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64권, 숙종 45년 1719년 11월

싸라리리 2025. 12. 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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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기사

헌부(憲府)에서 전에 진달(陳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었는데, 세자가 단지 이순곤(李順坤)의 일만 따랐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하였다.

 

11월 2일 경오

승지가 동궁에 입대하였다.

 

11월 3일 신미

유성(流星)이 허성(虛星) 아래에서 나와 서방(西方)으로 들어갔다.

 

조상경(趙尙絅)을 헌납(獻納)으로, 송성명(宋成明)을 사인(舍人)으로, 권상유(權尙游)를 판윤(判尹)으로 삼았다.

 

헌부(憲府)에서 전에 진달(陳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문화 현령(文化縣令) 조상경(趙尙慶)이 처(妻)의 투기(妬忌)에 노하여 구박해서 본가(本家)로 쫓아 보냈더니, 처형(妻兄)인 석성 현감(石城縣監) 홍중성(洪重聖)도 그 쫓겨난 것에 노하여 또 몰아내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조상경의 처는〉 문 밖에서 방황하다가 거취(去就)가 궁박해지자, 마침내 우물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잔인하고 행실이 야박한 무리는 의관(衣冠)의 반열(班列)에 둘 수가 없으니, 청컨대 조상경·홍중성을 모두 삭거 사판(削去仕版)하소서. 경기 감사(京畿監司) 황일하(黃一夏)는 늙고 쇠약하여 일을 할 수가 없으며, 무릇 제장(題狀)을 한결같이 청촉(請囑)에 따르고 있으니,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 숭릉 참봉(崇陵參奉) 황종(黃琮)은 어리석고 못나 문자(文字)를 전혀 알지 못하니, 청컨대 태거(汰去)하소서."
하였으나, 세자가 모두 따르지 않았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11월 4일 임신

동지사(冬至使) 조도빈(趙道彬)·부사(副使) 조영복(趙榮福)·서장관(書狀官) 신절(申晢) 등이 청(淸)나라에 들어갔다.

 

승지가 동궁에 입대하였다.

 

제주(濟州)에 풍운뢰우단(風雲雷雨壇)을 세우라고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제주에는 고을을 창설(創設)한 초기부터 풍운뢰우단이 있어 본주(本州)에서 치제(致祭)하였는데, 목사(牧使) 이형상(李衡祥)이 주관(州官)이 사사롭게 제시할 바가 아니라 하여 장문(狀聞)하여 혁파하였다. 그후 도중(島中)에 해마다 기황(飢荒)과 여역(癘疫)이 그치지 않자, 주민(州民)들이 ‘단사(壇祀)를 혁파한 데에서 탈이 난 것이다.’ 하고, 지금의 목사(牧使) 정동후(鄭東後)에게 다시 설치할 것을 호소하니, 정동후가 조정에 계문(啓聞)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예조에서 복주하여 허락할 것을 청하니, 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이 해부터 경사(京師)에서 향축(香祝)을 내려 보내어 제사하게 하였다.

 

11월 5일 계유

헌부(憲府)에서 전에 진달했던 것을 거듭 아뢰었는데, 세자가 단지 황종(黃琮)의 일만 따랐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11월 6일 갑술

유성(流星)이 규성(奎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南方)으로 들어갔다.

 

한세량(韓世良)을 승지로, 이희조(李喜朝)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승지가 동궁에 입대하였다.

 

11월 7일 을해

헌부(憲府)에서 전에 진달(陳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니, 세자가 단지 조상경(趙尙慶)과 홍중성(洪重聖)을 삭거 사판(削去仕版)하라는 일만 따르고, 황일하(黃一夏)는 체임(遞任)시키도록 하였다.

 

승지가 동궁에 입대하였다.

 

11월 8일 병자

서방(西方)에 화광(火光) 같은 기운이 있었다.

 

이홍(李宖)을 승지(承旨)로, 정호(鄭澔)를 대사헌(大司憲)으로, 민진후(閔鎭厚)를 우참찬(右參贊)으로, 이광좌(李光佐)를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로 삼았다.

 

헌부(憲府)에서 전에 진달(陳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청주 토포사(淸州討捕使) 유붕장(柳鵬章)은 정자(丁字)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으로서, 정사(政事)를 하리(下吏)에게 맡기고 있으니,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 일전에 가주서(假注書)의 망(望)을 신급제(新及第) 유득장(柳得章)으로 비의(備擬)하였는데, 유득장은 역당(逆黨)의 【곧 유혁연(柳赫然)이다.】  손자로서 세상에서 버림받았으니, 그 조부가 요행히 관작(官爵)이 회복되었다 하여 평인(平人)과 같이 볼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해당 승지(承旨)와 주서(注書)를 추고(推考)하소서. 종묘(宗廟)의 부봉사(副奉事) 박광세(朴光世)는 본래 향곡(鄕曲)의 야비하고도 비천한 자로서, 향천(鄕薦)을 도모하여 사적(仕籍)에 외람되게 통하였고, 관직에 있으면서도 처신(處身)은 관원의 모양 같지 않습니다. 청컨대 태거(汰去)하소서."
하였으나, 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11월 10일 무인

