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경인
공제(公除)하였다.
상이 두 원상(院相)에게 명하여 그대로 정원에 머물게 하였다가 경자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만두게 하였다.
6월 2일 신묘
비로소 개정(開庭)을 명하여, 왕비의 아비 김우명(金佑明)을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으로, 어미 송씨(宋氏)를 덕은 부부인(德恩府夫人)으로 삼고, 성향(姓鄕)인 청풍군을 부(府)로 승격하였다. 이정기(李廷夔)를 대사간으로, 성이성(成以性)을 사간으로, 목내선(睦來善)을 헌납으로, 여성제(呂聖齊)를 정언으로, 민유중(閔維重)을 이조 정랑으로, 정만화(鄭萬和)를 부응교로, 이홍연(李弘淵)을 병조 참의로, 민정중(閔鼎重)을 병조 참지로, 이응시(李應蓍)를 도승지로, 이정영(李正英)을 승지로, 송준길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경주목(慶州牧)을 다시 부윤(府尹)으로 승격하였으니 강호(降號)한 기간 10년의 연한이 찼기 때문이다.
상이 원상에게 하교하기를,
"신가귀의 지난해 공로를 잊을 수 없다. 참형과 교형이 그 죽는 것은 동일하니 교형에 처하도록 하는 것이 어떠한가?"
하니, 정태화가 대답하기를,
"성상께서 만약 이전의 공을 생각하신다면 비록 교살한다 하더라도 무방할 것입니다."
하여, 상이 드디어 신가귀에게 교형에 처할 것을 명하였다. 양사가 또 이에 대해 간쟁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평안 감사 김여옥(金汝鈺)이 치계하였다.
"삭주부(朔州府)에 4월 19일 신시에 광풍이 호지(胡地)로부터 일어나고 꿩알만한 큰 우박이 내려 그것이 쌓여 얼음이 되어 1척도 넘게 얼었으므로 온갖 곡식이 손실되고 논밭이 쑥밭이 되었습니다."
역관(譯官) 홍희남(洪喜男)이 대마도로부터 돌아와 아뢰었다.
"새 도주(島主) 평의진(平義眞)을 만나 보고 먼저 유황(硫黃)으로 회사(回謝)한 다음에 문안하고 그 다음에 조문하였더니, 의진은 자못 그 길례와 흉례가 함께 있는 것을 혐의하면서도 아비를 위해 추모하는 뜻은 조금도 없이 우리 나라에서 보낸 선물을 진열해 놓고 마치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였습니다. 희남이 조명(朝命)으로, 관왜(館倭)가 부산(釜山)의 시장에서 변란을 일으키고 개운포 만호(開雲浦萬戶) 김남두(金南斗)를 끌어냈으니 그 죄를 바루지 않을 수 없음을 말하자, 드디어 왜인들을 함부로 출현하도록 선동한 자와 만호를 끌어낸 자 두 왜인을 잡아다가 4월 17일 저희들이 보는 곳에서 처형하였습니다. 도주는 연소하고 일을 주관하는 왜인 우두머리는 세 사람인데 모두 늙었으며, 나머지는 연소한 자로 모두 도주의 측근이며 대마도의 일은 날로 점점 혼란해 갑니다."
경성 판관(鏡城判官) 홍여하(洪汝河)가 임소(任所)에 있으면서 응지소(應旨疏)를 올려 처음에는 변방이 소활한 걱정과 상벌이 알맞지 못한 폐단을 말하고, 이어 시비가 공평하지 못한 폐단을 진술하기를,
"시비가 바르면 기만이 모두 중지되어 올바른 선비가 등용되고, 시비가 바르지 못하면 흑백이 혼동되어 온갖 부정한 사람들이 진출됩니다. 시비가 혼동됨이 어찌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의 깊은 걱정거리가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 항상 연중(筵中)에서 하교하기를 ‘우리 나라 사대부가 한 가지 병통이 있으니, 이미 서쪽을 가리켜 동쪽이라 하였으면 비록 동쪽이 아닌 줄 알면서도 그것을 고집하여 변경하지 않는다. 이는 진실로 자신을 옳게 여겨 잘못을 이루는 병통에서 나온 것으로 시비가 더욱 혼동되는 이유이다.’고 하였습니다. 근년 이래 이 풍조가 더욱 성행하여 일시의 풍성에 상하가 모두 그러하니, 비록 하늘처럼 덮어 주는 도량을 지닌 성인이라 할지라도 신은 감히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보장하지 못하겠습니다. 심지어 사대부 중에 강경하게 자신을 고집하여 그른 줄 알면서도 기필코 그것을 합리화하는 자는 완남 부원군(完南府院君) 이후원(李厚源)이 가장 심합니다. 논의에 있어서는 편협으로 주장을 삼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불공평으로 으뜸을 삼습니다. 자신의 의견을 고집할 때에는 기필코 관철하기로 마음을 먹고, 겸허한 마음으로 타당한 것을 구한 적이 없으니, 어찌 나라를 그르침에 이르지 않겠습니까. 기타 여러 재신들도 거의 대부분 자신을 옳게 여기는 병통이 있어 온 나라가 모두 이기는 것만을 힘쓰니 시비가 어떻게 바르게 되겠습니까. 사람들의 일반적인 마음은 남을 보는 눈은 밝아도 자신을 보는 눈은 어둡습니다. 전하께서는 여러 신하들이 동쪽을 가리켜 서쪽이라 하는 것을 알면서도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또한 스스로 그것을 외면하지 못하고, 여러 신하들은 전하의 남을 이기기 좋아하는 병통을 간하면서도 자신의 처사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심합니다. 전하께서는 마땅히 먼저 자신을 반성하여 그 남 이기기 좋아하는 마음을 버리고 제신을 경계하여 그 습성의 편협함을 바로잡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각각 편협한 고집을 버리는 데 힘쓰고 원대한 모책을 넓혀서 상하가 서로 권면하며 함께 중정(中正)한 경지에 나아가면 시비의 혼동을 바루기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신이 삼가 전하께서 넉넉하게 정직한 선비를 포용하고 좋은 모책을 취하여 좌우의 말을 받아들이기에 게을리하지 않고 도움을 구함이 두루 초야에까지 미침을 보니, 언로가 막히는 것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이 듣건대, 간언에 대해 상을 내리는 이는 흥하고 간언에 대해 벌을 내리는 이는 망한다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독단을 좋아하고 자신을 믿는 데에 용감하시면, 간언을 막는 데 마음을 두지 않아도 사람들이 스스로 간언을 가리우게 될 것이니, 간하는 자를 죽이는 일과는 조금 다르지만 그 자취는 선비를 죽이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직언하는 선비가 흩어지게 되는 원인입니다. 홍우원(洪宇遠)의 간소(諫疏)에 이르러는 비록 비유를 타당하게 들지 못하였으나 실로 임금을 아끼는 충정에서 나온 것이니, 전하께서는 포상하고 용서해야 될 것입니다. 그 후 화를 당하던 날 전하께서 측은한 마음이 들어 세 아이002) 의 친속을 모두 취하여 입경시켰습니다. 신이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할 때 감격의 눈물이 흐릅니다. 이것이 비록 우원의 의논을 들어 주어 절부를 준 데에서 나온 것은 아니나, 신은 ‘전하께서 우원에게 특별히 온정의 회유를 베풀어 전과 같이 대접하시니, 이것은 바로 성인의 도량으로 장래를 격려하는 성대한 뜻이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배척당한 신하들이 모두 다시 청반(淸班)에 끼이게 되었는데 유독 우원의 일에만 석연치 못함이 있습니까. 언로의 막힘이 또한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대간의 소장이 나올 때마다 사심을 두는 일이 많고 또 날마다 분분하지만 모두가 형식입니다. 위로 국가의 흥망에 관계되는 일과 아래로 일신의 화복에 관계되는 일에 이르러는 감히 입 밖에 내지 않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정직한 선비를 예우하고 좋은 말 받아들이기를 좋아하여, 한갓 용서할 뿐 아니라 상을 내려 격려하고 권장하는 뜻을 드러내시어 간하는 자로 하여금 권장함이 있게 하소서."
하고, 또 이르기를,
"신이 초야에서 생장하여 벼슬한 지 오래지 않으므로 경국(京國)의 물정을 실로 알지 못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대략 사람 쓰는 법을 엿보니, 청류(淸流)를 진퇴함에는 정식이 있는 듯합니다. 현관(顯官)의 발탁은 경력을 따라 하는 것이니, 침체되는 것은 실로 자신에게 원인이 있었으며, 주의(注擬)할 때에 이부(吏部) 역시 뜻대로 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심지어 서관(庶官)·음직(蔭職)의 선발에 있어서도 사정을 따르는 것이 태반이고 공적으로 행함이 극히 적으므로, 후원이 없으면 천거되지 못하고 촉탁이 아니면 행하지 못합니다. 관직의 혼란과 분쟁이 이로 말미암아 일어나 명기(名器)의 혼란이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다행히 전형(銓衡)을 발탁해 제수하였으니, 점차 묵은 폐단의 정리를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춘방(春坊)의 첨설에 이르러는 보도(輔導)의 아름다운 뜻에서 나왔습니다. 진선(進善) 이상을 제수하거나 주의할 때에는 모름지기 명망의 흡족함을 기다려야 하고 참하(參下)의 선발은 별도로 자의(諮議)를 설치하여 문관의 아망(雅望)이 도리어 이에 미치지 못하는 바 있으니, 한 세대를 통틀어 두세 사람이 나와도 오히려 많습니다. 지금 일찍이 시험하는 일이 없었는데도 연소한 음관이 자의에 천거되어 평소에 노성한 이도 피하고 차지하지 않던 예를 하루 아침에 신진 선비에게 더하게 되니, 한갓 보기에만 좋고 무익하여 실효가 없을 것이며, 또 어진 선비를 우대하고 염우(廉隅)를 배양하는 방법도 아닙니다. 아, 인재를 등용하면 기강이 진작되고 상벌이 적중함을 얻을 것이며 공도(公道)를 행하면 언로가 열리고 시비가 저절로 명백해질 것입니다. 이 네 가지의 폐단을 없애려면 현재(賢才)를 발탁하고 공도(公道)를 넓히는 이 두 가지에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재를 등용하고 공도를 행하기 어려운 것은 그 이유가 있으니, 진실로 붕당의 화가 오늘날 나라를 병들게 한 뿌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 학술의 분열은 중국도 오히려 마찬가지입니다. 가정(嘉靖)·융경(隆慶) 이래로 사론(士論)이 서로 굴복하지 않고 백년 동안 서로 버티어 왔지만 그 화가 일찍이 조정에까지는 미치지 못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그렇지 않아 기치를 내세우는 것은 비록 의견을 따르지만 마음을 쓰는 것는 실로 명리(名利)에 관계되어 남몰래 다르다고 여기면서도 드러내서는 편을 갈랐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얄팍한 부류가 용기를 팔아 먼저 등용되고, 편벽된 무리가 더욱 독실히 사수하여 풍기를 무너뜨리며 서로 큰소리 치다가 오늘날에 이르러 고질을 이루고 미혹에 빠졌습니다. 그들이 설분할 때를 당하면 오직 마음속으로 후련하게 하는 것만을 일삼고 있고, 군부의 안위와 종사의 존망을 아예 생각도 않고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아, 이 또한 없앨 수 없는 것입니까. 이것을 일러 그 본심을 상실하였다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소는 4월 그믐께 현도를 거쳐 상문(上聞)하였는데 마침 선왕의 병환으로 인하여 드리지 못하였다가 이어 국휼(國恤)를 만나 지금까지 승정원에 두었는데, 승지 유계가 상께 아뢰기를,
"여하(汝河)의 상소는 성지(聖旨)에 응한 것으로, 본도의 실정 및 오늘날의 폐정을 낱낱이 진술하고 또 완남 부원군 이후원을 논박하였는데, 그 의논이 편협하니 어찌 나라를 그르치는 데 이르지 않겠느냐는 등의 말까지 하였으며, 또 전조(銓曹)가 음관(蔭官)을 자의(諮議)에 의망하는 일이 부당하다는 것을 논박하였습니다. 이 상소의 사실이 진언(進言)에 관계되어 받들어 올리는 것이 마땅할 것 같으나, 그 상소의 한 말이 대행 대왕의 성궁을 범하여 오늘날 그대로 쓰지 못할 것이 있습니다. 그대로 받들어 올려야 합니까? 아니면 개서(改書)하여 올려야 합니까?"
하니, 상이 원상 정태화에게 의논할 것을 명하여, 태화가 개서하여 드리게 청하니, 윤허하였다.
장령 황준구(黃儁耉)·허목(許穆), 지평 이합(李柙)·강유후(姜裕後), 정언 이익(李翊)이 합계하기를,
"예관으로 하여금 다시 절목을 상정하여 계빈(啓殯)하는 날 최복(衰服)도 마련하게 하고, 전일 마련하였던 복을 그 끝을 감침질하여 공복(公服)으로 바꾸어 사용하게 하면 신구가 양존하고 고금이 함께 편리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예조에 명하여 다시 의논하게 하였다.
집의 이유태(李維泰)가 상소하여 고향에 돌아가 노모를 봉양할 것을 청원하니, 상이 그 상소를 이조로 내려 보냈다. 이조가 ‘조정이 선비를 대접하는 도리에 가벼이 허락할 수 없다.’ 하므로, 상이 그대로 머물게 하라고 하유하였다.
6월 3일 임진
하교하기를,
"지난달 3일 저녁 입진(入診)할 때 의관 이기선(李嗜善)이 부기가 심한 것을 보고 감히 회피할 생각을 하여 진맥할 줄 모른다고 아뢰었다. 만약 그의 말과 같다면 지난해 편찮으실 때 입진하여 진맥을 논한 것은 무엇인가. 그 정상이 극히 흉참하니 통렬히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 잡아다 추국하여 조처하라."
하였다. 기선이 공초한 글에서 본래 맥법(脈法)을 모른다고 말하자, 상이 맥법을 모르면 어찌 의원이 될 수 있느냐고 하며 엄형으로 다스릴 것을 특명하였다.
금부가 어의 박군(朴頵) 등의 죄를 조율하여 장류(杖流)로 정하자, 상이 이르기를,
"기축년에 입시한 어의 정남수(鄭楠壽) 등도 모두 이 율에 해당시켰는가?"
하였다. 금부가 아뢰기를,
"기축년 국휼 때 정남수는 논죄 중에 들어가지 않았으나, 이형익(李馨益)·박군은 모두 장류되었습니다. 지금 박군 등의 논죄 또한 이 율을 쓴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당시 이형익·박군은 곧 지금의 유후성·조징규와 같다. 이들의 조율이 이처럼 너무 무거워도 되는가?"
하였다. 금부가 이에 대해 되풀이하여 아뢰었으나 끝내는 장 1백에 고신을 빼앗는 것으로 조율하였다.
장령 황준구 등이 아뢰기를,
"전 목사 김여수(金汝水)의 탐욕스런 정상은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아는 바입니다. 애당초 처벌을 잘못하여 아직까지 목숨을 보전하고 있으므로 중의가 아직까지 분개합니다. 서용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고, 또, 충홍 병사(忠洪兵使) 이수창(李壽昌)이 일찍이 본도의 수사 및 영흥 부사(永興府使)로 있을 때에 탐오한 짓을 한 정상을 논하여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완남 부원군 이후원이 상소하기를,
"신이 병석에 있던 중에 들으니, 북도 수령이 신의 성명을 거론하며 신을 공격하기를 ‘강경하게 자신을 고집하여 잘못인 줄 알면서도 기필코 그 일을 합리화하며 편협하고 불공평하다.’고 하면서 끝내는 나라를 망친다는 것으로 지목하였습니다. 나라를 망친다는 것은 신하로서 큰 죄가 되니, 신의 관직을 삭탈하여 남들의 말에 답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어찌 연소배의 말로 인하여 자책하기를 이에까지 이르는가. 경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총호사 심지원(沈之源)이 임영 대군 및 안여경(安汝慶)의 묘산, 헌릉 이수동(獻陵梨樹洞), 영릉 홍제동(英陵弘濟洞), 건원릉(建元陵)의 첫째 등성을 모두 간심한 후에 그 산들의 도형을 그려 예람(睿覽)에 대비할 것을 아뢰니, 답하였다.
