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64권, 숙종 45년 1719년 9월

싸라리리 2025. 12. 1.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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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경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9월 2일 신미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는데,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 함께 입시(入侍)하였다. 진후(診候)를 마치자 도승지(都承旨) 김연(金演)이 말하기를,
"왕세자께서 알성(謁聖)하신 후 춘당대(春塘臺)에서 관무재(觀武才)하는 날을 가리는 것과 시사(試士)하는 일에 대해 명하신 바가 있어 전례(前例)를 상고해 보았더니, 문신(文臣)과 유생(儒生)을 돌아가며 차례로 시취(試取)하였습니다. 이번에도 마땅히 정탈(定奪)하는 일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자, 임금이 처음에는 문신(文臣)을 시험하도록 명하였다. 도제조 이이명·제조 민진원이 모두 말하기를,
"세자가 알성(謁聖)하는 예(禮)를 거행하고 시사(試士)하는 일이 없으면 유생(儒生)의 무리들이 반드시 낙막(落莫)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다시 유생을 시험하도록 명하였다. 김연이 또 말하기를,
"지난해 정탈(定奪)하셨을 때 시사(試士)하는 일절은 절일제(節日製)의 예(例)와 같게 하도록 명하셨는데, 이제 만약 문무(文武)를 함께 시험한다면 마땅히 절일제와 다름이 있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입시한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지금 문무(文武)를 한꺼번에 시험하도록 한다면 과거(科擧)와 같이 해야 마땅합니다."
하고, 이건명은 말하기를,
"즉일(卽日)로 창방(唱榜)하는 것은 끝내 어떠할는지 모르겠으며, 혹 그 이튿날 시어소(時御所)374)  에서 설행(設行)하는 것도 무방하겠습니다."
하고, 도제조 이이명은 말하기를,
"신이 전일에 이미 즉일로 창방(唱榜)할 수가 없다는 뜻을 우러러 진계(陳啓)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만약 단지 갑과(甲科)·을과(乙科)만 갖추어 3, 4인만 뽑고 향군(鄕軍)이 올라오기를 기다려 무기(武技)를 시험한 후 비로소 방방(放榜)한다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10월 초1일 전에 향군이 반드시 다 올 것이다."
하였다. 이이명이 말하기를,
"그때에는 날씨가 추워서 마로(馬路)가 얼어서 미끄러운 염려가 있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10월 초1일에 어찌 마로가 얼어서 미끄럽게 되겠는가? 초1일에 알성(謁聖)하고 인하여 시사(試士)함이 좋다."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방방(放榜)은 따로 날을 가려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방방은 시험을 마친 후에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올해의 나라 경사는 곧 3백 년 동안 두 번 있었던 것입니다. 신 등이 여러번 진연(進宴)을 청하였는데, 성상의 뜻이 가을을 기다려 연사(年事)의 풍흉(豐凶)을 살펴보고 거행하고자 하였으므로, 잠자코 물러 나왔습니다. 올해의 연사가 비록 재해를 입은 곳이 없지 않으나 크게 흉년이 드는 데에 이르지는 않았고, 대소 신료들의 마음이 한 번 칭상(稱觴)375)  하기를 원하지 않음이 없으며, 왕세자의 지극한 정리(情理)를 또한 펼 만한 곳이 없으니, 기일을 미리 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이건명이 말하기를,
"성상께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신 것은 진실로 전고(前古)에 없던 큰 경사로서, 조정에서 반사(頒赦)하고 과거를 베풀며, 또 사연(賜宴)하였으니, 무릇 위열(慰悅)하는 데 관계된 도리가 지극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료로서 경사를 축하하는 정성을 드러내어 보일 바가 없고 단지 진연하는 일절만 있는데, 이제까지 지체하고 있으니, 어찌 답답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이이명이 말하기를,
"두 대신이 오로지 이 일을 위해 들어왔으니, 마땅히 진념(軫念)하셔서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 거행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이 진청(陳請)하는 정성을 내가 어찌 헤아리지 못하겠는가마는, 연사(年事)가 흉년이 들었고 병(病) 또한 이와 같으니, 진실로 억지로 행하기 어렵다."
하였다. 이이명이 말하기를,
"성상의 환후는 아침 저녁에 뿌리 뽑힐 병이 아니니, 다시 사연(賜宴)할 때와 같다면 거행하실 수가 있습니다. 연사 또한 흉년에 이르지는 않았는데, 어찌하여 군정(群情)의 답답해하는 마음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하고, 김창집이 말하기를,
"먼저 날을 가려서 기다리고 있다가, 다시 성상의 환후(患候)를 살펴보아 비록 며칠 앞당기거나 늦춘다 하더라도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하고, 이건명이 말하기를,
"성상께서 아무 까닭 없이 연락(宴樂)을 하시고자 한다면, 신 등이 비록 무상(無狀)할망정 보필(輔弼)하는 지위에 있으니, 마땅히 정지하기를 간쟁(諫爭)하지 어찌 감히 청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는 전에 없던 큰 경사이므로, 신 등이 크게 바라는 것은 오로지 이에 있을 뿐입니다."
하고, 김창집이 말하기를,
"호조(戶曹)에서도 마땅히 한 번 거행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미 조치(措置)한 물건이 있다고 합니다. 잔치에 참여하는 여러 신하들의 수도 줄인다면, 무슨 폐단될 일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들이 누누이 진청(陳請)하니, 억지로 어기기 어렵다. 그러나 법전(法殿)에 나가기가 어려우니 경현당(景賢堂)에서 설행(設行)하되, 참여하는 인원은 옛날에 견주어 간략함을 따르도록 할 것이며, 나누어 정하는 물건도 힘써 줄여서 폐해를 끼치지 않도록 함이 옳다."
하였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전에 군문(軍門)을 변통(變通)하는 일에 대해 여러 대신(大臣)들에게 문의(問議)하라는 명(命)이 있었으므로 모두 참여하여 상확(商確)하였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대신들의 뜻이 어떠하였는가?"
하니, 김창집이 말하기를,
"여러 의논이 모두 수어청(守禦廳)을 혁파하는 것은 중난(重難)하게 여겼습니다. 비록 수어청을 혁파하더라도 양정(良丁)이 많지 않고, 지난해에 또한 유수(留守)를 설치하였으나 불편(不便)한 일이 있는 것으로 말미암아 혁파하였다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금위영(金衛營)을 혁파하면 어떻겠는가?"
하자, 김창집이 말하기를,
"금위영은 이전부터 그러한 의논이 있었으나, 또한 갑자기 혁파하는 것은 중난하게 여겼습니다."
하고, 이이명이 말하기를,
"금위영을 혁파하고, 인하여 그 군사들이 한가하게 놀 수 있다면 진실로 좋겠지만, 지금 만약 다른 군문에 옮겨 채운다면 저 무리들에게 과연 무슨 유익함이 있겠습니까?"
하고, 이건명이 말하기를,
"진계(陳啓)하려면 말이 길어지는데, 일찍이 계미년376)   무렵에 잠깐 금위영을 혁파했다가 곧 다시 설치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영상(領相)의 차어(箚語)가 좋다. 일찍이 임술년377)   무렵에 청성 부원군(淸城府院君)의 주달(奏達)로 인하여 줄인 적이 있었는데, 해가 오래 되어 그 명목(名目)을 기억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이건명이 말하기를,
"그때 청성 부원군 김석주가 각 군문(軍門)의 잡색군(雜色軍) 1만 5천 명을 감제(減除)하고 각 고을에 보내어 도고(逃故)에 보충시킬 것을 청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때 이와 같이 줄여 정했다 하더라도 단지 눈앞에 폐단만 구제했을 뿐이었고, 오래 되지 않아 다시 폐단이 생겼으니, 구원(久遠)한 계책이 아닌 듯하다. 또 금위영 또한 이미 이루어진 군문인데, 갑자기 혁파하는 것은 애석하다. 단지 생각하건대 한정(閑丁)이 적지 않으나 가벼운 역(役)에 투입(投入)하려는 자가 매우 많고, 수령이 이미 원망을 살까 염려하는데다가 또 상사(上司)를 두려워하여 줄여서 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조정의 명령이 시행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근본(根本)을 이정(釐正)하려면 양정(良丁)이 넉넉해진 후에야 이 폐단을 구제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건명이 말하기를,
"계미년378)  에는 금위영을 혁파한 지 사흘 만에 다시 설치하였습니다. 신이 그때 대사간(大司諫)으로서 또한 일찍이 진소(陳疏)하였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금위영은 군제(軍制)가 매우 좋아서 어영청(御營廳)과 똑같으며, 본읍(本邑)에서 보인(保人)379)  을 정해 주면 국가에서는 경비(經費)를 소모할 일이 없을 것이니, 1만여 명의 충실한 군사를 혁파할 수는 없습니다. 도감군(都監軍)은 잡색군(雜色軍)·보군(步軍) 4천 명과 마군(馬軍)을 통틀어 5천여 명이 되는데, 호조(戶曹)에서 급료(給料)를 계속 주지 못하므로 혹 군자감(軍資監)·광흥창(廣興倉)에서 주기도 하나, 또한 부족을 근심하고 있습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부병(府兵)보다 좋은 것도 없고 장정(長征)보다 좋지 않은 것이 없다.」하였습니다. 송(宋)나라 때 금군(禁軍) 80만 명이 늘 경사(京師)에 머물고 있었는데, 소식(蘇軾)이 말하기를, 「수십 리를 가지 못한다.」고 했으니, 지금 훈국(訓局)의 군사가 바로 장정(長征)입니다. 매양 편안하고 한가하게 놀고 있다가 혹 행행(行幸)이 있으면 5, 60리도 못가서 곧 모두 쓰러지니, 게을리 놀던 자들의 쓸모 없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숙위(宿衛)하는 데 쓰고자 하면 그 액수(額數)를 정하는 바가 전혀 없을 수는 없으니, 궐액(闕額)이 있어도 보충하지 말고 2천 명을 한정해 두어 두 영(營)에 나누어 예속(隷屬)시키되, 그 군문의 명호(名號)를 없앤다면 경비를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삼군문(三軍門)의 한 표하군(標下軍)380)  이 8백 명인데, 한 군문의 8백 명을 감제(減除)하는 것 또한 적지 않습니다. 한(漢)나라는 천하를 차지하고서도 단지 남군(南軍)·북군(北軍)381)  만 있었다고 하니, 한 군문을 혁파하고 단지 두 영만 두는 것도 부족한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대저 소의(疏意)가 이와 같았으나 변통(變通)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지금 여러 대신(大臣)들에게 모두 의논을 써서 들이게 하여 조용히 살펴보시고, 합당하면 쓰시고 합당하지 않으면 그대로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는데, 김창집 또한 여러 대신들에게 의논을 모두 써서 바치게 하고, 한 번 살펴본 후에 처리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금위영은 비록 혁파할 수 없으나, 병조 판서(兵曹判書)가 대장(大將)을 겸임(兼任)하는 규식에 이르러서는 진실로 변개(變改)함이 마땅합니다. 도감(都監)·어영청(御營廳) 등과 같은 곳은 대장이 항상 있으므로 퇴폐(頹廢)해지는 일이 없으나, 금위영은 판서(判書)가 자주 체차(遞差)되므로 모양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크게 변통할 수 없다면 마땅히 이 폐단을 먼저 제거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우상(右相) 또한 일찍이 이 말을 하였다."
하였다. 이건명이 말하기를,
"신이 과연 일찍이 진소(陳疏)한 적이 있어 금군(禁軍)과 여정(餘丁)을 조처하고자 하였으나, 기강(紀綱)이 해이하여 지금까지 거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외인(外人)들은 모두 지금 교혁(矯革)하려 하는 것을 우활(迂闊)하고 가소로운 것으로 여기나, 이미 그 직임(職任)에 있다면 비록 하루라도 어떻게 편안히 앉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손을 댈 곳이 없다 하나, 일이 만약 이루어지면 나라에 이로울 것이고,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러한 모양으로 끌고 가다가 그칠 곳에서 그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고개를 끄덕였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9월 3일 임신

