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신축
사직(司直) 이만성(李晩成)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삼았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8월 2일 임인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하였다. 우부승지(右副承旨)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금부(禁府)의 죄인 유취장(柳就章)은 취초(取招)한 후 해부(該府)에서 율(律)에 의거하여 감죄(勘罪)함이 마땅한데, 사유(赦宥)한 후 6개월에서 겨우 하루가 지났기에 휘재(徽裁)333) 를 청했더니, 어제 논하지 말라고 판하(判下)하셨습니다. 비록 하루라도 이미 기한이 지났다면 곧바로 조율(照律)을 청함이 마땅하며, 만약 기한을 넘긴 것이 아주 가깝다 하여 기한 안과 똑같이 보고 곧 분간(分揀)함이 있다면 뒷날의 폐단에 크게 관계됩니다. 어제 입대(入對)했던 승지 조영복(趙榮福)은 환급(還給)할 수 없다 하여 대수롭지 않게 여겨 가지고 들어갔다가 잠시 후에 글을 올려 인책(引責)하였습니다. 원서(原書)는 비록 이미 퇴각(退却)했다 하더라도 금오(金吾)의 해당 당상(堂上)은 자세히 살피지 못한 과실을 면하기 어려우니, 추고(推考)하여 경책(警責)하소서. 그리고 판부(判付) 가운데 조율(照律) 두 자는 고쳐서 내리시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세자가 말하기를,
"금오 당상을 추고하고, 판부에다 고쳐 부표(付標)334) 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8월 3일 계묘
헌부(憲府)에서 앞서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기성(騎省)335) 은 바로 청선(淸選)의 계제(階梯)이므로 사람마다 함부로 제수(除授)할 수 없는데, 새로 제수받은 좌랑(佐郞) 문덕린(文德麟)은 지망(地望)이 본래 얕으니, 청컨대 개차(改差)하소서. 사천 현감(泗川縣監) 하필도(河必圖)는 본래는 비천(卑賤)한 무리인데, 외람되게 사로(仕路)에 통하였습니다. 사천은 바로 그가 사는 곳의 이웃 고을이고, 관속(官屬)과 이례(吏隷)는 대부분 제우(儕友)와 족당(族黨)으로서 체통을 이룰 수 없으니,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
하였으나, 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형조(刑曹)에서 함일해(咸一海)·양익도(梁益燾) 등을 가두어 추문(推問)하자, 함일해 등이 공초(供招)하기를,
"인장리(仁章里)의 광중(壙中)에 진실로 불안(不安)한 기운이 있었는데, 호상(護喪)하는 중사(中使)가 사실대로 계문(啓聞)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이에 금부(禁府)에서 그때의 중사인 김진문(金振文)과 다른 지사(地師)들을 나추(拿推)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감률(勘律)하였다. 금부에서 아뢰기를,
"내관(內官) 김진문은 자신이 봉명(奉命)한 사람이었으니, 광중(壙中)의 모든 일에 대해 다소(多少)와 경중(輕重)을 물론(勿論)하고 일일이 장달(狀達)했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위 아래 틈에 물방울이 뜨고 물이 나왔다는 등의 말을 해가 오래 된 땅 안에는 으레 있는 일이라고 핑계대어 장달 가운데에 거론하지 않았고, 이제 와서 거듭 추문하자 비로소 지만(遲晩)336) 하였다고 공초(供招)를 바쳤으니, 전후의 소위(所爲)가 놀랄 만합니다. 지사(地師) 조중렴(趙重廉)·박지만(朴枝萬)·유원창(柳元昌) 등은 틈에 물방울이 떴다는 등의 말을 두루 거론하지 않았으니, 또한 자세히 살피지 못한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청컨대 김진문은 장(杖) 80, 도(徒) 2년에 처하고, 조중렴·박지만은 각각 장 80에 고신(告身)을 회수(回收)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형조(刑曹)에서 또한 함일해 등의 일을 아뢰기를,
"땅 속의 불안(不安)함은 비록 모두 함일해의 말과 같지는 않았으나, 또한 이를 전혀 어긋난 것으로 돌릴 수는 없으니, 이로써 논죄(論罪)함은 과중한 듯합니다. 그러나 그는 향곡(鄕曲)의 무식하고 글을 모르는 사람으로서 분명한 지식이나 확실한 견해가 없음에도 감히 의논할 수 없는 바를 망령되게 논하여 성상께서 듣게 되셨으니, 이 길을 한 번 터놓으면 뒷날의 폐단을 막기 어려울 것입니다. 청컨대 참작하여 정죄(定罪)하소서. 양익도는 제멋대로 공초를 바쳐 뜻이 매우 흉참(凶慘)하였으니, 율에 의거하여 과단(科斷)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정관(加定官)337) 정탁(鄭倬)은 수본(手本) 가운데 실상을 모두 숨겨 호상하는 중사 김진문과 죄가 같으니, 청컨대 일체로 논죄하소서. 함일해에게 진달하는 글을 지어준 사람은 함일해의 본죄(本罪)를 종경(從輕)으로 논하였으니, 끝까지 추문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함일해의 일을 대신(大臣)들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근래에 풍수설(風水說)이 세도(世道)의 큰 해(害)가 되고 있는데, 국가에서 또 따라서 동요한다면, 원릉(園陵)의 중지(重地)를 장차 망령되게 의논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함일해의 정상은 진실로 헤아리기 지극히 어려우니, 비록 전혀 어긋난 것으로 돌릴 수는 없다 하더라도 말감(末減)338) 하여 뒷날의 무궁(無窮)한 폐단을 열 수 없을 듯합니다."
하였는데, 여러 대신들의 의논도 대략 같았다.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영상(領相)의 의논이 바로 나의 뜻에 맞으니, 종중 감처(從重勘處)하도록 하라."
하였다. 형조에서 마침내 양익도는 장 1백, 유(流) 3천 리로 감단(勘斷)하고, 함일해는 장 1백에 도배(徒配)로 감률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8월 4일 갑진
유성(流星)이 실성(室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하였다.
비국(備局)에서 홍석보(洪錫輔)를 충청도 균전사(忠淸道均田使)로 삼았다.
승지가 동궁(東宮)에 입대하였다.
세자가 하령(下令)하기를,
"이번의 대정(大政)에서 【도목정(都目政)을 으레 일컫는 것이다.】 황보인(皇甫仁)과 김종서(金宗瑞)의 후손(後孫)을 모두 일망(一望)339) 에 주의(注擬)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황보인의 후손만 유독 거두어 임용하지 않았으니, 훗날 과궐(窠闕)340) 에 의망(擬望)하는 일을 전조(銓曹)에 분부하도록 하라."
하였다.
오랫동안 비가 내려 농작물을 해친 까닭에 사문(四門)에서 영제(禜祭)341) 를 베풀었는데, 3일 만에 그쳤다.
8월 6일 병오
김상원(金相元)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하였다.
8월 8일 무신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하였다.
