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65권, 숙종 46년 1720년 6월

싸라리리 2025. 12. 1.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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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병신

시약청(侍藥廳)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의 병환의 여러 증상이 더욱 심해져 여러 신하들이 아뢰는 말들을 태반은 알아듣지 못했고, 간혹 가느다란 목소리로 답하였으나, 대부분 이해할 수가 없었다.

 

6월 2일 정유

시약청에서 입진하였다.

 

6월 3일 무술

시약청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부어오르는 증세와 구역질이 더욱 심하여 여러 신하들이 아뢰는 말에 대부분 답을 하지 못하였다.

 

이날 임금의 환후의 여러 증상이 더욱 더하여 종일 아무것도 들지 못하였다. 시약청의 여러 신하들이 합문(閤門) 밖에 나아가 다시 들어가 진찰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진찰을 마치자,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말하기를,
"어제 드신 미음이 아주 적었고 오늘은 전혀 드시질 않았습니다. 비록 여항(閭巷)의 백성이 병이 나 입맛이 없어도 자기 몸과 가정의 중(重)함을 생각하여 억지로라도 음식을 먹습니다. 성상께서는 3백 년 종사(宗社)의 의탁이 있고 아래로는 억조(億兆) 백성들의 목숨이 매여 있습니다. 어찌 억지로라도 미음을 드시어 원기(元氣)를 붙들 방도로 삼지 않으십니까? 날마다 이와 같이 하신다면 장차 어찌하시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혼수 상태에 빠져 알아듣지 못하였다. 이이명이 여러번 그 말을 거듭 아뢰니, 임금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답하기를,
"먹지 않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구역질이 심하여 먹지 못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간곡하게 청하니, 비록 먹고 나서 다시 토하더라도 마땅히 억지로 먹겠노라."
하였다. 미음을 받들어 올리자 임금이 먹으려 하였으나 구역질이 먼저 나서 끝내 먹지 못하였다. 이이명이 말하기를,
"밤이 깊은 이후에는 안팎이 막혀 성상의 환후가 더한지 덜한지 알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지금을 시작으로 정신이 맑거나 흐릿하거나 또는 기운이 상승하여 화락할 때는 곧바로 모시고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중궁(中宮)께 품하고 신 등에게 자주 나와 말하도록 하여 증세의 더하고 덜함을 알 수 있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머리를 끄덕였다.

 

6월 4일 기해

시약청(侍藥廳)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성상의 환후가 더 위중해져 여러 신하들이 아뢰는 말을 대부분 알아듣지 못하였다.

 

세자가 하령(下令)하기를,
"성상의 환후가 더욱 위중해짐이 이에 이르렀으니, 근심스럽고 가슴이 조여 몸둘 바를 모르겠다. 예전에도 이와 같은 때에는 이미 기도를 드리고 죄수를 석방시킨 조처가 있었으니, 마땅히 오늘에 있어서 조금도 늦출 수가 없는 일이다. 소자(小子)가 애를 태우는 것도 이것을 벗어나지 않는데, 대신(大臣)들의 의사는 어떠한가?"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 등이 종묘(宗廟)·사직(社稷)에는 대신을 보내고, 삼각(三角)·백악(白嶽)·목멱(木覓)·한강(漢江) 등지에는 중신(重臣)을 보내어 비록 밤이 깊어져도 곧바로 수향(受香)090)  하여 제사를 거행하고, 죄수를 석방하는 일은 의금부(義禁府)·형조(刑曹)의 당상관(堂上官)과 삼사(三司)를 모두 곧바로 패초(牌招)하여 거행할 것을 청하니, 세자가 옳게 여겼는데 이때 날이 이미 저물었다. 그 이튿날 대신과 의금부·형조의 당상관이 빈청(賓廳)에 모여 진달하기를,
"경인년091)  의 전례는 서울과 지방의 시수(時囚)092)  와 도류(徒流)093)  ·정배(定配)의 무리를 경중을 나누어 초계(抄啓)하여 품달하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죄수를 석방하는 일이 한시가 급합니다. 서울과 지방의 허다한 죄적(罪籍)들을 수정(修整)하는 즈음에 반드시 시간을 끌게 될 것이니, 시수 가운데서 강상(綱常)·저주(詛呪)·살옥(殺獄)·사주전(私鑄錢)·강도(强盜)·인신 위조(印信僞造)에 관계된 외에는 곧바로 승지를 보내어 모두 석방시키고, 외방(外方)의 시수들도 또한 여기에 의하여 구별해 석방시키라는 뜻으로 여러 도(道)의 감사(監司)와 양도(兩都)의 유수(留守)에게 매우 급하게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세자가 옳게 여겼다. 마침내 승지 유중무(柳重茂)를 의금부와 형조에 보내어 죄수를 석방시켰는데, 의금부는 6명이고 형조는 78명이었다.

 

유시(酉時)에 시약청(侍藥廳)에서 다시 입진(入診)하였다.

 

6월 5일 경자

오경(五更)에 임금의 환후가 더욱 극심하여 시약청에서 입진하고 사시(巳時)에 다시 입진하였다. 임금의 환후의 혼수상태가 더욱 더하여 여러 신하들이 높은 목소리로 아뢰어도 대부분 알아듣지 못하였다.

 

6월 6일 신축

진시(辰時)·신시(申時)에 시약청에서 재차 입진하였다. 임금의 환후가 더욱 어떻게 할 수 없이 되어 해역(咳逆)094)  ·견식(肩息)095)  을 그치지 않았다. 여러 신하들이 빙 둘러서서 당황해하다가 3경(三更)이 되어서야 비로소 잠시 물러나왔다.

 

6월 7일 임인

여러 대신(大臣)들이 입으로 진달하기를,
"종묘·사직과 산천(山川)에 기도를 올리는 일은 할 수 있는 도리는 모두 다한다는 방도에서 나온 것인데, 성상의 환후는 더욱 가중되고 신령의 도우심은 아직까지 지연되니, 가슴 조이고 애가 타서 갑절이나 더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다시 거듭 기도를 드려 감응(感應)의 효과를 꼭 얻을 것을 기약하지 않을 수 없으니, 오늘 안으로 수향(受香)하여 내일 새벽에 제사를 거행했으면 하는 뜻으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시약청에서 입진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조태채(趙泰采),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 국구(國舅) 경은 부원군(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이 같이 들어갔다. 임금이 해역(咳逆)·견식(肩息)·혼수상태 등의 증상이 더욱 심해져 여러 대신(大臣)들이 모두 억지로라도 약(藥)을 드실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혹은 답을 하기도 하고 혹은 답을 하지 못하기도 하였다.

 

신시(申時)에 시약청에서 재차 입진하니, 임금의 환후가 혼수상태에 빠져 더욱 감각이 없었다.

 

술시(戌時)에 시약청에서 세 번째로 입진하니, 임금의 혼수상태가 더욱 심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어탑(御榻) 아래로 나아가 큰 소리로 말하기를,
"신 등이 의관(醫官)을 인솔하고 입시(入侍)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알고 계십니까?"
하니, 임금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답하기를,
"알고 있다."
하였는데, 목소리가 빠르고 짧아서 거의 음성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의관(醫官) 권성징(權聖徵)이 숟가락을 들고 삼차(蔘茶)를 흘려넣으니, 임금이 혹은 그만두라고 명하고 혹은 깨닫지 못하였으며, 해역(咳逆)·견식(肩息)·담향(痰響)이 더욱 심하였다. 세자는 어상(御床)의 서쪽에 앉고 연잉군(延礽君)은 어수(御手)를 붙잡고 있었으며, 여러 신하들은 뫼시고 빙 둘러서서 조용히 기다리며 간간이 죽력(竹瀝)096)  ·삼차(蔘茶) 등속을 입에 흘려넣었다. 중궁(中宮)이 나와 보면 여러 신하들은 기둥 밖으로 물러가 엎드려 있고, 중궁이 안으로 돌아가면 여러 신하들은 다시 들어가 뫼시고 빙 둘러서 있었는데, 이와 같이 하기를 여러 차례 하여 밤을 새우기에 이르렀다.

 

6월 8일 계묘

임금이 승하(昇遐)하였다. 시약청(侍藥廳)의 세 제조(提調)와 사관(史官) 등이 어제 저녁부터 입시(入侍)하여 밤을 새우고 기둥 밖으로 물러나왔는데, 조금 후에 날이 밝았다.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환시(宦侍)로 하여금 중궁(中宮)께 아뢰기를,
"날이 이미 밝았으니, 신 등이 잠시 물러갔다가 문안(問安)드릴까 합니다."
하였다. 이윽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 나오자 사관(史官)이 뒤따라 나왔는데, 막 시약청에 이르자 환관(宦官)이 급히 나와 내교(內敎)를 전하기를,
"우선 문안드리지 말고 빨리 들어오라."
하였다. 이이명 등이 사관과 함께 황급히 달려들어가니, 연잉군(延礽君)이 이이명을 맞으며 말하기를,
"드셨던 약물(藥物)을 모조리 토해 내셨습니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와내(臥內)097)  로 들어가니, 임금이 목구멍 속에 담(痰) 끓는 소리가 크게 났다. 환시(宦侍)가 큰소리로 조정(朝廷)·승정원(承政院)·옥당(玉堂)이 문안드린다고 아뢰었으나, 임금이 알아듣지 못하였다. 도승지 윤헌주(尹憲柱)가 세자에게 고하기를,
"감군(監軍)098)  의 단자(單子)는 성상의 환후가 이와 같으시니 낙점(落點)할 수가 없겠습니다. 어제 낙점한 것으로 그대로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세자가 허락하였다. 연잉군이 내전(內殿)으로부터 나와 말하기를,
"다만 부원군(府院君)만 남아 있고 도제조 이하의 관원들은 조금 물러가 있으라."
하였다. 세 제조와 사관이 물러나 기둥 밖에 엎드려 있었는데, 이때 궁녀(宮女)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고 환시들도 눈물을 흘리며 몹시 바쁘게 다녔다. 조금 후에 부원군 김주신(金柱臣)이 나와 기둥 밖에 이르러 이이명에게 말하기를,
"내전(內殿)께서 그래도 만에 하나 성상의 병세가 회복되기를 기대하시므로, 방금 다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는 뜻으로 주달(奏達)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윽고 내시(內侍)가 여러 신하들을 불러서 도로 들어가니, 중궁(中宮)이 연잉군으로 하여금 전교(傳敎)하게 하기를,
"일찍이 듣건대 ‘명성 왕후(明聖王后)께서 병환이 나셨을 때는 단지 가슴 앞에 한 점(點)의 미지근한 온기(溫氣)가 있을 뿐이었는데도 능히 회복을 하셨다.’ 한다. 성상의 병환이 비록 위중하기는 하지만 가슴과 배에 모두 온기(溫氣)가 있으니, 약물(藥物)을 신중히 써서 기필코 회복을 기약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이명이 대답하기를,
"만일 할 수 있는 방도만 있다면 감히 정성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중궁이 또 연잉군으로 하여금 나와 전교하게 하기를,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임창군(臨昌君) 이혼(李焜)·어영 대장(御營大將) 김석연(金錫衍)  【바로 주상의 내구(內舅)이다.】 과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大臣)들을 모두 동궁(東宮)에게 품하여 입시(入侍)하게 하라."
하고, 또 연잉군을 시켜서 이이명에게 묻기를,
"원명귀(元命龜)  【숙경 공주(淑敬公主)의 아들이다.】 ·정건일(鄭健一)  【숙휘 공주(淑徽公主)의 아들이다.】 ·김도협(金道浹)  【김석연(金錫衍)의 아들이다.】  등을 모조리 같이 불러 들이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이이명이 대답하기를,
"너무 광범위합니다."
하였다. 연잉군이 들어가 아뢰고, 다시 나와 심정보(沈廷輔)  【숙명 공주(淑明公主)의 아들이다.】 를 부르라고 명하였다. 또 어유귀(魚有龜)·김동필(金東弼) 두 사람을 불러 들이라고 명하니, 이이명이 말하기를,
"이런 때에 어찌하여 반드시 인척을 다 불러들이겠습니까? 부디 이런 뜻으로 품주(稟奏)하소서."
하였다. 연잉군이 들어가 아뢰고 나와 내교(內敎)를 전하기를,
"진달한 바가 옳다."
하였다. 이에 시임·원임의 여러 대신이 다 같이 와내(臥內)로 들어왔는데, 이이명이 어탑(御榻) 아래로 나아가 큰 소리로 아뢰기를,
"시임·원임 대신이 들어왔습니다."
하고,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또 큰소리로 아뢰기를,
"소신(小臣) 창집 등이 들어왔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알아듣지 못하였다. 연잉군이 어수(御手)를 붙들고 울면서 말하기를,
"손가락이 이미 다 푸른 색으로 변했습니다."
하였다. 의관(醫官)이 나아가 콧마루를 살피고, 이어서 진맥(診脈)을 한 뒤 물러나와 말하기를,
"오른쪽 맥(脈)이 먼저 끊어졌고, 왼쪽의 맥은 바야흐로 들떠 흔들리며 안정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하였다. 중궁이 환시를 시켜서 전교하기를,
"종전에 약(藥)을 쓰는 길이 잘못되었기에 이미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런 때에 약을 쓰기란 더욱 어려우니, 반드시 상세히 살펴서 쓰라."
하니, 이이명이 울면서 대답하기를,
"신 등이 보호(保護)하는 처지에 있으니, 비록 하교(下敎)가 없으시더라도 어찌 십분 상세히 살피고 싶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본래 약리(藥理)에 어두운 까닭으로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죽어도 여죄(餘罪)가 있습니다. 지금 약을 쓰는 길이 여러 가지가 있기에 바야흐로 세심하고 신중히 골라쓰고는 있으나 그것이 합당한지 합당하지 않은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조금 후에 임창군(臨昌君) 혼(焜)·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어영 대장(御營大將) 김석연(金錫衍)·원주 목사(原州牧使) 심정보(沈廷輔)가 들어왔다. 이이명이 연잉군에게 묻기를,
"지난번 시약청을 설치할 때 빈전(嬪殿)의 일로 하교한 바가 있었는데, 선정전(宣政殿)은 창덕궁(昌德宮)에 있어서 불편하여 시행하기 어려운 단서가 있습니다. 그때 진달하고자 하였으나 차마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연잉군이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유교(遺敎)이니, 어찌 차마 어기겠는가?"
하였다. 이때 여러 신하들이 모두 조용히 탑전(榻前)에 엎드려 있었는데, 임금이 기식(氣息)과 담향(痰響)이 점차 가늘어지다가 갑자기 크게 토한 뒤 드디어 승하(昇遐)하였다. 이때가 바로 진정(辰正)099) 2각(二刻)100)  이었는데, 북쪽 협실(夾室) 안에서 일시에 울부짖고 곡(哭)하며 문을 밀치고 나오려 하다가 연잉군이 문을 막고 금하자 환시가 수족(手足)을 정돈하였다. 중궁(中宮)이 연잉군을 시켜 전교(傳敎)하기를,
"초상(初喪)에 있어서의 모든 일들을 중궁이 주관하라는 뜻으로 직접 성상의 하교를 받았다. 이제 마땅히 이것에 의거하여 시행할 것이니, 대신(大臣)은 모름지기 이 뜻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하니, 김창집이 부복(俯伏)하여 말하기를,
"삼가 마땅히 전교를 받들겠습니다."
하였다. 이때 밖에 있던 여러 승지와 종척(宗戚)들이 모두 들어왔다. 대신(大臣) 이하가 흐느껴 울면서 허둥지둥 어쩔 줄을 몰랐다. 《오례의(五禮儀)》와 등록(謄錄)을 들추어 열람하면서 임금이 승하하신 시각이 꽤 오래 되었는데도 곧바로 속광(屬纊)101)  을 하지 않았다. 승지 한중희(韓重熙)가 갑인년102)  의 일기(日記)를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관명(李觀命)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그때는 장선징(張善瀓)이 예조 판서로서 속광을 행하였으니, 오늘은 그대가 마땅히 속광하여야 합니다."
하니, 이관명이 말하기를,
"장선징은 바로 척속(戚屬)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불가하다."
하였다. 여러 의론이 박필성(朴弼成)과 혼(焜)으로 하여금 하게 하려고 하였는데, 결정이 나지 않았다.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이 손에 의주(儀註)를 들고 방(房)으로 들어와 말하기를,
"속광의 절차는 내척(內戚)이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이니, 심정보(沈廷輔)로 하여금 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때 심정보가 대궐 밖으로 나가서 곧 들어오지 않았으므로 찾느라고 어수선한 사이에 내시(內侍)가 이미 속광하였다. 중궁이 연잉군을 시켜 전교하기를,
"성상께서 평일에 매양 습렴(襲殮)103)   등의 여러 가지 절차를 기필코 정제(整齊)하게 하라는 뜻으로 누누이 하교하셨다. 대신(大臣)들은 부디 이 뜻을 깊이 체념하여 큰 일은 내간(內間)에 품하고 세세한 절차는 짐작하여 시행하되, 반드시 꼭 정성을 쏟도록 하라."
하니, 김창집과 이건명이 대답하기를,
"감히 마음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대신(大臣)이 내시 두 사람으로 하여금 호복(呼復)104)  을 하게 하니, 내시 두 사람이 함(函)에다 강사 곤룡포(絳紗袞龍袍)105)  를 담아 대궐 지붕으로 올라가 세 번 주상의 존호(尊號)를 불렀다. 내시가 남쪽 협실(夾室)에서 왕세자(王世子)를 부축하고 나와 입(笠)과 사포(紗袍)를 벗기고 머리를 풀고 거애(擧哀)106)  하였다. 연잉군이 옷을 벗고 머리를 풀고 기둥 밖에서 거애하였다. 대신 이하가 침문(寢門) 밖에서 부복(俯伏)해 거애하였는데, 뒤죽박죽으로 질서가 없었다. 곡이 끝나자 김창집이 주서(注書)로 하여금 ‘상대점(上大漸)’이란 세 글자를 써서 외정(外庭)에 내다 보이게 하였다. 이때 비가 퍼붓듯 크게 쏟아졌다. 백관(百官)들이 세 곳에 나뉘어 모여 있었는데, 주서가 두루 돌아다니며 들어보이니, 백관들이 모두 곡하였다. 대신이 마침내 외정으로 물러나와 옷을 바꿔입고 백관을 인솔하여 거애한 뒤 숭정전(崇政殿)의 동쪽 월랑(月廊)에 모였다. 승정원(承政院)·옥당(玉堂)·춘방(春坊)107)  ·익위사(翊衞司)108)   등은 흥태문(興泰門) 밖에 모였다.

