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4일 갑자
효종 10년 5월 4일 갑자에 효종 대왕이 창덕궁의 대조전(大造殿)에서 승하하였다. 전월 27일에 조그만한 부스럼이 오른쪽 귀 앞 귀밑털 위에 발생하고 얼굴에 약간의 부기가 있었다. 내의 도제조 원두표(元斗杓), 제조 홍명하(洪命夏), 부제조 조형(趙珩) 등이 여러 의원을 데리고 들어가 진찰하였다. 처음에는 독종(毒腫)이 될 줄을 모르고 탕약을 드리며 촉농고(促膿膏) 등의 약을 붙였으나 모두 효험이 없었다. 초하룻날 약방에 하교하기를,
"부기가 날로 심해지는데도 의원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다. 경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말라."
하고, 이 날 재차 침을 맞았다. 3일에 또 눈 언저리에 침을 맞고 4일에 또 종기난 곳에 침을 맞았다. 이 때 동지(同知) 신가귀(申可貴)에게 명하여 침을 놓게 하였는데, 가귀는 본래 무인으로서 침술을 알았다. 지난해 상이 낙상으로 인하여 볼기에 종기를 앓아 가귀에게 침을 놓게 하여서 효과를 보았는데, 이에 이르러 또다시 가귀로 하여금 침을 놓게 한 것이다. 그러나 가귀는 오랫동안 앓고 수전증이 있어 혈맥을 범함으로 인해, 처음에는 농즙 한 숟가락 정도 나오더니 검붉은 피가 계속해 샘솟듯이 쏟아져 나왔다. 급히 혈갈(血竭)·괴화(槐花) 등의 약을 썼으나 피는 그치지 않았다. 【혹은 말하기를 ‘잘못 혈맥을 범한 것이 아니라, 종독(腫毒)이 심하여 흉부(胸部)에까지 만연되고 혈도(血道)가 종기난 곳에 집중되었는데, 함부로 침을 놓아 터뜨렸다.’고 한다.】 오시(午時) 초에 상의 기도가 막혀 내전으로부터 죽력(竹瀝)·청심원(淸心元)을 드리라고 재촉하므로, 내의 제조 및 여러 승지들이 황급히 달려가 대조전의 계하에 이르렀다. 이윽고 의관들이 전언하기를, "미음과 독삼탕(獨參湯)을 조금 들었다." 고 하였다. 상의 기후가 조금 안정되자 동요하지 말라고 하교하였다. 제신들이 조금 물러나 한참 동안 있었는데 의관이 전언하기를, "상의 환후가 매우 위급하다." 하고, 내관이 또 내의 제조의 입시를 재촉하므로 승지·사관이 따라 들어갔다. 또 영의정 정태화, 이조 판서 송시열에게 전명하여 이르기를, "급히 들라. 장차 고명(顧命)이 있을 것 같다." 하므로, 두 대신이 바삐 들어갔는데, 좌의정 심지원, 우참찬 송준길이 뒤따라 들어갔다. 이 때에 상은 침상에 누워 동쪽으로 머리를 두고 흰 명주의 겹옷으로 머리를 덮었는데 벌써 옥음(玉音)은 들을 수 없었다. 좌우 협실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려 금지시켜려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왕세자가 침상 아래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므로 내관이 옆에서 부축하여 실외로 나왔고, 대신 이하가 도로 나와 훈국(訓局)·어영(御營) 두 대장으로 하여금 궁성을 호위하게 하였다. 이윽고 대신·승지·예관 및 시열 등이 다시 들어가 내관을 불러 호흡의 유무를 확인한 후 초혼례(招魂禮)를 행하였다. 대신 이하가 곡하고 나온 다음, 사관 정중휘(鄭重徽)가 종이 쪽지에다 대점(大漸)이란 두 글자를 크게 써서 외정(外庭)에 내보였으니, 기축년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97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의약(醫藥)
오시(午時) 초에 상의 기도가 막혀 내전으로부터 죽력(竹瀝)·청심원(淸心元)을 드리라고 재촉하므로, 내의 제조 및 여러 승지들이 황급히 달려가 대조전의 계하에 이르렀다. 이윽고 의관들이 전언하기를,
"미음과 독삼탕(獨參湯)을 조금 들었다."
고 하였다. 상의 기후가 조금 안정되자 동요하지 말라고 하교하였다. 제신들이 조금 물러나 한참 동안 있었는데 의관이 전언하기를,
"상의 환후가 매우 위급하다."
하고, 내관이 또 내의 제조의 입시를 재촉하므로 승지·사관이 따라 들어갔다. 또 영의정 정태화, 이조 판서 송시열에게 전명하여 이르기를,
"급히 들라. 장차 고명(顧命)이 있을 것 같다."
하므로, 두 대신이 바삐 들어갔는데, 좌의정 심지원, 우참찬 송준길이 뒤따라 들어갔다. 이 때에 상은 침상에 누워 동쪽으로 머리를 두고 흰 명주의 겹옷으로 머리를 덮었는데 벌써 옥음(玉音)은 들을 수 없었다. 좌우 협실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려 금지시켜려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왕세자가 침상 아래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므로 내관이 옆에서 부축하여 실외로 나왔고, 대신 이하가 도로 나와 훈국(訓局)·어영(御營) 두 대장으로 하여금 궁성을 호위하게 하였다. 이윽고 대신·승지·예관 및 시열 등이 다시 들어가 내관을 불러 호흡의 유무를 확인한 후 초혼례(招魂禮)를 행하였다. 대신 이하가 곡하고 나온 다음, 사관 정중휘(鄭重徽)가 종이 쪽지에다 대점(大漸)이란 두 글자를 크게 써서 외정(外庭)에 내보였으니, 기축년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세자가 하령하여 전 정(正) 정선흥(鄭善興), 전 정랑 장선징(張善澂), 좌랑 여성제(呂聖齊), 유학(幼學) 한두상(韓斗相)을 내전으로 불러들여 부마 홍득기(洪得箕)와 함께 염습(斂襲)의 일을 보게 하였다. 두상은 곧 인열 왕후(仁烈王后)의 아비 서평 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의 증손이고, 선흥과 성제는 곧 그 외손이며, 선징은 왕비의 오라비이다.
어의(御醫) 신가귀(申可貴)·유후성(柳後聖)·조징규(趙徵奎) 등 6인을 금부(禁府)에 하옥하였다.
예조 낭관이 정원에 와서 말하기를,
"《오례의》에 위곡(位哭)이 염습 후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으니, 염습 후에 곡성을 내는 것이 마땅할 것 같다."
하니, 정원이 말하기를,
"《오례의》는 비록 이와 같으나, 안에서 이미 곡성을 냈는데 외정이 아직까지 곡림(哭臨)하는 일이 없다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으랴."
하고, 이내 대신에게 품정한 후 복장을 고치고 곡성을 냈다. 배례는 없었다.
종실(宗室) 평운군(平雲君) 이구(李俅)를 수릉관(守陵官)으로, 내관(內官) 오이공(吳以恭)을 시릉관(侍陵官)으로, 회원군(檜原君) 이윤(李倫)을 대전관(代奠官)으로 삼았다.
이시방(李時昉)·윤강(尹絳)·이일상(李一相)을 빈전 도감 제조(殯殿都監提調)로, 이경휘(李慶徽)·홍처윤(洪處尹)을 도청(都廳)으로, 정유성(鄭維城)·허적(許積)·윤강(尹絳)을 국장 도감 제조(國葬都監提調)로, 이시술(李時術)·정만화(鄭萬和)를 도청으로, 정치화(鄭致和)·김남중(金南重)·홍중보(洪重普)를 산릉 도감 제조(山陵都監提調)로, 이만영(李晩榮)·조윤석(趙胤錫)을 도청(都廳)으로, 이정영(李正英)을 명정 서사관(銘旌書寫官)으로, 좌의정 심지원(沈之源)을 총호사(摠護使)로 삼았다.
정원이 순장 감군(巡將監軍)으로 번을 드는 내용으로 입달(入達)하고, 군호(軍號)의 일을 대신에게 품의하니, 정태화가 말하기를,
"세자가 비록 열어 보지 않더라도 달하(達下)한 후에 정원이 이것으로 분부함이 가하다."