8월 10일 경술
윤헌주(尹憲柱)를 행 도승지(行都承旨)로, 이만성(李晩成)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삼았다.
세자가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접(引接)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 말하기를,
"동래 부사(東萊府使) 서명연(徐命淵)이 장계(狀啓)하기를, ‘왜선(倭船) 두 척이 표류(漂流)하여 우리 경계(境界)에 이르렀는데, 실었던 화물(貨物)이 모두 물 속에 빠졌습니다.’ 하였습니다. 격왜(格倭)도 【격(格)이란 뱃사공[水手]을 지칭하는 것이다.】 익사(溺死)하여 지금 바야흐로 건져 내고 있고, 가라앉은 화물 또한 건져 내어야 할 것인데, 우리 나라 사람이 표류하여 일본(日本)에 이르면 저들은 마음을 다해 구제하여 의복과 양식까지 보내주었으니, 우리 나라에서도 마땅히 고휼(顧恤)하는 일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이는 전례(前例)가 없는 일이나, 우리 나라 백성이 저들 나라에 표류하여 도착하였을 경우에 저들이 이미 도와서 구조하였으니, 지금 표류한 왜인을 우리 나라에서도 구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옷과 양식을 넉넉히 주어 왜관(倭館)에 있는 왜인으로 하여금 거느리고 그 나라로 보내게 하되, 서계(書契)342) 를 만들어 주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였는데, 행 예조 판서(行禮曹判書)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서계는 예조에서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동래 부사로 하여금 만들어 보내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세자가 옳게 여겼다. 이건명이 또 말하기를,
"연분(年分)343) 이 멀지 않으니, 마땅히 경차관(敬差官)을 차출(差出)해 보내야 할 것이고, 삼남(三南)의 양정(量政)을 장차 시행하려면 균전사를 오래지 않아 내려 보내야 마땅합니다. 또 경차관을 보내면 폐해(弊害)를 끼칠 것이 염려스러우니, 올해에는 경차관을 차출하지 말고 단지 감사(監司)와 도사(都事)로 하여금 마감(磨勘)하게 하는 것이 비용(費用)을 줄이는 방도가 될 듯합니다."
하니, 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민진후가 말하기를,
"무과(武科)의 신출신(新出身)을 서북(西北)에 보내어 방수(防水)하게 하는 것은 무사로 하여금 변방의 일을 익혀서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광주(廣州) 등지(等地)는 비록 보장(保障)344) 의 중대한 땅이라 하나, 서울과 지척에 있는데도 산성(山城)이라는 핑계로 광주 출신을 광주에 보내니, 너무나도 의의(意義)가 없습니다. 이후로는 다른 예에 의거하여 서북에 보내어 방수하게 하되, 혹 부방(赴防)을 면제하고 쌀을 바칠 때가 있으면, 광주에서 가져다 쓰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그리고 광주 출신 외에 강화 출신 또한 강화에 보낸다고 하니, 마땅히 일체로 서북에 보내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병조 판서(兵曹判書) 조도빈(趙道彬) 또한 옳게 여기니, 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조도빈이 말하기를,
"도둑을 잡는 사목(事目)이 전후에 여러번 바뀌었다가 마침내 5명 이상을 잡은 자는 논상(論賞)한다는 것으로 정탈(定奪)하였습니다. 그런데 상주 토포사(尙州討捕使) 노흡(盧恰)이 장계(狀啓)한 가운데 도적(盜賊)이 사람을 죽인 것이 5, 6명에 이르렀다고 하였으니, 이와 같은 극적(劇賊)을 잡은 경우에는 비록 5명이 차지 않았다 하더라도 특별히 시상(施賞)함이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이건명이 말하기를,
"도둑을 잡은 사람을 논상하는 법은 전후에 여러번 고쳤는데, 지금 이로 인하여 또 변개(變改)한다면 장차 정식(定式)이 점차 바뀌게 될 것이니, 일이 매우 어렵습니다."
하고, 민진후가 또한 어렵게 여기니, 세자가 입시(入侍)하지 않은 대신(大臣)에게 묻게 하였다. 이건명이 또 말하기를,
"황해 감사(黃海監司) 이덕영(李德英)이 장계(狀啓)하기를, ‘옹진(瓮津)은 군병(軍兵)의 도고(逃故)가 1천여 명에 이르는데, 수사(水使)가 장문(狀聞)하여 변통(變通)하기를 청한 것으로 인하여 조정에서 해주(海州)와 반씩 나누어 충정(充定)하라는 뜻으로 분부하였으나, 절반의 액수(額數)를 모두 해주에 붙이는 것은 진실로 과중(過重)한 데에 관계됩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1백 명은 해주로 하여금 충정하게 하고, 그 나머지는 도내(道內)의 각 고을에 분배(分排)하는 것이 편리할 듯합니다."
하니, 세자가 옳게 여겼다. 대사간(大司諫) 황귀하(黃龜河)가 앞서의 계사를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온성 부사(穩城府使) 박상제(朴尙悌)는 이력(履歷)이 한낱 변장(邊將)에 지나지 않는데, 갑자기 큰 부(府)의 부사를 제수하시니, 정격(政格)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청컨대 개차(改差)하소서."
하였으나, 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집의(執義) 박성로(朴聖輅)가 앞서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박성로가 말하기를,
"신이 조언신(趙彦臣)의 일에 대하여 다시 소회(所懷)를 진달(陳達)할 것을 청합니다. 성진령(成震齡)이 흉당(凶黨)이라는 말은 이상성(李相成)에게서 나왔는데, 성진령이 격고(擊鼓)하여 억울함을 호소하자 두 사람이 취리(就理)345) 하여 대변(對辨)하였습니다. 그때 금오(金吾)에서 언의(讞議)한 내용이 명백하지 못하였으나, 당초에 유복명(柳復明)이 이상성을 논핵(論劾)하여 파직(罷職)시켰으니, 조정의 시비(是非)를 이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조언신이 금오에서 한 적이 없는 말을 연역(演繹)하여 반드시 흉당(凶黨)으로 귀착시키고자 하니, 어찌 이와 같은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대신(臺臣)과 여러 신하들이 지금 바야흐로 입시(入侍)하였으니, 반드시 순문(詢問)하시어 한 번 결정한 후에야 분쟁(紛爭)을 종식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자, 이건명이 말하기를,
"이 일은 이미 금오에서 의언(議讞)하였는데, 이제 무슨 거듭 순문할 일이 있겠습니까? 대신(臺臣)이 곧바로 대신(大臣)에게 순문하기를 청한 것은 사체(事體)에 마땅하지 아니합니다."
하였는데, 세자가 아울러 대답하지 않았다.
8월 11일 신해
비국(備局)에서 민진원(閔鎭遠)을 강화 구관 당상(江華句管堂上)으로 삼았다.
