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경자
세자가 새벽에 문묘(文廟)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였다. 이어 창덕궁(昌德宮)에 나아가 춘당대(春塘臺)에서 시사(試士)하고, 또 무재(武才)를 시험하였는데, 문과(文科)에서 남수현(南壽賢) 등 4인을 뽑았다.
10월 2일 신축
유성(流星)이 정성(井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다.
왕자(王子) 연령군(延齡君) 이훤(李昍)이 졸(卒)하였다. 훤은 자(字)가 문숙(文叔)인데, 임금의 세째 아들로서, 성품이 효성스럽고 근실하였다. 사제(私第)에 나가 살았는데, 폐해(弊害)가 백성들에게 미치지 않았다. 임금이 병든 후 밤낮으로 곁에서 모시며 조금이라도 게을리함이 없었으니, 임금이 매우 사랑하였다. 이에 이르러 졸하니, 나이 21세로 아들이 없었다. 임금이 매우 슬퍼하여 스스로 글을 지어 제사지내고, 또 친히 묘문(墓文)을 지었다. 시호(諡號)는 효헌(孝憲)이라 하였다.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졸(卒)한 연령군(延齡君)의 집에 친림(親臨)하는 일을 거행하도록 하라."
하고, 춘당대(春塘臺)와 모화관(慕華館)의 시재(試才)를 우선 정지하였다가 6일[乙巳]부터 다시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제조 민진원(閔鎭遠)·부제조 김연(金演) 등을 거느리고 합문(閤門) 밖에 나아가 문후(問候)하고, 연령군(延齡君)의 집에 친림(親臨)하는 일을 정지하기를 청하여 세 번 아뢰었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으며, 정원(政院)에서 또한 정지하기를 청했으나 임금이 또한 따르지 않았다. 홍문관 부응교(弘文館副應敎) 김운택(金雲澤)·부교리(副校理) 조상건(趙尙健) 등이 차자(箚子)를 올려 쟁론(爭論)하였으나, 임금이 비답(批答)을 내리지 않고 재촉해 엄가(嚴駕)399) 를 명하니, 위사(衛士)들이 이미 집합하였다. 곤전(坤殿)이 약방에 하교하기를,
"성상께서 여러 해 동안 고질병이 드신 나머지에 억지로 친림(親臨)하시려 하고 있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상차(喪次)에 거둥하시면 성상의 환후가 반드시 손상됨이 있을 것인데, 내전에서는 다투어 정지시킬 도리가 없으니, 오직 대신(大臣)들이 힘써 정지하기를 다투는 외에 다른 도리가 없다. 모름지기 다른 대신들과 함께 청대(請對)하여 반드시 돌이킬 것을 기필하도록 하라."
하니, 이이명이 말하기를,
"신 등이 이미 이러한 뜻을 다른 정승들에게 통지하고, 상량하여 등대(登對)해서 정지를 간청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다투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약방의 세 제조가 먼저 청대하니, 임금이 불러 흥정당(興政堂)에 이르렀다. 이이명이 친림할 수 없는 상황을 극진하게 아뢰자, 임금이 눈물을 뿌리고 오열하며 말하기를,
"나의 두 눈이 물건을 보지 못하니 비록 가더라도 무엇을 하겠는가마는, 단지 입관(入棺)하기 전에 그 시신(屍身)이라도 한 번 어루만져 보려는 것이다. 경 등은 모름지기 나의 지극한 정리(情理)를 헤아려 억지로 다투지 말라."
하였다. 이어서 판중추부사 조태채·영의정 김창집·우의정 이건명 등이 합문(閤門)에 나아가 청대(請對)하자 임금이 불러서 보았는데, 승지(承旨)와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도 따라 들어가 여러 사람이 번갈아 간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가보지 못하고 이곳에 앉아 슬퍼하고 번민만 하면 반드시 다른 병이 첨가(添加)될 것이다. 한 번 가서 슬픔을 풀어버리면 결단코 손상되는 바가 없을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 이에 대사간(大司諫) 이기익(李箕翊)·집의(執義) 박성로(朴聖輅)·사간(司諫) 윤석래(尹錫來)·응교(應敎) 김운택(金雲澤)·교리(校理) 조상건(趙尙健)·헌납(獻納) 조명겸(趙鳴謙) 등이 합사(合辭)하여 말하기를,
"지금 상차(喪次)에 친림하시겠다는 명이 지극히 인자하신 정리(情理)에서 나왔음을 신 등이 또한 어찌 알지 못하겠습니까마는, 다만 생각하건대 성상의 환후가 바야흐로 여러 해 동안 깊이 고질이 된 가운데에 있는데, 갑자기 동가(動駕)하여 정(情)이 북받치는 대로 임곡(臨哭)하신다면 여러 증세가 첨가될 것이 틀림없으니, 이는 이미 대성인(大聖人)의 병에 대해 삼가는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며, 종사(宗社)와 생민(生民)의 근심은 더욱 다시 어떠하겠습니까? 청컨대 세 번 더 생각하셔서 상차에 친림하시겠다는 명을 빨리 거두소서."
하니, 임금이 오랫동안 있다가 비로소 답하기를,
"병이 더해질 것을 염려하여 이와 같이 진청(陳請)하니, 부득이 억지로 따르겠지만, 발인(發靷)하기 전에 한 번 임어하지 않을 수 없다."
하자, 여러 신하들이 마침내 기뻐하여 사례하고 나갔다. 이날 임금의 슬픔이 지극히 심중(深重)하여 차마 우러러볼 수가 없었는데, 군신(群臣)이 진언(進言)하면 곧 누구냐고 묻고는 반드시 온화한 말로 답하였다. 그리고 삼사(三司)에서 합계(合啓)하자 정리를 억제하여 따랐으니, 군하(群下)로서 허심탄회하게 아랫사람을 접대(接待)하는 도량을 칭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인하여 이이명이 도승지(都承旨) 김연(金演)으로 하여금 나가서 연령군의 초상(初喪)을 호상(護喪)하게 하기를 청하였으니, 대개 김연의 종손녀(從孫女)가 연령군의 부인(夫人)이 되기 때문이었다. 여러 신하들이 물러가자 비로소 옥당(玉堂)의 차자(箚子)에 비답하기를,
"친림하는 일절은 우선 정지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이날 왕세자가 또한 장차 상차(喪次)에 친림(親臨)하려 하자, 춘방(春坊)의 여러 신하들이 청대(請對)하여 정지할 것을 다투고, 대조(大朝)에게 계품(啓稟)하여 정지하기를 청하니, 세자가 하령(下令)하기를,
"마땅히 계품하여 거행하겠다."
