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65권, 숙종 46년 1720년 1월

싸라리리 2025. 12. 1.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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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일 기사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전라도 균전사(全羅道均田使) 김재로(金在魯)와 충청도 균전사(忠淸道均田使) 김운택(金雲澤)이 품정(稟定)할 일로 인해 환조(還朝)하여 입대(入對)를 원하니, 세자(世子)가 소견(召見)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신(臣)이 당초에 ‘양전(量田) 뒤에 정안(正案)에 대해서는 감사(監司)로 하여금 관장하도록 하거나 혹은 다만 초안(草案)만 가지고 올라와서 따로 균전청(均田廳)을 경사(京司)에 설치하여 비교하고 바로잡아 고치는 일’을 품달(稟達)하고,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그 중 어느 하나를 지적해서 분부케 할 것을 청하였는데, 그 뒤에 빈청(賓廳)에서 차대(次對)할 때, ‘내려간 뒤에 다시 살펴서 품정(稟定)하겠다.’는 명이 있었습니다. 신 등이 내려간 뒤에 그 형세를 살펴보았더니, 개량(改量)하여 성책(成冊)하는 일이 지극히 호번하고 많았으며, 비록 전결(田結)이 지극히 적은 고을일지라도 문서(文書)는 역시 한 바리에 이르렀습니다. 도신(道臣)은 우도(右道)를 관장하였는데, 우도의 문서도 오히려 다 살펴보기가 어려웠으니, 어찌 거기다 좌도(左道)의 일을 더 보탤 수가 있겠습니까? 균전사가 만일 머물러 있으면서 정안(定案)을 다 만들려고 한다면 장차 여름을 지나서 가을까지 끌게 될 것이니, 끼칠 폐단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각읍(各邑)의 초안(草案)이 다 도착하기를 기다린 뒤 균전사가 올라와서 경중(京中)의 공해(公廨)에다 균전청을 설치하고, 호조(戶曹)의 산원(算員)과 각사(各司)의 서리(書吏) 중에서 문서와 계산에 능한 자들을 다수 옮겨 차임시키며, 균전사가 날마다 나와 앉아서 검독(檢督)하여 마감(磨勘)하는 방도로 삼는다면 좋을 듯합니다. 청컨대 다시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니, 세자가 옳게 여겼다. 김재로(金在魯)가 또 말하기를,
"이번 개량(改量) 때 오래된 전답(田畓)의 송사가 일제히 일어나 첩소(牒訴)001)                  가 아주 번거롭습니다. 그 중에서 즉시 결단할 수 있는 것은 진실로 마땅히 그 주객(主客)을 정하여 실제대로 장부에 기록해야 하겠지만, 또한 간혹 미처 상세히 조사하지 못하여 성급하게 결정하기 어려운 것들도 있으니, 이는 우선 시집(時執)002)                  으로써 장부에 기록하여 조용히 조사하고 분석해서 과연 명백한 본 주인이 있으면, 양명(量名)에 구애되지 말고 곧바로 이급(移給)해야 합니다. 또한 관계가 없는 사람이 그 본 주인이 멀리 있는 틈을 타서 몰래 자기 이름을 기록하여 남의 전답(田畓)을 훗날에 부당하게 차지하려는 계획을 하는 경우가 있으면, 마땅히 발견되는 대로 우선적으로 형추(刑推)하여 전가 사변(全家徙邊)003)                  시켜야 합니다."
하니, 세자가 옳게 여겼다. 김재로가 또 말하기를,
"양전(量田)이 바야흐로 한창인데, 그때 수령(守令)들을 만일 체개(遞改)시킨다면 다만 공역(功役)이 정체될 뿐만 아니라 막중한 문서(文書)가 반드시 허술한 데로 돌아가 간위(奸僞)가 쉽사리 발생할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더욱 몹시 흐리멍덩하여 결코 임무를 감당하기 어려운 자는 균전사와 도신(道臣)이 진실로 마땅히 잘 살펴서 물리쳐 버려야 하겠지만, 만일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비록 다소 미진한 점이 있을지라도 체직시켜 바꾸는 데 이른다는 것은 진실로 대단히 곤란한 바가 있습니다. 청컨대 양전(兩銓)에 신칙(申飭)하여 삼남(三南)의 수령들은 양전을 끝마칠 때까지는 비록 시종(侍從)의 직임이나 승천(陞遷)하는 자리라도 의망(擬望)하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세자가 허락하였다. 김운택이 말하기를,
"신이 관장하는 양전의 일 가운데 정안(正案)을 작성하는 한 가지 사항이 진실로 또한 처리하기 곤란합니다. 마땅히 호남 균전사가 진달한 바에 따라 해야 할 듯한데, 만일 혹시 정월(正月) 이내에 양전을 끝마친 경우가 있다면, 마땅히 신이 본도(本道)에 있는 동안 정안을 작성하도록 하여 인준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다만 그 계산하고 판단하는 등의 일은 실로 범위가 넓어 결코 한 사람의 산원(算員)이 혼자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청컨대 각 고을의 계산에 능한 사람들을 도회처(都會處)로 불러모아 사역(使役)시키되, 감관(監官)의 예(例)에 따라 급료를 지급하소서."
하니, 세자가 허락하였다. 김운택이 또 말하기를,
"양전은 실로 엄청난 일로서 관(官)과 민(民)이 현재 여기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지(紙)·필(筆)·묵(墨)을 마련하기 어려움도 또한 보통 때의 배나 되는데, 봄이 지난 뒤에 또 호적(戶籍)의 역사가 있습니다. 호적 역시 긴요하고 중대한 일인데, 지금의 사세(事勢)로서는 실로 양역(量役)과 병행하기 곤란합니다. 예전에 간혹 흉년 때문에 시기를 물려 거행한 예가 있으니, 청컨대 이번에도 이 예에 따라 가을 쯤으로 늦추어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고, 김재로가 말하기를,
"이것은 삼남(三南)도 똑같이 늦추어서 시행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세자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1월 4일 신미

이기익(李箕翊)과 조명봉(趙鳴鳳)을 승지(承旨)로, 송상기(宋相琦)를 판의금(判義禁)으로 삼았다.