"원릉(園陵)의 치부 중에서 보다 나은 곳을 택하여 다시 간심한 후 의논하여 결정하라."
6월 4일 계사
정원이 장마가 오래되어 보리가 잠기고 벼가 손실되므로 비록 입추(立秋)가 되지 않았지만 기청제(祈晴祭)를 지낼 것을 아뢰니, 이에 따랐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동부 승지 유계는 일찍이 선조(先朝) 때에 본사의 문서를 도맡아 관리하라는 하교를 받았습니다. 타직에 체부하여 유사 당상의 일만을 살피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에 따랐다.
양사가 유후성(柳後聖) 등의 일을 연계하고, 신가귀(申可貴)를 교형에 처하게 한 하명을 거두어 빨리 국법을 바로잡을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교형이나 참형이 죽이는 것은 일반이나 참형으로 하지 않는 이유는 선왕의 뜻을 생각해서이다. 또 그대들이 비록 가귀가 침을 놓을 때 후성 등이 그가 오랫동안 앓고 수전증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권하여 말리지 않은 것으로 대죄(大罪)를 삼고 있으나, 전년에 파종(破腫)할 때 가귀는 진실로 병이 없었으되 수전증은 있었는데 이는 곧 선왕께서 통촉하신 일이다. 항상 그가 침을 잘 놓는 것을 칭찬하셨는데, 뒤에 병이 깊어 거의 죽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자주 애석하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날 그로 하여금 침을 놓게 한 것도 대개 이 때문이었다. 의관이 물러간 후 내가 곁에서 머리를 쳐다보니 심신이 어지러워 눈물이 흐르는 것도 깨닫지 못하였다. 선왕께서 돌아보시고 이르기를 ‘파종하는 것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인데 왜 우느냐.’고 하셨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통곡만 나올 뿐이다. 비록 백 사람의 후성이 있은들 어찌 감히 그 사이에서 말할 수 있겠는가. 그대들은 그 당시의 사세는 헤아리지 않고 과격한 말만 하니 나는 그 저의를 알 수 없다. 기축년에 이형익 등도 양사가 합계하여 조율을 청하였으나, 선왕께서는 선조의 뜻에 어긋날까 염려된다고 하교하셨다. 나 역시 공손히 선왕의 하교를 받들고 또 선왕의 지극한 뜻을 준행하고자 한다. 비록 국법이라고 말하지만 어찌 그 사이에 융통성이 없겠느냐. 번거롭게 말하지 말라."
하였다.
이조 판서 송시열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지난 가을에 마침 들으니 선왕께서 극심한 병중에 계시면서도 오히려 미천한 신의 안부를 물었다고 하기에, 신은 감격한 마음 그지없어 황급히 대궐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즉시 돌아와 신의 초지를 관철했어야 하는데, 다만 성후(聖候)가 오랫동안 쾌차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성급히 퇴거를 청하지 못하고 저으기 주저하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그릇된 은전을 내려 신에게 전직(銓職)을 제수하여 신이 누차 소장을 올려 사양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무릅쓰고 받은 지 8, 9개월이 되었습니다. 대소간의 제수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는데, 그 비난의 의논이 분분하여 항상 스스로 부끄럽고 두려웠습니다. 지금 정원이 계품한 판관 홍여하(洪汝河)의 상소한 말을 삼가 들으니 그 중 한 조항이 소신을 정면으로 공척한 것이라 합니다. 신이 비록 원소(原疏)는 보지 못하였으나 그 대의는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신이 밤낮 공수하고 기다리던 일이어서 개운한 마음으로 감복하여 마치 아픈 곳에 침을 놓고 뜻한 일이 이루어지는 것같이 아무런 유감이 없습니다. 바라건대 본직을 체차하여 사람들의 말에 답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연소배의 경솔한 말에 어찌 자책하기를 이렇게 하는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이조 참판 이일상(李一相), 참의 조복양(趙復陽)이 또한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들이 듣건대, 홍여하의 상소 중에 정관(政官)이 인재를 등용하는 데의 잘못을 논척하였으므로 판서 송시열이 이미 이로 인해 소장을 올려 면직을 청하였다고 합니다. 그러하니 신들 또한 어찌 감히 사람을 전형하여 진퇴시키는 지위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들을 체직시켜 사람들의 말에 답하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수행하라고 답하였다.
큰비가 한 달 동안이나 내려 그 수재의 참혹함이 팔도가 모두 같았다. 가옥이 물에 잠기고 백성들이 빠져 죽은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고 서울에는 다리를 건너다가 익사한 자도 있었다. 상이 이에 대해 아울러 휼전을 베풀라고 명하였다.
6월 5일 갑오
정유성(鄭維城)을 선발하여 우의정으로 삼고, 권대운(權大運)을 좌부승지로, 채충원(蔡忠元)을 형조 참의로, 유계(兪棨)를 대사성으로, 이시술(李時術)·안후열(安後說)을 교리로, 이경억(李慶億)을 병조 참지로 삼았다.
대사헌 송준길이 차자를 올려 병으로 사직하고 진계(進戒)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춘궁(春宮)에서 덕행을 길러 내면으로 수양을 하신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하루 아침에 보위에 오르시므로 만물이 모두 우러러보고 있습니다. 그 효성은 중외를 감동시키고 명령은 대중의 마음에 맞아 아녀자와 어린아이들, 미천한 사람들도 모두 즐거이 경하하는 기색을 보이니, 이처럼 한결같이 하여 게을리 아니하면 나라가 태평하게 될 것입니다. 신이 비록 지극히 우매하나 오랫동안 연석(筵席)을 모시면서 특별한 보살핌과 예우를 받았으므로 그 희비(喜悲)의 정리가 타인에 비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크게 걱정되는 일이 있습니다.
대개 생각건대, 수백 년 동안 내려온 국가의 종묘 사직과 신인의 의탁이 오직 전하의 한 몸에 달렸습니다. 그 안위와 존망의 기추가 모두 오늘날에 있으므로 조금이라도 차질이 있으면 결과에는 천리의 먼 차이로 어그러질 것이니, 처음을 혹시라도 삼가지 않으면 나중에 구제하지 못할 것이니, 참으로 두렵지 않겠습니까.
신은 듣건대, 제왕의 효는 자연히 필부와 같지 않으니 반드시 사직을 안정하고 선인을 위호하며 기업의 명맥을 공고히 하고 무한한 경복을 받아 계속한 연후에야 비로소 효의 지극함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곡읍의 절차와 궤전(饋奠)의 예절 같은 것은 단지 말단적인 일일 뿐입니다. 여염의 일반인으로 비록 혈기가 왕성한 자라도 초상에 지나치게 슬퍼하면 병이 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되면 비록 오랫동안 조리하여도 차도와 효험을 보기 어려우니, 이는 대개 지나치게 슬퍼하면서 나물과 물만 먹어 장부가 손상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러러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신기가 몹시 완전한 것도 아니고 질병도 아직 쾌차하지 못하였는데, 갑자기 흉화를 당하여 가슴을 치고 통곡하며 슬퍼하시는 절차가 통상적인 예제에 더욱 지나칩니다. 지금 옥체의 큰 손상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곧 신명의 도움이라고 하겠으나, 속으로 손상을 받은 것을 필시 이루 형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기》에 이르기를 ‘죽음으로 인하여 생명을 손상하게 하지 말며, 슬퍼하더라도 본성을 잃지 말라.’ 하였고, 또 이르기를 ‘상사를 이겨내지 못하는 것은 자애롭지 않고 효성스럽지 않은 것에 비교한다.’ 하였습니다. 대개 어버이 상사는 진실로 누구나 자신의 정성을 다하는 것이지만 성인이 예로 제정하여 그 의의를 세우신 엄격함이 이와 같으니, 삼가 바라건대 상께서는 스스로 절제하시는 데 힘쓰시어 항상 조리를 하고 약으로 조섭하심에 그 방법을 다하소서. 모름지기 전하의 몸이 편안한 후에 자전의 마음이 편안할 것이며, 자전의 마음이 편안한 후에 종묘 사직과 신인이 진동하고 방황하는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아, 지금 팔도에 흉년이 들었는데, 한재와 수재가 겹치고 천재지변이 그치지 않으며 사람들의 모책이 좋지 못하니, 그 우환의 조짐이 너무도 많습니다. 이는 바로 군신 상하가 서둘러 구제를 도모하기에 급급할 때입니다. 전하께서 비록 상차를 떠나지 않고 최복을 벗지 않더라도 수시로 대신과 여러 재신을 인접하여 국가의 기무를 상의하시며 겸하여 상장(喪葬)의 일도 강구하소서. 그리하면 슬프고 답답한 마음이 풀어져 기운을 보양하는 방법에도 도움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군신은 부자와 같습니다. 부자가 서로 만나는데 무슨 구애가 있겠습니까. 옛날에 대행 대왕께서 상중에 계실 때 또한 이와 같던 일이 기억나거니와 신의 말이 상고한 바 없지 않습니다. 신이 또 국조의 고사를 보았는데, 명묘께서 승하하여 장례를 치르지 않았을 때 선묘(宣廟)께서 경연에 임하시어 《예기》의 여러 상례편을 강론하셨습니다. 대개 거상에 있어 장례 전에 상례를 읽고 장례 후에 제례를 읽는 것은 곧 《예경》의 글인데, 그 당시 유현(儒賢)들이 조정에 가득히 있었으니 반드시 증거한 바가 있어 진술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찌 의롭지 못한 일을 선묘께서 행하셨겠습니까. 신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선묘조의 구례에 의하여 법연(法筵)을 여는 것처럼 반드시 의식을 갖추어 경연을 열지 말고 다만 조석 궤전(朝夕饋奠)의 여가에 옥당 유신으로 하여금 상례를 진강하게 하고 전하께서는 그것을 조용히 듣고 토론하여 인하여 그것을 체득하여 탐구하고 살펴 실행하면, 그 정을 쏟고 예를 다하는 즈음에 도움되는 바가 많을 것입니다.
신이 삼가 보건대, 옛날의 제왕들은 왕위를 계승한 처음에 널리 직언(直言)을 구하고 반드시 널리 현준(賢俊)을 초치하여 새로 시작하는 정교를 돕게 하였습니다. 고사는 논할 것도 없거니와 기축년에 선대왕(先大王)께서 처음 정사를 보실 때 신처럼 용렬한 자도 함께 부름을 받았는데 마침 병이 심하여 부름에 달려가지 못하자 약물을 하사하시며 신으로 하여금 조리하고 나오게 하였습니다. 지금 그 일을 생각하면 심장이 찢어지듯 아픕니다. 신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선왕께서 실행하신 규범을 준수하시어 널리 노숙한 선비를 초치하여 극진한 예우를 더하시고 아직 이르지 않은 자는 반드시 초치할 것을 생각하고 이미 이른 자는 반드시 유치할 것을 생각하소서.
아, 소공(召公)이 성왕(成王)을 경계하여 이르기를 ‘왕께서 천명을 받은 것이 무궁한 복이나 또한 무궁한 걱정이기도 하다. 아, 어찌하랴. 이 어찌 공경하지 않으랴.’ 하고, 또 이르기를 ‘갓 태어난 아들이 처음 태어날 때 밝은 천명을 받은 것과 같다. 지금 하늘이 밝은 천명을 내렸는가? 지금 길흉을 내렸는가? 역년을 내렸는가? 아는 것은 지금 우리가 처음 정사에 임한 것뿐이니, 오직 왕께서는 빨리 덕을 공경하라.’ 하였으니, 아, 민심의 향배와 천명의 길흉이 모두 오늘에 결정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스스로 두려워 태만하고 방자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다시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기체를 보양하고 사려를 청신하게 가지시며, 궁위(宮闈)를 엄숙히 하시고 사경(私逕)을 끊어 버려 궁중·부중이 일체가 되도록 힘쓰시고 출척과 진퇴를 한결같이 공의에 맡기셔야 합니다. 오직 정일 집중(精一執中)과 지성 적심(至誠赤心)으로 마음을 가지며, 털끝만치라도 치우쳐 얽매이지 말고 억양과 운명에 맡겨 사물 다스리는 마음을 그 사이에 섞어서 순수하게 옛 성인의 마음가짐과 일을 처리하는 것으로 준칙을 삼으시어 우리 대행 대왕이 남겨주신 지극한 뜻을 계승하면 국가와 신민에게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의 차자를 살피고 또 전일 강석에서의 일을 생각하니, 지금에 이르러 행하고자 하나 행할 수 있겠느냐. 다만 스스로 통곡할 뿐이다. 경의 말한 바가 지성이 아닌 것이 없다. 내가 마땅히 감사하게 받아들여 마음에 간직하리라. 또 경이 이른바 계빈(啓殯) 전에 《예경》을 강론하는 것이 비록 예문에는 실려 있으나 지극한 정회를 억제하기 어렵다. 오늘날의 슬픈 감회를 오직 경은 너그럽게 살피라. 듣건대 경이 병이 있다 하니 내 마음 몹시 걱정된다. 사직한 직책은 선조께서 항상 경에게 이 직책을 맡기고자 하였기 때문에 오늘날 내가 그 유명(遺命)을 봉행한 것이니, 경 또한 위로 선조의 유지를 받들고 아래로 나의 심정을 생각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병을 조리하고 직무를 보살펴 미급한 나를 도우라."
하고, 곧 내의(內醫)를 보내 간병하게 하였다.
장릉(長陵)의 곡장(曲墻)이 큰비에 무너져 예조가
"위안제를 지내는 것이 마땅하나 국휼에 있어 졸곡 전에는 대소 제향을 모두 정지하므로, 고유문만 지어 위안례만 설행하는 것이 합당하다."
고 아뢰어 상이 이에 따랐다.
옥당이 차자를 올려, 양사의 의논을 쾌히 따라 빨리 유후성·조징규의 죄를 규명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집의 이유태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선조에 있어 망극한 은혜를 받았으나 일찍이 직무에 나아가 신하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대개 집에 노모가 계심으로 인하여 차마 멀리 떠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오늘날에 있어 어미를 버리고 벼슬에 나가서 성상의 처음 시작하는 청명한 정치를 더럽히겠습니까? 직명을 갈아 주소서."
하니, 상이 너그러운 비답으로 허락하지 않았다.
이조 판서 송시열이 상소하기를,
"신이 어제 홍여하의 상소를 가지고 죽음을 무릅쓰고 스스로 진술하여 국법을 감수할 것을 청하였으나, 성상의 비답에 ‘연소배의 날카로운 말[銳言]인데 어찌 자책하기를 이렇게까지 하는가.’고 회유하니, 신은 민망하고 답답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의 직명이 한만한 것이 아니라서 비록 신이 전연 실수한 일이 없었더라도 이미 비난을 받았다면 무릅쓰고 머물러 있을 수 없는데, 하물며 신의 부정이 남의 말을 기다리기 전에 신이 진실로 자인하고 있음에이겠습니까. 여하의 상소 또한 이미 늦었으며 또한 너무 너그러워 날카로운 말인 줄 모르겠습니다. 또 말을 듣는 방법은 오직 그 시비를 보는 것일 뿐이니, 진실로 그것이 옳다면 오직 날카롭지 않을까가 두렵습니다. 해치(獬豸)가 뿔로 받는 것과 명협(蓂莢)의 가리킴이 이 모두 날카로움의 지극한 것으로, 혹은 송사의 판단에 증거가 되기도 하고, 혹은 상서로운 세대에 찬송이 되기도 합니다. 어찌 그 날카로운 것을 병되이 여기며 그 지적받은 사람이 감히 태평히 동요하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빨리 면직을 허락함과 아울러 신의 죄를 다스려 나라 사람들의 말에 답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내가 글이 짧아 글자의 뜻을 상세히 모른다. 상소에 대한 비답 중 날카롭다[銳]는 글자는 경망하다는 뜻으로 글자를 놓은 것인데, 경의 소사(疏辭)를 보고서야 비로소 그릇됨을 깨달았다. 마음에 몹시 부끄러워 어찌 회유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믿는 자는 경이다. 어찌 이처럼 고사하는가. 다시는 피혐하지 말고 안심하고 직무를 보라."
