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64권, 숙종 45년 1719년 7월

싸라리리 2025. 12. 1.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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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임신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태학(太學)의 유생(儒生)들이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의 차어(箚語) 때문에 권당(捲堂)305)  하자, 임금이 본관 당상(堂上)에게 들어갈 것을 권하라고 명하였다. 여러 유생들이 소회(所懷)를 써서 바쳤는데, 이르기를,
"삼가 상신(相臣)의 차사(箚辭)를 보건대, 벼락이 회나무에 떨어진 변고(變故)를 거재 유생(居齋儒生)306)  들에게 돌리며, 심지어 사습(士習)이 옛날 같지 않고 투박(偸薄)하여 싸움질이나 하고 사리에 어둡다는 따위의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아 재변(災變)을 초래한 까닭이라 하였습니다. 신 등은 감히 이 말을 그르다고 하는 것은 아니나, 또한 개연(慨然)한 바가 있습니다. 대신(大臣)이란 온갖 책임을 도맡고 있는 바로, 재변을 만나 책면(責免)하는 것은 옛부터 있었던 전례(前例)입니다. 그런데 지금 수상(首相)은 자책(自責)하는 뜻은 조금도 없고 이에 거재 유생들에게 핑계를 미루고자 하였습니다. 과연 수상의 말과 같다면 벼락의 변이 반드시 정부(政府)의 나무에 떨어진 뒤에야 바야흐로 인책(引責)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신 등은 재변을 초래한 단서가 과연 어떤 일의 잘못에 있는지 알지 못하나, 재상(宰相)이 된 사람은 마땅히 변고를 다스리는 도리를 다하고 상서(庠序)307)  에 있는 자들은 마땅히 계칙(戒飭)하는 방도를 생각하여 각각 그 책무(責務)를 다한 뒤에야 하늘의 견책(譴責)에 조금이나마 답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수상은 그렇게 하지 않고 곧 ‘나 때문이 아니라 저 사람 때문이다.’ 하였으니, 어찌하여 자신을 책망하는 것은 관대하고 다른 사람을 책망하는 것은 밝습니까?"
하자, 세자(世子)가 하령(下令)하기를,
"지금 대신의 차사(箚辭)는 여러 유생들이 더욱 면려(勉勵)해야 마땅할 바인데, 어제의 소회(所懷)는 말에 화평(和平)함이 결여되었으니, 어찌 여러 유생들이 미처 깊이 생각하지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 한결같이 인혐(引嫌)함은 자못 너무 지나친 데에 관계된다. 다시 들어가도록 권고하라."
하였다. 여러 유생들이 다시 소회를 진술하고, 나흘 만에 비로소 입재(入齋)하였다.

 

7월 2일 계유

한세량(韓世良)을 승지(承旨)로, 윤석래(尹錫來)를 사간(司諫)으로, 조명겸(趙鳴謙)을 헌납(獻納)으로, 조상건(趙尙健)을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예조(禮曹)에서 말하기를,
"9월 초1일에 왕세자(王世子)께서 알성(謁聖)308)  하실 때 취사(取士)하는 일절(一節)은 마땅히 지난해 봄 판부사(判府事) 이이명(李頤命)이 헌의(獻議)한 바에 의거하여, 작헌(酌獻)한 후 수일 안에 특별히 성지(聖旨)를 내리셔서 관원에게 명하여 시취(試取)하게 하되, 반궁(泮宮)309)  에서 별제(別製)하는 규례(規例)와 같게 하소서."
하니, 세자가 옳게 여겼다.

 

7월 3일 갑술

지평(持平) 홍현보(洪鉉輔)가 조상건(趙尙健)이 글을 올려 대각(臺閣)에서 조언신(趙彦臣)을 논핵(論劾)하지 않은 것을 배척하였다 하여 인피(引避)하고, 말하기를,
"이상성(李相成)·김만주(金萬胄)는 진실로 의리로 처신(處身)함이 미진하였고, 전(前) 정언(正言) 김여(金礪)가 파직(罷職)하기를 청한 논의(論議)는 비록 규경(規警)하는 뜻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마침내 너무 심한 데로 돌아감을 면하기 어려우며, 조언신이 처치(處置)하면서 한 말은 예사롭지 아니하여 물정(物情)의 불만족을 초래함이 마땅하였습니다. 논박(論駁)하여 바로잡는 일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그만둘 수 없는 일인지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이상성 등이 다툰 바가 본래 국가(國家)에 관계된 일이 아닌데, 문득 조정에서 크게 싸우는 하나의 시끄러운 단서를 만들어 언의(言議)가 갈수록 과격(過激)해지고 기색(氣色)이 아름답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저쪽에서 논박하면 이쪽에서 변명하여 시비가 멈출 기약이 없으니, 식견이 있는 사람들이 근심하여 탄식한 지 이미 오래입니다. 신은 다른 사람을 따라 비위를 맞추어 가면서 스스로 풍파(風波)를 조장(助長)하는 죄과(罪科)에는 빠지고 싶지 않습니다."
하니, 대사간(大司諫) 윤봉조(尹鳳朝) 또한 인피하고 말하기를,
"김여가 두 신하를 들추어 논핵(論劾)한 바가 진실로 여론(輿論)을 얻는 것이라면 처치의 조어(措語)는 곧 하나의 탄핵(彈劾)하는 글이 됩니다. 자신이 대관(臺官)의 지위에 있는 자라면 마땅히 한 마디 말로 바로잡아 논해야 하겠지만, 신은 처치한 대신(臺臣)과 사소한 혐의의 단서가 있어 그 시비(是非)와 가부(可否)를 신이 꼭 발론(發論)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입을 다물고 잠자코 있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직절(直截)한 의리로써 논한다면 비난하지 않아도 부끄러운 마음이 있습니다."
하고, 아울러 물러나 물론(物論)을 기다렸다. 이튿날 부교리(副校理) 김운택(金雲澤)이 처치하기를,
"시비를 거꾸로 논하며 오로지 우물쭈물 하는 것만을 일삼고 억지로 입을 다물었던 사실에 대해서 강변(强辯)하였으니, 직절(直截)한 뜻이 부족합니다. 그리고 이미 바로잡아 논하지 않아 공의(公議)에 배척받고 자질구레한 혐의를 지나치게 끌어대었으니, 더욱 구차한 데에 관계됩니다. 청컨대 홍현보와 윤봉조를 아울러 체차(遞差)하소서."
하니, 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승지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7월 4일 을해