하였다. 잠시 후에 다시 하령하기를,
"연령군의 상차에 대조께서 친림하실 때 마땅히 어가(御駕)를 따라야 하니, 친림 단자(親臨單子)를 도로 주고 거애(擧哀)하는 절목(節目)을 마련하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3일 임인
왕세자가 존현각(尊賢閣)에 나아가 연령군(延齡君)을 위해 거애(擧哀)하였다.
10월 4일 계묘
달이 남두 제2성(南斗第二星)을 범하였다. 번개가 쳤다.
10월 5일 갑진
승지가 동궁에 입대(入對)하였는데, 집의(執義) 박성로(朴聖輅)가 함께 들어가서 전에 진달(陳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었으나, 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예조(禮曹)에서 전일에 민진후(閔鎭厚)가 진달(陳達)한 진시(陳試)의 부거(赴擧)를 허락하는 일로 인하여 대신(大臣)들에게 의논하였는데,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대과(大科)의 3백과 6백에 달하는 별시(別試)와 대소(大小)의 증광시(增廣試)에 진시(陳試)할 자를 각각 그 과(科)에 붙인 것은 그 액수(額數)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감시(監試)에 이르러서는 둘로 나뉜 것이 많아지는 데 관계될 듯하나, 대소의 증광시와 감시를 물론하고 초시(初試)의 액수는 원래 다소(多少)의 다름이 없으니, 모두 통틀어 허락하는 것이 무방(無妨)할 듯합니다."
하였는데,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조태채(趙泰采)와 김우항(金宇杭) 등도 김창집의 의논과 같으니, 세자가 그 의논을 쓰도록 하였다.
10월 6일 을사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세자가 영남 균전사(嶺南均田使) 이재(李縡)와 호서 균전사(湖西均田使) 홍석보(洪錫輔)로 하여금 내일 사조(辭朝)하도록 하였다. 이때 이재는 어버이의 병을 끌어대고 홍석보는 병을 핑계로 둘 다 여러 번 상소(上疏)하여 체차(遞差)를 원하였다. 그래서 조정에서 잇따라 재촉하는 명이 있었으나, 가려고 하지 아니하였다. 이에 비국(備局)에서 재촉할 것을 계청(啓請)하며 나라일은 쉴 틈이 없다는 말을 끌어대기에 이르렀으므로 이러한 하교가 있었으나, 이재 등은 또 명(命)을 받들지 않았다.
10월 7일 병오
유성(流星)이 동정성(東井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겨울에 천둥이 울렸다 하여 차자(箚子)를 올려 인책(引責)하고 책면(策免)을 원하였으나, 임금이 위유(慰諭)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보덕(輔德) 송성명(宋成明)이 겨울에 천둥이 울렸다 하여 상서(上書)하여 진계(陳戒)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저하께서 정사(政事)를 청단(聽斷)하신 지 비록 오래되었다 하나, 아직 대정령(大政令)과 대시조(大施措)가 스스로 결단하신 데에서 나온 적이 없었고, 승지(承旨)가 입대(入對)할 때에 ‘달(達)’ 자를 찍어 내리는 데에 지나지 않았으며, 전례에 따라 서답(書答)할 따름이었습니다. 대저 어찌 실덕(失德)과 폐정(弊政)이 있어 재이(災異)를 불러 앙화(殃禍)를 초래하는지요? 신이 저으기 생각해보건대 저하의 과실(過失)은 너무 지나치게 간묵(簡默)하시는 데에 있으니, 《서경(書經)》 열명편(說命篇)에도 이르기를, ‘말을 하지 않으면 신하들은 명령을 받을 수 없게 된다.’ 하였습니다. 신이 작년에 날마다 서연(書筵)·소대(召對)에 모시면서 매번 문의(文義)를 강독(講讀)할 즈음에 저하께서는 토론(討論)하고 문난(問難)하는 일이 전혀 없으므로, 신이 일찍이 울울(鬱鬱)한 채로 물러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전후로 강관(講官)의 반열(班列)에 있던 자로서 근심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대저 만기(萬機)를 대리하신 후에 미쳐서는 더욱 사체(事體)가 전일과 크게 다름이 있습니다. 무릇 호령(號令)을 낼 때에는 반드시 말을 기다린 후에 선포하고, 제정(制定)한 일이나 재결(裁決)하는 일도 또한 말을 기다린 후에 결단하는 법이니, 말씀을 하지 않으시면 어떻게 정사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지난번 비국(備局)에서 차대(次對)하였을 때 태보(台輔)400) ·빈객(賓客)의 신하들과 옥당(玉堂)·대각(臺閣)의 관원들이 모두 앞에서 번갈아 아뢰었으나 저하께서는 좌우(左右)를 보시며 듣지 않으시는 것과 같았고, 마침내 한 마디 발락(發落)401) 하신 것이 없었으니, 결국 여러 신하들이 권도(勸導) 하는 바와 저하께서 수응(酬應)하시는 바는 입품(入稟)과 수의(收議)의 두 조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이 감히 알지 못하겠지마는, 저하께서는 혹 그 말이 세쇄(細瑣)하고 번거로와 죄다 마음에 족히 둘 것이 없다고 여기셔서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절목(節目)의 편부(便否)를 미처 잘 이해하지 못하셔서 그런 것입니까? 어찌 그다지도 한만하고 답답하기만 하여 한 번 과단성(果斷性)을 발휘하여 운용(運用)할 기회를 잃는단 말입니까? 삼가 원하건대 저하께서는 이제부터 무릇 대소 관원을 인접하실 때 흔쾌하고 허탄(虛坦)한 마음으로 막힘없이 꿰뚫어 보시어 호분 누석(毫分縷析)402) 하듯 분변(分辨)하시고 강물이 흐르듯이 명쾌하게 결단하소서. 혹 말이 떨어지는 즉시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 있거나, 지극히 빨리 대응(對應)할 일이 있을 경우에도 모름지기 묻기를 좋아하고 천근(淺近)한 말이라도 살피시어 상확(商確)하기를 게을리하지 마셔서 담당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뜻을 보이시고, 천연(遷延)하여 결정을 보지 못하는 안건(案件)이 되지 않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일동 일정(一動一靜)과 일빈 일소(一嚬一笑)에 이르러서는 위의(威儀)의 절도(節度)에 관계되니, 또한 마땅히 항상 검섭(檢攝)하여 첨시(瞻視)를 높임이 마땅합니다. 이어 삼가 생각하건대 재이(災異)란 하늘이 인애(仁愛)로써 경고(警告)하는 것이니, 옛날에는 국가에서 재이를 만나면 임금이 반드시 교지(敎旨)를 내려 구언(求言)403) 하고, 상신(相臣)은 책면(策免)하며, 삼사(三司)에서는 진계(陳戒)하였습니다. 그러나 진실로 수성(修省)하는 실상이 없으면 모두 문구(文具)일 뿐인데, 근래에는 문구조차도 아울러 폐지되었습니다. 지난번 성묘(聖廟)의 회나무에 벼락이 떨어진 일과 태묘(太廟)의 집이 무너진 일은 예전에 없던 변고(變故)였으며, 지금 〈겨울에〉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치는 변고는 마음을 두렵게 하고 이목을 놀라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하(上下)가 태연하여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동요하는 바가 없으니, 아! 천변(天變) 또한 두려워할 것이 못 된다는 것입니까? 신은 저으기 개연(慨然)하게 여깁니다."
