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정유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4월 5일 신축
세자가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접(引接)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외방(外方)의 봉수군(烽燧軍)은 본래 고역(苦役)이기 때문에 이미 복호(復戶)081) 를 주었고, 또 세 사람의 보인(保人)을 정하였는데, 근래에 한정(閑丁)을 얻기 어려우며, 경기 고을은 더욱 심하여 군정(軍丁)의 결원을 뽑아 메울 수가 없습니다. 봉수군에게 보인을 주는 수를 비록 줄일 수는 없으나 세 사람의 보인을 굳이 다 양정(良丁)으로 채울 것은 없으니, 그 중에 일배(一倍)는 공사천(公私賤)으로 정해 준다면 양정을 거의 추이(推移)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만성(李晩成)은 말하기를,
"이름은 비록 세 사람의 보인이지만 숫자를 채우는 경우는 아주 적어 간혹 보인 한 사람이나 보인 두 사람의 경우가 있습니다. 대신(大臣)이 진달한 바가 이와 같으니 양정인 보인으로서 세 사람의 보인을 채우는 경우는 그 가운데서 한 사람의 보인을 공사천으로 바꾸어 정하는 것이 아마도 무방할 듯합니다."
하니, 세자가 옳게 여겼다. 지돈녕(知敦寧)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외방(外方) 각 고을에서 진휼청(賑恤廳)의 전곡(錢穀)을 빌어간 것들이 더러는 10여 년이 지났는데, 그것의 간 곳을 조사해 보면 혹은 관리(官吏)에게 내어주어 요리(料理)를 잃었고, 혹은 민간(民間)에 나누어 주어 지적해 징수할 곳이 없습니다. 그 사이에 수령(守令)들이 또한 사망한 이들도 많아서 어디에 물어보기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여산부(礪山府)에 있어서는 본청(本廳)의 돈을 빌어간 것이 4천 냥에 가까운데, 이를 한 명의 아전에게 맡겨 깡그리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연전에 관문(關文)082) 을 보내어 추치(推治)하고 그 아전의 일족에게 징수해 받은 것이 겨우 2천 냥에 그쳤는데, 해당 관리는 여러 해 동안 갇혀 있다가 결국 장형(杖刑)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이 일이 비록 지금 있는 수령의 죄는 아니지만 그 책임은 전적으로 그 고을에 있으니, 그 고을에서 징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일 매달의 월름(月廩)을 가지고 4, 5섬을 참작해 계산하여 덜어 낸 다음 본래의 수량을 다 채우고 그친다면, 백성은 다시 납부하는 원망이 없고 국가는 영원히 잃어버리는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다른 고을의 납부하지 않은 곳도 일례(一例)로 시행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였는데, 김창집이 말하기를,
"사건은 전관(前官) 때에 있었는데 후관(後官)의 월봉(月俸)을 감해 그 숫자를 채운다는 것이 비록 원통한 것 같기는 하지만 달리 징수해 낼 방도가 없으니, 참작해서 계산해 덜어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수령 중에 현재 생존한 자에 대해서는 조사하여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자, 민진원이 말하기를,
"여산의 관리는 비록 죽었지만 처자가 있다고 하니, 이와 같은 무리는 재산을 몰수하고 잡아들여 관청(官廳)의 노비(奴婢)로 삼는 법이 있습니다. 이들도 또한 본청(本廳)에 소속시켜 노비로 삼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세자가 모두 옳게 여겼다.
4월 9일 을사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4월 10일 병오
승지가 동궁에 입대하였다. 승지 한중희(韓重熙)가 말하기를,
"서북(西北)에 흉년이 들어서 기민(飢民)들이 타도(他道)로 유랑합니다. 변방의 일이 허술함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마땅히 여러 도(道)에 신칙(申飭)하여 그들을 따로 접제(接濟)를 더해주고 간혹 양자(糧資)를 마련해 주어 본토(本土)로 도로 돌려 보내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세자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였다.
4월 11일 정미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4월 12일 무신
달이 태미성(太微星) 가운데로 들어갔다.
승지가 동궁에 입대하였다.
4월 13일 기유
승지가 동궁에 입대하였다.
4월 14일 경술
달무리가 져서 토성(土星)을 빙 둘렀다.
4월 16일 임자
승지가 동궁에 입대하였다.