하였다.
내시가 세자의 영으로 와서 말하기를,
"두 송 판서(宋判書)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을 가리키는데 선조 때부터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의 말이 ‘기축 대상(己丑大喪) 때에는 대신이 반함례(飯含禮)를 섭행하였는데 이는 임시 방편에서 나온 것이므로 지금은 세자가 몸소 행하여야 한다.’고 한다. 해조(該曹)의 의주(儀注)가 어찌하여 서로 다른가?"
하니, 예조 판서 윤강이 답하기를,
"본조는 《오례의》에 의해 써서 올렸을 뿐입니다. 송시열 등의 의논이 이와 같으니 이는 고례(古禮)인 것입니다. 의주를 고쳐서 올리겠습니다."
하였다.
초경(初更)에 습례(襲禮)를 행하였다. 대신, 예관, 양사 장관, 여러 승지, 옥당의 1원이 기축년의 전례에 의거하여 뜰 위에 입시하고, 정태화가 송시열·송준길 등을 또 입시하게 하였다. 염습에는 곤룡포(袞龍袍)·익선관(翼善冠)·흑화(黑靴)를 썼는데, 시열이 나아가 악수(握手)를 묶었다. 【반함(飯含) 후에 악수를 묶어야 하는데 황급한 중에 실수를 범한 것이다.】 내시가 세자를 인도하여 들어가고 영상(領相)이 꿇어 앉아 주반(珠盤)을 드려 반함례를 마친 후 세자가 나왔다. 【곡위(哭位)는 처마 밑 뜰 위에 있었다.】 습상(襲床)을 받들어 전(殿)의 중앙으로 옮겨 남쪽으로 머리를 두게 하고 습전(襲奠)을 올렸다. 백관이 위곡(位哭)을 하였다.
정태화를 원상(院相)으로 삼았다.
대신이 아뢰기를,
"왕자와 부마가 비록 치상(治喪)으로 인해 내전에 들어왔으나 대내에서 유숙할 수는 없으니 출송을 명하소서."
하니, 세자는 내반원(內班院)에 유숙하도록 명하였다.
이날 저녁에 큰비가 내렸다.
5월 5일 을축
예조가 기축년 대상(大喪) 때의 전례에 의하여 주다례(晝茶禮)를 설정하였다. 대개 《오례의》에는 조석 상식(朝夕上食)만 있는데, 무신년 국휼(國恤) 때 주상식(晝上食)과 다례(茶禮)를 병설하고, 기축년에 이르러 주상식을 감하였다고 한다.
대사헌 이응시(李應蓍), 행 대사간 이상진(李尙眞), 사간 이준구(李俊耉), 장령 황준구(黃儁耉), 지평 이합(李柙), 헌납 정인경(鄭麟卿) 등이 주자의 군신 복의(君臣服議)에 의하여 고상복(古喪服)을 지어 상에 임할 것과, 특별히 포복두(布幞頭), 포공복(布公服), 포혁대(布革帶)를 만들어 조회할 것을 청하고, 또 말씀드리기를,
"인조 대왕의 상사 때에 고 유신(儒臣) 김집(金集)이 발인(發引)하는 날의 복제를 추개(推改)할 것을 청하였으나, 그 때의 여러 의논이 고례를 옳지 않다고 한 것이 아니라 다만 추개가 불편하다고 하여 일이 끝내 실시되지 않았으므로 식자들이 유감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지금은 형편이 전과 다르므로 결단을 내려서 실행하는 것은 저하에게 달렸습니다. 예관으로 하여금 때 맞춰 의논해 정하게 하소서."
하니, 예조가 대신과 유신에게 의논할 것을 청하였다. 영돈녕 이경석(李景奭)이 아뢰기를,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이 이 의논을 제기했을 때 고 상신 박순(朴淳)이 예관으로 이를 어렵게 여겨 고치지 못하였고, 고 유신 김집(金集)이 이 의논을 제기했을 때 고 상신 김상헌(金尙憲)이 이를 행하기 어렵게 여긴 바 있었습니다. 신이 고례를 불가하다는 것이 아니라 번거롭게 되어 의견이 일치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하고, 정태화(鄭太和)는 아뢰기를,
"우리 나라에서 오래도록 시행해 오던 예를 갑자기 바꾸기는 어렵습니다. 신이 기축년에 이미 신의 소견을 개진하였습니다. 지금도 전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고, 여러 대신들 또한 모두 행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송시열(宋時烈)이 아뢰기를,
"신자(臣子)는 군부(君父)가 돌아가신 후에는 다시 그 효성을 드릴 곳이 없으므로 그 정문(情文)을 다하고 최복(衰服)을 알맞게 하여 여한이 없게 할 뿐입니다. 주자(朱子)께서 고금을 참작하고 예제를 가감하여 천고의 바꾸지 못할 제도를 만들었으므로, 신은 그 예를 실행함에 의심의 여지가 없고 또 어려울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송준길은 아뢰기를,
"마땅히 주자의 예설로 시행의 정론을 삼아 다시 오늘날에 시행하게 된다면 어찌 그 다행함을 형언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두 찬선(贊善) 【시열 등이 이 때 찬선을 겸직하였다.】 의 뜻이 이와 같으니, 다시 대신들과 상의하라."
하였다.
교리 김만기(金萬基)가 상서하여, 《오례의》의 군신 상복의 그릇된 제도를 고쳐 한결같이 선유(先儒)의 정론에 따를 것을 청하니, 세자는 이미 예조 초기(禮曹草記)에 하유하였다고 답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자의 왕대비(慈懿王大妃)가 대행 대왕(大行大王)을 위하여 입는 복제가 《오례의》에는 실리지 않았습니다. 혹은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하기도 하고, 혹은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하기도 하니, 대신들과 상의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세자는 그 청을 따르고 또 두 찬선에게도 함께 문의하게 하였다. 영돈녕 이경석, 영의정 정태화, 연양 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 좌의정 심지원, 원평 부원군(原平府院君) 원두표(元斗杓), 완남 부원군(完南府院君) 이후원(李厚源) 등은 아뢰기를,
"고례(古禮)는 비록 알 수 없으나 시왕(時王)의 제도를 상고하면 기년복으로 정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고, 송시열·송준길은,
"고금의 예율(禮律)이 차이가 있는 데다 제왕의 제도는 더욱 경솔히 의논하기 어렵습니다. 여러 대신이 이미 시왕의 제도로 의논하였으니, 신들은 감히 다시 다른 말로 의논드리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세자가 의논대로 하라고 하였다. 이 때 왕대비의 복제가 정해지지 않았는데, 정태화가 합문(閤門) 밖에 앉아 있다가 송시열을 맞아 사람들을 물리치고 조그마한 종이 쪽지를 내보였으니, 이는 대개 왕대비가 대행 대왕에 대해 마땅히 자최 3년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종이 쪽지는 연양 부원군 이시백으로부터 온 것인데, 이시백은 윤휴의 의논을 듣고 이렇게 통보한 것이다. 이 말은 대개 《의례(儀禮)》의 장자(長子)를 위해 3년복으로 한다는 조항의 소(疏)에,
"장자가 죽으면 차적(次適)이 가통의 중임을 이으니 이를 또한 장자라고 이른다."
는 말을 취한 것이다. 이에 시열이 말하기를,
"《예기(禮記)》의 소(疏)에 과연 이 말이 있다. 그러나 그 아래 ‘중자는 장자와 같이 3년복이 될 수 없다.’는 조항의 소에 또 네 가지 종류의 설이 있어 이와 서로 같지 않다. 대개 이 모두가 소의 설이니 어느 것을 취하고 어느 것을 버릴 수 없다."
하니, 태화가 말하기를,
"이른바 네 종류란 무슨 말인가?"
하였다. 시열이 말하기를,
"그 첫째는 정이지만 체가 아닌 경우[正而不體]이니 적손으로 가통의 중임을 계승함을 이름이요, 둘째는 체이지만 정이 아닌 경우[體而不正]이니 서자가 서서 후사가 됨을 이름이요, 셋째는 정체(正體)이나 가통의 중임을 전할 수 없는 경우이니 적자로서 폐질이 있음을 이름이요, 넷째는 가통의 중임을 전함에 정체가 아닌 경우이니 서손(庶孫)이 후계가 됨을 이름이다."
