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64권, 숙종 45년 1719년 12월

싸라리리 2025. 12. 1.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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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기해

세자가 하령(下令)하기를,
"조신(朝臣)은 피혐(避嫌)할 수 없다는 성교(聖敎)가 분명히 있었는데, 승지(承旨) 조관빈(趙觀彬)이 거듭 소명(召命)을 어김은 오로지 피혐에서 말미암았으니, 크게 과당(過當)한 데 관계된다. 거듭 패초(牌招)하여 직임(職任)을 살피게 하라."
하였다. 이때 조관빈이, 승지 홍계적(洪啓迪)이 근년에 성진령(成震齡)을 구호(救護)하며 그 아버지 조태채(趙泰采)를 침척(侵斥)한 일이 있었다 하여 승정원(承政院)에 함께 있지 않으려고 연일 패초를 어겼으므로 이런 하교가 있게 된 것이다.

 

승지(承旨)를 전옥(典獄)에 보내어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게 하고, 얇은 옷을 입은 군사들에게 유의(襦衣)를 주게 하였으니, 날씨가 추워졌기 때문이었다.

 

12월 2일 경자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12월 3일 신축

윤헌주(尹憲柱)를 도승지(都承旨)로, 윤봉조(尹鳳朝)를 승지(承旨)로, 이봉익(李鳳翼)을 사간(司諫)으로, 경성회(慶聖會)를 장령(掌令)으로, 김민택(金民澤)을 지평(持平)으로, 홍우전(洪禹傳)을 정언(正言)으로, 홍계적(洪啓迪)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조상경(趙尙絅)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12월 6일 갑진

헌부(憲府)에서 전에 진달(陳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자산 부사(慈山府使) 유중석(柳重碩)은 장살(杖殺)한 이민(吏民)이 3, 4인에 이르고, 읍비(邑婢)에게 고혹(蠱惑)되어 탐학(貪虐)하고 법을 어겼으니, 청컨대 나문(拿問)하소서. 광양 현감(光陽縣監) 강성적(姜聖適)은 사람됨이 간사하고 잗달아서 오로지 백성을 학대하는 것만 일삼고 있으니,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
하였으나, 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12월 7일 을사

황귀하(黃龜河)를 승지(承旨)로, 조명겸(趙鳴謙)을 집의(執義)로, 홍용조(洪龍祚)를 지평(持平)으로, 박필정(朴弼正)·이현장(李顯章)을 정언(正言)으로, 조상경(趙尙絅)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이조(李肇)를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로 삼았다.

 

승지가 동궁에 입대하였다.

 

12월 8일 병오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어제 정사(政事)에서 남원 현감(南原縣監) 이현장(李顯章)을 대직(臺職)에 옮겨 제배(除拜)하였는데, 관안(官案)을 가져다 상고해 보았더니, 이현장은 부임(赴任)한 지 열 달이 안되었다. 자주 체차(遞差)하는 폐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 본직(本職)을 개차(改差)하고 남원 현감에 잉임(仍任)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9일 정미

세자가 하령(下令)하기를,
"‘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의 연시(延諡)449)  를 이달 19일로 정하였다고 하니, 1등의 음악을 내리고 연수(宴需) 및 내연(內宴)·외연(外宴)의 선온(宣醞)450)   등의 일은 전례에 의거하여 거행하라.’고 하교(下敎)하셨는데, 이는 응당 거행해야 하는 은전(恩典)이므로 성교(聖敎)가 이와 같았던 것이다. 다만 시호(諡號)를 내릴 때 음악을 내리는 일은 폐지할 수 없으나, 지금 성상의 환후(患候)가 더하여 상하(上下)가 애를 태우고 어쩔 줄 모르고 있는 때에 선온(宣醞) 등의 일을 한결같이 평소와 같이 한다면 본가(本家)에서도 반드시 불안(不安)해 할 것이니, 어떻게 하는 것이 알맞겠는가?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자, 예조(禮曹)에서 복주(覆奏)하기를,
"단지 반시(頒諡)할 때에만 음악을 내리고 내연(內宴)과 외연(外宴)의 선온(宣醞) 및 선온 때 음악을 내리는 것은 아울러 모두 정감(停減)하여 상하가 함께 근심하는 뜻을 보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내연과 외연의 선온을 아울러 정지하는 것은 너무 매몰(埋沒)하는 데 관계되니, 단지 외연의 선온만 베풀고, 연시(延諡)할 때 본가의 수용(需用)을 참작해서 실어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11일 기유

달이 필성(畢星)을 범하였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지평(持平) 김고(金槹)·집의(執義) 윤석래(尹錫來), 지평(持平) 홍우전(洪禹傳)·홍용조(洪龍祚), 정언(正言) 조영세(趙榮世)·박필정(朴弼正), 집의(執義) 조명겸(趙鳴謙) 등이 갑자기 윤선거(尹宣擧)의 서원(書院)을 허물라는 계청(啓請)을 정지하였다 하여 앞뒤로 인피(引避)하니, 처치(處置)하여 모두 체임(遞任)시켰다.