4월 17일 계축
세자가 결원인 수령(守令) 자리를 구전(口傳)으로 차출(差出)하도록 하였다. 이때 연달아 임금의 환후(患候)가 더함에 따라서 개정(開政)하지 못하니, 대신(大臣)이 ‘비단 백성의 일이 염려스러울 뿐만 아니라 마부(馬夫)와 말이 머물러 지체되는 것도 또한 매우 폐단이 있다.’며 승지에게 말하고, 동궁(東宮)에게 전달해 아뢰게 했기 때문에 이런 영(令)이 있었던 것이다.
4월 18일 갑인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4월 19일 을묘
승지가 동궁에 입대하였다.
4월 20일 병진
여선장(呂善長)을 검열(檢閱)로 삼았다.
장령(掌令) 남세진(南世珍)이 주서(注書)로 천거를 받은 사람인 강세윤(姜世胤)을 빼버리자는 논의를 정지하였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강세윤은 과장(科場)에서 용간(用奸)하였으니, 허물이 작지 않다. 그런데도 남세진이 이 논의를 성급하게 정지한 것은 오로지 이쪽저쪽을 돌아다보는 태도에서 나온 것이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를 비웃었다.
【태백산사고본】 73책 65권 12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98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인사-선발(選拔) / 역사-편사(編史)
사신(史臣)은 논한다. 강세윤은 과장(科場)에서 용간(用奸)하였으니, 허물이 작지 않다. 그런데도 남세진이 이 논의를 성급하게 정지한 것은 오로지 이쪽저쪽을 돌아다보는 태도에서 나온 것이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를 비웃었다.
4월 21일 정사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4월 24일 경신
승지가 동궁에 입대하였다.
성상의 환후가 더욱 무거워져 시약청(侍藥廳)을 설치하였다. 이날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니, 성상의 환후는 복부(腹部)의 팽창이 더욱 심하였다. 의관(醫官) 등이 진찰을 마치자,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고치기 어려운 병이 날이 갈수록 더욱 더해지니, 다만 죽을 날만을 기다릴 뿐이다."
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고질병을 앓은 지 지금 몇 년째인가? 이것은 일시적인 증상이 아니다. 십분(十分)으로 말한다면 팔분(八分)은 차도가 있어 낫기를 바랄 수 없다."
하였다. 이이명이 말하기를,
"이와 같이 생각하시는 것은 실로 지나치십니다. 마땅히 국세(國勢)를 부지(扶持)하고 백성을 보안(保安)하실 것을 생각하셔야지 좋지 않은 곳에 생각을 두셔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갑오년083) 의 내 병은 오랫동안 몸을 상한 나머지 나온 것은 아니었지만 또한 매우 위중(危重)했기 때문에 그때 생각하고 적어둔 것이 있다. 그 뒤에 병이 낫는 바람에 마침내 그 적어두었던 것을 잃어버렸는데, 그 뜻은 바로 자정전(資政殿)이 좁아서 빈소(殯所)를 만들 수가 없으니 반드시 선정전(宣政殿)으로 옮겨 빈소를 만들고, 혼전(魂殿)은 경녕전(敬寧殿)으로 옮기고, 이 궐(闕)에는 문정전(文政殿)에 혼전을 설치하는 일이었다. 지금은 병세가 또 그때에 비할 바가 아니니 다시 일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경(卿)은 마땅히 이런 뜻을 알아야 할 것이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다."
하였다. 이이명이 말하기를,
"성상의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시니, 어찌 조섭(調攝)하는 도리에 해로움이 있지 않겠습니까? 신 등 세 제조(提調)가 가까운 곳으로 옮겨서 숙직을 하니 진실로 시약청(侍藥廳)을 설치한 것이나 다름이 없는데도 외부에서의 의논은 아직까지 시약청을 설치하지 않은 것을 미안하게 여기고 있으니, 사체(事體)가 또한 그러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시약청을 설치하는 것이 합당하다."
하였다. 이이명이 말하기를,
"시약청을 설치하였다가 환후(患候)에 차도가 있어 나으신다면 즉시 철폐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지 않았다. 이이명이 또 말하기를,
"정신이 조금 나으실 때에는 대신(大臣)을 불러 보시고, 국사(國事)를 생각하고 헤아리시어 하교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알았다."
하였다. 이이명 등이 이미 물러났는데, 임금이 다시 환시(宦侍)에게 명하여 시약청에 하교하기를,
"진찰하러 들어왔을 때 이 한 가지 사항을 빠뜨렸기 때문에 적어서 내리노라."