 

호위 궁성 훈련 대장(扈衞宮城訓鍊大將) 이홍술(李弘述)은 흥화문(興化門)을 지키고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만성(李晩成)은 개양문(開陽門)을 지켰는데, 모두 등(燈)을 달고 조두(刁斗)109)  를 쳐 왕위를 계승하는 날에 이르러서야 그만 두었다. 이만성은 경계하여 지키며 잡인(雜人)이 함부로 드나드는 것을 자못 엄하게 금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원상(院相)110)  이 되어 승정원(承政院)에 앉아서 크고 작은 일들을 품의하여 시행하였다.

 

원상 김창집이 구전(口傳)으로 진달하기를,
"선정전(宣政殿)에다 빈소(殯所)를 설치하라는 것이 비록 유명(遺命)이긴 하지만, 선정전은 이미 시어소(時御所)가 아니고 자정전(資政殿) 역시 협착하니, 어떤 곳으로 결정을 해야 하겠습니까? 바라건대 중궁전(中宮殿)에 품의하여 하령(下令)하소서."
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빈전(殯殿)의 일에 대한 대행왕(大行王)111)  의 유교는 대개 자정전이 협착하므로 거기에 덧붙여 지을 적에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고 힘을 허비할까 염려했기 때문에 옮겨서 설치하라는 하교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선정전은 이미 시어소가 아니며, 자정전 이외에는 다시 다른 곳이 없으니, 자정전으로 하라."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을 총호사(摠護使)로, 호조 판서(戶曹判書) 송상기(宋相琦)·병조 판서(兵曹判書) 이만성(李晩成)·예조 판서(禮曹判書) 이관명(李觀命)을 국장 도감 제조(國葬都監提調)로, 좌참찬(左參贊) 정호(鄭澔)·지돈녕(知敦寧) 민진원(閔鎭遠)·예조 판서(禮曹判書) 이관명(李觀命)을 빈전 도감 제조(殯殿都監提調)로, 공조 판서(工曹判書) 신임(申銋)·형조 판서(刑曹判書) 유집일(兪集一)·부사직(副司直) 권성(權𢜫)을 산릉 도감 제조(山陵都監提調)로, 밀성군(密城君) 이식(李栻)을 대전관(代奠官)으로 삼았다.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은 재궁(梓宮)112)   상면(上面)에 상(上)자를 쓰고 지돈녕(知敦寧) 민진원(閔鎭遠)은 명정(銘旌)을 쓰도록 하였다.

 

공방 승지(工房承旨) 조관빈(趙觀彬)이 구전(口傳)으로 진달하기를,
"장생전(長生殿) 안에 있는 재궁(梓宮)을 삼망(三望)을 갖추어서 들여 보냈는데, 세자(歲字)113)  의 재궁이 나무의 품질이 가장 좋기 때문에 맨 위에 의망하여 들여 보냈습니다. 대신(大臣)의 의사가 이와 같았습니다."
하니, 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예조(禮曹)에서 진달하기를,
"《오례의(五禮儀)》 습구조(襲具條)의 ‘수관(首冠)’의 주(註)에 이르기를, ‘바로 복건(幅巾)이다.’ 하였습니다. 선정신(先正臣) 김집(金集)의 《의례(儀禮)》에는 말하기를, ‘복건(幅巾)을 곤룡포(袞龍袍)의 위에다 쓰면 서로 맞지 않는다.’ 하였는데, 일찍이 기축년114)  ·기해년115)  ·갑인년116)  의 국휼(國恤) 때 모두 익선관(翼善冠)과 곤룡포를 썼습니다. 청컨대 지금도 또한 이것에 의거하여 상방(尙方)117)  에 분부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오례의》에는 다만 아침 저녁의 상식(上食)만 있고 주다례(晝茶禮)는 없습니다. 갑인년의 국상 때는 모두 주다례를 행하였으니, 지금도 또한 이것에 의거하여 거행하소서."
하니, 세자가 모두 그대로 따랐다.

 