정언(正言) 정택하(鄭宅河)가 향리(鄕里)에서 오면서 가마를 탔다는 일로 인피(引避)하자, 정원(政院)에서 곧바로 파직(罷職)하라는 전지(傳旨)를 받들었으니, 대개 이 해 5월에 김창집(金昌集)의 차자(箚子)를 인용하여 새로 정식(定式)한 것이었으며, 이후로 매번 규례로 삼았다.
헌부(憲府)에서 앞서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곤양 군수(昆陽郡守) 허기(許夔)는 사람됨이 우둔하고 패려(悖戾)하여 처사(處事)가 전도되고 망령되었으니, 바야흐로 이처럼 양정(量政)을 시행하는 날을 당하여 군수(郡守)의 직임(職任)을 위임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
하였으나, 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8월 13일 계축
강원도(江原道)에서 민가(民家) 1백 수십 호가 표몰(漂沒)되었는데, 도신(道臣)이 계문(啓聞)하였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진후(診候)를 마치자,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말하기를,
"성상의 환후(患候)가 요사이 점차 전만 못하니, 청컨대 약원(藥院)을 주원(廚院)346) 으로 이설(移設)하여 가까운 곳에서 승후(承候)하는 바탕으로 삼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하루 이틀쯤 살펴보고 하도록 명하였다. 제조(提調)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지난해에는 균전사(均田使)를 보내지 않고 따로 양전청(量田廳)을 설치하였으므로 신이 또한 그 당상(堂上)이 되었는데, 지금은 이미 균전사를 차출(差出)하였습니다. 균전사가 내려갔으니 큰 일은 자연히 묘당(廟堂)에 곧장 보고할 수 있고, 작은 일은 호조(戶曹)와 왕복할 따름입니다. 따로 경청(京廳)을 설치함은 무익(無益)하니 양전청(量田廳)은 혁파(革罷)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고, 민진원이 또 말하기를,
"신이 진청(賑廳)을 주관한 지 이미 반 년이 되었는데, 국가에서 잇따라 흉년을 만나 용도(用度)는 몹시 넓으나 1석(石)의 곡식도 들어올 규정(規程)이 없습니다. 월과 화약(月課火藥)을 본청(本廳)에 전속(專屬)시키면 매년 남는 것이 3천여 석이 될 것인데, 대신(大臣)이 군문(軍門)에 이송(移送)시켰습니다. 그래서 신이 또 건지산(乾支山)을 본청에 소속시키기를 청하였으나, 또 대신이 막았습니다. 신이 밤낮으로 생각하고 헤아려 보았으나, 달리 손을 쓸 방도가 없었습니다. 신이 보건대, 외방(外方)에 허물어진 제언(堤堰)이 많은데, 이는 대개 조종조(祖宗朝)에서 수리(水利)를 중요하게 여겨 방방 곡곡(坊坊谷谷)에 제언을 많이 쌓아 농민(農民)이 이익을 얻는 바탕으로 삼았던 것이나, 해가 오래되어 막히고 통하지 않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수령(守令)이 된 자가 농민을 이롭게 하는 방도는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한때의 명예만 구하여 전혀 백성을 동원해서 수축(修築)하지 않으니, 이로 인하여 폐기되었습니다. 이번 양전(量田) 때에 각각 허물어진 제언을 일일이 타량(打量)347) 하여 수축해야 마땅한지의 여부(與否)를 살펴서 성책(成冊)하여 본청에 올려 보내게 하되, 그 가운데에서 수리(水利)를 입을 수 있는 곳은 본청에서 해도(該道)에 분부하여 여러 고을의 백성을 동원해서 수축한 다음 수세(水稅)를 헤아려 받아들이도록 하고, 수리를 입을 수 없는 곳은 백성들이 경간(耕墾)하도록 허락하여 그대로 그 세(稅)를 받는다면, 1년에 수천 석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신의 말을 불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묘당(廟堂)에서 해마다 호조와 병조의 전포(錢布)를 획급(劃給)하거나 혹 어떤 모양의 재화(財貨)를 해마다 본청에 들여 주어 그 수량을 정한 후에야 지용(支用)할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이이명이 말하기를,
"삼군문(三軍門)은 창설(創設)하였을 때부터 대장(大將)이 유고(有故)하면 중군(中軍)이 조련(操鍊)을 대신 거행한다는 규례(規例)가 있었습니다. 당저(當宁)348) 갑자년349) ·을축년350) 사이에도 이런 전례(前例)가 있었는데, 병인년351) 에 신여철(申汝哲)이 대장(大將)이 되어 말하기를, ‘군문(軍門)의 중대한 일을 중군(中軍)으로 함은 이미 미안(未安)한 데 관계됩니다. 그런데 중군이 유고하면 심지어 가중군(假中軍)으로써 대신 거행하도록 하니, 일이 지극히 마땅하지 못합니다.’ 하고, 대신(大臣) 또한 옳게 여기니, 마침내 중군으로써 대신 거행하지 말라는 명(命)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후 대장이 유고하면 도제조(都提調)가 조련을 대신 거행하는 것을 정식(定式)으로 삼았는데, 도제조는 늙고 병든 사람이 많아서 매번 거행하지 못하였습니다. 도감(都監)은 바로 경군(京軍)으로, 비록 더러 조련을 정지하더라도 또한 가끔 거행할 수 있으나, 금위영(禁衛營)과 어영청(御營廳)의 두 군영(軍營)은 모두 향군(鄕軍)으로서, 상번(上番)할 때 대장이 유고하면 혹 한 번의 습진(習陣)도 거치지 않은 채 그만두니, 융정(戎政)의 소우(疏虞)함이 진실로 염려스럽습니다. 외방에서는 병사(兵使)가 습조(習操)할 때 영장(營將)이 반드시 하루 전에 개인적으로 조련(操鍊)을 거행하는데, 이를 사조(私操)라고 일컫고 있으며, 경군문(京軍門)에서도 파총(把摠)과 초관(哨官)이 개인적으로 습진(習陣)하는 전례가 있습니다. 만약 중군으로 습조(習操)를 대신 거행하는 것이 미안(未安)하다고 여긴다면, 모두 대사조(大私操)라고 이름하여 중군으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는 것이 오히려 완전히 폐지하는 것보다 나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신여철(神汝哲)의 말은 의견이 없지 않으므로 그 당시 중군이 대신 거행하지 말라는 명이 있었다. 외방(外方)에서는 사조(私操)한 후에 병사(兵使)가 곧 정조(正操)한다고 하는데, 이는 정조 없이 단지 사조만 거행하는 것이니, 과연 어떠하겠는가?"
하자, 이이명이 말하기를,
"한 달 안에 3조(三操)를 정하여 거행하면, 대장이 비록 전조(前操)를 거행하지 않더라도 오히려 후조(後操)를 거행할 수 있는데, 이것이 문득 정조(正操)이니 아마도 무방할 듯합니다. 단지 신(臣) 한 사람의 견해가 반드시 합당한 것은 아니니, 마땅히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묘당으로 하여금 상의하여 품처하도록 명하였다.