부교리(副校理) 김운택(金雲澤)·부수찬(副修撰) 조상건(趙尙健)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문묘(文廟)310)  의 전알(展謁)은 대신(大臣)이 올린 차자(箚子)로 인하여 기일을 이미 정하였습니다. 시탕(侍湯)하는 중에서 잠시 떠나야 하는 것은 매한가지인데, 태묘(太廟)311)  에 참배하는 것은 이미 정지하고 선성(先聖)에게 배알(拜謁)하는 것은 특별히 거행하도록 하시니, 사체(事體)로 헤아려 보건대, 어찌 앞에 해야 할 일을 뒤에 하는 잘못이 없겠습니까? 신 등이 가까이 모시는 반열(班列)에서 감히 어리석은 소견을 올리니, 삼가 원하건대, 저하께서는 먼저 태묘를 배알하신 다음에 문묘(文廟)로 가시는 것이 전례(典禮)에 혹시라도 흠결(欠缺)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차사(箚辭)가 마땅하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예조(禮曹)에서 8월 20일을 태묘에 전알하는 길일로 가려서 아뢰었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7월 6일 정축

유명홍(兪命弘)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이만(李滿)을 지평(持平)으로, 김여(金礪)를 정언(正言)으로, 윤양래(尹陽來)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유생(儒生)의 소회(所懷) 가운데 헐뜯어 배척한 말이 있었다 하여 차자(箚子)를 올려 면직(免職)을 청하고, 이어 말하기를,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관명(李觀命)은 형제가 나란히 정부(政府)와 전조(銓曹)에 있는 것을 편안하지 못한 단서로 여겨 반드시 사직(辭職)하여 체차(遞差)되고자 하고 있습니다. 사의(私義)로써 말하건대, 혹 이관명의 뜻과 같은 것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조정(朝廷)의 사체에 있어서 어찌 굽혀서 그 원하는 바를 이루어 주어야 하겠습니까? 고(故) 상신(相臣) 정태화(鄭太和)가 영상(領相)이 되었을 때 그 아우 고(故) 상신(相臣) 정치화(鄭致和)는 이조 판서(吏曹判書)가 되었으나 출사(出仕)하여 명에 응(應)하였고, 전(前) 이조 판서(吏曹判書) 권상유(權尙游) 또한 지금의 좌상(左相) 권상하(權尙夏)의 아우로서, 애초에 비록 인혐(引嫌)하였으나 마침내 또한 출사(出仕)하였습니다. 비록 ‘좌상이 현재 행공(行公)하지 않으니, 권상유의 처치는 이관명과 조금 같지 않은 바가 있다.’ 【권상유는 권상하의 아우이고, 이관명은 이건명의 형이다.】 고 하더라도, 우상(右相)은 수상(首相)에 비하여 조금 다름이 없지 않으니, 정치화의 일에 견주어 또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유생의 과격한 말에 어찌 혐의할 필요가 있는가? 이조 판서의 일은 조정의 사체(事體)에 있어서 결코 체임(遞任)을 허락할 수 없으니, 거듭 정원(政院)으로 하여금 패초(牌招)312)  해 직임을 살피게 하여 대정(大政)313)  이 지체되는 데 이르지 않게 하라."
하였다. 이관명은 그의 아우 이건명이 바야흐로 정부(政府)에 있고 자신은 전지(銓地)의 장관(長官)으로 있는 것을 사사로운 의리에 불안(不安)하게 여겨 여러번 상소하여 면직(免職)을 원하였으므로, 김창집이 차자에서 언급했던 것이다. 이후 조정에서 끝내 체차(遞差)를 허락하지 않으니, 이관명이 마침내 출사(出仕)하였다.

 

7월 7일 무인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대보단(大報壇)314)   바깥 담장이 무너져 개축(改築)하고자 하여 지대(地垈)를 수치(修治)할 즈음에 해골이 나왔다 한다. 버려 둘 수가 없으니, 도성(都城) 밖에 잘 매장해 주는 일을 분부하라."
하였다.

 