하니, 태화가 손을 흔들어 저지하면서 말하기를,
"소현(昭顯)에게 아들이 있는데, 정이불체(正而不體)를 어찌 감히 오늘날 거론하는가?"
하였다. 시열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대명률(大明律)》 및 국제(國制)에 ‘장자와 중자를 막론하고 모두 부장기(不杖朞)로 한다’고 하였으니, 이를 근거로 결정하는 것이 또한 좋겠다."
하니, 태화는 좋다 하고 곧 전거를 찾아냈다. 시열이 《상례비요(喪禮備要)》에도 이 말이 실려 있다고 하면서 즉시 가져다가 그 인용한 대명률과 국제의 부장기 조항을 지적하였다. 태화가 몹시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지금 그 근거를 찾아냈으니 걱정이 없을 것 같다."
하였다. 시백이 시열의 말을 듣고 사람을 시켜 윤휴에게 통보하자, 윤휴가 또 내종(內宗)은 모두 참최로 한다는 설을 끌어 근거를 댔다. 시열은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내종이 대왕을 위해 모두 참최를 입는 것은, 군신의 의가 지엄하여 감히 사척(私戚)으로 임금을 슬퍼할 수 없기 때문에 비록 본종(本宗) 시마복(緦麻服) 이외의 종친 부녀라도 모두 참최를 입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의논은 그렇지 않다. 대행 대왕이 대비에 대하여 군신의 의가 있어 감히 아들로 일컫지 못하고 곧 신하로 일컫는다. 대왕 대비가 지금 도리어 신하가 되어 임금의 복을 입겠는가?"
하니, 윤휴가 이 말을 듣고 또 전의 말을 고집하여 말하기를,
"무릇 제왕가의 사체는 사가와 현격히 다르므로 대비가 대행 대왕에 대해 참최복을 입는 것이 옳다."
고 하면서 의논을 올림에 이르러서도 이 말을 썼다.
예조가 아뢰기를,
"저군(儲君)이 대통을 계승할 때의 묘사(廟社)에 고유하는 절차가 《오례의》에 실려 있지 않고, 기축년001) 에 본조가 고사를 근거함과 동시에 대신에게 문의하여 길일을 택해 종묘(宗廟)·영녕전(永寧殿)·사직(社稷)에 고유하였으니, 지금도 전례에 따라 초10일에 고유제를 설행할 것을 청합니다."
하였다.
5월 6일 병인
갑시(甲時) 소렴(小斂)을 행하려 할 때, 대신·예관·승지·사관과 3사(三司)의 각 1원 및 송시열 등이 입시할 뜻으로 세자에게 아뢰니, 세자는 전내가 협착하여 일을 보는 사람들 또한 당황하며 실수하는 일이 없지 않으니 염을 마친 후에 들어오라고 답하였다. 이에 원상(院相)이 아뢰기를,
"신들이 입시하고자 하는 뜻은 막중 대사에 혹시라도 차질이 있을까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령이 이와 같으니 간소하게 입시함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신 및 예조 판서, 두 찬선, 승지, 사관 각 1원은 입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세자가 하령하기를,
"소렴 때 입시하는 규정이 《오례의》에 보이는가?"
하였다. 원상이 달하기를,
"비록 《오례의》에는 실려 있지 않으나 고례(古禮)에 증거할 만한 문안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 명묘(明廟) 초상시에 이미 행한 전례가 있고, 기축년 국휼(國恤) 초에는 전례를 알지 못하여 소렴 전에 미처 품정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대렴(大斂) 때 비로소 진달하고 입시하였는데, 유신(儒臣) 김집(金集)이 추후에 규정화하여 영구한 의식으로 삼았습니다."
하니, 세자가 또 하령하기를,
"《오례의》에 실려 있지 않고 기축년 대상 때에도 실행하지 못하였다. 왔다갔다하는 사이에 시각이 너무 늦어지므로 아마도 선행해야 하겠다."
하였다. 원상이 달하기를,
"이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염습할 때 이미 입시하였으니 지금에 와서 더욱 중지할 수 없습니다. 많은 관원이 모두 들어오기 어려우면 대신과 예관 중에 한 사람이라도 입시해야 합니다. 만약 허락을 받지 못한다면 신들이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하고, 정원과 삼사가 또 합전에 나아가 극력 간청하였으나 세자는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이 재삼 간청하자 세자가 비로소 허락하여 대신 이하가 전내로 들어갔다. 의대(衣襨)를 이미 3∼4벌 염하고 나서 대신 이하가 곡을 멈추고 봉심하였다. 홍득기(洪得箕)·정선흥(鄭善興) 등 여러 집사가 수자 홍금 선의(壽字紅金線衣)를 염한 다음 녹단 표의(綠段表衣), 강사포(絳沙袍)를 차례로 염하였다. 상(裳)을 먼저 입히고 삼(衫)을 뒤에 입혔으며 폐슬(蔽膝)를 갖추고 녹단대(綠段帶)를 걸쳤으며 좌우에는 쌍수 사대(雙垂絲帶)를 두었다. 시열 등이 곁에서 지시하여 의대를 바로잡아 염한 후 끝으로 홍금 선금(紅金線禽)을 염하고 교포(絞布)를 종횡으로 벌려 놓고 묶지 않았다. 사람들이 묶지 않은 것을 온당치 않게 여기니, 정태화가 말하기를,
"교포는 신료들이 나가기를 기다려 묶으라."
하고, 시열은 말하기를,
"예문에는 대렴할 때 비로소 묶는다."
하였다. 대신 이하가 나가자, 내시가 세자를 모시고 들어왔다. 세자가 대신에게 하령하기를,
"소렴에 교포를 묶지 않은 데 대하여 비록 예의 본의가 어떠한지 알 수 없으나 일찍이 들은 바도 없을 뿐 아니라 이 매우 무더운 날씨에 뜻밖의 걱정이 생길까 염려된다. 조정의 중의는 어떠한가? 자세히 상의하여 아뢰라."
하니, 대신이 회달(回達)하기를,
"이는 유신(儒臣)이 예를 근거하여 결정한 일인데 다시 상의한 결과 송시열은 말하기를, ‘예문의 본의는 대개 효자의 마음으로 오히려 다시 살아나기를 기대하여 차마 성급히 묶지 못하는 것인데, 사람들이 모두 묶어야 한다고 하면 신도 감히 억지로 고집할 수 없다.’ 하고, 송준길은 말하기를 ‘예는 그러하나 여름철이라 매우 더우니 변례를 쓰지 않을 수 없다. 옛날 사대부가에서 혹은 묶어야 할 때 한두 가닥만 남겨 두어 예를 아끼는 뜻을 표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사세로 참작해 보면 이와 같은 무더위에 전연 묶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우선 한두 가닥만 남겼다가 사세를 보아 다 묶게 되면 염려할 일도 없을 것 같고 예의 뜻에도 어긋남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양사가 합달하기를,
"신료 복제(臣僚服制)의 정와론(正訛論)은 재차 수의를 거쳤으나 끝내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대신의 생각도 불가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변경하는 것을 어렵게 여기는 것일 따름입니다. 만일 예제의 미진함을 알았다면 어찌 행한 지 오래되었다고 하여 변통하지 않겠습니까. 만약에 우리 선군(先君)도 실행하지 않았다 하여 끝내 바로잡지 않는다면, 주(周)나라의 제례 작악(制禮作樂)이 문(文) 무(武)를 거쳐 성왕(成王)에 이르러 크게 갖추어진 것이 잘못입니까? 일찍이 선묘조(宣廟朝) 때 지평 민순(閔純)이 《오례의》의 졸곡(卒哭) 후 오모(烏帽)·오대(烏帶)의 잘못된 점을 고칠 것을 청하였는데, 선조(宣祖)께서 결단을 내려 행하였으니, 이것이 저하께서 오늘날 마땅히 본받아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익히 생각하여 깊으신 도량으로 단행하소서."
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이미 예를 정했으니 갑자기 고칠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였다.
미시(未時)에 내관 임우문(林友聞)이 원상 정태화에게 와서 고하기를,
"옥체는 장대한데 재궁(梓宮)의 척수가 부족하여 쓸 수 없습니다."
