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계유
황일하(黃一夏)를 도승지(都承旨)로, 김흥경(金興慶)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송상기(宋相琦)를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삼았다.
헌납(獻納) 이봉익(李鳳翼)이 상서(上書)하기를,
"판돈녕(判敦寧) 최규서(崔奎瑞)는 영도(榮塗)에 뜻을 끊고 조용히 지조를 지키고 있었는데, 지금 대간(臺諫)이 품달(稟達)하여 ‘오랫동안 좋은 벼슬에 있었으며, 구차하게 매복(枚卜)222) 을 채운다는 것’으로써 배척하였으니, 신은 이로부터 세상에 완전한 사람이 없게 될까 두렵습니다. 더욱이 신사년223) 의 국휼(國恤)과 계사년224) 의 정후(庭候) 때 최규서가 혹시 도성(都城) 밖에 와서 있기도 하고 혹은 궐하(闕下)에 달려오기도 했으니, 정례(情禮)를 모두 빠뜨렸다는 배척은 어찌 사실에 틀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소각(銷刻)225) 한 것을 혐의하지 마시고, 파직(罷職)하도록 한 명을 빨리 도로 거두소서. 어제 후원(喉院)226) 에서 비국 낭청(備局郞廳)을 죄주도록 청한 것은 대개 승정원의 규례를 준수(遵守)하려는 데에서 나왔는데, 이러한 작은 일로 인하여 세 승선(承宣)227) 이 한꺼번에 파직(罷職)당했으니, 신은 진실로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또 듣건대, 비국 낭청 양익표(梁益標)가 그 동료 낭청이 파직당한 것에 노하여 여러 승선의 성명(姓名)까지 부르며 공공연하게 제멋대로 욕설을 하고 꾸짖기까지 하였다 합니다. 양익표는 곧 무뢰(無賴)하고 광패(狂悖)한 사람으로서, 근년에 죄를 받아 유배(流配)되었다가 본읍(本邑)에서 그 폐해(弊害)를 감당하지 못하여 방면(放免)되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조정(朝廷)에서 양익표를 어찌할 수 없었던 탓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여러 무변(武弁)을 가려서 뽑는 직임(職任)에 그대로 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더욱이 그가 보잘것 없는 무부(武夫)로서 조정의 고관(高官)을 능욕(凌辱)하여 조금도 돌아보고 꺼리는 바가 없었으니, 체통(體統)이 관계된 바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빨리 쫓아내소서."
하였는데, 세자(世子)가 답하기를,
"최규서의 일은 대간(臺諫)의 논핵(論劾)이 옳았으니, 환수(還收)하기를 청한 것은 내가 진실로 이해하지 못하겠다. 승지(承旨)가 파직(罷職)된 일은 으레 시행하는 벌(罰)에 지나지 않는다. 양익표의 일은 다시 더 자세히 살펴서 처리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이때 승정원(承政院)에서 비국 낭청(備局郞廳)이 친히 전지(傳旨)를 받지 않은 것으로 인하여 죄를 주어 파직(罷職)하기를 청하였는데, 영상(領相) 김창집(金昌集)이 비국 낭청을 위해 차자(箚子)를 올려 승정원을 배척하였으므로, 승지 세 사람이 패초(牌招)를 어기고 파직되었다. 양익표는 본래 무뢰배(無賴輩)로서, 술에 취하여 지주(地主)를 구타(毆打)하고 유배(流配)되었는데, 오래 되지 않아 김창집이 연중(筵中)에서 진백(陳白)하기를, ‘적소(謫所)에서 소란을 부렸는데 본읍(本邑)에서 그 소요(騷擾)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으니, 청컨대, 석방(釋放)하소서.’하고, 곧 임용(任用)하여 비국 낭청을 삼았으므로, 이봉익(李鳳翼)이 글을 올려 이에 언급(言及)했던 것이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여, 형조(刑曹)의 공사(公事)인 안노미(安老味)의 일을 읽고, 승지 홍계적(洪啓迪)이 말하기를,
