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임인
세자가 승지(承旨)를 전옥(典獄)에 보내어 가벼운 죄수를 석방(釋放)하게 하였는데, 날씨가 매우 덥기 때문이었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6월 2일 계묘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좌의정(左議政) 권상하(權尙夏)가 현도(縣道)를 통해 상서(上書)하여 병(病)을 핑계하여 해면(解免)되기를 원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성학집요(聖學輯要)》는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에게서 나왔는데, 그것이 제왕(帝王)의 학문(學問)에 대해 약석(藥石)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저하(邸下)께서 만약 이 책에 대해 오로지 정신과 힘을 기울여서 혹시라도 게을리하지 않으신다면, 성인(聖人)이 되고 현인(賢人)이 되는 길이 이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니, 진실로 동방(東方) 만세(萬世)의 복(福)입니다."
하니, 세자가 우악한 비답(批答)을 내려 가납(嘉納)하였다.
6월 3일 갑진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에 계달(啓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수령(守令)의 공덕비(功德碑) 세우는 것을 금하는 조령(朝令)이 지극히 엄중한데, 비인 현감(庇仁縣監) 한오장(韓五章)은 사방으로 통하는 길에 비석(碑石)을 세워 행인(行人)들에게 과시(誇示)하였더니,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
하니, 세자가 단지 말단의 일만 따랐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6월 4일 을사
이봉익(李鳳翼)을 사간(司諫)으로, 김상옥(金相玉)을 교리(校理)로, 이세근(李世瑾)을 병조 참의(兵曹參議)로 삼았다. 이세근은 사람됨이 음험(陰險)하고 간사(奸邪)한데, 얼굴을 단장하기 좋아하여 날마다 여러 차례 낮을 씻고 목욕하고, 분을 바르고, 눈썹을 뽑았으며, 의복과 음식이 모두 보통 사람과 다르니, 당시에 그를 인요(人妖)라고 불렀다. 또 성품(性品)이 탐오(貪汚)하여 일찍이 접위관(接慰官)이 되었을 때 왜인(倭人)이 침을 뱉으며 비루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다만 붙좇는 데 교묘하여 때에 따라 얼굴을 바꿈으로써 승진하여 비옥(緋玉)253) 에 이르렀으나, 조정의 관원들이 함께 반열(班列)에 서는 것을 수치(羞恥)로 여겼다.
6월 5일 병오
세자(世子)가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접(引接)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 말하기를,
"수원(水原)은 기보(畿輔)의 중진(重鎭)으로서, 군병(軍兵)이 매우 많아서 도감(都監)과 다름이 없으므로, 구임(久任)시켜 승천(陞遷)시키는 것이 이미 정식(定式)이 있는데도, 병조(兵曹)에서 이를 적용하지 않는 까닭에 장관(將官)의 직임(職任)을 양반(兩班)들이 모두 싫어하여 군정(軍政)이 점차로 소우(疏虞)해지게 되었습니다. 광주(廣州)는 장관(將官)과 교련관(敎鍊官)이 각각 한 사람씩인데 차례로 승진시켜 보임(輔任)하고, 수어청(守禦廳)에서는 달수에 준거(準據)하여 조용(調用)하므로, 광주의 장교(將校)들은 흥기(興起)하는 자가 많다고 합니다. 수원(水原)은 바로 총융청(摠戎廳)의 소속(所屬)이니, 광주의 예에 의거하여 장관(將官)과 교련관(敎鍊官)을 각각 1인씩 계사(計仕)하여 총융청에 승진시켜 보임(輔任)해서 천전(遷轉)할 수 있게 한다면, 반드시 격려(激勵)하여 권장(勸奬)하는 효과가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세자가 이를 허락하였다. 공조 판서(工曹判書)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관방(關防)의 땅에 수목(樹木)이 무성하여 울창하면 성지(城池)를 담당할 수 있으므로, 조령(鳥嶺)의 수목을 배양(培養)해 온 지 해가 오래 되어 자못 무성해졌는데, 근래에 몰래 작벌(斫伐)한 것이 이루 셀 수가 없으며, 관재(棺材)로 베기까지 한 까닭에 장차 민둥산이 될 지경에 이르렀다 합니다. 관방의 중요한 땅을 도벌(盜伐)에 맡겨둘 수는 없으니, 마땅히 본도(本道)로 하여금 조사하여 감죄(勘罪)할 수 있도록 엄중하게 과조(科條)를 정하여 각별히 금단(禁斷)하게 하소서."
하니, 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민진후(閔鎭厚)가 또 말하기를,
"조정(朝廷)에서 쓰는 문자(文字)의 격식(格式)이 있으니, 등급(等級)이 같으면 관문(關文)을 쓰고 등급이 다르면 첩보(牒報)를 쓰며, 참하(參下)254) 는 체문(帖文)을 쓰는 것이 전례(前例)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통신사(通信使)와 접위관(接慰官)이 예조(禮曹)에 대해 관문을 쓰고 있습니다. 통신사는 당상관(堂上官)에 지나지 않고 접위관(接慰官)은 또 당하관(堂下官)입니다. 왕명(王命)을 받든 자가 외방(外方)에 있으면서 비록 존중(尊重)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경사(京司)에 대해 이 예(例)를 쓸 수 있겠습니까? 이후로 정식(定式)을 만들어 통신사·접위관은 모두 첩보(牒報)를 써서 예조에 바치게 하는 것이 사체(事體)에 당연(當然)합니다. 신이 예조에 있을 때 품정(稟定)하고자 하였으나, 미처 하지 못하였으므로, 이제 비로소 앙달(仰達)하는 것입니다."
하니, 세자가 이를 옳게 여겼다.
6월 6일 정미
달이 태미 동원(太微東垣) 제2성(第二星)을 범하였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6월 7일 무신
조영복(趙榮福)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진후(診候)를 마치자, 제조(提調)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지난해 제주(濟州)에 해마다 잇따라 흉년[凶荒]이 든 것으로 인하여 전후에 내려보낸 미곡(米穀)이 거의 20만 석(石)에 이르므로, 호남(湖南)과 경청(京廳)에 옛날 저장해 두었던 것이 이미 탕갈(蕩竭)되었습니다. 이후에도 만약 또 흉년이 든다면 다시 접제(接濟)할 방책이 없으니, 이후의 근심을 미리 강구(講究)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제주의 수령(守令)으로서 체임(遞任)되어 돌아온 자의 말을 듣건대, 본주(本州)에서 만약 돈 3, 4만 냥(兩)을 저축해 두었다가 흉년이 들 경우 백성에게 나누어 주어 미곡(米穀)을 바꾸게 하고, 혹은 물고기와 미역을 사서 육지(陸地)에 내다가 팔게 함으로써 흉년을 구제하는 방도를 삼는다면, 성조(聖朝)의 근심을 펼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으나, 3, 4만 냥의 돈을 어디에서 판비(辦備)하겠습니까? 전부터 전화(錢貨)를 더 주조(鑄造)하자는 의논이 있었으나, 이것을 어렵게 여긴 이가 많았으므로 과연 시행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제주(濟州)는 서울과 다르니, 만약 본주(本州)의 목사(牧使)로 하여금 믿을 만한 군관(軍官)과 더불어 스스로 3, 4만 냥의 전화(錢貨)를 주조하게 하여 위급(危急)에 대비(對備)하는 수용(需用)을 삼게 한다면 혹시 편호(便好)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진달한 바가 좋은 듯하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다.
6월 8일 기유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공사(公事)를 품재(稟裁)하기를 마치자, 세자가 승지로 하여금 앞으로 나오게 하고, 말하기를,
"일기(日氣)가 몹시 더우니, 공사를 가지고 들어올 필요가 없다."
하였는데, 승지(承旨) 조영복(趙榮福)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승지가 입대(入對)하지 않고, 모든 공사를 도착되는 대로 입달(入達)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세자가 고개를 끄덕이므로, 마침내 물러 나왔다. 이날 저문 후에 세자가 사약(司鑰)으로 하여금 영(令)을 내리게 하기를,
"조금 전에 공사를 가지고 들어오지 말라는 뜻을 승지에게 말하였는데, 입대(入對)는 폐지(廢止)할 수 없으니, 전과 같이 입대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6월 9일 경술
기로소(耆老臣)의 영수각(靈壽閣)이 완성되었다. 감독(監督)한 공로(功勞)의 차례를 매겨 당상(堂上) 임방(任埅)·강현(姜鋧), 상량문(上樑文)의 제술관(製述官) 이관명(李觀命), 편액 서사관(扁額書寫官) 신임(申銋) 등에게 마필(馬匹)을 내려 주도록 명하였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승지 이병상(李秉常)이 말하기를,
"각 해사(該司)는 도제조(都提調)의 아문(衙門)이 아니면 감히 초기(草記)를 쓸 수 없고, 부득이 변통(變通)해야 할 일이 있으면 제조(提調)가 친히 아방(兒房)255) 에 나아가 계달(啓達)하는 것이 곧 고례(古例)입니다. 그래서 여러번 신칙(申飭)하였으나 봉행(奉行)하지 않고 있으니, 지금부터 후에는 다시 정식(定式)을 만들어 그릇된 관습에 따르지 말도록 하소서."