판결사(判決事) 조태억(趙泰億)이 조상건(趙尙健)의 서어(書語)로 인하여 상서(上書)하여 스스로 변명하였는데, 이르기를,
"선신(先臣)이 당일에 올린 소장(疏章)에 이르기를, ‘지금 진언(進言)하는 것에 만약 혹시라도 송시열(宋時烈)에게 관계되는 말이 있으면 전하께서는 반드시 송시열의 당류(黨類)로 여기시는데, 신과 같은 자는 이미 송시열의 학도(學徒)도 아니요 또 문객(門客)도 아닙니다. 정분(情分)이 막연하여 논의(論議)가 송시열에게 통하지 못하니,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애석하게 여겨 사사롭게 비호하는 뜻이 있겠습니까? 송시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조정이 날로 궤열(潰裂)되어 가고 있으니, 이것은 신이 국가를 위해 깊이 염려하는 바입니다.’ 하였으니, 선신의 이 소장(疏章)이 과연 사사롭게 모열(慕悅)하는 데에서 나온 것이겠습니까? 더구나 신이 배척한 자는 신구(申球) 한 사람일 뿐인데, 송시열에게 무슨 관계되는 바가 있다고 이러한 협지(脅持)하는 말을 하는 것입니까? 또 신이 근래의 일을 정사년315)  에 견주었다 하여 무엄(無嚴)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이 살펴보건대, 정사년의 일은 폄박(貶薄)하였다는 것을 죄안(罪案)으로 삼았고, 금일의 논의는 무훼(誣毁)하였다는 것을 죄목(罪目)으로 삼았습니다. 남을 죄에 빠뜨리려는 뜻이 앞뒤로 똑같으니, 저들은 비록 억지로 구별하고자 하더라도 신은 그 차이를 보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승지가 입대(入對)할 때 서장(書章)을 들여보내니, 세자가 비답(批答)을 입으로 불러 승지로 하여금 쓰게 하였는데, 이르기를,
"무망(誣罔)한 말은 족히 혐의할 것이 없다."
하였다. 그리고 이튿날 도로 가져오게 하여 ‘무망(誣罔)’ 두 자를 유신(儒臣)으로 고쳐 내렸다. 부교리 조상건이 다시 상서(上書)하여 조태억의 서어(書語)를 변명하였는데, 이르기를,
"조가석(趙嘉錫)이 선정(先正)에 대하여 스스로 처신한 바를 신은 또한 ‘학도(學徒)도 아니요 문객(門客)도 아니나 특별히 모열(慕悅)하는 사람이다.’라고 하였는데, 비단 모열하였을 뿐만 아니라 독실하고 깊이 모열하였던 것입니다. 군흉(群凶)이 유현(儒賢)을 구함(構陷)하였을 때 화색(火色)이 하늘에 가득 찼었으니, 이는 바로 한 마디 말만 입 밖에 내면 화복(禍福)이 즉시 판가름나는 그런 때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조가석은 홀로 생사(生死)를 치지도외하고 뇌정(雷霆)을 범하며 과감하게 말하였으니, 대현(大賢)을 화망(禍網) 가운데에서 건져 내고자 했음은 변함없는 혈성(血誠)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지금 조태억이 그 아비의 소장 가운데에서 끌어댄 몇 마디 말은 선정(先正)을 존앙한 지극히 독실하고도 지극히 깊은 마음을 보기에 아주 적절할 뿐인데, 이로써 그 아비가 모열(慕悅)한 데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하고자 하니, 범가(范家)의 자제(子弟)가 그 아비의 마음을 알지 못했던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또 신이 일찍이 듣건대, 송상민(宋尙敏)이 임종(臨終)할 때에 올린 소장(疏章)은 오로지 선정의 억울함을 풀어 주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를 본 다른 사람들은 화(禍)를 가득히 싣고 남에게 해를 끼치는 물건과 같이 보았으나, 조가석은 그 글을 읽을 때마다 한없이 눈물을 흘렸으며, 이 때문에 의리를 사모하고 덕을 좋아하는 마음이 가인(家人)과 부유(婦孺)들까지 교화(敎化)시켰다고 하였습니다. 선정이 북방의 배소(配所)에서 남쪽으로 옮길 때 친구들은 두려운 나머지 움추린 채 감히 묻지도 못했는데, 노고를 탄식하고 고통을 안타깝게 여기는 말이 조가석의 규문(閨門) 안에서 나와 마침내 종들까지 흐느껴 울게 하였고, 의복을 부쳐 보냄에 이르러서는 선정이 비록 물품을 사절하고 받는 데에 근신(謹愼)했으나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 입고 사양하지 않았으니, 【송시열이 남쪽으로 배소(配所)를 옮길 때 조가석이 수령(守令)으로 봉직(奉職)하고 있던 고을을 지나게 되었는데, 마침 조가석은 없었고, 그 처(妻)가 의복을 지어 보내니, 송시열이 그 뜻에 감복하여 사양하지 않고 받았다.】  이로 보건대, 그 모열한 바는 단지 정사년의 한 장의 상소에만 그칠 뿐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비록 저하의 명철(明哲)하심으로도 드디어 그 말에 말려듦을 면치 못하시어 신을 무망(誣罔)하다고 책망하셨으니, 비록 즉시 고쳐 내리셨다 하더라도 신은 위축되어 진실로 상서(上書)에 대한 답을 깎고 고쳤다 하여 감히 스스로 편안할 수가 없으며, 도리어 개연스러워 한탄함이 있습니다. 당초 신의 상서에 대한 비답(批答)에서 논한 바가 옳다 하여 특별히 양사(兩司)의 청(請)에 의거하도록 하교(下敎)하시었는데, 문득 고쳐 내리고 그 유음(兪音)을 거두어 잠깐 사이에 종위(從違)316)  가 갑자기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신을 그르다고 하시지 않으셨는데, 이제 조태억의 글이 들어간 뒤 갑자기 신을 무망(誣罔)이란 죄과(罪科)에 돌리셨습니다. 인군(人君)이 하는 말은 일언 반구라도 매우 중대한 데에 관계되니, 반드시 미처 받아들이기 전에 신중히 살펴 말을 글로 발표할 때 후회하거나 인색함이 없도록 한 후에야 집덕(執德)317)  함이 공고해질 수 있고, 건극(建極)318)  에 치우침이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 일은 이미 대조(大朝)319)  께서 흔쾌하게 바로잡아 저하께 계모(計謨)를 끼쳐 주신 것으로, 사정(邪正)과 숙특(淑慝)320)  의 구분이 음양(陰陽)과 주야(晝夜)의 나뉨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미 허락했다가 도로 정침하고 처음에는 받아들이셨다가 끝에 가서는 배척하시니, 사령(辭令)의 어긋남과 청문(聽聞)의 의혹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조태억의 서장이 오로지 공정하지 못한 데에서 나왔으니, 그대는 혐의할 것이 없다."
하였다.

 

7월 8일 기묘

조도빈(趙道彬)을 동지 정사(冬至正使)로 삼았다. 대개 권성(權𢜫)이 연전에 사신(使臣)으로서 일을 그르쳤다 하여 극력 사직(辭職)하여 체차(遞差)되었으므로, 조도빈으로 대신하게 한 것이다. 김덕기(金德基)를 행 도승지(行都承旨)로 삼았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7월 9일 경진

정원(政院)에서 말하기를,
"오늘이 바로 처서(處暑)이므로, 마땅히 내일부터 상참(常參)을 취품(取稟)해야 할 것이나, 지금 늦더위가 그래도 심하니, 청컨대 서늘해질 때까지 조금 기다리도록 하소서."
하니, 세자가 허락하였다.