하였는데, 세자가 답하기를,
"말이 지극히 간절하니,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하였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진후(診候)를 마치자,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저번에 비통한 일을 당한 나머지 정리(情理)가 매우 박절하여 입관(入棺)하기 전에 한 번 가서 영결(永訣)하고자 하였으나, 여러 신하들의 청(請)을 억지로 어기기 어려워서 부득이 억지로 따랐다. 그러나 발인(發靷)하기 전에 한 번 임어(臨御)하겠다는 뜻을 또한 이미 하교(下敎)하였다. 겨울철의 날씨는 진실로 예측하기가 어려우니, 아직 추워지지 않았을 때 한 번 임어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제조(提調) 민진원(閔鎭遠)·도승지(都承旨) 김연(金演) 등이 모두 청하기를,
"성상의 마음이 조금 진정되기를 기다려 일기(日氣)가 따뜻해지거든 행하소서."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충분히 생각하였는데, 이는 예(禮)에 어긋난 일도 아니다. 추워지기 전에 한번 가서 본 후에야 이 마음을 풀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누를 수가 없다."
하였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좌의정(左議政) 권상하(權尙夏)는 늙은 나이에 아들을 잃어 의복과 음식을 맡을 사람이 없고, 대사헌(大司憲) 이희조(李喜朝)는 집안이 빈한(貧寒)하여 홀아비로 살면서 굶주림을 면하지 못하고 있으니, 마땅히 주급(周急)404) 하는 일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10월 8일 정미
약방(藥房)에서 아침 문안(問安)을 아뢸 때 겸하여 상차(喪次)에 친림(親臨)할 시기를 조금 늦출 것을 청하자, 임금이 답하기를,
"경들은 나의 지극한 정리(情理)를 헤아려 너무 염려하지 말라."
하고, 잠시 후에 또 승전색(承傳色)을 통해 구전(口傳)하여 하교(下敎)하기를,
"경들은 비록 조금 늦추도록 청하나, 증세가 이처럼 조금 덜한 때는 실로 쉽게 얻을 수 없다. 그런데 늦추고 또 늦추어 마침내 친림하지 못하게 하고야 말려는 것인가? 이러한 청을 들을 적마다 지나치게 심려(心慮)를 쓰는데, 마음을 쓰면 화증(火症)이 반드시 올라서 진정하기 어려우니, 증후(症候)가 첨가되기 쉽다. 반드시 이 정리를 편 후에야 거의 관억(寬抑)405) 하는 도리에 유익할 것이니, 나의 지극한 정리를 헤아려 다시는 번거롭게 청하지 말라."
하였다.
이기익(李箕翊)을 우승지(右承旨)로 삼았고, 김운택(金雲澤)을 승지(承旨)로 초수(超授)하였으며, 김창흡(金昌翕)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세자(世子)가 하령(下令)하기를,
"균전사(均田使) 이재(李縡)와 홍석보(洪錫輔)는 여러 차례 내려가도록 재촉하였으나 끝내 사조(辭朝)하지 않고 있으니, 일의 놀라움이 이보다 심할 수 없다. 우선 아울러 파직(罷職)하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9일 무신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10월 10일 기유
목성(木星)이 태미원(太微垣) 좌집법성(左執法星)을 범하였다.
비국(備局)에서 황귀하(黃龜河)를 경상좌도 균전사(慶尙左道均田使)로, 김운택(金雲澤)을 충청 좌도 균전사(忠淸左道均田使)로 삼았다.
승지가 동궁에 입대하였다.
전라좌도 균전사(全羅左道均田使) 김재로(金在魯)가 상서(上書)하여 양척(量尺)의 일을 논하였는데, 이르기를,
"지금의 양정(量政)은 인조(仁祖) 갑술년406) 과 같이 하는 것이 옳은데, 어찌하여 반드시 인조께서 특별히 결단하신 예지(睿旨)를 어기고 갑술년에 사용하지 않던 단척(短尺)을 써서 한갓 전결(田結)을 더 얻는 것만 다행하게 여기고 백성의 폐해(弊害)가 무거운 것은 돌아보지 않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오늘날의 이 일이 맹자(孟子)의 선군(先君)의 뜻을 준수(遵守)하라는 교훈에 어긋남이 있을 듯합니다."
하니, 세자가 묘당(廟堂)에 내렸다. 묘당에서 복주(覆奏)하기를,
"예로부터 역사(役事)를 일으킬 때에는 반드시 민심(民心)을 따르는 것을 위주로 하였습니다. 더욱이 지금 나라의 기강(紀綱)이 진작되지 못하여 민심(民心)이 쉽사리 어지러워져 군정(群情)을 어기기 어려운 바가 있습니다. 명령을 자주 고치면 비록 전도(顚倒)되는 듯하나, 소각(銷刻)407) 하는 혐의는 돌아볼 것이 못되니, 청컨대 김재로의 말에 의거하여 갑술년의 자[尺]를 쓰도록 허락하고, 영남(嶺南)·호서(湖西) 또한 일체로 준행(遵行)하게 하소서."
하니, 세자가 허락하였다.