"비록 형조의 문안(文案)을 가지고 보더라도 이 사람이 이미 술에 취해 있었으니, 어떻게 입계 문서(入啓文書)228) 의 중대함을 알았겠습니까? 그 술에 취한 망령된 짓을 구명(究明)하지 않고 곧바로 실봉(實封)한 공문(公文)을 찢은 율(律)로 결단하여 일죄(一罪)229) 로 감단(勘斷)하는 것이 적당한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는데, 우승지(右承旨) 조명봉(趙鳴鳳)과 문학(文學) 신절(申晢)이 잇따라 아뢰니, 세자가 말하기를,
"일죄(一罪)는 사용할 수 없으니, 비율(比律)230) 로 감단하여 감사(減死)시켜 변원 충군(邊遠充軍)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 왕자(王子) 연잉군(延礽君)이 병들었으므로, 임금이 의관(醫官)에게 명하여 지켜보고 있다가 그 병세(病勢)의 가감(加減)을 아뢰도록 하였는데, 바야흐로 종부시(宗簿寺)의 관리가 서계(書啓)를 가지고 와서 바치려 할 즈음에 상놈[常漢] 안노미(安老味)가 술에 취한 채 종부시(宗簿寺)의 관리와 서로 싸우다가, 그대로 가지고 있던 서계(書啓)를 찢어 버렸다. 그래서 종부시(宗簿寺)에서 안노미를 붙잡아 고신(拷訊)을 가하였는데, 안노미는 취하였을 때의 일을 까마득히 기억하지 못하므로 형조(刑曹)에 이송(移送)하여 조율(照律)하게 하였다. 형조에서는 본율(本律)로 감단(勘斷)할 만한 것이 없다 하여 실봉(實封)한 공문(公文)을 훼파(毁破)한 율(律)로 방조(傍照)231) 하여 대벽(大辟)232) 에 처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홍계적(洪啓迪) 등이 이를 말하여 세자가 특별히 용서하도록 하였으나, 안노미는 종부시에서 형신(刑訊)을 받아 중상(重傷)을 입은 것으로 인하여 미처 옥(獄)에서 나오지 못하고 죽었다.
5월 2일 갑술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5월 5일 정축
윤봉조(尹鳳朝)를 대사간(大司諫)으로, 홍우전(洪禹傳)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에 계달(啓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석성 현감(石城縣監) 유수(柳綏)는 일찍이 그 계부(季父) 유응운(柳應運)이 생존하였을 때 유응운이 어버이의 명(命)으로 장차 그 아우 유정(柳綎)을 후사(後嗣)로 삼으려 하였는데, 유수는 곧 편모(偏母)를 종용(慫慂)하여 온갖 말을 꾸며서 예관(禮官)의 집에 글을 바치고, 그 조모(祖母)의 유명(遺命)을 도리어 핑계댄다고 하면서 그 계부를 어버이를 속인 죄과(罪科)에 돌리고자 하였으니, 이 일을 차마 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인들 차마 할 수 없겠습니까?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이름을 깎아버리게 하소서. 양양 부사(襄陽府使) 송택상(宋宅相)은 타고난 천성이 어둡고 용렬한데가 처신(處身)이 비루하고 천박하여 백억 번 죽더라도 오직 이익에만 달려가며, 집안에는 사나운 아내가 있어서 날마다 질투하여 으르렁거리고 있으니, 재화(財貨)를 탐내는 정상(情狀)을 말한다면 입이 더러워질 뿐입니다. 청컨대, 관작(官爵)을 삭탈(削奪)하소서."
하였으나, 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5월 6일 무인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5월 7일 기묘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국구(國舅) 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은 【김만기(金萬基)이다.】 절혜(節惠)233) 의 은전(恩典)을 아직까지 빠뜨리고 있었으니, 진실로 흠전(欠典)이 되었다. 본가(本家)로 하여금 속히 시장(諡狀)을 짓도록 하고, 인하여 태상시(太常寺)에 분부하여 시호를 의논하는 바탕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5월 9일 신사
종묘(宗廟)의 악공청(樂工廳)이 비로 인하여 무너졌다고 예조(禮曹)에서 계문(啓聞)하니, 선공감(繕工監)으로 하여금 살펴보고 개조(改造)하도록 하였다.