 

7월 10일 신사

태학 유생(太學儒生)들이 권당(捲堂)하자, 세자가 본관(本館)의 당상(堂上)에게 들어가도록 권하라고 명하였다. 지난해 태학 유생들이 장차 종사(從祀)에 관한 소를 올리려고 하던 차에 정택하(鄭宅河)가 말을 타고 소청(疏廳)321)   앞으로 지나갔으므로, 서로 싸우게 되었다. 유생의 무리들이 권당의 소회(所懷) 가운데 정택하를 헐뜯는 말을 많이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정택하가 사직소(辭職疏)에 지난해의 일을 추후로 제기하여 도리어 반유(泮儒)를 헐뜯으니, 반유의 무리들이 마침내 다시 권당하고 소회를 써서 올리기를,
"지난해 겨울 태학에서 선정(先正)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는 일로써 바야흐로 진소(陳疏)하고자 하여 향문(香門) 밖에 소청(疏廳)을 베풀었습니다. 그때 정택하는 사문(斯文)에 죄를 진 사람으로 대사(大事)를 방해하려는 계책을 품고 반촌(泮村)에 출몰했습니다. 그래서 고의로 일을 일으키고자 말을 타고 별청(別廳) 앞에서 함부로 달렸으니, 이는 진실로 이전에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별청의 유생들이 겸종(傔從)을 뒤쫓아 붙잡자, 정택하는 도리어 노하여 길거리에서 날뛰며 채찍을 거꾸로 잡고 반례(泮隷)를 마구 때렸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간 후 하인들을 많이 보내어 성묘(聖廟)의 재사(齋舍) 안에서 수노(首奴)를 추포(推捕)하였는데, 이것도 3백 년 동안 없었던 해괴한 일이었습니다. 신 등이 통완(痛惋)을 금할 수 없어 권당(捲堂)의 소회에 전말(顚末)을 대략 진달하였는데, 지금 정택하는 자기의 악행(惡行)을 가리고자 도리어 신 등을 글 속에서 무함하며 장황하게 말을 지어내어 천청(天聽)을 현혹시켰으니, 하나는 ‘소회를 빙자하여 한없이 추욕하였다.’는 것이고, 하나는 ‘다른 말을 집어넣어 그 아비를 침범하였다.’고 한 것입니다. 아! 그때의 소회는 곧 전말을 거론한 것이었으니, 어찌 추욕하였다고 하겠습니까? 정택하의 아비 정식(鄭湜)은 여러 해 동안 반궁(泮宮)에 있었으니 재체(齋體)를 잘 알 것이고, 정택하 또한 일찍이 하재(下齋)에 몸을 둔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해괴한 일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부자(父子)를 언급했던 것은 진실로 그 까닭이 있었으니, 또한 어떻게 다른 말을 집어넣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글에 이른바 이 무리라고 한 것은 그 아비의 옛날 동반(同伴)하던 집우(執友)322)  들입니다. 그가 어떻게 감히 이처럼 거리낌없이 낭자하게 욕을 할 수 있단 것입니까?"
하였다. 세자가 거듭 권유하게 하니, 유생들이 마침내 재(齋)에 도로 들어갔다.

 

7월 11일 임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경강(京江)의 백성 김세만(金世萬)에게 절충 장군(折衝將軍)의 품계(品階)를 주었다. 김세만은 경도(京都)의 서강(西江)에 사는데, 장사를 위해 쌀 1백여 석(石)을 사서 배에 싣고 황해도(黃海道) 용매진(龍媒鎭)에 이르렀을 때 배가 뒤집혀 거의 물에 빠져 죽을 뻔하였는데, 다른 사람에 의해 구조되었다. 때마침 흉년이 들어 본진(本鎭)에서 바야흐로 진휼(賑恤)하고 있었는데, 곡식을 잇대지 못하여 장차 먼 곳에서 사려고 하던 참이었다. 김세만이 말하기를,
"내가 만약 물에 빠져 죽었다면 가지고 온 쌀은 곧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었을 것인데, 지금 다행히 살아났으니, 이 쌀로 진졸(鎭卒)을 구제하여 하늘이 목숨을 소생시켜 주신 호생지덕(好生之德)에 사례하기를 원합니다."
하고, 드디어 그 쌀을 모두 희사(喜捨)하였다. 진장(鎭將)이 그 값을 돈으로 계산하여 주었지만 또한 받지 않으니, 진장이 의롭게 여겨 감사(監司)에게 보고하였고, 다시 조정(朝廷)에 진달하자, 이 명(命)이 있었던 것이다.

 

7월 12일 계미

금성(金星)이 좌각성(左角星)을 범하였다.

 

이택(李澤)을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이봉익(李鳳翼)을 사간(司諫)으로, 송필항(宋必恒)을 장령(掌令)으로, 황일하(黃一夏)를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로, 이재(李縡)를 부제학(副提學)으로, 김상옥(金相玉)을 교리(校理)로, 김운택(金雲澤)을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삼았다.

 

예조(禮曹)에서 말하기를,
"지난해 흉년으로 인하여 제도(諸道)와 제주(濟州)의 삼명일(三名日)323)  의 방물(方物)을 올가을까지 한정하여 임시로 감해 주었습니다. 이제 가을이 되었고, 막중한 향사(享祀)의 제물(祭物)을 오랫동안 폐지하는 것도 마땅하지 못하니, 청컨대 동지(冬至)부터 구례(舊例)에 의거하여 봉진(封進)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내년 가을까지 한정하여 감면해 주라고 명하였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공사(公事)의 품재(稟裁)가 끝나자, 사서(司書) 이국휴(李國休)가 말하기를,
"시약(侍藥)하며 초민(焦悶)하는 가운데 서연(書筵)을 오랫동안 폐지하셨는데, 앞으로 날씨가 점차 서늘해지고 성상의 환후(患候)에 차도가 있을 때에는 가끔 소대를 거행함이 마땅합니다. 또 비록 내간(內間)에서 한가롭게 계실 때라도 청컨대 서책(書冊)을 가까이 하시어 중도에 공부가 단절되지 않게 하소서."
하니, 세자가 말하기를,
"계달(啓達)한 바가 옳으니, 마땅히 유의(留意)하겠다."
하였다.

 

7월 13일 갑신

윤헌주(尹憲柱)를 행 도승지(行都承旨)로, 김재로(金在魯)를 승지로, 조명겸(趙鳴謙)을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승지(承旨)가 동궁에 입대(入對)하였다.