유명(遺命)에 따라서 방상(方喪)118)  을 행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진달하기를,
"갑오년119)  에 비망기(備忘記) 때문에 군신(君臣)의 상복(喪服)을 고제(古制)로 회복하는 일에 대해 대신(大臣)과 유신(儒臣)에게 수의(收議)하고, 전교하시기를, ‘이 일은 주자(朱子)의 정론(定論)이 있어 본래 의심할 만한 것이 없으니 과단성 있게 행하는 것이 옳다.’ 하셨습니다. 사명(事命)이 내려지자 본조(本曹)에서 이어서 옥당(玉堂)으로 하여금 널리 고증하여 품처(稟處)토록 할 것을 청하니, 아뢴 대로 윤허하셨습니다. 그때 옥당(玉堂)에서 한결같이 주자의 《군신복의(君臣服議)》를 따르고, 다시 주자의 서독(書牘)·어류(語類)와 명조(明朝)의 예(禮)와 본조(本朝)의 선정신(先正臣)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고(故) 상신(相臣) 이정귀(李廷龜) 등이 논열(論列)한 것들을 상고하여 서로 비교하고 고증해서 한 통(通)의 문자(文字)로 작성하여 정제(定制)를 만들었는데,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 연달아 편찮으신 중에 계셨기 때문에 이러한 문자를 입람(入覽) 재품(裁稟)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불편할 것 같아서 시간을 끌다가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불행히 신민(臣民)이 복록(福祿)이 없어 대행 대왕께서 승하하셨으니, 울부짖으며 망극(罔極)해 하는 가운데에서 상하(上下)가 오늘날 스스로 다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복제(服制) 한 가지 사항에 있는데 우리 대행 대왕께서 성학(聖學)이 고명(高明)하고 백왕(百王)보다 훨씬 뛰어나시어 천고(千古)의 속제(俗制)를 깨끗이 씻어버리고 능히 주자의 정론(定論)을 따라 만세(萬世)에 준행(遵行)할 영전(令典)으로 삼은 것도 실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 마땅히 삼가 ‘과단성 있게 행하라.’는 하교에 의거하여 최질(衰絰)의 제도를 중외(中外)에 반포하여 거행할 것인데, 그 중에서 장(杖)과 전함(前銜)120)  의 상복을 입는 품수(品數) 등의 미처 품정(稟定)하지 못한 것들은 지금 애통하신 가운데 잇따라 앙품(仰稟)할 수가 없으니, 모두 대신(大臣)에게 의논하여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령(下令)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이에 앞서 옥당에서 분부를 받고 여러 서적을 참고하여 한 통(通)의 문자를 만들었는데, 연달아 성상의 환후가 편안하지 않는 날을 만나 입계(入啓)하지 못하였다. 그 입계하려 했던 내용에 이르기를,
"《예기(禮記)》 단궁(檀弓)에 말하기를, ‘임금을 섬김에 방상(方喪) 3년 한다.’ 하였는데, 주씨(朱氏)는 말하기를, ‘어버이의 상사(喪事)에 비교하여 의리로 은혜를 같이하는 것이다.’ 하였고, 주자(朱子)의 《군신복의(君臣服議)》에는, ‘옛적의 이른바 「방상 3년」이란 것은 대개 부모의 상에 견주어 말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의례(儀禮)》의 상복(喪服) 참최장(斬衰章)에 말하기를, ‘참최상(斬衰裳)·저질(苴絰)·죽장(竹杖)·교대(絞帶)·관승영(冠繩纓)·관구자(菅屨者)’라 하였고, 경(經)의 부(父)와 군(君)에 대한 전(傳)에 말하기를, ‘군은 지존(至尊)이다.’ 하였습니다. 주자(朱子)의 《군신복의》에는 말하기를, ‘참최(斬衰) 3년은 아버지와 임금을 위해서 입으니, 《의례》의 상복(喪服)의 설과 같을 따름이다. 그 복(服)은 포관(布冠)·포삼(布衫)에 최벽령(衰辟領)·부판(負版)을 더하고, 엄임(掩袵)·친삼(襯衫)·포군(布裙)·마요질(麻腰絰)·마수질(麻首絰)·마대(麻帶)·관구(管屨)·죽장(竹杖)이다. 천자(天子)로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귀천(貴賤)으로 인해서 더하거나 덜하는 바가 있지는 않다. 다만 《의례》의 관(冠)은 3량(梁)인데, 이는 바로 사례(士禮)이다. 지금 천자(天子)의 통천관(通天冠)은 24량(梁)이니 마땅히 여기에 기준하여 그 절반을 버리고 12량(梁)으로 하여야 하며, 군신(群臣)은 본품(本品) 진현관(進賢冠)의 수(數)와 같이 하여 차등을 두어야 한다.’ 하였습니다. 신 등이 삼가 살피건대, 개원례(開元禮) 서례(序例)의 면복제도조(冕服制度條)에 말하기를, ‘진현관(進賢冠)은 3품 이상은 3량(梁), 5품 이상은 2량, 9품 이상은 1량이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주자는 말하기를, ‘본품에 의거하여 등급을 둔다.’ 하였으니, 마땅히 《의례》의 제도로써 참작하여 양수(梁數)를 강정(講定)해야 할 듯합니다. 【이상은 수질(首絰)·포관(布冠) 양수(梁數)에 대해 논한 것이다.】 단궁(檀弓)에 말하기를, ‘공(公)의 상(喪)에는 여러 달관(達官)의 장(長)이 지팡이를 짚는다.’ 하였고, 그 주(註)에 ‘무릇 관(官)에는 다 장(長)과 이(貳)121)  가 있는데, 여기는 장으로 말하였으니 이에는 미치지 않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군신복의(君臣服議)》에 말하기를, ‘예(禮)에 「임금의 상(喪)에 여러 달관의 장이 지팡이를 짚는다.」 하였는데, 이른바 달관이란 전달(專達)의 관(官)을 말한 것이다. 오늘날에 있어서는 내직으로는 성(省)·조(曹)·시(寺)·감(監)의 장관(長官)이고, 외직으로는 감사(監司)·군수(郡守)이다. 무릇 한 사(司)의 장(長)이란 일찍이 시종(侍從) 이상의 벼슬에 종사하여 주사(奏事)를 단독으로 했던 자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지팡이를 짚지 않는 제도를 요좌(僚佐)122)   이하에 시행하는 것은 옳지만, 그 장관(長官)으로 하여금 낮추어 같게 하여서 비록 옛 재상이나 영수(領帥)였다 하더라도 집안에 있는 자와 다름이 없이 한다는 것은 예문(禮文)이 어찌 야박하지 않겠는가?’ 하였고, 《어류(語類)》에는 말하기를, ‘달관(達官)이란 임금에게 스스로 통하는 자를 말한 것이니, 가령 내직(內職)으로는 공경(公卿)·재집(宰執)과 육조(六曹)의 장(長)과 구시(九寺)·오감(五監)의 장이며, 외직(外職)으로는 감사(監司)·군수(郡守)이다. 임금에게 장주(章奏)를 스스로 통할 수 있는 자들은 무릇 모두 지팡이를 짚되 그 다음은 지팡이를 짚지 않는 것이니, 가령 태상경(太常卿)은 지팡이를 짚되 태상 소경(太常少卿)은 지팡이를 짚지 않으며, 만일 태상경이 없을 경우에는 소경이 대신 지팡이를 짚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 등이 삼가 살피건대 달관이란 오늘에 있어서 의정부(議政府)와 육조(六曹)의 판서(判書)와 한성 판윤(漢城判尹)·삼사(三司)의 장관(長官)·대사성(大司成)·판결사(判決事)이고, 외직으로는 팔도(八道)의 감사(監司)와 양도(兩都)의 유수(留守)입니다. 이들이 이른바 달관의 장이라는 것은 본디 논할 것도 없으나, 주자가 ‘일찍이 시종(侍從) 이상의 벼슬에 종사하여 장주(章奏)를 단독으로 한 자’를 모두 ‘달관’이라 하였으니, 그렇다면 지금 당하관(堂下官)인 삼사(三司)의 여러 관원들도 모두 지팡이를 짚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런데 육조(六曹)의 참판(參判)과 참의(參議)는 도리어 좌이(佐貳)인 이유로 지팡이를 짚지 못하니, 경정(徑庭)123)  을 면치 못합니다. 마땅히 강정(講定)해야 할 듯합니다. 일찍이 시종(侍從) 이상의 벼슬에 종사한 자가 이미 지팡이를 짚을 수 있다고 한다면 당상관(堂上官)과 당하관(堂下官)을 물론하고 일찍이 시종을 역임한 자는 그 수효가 매우 많으므로 취사(取舍)에 어려움이 있으니, 마땅히 참작하여 원칙을 정해야 할 듯합니다. 주자가 구시(九寺)·오감(五監)의 장을 달관이라 하였는데, 지금의 관제(官制)로써 말한다면 원(院)·시(寺)의 감(監)·정(正)을 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또 제조(提調)가 있으니, 비록 권설직(權設職)124)  이기는 하지만 그 등급과 서열을 논한다면 저절로 높고 낮음의 구별이 있습니다. 또한 마땅히 헤아려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각 군문(軍門)의 대장(大將)들도 비록 실직(實職)은 아니지만 또한 한 군영(軍營)의 장이니, 지팡이를 짚을 것인가 안 짚을 것인가 하는 것을 또한 마땅히 재량하여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외직의 통제사(統制使)·병사(兵使)·수사(水使)는 감사(監司)와 위품(位品)이 서로 같은데, 주자는 단지 감사만 거론하고 곤수(閫帥)125)  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영수(領帥)라는 표현은 있으나 송(宋)나라 때의 ‘영수’는 오늘날의 곤수와는 차이가 있으니, 또한 마땅히 참작해 결정해야 합니다. 【이상은 장(杖)의 등수(等數)에 대해 논한 것이다.】  주자가 여정보(余正甫)에게 답하는 편지에 말하기를, ‘지난번 효종(孝宗)이 고종(高宗)을 위해 복(服)입는 것을 보니, 이미 장사(葬事)를 지낸 뒤에도 오히려 백포 의관(白布衣冠)으로 조회를 보았다.’ 하였고, 주자가 거상(居喪)에 있어 예율(禮律)을 따를 것을 효유(曉諭)하기를, ‘수황(壽皇)126)  이 소의(素衣)와 소관(素冠)을 모두 추포(麤布)127)  를 사용하였으며, 일찍이 일을 주달함으로 인해 친히 첨앙(瞻仰)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매우 거룩한 덕으로서 천재(千載)의 오류를 깨뜨려버린 것이다. 지난 시대에는 다만 임금만을 위해서 복(服)을 입고 임금 스스로는 복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고례(古禮)를 회복할 수가 없었다. 당시에 이미 이런 기회가 있었는데도 유신(儒臣)과 예관(禮官)이 건의하여 일대(一代)의 제도로 삼지 못하고 드디어 임금은 위에서 복을 입는데 신하는 밑에서 복을 벗게 하였으니, 삼가 생각건대 마땅히 효종(孝宗)이 제정한 예(禮)와 같이하여 임금과 신하가 함께 복(服)을 입되 약간의 구별을 두어 상하(上下)를 분별해야 할 것이다. 13개월 만에 연복(練服)128)  을 입고, 소상(小祥)을 치르고 25개월 만에 난복(欄幞)을 입고 담제(禫祭)129)  를 지내며, 27개월 만에 조복(朝服)을 입고 복을 벗는데, 조정과 주현(州縣)에서 모두 이 제도를 써야 한다. 연거(燕居)에는 백견건(白絹巾)·백량삼(白涼衫)·백대(白帶)의 착용을 허락하고, 선인(選人)130)  과 소사신(小使臣)131)  은 부제(祔祭)132)  를 지낸 뒤 최복(衰服)을 벗되, 조건(皁巾)·백량삼(白涼衫)·청대(靑帶)로 상(喪)을 마치고, 서인(庶人)과 이졸(吏卒)들은 3년 동안 홍자(紅紫)를 입지 않아야 한다.’ 하였습니다. 신 등이 삼가 살피건대 이미 최질(衰絰) 차림으로 성복(成服)한다면 연제와 담제도 또한 마땅히 한결같이 주자(朱子)의 설에 의거해야 합니다. 다만 이른바 난복(欄幞)은 이미 시세(時制)가 아니니, 단령(團領)과 모(帽)·대(帶)의 품색(品色)을 또한 마땅히 강정(講定)하여 담제 때의 상복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이상은 연제(練祭)와 담제(禫祭) 뒤의 복색(服色)에 대해 논한 것이다.】 신 등이 삼가 살피건대 연거(燕居)의 복(服)은 주자가 말하기를, ‘백견건(白絹巾)·백량삼(百涼衫)·백대(白帶)의 착용을 허락한다.’ 하였으나, 하단(下段)에 기록한 황조(皇朝)의 제도로 살펴본다면 ‘퇴거(退居)한 때에는 곧바로 효복(孝服)133)  을 입는다.’ 하였으니, 이것도 또한 같지 않습니다. 마땅히 하나를 지정하여 작정해야 할 듯합니다. 다만 황조의 제도는 ‘역복(易服)134)  한 달로부터 27일이 되어 상복을 벗기 이전에는 비록 연복(燕服)이라도 종중(從重)한다.’는 것을 따랐는데, 지금은 이미 순전히 3년의 제도를 적용하니 연거의 복색을 한결같이 주자의 의논에 따르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이상은 연거(燕居)의 복색(服色)에 대해서 논한 것이다.】  주자가 여정보(余正甫)에게 답하는 편지에 또 말하기를, ‘초상(初喪)에는 마땅히 고상복(古喪服)을 지어서 임(臨)하고, 별도로 포복두(布幞頭)·포공복(布公服)·포혁대(布革帶)를 지어 조회하는 것이 예(禮)에 합당하다.’ 하였고, 황명(皇明) 성조(成祖) 영락(永樂) 22년(1424)에 상복 예의(喪服禮儀)를 정하였는데, 예부(禮部)에서 사의(事宜)를 의주(議奏)하기를, ‘서울에 있는 문무(文武) 관원들은 4일 만에 성복(成服)하고 최질(衰絰)을 구비하여 사선문(思善門) 밖에 나아가 아침 저녁으로 3일간 곡림(哭臨)하고, 또 10일간 조림(朝臨)하는데, 성복한 날로부터 시작해서 27일간 최복(衰服)을 입으며, 무릇 입조(入朝)하거나 아문(衙門)에서 시사(視事)할 때에는 포과 사모(布裹紗帽)·수대(垂帶)·소복(素服)·요질(腰絰)·마혜(麻鞋)를 착용하고, 물러 나와서는 다시 최복을 입어야 한다.’ 하였습니다. 고(故) 상신(相臣) 문충공(文忠公) 이정귀(李廷龜)의 《조천기사(朝天記事)》 가운데에는 신종 황제(神宗皇帝) 대행의(大行儀)를 기록하기를, ‘서울에 있는 문무 관원들은 22일 상(喪)을 처음 들은 때로부터 백포 단령(白布團領)·오사모(烏紗帽)·흑각대(黑角帶)·조화(皁靴)를 착용하고 사선문 밖에 나아가 곡림(哭臨)하였으며, 26일에는 각자 참최복(斬衰服)을 구비하여 사선문 밖에 나아가 아침 저녁으로 3일간 곡림하고, 또 7일간 조림한 뒤 각자가 15번씩 곡소리를 내고 멈추었다. 무릇 입조하거나 아문에서 시사(視事)할 때에는 포과 사모·수대·소복·요질·마혜를 착용하고, 물러나와 거처할 때에는 곧바로 효복을 입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예부에 정문(呈文)하여 천관(千官)135)  을 곡림의 반열에 참여시키기를 요청하니, 예부에서 반항(班行)을 따를 것을 허락하였다. 인하여 의주(儀註)에 기입하고, 공부(工部)에 행문(行文)136)  하여 효복을 제조해 주었다. 백모(白帽)·백의(白衣)로 대궐문 밖에 가서 참최·요질·수질·대(帶)·마혜를 착용하고, 천관을 따라 성복례(成服禮)를 거행하였으며, 전후에 걸쳐 거애(擧哀)하고 네 번 절한 다음 그쳤다.’ 하였습니다. 선묘조(宣廟朝)의 선정신(先正臣)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는 의계(議啓)하기를, ‘반드시 선왕(先王)의 예(禮)에 합하게 하고자 한다면 당초에 위 아래가 마땅히 최질(衰絰)을 구비하여 《의례(儀禮)》의 제도와 같이 하고, 별도로 포모(布帽)·포단령(布團領)·포대(布帶)를 만들어 시사(視事)하는 옷으로 삼아야 하지만, 지금은 이미 시기를 놓쳐버렸으니 추복(追服)137)  할 수 없으며, 차라리 송(宋)나라 효종(孝宗)의 제도에 의거하여 위 아래가 백의 관대(白衣冠帶)로 시사하는 것이 고례(古禮)에 가까울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신 등이 삼가 살피건대 공조복(公朝服)을 주자는, ‘별도로 포복두(布幞頭)·포공복(布公服)·포혁대(布革帶)를 지어서 조회한다.’ 하였고, 황조의 제도는 포모(布帽)·소복(素服) 이외에 요질(腰絰)·마혜(麻鞋)를 구비하게 하니, 이것은 주자의 설과 약간 다름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조(本朝)의 문선공 이이가 의논한 바 포모(布帽)·포단령(布團領)·포과 각대(布裹角帶)·백화(白靴)가 실은 주자의 뜻에 근본한 것이니, 이제 당연히 이를 준용(遵用)해야 합니다. 【이상은 공·조복(公朝服)에 대해서 논한 것이다.】 기축년138)   인조(仁祖)의 국휼(國恤) 때 선정신(先正臣)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이 《상례고금이동의(喪禮古今異同議)》를 진헌하였는데, 그 책자(冊子)에 말하기를, ‘《오례의(五禮儀)》의 복제(服制)는 아주 순서가 없습니다. 대개 임금과 아버지는 일체(一體)이니, 어찌 아버지에게는 순전히 상복(喪服)을 입고 임금에게는 조복(朝服)의 제도를 참용(參用)하여 반상 락하(半上落下)139)  하는 의례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전함(前銜)은 지금은 비록 관직이 없으나 이미 이름이 사적(仕籍)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사실 현재 관직에 있는 사람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데, 이에 사인(士人)들과 더불어 함께 백의(白衣)의 제도로 한 것은 더욱 매우 미안한 일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신의 이 의논을 특별히 예관(禮官)에게 내려서 한결같이 주자가 덜고 더한 제도에 따르도록 속히 지휘하고, 백관(百官)으로 하여금 최복(衰服)을 미리 구비하여 발인(發靷)할 때 입고 들어가 임하게 하며, 지금 착용하고 있는 단령(團領)은 그 끝부분을 꿰매어 포모·포과·각대·백화로 시사(視事)하는 옷을 만들어야 합니다. 또한 전함에게도 이번에 다시 성복(成服)하게 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였습니다. 예종조(睿宗朝)에는 승정원(承政院)에 하교하기를, ‘상복은 추가로 만들 수 없으니 이번에 새로 제직(除職)된 자들은 소의(素衣)로 취사(就仕)하라.’ 하였습니다. 신 등이 삼가 살펴보건대 전함이 사인(士人)과 똑같이 복(服)을 입는다는 것은 참으로 미안한 일이지만 전함 중에도 또한 차등이 없지 않습니다. 무릇 문무(文武), 음관(蔭官)의 일명(一命)140)   이상으로 파산(罷散)한 사람들이 일률적으로 모두 최복을 입는다면 그 역시 아무래도 형편상 시행하기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문관(文官)은 만약 제2조(條)의 ‘일찍이 시종(侍從)을 역임한 경우는 모두 지팡이를 짚는다.’는 것으로 기준을 삼는다면 품질(品秩)은 의논할 바가 아니지만, 무음(武蔭)에 있어서는 일찍이 2품(品) 이상의 실직(實職)을 역임한 자로 한정하고, 그 나머지는 현직에 있는 사람 이외에는 모두 백의관(白衣冠)으로 성복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전함(前銜)으로 관직을 얻은 자와 새로 관직에 제수된 자가 무릇 상제(喪祭)에 있어 최복을 착용하지 않는 것은 진실로 미안한 일이니, 성복 때 각사(各司)에서 그 관원의 수효를 계산하여 이미 최복을 만들어 놓는다면 이미 체직된 뒤에라도 그 직책을 교대하는 자가 그 관사(官司)에 나아가 전임자의 복(服)을 입으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새로 임명된 관원도 각자가 마땅히 입어야 할 최복이 있어 자연히 추복(追服)하는 일절(一節)은 없게 되는 것이다.’ 하고, 또 혹자는 말하기를, ‘상복은 제복(祭服)과는 달라서 전임자가 입었던 것을 대신하여 입는 다는 것은 이미 매우 구차스러운 일이며, 애당초 최복을 받은 관리가 체직된 뒤에는 비록 변제(變除)141)   때라도 다시 벗고 입는 절차가 없으니, 또한 불편한 점이 있다.’ 하고, 또 혹자는 말하기를, ‘2품 이상의 실직(實職)과 시종신(侍從臣)은 시임(時任)과 전임을 막론하고 이미 모두 최복을 입는다면 새로 제직(除職)되거나 복직(復職)된 뒤에 최복이 없는 자는 무음(武蔭) 3품 이하의 서관(庶官)에 불과할 뿐이다. 이들은 예종조(睿宗朝)의 하교(下敎)에 따라 소의(素衣)로 취사(就仕)하게 하는 것이 아마 무방할 듯하다.’ 하였습니다. 다만 널리 문의하여 정확하게 결정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이상은 전함(前銜)의 복(服)과 추복(追服)의 당부(當否)에 대해서 논한 것이다.】 "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73책 65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101면
【분류】왕실-의식(儀式)