예조(禮曹)에서 진연(進宴) 뒤 내연(內宴)382)  을 갑오년383)  의 예(例)에 의거하여 일체로 거행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신절(申晢)을 지평(持平)으로, 조상경(趙尙絅)을 부교리(副校理)로, 홍석보(洪錫輔)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삼았다.

 

평안 감사(平安監司) 이택(李澤)이 폐사(陛辭)하니, 세자(世子)가 불러서 보고 칙유(勅諭)하였다. 이택이 본도(本道)에서 입은 수재(水災)의 참상(慘狀)을 진달(陳達)하고, 청하기를,
"연전(年前)에 본도에서 얻은 이전곡(移轉穀)은 우선 남겨 두었다가 진자(賑資)에 쓰고, 명년 가을을 기다려 도로 갚도록 허락하소서. 그리고 본도에서 응당 상납(上納)해야 하는 세미(稅米)·세태(稅太)는 은(銀)으로 절가(折價)384)  하여 상납하되 그 나머지와 태가(駄價)를 취(取)하여 진정(賑政)에 보태도록 허락하소서. 그리고 조적(糶糴)의 모곡(耗穀) 또한 바라건대 올해에 한하여 가져다 쓰게 하고, 병사(兵使)의 순력(巡歷) 또한 정지하게 하소서."
하니, 세자가 모두 허락하였다.

 

9월 4일 계유

내연(內宴)을 정지하도록 명하자, 예조(禮曹)에서 말하기를,
"진연(進宴)하는 처소(處所)는 정탈(定奪)한 바에 의거하여 경현당(景賢堂)에서 설행(設行)하고, 내연 또한 전례에 의거하여 광명전(光明殿)에서 거행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내전(內殿)이 내연의 일로 불안(不安)해 하는 바가 있어서 말하기를, ‘이는 전일(前日)의 내연과 다릅니다. 성상의 환후(患候)가 여러 해 동안 미령(未寧)하셔서 아직도 차도가 없어 바야흐로 밤낮으로 초민(焦悶)한 중에 있는데, 무슨 마음으로 잔치를 받겠습니까? 원컨대 속히 정지하소서.’ 하며 누누이 말하니, 이번에는 내연을 설행하지 말도록 하여 내전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편안하게 하려 한다."
하였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9월 5일 갑술

유성(流星)이 규성(奎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南方)으로 들어갔다.