 

7월 14일 을유

달무리가 졌는데, 화성(火星)을 둘렀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는데,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 함께 입시(入侍)하였다. 진후(診候)를 마치자, 이건명이 말하기를,
"근년에 흉년으로 인하여 수군(水軍)과 육군(陸軍)의 조련(操鍊)을 해마다 정지하였으니, 일이 자못 미안합니다. 청컨대 올해는 각도(各道)에 분부(分付)하여 설행(設行)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융사(戎事)를 다스림은 큰 정사(政事)인데, 잇따라 정지함은 자못 미안한 데 관계된다. 설행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이건명이 또 말하기를,
"봄 사이에 양전(量田)의 역사를 우선 정지하라는 명(命)이 있었는데, 지금 이미 가을이 되었습니다. 만약 양전을 폐해(弊害)가 있다 하여 폐지해 버린다면 오히려 괜찮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성명(成命)이 있은 지 이제 이미 3년이 되도록 아직 거행하지 않았으니, 국체(國體)가 이로 말미암아 존엄(尊嚴)하지 못하게 되고, 외방(外方)에서는 반드시 더욱 조령(朝令)을 가볍게 여길 것입니다. 10월 이후에 곧 거행하되, 먼저 균전사(均田使)를 차출(差出)해서 양정(量政)을 미리 강구(講究)하게 하는 것이 아마도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이건명이 말하기를,
"당초에는 균전사를 차출하지 않고 단지 균전 당상(均田堂上)과 낭청(郞廳)만 차출하여 당상은 서울에 있고 낭청은 내려 보내게 하였는데, 이제 장차 균전사를 차출할 때 또한 각 낭청을 차출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계미년324)  에는 종사관(從事官)이 있었는가?"
하였다. 이건명이 말하기를,
"종사관을 차출하면 폐단이 있을 듯합니다. 균전사로 하여금 군관(軍官)으로 일찍이 수령(守令)을 거쳐 일에 능숙한 자를 특별히 가려서 데리고 가게 하고, 시급히 적간(摘奸)할 일과 간심(看審)하는 일을 아울러 살펴보게 하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군관을 가려서 데리고 가도록 명하였다. 이건명이 또 말하기를,
"금위영(禁衛營)과 어영청(御營廳) 두 군문(軍門)의 군사들이 입번(入番)을 정지한 지 이미 2년이 되어 경사(京師)의 숙위(宿衛)가 단약(單弱)해졌습니다. 또 두 군문의 입번을 도감(都監)에서 대신 담당하므로 도감군(都監軍)은 번차(番次)가 빈번하여 감당하기 어렵다고 하니, 10월부터 상번(上番)하게 해도 불가함이 없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제조(提調)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신이 맡고 있는 진청(賑廳)의 곡물(穀物)은 본래 13만여 석이었는데, 이미 죄다 각처(各處)로 옮겨 진휼(賑恤)하고, 지금 단지 2만여 석만 남아 있으니, 이것을 가지고 어떻게 충당해 쓸 수 있겠습니까? 외방에 흩어져 있는 것을 수습(收拾)하려고 하였으나, 외방에서는 진청의 곡물에 대해 언제나 갚지 않으려 하여 비록 여러번 재촉하였지만 올려 보내지 않고 있습니다. 청컨대 이후로는 본청(本廳)에서 직접 각 고을의 감색(監色)325)  을 추치(推治)하게 하소서."
하자, 이건명이 말하기를,
"외방의 감색을 경사(京司)로 잡아오는 것은 큰 폐해가 됩니다. 경사뿐만 아니라 비록 순영(巡營)으로 잡아오는 것도 몹시 폐해가 있으므로, 감사(監司)가 감색을 다스리고자 하나 그 폐해를 끼칠 것이 염려스러운 경우 부과(附過)326)  해 두었다가 순력(巡歷)할 때 해당 고을에 이르러 죄를 다스린다고 합니다. 바치지 않은 것이 가장 심한 자는 그 수령(守令)을 논책(論責)하고, 감색은 영문(營門)으로 하여금 추치(推治)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 뜻도 그렇다. 감색을 경사에 잡아오는 것은 폐해가 있으니, 영문으로 하여금 죄를 다스리게 하고, 수령으로서 더욱 심한 자는 논죄(論罪)함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김연(金演)을 도승지(都承旨)로 삼았다. 김덕기(金德基)·윤헌주(尹憲柱)를 서로 잇따라 도승지로 삼았는데, 모두 물정(物情)이 적합하게 여기지 않는다 하여 병을 핑계로 극력 사직(辭職)하자, 체차(遞差)하고 김연으로 이를 대신하게 한 것이다.

 

7월 15일 병술

월식(月食)하였다.

 

황해도(黃海道) 각 고을에 6월 그믐부터 7월 초3일까지 밤낮으로 큰 비가 쏟아져 평지(平地)가 바다를 이루고 홍수(洪水)가 하늘까지 닿았는데, 익사(溺死)한 사람이 2백 17여 명에 이르고 표몰(漂沒)한 인가(人家)가 2천 4백여 호에 이르렀다. 도신(道臣)이 계문(啓聞)하니, 세자가 특별히 휼전(恤典)을 거행하게 하였다. 이 해에 경기(京畿)의 물가 고을과 관동(關東) 일로(一路)에서 모두 수재(水災)를 입었는데, 해서(海西)가 가장 혹심하였다.

 

7월 18일 기축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이징귀(李徵龜)를 도승지(都承旨)로, 홍용조(洪龍祚)를 정언(正言)으로, 이인복(李仁復)을 수찬(修撰)으로, 조관빈(趙觀彬)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이재(李縡)를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이집(李㙫)을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삼았다. 처음에 예조·형조 양조(兩曹)의 참판이 결원(缺員)이었으므로, 전조(銓曹)에서 이미 상당한 품계로 주의(注擬)해 들였다. 임금이 3품으로 의망(擬望)을 더하는 것을 대신(大臣)에게 물어보도록 명하니, 마침내 이재와 이집이 승진하여 탁용(擢用)되었다.

 

7월 19일 경인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7월 20일 신묘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진후(診候)를 마치자,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서원 부부인(西原府夫人)의 병이 오랫동안 낫지 않고 있는데, 약물(藥物)을 잇대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다시 어의(御醫)를 보내어 약(藥)을 가지고 가서 살피도록 명하였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하였다.

 

7월 21일 임진

승지가 동궁에 입대하였다.