하였다.
호서(湖西)를 진구(賑救)할 때 대여한 상평청의 미조(米租) 2천7백80석을 견감할 것을 명하였다.
6월 7일 병신
상의 병세가 오래도록 차도가 없어 약방 도제조 정태화가 2, 3명의 의관과 입진(入診)할 것을 청하고, 좌의정 심지원 또한 함께 입시하였는데, 상이 만나 보고 통곡하였다. 태화가 증세를 논란한 후 곧 나아가 아뢰기를,
"홍여하의 상소가 비록 백성들의 고통과 당시의 폐단을 진술하였으나, 이후원을 지적해 공격한 말은 아무런 근거도 없습니다. 후원이 일을 담당하여 시행한 것이 없는데 무슨 나라를 그르친 일이 있겠습니까. 이어 전조의 주의가 불공평하여 자의(諮議)의 의망이 지나치게 참람하다고 말하였습니다. 송시열이 이로 인해 불안하여 여러 차례 사직소를 올렸습니다. 어찌 여하의 한마디 말로 동요하는 바가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은 그 소를 보기에 과연 어떠하던가?"
하였다. 이에 태화가 아뢰기를,
"소 중에 이미 폐단되는 일을 진술하고 또 언로(言路)를 이어 말하였으므로 다시 써서 드리게 하였습니다. 설사 전례대로 계하한다 하더라도 모두 채택할 만한 말이 없는데, 이판(吏判)은, ‘이미 다시 쓰게 하였다면 일이 아직 결말이 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공무를 집행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조정이 예우하는 도리에 있어 여하의 망녕된 말로 인하여 경솔히 총재를 체직할 수 없습니다. 이후에 혹시라도 동요시키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다시 이를 들먹일 것인즉, 그 폐단을 또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판은 내가 몹시 믿는 바이다. 어찌 이로 인하여 체직할 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제왕의 효가 필부와 다르므로 반드시 감정을 억제하고 예를 따르며 깊이 보호를 생각하여 후회가 있지 않게 합니다. 소신이 옛날에 거상 중에 있을 때 질병이 극심하므로 선왕께서 특별히 중사(中使) 이엽(李曄)을 보내 임시 권도를 따를 것을 권유하고 나라를 위해 힘써 보호하라는 뜻으로 회유하였습니다. 신은 성상의 분부에 감격하여 울면서 그 하명을 받들었습니다. 이로 생각할 때, 하늘에 계시는 선왕의 영령이 전하를 돌보심이 의당 어떠하시겠습니까?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어찌 생각이 이에 미치지 못하십니까?"
하고, 심지원 또한 이어 보호의 뜻으로 진수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때 어찌 이런 말을 하느냐."
고 하면서 통곡하여 그치지 않았다. 상이 승지 김수항에게 일러 말하기를,
"대사헌 의 차자 중 널리 현준(賢俊)을 불러들이라는 한 가지 일을 정원이 속히 거행하여 나의 말로 말을 만들어 하유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수항이 아뢰기를,
"전 찬선(贊善) 권시(權諰), 전 진선(進善) 윤선거(尹宣擧)를 의당 먼저 불러들이고, 이 밖의 재야인 또한 마땅히 방문하여 모두 불러들여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리하라고 답하였다. 상이 태화에게 일러 말하기를,
"대간이 유후성·조징규의 일로 논집한 지 오래나, 내 생각에 그렇게 여기지 않는 것은 후성이 전에 약을 의논할 때 성심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 와서 어찌 감히 그를 소홀히 하겠는가. 또 자전의 증세가 수시로 일어나는데, 지금의 의관으로는 후성과 징규에 미칠 자가 없고 전후 증세를 잘 아는 자 또한 두 의관 같은 자가 없다. 죽임을 용서하여 유배하였다가 급하면 소환하여 약을 의논하는 것이 어떠한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이와 같이 처치하는 것이 무방하겠습니다. 그러나 박군(朴頵) 등의 탈고신(奪告身)에 이르러는 중의가 모두 너무 경하다 하니 도배(徒配)로 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이날 대간의 아룀으로 인하여 제조 등의 직을 파하고 박군 등을 도배하였다.
우의정 정유성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임금의 직책은 재상을 논정하는 데에 있습니다. 왕위를 계승한 처음에 더욱 삼가 선발해야 마땅할 것인데, 덕이 있는 이를 임명하여야 할 자리가 도리어 지극히 용렬한 신에게 내려졌습니다. 신이 미천한 분수를 지켜 한결같이 힘써 사피하고자 하면, 원행(遠行)이 박두하였으니 일을 당해 어려움을 사피하는 도리가 없고, 은혜로운 교지를 받들어 주제넘게 받아들이고자 하면 관직을 더럽히게 되니, 재상의 직은 구차히 채울 자리가 아닙니다. 바라건대 새로 주신 하명을 거두고 임시 의정(議政)의 직함으로 행장을 챙겨 국경을 나가게 하소서. 그리고 다시 다른 정승을 뽑아 정사를 총괄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너그러이 비답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이조 판서 송시열이 재차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호서(湖西) 예산현(禮山縣)에 어떤 여인이 아들을 낳았는데 하나의 몸뚱이에 머리는 둘이며 손이 넷, 발이 넷이었다. 도신(道臣)이 이를 알려 왔다.
6월 8일 정유
상이 학질을 앓자, 이경석·이시백·심지원 등이 양 자전에게 계달하여 권도를 따라 보호의 방법을 다하도록 권유해 줄 것을 청하니, 답하였다.
"계사는 비록 이와 같으나 이 때에 이 말을 꼭 따를 이치는 없다. 우선 사세를 보아 하겠다."
송시열을 판의금으로 삼았다. 시열의 품계가 정2품에 있으므로 의망 중에 들지 못하였는데, 정2품을 추가하여 의망하라고 명하여 시열에게 제수하였다. 강백년(姜栢年)을 좌승지로, 정치화(鄭致和)를 병조 판서로, 김남중(金南重)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원상 정태화가 이뢰기를,
"각도 암행 어사의 서계를 함께 이조에 내려 보냈는데, 그 중 체직될 수령은 감히 소임을 수행할 수 없어 혹 이미 상경한 자도 있습니다. 국장시 도감의 요구와 독촉이 급박하므로 그 관을 비울 수가 없는데도 이조 판서 송시열이 한결같이 허물을 인책하고 출사하지 않으니 즉시 명하여 불러서 그로 하여금 회계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시열이 병으로 나오지 않으므로 재차 불렀다. 시열이 궐문 밖에 이르러 소를 올리고 사직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앞서 선왕이 이미 송시열 등을 불러 써서 장차 서정을 개혁하고 쌓인 폐단을 정돈하고자 하였다. 이에 드디어 어사를 팔도에 나누어 파견하여 나라의 곡식을 도둑질하는 것, 아권(衙眷)을 참람히 거느리는 것, 군민을 침해하는 것, 경상(京商)과 결탁하는 것, 서울로 뇌물을 실어 보내는 것, 토호에게 아첨하는 것, 형장(刑杖)을 남용하는 것, 주연에 빠지는 것, 사결(私結)을 은밀히 쓰는 것, 하리(下吏)에게 행정을 맡기는 것, 진휼의 부지런함과 태만한 것, 농사의 상황, 휼전의 시행 여부, 유민(流民)들이 다시 돌아오는지의 여부, 추종(騶從)의 다과, 공봉(供奉)의 풍요하고 검소한 것 등 17조로 열읍을 순방하여 탐문하고, 또 군병 전선(軍兵戰船)의 허실 및 모든 궁가와 각 아문·사대부의 둔장(屯庄)·염분(塩盆)·어전(漁箭)·선척(船隻)·원당(願堂)과 정사를 어지럽히고 백성을 해치는 자를 아울러 순찰하게 하여 장차 변통 정리하려 하였는데, 어사가 복명하기 전에 국상을 만나 각도의 어사가 모두 돌아옴으로 인해 일 또한 흐지부지되어 여론이 유감스럽게 여겼다.
완남 부원군 이후원이 재차 소를 올려 사직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6월 9일 무술
정원이 아뢰기를,
"대사헌 송준길이 신들에게 전언하여 이르기를 ‘대면하여 천안(天顔)을 우러러보고 아울러 직접 아뢸 일이 있으나 성상께서 편찮으시기 때문에 감히 못한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몹시 서로 보고 싶으나 기력이 없어 만나지 못했다. 조금 기다리되 하고 싶은 말은 먼저 써서 올리게 하라."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오늘날의 막중한 일은 오직 성궁(聖躬)을 보호하는 데에 있으므로 신은 홀로 걱정하고 염려하여 밤낮 초조합니다. 삼가 듣건대 너무 지나치게 수척하고 학질이 다시 발작한다고 하니, 이는 비위(脾胃)의 손상을 입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그대로 버려두어 더욱 극심하게 되면 자전이 자식의 병을 걱정하는 심정을 이루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며 종묘 사직과 신인(神人)의 경동이 또한 어떻겠습니까. 그러므로 입대하여 《예경》의 뜻을 상세히 진술하려 하였으나 기회를 얻지 못하여 더욱 초조히 걱정하는 마음을 참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였다.
승지 김수항이 아뢰었다.
"어진 선비를 불러들이라는 분부를 받고 송준길에게 물으니 ‘전 자의(諮議) 이상(李翔)에게 일찍이 권유의 하교가 있었는데 지금 이미 고향에 내려갔으니, 권시(權諰)·윤선거(尹宣擧) 이 두 사람과 함께 불러야 한다.’고 합니다. 이 세 사람에게 보낼 하유초(下諭草)를 함께 써서 드립니다."
6월 10일 기해
의관 신가귀가 처형되었다. 하명(下命)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지만 거리끼는 일로 인하여 즉시 형을 시행하지 못하였다가 지금에서야 교살로 집행하였다.
우의정 정유성이 세 번째 소를 올려 면직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정원이 아뢰기를,
"듣건대, 이유태가 지금 도성 밖에 있는데 소를 올리고 귀향할 계획이라 합니다. 마땅히 권유하여 도성으로 불러들이는 거조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즉시 사관 유명윤(兪命胤)을 보내 권유하여 들어오게 하였다. 이에 유태가 답하기를,
"성상의 권유가 이에 이르니 어찌 감히 성급히 귀향하겠는가."
하고 도성에 들어와 다시 소를 올리고 귀향을 청하였다. 상이 영원히 떠나갈 생각을 말라고 회유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유태가 노모가 있다고 하니 본도로 하여금 음식물을 주게 하라."
하였다.
행 부호군 조경(趙絅)이 상소하여 시책(諡冊)을 찬술하라는 명을 사양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이어 조경이 녹봉이 있느냐고 묻자, 정원이 살고 있는 고을로부터 월봉(月俸)만 줄 뿐 녹은 받지 않는다고 대답하니, 상이 해조로 하여금 음식물을 주게 하였다.
6월 11일 경자
이조 판서 송시열이 소를 올려 사직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죄 많은 사람으로 맨 먼저 은전을 그르쳐 사람들의 이목을 놀라게 하였으니 그 영향이 적지 않습니다. 성명께서는 무슨 연고로 이와 같이 지나치게 하시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또 신이 개탄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관중(管仲)은 패자(伯者)의 보좌이나 오히려 이르기를 ‘예의염치(禮義廉恥)는 곧 네 가지의 근간이 되는 것이니, 이 네 가지 근간이 신장되지 못하면 나라가 멸망한다.’ 하였고, 주자(朱子)의 훈계에도 이르기를, ‘사대부의 사수출처(辭受出處)는 유독 그 자신의 일이 될 뿐 아니라 풍속의 성쇠에 관계된다.’ 하였습니다. 신이 전선(銓選)의 관직으로 능히 그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여 남의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전하께서는 신으로 하여금 염치를 잊고 억지로 출사하게 하니, 전하께서 미천한 신을 대우하심이 너무 박하지 않습니까? 또 듣건대, 홍여하의 상소를 고쳐서 드리게 하였다 하니, 신의 죄명이 예람(睿覽)를 거치지 않고 앞서의 연좌된 바가 아직 미정의 사이에 있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본직 및 겸대한 승질(陞秩)을 체차하시어 필부가 치욕을 멀리하려는 뜻을 온전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내가 경을 강압할 수는 없으나 지금 만약 체직을 허락하면 훗날의 폐단이 있을까 염려된다. 경은 사양하지 말고 공무를 수행하라."
하였다. 처음에는 ‘본직에 대해서는 체직을 허락한다.’고 답하였는데, 정원이 아뢰기를,
"송시열이 굳이 사직하는 것이 애당초 홍여하의 소척(疏斥)에서 나온 것이므로, 성상의 하교에 이른바 ‘내가 실로 여하의 망령됨을 아는 터라 이로 경의 관직을 체차할 수 없다.’고 한 것은 참으로 지당한 처사입니다. 한 사람의 망령된 상소로 인하여 경솔히 전형의 중임을 체직한다는 것은 국가의 체면으로 보아 이처럼 전도할 수 없는 것으로 중외의 이목을 놀라게 할까 염려됩니다. 어찌 모두 성상의 뜻이 박절하지 않게 예우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임을 알겠습니까?"
하고, 곧 비지(批旨)를 도로 봉환하였기 때문에 다시 고쳐서 내린 비답이다.
예조가 대간이 최복(衰服)을 추후에 입는 일에 대해 아뢴 것을 대신에게 의논할 것을 청하였다. 정태화·심지원은 아뢰기를,
"신들의 뜻은 전에 모두 피력하였으므로 지금 다시 의논하기 어렵습니다."
하고, 이경석은 주자(朱子)의 말을 인용하여 의논을 드렸는데, 그 대략에,
"신이 고례를 회복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만약 계빈 때에 추복(追服)하게 되면 주자가 당면하였던 때에 그가 의논드렸던 본의와 서로 약간 같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주자가 상복을 의논드린 차자에 이르기를 ‘수황(壽皇)은 역월(易月)의 기한이 끝난 후에도 오히려 통상적인 상례를 집행하여 조의 조관(朝衣朝冠)을 모두 성긴 베로 하였으니 매우 훌륭한 덕행이었습니다. 태상 황제(太上皇帝)께서 불편하여 몸소 상차에 나아가지 못하니, 폐하께서 적자로서 대통을 잇게 되고 그리하면 승중복(承重服)을 입는 것이 예율(禮律)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의당 한결같이 수황이 이미 행한 예법을 따라야 하는데, 한때 창졸함으로 인하여 미처 자세히 의논하지 못하고 드디어 칠사 천황(漆紗淺黃)의 상복을 썼습니다. 기왕의 실수는 추급하여 고칠 수 없더라도 오히려 앞으로 계빈과 발인이 있으니 그 때 다시 초상의 복을 입게 하면 변제(變除)의 절차도 오히려 의논할 수 있고 관리와 군민 남녀의 부모복을 입는 예도 또한 마땅히 점차 바로잡힐 것입니다. 지나치게 화려하게 하지 말고 점차 옛 제도를 회복하기 바랍니다.’고 하였으니, 오늘날의 제도에 비해 어떠합니까. 지금의 논자들은 주자께서 앞서 말한 상단의 내용을 잘라 버리고 곧 추복(追服) 한 가지만을 들어 쟁집하니 주자의 본의에 어긋나는 것이 아닙니까. 주자가 추복의 의논에 있어 옛 제도를 다 회복하자고 직청하지 않았습니다. 옛날 성현이 예를 회복하지 못한 것을 개탄하지 않은 적이 없으나 또한 경솔히 고치는 것을 혐의하였으니 주자의 뜻을 알 만합니다."
하고, 이시백은 아뢰기를,
"오랫동안 준행하던 복제(服制)를 이처럼 당황한 때에 경솔히 변경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다시 송시열·송준길에게 물을 것을 명하자, 시열은 ‘상소하여 자책 중에 있기 때문에 감히 의논드릴 수 없다.’는 것으로 사양하고, 준길은 ‘신의 뜻은 이미 전에 다 진술하였다.’고 하였다. 상이 여러 대신의 의논에 따를 것을 명하였다.