 

승지가 동궁(東宮)에 입대하였다.

 

삼남(三南)을 좌도 균전사(左道均田使)와 우도 균전사(右道均田使)로 나누어, 이재(李縡)를 경상좌도 균전사로, 경상 감사(慶尙監司) 오명항(吳命恒)을 경상우도 균전사로, 김재로(金在魯)를 전라좌도 균전사로, 전라 감사(全羅監司) 신사철(申思喆)을 전라우도 균전사로, 홍석보(洪錫輔)를 충청좌도 균전사로, 충청 감사(忠淸監司) 권업(權𢢜)을 충청우도 균전사로 삼았다. 묘당(廟堂)의 의논이 한 도에 균전사를 1원씩 삼으면, 검찰(檢察)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하여 좌도와 우도로 나누고, 그 도의 감사와 나누어 다스리게 하기를 계청하니, 세자가 그대로 따른 것이다.

 

예조(禮曹)에서 말하기를,
"세자(世子)께서 문묘(文廟)에 배알(拜謁)하여 헌작(獻酌)하신 후 마땅히 집춘문(集春門)을 경유하여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시고 환궁(還宮)하실 때에는 마땅히 홍화문(弘化門) 동쪽 협문(挾門)을 경유하셔야 합니다."
하니, 세자가 옳게 여겼다.

 

예조(禮曹)에서 말하기를,
"문묘(文廟)의 전알(展謁)을 이미 10월 초1일로 정하였으니, 태묘(太廟)의 전알 또한 전에 정탈하신 바에 의거하여 그 이전으로 미루어 택일(擇日)하게 하소서."
하니, 세자가 이달 19일로 정하여 거행하게 하였다.

 

9월 6일 을해

예조(禮曹)에서 말하기를,
"진연(進宴) 때 나아가 참여하는 인원은 이전보다 수를 줄이라는 일을 정탈(定奪)하셨습니다. 청컨대 종친(宗親) 종2품과 동반(東班) 종2품의 실직(實職)과, 서반(西班)의 일찍이 시종(侍從)을 지낸 종2품 군직(軍職)과 문신(武臣)으로서 일찍이 아경(亞卿)을 지낸 사람과, 시임 총관(時任摠管) 이상과, 무신(文臣) 당상(堂上)으로서 실직(實職)인 사람 및 승지(承旨), 삼사(三司), 춘방(春坊),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나아가 참여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9월 8일 정축

달이 견우성(牽牛星) 남쪽의 작은 별을 범하였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진후(診候)를 마치자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말하기를,
"낮이 점차 짧아지고 천기(天氣)도 서늘해졌는데, 성상께서 환후(患候)가 미령(未寧)하신 가운데 종일 바깥에 계실 수는 없으니, 청컨대 구작(九酌)을 줄여 7작으로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9월 9일 무인

유성(流星)이 자성(觜星) 아래에서 나와 서방(西方)으로 들어갔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이병상(李秉常)을 부제학(副提學)으로, 홍용조(洪龍祚)를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비국(備局)에서 말하기를,
"지난번 재자관(齎咨官)의 행차에 예부에서 황지(皇旨)를 칭탁해 신사(信使) 일행 가운데 일에 효달(曉達)한 자 한 사람을 절사(節使)가 행차할 때 들여보내라는 일을 이자(移咨)하였는데, 통신사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니, 청컨대 이번 행차에는 들여보낼 수 없다는 뜻으로 이자하는 회보(回報)를 사행(使行)에게 부치게 하소서."
하니, 세자가 옳게 여겼다.

 

병조 판서 조도빈(趙道彬)이 면직(免職)되었다. 조도빈이 상서(上書)하기를,
"띠고 있는 벼슬은 출강(出疆)385)  하면 마침내 반드시 해면(解免)하게 되어 있으니, 바라건대 기일에 앞서 체차(遞差)하여 선묘(先墓)를 찾아가서 참배(參拜)하게 하소서."
하므로 세자가 이를 묘당(廟堂)에 내렸는데, 묘당에서 복주(覆奏)하자 허락하였다.

 

9월 10일 기묘

달무리가 져서 화성(火星)을 둘렀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9월 11일 경진

승지가 동궁에 입대하였다.

 

이기익(李箕翊)을 대사간(大司諫)으로, 황귀하(黃龜河)를 승지(承旨)로, 이만성(李晩成)을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삼았다.

 

9월 12일 신사

승지가 동궁에 입대하였다.

 

예조(禮曹)에서 말하기를,
"문묘(文廟)에 전알(展謁)하여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할 때에는 청컨대 태묘(太廟)에서 행례(行禮)할 때의 예에 의거하여 계성사(啓聖祠)386)  에도 관원을 보내어 전작(奠酌)하게 하소서."
하니, 세자가 옳게 여겼다.

 