 

승지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1월 5일 임신

정언(正言) 유복명(柳復明)이 기막(畿幕)으로부터 조정에 돌아와서 상서(上書)하여 기읍(畿邑)의 폐막(弊瘼)을 논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공도회(公都會)004)  를 6월에 시행하는 것은 그 까닭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바야흐로 농사가 한창인 절기라 시골 마을이 아무 것도 없고, 노자돈이나 먹을 양식을 빈궁한 선비가 마련하지 못하여 앉아서 그만두는 경우가 거지반입니다. 이제부터 중춘(仲春)이나 혹은 중추(仲秋)로 결정하여 시행하는 것이 아무래도 합당할 듯합니다. 기내(畿內)의 전정(田政) 가운데 이른바 ‘구진(舊陳)005)  ·잉진(仍陳)006)  ·천반 포락(川反浦落)007)  ·복사(覆沙)008)   등의 여러 가지 명색(名色)이 원장(元帳)에 비해서 거의 절반이 넘습니다. 고을마다 다 그러한데 만일 삼남(三南)의 예에 따라 개량(改量)을 더하고자 한다면 실로 감당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모조리 개량하지 말고 다만 잉진·구진·천반 포락·복사·잡탈(雜頉)009)   등의 곳에 집어내어, 경차관(敬差官)이나 또는 도사(都事)를 골라 보내어 축고 타량(逐庫打量)하도록 한다면, 경내(境內)는 소요가 일어나는 폐단이 없고 전결(田結)을 앉아서 얻는 이익이 있을 것이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함이 마땅합니다. 총융사(摠戎使)가 기보(畿輔)에 나가 순행하는 것은 조금도 보탬이 없으며, 서울에서부터 데리고 가는 80명의 추졸(騶卒)010)  이 열읍(列邑)을 두루 돌아다닌다면 그들을 접대하는 폐단은 잔읍(殘邑)에서 더욱 지탱하기 어려운 점입니다. 수원(水原)에서 시상(試賞)하고 호궤(犒饋)011)  하는 즈음에 만명에 가까운 군병(軍兵)들이 짧은 시간 동안 음식을 나눠 먹으며 대충대충 스쳐 지나가니, 무슨 연습하는 이익이 있겠습니까? 수원과 장단(長湍)은 본래 좌우(左右) 방영(防營)이니, 해마다 양진(兩鎭)으로 하여금 봄과 가을에 시상하도록 하여 조용히 무예를 강습한다면 재주를 시험하고 군사를 먹이는 일이 반드시 이와 같이 구간(苟簡)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총수(摠帥)의 순행을 만일 완전히 폐지하기 어렵다고 한다면, 3년에 한 번 순행하게 하되, 그 추졸을 감해야 한다는 뜻으로 신칙(申飭)을 더함이 마땅합니다. 경기(京畿)의 수재(守宰)가 도하(都下)에 들어올 때 영문(營門)에서 말미를 받는 규정이 없기 때문에 내왕이 매우 잦아서 민폐(民弊)가 염려스럽습니다. 지금부터는 경기의 원에게 휴가를 주어서 다니도록 하고 임의로 왕래하지 못하게 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나라의 기강이 아주 크게 느슨해지고 형법(刑法)이 더욱 무너져 요사이 중인(中人)·하인(下人)의 무리로서 죄를 지어 유배(流配)된 자가 사사로이 본 고을의 원에게 부탁하여 곧바로 그 집으로 돌아와 해가 지나도록 돌아가지 않기도 하고, 심한 경우는 간혹 다시 배소(配所)에 가지 않는 자들도 있습니다.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적발하여 중죄(重罪)로 추궁하도록 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세자가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였다.

 