세자가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접(引接)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충청 감사(忠淸監司) 권업(權𢢜)은 장청(狀請)하기를, ‘군향(軍餉)은 단지 새로 나누어 준 것만 받아들이소서.’ 하였고, 강원 감사(江原監司) 유숭(兪崇)은 장청(狀請)하기를, ‘경자년427)  의 식년(式年)에 노비(奴婢)를 추쇄(推刷)하는 일과 삼군문(三軍門)의 도안(都案)을 고치는 일을 늦추어 거행하소서.’ 하였습니다. 호서(湖西)는 올해 양역(量役)이 한창 벌어지고 있으니, 민간(民間)에 반드시 소요(騷擾)함이 많을 것입니다. 추쇄와 도안 등의 일은 흉년으로 인하여 정지했던 구례(舊例)가 또한 있으니, 양도의 청은 아울러 허락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세자가 옳게 여겼다. 김창집이 또 말하기를,
"지난번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을 때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군문(軍門)에서 습조(習操)를 많이 폐지한다 하여 외방(外方)의 사조(私操)의 예에 의거하여 대사습(大私習)을 설행(設行)하되, 중군(中軍)으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기를 청하였습니다. 근래에 이를 장신(將臣)들과 상의(相議)하였더니, 모두 말하기를, ‘중군이 대신 거행하는 것이 비록 고사(故事)가 있긴 하나 신여철(申汝哲)이 건백(建白)하여 혁파(革罷)하기에 이르렀으니, 지금 와서 다시 중군으로 하여금 대신 거행하게 하는 것은 마침내 미안(未安)한 데 관계된다. 만약 대장이 유고하면 반드시 도제조(都提調)가 대신 거행하되, 간헐적으로 하지 않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하였습니다. 이는 대조(大朝)께 취지(取旨)해야 하는 일이니, 대조께 품의(稟議)하여 하교(下敎)하시는 것이 아마도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세자가 허락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좌참찬(左參贊) 민진후(閔鎭厚)의 진달(陳達)로 인하여 남병사(南兵使)의 솔권(率眷)을 제외시키는 일도 품처(稟處)하라는 명령이 있었는데, 이는 본도(本道)에 물어서 그 회보(回報)를 기다려 품처(稟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외방(外方)의 폐단은 병사(兵使)·수사(水使)의 솔권 한 가지 일뿐만이 아니니, 제도(諸道) 감사의 지공(支供)은 솔권의 여부를 물론하고 폐단이 작지 않습니다. 조정에서 이미 감사의 지공을 위하여 감영(監營)의 수용(需用)에서 하루에 쌀 1석씩을 획급(劃給)하고 있으니 넉넉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 감사는 스스로 판출(辦出)하지 않고 반드시 판관(判官)으로 하여금 지공하게 하니, 하관(下官)은 상관(上官)을 접대(接待)하는 즈음에 매몰(埋沒)할 수가 없어 풍성하고 사치스럽게 하는 데 힘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평양(平壤) 한 곳으로 말하자면, 감사의 1년 지공이 거의 2만 냥(兩)을 넘는데도 오히려 부족함을 근심하며, 공주(公州)·전주(全州) 두 곳에서는 전결(田結) 1천여 결을 덜어내어 감사의 지공에 쓰므로 권솔의 한 가지 일은 오히려 제2의 건이 되었으니, 지공의 폐단은 변통(變通)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김창집이 말하기를,
"혹자의 말에 감사는 체모(體貌)가 존귀하고 엄중하여 지공을 스스로 판출할 수가 없다고 하나, 이는 그렇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양도(兩都)의 유수(留守)는 그 체모의 존귀하고 엄중함이 감사와 다름이 없으나 지공의 일절(一節)을 모두 스스로 판출하고 있으니, 어찌 감사만 유독 스스로 판출할 수 없겠습니까? 진실로 변통하는 것이 마땅하니, 감영의 수용(需用)에 쓰이는 쌀을 감사에게 부쳐서 스스로 공급하게 하되, 만약 부족하면 마련하여 더 주는 것은 불가(不可)하지 않습니다. 청컨대 명년(明年) 정월부터 이에 의거하여 정식(定式)을 삼아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세자가 옳게 여겼다. 지평(持平) 김고(金槹)가 전에 진달(陳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괴원 분관(槐院分館)428)  을 취사(取舍)하는 즈음에 사의(私意)에 일임하므로, 재주와 지망(地望)이 아주 합당한 자도 누락되는 일이 많습니다. 증광시(增廣試)의 한 방(榜)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분권(分圈)429)  을 불태우고 파좌(罷坐)하는 일이 있었으니, 청컨대 상박사(上博士)와 장무관(掌務官)을 나문(拿問)하고 분권을 개정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세자가 단지 박광세(朴光世)의 일만 따랐다. 정언(正言) 정택하(鄭宅河)가 전에 진달했던 것을 거듭 아뢰었으나, 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효행(孝行)과 절의(節義)가 뛰어난 사람들을 정포(旌褒)하였다. 평택(平澤)의 사비(私婢) 천금(千芩), 면천(沔川)의 학생(學生) 이성일(李性一), 청주(淸州)의 사인(士人) 이명환(李命煥)의 처 신씨(申氏), 목천(木川)의 사인(士人) 김천규(金天揆), 평택의 사비(私婢) 천생(賤生), 진천(鎭川)의 사인(士人) 이희(李熺), 순천(順天)의 군인(軍人) 김금선(金今先)의 처 김씨(金氏), 청양(靑陽)의 백성 한도동(韓道東)의 처 최씨(崔氏), 보은(報恩)의 유학(幼學) 구이극(具爾極), 평산(平山)의 사인 홍만창(洪萬昌)의 처 김씨 등 10인을 효행과 정절(貞節)로 정려(旌閭)하고, 당진(唐津)의 사노(私奴) 동립(同立), 사비(私婢) 막지(莫芝), 부여(扶餘)의 금위군(禁衛軍) 오성안(吳成安), 당진의 어영군(御營軍) 김두상(金斗尙), 영변(寧邊)의 관노(官奴) 사군(四軍), 순안(順安)의 사노(寺奴) 필주(弼柱) 등 6인을 효행으로 면역(免役)하고, 평산(平山)의 진사(進士) 민채만(閔采萬), 통덕랑(通德郞) 이시환(李時煥) 등 25인을 효행과 충의(忠義)로 증직(贈職)하고, 송화(松禾)의 촌민(村民) 차성필(車成弼), 금천(衿川)의 사비(私婢) 이정(二貞) 등 41인을 효행과 정절로 복호(復戶)하고, 옥구(沃溝)의 촌동(村童) 김선문(金善文), 개천(价川)의 촌녀(村女) 선향(善香) 등 37인을 효행과 정절로 물건을 차등있게 내려주었다.