[註 118] 방상(方喪) : 자식이 부모의 상(喪)에 3년 동안 복(服)을 입는 것에 비교하여 임금을 섬기는 신하가 임금이 죽은 후에 3년복을 입는 것을 말함.[註 119] 갑오년 : 1714 숙종 40년.[註 120] 전함(前銜) : 전직(前職).[註 121] 이(貳) : 부관(副官).[註 122] 요좌(僚佐) : 속관(屬官).[註 123] 경정(徑庭) : 매우 심한 차이.[註 124] 권설직(權設職) : 임시직.[註 125] 곤수(閫帥) : 병사(兵使)와 수사(水使).[註 126] 수황(壽皇) : 송(宋) 효종(孝宗)의 존호(尊號).[註 127] 추포(麤布) : 거친 베.[註 128] 연복(練服) : 소상(小祥) 때부터 담제(禫祭) 전까지 입는 상복으로 거친 베로 된 상복을 삶아서 약간 다듬은 것임.[註 129] 담제(禫祭) : 초상(初喪)으로부터 27개월 만에, 곧 대상(大祥)을 치른 그 다음 다음 달 하순의 정일(丁日)이나 해일(亥日)에 지내는 제사. 부(父)가&n6월 8일 계묘

예조(禮曹)에서 최질(衰絰)의 제도를 대신에게 의논하였다. 당시 산관(散官)으로 마땅히 최복을 입을 사람과 마땅히 지팡이를 짚을 사람을 참량(參量)하여 법식을 정하였고, 문무 백관(文武百官)의 공복(公服)과 전함(前銜) 당하관(堂下官) 3품 이하 및 생도(生徒)들의 복색(服色)을 대략 깎고 윤색을 더하여 별단(別單)으로 써서 올렸는데, 그 별단에 이르기를,
"왕세자(王世子)는 참최(斬衰) 3년인데, 의상(衣裳) 【아주 굵은 생포(生布)를 쓴다.】 ·관(冠) 【조금 가는 생포를 쓰는데, 마승(麻繩)으로 무(武)를 만들고 영(纓)을 만든다.】 ·수질(首絰)·요질(腰絰)·교대(絞帶) 【모두 생마(生麻)를 사용한다.】 ·죽장(竹杖)·관구(菅屨)를 하고, 사위(嗣位)할 때는 면복(冕服)을 입는다. 졸곡(卒哭)한 뒤 시사(視事)할 때는 포포(布袍) 【생포를 쓴다.】 ·포과 익선관(布裹翼善冠) 【입(笠)도 역시 같다.】 ·포과 오서대(布裹烏犀帶)·백피화(白皮靴)를 착용하고, 무릇 상(喪)과 관계되는 일에는 최복을 입는다. 13개월 만에 연제(練祭)를 지낸 다음 연관(練冠)을 쓰고, 수질(首絰)·부판(負版)·벽령최(辟領衰)를 벗으며, 시사복(視事服)으로는 백포(白袍)·백포과 익선관(白布裹翼善冠)·백포과 오서대(白布裹烏犀帶)·백피화(白皮靴)를 착용한다. 25개월 만에 상제(祥祭)를 지내고 나서는 참포(黲袍)·익선관·오서대·백피화를 착용하고, 담제(禫祭)를 지낸 후에는 곤룡포(袞龍袍)·옥대(玉帶)를 착용한다.
1. 왕비(王妃)는 참최(斬衰) 3년인데, 대수(大袖)·장군(長裙) 【모두 아주 굵은 생포(生布)를 쓴다. 대수는 본국(本國)의 장삼(長衫)이며 장군(長裙)은 곧 치마이다.】 ·개두(蓋頭)·두수(頭𢄼) 【조금 가는 생포를 쓰는데 개두는 본국의 여자용 입모(笠帽)로 대신하고, 두수는 본국의 수파(首帊)로 대신한다.】 ·죽차(竹釵) 【전계(箭筓)이다.】 ·포대(布帶) 【굵은 생포를 쓴다.】 ·포리(布履) 【백면포(白綿布)로 만든다.】 를 착용한다. 13개월 만에 연제를 지내고, 백포(白布)로 된 대수·장군  【연포(練布)를 쓴다.】 ·개두·두수·대(帶)·백피혜(白皮鞋)를 착용하며 25개월 만에 상제를 지내고 짙게 물들인 옥색(玉色)의 대수·장군과 흑개두(黑蓋頭)·두수·대·피혜(皮鞋)를 착용하고, 금주(金珠)나 홍수(紅繡)는 사용하지 않는다. 27개월 만에 담제를 지낸 뒤에는 길복(吉服)을 입는다.
1. 왕세자빈(王世子嬪)은 참최(斬衰) 3년인데, 왕비(王妃)와 복(服)이 같다.
1. 내명부(內命婦)·빈(嬪) 이하의 복도 왕비와 복이 같다.
1. 친자(親子)의 복은 왕세자의 복과 같다. 졸곡(卒哭) 후에는 임시로 포단 령의(布團領衣) 【굵은 생포를 쓰며 가를 꿰맨다.】 ·포과 사모(布裹紗帽) 【철(鐵)로 된 뿔을 제거하고 포로 대(帶)를 만들어 후면에 드리운다. 입(笠)도 역시 같다.】 ·포과 각대(布裹角帶)·백피화(白皮靴)를 착용하고, 무릇 상사(喪事)에 관계된 경우에는 최복을 입는다. 13개월 만에 연제(練祭)를 지내고 연관(練冠)을 착용하고 수질(首絰)·부판(負版)·벽령최(辟領衰)를 벗으며, 임시로 백포 단령의(白布團領衣)·백포과 사모(白布裹紗帽)·백포과 각대(白布裹角帶)·백피화를 착용한다. 25개월 만에 상제(祥祭)를 지내고 짙게 물들인 옥색의(玉色衣)와 오사모(烏紗帽)·흑각대(黑角帶)·백피화를 착용하며, 27개월 만에 담제(禫祭)를 지내고 흑의(黑衣)·오사모·흑각대·백피화를 착용한다. 담제를 지낸 뒤에는 길복을 입는다.
1. 친자의 처(妻)의 복(服)은 왕세자빈의 복과 같다.
1. 상궁(尙宮) 이하는 참최(斬衰) 3년인데, 배자(背子) 【본국의 몽두의(蒙頭衣)이다. 매우 굵은 생포를 사용한다.】 ·개두(蓋頭)·두수(頭𢄼) 【약간 가는 생포를 쓰는데 시비(侍婢) 이하는 개두가 없다.】 ·포대(布帶)·소혜(素鞋) 【백피(白皮)로 만든다.】 를 착용하고, 연제(練祭)를 지낸 뒤에는 백포 배자(白布背子)·개두·두수·대(帶)·백피혜를 착용한다.
1. 수규(守閨)142)   이하는 참최(斬衰) 3년인데, 상궁(尙宮) 이하의 복(服)과 같다.
1. 종친(宗親) 및 문무 백관의 처(妻)는 자최(齋衰) 1년인데, 대수(大袖)·장군(長裙) 【차등의 굵은 생포(生布)를 사용한다.】 ·개두(蓋頭)·두수(頭𢄼) 【조금 굵은 생포를 쓴다.】 ·죽차(竹釵)·포대(布帶) 【차 등의 굵은 생포를 사용한다.】 ·포리(布履) 【백면포(白綿布)로 만든다.】 를 착용하고, 졸곡(卒哭) 후에는 백포(白布)로 된 대수·장군·개두·두수·대(帶)·백피혜(白皮鞋) 【담제(禫祭)를 지내기 이전에는 금수(錦繡)·홍자(紅紫)·금옥(金玉)·주취(珠翠) 등의 장식의 사용을 금한다.】 를 착용한다.
1. 각도(各道)의 대소(大小) 사신(使臣)과 외관(外官), 전함(前銜)의 복(服)은 백관의 복과 같고, 그 처의 복은 백관의 처와 복과 같다.
1. 동성(同姓)과 이성(異姓)의 시마(緦麻) 이상 친척은 【시임(時任)과 전함 및 직책이 없는 사람을 막론한다.】  참최(斬衰) 3년인데, 백관의 복(服)과 같으며, 그 처의 복은 백관의 처의 복과 같다.
1. 동성과 이성의 시마(緦麻) 이상 여자는 참최 3년인데, 친자(親子) 처의 복과 같다.
1. 수릉관(守陵官)·시릉관(侍陵官)·내시(內侍)는 참최 3년인데, 최복(衰服)의 제도와 연제(練祭)·상제(祥祭)·담제(禫祭)의 복은 친자(親子)의 복과 같다.
1. 내시(內侍)·사알(司謁)·사약(司鑰)·서방색(書房色)·반감(飯監)은 참최 3년인데, 백관의 복과 같다.
1. 별감(別監)과 각 차비인(差備人)은 아주 굵은 생포(生布)로 만든 직령의(直領衣)·두건(頭巾)·마대(麻帶)·백승혜(白繩鞋)를 착용하고, 연제(練祭)를 지낸 뒤에는 백의(白衣)·백두건(白頭巾)·백대(白帶)를 착용하여 3년을 마친다.
1. 직사(職事)가 있는 전함 각품(各品)과 성중관(成衆官) 【내금위(內禁衞)·충의위(忠義衞)·충찬위(忠贊衞)·충순위(忠順衞)·별시위(別侍衞)·족친위(族親衞) 등의 무리를 말한다.】 은 포단 령의(布團領衣) 【굵은 생포를 쓰는 데 가를 꿰맨다.】 ·포과 사모(布裹紗帽) 【입(笠)도 또한 같다.】 ·포과 각대(布裹角帶)·백피화를 착용하고, 연제(練祭)를 지낸 뒤에는 백포 단령의(白布團領衣)·백포과 사모(白布裹紗帽)·백포과 각대(白布裹角帶)로 3년을 마친다.
1. 녹사(錄事)와 서리(書吏)는 생포의(生布衣)·포과 평정 두건(布裹平頂頭巾) 【입(笠)도 같다.】 ·마대(麻帶)·백피화(白皮靴)를 착용하고, 연제(練祭)를 지낸 후에는 백의(白衣)·백평정 두건(白平頂頭巾)·백대(白帶)로 3년을 마친다.
1. 생원(生員)·진사(進士)·유학(幼學)·생도(生徒)는 백립(白笠)·생포의(生布衣)·마대(麻帶)·백피화·백피혜를 착용하고, 연제(練祭) 뒤에는 백의(白衣)·포대(布帶)로 3년을 마친다. 【학교(學校)에 들어갈 적에는 백두건(白頭巾)을 착용하고, 궁궐 안을 출입할 때에는 흑두건(黑頭巾)을 쓴다.】 1. 사직서(社稷署)·종묘서(宗廟署) 및 여러 능(陵)과 여러 전(殿)의 참봉(參奉) 등의 벼슬아치는 모두 상복(常服)을 입어 오사모(烏紗帽)와 흑각대(黑角帶)를 착용하며, 밖에 나갈 적에는 백관(百官)과 같다. 【익릉(翼陵)·명릉(明陵)·장녕전(長寧殿)·영소전(永昭殿)·경녕전(敬寧殿)·혜릉(惠陵)·영휘전(永徽殿)의 참봉 등의 벼슬아치는 입직(入直)할 때의 복색(服色)이 백관(百官)의 공복(公服)과 같다.】 1. 갑사(甲士)와 정병(正兵)은 백의(白衣)·백립(白笠)·마대(麻帶)·백피화(白皮靴)를 착용하고, 연제(練祭)를 지낸 후에는 포대(布帶)로 3년을 마친다. 1. 서인(庶人)과 승도(僧徒)는 백의(白衣)·백립(白笠)·백대(白帶)로 3년을 마치며, 서인의 여자는 백의(白衣)를 입다가 연제(練祭)를 지내고 나서 벗는다. 【담제(禫祭)를 지내기 이전에는 홍자(紅紫)의 장식을 사용하는 것을 금한다.】 1. 조례(皁隷)와 나장(羅將)은 백의(白衣)·백두건(白頭巾)·백대(白帶)로 3년을 마친다. 백관(白官)의 최질(衰絰)의 구비물은 병조(兵曹)·호조(戶曹)로 하여금 제급(製給)하게 한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73책 65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102면
【분류】왕실-의식(儀式)


[註 142] 수규(守閨) : 나인[內人]의 종6품 벼슬.
1. 사직서(社稷署)·종묘서(宗廟署) 및 여러 능(陵)과 여러 전(殿)의 참봉(參奉) 등의 벼슬아치는 모두 상복(常服)을 입어 오사모(烏紗帽)와 흑각대(黑角帶)를 착용하며, 밖에 나갈 적에는 백관(百官)과 같다. 【익릉(翼陵)·명릉(明陵)·장녕전(長寧殿)·영소전(永昭殿)·경녕전(敬寧殿)·혜릉(惠陵)·영휘전(永徽殿)의 참봉 등의 벼슬아치는 입직(入直)할 때의 복색(服色)이 백관(百官)의 공복(公服)과 같다.】 1. 갑사(甲士)와 정병(正兵)은 백의(白衣)·백립(白笠)·마대(麻帶)·백피화(白皮靴)를 착용하고, 연제(練祭)를 지낸 후에는 포대(布帶)로 3년을 마친다. 1. 서인(庶人)과 승도(僧徒)는 백의(白衣)·백립(白笠)·백대(白帶)로 3년을 마치며, 서인의 여자는 백의(白衣)를 입다가 연제(練祭)를 지내고 나서 벗는다. 【담제(禫祭)를 지내기 이전에는 홍자(紅紫)의 장식을 사용하는 것을 금한다.】 1. 조례(皁隷)와 나장(羅將)은 백의(白衣)·백두건(白頭巾)·백대(白帶)로 3년을 마친다. 백관(白官)의 최질(衰絰)의 구비물은 병조(兵曹)·호조(戶曹)로 하여금 제급(製給)하게 한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73책 65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102면
【분류】왕실-의식(儀式)


[註 142] 수규(守閨) : 나인[內人]의 종6품 벼슬.
1. 갑사(甲士)와 정병(正兵)은 백의(白衣)·백립(白笠)·마대(麻帶)·백피화(白皮靴)를 착용하고, 연제(練祭)를 지낸 후에는 포대(布帶)로 3년을 마친다.
1. 서인(庶人)과 승도(僧徒)는 백의(白衣)·백립(白笠)·백대(白帶)로 3년을 마치며, 서인의 여자는 백의(白衣)를 입다가 연제(練祭)를 지내고 나서 벗는다. 【담제(禫祭)를 지내기 이전에는 홍자(紅紫)의 장식을 사용하는 것을 금한다.】 1. 조례(皁隷)와 나장(羅將)은 백의(白衣)·백두건(白頭巾)·백대(白帶)로 3년을 마친다. 백관(白官)의 최질(衰絰)의 구비물은 병조(兵曹)·호조(戶曹)로 하여금 제급(製給)하게 한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73책 65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102면
【분류】왕실-의식(儀式)


[註 142] 수규(守閨) : 나인[內人]의 종6품 벼슬.
1. 조례(皁隷)와 나장(羅將)은 백의(白衣)·백두건(白頭巾)·백대(白帶)로 3년을 마친다.
백관(白官)의 최질(衰絰)의 구비물은 병조(兵曹)·호조(戶曹)로 하여금 제급(製給)하게 한다."
하였다.