세자가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접(引接)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호남 균전사(湖南均田使) 김재로(金在魯)가 양안(量案)을 수정(修正)하는 일 때문에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해야 할 것을 원하였습니다. 균전사가 체류하면서 다 수정하기를 기다린다면 폐해를 끼치는 것이 반드시 적지 않을 것이고, 서울로 올라온 뒤에 균전청(均田廳)을 설치하여 수정한다면 폐해를 덜 수가 있을 것이니, 마땅히 허락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 말하기를,
"김운택(金雲澤)이 진달한 바에 의거해서 균전사가 본도(本道)에 있을 때 각 고을의 문서(文書)를 양전(量田)을 끝마치는 대로 즉시 수정하되, 미처 수정하지 못한 것들은 올라온 뒤에 마감(磨勘)하는 것이 편리하고 좋을 듯합니다."
하니, 세자가 옳게 여겼다. 김창집이 또 말하기를,
"김운택이 양전하는 일이 바야흐로 한창이라 하여 호적(戶籍)을 늦출 것을 원하였는데, 삼남(三南)을 모두 가을쯤으로 늦추어서 시행하도록 허락하는 것이 무방하겠습니다."
하니, 세자가 허락하였다. 김창집이 또 말하기를,
"동래 부사(東萊府使)가 장계(狀啓)를 올리기를, ‘왜(倭)의 공목 작미(公木作米)012)  는 연한이 이미 다한 뒤에는 다시 허가할 수 없다는 뜻으로 사리에 의거해 책유(責諭)하였더니, 왜인(倭人) 등이 말하기를, 「대마도(對馬島)는 산만 있고 평야가 없어 곡식이 생산되는 곳이 없기 때문에, 본도(本島)의 인민(人民)들은 다만 이 쌀만 바라고 있습니다. 이 쌀을 얻으면 생존할 수 있지만 얻지 못하면 굶주리게 되니, 관계가 매우 중대합니다. 더구나 70년 동안의 작목미(作木米)를 일시에 정파(停罷)해 버리면 섬에 사는 사람들의 목숨은 이로부터 끊어지고 말 것입니다.」 하면서 누누이 간청하였습니다.’ 하며,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대마도는 이미 곡식을 생산하는 지역이 아니라 그들의 청에 따라 공작미를 지급하도록 허락한 것이 그 유래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그런데 연한이 이미 다 되면 번번이 연한을 늦출 것을 청하곤 하니, 이는 실로 계속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시종 막아버리는 것도 곤란하니, 다시 5년을 한정하여 허락하는 것이 또한 무방할 듯합니다."
하니, 세자가 옳게 여겼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신(臣)이 생각한 바가 있어서 감히 진달합니다. 저하(邸下)께서 대리(代理)하신 지 지금 이미 4년이 되었습니다. 국사(國事)에 대해서 아마 이미 명백히 익히셨을 듯한데, 언제나 신료(臣僚)를 인접(引接)할 때면 너무 심하게 침묵을 지키시고, 수작하는 즈음에 간혹 분명함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 신하들이 마음속으로 자못 답답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이 점에 유의하시어 비록 승지가 입대(入對)할 때라도 크고 작은 장독(章牘)에 대해 반드시 그 가부(可否)를 논하시고 그 진달하는 바를 듣고서 논란(論難)에 대해 분별해 주신다면 보탬이 되는 바가 어찌 적겠습니까?
하니, 세자가 말하기를,
"마땅히 유의(留意)하겠다."
하였다. 이건명이 말하기를,
"영상(領相)이 진달한 바가 진실로 매우 절실합니다. 비괘(否卦)와 태괘(泰卦)를 가지고 말씀드린다면, 천지(天地)가 교합(交合)하지 못하는 것이 비(否)로서 만물(萬物)이 이루어지지 않고, 천지가 교합하는 것이 태(泰)로서 음양(陰陽)이 승강(升降)하고 두 기운이 서로 유행하여 만물이 화태(和泰)하게 됩니다. 인군(人君)이 하늘을 본받아 도(道)을 행하고 자신을 비우고 합하여 받아들인다면 위아래가 서로 믿고 뭇 사람의 마음이 막힘이 없게 될 것입니다. 지금 민생(民生)이 극도로 곤궁하고 지쳐있으며, 국정(國政)이 극도로 해이해져 있습니다. 저하께서 언제나, ‘어떻게 하면 조금이나마 구제할 수 있을까?’라고 생가하시어 부지런히 노력하며 게을리하지 않으시고 모든 생각을 여기에 두신다면, 정치를 하는 방도에 있어 어찌 효험이 없겠습니까? 바야흐로 한 해의 첫머리를 당하였으니, 더욱 마땅히 상천(上天)을 본받아 덕정(德政)을 펼쳐야 할 것습니다."
하고, 김창집이 말하기를,
"신이 먼저 대략(大略)을 진달하였는데, 우상(右相)이 또 이와 같이 진달하니, 원컨대 깊이 유념을 더하소서. 학문과 공부에 이르러서는 더욱 잠시라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인데, 요사이 시탕(侍湯)하는 중에 있으시어 오랫동안 서연(書筵)을 폐하였습니다. 비록 사세가 참으로 그렇긴 하지만, 또한 조금이라도 여가가 있을 때 곧 서사(書史)를 펼쳐 읽는다면, 절로 침잠(沈潛)·융회(融會)의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지돈녕(知敦寧)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모든 일은 정신을 모은 뒤에야 시비(是非)의 소재를 스스로 알 수 있으니, 크고 작은 일을 물론하고 여러 신하들의 의견을 거두어 들어 보셔서 시비를 살피고 일의 정당함을 저울질한다면 지려(智慮)가 점차 증진될 것입니다."
하니, 세자가 말하기를,
"마땅히 유의하겠다."
하였다. 응교(應敎) 김상옥(金相玉)이 말하기를,
"조금 전에 두 대신(大臣)이 진달한 바는 근간(懃懇)하고 절실하며, 저하께서는 이미 ‘유의하겠다.’고 허락하셨으니, 다시 더 진달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다만 종전부터 연중(筵中)에서 진계(陳戒)하는 것이 있으면 저하께서 언제나 ‘유의하겠다.’고 답하였으나, 그 뒤에 특별히 ‘유의’를 더하는 실효가 있음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듣건대 승지가 입대할 때에 크고 작은 장주(章奏)를 대충 한 번 읽고 나면 저하께서는 일찍이 유의하지 않으시고 번번이 예에 따라 답하시는 경우가 많다고 하니, 이점은 더욱 여러 신하들이 마음에 민망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이 뒤부터는 종전처럼 대충 듣지 마시고, 채 이해되지 않는 곳이 있으면 승지로 하여금 다시 읽도록 하여 주시길 바라며, 비록 여러 차례 읽게 된다 하더라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신다면 국사(國事)는 매우 다행스러워질 것이고, 대조(大朝)013)  께서 부탁하신 뜻도 위로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삼가 보건대 저하께서는 신료를 대하는 즈음에 자못 엄하고 굳센 태도가 결여되어 있고, 때로는 간혹 피곤하여 기대시기도 하십니다. 더구나 대신이 지금 바야흐로 입시하고 있으니 그 공경히 대우하는 도리에 있어서 더욱 마땅히 이와 같이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구용(九容)014)  의 의미에 대하여 더욱 유의하도록 하소서."
하니, 세자가 말하기를,
"마땅히 유의하겠다."
하였다.

 

