 지극히 중대한 데에 관계되는데, 다행히, 죄망(罪網)에서 벗어난 지 오래 되자 점차 거두어 서용(敍用)하였으니, 이는 이미 국가(國家)의 형정(刑政)이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 근래에 전조(銓曹)에서 더러 경조윤(京兆尹)과 중추부(中樞府)에 비의(備擬)하였으니, 진실로 숙특(淑慝)205)  을 밝혀서 제방(隄防)을 엄중하게 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청컨대,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의 해당 당상관(堂上官)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소서."
하였으나, 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4월 28일 경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에 계달(啓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최규서(崔奎瑞)는 과거(科擧)를 통해 발인(發靭)206)  하고는 몸을 당론(黨論)에 바치고 화관 숭질(華貫崇秩)207)  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갑자기 물러가서 시종(始終)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근기(近畿)에 살고 있으면서 국모(國母)께서 승하(昇遐)하셨을 때에도 끝내 달려오지 않았고, 문후(問候)하는 반열(班列)을 오랫동안 베풀었으나 한 번도 와서 참여하지 않았으니, 신하로서 진퇴(進退)에 근거가 없음이 최규서와 같은 자는 없었습니다. 청컨대, 파직(罷職)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하였는데, 세자가 다만 최규서의 일만 따랐다.

 

4월 29일 신미

조명봉(趙鳴鳳)·이병상(李秉常)·권세항(權世恒)·홍계적(洪啓迪)을 승지(承旨)로, 김재로(金在魯)를 대사성(大司成)으로, 이택(李澤)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삼았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4월 30일 임신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진후(診候)하기를 마치자, 제조(提調)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신이 성지(城址)를 살펴보았을 때 북성(北城)의 동쪽 가장자리를 보니, 바로 국도(國都)의 내맥(來脈)인데 홍수[水遼] 때문에 패여 있었습니다. 그때에는 장차 여장(女墻)208)  을 설치하면 자연히 흙을 메울 수 있었으므로 진백(陳白)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성을 쌓는 역사(役事)를 이미 파하였으니, 이곳에 흙을 메우고 사초(莎草)를 덮는 일을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이때에 백성을 동원하는 것도 또한 매우 불편(不便)하니, 경리청(經理廳)에서 대가(代價)를 주고 군사를 모집하여 수축(修築)하는 것이 편하고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민진원이 또 말하기를,
"산맥(山脈)이 뚫려서 허물어지는 것은 수목(樹木)이 무성(茂盛)하지 못한 때문이니, 대개 동촌(東村)의 무뢰배(無賴輩)들과 사대부(士大夫) 집안의 종들이 공공연하게 작벌(斫伐)한 탓입니다. 산지기의 무리가 만약 이들을 붙잡으려 하면 문득 도끼를 휘둘러 죽이려고 하므로 감히 누구냐고 힐문(詰問)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향리(鄕里)의 필부(匹夫)도 오히려 그 집안의 뒷산을 보호할 수 있는데, 당당(堂堂)한 국가(國家)에서 어찌 도성(都城)의 내맥(來脈)에 있는 수목(樹木)이 벌채(伐採)되는 것을 보고도 금할 수 없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동교(東郊)에 각 군문(軍門)의 장교(將校)들이 많이 있으니, 그들로 하여금 살펴보고 있다가 만나면 붙잡게 하여 논상(論賞)하고, 만약 그 힘이 적을 상대하지 못할 경우에는 빨리 북한 별장(北漢別將)에게 고하여 무기를 가지고 종사(從事)하되, 비록 혹시 운명(殞命)하더라도 옥사(獄死)를 이루지 않도록 한다면, 거의 금단(禁斷)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세자(世子)가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접(引接)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금위영(禁衛營)을 혁파(革罷)하는 것과 광주 유수(廣州留守)를 차출(差出)하는 두 조항의 일을 묘당(廟堂)에 문의(問議)하도록 영(令)을 내리셨는데,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이 쉽사리 일제히 모이지 않고 있으니, 만약 문자(文字)로 그 견해(見解)를 진달(陳達)하도록 한다면 좋을 듯합니다. 청컨대, 비국 낭청(備局郞廳)으로 하여금 여러 대신들에게 가서 묻게 하소서."