9월 13일 임오

예조 판서(禮曹判書) 민진후(閔鎭厚)가 청대(請對)하니, 임금이 불러서 보았다. 민진후가 말하기를,
"왕세자가 알성(謁聖)한 뒤 이어 시사(試士)할 것인데, 서제(書題)를 시어소(時御所)에 와서 계품(啓稟)한 후에 걸면 왕래하는 즈음에 시각이 지체될 것입니다. 왕세자가 대신 거행하는 것은 사체(事體)가 명관(命官)과 다름이 있으니, 동궁(東宮)에게 수점(受點)하고 이어 걸게 해도 무방(無妨)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민진후가 말하기를,
"사람을 선발(選拔)하는 액수(額數)는 동궁이 마땅히 안에서 계품하여 정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민진후가 말하기를,
"시사(試射) 때 왕세자가 날마다 친히 나갈 수가 없으니, 단지 알성(謁聖)하는 날에만 그대로 종일 열무(閱武)하고, 그 후에는 명관(命官)을 보내는 것이 편호(便好)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이튿날부터 명관을 보내는 것이 옳다."
하였다. 민진후가 또 말하기를,
"계미년387)  에 명령하신 후 창건(創建)한 사원(祠院)을 조사하여 계문(啓聞)하게 하였는데, 다른 도에서는 이미 조사하여 계문하였으나 북도(北道)의 보문(報聞)은 이제야 비로소 왔습니다. 그 가운데 안변(安邊)의 이지온(李之馧), 무산(茂山)의 남구만(南九萬)·이세화(李世華)의 사우(祠宇)와 길주(吉州)의 길성군(吉城君) 허유례(許惟禮) 등의 사우는 모두 명령 후에 세운 것들인데, 허유례의 사우 가운데에 합향(合享)하는 여러 사람들은 모두 변방(邊方)의 수어(守禦)에 공(功)을 세우거나 혹은 왕사(王事)에 순절(殉節)한 사람들이니, 이미 세운 사우를 도로 철거(撤去)시키는 것이 중난(重難)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단지 허유례 등의 사우만 두고 안변·무산의 두 사우는 훼철(毁徹)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민진후가 말하기를,
"신이 봉심(奉審)하러 갔을 때 함흥(咸興)의 본궁(本宮)에 숙배(肅拜)하였는데, 본궁에는 명목(名目)을 괴이하게 여길 만한 별제(別祭)가 많이 있었습니다. 야백제(夜白祭)·야흑제(夜黑祭)·검제(劍祭) 등과 같은 것이었는데, 모두 그 의의(意義)를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또 의대(衣襨)388)  가 있으므로 이를 물어 보았더니, 대내(大內)에서 해마다 새것을 만들어 보내오면 옛날 것은 모두 태워 버린다고 하였는데, 이 또한 의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성상께서 즉위(卽位)하신 이래로 궐전(闕典)을 모두 다스리고 그릇된 전례(前例)를 모두 바로잡으셨으니, 군하(群下)가 그 누군들 흠앙(欽仰)하지 않겠습니까? 이와 같은 것을 개혁(改革)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천고(千古)에 의혹을 초래하게 될 것이니, 영녕전(永寧殿)의 예에 의거하여 음악을 써서 제사지내고 별제를 혁파하되, 참봉(參奉)으로 하여금 이를 지키게 한다면, 방례(邦禮)와 성덕(聖德)에 어찌 더욱 빛나지 않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함흥 본궁의 일은 오늘날에 창시(創始)한 것이 아니고 조종조(祖宗朝)부터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다. 그래서 나 또한 전례에 의거하도록 허락하였으니, 이제 갑자기 혁파하기는 어렵다."
하였다. 민진후가 자못 힘껏 말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는데, 전라도 균전사(全羅道均田使) 김재로(金在魯)가 청대(請對)하여 함께 입시(入侍)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갑술년389)  의 양척(量尺)은 준수척(遵守尺)과 모양이 어긋나는데, 그때에 그 자[尺]를 제멋대로 쓰지는 않았습니다. 호남 우도 균전사(湖南右道均田使) 박황(朴潢)이 이로써 진품(陳稟)하였더니, 해조(該曹)에서는 구척(舊尺)을 쓰도록 청하였습니다. 인조(仁祖)께서 하교(下敎)하시기를, ‘이미 내려 보냈는데, 분촌(分寸)이 조금 길다고 하여 버리고 쓰지 않는 것은 미안(未安)한 바가 있다.’ 하고, 대신(大臣)들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셨는데, 영상(領相) 윤방(尹昉)은 말하기를, ‘성교(聖敎)가 진실로 마땅합니다.’ 하였고, 우상(右相) 김상용(金尙容)은 도량형(度量衡)을 똑같이 한다는 글을 끌어대고 쓰지 말기를 청하니, 인조께서 특별히 명하여 영상의 의논을 쓰도록 하셨습니다. 인조의 뜻은 대개 위를 덜어 아래를 보태는 뜻에서 나왔으니, 결수(結數)가 비록 줄더라도 하민(下民)에게는 이롭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선조(先祖)의 수교(受敎)에 관계되어 문득 영갑(令甲)390)  을 이룬 것입니다. 신척(新尺)은 구척(舊尺)에 대해 그 차이가 포백척(布帛尺) 1촌(寸)에 지나지 않으므로, 다투는 바가 이미 매우 근소하였습니다. 그러니 인조(仁祖)의 관대한 덕(德)을 어찌 오늘날 마땅히 본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라건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속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세자가 옳게 여겼다. 김재로가 또 말하기를,
"이번의 사목(事目)에서 진황지(陳荒地)는 모두 6등으로 기록하게 하였으니, 대개 경작하지 않는 전지(田地)가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 갑술년의 문서(文書)를 상고해 보았더니, 그때에도 이러한 의논이 있었습니다. 인조(仁祖)께서 하교(下敎)하시기를, ‘진황지를 모두 6등으로 시행하면 도리를 어기면서 명예를 희구하는 수령(守令)이 반드시 핑계대는 바가 있을 것이다.’ 하자, 그때 묘당(廟堂)에서 복주(覆奏)하기를, ‘환히 앞일을 내다보신 것입니다.’ 하고, 마침내 네 곁의 전지를 따라 1등으로 하면 그 근처는 2등으로 하고, 곁의 전지를 5등으로 하면 그 근처는 6등을 하도록 청하였습니다. 지금도 이에 의거하여 근처의 토품(土品)에 따라 등급을 매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세자가 옳게 여겼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전토(田土)의 등차(等次) 상하(上下)를 묘당에서 품정(稟定)하면 또한 옛날에 견주어 1등을 넘지 못하게 하셨는데, 이 또한 그렇지 않은 바가 있습니다. 수도(水道)가 일정하지 않고 토품(土品) 또한 변개(變改)하는 바가 있으므로, 이전에 1, 2등에 있었다가 지금 5, 6등이 될 수 있는 경우가 있고, 이전에 5, 6등에 있었다가 지금은 1, 2등이 될 수 있는 경우가 있으니, 1등이 넘는 경우가 없도록 한다 하여 억지로 승강(升降)을 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또한 마땅히 묘당으로 하여금 거듭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니, 세자가 옳게 여겼다. 김재로가 또 말하기를,
"양전(量田)하는 일은 반드시 춘경(春耕) 이전에 역사를 마쳐야 할 것인데, 문서(文書)가 매우 번거로와서 만약 문서를 모두 수정(修整)하기를 기다린다면 비록 명년(明年) 가을이 되어도 완료하기 어려울 것이니, 그 사이에 도내(道內)에 머물러 지체한다면 반드시 많은 폐해(弊害)를 끼치게 될 것입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균전사(均田使)는 총수(總數)만 핵실하여 알아낸 후에 경중(京中)에 올라와서 관청(官廳)을 설치하고, 산원(算員)의 무리로 하여금 고준(考準)하고 마감(磨勘)하게 하는 것이 편호(便好)할 것이다.’ 하고, 혹자는 말하기를, ‘균전사는 단지 총수만 핵실해서 알아내어 돌아오고, 문서를 마감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감사(監司)로 하여금 완료하게 하는 것이 좋다.’고 하니, 또한 묘당으로 하여금 하나를 지정하여 품정(稟定)하게 한 후에야 봉행(奉行)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세자가 옳게 여겼다.

 

9월 14일 계미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하였다.

 

우윤(右尹) 이재(李縡)가 상소(上疏)하여 진연(進宴)을 정지하기를 원하였는데, 이르기를,
"이때가 어느 때인데, 이러한 일을 하려고 하십니까? 춘궁(春宮)은 위에서 초민(焦悶)하고 백료(百僚)는 아래에서 마음을 졸이며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한편에서는 약을 시중들고 한편에서는 잔치를 벌인다면, 어찌 근심과 즐거움을 동시(同時)에 하지 않는다는 경계에 어긋나는 바가 있지 않겠습니까? 춘궁이 열무(閱武)하는 데 이르러서도 그 시기가 아니라고 할 수 있으나, 성의(聖意)가 무예(武藝)를 다스리는 데에서 나왔으니, 진실로 중도에 정지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춘궁께서 시탕(侍湯)하는 중에 친림(親臨)할 필요는 없으니, 명관(命官)으로 하여금 대신 거행하게 하는 것이 진실로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경의 상소(上疏)를 살펴보건대, 나의 병(病)을 근심함이 지극하다고 할 수 있으니, 나를 사랑하는 정성을 매우 가상(嘉尙)하게 여긴다. 그러나 이 일은 본래 내가 즐거이 하려 한 것이 아니었다. 동궁(東宮)의 정성을 저버릴 수도 없고, 군하(群下)의 청 또한 굳이 물리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세자의 청정(聽政) 이후 문묘(文廟)의 전알(展謁)을 아직도 천연(遷延)하였으니, 어찌 미안(未安)하지 않겠는가? 이에 내가 세자에게 명하여 빨리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고, 인하여 춘당대(春塘臺)에 나가 시사(試士)하도록 한 것이다. 이미 시사하였으면 무재(武才) 또한 시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이는 까닭 없이 친림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하였다.