10월 11일 경술
사시(巳時)에 임금이 졸(卒)한 연령군(延齡君) 이훤(李昍)의 상차(喪次)에 거둥하였는데, 세자가 어가(御駕)를 따랐다. 연(輦)에 오르자,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앞으로 나아가 문후(問候)하고, 또 너무 애통(哀痛)해 하지 말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어가가 상가(喪家)에 이르러 잠시 휴식하고 상차에 들어가니, 호군(護軍) 4인이 창을 가지고 앞에서 인도하고, 도열(桃茢)408) 을 다음으로 가지고 들어가 사방 구석에 벌여 놓았다. 임금이 정당(正堂) 앞에 베풀어 놓은 안(案) 앞에 나아가 몸을 굽혀 곡(哭)하니, 승지(承旨)와 사관(史官)이 대청 위에서 배곡(陪哭)하고, 세자는 뜰에서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곡하였다. 예(禮)를 마치자, 약방의 여러 신하들이 앞으로 나아가 빈소(殯所)에는 임어하지 말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니, 약방의 여러 신하들이 물러났다. 곧 승지와 사관에게 명하여 모두 물러가게 하고, 장만(帳幔)으로 앞을 가렸다. 임금이 바로 빈당(殯堂)에 들어가 매우 애통하게 곡하니,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는데, 잠시 후에 그쳤다. 그리고 조금 후에 어가가 떠나 궁궐로 돌아왔는데, 어가가 흥태문(興泰門)을 들어서자 약방에서 또 앞으로 나아가 문후(問候)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침과 똑같다."
하였다. 마침내 임금이 내전(內殿)으로 들어가자, 해엄(解嚴)409) 하였다.
10월 12일 신해
우부승지(右副承旨) 황귀하(黃龜河)가 일찍이 대사간(大司諫)으로서 균전사(均田使) 윤헌주(尹憲柱)를 논핵(論劾)하였는데, 자신이 그 직임(職任)을 맡게 되었다 하여 인혐(引嫌)하여 상서(上書)하고 사면(辭免)하니, 세자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묘당에서 복주(覆奏)하기를,
"삼사(三司)의 언의(言議)하는 신하로서 다른 삼사의 관직에 있는 사람을 배척하고, 또 외방(外方)의 감사(監司)와 수령을 논핵(論劾)하는 것이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을 논핵한 때문에 억지로 이러한 직임(職任)을 인피하였다는 것은 들어보지 못하였으니, 조정(朝廷)의 사체(事體)에 있어서 결단코 체임(遞任)을 허락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후에 하령(下令)하기를,
"균전사 황귀하의 일을 대조(大朝)께 들어가 고(告)하였더니, ‘황귀하가 일찍이 간원(諫院)의 장관(長官)으로 있었을 때 윤헌주를 논핵하여 균전사의 직임을 체차(遞差)시켰는데, 이제 이 직임에 있어서 다른 사람은 체차하도록 논하고 자기는 출사(出仕)하여 직임을 받는다면, 사대부(士大夫)의 염우(廉隅)에 있어서 이러한 이치는 없는 것이다. 한갓 강박(强迫)을 일삼는 것은 신하를 부리는 도리에 어긋나니, 균전사의 직임을 체차하도록 허락하고, 곧 대신할 사람을 내도록 하라.’고 하교(下敎)하셨다. 성교(聖敎)가 지극히 마땅하니, 황귀하의 균전사 직임을 개체(改遞)하도록 하라."
하였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10월 14일 계축
날씨가 추워진 까닭에 숙위(宿衛)하는 군사들에게 유의(襦衣)와 공석(空石)410) 을 내려 주도록 하였다.
김상원(金相元)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10월 15일 갑인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 겨울 천둥의 변고(變故) 때문에 차자(箚子)를 올려 인책(引責)하여 책면(策免)을 원하고, 시사(時事)를 덧붙여 논하였는데, 이르기를,
"조정(朝廷)이란 강기(綱紀)를 의지하는 바이며, 사방의 표준이 되는 곳입니다. 그런데 근래에 대소 신료들이 세월을 헛되이 보내며 온갖 법도(法度)가 해이해져 정성을 다해 봉공(奉公)하는 뜻은 없고, 사사롭게 스스로 편히 지내고자 하는 생각이 습관을 이루었습니다. 지위가 높고 가까이 시종(侍從)하는 반열(班列)에 있는 신하들은 태연하여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갈수록 서로 본받아 고상한 풍치(風致)로 삼고 있으니, 어떻게 서료(庶僚)를 진작시키고 사공(事功)을 흥기(興起)하겠습니까? 이런 까닭에 조정의 모든 일이 대개 다 망쳐지고 폐해지고 있습니다. 논사(論思)의 지위에 이르러서는 책무(責務)가 더욱 중대한데, 한가하고도 쓸모없는 것과 같이 보아 금중(禁中)의 숙직(宿直)이 갖추어 있지 않으며, 전조(銓曹)에서는 개정(開政)하는 데 시달려 경패(庚牌)411) 가 번번이 헛된 데로 돌아가는 데 이르니, 이 어찌 진실로 반드시 나아갈 수 없는 의리가 있어서 폐고(廢錮)를 자획(自畫)하는 것이겠습니까? 조금이라도 혐의가 있으면 온갖 방법으로 사피(辭避)하고, 스스로 편견(偏見)을 세워 의리를 연성(演成)하고, 공의(公議)와 국체(國體)는 한쪽으로 제쳐 두니, 이것이 무슨 도리입니까?"
하였는데, 세자가 우악한 비답(批答)을 내렸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10월 16일 을묘
세자가 하령(下令)하기를,
"김상옥(金相玉)은 일찍이 관직(館職)에서 아무런 연고 없이 행공(行公)하였는데, 한 번 체직(遞職)된 후부터 무슨 혐의할 단서가 있는지 모르겠으나, 관직을 자획(自畫)하고는 전후로 제수받은 뒤에도 꼼짝하지 않는 채 출사(出仕)하지 않으니, 이 무슨 분의(分義)이며 이 무슨 사체(事體)인가? 아! 조정의 기강(紀綱)을 한낱 김상옥이 여지없이 모두 무너뜨렸으니, 진실로 지극히 한심하여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각별히 엄중하게 신칙(申飭)하도록 하라. 또 주사(籌司)412) 의 자리에 당상(堂上)으로서 병을 핑계하여 나아가지 않는 자가 많으니, 마음이 항상 미편(未便)하였다. 또한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대개 김상옥이 황귀하(黃龜河)와 반직(伴直)하면서 작은 일로 서로 다투었는데, 황귀하가 김상옥을 침척하여 말하니, 김상옥이 마침내 관직(館職)을 자획(自畫)하고 전후에 패초(牌招)를 어긴 것이 여러 차례나 되어 셀 수가 없었으며, 또 금추(禁推)413) 한 것만도 10여 차례가 넘었으나 그래도 행공(行公)하지 않으므로, 이러한 하교가 있었던 것이다.