하니, 세자가 이를 옳게 여겼다. 이병상이 또 말하기를,
"대관(臺官)이 패초(牌招)를 받고 들어왔다가 정사(呈辭)하고 나가는 것은 진실로 그릇된 예(例)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오히려 핑계댈 만한 정상과 병(病)이라도 있으나, 스스로 조방(朝房)256) 에 나아가 감다(監茶)하고는 【대관(臺官)이 조방(朝房)에 나아가 일을 다스리는 것을 다시(茶時)라고 하며, 감다(監荼)란 다시를 감독하는 것이다.】 대각(臺閣)에 나아가지 않은 채 잇따라 아뢰어 정사(呈辭)하고 나가는 자와 같은 경우는 더욱 매우 무상(無狀)하니, 이후에는 각별히 신칙(申飭)하는 일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세자가 이를 허락하였다. 이튿날 지평(持平) 송필항(宋必恒)이 감다(監茶)한 후에 갑자기 서학(署瘧)에 걸렸기 때문에 부축받아 집으로 돌아간 것으로 인피(引避)하고, 집의(執義) 윤석래(尹錫來)와 장령(掌令) 조명겸(趙鳴謙)이 모두 패초(牌招)를 받고 정고(呈告)한 것으로써 인피하니, 옥당(玉堂)에서 송필항은 체차하고 윤석래·조명겸은 출사(出仕)시키도록 처치(處置)하였다.
6월 11일 임자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승지 유숭(兪崇)이 겨우 들어가서 자리에 나아가자마자 세자(世子)가 성난 목소리로 말하기를,
"승지는 속히 물러가라. 조영복(趙榮福)은 오늘 무엇 때문에 들어오지 않았는가? 승지들이 무상(無狀)하니 여섯 승지들을 마땅히 모두 나문(拿問)하도록 하라. 사관(史官) 또한 모두 물러가도록 하라."
하였다. 유숭이 일어나 절하고 말하기를,
"엄위(嚴威)가 갑자기 진동(振動)하니 지극히 황공(惶恐)합니다마는, 단서(端緖)를 알지 못하겠으니, 감히 청하건대, 명백히 하교(下敎)해 주소서. 죄명(罪名)을 알고 물러가고자 합니다."
하니, 세자가 말하기를,
"육승지(六承旨)는 마땅히 모두 나문(拿問)할 것이니, 속히 물러가도록 하라."
하므로, 유숭이 총총히 걸어 나갔다. 문학(文學) 이중협(李重恊)이 진달(進達)하기를,
"신이 궁관(宮官)의 반열(班列)에 봉직(奉職)하고 있으니, 이미 생각한 바가 있으면 어찌 감히 진달(陳達)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저하께서 사기(辭氣)가 과격(過激)하시고 거조(擧措)가 너무 당황스러우신 것은 아마 평소 함양(涵養)의 공부가 부족(不足)해서인 듯하니, 신은 가만히 이를 애석하게 여깁니다. 승지가 만약 죄과(罪過)가 있다면 진실로 명백하게 하교(下敎)하셔야 할 것인데, 이미 입대(入對)하도록 하고는 곧 물러가게 하셨으니, 다만 일이 전도(顚倒)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아랫사람을 접대(接待)하는 도리에도 어긋난 것입니다."
하니, 세자가 말하기를,
"모두 곧 물러가라. 사관(史官) 또한 곧 물러가라."
하므로, 이중협과 사관(史官)이 또한 총총히 걸어 나왔다. 잠시 후에 사약(司鑰)이 나와서 영지(令旨)257) 를 전하여 승지로 하여금 도로 입대(入對)하게 하였다. 유숭(兪崇)이 합문(閤門) 밖에 나아가 말로써 전하여 진달(陳達)하기를,
"지금 다시 입대(入對)하라는 명(命)을 받고 합문 밖에 나아왔으나, 이미 나문(拿問)하라는 하교가 있었으므로 황공하여 감히 입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니, 영(令)을 내리기를,
"다른 승지들도 입대하게 하라."
하므로, 유숭이 일어나 나갔다. 승지 한중희(韓重熙)·이병상(李秉常)이 같이 합문 밖에 나아가 전하여 진달(陳達)하기를,
"신 등이 와서 합문 밖에 나아왔으나, 엄교(嚴敎)가 여러 승지들에게까지 미쳤으니, 신 등의 황공함도 유숭과 다름이 없으므로 대죄(待罪)하는 중에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자, 영(令)을 내리기를,
"대죄(待罪)하지 말라. 우승지(右承旨)도 도로 입대하게 하라."
하였다. 한중희·이병상이 또 아뢰기를,
"우승지 유숭은 지금 이미 합문 밖으로 나갔습니다. 패초(牌招)하여 입대시켜야 하겠습니까?"
하니, 영을 내리기를,
"곧 패초하여 입대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한중희·이병상이 일어나서 나갔다. 유숭이 패초를 받고 입대하여 공사(公事)를 품재(稟裁)하기를 마쳤다, 유숭이 일어나 절하고 말하기를,
"신이 비록 무상(無狀)하나, 군주(君主)를 섬기는 의리를 대강 알고 있습니다. 군신(君臣)은 부자(父子)와 같으니, 부모(父母)가 비록 혹시 꾸짖더라도 모두 가르쳐 신칙(申飭)하는 뜻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신이 어찌 이러한 뜻을 모르겠습니까마는, 조금 전의 엄교(嚴敎)는 진실로 어떠한 일에서 기인(基因)하였는지 알지 못하겠으므로, 죄명(罪名)을 알아서 징개(懲改)258) 하는 계획으로 삼고자 할 따름입니다. 군주의 희로(喜怒)는 중도(中道)를 얻기 어려워 발작하기는 쉽고 제어하기는 어려우니, 마땅히 평일(平日)에 성찰(省察)해야 할 따름입니다."
하였는데, 세자가 답하지 않았다. 이중협이 말하기를,
"신이 궁료(宮僚)에 인원을 갖추고 있었는데, 천둥 같은 위엄이 엄중하고 사기(辭氣)가 너무 당황한 것을 눈으로 직접 보고는 허둥지둥 진계(陳戒)하였으나, 회청(回聽)을 얻지 못하고, 이내 물러가라는 교령(敎令)을 내리셨으므로, 방금 매우 황송(惶悚)하였습니다. 그런데 곧 개오(開悟)하시는 일이 있어서 이미 물러갔던 승지를 도로 들어오게 하시는 데 이르렀습니다. 희로(喜怒)는 빨리 고치기는 어려운 법인데도 저하(邸下)깨서 이를 능히 고쳤으니 누군들 대성인(大聖人)의 작위(作爲)를 흠앙(欽仰)하지 않겠습니까마는, 대개 제어하기 어려운 것은 희로(喜怒)만한 것이 없으므로 옛말에 이르기를, ‘분노(忿怒)를 억제하는 것은 태산(泰山)을 꺾는 것과 같다.’ 하였으니, 마땅히 근실하게 힘써야 함을 말한 것입니다. 모름지기 평일의 사기(辭氣)를 표현하는 사이에 항상 공부하는 마음을 가지고서 폭발(暴發)하는 근심이 없게 해야 하니, 이것이 신의 바라는 바일 따름입니다."
하니, 세자가 말하기를,
"마땅히 유의(留意)하겠다."
하였다. 이중협이 또 말하기를,
"소대(召對)를 오랫동안 폐지(廢止)하셨습니다. 비록 상약(嘗藥)259) 하시는 가운데 있고, 또 겸하여 서무(庶務)를 대리(代理)하시게 되니 소대(召對)하실 여가가 없겠지마는, 일을 하다가 그만두는 것은 공부(工夫)에 가장 방애(妨碍)가 됩니다. 지금 비록 몹시 덥다 하더라도 마땅히 앞이 탁 트인 곳에서 궁료(宮僚)를 불러 접견(接見)하시고, 공부를 중간에서 단절(斷絶)됨이 없게 하소서."
하니, 세자가 말하기를,
"옳다."
하였다.