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비국 낭청으로 하여금 가서 문의(問議)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 말하기를,
"전라도(全羅道)는 새로 설치한 진보(鎭堡)가 자못 많습니다. 갈두산(葛頭山)은 윤번(輪番)하는 군사가 1백 90명인데, 비록 본도(本道)로 하여금 충정(充定)하도록 하였으나, 지금 양정(良丁)을 얻기가 어려워서 아직도 충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해마다 회부미(會付米)209)  를 획급(劃給)하지 않을 수 없으나, 이것도 잇대기 어려운 방도가 되었습니다. 격포(格浦) 또한 새로 승진(陞進)된 첨사(僉使)인데, 허다한 방군(防軍)을 충급(充給)할 수가 없으니, 일이 지극히 난처(難處)합니다. 본도(本道) 각진(各鎭)의 전선안(戰船案)을 가져다 상고해 보았더니, 첨사(僉使)·만호(萬戶)를 논할 것 없이 진(鎭)마다 각각 한 척의 전선(戰船)을 배치하였는데, 방답진(防踏鎭)·고금도(古今島)·사도(蛇島) 등 3진에는 모두 2척씩 있었습니다. 비록 당초의 본의(本意)는 알지 못하겠으나, 이 3진을 다른 곳과 다르게 할 필요는 없으므로, 한 척씩 줄여서 새로 설치된 곳에 옮겨 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러나 먼 외방(外方)의 편부(便否)를 멀리서 헤아리기는 어려우니, 본도(本道)의 감사(監司)와 통제사(統制使)·수사(水使)에게 물어본 후에 품처(稟處)하게 함이 합당할 듯 합니다."
하였는데, 이조 판서(吏曹判書) 권상유(權尙游)가 말하기를,
"일찍이 순무사(巡撫使)가 되어 친히 고금도(古今島)와 방답진(防踏鎭)을 살펴 보았는데, 가장 적로(賊路)의 요충(要衝)이 되는 곳이었습니다. 고금도(古今島)는 곧 이순신(李舜臣)이 승첩(勝捷)한 지역이므로 특별히 두 척의 전선(戰船)을 설치하였으니, 뜻한 바가 있었던 것입니다. 갈두진(葛頭鎭)은 근처에 이미 난갈두(蘭葛頭)가 있으므로 비록 진(鎭)을 설치하지 않더라도 무방(無妨)할 듯, 애초에 설치하면서 모든 일이 소홀하여 마침내 모양을 이루기 어려웠으니, 이를 혁파(革罷)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러나 이 한 조항 또한 마땅히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니, 세자가 모두 옳게 여겼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외방(外方)에서 봄·가을로 고강(考講)할 때에 단지 교생(校生)만 강(講)하게 하고 원생(院生)은 거론(擧論)하지 않으므로, 군역(軍役)을 피하려는 자들이 모두 원생에 투입(投入)하니, 원래의 액수보다 지나치게 많습니다. 이후에는 도사(都事)가 순강(巡講)할 때 원생들 또한 마땅히 교생과 일체로 고강하되, 불러서 미치지 못하거나 통하지 못한 정원(定員) 이외의 자들은 한결같이 충군(充軍)하게 하소서."
하니, 세자가 말하기를,
"계달(啓達)한 바가 옳다. 이로써 분부(分付)하겠다."
하였다. 지평(持平) 김민택(金民澤)과 정언(正言) 김여(金礪)가 전일에 계달했던 것을 거듭 아뢰었으나, 세자가 모두 따르지 않았다.