하니, 태화가 윤강·송시열·송준길 등과 더불어 곧 정선흥을 불러 물었다. 선흥이 대답하기를,
"어깨가 닿는 곳이 가장 넓은데, 재궁의 부족한 척수가 거의 두 치나 되고 길이도 부족한 것이 1푼 정도입니다. 만약 소렴 의대(小斂衣襨)가 과다했기 때문이라 한다면, 어깨가 닿은 곳에 사용한 것은 몇 건에 지나지 않으니 그것 때문이 아닙니다. 교포(絞布)는 처음에는 비록 묶지 않았으나 즉시 묶었고 그 묶은 것이 또 한 그리 느슨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염습을 잘하지 못한 소치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원상이 제신과 함께 들어가 봉심한 결과 과연 선흥의 말과 같았다. 제신이 어찌할 줄 모르면서 물러나와 상의하고, 세자에게 달하기를,
"장생전(長生殿)의 예비 재궁들이 모두 그 길이와 넓이가 쓸 만한 판재가 없으니, 외재궁(外梓宮)의 판재를 택하든가, 혹은 성중 및 강상(江上) 여염집에서 찾아서 만약 합당한 판재를 얻는다면 마땅히 을해년 국휼 때와 같이 하여 재궁을 봉안한 후 칠을 하면 됩니다. 그렇지만 끝내 넓은 판재를 얻지 못하면 부득불 황장목 상품(上品)으로 이어 붙여 쓰는 수밖에 다시 다른 계책이 없습니다."
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여염집에서도 오히려 부판을 쓰지 않으니 이는 결단코 할 수 없다. 좋은 나무를 속히 선택하여 대사에 유감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유시(酉時)에 원상이 아뢰기를,
"길이와 넓이가 합당한 판재는 품질의 좋고 나쁜 것을 막론하고 백방으로 찾아도 구할 수가 없습니다. 또 좋은 목재로 연판하면 실로 전판의 품질이 나쁜 것보다 났습니다. 그러므로 사대부가에서도 그 변백(邊白)을 제거하고 이어 붙여서 쓰는 자가 많습니다. 지금 사세가 급박하니 결코 부판을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백방으로 생각해 보아도 좋은 계책이 없다. 빨리 장인(匠人)으로 하여금 오늘 밤 안으로 재궁을 조성하여 그 내면 및 칠성판에 여러 차례 칠을 하도록 하라."
하였다.
신은 삼가 살피건대, 《정원일기》에 소렴 의대가 여섯 벌에 불과했다고 하였고 정선흥이 원상에게 대답한 말도 모두 실려 있다. 여섯 벌은 지나치게 두터운 것이 아니다. 교포를 묶지 말자는 의논은 처음 송시열에게서 나왔으나 성상의 분부와 신하들의 걱정하는 말로 인하여 한두 가닥만 남겨 예를 아끼는 뜻을 보일 것을 청하고 시열 역시 당초의 견해를 버리고 그것을 따랐다. 선흥의 대답에서도 교대를 너무 느슨하게 묶지 않았다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소렴을 잘하지 못한 것이 아니며 또 다른 걱정도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옥체의 풍위가 보통에 비해 큰 데 대해 재궁은 비록 즉위초부터 비치하였으나 유래의 척도를 따랐을 뿐이었다. 상사를 당해 널을 다루는 날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 길이와 넓이가 부족한 것을 알았다. 다른 재목을 찾아 얻지 못함으로써 부판을 쓰게 된 것은 참으로 부득이한 데에서 나온 것인데, 모함하는 자들은 교포를 묶지 않고 염습 고치기를 청하지 않은 것으로 송시열에게 죄를 돌렸다. 또 태화가 맨 처음 부판을 쓸 것을 발론한 것으로 시열의 뜻에 영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어찌 인정에 가까운 소행이겠는가. 간사한 사람들의 남을 모함하는 심리가 한결같이 이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시정기(時政記)는 지금 상고할 수 없으나, 마침 그 당시의 《승지일록(承旨日錄)》과 《정원일기》를 얻어 참고한 결과 소렴 의대가 조금도 예에 어긋남이 없었다. 승지일록에는 선흥(善興)의 말을 기록하여 이르기를 "어깨가 닿는 곳에 입힌 옷이 여섯 벌에 불과하며 또 모두가 겹옷과 홑옷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교포를 처음에는 묶지 않았으나 이내 묶었다."고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4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98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예조가 즉위할 날짜와 시각을 택하여 아뢰었다. 세자가 하령하기를,
"어제 들인 초기(草記)를 보고 몹시 놀랐다. 지금 또 날짜와 시각을 정하여 들이니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물어서 아뢰라."
하니, 원상 및 정원이 회달하기를,
"저군(儲君)의 사위(嗣位)가 옛날 제왕들의 통행하는 예일 뿐 아니라 아조의 열성들도 모두 그렇게 하였습니다. 이는 해조가 옛 제도에 따라 거행한 것이니, 별로 물을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답하기를,
"지금이 어떤 때이며 어떠한 거조인데 분명하게 품의하지 않고 바로 일시를 택하여 마치 시험하듯 하는가? 이는 내가 알 수 없는 일이다."
하니, 또 아뢰기를,
"자고로 대통을 계승하는 임금은 반드시 성복하는 날 위를 계승하였으니, 이는 대보(大寶)의 위를 하루도 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열성조가 준행하던 바이며 《오례의》에 모두 실려 있는 것으로서 실로 바꿀 수 없는 제도입니다. 해조가 품청하지 않고 바로 일시를 택한 것은 옛부터 유사로서 응당 행할 절차입니다. 어찌 시험하는 뜻이 있겠습니까. 하령이 실로 매우 온당치 않습니다."
하였다. 이에 답하기를,
"성복하는 날에 위를 계승함은 남의 자식된 정의로서 차마 할 수 없는 일인데 경들이 또 어찌 이를 차마하여 조금도 나의 뜻을 헤아리지 않는가. 빨리 예조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게 하라."
하였다.
5월 7일 정묘
원상 및 정원이 아뢰기를,
"삼가 하령을 받고 신들은 머리를 모아 통곡하며 차마 읽지 못하였습니다. 신들이 그 효심의 망극하고 인정으로 차마 하기 어려움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왕자가 통서를 계승하는 예는 지극히 엄중한 것이어서, 옛날의 철왕(哲王)들이 모두 지극히 애통함을 참고 대보(大寶)에 올랐으니, 실로 천위를 잠깐도 비울 수 없고 사정을 스스로 펼 여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신들은 결코 감히 이 하령을 해조에 분부할 수 없으니, 삼가 바라건대 슬픈 감정을 억제하고 선왕이 이미 행하신 예를 따르소서."
하고, 이어 전에 내린 택일 단자를 도로 드렸다. 이에 답하기를,
"예가 비록 중요하나 정의를 폐할 수는 없다. 경들은 어찌하여 나의 망극한 심회를 생각지 않는가? 결코 억지로 정리를 억제하며 이를 거행할 수 없다. 마땅히 전의 영에 따라 예관으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게 하라."
하니, 양사가 합달하고 옥당이 차자를 올려 제왕의 효를 깊이 생각하여 빨리 유사의 청을 따르라고 간청하였다. 이에 답하기를,
"나의 심정을 이미 원상에게 말하였으니, 다시 번거롭게 말하지 말라."
하였다.
정태화·심지원·윤강·송시열·송준길·김수항 【우승지.】 등이 아뢰기를,
"새로 만든 재궁이 몹시 완전하고 좋은 것 같습니다만, 이와 같이 막중한 일에 조금이라도 실수가 있으면 후회하여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혹시라도 이 때에 다시 의논하여 선처할 방법이 없지 않을 것이니, 이미 봉심한 6인의 신하 이외에 소렴 때 입시한 원임 대신 이하를 함께 봉심하게 하소서."
하니, 세자가 허락하여, 대신 이경석·이시백·원두표, 대사헌 이응시, 대사간 이상진, 승지 조형(趙珩)·원만석(元萬石)·오정원(吳挺垣)·이은상(李殷相)·유계(兪棨), 수찬 김만균(金萬均), 주서 이백린(李伯麟), 사관 정중휘(鄭重徽)가 들어가 봉심한 후 아뢰기를,
"조금도 미진한 일이 없어서 감히 다시 다른 의논을 드릴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새 재궁이 완성되어 재궁 내부에 세 차례 칠을 하였다.