 

9월 15일 갑신

세자가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접(引接)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일전에 균전사(均田使) 김재로(金在魯)가 연중(筵中)에서 진백(陳白)하기를, ‘양역(量役)은 문서(文書)가 매우 호번하여 오랫동안 머물기 어려운 바가 있는데, 혹자는 감사(監司)에게 위임하여 마감하게 하자고 하고, 혹자는 경중(京中)에 올라와서 관청(官廳)을 설치하여 완료하게 하자고 하니, 청컨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하나로 지정해서 품처(稟處)하게 하소서.’하였는데, 균전사는 총수(總數)를 살펴본 후 먼저 올라오고, 문서는 각 고을에서 수정(修整)하여 보내며, 경중(京中)에 관청을 설치하여 완료하는 것이 과연 무방(無妨)할 듯합니다."
하고,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은 말하기를,
"그대로 감사로 하여금 마감(磨勘)하게 하자는 말이 더욱 편호(便好)한 듯합니다."
하고, 예조 판서(禮曹判書) 민진후(閔鎭厚)는 말하기를,
"주관(主管)하는 우도의 감사로 하여금 좌도의 문서(文書)를 마감하게 한다면, 어찌 난편(難便)한 일이 없겠습니까?"
하였는데, 김창집이 말하기를,
"이 일은 미리 정할 수가 없으니, 내려보낸 후에 형세를 살펴보아 시기에 임하여 장품(狀稟)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 합니다."
하니, 세자가 옳게 여겼다. 김창집이 또 말하기를,
"김재로가 진달한 진황처(陳荒處)는 그 네 곁의 전지(田地)에 따라 분등(分等) 및 등수(等數)를 매기는 데에 있어 한 등급의 한정(限定)에 구애(拘碍)하지 말라는 두 조항은 진실로 식견(識見)이 있는 말이니, 허락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세자가 옳게 여겼다. 김창집이 또 말하기를,
"김재로가 또 양척(量尺)의 일로 진달(陳達)한 바가 있는데, 법의(法意)로써 말한다면 마땅히 준수척(遵守尺)을 써야 할 것이나, 근래에 자[尺]의 일로 민간(民間)에서 소요(騷擾)하여 ‘조정에서 전결(田結)을 더 얻으려 한다.’고 합니다. 신의 뜻에는 이전에 이미 장척(長尺)을 썼으니, 지금도 그때의 예에 의거하여 장척을 쓰면 설령 전결이 조금 줄어든다 하더라도 인정(仁政)에 해롭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였는데, 이건명은 말하기를,
"듣건대 충청도(忠淸道)에서는 그후 기유년391)  에 양전(量田)하였을 때 도로 준수척(遵守尺)을 썼다고 하는데, 호서(湖西)에서는 단척(短尺)을 쓰고 양남(兩南)에서는 장척(長尺)을 쓰니, 이미 매우 고르지 못합니다. 또 늘어나고 줄어드는 것이 많지는 않으나, 백성의 마음은 반드시 양전의 일이 이루어지지 않기를 바라므로, 이와 아울러 나라를 원망하는 단서가 되는 것입니다."
하고, 호조 판서(戶曹判書) 송상기(宋相琦)는 말하기를,
"인조(仁祖)께서 준수척(遵守尺)을 쓰지 않으신 것은 백성의 원망이 있을까 염려해서였습니다. 또 품재(稟裁)를 거쳐 그대로 쓰도록 특명(特命)하면 곧 정식(定式)과 똑같으니, 이제 와서 그대로 쓰더라도 방해되지는 않습니다."
하고, 민진후는 말하기를,
"신이 듣건대 전라도(全羅道)는 병화(兵火)를 겪지 않았으므로, 갑술년392)   이전의 양척(量尺)도 있는데, 더욱 단소(短小)하다고 합니다. 자[尺]의 모양이 각기 다른 것은 이를 정교하게 만들지 못한 데에 지나지 않습니다. 갑술년에 수의(收議)하였을 때 고(故) 상신(相臣) 김상용(金相容)은 도량형(度量衡)은 똑같이 하는 법이라고 말하기까지 하였으니, 관계된 바가 어찌 중대하지 않겠습니까? 진실로 다툴 것이 많지 않다고 하여 다툴 필요가 없다면 경기·충청의 백성만 유독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이로써 말하건대 준수척을 쓰는 것이 마땅합니다. 모든 일은 모름지기 먼저 인정(人情)을 살펴야 하는데, 지금 민심(民心)이 모두 조정에서 민결(民結)을 더 얻으려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이를 집집마다 깨우칠 수는 없습니다. 경기·충청도의 자[尺]가 비록 양남(兩南)과 다르지만, 이제 다른 일로써 말하건대 팔도(八道)의 일은 각기 그 구례(舊禮)를 좇아 똑같지 않은 전례(前例)가 매우 많습니다. 호서에 이미 기유년의 자[尺]를 썼다면 지금도 기유년의 전례를 쓰고, 양남에 이미 갑술년의 자를 썼다면 지금 또한 갑술년의 자를 쓰는 것이 사체로 보아 무슨 해로움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건명이 말하기를,
"민진후의 말이 그럴 듯합니다. 다만 충청도 한 도의 경우 갑술년의 양전(量田) 때에는 장척(長尺)을 쓰고, 기유년의 양전 때에는 단척(短尺)을 썼는데, 또한 기유년에 미처 양전을 마치지 못하고 갑술년의 양전을 그대로 둔 고을이 있으니, 이 경우 장차 무엇을 따라야 마땅하겠습니까?"
하자, 민진후가 말하기를,
"대저 이 일은 갑자기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마땅히 오늘 들어 오지 않은 대신(大臣)들에게 물어서 처리하소서."
하니, 세자가 이를 옳게 여겼다. 민진후가 또 말하기를,
"대소(大小)의 증광시(增廣試) 액수(額數)가 같지 않은데, 진시(陳試)하는 자가 서로 넘나들어 부거(赴擧)함은 마땅하지 못하니, 청컨대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니, 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대사간(大司諫) 이기익(李箕翊)·장령(掌令) 남세진(南世診)이 전에 진달(陳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었으나, 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9월 16일 을유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빈궁(嬪宮)의 관례(冠禮)를 이달 20일 이후로 택일(擇日)해서 들여오도록 하라."
하니, 이에 예조(禮曹)에서 이달 26일로 택정(擇定)하여 아뢰었다.