8월 14일 갑인
김연(金演)을 도승지(都承旨)로 삼았다. 이때 도승지 윤헌주(尹憲柱)가 사직(辭職)하여 체임(遞任)되고, 약방(藥房)에 부제조(副提調)가 여러 날 동안 없었는데,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관명(李觀命)과 참의(參議) 이병상(李秉常)이 부질없이 하찮은 혐의를 끌어대어 개정(開政)하라는 명을 내렸는데도 여러번 소명(召命)을 어기고 끝내 거행하지 않으니, 세자가 하령(下令)하기를,
"아울러 직숙(直宿)이 오랫동안 비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끝내 부름에 나오지 않으니, 분의(分義)와 사체(事體)가 어찌 감히 그럴 수가 있는가? 지극히 한심하다.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인하여 도승지(都承旨)의 전망 단자(前望單子)352) 를 들여오게 하고, 김연으로 낙점(落點)하여 내린 것이다.
이날 밤 의관(醫官)이 입시(入侍)하니, 임금이 어제 능소(陵所)에서 적간(摘奸)하기 위해 입마(立馬)353) 할 때 정원(政院)의 하인(下人)이 병조 낭청을 너무 큰 소리로 부르는 바람에 마침 잠들었다가 인하여 놀라서 일어났다고 누누이 하교(下敎)하였다. 또 의관에게 말하기를,
"갑오년354) 무렵에 내가 비록 병이 무거웠으나, 원기(元氣)의 허약함이 오늘날 같지는 않았다. 그때에는 신료(臣僚)들이 그래도 조금 근심하여 근신(謹愼)하는 일이 있었는데, 근래에는 유안(狃安)355) 함이 심하다. 나의 병이 어찌 다시 회복되어 소생(蘇生)할 수 있는 병이겠는가? 단지 죽을 때를 기다릴 따름이다. 죽고 사는 즈음에 내가 다시 무엇을 염려하겠는가마는, 신료들이 이와 같이 유안하니 자못 유감스럽다. 유안하는 바가 한두 가지 일에 그치는 것이 아니나 죄다 말할 수가 없어서 마침내 우울한 데에 이르렀다."
하였다. 의관들이 나가서 약방에 말하자, 이에 약방에서 아뢰기를,
"성상의 환후(患候)가 더하고 기운이 허약하신 때를 당하여 보호하는 지위에 있으면서 일에 따라 척념(惕念)하지 못하여 정섭(靜攝)하시는 데 방해하는 일이 있게 되었으니, 신 등이 유안하여 성실하지 못한 죄는 만 번 죽어도 속죄(贖罪)할 수 없습니다. 황공함을 금하지 못하여 대죄(待罪)합니다. 정원(政院) 또한 검찰(檢察)하지 못한 과실을 면하기 어려우니, 청컨대 해당 승지를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소서."
하니, 임금이 대죄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이날부터 정원과 궐내(闕內)의 각사(各司)에서 모두 감히 큰 소리를 내지 못하였고, 순경(巡更)할 때의 군호(軍號)도 모두 소리를 전해 답하게 하였다.
8월 15일 을묘
예조(禮曹)에서 6월 25일에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 경연(經筵)에서 아뢴, 제향(祭享) 때 축(柷)·어(敔)·훈(壎)·생(笙)과 악장(樂章) 등의 일로 인하여 이때에 이르러 복주(覈奏)하기를,
"악원(樂院)의 등록(謄錄)을 가져다 상고해 보건대, 평소 종묘(宗廟)의 등가(登歌)는 36인이고 헌가(軒架)는 72인이었는데, 전란(戰亂) 후에 등가는 줄여서 22인이 되었으나, 이제 와서 복구(復舊)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쓰고 있는 것을 가지고 말하건대, 종묘·영녕전(永寧殿)의 등가에는 축(柷)과 어(敔)가 모두 있으나 헌가에는 축은 있어도 어는 없는데, 대정(大庭)에서 진하(陳賀)할 때의 헌가 또한 그러합니다. 등가에 훈(壎)과 생(笙)이 없고 헌가에 생이 없는데 이르러서도 또한 팔음(八音)이 조화를 이루는 데 어긋남이 있습니다. 이는 대단한 연혁(沿革)과는 다름이 있으니, 비록 공인(工人)을 더 첨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추이(推移)하여 분배(分排)할 수는 있습니다. 영소전(永昭殿)에 이르러서는 문소전(文昭殿)과 태묘(太廟)의 악장을 섞어 쓰고 존호(尊號)의 악장을 쓰지 않으니, 자못 의의(意義)가 없으며, 또 경녕전(敬寧殿)과 차이가 있어서 더욱 미안(未安)하니, 한결같이 경녕전을 따라 거행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습니다. 만약 제사를 지낼 때 미처 음악을 마치지 아니하여 먼저 음악을 그치도록 창(倡)하면 진실로 빨리 이루어지기를 재촉하는 혐의가 있습니다. 지금 대신(大臣)이 논한 바가 진실로 합당하니, 아울러 이에 의거하여 시행하소서. 또 장악원(掌樂院)의 첩보(牒報)를 보았더니, 종묘(宗廟)·경녕전에서 아헌(亞獻)이 인입(引入)할 때는 음악이 있고 춤이 없으며, 종헌(終獻)이 인입할 때에는 음악과 춤을 모두 빠뜨리니, 《오례의(五禮儀)》·《악학궤범(樂學軌範)》과 크게 서로 어긋난다고 하였습니다. 무릇 악장에 관계된 것은 모두 《오례의》와 《악학궤범》을 써야 하는데, 유독 이 절목에서만 이와 같이 흠결(欠缺)이 있는 것은 전란 후 의문(儀文)이 많이 빠지게 된 소치로 말미암은 듯합니다. 청컨대 이제부터 아헌이 인입할 때의 춤과 종헌이 인입할 때의 음악·춤을 한결같이 예전(禮典)에 따라 아울러 복구(復舊)시키도록 명하소서."
하니, 세자가 옳게 여겼다.
8월 16일 병진
약방(藥房)에서 사옹원(司饔院)에 옮겨 직숙(直宿)하였으니, 임금의 환후가 점차 더하였기 때문이었다.