 

한중희(韓重熙)를 승지(承旨)로, 유명웅(兪命雄)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삼고, 고(故) 우찬성(右贊成) 유인숙(柳仁淑)의 시호(諡號)를 문정(文貞)으로, 오산군(鰲山君) 이탁남(李擢男)의 시호를 의정(毅靖)으로, 남창군(南昌君) 홍진문(洪振文)의 시호를 충정(忠靖)으로, 의계군(宜溪君) 남절(南截)의 시호를 양정(襄靖)으로, 증 병조 판서(贈兵曹判書) 한순(韓循)의 시호를 의장(毅壯)으로, 증 이조 판서(贈吏曹判書) 김홍욱(金弘郁)의 시호를 문정(文貞)으로, 의성위(宜城尉) 남치원(南致元)의 시호를 영희(榮僖)로 내려 주었다.

 

지평(持平) 홍우전(洪禹傳)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번에 삼가 듣건대 옥당(玉堂)에서 차자(箚子)를 올리던 날 성교(聖敎)를 특별히 내리셔서 삼사(三司)의 상소(上疏)와 차자(箚子)를 아울러 동궁(東宮)에 올리도록 거듭 신칙(申飭)하시고, 잇따라 감군(監軍) 등의 네 가지 일 외에 병조(兵曹)의 공사(公事)도 동궁에 입달(入達)하라는 명을 특별히 내리셨다 하니, 신은 진실로 여러 날 동안 놀라움과 근심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성상의 환후(患候)는 한결같이 침중(沈重)해져 가고 있는데, 또 뜻밖에 이러한 참척(慘慽)430)  을 당하셨으니, 무릇 군하(群下)된 도리에 있어서는 절박한 마음에 애가 타서 어찌할 줄을 모르며 성궁(聖躬)을 위해 근심하는 것이 극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유신(儒臣)의 말이 또한 어찌 일찍이 지금 성상의 환후가 날마다 서책(書冊)을 가까이하고 날마다 서무(庶務)를 감당할 만하다고 한 것이겠습니까? 단지 전하께서 가끔 군하들을 연접(延接)하셔서 답답한 마음을 푸시고, 상하(上下)의 정리(情理)를 소통시켜 절선(節宣)의 도리를 다하실 것을 바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처럼 격뇌(激惱)하시는지요? 지금 원량(元良)이 대리(代理)하여 날로 번거로운 만기(萬機)를 익혀 이미 적체(積滯)되는 근심은 없으나, 전하께서는 이에 부탁할 만한 마땅한 사람을 얻었다 하여 갑자기 밖의 일을 사절(謝絶)하시고, 다시 정사(政事)의 청단(聽斷)을 관계하지 않으려 하시니, 군하(群下)의 마음이 어찌 답답하고 근심스럽지 않겠으며, 또한 어찌 우리 전하께서 40년 동안 근로하시고 두려워하여 도모하신 뜻이겠습니까? 대소 신료(臣僚)들의 소장(疏章)을 이미 소조(小朝)431)  에게 곧바로 올리도록 하셨으나, 그 말이 성상에게 관계된 것은 자연히 신총(宸聰)에 상철(上徹)하지 않을 수 없으며, 군국(軍國)의 중차대한 일에 이르러서는 또 어떻게 우러러 성청(聖聽)을 번거롭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상소 말미에 목화밭에 급재(給災)하기를 덧붙여 청하였다. 임금이 답하기를,
"이 일은 이미 대리(代理)하던 초기에 정해졌고 이의(異議)가 없었다. 지금 나의 병이 날로 더욱 침중(沈重)해지고 있는데, 도리어 격뇌(激惱)한 데에서 나왔다고 하니, 무슨 말인가? 실로 이해하지 못하겠다. 그후 형옥(刑獄)의 문서(文書)와 망통(望筒)432)   출납(出納) 등의 일 또한 많이 변통(變通)하였으니, 병조(兵曹)의 문서를 동궁에 입달(入達)하라는 명령은 원래 이상한 일이 아니다. 목화밭에 급재하는 한 가지 일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하니, 비국(備局)에서 복주(覆奏)하여 삼남(三南)의 약간의 전결(田結)에만 급재하게 하였다.