상이 양지당(養志堂)에 나아가 삼공 및 이조 판서 송시열, 대사헌 송준길을 인견하였다. 이때 시열은 불렀으나 병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병세가 그리 대단치 않거든 나와 주기 바란다. 서로 보지 못한 지 오래되었고 또 면대하여 권유할 일이 있다."
하니, 정원이 이 뜻으로 전언함으로써 시열이 나아가 입시하였다. 상이 정태화에게 이르기를,
"자전께서 나를 여기에서 피출시켜 재궁을 멀리 떠나게 하시니 심사가 비통하여 더욱 말할 수 없다."
하니, 태화 등이 시열과 준길로 더불어 교대로 나아가 《예경(禮經)》을 인용하며 힘써 임시 방편을 따를 것을 진술하였다. 이에 상이 눈물을 흘리면서 답하기를,
"내가 비록 병이 있으나 그리 심중하지 않은데 경들이 지나치게 염려한다."
하였다. 준길은 다시 성종 대왕이 정신(廷臣)에 답하여
"소식(素食)을 하는 것은 과연 어려우나 다른 일은 스스로 다 할 수 있다."
고 한 하교를 인용하여 반복해 진달하고, 시열이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 몸을 보전하여 소중히 할 것을 생각지 않으시어 후회를 남기게 되면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모두 죄인이 되고 전하 또한 효가 되지 못합니다."
하고, 태화는 아뢰기를,
"전에 어사를 파견할 때 선왕께서 특별히 신과 송시열로 하여금 봉서(封書) 중의 절목을 의정(議定)하게 하였는데, 흉년을 당하여 도리상 간소함이 마땅한 것 같아 재우(宰牛) 한 가지 일은 처음부터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대개 이 일이 각 고을에 항상 있는 것이지만, 적발이 되고 나면 비록 정치를 잘하는 자라도 으레 죄에 걸려 파직됨을 면치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처음부터 봉서에 들지 않았다면 어찌 거론할 필요가 있겠느냐?"
하였다. 시열이 본직을 간곡하게 사양하니, 상이 이르기를,
"실책은 저 사람에게 있는데 경이 어찌 이렇게까지 굳이 사양하는가? 경이 이미 선조에 명을 받아 봉서를 의정하였는데, 지금 사직으로 인하여 회계하지 않으면 복명을 하지 않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홍여하의 상소가 이후원을 몹시 공격하고 또 송시열을 공격하였습니다. 만약 이후원을 공격하여 국사를 담당하지 않았다고 하면 혹 괜찮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만, 어찌 치우치게 공격하여 나라를 그르쳤다고 지적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정유성은 아뢰기를,
"여하가 터무니없는 말을 날조하여 대신을 지적해 공격하나 그 뜻은 실로 시열 등에게 있습니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여하가 후원을 공격한 그 한 가지 일로 보더라도 허구의 실상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을 인하여 전조(銓曹)를 공격함에 미쳐서는 말을 이리저리 바꾸어 가며, 음관을 자의에 의망한 것으로 그 죄안을 만들었습니다. 허망함이 이와 같으나 새로 시작하는 때의 언로에 관계되기 때문에 다시 써서 드리게 하였습니다. 성상께서 이미 그 상소의 간사함을 알고 계시니 명백히 하교하여 다시 받들지 말게 하소서."
하였다. 준길은 아뢰기를,
"선조 때 있었던 일이어서 비록 논죄하는 것은 불가하나 이는 간교한 사람의 사악한 말이니 반드시 통렬히 분변하여 시비를 바로잡기 바랍니다."
하고, 동부승지 이은상(李殷相)은 아뢰기를,
"지금 만약 이판을 체직하신다면 여하의 간교한 계략에 빠지는 것이니 훗날의 폐단을 이루 형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난 밤에 봉환(封還)한 비지(批旨)를 성상께서 혹시라도 깊이 생각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신의 생각에는 우선 체직을 허락하여 그 마음을 편히 해주는 것이 무방할 것 같다고 보았는데, 지금 은상의 말을 들으니 신의 소견이 그릇되었습니다."
하였다. 이에 상이 이르기를,
"처음 체직하고자 한 것은 그의 진정을 굳이 거절하기 어려웠기 때문인데 지금 이 말을 들으니, 만약 그를 체직하면 그 간교한 계책에 빠지는 것이니 실로 윤허하여 따르기 어렵다. 이판은 어찌 나의 지극한 정성을 헤아리지 않는가."
하였다. 시열이 또 고사하였으나 상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준길이 유후성 등에 대한 논계를 오랫동안 윤허하지 않고 있어서 물의가 더욱 격렬한 상황을 진술하니, 상이 후성은 큰 죄가 없다는 것으로 하교하고, 이어 대관(臺官)이 잘못 들은 일을 들어 답하였다. 유성과 준길 등이 모두 이기선(李耆善)은 실로 맥법(脉法)을 알지 못한 것이라고 진술하였다. 이에 상이 답하기를,
"본래 죽이려고 하지는 않았다."
하였다. 준길이 또 약방 제조의 죄를 논하니, 상이 이르기를,
"부처(付處)는 과중하다."
하였다. 상이 허목의 소를 대신에게 내보이면서 이르기를,
"가칠(加柒)하는 일이 실로 온당치 않은 줄은 아나, 불행히도 이 변고를 당하였으니 어찌 모두 옛 제도대로 할 수 있겠는가."
하니, 태화·유성 등이 대답하기를,
"계빈(啓殯)은 반드시 길일을 택하여 하는 것인데, 지금 가칠로 인해 자주 개폐하니 몹시 온당치 않습니다."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허목의 말이 옳습니다. 외재궁(外梓宮)의 가칠이 또한 어찌 깊은 염려에서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태화도 아뢰기를,
"신 역시 허목의 말을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신하가 임금의 상복을 입는 제도에 대하여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일치하지 않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신들의 의견은 전에 이미 진달하였으나 우상이 참여하지 않았으니 수의하여 하문하여야 될 것입니다."
하였다. 유성은 아뢰기를,
"조종조가 시행하지 않던 일을 지금 갑자기 행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예는 실정과 형식이 서로 맞는 것이 귀중합니다. 이미 최마 질대(衰麻絰帶)가 있으니 음식과 기거 또한 마땅히 상례(喪禮)로 자처해야 하지만, 혹시라도 구애되거나 불편한 일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전부터 변혁하지 못하는 것도 어찌 이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시열은 아뢰기를,
"노(魯)나라 임금의 상사에 계씨(季氏)가 맹경자(孟敬子)에게 묻기를 ‘임금의 상사를 위해 무엇을 먹느냐.’고 하니, 경자는 ‘죽을 먹는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에 계씨의 말이 ‘사람들로 하여금 진정으로 거상하지 아니하였다고 의심을 받지 않겠는가. 나는 밥을 먹겠다.’고 하였는데, 선유들은 소인으로서 기탄이 없는 자라고 말하였습니다. 지금 어찌 실정에 맞지 않는다 하여 경솔히 그 예를 폐하겠습니까. 이경석이 진술한 바는 ‘주자의 계빈(啓殯)시 추복설은 곧 사군(嗣君)이 초상복을 추복하는 것을 가리킴이니, 지금 제신이 이미 성복한 후 부모의 상복과 같이 추복하는 뜻이 아니다.’고 하나, 이는 전연 그렇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주자는 일찍이 말하기를 ‘아비와 임금을 위하여 참최(斬衰) 3년으로 하는 것은 천자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가감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주자의 말에 따라 최복을 만들어서 제사를 모실 때 쓰고 전일에 만든 최복을 또 단을 감쳐서 일을 볼 때 입는 옷으로 사용하니, 이는 변혁한 일이 아닙니다."
하고, 준길은 아뢰기를,
"주자의 뜻은 제사에는 제복을 쓰고 일을 볼 때에는 공복(公服)을 쓰고자 하였습니다. 추복의 설은 그 미비한 것을 추보(追補)하는 데에 불과합니다."
하고, 유성은 아뢰기를,
"명묘(明廟)의 상사에 이황(李滉)이 이 일을 발론하였으나 박순(朴淳)이 어렵게 여겼고, 그후 기축년에 김집(金集)이 또 이를 발론하였으나 김상헌(金尙憲)이 어렵게 여겼습니다. 이 두 신하가 어찌 소견이 없어서 변혁을 반대하였겠습니까?"
하고, 준길은 아뢰기를,
"우상 이 이른바 조종조에 통행하던 규례를 갑자기 변혁하기 어렵다는 것은 그럴듯하나, 이경석의 의논은 그 논의와 함께 공격하는 것 같으니 일이 몹시 온당치 않습니다."
하고, 시열은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빈전에 제사할 때 소찬(素饌)을 쓴다고 하는데, 소찬을 쓰는 것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생각건대 전조 때 부처를 숭배함으로써 이와 같이 그릇된 예가 생긴 것 같습니다."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고 상신 황희(黃喜)가 계품하여 결정하였다고 합니다."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그 말이 옳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조석 상식에는 또한 소찬을 쓰나, 주다례(晝荼禮)에는 평소처럼 내전으로부터 고기 반찬을 갖추어 썼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외부의 여론이, 모든 궁가의 진향(進香)이 풍요롭고 사치하다고 비난합니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궁가의 진향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법으로 규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 이기려고 힘써 그 폐단이 적지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인목 왕후(仁穆王后)·인열 왕후(仁烈王后)의 상사 때부터 이미 이 예가 있었는데, 대행 대왕이 본래 이런 일을 좋아하지 않았고 또 이기려고 힘쓰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성심이겠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내전으로부터 일정한 격식을 만들어 그 격식을 넘지 않게 하소서."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신의 형편이 민망한 데다가 체차의 하명까지 있었습니다. 어찌 감히 주제넘게 공무를 수행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판의 사양이 이에 이르렀는데 한결같이 독촉하는 것이 또한 미안한 것 같다. 경들의 뜻은 어떠한가."
하였다. 태화는 아뢰기를,
"그를 예우하는 도리에 있어 또한 강권하기도 어렵습니다. 우선 체직을 허락하여 그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은상(殷相)은 아뢰기를,
"이판이 병으로 체직되는 것은 괜찮지만, 만약 여하의 상소로 인해 체직된다면 듣는 사람들이 반드시 놀랄 것이며 또한 크게 훗날의 폐단에 관계될 것입니다."
하고, 유성은 아뢰기를,
"어찌 하찮은 여하의 소로 인하여 경솔하게 전형을 체직하겠습니까."
하였다. 시열이 또 고사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사양은 비록 이와 같으나 어사의 서계를 어떻게 처리하겠는가?"
하니, 시열이 아뢰기를,
"신이 비록 본직에서 체차되더라도 영상과 함께 의논하여 회계하면 또한 불가함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장령 허목의 상소에 답하기를,
"진술한 일은 내 마땅히 채택하여 시행하리라."
하였다. 그 소에 이르기를,
"빈렴의 절차는 군자가 반드시 성실히 하고 삼가서 후회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지금 부득이하여 재궁을 개조하는 변례가 있어 칠을 올리는 일이 이미 빈소를 차린 후에 나왔습니다. 《상대기(喪大記)》에 이르기를 ‘임금의 빈소에 순(輴)이란 상여를 쓰고 관(棺)을 그 위에 올려 놓고서 흙으로 바른다.’고 하여 귀천이 모두 유악(帷幄)에 거처하는 것은 유암(幽暗)을 숭상하고 유택으로 간다는 뜻에서입니다. 지금 제기를 진설하지 않고 일산을 들지도 않으며 세 번 인기척을 내어 세 번 알리는 절차도 없이 하루 걸러 칠을 올림으로써 빈례(殯禮)를 이루지 못한 것이 벌써 30여 일입니다. 신은 선왕을 받드는 도리에 반드시 성실히 하고 반드시 신중히 해야 할 것이 도리어 예를 다하지도 못하게 될까 염려됩니다. 예로부터 관에 칠을 올리는 것이 일정한 수가 없었습니다. 단궁(檀弓)에 이르기를 ‘임금이 즉위하여 널을 만들어 해마다 한 번씩 칠을 올려 간직한다.’고 하였으니, 널이란 땅속에 묻히는 관입니다. 그렇다면 탕(湯)은 재위 13년이니 널에 열 세 차례 칠을 올렸을 것이며 무왕(武王)은 재위 7년이니 널에 일곱 번 칠을 올렸을 것입니다. 지금 재궁에 칠을 올린 것이 영원을 기하는 옛 제도에 준할 수 없으나 탕과 무왕의 널에 비하면 너무 후합니다. 더구나 지금은 열 다섯 번 칠을 올렸으니 옛 제도에 비하여도 예에 어긋난다고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효(聖孝)의 지극한 정성에 대하여 제도에 어긋난다 하여 성급히 그만두라고 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신의 생각에는 외재궁(外梓宮)의 가칠은 일정한 격식으로 제한하지 않으나, 오늘날 재궁의 예는 인산 전의 날짜가 많아 칠을 올린 것이 견고하고 두터워 내관이나 외관이나 모두 차이가 없으므로 예에 있어서도 극진하지 못한 유감이 없으며, 장막과 빈소도 유암을 숭상하는 도리에 있어 또한 만족하다고 봅니다."
하였다. 이 상소가 들어갔는데 오랫동안 궁중에 두었다. 연신(筵臣)이 그 온당치 않음을 진술함으로써 이날 비로소 비답이 내렸다.
상이 원상 정태화·심지원에게 하교하였다.
"이판이 굳이 사양하여 마지않으니 한결같이 강권할 수 없다. 우선 체직하여 그 마음을 편케 하도록 하라."
원상 정태화·심지원에게 금일부터 파출할 것을 명하였다.
6월 12일 신축
이조 참판 이일상(李一相), 참의 조복양(趙復陽)이 상소하여 체직을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이판의 체직을 허락한 것이 어찌 홍여하가 배척한 때문이겠는가. 실로 이판의 뜻을 받아들인 것이다. 경들은 그와 같지 않은 것이 있다. 여하의 간사하고 요망한 말을 내 이미 알고 있다. 사양하지 말고 직무를 수행하라."
전 판서 송시열이 상소하여 판의금을 사양하고 새로 승급한 숭정(崇政)의 품계를 강등하여 줄 것을 청하니, 답하였다.
"경이 올린 차자의 내용을 보니 마음이 몹시 경동되어 내가 성의가 미덥지 못한 것이 유감스럽다. 전에는 내가 경의 지극한 심정을 생각하여 억지로 허락하였는데, 경은 어찌 이를 헤아리지 않고 또 사양하는가? 경 또한 나의 지극한 심정을 생각하여 다시 사양하지 말기를 바란다. 빨리 나와 공무를 보라."
지평 강유후(姜裕後)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후원(李厚源)이 재차 정승의 지위에 올라 늘 겸양만 하고 건의하여 주장한 일이 없으니, 만약 그가 몸소 대신이 되어 국사를 담당하지 못한 것으로 공격한다면 그것은 괜찮지만, 제멋대로 하여 나라를 그르쳤다는 등의 말로 지목하니, 어찌 천만 부당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후원이 과연 잘못인 줄 알면서 기필코 이루어낸 일이 있고 전조(銓曹)도 인재 등용의 실수가 있다면, 어찌 그 사실을 낱낱이 거론하고 분명히 그 사람을 지적해 말하여 공격하지 않고 이처럼 머리와 형체를 감추고 귀신같이 모호한 말을 하여 성상의 귀를 현혹시킵니까? 이처럼 질투하는 무리는 마땅히 사방의 먼 곳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그 상소가 응지(應旨)를 핑계하니 함부로 유방(流放)의 법을 적용할 수 없겠으나, 어찌 이로 인해 경솔히 전형의 자리를 체직하여 그의 간사한 계책을 이루어 주겠습니까. 송시열이 잠시 전형의 자리를 떠난 것은 대단치 않으나 그것은 실로 군자와 소인이 소장하는 기미에 관계됩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는 실로 내가 선처하지 못한 때문이니 내 몹시 부끄럽다."