충청도(忠淸道) 면천군(沔川郡)의 조련(操鍊)하던 수영(水營)의 배가 안흥(安興) 앞바다에 이르러 패선(敗船)하여 물에 빠져 죽은 군인이 있었는데, 휼전(恤典)을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에 진달(陳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황해 수사(黃海水使) 박창윤(朴昌潤)은 본진(本鎭)에서 수사에 승천(陞遷)한 후 거듭 대간(臺諫)의 탄핵(彈劾)을 받자, 본부(本府)의 이민(吏民)에게 의심을 두어 여러 방면으로 기찰(譏察)하여 체포해서 밤낮으로 가두어 다스렸으며, 심지어 ‘언관(言官)에게 뇌물을 주고 지적하여 발론(發論)을 부탁했다.’는 말로 위협해 고음(侤音) 【방언(方言)에 공사(供辭)를 고음이라 한다.】 을 받아 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수백 관(貫)의 돈을 토졸(土卒)에게 흩어 주고 수개월 만에 갑리(甲利)356) 로 징수(徵收)하였습니다.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
하였으나, 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김재로(金在魯)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홍용조(洪龍祚)를 지평(持平)으로, 김민택(金民澤)을 정언(正言)으로, 조관빈(趙觀彬)을 부교리(副校理)로, 한중희(韓重熙)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예조(禮曹)의 ‘진시(陳試)357) 는 구별해서 부거(赴擧)를 허락한다.’는 내용의 초기(草記)를 읽는 것이 끝나자, 우부승지(右副承旨)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진시의 규례가 옛날에는 증광시(增廣試)·식년시(式年試)·감시(監試)를 물론하고 액수(額數)가 같았으므로 통융(通融)하여 부거(赴擧)를 허락하였습니다. 그런데 연전(年前)에 이돈(李墩)이 예조 판서(禮曹判書)가 되고, 김진규(金鎭圭)가 참판(參判)이 되었을 때 혼잡(混雜)하다 하여 증광시와 감시는 증광시(增廣試)에 붙이고, 식년시와 감시는 식년시에 붙일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때 상교(上敎)와 연신(筵臣)들의 말이 모두 액수가 이미 같다 하여 이와 같이 구별하는 것을 지난(持難)하였으나, 우선 예관(禮官)의 말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이 초기(草記)에서는 또 증광시 가운데에서 대소(大小)를 구별하고자 하였으니, 진실로 까다롭고 잗단 데에 관계됩니다. 대증광시(大增廣試)에 진시하는 자는 증광시에 부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대증광시를 어떻게 쉽게 맞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세자가 일체로 부거를 허락하도록 하였다.
지평(持平) 홍우전(洪禹傳)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금 개량(改量)하는 일은 시작한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곧 다시 정지하여 거의 아이들 장난과 같게 되었으니, 조정에서 국체(國體)가 손상됨을 염려함은 진실로 그럴 만하였습니다. 단지 생각하건대, 일에는 완급(緩急)이 있으니, 시험삼아 당시의 폐막(弊瘼)을 헤아려 본다면, 어찌 양역(良役)의 폐단만 하겠습니까? 대저 양역의 폐단은 팔도(八道)가 똑같아서 옛날의 부호(富戶)가 지금은 모두 파산(破産)하였고, 옛날의 부성(富盛)했던 촌락(村落)이 지금은 절반이나 황폐한 마을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국가의 계책(計策)을 담당한 자들은 이러한 위급함을 구제함에 있어 마땅히 물이 새는 독을 들어 바닥이 타는 솥에 쏟아붓듯이 하여 다른 것을 돌아볼 여가가 없어야 할 것인데, 바야흐로 또 급하지 않은 전정(田政)에 급급하고 있습니다. 가령 양역(量役)을 곧 마치고 새 양안(量案)을 곧 이룬다고 한다면 단지 민생(民生)의 곤췌(困悴)만 더할 것이고, 국가의 위급한 형세에는 보탬이 없을 것입니다. 신은 양남(兩南)에서 양전하는 일에 대해 또한 의아한 점이 있습니다. 갑술년358) 양전했을 때의 구척(舊尺)은 진실로 법척(法尺)을 준수(遵守)하는 데에 어긋나는 바가 있었지만, 그 당시 균전사(均田使)가 조정에 계품하자 대신들로 하여금 의논하게 한 후에 선왕(先王)께서 아랫사람을 이롭게 하시는 어짊으로써 그대로 장척(長尺)을 쓰도록 허락하셨으니, 한때 잘못을 저지른 일이 아니었습니다. 신척(新尺)과 구척의 길고 짧음을 다투는 것이 반촌(半寸)에 지나지 않아 비록 지극히 작은 듯하나, 양남(兩南)에서 자[尺]를 고쳐서 더 얻게 되는 수량을 통계(通計)하면 거의 3, 4만 결에 이릅니다. 조정에서는 비록 법척(法尺)을 준용(遵用)하는 데만 힘쓰고 결부(結負)를 많이 얻는 데에 이로울 것이 없다고 하지만, 어떤 사람이 이를 믿겠습니까? 또 듣건대, 개량(改量) 때 쓴 양식(糧食)·늠료(廩料)·지(紙)·필(筆)·묵(墨)의 값을 모두 환모(還耗)에서 가져다 쓴다 합니다. 이는 백성을 위하여 폐단을 제거하는 데에서 나왔다고는 하나, 여러 가지 잡비(雜費)는 논할 것도 없이 다만 지지(紙地)만을 계산하더라도 대읍(大邑)에서 응당 받아들이는 것이 2천여 냥의 전(錢)에 밑돌지 않고, 중읍(中邑)·소읍(小邑) 또한 4, 5백 냥에서 줄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각 고을의 환모(還耗)가 반드시 많이 부족(不足)할 것이니, 형편상 다시 원환(元還)을 허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양호(兩湖)의 경우 계사년359) ·갑오년360) 이후에 대부분 받아 들이지 못했는데, 허다(許多)한 양전(量田)의 비용을 다시 환곡(還穀)에서 판출(辦出)한다면 삼남(三南)의 환곡은 또 장차 거의 다 없어질 것이니, 불행하게도 갑자기 군사를 이바지하거나 흉년에 진휼(賑恤)하는 일이 있게 된다면, 어디에서 판출하기를 바라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개량하는 정사를 우선 한편으로 치워버리고 풍년이 들기를 조금 기다려 천천히 의논하여 거행하되, 만약 개량하는 데 힘쓰던 뜻을 양역을 변통하는 정사에 옮겨서 좋은 계책을 강구(講究)하여 시행한다면, 피로하여 병든 백성을 오히려 구제할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양역의 폐단이 생기는 원인은 진실로 양정(良丁)을 얻기 어려운 데에 있고, 양정을 얻기 어려운 것은 도망하고 회피(回避)하는 방도가 많은 데에 말미암습니다. 그런데 이는 대개 각도(各道)와 각영(各營)의 장인(匠人)·군관(軍官)과 각 관사(官司)와 각청(各廳)의 사장(私匠)·보인(保人)의 역(役)이 가벼워서 백성들이 모두 그쪽으로 가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각 고을의 교생(校生)·원생(院生)에 이르러서는 연줄을 타서 함부로 입속(入屬)하니, 까닭 없이 한유(閑游)하는 자가 가장 많은 고을의 경우 혹 4, 5백 명에 이릅니다. 지금 만약 도신(道臣)에게 특별히 유시(諭示)하고 각 고을에 엄중히 신칙(申飭)하여 사실대로 조사해 내고 속이거나 숨기지 못하게 한 후에 마땅히 액수(額數)를 헤아려 정하여 본영(本營)과 본관(本官)에 획급(劃給)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군사로 뽑게 한다면, 양정이 오히려 수십만에 밑돌지 않을 것이니, 인족(隣族)이 괴로움을 당하는 위급함을 어찌 구제할 수 없겠습니까?"