 

미시(未時)에 습례(襲禮)를 행하였다.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大臣)과 종신(宗臣)·외척(外戚)·의빈(儀賓)·승지(承旨)·삼사(三司)·춘방(春坊)·사관(史官)이 모두 입시(入侍)하였고, 대신 이하의 관원이 차례대로 전(殿)에 올라갔다. 환시(䆠侍)가 중궁(中宮)의 언교(諺敎)를 원상(院相) 김창집(金昌集)에게 나와 전달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성상의 평상시의 거룩한 덕(德)을 대신(大臣)과 조신(朝紳)이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대로 오히려 다 알지 못함이 있다. 호다(浩多)한 공사(公事)를 수응(酬應)하실 때에는 심지어 침식(寢食)을 폐하기까지 하셨으며 밤낮으로 쉬지 않으셨다. 공경히 하늘을 섬기시어 비록 소소한 재앙과 변괴를 만나더라도 두려워하는 가운데 봄·여름·가을·겨울의 기후를 살피시고, 혹시라도 우설(雨雪)이 적기를 놓치거나 바람과 햇볕이 조화(調和)되지 않으면 잠시도 염려를 놓지 않으셨다. 만약 몸소 살피기 어려우면 반드시 날씨의 흐리고 맑음과 바람이 어느 방향으로부터 불어올 것인지를 내시(內侍)와 궁인(宮人)에게 물으셨다. 만일 농사에 해롭지 않고 시기에 어긋나지 않으면 반드시 기뻐하셨고, 혹시 비의 많고 적음이 농사에 적합하지 않으면 반드시 근심하시어 잠시라도 해이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비록 여러 해 동안 몸을 손상해 오는 가운데 계셨으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나라일과 민폐(民弊)에 대하여 미처 미치지 못할 듯이 하셨다. 지금 비록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지경을 당했지만, 성덕(聖德)의 만분의 일이나마 대강 서술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국사(國事)에 부지런히 수고하시다가 병마에 걸리기에 이르러 끝내 성수(聖壽)가 단축되고 말았다. 오늘날 상장(喪葬)의 제구(諸具)에 있어서 경(卿) 등이 극진함을 다해 예(禮)대로 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반드시 성상의 덕의(德意)를 본받고, 이어서 민생(民生)의 병폐(病弊)를 살피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근래에 해조(該曹)의 저축이 모두 바닥이 나지 않음이 없었으므로 성상께서 진념(軫念)하셨다. 무릇 빈전(殯殿)과 산릉(山陵)의 기명(器皿) 등의 물품과 거기 넣는 은자(銀子)는 순은(純銀)으로 정련(精鍊)해서 계자(啓字)를 찍어 봉(封)해 두었다. 앞으로 빈전과 산릉에 넣는 은그릇은 대내(大內)에서 마땅히 봉해 둔 은자(銀子)를 내려줄 것이니, 다만 양식대로 만들어 올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빈전에서 사용하는 금잔(金盞) 3구(具)와 병(甁) 1좌(坐)는 3, 4년 전에 이미 만들어 두었으니, 지금 이것을 사용하고자 한다. 성상께서 말씀하시기를, ‘근래에 여러 도(道)에 해마다 흉년이 들었으니 이번에 통신사(通信使)가 가지고 온 은자는 호조(戶曹)에 내어주고, 그 나머지는 강계(江界)와 내수사(內需司)의 노비 공포(奴婢貢布) 대신 받는 은자와 합해서 함께 계자를 찍은 뒤 봉해 두어 장차 앞으로의 진휼(賑恤)할 때의 수요(需要)에 대비하라.’ 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만약 해마다 풍년이 들어 이것을 번거롭게 사용하지 않게 된다면 다행이겠다.’ 하셨다. 오늘날 나라일이 불행하고 죄역(罪逆)이 깊고 무거워 갑자기 이런 변고를 당하였는데, 이런 등의 일을 어찌 대신(大臣)들로 하여금 알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성덕(聖德)을 우러러 믿고 삼가 무강(無彊)의 수(壽)를 기원하며 윤월(閏月)의 의대(衣襨)143)  를 일찍이 이미 만들어 두었고, 평상시에 입으시는 의대도 지금 또 대령하고 있다. 그러니 해조(該曹)에서는 비록 의대 등속일지라도 굳이 일일이 관례와 같이 준비할 것이 없으며, 다만 내간(內間)에서 써서 보이기를 기다려 비로소 준비해 올리도록 하여 성상께서 평소 절약하신 뜻을 따라서 성덕(聖德)을 훼손하는 일이 없도록 한다면 다행이겠다."
하니, 김창집(金昌集)이 대답하기를,
"평소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들을 구제하신 것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으니, 무릇 군하(群下)로서 누군들 성덕(聖德)을 흠앙(欽仰)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여러 해에 걸친 근로(勤勞)로 인해 성수(聖壽)를 줄게 만들어 이러한 하늘이 무너지는 애통함을 만났으니, 슬프고 망극(罔極)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하교(下敎)를 받드니 더욱 가슴이 찢어지는 듯합니다. 모든 일을 거행함에 있어서 감히 정리와 예절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목욕(沐浴) 때 연잉군(延礽君) 및 호조 참의(戶曹參議) 김운택(金雲澤)  【곧 인경 왕후(仁敬王后)의 조카이다.】 이 집사(執事)하였고, 염습(殮襲)할 때는 밀풍군(密豊君) 이탄(李坦)과 김운택·김도협(金道浹)이 집사하였고, 중궁(中宮)이 친히 반함(飯含)144)  을 행하려 하자 여러 대신(大臣)이 일제히 같은 목소리로 불가하다고 하였으므로, 이에 그만두었다. 연잉군으로 하여금 김창집에게 전교하게 하기를,
"세자가 반함을 거행할 때 원상(院相)이 곁에 있으면서 세자를 도와 예를 거행하라."
하였다.

 

6월 9일 갑진

중궁(中宮)이 언서(諺書)로써 원상(院相) 김창집(金昌集)에게 하교(下敎)하기를,
"진휼(賑恤)할 때 드는 은자(銀子)를 봉해 둔 이유를 어제 이미 하교하였다. 근래 해조(該曹)의 재정이 바닥이 난 가운데 지금 국휼(國恤) 초상(初喪) 때의 모든 물품과 산릉(山陵)의 공역(工役)을 모두 다 감당하게 되니, 모든 일에 반드시 부족할 염려가 많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은자를 내보내니, 해조에 분부하여 이것을 보태 쓴다면 또한 민폐(民弊)를 더는 일단(一端)으로서 실로 진휼에 보태 쓴 것이나 다름이 없을 것이며, 또한 성상의 뜻에도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3천 7백 53냥을 내보내니, 이 은자를 가지고 국장(國葬)에 보태 쓰는 것이 옳을 것이다. 성상(聖上)께서는 나라 일을 부지런히 노력하신 외에 서사(書史)를 매우 좋아하시었다. 그러므로 베껴 쓰거나 제술하신 것이 아주 많았다. 마땅히 조정에 내어 보여야 할 것들은 일찍이 이미 기록하여 갈무리해 두셨다. 이러한 천지 망극(罔極)을 당한 가운데 이것은 동궁(東宮)에게 보내어 내보이는 자료로 삼는다."
하니, 김창집이 구전(口傳)으로 대답하기를,
"다시 하교하심을 받으니, 하정(下情)이 더욱 찢어지는 듯 아픔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은자는 삼가 마땅히 하교에 따라 보태 쓰겠으며, 어제(御製)에 대해서는 내려 보인 뒤에 마땅히 곧바로 품처(稟處)하겠습니다."
하였다.

 

원상 김창집이 구전(口傳)으로 전달하기를,
"국휼(國恤) 때 여러 대신(大臣)들이 같이 원상(院相)이 된 전례가 있으니, 청컨대 이번에도 전례에 의거하여 우상(右相)과 함께 모든 일을 의논하게 하소서."
하니, 세자가 옳게 여겼다.

 

원상 김창집이 진달하기를,
"명정(銘旌)의 의주(儀註)를 해조(該曹)에서 한결같이 《오례의(五禮儀)》에 실려 있는 대로 ‘대행 대왕 재궁(大行大王梓宮)’이라 써 넣는 일로 마련(磨鍊)하였습니다. 대행 대왕께서는 이미 존호(尊號)가 있으시니 이번 명정을 쓸 때에 대행(大行)의 위에 마땅히 존호 8자(八字)를 더 써야 할 것입니다."
하니, 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원상 김창집이 진달하기를,
"방금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 등이 와서 말하기를, ‘영(令)을 받들어 대행왕(大行王)의 어상(御床)을 봉심(奉審)했는데, 옥체(玉體)에 비록 대단한 부기(浮氣)는 없지만 날의 더움이 이와 같다면 뜻밖의 우려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예전에도 더운 달에 국휼을 당하였을 때는 대렴(大斂)145)  ·소렴(小斂)146)  을 앞당겨 정한 일이 또한 많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중궁전(中宮殿)에 품달(稟達)했더니, 「나의 의사도 또한 이와 같다. 여러 대신(大臣)들에게 나가서 말하여 조속히 의논해 결정하도록 하라」고 하교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즉시 마땅히 이에 의거하여 거행하여야 하지만 사체(事體)가 지극히 중대하기 때문에 서로 의논해 보았더니 총호사(總護使)와 여러 대신들의 의향도 모두 이와 같았습니다. 감히 이에 앙품(仰稟)합니다."
하였다. 계사(啓辭)가 막 들어가 비답이 채 내려오지 않았는데, 내시(內侍)가 예조(禮曹)의 ‘소렴 의주(小斂儀註)’를 가지고 세자(世子)의 명으로 와서 말하기를,
"여러 집사(執事)가 어상(御床)을 봉심(奉審)했는데, 비록 대단한 부기(浮氣)는 없지만, 뜻밖의 우려가 없지 않으므로 소렴(小斂)을 빨리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방금 택일 단자(擇日單子)를 보니 내일로 결정하였다. 이것이 예(禮)로서는 비록 당연한 것이지만 권도(權道)로 오늘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이제 막 이러한 의사로써 자전(慈殿)께 품의했더니, ‘나의 의향도 역시 이와 같다.’고 하교하셨다."
하니, 김창집이 대답하기를,
"삼가 마땅히 이에 의거하여 거행하겠습니다."
하였다.

 

예방 승지(禮房承旨)가 진달하기를,
"염습(殮襲)을 한 뒤에 명정(銘旌)을 세우는 것은 응당 행해야 되는 예인데, 명정 서사관(銘旌書寫官)인 민진원(閔鎭遠)이 아직까지 써서 올리지 않아서 지연되는 실수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추고(推考)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빈전 도감(殯殿都監)에서 진달하기를,
"찬궁(攢宮)147)  을 자정전(資政殿)에 배설(排設)하는 일은 이미 정탈(定奪)하였습니다. 그런데 본전(本殿)은 처소(處所)가 협착하여 각 차비(差備)가 입접(入接)할 곳이 없습니다. 청컨대 예문관(藝文館)의 향실(香室)과 금군청(禁軍廳)에 추이(推移)하여 입접하게 하소서."
하니, 세자가 옳게 여겼다.

 

원상(院相) 김창집(金昌集)이 구전(口傳)으로 진달하기를,
"신 등이 승정원(承政院)·옥당(玉堂)·양사(兩司)와 함께 내재궁(內梓宮)을 봉심(奉審)했더니 다들 ‘결함이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알았다."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진달하기를,
"종묘(宗廟)와 각릉(各陵)·전(殿)은 졸곡(卒哭) 전에는 비록 제향(祭享)을 폐하지만, 삭망(朔望)의 분향(焚香)은 정폐(停廢)할 수 없습니다. 마땅히 종전대로 거행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또 진달하기를,
"사복시(司僕寺)에서 첩(牒)148)  을 올려 말하기를, ‘국휼(國恤) 때 각전(各殿)의 연(輦)·여(輿)·교자(轎子)·장보(仗寶)·마안(馬鞍) 등의 제구(諸具)를 백면포(白綿布)로 싸는 것은 이미 전례가 있습니다.’ 하였으니, 또한 여기에 의거하여 거행해야 합니다."
하니, 세자가 모두 옳게 여겼다.

 

예방 승지(禮房承旨)가 진달하기를,
"삼가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명정(銘旌)을 살펴보건대, 체양(體樣)149)  이 지나치게 깁니다. 《오례의(五禮儀)》를 가져다 상고해 보면, 명정의 길이는 9척(九尺)인데 예기(禮器)를 제작할 때의 자[尺]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올린 명정은 포백척(布帛尺)을 사용한 소치인 듯하여 예식(禮式)에 어긋남이 있으니, 청컨대 도감(都監)의 해당 당상관(堂上官)과 낭청(郞廳)을 추고(推考)하여 그로 하여금 개비(改備)해서 들여오게 하소서."
하니, 세자가 옳게 여겼다.

 