 

11월 11일 기묘

헌부(憲府)에서 전에 진달(陳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었으나, 세자가 단지 괴원(槐院)의 일만 따랐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11월 12일 경진

헌부에서 전에 진달했던 것을 거듭 아뢰었으나, 세자가 단지 유붕장(柳鵬章)의 일만 따랐다.

 

11월 13일 신사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진후(診候)를 마치자,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말하기를,
"좌참찬(左參贊) 민진후(閔鎭厚)는 국사(國事)에 마음을 다 바쳐 피로한 나머지 병이 들어 장차 사망(死亡)할 근심이 있습니다. 청컨대 띠고 있는 번다한 직임(職任)을 해면(解免)하여 편히 조식(調息)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 띠고 있는 비국 당상(備局堂上)의 직임을 체차(遞差)하게 하였다.

 

이기익(李箕翊)을 승지(承旨)로, 김상옥(金相玉)을 사간(司諫)으로, 조명겸(趙鳴謙)을 헌납(獻納)으로, 박필정(朴弼正)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헌부(憲府)에서 전에 진달(陳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의조(儀曹)433)  의 장석(長席)은 지망(地望)이 자별(自別)한데, 예조 판서(禮曹判書) 유명웅(兪命雄)은 명론(名論)이 본래 가벼워서 물정(物情)이 만족하게 여기지 않으니, 청컨대 개차(改差)하소서."
하였으나, 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11월 14일 임오

달이 필성(畢星) 가운데로 들어갔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조태채(趙泰采)가 휴가를 얻어 성묘(省墓)하고 돌아왔는데, 차자(箚子)를 올려 연로(沿路)에서 본 바를 말하기를,
"안성(安城)·양성(陽城)·천안(天安)·직산(稷山) 등지에 도둑이 일어나 겁략(劫掠)하는 환난이 많으니, 청컨대 무쉬(武倅)를 차견(差遣)하여 기포(譏捕)하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농사가 흉작인데 양역(量役)이 바야흐로 한창이니, 옛 환곡(還穀)과 신포(身布)를 거두어 들이는 것을 일체 정지하소서. 상당성(上黨城)의 역사(役事)를 마치지 못하였는데, 생수(生手)434)  에게 맡길 수는 없습니다. 병사(兵使)가 개만(箇滿)435)  이 되더라도 대신할 사람을 우선 차출(差出)하지 말고 성효(成效)를 책임지우소서."
하니, 세자가 모두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민진후(閔鎭厚)를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권상유(權尙游)를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삼았다.

 

11월 16일 갑신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비국(備局)에서 권상유(權尙游)를 수어사(守禦使)로 삼았다.

 

심택현(沈宅賢)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삼았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11월 17일 을유

승지(承旨)가 동궁에 입대하였다.

 

11월 18일 병술

반궁(泮宮)에 감귤(柑橘)을 나누어 주고, 시사(試士)하였다. 수석(首席)을 차지한 유생(儒生) 목천임(睦天任)에게 급제(及第)를 내렸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지평(持平) 홍우전(洪禹傳)이 함께 입시(入侍)하여 전에 진달(陳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인조(仁祖)께서 탄강(誕降)하신 해주(海州) 구기(舊基)의 비문(碑文)은 바로 역신(逆臣) 민암(閔黯)이 찬술(撰述)한 것이니, 청컨대 따로 찬술한 비문을 내려 보내어 곧 다시 세우게 하소서. 공조 정랑(工曹正郞) 이정엽(李廷燁)은 일찍이 지부(地部)436)  에 임용되었는데, 비루하고 잗달다는 평판이 많고 소문이 낭자하였으나 요행히 탄핵받아 태거(汰去)됨을 면하고 도리어 승천(陞遷)되었으니, 청컨대 태거하소서."
하였는데, 세자가 단지 비문을 다시 세우는 일만 따랐다. 이날 윤선거(尹宣擧)의 서원(書院)에 대한 논의를 정지하였다.