삼사가 재차 사위(嗣位)의 간청을 폈으나 따르지 않았다.
5월 8일 무진
관학 유생 남이성(南二星) 등이 글을 올려, 속히 선유(先儒)의 정론에 따라 상복의 잘못된 점을 바로잡을 것을 청하고, 또 비록 뒤늦은 아쉬움은 있으나 선유들의 추복론(追服論)을 오히려 상고할 수 있음을 들어 말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여러 선비들의 말이 이에 이르렀으니 다시 예관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조처하게 하라."
하였다. 예조가 복계하였으나 시행하지 않았다. 사직(司直) 민정중(閔鼎重)이 또한 상서하였으나, 이미 관학 유생에게 하유한 것으로 답하였다.
대신이 백관 삼사를 거느리고 재차 사위(嗣位)를 청하고, 백관들이 세 차례나 아뢰었으나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사시(巳時)에 대행(大行)의 시상(屍床)을 선정전(宣政殿)으로 옮겨 오시(午時)에 대렴하였다. 이경석·정태화·이시백·심지원·원두표·이후원·윤강·송시열·송준길·이응시·이상진·조형·원만석·김수항·오정원·이은상·유계·김만기·이백린·맹주서(孟胄瑞) 【 주서(注書).】 ·박순(朴純) 【가주서(假注書).】 ·정중휘(鄭重徽)·송창(宋昌) 【사관(史官).】 등이 함께 입시하여 시상(屍床)을 전내 동북쪽 모퉁이에 봉안하고 남쪽으로 머리를 향하게 하였으며, 찬궁(欑宮)을 전내 북쪽에 설치하여 그 중앙에 해당시켰으니 일찍이 어탑(御榻)을 설치하였던 곳이다. 재궁은 찬궁 곁에 두고 염상(殮床)에 의대(衣襨)를 진열하여 재궁 남쪽에 두었으며, 명정 선개(銘旌扇蓋)는 찬궁 밖 서남쪽 모퉁이에 세웠다. 유장(帷帳)은 백색의 명주를 썼으며 【선개 역시 백색을 썼다.】 출회(秫灰)를 재궁 밑에 폈다. 【5두를 썼는데 두께는 1촌이다.】 재궁 내에는 홍단(紅段)을 바르고 사각(四角)에는 녹단(綠段)을 발랐다. 다음으로 칠성판(七星板)을 더하고 【역시 홍단을 발랐다.】 다음으로 금욕(錦縟)을 폈다. 옥체(玉體)를 대렴상으로 옮겨 모셨는데, 의대는 17벌이었다. 위에는 면복(冕服)을 쓰고 황금 선금(黃金線衾)으로 염하였다. 【대·소렴포(大小殮布)는 모두 백방 사주(白方絲紬)를 썼다.】 염이 끝나자 재궁에 봉안하였는데, 통천관(通天冠)과 적석(赤舃)을 가져다가 재궁에 넣었다. 윤강이 규(圭)와 패옥(佩玉)도 넣어야 하느냐고 묻자, 시열이 말하기를,
"불가하다. 주공(周公)의 제례(制禮)에는 썼으나, 노군(魯君)의 상에 공자(孔子)가 전계에 나아가 쓰지 말 것을 청하였다."
하였다. 태화가 선흥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기축년에는 어찌 하였는가?"
하니, 쓰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이에 태화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마땅히 현궁(玄宮)에 넣어야겠다."
하였다. 드디어 빈소를 설치하고 대신 이하가 곡하면서 퇴출하였다.
양사·옥당이 세 번째 아뢰고 백관들이 네 번째 아뢰어, 다시 사위(嗣位)를 청하였으나, 결코 따를 수 없다고 답하였다. 대신이 백관들을 거느리고 자전(慈殿)·중전(中殿)에게 아뢰어 내전으로부터 사위를 권면할 것을 청하니, 자전이 답하기를,
"조종의 옛 법도이다. 비록 망극한 상중에 있으나 어찌 행하지 않겠는가. 마땅히 세자에게 권유하여 따르게 할 것이다."
하고, 중전 역시 권유하겠다고 답하였다. 백관이 다섯 번째 아뢰니, 세자가 답하기를,
"위로 자전의 뜻을 받들고 아래로 여러 사람들의 뜻을 따라서 하늘에 사무치는 망극한 심정을 억제하며 그 차마 하지 못할 일을 하니 이를 바를 모르겠다."
하였다.
세자가 선정전 서쪽 계단 밑 여막에 있었다.
5월 9일 기사
진시(辰時)에 의식대로 성복하였다.
오시 초에 왕세자가 사위하였다. 사위에 앞서 욕위(褥位)를 빈전(殯殿)의 동쪽 뜰에 남쪽에 가깝게 설치하여 북향을 하게 하고, 악차(幄次)를 돈례문(敦禮門) 동쪽 협문 안에 설치하고 【악차는 원래 문밖에 설치해야 하는데 잘못 문안에 설치하였다.】 대보안(大寶案) 및 향안(香案)을 찬궁(欑宮) 남쪽에 설치한 다음, 영상, 예조 판서, 승지, 주서, 사관, 좌·우통례 가 함께 조복을 갖추고 차례로 들어갔다. 영상·도승지 및 주서·사관 각 1인은 빈전 동쪽 계하에 나아가 부복하고, 좌승지 이하는 서쪽 뜰 여막 남쪽에 꿇어 엎드리고 좌·우통례 는 서쪽 계하 장막 밖에 꿇어 엎드려 승지 앞에 있었고, 예조 판서는 여막 앞에 나아가 꿇어 앉아 면복을 갖추기를 청하고, 영상·도승지·주서·사관은 동계로 말미암아 먼저 들어가 전내의 동쪽에 꿇어 엎드렸다. 좌승지가 시각이 늦었다고 고하자, 사왕(嗣王)은 평천관(平天冠)을 쓰고 흑곤의(黑袞衣)를 입고 홀[圭]을 잡고 여막에서 나왔다. 좌·우통례 가 사왕을 인도하여 서계 아래로부터 걸어서 욕위(褥位)에 나와 꿇어앉고 승지와 사관이 배종하였다. 사향(司香)인 예조 낭관이 향안(香案) 앞에 나와 분향하고 물러가자 사왕이 사배(四拜)하고, 영상이 찬궁 남쪽 상 앞에 나아가 꿇어앉아 대보(大寶)를 받들고 물러나 서쪽을 향하여 섰다. 좌통례가 사왕을 인도하여 동쪽 계단으로 올라가 【승지와 사관은 전문 밖에 머물러 있고 우승지만 들어갔다.】 향안 앞에 나아가 북향하고 꿇어앉아 홀을 놓으니 도승지가 홀을 받았다. 영상이 대보를 받들어 사왕에게 올리자, 사왕이 대보를 받아 내시에게 주었다. 우승지가 다시 전해 받들고 물러나와 뒤에 꿇어앉았다. 도승지가 홀을 올리니 사왕이 홀을 잡았다. 우승지가 대보를 전해 주고 도승지가 대보를 받들고 먼저 전계를 내려갔다. 좌통례가 사왕을 인도하여 욕위(褥位)로 나아가 사배(四拜)한 다음, 악차(幄次)에 나아갔다. 잠시 후에 우통례가 자리에서 물러나기를 계청하고, 인도하여 동쪽 협문으로 나아갔다. 상서원(尙瑞院) 관원이 대보를 받들고 먼저 행하였다. 산선 시위(繖扇侍衛)가 의식에 따라 소여(小輿)를 드렸으나 사왕이 물리치고 걸어서 연영문(延英門)·숙장문(肅章門) 두 문을 나왔다. 이에 앞서 인정문(仁政門)에 어좌(御座)를 베풀었는데, 중앙에 위치하고 남향하여 여연(輿輦)·노부(鹵簿)를 설치하기를 의식대로 하였다. 백관들이 조복을 갖추고 동·서정에 순서대로 섰다. 사왕이 어좌의 동쪽에 이르자 도승지가 세 번 어좌에 오르기를 청하고 우승지가 이어 청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예조 판서가 또 이어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영상이 따라 들어가 굳이 청하자 사왕이 비로소 어좌 앞에 나아가 남쪽을 향해 섰다. 바로 어좌에 오르지 않자 예판과 영상이 나아가 강청하였다. 이에 사왕이 말하기를,
"이미 어좌에 나아갔으니 자리에 앉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고 하면서 목놓아 슬피 울며 눈물이 비오듯하여 여러 신하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다. 영상이 울면서 의식에 따를 것을 두세 번 간청하자 곧 어좌에 나아가 앉았다. 이 때 궁정에 있던 제신과 시위 장사가 오열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사왕이 백관의 하례를 받은 다음, 어좌에서 내려 인정문(仁政門) 동협으로 걸어서 들어가며 정로(正路)를 경유하지 않았다. 동쪽 계단으로 올라가 인정전에 이르자, 우승지가 전내 정문으로 들어갈 것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고 궁전 밖 동무(東廡)로 돌아 걸어서 인화문(仁和門)으로 들어갔는데, 통곡하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이 날 비가 내렸는데, 사위(嗣位)할 때에는 쾌청하였다가 저녁에 다시 비가 내리므로 사람들이 모두 다행하게 여기었다.