하고, 이어서 종이 한 장을 내리니, 그 글에 이르기를,
"사위(嗣位)하는 날에 매양 청(淸)나라 국새(國璽)를 쓰므로 마음에 항상 미안했다. 뒤에 황조(皇朝)의 사본(賜本)을 얻었는데, 전획(篆劃)이 아주 선명하였다. 드디어 이를 모각(摹刻)하여 금보(金寶)로 만들어 보관해 두었으니, 이것을 사용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앞서 이이명이 승문원(承文院)의 고지(故紙) 가운데에서 명조(明朝)에서 하사한 인지(印紙)를 얻어서 올리자, 임금이 이를 대내(大內)에서 모각하여 옥새로 만들어 두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이런 하교가 있었다.
4월 25일 신유
시약청(侍藥廳)에서 입진(入珍)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성상의 환후가 더욱 위중하여 바야흐로 시약청을 설치했으니, 성상의 환후가 조금 차도가 있을 동안까지는 우선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는 일을 정지할 것을 청하였다. 또 말하기를,
"정시(庭試) 【동궁(東宮)의 홍진(紅疹)이 회복됨으로 인해 베푼 경과(慶科)이다.】 와 무과(武科)의 초시(初試)가 가까이 닥쳐왔는데, 온 관사(官司)가 직무를 폐지하고 앉아 있는 시기에 과장(科場)을 설치하여 인재를 시험하는 것은 미안한 일입니다. 청컨대 뒤로 물려서 시행하소서."
하고, 병조(兵曹)에서 말하기를,
"등록(謄錄)을 가져와 상고해 보니, 시약청을 설치한 뒤에는 각 군문(軍門)의 중일(中日)084) 시재(試才)와 조련을 연습하는 등의 일을 모두 정지하였습니다. 지금도 또한 이에 따라 정지하소서."
하니, 세자가 모두 옳게 여겼다.
4월 26일 임술
해가 뜰 때 빛이 붉고 광채가 없었으며, 태양 가운데 검은 기운이 있었다.
4월 27일 계해
시약청(侍藥廳)에서 입진(入診)하니,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같이 들어왔다.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말하기를,
"일전에 써서 내린 전교는 【바로 황조(皇朝) 사본(賜本)인 신보(新寶)를 사용하라고 명한 일이다.】 무릇 신하된 이라면 누군들 흠탄(欽歎)하지 않겠습니까? 이 전교는 약방(藥房)에 둘 수가 없기 때문에 이미 승정원(承政院)으로 보내어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일기(日記)에 기록하고 신중히 보관해 두게 하였습니다. 따로 한 본(本)을 써서 예조(禮曹)에 보내어 만세(萬世)에 전하도록 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오랫동안 개정(開政)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도승지(都承旨) 외에 승지가 단지 세 명이 있습니다. 일이 구차스럽고 간단하게 처리되는 경우가 많은데, 종전에도 또한 구전(口傳)으로 차임한 전례가 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망 단자(前望單子)를 들여보내라."
하였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함경 감사(咸鏡監司)의 천망(薦望)은 입계(入啓)한 지가 여러 날이 되었는데 아직까지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전(前) 감사(監司) 김상직(金相稷)은 신병(身病)이 위중하여 오랫동안 직무를 폐지하고 있는데, 변방은 사무가 중요하니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승지의 망단자(望單子)를 내릴 때 같이 내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조명봉(趙鳴鳳)과 조관빈(趙觀彬)을 승지(承旨), 홍치중(洪致中)을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로, 이관명(李觀命)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삼았다.
4월 29일 을축
시약청(侍藥廳)에서 입진(入診)하니, 판부사(判府事) 조태채(趙泰采)와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 같이 들어왔다. 이건명이 말하기를,
"오랫동안 개정(開政)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육경(六卿)·삼사(三司)가 결원이 매우 많습니다. 비록 일시에 모두 차임하지는 못할지라도 구전(口傳)으로 비망(備望)하여 간간이 유입(流入)하였다가 성상의 환후가 차도가 있을 때 점하(點下)085) 하신다면 긴요한 자리는 아마 채울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말하기를,
"대간(臺諫)과 옥당(玉堂)을 구전으로 차출(差出)한 전례가 없습니다."
하였다. 이건명이 말하기를,
"성상의 환후가 이와 같으니 상례(常例)로 논할 수 없습니다. 판서(判書)와 감사(監司)도 또한 구전으로 차출하는데, 삼사만 어찌 유독 불가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간과 옥당은 형세를 보아서 차출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이건명이 드디어 삼사 이외의 긴요한 자리는 모두 구전으로 차출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4월 30일 병인
유명웅(兪命雄)을 판윤(判尹)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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