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일 기해
이기익(李箕翊)과 윤양래(尹陽來)를 승지(承旨)로, 조명겸(趙鳴謙)을 사간(司諫)으로 삼았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2월 3일 경자
승지가 동궁에 입대하였다.
정언(正言) 김고(金槹)가 상서(上書)하기를,
"박필봉(朴弼夢)이 추천하는 일에 훼방을 놓은 것은 뜻을 쓴 것이 불미스럽지만, 이미 가부(可否)를 결정하도록 해놓고 또 뒤따라 논핵하는 것은 후일의 폐단에 관계가 있습니다. 의성 현령(義城懸令) 이진망(李眞望)은 애초부터 의견이 양전(量田)의 역사에 맞지 않았고, 또 남솔(濫率)051) 의 죄과를 범하였기 때문에 초겨울부터 관직을 버리고 예안(禮安) 땅에 와 거주하며 여러 차례에 걸쳐 글을 올려 면직을 바랐는데, 도신(道臣)이 아직까지 장계(狀啓)를 올려 파면하지 않고 오랫동안 벼슬자리를 비워두도록 그대로 내버려 두었으니, 도신은 추고(推考)하고 이진망은 파직시켜야 마땅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지신사(知申事)052) 를 자주 체직시키는 것은 기강이 무너져 해이해진 소치이니, 청컨대 경솔하게 체직하지 말고 사체(事體)를 무겁게 하소서."
하였다. 말미에 말하기를,
"삼남(三南)의 남솔한 수령(守令)들을 우선 그대로 두도록 한 것은 비록 양전의 역사가 바야흐로 한창이기 때문에 그냥 그대로 보류해 두는 것이나, 지금까지 보내지 않은 자들은 또한 마땅히 전례에 따라 각별히 신칙(申飭)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박필몽을 탄핵하여 파직시킨 것이 과중한 일인 줄 알지 못하겠다. 이진망의 일은 논한 바가 옳으니, 감사(監司)를 추고(推考)하라. 아래 조항의 일은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2월 4일 신축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 차자(箚子)를 올렸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지난번에 감영(監營)에 내린 분공(分供)하라는 명령은 실로 경비를 절감하자는 의도에서 나온 것인데, 여러 도(道)에서 대부분 종전 그대로 할 것을 청하면서 모두가 체모(體貌)의 손상을 말했습니다. 이번에 분공(分供)하라는 뜻은 대개 하관(下官)의 진공(進供)이 사치스럽고 자기(自己)의 취양(取養)이 절제가 있음을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절제가 있는 것에 대해 꺼리어 반드시 체모에 핑계를 대니, 그렇다면 두연(杜衍)053) 의 면(麵) 한 그릇, 밥 한 사발은 진실로 취할 것이 없고, 하증(何曾)054) 의 날마다 만전(萬錢)을 먹는 것이라야 바야흐로 체모를 얻었다고 이를 수 있겠습니까? 일전에 대피(臺避) 가운데, ‘국운(國運)은 장구하게 열리고 기로(耆老)는 조정에 가득하다.’ 한 것은 실로 성세(聖世)의 드물게 있는 경사입니다. 그런데, 허윤(許玧)의 근력(筋力)은 아직 쇄패(衰敗)하지 않았는데 탄핵을 받았으니, 진실로 뜻밖입니다. 이로부터 이후로 기로(耆老)의 신하가 모두 불안한 생각을 품고 사퇴하는 사태가 시끄럽게 일어날 것이니, 신은 실로 개탄스럽습니다. 무녀(巫女)가 성(城) 안에 거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비록 옛 제도라고 하지만, 이미 일시에 완전히 거주하는 것을 개혁할 수 없다면 수백 명이 살 곳을 잃는 것에 대한 근심도 또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박필몽(朴弼夢)의 처사(處事)는 비록 매우 정당함을 잃은 것이기는 하지만, 이미 가부(可否)를 물어놓고 그의 말이 나오자마자 뒤따라 문책을 했으니, 만일 후일의 폐단을 염려한다면 그 벌(罰)을 중지해야 마땅합니다. 후사(喉司)의 직책은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고생하는 자리인데, 날마다 입대(入對)한 뒤로부터는 사람들이 대부분 다 싫어하여 피하고, 조그만 사단(事端)이라도 있으면 번번이 일마다 소패(召牌)를 어기니, 정사(政事)는 계속 이어지는데 근무(勤務)할 사람이 없습니다. 예전에 당상관(堂上官)이 소패(召牌)를 어길 경우 파직을 시키지 않으면 특별히 금추(禁推)055) 의 명령이 있었던 것은 대개 경칙(警飭)하고자 함이었으니, 또한 조용한 마음으로 살펴보시길 원합니다."