하였다.
집의 이유태가 상소하여, 본도로 하여금 양찬(糧饌)을 공급하라는 하명을 사양하고 이어 고향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봉양할 것을 청하니, 답하였다.
"어미의 병으로 귀향을 청하니 내 어찌 차마 억지로 머물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대가 올라온 지 오래지 않으니 굳이 사양하지 말고 속히 나와 공무를 수행하라. 하사한 것은 작은 찬물이다. 또 무슨 사양을 하는가?"
우의정 정유성이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홍여하의 상소는 응지(應旨)를 가탁하고 대신·총재를 제멋대로 공격하고 착한 사람들을 이간하니 그 정상이 패악합니다. 조정의 조처는 의당 분명하게 시비를 가려 그의 사악한 말을 통렬히 공격해야 하기 때문에 신이 전일에 총재를 함부로 체직함이 부당하다는 뜻으로 누누이 진술하였는데, 파출한 뒤에 즉시 송시열을 체직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성상의 생각은 비록 강권하고자 하지 않는 데에서 나온 것이지만, 선왕께서 신임하고 의지하던 신하를 한 사람의 요망한 말로 인해 면직을 허락하니, 보고 듣는 자만 놀라고 당혹할 뿐 아니라 훗날의 폐단을 이루 다 형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미 내려진 명령은 비록 도로 거두기 어려우나 차차 수일을 기다려 특별히 새로운 명령을 내리시면 중외의 의혹이 풀릴 것이며 선조의 은우(恩遇)도 변함이 없게 될 것입니다. 오직 성명께서는 재량하여 조처하소서."
하니, 상이 충고의 지극한 말을 마땅히 유념하겠다고 답하였다.
부호군 조경(趙絅)이 상소하기를,
"신이 물러갈 나이가 되어 초야에 물러가 있는데 대행 대왕께서 특별히 월봉(月俸)을 주었습니다. 뜻밖에 지금 지부(地部)가 또 성상의 하교로 곡식을 실어 왔습니다. 신은 성상께서 미처 신이 월봉을 받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였는가 염려됩니다. 빨리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비변사가 송시열을 그대로 본사의 제조에 차임할 것을 청하였으니, 대개 이판을 체직하면 겸직한 제조도 함께 체직되기 때문이다.
삼가 상고하건대, 시열이 물러난 후 이공(貳公)·중추(中樞) 등의 직임을 비록 간절히 사양하였으나 조정은 직무가 없다는 이유로 체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비국 당상의 직임도 일찍이 사양하였으나 면직을 얻지 못하였다. 조정이 체직하지 않는 것은 또한 성상의 예우가 쇠하지 않아 부름의 명령이 계속되며 다시 돌아오기를 기대한 것 때문이었는데, 질투하는 자들은 이로써 시열을 질시하여 기세의 성대함이 이와 같다고까지 하니 매우 심하다.
6월 13일 임인
양남(兩南)의 감사(監司)가 모두 수재가 몹시 참혹하다고 계문하였다.
이 때 상이 또 학질을 앓아 기력이 떨어지므로 약방이 백출(白朮) 가루에 계강(桂薑)을 조화시켜 환약을 지어 드릴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양지당(養志堂)으로 옮겨 거처하는 것을 미안하게 여겨 여막으로 돌아가고자 하므로 약방이 그대로 머물 것을 간청하니, 상이 유념하겠다고 답하였다.
6월 14일 계묘
정언 여성제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대략 듣건대, 홍여하의 상소는 오로지 이후원이 나라를 망친 죄를 공격하고 또 송시열이 전형을 맡아 인재를 잘못 등용하는 것으로 논박하였다 합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분명한 교지를 내려 괴망한 말을 타파하지 않으시니 신은 삼가 애석하게 여깁니다. 여하의 뜻은 후원이 시열과 서로 친밀하니 곧 후원을 공격하면 시열에게 영향이 미치리라는 계책을 낸 것이니 가벼이 시열의 직책을 체차하지 말아야 했음이 분명합니다."
하고, 또 이르기를,
"지금 공사간의 재정이 바닥난 때에 비록 제향에 소용되는 것이라도 오히려 절감하여 선왕이 백성을 구휼하신 성대한 덕을 따라야 합니다. 신이 삼가 듣건대, 소선(素膳) 중에 들깨를 넣어 드리는 수가 한 달에 많을 때는 8석이나 된다고 하니, 비록 미세한 일이나 소비가 너무 지나칩니다. 또 제사에 사화(絲花)를 쓰는 것은 원래 정례(正禮)가 아니며 또 불사(佛事)에 가까운 것이니, 잘못 유래된 전례를 그대로 따를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고 들깨에 관한 일은 즉시 해조로 하여금 조사하여 아뢰게 하였다.
해서(海西)에 수재가 참혹하여 곡식이 많은 손해를 입었다.
6월 15일 갑진
고부 정사(告訃正使) 우의정 정유성, 부사 유심(柳淰), 서장관 정익(鄭榏)이 청국(淸國)으로 갔다.
송시열이 전형에서 체직되자, 교리 이시술(李時術)이 차자를 올려 시열의 전직을 그대로 유임시킬 것을 청하고자 하여, 부응교 정만화(鄭萬和), 교리 김만기(金萬基), 수찬 김만균(金萬均) 등과 연명으로 통문을 내어 여러 동료들이 모두 이에 따랐다. 그런데 회합할 때 정만화는 그 형인 정태화가 실로 시열의 체직을 찬성했다는 일로 인혐하여 첨석하지 않았고, 만기·만균 등은 또 말하기를
"이후원이 고부(姑夫)가 되는데, 차자의 말이 또한 이 분에게 언급될 것인데도 미처 혐의가 있는 줄 알지 못하였다."
하고 모두 들어가 참석하지 않았다. 교리 안후열(安後說)과 수찬 오시수(吳始壽)는
"완의(完議) 후에 여러 동료가 혐의를 칭탁하였으니 무시를 당한 것이다."
하고 서로 뒤이어 나갔다. 그래서 차자를 올리려던 일이 정지되고 말았다. 이날 대사간 이정기 등이 모두 탄핵하려 하자, 헌납 목내선(睦來善)이 말하기를
"만기 등이 갑자기 혐의를 피하고 그들이 발론하려던 일을 동료에게 책임지우니 어찌 무시당하는 혐의가 없겠는가. 지금 논핵하려면 경중을 분별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으나, 여러 동료들이 따르지 않으므로 드디어 모두 피혐하였다.
그 이튿날 헌부의 처치에 있어 대사헌 송준길, 장령 황준구, 지평 이합·강유후가 이정기 등을 출사시키고 목내선을 체직하고자 하니, 장령 허목이 불가함을 고집하였다. 황준구 등이 피혐하기를,
"옥당의 관원들이 다 같이 실수한 바 있는데 다른 의견을 내어 등급을 나누고자 하며 구차히 고집하여 소요를 야기합니다. 그간의 시비는 환하게 분별되는 것이므로 신들이 이와 같이 처치하고자 하여 허목에게 통지하였으나 의견이 서로 엇갈려 끝내 어렵게 여겼으니, 이는 모두 신들이 경시당한 소치입니다."
하고, 이튿날 허목이 또 인피하기를,
"홍여하의 상소에 이름을 지적하여 공격한 것은 오로지 이후원에 있습니다. 옥당의 차자가 비록 송시열을 위하여 발론하는 것이지만, 여하가 한 말을 들어 논할 때 이후원을 변설하는 것이 의당 제일 첫째의 일이 될 것입니다. 그 처음 연명으로 통문을 낼 때는 피혐한 여러 사람들이 모두 그 혐의를 말하지 않다가 차자를 초할 때 이르러서야 비로소 혐의를 피하고 일어나니, 비록 그 실상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또한 사람들의 의심을 살 만합니다. 끝내는 동료로 하여금 도리어 무시당함으로 피혐하는 허물을 지우니, 그 실수를 논하면 책임질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간원의 많은 관원이 사피하는 것이 비록 다 같이 실수한 바가 있어서라고 말하지만 실은 은연중 차자를 중지한 것을 질책함입니다. 그런데 일을 잘못 전도시킨 자는 그 실수가 도리어 가벼우니 신은 그것이 옳은 줄 모르겠습니다. 성상의 슬픔이 그지없는 중에 진실로 심려를 어지럽히는 것이 죄가 됨을 아나, 잘잘못을 논하고 시비를 가림에 있어 모두 말하여 의리의 정당함을 밝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모두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송준길이 이어 피혐하기를,
"옥당 여러 관원의 거조가 전도되어 모두 실책이 있으니 서로 규계하는 논박은 불가함이 되지 않습니다. 그 사이의 곡절이 설사 차별이 있더라도 본래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어찌 반드시 구구하게 분등하여 구차한 결과를 면치 못하게 하겠습니까? 이러한 뜻으로 그 입락(立落)을 결정하려 하였는데 허목의 의견이 이와 어긋나 끝내 일치하지 못하였고 결국에는 슬픔 속에서 조리하고 계심을 어지럽혔습니다. 체직을 명하소서."
하니, 상이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응교 이경휘(李慶徽), 부수찬 김우형(金宇亨) 등이 처치한 차자에,
"통문을 내고 차자를 정지하였으니 그 실수한 바가 모두 균등하여, 율을 적용하는 경중에 있어 차별할 필요가 없습니다. 억지로 나누려고 하면 자못 평온을 해칠 것입니다. 입락할 때 시비는 자연 드러날 것인데, 처음에는 고수하다가 끝내는 변명하니 그 책임은 돌아갈 데가 따로 있습니다. 양사의 여러 관원들을 출사시키고 목내선과 허목은 체직하소서."
하였다. 그 이튿날 대사간 이정기 등이 아뢰기를,
"근일 홍여하의 일을 대신·유신이 매우 자세히 진술하고 전하께서 또 간사함으로 하교하였습니다. 그러나 경솔히 송시열의 체직하지 말아야 할 관직을 체직하였으니, 옥당은 논사(論思)의 자리로서 명백히 진술하여 곤직(袞職)의 부족함을 보좌하는 것은 곧 그의 직분입니다. 정만화·이시술·김만기·김만균은 차자를 올릴 뜻으로 통문을 내고, 안후열·임한백·오시수 등은 혹은 잘 알았다고 쓰고 혹은 자신의 의견 또한 그렇다고 하여 완의가 하나로 모아진 후에, 만화는 반드시 피하지 않아도 될 혐의를 피하고 만기와 만균은 비로소 처음부터 피했어야 할 혐의를 깨닫고서 모두 들어가 참석하지 않았으니, 그 처음의 그릇됨과 일에 임해 전도한 실수는 실로 밝게 드러났습니다. 안후열·임한백·오시수는 한 자리에 앉아 같이 의논한 사람으로 차자를 초하려고 하다가, 세 사람이 피혐한 후 갑자기 별도로 의견을 내어 다수를 따르는 규칙을 준행하지 않고 이미 정해진 의논을 묵살해 버렸으니, 그 전후가 일치하지 못하고 진퇴에 근거가 없어 자못 논사의 본체를 상실하였습니다. 이시술은 본래 의논을 제기한 사람으로 더욱 피할 만한 혐의가 없는데도 자립하지 못하고 흐지부지 파하고 나갔다가 최후에 소를 올려 진술하였으나 또한 그 곡절을 밝히지 못하였습니다. 이 7인 등의 사정은 비록 다르나 끝내는 옛 풍속을 추락시켰으니, 그 전도되고 형편없는 자임에는 동일합니다. 아울러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 판서 윤강, 관상감 제조 이응시가 아뢰기를,
"신들이 지금 간심한 바, 남양(南陽)의 옛 고을 터, 장단(長湍)의 김영렬(金英烈), 교하(交河)의 윤반(尹磻), 광주(廣州)의 정난종(鄭蘭宗)·이증(李增), 남양의 홍언필(洪彦弼)·홍기영(洪耆英) 등의 묘산 및 양재역(良才驛) 뒷산, 한강(漢江) 북쪽 가장자리에 있는 산, 왕십리 해동촌(往十里海東村) 이충작(李忠綽) 묘산 정토 근처를 모두 지관(地官)으로 하여금 일일이 상론하게 하고 이원진(李元鎭)·윤선도(尹善道) 역시 산자리를 평가하게 하여, 그 중 좀 우수한 네 곳을 그림을 그려서 올립니다."
하니, 상이 윤강에게 명하여 네 곳 산 도형 중 쓰기에 합당한 것을 등차를 매겨서 들이라 하였다. 이에 윤강이 답하기를,
"수원(水原) 산은 용혈(龍穴)과 사수(砂水)가 진선 진미하니 이는 실로 천재 일우의 길지로서 결코 다른 산에 비교할 수 없으나, 네 곳의 산은 결코 대용(大用)에 합당치 못합니다. 그러나 성상의 하교로 인하여 여러 지관으로 하여금 등급을 매기게 하니, 교하 윤씨의 산이 가장 좋고, 남양 홍씨의 산이 다음이고, 광주 정씨의 산이 그 다음이고, 한강 북쪽 산이 네 번째가 된다고 합니다."
하였다.
6월 16일 을사
이경휘(李慶徽)를 응교로, 김우형(金宇亨)을 부수찬으로, 권두추(權斗樞)를 주서로, 이명익(李溟翼)을 봉교로, 송시열을 판중추로 삼았다.
연양 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이 차자를 올리기를,
"이후원이 병으로 사직하고 한가로이 살며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는데 홍여하는 나라를 그르쳤다는 누명을 씌웠습니다. 자의(諮議)를 엄선하여야 하는 것을 누군들 모르겠습니까만, 여하는 음관(蔭官)으로 차임하였다고 공격하여 전조를 동요시킬 계책을 꾸몄습니다. 혹은 구언(求言)하는 터에 말하는 자를 죄줄 수 없다고 하나, 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선조가 구언한 의도가 어찌 대신을 모함하고 유신을 공격하는 데에 있었겠습니까. 호오(好惡)가 분명치 않으며 사정(邪正)이 분별되지 않고서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자는 있지 않습니다. 송시열이 그 관직에 안정하지 못하였습니다. 성명께서 우선 체직을 허락한 것이 비록 예우하는 뜻에서 나왔으나, 왕위를 계승한 초기에 성정(聖政)에 손상이 될 것이니, 이것이 정유성이 차자를 올려 도로 제수할 것을 청한 이유입니다. 그러나 신은 삼가 생각건대 체직하지 않았으면 모르지만 이미 체직하고 바로 다시 제수한다면 좀 어색할 것 같습니다. 시열이 더욱 불안하게 생각하면 조처하기는 배나 어려워질 것입니다. 더구나 어사의 서계를 오래도록 처치하지 못하였고 대정(大政)의 진퇴는 더욱 작은 일이 아닙니다. 유성의 말은 이른바 그 하나만 생각하고 둘은 생각지 않은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원임 대신 이하를 인견하였다. 상이 이경석 등을 보고 통곡하자, 경석 등 또한 부복하고 흐느껴 울면서 옥체를 보호할 방법을 번갈아 진술하였다. 이에 병환이 거의 다 나았다고 답하였다.
심지원·윤강 등이 상의한 바, 기전(畿甸)의 모든 산 가운데 국장으로 쓸 수 있는 적합한 곳은 멀리는 홍제동(弘濟洞), 가까이는 수원의 산 이 두 곳을 선택하는 데 불과할 뿐이었다. 상이 이르기를,
"인조 조의 전후 국장 때 무엇 때문에 홍제동을 쓰지 않았는가?"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을해년 산릉은 이곳에 정하였었는데, 인조께서 길이 멀다고 하시어 쓰지 않았습니다."