 

겸 집의(兼執義) 조언신(趙彦臣)이 【조언신이 바야흐로 서장관(書狀官)이 되었으므로 집의(執義)를 예겸하고 있었다.】  전일에 조상건(趙尙健)이 글을 올려 처치(處置)한 일을 배척한 것 때문에 상서(上書)하여 스스로 변명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김만주(金萬胄)가 시관(試官)으로 의망(擬望)되어 논핵(論劾)받은 것이 연전(年前)에 있었는데, 그후 정유년327)  에 동당(東堂)의 시관(試官)으로 참여하였습니다. 구차하게 탄핵(彈劾)을 견뎌내며 시험을 관장한 것이 염우(廉隅)를 손상시킨 바가 있었다면 마땅히 그때 이러한 논핵이 있었어야 합니다. 정유년 이후 김여(金礪)가 대각(臺閣)에 출입한 적이 한두 번에 그치지 않는데, 어찌하여 그때는 논핵하지 않다가 오늘에야 비로소 논핵하는 것입니까? 이상성(李相成)이 지난해 올린 한 글은 진실로 언관(言官)을 도리어 꾸짖은 것이라 할 수 있으나, 그때 조사한 일이 허투(虛套)로 돌아가지 않았으니, 이상성에게는 조금도 인혐(引嫌)할 만한 것이 없으며, 한 해가 지난 후 시관(試官)에 의망(擬望)되었으니, 또한 어찌 패초(牌招)를 어기고 나아가지 않은 단서가 있겠습니까? 이와 같은 염우(廉隅)를 신은 진실로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김여는 억지로 그 죄를 이루고자 하여 취모 멱자(吹毛覓疵)328)  한 자취가 현저하게 있어 어제는 김만주를 탄핵하고 오늘은 이상성을 탄핵하였습니다.
아! 오늘날 성진령(成震齡)을 도운 자는 많이 현영(顯榮)하게 되었고, 성진령을 배척한 자는 많이 배척당해 버림받았습니다. 이해(利害)가 관계됨에 따라 사람들이 항심(恒心)을 잃고 다투어 성진령 한 사람을 가지고 문득 영화(榮華)를 매개하는 계제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성진령을 배척한 자는 며칠 동안에 서로 잇따라 논핵(論劾)을 받았으니, 이것이 신의 이른바 형세에 따라 논핵을 더함이 공심(公心)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마음 쓰는 것을 비록 슬며시 스스로 숨기고자 하지만 어떻게 명철한 저하(邸下)의 눈을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김여가 조사한 일이 허투로 돌아갔다는 것을 이상성의 죄안(罪案)으로 삼았으나, 금오(金吾)의 의언(議讞)을 지금 안핵(按覈)할 수 있으니, 허투로 돌아갔다는 것이 과연 말이나 되겠습니까? 금오의 의언 가운데 성진선(成晉善)의 일을 논하기를, ‘성하연(成夏衍)이 흉모(凶謨)를 수창(首倡)하였으나 자신은 엄부(嚴父)가 되어 금지하지 못하였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신익성(申翊聖)의 일록(日錄) 가운데 첨(瞻)·찬(纘)  【이이첨(李爾瞻)과 한찬남(韓纘男)이다.】  두 원흉(元凶)과 아울러 열서(列書)하고, 그 아들과 조카가 흉소(凶疏)를 창도(倡導)했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이상성이 말하게 된 까닭입니다.’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성진선이 이미 친히 범한 일이 없으니, 혼조(昏朝)의 청환(淸宦)을 지낸 것과 그 아들이 흉소를 창도한 것을 흉당(凶黨)으로 돌릴 수는 없다.……’ 하였습니다. 이른바 ‘금지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곧 ‘집에 있으면서 몰랐다.’는 뜻을 감히 말한 것이고, 이른바 ‘신익성의 일록에서 두 원흉에 아울러 열서하였다.’는 것은 곧 명확히 증거가 있음을 말한 것이며, 이른바 ‘친히 범한 일이 없으니, 혼조(昏朝)의 청환(淸宦)을 지낸 것과 그 아들이 흉소를 창도한 것을 흉당(凶黨)으로 돌릴 수는 없다.’는 것은 곧 판단하기에 어려운 말입니다. 위의 일절에서는 그 마음을 의심하였고, 말단(末端)의 일절에서는 그 자취를 논하여 우선 의심스럽고 명확하지 못한 데에 두었던 것입니다. 대저 금오(金吾)에서 의언(議讞)한 후로 나라 사람들이 모두 성진령의 허물은 예전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성진령을 돕는 자가 진실로 한 마디 말로 변파(辨破)해서 성진령에게 허물이 없음을 밝히고 금오의 의언을 배척한다면 무릇 누가 불가하다고 말하겠습니까만, 단지 사사롭게 좋아한 마음을 힘써 부식(扶植)하는 바탕으로 삼고 억지로 여러 사람의 입을 막고 이목(耳目)을 엄폐(掩蔽)하고자 하였습니다. 신이 이른바 ‘억지로 허투로 돌렸으니, 더욱 유려(謬戾)하다.’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조상건의 글 가운데 앞장섰다는 등의 말은 진실로 한 번 웃을 거리도 못 됩니다.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대각(臺閣)에서 승패(承牌)하여 처치(處置)한 것은 앞장선 것이 되고, 경악(經幄)에서 갑자기 치고 공격한 것은 앞장선 것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까?"
하니, 세자가 말하기를,
"대간(臺諫)의 말이 타당하지 못한데 어찌 깊이 혐의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7월 22일 계사

도목정(都目政)을 거행하였는데, 임금의 환후(患候)가 미령(未寧)하다 하여 3일로 나누어 마쳤다. 이병상(李秉常)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유숭(兪崇)을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최규서(崔奎瑞)를 홍문 제학(弘文提學)으로 삼았다.

 

7월 23일 갑오

도목정(都目政)을 거행하였다. 조관빈(趙觀彬)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이재(李縡)를 부제학(副提學)으로, 홍계적(洪啓迪)을 승지(承旨)로, 황귀하(黃龜河)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삼았다.