 

12월 12일 경술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12월 13일 신해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공사(公事)를 품재(稟裁)하고 나서 동부승지(同副承旨)        조관빈(趙觀彬)이 말하기를,
"묘당(廟堂)에서 황해 감사(黃海監司)의 장본(狀本)으로 인해 신포(身布)를 바치지 못한 신천(信川) 사람 이순찬(李順贊)이 관문(官門) 밖에서 자문(自刎)한 일을 복주(覆奏)하고, 신역(身役)과 환상(還上)을 아울러 탕감(蕩減)하기를 청하였습니다. 근래에 해마다 잇따라 흉년이 들었고, 게다가 여역(癘疫) 때문에 생민(生民)의 곤췌(困瘁)함이 팔도가 똑같은데, 가장 심한 것은 신역의 침독(侵督)이 인족(隣族)에 미치는 것으로서, 살아 남은 백성들이 더욱 보존(保存)할 희망이 없어져 심지어는 자살하는 사람까지 있으니, 이를 생각하면 진실로 불쌍합니다. 저하께서 대리(代理)하신 이후 어질다는 소문이 이미 전파되었으니, 누군들 흠앙(欽仰)하지 않겠습니까마는, 구중 궁궐 깊은 곳에서 소민(小民)의 여러 가지 질고(疾苦)를 어떻게 모두 들으실 수 있겠습니까? 삼가 성상께서 40년 동안 우근(憂勤)하시며 백성을 사랑하신 뜻을 생각하여 장주(章奏)와 장문(狀聞)가운데 무릇 민은(民隱)451)                  에 미치는 것은 반드시 뜻을 더하여 성찰(省察)하시고, 혹 대조(大朝)께 계품(啓稟)하시거나 혹은 묘당에 물으셔서 힘써 자혜(子惠)452)                  의 정사에 힘쓴다면, 어찌 생민의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세자가 말하기를,
"마땅히 유의(留意)하겠다."
하였다. 조관빈이 또 말하기를,
"나라에서 감사(監司)와 수령(守令)을 둔 것은 책임이 휼민(恤民)하는 데에 있으니, 백성이 곤궁하고 고통스러우면 마땅히 목이 타는 것처럼 근심하여 백성들이 살 곳을 마련해 주어야 하는데, 신천 군수(信川郡守)        이진순(李眞淳)은 어리석은 백성이 자살하였다 하여 체임(遞任)시켜 주기를 원하는 데에 이르렀습니다. 관직을 담당한 자가 조금이라도 난처한 일이 있을 경우 선처(善處)할 도리는 생각하지 않고 곧 모두 사피(辭避)한다면 누가 기꺼이 이사(吏事)를 담당하여 직책에 마음을 다하겠습니까? 너무나도 몹시 미안(未安)한 일인데, 황해 감사        이덕영(李德英)은 책면(責勉)할 도리는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장문(狀聞) 가운데에 그 사연(辭緣)을 끌어대었으니, 또한 매우 외람되고 잗단 것입니다. 청컨대 아울러 추고(推考)하소서."
하니, 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12월 14일 임자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헌부(憲府)에서 전에 진달(陳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당후(堂后)453)  의 천거(薦擧)는 참하(參下)의 청선(淸選)에 관계되므로, 진실로 허물이 있으면 감히 함부로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강세윤(姜世胤)은 과장(科場)에서 간교한 꾀를 썼기 때문에 충군(充軍)되기에 이르렀었으니, 그 허물이 진실로 작은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천염(薦剡)454)  에 올라 조금도 꺼리는 바가 없으니, 청컨대 추천한 해당 주서는 파직(罷職)하고 새로 천거된 강세윤은 천염 가운데에서 빼버리소서."
하였는데, 세자가 단지 유중석(柳重碩)·강성적(姜聖適)의 일만 따랐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12월 16일 갑인

승지(承旨)가 동궁에 입대하였다.