왕의 휘는 원(棩)이요, 자는 경직(景直)이니 효종 대왕의 적사(適嗣)며 인조 대왕의 손자이다. 모비(母妃)는 인선 왕후(仁宣王后) 장씨(張氏)로 우의정 신풍 부원군(新豊府院君) 유(維)의 딸이니, 명나라 숭정 14년 신사 2월 4일 기유 축시(丑時)에 심양 질관(瀋陽質館)에서 왕을 탄생시켰다. 갑신년에 비로소 환국하였는데, 을유년에 소현 세자가 졸하자, 효종이 차적(次嫡)으로서 책봉을 받아 왕세자가 되고 왕은 원손이 되었다. 기축년 2월에 인조가 친히 인정전에 임어하여 왕세손으로 책봉하였는데, 이 해 5월에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왕위를 계승하자 왕이 왕세자가 되었다. 신묘년에 원복(元服)을 가하고 비로소 책봉례를 행하였으며, 겨울에 익위사 세마(洗馬) 김우명(金佑明)의 딸 【영의정 김육(金堉)의 손녀.】 을 빈(嬪)으로 삼고, 임진년에 입학례를 행하였다. 기해년 5월에 이르러 효종이 승하함으로써 왕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왕이 즉위 후 백관의 하례를 받고 대사령과 함께 팔방에 교서를 반포하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왕은 이른다. 하늘이 큰 상사를 내려 바야흐로 혹독한 벌을 입고 있는데, 나는 군하의 청에 못 이겨 억지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애통하기 그지없으니 울부짖은들 어찌 미치랴. 우리 대행 대왕(大行大王)은 대순(大舜)의 성스러운 효(孝)로 문왕(文王)의 현명한 책모를 계술하였다. 정일(精一)로 전승함으로써 높은 덕업이 상제(上帝)를 짝하고, 억조 창생이 추대를 원함으로써 지극한 은택이 널리 하민(下民)에 흡족하였다. 하늘을 공경하여 수성(修省)의 도리를 다하자 우양(雨暘)이 조화를 이루고, 어진 이를 예우하여 등용의 미를 이루자 초야가 모두 비었다. 임어하신 지 10년 이래 거의 삼대(三代)의 성세를 만회하였다. 하늘이 남몰래 도움으로써 옛날 병의 쾌유를 즐거워하게 되고 정치의 기구를 다 갖춤으로써 더욱 큰 업적을 이룰 뜻을 넓히게 되었다. 어찌 작은 신병이 더욱 심하여 마침 영원히 서거하심에 이를 줄 알았으랴. 소자가 불행하여 모인을 대임하고 싶은 마음 간절할 뿐이요, 군생이 복이 없어 갑자기 아비를 잃은 슬픔에 잠기었다. 황황히 구할 것 같은 마음은 옥궤(玉几)를 받들 뿐 미칠 수가 없었고, 희미하게 보이는 것 같은 마음은 유궁(遺弓)을 안을 뿐 누구에 의지하랴. 이에 흙덩이를 베개하는 막중 상사를 당하여 어찌 왕위에 오르는 의식을 편히 여기랴. 지극히 애통함을 스스로 억제하기 어려움이 있거니와 어린아이의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깊고, 왕위를 오랫동안 비울 수 없거니와 신민이 버리지 아니함에 어찌하랴. 이에 자전(慈殿)의 뜻을 받들고 옛 법도에 따라 금년 5월 9일 인정문(仁政門)에서 왕위에 올랐다. 자의 왕대비(慈懿王大妃) 조씨(趙氏)를 추존하여 대왕 대비(大王大妃)로 삼고, 왕비(王妃) 장씨(張氏)를 추존하여 왕대비(王大妃)로 삼고, 빈(嬪) 김씨(金氏)를 왕비(王妃)로 삼았다. 금년 5월 9일 이전의 잡범 사죄(雜犯死罪) 이하는 모두 사면하고 관직에 있는 자는 각각 1등급의 자급을 더하며 자궁자(資窮者)는 대신 가자하라. 욕의(縟儀)의 진설을 쳐다보면서 차마 오늘 아침의 하례를 받는다. 침전을 문안할 날이 없음을 통탄하며 슬피 부르짖어 울고, 돌아보고 어찌 지존의 병풍을 치랴 하며 자신을 어루만지면서 슬퍼한다. 아, 조종의 왕업을 떨어뜨릴까 염려되니 어찌 감히 게을리하겠는가. 뇌우(雷雨)의 은택이 시원히 내리니 다 함께 새로운 시작에 참여한다."
관상감이 본감(本監)에 기록된 곳 중 일찍이 좋다고 평가된 산의 열두 곳을 먼저 가서 간심할 것을 계청하니, 상이 일렀다.
"장릉(長陵) 내외도 또한 함께 간심하라."
병조가, 궁성의 호위를 철거할 것과 선전관을 보내 먼저 봉황성에 부고할 것을 계청하였다.
정원이, 원상(院相)을 전례에 의해 파출할 것을 계청하니, 상이 황미한 중에 일을 살피지 못함을 들어서 공제(公除)까지 그대로 유임할 것을 명하였다. 정태화는, 구차히 규례를 어기면서 과다한 날을 머무는 것이 미안하다는 것으로 사양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여러 승지가 그대로 함께 머물러 숙직하였다.
양사가 합계하기를,
"약방 도제조 원두표(元斗杓)가 대행 대왕이 병환으로 편치 못한 때에 널리 명의(名醫)를 불러들여 함께 침약(鍼藥)을 의논하지 못하고, 또 시약청(侍藥廳)을 설치하여 보호의 도리를 다하지도 못하였습니다. 심지어 초4일 입진(入診)할 때에 이르러는 한결같이 유후성(柳後聖)에게 맡겨 병든 의원으로 하여금 침을 놓게 함으로써 잘못 혈맥을 범하였습니다. 이에 신민이 다 함께 분개하여 두표에게 죄를 돌리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두표를 중도 부처(中道付處)하소서. 제조 홍명하(洪命夏), 부제조 조형(趙珩)은 비록 부관으로서 주장할 수는 없었으나 그 가부를 따져 쟁집하지 못한 죄는 중히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울러 관작을 삭탈하소서. 어의(御醫) 유후성(柳後聖)은 병환이 있을 초기에는 작은 부스럼병이라 생각하여 대수롭잖게 보았고, 점차 심중하게 되어서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추종자 한두 사람을 입시시키고 또 병들고 수전증이 있는 자로 침을 놓게 하여 망극한 상을 당하였습니다. 조징규(趙徵奎)는 후성에게 아부하여 심복이 되었는데, 증세를 논하고 약을 의논함에 있어 그의 지시만을 듣고 군부의 병환을 생각하지 않아 오직 후성의 뜻에 어긋날까 두려워할 뿐이었으니, 후성과 징규는 그 죄가 동일합니다. 신가귀(申可貴)는 병이 중한 것을 헤아리지 않고 손을 떨면서 끝내 침을 놓기를 삼가지 않아 잘못하여 혈맥을 범하였으니, 이 세 적의 죄는 천지에 사무치는 것으로 사람들이 그 고기를 먹고자 합니다. 왕법으로 헤아려 볼 때 결코 일각도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다 함께 처벌하여 방형(邦刑)을 바로잡으소서. 그 나머지 입시한 여러 의원들도 모두 멀리 귀양보내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제조 는 여러 의원의 말을 믿고 따랐을 뿐이니 이처럼 처벌할 수 없고, 여러 의원을 모두 잡아 가두었으니 공평한 의논을 기다려 조처하려 한다."