 

7월 24일 을미

도목정(都目政)을 거행하여 홍계적(洪啓迪)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정도복(丁道復)을 승지(承旨)로 삼고, 단종조(端宗朝)의 구신(舊臣) 김종서(金宗瑞)의 후예(後裔)인 김익량(金翼亮)을 서록(敍錄)하여 장녕전 참봉(長寧殿參奉)으로 삼았다.

 

헌부(憲府)에서 【장령(掌令) 남세진(南世珍)이다.】  앞서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일전에 김여(金礪)가 논한 두 신하의 일은 한결같이 공론(公論)을 따라 사실에 의거하여 논열(論列)하였으니, 이는 대개 염치(廉恥)를 권면(勸勉)한 뜻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인피(引避)하기에 이르러 조언신(趙彦臣)은 편벽되게 자기의 견해를 주장하여 억지로 낙과(落科)에 두었으니, 그 조사(措辭)는 곧 탄핵하는 글과 같았습니다. 시비(是非)가 공정하지 못하고 처치(處置)의 마땅하지 못함이 이보다 심할 수 없었으므로, 여정(輿情)의 울분이 갈수록 더욱 격렬해지고 있으니, 조언신의 도리로는 오로지 몸을 움추린 채 물의(物議)를 기다리고 있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도리어 한 글을 올렸으니, 피사(詖辭)와 둔사(遁辭)가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시비를 돌아보지 않은 채 오로지 분박(噴薄)을 일삼고 있으니, 청조(淸朝)의 시종(侍從)하는 반열에 이러한 아름답지 못한 풍습이 있을 줄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청컨대 파직(罷職)시키소서."
하였으나, 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조언신이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사폐(辭陛)할 날이 겨우 며칠밖에 남지 않았는데, 이로 인하여 사신(使臣) 행차의 시기를 조금 늦추었다.

 

7월 25일 병신

비국(備局)에서 이재(李縡)를 경상도 균전사(慶尙道均田使)로, 김재로(金在魯)를 전라도 균전사로, 윤헌주(尹憲柱)를 충청도 균전사로 삼았다.

 

세자(世子)가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접(引接)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 말하기를,
"작년에 신이 차자(箚子)를 올려 여역(癘疫)으로 온 가족이 모두 죽은 경우 신역(身役)을 감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어린아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의성 현령(義城縣令) 이진망(李眞望)이 상소(上疏)하여 어린아이의 신역(身役)까지 아울러 감해 주기를 청하였으므로, 영남(嶺南) 한 도는 일체 탕감(蕩減)하게 하였는데, 이번에 경기 감사(京畿監司) 역시 이것을 장청(狀請)하였습니다. 이미 영남을 허락하였으니, 다른 도를 다르게 함은 마땅하지 못하니, 제도(諸道)를 일체로 탕척함이 무방(無妨)할 듯합니다."
하니, 세자가 말하기를,
"일체로 탕척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이건명이 또 말하기를,
"옥당(玉堂)·이조(吏曹) 및 대간(臺諫)은 외임(外任)이 될 수 없으므로 걸군(乞郡)329)  을 허락하였으나, 춘방(春坊)은 으레 병조(兵曹)의 낭관(郞官)과 시정(寺正)330)   및 외임(外任)의 직책에 주의(注擬)하므로 걸군의 규례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춘방에서 걸군하는 자가 ‘듣건대 일찍이 한 번 전례가 있었다.’고 한다 하나, 격례(格例)가 잘못된 것입니다. 이미 외임을 제수(除授)한 자는 비록 환수(還收)할 수 없으나, 이후로 춘방의 걸군하는 상소(上疏)는 봉입(捧入)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세자가 정원(政院)에 신칙(申飭)하게 하였다. 행 공조 판서(行公曹判書)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국가(國家)에서 법(法)을 적용함에 있어서 율문(律文)을 인용한 경우는 사유(赦宥)를 만나면 유지(宥旨) 전의 일로 하여 논하지 않음이 진실로 마땅하나, 사목(事目)에 실려 있는 경우에 이르러서는 유지의 전후를 의논할 수가 없습니다. 환상(還上)을 허록(虛錄)한 것으로써 말하건대, 본죄(本罪)가 율문(律文)에 있는 경우는 진실로 유지 이전의 일로 여겨 탕척(蕩滌)함이 마땅하나, 금고(禁錮)의 벌은 바로 사목이고 율문이 아니므로 거론함은 마땅하지 아니합니다. 죽산 부사(竹山府使) 유윤흥(柳胤興)은 남한(南漢)과 다른 곳에 이전(移轉)한 많은 수량의 곡식을 허록하였는데, 유지 이전의 일로써 방면(放免)된 후 금고(禁錮)의 법을 시행하지 아니하여 마침내 무고(無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이외에도 혹 이와 같은 부류가 있다고 하니, 금부(禁府)로 하여금 이조(吏曹)에 초록(抄錄)해 보내어 아울러 금고의 법을 시행하는 일은 그만둘 수가 없을 듯합니다."
하자, 이건명이 말하기를,
"사령(赦令)이 행해지면 비록 중죄(重罪)라 하더라도 용서하여 면제받을 수 있어 고신(告身)331)  을 빼앗고 도배(徒配)한 부류도 1, 2년이 지나지 않아 모두 거두어 서용(敍用)하는데, 유독 금고한 자는 10년이 되어도 거두어 서용될 수 없으니, 그 벌이 너무 무거워서 사유(赦宥)를 적용하는 뜻이 아주 없습니다. 갑자기 이와 같이 정식(定式)하는 것은 중난(重難)한 데 관계되는 듯합니다."
하니, 세자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강화 유수(江華留守) 심택현(沈宅賢)이 말하기를,
"이전부터 비국 당상(備局堂上) 가운데 따로 강도(江都)를 주관하는 당상이 있어서 모든 일을 강화 유수와 서로 의논하여 수응(酬應)하였으므로 일이 많이 편리하였는데, 근래에는 오랫동안 차출(差出)하지 않았습니다. 바라건대, 묘당으로 하여금 반드시 일찍이 유수의 직무(職務)를 거친 사람을 특별히 차출하여 함께 일을 처리해 가게 하소서."
하니, 세자가 옳게 여겼다. 장령(掌令) 남세진(南世珍)·헌납(獻納) 조명겸(趙鳴謙)이 앞서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세자가 모두 따르지 않았다. 이건명(李健命)이 말하기를,
"조언신(趙彦臣)의 일은 지금 비록 따르지 않으신다 하더라도 형세로 보아 길을 떠나기 어렵겠습니다. 방물(方物)을 싸서 봉하는 일은 내일 있고 배표(拜表)332)  는 28일로 되어 있는데, 장차 어떻게 결말(結末)이 날지 알지 못하겠지만, 조언신(趙彦臣)은 그대로 갈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조언신의 서장관(書狀官) 직임을 우선 개차(改差)하고 길 떠나는 시기를 조금 늦추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세자가 옳게 여겼다.