하고, 경석은 아뢰기를,
"이는 곧 하늘이 정한 곳입니다. 이 어찌 임자를 기다려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시열은 아뢰기를,
"수원은 국가의 관문이 되므로 선왕께서 일찍부터 유의하던 곳입니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철거하여 군민으로 하여금 살 곳을 잃게 함은 아마도 선왕의 뜻이 아닐 듯싶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선왕께서도 일찍이 홍제동이 길지라는 것을 말씀하셨으나 그 길이 먼 것을 혐의하였으니 자손으로서 쓸 수 없을 것 같다."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주자(朱子)의 산릉론(山陵論)에 ‘부양 손씨(富陽孫氏)가 발적한 땅을 국릉(國陵)으로 쓸 만하다.’고 하였는데, 송(宋)나라 수도 임안(臨安)에서 부양까지의 거리는 자못 멉니다. 이로써 자고로 길지를 택하는 데에도 거리의 멀고 가까운 것에 구애되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수원 대진(水原大鎭)은 경도(京都)와 보거(輔車)가 되어 만약 급한 일이 있을 경우 아침에 명령하면 저녁에 이릅니다. 산릉이 중대한 일이어서 폐단을 말할 수는 없으나 민가 수백 채를 일시에 철거해야 하니 지도(地道)로 말하더라도 편치 못할 것 같습니다. 선조(宣祖)의 산릉을 수원으로 의정하였으나, 광해(光海)가 민가를 많이 철거하는 것을 어렵게 여기었고 총호사 이항복(李恒福)이 이를 지당하다 하여 끝내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러 신하가 모두 홍제동이 가장 좋아 쓸 만하다고 하는데 유독 윤강만이 혈형(穴形)이 너무 긴 것으로 흠을 삼습니다."
하고, 정태화는 아뢰기를,
"만약 수원의 산을 쓰면 민가를 이전하는 계획을 미리 강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원 경내에 많이 있는 태복(太僕)의 둔전(屯田)과, 훈련 도감 총융청의 둔전 및 해변의 방죽을 쌓을 만한 곳을 모두 민전(民田)으로 환급함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고, 시열은 아뢰기를,
"예로부터 영원한 국조(國祚)는 없습니다. 수원의 형승이 지금은 비록 잠시 피폐하나 뒷날에는 관방(關防)이 될 것입니다. 정자(程子)가 오환(五患)을 논하는 데 성곽을 가장 꺼리었습니다."
하니, 지원이 아뢰기를,
"수원은 본래 성곽이 없습니다."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군부를 장례함에는 의당 장원한 계책을 두어야 합니다. 어찌 만세(萬歲) 후에 성곽이 되지 않을 것을 보장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외재궁의 가칠은 비록 많으나, 내 생각에는 내재궁의 가칠을 반드시 스무 번을 거듭하고 싶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그렇다면 자주 가칠해야 하니 시일을 늦추지 않아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시열에게 이르기를,
"경과 영상이 함께 선왕의 명을 받았으니, 어사의 서계에 대해서 다만 이조에게만 전례에 따라 회계하게 해서는 안 될 듯하다."
하니, 시열이 아뢰기를,
"성상의 유시가 이에 이르니 일은 비록 법규를 벗어났지만 감히 하명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하고, 태화는 아뢰기를,
"송시열과 비국에 모여 상의하여 회계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연양 부원군 및 우상이 모두 차자를 올려 판중추의 일을 말하였는데, 연양은 우상의 의사를 온당치 않게 여기니 오늘 이를 강론하여 정하고자 한다."
하니, 이경석이 아뢰기를,
"시열의 공정하고 강직한 마음을 온 조정이 모두 아는 바입니다. 시열은 마땅히 제갈량(諸葛亮)이 촉(蜀)을 다스림과 같이 국사를 담당할 뿐이니 원망을 받더라도 돌아보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하고, 태화는 아뢰기를,
"근일 조정의 불안함은 모두 소신이 애당초 선처하지 못한 때문입니다. 신은 상소는 언로에 관계되기 때문에 고쳐 써서 올려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또 신이 정원에 숙직하던 날, 성상께서 이판 체직의 가부를 하문하시기에, 신의 생각에 체직하여 그 마음을 편히 해 주는 것이 그를 예우하는 도리에 있어 불가함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감히 이를 앙달하였는데, 오늘날의 물의가 모두 신을 책망하니 신은 실로 민망하기 그지없습니다."
하고, 지원 역시 같은 내용으로 진달하고 인책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선처를 잘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찌 경들의 잘못이겠는가."
하니, 시열이 아뢰기를,
"신이 변변치 못하였기 때문에 조정의 분란을 일으키다가 다행하게도 체직을 허락받아 감격스러움을 금할 수 없었는데, 대신이 이처럼 불안하게 여기니 하루를 도성에 머물러 있는 것도 황공하기 그지없습니다."
하였다. 경석이 여하의 추고를 청하니, 시백이 아뢰기를,
"파직의 벌로 시행하였으니 시비는 밝혀진 것입니다. 추고는 불가합니다."
하고, 지원은 아뢰기를,
"상하의 공론이 모두 그의 망령됨을 압니다. 어찌 반드시 추고 파직으로 논죄하겠습니까?"
하고, 태화는 아뢰기를,
"오늘날의 일은 시열이 만약 동요하지 않으면 조정은 자연 안정됩니다."
하였다. 대사헌 송준길이 약방 제조 및 어의를 논죄하는 일을 아뢰니, 답하기를,
"제조 는 모두 관작을 삭탈하고, 유후성·조징규 등은 모두 사형을 감하여 정배하라."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소신에 대해 승급도 황공하기 그지없는데 이어 좨주(祭酒)를 겸하게 하는 것은 체례에 어긋납니다. 빨리 체직해 주소서."
하니, 상이 해조에 명하여 품처하게 하였다. 제신이 파출할 때 상이 특별히 시열과 준길을 불러 놓고 이르기를,
"내가 믿는 바는 두 찬선이니 각별히 심력을 다해 나의 미흡한 점을 도우라."
하며 그 말이 몹시 간절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이와 같으니 감격스러운 마음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다만 근자의 일로 말하면 신이 간섭한 일마다 조용하지 못하였습니다. 조정에 머물러 나라에 보답하고 싶지만 도리어 조정에 누를 끼칠까 염려됩니다. 신이 감히 고상히 숨어 스스로 편할 마음을 두는 것이 아니라 다만 구구한 체면을 지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일후에 만약 도울 일이 있으면 어찌 감히 성심을 다하여 만분의 일이나마 보답을 도모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준길은 아뢰기를,
"소신이 만약 말할 만한 일이 있으면 무슨 일인들 말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신은 지혜와 생각이 부족하고 근력이 쇠진하여 자력으로 성상의 뜻에 우러러 보답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신의 걱정되는 심정은 시열과 다름이 없습니다."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심지원이 아뢰기를,
"지금 능호(陵號)를 영(寧)자로 결정하였는데, 어떤 이는 이것이 바로 송 흠종(宋欽宗)의 능호라고 합니다. 이에 다시 전사(前史)를 상고하니, 송조(宋朝)의 능호는 모두 두 글자를 썼는데, 영창(永昌)·영정(永定)·영소(永昭) 같은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흠종의 능호는 영녕릉(永寧陵)이니 지금 영(寧)자 한 자만 쓰는 것은 혐의가 되지 않습니다. 《조야잡기(朝野雜記)》에 말하기를 ‘흠종의 능호를 영헌(永獻)으로 올렸다.’고 하였으니 더욱 혐의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막중한 능명을 익히 강론하지 않을 수 없으니, 다시 여러 대신 및 송시열·송준길 등에게 물으소서."
하니, 이경석이 아뢰기를,
"송나라 능호는 두 글자로 썼다는 것은 명백히 증거할 수 있으니, 영(寧)자 하나로 부르는 것은 상치되는 혐의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고, 송시열과 송준길이 아뢰기를,
"삼가 영·좌상의 계사를 보니, 흠종의 능호가 비록 영녕이라고 하더라도 혐의되는 바가 없는데 만약 영헌이라면 더욱 상관되지 않으니 비록 말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이미 결정한 능호를 경솔하게 고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에 따랐다.
집의 이유태가 소를 올려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노모를 뵈올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대가 출사하기를 내가 날마다 기다렸는데, 지금 이 상소를 보니 서운한 마음을 금치 못하겠다. 다시는 사직하지 말라."
하고, 이어 음식물을 하사하였다.
6월 18일 정미
양사가 약방 도제조 원두표에 대한 중도 부처의 논을 멈추고, 이어 유후성·조징규를 처벌하여 빨리 국법을 바로잡을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대사헌 송준길이 차자를 올려, 헌부의 직을 체차하여 조용히 수양하게 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때마침 입대(入對)를 허락하므로 마음속의 생각을 진술하니, 상이 선을 개진하고 악을 경계해 주는 책임은 오로지 경을 기대한다고 유시하고 이어 안심하고 직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조정이, 상주(尙州)의 군보(軍保) 강사인(姜士仁)이 그 어미의 배 안에 있을 때 남의 고소를 입어 군역(軍役)에 정해졌다는 말을 듣고 도신으로 하여금 조사하여 아뢰게 하니, 곧 태어난 지 한 달이 안 된 자였다. 즉시 군포(軍布)를 감해 주게 하고 또 그 당시 수령의 처벌을 명하였다.
살피건대, 어린아이에게 군포를 징수하는 것은 민생의 큰 폐단이 되는데, 심지어 태어난 지 한 달도 안 되는 아이까지 역무에 배정되니 이는 고금에 없었던 일이니 참으로 한심하다고 하겠다.
평안도에 홍수가 나서 안주(安州)·숙천(肅川)·영유(永柔) 등 고을에 가옥이 가라앉고 사람과 가축이 많이 죽었으며, 또 천둥 벼락으로 죽기도 하였다. 도신이 이것을 계문하자, 상이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을 거행할 것을 명하였다.
6월 19일 무신
총호사 심지원, 예조 판서 윤강, 관상감 제조 오준(吳竣), 산릉 도감 제조 정치화, 호군 이원진 등이 재차 수원의 산을 간심하고 돌아와 복명하면서 연서(延曙), 한강 북쪽, 왕십리, 이 세 곳의 산의 지도를 함께 드리니, 상이 영의정 정태화, 판중추 송시열, 대사헌 송준길, 첨지 윤선도 등을 불러 양지당에서 인견하였다. 상이 심지원에게 묻기를,
"재차 수원의 산을 간심하니 경의 생각에는 어떠하던가?"
하니, 지원이 아뢰기를,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모두 다시없는 길지라 하고 신과 같은 범안으로도 범상치 않음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세 곳의 산은 모두 흠이 있어 국용에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수원 산의 정혈은 윤선도와 이원진의 지점한 곳이 각각 다르므로 단정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윤·이 두 사람은 각각 소견을 진술함이 좋겠다."
하였다. 이에 선도는 원진이 지정한 곳을 협락(狹落)이 된다고 하고, 원진은 선도가 좋다고 하는 곳을 호사(護砂)가 된다고 하여 논쟁이 그치지 않았다. 선도가 또 아뢰기를,
"도로의 원근을 논하지 않고 산의 우열만 논한다면 홍제동이 의당 제일이고 수원이 그 다음입니다. 수원이 홍제동에는 미치지 못하나, 오히려 건원릉(健元陵)의 여러 산등보다는 낫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풍수(風水)가 대단히 좋은 곳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홍제동은 다른 지관들이 모두 한결같이 칭찬할 뿐 아니라 예로부터 길지라고 하였는데, 윤강 혼자서만 흠을 잡으니 알 수 없습니다."
하니, 강이 아뢰기를,
"신이 무슨 소견이 있겠습니까만, 이원진도 현무(玄武) 부리의 괴혈이라고 하니, 어찌 괴혈이 국용에 적합할 수 있겠습니까. 선도는 비록 홍제동을 극찬하지만, 신의 생각에는, 영릉(英陵)이 전기(專氣)가 된다면 이는 곧 그 지엽간에 맺힌 혈인데, 선도가 제일로 삼는 의도를 신 또한 알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수원이 가깝고 또 흉해가 없으니 그 곳을 쓰기로 결정함이 좋겠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그렇다면 산릉의 일은 이미 결정된 것입니다."
하였다. 이어 별지에 적은 것을 드리면서 아뢰기를,
"가옥 5백여 채를 옮겨야 하고 밭 7백여 결을 묵혀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이 상의하여 편리하게 환급하여 민원이 없도록 하라."
하고, 또 묻기를,
"읍거(邑居)는 어느 곳으로 옮기려 하는가?"
하니, 지원이 대답하기를,
"마땅히 본부의 북쪽 고등촌(高等村)으로 옮겨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또 아뢰기를,
"판중추·대사헌도 각각 소견을 진술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시열이 아뢰기를,
"신의 우매한 소견은 이미 앞서 진달하였거니와, 오늘날의 일이 끝내 온당치 못한 바가 있으므로 다시 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홍제동은 지금의 지관들이 다 함께 찬성할 뿐아니라 예로부터 극찬을 받던 곳인데, 어찌 윤강의 말로 인해 버리겠습니까. 성상의 뜻이 이미 수원에 있기 때문에 군신들이 모두 그대로 따라 다른 말이 없는 것입니다. 성상의 뜻이 만약 홍제동에 있다면 사람들의 의견이 또한 필시 그쪽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하고, 준길은 아뢰기를,
"만약 홍제동이 가장 길지임을 안다면 그 곳을 쓰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러나 윤강의 하자와 중의의 칭찬을 신은 분명히 알 수 없기 때문에 극력 쟁변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분명 수원이 길지가 됨을 안다면 관방(關防)의 중대함이야 말할 여지가 없겠으나 십분 완벽하지 않다면 가장 길지인 홍제동을 버리고 그 다음인 수원을 반드시 쓰겠습니까. 또 그 곳 지세가 만세의 후에는 오환(五患)을 면치 못할까 염려됩니다. 원컨대 성명께서는 깊이 생각하소서."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시열이 여러 신하가 성상의 뜻을 그대로 따른다고 말하니 신들의 마음은 스스로 편치 못합니다. 신 역시 처음에는 홍제동을 쓸 만하다고 하였으나, 선왕께서 거리가 먼 것을 염려하는 하교가 있었음을 듣고는 감히 다시 청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밖에 쓸 만한 곳이 수원밖에 없었기 때문에 신이 불편한 것을 알면서도 또한 감히 진달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국초에 무학(無學)이 건원릉의 열두 산등성이가 모두 쓸 수 있다고 하였고, 이항복(李恒福)이 일찍이 이것으로 의논드린 일이 있으니 다시 간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지원에게 이르기를,
"경이 여러 산등을 두루 살펴보지 않았는가?"
하였다. 이에 지원이 대답하기를,
"신이 이미 두루 보았습니다만, 쓰기에 합당한 곳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에 판중추가 제사에 소선(素膳)을 쓰는 것이 온당치 않다고 하여 내 생각에 육선(肉膳)을 절반쯤 섞으려 하는데 어떠한가?"
하니, 시열이 아뢰기를,
"밖에서는 소선을 장만하고 안에서는 육선을 쓰게 되니, 내외가 제수를 달리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하고, 지원은 아뢰기를,
"조종조에서 제정한 것은 반드시 깊은 뜻이 있으니 아마도 하루 아침에 변혁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황희(黃喜)가 이 제도를 제정하였는데, 대개 무궁한 세대를 전하는 동안에 국력이 지탱하지 못할까 염려한 것입니다. 각능의 사시제(四時祭)에 모두 소선을 쓰는데, 지금 만약 그 제도를 고친다면 어찌 유독 상제(喪祭)에만 고기를 쓸 뿐이겠습니까. 반드시 각능의 제사에도 다 같이 써야 할 것이니 이것은 몹시 난처한 일입니다."
하고, 태화는 아뢰기를,
"국가의 사전(祀典)에 종묘(宗廟)에만 고기를 쓰는 것은 대개 혈식(血食)을 취하는 뜻에서입니다."
하고, 지원은 아뢰기를,
"기축년 상제 때에도 또한 고기를 쓰지 않았으니, 어찌 선왕의 효성이 미진한 바 있어서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하고, 태화는 아뢰기를,
"전에 보니 3년 내에 혼전(魂殿)에 꿩과 노루를 봉진하였습니다. 이로 보면 순수하게 소선만을 쓰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조로 하여금 상고하여 아뢰게 함이 좋겠다."