 

12월 17일 을묘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는데,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함께 입시(入侍)하였다. 진후(診候)가 끝나자,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말하기를,
"내일 개정(開政)하라는 명(命)이 있었는데, 지금 증후(症候)가 더하여 수응(酬應)이 민망스러우니, 조금 늦추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며칠 늦추도록 명하였다. 이이명이 말하기를,
"도목 대정(都目大政)은 으레 이달에 하는데, 지금 증후로서는 비록 으레 거행하는 정사(政事)라도 수응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하물며 대정(大政)은 많은 관원들을 주의(注擬)하여 차출(差出)하는 것이겠습니까? 일찍이 전에도 지체하여 봄을 넘기고 여름을 건너뛴 적이 있었으니, 이번에도 늦추어 거행하는 것이 무방(無妨)할 듯합니다."
하였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태조 대왕(太祖大王)께서는 육순(六旬)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셨는데, 신료(臣僚)들의 정성이 하루를 급하게 여겼으므로 올해 어휘(御諱)를 봉안(奉安)하고 고묘(告廟)·칭경(稱慶)을 진청(陳請)했던 것입니다. 다만 명년(明年)이 바로 성수(聖壽)가 육순에 꼭 차게 되는 해인데, 명년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이미 거행하였으므로 이제 더 거행할 만한 일이 없으나, 만약 육순이 되는 해를 적절하게 그냥 보낸다면 군하(群下)들의 결연(缺然)한 마음이 다시 어떠하겠습니까? 군의(群議)가 ‘진하(陳賀)하고 반교(頒敎)하는 일은 그만둘 수가 없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올해 이미 거행하였으니, 자못 중첩(重疊)되는 듯하다."
하였다. 이이명이 말하기를,
"육순이 되는 해를 어떻게 그냥 넘길 수 있겠습니까? 진하·반교하는 일 외에 칭경 등의 일은 올해에 이미 거행하였으나, 진하를 어떻게 폐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단지 진하하고 반교하는 일만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12월 18일 병진

승지가 동궁에 입대하였다.

 

12월 19일 정사

달이 태미 서원(太微西垣) 안으로 들어갔다.

 

승지가 동궁에 입대하였다.

 

12월 20일 무오

세자가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접(引接)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 말하기를,
"일찍이 전에는 춘첩자(春帖子)455)  의 영상시(迎祥詩)를 지어 바칠 때 대제학(大提學)이 패초(牌招)받아 대궐에 나아가 운(韻)을 내면 뽑힌 자들도 대궐에 나아가 지어서 바쳤는데, 근래에는 모두 집에서 지어서 보낸다 하니, 이 또한 태만한 습관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번부터 춘첩자는 마땅히 궐중(闕中)에 나아가서 지어 바치게 하소서."
하니, 세자가 옳게 여겼다. 지돈녕(知敦寧)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근래에 기강(紀綱)이 해이해져서 각 고을의 공부(貢賦)·군포(軍布) 등의 물건을 모리배(牟利輩)들이 중간에서 모두 방납(防納)하여 외방(外方)에서 받아 내고는 경중(京中)에 도착하면 곧 상납(上納)하지 않으므로 각 아문(衙門)의 용도(用度)가 구간(苟簡)하니, 일이 지극히 한심합니다. 이후로 방납하는 무리를 포청(捕廳)에 이송(移送)시켜 엄중하게 다스려 독촉해서 받아들이되, 기한 안에 바치지 않는 자는 바로 강도(强盜)와 다름없으니, 형조(刑曹)에 보내어 부대시 참형(不待時斬刑)456)  에 처하소서. 그리고 수령으로서 알면서도 모르는 체하는 자도 또한 마땅히 나문(拿問)하소서."
하자,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근래에 방납의 폐해(弊害)가 한정이 없으나, 부대시 참형에 처하는 데 이르러서는 어떨는지 모르겠습니다. 포청으로 하여금 장형(杖刑)으로 다스려 죄를 징계해도 또한 뒷날의 폐단을 막을 수 있습니다."
하자, 민진원이 말하기를,
"국가(國家)의 재물 4, 5천 금을 중간에서 도둑질해 먹은 자는 곧 도둑 중에서도 큰 도둑이니, 부대시 참형에 처하는 것이 지나친 줄을 모르겠습니다."
하였는데, 이건명이 말하기를,
"이러한 무리는 장물(贓物)을 계산하여 많을 경우 비록 사율(死律)에 이르더라도 또한 불쌍히 여길 것이 못 되나, 곧바로 부대시 참형으로 감단(勘斷)하는 것은 끝내 너무 지나친 듯합니다."
하니, 세자가 장물을 계산하여 논단(論斷)하게 하였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만성(李晩成)이 말하기를,
"무사(武士)로서 승전(承傳)하여 오랫동안 정체(停滯)된 자가 근년에 상언(上言)하여 억울함을 호소하였는데, 병조(兵曹)는 과궐(窠闕)이 매우 적기 때문에 미처 은혜를 입지 못하여 억울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양서(兩西)의 둔별장(屯別將)·산성 별장(山城別將), 진도(津渡)의 다섯 군데 별장 등의 직임(職任)은 그래도 전혀 은혜를 입지 못한 것보다 낫다고 하므로, 일찍이 이로써 정탈(定奪)하였으나 아직 절목(節目)을 정하지 못하였으니, 청컨대 이제부터 시작해서 절목을 만들어 달하(達下)해서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세자가 옳게 여겼다. 이만성이 또 말하기를,
"내삼청(內三廳)의 말사(末仕)를 옛날에는 이조에 보내어 승륙(陞六)시켰는데, 근래에 대신(大臣)이 ‘이조(吏曹)에서 승륙시킨 후 대부분 그대로 작산(作散)457)  하니, 억울하게 여긴다.’ 하고, 다시 이조에 보내지 않는 것으로 품정(稟定)하였습니다. 대저 수문장(守門將) 등속은 감찰(監察) 등의 벼슬을 할 수 없어서 쉽게 작산(作散)되지만, 선전관(宣傳官) 등속은 감찰·수령(守令) 등의 벼슬을 삼을 수 있는데도 이조에서 저지받는다 하여 도리어 억울함을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이후로는 선전관과 부장의 말사(末仕)는, 청컨대 전례에 의거하여 이조에 보내고 훈련원 수문장은 병조에 보내소서."
하니, 세자가 옳게 여겼다. 지평(持平) 김민택(金民澤)이 전에 진달(陳達)했던 것을 거듭 아뢰었으나, 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12월 21일 기미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춘첩자(春帖子) 연상시(延祥詩)의 제술관(製述官)의 초계 단자(抄啓單子)와 대제학(大提學)을 패초(牌招)하는 계사(啓辭) 및 지어서 바친 첩자(帖子)를 동궁(東宮)에 아울러 입달(入達)하게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계청(啓請)하기를,
"정월(正月) 초8일 진하(陳賀)할 때에 각도의 방물(方物)과 물선(物膳)을 전례에 의거하여 거행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명하여 봉진(封進)하지 말도록 하였다. 예조에서 다시 동궁에 진달하기를,
"이것이 비록 성상께서 불쌍히 여겨 절생(節省)하는 지극한 뜻에서 나왔으나, 폐지할 수는 없으니, 전례에 의거하여 봉진하게 하소서."
하니, 세자가 봉진하도록 하였다.