오시(午時)·미시(未時) 사이의 곤시(坤時)에 소렴례(小斂禮)를 거행하였다. 애초에는 신시(申時)로 정하였다가 내전(內殿)의 하교(下敎)로 인하여 앞당겨 정하였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관명(李觀命)·예방 승지(禮房承旨) 한세량(韓世良)이 먼저 들어가고,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大臣)과 종신(宗臣)·외척(外戚)·의빈(儀賓)·승지(承旨)·사관(史官)·삼사(三司)·춘방(春坊)이 모두 입시(入侍)하였다. 원상(院相) 김창집(金昌集)이, ‘먼저 어상(御床)을 봉심(奉審)하시라’는 뜻으로 세자에게 품하니, 세자가 남쪽의 협실(夾室)150)  로부터 부축을 받아 나오고, 대신과 승지·사관(史官)이 따랐다. 세자가 부축을 받아 어상(御床)의 북쪽에 서서 봉심을 마친 다음 세자는 남쪽의 협실로 돌아오고 여러 신하들도 따라 나왔다. 이때 세자와 연잉군(延礽君)이 이미 괄발(括髮)151)  ·포좌(布髽)152)  를 하고 수질(首絰)을 쓰고 대마(帶麻)를 하였는데, 이건명(李健命)이 한세량(韓世良)으로 하여금 《오례의》의 소렴조(小斂條) 아래의 주(註)를 가지고 세자에게 궤진(跪進)하게 하기를,
"괄발·포좌하고 수질을 쓰는 것은 소렴 뒤에 하는 것인데, 지금 앞당겨서 행하셨습니다. 예문(禮文)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세자가 말하기를,
"알았다."
하였다. 이건명이 이어서 정재륜(鄭載崙)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어제 염습(殮襲)할 때에는 갑작스러워 산란(散亂)하고 차례를 잃음을 면하지 못하였지만, 오늘은 마땅히 반열(班列)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였다. 김창집이 내시(內侍)로 하여금 보쇄(黼殺)153)  를 가지고 들어가 세자에게 품하게 하기를,
"이것은 예(禮)에 마땅히 사용해야 하는 것으로 염(斂)할 때에 매우 편리합니다. 등록(謄錄)으로 말씀드린다면 효종 대왕(孝宗大王)의 국휼(國恤) 때에 사용했고, 장렬 왕후(莊烈王后)의 국휼 때는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또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세자가 펼쳐서 본 뒤 자전(慈殿)께 품하도록 하였다. 내전(內殿)에서 하교(下敎)하기를,
"기해년154)  에는 사용하였으나, 무진년155)  에는 성상의 의사로 인해 사용하지 않았으니, 이번에도 또한 무진년에 의거하여 쓰지 않는 것이 옳다."
하였다. 드디어 보쇄를 사용하지 않았다. 소렴의 여러 도구를 정돈하여 기다리니 정시(正時)가 되었을 때 연잉군(延礽君)과 김주신(金柱臣)이 안으로 들어갔고 한참 후에 함께 나왔다. 김주신이 김창집에게 말하기를,
"내전(內殿)께서 바야흐로 북쪽의 협실(夾室)에 계시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옮겨가 계신 연후에 대신들이 들어가서 염(斂)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뜻으로 힘써 권하여 방금 다른 곳으로 옮겨가려 하셨는데, 다만 내전의 기후(氣候)가 몹시 고르지 않으시어, ‘조금 진정되기를 기다려 한 번 나와 천안(天顔)을 우러러 뵌 뒤에 비로소 염을 하라.’고 하교하셨습니다. 소렴을 정한 시각을 애초 정했던 신시(申時)로 다시 물려서 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대신들이 모두 말하기를,
"신시는 바로 당초 정했던 것이니, 물려서 행하는 것이 무엇이 해롭겠는가?"
하였다. 연잉군이 다시 나와 김주신에게 말하기를,
"내전의 기후를 수습할 수 없으니,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곧바로 김주신을 이끌고 함께 들어갔다. 잠시 후에 연잉군이 혼자 나와 김창집에게 말하기를,
"내전의 불편하신 기후가 아직도 덜하질 않다. 그러므로 부원군(府院君)이 바야흐로 머물러 기다리고 있는데, 염할 때 만약 곡읍(哭泣)한다면 반드시 더 손상하게 될 것이다. 어찌해야 하겠는가?"
하니, 김창집이 말하기를,
"이때는 결코 곡벽(哭擗)156)  하기가 어려우니, 반드시 모름지기 권하여 그치게 해야 합니다."
하였다. 연잉군이 말하기를,
"내간(內間)의 곡벽을 한결같이 모조리 정지시키는 것이 옳겠는가?"
하니, 김창집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김주신이 다시 나와서 말하기를,
"내전의 환후가 이와 같은데 습상(襲床)을 봉심(奉審)한다면 뜻밖의 염려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예(禮)로써 말한다면 내일이 바로 소렴하는 날이니 물려서 거행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이건명이 말하기를,
"소렴의 도구를 이미 정돈해 두었으니 물려서 거행하기는 어렵겠습니다. 가령 물려서 거행한다 하더라도 내전의 환후가 내일 또 이와 같지 않을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였다. 연잉군이 나와서 대신들에게 말하기를,
"만약 밖에서 거애(擧哀)하면 내간에서도 반드시 곡읍(哭泣)할 것이다."
하니, 여러 대신들이 말하기를,
"밖에서 비록 거애하더라도 내간에서는 엄금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였다. 정재륜이 말하기를,
"밖에서 거애할 때 대신(大臣)과 집사(執事) 외에 내시배(內侍輩)들이 곡읍하는 것을 금지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연잉군(延礽君)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나인배[內人輩]도 또한 외간(外間)을 따라 거애하지 말도록 할 것인가?"
하니, 모두 말하기를,
"옳습니다."
하였다. 장차 소렴(小斂)을 거행하려고 김창집이 내시로 하여금 세자에게 고하게 하니, 세자가 남쪽의 협실(夾室)로부터 부축을 받고 나와 염상(斂床)의 서쪽에 섰다. 장차 부복(俯伏)하여 곡을 하려고 하는데, 이이명이 나와 말하기를,
"내전(內殿)의 기후가 불편하시니 염(斂)할 때에 곡읍(哭泣)을 마땅히 엄금하여야 합니다. 저하(邸下)께서는 비록 곡을 하시더라도 내시들은 조곡(助哭)을 못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세자가 말하기를,
"알았다."
하고, 곧 부축을 받고 일어나 어상(御床)의 북쪽에 섰다. 이이명이 다시 나와서 말하기를,
"방(房)이 매우 협착(狹窄)하여 장차 소렴을 할 즈음에 구차스러운 점이 많습니다. 저하께서는 다시 남쪽의 협실(夾室)로 나가시어 그 사잇문을 열고 몸소 보심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세자가 말하기를,
"알았다."
하고, 부축을 받아 남쪽 협실로 갔다. 내시가 사잇문을 여니 염상이 바로 사잇문의 앞에 있었다. 소렴할 때에 김운택(金雲澤)·김도협(金道浹)·임창군(臨昌君) 이혼(李焜)·정재륜·박필성(朴弼成)·밀풍군(密豊君) 이탄(李坦) 등이 집사(執事)하였다. 염을 반쯤 했을 무렵 연잉군이 안으로부터 나와 대신들에게 말하기를,
"내전께서 하교하기를, ‘일찍이 전교(傳敎)를 들으니, 「습염(襲殮) 때는 마땅히 거애한다.」 하셨다. 지금 바야흐로 염을 하는데 곡을 하지 않으니, 나의 질병 때문에 그런 듯하므로 몹시 불안하다. 예전부터 마음이 편하지 않으면 번번이 병이 났는데 지금 마음이 몹시 불안하여 손가락이 점차 차가와지니, 앞으로 견디기가 어려울 듯하다. 바야흐로 거애하고자 한다.’ 하셨다."
하였는데, 이이명이 말하기를,
"비록 일이 없어 거애할 때라도 염할 때가 되면 으레 곡을 정지하는 것이니, 대개 장차 염을 할 적에는 반드시 조심하고 신중히 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하고, 조태채(趙泰采)는 말하기를,
"애당초 옥체(玉體)를 옮겨 모실 때에는 거애할 수가 있었으나 이미 곡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바로 곡을 그칠 때입니다."
하자, 연잉군이 말하기를,
"이것을 아뢸 것인가?"
하니, 모두가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연잉군이 또 안으로부터 손에 조그마한 봉지(封紙)를 가지고 나왔는데 봉한 겉면은 공백(空白)으로 아무 것도 쓰여진 것이 없었고, 길이는 서너 촌(寸)쯤 되었다.
대신(大臣)들에게 말하기를,
"내전께서 이 봉지를 소렴(小斂)하는 가운데 넣고자 하신다."
하니, 대신들이 말하기를,
"마땅히 동궁(東宮)께 품하여 처리해야 됩니다."
하였다. 연잉군이 들어가서 세자에게 품하니, 세자가 말하기를,
"넣어도 괜찮다."
하였다. 조금 후에 연잉군이 안으로부터 나와서 말하기를,
"내전께서 다시 ‘굳이 봉지를 넣을 것이 없다.’고 하교하셨다."
하고, 곧 그 봉지를 가지고 도로 들어갔다. 김창집이 남쪽 협실로 나아가 ‘봉지를 넣지 않는다’는 의사를 꿇어 엎드려 진달하니, 세자가 말하기를,
"알았다."
하였다. 이때 민진원(閔鎭遠)이 명정 서사관(銘旌書寫官)으로서 밖에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보쇄(黼殺)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말하기를,
"신사년157) 인현 왕후(仁顯王后)의 국휼 때는 보쇄를 성상의 하교에 따라 사용하였습니다."
하였다. 연잉군이 다시 나와서 내전(內殿)의 하교를 전하기를,
"대행왕(大行王)의 평상시의 의대(衣襨)는 대단(大段)158)   등속은 일찍이 입지 않으셨으며, 동궁(東宮)의 의복에 있어서도 또한 여기에 따라 하도록 하셨다. 이번에 습렴(襲殮)에 사용되는 것들은 윤월(閏月)에 준비했던 것들로 의대는 모두가 대단이니, 평상시의 숭상하시던 바에 어긋남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종전부터 국휼 때 사용하는 습렴의 여러 도구는 으레 대단을 사용하였으니, 비록 일찍이 이러한 뜻을 성상(聖上)에게 품고(稟告)하지는 않았지만, 성상께서도 반드시 헤아려 아실 것이다. 조정에서 이러한 것을 알지 않아서는 안될 것이기에 말하는 것이다."
하였다. 소렴을 마치자 세자가 남쪽 협실에서 나와 염상의 곁에 서서 동쪽을 향해 부복(俯伏)하고 곡하였으며, 여러 신하들도 세자의 뒤를 따라 부복하여 곡하였는데, 산란(散亂)하여 예모(禮貌)가 없었다. 곡을 마치자 민진원(閔鎭遠)이 내시(內侍)를 이끌고 나와 소렴의 견양(見樣)에 명정(銘旌)을 세웠다. 명정은 마땅히 염습한 뒤에 세워야 하는데, 염습할 때는 경황이 없어 못하고 이제야 비로소 세운 것이다. 여러 신하들이 물러 나갔다.

 

예조(禮曹)에서 사위(嗣位)의 절목(節目)을 갖추어 올리니, 세자가 하령(下令)하기를,
"이 단자(單子)를 보니, 오장(五臟)이 타는 듯하다. 망극(罔極)한 나머지 정신을 진정할 수가 없으니, 이 단자를 도로 내어 주라."
하였다. 이에 원상(院相) 김창집(金昌集)·이건명(李健命) 등이 여섯 승지를 거느리고 진달하기를,
"신 등이 방금 삼가 하령을 받드니, 해조(該曹)에 단자를 도로 내리신 조처까지 있었습니다. 신 등은 머리를 맞대고 경색(哽塞)159)  하며 더욱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예조에서 올린 절목은 실로 고금의 제왕(帝王)이 차례대로 계승하는 떳떳한 절차이며, 아조(我朝)의 역대 열성(列聖)께서 이미 거행했던 전례(典禮)입니다. 비록 효성스런 생각이 망극하신 가운데 차마 하지 못할 바가 있어 이처럼 도로 주라는 하령이 있었지만, 한결같이 애운(哀隕)의 정(情)에만 내맡겨 물려주신 중대함을 생각하지 않을 수는 결단코 없는 일입니다. 내려 보내신 단자를 곧바로 다시 들여보낸다는 뜻을 감히 진달합니다."
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애통하고 망극한 가운데 연달아 이러한 말을 들으니 심장이 찢어지는 듯하여 실로 어떻게 이해시켜야 할지 모르겠다. 절목을 도로 내어주라."
하였다.

 

6월 10일 을사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이명(李頤命)·경은 부원군(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이 종척(宗戚)과 의빈(儀賓) 및 도승지(都承旨)·예방 승지(禮房承旨)를 거느리고 대행왕(大行王)의 어상(御床)을 봉심(奉審)하였다. 세자가 부축을 받고 어상의 서쪽에 나아갔다. 여러 신하들이 봉심을 마친 다음 물러나왔다.

 

원상 김창집·이건명이 여섯 승지를 거느리고 다시 사위(嗣位)를 거듭 청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사위의 거조를 성복(成服)한 날에 거행하는 것을 자식된 정리로 어찌 차마 할 수 있겠는가? 예(禮)는 인정(人情)에 말미암는 것이니, 결단코 따를 수 없다.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다시 의정(議定)하게 하라."
하였다.

 

대사헌(大司憲) 조도빈(趙道彬)·대사간(大司諫) 이의현(李宜顯)이 양사(兩司)의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합사(合辭)하여 진달하기를,
"신 등이 삼가 승정원에 내리신 하령(下令)을 보고, 진실로 저하의 순수하고 지극하신 효성으로 이처럼 경황이 없고 곡벽(哭擗)하는 가운데 왕위에 오르는 예를 거행하는 것이 차마 하지 못하는 바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차례대로 계승하는 절차는 지극히 엄정하고 또 중대한 것으로서, 이것은 바로 아조(我朝) 열성(列聖)께서 일찍이 통행(通行)했던 전례(典禮)입니다. 참으로 대위(大位)160)  는 잠시도 비워둘 수가 없고 종사(宗社)는 주재(主宰)하는 사람이 없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찌 자기 생각나는 대로 바로 행하고 부탁(付托)의 중대함을 생각하지 아니하여 온 나라 신민(臣民)들의 크게 우러러보는 기대를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제왕(帝王)의 효도를 깊이 생각하시어 유사(有司)의 청을 빨리 따르소서."
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이미 원상(院相)에게 유시(諭示)하였으니, 다시 번거롭게 말하지 말라."
하였다. 이날 세 번 진달하였으나,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홍문관(弘文館)에서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인군(人君)의 효도는 오로지 사업을 계승하는 데 있고, 대보(大寶)의 지위는 잠시도 비워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생각건대 아조(我朝)의 열성(列聖)께서 성주(成周)의 고명(顧命)161)                  의 전례(典禮)를 따라 모두가 지극한 애통을 억지로 억누르고 여러 사람의 심정(心情)을 굽어 따랐던 것은 진실로 제왕(帝王)의 효도는 필부(匹夫)와는 달라 한결같이 유모(孺慕)162)                  의 정(情)에 맡겨 잠시라도 대통(大統)을 잇는 예(禮)를 비워둘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저하께서는 조종(祖宗)의 부탁을 우러러 생각하시고, 신민(臣民)의 정리를 굽어 살피시어 빨리 윤허를 내리시고 혹시라도 어렵게 여기지 마소서."
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고(孤)의 가슴 아프고 망극한 심정을 이미 원상에게 유시하였다."
하였다. 이날 세 번 차자를 올렸으나,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과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 등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진달하기를,
"성복(成服)한 날 왕위를 계승하는 것은 바로 백왕(百王)의 변경할 수 없는 제도이고, 열성(列聖)께서 이미 거행한 전례(典禮)입니다. 그런데 해조(該曹)의 절목(節目)을 누차에 걸쳐 들여 보냈으나 도로 내리시고 여러 신하들의 진청(陳請)을 한결같이 굳이 거절하시니, 신 등은 더욱 걱정과 당황, 민망과 절박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함께 대정(大庭)에 나와 같은 소리로 호소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생각건대 우리 저하께서 다만 애통하고 절박한 정리로 차마 하지 못함이 있으시어, ‘다시 의정(議定)하라.’는 하교까지 하셨지만, 이것은 바로 응당 행해야 할 상전(常典)으로 다시 의논할 여지가 없으며, 또한 시간을 지체하고 날짜를 끌어 대위(大位)를 잠시라도 비워둘 수는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저하께서는 위로 조종(祖宗)의 부탁이 중대함을 생각하시고 아래로 신민(臣民)의 크게 우러러 바람이 간절함을 체념하시어 애써 지극한 정리를 억누르시고 빨리 유음(兪音)을 내리소서."
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여러 해 동안 시탕(侍湯)하던 가운데 반호(攀號)163)  의 망극(罔極)한 애통함을 당하니, 오장(五臟)이 무너지는 듯하다. 다만 여러 경(卿)들은 나의 지극한 심정을 이해하여 빨리 정지하고 번거롭게 하지 말기를 바란다."
하였다. 이날 두 번 진달하였으나,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도승지 윤헌주(尹憲柱)·좌승지 조명봉(趙鳴鳳)·우승지 한세량(韓世良)·좌부승지 한중희(韓重熙)·우부승지 유중무(柳重茂)·동부승지 조관빈(趙觀彬) 등이 진달하기를,
"성복한 날에 천조(踐阼)164)  하는 것은 실로 아조(我朝)의 열성(列聖)과 우리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 이미 감정을 억누르고 거행하셨던 것입니다. 지금 어찌 어버이를 대신하는 예절을 차마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 응당 행해야 할 절차를 지연시킬 수 있겠습니까? 비록 하교가 계셨지만 다시 의논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고 또 대신(大臣)들이 바야흐로 백료(百僚)를 이끌고 정청(庭請)하고 있고, 삼사(三司)에서도 또한 일제히 호소하고 극력 간쟁(諫諍)하는데, 절목(節目)의 단자(單子)를 본원(本院)에 보류해 두니, 더욱 미안한 바가 있습니다. 이에 감히 도로 들여보낸다는 뜻을 감히 진달합니다."
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이 절목(節目)을 도로 내어주라."
하였다.