5월 11일 계미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홍계적(洪啓迪)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조상경(趙尙絅)을 헌납(獻納)으로, 홍석보(洪錫輔)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가 보건대, 저하(邸下)께서 금위영(禁衛營)을 혁파(革罷)하고 남한 산성(南漢山城)에 유수(留守)를 설치하는 일로써 성교(聖敎)를 우러러 받들어 묘당(廟堂)에 하문(下問)하셨는데, 이는 진실로 조정(朝廷)의 큰 거조(擧措)이니, 진실로 마땅히 상확(商確)해서 품정(稟定)해야 할 것이나, 다만 정사(政事)는 본말(本末)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양역(良役)의 폐단(弊端)은 진실로 고금 천하(古今天下)에 듣지 못하던 것이니, 그 폐단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비록 요·순(堯舜)이 위에 있을지라도 난망(亂亡)한 형세를 구제(救濟)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지금 논자(論者)가 혹 말하기를, ‘양정(良丁)으로 한유(閑遊)한 자가 많으니, 찾아 모아서 정원(定員)을 채우는 것만 못하다.’ 하고, 혹은 말하기를, ‘군문(軍門)이 새로 창설(創設)된 것이 많으니, 먼저 마땅히 혁파(革罷)하여 수효를 줄이어 백골(白骨)과 인족(隣族)의 근심을 제거해야 한다.’ 하는데, 이것은 모두 한때에 위급(危急)함을 구제하는 계책(計策)이지 영세(永世)의 이익은 못됩니다. 임술년234) 무렵에 조정(朝廷)에서 제도(諸道) 군병(軍兵)의 도고(逃故)235) 를 조사해 내었는데, 그 수효가 1만 1천 6백여 명이나 되었으므로, 고(故) 상신(相臣) 김석주(金錫胄)가 여러 군문(軍門) 가운데 긴요하지 않은 명색(名色)을 혁파(革罷)하여 그 정원(定員)을 보충(補充)하도록 청하고, 이에 말하기를, ‘이것이면 십수 년 동안은 지탱해 갈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으나, 그후 도고(逃故)의 폐단은 몇 년이 안되어 그전과 같았습니다. 설령 오늘날 한정(閑丁)을 찾아내고 군액(軍額)을 줄인다 하더라도 임술년과 같은 데 지나지 않을 뿐인데, 어찌 변통(變通)하는 뜻이 있겠습니까? 조정(朝廷)에서 민사(民事)를 서로 잊어버리는 처지에 둔다면 그만이겠지만, 만약 가엾게 생각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한 번의 경장(更張)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지난번 인조(仁祖)·효종(孝宗) 양조(兩朝) 때 묘당(廟堂)에서 큰 계모(計謀)를 지닌 신하와 저 시무(時務)를 잘 아는 선비들도 그 방책(方策)이 한결같지 않았으나, 유포(儒布)·호포(戶布)·구전(口錢)·유포(游布)·결포(結布)와 같은 법이 모두 시폐(時弊)를 구제하는 술책(術策)이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만약 저하께서도 대지(大志)를 분발(奮發)하셔서 폐해(弊害)를 개혁(改革)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제일의 급무(急務)로 삼으신다면, 우선 마땅히 빨리 경외(京外)로 하여금 1년 동안 징수(徵收)하는 베[布]의 수량과 각 고을의 호전(戶田)·전결(田結)의 많고 적은 것을 초출(抄出)하게 하고, 지난날 여러 사람의 의논을 가지고 재량(裁量)하고 비교하여 그 우열(優劣)을 살펴서 단연코 이를 시행해야 할 것이니, 어찌 돌아보아 꺼릴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에는 큰 안목(眼目)이나 큰 역량(力量)도 없이 의논만 좋아하여 서로 비난하여 바른 이를 헐뜯는 것이 오늘날의 폐습(弊習)이 되었습니다. 만약 한두 고을에 이를 시험해 보면, 이해(利害)와 편부(便否)가 저절로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니, 한 고을에 미치게 한 다음 한 고을로부터 온 나라 안에 두루 미치게 한다면, 백성을 놀라게 하지 않고도 일은 성공(成功)의 실마리가 열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세자(世子)가 말하기를,
"양역(良役)의 폐단은 이를 말한 지 오래 되었다. 이 폐단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백성을 보존할 도리가 없으니, 먼저 급히 변통(變通)하지 않을 수 없다.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상확(商確)하여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다.
5월 12일 갑신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에 계달(啓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양양 부사(襄陽府事) 이태원(李太元)은 전연 일을 알지 못하여 모든 행정(行政)을 한결같이 두세 명의 간사한 아전에게 들어주어서 장정(壯丁)을 뽑을 때에 뇌물의 많고 적은 것을 견주어 조종(操縱)하고, 송사(訟事)의 청단(聽斷)은 다른 사람의 사주(使嗾)와 부탁을 받아 그릇되게 재단(裁斷)하였으니, 청컨대, 나문(拿問)하여 정죄(定罪)하소서."