 

정언(正言) 홍현보(洪鉉輔)가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나라의 대사(大事)는 제사(祭祀)에 달려 있으니, 진실로 한결같이 예제(禮制)를 준수(遵守)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기신제(忌辰祭)와 오명일(五名日) 절사(節祀)의 선품(饍品)을 단지 유과(油果)와 포탕(泡湯)만을 가지고 설행(設行)하니, 매우 미안(未安)합니다. 전해 듣건대, 국초(國初)에 예제(禮制)를 정한 대신(大臣)이 훗날의 폐단(弊端)을 염려하여 이로써 정식(定式)을 삼았다고 하는데, 소선(素饍)의 제도를 경전(經傳)에서 상고하고 사전(祀典)에서 질정(質正)해 보았으나 모두 근거가 없었습니다. 이는 우리 나라가 처음 창건(創建)하던 초기에 멸망된 나라[高麗]의 불교(佛敎)를 숭상하던 여습(餘習)210)  을 인습(因襲)한 데 지나지 않는데, 막중(莫重)한 사전(祀典)을 이 제도로 준용(遵用)하고 있으니, 어찌 혈식(血食)211)  하는 뜻이 있겠습니까? 만약 소선(素饍)이 예의(禮意)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태묘(太廟)의 제사도 마땅히 이 제도를 준용(遵用)해야 할 것인데, 태묘는 삭망제(朔望祭)와 대제(大祭)에 모두 희생(犧牲)을 바치는 제전(祭典)을 쓰고 있으니, 이는 진실로 예제(禮制)에 없는 예(禮)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의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소선(素饍)을 고쳐 육선(肉饍)을 쓰면 경비(經費)를 지탱하기 어렵다.’ 하나, 또한 그렇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신이 듣건대, 봉상시(奉常寺)에서 봉진(封進)하는 소선(素饍)의 공물가(貢物價)는 그 액수가 매우 많지마는, 반수 이상은 유밀과(油密果)에 들어간 유청(油淸)·진말(眞末)212)  의 값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유밀과는 예가(禮家)에서 숭상하는 것이 아니고, 실로 승려(僧侶)와 속인(俗人)이 귀하게 여기는 것인데, 또 태묘(太廟)에 올리고 있으니, 이를 줄이는 것이 옳습니다. 만약 선조(先祖)에서 쓴 것이 유래가 이미 오래 되었다는 이유로 갑자기 완전히 폐지할 수 없다면 그 그릇의 수효를 반감(半減)하고, 그 줄인 값을 계산하더라도 오히려 적지 않으니, 육선(肉饍)의 값을 족히 충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혹시 대뢰(大牢)에 부족(不足)하더라도 오히려 소뢰(小牢)는 판비(辨備)할 수 있을 것이니, 이와 같이 하고서도 부족(不足)할 경우에는 단지 장포(長脯)만 쓰더라도 소선(素饍)을 베풀어 불교(佛敎)의 습속에 따르는 그릇된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억울한 누명을 벗겨 원한을 풀어주는 것은 나라를 보유(保有)하는 선무(先務)입니다.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은 우리 세조 대왕(世祖大王)께서 선위(禪位)를 받을 즈음에 스스로 그 군주(君主)를 위해 일찍이 반룡부봉(攀龍附鳳)213)  하지 않고 모두 극화(極禍)를 입고서 아직도 죄적(罪籍)에 있습니다. 성조(聖祖)214)  께서 여러 사람을 죽인 일은 대개 위의(危疑)를 평정(平定)하고 대권(大權)을 행하려는 뜻에서 나왔는데, 이미 등극(登極)하신 후에 훈사(訓辭)를 지어 예종(睿宗)에게 보이시고 말씀하시기를, ‘나는 험난(險難)함을 당하였으나 너는 태평(泰平)함을 당하게 될 것이다. 일은 세상을 따라 변하는 것인데, 네가 나의 한 일에 구애받아 변통(變通)할 줄을 모른다면, 이른바 둥글게 뚫은 구멍에 모난 장부[枘]를 끼우려 하는 것이다.’ 하셨으니, 성조(聖祖)께서 그 뜻을 칭찬하시고 그 죽음을 불쌍히 여기신 큰 뜻을 이에게 볼 수 있습니다. 성조(聖祖)의 뜻을 오늘날에 비로소 시행하여 그 관직을 회복시킨다면 어찌 계술(繼述)하는 아름다움이 더욱 성조께 빛나는 바가 있지 않겠습니까?"