1월 6일 계유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1월 8일 을해

임금의 수(壽)가 꼭 육순(六旬)이 되었다 하여 종묘(宗廟)에 고한 뒤 왕세자(王世子)가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진하(陳賀)하고, 팔방(八方)에 교지(敎旨)를 반포하였다. 그 글에 이르기를,
"왕은 말하노라. 상천(上天)이 아름다움을 되풀이하여 육순(六旬)의 연기(年期)가 이미 이르러, 한 사람이 경사가 있으매 십행(十行)015)  의 윤음(綸音)을 크게 펼치노니 성사(盛事)를 과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군정(群情)의 간곡함을 따른 것이다. 생각건대 나 불곡(不穀)016)  이 외람되게 큰 기업을 이었도다. 질병이 몸을 떠나지 않는데 만년이 어느덧 닥친 것이 놀랍고, 어려움이 눈에 가득한데 보위(寶位)를 돌아보니 편안하지 못하도다. 거룩한 덕은 선왕(先王)에 짝할 수 없으니 한갓 근심만 간절하고, 이 백성을 태평한 세상에 살게 할 수 없으니 치리(治理)를 이루기 어렵도다. 일과 마음이 아득히 틀어지는데, 어느덧 나이는 이순(耳順)017)  이 되었도다. 수사(壽社)018)  의 지미(趾美)에 한 살이 부족하고, 새해가 새로 시작됨에 미쳐서 꼭 60세가 되었도다. 이에 정월(正月)이 돌아옴을 맞아 만백성의 축복(祝福)이 더욱 간절하도다. 비록 신자(臣子)의 희구(喜懼)019)  하는 정성으로는 금년을 헛되이 보내는 것을 애석하게 여기겠으나, 과인이 억제하고 겸손하는 뜻에는 번거로운 의식을 거듭 행하는 것을 불만족하게 여긴다. 백관(百官)들을 조정에 모아서 단지 하례를 받는 전례만을 허락하고, 종묘(宗廟)에 제사를 올려서 이에 고사(告事)의 의식을 거행하노라. 절차가 간단하매 나의 마음은 편안하고 예(禮)가 펼쳐지매 뭇 사람의 바람은 이지러짐이 없도다. 내가 어떻게 수신(修身)하여 미칠 수 있을까? 국운을 여는 아름다운 경사를 추급(追及)하기는 어렵도다. 나는 한 일이 없는데 사람들이 스스로 편안하니, 깊은 연못가에 선 듯 두려움이 더욱 두텁도다. 돌아보건대 드물게 보는 성대한 일을 당하였으니, 위와 아래의 서로 수양함이 없을 수 있겠는가? 만약 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일월(日月)이 더욱 빠를 것이 근심스럽고 거의 큰 후회가 없으리니, 잠경(箴儆)을 서로 들려주기를 바란다. 이에 심중에 있는 말을 고하여 중외(中外)의 청문(聽聞)에 널리 알리노라. 성인(聖人)은 덕이 있어 반드시 수(壽)를 누리고 왕자(王者)는 백성과 더불어 기쁨을 같이 나눈다. 소민(小民)과 화합하여 하늘에 기원하노니, 어찌 감히 스스로 안일한 것인가? 황극(皇極)020)  을 세워서 복(福)을 내리어 길이 결과가 훌륭하기를 도모하노라. 그러므로 이에 교시(敎示)하는 것이니 생각건대 마땅히 잘 알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대제학(大提學) 이관명(李觀命)이 지어 올렸다.】


【태백산사고본】 73책 65권 3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94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궁관(宮官) / 왕실-의식(儀式)


[註 015] 십행(十行) : 수적(手迹)으로 나라에서 내리는 문서는 모두 10행으로 쓰기 때문에 나온 말임. 곧 교서(敎書) 따위의 나라에서 내리는 글을 말함.[註 016] 불곡(不穀) : 제후(諸侯)의 자칭. 곡(穀)은 선(善)의 뜻으로 불곡(不穀)은 불선(不善)의 의미임.[註 017] 이순(耳順) : 60세.[註 018] 수사(壽社) : 기로소(耆老所)·기사(耆社).[註 019] 희구(喜懼) : 《논어(論語)》의 "부모의 나이는 기억하지 않을 수 없으니, 한편으로 기쁘고 한편으론 두렵다."에서 인용된 것임. 자식이 부모의 연세를 늘 기억하고 있게 되면 한편으론 아직까지 살아계신 것이 기쁘고, 또 한편으론 이제 노쇠하셨으니 돌아가실 날이 멀지 않음이 두렵다는 뜻임.[註 020] 황극(皇極) : 제왕이 국가를 다스리는 데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대중 지정(大中至正)의 도(道).

 

1월 10일 정축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예조(禮曹)에서 말하기를,
"오는 2월 초7일 단의빈(端懿嬪)의 재기(再期) 뒤 혼궁(魂宮)과 묘소(墓所)에는 마땅히 소현궁(昭顯宮)의 예(例)에 따라 삭망제(朔望祭)와 분향(焚香) 등의 일을 일체 모두 정지하소서."
하니, 세자(世子)가 옳게 여겼다.

 

1월 11일 무인

승지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서릉 도정(西陵都正) 이욱(李煜)과 서양 영(西陽令) 이만(李熳) 등이 상서(上書)하여 휘호(徽號)를 추가하여 올릴 것을 청하고, 또 신비(愼妃)021)  의 위호(位號)를 마땅히 회복할 것과 함흥(咸興)에 있는 태조(太祖)의 잠저(潛邸)의 옛터에 마땅히 비석(碑石)을 세워 사적을 기록하는 조처가 있어야 함을 진달하였다. 상서가 승정원(承政院)에 이르자, 승정원에서 이 일은 지극히 중대하여 한둘의 보잘것 없는 종신(宗臣)이 감히 경솔하게 논의할 수 있는 바가 아니라고 하여 물리치니, 욱 등이 그 상서 끝에다 승정원을 헐뜯고 배척하여 중간에서 가린 죄상을 다스릴 것을 청하였다. 승정원에서 그 상황을 계진(啓陳)하니, 세자(世子)가 받아들이지 말게 하였다. 뒷날 정언(正言) 김고(金槹)가 상서(上書)하여 말하기를,
"욱 형제가 보잘것없는 종친의 후손으로서 몽매하여 지식도 없으면서 감히 지극히 중대한 일에 대하여 망령되이 논하였으니, 진실로 이미 해괴한 일입니다. 그런데 잇따라 또 즉시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 대해 성을 내면서 곧바로 승지를 치죄(治罪)할 것을 청하였으니, 이는 더욱 예전에 없던 일입니다. 승정원의 신하는 마땅히 사리에 의거해 되돌려 주어야 할 것인데도 서로 이끌고 달려 나가서 재차 소패(召牌)를 어겼으니, 사체(事體)를 스스로 손상시키는 결과가 됨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청컨대 욱 형제를 파직(罷職)하고 승지를 추고(推考)하소서."
하니, 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1월 15일 임오

승지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1월 16일 계미

승지가 동궁에 입대하였다.

 

대사간(大司諫) 김유경(金有慶)이 상서(上書)하여 관서(關西)의 군비(軍備)가 허술함을 진달하고, 열읍(列邑)으로 하여금 각각 농한기(農閑期)를 이용하여 항상 교련(敎鍊)하도록 하되,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이 순행하면서 잘하고 잘못하는 것을 심사하여 그 수령(守令)을 출척(黜陟)시킬 것과, 서로(西路)의 별무사(別武士)022)  에게 활쏘기를 시험보여 몰기(沒技)023)  한 자들을 직부(直赴)024)  에 붙이도록 허락할 것과, 관서의 인재(人才)를 특별히 전조(銓曹)에 명하여 그 중 더욱 특출한 자를 선발해서 삼남(三南)과 함께 똑같이 조용(調用)할 것을 청하였다. 상서 끝에 또 말하기를,
"민진후(閔鎭厚)는 충근(忠勤)하고 공량(公諒)하므로 하루라도 조정에 없을 수 없으니, 청컨대 불러 묘당(廟堂)에 두시고 일에 따라 자문을 구하소서. 병조 참판(兵曹參判) 허윤(許玧)과 한성 우윤(漢城右尹) 신경제(申慶濟)는 쇠퇴(衰頹)하고 혼모(昏耗)하여 직무를 감당할 수 없으니, 청컨대 개차(改差)하게 하소서."
하니, 세자(世子)가 답하기를,
"상서하여 진달한 일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민진후의 일은 마땅히 유의(留意)하겠으나, 아래 조항의 일은 타당하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하였다.