6월 12일 계축
황귀하(黃龜河)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여 공사(公事)를 품재(稟裁)하기를 마치자, 필선(弼善) 이인복(李仁復)이 말하기를,
"삼가 듣건대, 어제 입대(入對)하였을 때 승지를 책망(責望)하여 물리치셨는데, 사기(辭氣)가 매우 엄격(嚴格)하고 거조(擧措)가 경솔하셨으므로, 입시(入侍)했던 궁료(宮僚)가 분노(忿怒)를 제어하여 함양(涵養)해야 한다는 뜻을 우러러 진달하자, 저하께서 곧 개납(開納)하셔서 유의(留意)하겠다는 뜻을 허락하셨다 하니, 군하(群下)로서 누군들 흠앙(欽仰)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앎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실행이 어려운 것이다.’ 하였으니, 원컨대, 저하께서는 실행(實行)하는 공부에 뜻을 더하셔서 순수하여 허물이 없는 지경에 이르신다면, 어찌 종사(宗社)의 복(福)이 아니겠습니까? 대저 성기(聲氣)의 병(病)은 미처 일어나기 전에 함양(涵養)하는 것이 가장 마땅하고, 이미 일어나게 되면 제어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함양(涵養)하는 방법은 다름이 아니라 서책(書冊)을 가까이 해서 관감(觀感)하여 체험(體驗)한다면 반드시 그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세자가 말하기를,
"마땅히 유의(留意)하겠다."
하였다. 동부승지(同副承旨) 황귀하(黃龜河)가 말하기를,
"이인복의 말이 진실로 절실(切實)합니다. 아랫사람을 다스릴 때에는 마땅히 관용(寬容)하는 뜻을 보이셔야 하며, 성색(聲色)을 나타내시는 것은 성인(聖人)이 신하를 부리는 방도가 아닙니다. 또 신하로서 죄가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명백하게 하교(下敎)하시기를, ‘이 일은 그르다. 이 일은 죄가 된다.’고 하시면서, 상세하게 가르쳐 책망하시어 군하(群下)로 하여금 허물을 고칠 수 있게 하신다면 군신의 사이가 가인(家人)과 부자(父子)와 같아질 것이니, 무슨 일인들 할 수 없겠습니까?"
하니, 세자가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6월 13일 갑인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정언(正言) 신절(申晢)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가 듣건대, 어제 입대(入對)하였을 때 예노(睿怒)260) 를 갑자기 내셔서 승선(承宣)을 꾸짖어 물리치시면서 사기(辭氣)가 준엄(峻嚴)해서 감히 들을 수 없는 바가 있었다 하니, 가만히 저하를 위해 이 일을 애석하게 여깁니다. 성학(聖學)의 공부는 소중히 여기는 바가 함양(涵養)하는 데에 있으니, 사기(辭氣)를 표현하는 사이에 반드시 조포(粗暴)함을 제거해야 합니다. 가만히 살펴보건대, 우리 저하께서는 예질(睿質)이 온수(溫粹)하시고 덕량(德量)이 깊고도 넓으시므로, 무릇 조포(粗暴)하신 허물은 마땅히 근심할 만한 것이 없을 것인데도 작은 일로 인하여 갑자기 과격(過激)한 일이 있었으니, 신은 알지 못하겠지만, 저하께서 평일(平日)에 함양(涵養)하는 공부에 혹 미진(未盡)함이 있어서 한때 희로(喜怒)의 절도(節度)에 스스로 그 지나친 정도를 깨닫지 못하신 것입니까? 허물을 고치는 데 주저하지 않는 것은 성왕(聖王)이 본받은 바이니, 저하께서는 오로지 더욱 힘껏 반성(反省)하시고 반드시 빨리 고칠 것을 생각하시어 본원(本源)의 바탕에 뜻을 더하고 함양하는 방도에 힘쓰셔서 털끝만한 찌끼라도 마음속에 남아 있지 못하게 하소서. 이렇게 되면 칠정(七情)261) 의 일어남이 저절로 중도(中道)에 어긋나는 일이 없어져서 수신제가(修身齊家)262) 하고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263) 하는 효험(效驗)을 장차 이로부터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내가 마땅히 유의(留意)하겠다."
하였다. 이때 유숭(兪崇)이 이미 어제 병을 핑계대어 정사(呈辭)하였고, 한중희(韓重熙)와 이병상(李秉常)은 우선 남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유숭이 체차(遞差)된 후 차례로 해면(解免)되었다. 그런데 신절의 상서(上書)가 갑자기 나왔으므로, 한중희·이병상 또한 대궐 밖에 나가서 패초(牌招)를 어기고 파직(罷職)당하였는데, 임금이 다만 추고(推考)하도록 명하였다.
6월 14일 을묘
박성로(朴聖輅)를 집의(執義)로, 이중협(李重恊)을 지평(持平)으로, 남세진(南世珍)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남세진은 사람됨이 용렬하고 처지(處地)가 미천(微賤)하여 본래 영선(榮選)에 적합하지 못한데도 구차하게 대직(臺職)에 채웠으므로, 일이 전도(顚倒)되고 망령된 것이 많았으니,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다.
승지(承旨) 유숭(兪崇)이 병을 핑계대어 정사(呈辭)하기를 세 차례에 이르니,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일전에 승선(承宣)을 꾸짖어 물리친 일은 진실로 전에 없던 지나친 일이었다. 광구(匡救)하는 대관(臺官)의 글이 이미 올라왔으나, 논사(論思)하는 지위에 있는 자들은 끝내 한 마디 말도 없었으니, 내가 진실로 개연(慨然)하게 여긴다. 유숭은 이미 잘못한 바가 없으니, 이 정사(呈辭)를 도로 내주고, 곧 직임(職任)을 살피게 하라."
하였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부교리(副校理) 김운택(金雲澤)이 상교(上敎)가 엄절(嚴切)한 것으로 인하여 숙직(宿直)하는 방에서 곧 나가서 상서(上書)하여 인책(引責)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신이 외람되게 있는 직임(職任)을 돌아보건대, 무릇 군덕(軍德)의 궐유(闕遺)에 대해 어긋나는 것을 광정(匡正)하고 모자란 점을 보충하는 것이 바로 그 책무(責務)입니다. 그러나 신이 본래 우둔(愚鈍)하고 나약(懦弱)하여 일찍이 스스로 그 충성(忠誠)을 다하지 못하고, 대신(臺臣)만이 오로지 이를 말하게 하여 성충(聖衷)께서 개연(慨然)해 하시는 데 이르렀으니, 그 죄가 어찌 다만 책무(責務)를 저버린 데에 그칠 뿐이겠습니까? 인하여 삼가 생각해 보건대, 저하의 이번 일은 진실로 군하(群下)가 바라던 것이 아니었으니, 성상(聖上)의 지극히 자애(慈愛)하신 생각으로 지나친 책망이 있을 듯한데, 신 등이 구제하여 바로잡지 못하였던 것은 바로 저하를 위한 때문이었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저하께서는 위로 대조(大朝)의 교도(敎導)를 준수(遵守)하시고, 아래로 대신(臺臣)의 규면(規勉)을 따르셔서 본원(本源)의 바탕에 더욱 유의(留意)하실 것이며, 전일(前日)과 같이 혹 위노(威怒)를 폭발(爆發)하시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아래 조항의 진계(陳戒)한 바를 유심(留心)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부수찬(副修撰) 남일명(南一明)이 상교(上敎)로 인해 상소(上疏)하여 사직(辭職)하고, 또 말하기를,
"동궁(東宮)께서 승선(承宣)을 엄중히 책망하신 것은 대개 그 까닭이 있습니다. 일전에 입대(入對)했던 승선(承宣)이 휘교(徽敎)에 대해 의미를 알아 듣지 못하였으나, 명백하게 우러러 계품(啓稟)하지 못하고서 글을 내어 하령(下令)하였으므로 사약(司鑰)이 환수(還收)하는 일이 있었다 하니, 왕명(王命) 출납(出納)을 성실히 해야 하는 방도에 어긋난 점이 있음을 이에서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 후에 입대하였을 때의 엄교(嚴敎)는 까닭 없이 꾸짖어 책망한 것과는 다르며, 더욱이 곧 불러서 입대하게 하였으니, 더욱 허물을 고치는 데 주저하지 않는 아름다움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이 성교(聖敎)를 어떤 사람은 그 위절(委折)264) 을 미처 굽어 살피지 않았다하여 전에 없던 지나친 거조(擧措)라고까지 말하겠습니까? 설령 동궁(東宮)께서 한때의 희로(喜怒)가 중도(中道)를 잃는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전하께서 자애(慈愛)로 교도(敎導)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마땅히 곡진하게 면명(面命)265) 하시고, 일에 따라 외인(外人)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교회(敎誨)하고 책양(責讓)하셔서 스스로 순수하여 허물이 없는 지경에 이르게 해야 할 것인데, 지금 도리어 특별히 전교(傳敎)를 내리셔서 조지(朝紙)266) 에 전파(傳播)하였으므로 조금도 짐작(斟酌)하는 뜻이 없었으니, 신은 이를 가만히 애석하게 여깁니다."