하였다. 그 후에 예조가 아뢰기를,
"기축년 등록 중 우제(虞祭)·졸곡(卒哭)·삭망(朔望)·소·대상(小大祥)·담제(禫祭) 등 및 오향 대제(五享大祭) 이외에는 모두 소선(素膳)을 썼고, 《오례의》의 도식(圖式)도 이와 같으며, 고기를 쓰는 제사에는 노루와 꿩의 생육과 생선을 진설하는 것으로 이미 본조로부터 주원(廚院)에 이문(移文)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잘 알았다고 답하였다.
집의 이유태가 소를 올려 체직을 간곡히 청하고, 송준길이 연중(筵中)에서 또 이유태를 위하여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지금 우선 체직하여 한직에 두니, 그대 또한 나의 지극한 뜻을 생각하여 나의 부족한 점을 도우라."
6월 20일 기유
판중추 송시열이 차자를 올려 병세를 진술하여 금부(禁府) 겸직의 체직을 청하고, 또 아뢰기를,
"어제 사대(賜對)하였을 때 기휘(忌諱)할 줄 모르고 망령되이 산릉을 논하여 대신의 비위를 건드려 대신으로 하여금 불안하게 하고 나니, 황공하기 그지없어 혀를 깨물어도 후회 막급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 직책은 경이 아니면 불가하다. 또 어찌 미세한 일로 인책하기를 이처럼 지나치게 하는가. 사직하지 말고 조리하고 공무를 보라."
하였다.
부호군 이상진(李尙眞)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수원의 산은 그 용세와 혈이 산만하고 모호하여 청수하고 존귀한 기세는 조금도 없습니다. 또 형세가 평범하고 낮아서 맺히고 견고한 곳이 없으니 이런 곳이 어떻게 대장(大葬)의 땅이 될 수 있겠습니까. 기전(畿甸) 1백 리 이내에 또한 반드시 선택할 만한 곳이 있을 것이니, 시일의 기한을 좀 늘려 널리 수소문해 구하여 대사에 최선을 다하지 못하였다는 걱정이 없게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상소의 말이 지성에서 나온 것이니 내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총호사 심지원이 아뢰기를,
"이상진의 상소에 대해 유념하겠다는 것으로 비답을 내리니, 신들이 감히 성급히 재혈(裁穴)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미 결정한 국릉을 어찌 한 사람이 망령되이 의논할 수 있겠는가. 즉시 나아가 재혈하라."
하므로, 지원이 윤강·이응시·이원진·윤선도 및 산릉 도감의 도청·낭청 등과 함께 다시 수원으로 갔다.
함경도 길주(吉州)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계란 같았고 천둥과 비가 함께 내려 어린아이가 우박에 맞아 죽기까지 하였으며, 함흥(咸興)·안변(安邊) 등지에 홍수가 나서 가옥이 유실되고 사람이 빠져 죽기도 하였는데, 도신이 이를 계문해 왔다.
6월 21일 경술
함릉군(咸陵君) 이해(李澥)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지리학을 신은 알지 못하지만, 일찍이 수원에 부임하였을 때에 그 곳의 형세를 익히 보았는데 이를 인사로 미루어 볼 때 결단코 국장에 합당치 못함을 알 수 있습니다. 대개 수원은 3도의 경계를 접하고 땅은 모두 평야인데 그 읍거(邑居)만이 약간의 잔산 단록(殘山斷麓)이 되어 두어 겹을 둘렀을 뿐입니다. 이른바 피해야 하는 5환(患)이라는 것이 이런 곳을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국초 이래로 한 사람의 석덕 준사(碩德儁士)도 이곳에서 나왔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고 오직 무부 궁마(武夫弓馬)의 인재만 나왔을 뿐입니다. 반드시 닥쳐올 환란을 헤아리고 지난날의 징험으로 논할 때 결코 쓸 수 없는 소지가 있습니다. 윤강은 홍제동이 나쁘다고 하며 모르는 것을 아는 체하고 있습니다. 신의 상소를 내려 다시 여러 대신 및 유신으로 하여금 반복해 가며 논의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알았다고 답하였다. 삼가 상고하건대, 이해는 훈구(勳舊)로 병을 핑계대고 두문 불출한 지 10년이 거의 되도록 입을 막고 세상 일을 말하지 않았는데, 이에 이르러 소를 올려 산릉을 수원에 쓸 수 없음을 극언하니, 그는 반드시 국가를 위한 원대한 생각이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혹은 그를 공격하여 송시열의 논을 두둔하는 것이라고 한다. 세상에 욕심이 없는 이해로도 오히려 이와 같은 비난을 받았으니 그 나머지는 말할 게 뭐 있겠는가.
송시열을 다시 이조 판서로 삼았다. 시열이 전형에서 체직된 후, 상이 아직 대임을 내지 말도록 명하였다가, 이에 이르러 가망(加望)을 명하여 제수하였다. 이후(李垕)를 사간으로, 윤선거(尹宣擧)를 집의로, 김익렴(金益廉)을 장령으로, 강호(姜鎬)를 헌납으로, 정지화(鄭知和)를 형조 참판으로, 이유태를 사복시 정으로, 홍처윤(洪處尹)을 부수찬으로, 권상구(權尙矩)를 정언으로 삼았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이미 정해진 국릉에 대해 풍수를 알지 못하는 자는 감히 함부로 의논해서는 안 된다. 지금 흠을 잡는 상소가 분분하게 이르는데 국가가 어찌 이와 같은 것을 용납하겠는가. 이후부터 이와 같은 상소는 절대로 받아들이지 말라."
대사헌 송준길이 차자를 올려 체직을 청하니, 답하였다.
"나는 마음을 다하는데 경의 사양이 이에 이르니 이는 내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다. 믿는 사람은 오직 경뿐이니 안심하고 사양하지 말고 나의 기대에 부응하라."
6월 22일 신해
연양 부원군 이시백이 차자를 올려 수원이 산릉에 합당치 못함을 극력 개진하여 이르기를,
"사리로 논하면 송시열의 말이 지당하고, 형세로 말하면 이상진과 이해의 상소가 상세합니다. 신이 일찍이 본부에 부임하여 6년 동안이나 있었습니다. 선유 및 지관의 말에 모두 초목이 무성한 곳이 좋다고 하였는데, 지금 국릉을 정한 곳은 바로 관아의 뒤입니다. 신이 항상 그 민둥산을 민망히 여겨 나무를 심었으나 끝내 수풀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크게 의심스러운 것이며, 또 청룡, 백호 사이에 계란형의 사각(砂角)이 하나 있으니 이는 지가(地家)들이 가장 꺼리는 바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용이하게 결정하고 여러 신하들의 염려하는 말도 모두 돌아보지 아니하는가 하면 상소까지도 받아들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이를 반복해 생각할 때 초조한 마음에 애가 타서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눈물만 흘렸습니다. 이에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차자를 번거롭게 올립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것이 비록 경의 지성에서 나온 것이나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무신년에 수원 산을 결정하였다가 민폐로 정지하였는데, 오늘날처럼 분분하게 하자의 시비가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국릉을 결정하였으니 다시 번거롭게 말하지 말라."
하였다.
이판 송시열이 차자를 올려 사직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직무를 제대로 받들지 못하여 선왕의 명철한 처사에 누를 끼침으로써 그 죄과는 이미 용서받기 어려웠고, 이로 인해 전전하여 삼사(三司)의 괴리를 부르고 선발한 명사로서 낭패를 보고 방황하는 자가 10여 인입니다. 조짐이 좋지 못하고 화기가 모두 사라져 길거리에서 우연히 한 말이 멀리까지 전파되니, 비유하건대 마치 태풍이 지난 뒤 온 수풀의 소란이 그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신이 밤에는 양심에 부끄럽고 낮에는 사람들 보기에 부끄럽습니다. 마땅히 버선발로 도성문에 나아가 땅에 머리 조아려 사죄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에 와서 이미 실패한 자취로서 스스로 짓는 죄얼을 무릅쓰고 다시 선부(選部)에 들어가 인물을 전형하게 되니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그지없이 어리석어 소와 말을 분변하지 못하는 자라도 오히려 또한 부끄러운 일인 줄 알 것입니다. 또 홍여하의 소를 이미 고쳐서 올리게 하였으니, 신의 양심의 가책이 장차 준엄히 평가될 날이 있을 것입니다. 또 특명으로 다시 소를 올리지 말게 하니 신의 연고로 인해 언로를 막는 것으로서 이 또한 작은 일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내가 전에 경을 체직한 것은 경의 마음을 편히 해주려는 뜻이었고, 오늘날 다시 제수한 것은 일의 체모를 보존하려는 뜻에서다. 어찌 사설(邪說)로 인해 경을 버릴 리가 있겠는가? 나의 지극한 뜻을 잘 알아서 속히 나와 공무를 보기 바란다."
하였다.
응교 이경휘(李慶徽)등이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산릉을 논의한 상소는 받아들이지 말라고 하교하시니 신들은 삼가 애석하게 여깁니다. 인산을 선택해 정하는 것은 종사에 있어 만세의 계책이 되는 것이며, 신민에 있어 정성을 다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널리 여러 사람들의 말을 들이게 하여 그중에서 선택하여야 될 것입니다. 건의를 물리쳐서 그 길을 막는 것은 부당합니다. 또 언로의 개폐는 국가 치란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내 어찌 언로를 막고자 하겠는가. 지금 이 산릉은 널리 자문하여 선택한 것이다. 이미 결정한 후에 하자를 떠들고 일어나니 이것이 어찌 아름다운 일인가. 일이 아름답지 못하다면 남의 자식된 심정으로 어찌 이를 듣고 싶어하겠는가. 기타 언로에 관한 일은 내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대사간 이정기 등이 차자를 올려 맨 먼저 선왕의 뜻을 계술할 것과 옥체를 보호할 방법을 진술하고, 다음은
"인산을 선택하는 일은 매우 중대하여 재신·중신들이 계속 진언하는 데 대해 혹은 망령된 말이라 하여 물리치고 혹은 알았다고 답하는가 하면 상소를 받아들이지 말라는 하교까지 내리니, 새로운 교화를 이룩하는 처음에 이처럼 지나친 분부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정원은 후설(喉舌)의 직에 있으면서도 그 궐실에 대한 보언이 한 마디도 없습니다."
하고, 다음은,
"국휼 때의 등록이 너무 지나쳐 필요치 않은 비용이 많이 차지하니 다시 참작해 정하소서."
하였다. 이에 상은
"진언한 정성은 내가 가상히 생각하나 이미 결정한 산릉은 다시 의논하기 어려울 것 같다. 필요치 않은 비용에 대해서는 유사로 하여금 참작하여 조처하게 하라."
고 답하였다.
송시열이 좨주(祭酒)를 겸대하는 여부를 해조가 대신과 의논할 것을 청하였다. 이경석·이시백 등은 아뢰기를,
"고례에 의정(議政)이 대제학을 겸임하고 정2품이 대사성을 겸임하는데, 이 좨주의 설치는 그 의미가 우연치 않으므로 상례로 논할 수 없습니다."
하고, 정태화·심지원은 아뢰기를,
"좨주가 본래 우리 나라의 상설 관직이 아니고 그 직책에 맞는 사람을 기다려 비로소 설치하였으니, 품질에 구애될 것이 없을 듯합니다. 그를 품질에 따라 겸대시켜도 무방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에 따랐다.
6월 24일 계축
총호사 심지원 등이 수원으로부터 재혈하고 돌아와 해조로 하여금 택일하게 할 것을 계청하니, 상이 이에 따랐다.
상이 양지당(養志堂)에서 총호사 이하를 인견하고 수원 산의 일을 논란하면서 상소가 분분한 것으로 몹시 고민하였다. 승지 강백년(姜栢年)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근래에 산릉을 논하여 올린 소는 먼저 품의한 후에 들이는 것이 좋겠다."
하였는데, 그 후 대사간 이정기 등이
"소차를 먼저 품의한 후에 들이라는 하교는 몹시 온당치 못한 것인데, 입시 승지가 끝내 한 마디 말도 없었으니, 자못 가부를 논하여 상을 보필하는 승지의 임무에 흠이 있는 것입니다."
고 논하여 추고를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연양 부원군 이시백이 차자를 올려 전의 말을 되풀이하여 홍제동을 쓰지 않을 수 없음을 극론하니, 상이 길이 멀어 쓸 수 없다는 선왕의 뜻으로 하유하였다. 이날 또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수원 산은 흠을 잡는 의논이 많으므로 중의가 걱정스럽게 여깁니다. 불가불 널리 지관을 구하여 각각 기내(畿內)의 쓸 만한 땅을 추천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내 말은 이미 다 했는데 경의 뜻이 이와 같으니 어떻게 하유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였다.
총호사 심지원이 아뢰기를,
"인산을 선정하자 중의가 맞지 않아 대신·중신의 소차가 잇달고 있으니, 이미 결정된 것으로만 핑계하고 널리 자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품 이상 여러 재신 및 삼사(三司)의 관원으로 하여금 빈청에서 회의하게 하여 모두 불가하다고 하면 다시 진선 진미한 곳을 택하여 쓰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 또한 어찌 이런 말을 하는가. 함부로 하는 논의에 동요되지 말고 즉시 택일하여 아뢰라."
하였다. 심지원이 아뢰기를,
"현궁(玄宮)을 하관함에 있어 9월 내에는 길일이 없으므로 부득이 10월 1일 발인하여 4일 현궁을 하관할 것으로 날을 잡았습니다."
하였다.
예조 판서 윤강이 소를 올려 인책하였는데, 이해에게 공척을 당하였기 때문이다. 또, 이상진(李尙眞)·유계(兪棨)·이광재(李光載)로 하여금 다시 홍제동 및 수원 산을 간심하게 하여 혹시라도 수원보다 나은 다른 산을 얻게 되면 더욱 다행한 일이라는 것으로 청하였다. 소가 들어가자, 정원에 하교하기를,
"이 소는 총호사와 의논하여 아뢰게 하라."
하고 이어 윤강을 회유하여 안심하고 대죄하지 말라고 하였다.
전 영중추 원두표(元斗杓)가 장준(張浚)이 적소에서 상소를 올린 고사를 인용하여 죄를 진 신하라고 자칭하고 상소하여 수원 산이 국릉에 불가하고 홍제동을 버릴 수 없음을 극언하고, 또 윤강의 지술(地術)이 부족함을 공격하였다. 이에 상이 답하였다.
"내 실로 경의 지극한 정성을 아나 다시 의논하기 어려운 일이다."
총호사 심지원이 아뢰기를,
"윤강의 상소에 의하여, 이상진 등 세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수원 산 및 홍제동을 간심하게 하되, 홍제동은 3신(三臣)의 간심을 기다리지 않아도 이미 그 쓰기에 합당함을 알고 있으니, 만약 다른 산을 보아 소득이 있으면 그만한 다행이 없겠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홍제동은 다시 간심할 필요가 없으니, 세 사람으로 하여금 각각 서울에서 가까운 다른 산을 추천하게 하라."
하였다. 유계(兪棨)가 상소하여 사직하기를,
"본래 지술를 모르는 사람인데 일을 맡은 신하들이 잘못 듣고 추천하였으니 물리쳐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사양하지 말고 빨리 가라."