 

12월 22일 경신

유성(流星)이 하늘 가운데 엷은 구름 사이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다.

 

유명홍(兪命弘)을 도승지(都承旨)로, 김재로(金在魯)를 부제학(副提學)으로, 홍정필(洪廷弼)을 집의(執義)로, 정찬선(鄭纘先)을 교리(校理)로, 김진상(金鎭商)을 지평(持平)으로, 김고(金槹)·유복명(柳復明)을 정언(正言)으로, 김상윤(金相尹)을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12월 23일 신유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지금 여러 증후(證候)가 모두 줄어든 것이 없는데, 늙고 병든 대신(大臣)이 하루 종일 추위를 무릅쓰고 들어오니, 내가 매우 염려된다. 조정에서는 문안(問安)하지 말도록 하라. 경은 부원군(慶恩府院君)이 본래 해소병(咳嗽病)과 요통(腰痛)을 앓고 있는 것을 내가 자세히 알고 있다. 추위를 무릅쓰고 출입하면 반드시 손상될 것이니, 스스로 헤아려 들어오되 매일 문안(問安)하지는 말게 하라."
하였다.

 

12월 25일 계해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12월 26일 갑자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관상감(觀象監)에서 말하기를,
"평소에 일식(日蝕)·월식(月蝕)이 하늘가에 나타나면 으레 반드시 높은 곳에 올라가서 보아야 합니다. 경자년458)   정월 초1일 무진(戊辰)에 일식이 있을 것인데, 사편법(四篇法)으로 추산(推算)해 보건대, 대명 력법(大明曆法)으로는 일식하지 않게 되어 있으나, 시헌 력법(時憲曆法)으로는 처음 이지러지는 시각이 신시(申時) 정2각 8분이었고, 내편법(內篇法)으로는 처음 이지러지는 시각이 유시(酉時) 초1각이었고, 외편법(外篇法)으로는 처음 이지러지는 시각이 유시 초 초각이었고, 삼편법(三篇法)으로 살펴보았더니, 그날 해가 질 때와 서로 가까왔습니다. 대궐 뜰에서 바라보면 상세하게 살펴보기 어려울 듯하니, 청컨대 따로 본감(本監)의 관원을 정하여 남산에 올라가서 보게 하고, 해가 질 때에 만약 이지러지는 형상이 있으면 곧 화전(火箭)을 쏘아 서로 보고하게 하여 구식(救食)하는 바탕으로 삼으소서."
하니, 세자가 옳게 여겼다.

 

12월 27일 을축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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