 

11월 19일 정해

헌부(憲府)에서 전에 진달(陳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현풍 현감(玄風縣監) 정도현(鄭道顯)은 귀가 먹고 병으로 혼미(昏迷)하여 정령(正令)이 전도(顚倒)되었고,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이다.】 을 승배(陞配)하였을 때에는 이웃 고을로 달아나 피하고 끝내 제사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나쁜 무리를 불러모아 선정(先正)의 명자(名字)를 배척해 불렀으니, 청컨대 파직(罷職)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하였으나, 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11월 20일 무자

세자(世子)가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접(引接)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호서 균전사(湖西均田使) 김운택(金雲澤)이 장계(狀啓)하기를, ‘조정의 절목(節目)에 필묵(筆墨)·지지(紙地) 및 감색(監色)을 공궤(供饋)하는 수용(需用)은 모곡(耗穀)을 가져다 쓰도록 하였는데, 모곡(耗穀)은 원래 수량이 적고 또 피곡(皮穀)이므로 찧어 먹기에 부적절합니다. 본 고을에서 공궤(供饋)하고 대신 피곡을 받게 하면 비록 수량에 준하여 대신 준다 하더라도 주채(酒債)와 찬가(饌價)로 돌아가는 데 불과하여 한갖 낭비만 됩니다. 그러므로 각 고을에서 결(結)마다 1두(斗)씩을 거두고 명년 봄에 이 수량을 헤아려 대동미(大同米)에서 감제(減除)하기를 원하고 있으니, 모곡을 낭비하는 근심이 없을 것이고, 대동의 부족한 수량은 모곡을 가지고 수를 채운다면 진실로 무방할 것입니다. 만약 대동미를 중난(重難)하다고 생각한다면, 감관이 먹는 것은 저치미(儲置米)로 충급(充給)해도 또한 좋습니다.’ 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편호(便好)할 듯합니다. 다만 호서 뿐이 아니라, 삼남(三南)에서 일체로 저치미를 취(取)하여 쓰고 모곡으로써 상환(償還)하도록 허락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세자가 옳게 여겼다.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 말하기를,
"근래에 외방(外方)에서 조정의 명령(命令)에 대해 큰 일이건 작은 일이건 오로지 천연(遷延)을 일삼아 봉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번 여름에 신이 호남(湖南)의 새로 설치한 진보(鎭堡)에 방군(防軍)을 주지 않고 회부미(會付米)를 획급(劃給)한 까닭에 환곡(還穀)의 일이 실로 지탱하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도내(道內)의 각 진보(鎭堡) 가운데 전선(戰船)을 겹쳐 배치한 곳에서 새로 설치한 곳에 옮겨주는 일의 편부(便否)를 도신(道臣)과 통제사(統制使) 및 좌수사(左水使)·우수사(右水使)에게 물었으나, 아직도 회보(回報)가 없습니다. 유복명(柳復明)이 북평사(北評事)에서 체차(遞差)되어 돌아와 상서(上書)하기를, ‘강원도(江原道) 은계역(銀溪驛)은 말의 수량을 줄인 후 보존(保存)할 도리가 없어졌으니, 청컨대 더 세우도록 하소서.’ 하므로 도신에게 물었더니, 또한 회보가 없습니다. 경상도(慶尙道)의 수령으로서 사군목(射軍木)437)  을 빌어 쓴 자에게 도신으로 하여금 재촉해서 수봉(收捧)하도록 하였으나, 아직 거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일마다 이와 같으니, 무슨 일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세 도의 감사와 호남의 수신(帥臣)을 아울러 추고(推考)하고, 곧 속히 회보하게 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장령(掌令) 박필정(朴弼正)이 전에 진달(陳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감찰(監察) 정귀서(鄭龜瑞)는 본래 용렬하고 잗단 무리인데, 외람되게 전중(殿中)438)  의 벼슬을 제수하였으니, 청컨대 태거(汰去)하소서. 훈련 대장(訓鍊大將) 이홍술(李弘述)은 지극히 삼가야 할 자리에서 높은 소리로 사사로운 말을 하였으니, 청컨대 추고하소서."
하였으나, 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정언(正言) 정택하(鄭宅河)가 전에 진달했던 것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행 대사성(行大司成) 이집(李㙫)은 일찍이 추조(秋曹)439)  의 이석(貳席)440)  에 있었을 때 병조(兵曹)의 서리(書吏)로서 인신(印信)을 몰래 찍어 본조(本曹)에 이관(移關)한 자를 구류(拘留)하지 말게 하였고, 조율(照律)하기에 미쳐서는 반드시 수속(收贖)하고자 하였으니,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
하였으나, 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이날 밤 상후(上候)가 허약하고 피로해서 호흡이 고르지 못한 증세가 갑자기 더해지니,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는데, 조금 진정되자 비로소 물러갔다.