 

1월 17일 갑신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1월 18일 을유

이집(李㙫)을 도승지(都承旨)로, 한중희(韓重熙)·임수간(任守幹)·조관빈(趙觀彬)을 승지(承旨)로, 송필항(宋必恒)을 장령(掌令)으로, 홍용조(洪龍祚)·홍우전(洪禹傳)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승지가 동궁에 입대하였다.

 

1월 19일 병술

승지가 동궁에 입대하였다. 공사(公事)의 품주(稟奏)가 끝난 뒤 문학(文學) 신택(申)이 말하기를,
"저하(邸下)의 총명(聰明)으로는 모든 공사(公事)를 한 번 보시면 반드시 결정하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인(聖人)의 청납(聽納)하는 도리는 반드시 주밀하고 신중히 하는 데 힘씁니다. 입대(入對)할 때에 의례적인 공사(公事) 이외에 진계(陳戒)하고 논사(論事)한 장주(章奏)라든가 각사(各司)의 송옥(訟獄)에 대해 언주(讞奏)한 신목(申目)025)  이라든가 또는 제도(諸道)의 장본(狀本) 가운데에 읍폐(邑弊)·민막(民瘼)·군무(軍務)·변정(邊情)에 대해 진달한 것들은 승지가 펼쳐서 읽은 뒤 굳이 곧바로 답하지 마시고, 그대로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 친히 스스로 펼쳐 열람해 보신 뒤 일에 따라 자세히 생각해 보시거나 혹은 대조(大朝)께 여쭈어 그 이튿날 입대를 기다려 비로소 답을 내리시되, 혹은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의논하여 결정한다면, 실로 《대학(大學)》의 능려(能慮)026)  의 가르침에 부합할 것이며, 우리 성상(聖上)께서 들으시더라도 또한 반드시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니, 세자가 말하기를,
"마땅히 유의하겠다."
하였다.

 

1월 21일 무자

김상원(金相元)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지평(持平) 홍우전(洪禹傳)이 상서(上書)하기를,
"지난 겨울에 상서하여 나이 많은 노인(老人)을 곤임(閫任)에 차견(差遣)하지 말 것을 청했는데, 그뒤 묘당(廟堂)에서 여전히 늙고 병든 사람으로 구차하게 완급(緩急)을 채웠으니, 이 다음에 어떻게 그들의 힘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지난 겨울 대신(大臣)의 상서에 대한 답(答)에 ‘어의(御醫)가 간병(看病)하도록 하라.’는 명령이 있었는데, 승지가 소홀히 여기고 거행하지 않다가 영지(令旨)027)  로 하문(下問)하심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정해 보내었으나, 죄를 하리(下吏)에게 미루어 약간 문책하고 말았으니, 청컨대 승지를 책벌(責罰)하여 뒷날의 습관을 경계하도록 하소서."
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상서의 내용은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겠다. 승지는 추고(推考)하라."
하였다. 뒷날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차차를 올려 그것의 부당함을 극력 변론하였는데, 이르기를,
"진실로 유능하다면 비록 연로하더라도 무슨 해로울 것이 있겠습니까? 만일 무능하다면 비록 젊더라도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하고, 또 스스로 연로(年老)하여 복주(覆奏)하지 못했음을 진달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대간(臺諫)의 말이 정도에 지나치니, 굳이 복달(覆達)할 것이 없다."
하였다. 이윽고 하령(下令)하기를,
"그저께 입대(入對)한 뒤 홍우전의 상서 가운데 있는 ‘연로한 무신(武臣)에게는 곤임(閫任)을 맡기지 말라.’는 일을 가지고 들어가 대조(大朝)께 고하였더니, 성상(聖上)께서 말하기를, ‘만일 홍우전의 말대로 한다면 장차 연소(年少)한 사람만 모두 써야 할 것인가? 정체(政體)에 있어서 결단코 그럴 수가 없다. 옛적에 한(漢)의 광무제(光武帝)는 마원(馬援)028)  을 일컬어 「건장하다! 이 늙은이여」라고 하고, 마침내 마원을 보내어 남만(南蠻)을 토벌하여 끝내 그들을 평정하였으니, 어찌 연로하다고 해서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이 말을 듣고 보니 이미 지극히 미편하며, 연로한 무신(武臣)들도 또한 반드시 해체(解體)029)  해질 것이다. 이와 같이 오활(迂濶)한 의논을 결단코 채용할 수 없다.’고 하교하셨다. 성상의 하교가 지극히 마땅하니, 홍우전의 상서는 복달(覆達)하지 말라."
하였다.

 

1월 22일 기축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1월 23일 경인

승지가 동궁에 입대하였다.