하였는데, 소장(疏章)이 들어가자 계(啓) 자를 찍었다. 【무릇 사직(辭職)하는 소장(疏章)에 계(啓) 자를 찍으면 으레 체차(遞差)하도록 되어 있다.】 대개 남일명은 그날 입대(入對)하였을 때의 엄교(嚴敎)에 조영복(趙榮福)의 성명(姓名)을 들어 언급(言及)한 까닭으로, 이에 생각하기를, ‘기유267) 에 입대하였을 때 이미 승지로 하여금 입대하지 말도록 하였는데, 또 전과 같이 입대하라는 명이 있었지만, 반드시 조영복이 그 의미를 알아 듣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임자268) 에 입대하였을 때 엄교(嚴敎)가 있었을 것이다.’고 여겼다. 이때 조영복이 바야흐로 병조 참지(兵曹參知)가 되었는데, 상서(上書)하여 스스로 변명하기를,
"신이 초8일에 입대하여 장차 파(罷)할 즈음에 저하께서 신을 불러 앞으로 오게 하신 후 하령(下令)하신 바가 있었는데, 신이 재차 우러러 계품(啓稟)하여 명백히 휘음(徽音)을 받은 후 원중(院中)에 나가서 함께 입대했던 주서(注書)로 하여금 기록을 적도록 하고, 이내 등사(謄寫)해서 장차 반포(頒布)하려고 하였으나, 곧 하령(下令)으로 인하여 도로 정지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함께 직숙(直宿)했던 승지와 머리를 맞대고 서로 이야기하면서 우리 저하께서 정사(政事)에 부지런하신 성의(盛意)를 더욱 앙모(仰慕)하였는데, 지금 유신(儒臣)이 위절(委折)을 알지 못하고 딴 말을 창출(創出)하여 그들을 책망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때의 사상(事狀)은 저하의 밝으심도 반드시 기억하시는 바가 있을 것이니, 신이 어떻게 억지로 변명(辨明)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세자가 사직(辭職)하지 말고 직무(職務)를 보살피라고 답하였다.
6월 15일 병진
부교리(副校理) 김운택(金雲澤)과 부수찬(副修撰) 조상건(趙尙健)이 패초(牌招)를 어기어 파직되었다.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어제 세자의 허물을 보고 노하여 내린 전교(傳敎)는 교회(敎誨)하고 책유(責諭)하는 데에서 나왔으므로 지나치게 혐의할 필요가 없는데, 남일명(南一明)의 소어(疏語)는 전연 사리(事理)에 어긋난 것이었다. 또 비망기(備忘記)의 본뜻은 세자로 하여금 허물이 없게 하고자 하여 세자를 사랑하는 데에서 나왔으니, 소장 말미에 있는 말을 더욱 미안(未安)한 데 관계된다. 그래서 계(啓)자를 찍어 내렸으니, 김운택(金雲澤) 등은 이로써 인형(引嫌)할 단서(端緖)가 없다. 추고(推考)하되, 직무(職務)를 보살피게 하라."
하였다.
사간(司諫) 이봉익(李鳳翼)이 상소(上疏)하기를,
"신 등이 삼가 어제 승정원(承政院)에 내리신 비망기(備忘記)를 보았더니, 일전에 입대(入對)하였을 때 승지(承旨)를 꾸짖어 물리친 것은 진실로 전에 없던 지나친 일이라고 하교(下敎)하셨으므로, 신은 이에 지극히 경혹(驚惑)과 우탄(憂歎)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동궁(東宮)께서 대리(代理)하신 이후 정령(政令)을 시행(施行)하고 조처(措處)하는 사이에 조금도 과실(過失)이 없었고, 신료(臣僚)를 인접(引接)하실 때 화기(和氣)가 애연(藹然)하셔서 대소 군신(群臣)들이 흠앙(欽仰)하여 애대(愛戴)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니, 일전에 입대(入對)하였을 때 설령 중도(中道)에 지나친 일이 있었을지라도 이는 군신(君臣) 사이에 한때 교회(敎誨)하고 책유(責諭)하는 뜻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더욱이 위노(威怒)를 곧 푸시고 도로 승선(承宣)을 인접(引接)하셨으니, 곧 회복하신 아름다움을 사람들이 모두 칭송(稱頌)하였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조금도 천천히 살펴보시지 않고서 문자(文字)에 드러내시어 자못 조용히 훈계(訓戒)하시는 뜻이 없었습니다. 임금의 말씀이 한 번 전파(傳播)되자 들은 사람들이 모두 의혹(疑惑)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우리 성상께서 교도(敎導)하여 이끄는 도리에 어긋남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비지(批旨)를 도로 거두셔서 조정과 민간(民間)의 소망(所望)에 부응(副應)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겨우 두 유신(儒臣)에게 다만 비망기(備忘記) 중의 말을 미루어 나의 뜻을 명시(明示)하였는데, ‘경혹(驚惑)’이란 두 글자는 실로 아주 의사(意思)의 뜻 밖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말이 이와 같으니 어찌 지난(持難)할 필요가 있겠는가? 어제의 비망기를 환수(還收)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승지(承旨) 유숭(兪崇)·한중희(韓重熙)·이병상(李秉常) 등이 연일 패초(牌招)를 어겼으나, 임금이 번번이 파직(罷職)하지 말라는 명(命)을 내렸다. 유숭 등이 각자 상서(上書)하여 황송(惶悚)한 심정(心情)을 아뢰고, 직명(職名)을 해면(解免)시켜 주기를 원하였는데, 세자가 답하기를,
"내가 어제의 잘못을 깨닫고 있는데, 어찌 매우 불만(不滿)스럽게 여기는 데 이르는가?"
하니, 이튿날 유숭 등이 모두 도로 직사(職事)에 나아갔다.
6월 16일 정사
정찬선(鄭纘先)을 보덕(輔德)으로, 김민택(金民澤)을 문학(文學)으로 삼았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진후(診候)를 마치자,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동궁(東宮)은 비록 대리(代理)하는 일이 없다 하더라도 한 나라의 원량(元良)인데, 평상시의 교회(敎誨)를 범연(泛然)하게 할 수 있겠는가? 일을 잘 처리하면 기쁘지만 미진(未盡)하면 근심이 된다. 대리(代理)한 후에는 책망(責望)이 더욱 중대하므로, 곡진하게 계칙(戒飭)하기를 어느때든지 그렇게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일전에 듣건대 입대(入對)한 승지(承旨)가 갑자기 쫓겨났었다 하니, 병들어 있는 가운데 경동(驚動)함이 어떠하였겠는가? 이것은 전에 없던 지나친 거조(擧措)이므로 바야흐로 불러서 경계하여 가르치려 하였었다. 그런데 듣건대 옥당(玉堂)에서 차자(箚子)를 동궁(東宮)에게 들였다 하므로 내 생각에 진계(陳戒)하는 말이라 여겼다. 그런데 그 차자의 말을 물어보았더니, 이것은 다만 대간을 처치(處置)하는 것이라고 하므로, 마침내 스스로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하였었다. 때마침 유숭(兪崇)이 책망받은 승지(承旨)로서 세 번이나 정사(呈辭)하여 입계(入啓)하였는데, 승지는 이미 잘못한 바가 없고 한때 거조(擧措)가 지나쳐서 이에 이르렀던 것이다. 마땅히 도로 내주어야 하겠지마는, 부자(父子)의 정리(情理)에 있어서 대리한 후에 잘하게 하려는 뜻으로 한 마디 말이 없을 수 없었고, 옥당의 일은 마음속에 간직해 두었던 바가 있었으므로, 이러이러한 말을 했던 것이다. 대저 내 생각에는 대간(臺諫)이 광구(匡救)하였는데도 【신절(申晢)이 상서(上書)한 것이다.】 논사(論思)하는 자리에서 말하지 않은 것은 개탄(慨歎)할 만하다고 여겼으나, 모두 세자를 사랑하여 허물이 없게 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군신(君臣)의 사이가 어찌 절연(截然)하지 않겠는가마는, 군주가 허물이 있으면 신하는 반드시 진계(陳戒)해야 하는데, 더욱이 내가 다만 세자를 사랑하는 뜻으로 논사(論思)하는 신하를 칙유(飭諭)하였으니, 이는 바로 호의(好意)인 것이다. 남일명(南一明)은 대단히 사리(事理)에 어긋나서 내 말의 곡절(曲折)을 살펴보지도 않은 채 다른 말을 삽입(揷入)하였고, 이봉익(李鳳益)의 상소(上疏)는 경혹(驚惑)하고 우탄(憂歎)한다는 말이 있기에 이르렀다. 세자에게 지나친 거조(擧措)가 있어도 조정(朝廷)에서 진계(陳戒)하는 자가 없었던 것은 근심하지 않으면서 내가 세자를 사랑하는 뜻은 도리어 근심하여 한탄한다고 하였으니, 또한 이상하지 않은가? 나는 세자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왔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간(諫)하지 않는 것을 매우 괴이(怪異)하게 여겼는데, 저 무리들은 경혹(驚惑)하고 우탄(憂歎)한다는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내가 이를 가만히 괴이하게 여기니, 그 마음이 자못 옳지 못한 것이다. 남일명·이봉익의 소장(疏章)이 들어왔을 때 호흡(呼吸)이 매우 고르지 못하였는데, 이 때문에 오랫동안 앓고 있던 기력(氣力)이 결코 저당(抵當)할 형세가 없었으므로 부득이 비망기(備忘記)를 환수(還收)한 것이지, 그 말이 옳다고 여긴 것은 아니었다. 비록 비지(批旨)를 보더라도 그것을 상쾌하게 여기지 않는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말하기를,
"근일에 군신(群臣)이 성상(聖上)의 뜻을 알지 못하고 말을 가리지 않은 채 많이 했으니, 신도 또한 개연(慨然)하게 여겼습니다. 신료(臣僚)의 도리에 있어서 세자에게는 마땅히 신료(臣僚)를 깔보고서 큰 소리로 꾸짖지 말라는 뜻을 고해야 하며, 성상에게는 마땅히 평소에 곡진하게 계칙(戒飭)하시되 외부에 선양(宣揚)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을 고했어야 합니다. 두셋의 신하들이 또한 어찌 이와 같이 하고자 하지 않았겠습니까마는, 다만 말이 의사(意思)를 전달하지 못한 것뿐이니, 만약 이로 인하여 지나치게 의심하신다면 옳지 못합니다. 유숭의 일은 성상께서 이와 같이 처분(處分)하신 것이 스스로 불가(不可)함이 없으나, 만약 세자께서 스스로 개석(開釋)하게 하시면 더욱 좋을 듯합니다. 또 일은 이미 지나갔으니, 이제부터 이후로 성상께서는 너그럽게 잊어버리시고 다시 기억하지 않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大臣)이 진달(陳達)한 바가 옳다. 그러나 다만 여러 신하들이 세자를 자애(慈愛)하는 본뜻을 알지 못하고, 경혹(驚惑)·우탄(憂歎)이라는 말이 있기에 이르렀으니, 한탄할 만하다."