비국에서 심수현(沈壽賢)을 경상좌도 균전사(慶尙左道均田使)로 삼았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10월 17일 병진
부교리(副校理) 조상건(趙尙健)이 임금에게 차자(箚子)를 올려, 전일에 약방(藥房)에 내린 비답(批答)에서 ‘마음을 쓰면 화기(火氣)가 올라 쉽사리 증후(證候)가 첨가(添加)된다.’는 하교(下敎)를 가지고 진계(陳戒)하기를,
"비록 여항(閭巷)의 선비라 하더라도 조금 조심(操心)하는 공력(工力)이 있으면 오히려 이로써 경계를 삼을 수 있습니다. 더욱이 인주(人主)의 일심(一心)은 만물을 화육(化育)하는 근본으로서 잡고 놓는 사이에 흥망(興亡)이 달려 있습니다. 만약 죽음에 대한 슬픔으로 감정이 북받치는 대로 지나치게 슬퍼하시어 병이 첨가된다면 그 마음을 다스리는 요체(要諦)에 해로움이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증후에 조금이나마 차도가 있을 때 특별히 두세 대신(大臣)과 경재(卿宰)를 부르시되, 예모(禮貌)를 간결하게 하여 와내(臥內)에서 인견(引見)하시고, 한결같이 가인(家人)의 예(禮)와 같이 조용히 수작(酬酢)하시며, 혹은 치도(治道)를 논하고 혹은 민막(民瘼)을 자문(諮問)하도록 하소서. 또 약원(藥院)과 근시(近侍)하는 여러 신하들을 상규(常規)에 얽매이지 말고 자주 진접(晉接)414) 하시어 약이(藥餌)와 조섭(調攝)하는 방도를 상확(商確)하시고, 고금(古今) 치란(治亂)의 자취를 진술하게 하시면 장차 반드시 병회(病懷)를 풀어버리고 근심 걱정을 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대사헌(大司憲) 이희조(李喜朝)가 바친 책자(冊子)는 곧 우리 나라 조정의 여러 현신(賢臣)들이 임금에게 고한 말 가운데 있는 가언(嘉言)과 지론(至論)으로서 글자마다 뜻이 절실합니다. 옛날 박세채(朴世采)가 편찬하여 바쳤던 《정주경연고사(程朱經筵故事)》와 함께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탑전(榻前)에서 읽게 하고, 침석(枕席)에 기대어 들으시되 겸하여 동궁(東宮)으로 하여금 곁에서 모시고 문난(問難)하게 한다면, 이연(貽燕)415) 하는 규모(規謨)와 관감(觀感)하는 공효(功效) 두 가지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마지막으로 논하기를,
"이재(李縡)와 홍석보(洪錫輔)는 여러 차례 힘써 불러서 출숙(出肅)하게 하였으나 끝내 명(命)을 받들어 따르지 않고 있으니, 그 분의(分義)에 있어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그 범한 바를 논하건대 파직(罷職)으로 그칠 수 없으니, 마땅히 거듭 견책(譴責)을 더하여 무너진 기강(紀綱)을 진작(振作)시키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일전에 약원에 내린 교지(敎旨) 가운데 ‘진정(鎭定)하기 어려운 바가 있고, 증후(證候)가 첨가될 것이다[有難鎭定 證候添加]’는 여덟 자는 원래 내가 한 말이 아니니, 반드시 내관(內官)이 잘못 전하였을 것이다. 진계(陳戒)한 말은 유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옥서(玉署)416) 의 신하는 아침 저녁으로 문후(問候)하면서 오히려 나의 병이 강잉(强仍)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기니, 이 무슨 말인가? 병이 고황(膏肓)에 들어가 날이 갈수록 더욱 고질(痼疾)이 되었으니, 수응(酬應)이 번거로울 것 같으면 여러 증후가 잇따라 발생할 것이다. 비록 작은 수응이라도 해(害)가 따라서 발생하니, 비록 강잉하고자 하더라도 그 형세상 어찌할 도리가 없다. 두 신하의 소위(所謂)는 진실로 지극히 해괴하다. 평시에도 이와 같은데 완급(緩急)에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그 죄상(罪狀)을 논하건대, 파직(罷職)으로 그칠 수 없으니, 아울러 삭탈 관작(削奪官爵)하여 문외 출송(門外黜送)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삼사(三司)의 상소(上疏)와 차자(箚子)는 모두 동궁(東宮)에 올리도록 이미 정식(定式)이 있으니, 이후로는 한결같이 정식에 의거하는 일을 거듭 신칙(申飭)하도록 하라."
하였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진후(診候)를 마치자, 제조(提調)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제주(濟州)에서 주전(鑄錢)하여 진휼(賑恤)에 보태는 일을 진백(陳白)하였는데, 묘당(廟堂)에서 복주(覆奏)하여 시행하기를 청하였으나, 여러 사람들이 모두 의논하기를, ‘절도(絶島)에서 주전하면 간교한 폐단이 발생하기 쉽다.’ 하였으므로, 대신(大臣)들이 이 때문에 지난(持難)하여 아직 주전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비록 복주하여 시행하도록 허락한 일이라 하나, 묘당의 의논이 귀일(歸一)되지 못하였으니, 도로 정지하는 것이 또한 무방(無妨)할 듯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에게 묻기를,
"제주에서 주전하는 의논을 나는 좋다고 생각하였고, 여러 의논이 이와 같다고 한다. 경의 뜻은 어떠한가?"
하자, 이이명이 말하기를,
"섬에서 폐단이 발생할 것이라는 말은 소견이 없지 않으나, 옛부터 전화(錢貨)를 폐지했던 세상은 없었으니, 만약 없앨 수 있다면 그만이겠지만, 이미 갑자기 폐지할 수도 없고 또 더 주전하려 들지 않으면 점차 더욱 용귀(踊貴)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 도(道)의 신포(身布)를 목화(木花)가 참혹한 흉작이라 하여 전화(錢貨)로 대신 바치도록 허락하였는데, 전화 또한 아주 귀해져서 소민(小民)이 곡물(穀物)을 가지고 전화를 바꾸려 할 즈음에 비용(費用)이 무한(無限)할 것입니다. 그러니 제주에서는 비록 주전할 수 없다 하더라도 만약 경아문(京衙門)에서 더 주전하여 널리 통용시키는 것은 불가(不可)함이 없을 듯합니다. 시험삼아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가, 이튿날 하교(下敎)하기를,
"전화(錢貨)가 폐단이 되는 것은 한정이 없으니, 결코 더 주전할 수가 없다."