하고, 모두 따르지 않았다.
5월 10일 경오
원상 정태화가, 기축년 고사에 의하여 좌상 심지원과 함께 원상의 일을 행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에 따랐다.
이후원(李厚源)을 고부사(告訃使) 겸 청시승습사(請諡承襲使)로, 유심(柳淰)을 부사로, 정익(鄭榏)을 서장관으로, 정태화를 내의 도제조로, 정유성(鄭維城)을 제조로 삼았다. 【대신이 약방 제조가 논박을 당했다는 이유로 먼저 체직을 청하였다. 공제(公除) 전에 대개 차제(差除)가 있을 경우, 상이 낙점하지 않고 3망(三望) 중에 나아가 모망(某望)을 차임하라고만 명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8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100면
【분류】인사-임면(任免)
대신, 정부 당상, 6조 2품 이상이 빈청에 모여 어압(御押)을 의논한 결과 입(立)자로 정하였다.
5월 11일 신미
이경석(李景奭)을 시장 제술관(諡狀製述官)으로, 조경(趙絅)·채유후(蔡𥙿後)·윤순지(尹順之)·이일상(李一相)·조수익(趙壽益)·조한영(曺漢英)·김수항(金壽恒)·조복양(趙復陽)·유계(兪棨)·이정기(李廷夔)를 찬집청 당상(撰集廳堂上)으로, 이단상(李端相)·조귀석(趙龜錫)·안후열(安後說)·김만기(金萬基)·김만균(金萬均)·임한백(任翰伯)·목내선(睦來善)·김익렴(金益廉)·오시수(吳始壽)·이정(李程)·황준구(黃儁耉)·정인경(鄭麟卿)을 낭청으로 삼았다.
대신 및 정부 당상, 6조 참판 이상, 관각 당상이 모여 대행 대왕의 시호를 의정하여 선문 장무 신성 현인(宣文章武神聖顯仁) 【선을 베풀어 두루 열어주는 것을 선(宣)이라 하고, 민첩하고 학문 좋아하는 것을 문(文)이라 하고, 법도를 크게 밝히는 것을 장(章)이라 하고, 대사를 결정하여 정하는 것을 무(武)라 하고, 백성을 잘 다스려 일이 없이 하는 것을 신(神)이라 하고, 선행을 포양하고 부세를 가벼이 하는 것을 성(聖)이라 한다.】 으로, 묘호(廟號)를 효종(孝宗)으로, 전호(殿號)를 경모(敬慕)로, 능호(陵號)를 영(寧)으로 하였다. 대신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열성 휘호(徽號)의 끝자를 상고해 보니 모두 효(孝)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효자로 묘호를 삼았으므로 거듭 쓸 필요가 없습니다. 또 황조(皇朝)의 시호를 상고하니, 모두 효자가 있으나 유독 효종에게는 다른 글자로 고쳤습니다. 이를 근거하여 신들이 의논해 확정하여 인(仁)자로 효자를 대신하였습니다."
하였다. 시호는 처음 열문 의무 신성 지인(烈文毅武神聖至仁)으로 정하였으나 열문 의무 지인은 모두 열성의 휘호를 범하기 때문에 고쳤고, 능호는 처음 익(翼)자로 정하였으나 상이 미흡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또한 고쳤다. 상이 영(寧)자가 무슨 뜻이냐고 묻자, 여러 신하들이 영(寧)은 곧 안녕의 뜻으로 마치 《서경(書經)》에서 말한 영고(寧考)·영왕(寧王)과 같고, 본조의 영녕(永寧)·숙녕(肅寧) 등의 전호(殿號)가 또한 이 뜻이라고 대답하였다. 상이 이에 좋다고 하였다.
5월 12일 임신
재궁 가칠 도감(梓宮加漆都監) 당상이 뜰 위에 들어와 부복하고 승지와 사관도 함께 입시하였다. 백관이 인정전(仁政殿) 뜰에 모여 곡하고, 그 후 가칠하여 스물 다섯 차례에 이르러 그쳤다.
이에 앞서 여러 도에 암행 어사를 파견하였는데, 예조가 나라에 대상(大喪)이 일어남으로써 경기 어사 안후열(安後說),강원도 어사 이정(李程) 등을 소환하여, 이들은 모두 일을 마치지 못하고 즉시 달려와 곡하였다. 대사헌 이응시 등이 아뢰기를,
"사명을 받들고 나갔다가 국상을 만난 자는 반드시 일을 마친 후 빈전(殯殿)에 복명하는 것이 상례입니다. 지금 여러 도에 파견된 암행하는 신하들이 미처 일을 마치지 못하였는데, 예조가 전례를 살피지 못하고 그들의 귀환을 성급하게 재촉하였습니다. 처음 대행 대왕께서 파견하여 염문(廉問)하게 한 뜻은 실로 평범한 의례를 따른 데 비할 것이 아니니, 지금 만약 방치하고 거행하지 않는다면 이는 선왕의 명령을 풀숲에 버리는 것입니다. 예조 당상을 추고하고, 귀환하지 않은 여러 도의 어사에게 속히 명하여 일을 마친 후 복명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에 따랐다. 장령 허목이 이윽고 인피하면서 아뢰기를,
"옛날 사명을 받든 자가 임금이 승하할 경우 반드시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것은 임금의 명령을 중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치화를 경신하는 처음에 행여 해이한 폐단이 있을까 염려되는데, 신이 우매하고 망령됨을 헤아리지 못하고 맨 처음 이 의논을 제기함으로써 대신으로부터 비난을 받았습니다. 체직하소서."
하자, 대사헌 이응시, 장령 황준구 등이 잇달아 인피하였다. 정언 안후열이 또 ‘신자의 정리로 차마 바로 달려가 곡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과천(果川) 도중에 예조의 이관(移關)을 보고도 그대로 들어옴으로써 빨리 귀환한 잘못을 면하기 어렵다.’는 것으로 체직을 청하였다. 이튿날 간원이 처치하여 아뢰기를,
"사명을 받든 신하는 의당 정리를 억제하고 그대로 머물렀다가 빈전에 복명하여야 하고, 《오례의》에도 사신의 성복 절차가 있으니, 어사의 거취는 본래 해조가 지휘할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논계를 해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 반면에 지극한 애통이 발로되어 정리가 예의보다 지나치게 된 것이니, 그 형편을 보아서 성복일에 미칠 만하다면 황급히 귀환하는 것도 하나의 도리입니다. 아울러 출사하게 하소서."
하여, 상이 이에 따랐다.
5월 13일 계유
간원이, 훈련 별장(訓鍊別將) 김경(金鏡)이 궁성을 호위하던 날에 여인을 장막으로 끌어들였다고 탄핵하여 사판에서 삭제할 것을 청하고, 또 군령을 엄하게 하지 못한 것으로 대장 이완(李浣)의 추고할 것을 청하였는데, 나중에 알아보니 여인은 바로 김경의 집 여종으로 식사를 나르던 자였다. 여러 관원이 모두 실정을 알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이에 상은 사직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드디어 사판 삭제의 명을 환수하고 먼저 파직하고 뒤에 추고할 것을 계청하니, 상이 추고만을 명하였다.
전남도(全南道) 암행 어사 강유후(姜裕後),충청도 어사 김수흥(金壽興)이 들어왔다.
5월 14일 갑술
지평 강유후가 어사로서 빨리 돌아온 실책을 들어 체직을 청하니, 헌부가 처치하여 출사를 청하였다.
경상 우도 어사 민유중(閔維重)이 들어왔다.