하였으나, 세자가 다만 역관(譯官)과 송택상(宋宅相)의 일만 따랐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5월 13일 을유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진후(診候)를 마치자, 제조(提調)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경리청(經理廳) 차인(差人)의 봉료(俸料)를 판비(辦備)하는 일은 이미 정파(停罷)하라는 명(命)이 있었는데, 그 전에 이미 시행하면서 마치지 못한 것을 각 아문(衙門)과 각 고을에서 모두 지금은 이미 정파하였다 하면서 거행(擧行)하지 않고 있습니다. 성역(城役) 때 다른 관사(官司)에 빌려 준 것이 매우 많은데, 이 일을 수습하지 못한다면 갚을 수가 없으니, 청컨대, 이미 시작했던 것은 그대로 수습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다만 흩어진 것만 수습하고, 이후에는 봉료를 판비하는 일은 다시 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5월 14일 병술
이관명(李觀命)을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236) 으로, 김운택(金雲澤)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삼았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민진후(閔鎭厚)가 상서(上書)하여 대마도(對馬島)의 서계(書契)에 대한 일을 논하기를,
"왜인(倭人)은 원래 시일[日月]을 늦추어 채운 적이 없고 역관(譯官)을 보내기를 청한 글도 없었습니다. 이번의 서계(書契)가 비록 예조(禮曹)의 서계를 얻고자 하는 데에서 나왔다고는 하나, 이른바 시일을 늦추어 날짜를 채운다는 것과 같은 말은 다만 입으로 전해지는 말일 뿐이니, 조정(朝廷)에서는 마땅히 예조로 하여금 답하게 하기를, ‘우리가 동래부(東萊府)의 서계로 인하여 특별히 전례(前例)가 없던 일을 허락하였으니, 이는 교린(交隣)하는 정의(情誼)에 있어서 진실로 이미 지극한 것이다. 역관(譯官)이 갔다가 돌아온 지가 이미 오래 되었으므로 다시 논할 만한 것이 없었지마는, 지금 이 답서(答書)가 족히 또한 동무(東武)237) 에게 빙신(憑信)할 수 있을 것이다.’ 한다면, 저들은 반드시 다툴 만한 말이 없을 것입니다. 저들이 만약 그래도 부족(不足)하게 여기는 바가 있어서 반드시 억지로 청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장차 예조의 서계를 늦추어 지어 줌으로써 시일을 늦추어 날짜를 채운 다음 오게 해야 할 것이니, 이에 이르러 시일을 늦추어 날짜를 채워서 답서(答書)를 만들어도 오히려 늦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저들의 글을 보지 않은 채 우리 나라에서 답서를 짓는다면, 신은 이 글이 무슨 명분(名分)인지 모르겠습니다. 아! 교활한 왜인(倭人)의 정상(情狀)은 알기가 어렵지 않으니, 반드시 우리 나라에서 먼저 역관을 보내게 하여 다른 날 구실(口實)로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애초에 입으로 전해진 말로 시험해 보고서 이미 서계를 기다리고 있다가 마땅히 허락한다는 명(命)을 얻으니, 바로 동래부(東萊府)에 답서를 보내면서 예조에는 답서를 빠뜨렸습니다. 뒤에 예조에서 먼저 보내는 서계를 얻기를 요구하다가 허락을 얻지 못하면 따로 답서(答書)를 보내려고 또 입으로 전해진 말을 가지고 우리 나라에 시일을 늦추어 날짜를 채우기를 청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대개 장차 이후에 통신사(通信使)의 행차 때 반드시 우리 나라로 하여금 먼저 역관을 보내게 하고, 보내지 않으면 장차 전례(前例)를 준수(遵守)하지 않는다는 이유로써 책망하기를, ‘애초에 무엇 때문에 일찍이 서계를 기다리게 하고 역관을 보내느냐?’고 할 것이니, 이와 같으면 조정의 수치를 어떻게 씻을 수 있겠으며, 그들의 교만 방자한 습관이 또한 어느 곳엔들 이르지 않겠습니까?"