 

1월 24일 신묘

사헌부(司憲府)에서 전(前) 판관(判官) 박필몽(朴弼夢)을 탄핵하기를,
"지난해의 한 통의 상소는 오로지 선류(善類)를 일망 타진하려는 의도에서 나왔습니다. 그때 성명(聖明)께서 그 정상(情狀)을 통촉하시고 축출하여 외직에 보임한 본보기도 또한 말감(末減)이라 할 수 있으니, 그의 도리로서는 다만 마땅히 쭈그려 엎드린 채 징계되어 두려워해야 할 것이며, 세월이 조금 오래 되었다 하여 무고(無故) 한 사람으로 자처(自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당(私黨)을 위해 죽기를 각오한 마음이 그치지 않고 남을 해치는 습성을 뉘우치지 않아 이에 한원(翰苑)의 신천(新薦) 때 해괴한 이론을 제창하였으니, 【그때 사관(史館)을 신천(新薦)하자 박필몽(朴弼夢)이 일찍이 이 직(職)을 역임했기 때문에 준례에 따라 회시(回示)하였는데, 박필몽이 장황하게 하자(瑕疵)을 지적하여 저패(沮敗)시켰다.】  그가 식보(息補)030)  의 의미에 대해 전연 어둡고, 또 괴란(壞亂)의 작태를 부린 것은 이른바 방자함이 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청컨대 파직하여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하니, 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통신 정사(通信正使) 홍치중(洪致中)·부사(副使) 황선(黃璿)·종사관(從事官) 이명언(李明彦) 등이 일본(日本)에서 돌아오니, 세자가 소견(召見)하고 위유(慰諭)하였다. 홍치중이 말하기를,
"위령(威靈)031)  이 미친 바로 인해 저들이 중간에서 방해하는 일이 없었으니, 이는 모두가 나라의 은혜입니다. 저들의 국경(國境)에 들어간 뒤로부터 혹시라도 알아둘 만한 사정(事情)이 있을까 해서 각별히 유의하였습니다. 병제(兵制)와 같은 종류에 있어서는 더욱 들어 알고자 하였으나, 연경(燕京)과는 달리 본래 조보(朝報)가 없고, 또 그 법령(法令)이 매우 엄해서 비록 하천(下賤)들일지라도 또한 그 사정(事情)을 언급하지 않았으므로 실로 탐지해 낼 방도가 없었습니다. 대저 그 나라는 법금(法禁)이 아주 엄중하여 명령하면 행하고 금하면 그쳤으며, 물력(物力)은 매우 풍성했고, 인구도 또한 많았습니다. 5천 리(里)에 걸친 수로(水路)가 마을마다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들의 부강하고 풍요로운 방도를 추구해 보니 본디 다른 방법은 없었고, 단지 간약(簡約)을 위주로 삼았습니다. 의복(衣服)은 비록 비단옷을 입기는 하였으나, 아랫바지를 벗기까지 하여 들어가는 경비가 매우 간략하였고, 음식(飮食)은 조그마한 그릇에 담아서 먹되 먹는 것도 적었습니다. 관백(關白)은 본래 부자(父子)가 서로 계승한 것은 아닌데, 말타고 사냥하기를 좋아한다고 하여 처음에는 혹시 난처(難處)한 일이 있을까 염려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 있어서 순리와 편의를 따르는 데 노력하고, 그 자신이 매우 검소한 것을 숭상하여 항상 목면(木綿)을 입기 때문에 비록 그 나라의 재상이라 하더라도 관백이 보는 곳에서는 감히 화려한 의복을 입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관백이 사냥을 나가 밤늦게 돌아오다가 시골 민가에 들어가 유숙하자, 집정(執政)이 간언(諫言)을 올리니, 관백이 말하기를, ‘천성이 사냥을 좋아하므로 진실로 갑자기 그만두기 어렵고, 또한 무예(武藝)를 익힐 수 있는데, 어찌 폐할 수 있겠는가? 군주의 은혜가 백성에게 미친다면 비록 들에서 노숙을 하더라도 무슨 해로울 것이 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비록 구중 궁궐 안에 있을지라도 어찌 위험이 없겠는가?’ 하였다 합니다. 그가 나라를 다스리는 요령(要領)에 대하여 소견이 없지 않다고 하겠습니다. 임진년032)  의 일은 일본(日本)이 지금까지 후회하고 있으며, 평수길(平秀吉)을 평적(平賊)이라 부르기까지 하였습니다. 인심이 이와 같고, 그 나라 안의 위아래가 서로 협력하여 또한 변란(變亂)이 없으니, 우선은 우려할 만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대저 저들과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살고 있으니, 우호(友好)를 잃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영남(嶺南) 한 도(道)는 방비가 매우 허술한데, 바람이 한 번 불면 배를 타고 올 수 있는 적(敵)에 대하여 어찌 견제(牽制)하는 방책을 쓰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이명언이 말하기를,
"평수길(平秀吉)이 난(亂)을 일으킬 즈음에 그 자신이 이미 걸오(桀驁)033)  하였고, 일시(一時)의 여러 장수들도 또한 시대에 응하여 나온 자가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능히 우리 나라를 유린할 수 있었으나, 그들 자신의 손상과 실패 또한 많았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뉘우치고 경계한다 합니다. 섬나라 왜인(倭人)은 매우 속임수가 많기 때문에 평적(平賊)이란 이야기도 혹 우리들로 하여금 듣게 하려고 일부러 이런 말을 한 것인 듯도 합니다. 다만 그 60주(州)의 관원(官員)들을 볼 때 모두가 몹시 노둔하고 용렬하여 백성을 다스리고 대중을 제어하는 재능이 없었으니, 우리 나라는 아마 남쪽의 근심은 없을 것입니다. 섬나라 오랑캐가 우리 나라는 모든 일에 지구성(持久性)이 없음을 알고 반드시 서로 다투어 곡종(曲從)034)  하게 하려고 하는데, 이는 아마 효종조(孝宗朝)로부터 북벌(北伐)하려는 뜻이 있어 남쪽의 이웃을 후대하였고, 묘당(廟堂)에서도 모든 일을 곡종해 왔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결과를 초래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고, 황선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저 나라와 서로 견제(牽制)하고 있을 뿐이니, 왕복(往復)하는 일은 본디 그다지 다툴 수는 없으며 또한 굳이 곡종할 것도 없습니다. 무릇 접대하는 즈음에 반드시 처치(處置)의 타당함을 얻는 데 힘쓴다면 좋을 것입니다."
하였다. 홍치중이 말하기를,
"저들이 사신(使臣)에게 보내 준 회례 은화(回禮銀貨)는 전례에 따라 대마도(對馬島)에 보관해 두고 공작목(公作木) 2백 동(同)을 대신한다는 뜻으로 이미 장계(狀啓)을 올려 아뢴 바 있습니다. 듣건대 임술년035)  의 전례(前例)는 사신(使臣)의 품정(稟定)에 의해 미리 양남(兩南)에 분부하였으되, 감하는 수량은 애당초 민간(民間)에 나누어 정하지 않았다 합니다. 이번의 사신 행차 때에는 영남 백성들의 노고와 비용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또 지금 양전(量田)의 역사(役事)가 바야흐로 시작되어 백성들의 힘이 몹시 지쳐 있습니다. 미리 본도(本道)의 감사(監司)에게 분부하여 감하는 공작목 2백 3동 영(零)은 민간에 나누어 정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세자가 허락하였다.