하였다. 제조(提調)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일전의 전교(傳敎)는 세자에게 지나친 거조가 있었음을 염려하셔서 신료(臣僚)를 칙려(飭勵)하시는 뜻에 지나지 않았으니, 군신(君臣)과 부자(父子) 사이에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 등의 소견(所見)에는 경혹(驚惑)할 만한 일이 있음을 알지 못하겠는데, 군신(群臣)의 의혹(疑惑)이 이와 같았으니, 대개 지난해에 하교(下敎)하셨던 것도 세자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지마는, 신료(臣僚)들의 놀라 근심함이야 마땅히 어떠하였겠습니까? 그후부터 지금까지 이 마음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大臣)과 제조(提調)의 말이 모두 좋으나, 저 무리들이 마땅히 경혹(驚惑)하지 않아야 할 부분에 대해 갑자기 경혹을 일으켜 문의(文義)가 이상한 까닭에 설파(說破)한 것이다."
하였다.
비국(備局)에서 사은사(謝恩使)의 출행(出行) 시기를 늦추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지난달 입진(入診)하였을 때 임금이 친히 부사(副使) 유명홍(兪命弘)에게 유시(諭示)하여 그로 하여금 출행 시기를 빨리 정하도록 하였으므로 마침내 7월 초4일로 날짜를 가렸었다. 그런데 정사(正使) 여산군(礪山君) 이방(李枋)이 더위를 무릅쓰고 떠나는 것을 꺼려하고, 또 열읍(列邑)에 구청(求請)한 것이 미처 올라오지 못한 일로써 비국(備局)에 청탁하려고 꾀하였는데, 비가 개인 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도 장맛비가 염려스럽다고 핑계대어 갑자기 시일을 늦추니, 사람들이 놀랍게 여겼다.
사서(司書) 조진희(趙鎭禧)가 상소(上疏)했는데, 이르기를,
"일전에 동궁(東宮)께서 입대(入對)하였을 때 승선(承宣)을 꾸짖어 물러가라고 명하신 일이 있었는데, 이는 마침내 중도(中道)에 지나친 일이었습니다. 성상께서는 지극히 인자하신 생각으로 연한(燕閑)한 때에 직접 대하여 신칙(申飭)하고 권면(勸勉)하시지 않고, 갑자기 문자(文字)에 전파(傳播)하셨으니, 이는 자못 헤아리신 뜻이 부족한 것이었습니다. 신은 전하의 이 하교(下敎) 또한 과중(過重)함을 면하지 못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남일명(南一明)의 상소(上疏)에 이르러서는 결단코 다른 뜻이 없었는데, 다만 개납(開納)하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또 뒤따라 그 직임(職任)을 체차(遞差)하셨으니, 신은 가만히 미혹(迷惑)됩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남일명의 상소 말미에 있는 말은 마침내 미안(未安)한 데에 관계된 것이었다."
하였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6월 17일 무오
약방(藥房)에서 동궁(東宮)에게 입진(入診)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말하기를,
"지금 이처럼 더운 적이 전에 없었는데다가 시탕(侍湯)하는 가운데 만기(萬機)269) 를 대리(代理)하고 계시므로, 신 등이 보호(保護)하는 지위에 있으면서 어찌 저하께서 안일(安逸)하여 근로(勤勞)함이 없도록 하고자 하지 않겠습니까만, 사세(事勢)가 노췌(勞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으니, 만약 노췌하도록 근고(勤苦)하시다가 싫증이 나서 게을러지는 뜻이 생기면 더욱 감당하기 어려움을 깨달으셔야 합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장경(莊敬)270) 하면 날로 강건(强健)해진다.’ 하였으니, 마음을 장경하게 가지면 의지(意志)가 기질(氣質)을 다스릴 수 있어서 온 몸이 편안해질 것이나, 마음이 장경하지 못하면 심신(心身)이 피로해지고 지기(志氣)가 나태해져서 혹시 병이 발생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저하께서는 책임(責任)이 매우 중대하시므로, 다만 입지 자강(立志自强)하는 것만을 급무(急務)로 삼으시고 혹시라도 싫증이 나서 게을리하는 마음이 없어야 할 것이니, 이것이 신의 소망(所望)입니다. 지난번 성상께서 혈뇨(血尿)가 처음 나왔을 때 국사(國事)를 매우 염려하셔서 바로 승지(承旨)로 하여금 공사(公事)를 가지고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라고 하교(下敎)하셨는데, 이는 저하로 하여금 국사를 환하게 익히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듣건대, 입대하였을 때 논란(論難)하는 일이 없고, 총총히 한 번 읽으면 달(達) 자를 찍어 내주는 데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것은 대궐 안에서 슬쩍 보아 넘기고 관례에 따라 판하(判下)하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도리어 무엇이 유익(有益)하겠습니까? 보통 사람은 칠정(七情)에 있어서 다만 노(怒)를 제어(制御)하기가 어렵습니다. 근일에 저하께서 승선(承宣)을 책망하여 물리친 일로 소장(疏章)이 분운(紛紜)한데, 그 근본을 생각해 보면 칠정(七情)을 제어하지 못하여 위노(威怒)가 폭발하게 된 것이니, 이후로는 비록 마음에 불쾌(不快)한 것이 있더라도 갑자기 성색(聲色)에 나타내지 않으신다면 다행하겠습니다. 그때 승지를 이미 물러가게 하셨다가 곧 도로 입대하게 하셨는데, 그 사이가 지극히 짧은 시간에 지나지 않았으니, 애초에 만약 참으셨더라면 잠깐 사이에 어찌 중도(中道)에 지나친 일이 있었겠습니까? 또 신하에게 죄가 있으면 마땅히 그 죄를 명확하게 말씀하셔야 하는데, 저하께서는 끝내 죄명(罪名)을 말씀하시지 않았으니, 이를 당한 자는 어찌할 바를 못하였고 이를 들은 자는 번민하여 근심하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대조(大朝)의 하교(下敎)는 저하의 일신(一身)을 위하여 지극한 정성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저하께서는 마땅히 한결같이 황공(惶恐)하게 여기고만 있어서는 안됩니다. 마땅히 성상의 자애(慈愛)를 우러러 본받아 한결같이 성의(誠意)로써 품정(稟定)하여 이를 시행해야 할 것이니, 이는 온 나라 신민(臣民)의 소망(所望)입니다."