하니, 세자(世子)가 이를 묘당(廟堂)에 내렸다. 이튿날 비국(備局)에서 차대(次對)할 때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지돈녕(知敦寧) 민진후(閔鎭厚)·병조 판서(兵曹判書) 조도빈(趙道彬) 등이 모두 말하기를,
"당초에 경솔히 허락하여 이러한 난처(難處)한 일이 있으니 민진후의 상서의 말이 진실로 옳습니다. 시일을 늦추어 날짜를 채우는 것을 허락하지 말고, 다만 동래(東萊)와 부산(釜山)으로 하여금 이번의 서계만 답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세자가 이를 옳게 여겼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5월 15일 정해
세자(世子)가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접(引接)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 말하기를,
"동래 부사(東萊府使) 서명연(徐命淵)이 장계(狀啓)하기를, ‘이전부터 도주(島主)가 새로 임무를 맡아 강호(江戶)에 가서 조현(朝見)하고 돌아오면 반드시 고환 차왜(告還差倭)를 보내었으며, 이로부터 또한 사람을 보내어 보문(報問)하는 예(禮)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마도(對馬島)에서 폐해(弊害)를 끼친다고 핑계하고서 차왜(差倭)를 보내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였습니다. 그 뜻이 폐해를 줄인다는 뜻인 듯하나, 묘당(廟堂)에서는 의논하기를, ‘비록 한때의 폐해를 줄인다 하나, 모든 일은 스스로 규례(規例)가 있는 것인데, 그 말로써 폐지한다면 이후에는 반드시 이것을 가지고 말썽을 부림이 있을 것이니, 경솔히 규례를 고치는 폐단을 곧이들을 수가 없습니다. 마땅히 고환 차왜(告還差倭)를 정지할 수 없다는 뜻으로 분부(分付)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세자가 이를 옳게 여겼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조도빈(趙道彬)이 말하기를,
"충청 좌도 어사(忠淸左道御史) 조상경(趙尙絅)의 서계(書啓)에 이르기를, ‘명화적(明火賊)을 지시 체포(逮捕)한 것이 5명 이상이면 바야흐로 가자(加資)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충주(忠州) 사람 심약휘(沈若輝)는 두 번에 나누어 포착(捕捉)하였으나, 또한 가자(加資)받았습니다. 매우 외람되고 지나친 데에 관계되니, 한결같이 환수(還收)함이 마땅합니다.’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종류가 매우 많으니, 지금부터 이후에는 정식(定式)을 삼아 모두 가자(加資)하지 말아야 하겠습니까? 일찍이 전에 가자했던 자도 마땅히 환수해야 하겠습니까?"
하였는데, 이건명이 말하기를,
"1년 동안에 두서너 사람을 체포한 것은 이미 기한이 차지 않았어도 미포(米布)를 받았는데, 그후 5, 6년이 지나 또 두서너 사람을 체포하였을 경우 모두 계산하여 가자(加資)한다면, 전에 받았던 미포(米布)의 상(賞)과 겹쳐 받게 되니, 어사(御史)의 말이 옳습니다. 이제 해가 오래 된 후를 당하여 비록 일일이 환수(還收)하기는 어렵지마는, 이후에는 정식[法式]하여 다만 한 번 순행(巡行)해서 5명 이상을 체포한 자에게만 가자(加資)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세자가 이를 옳게 여겼다. 조도빈이 또 말하기를,
"본조(本曹)의 기병(騎兵)·보병(步兵)의 납포(納布)를 외방 고을에서 전혀 척념(惕念)하지 않아서 미처 거두지 못한 것이 매우 많으니, 청컨대 6개월을 한정해서 거두어들여 올려 보내되, 기한에 미치지 못한 자는 모두 영문(營門)에서 장형(杖刑)을 집행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이건명이 말하기를,
"올해는 절기(節氣)가 일러서 6월의 기한에 맞추기가 어려우니, 마땅히 9월로 늦추어야 합니다. 단지 거말(居末)238) 인 한 고을만 장형(杖刑)을 집행하소서."