 

빈전 도감(殯殿都監)에서 진달하기를,
"어제 승정원(承政院)에서 진달한 말로 인해 명정(銘旌)을 개비(改備)해 써서 들여오라는 일을 하령(下令)하셨습니다. 명정을 방금 예식(禮式)에 의거하여 고쳐 써서 들여왔으니, 전에 들여온 명정은 청컨대 도로 내려 불에 태워 버리도록 하소서."
하니, 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6월 11일 병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이명(李頤命)·경은 부원군(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 등이 종척(宗戚)과 도승지(都承旨)·예방 승지(禮房承旨)를 거느리고 대행왕(大行王)의 어상(御床)을 봉심(奉審)하였다. 세자가 부축을 받아 어상의 북쪽에 나아갔으며 여러 신하들이 봉심을 마친 뒤 물러나왔다.

 

임창군(臨昌君) 이혼(李焜)이 종척(宗戚)과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진달하기를,
"사위(嗣位)의 예(禮)가 반드시 성복한 날 있는 것은 바로 고금의 공통된 법이며 열조(列祖)께서 행하셨던 바입니다. 그런데 해조(該曹)의 절목을 누차 들여보냈으나 도로 내리셨고, 심지어 다시 의정(議定)하라는 하령까지 있었으니, 신 등은 여기에 실로 몹시 근심스럽고 답답한 마음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우러러 생각건대 저하께서 울부짖으며 사모하시는 가운데 비록 천위(踐位)의 예절을 거행하는 일을 차마 하지 못하시겠다 하더라도, 제왕의 효도는 오로지 이것이 중대한 것이고 천위(天位)의 중요함은 잠시라도 비워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결같이 굳게 거절하신다면 어찌 신(神)·인(人)의 지극한 기대에 어긋남이 있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망극(罔極)한 정(情)을 애써 억누르시고 대정(大庭)에 가득한 여러 사람의 소청을 굽어 따르소서."
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한없이 망극한 가운데 차마 감정을 억누를 수 없다는 뜻을 이미 정청(庭請)의 비답(批答)에 유시(諭示)하였다."
하였다. 재차 진달하였으나, 역시 허락하지 않았다.

 

홍문관(弘文館)에서 차자(箚子)를 올려 사위(嗣位)를 거듭 청하였다. 두 번에 이르렀으나 세자가 허락하지 않았다.

 

양사(兩司)의 여러 신하들이 사위(嗣位)를 거듭 청하였다. 두 번에 이르렀으나, 세자가 허락하지 않았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예조(禮曹)의 사위 절목(嗣位節目)을 도로 들여보내고 재차 진달하여 윤허를 내려주기를 청했으나, 세자가 허락하지 않았다.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과 우의정(右議政) 이건명(李健命) 등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대정(大庭)에서 호소하여 사위(嗣位)를 거듭 청하였으나, 세자가 허락하지 않았다. 김창집 등이 재차 진달하고, 다시 승전색(承傳色)을 불러 구전(口傳)으로, 자전(慈殿)에게 아뢰기를,
"성복한 날에 사위하는 것은 바로 역대 제왕들이 공통적으로 거행해온 전례이며, 아조(我朝)의 열성(列聖)께서도 또한 차례대로 계승하는 중대함을 생각하여 모두가 그렇게 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왕세자께서는 다만 기가 꺾이고 살을 베는 듯한 정리 때문에 아직까지 억지로 따르시려는 뜻이 없으시니, 신 등은 근심스럽고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바야흐로 합사(合辭)하여 거듭 청하니, 내전(內殿)에서도 또한 권유(勸諭)하시기를 간절히 엎드려 바랍니다."
하니, 자전(慈殿)이 답하기를,
"오늘날 이렇게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을 당하고, 또 계사(啓辭)를 보니 더욱 망극하다. 세자의 정경(情境)은 비록 이와 같겠으나 열성께서 계승하신 기업을 어길 수는 없다. 또 종사(宗社)의 부탁이 지극히 중대하니, 이 망극한 정리를 참기를 바야흐로 권유하고 있다."
하였다. 이에 세자가 정청(庭請)의 진달에 답하기를,
"고(孤)의 애통한 정리는 억누르기 어렵지만 위로 자전(慈殿)의 하교를 받들고 경(卿) 등의 요청이 이에 이르렀으니 마지못해 억지로 따르겠다."
하였다.

 

비국(備局)에서 말하기를,
"전에는 국휼(國恤) 때 하루 이틀 안에 선전관(宣傳官)을 떠나 보내어 봉황성(鳳凰城)으로 달려가, ‘대행 대왕(大行大王)이 승하(昇遐)하셨다.’는 부음(訃音)과, ‘사신(使臣) 아무 관원(官員)을 차출(差出)한다.’는 뜻으로 보고하여 아문(衙門)에 통지하게 하였습니다. 청컨대 해조(該曹)로 하여금 선전관을 택정(擇定)해서 전례대로 가함(假銜)에 의해 말을 주어 발송(發送)하게 하소서."
하니, 세자가 옳게 여겼다. 이에 선전관 안윤문(安允文)을 보내 공조 좌랑(工曹佐郞)의 직함을 빌어 가게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진달하기를,
"갑인년165)  의 등록(謄錄)을 가져다가 상고해 보니, 저군(儲君)166)  이 사위(嗣位)한다는 뜻을 길일(吉日)을 가려 사직(社稷)·영녕전(永寧殿)·종묘(宗廟)에 고(告)하였습니다. 이번에도 또한 전례에 따라 장차 이번 6월 14일에 고례(告禮)를 거행하려 하는데, 영소전(永昭殿)과 경녕전(敬寧殿)에도 또한 마땅히 똑같이 거행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세자가 옳게 여겼다.

 

태학생(太學生) 윤지술(尹志述) 등이 상서(上書)하기를,
"삼가 생각건대 하늘이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여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 갑자기 군신(群臣)들을 버리셨으니, 울부짖으며 슬퍼함은 온 땅의 백성들이 모두 똑같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대행 대왕께서는 성학(聖學)이 고명(高明)하시어 백왕(百王)보다 훨씬 뛰어나셨고 다시 방상(方喪)의 예를 행하여 천고(千古)의 잘못을 씻으려 생각하셨습니다. 그런데 창황하고 급박한 즈음에 옛 제도를 다 적용하지 못할까 염려하시어 미리 대신(大臣)과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널리 의논해서 올리게 하셨고, 이어서 또 하교(下敎)하기를, ‘이 일은 본디 주자(朱子)의 정론(定論)이 있으므로 원래 의심할 만한 것이 없다. 과단성 있게 행하는 것이 옳다.’ 하셨습니다. 아아! 오늘날 상하(上下)가 스스로 다할 수 있는 것이 어찌 이것을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다만 해조(該曹)에서 진달해 달하(達下)한 복제(服制)의 절목(節目)을 삼가 보건대, 그 소소한 품절(品節)은 우선 버려두고 논하지 않더라도 그 대강(大綱)이 주자의 본지(本旨)와 어긋나는 것이 많습니다. 신 등이 삼가 주자의 복의(服議)를 살펴보니, 거기에 이르기를, ‘참최(斬衰) 3년은 아버지와 임금을 위해서 입으며, 그 복(服)은 포관(布冠)·직령(直領)·대수(大袖)·포삼(布衫)에 최벽령(衰辟領)·부판(負版)·엄임(掩袵)·친삼(襯衫)·포군(布裙)·마요질(麻腰絰)·마수질(麻首絰)·마대(麻帶)·관구(菅屨)·죽장(竹杖)을 더하는데, 천자(天子)로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귀(貴)·천(賤) 때문에 더하거나 덜하는 일이 없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임금과 신하가 복을 똑같이 입되 약간의 구별을 두어서 상하(上下)를 분별한다.’고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지금 신하와 백성들의 복은 앞에 진술한 바와 같으니, 이미 정설(定說)이 있는 것이다. 유독 가난한 서인(庶人)과 군리(軍吏)는 완전히 갖출 것을 요구할 수 없으며, 비록 백지(白紙)로 관(冠)을 만들더라도 홍자(紅紫)의 화려한 장식만 제거하면 또한 괜찮은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예(禮)에 「임금의 상(喪)에는 여러 달관(達官)의 장(長)은 지팡이를 짚는다.」 하였는데, 달관이란 전달(專達)의 관원을 말한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일찍이 시종(侍從) 이상을 역임하여 단독으로 주사(奏事)한 사람이 바로 이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지팡이를 짚지 않는 제도는 요좌(僚佐) 이하의 관원에게 시행하면 된다.’ 하였습니다.
선정신(先正臣)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은 일찍이 인조 대왕(仁祖大王)의 대상(大喪) 때 이 예(禮)를 시행할 것을 청하였는데, 이미 주자의 의논에 의거하고 다시 《의례(儀禮)》·《경전통해(經傳通解)》 등의 책을 참고해서 하나의 책자를 저술하여 차자(箚子)에 붙여 올렸습니다. 그 내용에 이르기를, ‘《오례의(五禮儀)》의 복제(服制)는 자못 차례가 없습니다. 대개 임금과 아버지는 일체(一體)인데 어떻게 아버지에게는 순전히 상복(喪服)을 입고, 임금에게는 조복(朝服)의 제도를 참용(參用)하여 반상 낙하(半上落下)하는 의례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전함(前銜)은 비록 지금은 관직이 없을지라도 이미 이름이 사적(仕籍)에 올라 있으므로, 실제로 현직에 있는 것과 조금과 차이가 없는데 이미 사인(士人)들과 마찬가지로 백의(白衣)의 제도로 하였으니, 더욱 지극히 미안한 일입니다. 청컨대 백관(百官)으로 하여금 미리 최복(衰服)을 준비하여 발인(發靷) 때 입고 들어가 임곡(臨哭)하게 하고, 또한 전함으로 하여금 그때 미쳐 다시 성복(成服)하게 하는 것이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른바, ‘미리 최복을 준비하여 발인 때 입고 들어가 임곡하게 하고, 그때 미쳐 다시 성복(成服)하게 한다.’고 한 것은 대개 이미 초상(初喪) 때는 미처 하지 못하고 계빈(啓殯)167)  할 적에 추행(追行) 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 말이 이와 같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선정신(先正臣)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도 또 그 당시에 봉사(封事)를 올려 말하기를, ‘김집이 올린 예서(禮書)는 입으로 판단하고 억측으로 지어낸 것이 아니라 주공(周公)·공자(孔子)로부터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에 이르기까지 낱낱이 근거가 있으므로 백세(百世)를 기다려도 의심할 것이 없으니, 두찬(杜撰)168)  인 《오례의(五禮儀)》보다 훨씬 낫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병통이 되어 시행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아! 두 분 선정(先正)께서 하신 이 논의는 옛 성현(聖賢)의 가르침에 근본을 두지 않음이 없으니, 지금 따라 의거할 수 있는 것으로서 이것을 버리고 무엇이 있겠습니까? 더구나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성교(聖敎)가 해와 별처럼 환하여 백세(百世)의 표준이 될 만하니,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이제 해조(該曹)의 품달(稟達)이 이미 성교와 주자의 의논을 인용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절목(節目)을 보았더니, 최복(衰服)의 제도는 거의 예(禮)의 본뜻을 잃지 않았으나, 다만 그 최포(衰布)와 친삼(襯衫)을 계승한 것을 마련하지 않은 것이 그 첫번째 실수입니다. 그 절목에는 또 동성(同姓)·이성(異姓)의 시마 이상친(緦麻以上親) 이내의 전함(前銜)과 무직인(無職人)을 백관(百官)과 더불어 같이 참최(斬衰)를 하도록 하였습니다. 대저 군신(君臣)의 분별은 지극히 엄하여 비록 동성(同姓)의 지친(至親)일지라도 감히 사사로운 척분[私戚]으로 임금을 친척(親戚)으로 여기지 못하고, 기복(期服)·대공(大功)·시마(緦麻)를 물론하고 본복(本服)으로서 복(服)을 입지 못하고, 한결같이 다른 신민(臣民)처럼 자최(齋衰)의 참최(斬衰)를 입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방(禮防)의 중대한 것인데, 지금 어찌 ‘유복(有服)의 친(親)’으로 처리하여 그 사이에 다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요사이 의논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은 필시 《상복소기(喪服小記)》에서 나온 것이다.’고 합니다. 대저 《상복소기》는 바로 상고(上古)의 예(禮)이며, ‘감히 사사로운 척분으로 임금을 친척으로 여기지 못한다.’는 것이 바로 정자(程子)·주자(朱子)의 의논입니다. 그렇다면 어찌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취할 수 있겠습니까? 의논하는 자들은 또 말하기를, ‘이것은 《오례의》에 기재되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 이미 한결같이 주자의 정론(定論)에 의거하도록 하셨으니, 이제 어찌 감히 한결같이 이 하교를 따르지 않고서 떳떳하지 못한 예(禮)를 참용(參用)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그 두 번째 실수입니다. 그리고 조신(朝臣)이 지팡이를 짚느냐 짚지 않느냐 하는 조문에 있어서도 또한 경정(逕庭)이 많습니다. 종친(宗親) 종2품 이상과 육조(六曹)·삼사(三司)·승정원(承政院)·한성부(漢城府)·성균관(成均館)·장례원(掌隷院)의 장관(長官)과 양도(兩都)의 유수(留守), 여러 도(道)의 감사(監司), 무관(武官)의 시임 대장(時任大將)·통제사(統制使)·통어사(統禦使) 이외에는 지팡이를 짚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비록 ‘주자의 《군신복의(君臣服議)》에 의거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또한 그렇지 않은 바가 있습니다. 주자는 무릇 관장(官長) 외에 일찍이 시종(侍從)을 역임하여 단독으로 주사(奏事)한 관원은 모두 지팡이를 받도록 하였는데, 지금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육조(六曹)의 참판(參判)과 참의(參議), 한성부의 좌윤(左尹)·우윤(右尹) 및 승정원과 삼사(三司)의 관원은 비록 차관(次官)이라 할지라도 모두가 바로 시종으로서 단독으로 주사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또한 간혹 일찍이 시종이나 대장(大將)·통제사(統制使)·곤수(閫帥) 등의 직임을 역임하여 단독으로 주사한 이들도 있는데, 이제 모두 허락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세 번째 실수입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실수는 그래도 절목 사이의 일이나, 그 대강(大綱)은 완전히 온 나라 신민(臣民)이 공통으로 행하는 방상(方喪)의 제도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해조(該曹)에서 도리어 그 존비(尊卑)를 구별하여 심지어 훈련원(訓鍊院)의 습독(習讀)·봉사(奉事) 이하 및 외방(外方)의 첨사(僉使)·만호(萬戶)·권관(權管)·별장(別將), 각 능전(陵殿)의 참봉(參奉)·무숙배(無肅拜)·초부직(初付職), 외방의 감목관(監牧官) 등과 전함(前銜)의 당하(堂下) 3품(三品) 이하와 관학 유생(館學儒生)들까지도 다 최복을 입지 못하게 하였으니, 어디에 근거하여 그런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주자는 이미 신민(臣民)이 다 같이 최질(衰絰)을 착용하는 것을 허락하고, 비록 가난한 서인(庶人)이나 군리(軍吏)에게 완전한 것을 요구하진 않았으나 그래도 종이로 관(冠)을 만들게 하였으니, 그 자력으로 능히 최복을 갖출 수 있는 자는 응당 최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비단 일반 백성들의 복(服)이 없을 뿐 아니라, 위에 말한 훈원(訓院)·변장(邊將)·능전(陵殿)의 관원 등 및 전함(前銜)·관유(館儒) 등을 단지 백의(白衣)·백립(白笠)·백대(白帶)로만 성복(成服)하도록 하였으니, 어디에 공통적으로 상복(喪服)을 입는 의리가 있습니까? 이것은 그 실수가 또 소소한 절목에 견줄 바가 아닙니다. 진실로 마땅히 먼저 이 대강(大綱)을 바로잡은 연후에야 그밖의 일에 대해 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졸곡(卒哭)이 지난 뒤에 가취(嫁娶)를 허락하는 한 가지 사항에 있어서는 단지 《오례의》에 기재된 것이며, 전혀 주자가 등급(等級)을 분정(分定)한 뜻이 아닙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추후 따져서 확정하더라도 도리어 바로잡을 수 있기 때문에 아직은 누누이 진달하지 않겠습니다.
대저 주자의 《군신복의》는 진실로 만세(萬世)의 모범이 되니, 이것이 우리 대행 대왕께서 반드시 준행(遵行)하고자 하신 까닭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유사(有司)가 만일 한결같이 《군신복의》를 따라 그 품절(品節)과 도수(度數)를 바르게 한다면 본말(本末)이 다 바르게 되고, 작건 크건 모두 구비되기에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그런데도 이제 이렇게 하지 않고 혹 시속(時俗)의 제도를 써 참용(參用)한 것이 있고, 또는 《오례의》를 간혹 적용한 것도 있어서 끝내 반박(斑駁)으로 돌아감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비단 장차 후세에 비웃음을 끼치게 될 뿐만 아니라, 실로 우리 대행 대왕의 유훈(遺訓)을 받들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어찌 크게 두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절목이 처음 나온 날 신 등이 저하(邸下)께 장주(章奏)를 올릴 줄 몰랐던 바 아니었으나, 절목은 이미 원상(院相)이 의논한 뒤 재처(裁處)해 달하(達下)되었으며, 또 일찍이 주자가 국가의 대사(大事)를 의논한 것을 보았더니 도당(都堂)에 상서(上書)하여 전문(轉聞)해 처리되기를 바랐습니다. 신 등도 삼가 이 의리를 사모한 나머지 어제 과연 원상에게 상서해 간쟁하였으나 전례가 없다며 물리쳤습니다. 신 등이 애운(哀隕)한 가운데 계신 저하를 번거롭게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으나, 생각건대 이 복제(服制)는 반드시 바로 지금 개정해야만 거의 유감이 없을 것이기에 이에 감히 서로 이끌고 와서 우러러 호소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저하께서는 대행 대왕의 성교(聖敎)가 중대함을 추념하고 선현(先賢)의 정론(定論)이 엄정함을 유념하시어 빨리 신 등의 글을 해조(該曹)에 내리시고, 예관(禮官)에게 분명히 명(命)하시어 원상과 여러 대신(大臣)들로 하여금 다시 상량(商量)을 더하여 감정(勘定)하도록 하되, 혹시라도 정문(情文)에 미진함이 없게 하소서."
하였으나, 세자(世子)가 답(答)을 내리지 않고, 【초상(初喪)에 있었기 때문이다.】  해조로 하여금 품의해 처리하게 하였다. 예조에서 복주(覆奏)하기를,
"신 등이 원상과 여러 대신에게 나아가 의논하니, 말하기를, ‘상서(上書) 가운데 진달한 소소한 절목은 창졸간에 비록 낱낱이 감정(勘定)할 수 없지만, 그 가운데 「훈련원(訓鍊院)·변장(邊將) 이하와, 각릉(各陵)·전(殿)의 관원 이하 및 전함 백관(前銜百官), 유생(儒生) 등을 단지 백의(白衣)·백립(白笠)·백대(白帶)로만 성복(成服)하게 한 것은 어디에 공통적으로 상복(喪服)을 입는 의리가 있는 것입니까?」라고 한 설(說)은 진실로 주견(主見)이 있는 말이다. 똑같이 참최(斬衰)로 성복하게 하되 유생은 조관(朝官)과 차별이 없지 않으니, 생포의(生布衣)·마대(麻帶)로 성복하는 것이 타당하겠다.’ 하였습니다. 청컨대 이것을 서둘러 알려주어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윗글에 기록한 복제(服制) 별단(別單)의 전함(前銜)·유생(儒生) 등의 복제는 모두 윤지술의 상서로 인해 예조에서 개정(改正)한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73책 65권 26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105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왕실-의식(儀式)