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차자의 내용이 마땅하다. 허윤의 일은 대간(臺諫)의 말이 마땅한지 알지 못하겠다. 박필몽의 일과 아래 조항의 일은 마땅히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이날 밤에 다시 하령(下令)하기를,
"우상(右相)이 차자로 진달한 일은 모두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2월 5일 임인
세자가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경상도 균전사(慶尙道均田使) 심수현(沈壽賢)이 장계(狀啓)를 올리기를, ‘도내(道內)의 언양현(彦陽縣)은 갑술년056) 양전(量田) 때 등급이 고르지 않아 백성들이 지탱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경진년057) 에 암행 어사(暗行御史) 이진수(李震壽)의 서계(書啓)에 따라 도신(道臣)에게 자문을 구한 뒤 조정에서 개량(改量)하여 이내 성안(成案)하였습니다. 이제 겨우 20년이 되었는데 별달리 잘못된 곳이 없고 백성들도 다 편리하다고 하니, 굳이 개량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이 고을은 개량한 지 오래되지 않았고 또 민원(民怨)도 없으니, 개량하지 않도록 해도 무방합니다. 남병사(南兵使)와 강원도 방어사(江原道防禦使) 등이 금년에 흉년이 들었다 하여 장계(狀啓)를 올렸는데, 우선 순점(巡點)을 물려서 가을쯤에 가서 거행할 것을 청하였으니, 모두 받아들여 허락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세자가 옳게 여겼다. 지돈녕(知敦寧)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몰기(沒技)의 직부(直赴)는 간교하고 외람됨이 지극히 많기 때문에 조정에서 막았던 것입니다. 그 뒤에 서북(西北)의 도신(道臣)과 수신(帥臣)들이 모두 무사(武士)들이 낙담한다 말하고, 대신(臺臣)들도 또한 상서하여 논의하였기 때문에 대조(大朝)께서 특별히 복구(復舊)를 허락하였으니, 이것은 위열(慰悅)하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간사함을 방지하는 도리는 엄하게 신칙(申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臣)이 일찍이 서도(西道)의 안찰사(按察使)로 있을 때에 하루에 몰기한 자가 세 사람이나 되었는데, 신이 다시 그들에게 쏘아 보게 하자 두 사람은 전혀 활을 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감영(監營)·병영(兵營)의 장교(將校) 가운데 활을 잘 쏘지 못함을 신이 익히 알고 있는 자가 연이어 몰기로 등제(登第)하였으니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조총(鳥銃)에 있어서는 더욱 농간을 부리기가 쉽고 시관(試官)이 발각해내기가 매우 어려우니, 모름지기 묘당(廟堂)에서 절목(節目)을 만들어 반포하고 따로 신칙해야 합니다."
하였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만성(李晩成)이 말하기를,
"서북의 몰기한 자들에 대하여 이미 직부를 허락하였으면 동래(東萊) 또한 변지(邊地)이니, 똑같이 허락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세자가 옳게 여겼다. 민진원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이만성이 진달한 바에 따라 비국(備局)의 여정(餘丁)을 병조(兵曹)에 이송(移送)하는 일을 정탈(定奪)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여정들은 곧 비국에서 각 고을에 사문(査問)해 찾아낸 피역(避役)058) 하고 투헐(投歇)059) 한 무리를 여정으로 장부에 올린 것이나, 각 고을에서 군역(軍役)에 충당시키고자 보고를 하는 경우가 있으면 언제나 즉시 허락하였으니, 조금이라도 외방(外方)의 인족(隣族)의 폐단을 해소해 주고자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만일 모두 본안(本案)과 함께 병조(兵曹)로 이송한다면, 비록 군역(軍役)을 이정(移定)하고자 하더라도 병조에서 반드시 허락하지 않을 것이니, 당초의 조사하여 찾아낸 본의(本意)와는 서로 틀리게 됩니다."
하고,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본안(本案)에 있어서는 굳이 모두 이송할 것이 없으며 비국에서 그 포(布)를 징수하더라도 무방할 것입니다."
하니, 세자가 옳게 여겼다.