하니, 세자가 그 말을 따랐다. 집의(執義) 윤양래(尹陽來)가 전일에 계달(啓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었으나, 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정언(正言) 김여(金礪)가 전일에 계달(啓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군자감 정(軍資監正) 김만주(金萬胄)는 일찍이 시험을 관장(管掌)하는 데 적합하지 못하다 하여 거듭 대간(臺諫)의 탄핵(彈劾)을 받았으므로, 그가 자처(自處)하는 도리에 있어서 진실로 이 직임(職任)에 몸을 움추려 피해야 할 것인데, 이번의 문소(文所)에 태연한 태도로 무릅쓰고 나아가 당초에 핵론(劾論)한 사람들과 뻔뻔스러운 얼굴로 함께 고과(考課)하기까지 하면서 조금도 부끄러워할 줄을 모르니,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
하였으나, 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5월 16일 무자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한성부(漢城府)에서 말하기를,
"지금 노인(老人)을 초록(抄錄)할 때에 나이를 늘여서 기록한 자는 낱낱이 고핵(考覈)해서 사목(事目)에 의거하여 과죄(科罪)한다는 뜻을 청컨대, 여러 도(道)에 분부(分付)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이때 임금이 기로소(耆老臣)에 들어간 것으로 인하여 노인(老人)에게 추은(推恩)하여 조사(朝士)는 나이 70세 이상된 자, 사서인(士庶人)은 나이 80세 이상된 자에게 가자(加資)하도록 하였는데, 비천(卑賤)한 무리 가운데 혹시 나이를 늘여 속여서 신고하였다가 드러난 자가 많았으므로, 한성부에서 적발(摘發)하여 과죄(科罪)하기를 청한 것이다. 이후에는 조정(朝廷)에서, ‘지금 추은하는 일은 노인을 공경(恭敬)하는 뜻에서 나왔으니, 비록 나이를 늘여서 기록한 자가 있을지라도 이로 인하여 과죄(科罪)하게 하는 것도 과중(過重)한 데에 관계된다’고 하니, 마침내 과죄하라는 명령을 정지시켰다.
5월 17일 기축
윤헌주(尹憲柱)를 도승지(都承旨)로 삼았다. 은대(銀臺)239) 의 장관은 지망(地望)이 청렴(淸廉)하고 준엄(峻嚴)해야 하는데, 윤헌주는 비천(卑賤)하고 한미(寒微)한 데에서 출세(出世)하였고, 또 자격과 이력(履歷)도 모자랐으며, 여러 번 큰 고을을 다스리면서 청렴하지 못하다고 알려졌었다. 그런데도 인연(夤緣)240) 을 다행히 만나서 갑자기 외람되게 이 직임(職任)을 받으니, 물정(物情)이 이를 해괴(駭怪)하게 여겼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에 계달(啓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사과(司果) 이상성(李相成)은 작년에 상서(上書)하여 자기를 탄핵(彈劾)하였던 대관(臺官)을 도리어 구함(構陷)하였으니, 풍습(風習)이 가증스럽습니다. 진실로 이는 천신(薦紳)241) 의 수치(羞恥)인데도 도리어 뽐내면서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바가 없으니, 파직(罷職)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통진 부사(通津府使) 박태도(朴泰道)는 문자(文字)를 해득(解得)하지 못하여 소장(訴狀)의 제사(題辭)를 오로지 하리(下吏)에게 위임(委任)하였고, 칙사(勅使)의 수용(需用)이라고 핑계대고서 가호(家戶)를 헤아려 돈을 받아들였으니, 청컨대, 파직(罷職)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였는데, 세자가 답하기를,
"김만주(金萬胄)와 이상성(李相成)의 일은 논핵한 바가 자못 정도에 지나친 데 관계된다."
하였다. 후일에 발론(發論)한 대관(臺官) 김여(金礪)가 인피(引避)하면서 말하기를,
"김만주가 염치(廉恥)와 의리(義理) 없음을 무릅쓰고 탄핵(彈劾)을 감내(堪耐)하면서 시험을 관장한 것은 진실로 진신(搢紳)의 수치입니다. 그리고 이상성의 경우는 지난해 한 통의 상서(上書)가 공의(公議)에 버림을 받았고, 조사한 일이 허투(虛套)로 돌아갔는데, 죄벌(罪罰)을 요행히 면하였습니다. 그러면 자처(自處)하는 도리에 있어서 오직 물러가 엎드려 허물을 반성해야 할 것인데, 전후의 시임(試任)에 득의양양(得意揚揚)하여 무릅쓰고 나아갔습니다. 지금 신이 논핵한 바도 참작(參酌)하는 뜻에서 나왔습니다."
하고, 인하여 물러가 기다렸는데, 사간(司諫) 조언신(趙彦臣)이, ‘뒤따라 논핵(論劾)을 가하는 것이 이미 공심(公心)이 못되는데, 억지로 허투로 돌아갔다고 한 것은 더욱 매우 그릇된 것이다.’라고 처치(處置)하여 김여를 체차(遞差)하기를 청하니, 세자(世子)가 그대로 따랐다.