 

장령(掌令) 남세진(南世珍)이 상서(上書)하여 내연(內宴)을 거행하기를 원하였는데, 이르기를,
"만약 성상께서 진연(進宴)을 받으시는 날 내연만 유독 거행하지 않는다면, 저하의 효성(孝誠)에 섭섭해 함이 반드시 많을 것이고, 경사(慶事)를 축하하는 성례(盛禮)에 부족함을 면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에 신이 입이 닳도록 우러러 청하며 번거롭고 외람됨을 피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고, 또 당하관(堂下官)으로서 가마를 탔다가 자수(自首)한 자는 곧바로 의금부(義禁府)에서 추문(推問)을 받게 하고, 동몽 교관(童蒙敎官)을 각별하게 가려서 차출(差出)하고, 수령(守令)의 남솔(濫率)393)  을 거듭 금지할 것을 청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내연의 일을 대조(大朝)께 우러러 계품(啓稟)하였더니, 대간(臺諫)의 말이 비록 좋으나 내전(內殿)이 잔치를 받지 않으려 함은 지극한 뜻에서 나왔으므로, 정지하라는 명은 내전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려는 까닭이라고 하교(下敎)하셨다. 다른 나머지 일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할 것이고, 남솔의 일은 도신(道臣)에게 거듭 신칙(申飭)하여 드러나는 대로 논죄(論罪)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후에 정언(正言) 홍용조(洪龍祚)가 상서(上書)하여 남세진을 배척하였는데, 이르기를,
"자신이 헌관(憲官)이 되어 내연을 거행하도록 청했으니, 실로 대각(臺閣)의 수치입니다."
하자, 남세진이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인피(引避)하며 홍용조(洪龍祚)를 침척하니, 홍용조 또한 인피하였는데, 헌부(憲府)에서 처치하여 남세진은 체차(遞差)하고 홍용조는 출사(出仕)하게 하였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9월 17일 병술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진후(診候)를 마치자, 도승지(都承旨) 김연(金演)이 말하기를,
"지난해 정시(庭試) 때에는 여러 시관(試官)들을 시어소(時御所)에 모이게 하여 낙점(落點)한 후 궐내(闕內)에 머물러 있게 하였다가 새벽에 시소(試所)에 나가게 하였었는데, 지금 춘당대(春塘臺)에서 시사(試士)할 때에는 고관(考官)을 장차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시어소에서 낙점하고, 왕세자가 궁궐을 나갈 때 배종(陪從)하여 시소로 가도록 명하였다. 김연이 말하기를,
"시권(試券)을 거둔 후에 그곳에서 그대로 과차(科次)394)  를 매겨야 하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그곳에서 과차를 매기고 방(榜)을 개탁(開坼)한 후에 방목 단자(榜目單子)를 가지고 와서 올리는 것이 옳다."
하였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문학(文學) 정석오(鄭錫五)·설서(說書) 서종섭(徐宗燮)이 말하기를,
"성상의 환후(患候)에 차도가 없어 곁을 떠날 수 없으니, 대조(大朝)께 계품(啓稟)하시어 태묘(太廟)의 전알(展謁)을 조금 늦추도록 하소서."
하니, 세자가 이를 허락하였다가, 이날 저녁에 하령(下令)하기를,
"궁관(宮官)이 진달(陳達)한 바로 인하여 태묘의 전알을 조금 늦추는 일을 대조께 계품하였더니, 늦추어 거행하지 말라고 하교(下敎)하셨다."
하였다.

 

9월 18일 정해

조영복(趙榮福)을 승지(承旨)로, 임방(任埅)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조도빈(趙道彬)을 한성 판윤(漢城判尹)으로, 민진후(閔鎭厚)를 판의금(判義禁)으로, 김상옥(金相玉)을 부교리(副校理)로, 황보겸(皇甫慊)을 후릉 참봉(厚陵參奉)으로 삼았다. 황보겸은 곧 단종조(端宗朝)의 구신(舊臣) 황보인(皇甫仁)의 후손이다.

 

승지가 동궁에 입대하였다.

 

9월 19일 무자

왕세자(王世子)가 태묘(太廟)에 배알(拜謁)하였다. 오시(午時)에 세자가 궁궐을 나가서 태묘에 나아갔다. 문 밖에 이르러 연(輦)에서 내려 소여(小輿)를 타고 재실(齋室)에 들어갔다. 면복(冕服)을 갖추고 걸어서 정전(正殿)에 이르러 사배례(四拜禮)를 거행하고, 전(殿)에 올라 봉심(奉審)을 마치고, 또 영녕전(永寧殿)에 나아가 사배례를 거행하고 전에 올라 봉심하였다. 궁관이 소여에 오르기를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고, 걸어서 재실에 돌아와 잠시 쉬었다가 궁궐로 돌아왔다.

 

9월 20일 기축

헌부(憲府)에서 전에 계달(啓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양덕 현감(陽德縣監) 박횡(朴鐄)은 잔열(孱劣)한데다가 착하기만 하고 주변이 없어 매사에 무능한데, 백성들이 명에 따르지 않는 것에 노하여 차인(差人)을 보내어 잡아들였더니, 수백 명의 난민(亂民)이 떼를 지어 돌입해서 도로 빼앗아 갔습니다. 이와 같은 경우가 세 번이나 되었으나 감히 누구인지 힐문하지도 못하였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였으나, 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9월 21일 경인

유성(流星)이 규성(奎星) 위에서 나와 직녀성(織女星)으로 들어갔다.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조상경(趙尙絅)을 지평(持平)으로, 홍용조(洪龍祚)를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증광 문과 전시(增廣文科殿試)에서 정형익(鄭亨益) 등 33인에게 문과 급제(文科及第)를 내렸다.

 

대사헌(大司憲) 이희조(李喜朝)가,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가 편한 《경연고사(經筵故事)》를 모방(模倣)하여 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이이(李珥)·성혼(成渾)·김장생(金長生) 등이 연중(筵中)에서 주달(奏達)한 말을 채록해 합쳐 두 책으로 만들어 이름을 《속경연고사(續經筵故事)》라 하고, 또 정몽주(鄭夢周) 이하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한 9인의 장주(章奏)를 모아서 8책을 만들어 이름을 《동현주의(東賢奏議)》라 하였는데, 상소(上疏)할 때 같이 바쳤으며, 신기(神氣)가 편안할 때 옥당관(玉堂官)을 불러들여 약간편(若干篇)을 읽게 하고 들어 읽는 것이 끝나면 왕세자에게 내보여 체험(體驗)하여 시행하도록 기필하기를 원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批答)을 내렸다.

 

간원(諫院)에서 전에 진달(陳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후릉 참봉(厚陵參奉) 황보겸(皇甫慊)은 황보인(皇甫仁)의 적장손(嫡長孫)이 아니니, 청컨대 다시 적손(嫡孫)을 구하여 녹용(錄用)하소서."
하였는데, 세자가 단지 말단의 일만 따랐다.