 

7월 26일 정유

미시(未時)에 태백성(太白星)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는데, 그후 여러번 나타났다.

 

윤석래(尹錫來)를 사간(司諫)으로, 신절(申晢)을 정언(正言)으로, 김운택(金雲澤)을 응교(應敎)로 삼았다.

 

《선원계보기략증보(璿源系譜紀略增補)》가 이루어졌다. 종부시 제조(宗簿寺提調) 이하가 배종(陪從)하고 의장(儀仗)과 법악(法樂)이 앞에서 인도하여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올리니, 임금이 종척(宗戚)과 여러 신하들에게 반사(頒賜)하도록 명하였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7월 27일 무술

예조(禮曹)에서 사은사(謝恩使)의 배표(拜表)하는 길일(吉日)을 8월 11일로 고쳐 가려서 정하여 들이니, 세자가 하령(下令)하기를,
"11일은 너무 머니, 10일 이전으로 가려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또 하교(下敎)하기를,
"봄 무렵에 부사(副使) 유명홍(兪命弘)이 도승지(都承旨)로서 입진(入診)하러 입시(入侍)하였을 때 언제쯤 배표하는 것이 마땅한지 물었더니, 8월 무렵으로 정하여 행한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칙사(勅使)는 2월에 나왔는데, 사은사가 8월에 길을 떠나는 것은 너무 멀다. 이전에는 사은사가 5월에 배표하여 비록 장마가 멀지 않은 때라 하더라도 또한 능히 들어갔으므로, 이번에는 7월 초로 택일(擇日)하도록 하교(下敎)하였는데, 처음에는 초4일로 택일하였다가 뜻밖에 또 그믐께로 물려 정하였다. 그리고 헌부(憲府)의 옳지 못한 새로운 계사(啓辭) 때문에 서장관(書狀官)을 개체(改遞)하고 길을 떠날 시기를 다시 늦추어 과연 부사가 당초에 하교한 뜻이 아주 없어졌으니, 사체(事體)에 있어서 진실로 매우 미안하다. 근래에 사신 행차는 배표(拜表)한 후 강을 건너는 기일도 또한 옛 규례(規例)가 없어 점차 질질 끌게 되고, 여러 날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강을 건너고 있다. 이번의 사신의 행차가 만약 또 지체한다면 장차 9월 초에야 비로소 강을 건너고 10월 초에야 마땅히 북경(北京)에 도착하게 될 것인데, 칙사(勅使)가 입경(入京)한 날부터 계산해 보면 아홉 달이 되니, 일이 이와 같아서는 마땅하지 못하다. 이번에는 지체하지 말고 반드시 9월에 북경에 들어가는 일을 각별히 신칙(申飭)하도록 하라."
하였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7월 28일 기해

간원(諫院)에서 앞서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양전(量田)하는 일은 지극히 중대하고도 어려운 까닭에 조정(朝廷)에서 방백(方伯)에게 위임하지 않고 반드시 균전사(均田使)를 차출(差出)하니, 비단 부안(簿案)을 관검(管檢)할 뿐만 아니라, 대개 그 성망(聲望)을 빌어 한 도(道)를 탄압(彈壓)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호서 균전사(湖西均田使) 윤헌주(尹憲柱)는 지망(地望)이 본래 비천(卑淺)하고 또 술이 취해 저지른 과실이 있으며, 일찍이 호남(湖南)의 관찰사가 되었을 적에는 위의(威儀)를 잃고 비웃음을 산 일이 많았습니다. 결단코 이 직임을 맡겨서 열읍(列邑)에서 업신여김을 당할 수는 없으니, 청컨대 개차(改差)하소서."
하였으나, 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이날 밤 파루(罷漏) 때 임금의 환후(患候)가 갑자기 도져 호흡이 고르지 못하므로, 약방(藥房)에서 흥정당(興政堂)에 입진(入診)하니, 임금이 종모(鬃帽)를 쓰고, 작은 옷을 입고 이불을 두르고 베개에 기댄 채 침상(寢床) 위에 앉아 있었다.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나아가 엎드려 문후(問候)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밤중에 잠이 들어 겨우 눈을 붙이자마자 어떤 물건이 꿈에 나타났는데, 보기에 지극히 해이(駭異)하였다. 그 때문에 깜짝 놀라 깨어났는데, 이처럼 호흡이 고르지 못하여 진정시킬 수가 없다."
하였다. 이이명이 말하기를,
"의법(醫法)에 꿈 때문에 병을 얻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본 것이 두려운 일이었습니까? 추악(醜惡)한 일이었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두려운 일이었다."
하였다. 여러 의관(醫官)들이 진후(診候)를 마치고 안신환(安神丸)을 조제(調劑)하여 바치니,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러가도록 명하였는데, 이튿날 비로소 진정되었다.

 

7월 29일 경자

간원(諫院)에서 앞서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니, 세자가 단지 윤헌주(尹憲柱)의 일만 따랐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경기(京畿)에 홍수가 나서 인가(人家) 7백여 호가 표몰(漂沒)하고, 강원도(江原道)에서는 6백여 호가 표몰하였는데, 도신(道臣)이 계문(啓聞)하였다.

 

경사(京師)와 팔로(八路)에서 여역(癘疫)이 이달부터 조금 줄었으나, 그래도 여전히 지식(止熄)되지는 않았으며, 곧바로 연말(年末)이 되어서야 완전히 없어졌다. 4월 이후 제도(諸道)에서 사망한 백성이 7천 4백 명이었는데, 사대부(士大夫) 가운데 장보(狀報)에 들지 않은 자와 기교(畿郊) 및 도성(都城)의 수는 또 갑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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