응교(應敎) 김상옥(金相玉)이 차자를 올리기를,
"후사(喉司)의 장(長)은 으레 약원(藥院)의 제거(提擧)를 겸직하므로 책임이 더욱 특별한데, 도승지(都承旨) 유명홍(兪命弘)은 여러번 소명(召命)을 어겼으니, 마땅히 파직시켜서 무너진 기강을 진작시켜야 할 것입니다."
하니, 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2월 6일 계묘
좌의정(左議政) 권상하(權尙夏)가 정승에 임명된 4년 동안 연달아 상소하여 간곡히 사직하니, 임금과 세자가 여러번 승지(承旨)를 보내 돈소(敦召)하였으나 끝내 오지 않았다. 본주(本州)에 명하여 월름(月廩)을 주어도 또한 받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또 상소하여 해직(解職)을 원하니, 세자가 ‘한결같이 자주 재촉만 하는 것도 또한 예우(禮遇)하는 도리에 어긋남이 있다.’며 체직을 허락하고, 마음을 돌려 길에 올라 나오도록 개유하고 준례에 따라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제수하였다.
윤헌주(尹憲柱)를 도승지(都承旨)로, 유중무(柳重茂)와 홍중우(洪重禹)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2월 8일 을사
익양군(益陽君) 이단(李檀)에게 가자(加資)를 명하였는데, 단의빈(端懿嬪)의 묘소(墓所)를 지킨 공로를 서훈한 것이다. 혼궁(魂宮)의 종신(宗臣)과 내관(內官) 등에 대해서도 또한 차등있게 가자하였다.
도목 정사(都目政事)를 행하였다. 조상경(趙尙絅)을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2월 9일 병오
달이 동정성(東井星)을 범하고, 목성(木星)이 태미(太微)의 좌집법성(左執法星)을 범하였다.
2월 10일 정미
도목 정사(都目政事)를 행하였다. 김상옥(金相玉)을 응교(應敎)로, 홍우전(洪禹傳)을 헌납(獻納)으로, 박필주(朴弼周)를 지평(持平)으로, 이의현(李宜顯)을 대사간(大司諫)으로, 김동필(金東弼)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2월 11일 무신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2월 12일 기유
승지가 동궁에 입대하였다.
헌납(獻納) 홍우전(洪禹傳)이 상서(上書)하기를,
"진익한(陳翼漢)은 출신처를 알 수가 없는데 누차 낭료(郞僚)의 의망(擬望)에 들었고, 이지성(李知聖)은 외람되이 과제(科第)060) 를 도적질했는데도 또한 당후관(堂后官)에 의망되었습니다. 대성(臺省)의 직책이야말로 어떠한 청요직(淸要職)입니까? 그런데도 정언(正言) 이만(李滿)은 그 사람됨의 성품과 행실이 매우 거칠고 패리(悖理)하며, 몸가짐과 일을 처리하는 것이 대부분 사리에 어긋나는 일이 많아서 오랫동안 향당(鄕黨)과 친족(親族)들에게 모두 버림받았습니다. 조정에서의 언론(言論) 또한 매우 공정하지 못하여 남을 모함하고 이랬다저랬다하는 태도를 사람들이 모두 천하게 여기며 증오하였는데, 외람되게도 청로(淸路)에 통하여 함부로 대선(臺選)을 차지하였으니, 물리쳐야 마땅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연서역(延署驛)에 있는 마을은 인조(仁祖) 잠저(潛邸) 때의 별서(別墅)인데, 그때의 비문(碑文)은 바로 역적 이항(李杭)이 쓴 것입니다. 그리고 장렬 왕후(莊烈王后)의 존호 악장(尊號樂章)은 바로 적신(賊臣) 오정창(吳挺昌)이 지은 것이니, 청컨대 개정하소서."
하니, 세자가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2월 13일 경술
유성(流星)이 삼태성(三台星) 위에서 나와 북방(北方)으로 들어가고, 달이 헌원 대성(軒轅大星)을 범하였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2월 14일 신해
승지가 동궁에 입대하였다.