 

9월 23일 임진

호조(戶曹)에서 양척(量尺)의 일로 대신(大臣)에게 의논하였는데,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이명(李頤命)은 청하기를,
"우선 양역(量役)을 정지하고, 조금 풍년이 들기를 기다리소서. 자[尺]의 경우 장척(長尺)은 이미 과제(過制)395)  이고, 이른바 준수척(遵守尺)은 새긴 것이 쉽게 본래 바탕을 잃고, 목판은 건조하거나 습기가 있으면 찍은 것이 때에 따라서 짧아지거나 길어지니, 또한 준거하여 믿기가 어렵습니다. 일찍이 《소대전칙(昭代典則)》을 보았더니, 홍무(洪武)396)   4년(1371)에 옥(玉)으로 만든 도기(圖記)는 사방이 1촌 5분인데, ‘광운지기(廣運之記)’란 문자를 새겼습니다. 만약 내간(內間)의 서화(書畵)나 도적(圖籍) 가운데 이 도기를 찍은 것이 있어 그 촌수(寸數)에 의거해 척도(尺度)를 고쳐 만들어 사용한다면, 거의 오차(誤差)를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판중추부사 김우항(金宇杭)은 단척(短尺)을 쓸 것을 청하고, 판중추부사 조태채(趙泰采)는 장척(長尺)을 쓸 것을 청하니, 세자가 하령(下令)하기를,
"구척(舊尺)을 쓰는 것이 마땅할 듯하며, 양전(量田)의 역사는 결단코 중지하기 어렵다."
하였다. 호조에서 또 말하기를,
"준수척이 본래 구척인데, 양남(兩南)에서는 갑술년397)  에 쓴 자가 구척이 되니, 어떤 자를 구척으로 정해서 써야 마땅하겠습니까?"
하니, 세자가 준수척을 쓰도록 하였다.

 

9월 24일 계사

달이 헌원 우각성(軒轅右角星)을 범하였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형조 판서(刑曹判書) 권성(權𢜫)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일전에 인접(引接)하셨을 때 외람되게 대부(大夫)의 뒤를 따라 경광(耿光)을 뵈었는데, 저하께서는 조용하고 차분히 계신 채 끝내 군하(群下)의 뜻을 물어보시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진실로 일에 임하여 신중하게 하는 도리이겠습니다마는, 묻기를 좋아하고 살피기를 좋아하는 것이 우순(虞舜)의 성덕(聖德)이었습니다. 오로지 침묵을 지키는 것만 숭상하시어 떨쳐서 면려(勉勵)하는 바가 없으시면, 장차 어떻게 신민(臣民)의 큰 바람에 부응(副應)하고 대조(大朝)의 부탁을 이루실 수 있겠습니까? 대조(大朝)께서 40년 동안 근로(勤勞)하신 나머지 저하께서 정일(精一)한 교훈을 이어받아 계술(繼述)하는 책임을 맡으셨으니, 밤낮으로 근로하셔야 할 것인데, 어찌 방관하신 채 침묵만 지키고 계십니까?"
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내가 마땅히 유의(留意)하겠다."
하였다.

 

9월 25일 갑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진후(診候)를 마치자,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말하기를,
"관무재(觀武才) 때 여러 대장(大將)들의 치사(馳射)는 매번 시기에 임하여 하교(下敎)하셨는데, 이번에는 이미 친림하지 못하시므로 모름지기 미리 하교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깥의 의논은 ‘대장의 치사(馳射)는 마땅히 왕세자께서 시장(試場)에 임어하시는 날에 시험해야 하며, 명관(命官)이 시사(試射)를 감독할 때에는 사체(事體)가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첫날 시험하도록 명하였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9월 26일 을미

사시(巳時)에 세자빈(世子嬪)의 관례(冠禮)를 거행하였다.

 

승지(承旨)가 동궁에 입대하였다.

 

9월 27일 병신

승지가 동궁에 입대하였다.

 

이조 참의(吏曹參議) 김재로(金在魯)가 상서(上書)하기를,
"바라건대 대조(大朝)께 계품(啓稟)하여 인조(仁祖)의 성의(盛意)를 좇아 장척(長尺)을 쓰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일전에 양척(量尺)에 대해 수의(收議)해서 이미 대조께 계품하여 판하(判下)하였다. 이제 또 바꾸는 것은 결단코 불가(不可)한 줄로 안다."
하였다.

 