 

11월 21일 기축

헌부(憲府)에서 전에 진달(陳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었는데, 세자가 단지 정도현(鄭道顯)·정귀서(鄭龜瑞)·이홍술(李弘述)의 일만 따랐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부교리(副校理) 조상건(趙尙健)이 상서(上書)하기를,
"정택하(鄭宅河)가 이집(李㙫)을 탄핵(彈劾)한 것은 크게 실상(實狀)이 아닙니다."
하였는데, 이튿날 정택하가 인피(引避)하니, 간원(諫院)에서 처치(處置)하여 체차(遞差)시켰다.

 

조상건(趙尙健)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삼았다.

 

11월 22일 경인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지난 겨울에는 여러 증세가 올해 같지는 않았는데, 상전 개탁(上前開拆)441)  하던 날 저녁까지 장시간에 걸쳐 수응(酬應)을 하고 증후(證候)가 더 첨가되었다. 앞으로 전최(殿最)442)  가 멀지 않았는데, 지금 기력(氣力)이 점차 예전만 못하고 정신이 때때로 어지러워 결코 하루 안에 마치기 어려울 것이니, 변통(變通)하여 둘로 나누지 않을 수 없다. 수령(守令)과 변장(邊將)의 포폄(褒貶)은 전례에 의하여 입계(入啓)하고, 그 나머지 경외(京外)의 포폄은 동궁(東宮)에 입달(入達)하되, 이조(吏曹)·병조(兵曹)의 양등(兩等)의 세초(歲抄)443)  는 소결(疏決)한 예에 의거하여 그날 대신(大臣)이 입대(入對)하면 세자가 대신에게 물어서 부표(付標)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윤양래(尹陽來)·홍계적(洪啓迪)을 승지(承旨)로, 윤석래(尹錫來)를 집의(執義)로, 김상옥(金相玉)을 부응교(副應敎)로, 조상경(趙尙絅)을 교리(校理)로, 황흠(黃欽)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정호(鄭澔)를 좌참찬(左參贊)으로 삼았다.

 

11월 23일 신묘

간원(諫院)에서 전에 진달(陳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직강(直講) 신혼(申混)은 일찍이 해주(海州)를 맡았을 때 군보미(軍保米)를 가지고 사사롭게 장사를 하여 취리(取利)한 것이 셀 수가 없으며, 지난해에 급재(給災)가 자그마치 3백 80결에 이르렀는데도 민간에 나누어 급재한 것은 60여 결에 지나지 않았으니,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소서. 곽산 군수(郭山郡守) 이천익(李天翊)은 본래 비천(卑賤)한 사람으로서 연줄을 타고 출세하여 일찍이 강동(江東)을 맡았을 때 오로지 사복(私腹)만 채웠으니, 청컨대 개차(改差)하소서."
하였는데, 세자가 말단의 일만 따랐다.

 

헌부(憲府)에서 진달(陳達)하기를,
"장단(長湍)은 기보(畿輔)의 중진(重鎭)이고 또 방영(防營)인데, 큰 길에 위치해 있으면서 조잔(凋殘)하고 피폐함이 날로 심해지고 있습니다. 종전에 송도(松都)에서 장단(長湍)의 송서면(松西面)을 떼어주기를 청하였으나, 지금까지 허락하지 않았던 것은 대개 그 까닭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전(前) 유수(留守)의 신청(申請)으로 인하여 묘당(廟堂)에서 복주(覆奏)하여 시행하도록 허락한 일이 있다고 합니다. 장단에서 믿고 의뢰하는 고을은 단지 이 한 면(面)뿐이고, 송도는 원래 호조(戶曹)에 납세(納稅)하는 규례가 없고, 또 백성들이 부역(賦役)하는 일도 없는데, 이제 장단의 세금을 바치는 땅을 송도(松都)의 세금이 없는 전지(田地)로 만드니, 이미 조정의 실책입니다. 한 면에서 담당하던 부역을 다른 면에 첨가시킨다면 장단은 더욱 지탱하기 어려운 형세가 있으니, 청컨대 송서면을 송도에 이속(移屬)시키도록 한 명령을 거두소서."
하였으나, 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대개 송서면은 곧 장단의 땅이었는데, 송도와 근접(近接)해 있으므로, 송도에서 번번이 이를 얻고자 하여 여러번 조정에 청할 적마다 장단에서 문득 이를 다투어 수십 년이 지나도록 결정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전(前) 개성 유수(開城留守) 유명웅(兪命雄)이 또한 장계(狀啓)에 연명(連名)하여 이속시키기를 원하자, 묘당(廟堂)에서 앞질러 그 청을 허락하였으므로, 대관(臺官)이 쟁론(爭論)한 것이었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진후(診候)를 마치자,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근일에 임금의 환후(患候)가 첨가(添加)되어 수응(酬應)이 더욱 어렵다 하여 평소 응당 입계(入啓)해야 할 공사(公事)의 명목(名目)을 열서(列書)해 올리고 도승지(都承旨) 김연(金演)으로 하여금 앞에서 읽게 한 뒤 임금이 재량(裁量)하여 줄일 것을 청하였다. 이에 군호(軍號)·생기(省記), 관상감(觀象監)의 재이 단자(災異單子), 감군(監軍)의 낙점(落點)·표신(標信)·계청(啓請)·보계청(寶啓請) 외에 크고 작은 공사(公事)를 한결같이 동궁에 입달(入達)하도록 명하였다.