5월 18일 경인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5월 19일 신묘
유성(流星)이 방성(房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5월 21일 계사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사간(司諫) 조언신(趙彦臣)이 상서(上書)하여 양역(良役)을 변통(變通)하기 어려움을 논하고, 팔로(八路)의 승도(僧徒)에게 베를 거두어 포흠(逋欠)에 보충하기를 청하였는데, 세자가 묘당(廟堂)에 내렸으나 마침내 채택하여 시행한 것이 없었다.
5월 22일 갑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에 계달(啓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니, 세자가 다만 박태도(朴泰道)의 일만 따랐다.
평안도(平安道)에서 황충(蝗蟲)이 극심하게 발생하였는데, 크기가 두 번 잠잔 누에만하였다. 익어가는 양맥(兩麥)242) 과 바야흐로 자라는 서직(黍稷)과 볏모[稻苗] 가운데 부드럽고 연한 것을 거의 다 먹었으므로, 한 도가 거의 적지(赤地)243) 가 되었다. 그래서 백성들이 모두 모여서 울부짖고 있다고 도신(道臣)이 계문(啓聞)하였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5월 23일 을미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근래에 조사(朝士)들이 문관(文官)·음관(蔭官)·무관(武官)을 막론하고 무릇 제배(除拜)가 있을 적에는 문득 그곳이 쇠잔(衰殘)한 곳인지 번성(繁盛)한 곳인지, 건조(乾燥)한 곳인지 저습(低濕)한 곳인지를 보고서 나아가거나 피하고 있습니다. 장붕익(張鵬翼)을 처음 여주(驪州)에 임명했을 적에는 군문(軍門)에서 중군(中軍)에 사람이 모자란다 하여 입달(入達)해서 잉임(仍任)244) 시키도록 청하였는데, 이제 장붕익이 춘천 부사(春川府使)가 되자 그가 부임(赴任)하기를 좋아하는 뜻이 있으므로 군문에서도 또한 따라서 내버려 두고 있으니, 물정(物情)이 어찌 의혹(疑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싫어하여 피하는 수령(守令)을 그 땅에 정배(定配)하는 것은 이것이 영갑(令甲)245) 이니, 반드시 이 법을 거듭 엄중하게 시행해야만 비로소 뒷날의 폐단(弊端)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외방(外方)의 수령(守令)과 별성(別星)246) 이 가마를 타는 폐단을 조정에서 신칙(申飭)한 것이 한두 번에 그치지 않았는데도 끝내 징계하여 그치지 않고서 옛날과 같이 이를 범하고 있으며, 또한 영하(營下)에서도 제멋대로 출입(出入)하면서 반성하여 조심하는 바가 없습니다. 만약 저 노수(老帥)가 【김중기(金重器).】 혹시 질병(疾病)으로 인하여 초교(草轎)를 타고 다녔는데, 문득 이를 가마를 탔다고 지목하였으니, 이 어찌 대신(臺臣)의 이목(耳目)이 다만 곤수(閫帥)247) 에게만 미치고 수령(守令)에게는 미치지 않는 것입니까? 삼사(三司)의 관원(官員)에 이르러서는 부름을 받고 올라오면서 또한 모두 말을 타는데, 이내 법(法)을 범했다는 것으로 자수(自首)하여 문득 해직(解職)하는 묘책(妙策)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수령과 별성(別星) 이하의 관원으로 가마를 탄 자는 마땅히 도신(道臣)에게 신칙(申飭)하여 곧 파출(罷黜)을 시행하도록 하고, 삼사에서 이로써 자핵(自劾)248) 하는 자 또한 마땅히 일체 파직(罷職)하소서. 이미 문형(文衡)249) 을 지낸 사람은 제학(提學)을 겸할 수 없다는 것을 일찍이 결정하신 바가 있었으니, 곧 선신(先臣)250) 의 일입니다. 고(故) 상신(相臣) 이단하(李端夏)와 고(故) 판서(判書) 김만중(金萬重)은 모두 이 때문에 서로 잇따라 체차(遞差)되었는데, 지금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송상기(宋相琦)가 반드시 해면(解免)되고자 함은 그 형세가 진실로 그러하니, 또한 마땅히 억지로 직임(職任)을 보도록 할 수는 없습니다. 전(前)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최규서(崔奎瑞)가 당일에 떠난 것은 그 뜻이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지만, 염퇴(恬退)한 절조(節操)는 대체로 존중할 만하니, 그것을 인입(引入)하고 출사(出仕)하지 않는 사람에게 견주어 같이 말할 수는 없는데, 어떻게 이로써 죄를 삼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세자가 우악(優渥)한 비답(批答)을 내려 가납(嘉納)하여 송상기가 겸대(兼帶)한 제학(提學)을 체차(遞差)하고, 최규서를 서용(敍用)하도록 하였다.