하고, 글의 말미에 벼슬을 팔아 진휼(賑恤)에 보태는 것이 옳지 못하다는 것과, 조정(朝廷)의 상전(賞典)을 믿지 않는다는 것, 문관(文官)·음관(蔭官) 출신의 수령(守令)으로서 도둑을 막지 못한 자는 마땅히 논죄(論罪)해야 된다는 것, 윤장(尹樟)·남세진(南世珍)이 춘방관(春坊官)에 의망(擬望)된 것은 외람되다는 것, 유집일(兪集一)이 연경(燕京)에 사신(使臣)으로 갔을 때 까다롭고 잗달았다는 등의 여러 일들을 덧붙여 논핵(論劾)하였는데, 세자(世子)가 그 글을 해조(該曹)에 내렸다. 이후에 향사(享祀) 할 때의 선품(饍品)에 대한 일은 예조(禮曹)에서 갑자년215)  의 판부(判付)를 【무릇 공사(公事)에서 글을 내려 상교(上敎)를 낸 것을 판부라고 일컫는다.】  끌어대고는 복주(覆奏)하여 쓰지 않았다. 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에 대한 일은 이조(吏曹)에서 대신(大臣)에게 의논하기를 청하였는데,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이이명(李頤命)이 말하기를,
"병자년216)  의 여러 신하들은 거의 영락 때 방효유(方孝儒)·철현(鐵鉉)보다 심하나,217)   성교(聖敎)에 이르기를, ‘성삼문(成三問) 등은 오늘날의 난신(亂臣)이나, 후세(後世)에는 충신(忠臣)이다.’ 하셨습니다. 이 일도 오히려 그러한데, 더욱이 계유년218)  의 여러 신하들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동궁(東宮)께서 서무(庶務)를 참결(參決)하시려면 먼저 연좌(緣坐)된 2백여 인을 용서해야 할 것이니, 만약 성지(聖志)의 미치는 바가 아니라면 어찌 이러한 성교(聖敎)가 있었겠습니까? 또 신이 삼가 듣건대, 공주(公州) 동학사(東鶴寺)에 세조 대왕(世祖大王)께서 일찍이 거둥하셨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그 때 절의 중이 재(齋)를 베풀어 원통하게 죽은 혼령(魂靈)을 위로하고 있었고, 이른바 초혼기(招魂記)라는 것이 아직도 보존되어 있는데, 모두 여러 신하들의 이름을 기록한 것이다.’라고 하니, 죽은 이가 만약 알고 있다면 여러 신하들도 이미 성조(聖祖)의 불쌍히 여기신 어짐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 간신(諫臣)이 인용(引用)한 세조(世祖)께서 예종(睿宗)께 보이신 훈사(訓辭)에 이르기를, ‘나는 험난한 때를 당하였으나 너는 태평한 때를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일은 세상을 따라 변하게 되는 것인데, 만약 네가 나의 자취에 구애받아 변통(變通)할 줄 모른다면, 이른바 둥글게 판 구멍에 네모난 장부를 끼우려 하는 것이다. 너는 모름지기 잊지 말도록 하라.’ 하셨는데, 우리 성조(聖祖)의 유교(遺敎)가 명확하여 막힘이 없으니, 지금 어찌 반드시 그 뜻을 이어받지 않고 도리어 그 자취에 구애받겠습니까? 신설(伸雪)하는 것이 계술(繼述)하는 효도(孝道)에 진실로 합당합니다."
하고,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조태채(趙泰采)는 말하기를,
"장릉(莊陵)을 복위(復位)한 후 의리(義理)를 지킨 여러 신하들은 모두 포장(褒奬)의 은전(恩典)을 받았는데, 유독 두 신하만 지금까지 억울함을 품은 채 누명(陋名)을 벗지 못하고 있으니, 진실로 매우 민망스럽고도 불쌍합니다. 억울함을 풀어 주어 관작(官爵)을 회복시키는 것이 진실로 성덕(盛德)의 일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김우항(金宇杭)·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은 이이명(李頤命)의 의논과 같았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유(李濡)는 말하기를,
"장릉(莊陵)을 복위(復位)하고, 의리(義理)를 지킨 여러 신하들에게도 또한 포장(褒奬)을 가하신 것은 이미 천고(千古)의 성덕(盛德)의 일입니다. 그런데 유독 이 두 사람만 아직도 죄적(罪籍)에 있으니, 마땅히 여정(輿情)이 오래 갈수록 더욱 답답해 할 것입니다. 신은 이에 대해서 별다른 의논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또 육경(六卿)과 삼사(三司)에 다시 묻도록 명하였다. 행 공조 판서(行工曹判書)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신이 근년에 감히 이 일을 전석(前席)에서 우러러 계달(啓達)하였는데, 곧 재신(宰臣)이 소장(疏章)을 올려 논박(論駁)한 의논으로 인하여 【민진후가 지난해에 이 일을 진청(陳請)하였는데, 김진규(金鎭圭)가 상소(上疏)하여 불가(不可)함을 말하였으므로 일이 마침내 정지되었다.】  마침내 정지되고 시행되지 않았었으니, 감히 다시 참견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병조 판서(兵曹判書) 조도빈(趙道彬)은 말하기를,