 

금성(金城)의 요적(妖賊) 윤풍립(尹風立)을 베었다. 처음에 금성에 신의선(申義先)이라는 요사(妖邪)한 백성이 있었는데, 신(神)을 섬긴다고 사칭(詐稱)하며 부적(符籍)과 정화수(井華水)로 사람의 온갖 병을 치료할 수 있다 하므로 귀부(歸附)하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매우 많았다. 윤풍립이 더욱 정성을 다하여 신의선을 섬기자, 신의선은 성인(聖人)을 자칭(自稱)하고 윤풍립을 공자(公子)라고 불렀다. 그리고 신의선이 떠벌리기를, ‘올해에 여역(癘疫)이 크게 퍼져 온 나라 사람들이 장차 죄다 죽을 것이나, 나를 따라 횡성(橫城)에 가서 북도(北道)로 이전해 들어가는 자는 근심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현령(縣令)        조하기(曹夏奇)가 그 요탄(妖誕)한 말을 미워하여 그 절친(切親)을 가두자, 신의선이 이에 윤풍립과 그 아들 신명립(申明立) 등을 거느리고서 말을 타고 활을 차고 손수 칼을 잡고 관문(官門)에 나아갔는데, 이는 대개 관리(官吏)가 그 신(神)을 두려워하여 가둔 사람을 석방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하기가 군졸을 풀어 이들을 포위한 뒤 신의선을 격살(格殺)하고, 윤풍립·신명립과 따르는 백성 5, 6인을 잡아 순영(巡營)에 보고하였다. 영상(領相) 김창집(金昌集)의 차자(箚子)로 인하여 그 옥사(獄事)를 서울로 올려 보내어 좌·우 포도 대장(捕盜大將)에게 명하여 합좌(合坐)해서 안치(按治)하게 하였는데, 모두 복초(服招)하니, 마침내 베고 나머지는 모두 원방(遠方)에 유배(流配)하였다.

 

11월 24일 임진

세자가 경현당(景賢堂)에 좌기(坐起)하여 경외(京外)의 사수(死囚)의 초복(初覆)을 행하였는데, 모두 9명이었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법(法)에 의거해서 다스리도록 대답하였는데, 아울러 우선 삼복(三覆)444)  을 기다려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였다. 사간(司諫) 조명겸(趙鳴謙)이 전에 진달(陳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회령 부사(會寧府使) 이하정(李夏禎)은 상고(商賈)와 결탁하여 관문(官門)을 저자[市]로 만들었고, 요사스러운 기생에게 고혹(蠱惑)되어 뇌물(賂物)이 공공연하게 행해졌습니다.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
하였으나, 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이날 윤선거(尹宣擧)의 서원(書院)에 대한 일을 간원(諫院)에서도 정론(停論)하였다.

 

11월 25일 계사

김제겸(金濟謙)을 헌납(獻納)으로, 조영세(趙榮世)를 정언(正言)으로, 정택하(鄭宅河)를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11월 26일 갑오

형조(刑曹)에서 재복(再覆)한 문서(文書)를 가지고 와서 바쳤다.          【재복(再覆)은 으레 입시(入侍)하지 않고, 단지 해조(該曹)에서 문서(文書)만 다듬어 들여 보낸다.】


【태백산사고본】 72책 64권 33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90면
【분류】사법-재판(裁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11월 27일 을미