5월 25일 정유
비국(備局)에서 차대(次對)하고 당상관(堂上官)이 일제히 모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탈품(頉稟)251) 하였다. 이때 기강(紀綱)이 해이(解弛)해져서 백료(白僚)가 직무(職務)를 게을리하였는데, 대료(大僚)에 이르러서도 척념(惕念)하는 일이 없었다. 비국의 차대(次對)는 당상관(堂上官) 3인이 있으면 으레 인원(人員)을 갖추었다고 일컫는데, 당시에 비국의 직임을 겸무한 자가 거의 20인이 되었으나, 매번 차대(次對)를 당하면 기꺼이 와서 모이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번번이 3원(員)을 갖추지 못하여 품의(稟議)가 정지되었다. 여러 번 신칙(申飭)하는 명(命)이 있었으나 뻔뻔스럽게 조금도 뜻을 두지 않으니, 견식이 있는 이는 한심(寒心)하게 여겼다.
유숭(兪崇)을 승지(承旨)로, 김운택(金雲澤)을 부교리(副校理)로, 신절(申晢)을 정언(正言)으로, 조명겸(趙鳴謙)을 장령(掌令)으로, 이관명(李觀命)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민진후(閔鎭厚)를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삼았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도목정(都目政)252) 은 반드시 다음달 안에 해야 하는 일이니, 분부(分付)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 양전(兩殿)에서 매번 연고(緣故)가 많아서 도목정을 그 달에 거행하지 못하였으므로, 특별히 하교(下敎)하여 신칙(申飭)한 것이다.
5월 26일 무술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5월 27일 기해
한중희(韓重熙)를 승지(承旨)로, 김동필(金東弼)을 필선(弼善)으로, 이중협(李重恊)을 문학(文學)으로, 정택하(鄭宅河)를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5월 28일 경자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진후(診候)를 마치자, 도승지(都承旨) 윤헌주(尹憲柱)가 말하기를,
"전부터 여름이 되면 처서(處暑) 전에는 시사(視事)를 탈품(頉稟)하는 예가 있었습니다. 올해는 천기(天氣)가 몹시 더운데, 승지(承旨)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는 것도 또한 시사(視事)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왕세자(王世子)께서 더위를 무릅쓰고 날마다 자리에 나아가 앉아 있어야 하니, 손상될 염려가 없지 않습니다. 처서까지 한정하여 정지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는 것은 시사(視事)와 다르니, 정지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말하기를,
"성교(聖敎)가 진실로 옳습니다마는, 다만 일기(日氣)가 몹시 더운데다가 인접(引接)하는 당(堂)이 좁아서 춘궁(春宮)께서 날마다 나가 앉아 있으면 반드시 손상될 것입니다. 비록 정지하지는 않더라도 처서까지 한정해서 혹 이틀에 한 차례씩 입대하는 것 또한 무방(無妨)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정지하고자 한다면 당연히 내전(內殿)에서 생각하고 헤아려 하교(下敎)할 것이니, 우선 정지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5월 29일 신축
전라도(全羅道) 낙안(樂安) 백성 19명이 바다에 나가서 고기를 잡다가 풍랑(風浪)을 만나 표류(漂流)하여 일본(日本) 장문주(長門州) 경계에 정박하였는데, 한 사람이 병들어 죽었다. 일본에서 옷과 양식을 주고, 또 죽은 사람을 염습(殮襲)하여 입관(入棺)시켰으며, 사람을 보내어 호송해 돌아오게 하였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숙종실록64권, 숙종 45년 1719년 7월 (1) | 2025.12.01 |
|---|---|
| 숙종실록63권, 숙종 45년 1719년 6월 (0) | 2025.12.01 |
| 숙종실록63권, 숙종 45년 1719년 4월 (0) | 2025.12.01 |
| 숙종실록63권, 숙종 45년 1719년 3월 (1) | 2025.12.01 |
| 숙종실록63권, 숙종 45년 1719년 2월 (0) | 2025.1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