하였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좌부승지(左副承旨) 황귀하(黃龜河)가 제주목(濟州牧)에서 곡식을 청한 장계를 읽고 나서 말하기를,
"신이 병신년417) 에 감진 어사(監賑御史)로 제주에 왕래하였기 때문에 도중(島中)의 일을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지금 이와 같은 흉년(凶年)을 만났으니, 반드시 시기(時期)에 맞추어 곡식을 수송(輸送)한 후에야 먹여 주기를 바라는 백성을 구제할 수 있을 것인데, 조정에서 부응(副應)하는 것은 매번 시기에 늦는 한탄이 있습니다. 이번의 곡식은 반드시 이전(移轉)하는 관원들에게 각별히 엄중하게 신칙하여, 만약 시기에 맞추어 들여보내지 않으면 반드시 더욱 무겁게 허물을 추궁하겠다는 뜻으로 미리 신칙(申飭)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세자가 옳게 여겼다. 황귀하가 또 제주목에서 장론(狀論)한 김세화(金世華)의 격쟁(擊錚)한 일을 읽고 나서 말하기를,
"일찍이 선조조(先祖朝)에 김만일(金萬鎰)이 1만 필의 말을 바친 공로로 산둔 감목관(山屯監牧官)을 세습(世襲)하도록 허락하였는데, 그후 자손 가운데 더러 불초(不肖)한 자가 있어 목졸(牧卒)을 가혹하게 부리는 바람에 원고(怨苦)를 초래하여 본시(本寺)에 정소(呈訴)하는 데 이르니, 그 세습(世襲)을 폐지하고 정의 현감(旌義縣監)이 감목관을 겸임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김만일의 자손 김세화의 격쟁으로 인하여 사복시(司僕寺)에서 제주에 그 편부(便否)를 물었으므로, 이러한 장문(狀聞)이 있었던 것이나, 이 일은 알기 어렵지 않습니다. 만약 사사로운 이해(利害)가 없다면 그가 어찌 바다를 건너 천 리의 먼 길에 와서 격고(擊鼓)하는 데 이르겠습니까? 이 일은 시행하지 않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10월 18일 정사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감군(監軍) 및 밀부(密符)·유서(諭書)·표신(標信) 등 계청(啓請)하는 문서(文書) 외에 병조(兵曹)의 공사(公事)는 일체 동궁(東宮)에게 입달(入達)하도록 하라."
하였다.
세자(世子)가 하령(下令)하기를,
"이후로 대신(大臣)의 차자(箚子)가 입대(入對)하기 전에 내도(來到)하면 승지(承旨)가 먼저 가지고 들어오고, 입대한 후에 내도하는 것도 승지가 가지고 들어오도록 하라."
하였다.
비국(備局)에서 계청(啓請)하기를,
"제도(諸道)의 여러 가지 군포(軍布)와 신공(身貢)으로 미처 받아들이지 않은 그 고을에서 가장 오래된 1년 조를 탕감(蕩減)하소서."
하니, 세자가 그대로 따랐는데, 대개 진연(進宴)한 후에 추은(推恩)하는 것이었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10월 19일 무오
이병상(李秉常)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고, 조관빈(趙觀彬)을 특별히 승지(承旨)에 제수하였다.
10월 20일 기미
세자가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접(引接)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예조 판서(禮曹判書) 민진후(閔鎭厚)가 북로(北路)에 흉년이 들었다 하여 글을 올려 영남(嶺南)의 곡식 1만 5천 석을 옮겨 줄 것을 청하였는데, 함경 감사(咸鏡監司) 김상직(金相稷)이 장계(狀啓)하기를, ‘북도(北道)에 비록 배가 있다 하나 생김새가 매우 작아서 2, 30석을 싣는 데 지나지 않으니, 1만여 석의 곡식과 3백 석의 소금을 이것으로 운반해 가고자 한다면, 형세가 미치지 못할 바가 있습니다. 이전에 병신년418) ·정유년419) 에 영남의 곡식을 이전(移轉)하였을 때에는 본도(本道)에서 스스로 수송(輸送)해 간 것은 3, 4백 석에 불과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영남에서 수송하였으니, 청컨대 지금도 역시 이 예를 쓰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북도의 선제(船制)가 과연 이와 같다면 1만여 석을 운반하고자 해도 그 형세가 반드시 어려울 것이니, 5천 석은 마땅히 북도로 하여금 수송해 가게 하고, 1만 석은 마땅히 영남으로 하여금 북도의 계수관(界首官)420) 에게 수송해 주게 하소서."
하니, 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이건명이 또 말하기를,
"전일에 대간(臺諫)이 상소(上疏)하여 남솔(濫率)을 금지시킬 것을 거듭 청하였는데, 전규(前規)에 남솔한 자로 일찍이 2품의 벼슬과 시종(侍從)을 지낸 경우는 파직(罷職)하고, 그 외에는 결장(決杖)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염우(廉隅)를 중대하게 여기므로, 결장(決杖)한 후에는 결코 그대로 재직(在職)하지 않아 반드시 사면(辭免)하고자 하는 즈음에 직사(職事)가 오랫동안 폐지됩니다. 삼남(三南)의 수령 또한 반드시 이 죄를 범한 자가 있을 것인데, 지금 바야흐로 양역(量役)이 한창 시행되고 있는 가운데 이러한 일이 있을까 염려되니, 지금은 비록 자수(自首)하는 자가 있더라도 우선 장문(狀聞)하지 말고 양전(量田)의 일을 마치기를 기다린 후에 장문(狀聞)하게 하는 것이 무방(無妨)할 듯합니다."