하니, 세자(世子)가 이를 묘당(廟堂)에 내렸다.
8월 17일 정사
필선(弼善) 이국휴(李國休)·문학(文學) 정석오(鄭錫五)·겸문학(兼文學) 김운택(金雲澤)·사서(司書) 이중협(李重協)·설서(說書) 서종섭(徐宗燮) 등이 상서(上書)하기를,
"성상의 환후(患候)의 여러 증세가 근래에 더욱 첨가(添加)되어 약원(藥院)에서 또 다시 옮겨 직숙(直宿)하니, 저하께서 밤낮으로 초민(焦悶)하는 마음이 다시 어떠하겠습니까? 마침 이러한 때에 태묘(太廟)의 전알(展謁)이 불과 며칠 남지 않았고, 또 성묘(聖廟)의 작헌(酌獻)이 멀지 않았는데, 예전(禮典)의 거행이 비록 매우 중대하다 하더라도 성상의 환후가 조금 안정된 때를 기다려 다시 연길(涓吉)361) 을 의논하는 것이 아마도 무방(無妨)할 듯합니다."
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내가 바야흐로 늦추어 거행하고자 하였는데, 그대들의 글이 또 이와 같으니, 아울러 우선 정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8월 19일 기미
한세량(韓世良)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진후(診候)를 마치자,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전일(前日)에 정원(政院)의 하인(下人)이 크게 소리치는 바람에 정섭(靜攝)하는 가운데 경동(驚動)하는 일이 있기에 이르렀다 하여 인책(引責)하고 유안(狃安)한 죄를 받기를 원하니, 임금이 안심(安心)하고 대죄(待罪)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이이명이 또 말하기를,
"지난번 대간(臺諫)의 소장(疏章)으로 인하여 묘당(廟堂)에서 복달(覆達)하여, 각사(各司)의 액수(額數) 이외의 이서(吏胥)는 장차 태거(汰去)하여 줄이도록 하였는데, 들어보건대 태거된 액수가 2백여 명에 이른다고 하니, 그 가속(家屬)까지 합하면 5, 6백 명에 이를 것입니다. 이들이 모두 실업(失業)하게 되면 또한 인정(仁政)에 손상됨이 있으니, 우선 한꺼번에 아울러 태거하지 말고 각사(各司)로 하여금 궐액(闕額)이 있어도 보충하지 않음으로써 저절로 정한 액수 안에 이르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8월 20일 경신
달이 필성(畢星)의 좌각성(左角星)을 범하였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8월 22일 임술
달이 동정(東井)으로 들어갔다.
8월 23일 계해
간원(諫院)에서 전에 진달(陳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역마(驛馬)를 외람되게 더 잡아 타는 것은 원래 정해진 율(律)이 있는데, 지난번 전라도(全羅道)의 신구(新舊) 병사(兵使)인 이한규(李漢珪)와 이규성(李奎成) 등은 행차가 죽산(竹山)에 이르자, 외람되게 잡아 탄 역마가 낭자했을 뿐만 아니라, 이한규의 경우는 몽둥이로 역졸(驛卒)을 때려 역졸이 죽기까지 하였습니다. 본도(本道)에서 애초 외람되게 역마를 잡아 탔다는 것으로 치문(馳聞)하였는데, 형관(刑官)이 법례(法例)를 돌아보지 않고 문비(問備)362) 를 청했으니, 청컨대 이한규·이규성은 나문(拿問)하여 정죄하고, 형조(刑曹)의 해당 당상(該當堂上)은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소서."
하였는데, 세자가 단지 박창제(朴昌悌)와 말단(末端)의 일만 따랐다.
헌부(憲府)에서 전에 진달(陳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니, 세자가 단지 박창윤(朴昌潤)과 허기(許虁)의 일만 따랐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공사(公事)의 품재(稟裁)를 마치자, 필선(弼善) 이국휴(李國休)가 말하기를,
"입대(入對)를 저녁 수라(水剌) 전에 많이 거행하여 그대로 촛불을 켤 때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대조(大朝)께서는 수라의 정해진 시각이 없어서 혹 폐문한 후에 있거나 혹 다른 어선(御膳)과 약물(藥物)을 올릴 때도 있는데, 저하께서는 입대를 파(罷)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친히 모시고 살펴보지 못할 것이니, 반드시 민망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이후로는 그 시각을 헤아려 상치(相値)되지 않게 함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세자가 말하기를,
"이후에는 오시(午時)와 미시(未時) 사이에 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지평(持平) 홍용조(洪龍祚)가 상서(上書)하기를,
"예로부터 군신(君臣)이 서로 잘 만난 것으로 효종 대왕(孝宗大王)께서 송시열(宋時烈)에 대한 것보다 성대한 것은 없었으니, 만약 죽은 사람의 혼백(魂魄)이 있다면 반드시 속거(屬車)363) 와 표미(豹尾)364) 의 사이에서 추창(趨蹌)하며 감히 잠시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조(聖祖)의 묘정 배향(廟庭配享)에 송시열이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이 어찌 예전(禮典)의 큰 결흠(缺欠)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저하께서 대조께 계품(啓稟)하시고 조정(朝廷)의 신하들에게 하문(下問)하시어 빨리 성전(盛典)을 거행하소서. 좌의정(左議政) 권상하(權尙夏)는 곧 선정(先正)의 적전(嫡傳)이니, 옛날에 이른바 산림(山林)의 백수(白首)요 기애(耆艾)365) 의 어진 선비입니다. 벼슬을 맡겨 수고로움을 끼칠 필요가 없으니, 예의(禮儀)를 베풀고 성의를 다해 초치(招致)하여 의심스러운 것을 묻고 일에 대해 자문(諮問)한다면, 유현(儒賢)을 공경하여 존숭하는 도리를 얻게 될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유의(留意)하소서. 근래에 논의(論議)의 분열이 심해져 이미 수화 상극(水火相克)으로 고질(痼疾)이 된 경우는 논할 것도 없고, 비록 지금의 조정으로서 말하더라도 또한 괴격(乖激)한 경우가 없지 않으니, 비유하건대 형제(兄弟) 사이의 집안 싸움에 점차 가면 갈수록 의심하고 막혀 그칠 기약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천재(天災)와 시변(時變), 백성의 근심과 국가의 계책이 매우 위급하여 비록 서로 공경하여 화합하더라도 오히려 고칠 수 없는 환난이 있는데, 도리어 작은 물결을 일으켜 큰 물결을 조장(助長)하고 작은 혐의를 쌓아 큰 시비를 만들며, 곧 국사(國事)는 서로 잊어버린 지경에 버려 두니, 이는 진실로 이른바 사슴을 쫓다가 태산(泰山)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원하건대 저하께서는 군공(群工)을 밝게 신칙(申飭)하시어 탕평(蕩平)한 지경으로 돌아가게 하소서."