하였는데, 제조(提調)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대신(大臣)의 말이 매우 간절하여 애대(愛戴)271) 하는 정성에서 나왔으니, 마땅히 더욱 양찰(諒察)하셔야 할 것입니다. 신이 지난해 춘방(春坊)272) 에 대죄(待罪)하였을 때 저하께서 글을 받으시고 미처 암송(暗誦)하지 못하시므로, 잠시 시각(時刻)을 늦추어 날이 저문 후에 들어가니, 저하께서 이를 암송하셨으나 그래도 관통(貫通)하지는 못하셨습니다. 고(故) 상신(相臣) 신완(申琓)이 그때 빈객(賓客)으로서 입시(入侍)하였다가, 진계(進戒)하기를, ‘저하께서 글을 능숙하게 암송하지 못하시는 까닭에 그 시각을 늦추어 강관(講官)으로 하여금 물러가서 기다리게 하다가 날이 저물어 비로소 진강(進講)하였으나, 또 이와 같이 암송하시는 것이 정숙(精熟)하지 못하시니, 어떻게 장차 학업(學業)을 성취(成就)하시겠습니까?’ 하고 말이 매우 절실하였습니다. 저하께서 그때에 송연(悚然)273) 해 하시며 낯빛을 고치시고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개납(開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튿날부터 일찍 서연(書筵)을 여심으로써 글을 암송하시는 바가 더욱 정숙해졌으므로, 신은 평소 저하께서 책망을 받고 쉽사리 따르시는 도량(度量)을 흠앙(欽仰)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신의 말이 또 이와 같이 지극히 간절하니, 저하께서 지난해 빈객의 말을 채납(採納)하셨던 것과 같이 하신다면 진실로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하였다. 이이명이 말하기를,
"저하께서 군신(群臣)을 대하실 때 반드시 수작(酬酢)하심을 울림이 소리에 응하듯이 하여 옳다고 하든가 옳지 않다고 하신다면 마음이 통할 수 있겠지만, 만약 다만 연묵(淵默)274) 만 숭상하신다면 상하(上下)의 마음이 서로 믿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천지(天地)가 어찌 멀리 떨어져 있지 않겠습니까마는, 이기(二氣)275) 가 유통(流通)하므로 비가 내려서 만물(萬物)이 생성(生成)되니, 군신(君臣)의 도리 또한 이와 같아야 할 것입니다."
하니, 세자가 말하기를,
"상세히 진계(陳戒)한 말은 마땅히 유의(留意)하겠다."
하였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6월 20일 신유
문묘(文廟) 대성전(大成殿) 동무(東廡) 남쪽의 회목(檜木)에 벼락이 떨어졌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6월 21일 임술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여 공사(公事)를 품재(稟裁)하기를 마치자, 겸문학(兼文學) 김운택(金雲澤)이 승지를 책망하여 물리친 일로 진계(陳戒)하면서 우러러 성의(聖意)를 체득(體得)하여 항상 위노(威怒)의 폭발을 경계하기를 청하고, 정자(程子)의 ‘분노(忿怒)를 다스리기가 어려우니, 다만 극기(克己)로써 분노를 다스릴 수 있다’는 말을 인용하였는데, 말이 매우 간절하였다. 세자가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유의(留意)하겠다."
하였다. 김운택이 또 말하기를,
"다만 한때의 폭노(暴怒)만이 중도(中道)에 지나친 일이 될 뿐 아니라, 신료(臣僚)를 깔보아 함부로 꾸짖고 질책(叱責)하셨으니, 진실로 신하를 예(禮)로써 부리고 아랫사람을 접대할 적에 공손함을 생각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또 그때 승지 가운데 설혹 한 사람이 예지(睿旨)에 감동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로 인하여 온 원(院)의 여러 신하들까지 모두 책망하셨으니, 이는 이미 천노(遷怒)276) 하지 않는다는 뜻에 어긋난 것입니다. 더욱이 승선(承宣)은 대조(大朝)의 소속(所屬)입니다. 신료(臣僚)가 저하를 엄외(嚴畏)함이 비록 대조(大朝)에 대해 하는 것과 차이가 없어야 하나, 저하께 있어서는 마땅히 대조께 계품(啓稟)하여 이를 처벌하셔야 될 듯합니다. 저하께서 평일에 이러한 도리를 어찌 알지 못하였겠습니까마는, 다만 한때의 졸급(猝急)함으로 인하여 이와 같았으니, 어찌 뉘우칠 만한 부분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는데, 세자가 고개만 끄덕이고 대답하지 않았다.
장령(掌令) 남세진(南世珍)이 상서(上書)하여 승선(承宣)을 책망하여 물리친 일을 논하고, 계청(啓請)하기를,
"노(怒) 자 위에 뜻을 두고서 항상 긍지(矜持)를 가지시되, 혹시라도 소홀히 하지 마시고, 본원(本源)의 바탕을 다스리며 더욱 함양(涵養)하는 공부를 더하소서."
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유념(留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6월 22일 계해
홍현보(洪鉉輔)를 지평(持平)으로, 권첨(權詹)을 보덕(輔德)으로, 김동필(金東弼)을 문학(文學)으로, 이국휴(李國休)를 사서(司書)로 삼았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대사성(大司成) 김재로(金在魯)가 문묘(文廟)의 회목(檜木)에 벼락이 떨어진 변괴(變怪)로 인하여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재변(災變)은 헛되이 생기는 것이 아니고, 사람으로 말미암아 불러 오는 것입니다. 시험삼아 살펴보건대, 오늘날 교화(敎化)가 시행되지 않고 습상(習尙)277) 이 날로 허물어져 상서(庠序)278) 가운데에서 겸양(謙讓)하는 것을 듣지 못하겠고, 여항(閭巷)에서는 예의(禮義)가 흔적도 없이 되었습니다. 인사(人事)가 이미 그러하므로 천심(天心)을 알 수가 있으니, 하늘을 성실로써 응하는 도리에 있어서 결코 우연한 일로 볼 수가 없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저하께서는 경외(敬畏)하는 생각을 크게 진념(軫念)하셔서 몸소 먼저 도솔(導率)하여 군공(群工)을 칙려(飭勵)하시고, 반드시 유도(儒道)를 돈독히 숭상하여 윤교(倫敎)를 천명(闡明)하는 것을 선무(先務)로 삼으시되, 거짓 없이 지극히 성실하게 하여 게을리하지 않고 서로 다스린다면, 장차 교화(敎化)가 많은 인재[菁莪]를 육성(育成)시켜서 선비가 아칙(雅飭)하는 아름다움이 있게 되고, 영(令)이 풍초(風草)279) 처럼 시행되어 백성이 효제(孝悌)의 풍속(風俗)을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진계(陳戒)한 말을 유념(留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6월 23일 갑자
이조 판서(吏曹判書) 권상유(權尙游)가 병으로 면직(免職)되었다.