하였다. 이상진이 또 아뢰기를,
"실로 직접 보아 얻은 것은 없으나, 일찍이 지관의 말을 들으니, 광주(廣州) 원적산(圓寂山)의 용세가 아름답고, 헌릉(獻陵) 내 이수동(梨樹洞)이 예로부터 일컬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이 두 곳을 간심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대사헌 송준길이 차자를 올려 사직하고, 또 아뢰기를,
"신이 본래 풍수 지리의 학설에 어두워 감히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 분명하게 말씀드리지는 못하겠으나, 신하들이 잇달아 계청하는 것은 모두 지극한 본의에서 나온 것이니, 먼저 배척을 가하여 일체를 끊어 버리는 것은 부당합니다. 신이 평소 아는 바로는 이상진은 자못 그 방면에 밝습니다. 두어 신하와 함께 다시 기내의 여러 산을 간심하게 하여 혹시라도 전혀 흠이 없는 순수한 길지를 얻는다면 무엇이 이보다 더 다행하겠습니까. 만약에 얻지 못한다면 그대로 수원을 쓰는 것 또한 무방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산릉을 이미 다시 간심하게 하였으니, 경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이판 송시열이 차자를 올려 사직하고 또 이해의 상소로 인책하며 아뢰기를,
"산릉의 의논은 두 차례의 사대(賜對) 때에 구구한 소회를 다 말하였다고 생각하는데, 지금 아울러 안율(按律)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이는 대개 이해가 제신이 수원 산의 합당하지 못한 것을 힘써 쟁집하지 않음을 그르다고 했기 때문이다. 상이 너그러이 비답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이튿날 시열이 다시 차자를 올리기를,
"신의 정세는 이미 전후 상소에 모두 말하였는데, 전하께서는 오히려 신으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출사하게 하니, 이는 염치를 아는 사람으로 신을 대접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이 전하에게 득죄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밀한 살핌을 받지 않으나, 정신(廷臣) 이하는 친한 자는 걱정해 주고 소원한 자는 비웃고 미워하는 자는 공격하니, 만약 깨끗한 선비로 하여금 이 처지에 놓이게 하면 어찌 잠깐이나마 머무르겠습니까. 생각건대, 승하하신 옥체가 아직 식지 않고 슬피 사모하는 마음 더욱 새로운데 이 때 나라를 떠나는 마음이 또한 어떠하겠습니까. 비웃음을 무릅쓰고 죄를 범하면서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태가 궁박하여 감히 더 이상 도성에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즉시 성밖에 나가 엄명(嚴命)을 기다리겠습니다. 혹시라도 어여삐 여겨 놓아 준다면 삼가 마땅히 조심스레 교외에 엎드려 산릉의 일을 마치기를 기다리겠습니다."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정원에 하교하기를,
"지금 경이 내 뜻을 헤아리지 않고 교외로 나갔으나, 간절한 내 뜻을 헤아려 혹시라도 버리지 않는다면 그 다행함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하여, 이 뜻으로 사관을 보내 회유하고, 또 간곡하게 비답하였으나, 시열은 사절하고 입성하지 않았다.
6월 26일 을묘
완남 부원군 이후원이 차자를 올려 수원 산을 쓸 수 없음을 극력 진술하고, 또 아뢰기를,
"건원릉 은 곧 우리 태조(太祖)가 신승 무학(無學)으로 더불어 친히 고른 땅으로서 대개 명 나라의 만세산(萬歲山)과 같이 만들려고 할 것입니다. 그 지류의 산등성이가 많다고 하니 필시 쓸 만한 땅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헌릉(獻陵) 언덕은 칭찬하는 자는 몹시 많고 흠을 잡는 자는 몇 사람에 불과합니다. 무릇 산을 정하는 법은 칭찬하는 자가 많고 흠잡는 자가 적으면 쓸 수가 있습니다. 신은 들으니, 한양(漢陽)에 도읍을 정할 때 의논이 분분하여 마치 오늘날 같았는데, 태종 대왕께서 태묘(太廟)에서 동전을 던져 점쳐 이길 일흉(二吉一凶)을 얻고서 드디어 정하였다고 합니다. 도읍과 능이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수원은 술사(術士)는 비록 길하다 하나 앞으로의 길흉을 예측할 수 없거니와, 국릉(國陵)의 국내는 곧 이미 징험한 땅입니다. 어찌 편벽되게 지리(地理)의 애매한 말을 믿고 현저히 나타난 인사로 주장을 삼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의 지성은 가상하나 다시 의논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였다.
상이 발에 가렵고 아픈 증세가 있어 약방 제조가 여러 의원을 데리고 입진하였다. 상이 중관(中官)에게 명하여 조경(趙絅)이 제술하여 올린 시책문(諡冊文)을 내보이게 하면서 이르기를,
"이 글이 이해하지 못할 곳이 많아 경들과 상의하려 한다."
하니, 정태화가 해석하여 대답하였다. 채유후(蔡𥙿後)가 아뢰기를,
"고문을 전공하는 이의 저술은 으레 이처럼 심오합니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그중에 착오된 부분을 예문관의 관원으로 하여금 전유하여 고치게 함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판의 일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는가. 사직서 올리기를 마지 않고 교외로 나가기까지 한다. 수령의 자리는 많이 비어 있고 대정(大政) 또한 점점 지체되니 자못 염려된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진실로 그러합니다. 신이 전에 우선 그의 체직을 허락하자고 청한 것은 실로 예우하는 뜻에서였는데, 외부의 의논이 지금까지 그르게 여기니 신은 스스로 편안치 못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제 보고 싶다는 뜻으로 전유하였는데도 결단코 들어오지 않겠다고 하니 그의 뜻은 진정 이판을 사면하려는 데 있다. 이는 다른 신하에 비할 바 아니라 한결같이 압력을 가할 수도 없고, 금방 제수하고 금방 체직하는 일 또한 몹시 경솔하다. 만약 체직을 허락하면 혹시라도 영영 가버릴까 염려된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성급히 도성문을 나가는 것은 너무 지나칩니다. 이 때에 어찌 영영 가기야 하겠습니까. 그 의도를 보니 이판에서 체직되기만 바라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어 산릉의 일을 논하다가 파하였다.
상이 대행 대왕의 행적을 적어 정원에 내려서 행장 저술관에게 전하게 하였다.
이판 송시열이 세 번째 차자를 올려 사직하였는데, 그 대략에,
"《중용》에 이르기를 ‘군신(群臣)을 체(體)한다.’고 하였는데, 주자의 해석에 이르기를 ‘예컨대 자신이 그 지위에 처하여 그 마음을 살피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무릇 임금과 신하의 신분이 비록 하늘과 땅의 높고 낮음과 같으나 그 정의는 일찍이 통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신은 형세의 어려움이 극에 달하였으되 성명의 인자한 살핌을 힘입지 못하고 한결같이 권면하기만 하니, 신은 답답하고 민망하여 미칠 것 같습니다. 비록 다시 성은을 입어 알맞은 자리에 쓰이고자 하나 또한 불가하겠습니다. 공자(孔子)의 말씀에 ‘삼군(三軍)의 장수는 빼앗을 수 있으나 필부의 뜻은 빼앗을 수 없다.’고 하였듯이, 신이 치욕을 무릅쓰고 하명을 받아들일 수 없음을 이미 작정하였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굳이 사양하기를 이와 같이 하니, 본직의 체직을 허락하겠다. 경이 들어오는 것을 가뭄에 구름과 무지개를 바라듯이 기다리고 있다."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삼가 송시열의 차자에 비답한 것을 보니, 실로 성상께서 유현을 우대하여 그 마음을 안정시키고 그로 하여금 들어오게 하려는 지극한 뜻을 알겠습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총재의 직이란 관계가 몹시 중한 자리인데, 체직했다가 즉시 제수한 그 뜻이 우연치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사양하는 말로 인하여 또 체직을 허락하니, 사리로 보아 전도된 처사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사세가 이와 같으니 지금 그의 뜻을 따른 후에 선처하는 것 또한 마땅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총호사 심지원이 아뢰기를,
"여러 대신이 계속 차자를 올리고, 이상진(李尙眞) 또한 다시 다른 산을 간심하기 위해 나아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니 수원의 산역은 우선 정지하게 하고, 도감 제조 이하는 완전히 결정한 후에 보내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어찌 정지하겠는가. 그대로 산역을 시작하여야 될 것이다."
하였다.
6월 27일 병진
집의 윤선거가 죽을 죄를 진 신하라고 하면서 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신은 불초한 자로서 오랫동안 허명을 도둑질하여 지금 10년이 되도록 한결같이 도피해 오기만 하였습니다. 대행 대왕께서 어여삐 굽어살펴 주시어 일찍이 위명(威命)으로 강압하지 않고 전야에서 스스로 한가로이 지내게 해 주셨습니다. 신이 만약 지금에 와서 다시 성상의 총애를 탐하여 거만스레 글을 읽고 도를 구하는 것으로 자처하면서 의문을 고찰하고 예를 묻는 지위에 무릅쓰고 나아간다면, 미천한 신만이 그 본심을 상실할 뿐 아니라 또한 선왕께서 시종 신을 길러준 덕의가 아닙니다. 신이 죽고 싶은 마음을 참고 길에 올라 서울에 들어오던 날 집헌(執憲)의 새로운 하명이 있음을 듣고 더욱 황공하여 즉시 대궐 밖에 나아가 경건히 배곡(拜哭)을 한 다음, 이어 진정을 진술하여 처분을 기다립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에게 내린 그릇된 은전을 거두고 신에게 율의 적용을 의논하여 조정의 기강을 떨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그대가 입경하였단 말을 들으니 다행함을 형언할 수 없다. 사양하지 말고 직무를 보라."
하였다.
판의금 송시열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자애하신 성상께서 굽어 보시고 체직을 허락해 주시니 그 재생의 은혜를 무어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임금과 신하 사이가 언제나 이와 같다면 어찌 펴지 못하고 밝히지 못할 억울한 일이 있겠습니까?"
하고, 이어 도성 밖에서 병을 조리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또 아뢰기를,
"금부(禁府)의 일이 신으로 인해 적체되고 새로운 사랑의 은혜가 아직 흡족히 내려지지 않았으니, 자못 온 나라에 사면을 행하는 뜻이 아닙니다. 전하께서 빨리 면직을 내리시면 공·사가 모두 다행이겠습니다. 만약 우선 신의 병세를 보아 조처하고자 하신다면 지사(知事) 이하로 하여금 즉시 의논을 드리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금부의 일은 우선 차관(次官)으로 하여금 처리하게 하였으니, 경은 안심하고 조리하여 병이 조금 낫거든 들어와 공무를 보라."
하고, 이어 어의를 명하여 병을 보게 하였다.
6월 28일 정사
대사헌 송준길이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근일에 산릉의 일로 전후 진언하는 신하들은 모두 선조의 원로로서 그 깊은 염려가 지극하고 간절하여 반드시 국가의 대사를 의심 없이 완전하게 하려는 것이니 그 마음 실로 가상합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혹은 알았다는 말로 일축하여 답하고, 혹은 받아들이지 말라고 하교하시니 그 처사가 몹시 타당하지 않습니다. 이상진 등을 명하여 다시 여러 산을 간심하게 하므로 거리낌 없이 흔쾌히 받아들이는 줄 알았는데, 어찌하여 일변 간심하게 하고 일변 산역을 시작하게 하십니까? 총호 대신(摠護大臣)이 산역을 정지할 것을 청하였는데도 윤허하지 않으시니, 만약 그렇다면 애당초 어찌하여 다시 간심하게 하였습니까. 전하의 춘추가 성만하지 못하고 보위에 오르신 지 오래지 않았는데도 이런 큰일을 당하여 이처럼 확고히 흔들리지 않으시니 신은 실로 기쁘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대개 그 고집하는 일이 과연 옳으면서 흔들림이 없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만약 그렇지 못하면서 원로 중신, 학사 대부들의 의논을 한결같이 물리쳐 받아들이기를 허락하지 않는다면, 훗날의 국사를 실로 어느 곳에 안착시켜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신이 장래를 걱정하며 진심으로 마음이 편치 않은 까닭입니다. 우선 산릉의 산역을 정지하고 상진 등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그들의 논설을 들은 연후에 여러 대신으로 하여금 회의하여 익히 상의하게 하여, 중외의 신민들로 하여금 석연히 걱정되는 마음이 없게 하소서."
하니, 이에 상이 답하기를,
"차자의 말이 모두 깨우쳐 주는 말이라 내 마땅히 유념하겠다. 산릉의 일은 경의 말이 이에 이르니 우선 산역을 정지하게 하겠다."
하고, 이어 산릉의 역사는 이상진이 돌아올 때까지 정지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예조가, 졸곡(卒哭) 후의 조석 상식에 육선(肉膳)을 쓰는 데 대한 가부를 대신에게 의논할 것을 아뢰었다. 영부사 이경석, 연양 부원군 이시백 등은 아뢰기를,
"《오례의》에 조석 상식의 소선(素膳)이 우제(虞祭)·졸곡(卒哭)·삭망(朔望)·소·대상(小大祥) 및 대향(大享)·납향(臘享) 등의 제사와 같지 않습니다. 상제(喪祭)는 선조(先祖)를 따르라는 말을 선현 이황(李滉)께서도 일찍이 말씀하였습니다. 성조(聖祖)가 제정하고 선왕께서 행한 것을 지금에 와서 고치는 것이 몹시 온당치 않은 것 같습니다."
하고, 영의정 정태화는 아뢰기를,
"졸곡 후의 조석 상식에 소선을 쓰는 것은 이미 국조로부터 유래되어 온 정식이므로 지금에 와서 다시 고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고, 좌의정 심지원은 아뢰기를,
"신의 우매한 소견은 이미 탑전에 진술하였거니와, 조종조가 제정하여 행하던 예를 지금에 와서 경솔하게 의논하기 미안합니다."
하니, 상이 의논에 따르라고 명하였다.
6월 29일 무오
송시열을 좌참찬으로, 송준길을 이조 판서로, 채유후(蔡𥙿後)를 대사헌으로, 이단상(李端相)을 사인으로, 민유중(閔維重)을 교리로 삼았다.
예조 판서 윤강, 관상감 제조 이응시가 산을 간심하고 돌아와 아뢰기를,
"원적산(圓寂山)·광진(廣津) 강 위의 산, 이수동(梨樹洞)이 모두 대용(大用)에 합당치 않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대로 수원을 쓰라."
하였다.
6월 30일 기미
상이 좌참찬 송시열을 인견하니, 시열이 ‘곡진히 미천한 정성을 받아들여 전형의 체직을 허락하니 감격함을 참을 수 없다.’는 뜻으로 사례하였다. 이에 상이 조경이 제진한 시책문을 내 보이면서 이르기를,
"이 글이 이해하지 못할 곳이 많다."
하니, 시열이 상의 물음에 따라 해석하여 대답하였다. 승지 이은상(李殷相)이 아뢰기를,
"대우구(對偶句)의 정밀치 못한 곳은 마땅히 다시 저술인에게 물어서 진선 진미한 글로 만들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밀을 기하는 것이 좋다."
하고, 이어 사관을 보내 다시 고쳐서 드리게 하였다. 또 이르기를,
"지금 이 산릉의 일에 대하여 좌참찬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시열이 아뢰기를,
"막중한 일을 소신이 맨 처음 이의를 제기하고 그 후 대신·재신이 계속 차자를 올려 지금까지 결정하지 못하고 보니 신은 실로 황공합니다. 그러나 만세의 후에 오환(五患)의 염려는 인사로 미루어 볼 때 반드시 닥쳐올 형세입니다. 본부가 항상 6, 7천의 병마를 보유하고 지세 또한 삼남(三南)의 요충에 위치하여 혹시라도 변란이 있으면 반드시 전쟁터가 될 것입니다. 지금 수백 채의 민호를 일시에 철거하여 조상의 분묘를 잃고 가산을 파하게 되므로 그 원한의 탄식 소리가 응당 화기를 상할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주자(朱子)의 말에 의하여 우선 시기를 늦추어 널리 다른 산을 구하는 것만 못하다고 봅니다."
하고, 이어 건원릉의 좌측 산등성이를 다시 여러 지관에게 문의할 것을 청하니, 상이 주서 권두추(權斗樞)를 명하여 빈청에 나가 대신에게 묻게 하여 이르기를,
"건원릉 좌측 산등성이가 두 능의 청룡·백호가 되는데 그곳을 쓸 경우 두 능에 해가 없겠느냐고 윤강·이원진·윤선도 및 여러 지관에게 물어 아뢰게 하라."
하니, 영상·좌상이 아뢰기를,
"신들이 윤강·이원진 및 여러 지관을 불러 물어서 별단으로 서계(書啓)합니다. 윤선도는 강외(江外)에 나가 있으므로 물어 아뢸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답하기를,
"달리 좋은 땅이 없고 사세가 이에 이르렀으니 수원 밖에 다른 의논이 없을 것 같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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