9월 28일 정유

사시(巳時)에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진연(進宴)을 받았다. 임금이 곤룡포(袞龍袍)에다 익선관(翼善冠)을 갖추고 대여(大輿)를 타고 나가니, 내시(內侍)가 궤장(几杖)을 받들고 따랐는데, 산선(繖扇)과 시위(侍衛)는 의장(儀仗)과 같이 하였다. 고취(鼓吹)를 울려 진작(振作)하자 여민락(與民樂)을 연주하고,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들어가자 고취가 그치고 헌가악(軒架樂)을 연주하였다. 임금이 어좌(御座)에 오르자 내시가 궤장을 받들어 어좌 곁에 두고, 상서원(尙瑞院)의 관원(官員)이 어보(御寶)를 받들어 안(案)에 놓으니 음악이 그쳤다. 근시(近侍)와 여러 집사관(執事官)들이 전(殿)에 내려와 먼저 사배례(四拜禮)를 행하고, 예를 마치자 다시 입시(入侍)하였다.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나아가 엎드려 문후(問候)하고, 물러나 자리에 돌아갔다. 왕세자(王世子)가 종친(宗親)과 문무 백관(文武百官)을 거느리고 배위(拜位)에 나아가자 음악이 연주되고, 사배례를 행하고 마치니 음악이 그쳤다. 제조(提調)가 주기(酒器)를 바치자 음악이 연주되고, 바치기를 마치자 음악이 그쳤다. 왕세자 이하가 모두 꿇어앉고, 제조가 휘건(揮巾)을 바치자 음악이 연주되고, 내시가 휘건을 받아 바치기를 마치니 음악이 그쳤다. 제조가 찬안(饌案)을 바치자 음악이 연주되고, 바치기를 마치니 음악이 그쳤다. 제조가 행과(行果)를 바치자 음악이 연주되고 바치기를 마치니 음악이 그쳤다. 승지(承旨)가 꿇어앉아 꽃을 바치기를 청하여 화반(花盤)을 바치자 음악이 연주되고, 내시가 꽃을 받아 바치기를 마치니 음악이 그쳤다. 제조가 염수(鹽水)를 받들자 음악이 연주되고, 내시가 받아 바치기를 마치니 음악이 그쳤다. 왕세자 이하가 부복(俯伏)·흥(興)·평신(平身)하고, 다시 꿇어앉았다. 제조가 소선(小饍)을 바치자 음악이 연주되고, 바치기를 마치니 음악이 그쳤다. 왕세자 이하가 부복·흥·평신하였다.
전악(典樂) 2인이 동서로 나누어 서서 존숭 악장(尊崇樂章)을 창하여 유천지곡(維天之曲)을 마치자, 상례(相禮)가 왕세자를 인도하여 동계(東階)로부터 올라가 동문(東門)을 거쳐 들어가서 제1작을 올려 제조에게 주고 배위(拜位)에 나아가 꿇어앉으니, 종친과 문무 백관이 모두 꿇어앉았다. 치사관(致詞官)이 서계(西階)로부터 올라가 서문(西門)을 거쳐 들어가서 어좌(御座) 앞에 나아가 꿇어앉아 치사(致詞)하고 물러났다. 임금이 작(爵)을 들자 음악은 천년만세곡(千年萬歲曲)이 연주되고, 제조가 나아가 빈 작(爵)을 받아 다시 점(坫)에 놓으니 음악이 그쳤다. 왕세자 이하가 부복·흥·평신하고 다시 꿇어앉았다. 제조가 고기를 베어 꿇어앉아 찬안(饌案)의 오른쪽에 바치자 음악은 청평곡(淸平曲)이 연주되고, 제조가 만두(饅頭)를 바치고, 이를 마치니 음악이 그쳤다. 왕세자 이하가 부복·흥·평신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제2작을 바치고 치사관(致詞官)이 치사를 바치기를 전의 의식(儀式)과 같이 하였다. 전교관(傳敎官)이 동문(東門)을 거쳐 나가서 계단에 임하여 서쪽을 향해 서서 전교(傳敎)하기를, ‘공경히 경들은 작(爵)을 들라.’ 하고, 임금이 작을 들자 음악은 오운개서조(五雲開瑞朝)가 연주되고, 왕세자 이하가 삼고두(三叩頭)와 산호(山呼)의 예(禮)를 거행하니 음악은 환환곡(桓桓曲)이 연주되었다. 왕세자 이하가 사배하니 음악이 그쳤다. 상례(相禮)가 왕세자를 인도하고, 인의(引儀)가 종친과 문무 백관을 나눠 인도하여 전(殿)에 올라 자리에 나아갔다. 임금이 시위(侍衛)하는 제장(諸將)에게 명하여 자리에 나아가게 하였다. 전악(典樂)이 가자(歌者)와 금슬(琴瑟)을 인도하여 동서(東西)로 나누어 계단에 올라가 서게 하였다. 부제조가 왕세자의 찬탁(饌卓)에 별행과(別行果)를 바치고, 보덕(輔德)이 꽃을 바쳤으며, 부제조가 왕세자에게 찬(饌)을 바쳤다. 집사자(執事者)가 종친과 문무 백관의 찬탁(饌卓)을 배설하였다. 산화(散花)를 마치고, 제조가 탕(湯)을 바치자 음악이 연주되고, 왕세자 이하가 자리를 떠나 부복하였다가 바치기를 마치니 도로 자리에 나아갔다. 부제조가 왕세자에게 탕(湯)을 바치고, 집사자가 종친과 문무 백관에게 탕을 배설하기를 마치자 음악이 그쳤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이명(李頤命)이 제3작을 바쳤는데, 의식은 전과 같이 하였으며, 음악은 보허자령(步虛子令)이 연주되고, 무동(舞童)이 들어와서 춤을 추었다. 부제조가 왕세자에게 술을 바치고, 집사자가 종친과 문무 백관에게 술을 돌렸다. 이하 작(爵)을 바칠 때에는 다 전의 의식과 같게 하였는데, 바치기를 마치니 음악이 그쳤다. 탕을 바치고, 전성군(全城君) 이혼(李混)이 제4작을 바치자 음악은 정읍만기(井邑慢機)가 연주되었으며, 무동이 들어와서 춤을 추었다.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이 제5작을 바치자 음악은 보허자령(步虛子令)이 연주되고, 무동이 들어와 춤을 추었고, 천년만세곡(千年萬歲曲)이 연주되었다.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주신(金柱臣)이 제6작을 바치자 음악은 정읍만기(井邑慢機)가 연주되고, 무동이 들어와서 춤을 추었으며, 청평곡(淸平曲)이 연주되었다. 행 호조 판서(行戶曹判書) 송상기(宋相琦)가 제7작을 바치자 음악은 여민락령(與民樂令)이 연주되고 무동이 들어와 춤을 추었다. 제조가 소찬(小饌)을 물리고 대찬(大饌)을 바치자 음악은 태평년지곡(太平年之曲)이 연주되고, 이어서 여민락(與民樂)이 연주되었으며, 향악(鄕樂)과 당악(唐樂)을 잇따라 연주하고, 처용무(處容舞)가 들어와 춤을 추었다. 부제조가 왕세자에게 찬을 바치고, 집사자(執事者)가 종친과 문무 백관에게 찬을 배설하고, 이를 마치니 음악이 그쳤다. 조금 후에 제조가 나아가 찬안(饌案)을 거두고, 부제조가 왕세자의 찬탁을 거두었으며, 집사자가 종친과 문무 백관의 상(床)을 거두었다. 이를 마치자 여러 대신(大臣)들이 함께 나아가 경축(慶祝)하는 말을 아뢰었다.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 말하기를,
"신민이 너무 다행스럽게도 오늘의 경사를 볼 수 있었는데, 조정(朝廷)에 있는 여러 신하들은 비록 함께 즐길 수 있었으나 팔도(八道)의 소민(小民)에게는 은혜가 고루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옛날부터 이와 같은 큰 경사에는 매번 추은(推恩)하는 일이 있었는데, 한 가지 정사(政事)와 한 가지 일을 시행함은 큰 은혜를 베풀기에 족하지 않습니다. 양역(良役)을 변통(變通)하는 의논은 이제까지 결정하지 못하였는데, 춘궁(春宮)이 대리(代理)한 지 오래 되어 점차 더욱 밝게 익혀가고 있으니, 만약 한가로운 가운데에 백성들의 질고(疾苦)를 더욱 익숙히 알게 하시고 추후로 인은(仁恩)을 시행하게 하신다면, 팔도의 생령(生靈)들이 장차 반드시 수역(壽域)398)  에서 함께 살게 될 것이니, 은혜가 더할 수 없이 클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진계(陳啓)한 바가 절실하니, 마땅히 유의(留意)하겠다."
하였다. 영의정 김창집이 말하기를,
"춘궁이 알성(謁聖)할 날이 이미 임박하였습니다. 신이 전일에 차자(箚子)를 올려 여러 유생(儒生)들에게 교유(敎諭)하시기를 청하였습니다만, 이번에는 알성(謁聖)한 뒤 그대로 그곳에서 시사(試士)하는 것과 다르고, 곧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서 시장(試場)을 베풀어야 하니, 그 사이에 미처 선유(宣諭)하지 못하게 될 듯합니다."
하였는데, 판중추부사 조태채(趙泰采)와 우의정 이건명이 모두 말하기를,
"한편으로 유시(諭示)를 듣고 한편으로 부거(赴擧)하려면 글을 짓는 데 급한 나머지 자못 성실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에는 분답(紛沓)해서 할 수가 없겠다."
하니, 여러 대신들이 물러나 자리에 나아갔다. 왕세자가 내려가서 배위(拜位)에 나아가 종친과 문무 백관을 거느리고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자 음악이 연주되고, 이를 마치자 음악이 그쳤다. 통례(通禮)가 꿇어앉아 예(禮)가 끝났음을 아뢰자 공인(工人)이 축(柷)을 두드려 음악이 연주되었으며, 임금이 여(輿)를 타고 궐내(闕內)로 돌아가니 공인이 어(敔)를 두드려 음악이 그쳤다. 왕세자가 대궐로 돌아가고, 의장(儀仗)을 해산하였다.

 

9월 29일 무술

유성(流星)이 북극성(北極星) 위에서 나와 건방(乾方)으로 들어갔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9월 30일 기해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내일 동궁(東宮)이 춘당대(春塘臺)에서 시사(試士)할 때 갑과(甲科) 1인, 을과(乙科) 1인, 병과(丙科) 2인으로 액수(額數)를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진연(進宴) 때의 진작관(進爵官) 김창집(金昌集) 등에게 말을 내려주고, 진연청 당상(進宴廳堂上) 김주신(金柱臣) 이하 낭청(郞廳) 등에게 말을 내려주고, 차등있게 승서(陞敍)하도록 명하였다.

 

김상옥(金相玉)을 장령(掌令)으로, 박필정(朴弼正)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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