이관명(李觀命)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권상유(權尙游)를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조영복(趙榮福)을 승지(承旨)로, 정석오(鄭錫五)를 문학(文學)으로 삼았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6월 24일 을축
기로소 당상(耆老所堂上) 등이 일제히 영수각(靈壽閣)에 나아가 어첩(御帖)을 봉안(奉安)하였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6월 25일 병인
세자가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접(引接)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 말하기를,
"북병사(北兵使) 백시구(白時耉)가 장계(狀啓)하기를, ‘호조(戶曹)에서 이관(移關)280) 하여, 내노(內奴) 3분의 1을 한정해서 속오군(束伍軍)을 정한 외에는 모두 공물(貢物)을 징수(徵收)하여 주창(州倉)에 머물러 두게 하였는데, 북관(北關)은 인물(人物)이 매우 적어서 한정한 정원(定員) 외에 이미 군액(軍額)에 보충한 내노(內奴)를 도로 파(罷)한다면 그 수효가 3천여 명에 이르므로 보충할 수효가 없습니다. 청컨대, 삼수(三水)와 갑산(甲山)의 예에 의거하여 그대로 보존(保存)시키게 하소서.’ 하였는데, 대개 남병사(南兵使)가, ‘삼수·갑산의 내노는 이미 군액(軍額)을 정한 자가 비록 한정한 이외라 하더라도 예전 그대로 두기’를 겨우 청하자마자 받아들였으므로, 북병사 또한 이를 청한 것입니다. 그러나 내노 3분의 1을 군액(軍額)에 정한 것은 이것이 사목(事目)이고, 남도(南道)와 북도(北道)에서 모두 이와 같이 한다면 내사(內司)에서 거두는 공물(貢物)이 장차 크게 줄어들게 될 것이니, 허락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세자가 이를 옳게 여겼다. 이건명이 또 말하기를,
"신이 바야흐로 장악원 제거(掌樂院提擧)를 겸무하고 있으므로, 《악학궤범(樂學軌範)》의 도형(圖形)을 살펴보니 의심스러운 것이 있었습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축(柷)과 어(敔)로 음악(音樂)을 합주(合奏)하게 하고, 그치게 한다.’ 하였는데, 축(柷)이란 시작하는 데 쓰는 것이고 어(敔)란 끝나는 데에 쓰는 것이니, 한 가지를 빠뜨리면 음악이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그런데 지금 태묘(太廟)에서 쓰는 악공(樂工)은 이미 태반(太半)을 줄였고, 또 축(柷)은 있어도 어(敔)는 없으니, 전란(戰亂)이 끝난 후에 미처 갖추지 못한 것에 말미암았다고 생각됩니다. 지금 태평(泰平)하던 때의 고제(古制)를 모두 회복하고자 하면, 갑자기 의논하기 어려움이 있겠으나, 축(柷)은 있어도 어(敔)가 없는 경우는 갖추어지지 못한 것이 심합니다. 또 대악(大樂)의 법은 팔음(八音)281) 이 조화(調和)를 이루어야 악장(樂章)을 이룰 수 있는데, 종묘(宗廟)·영녕전(永寧殿)에서 쓰는 것은 훈(壎)과 생(笙)이 없으니, 또한 인원(人員) 수를 줄일 때에 뒤섞어 줄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훈(壎)이란 토음(土音)이고 생(笙)이란 포음(匏音)인데, 사람 수효는 비록 줄일 수 있으나 팔음(八音)은 줄일 수가 없으므로, 전악(典樂)의 무리에게 물어 보았더니, 다만 두 사람만 늘리면 훈(壎)과 생(笙)을 회복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등가(登歌)는 축(柷)과 어(敔)는 있어도 훈(壎)과 생(笙)이 없고, 현가(懸架)는 축은 있어도 어는 없는데, 이는 진실로 흠결(欠缺)이 되니 마땅히 변통(變通)하는 도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세자가 말하기를,
"어(敔) 1부(部)를 더 내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이건명이 말하기를,
"훈과 생도 일체로 더 내도록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세자가 말하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이건명이 또 말하기를,
"영소전(永昭殿)·경녕전(敬寧殿)의 두 전(殿)은 대제(大祭) 때 종묘악(宗廟樂)을 씁니다. 대개 종묘에서는 연례(宴禮)를 쓰지 않는데, 영소전은 종묘와 다르기 때문인 듯하며, 찬물(饌物)은 모두 상식(常食)을 쓰고, 예(禮)는 연례(宴禮)를 쓰며, 음악은 종묘에서 쓰는 기명(基命)·귀인(歸仁) 등의 악장(樂章)을 섞어 쓰니, 이는 제례(祭禮)와 연례(宴禮)를 섞어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녕전에서는 순전히 연례의 악장만 씁니다. 양전(兩殿)은 마땅히 똑같이 해야 할 것인데도 이와 같이 각각 다르니, 일이 자못 옳지 못합니다. 또 이미 연례를 썼으면 마땅히 노래가 있어야 할 것인데, 소리만 있고 곡조(曲調)는 없으므로, 의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양전(兩殿)에 모두 존호(尊號)를 올렸을 때 새로 지은 악장(樂章)이 있으니, 참신(參神)282) 하고 사신(辭神)283) 할 때에 쓴다면 편하고 좋을 듯하다.’ 하였습니다. 또 양전(兩殿)에 노래는 없고 음악만 있으므로, 음악의 일절(一節)이 끝나도 음악이 끝나지 않는 바가 있어서 노자(臚者)284) 가 그치라고 창(唱)할 때에 일이 자못 미안(未安)하니,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심이 마땅할 듯 합니다."
하니, 세자가 예관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였다. 이건명이 또 전일에 승선(承宣)을 책망하여 물리친 일과 문묘(文廟)의 회목(檜木)에 벼락이 떨어진 이변(異變)으로써 되풀이하여 진계(陳戒)하고, 또 말하기를,
"가만히 보건대, 저하(邸下)께서는 신료(臣僚)가 진달(陳達)하는 말에 대해 한결같이 연묵(淵默)하시고 응답하실 때가 매우 드뭅니다. 군신(君臣) 사이의 분의(分義)가 본래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외방(外方)에서 열 가지 일을 헤아려 진달(陳達)한 경우에 들어와서 상달(上達)되는 것은 겨우 한두 가지 뿐인데, 저하께서 응답을 내리지 않으시니, 누가 감히 생각한 바를 다 말하겠습니까?"
하였는데, 공조 판서(工曹判書) 민진후(閔鎭厚)가 이를 잇따라 말하니, 세자가 말하기를,
"마땅히 각별히 체념(體念)하겠다."
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윤봉조(尹鳳朝)가 전일에 진달(陳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었으나, 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윤봉조가 또 승지를 책망하여 물리친 일로 생각한 바를 진달(陳達)하고, 마음을 다스려 분노(忿怒)를 경계하기를 청하니, 세자가 유의(留意)하겠다고 답하였다.
6월 29일 경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문묘(文廟)의 회목(檜木)에 벼락이 떨어진 이변(異變)으로 인하여 차자(箚子)를 올려 진계(陳戒)하였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뇌정(雷霆)이란 상천(上天)의 지극히 노(怒)한 위엄이고, 성묘(聖廟)는 국가에서 지극히 공경하는 곳인데, 지극히 노(怒)한 위엄으로써 지극히 공경하는 곳에 미치게 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이를 부른 바가 있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세교(世敎)가 점차 쇠퇴(衰頹)해져서 사습(士習)이 옛날 같지 않으므로, 금신(衿紳)285) 의 반열에서 아칙(雅飭)하고 검속(檢束)하는 행실(行實)을 듣지 못하였고, 상서(庠序)의 사이에서는 다만 투박(偸薄)하여 다투는 풍습(風習)만 물려받고 있을 뿐입니다. 대저 어려서 이를 배우는 것은 장년(壯年)이 되어 이를 실행하려고 하는 것이니, 제생(諸生)이 덕행을 향상(向上)시키고 학업(學業)을 닦아서 먼저 그 근본(根本)을 세우지 못하고서 이와 같이 무무(貿貿)286) 하다면 다른 날 나와서 당시에 소용이 되기를 어떻게 바랄 수 있겠습니까? 비록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는 일로써 살펴보더라도 신이 듣건대, 여러 선배(先輩)들은 종사(從祀)하는 법이 지극히 중대하므로 반드시 조야(朝野)의 사론(士論)이 귀일(歸一)되기를 기다린 후에야 정하였다 하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먼 지방의 선비들이 경솔하게 발단(發端)하여 혹 양현(兩賢)을 종사하기를 청하기도 하고, 혹은 삼현(三賢)을 종사하기를 청하기도 하며, 태학(太學)287) 에 이르러서는 또 사현(四賢)을 종사하자는 의논을 내어 취사(取捨)를 제뜻대로 하면서 의논을 정지시키고 꺼내는 것이 일정함이 없으니, 이러한 사론(士論)은 진실로 이전에는 듣지 못하던 것인 듯합니다. 지금 절반을 구득(救得)하고자 하면, 다만 사유(師儒)의 장(長)을 신중하게 간선(簡選)해서 구임(久任)시켜 책성(責成)288) 하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옛날 인조조(仁祖朝) 때 고(故) 참판(參判) 정엽(鄭曄)은 평소 국자감(國子監)의 장관(長官)을 겸임하였고, 선왕조(先王朝)의 고(故) 상신(相臣) 민정중(閔鼎重)도 일찍이 겸무(兼務)해서 그가 유액(誘掖)289) 하여 새롭게 만든 효과(效果)를 지금까지 칭찬하고 있으니, 이것도 또한 사문(斯文)을 진기(振起)시키는 한 가지 단서(端緖)입니다. 