하니, 세자가 옳게 여겼다. 이건명이 말하기를,
"신이 구구한 소회(所懷)가 있어서 감히 이를 우러러 진달(陳達)하고자 합니다. 천재(天災)와 시변(時變)이 없는 달이 없는데, 올해의 경우를 말해 보건대 정월(正月) 세수(歲首)에 일식(日蝕)·월식(月蝕)이 있었고, 근일에는 겨울 천둥이 심상(尋常)하지 않았으며, 지금은 일기가 따뜻하고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비록 치평(治平)한 때라 하더라도 변괴(變怪)가 이와 같으면 군신(君臣) 상하가 마땅히 더욱 경동(驚動)해야 할 것인데, 인정(人情)이 보고 듣고 서로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풍습에 더욱 익숙해져 그 괴이함을 알지 못함이 이와 같으니, 무슨 일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저하께서 정사(政事)를 청단(聽斷)하신 지 1년이 넘어 서무(庶務)를 밝게 익히셨으니, 생민(生民)의 질고(疾苦)와 형정(刑政)의 득실(得失)에 항상 유의하셔야 할 것인데, 밖에서 보건대 신료(臣僚)들이 진달(陳達)하는 말을 단지 예에 따라 하라고 하교(下敎)하십니다. 만약 보도(輔導)하는 신하들이 헤아린 책략(策略)에 빈 틈이 없다면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마는, 그렇지 않은데도 예에 따라 할 따름이니, 지금의 시세(時勢)가 어찌 예에 따르는 것으로써 만회(挽回)할 수가 있겠습니까? 인군(仁君)은 억조 창생(億兆蒼生) 위에 군림하니, 연묵(淵嘿)이 진실로 아름다운 일이겠지마는, 천지(天地)로써 말하건대 높고 낮음이 비록 현격(懸隔)하다 하더라도 천기(天氣)가 하강(下降)하고 지기(地氣)가 상승(上升)하여 음양(陰陽)이 섞인 후에야 만물이 생성(生成)되는 법이니, 인군이 한결같이 연묵할 따름이라면 신하의 정리(情理)가 어디로 말미암아 상달(上達)되겠습니까? 신 등뿐만 아니라, 비록 지극히 벼슬이 낮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모든 일을 반드시 더불어 정성스럽게 상확(商確)한다면 거의 교부(交孚)하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탕왕(湯王)은 덕(德)이 지극하여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체념(體念)하소서."
하니, 세자가 말하기를,
"마땅히 체념하겠다."
하였다. 훈련 대장(訓鍊大將) 이홍술(李弘述)이 말하기를,
"전일에 의주(義州)의 수신(守臣)이 장계(狀啓)하기를, ‘피인(彼人)이 심양성(瀋陽城)을 더 쌓고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반드시 까닭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잇따라 흉년을 만나 양서(兩西)의 군정(軍政)을 완전히 포기하였으므로, 군병(軍兵)이 혹은 흩어지고 혹은 죽어 빈 장부만 있으니, 만약 혹시라도 뜻하지 않은 변고(變故)가 있다면 어떻게 방어(防禦)하겠습니까? 삼남(三南)은 영장(營將)을 더 설치하였으므로 군병(軍兵)을 완전히 포기하는 데에 이르지는 않았으나, 양서(兩西)는 단지 수령(守令)으로 하여금 이를 겸임하게 하였으므로, 여러 검칙(檢飭)하는 일들이 수령(守令)의 관문(關文)에 지나지 않으니, 누가 기꺼이 생각을 기울이겠습니까? 만약 양서(兩西)에 따로 영장(營將)을 설치한다면 반드시 그 공효(功效)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이건명이 말하기를,
"양서에 영장을 설치하는 것이 진실로 좋습니다. 다만 양서는 전세(田稅)가 매우 적은데, 만약 영장을 내보내면 반드시 늠료(廩料)를 주어야 할 것이고, 거느리는 병졸도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니, 이것을 조치(措置)할 방도가 없습니다."
하자, 이홍술이 말하기를,
"양서에는 긴요하지 않는 첨사(僉使)와 만호(萬戶)가 매우 많으니, 그 액수(額數)를 헤아려 줄이고 영장을 설치하면 새로 창설(創設)하는 폐단이 없고 일도 반드시 착실해질 것입니다."
하므로, 이건명이 말하기를,
"갑자기 결정할 수는 없으니, 청컨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니, 세자가 옳게 여겼다. 지평(持平) 홍용조(洪龍祚)가 전에 진달(陳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일전에 옥당(玉堂)의 차자(箚子)에 대한 비답(批答)에, ‘「진정하기 어려운 바가 있고, 다른 증후(證候)가 첨가될 것이다.[有難鎭定 證候添加]」라는 여덟 자는 반드시 내관(內官)이 잘못 전한 것이다.’라고 하교(下敎)하셨습니다. 대저 내관이 성교(聖敎)를 구전(口傳)하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일입니까? 그런데도 이러한 잘못 전하는 일이 있었으니, 뒷날의 폐단에 관계되는 바라 엄중히 징치(懲治)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해당 승전색(承傳色)을 나문(拿問)하여 정죄(定罪)하소서."
하였는데, 세자가 단지 말단의 일만 따랐다.
임금이 특별히 하교하여 밀풍군(密豐君) 이탄(李坦)의 둘째 아들 이상대(李尙大)를 졸(卒)한 연령군(延齡君) 이훤(李昍)의 후사(後嗣)로 삼고, 이름을 공(糿)이라고 내렸다.
10월 21일 경신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10월 22일 신유
승지(承旨)가 동궁에 입대하였다.
10월 23일 임술
홍계적(洪啓迪)을 부제학(副提學)으로, 김상옥(金相玉)을 응교(應敎)로, 어유봉(魚有鳳)을 집의(執義)로, 김제겸(金濟謙)을 정언(正言)으로, 홍우전(洪禹傳)을 지평(持平)으로, 김창흡(金昌翕)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함경 감사(咸鏡監司) 김상직(金相稷)이 상서(上書)하기를,
"병세(病勢)가 깊어서 황정(荒政)을 처리하지 못하고 있으니, 청컨대 갑신년421) 과 병술년422) 의 예에 의거하여 감진 어사(監賑御史)를 내려 보내 주소서."
하자, 세자가 옳게 여겼는데, 묘당(廟堂)에서 복주(覆奏)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10월 24일 계해
달이 태미원(太微垣) 단문(端門) 안으로 들어갔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에 진달(陳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조관빈(趙觀彬)이 지망(地望)과 재망(才望)으로 순서에 따라 진출하였다면 어찌 불가(不可)하겠습니까마는, 중비(中批)423) 로 벼슬을 제수하는 것은 본래 청조(淸朝)의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또 그 자격과 이력(履歷)이 아직 얕은데 순서를 너무 크게 뛰어넘어 제수하였으니, 청컨대 승지 조관빈을 특별히 제수하라는 명을 환수(還收)하소서."
하였으나, 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10월 27일 병인
달이 저성(氐星)으로 들어갔다.
정도복(丁道復)을 승지(承旨)로, 김고(金槹)를 지평(持平)으로, 이집(李㙫)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삼았다.
간원(諫院)에서 전에 진달(陳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춘천 부사(春川府使) 박휘등(朴彙登)은 농병(聾病)이 이미 극심한데다가 매우 쇠모(衰耗)하니, 흉년을 만나 피폐해진 고을을 맡길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개차(改差)하소서."