 

1월 25일 임진

임금이 홍치중(洪致中)·황선(黃璿)은 가자(加資)하고 이명언(李明彦)은 승진하여 서용하라고 명하였는데, 일본(日本)에 봉사(奉使)한 노고 때문이었다.

 

세자가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접(引接)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 말하기를,
"경기 감사(京畿監司) 이조(李肇)가 장계(狀啓)를 올리기를, ‘지난해에 참혹한 수재(水災)를 입은 해변(海邊)과 강변(江邊)은 종자(種子)와 농사철의 양식을 나누어 줄 수가 없으니, 청컨대 남한 산성·북한 산성과 강도(江都)의 쌀 각 3천 석(石)과 진휼청(賑恤廳)의 경창(京倉) 쌀 5천 석 및 새로 받는 환상(還上)의 모곡(耗穀)036)  을 얻었으면 합니다.’ 하였습니다. 기내(畿內)는 토질이 척박하고 백성이 빈곤합니다. 더욱이 재앙을 당한 해에는 마땅히 별도의 고휼(顧恤)하는 조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북한 산성은 원래 정해둔 고을이 있으니 거론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진휼청에 저축된 쌀도 넉넉하지 못하니, 단지 강도와 남한 산성의 쌀 각각 2천 석을 허락하고, 모곡은 절반을 취해서 쓰도록 하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하고, 강화 유수(江華留守) 어유귀(魚有龜)는 말하기를,
"본부(本府)의 곡식 수량이 크게 줄어들어 실로 지급을 허락하기 어렵습니다."
하니, 세자가 수량에 따라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만성(李晩成)이 말하기를,
"지난번 강화의 전(前) 유수(留守) 심택현(沈宅賢)이 본부(本府) 각진(各鎭)·보(堡)의 급대목(給代木)을 병조에서 곧바로 내려 보내지 않는다고 하여, 이 다음부터는 병조로 하여금 군정(軍丁)을 본부(本府)에 떼어 주도록 하고, 본부에서 거두어 들여 급대(給代)할 것을 청하자, 묘당(廟堂)에서 복주(覆奏)하여 시행을 허락하였습니다. 대저 ‘급대’의 규정은 종전에는 비국(備局)에서 여정(餘丁)의 목면으로 계산해 지급했습니다. 그러다가 병인년037)  에 고(故) 상신(相臣) 김수항(金壽恒)이 비국에서 상하(上下)038)  하는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여 병조로 이송(移送)했고, 병조로 하여금 징수하여 급대하게 하였습니다. 한 달 동안에 지급하는 것은 7동(同)이며, 이를 통계하면 84동이 되는데, 여정은 대정(代定)의 규정이 없기 때문에 점차 세월이 흐르자 축이 나서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부득이 이군색(二軍色)039)  이 받는 것을 가지고 그때그때 보내 주다 보니 자연히 시일을 지체하게 되었습니다. 군정(軍丁)을 떼어주는 문제에 있어서는 끝내 어려운 바가 있으므로 달리 변통할 방도가 없습니다. 지금 비국의 여정이 아직도 7백여 명이나 있으니, 만일 묘당으로 하여금 있는 수대로 병조로 이송하게 한다면 급대를 더 보충하는 바탕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강화의 선두포(船頭浦)에서 수세(收稅)하는 곡식을 일찍이 ‘거두는 대로 급대하는 것’으로 정식(定式)하였고, 본부(本府)에도 또한 약간의 제발목(除撥木)과 연말 회록(會錄)040)  의 잉여 미곡[餘米]이 있으니, 한 달의 급대는 본부(本府)에서 충분히 마련해 낼 수가 있습니다. 지금부터 이후로는 한 달의 급대는 본부에서 담당하고 열한 달 동안의 급대는 본조(本曹)에서 내려 보내는 것이 편리하고 좋을 듯합니다."
하자, 이건명이 말하기를,
"이른바 제발목이란 5, 6동에 지나지 않습니다. 강화는 본래 포목이 나오는 데가 없지만, 활쏘기를 시험하고 상전(賞典)을 내리는 즈음에 으레 사용처가 많습니다. 연말에 가서 남은 쌀이라야 그 수량이 많지 않아 지난해 심택현이 보고한 것이 50석에 불과하였으니, 어디에 보태 쓸 수가 있겠습니까? 비국의 여정을 있는 수대로 병조로 이송해 추이(推移)하여 보충해서 지급하게 하는 것이 무방할 것입니다."
하니, 세자가 말하기를,
"연속해서 보충해 지급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만성이 말하기를,
"무겸(武兼)041)   50자리 안에서 12자리가 참하(參下)042)  인데, 임자년043)  에 참상(參上)044)  이 적체되었기 때문에 그 가운데 여섯 자리를 올려 참상으로 만들었습니다. 지금 출신(出身)045)  ·취재(取才)046)  의 무리가 매우 많아 조용(調用)할 수가 없으니, 청컨대 참상 여섯 자리를 다시 참하(參下)로 만들고 추이(推移)해 의차(擬差)하게 하소서."
하니, 세자가 허락하였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권상유(權尙游)가 말하기를,
"지난번 이만성의 진달로 인해 각처의 진(津)·도(渡)의 별장(別將)을 승전(承傳)하는 사람으로 차출(差出)하는 일로 정탈(定奪)047)  하였습니다. 그런데 송파둔(松坡屯)과 삼전도(三田渡)는 다른 진(津)과 다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전부터 수어청(守禦廳)에 소속시켜 수어청의 장교(將校)를 별장으로 삼고, 진부(津夫)048)  의 자지(子枝)049)  와 강변(江邊)에 사는 사람들을 모집하여 한 초[一哨]를 만들게 하였습니다. 송파 근처에 이른바 갑사둔(甲士屯)이라는 곳에도 또한 한 초의 군대가 있는데, 천총(千摠)의 관할로 되어 있고, 진부도 또한 일체 거기에 속해 있습니다. 매년 봄이 지난 뒤에 천총을 진두(津頭)에 내보내어 점열(點閱)하여 신지(信地)를 알게 하고, 근방에 있는 성가퀴를 수비하는 군관(軍官)들도 또한 초출(抄出)하여 점열한 때 같이 참가하도록 해왔는데, 지금 만일 승전하는 사람을 병조에서 별장으로 차송(差送)한다면, 이러한 일들은 장차 폐기될 것입니다. 송파와 삼전의 별장은 종전처럼 수어청에서 차송하든가, 그렇지 않을 경우 병조의 승전하는 사람을 베껴와서 사람을 고르고 본청(本廳)에서 의망(擬望)하여 보내면, 병조에서 들어가 주달(奏達)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세자가 옳게 여겼다. 지평(持平) 홍용조(洪龍祚)가 종전에 진달했던 것을 거듭 아뢰고, 장단(長湍) 송서면(松西面)의 일을 언급하였는데, 세자가 미처 답하기 전에 김유경(金有慶)이 나아가 아뢰기를,
"이 일은 신이 서관(西關)에서 올라올 때에 그 형세를 직접 눈으로 보았습니다. 송도(松都)는 만월대(滿月臺)로부터 그 이하가 죄다 텅텅 비어 조련(操鍊)의 장소로서 어느 곳도 불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또 한때 진장(陣場)이 되는 것이 비록 혹시 아깝다 하더라도 어찌 이것으로 인하여 토지(土地)와 인민(人民)을 공연히 떼어줄 수가 있겠습니까? 이번 대간(臺諫)의 진달은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홍용조가 또 말하기를,
"여염(閭閻)에 무속(巫俗)이 날로 성하니, 풍속이 무너지고 어지러워지는 것과 재산의 손실이 여기에서 말미암지 않는다고 기필할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무녀(巫女)로서 성중(城中)에 있는 자를 조사해 내어 모조리 성 밖으로 내쫓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세자가 다만 무녀를 내쫓는 일만 따랐다. 문학(文學) 신택(申)이 말하기를,
"비록 상약(嘗藥)050)  하는 중에 있을지라도 강학(講學)을 어찌 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서연(書筵)·소대(召對)를 오랫동안 정지하였습니다. 청컨대 이 뒤로부터는 5일 가운데 4일은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고, 하루는 궁관(宮官)을 소대하여 이것을 정규(定規)를 삼는다면, 두 가지가 다 편리할 듯합니다."
하였는데, 이건명이 말하기를,
"문학(文學)이 진달한 바가 옳습니다. 제왕가(帝王家)의 정치하는 근본은 오르지 학문에 있는데, 근래에 강마(講磨)의 공부를 전폐(全廢)함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비록 시탕(侍湯)하는 중에 있을지라도 간간이 소대하는 것이야 무슨 해될 것이 있겠습나까? 지금 승지가 날마다 입대하고 있으니, 정사에 부지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하(邸下)께서는 한결같이 침묵만을 지키시어 강구(講究)하는 일이 없으시고, 입대하는 신하가 한 번 읽고 나면 답서가 의례적으로 내려질 뿐이니, 정사에 부지런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정사에 부지런한 실상이 없습니다. 이 뒤로부터 소대하면 유신(儒臣)과 더불어 반복해 논란(論難)하여 깊이 성의(誠意)·정심(正心)·격물(格物)·치지(致知)의 공부를 탐구하시고, 입대 때는 군국(軍國)의 사무(事務)와 생민(生民)의 휴척(休戚)에 대해 반복해서 자문을 구하신다면, 이미 총명(聰明)을 개발할 수 있고, 또한 여러 신하들의 유능 여부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세자가 말하기를,
"마땅히 더 유의하겠다."
하였다.