저하께서 대리(代理)하신 후에 마땅히 성묘(聖廟)에 전알(展謁)하는 예전(禮典)이 있어야 하는데, 천기(天氣)가 서늘해지고 성상의 환후(患候)에 차도(差度)가 있을 때를 점차 기다려 한 번 성묘(聖廟)에 배알(拜謁)하여 욕의(縟儀)를 거행하시고, 이내 여러 사유(師儒)의 신하들로 하여금 제생(諸生)을 불러 악차(幄次) 아래에 세워 놓고, 곡진하게 이끌어 교회(敎誨)하게 함으로써 저하께서 즐거이 육영(育英)하시는 뜻을 알게 한다면, 반드시 감화(感化)받아 개선되는 데 보탬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송(宋)나라 신하 진덕수(眞德秀)가 그 군주에게 고(告)하기를, ‘부모(父母)의 마음을 아는 자는 천심(天心)을 알 수 있고, 군주의 도리를 아는 자는 천도(天道)를 알 수 있습니다.’고 하였으니, 이제 저하께서는 우러러 성상의 자육(慈育)하시는 뜻을 이어받아 경계(儆戒)하여 게을리하지 아니하시고, 상천(上天)의 인애(仁愛)하는 마음을 본받아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편안히 여기지 않으신다면, 하늘이 흑 재이(災異)를 거두실 것이니, 지금 태묘(太廟)의 회목(檜木)에 벼락이 떨어진 이변(異變)이 도리어 상서(祥瑞)를 내게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니, 세자가 우악(優渥)한 비답(批答)을 내려 가납(嘉納)하고, 인하여 9월 초10일에 문묘(文廟)의 전알(展謁)을 거행하도록 하였는데, 이 뒤에 국자감 정(國子監正)을 구임(久任)시키는 등의 법은 끝내 시행되지 않았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부수찬(副修撰) 조상건(趙尙健)이 태묘(太廟)·악공청(樂工廳)이 무너지고, 문묘(文廟)의 회목(檜木)에 벼락이 떨어진 일로 상서(上書)하여 진계(陳戒)하였는게, 이르기를,
"저하께서는 예지(睿智)를 타고 나셔서 서사(庶事)를 명확하게 익히셨는데, 군하(群下)를 접견(接見)하실 때 연묵(淵默)이 너무 지나치므로 날마다 입대(入對)하는 것이 문득 문구(文具)를 이루고 있습니다. 비록 긴요하고 중대한 문서(文書)일지라도 승지(承旨)가 한 번 읽고 넘어가면 저하께서는 단지, ‘계달(啓達)에 의거하라[依達]’는 두 자만 내리실 따름입니다. 대신(大臣)이 차대(次對)하여 건백(建白)하는 경우는 군국(軍國)의 중대한 일이 아닌 것이 없는데도 오히려 발락(發落)290) 한다는 말을 적게 내리시니, 신은 가만히 답답하게 여깁니다. 요·순(堯舜)의 다스림이 비록 아무 일도 한 것이 없다고 하지마는, 도유우불(都兪吁咈)291) 하고, 악목(岳牧)292) 에 누가 합당한지 물어 보았다면, 신은 알지 못하겠지만, 한결같이 침묵(沈默)하는 것을 오늘과 같이 하였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윤선거(尹宣擧)가 죄를 받은 후부터 이를 돕는 당류(黨類)들이 위언(讆言)293) 을 제창하여 국시(國是)를 현혹시켜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일전에 조태억(趙泰億)의 글에 이르러서는 반유(泮儒)가 지난해 서계(書啓)한 가운데의 말을 가탁(假託)하여 진언(進言)하기 어려운 단서(端緖)라고 하였는데, 말한 바가 아주 패리(悖理)하여 차마 바로 볼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아! 그 아비294) 는 간사한 무리들이 정인(正人)을 해치는 날을 당하여 직언(直言)과 당론(讜論)295) 으로 선정(先正)296) 이 무함(誣陷)받은 억울함을 통렬하게 변파(辨破)하였는데, 이는 대개 평일(平日)에 모열(慕悅)하는 마음이 깊어서 일신(一身)의 이해(利害)를 돌보지 않고서 다른 사람들이 어렵게 여기는 것을 말하였으니, 지금까지 사우(士友) 사이에 칭찬하는 말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조태억은 그 아비가 본래 선정을 존앙(尊仰)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말하였으니, 이것이 차마 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리고 마침내 현판(懸板)을 부수고 봉호(封號)를 추삭(追削)하자는 등 옛날에 없던 말을 은근히 삽입(揷入)하여 일편(一篇)의 정신(精神)이 모두 이에 있었으니, 시비(是非)를 현혹시켜 어지럽히는 계책을 이루려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데도 버려둔다면 장차 어찌 선인(善人)을 좋아하고 악인(惡人)을 미워하는 변별(辨別)을 엄중히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인하여 양사(兩司)에서 서원(書院)을 훼철(毁撤)하라는 청(請)을 흔쾌히 따르기를 청하였다. 또 말하기를,
"이상성(李相成)·김만주(金萬胄)는 의(義)를 지키는 도리가 아름답지 못하므로, 이는 진실로 청조(淸朝)297) 에서 수치(羞恥)로 여겨야 합니다. 그러니 김여(金礪)가 자거(刺擧)298) 하여 파직(罷職)을 논한 것은 진실로 공의(公議)에서 나왔는데, 조언신(趙彦臣)이 감히 앞장서서 처치(處置)하였다가 갑자기 주달(奏達)을 정지하였으니, 김여가 두 사람에 대하여 이미 사감(私憾)이 없다면, 이른바, ‘공심(公心)에서 나온 것이 아니므로, 더욱 어긋난다.’ 한 것이 과연 사리에 맞는 말이겠습니까? 대각(臺閣)의 지위에 있으면 마땅히 논박(論駁)하여 바로잡는 논의(論議)가 있어야 할 것인데, 어렴풋이 듣건대, 한 달이 지나도 아직 한 마디 말도 없으니, 신은 가만이 이를 애석하게 여깁니다."
하였다. 대개 연전(年前)에 반유(泮儒)들이 권당(捲堂)299) 하여 생각한 바를 진달(陳達)하며 세도(世道)의 변괴(變怪)를 낱낱이 말하고, 인하여 조태억의 아버지 고(故) 참의(參議) 조가석(趙嘉錫)은 다른 사람보다 갑절이나 송시열(宋時烈)을 모열(慕悅)하여 진소(陳疏)해서 신리(伸理)300) 하는 데 이르렀으나, 조태억은 예조 참의(禮曹參議)가 되자 감히 상소(上疏)하여 윤증(尹拯)을 편들었다고 배척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조태억이 판결사(判決事)에 임명되자 비로소 상서(上書)하여 스스로 변명하기를, ‘선신(先臣) 조가석은 정사년301) 에 고묘(告廟)의 논의(論議)302) 가 한참 일어났을 때 응지(應旨)하여 진언(進言)해서 당인(黨人)들이 화(禍)를 전가(轉嫁)시키려는 계책을 힘껏 배척하였는데, 반유(泮儒)들의 이른바 다른 사람보다 갑절이나 모열(慕悅)하였다는 것은 이러한 일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근일에 신구(申球)의 무함(誣陷)은 오로지 정사년에 다른 사람을 구함(構陷)하던 여습(餘習)을 이어받은 것인데, 온 세상에서 이를 붙좇고 있으므로, 신이 전소(前疏)에서 논열(論列)한 것은 진실로 선신(先臣)이 간신(奸臣)을 배척한 뜻을 따른 것입니다.’ 하였으므로, 조상건의 상서가 이에 미친 것이다. 서장(書狀)을 승지(承旨)가 입대하였을 때 들여 보내니, 세자가 비답(批答)을 입으로 불러서 승지로 하여금 쓰게 하였는데, 이르기를,
"말이 매우 절실(切實)하니, 체념(體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조태억의 일은 처분(處分)을 이미 정하였는데, 논한 바가 바르다. 서원(書院)을 훼철(毁撤)하라는 청은 특별히 양사(兩司)의 의논에 의거하도록 하라. 이상성·김만주의 일은 논한 바가 옳으니, 파직(罷職)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후 이경(二更)에 사약(司鑰)으로 하여금 조상건의 상서에 대한 답을 도로 가져오게 하여, 서원을 훼철하라는 청은 결코 준허(準許)하기가 어렵고, 이상성·김만주의 일은 파직하기를 청한 대신(臺臣)의 논의가 자못 정도에 지나친 데 관계된다고 고쳐서 내렸다.
교리(校理) 홍정필(洪廷弼)이 문묘(文廟)의 회목(檜木)에 벼락이 떨어진 변괴(變怪)로 상서(上書)하여, 자신을 반성(反省)하고 덕(德)을 닦아서 재이(災異)가 바뀌어 상서(祥瑞)가 되게 하는 일을 중종(中宗)의 상곡(桑穀)의 재이(災異)303) 와 성왕(成王)의 풍뢰(風雷)의 변고(變故)304) 와 같이 하기를 청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진실로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으니, 유의(留意)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6월 30일 신미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윤봉조(尹鳳朝)가 문묘(文廟)의 회목(檜木)에 벼락이 떨어진 변고로 상서(上書)하여 수성(修省)해서 재이(災異)를 그치게 하기를 청하였다. 또 서로(西路)의 기황(饑荒)을 진달(陳達)하고, 본도(本道)에 신칙(申飭)하여 기일(期日)에 앞서 계획을 세워 접제(接濟)하는 방도를 삼고, 서로(西路)의 세미(稅米)는 은(銀)으로 절납(折納)하는 것을 허락하되 영문(營門)에서 빚을 주는 폐단(弊端)을 엄금(嚴禁)하기를 청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내가 매우 가상(嘉尙)하게 여긴다."
하고, 인하여 묘당(廟堂)에 내렸는데, 이 뒤에 복주(覆奏)하여 다만 빚을 주는 폐단만 엄금하도록 신칙(申飭)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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