[註 167] 계빈(啓殯) : 발인(發靷)의 준비로서, 출구(出柩)하려고 빈소(殯所)를 엶.[註 168] 두찬(杜撰) : 잘못된 저술.

 

6월 12일 정미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어상(御床)을 자정전(資政殿)으로 옮겨 봉안하였다.

 

묘시(卯時)에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이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大臣)과 종척(宗戚)·예관(禮官)·승지(承旨)를 거느리고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어상(御床)을 봉심(奉審)하였다.

 

사시(巳時)에 대렴례(大斂禮)를 거행하였다. 대행 대왕의 어상(御床)을 이미 융복전(隆福殿)에서 자정전(資政殿)으로 옮겨 봉안하였는데, 남쪽으로 머리를 두고 전(殿)의 서편에 봉안하여 흰 비단 휘장으로 덮었다. 대신(大臣) 이하의 관원이 호외(戶外)의 보계(補階)에 나아가 곡(哭)을 마치자, 세자가 전(殿) 서쪽의 여차(廬次)169)  로부터 생포 중단의(生布中單衣)·포건(布巾)·요질(腰絰)·수질(首絰)·관구(菅屨)를 끄집어 내어 찬궁(攢宮)의 서쪽에 세웠다. 보덕(輔德) 송성명(宋成明)이 나와 말하기를,
"전내(殿內)가 좁으니, 청컨대 잠시 여차로 나아가소서."
하니, 세자가 여차로 돌아왔다. 대렴(大斂) 때 김운택(金雲澤)·김도협(金道浹)과 밀풍군(密豊君) 이탄(李坦)이 집사(執事)하였다. 장차 염(斂)을 하려 할 때 조태채(趙泰采)가 말하기를,
"소렴(小斂) 때는 세자께서 남쪽 협실(夾室)에서 사잇문을 열고 직접 보셨으므로 비록 염하는 곳에 계시지 않아도 무방하였지만, 지금은 여차(廬次)가 이곳과 약간 간격이 있으니 세자께서 염하는 곳에 나와 직접 보지 않을 수가 없다."
하고, 마침내 승지(承旨) 한세량(韓世良)으로 하여금 사알(司謁)을 불러 여차에 들어가 고하게 하니, 세자가 부축을 받고 나와 염상(斂床)의 남쪽에 섰다. 이윽고 북향(北向)으로 앉아 바야흐로 염하려 할 때 김창집(金昌集)이 진달하기를,
"평천관(平天冠)은 마땅히 대렴(大斂)에 넣어야 하는데, 기해년170)   국휼(國恤) 때 불편하다고 하여 재궁(梓宮)에 넣었습니다. 옥규(玉圭)171)  는 마땅히 재궁(梓宮)에 넣어야 하는데 기해년에 또한 금옥(金玉)의 등속을 재궁에 넣어 두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하여 현궁(玄宮)172)  에 넣었습니다. 지금도 또한 여기에 의거하여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하령(下令)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대렴(大斂)을 끝마치자 재궁이 이미 찬궁 안에 봉안되어 있었다. 재궁은 안의 길이가 6척(尺) 5촌(寸) 8푼[分]이고, 안의 너비가 1척 8촌 5푼이고, 안의 높이가 1척 8촌 5푼이었다. 여러 집사(執事)들이 장차 재궁에 넣는 절차를 진행하려 할 때 김창집·이이명(李頤命)이 나와 말하기를,
"재궁에 장차 차조의 재[秫灰]를 깔아야 하는데, 시각이 자못 오래 걸립니다. 청컨대 잠시 여차에 나가 휴식을 취하소서."
하니, 세자가 말하기를,
"그대로 머물러 있고 싶다."
하였다. 여러 대신(大臣)들이 재삼 진청(陳請)하였으나, 세자가 끝내 듣지 않았다. 송성명이 나와 말하기를,
"대신이 누차 진달하였으니, 억지로라도 따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세자가 한참 있다가 답하기를,
"알았다."
하고, 곧 부축을 받아 여차로 나갔다. 재궁에 재를 까는 일이 끝나자 세자가 여차에서 나와 염상(斂床)의 남쪽에 섰다. 김창집이 나와 말하기를,
"재궁에 〈시신을〉 받들어 내려놓을 때 마땅히 포(布)를 사용하여 곧게 밑으로 드리워야 하는데, 기울어질까 염려스럽습니다. 만일 중목(中木)173)  을 재궁에 걸쳐 놓아 대행 대왕의 옥체(玉體)를 그 위에 봉안하여 정제(整齊)·안돈(安頓)한 뒤에 재궁에 내려놓는다면 마땅할 듯합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하니, 세자가 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내시(內侍) 등이 대행 대왕의 옥체를 횡목(橫木)의 위에 옮겨 봉안하니, 집사 등이 여러 신하들에게 봉심(奉審)할 것을 청하였고, 힘써 위와 아래를 고르고 바르게 한 연후에 마침내 받들어 재궁에 내려 놓았다. 빠진 머리카락과 빠진 이빨과 좌우의 손톱·발톱을 담은 비단 주머니를 넣었고, 또 평천관(平天冠)을 위에 적석(赤舃)174)  을 아래에 넣었다. 또 효종 대왕(孝宗大王)이 입던 곤룡포(袞龍袍)를 위에, 현종 대왕(顯宗大王)이 입던 곤룡포를 아래에 넣었다. 송성명(宋成明)이 나와 말하기를,
"일을 끝마쳤습니다. 마땅히 부복(俯伏)하고 곡(哭)해야 합니다."
하니, 세자가 엎드려 곡하였고, 여러 신하들도 또한 엎드려 곡한 뒤에 조금 물러나왔으니, 대개 내전(內殿)에서 나와서 곡림(哭臨)하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에 대신 이하가 다시 들어왔다. 이집(李㙫)이 장인(匠人)의 무리를 이끌고 뒤따라 들어와서 천개(天蓋)와 은정(銀釘)을 더한 뒤 여러 신하들이 물러나왔다.

 

원상(院相) 김창집(金昌集)이 총관(摠管) 2원(員)이 결원이 있어 내일 사위(嗣位)할 때 시위(侍衞)가 갖추어지지 못할 것이라며 조태구(趙泰耉)를 도총관(都摠管)에 임시로 차정(差定)하고 심택현(沈宅賢)을 부총관(副摠管)에 임시로 차정할 것을 청하였다. 대개 세자가 아직 사위하지 않아 개정(開政)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승지(承旨) 한중희(韓重熙)가 진달하기를,
"궐내(闕內)의 입직(入直)은 사체(事體)가 지극히 중대하여 비록 평상시라 하더라도 모두 생기(省記)175)  가 있습니다. 더욱이 이처럼 국휼(國恤)로 경황이 없을 때는 더욱 생기가 없을 수 없는데,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은 8일 이후부터 연일 숙직(宿直)하면서 모두 생기가 없었으니, 몹시 미안(未安)한 일입니다. 청컨대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소서. 병조(兵曹)의 당상관(堂上官)과 낭청(郞廳)도 또한 검칙(檢飭)하지 못한 실수를 면하기 어려우니, 모두 추고(推考)하소서. 신은 해방(該房) 승지(承旨)로서 즉시 발각해 내지 못하였으니, 황공하여 대죄(待罪)합니다."
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모두 추고하지 말고, 또한 대죄하지도 말라."
하였다.

 

6월 13일 무신

묘시(卯時)에 성복(成服)하였다. 백관(百官)이 최질(衰絰)을 갖추고, 【달관(達官)의 장(長)은 지팡이를 받았다. 그 뒤에 절목(節目)을 개정(改定)하여 일찍이 대시(臺侍)를 역임한 자는 모두 지팡이를 받았다.】 숭정전(崇政殿)에서 성복하였다.

 

이날 사시(巳時)에 왕세자가 숭정문(崇政門)에서 사위(嗣位)하였다.

 

이달 경술(庚戌)에 대신(大臣)과 2품 이상이 빈청(賓廳)에 모여 시호(諡號)를 올릴 것을 의논하여, ‘장문 헌무 경명 원효(章文憲武敬明元孝)’라 하였다. 시법(諡法)에 법도 대명(法度大明)을 ‘장(章)’, 도덕 박문(道德博聞)을 ‘문(文)’, 상선 벌악(賞善罰惡)을 ‘헌(憲)’, 강강 이순(剛强以順)을 ‘무(武)’, 숙야 경계(夙夜儆戒)를 ‘경(敬)’, 조림 사방(照臨四方)을 ‘명(明)’, 입의 행덕(立義行德)을 ‘원(元)’, 대려 행절(大慮行節)을 ‘효(孝)’라 한다. 묘호(廟號)는 숙종(肅宗)이라 하였는데, 시법에 강덕 극취(剛德克就)를 ‘숙(肅)’이라 한다. 전호(殿號)는 효령(孝寧)이라 하고, 능호(陵號)는 그대로 명릉(明陵)이라 칭하였다. 【대개 인현 왕후(仁顯王后)를 먼저 명릉(明陵)에 장사지냈는데, 이때에 이르러 유명(遺命)에 따라 같은 영역(塋域)에 장사지냈다.】  12월 21일 갑인(甲寅)에 명릉에 장사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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