하니, 세자가 말하기를,
"위 조항은 진달(陳達)한 대의(大意)가 진실로 좋다. 아래 조항의 양건(兩件)의 일은 유의(留意)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때 작년에 성진령(成震齡)이 상소한 이후로 조정의 사이에 의조(疑阻)가 갈수록 깊어져 서로 배격(排擊)하고 효상(爻象)이 아름답지 못하여 사람들이 많이 근심하였으므로, 홍용조가 글의 말미에서 언급(言及)한 것이었다. 그런데 훗날 지평(持平) 이만(李滿)이 상서(上書)하여 조언신(趙彦臣)을 파직(罷職)하라는 청을 빨리 따르고 성진령의 억울함을 흔쾌히 씻어주기를 청하였다. 그리고 ‘시비(是非)를 분별하지 않고 반은 숨기고 반만 말하였으니, 대신(臺臣)이 일을 논함은 마땅히 이와 같이 구차해서는 안된다.’고 홍용조를 배척하였다. 홍용조가 마침내 인피(引避)하고 말하기를,
"이만이 말하는 옳은 자가 누구이고 그른 자가 누구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신의 본의(本意)는 국시(國是)가 이미 정해져서 조정이 약간 안정되었으니, 조정의 신하들이 서로 마음과 힘을 합해 나랏일을 처리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오히려 외부에서 간사한 침범과 이론(異論)이 일어날까 두려운데, 이에 도리어 서로 시기하고 의심하여 가면 갈수록 어긋나고 멀어지며 상대편을 이기려는 말을 잇따라 발론(發論)하고 서로 제기하여 이것이 원기(元氣)를 손상시키고 국맥(國脈)을 무너뜨리고 있음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신의 글에 이른바 그 편중(偏重)함을 억제해야 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말들을 가리킨 것입니다. 신은 차라리 구차하다는 배척을 받을망정 차마 스스로 풍파(風波)를 조장하지는 못하겠습니다."
하니, 이만이 또한 인피하고 물러가서 물론(物論)을 기다렸다. 장령(掌令) 남세진(南世珍)이 처치하여 홍용조는 체차(遞差)하고 이만은 출사(出仕)시켰다.
8월 24일 갑자
윤봉조(尹鳳朝)를 승지(承旨)로, 조상경(趙尙絅)을 수찬(修撰)으로, 송진명(宋眞明)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강원 감사(江原監司) 유숭(兪崇)이 사폐(辭陛)하니, 세자가 불러서 보았다. 유숭이 말하기를,
"본도(本道)에 일어난 홍수의 참혹함은 근래에 없던 바입니다. 부교리(副校理) 조관빈(趙觀彬)이 이제 막 금성(金城)에서 와서 말하기를, ‘금성 한 고을을 말하더라도 표몰(漂沒)한 인가(人家)가 5백여 호에 이른다.’ 하였으니, 다른 곳도 미루어 알 수가 있습니다. 본영(本營)은 본래 저축이 없으니, 모름지기 조정에서 전례(前例)에 따라 고휼(顧恤)하는 일이 있은 후에야 구렁에 빠진 백성을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세자가 옳게 여겼다.
간원(諫院)에서 전에 진달(陳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각사(各司)의 회계(回啓)에 일정한 한도가 있음은 원래 조종조(祖宗朝)의 성규(成規)입니다. 그런데 나라의 기강(紀綱)이 쇠퇴하고 해이해져 부서(簿書)의 마감(磨勘)과 정기(定期)의 집회(集會)가 또한 지체되는 일이 많습니다. 그리고 격쟁(擊錚)하여 상언(上言)하는 것도 내버려 둔 채 오랫동안 논하지 않으며, 외방(外方)의 정폐(政弊)와 민막(民瘼)을 계문(啓聞)하기에 이르러서도 또한 모두 지체하여 미루기만 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지금 이후로는 경외(京外)를 논할 것 없이 무릇 복달(覆達)하여 처리해야 할 것은 곧 논의하여 계문(啓聞)하라는 뜻을 정원으로 하여금 검칙(檢飭)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세자가 말단(末端)의 일만 따랐다.
8월 26일 병인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진후(診候)를 마치자,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평일(平日)에 내가 숙위(宿衛)하는 군사에 대해 힘써 애휼(愛恤)을 더하여 격려하고 권장하였는데, 눈이 어두워진 후부터 일체 폐지했다. 그래서 지난해 가을에 금군장(禁軍將) 이하를 불러 하교(下敎)하기를, ‘너희들은 나를 볼 수 있어도 나는 너희들을 볼 수가 없다.’고 하였다. 경인년366) 에 관무재(觀武才)367) 를 거행한 후 10년이 되도록 관무재를 거행하지 않았다. 평소에는 2, 3년마다 한 번씩 거행하였는데, 지금 이렇게 오랫동안 거행하지 않았으니, 저 무리들이 낙막(落莫)해 할 뿐만 아니라 또한 나의 뜻과도 어긋나므로, 한 번 명관(命官)368) 을 보내 설행(設行)하게 하여 위열(慰悅)하는 뜻을 보이고자 한다. 선조(先朝) 을사년369) 무렵에 관무재를 거행하는 날을 가렸다가 겨울철의 천둥으로 인하여 명관을 보내어 거행하게 하였었으니, 지금도 또한 이 전례에 의거하여 명관을 보내어 거행하게 함이 무방(無妨)할 듯하다."
하니,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말하기를,
"지난해 전하께서 무사(武士)를 불러 접견(接見)하실 때 궁전(宮殿)에 오르게 한 후 대면하여 위로하시자, 비록 무식한 금려(禁旅)라 하더라도 물러가서 감읍(感泣)하지 않은 자가 없었는데, 이제 만약 이 성교(聖敎)를 들으면 반드시 더욱 감격해 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두 영(營)의 군사를 마땅히 10월부터 상번(上番)해야 하는데, 9월 25일이 향군(鄕軍)의 봉점(逢點)370) 하는 날이다. 그러니 서울에 있는 장교(將校)에게 먼저 초시(初試)를 거행하고, 향군은 올라오기를 기다려 추후에 초시를 거행하며, 회시(會試)는 합설(合設)하는 것이 편호(便好)할 듯하다."