"성조(聖朝)께서 당일의 훈사(訓辭)에 이미, ‘나는 험난한 때에 당하였으나 너는 태평한 때를 당하게 될 것이다.’라고 유시(諭示)하셨으니, 불쌍히 여기시는 인덕(仁德)을 보이심으로써 이미 구애받지 말라는 미의(微意)를 보이신 것입니다. 지금 만약 성조의 뜻을 본받고 성조의 인덕(仁德)을 미루어 특별히 불쌍히 여기는 은전(恩典)을 내려서 유원(幽冤)을 풀어주는 것이 존엄(尊嚴)한 분의 일을 숨기는 뜻에 부족함이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권상유(權尙游)와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관명(李觀命)은 특별히 아뢰는 말이 없었다. 부교리(副校理) 김운택(金雲澤)은 말하기를,
"이 일은 모두 상량(商量)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김종서(金宗瑞) 등은 당초의 죄안(罪案)에 이미 이용(李瑢)219)  을 추대(推戴)하여 불궤(不軌)220)  를 모의(謀議)한 것으로 연좌되었고, 우리 세조(世祖)께서는 실제로 그 훈명(勳名)이 책록(策錄)되었는데, 지금 만약 김종서 등의 죽음을 억울하다고 일컬어 복관(復官)하기에 이른다면 그것이 성조의 훈명에 어찌 크게 방애(妨碍)되는 바가 있지 않겠습니까? 비록 장릉(莊陵)을 추복(追復)한 후라고 말하더라도 육신(六臣)과 의리(義理)를 지킨 여러 신하들에게 견주어 본다면 그 체단(體段)221)  이 자연히 같지 않으므로, 신의 중부(仲父)인 고(故) 판서(判書) 김진규(金鎭圭)는 일찍이 중신(重臣)이 이 일을 건백(健白)한 데 대해 그 불편(不便)함을 상소(上疏)하여 논박(論駁)하고, 인하여 관청에서 유사(遺祀)를 짓는 데 도와주고 후손(後孫)을 견발(甄拔)하라는 청에 미치었으니, 대개 복관(復官)은 경솔히 의논할 수 없는 바가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만약 두 신하가 수립(樹立)한 공적(功績)을 모두 마땅히 민몰(泯沒)시킬 수는 없으니, 특별히 불쌍히 여기는 은전(恩典)을 베풀어야 하고, 또 남아 있는 자손들을 채용(採用)하여 사족(士族)에 낄 수 있게 한다면 가엾게 여겨 용서하는 뜻이 저절로 그 사이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하고, 부수찬(副修撰) 조상건(趙尙健)은 말하기를,
"황보인·김종서는 이름이 죄적(罪籍)에 남겨져 있어서 억울함이 저승[泉壤]에 맺혀져 있는 지 거의 2백여 년이나 되어 여정(輿情)의 근심하고 답답해 함이 갈수록 더욱 심해지고 있으니, 억울함을 풀어주고 관작(官爵)을 추복(追復)시키는 일을 진실로 그만둘 수가 없는 일입니다. 또 두 신하의 죄는 이용(李瑢)을 추대(推戴)하려 했다는 것으로 명분(名分)을 삼았으니, 이제 만약 두 신하의 일을 억울하다고 여긴다면 용(瑢)도 또한 마땅히 두 신하와 다름이 있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였다. 양사(兩司)의 여러 신하들은 모두 연고가 있어서 헌의(獻議)하지 못하였는데, 해조(該曹)에서 상세히 계문(啓聞)하니, 세자(世子)가 영(令)을 내리기를,
"다시 이 일을 가지고 대조(大朝)께 우러러 계품(啓稟)하였더니, ‘두 신하의 일은 이제 장차 수백여 년이 되어 가는데도 유원(幽冤)을 씻지 못하고 있으니, 탄식과 슬픔을 금하지 못하겠다. 간신(諫臣)이 논열(論列)한 바는 지극히 절실(切實)하다고 이를 만하지마는, 다만 정난(靖難)의 훈공(勳功)을 생각하건대, 이에 크게 방애(妨碍)되는 바가 있으니, 복관(復官)하는 한 가지 일은 마침내 중난(重難)한 데에 관계된다. 전조(銓曹)에 명하여 두 신하의 후예(後裔)를 거두어 임용(任用)해서 억울함을 불쌍히 여겨 위로하는 뜻을 보임이 마땅하다.’고 하교(下敎)하셨다. 이에 의거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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