2월 15일 임자
세자가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접(引接)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 말하기를,
"정언(正言) 김고(金槹)가 상서(上書)하여, ‘연해(沿海) 수군의 쌀에 대해 비국(備局)의 낭관(郞官)을 보내 부정을 적발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수군의 쌀은 조적(糶糴)보다 더욱 중대한 것인데, 근래에 각읍(各邑)과 진(鎭)에서 정식(定式)을 따르지 않고 창고를 죄다 기울여 나누어 주는 폐단을 초래하였으니 대간(臺諫)의 말이 옳습니다. 하지만 비국의 낭관을 보내면 주전(廚傳)061) 의 폐해가 적지 않을 것이니,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군관(軍官)을 보내어 불시에 부정을 적발하도록 하는 것이 편리하고 좋을 듯합니다. 통제사(統制使) 이수민(李壽民)의 장본(狀本)에 양전(量田)의 역사(役事)가 바야흐로 한창이므로 봄철의 조련(操鍊)을 정지할 것을 청하였으니, 또한 허락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세자가 모두 옳게 여겼다. 사간(司諫) 조명겸(趙鳴謙)이 말하기를,
"공주(公州)의 영장(營將) 남태징(南泰徵)은 외람되고 망령되어 도적을 다스리는 즈음에 뇌물이 낭자하였으니,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하였으나, 세자가 따르지 않았다가, 세 번 진달하니, 비로소 따랐다.
2월 16일 계축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 같이 들어가 연령군(延齡君)의 상사(喪事) 뒤 임금이 매양 비감(悲感)에 차 있어 조섭에 해로움이 있다며 억지로라도 스스로 마음을 관대하게 갖고 억제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음을 관대하게 갖고 억제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본병(本病)이 이미 깊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것이며, 감정에 내맡겨서 그런 것이 아니다."
하였다.
2월 18일 을묘
홍계적(洪啓迪)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이때에 개정(開政)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으나,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관명(李觀命)과 참의(參議) 이병상(李秉常)이 연일 소패(召牌)를 어겼으므로, 세자가 특별히 이병상을 체직하고 대신(大臣)으로 하여금 차출(差出)하게 하니, 마침내 홍계적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지평(持平) 홍용조(洪龍祚)가 현도(縣道)를 거쳐 상서(上書)하기를,
"호서(湖西)는 곡식이 잘 여물지 않았고 양전(量田)의 역사(役事)는 바야흐로 한창이니, 상당 산성(上黨山城)의 역사를 중지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세자가 묘당(廟堂)에 내렸다. 묘당에서 복주(覆奏)하였으나 채용되지 않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논하기를,
"정언(正言) 이만(李滿)은 사람됨이 거칠고 사나와서 전연 선비의 모습이 없습니다. 가정에서의 행실도 매우 패려(悖戾)하여 친족(親族)간에는 사이가 틀어지게 되었고 향당(鄕黨)은 천하게 여겨 버렸습니다. 통적(通籍)한 뒤에는 논의를 이랬다저랬다하였는데, 정적(情跡)이 탄로나 동료들이 함께 어울리기를 수치스럽게 여기니, 청컨대 개정(改正)하소서."
하였는데, 세 번 진달하자 비로소 따랐다.
2월 19일 병진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2월 20일 정사
이병상(李秉常)을 승지(承旨)로, 조상경(趙尙絅)을 교리(校理)로, 윤석래(尹錫來)를 집의(執義)로, 조태구(趙泰耉)를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삼았다.
2월 26일 계해
왕세자(王世子)가 홍진(紅疹)을 앓아 의약청(議藥廳)을 설치하였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세자의 홍진(紅疹) 징후가 분명하다.’며 임금에게 다른 곳으로 옮겨 피할 것을 청하자 임금이 허락하였다. 이날 날이 저문 뒤 임금이 내전(內殿)에서 광명전(光明殿)으로 거처를 옮기고, 약방에서는 상의원(尙衣院)으로 옮겨서 숙직하였다. 약방의 제조(提調)는 언제나 한 사람이 윤번으로 의약청에 숙직하며 날마다 동궁에 입진하였다.
2월 27일 갑자
약방(藥房)에서 말하기를,
"강화 유수(江華留守) 어유귀(魚有龜)가 방금 들어왔다 합니다. 청컨대 내일부터 제조(提調)와 의관(醫官)이 동궁에 입진(入診)할 때 같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2월 28일 을축
이날부터 제조(提調) 민진원(閔鎭遠)이 계속해서 의약청(議藥廳)에 숙직하고 윤번으로 숙직하지 않았다. 대개 임금이 거처를 옮겨 피하였으므로, 약방의 여러 신하들이 서로 왕래할 수 없기 때문이다.
2월 30일 정묘
지진(地震)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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