하자, 이이명이 말하기를,
"왕세자가 태묘(太廟)와 문묘(文廟)에 전알(展謁)하는 것을 성상의 환후(患候)가 첨가된 것으로 인하여 지금 우선 정지하였습니다. 관무재를 이미 설행하고 유생(儒生)에게는 미치지 않는다면 유생의 무리가 반드시 낙막할 것입니다. 전알의 길일(吉日)을 9월 초 개복(改卜)하고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문무(文武)를 합하여 시험보이게 하되, 혹 왕세자에게 대행(代行)하도록 명하시거나 혹은 명관(命官)을 보내어 거행하게 하는 것이 편호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기를,
"마땅히 이에 의거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제조(提調)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성상의 환후가 이와 같으므로 약방(藥房)에서 바야흐로 옮겨 직숙(直宿)하고 있는데, 그 전에 만약 물러가 직숙하게 하지 않는다면 세자께서 곁을 떠나기 어려울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시기에 임하여 형세를 살펴보고 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8월 27일 정묘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평안도(平安道) 은산(殷山)·순천(順川)·순안(順安)·숙천(肅川)·정주(定州) 등의 고을에 8월 17일에 우박이 내렸는데, 큰 것은 거위알 만하고 작은 것은 비둘기알 만하였다. 들에 쌓인 것이 밤이 지나도 녹지 않았으며, 경과(經過)한 것이 길이는 10여 리쯤이고 너비는 50여 리쯤이었는데, 병마(兵馬)가 짓밟은 것 같았다. 물오리·기러기·참새 따위의 작은 새들이 많이 맞아죽었고, 여염집의 기와·동이·항아리 등 깨지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남은 화곡(禾穀)이 없었다. 강계부(江界府)에서는 7월 20일 후에 비둘기알 만한 우박이 내려 각종 곡식이 채찍으로 후려친 것 같았으며, 7월 28일에는 눈이 내렸으니, 도신(道臣)이 계문(啓聞)하였다.
8월 28일 무진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장령(掌令) 남세진(南世珍)이 함께 들어와서 전에 진달(陳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관서(關西)의 각역(各驛)은 임진년371) 무렵에 신법(新法)을 새로 만들어 마필(馬匹)을 더 세웠으나 위전(位田)은 늘이지 않았고, 복호(復戶)를 혁파하고서 다시 쌀을 거두었습니다. 이로부터 더욱 조잔(凋殘)해졌으니, 청컨대 본도(本道)로 하여금 다시 변통(變通)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8월 29일 기사
서리가 내렸다.
김상옥(金相玉)을 정언(正言)으로, 조관빈(趙觀彬)을 교리(校理)로 삼았다.
세자(世子)가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접(引接)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지평(持平) 홍우전(洪禹傳)이 상서(上書)하여 양역(良役)을 변통하고 양전(量田)을 정지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조정의 양전하는 본뜻은 결수(結數)를 더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조종조(祖宗朝)에서 20년에 한 번씩 양전하던 법이 오랫동안 폐지되어 전정(田政)이 문란해졌으므로 한 번 정돈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정지하였던 것도 진실로 매우 전도(顚倒)된 것입니다."
하고,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 말하기를,
"예초에 시작하지 않았으면 그만이지만, 정유년372) 부터 경영(經營)하여 이제 3년이 되었는데, 만약 또 정지한다면 나라의 체통이 어찌 손상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세자가 그대로 거행하게 하였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대신(臺臣)이 글의 말미에 또 말하기를, ‘숨어 있는 양정(良丁)이 많으니, 청컨대 한가하게 놀고 있는 무리를 조사해 내어 군역(軍役)에 정하소서.’ 하였는데, 그 말이 좋습니다. 외방(外方)의 군관(軍官)·장인(匠人)·교생(校生)·원생(院生)은 진실로 가려내어 군역에 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명목(名目)이 많은데, 감영(監營)·병영(兵營)의 군관(軍官)을 수령(守令)이 만약 군액(軍額)에 채우면 감영·병영에서 곧 논책(論責)하므로, 수령이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이후에는 수령으로 하여금 임의대로 충정(充定)하도록 허락하고, 감사·병사로 하여금 막을 수 없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세자가 옳게 여겼다. 김창집이 또 말하기를,
"강화 유수(江華留守) 심택현(沈宅賢)이 장계(狀啓)하기를, ‘대조(大朝)께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시고 반사(頒赦)한 후 노인에게 추은(推恩)하고 가자(加資)하도록 하였을 때 본부(本府)의 호적 가운데 나이를 늘린 자가 자그마치 28인에 이르렀습니다. 만약 조정의 명령에 의거하여 모두 나이를 늘린 율(律)을 적용한다면, 이 사람들은 백발(白髮)의 거의 죽게 된 나이라 행보(行步)도 못할 것이니, 결코 배소(配所)에 도달할 형세가 못 됩니다. 그 자손(子孫)들이 부축하여 관정(官庭)에 와서 울부짖으며 목숨을 살려달라고 애원하니, 보기에 가련합니다.’고 하였습니다. 듣건대 그 나이가 늘거나 줄어든 것은 도고(逃故) 때 잘못 기록한 데에 말미암았다고 하는데 3, 40년 전에 어떻게 오늘날 추은(推恩)하는 일이 있을 것을 알고 미리 그 나이를 늘렸겠습니까? 비록 몇 년의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모두 80세의 노인들이니, 장배(杖配)와 충군(充軍)의 벌은 진실로 차마 시행하지 못할 바가 있습니다. 애초에 큰 경사로 인하여 은혜를 베푸는 뜻에서 나왔는데, 이제 도리어 가죄(加罪)한다면 또한 조정의 본뜻이 아니니, 용서하여 풀어주는 일이 있어야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세자가 감죄(勘罪)하지 말라고 하였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저번에 연중(筵中)에서 민진후(閔鎭厚)가 허록(虛錄)한 것으로 금고(禁錮)시킨 일에 대해 진달(陳達)한 바가 있었는데, 이는 금부(禁府)에서 본의(本意)를 자세히 알지 못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 소치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차후로 사유(赦宥)를 입은 자는 본죄(本罪)는 감제(減除)하고 금고(禁錮)는 사목(事目)에 의거하여 풀어주지 않는 것이 진실로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세자가 옳게 여겼다. 김창집이 또 말하기를,
"여염집을 빼앗아 들어가는 것은 조정(朝廷)의 금법(禁法)이 지극히 엄중한데, 작년과 올해에 여역(癘疫)이 치성(熾盛)하자, 사대부(士大夫)로서 금법(禁法)을 함부로 범하여 빼앗아 들어간 자가 많았으니, 이미 매우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병조 좌랑(兵曹佐郞) 이자(李滋)는 이미 아무 까닭 없이 공연히 상역(商譯)의 집을 가려 차지하고 차례로 빼앗아 들어갔으며, 또 주인(主人)으로 하여금 공궤(供饋)하게 하여 조금이라고 뜻에 맞지 않으면 주인을 질책(叱責)하므로, 여항(閭巷)에서 원망이 많으니, 풍습(風習)이 자못 해괴합니다. 이 자를 마땅히 파직(罷職)하소서."
하니, 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공조 판서(工曹判書) 이만성(李晩成)이 말하기를,
"향리(鄕里)에서 올라오면서 물가에 위치한 고을의 재해(災害)를 입은 참상(慘狀)을 직접 보았습니다. 바라건대 내재(內災)를【내재란 한 전지(田地) 안에서 재해를 입은 여부(與否)를 살펴보고, 구분해서 다르게 급재(給災)373) 하는 것이다.】 주소서."
하니, 세자가 이를 허락하였다. 사간(司諫) 윤양래(尹陽來)가 전에 진달(陳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었으나, 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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