하였는데, 세자가 단지 말단의 일만 따랐다.
헌부(憲府)에서 전에 진달(陳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올해의 목화(木花)는 실로 근년에 없던 흉작이니, 청컨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면전(綿田)을 헤아려 급재(給災)하게 하소서.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 이순곤(李順坤)은 본래 명성(名聲)이 부족한데다가 나이도 많아 쇠모(衰耗)하니, 청컨대 개차(改差)하소서."
하였는데, 세자가 따르지 않고, 면전(綿田)에 급재하는 일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대사헌(大司憲) 이희조(李喜朝)가 상서(上書)하여 바친 두 책(冊)에 【곧 전에 바쳤던 《속경연고사(續經筵故事)》와 《동현주의(東賢奏議)》이다.】 마음을 기울여 체험(體驗)할 것을 청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내가 마땅히 유의(留意)하겠다."
하였다.
10월 28일 정묘
세자(世子)가 하령(下令)하기를,
"경상도 균전사(慶尙道均田使) 심수현(沈壽賢)과 충청도 균전사(忠淸道均田使) 김운택(金雲澤)이 아직도 사조(辭朝)하지 않고 있으니, 언제 내려가겠다는 것인가?"
하니, 정원(政院)에서 아뢰기를,
"심수현은 모레 사조하고, 김운택은 내일 사조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때 전라도 균전사 김재로(金在魯)는 먼저 내려갔는데, 심수현 등이 아직 떠나지 않고 있으므로 특별히 재촉하게 한 것이다.
10월 29일 무진
세자가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접(引接)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헌부(憲府)에서 삼남(三南)의 면전(綿田)에 급재(給災)할 것을 계청(啓請)하였는데, 이전부터 급재는 으레 모람(冒濫)된 폐단이 많았고, 면전에 급재하게 되면 기장·조·콩·팥을 아울러 혼입(混入)하여 백성들은 실제의 혜택을 받지 못하므로 조정에서 일체 막았습니다."
하였는데,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 말하기를,
"수상(首相)이 진달(陳達)한 대체(大體)는 그러하나, 올해는 목화(木花)가 흉작이라 시가(市價)가 갑절이나 올랐습니다. 그런 줄을 명확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또 억지로 징수(徵收)하는 것은 정사(政事)에 해롭습니다. 이는 정사에 큰 관계가 되는 것이니, 혹 대조(大朝)께 계품(啓稟)하여 처리하는 것이 아마도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세자가 허락하였다. 김창집이 또 말하기를,
"올해 해서(海西)의 수재(水災)는 너무나 참혹하여 백성들이 바야흐로 유산(流散)하고 있으니, 앞으로 장차 진휼(賑恤)을 베푸는 일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감사(監司) 이덕영(李德英)은 치적(治績)과 명성(名聲)이 매우 높은데, 과만(瓜滿)이 12월에 있으니, 청컨대 맥추(麥秋)까지 한정해서 잉임(仍任)424) 시키소서."
하니, 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자신이 곤임(閫任)을 위임받은 자는 떠나갈 때 마땅히 말가죽으로 시신(屍身)을 싸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니, 어떻게 처자를 거느리고 갈 수 있겠습니까? 곤수(閫帥)로서 처자를 거느리고 가는 곳이 있음은 진실로 마땅하지 못한데, 평안도(平安道)·황해도(黃海道) 등의 수신(帥臣)은 그 폐해(弊害)가 있는 것으로 인하여 이미 권속(眷屬)을 거느리는 것을 폐지하였으니, 남병사(南兵使)와 같이 외관(外關)의 땅에 가속(家屬)을 데리고 가는 것은 더욱 마땅하지 못하며, 경기 수사(京畿水使)와 황해 수사(黃海水使)는 바로 가까운 지역입니다. 대저 변수(邊帥)도 혼자 갈 수 있으니, 가까운 지역의 곤수야 혼자 가는 것이 어찌 어렵겠습니까? 흉년에 지공(支供)하는 폐해 또한 감당하기 어려우니, 마땅히 혁파(革罷)해야 합니다. 또 국초(國初)에는 목사(牧使)가 있는 곳에 모두 판관(判官)이 있었으나, 중간에 용관(冗官)이라 하여 이미 모두 혁파하고 유독 제주(濟州)에만 있습니다. 한 섬 안에 관원(官員)이 너무 많으니 판관은 혁파해도 무방(無妨)할 듯한데, 먼저 그 편부(便否)를 도신(道臣)에게 물어 보고 처리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세자가 도신에게 물어 보도록 하였다. 지평(持平) 홍우전(洪禹傳)이 전에 진달(陳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영평후(營平侯)425) 와 복파 장군(伏波將軍)426) 은 세상에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근래에 제도(諸道)의 곤수(閫帥)가 모두 안마(鞍馬)를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니, 청컨대 서전(西銓)에 신칙(申飭)하여 연로(年老)한 사람은 곤임(閫任)에 차출(差出)해 보내지 말게 하소서."
하니, 세자가 단지 말단의 일만 따랐다. 정언(正言) 홍용조(洪龍祚)가 전에 진달(陳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승지가 입대(入對)할 때에는 승정원을 지킬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든 인원이 다 입참(入參)해야 마땅할 것인데, 간혹 한 승선(承宣)만 혼자 입대하는 날이 있으니, 너무나도 사체(事體)를 중요하게 여기는 도리가 아닙니다. 청컨대 이제부터 이후로 승지는 신시(申時) 이전에 지레 물러갈 수 없고, 입대할 때에는 승정원을 지킬 사람을 제외한 모든 인원이 입참하는 일을 정식(定式)으로 삼아 시행하소서."
하였는데, 세자가 단지 말단의 일만 따랐다. 그리고 이날 저녁에 대관(臺官)이 아뢴 말 가운데 곤임(閫任)은 서전(西銓)에서 차출하여 보내지 말라는 일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고 비답(批答)을 고쳐 내렸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숙종실록64권, 숙종 45년 1719년 12월 (0) | 2025.12.01 |
|---|---|
| 숙종실록64권, 숙종 45년 1719년 11월 (0) | 2025.12.01 |
| 숙종실록64권, 숙종 45년 1719년 9월 (0) | 2025.12.01 |
| 숙종실록64권, 숙종 45년 1719년 8월 (0) | 2025.12.01 |
| 숙종실록64권, 숙종 45년 1719년 7월 (1) | 2025.1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