세자가 경외(京外)의 사수(死囚) 9명의 삼복(三覆)을 행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법(法)대로 처리하도록 대답하니, 아울러 율(律)에 의거하도록 하였다. 지평(持平) 김고(金槹)가 전에 진달(陳達)했던 것을 아뢰었으나, 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 말하기를,
"상주 목사(尙州牧使) 권엽(權熀)은 제멋대로 서울 사람에게 대동미(大同米)를 내주고 환전(換錢)하여 방납(防納)445)  하도록 허락하였으니, 마땅히 나문(拿問)해야 합니다."
하니, 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사학 유생(四學儒生) 황상중(黃尙中) 등이 상서(上書)하여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을 효종(孝宗)의 묘정(廟庭)에 추배(追配)하기를 청하고, 또 윤선거(尹宣擧)의 서원(書院)을 허물고 정론(停論)한 대관(臺官)을 견책(譴責)하기를 원하였는데, 이르기를,
"가령 은(殷)나라·한(漢)나라 양대(兩代)에서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한 예전(禮典)을 거론(擧論)한다면, 어찌 이윤(伊尹)446)  과 공명(孔明)447)  이 성탕(成湯)과 소열 황제(昭烈皇帝)448)  보다 늦게 죽었다 하여 그 묘정에 배향하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선정(先正)의 성조(聖祖)에 대한 관계는 은나라 한나라 군신(君臣)에 비하여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으니, 지금 유독 전례(前例)로서 말하는 것이 또한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송(宋)나라 조보(趙普)는 태종조(太宗朝)에 죽었으나 태조(太祖)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한기(韓琦)는 신종조(神宗朝)에 죽었으나 영종(英宗)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우리 나라 한명회(韓明澮)는 성종조(成宗朝)에 죽었으나 세조(世祖)의 묘정에 배향되었습니다. 이 몇 신하들의 경우는 선정(先正)에게 견주기에 부족하나 그 추배(追配)하는 전례로 말하자면 이와 같이 명백(明白)하니, 이 어찌 전례(前例)가 없다고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양사(兩司)에서 잇따라 윤선거(尹宣擧)의 서원(書院)을 허물고 문집(文集)의 판각(板刻)을 깨뜨리자는 진달(陳達)을 정지하였는데, 이 일은 관계된 바가 매우 중대합니다. 무릇 대각(臺閣)에 있는 자는 입이 닳도록 힘써 간쟁(諫爭)해야 하는 법이고, 청한 바를 준허(準許)받지 못하면 그만둘 수가 없는데, 도리어 대수롭지 않게 보고 갑자기 정론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여 그치지 않는다면 점차 제방(堤防)이 해이해지고 시비(是非)의 구분이 어두워질 것이니, 얼마 후에는 추삭(追削)의 벌(罰)을 환수(還收)하고 윤선거를 가리켜 현인(賢人)이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세도(世道)와 인심(人心)의 해가 됨은 장차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삼가 원하건대 저하께서는 빨리 서원을 허물고 문집의 판각을 깨뜨리라는 명(命)을 내리시고, 인하여 정론한 대관(臺官)의 죄를 다스리소서."
하였다. 입대(入對)하였을 때에 글을 들이니, 세자가 답하기를,
"지금 배향하자는 청을 듣고 유현(儒賢)을 존숭(尊崇)하는 너희들의 정성을 매우 가상(嘉尙)하게 여긴다. 그러나 이 일은 사체(事體)가 중대하니, 준허(準許)할 수 없다."
하고, 이날 밤 또 비지(批旨)를 가져 오게 하여, ‘윤선거의 일은 쟁집(爭執)한 지 이미 오래 되었으니, 정론하였다 하여 무슨 해로움이 있겠는가? 너희들의 말은 자못 너무 지나친 데에 관계된다.[尹宣擧事 爭執已久 停論何妨 爾等之言 殊涉太過]’는 21자를 첨서(添書)하여 내렸다. 황상중 등이 세 번이나 상서(上書)하여 거듭 청하였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11월 28일 병신

이집(李㙫)을 도승지(都承旨)로, 홍정필(洪廷弼)을 사간(司諫)으로, 남일명(南一明)을 수찬(修撰)으로, 김민택(金民澤)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11월 30일 무술

예조(禮曹)에서 겨울이 이미 저물어 가는데 아직 큰 눈이 내리지 않고 있으므로, 내년 〈가뭄의〉 근심을 말할 수 없다 하여, 중신(重臣)을 보내어 종묘(宗廟)·사직(社稷)·북교(北郊)에서 기설제(祈雪祭)를 베풀기를 청하니, 세자가 옳게 여겼다.

 

세자가 대신(大臣)을 불러 접견(接見)하고, 연례(年例)의 세초(歲抄)를 의논하여 처결(處決)하였다. 승지(承旨)가 나아가 이조(吏曹)·병조(兵曹)의 단자(單子) 가운데 있는 여러 사람의 죄명(罪名)을 읽고 난 뒤 서용(敍用)할 자와 직첩(職牒)을 환급(還給)할 자를 아울러 부표(付標)하게 하고, 해당되지 않은 자는 내버려 두게 하였으며, 죄명(罪名)이 의심스러운 자는 대신(大臣)에게 물어서 처리하게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 말하기를,
"권두기(權斗紀)·김세흠(金世欽)·여필중(呂必重)·강이상(姜履相)·박태춘(朴泰春)·이정사(李廷師)·이명의(李明誼) 등은 모두 대조(大朝)께서 서용하지 않게 한 사람들입니다."
하니, 세자가 서용하지 말도록 하였다. 세초를 마치자,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전(前) 균전사(均田使) 이재(李縡)와 홍석보(洪錫輔)는 각기 사정과 형편이 있었는데 죄를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이미 벌을 시행하였으니, 바라건대 대조께 계품(啓稟)하여 처리하소서."
하니, 세자가 허락하였다. 이날 저녁에 세자가 하령(下令)하기를,
"이재와 홍석보의 일을 대조께 계품하였더니, 문외 출송(門外黜送)을 풀어줌이 마땅하다고 하교(下敎)하셨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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