 

1월 27일 갑오

황귀하(黃龜河)를 승지(承旨)로, 홍정필(洪廷弼)을 교리(校理)로, 조상경(趙尙絅)을 헌납(獻納)으로, 윤석래(尹錫來)를 사간(司諫)으로 삼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말하기를,
"각 고을과 각진(各鎭)·포(浦)의 수군의 쌀을 절반을 창고에 남겨 두는 것은 법의 근본 취지가 있는 것인데, 담당 관원들이 법령을 준수하지 않고 전량을 모조리 나누어 주거나 또는 이익을 좋아하는 자가 전량을 모조리 판매하므로, 창고에 하나도 비축된 것이 없습니다. 청컨대 매년 6, 7월 경에 비변사의 낭관(郞官)을 보내어 부정(不正)한 짓을 적발하도록 하소서."
하니, 세자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1월 28일 을미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1월 29일 병신

세자가 하령(下令)하기를,
"지난번에 김유경(金有慶)·유복명(柳復明)의 상서(上書) 가운데 있는 친기위(親騎衛)의 일을 대조(大朝)에 들어가 여쭈었더니, ‘한 번 친기위의 직부(直赴)를 혁파(革罷)한 뒤로부터 무사(武士)들이 낙심하여 들어와 소속되기를 원하지 않으니, 군정(軍政)이 허술하여 대단히 염려스럽다. 몰기(沒技)한 무리들을 종전처럼 직부하도록 하되, 무릇 일이란 자주 개정하면 인심(人心)이 믿지 않을 것이니, 이 다음부터 다시는 변경하여 고치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교(下敎)하였다. 성상의 하교가 윤당(允當)하니, 이에 따라 거행하라."
하였다. 대개 유복명은 지난해에 북막(北幕)으로부터 체직되어 돌아왔고, 김유경은 의주(義州)로부터 돌아왔는데, 모두 상서하기를,
"서북(西北) 친기위의 몰기한 자를 전시(殿試)에 직부하게 했기 때문에 흥기(興起)한 자가 많았는데, 중간에 그 규정을 혁파하는 바람에 드디어 무사(武士)의 무리가 기피하여 들어가 소속되기를 원하지 않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하였는데, 묘당(廟堂)에서 모람(冒濫)의 폐단이 다분히 있다고 하여 고집하고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이런 하교가 있었던 것이다.

 

돌아가는 통신 사행(通信使行) 가운데 역관(譯官) 한 명을 파견하여 자문(咨文)을 가지고 청(淸)나라에 가게 했다. 처음에 청나라의 예부(禮部)에서 이자(移咨)하기를, ‘황제(皇帝)께서 사행(使行)이 돌아온 뒤 사리를 아는 역관 한 사람을 들여보내게 하였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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