상이 이후원(李厚源)의 병이 심하여 사명(使命)을 변경하려고 하는 것으로 원상에게 묻자, 정태화·심지원이 함께 자신이 갈 것을 청하였다. 이에 상이 이르기를,
"수상(首相)은 갈 수 없고, 총호사도 중간에 개정할 수 없거니와 정청을 열어 새로 선출하기도 더욱 미안하다. 경들은 다시 변통하는 방법을 생각하라."
하였다. 이에 태화가 아뢰기를,
"임신년 국상 때의 고사를 상고하면 공제 전에도 정청을 열었습니다. 지금은 이 전례를 따르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금일은 임신년과 다르므로 정청을 열 수 없다. 먼저 사신을 차출하고 뒤에 정승을 뽑도록 하라."
하고, 드디어 전일 복상(卜相)에 참여된 사람을 써서 들여올 것을 명하고 판중추부사 정유성(鄭維城)을 고부 정사(告訃正使)로 차임하였다.
5월 16일 병자
채유후(蔡𥙿後)를 지춘추(知春秋)로 삼았다.
총호사가 아뢰기를,
"산릉의 가합한 곳을 예조 당상과 관상감 제조가 간심한 후 신이 즉시 나아가 의논해 결정해야 하는데, 술업에 정명한 사람이 아니라면 취사가 실로 어렵습니다. 사대부 중에 전 참의 윤선도(尹善道), 행 부호군 이원진(李元鎭)이 풍수에 해박하여 이름이 났으니, 이 두 사람을 함께 대동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상이 이에 따랐다.
이판 송시열이 상소하여 지문(誌文)을 짓는 것을 사양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이 만약 지문을 짓는다면 또한 선왕을 보답하는 데 한 방법이 될 것이다."
하였다. 시열이 재차 사양하기를,
"신이 일찍이 보건대 주자(朱子)가 효종(孝宗)의 상사에 만사를 제진(製進)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제진하지 못하고 퇴임하였다가, 그 후 병들고 쇠약하였을 때 드디어 완성하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묵묵히 평생토록 생각하며 우러러 은혜에 보답한다.’고 여기며 감격하여 마지않고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다는 뜻을 보였습니다. 신이 이를 읽을 때마다 두세 번 반복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지금 신이 조금이라도 재력(才力)이 있어 만분의 일이라도 그 훌륭한 업적을 포양하여 금석에 올릴 수 있다면 미천한 신이 평소 은혜와 신임을 저버린 죄를 조금이나마 보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은 어려서 학문에 실패하여 문자(文字)의 일에 있어서는 전연 그 맥락을 모릅니다. 그러므로 결코 비루한 재식으로 막중한 국가의 전례를 더럽힐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사양하지 말라고 회유하였다.
헌부가, 각도의 어사를 재촉하여 귀환하게 한 이유로 예관의 추고를 청하였다. 이경석(李景奭)이 듣고 말하기를,
"아비가 죽었는데 상사에 달려가지 않는 것이 그 예의에 대해 어떠한지를 모르겠다."
하니, 허목이 또 피혐하며 아뢰기를,
"어버이의 상사는 은혜를 주장하고 임금의 상사는 의리를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상사에는 상사가 아니면 말하지 않고 임금의 상사에는 일을 폐하는 것으로 예를 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봉명 사신이 천자가 붕어하거나 임금이 훙서할 경우 직위를 위해 한 차례 어깨를 벗어메는 의식을 행하고 천자에게는 9곡, 제후에게는 5곡을 하여 감히 외빈을 맞지 않을 뿐입니다. 만약 사신 일의 중대함을 묻지 않고 한결같이 달려가 곡하는 것으로 정의를 삼는다면 그 선왕의 명령을 풀숲에 버리게 되는 데에 어찌하겠습니까. 신의 고집하는 바는 이와 같은 뜻에서입니다. 일찍이 예조 관문의 실수를 논박하고 지금 대신의 깊이 질책하는 바가 되었으니, 태연히 직위에 있을 수 없습니다. 체척을 명하소서."
하고, 여러 동료들도 드디어 함께 피혐하였다. 간원이 또, 전일 헌부의 여러 관원을 출사시킬 것을 청함으로써 대신으로부터 비난을 받았고, 또 전에 김경(金鏡)의 일을 논한 것이 실수한 이유와 또 물러나 물론을 기다리지 않고 즉시 율문을 고침으로써 옥당이 논박하고자 하는 바 되어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피혐하였다. 홍문관이 차자를 올려 장령 허목 등을 출사시키고 대사간 이상진 등을 체차할 것을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5월 17일 정축
중전(中殿)의 탄일이므로 정부가 표리(表裏)를 봉진하고, 상방(尙方) 역시 물건(物件)의 봉진이 있자, 상이 이르기를,
"비록 미세한 물건이지만 이 때 봉진해서는 안 된다."
하고, 들이지 말 것을 명하였다.
영돈녕 이경석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의례》를 상고하였습니다. 그 글은 감히 모두 거론할 수 없겠으나 그 뜻은 대개 이르기를 ‘왕명을 받들고 빙문하는 자가 이미 그 국경으로 들어갔으면 사신의 일을 수행한다.’고 하였으니, 수행한다는 것은 곧 사신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며 사명을 띠고 나갔다가 돌아오면 최복을 입고 나와서 빈소에 복명하는 것이니, 이는 곧 이웃 나라를 빙문하는 예로서 국내에서 사명을 받든 것과는 자연 같지 않습니다. 이웃 나라를 빙문하는 자도 부음을 들으면 즉시 돌아오는 법인데, 국내에 있는 자가 군부의 부음을 듣고 달려오지 않으면 되겠습니까. 《오례의》에 사명을 받들고 성복(成服)한다고 실렸으니, 그것은 감사(監司)·병사(兵使)·수사(水使)가 모두 사명을 받든 것이며 지금 북경 사행(北京使行)·동래 접위사(東萊接慰使)도 또한 그것입니다."
하고,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심지원이 아뢰기를,
"신들이 예는 알지 못하나 사리로 헤아려 보면, 사명을 받든 자가 천붕(天崩)의 변을 들으면 필시 그대로 암행(暗行)할 수 없어서 관문(官門)에 나아가 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번 그렇게 하고 나오게 되면 열읍이 아는 바가 되어 비록 다시 이 소임을 시행하고자 하여도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예조가 귀환을 재촉한 일은 신들이 이미 참여한 일인데, 대각의 말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부끄럽고 두려움을 참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함께 답하기를,
"경들은 잘못한 바가 없다."
하였다.
정태화가 구두로 전하여 상에게 아뢰기를,
"제왕가는 범인과 달라서 비록 친속간의 예법이라도 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듣건대 두 왕자 외에 대군의 여러 아들에 이르기까지 항상 금달(禁闥)에 거처한다고 하니 이는 수시로 나아가 접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또 듣건대, 친속 부인이 오랫동안 내간에 머물고 비복의 무리가 멋대로 출입하여 즉위의 초기에 소문이 아름답지 못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특별히 성찰을 가하여 이와 같은 폐단이 없게 하소서. 양전(兩殿)에 관계되는 일에 이르러도 신들의 말로 앙달(仰達)하여 엄히 금하는 것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의 정성이 여기에 이르니 내 몹시 감격스럽다. 일찍이 선조에 있어서는, 국법으로 보아 비록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되지만 친친의 도리를 또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여 수시로 출입하게 하였다. 금후에는 마땅히 유념하여 자주 들게 아니할 것이다."
하였다.
이 때 양사가 합계하여 내의 제조 원두표의 부처와, 홍명하·조형 등의 삭탈과 어의 신가귀·유후성·조징규 등을 국법으로 다스릴 것을 계속 청하고, 옥당도 역시 차자를 올려 논박하였다. 이에 상이 이르기를,
"그 당시의 사세를 참작하지 않고 공훈 대신을 곧바로 유배시키자고 청하는 것은 옳은 처사가 되지 못한다. 병든 의원으로 하여금 침을 놓게 한 것은 제조 및 후성의 무리가 감히 스스로 결정한 일이 아니라 이는 특명에서 나온 것이다. 약을 쓰는 것이 만약 미진함이 있어서 망극한 슬픔을 당하였다면 내가 무슨 마음으로 경들의 말을 듣지 않으랴. 약간이라도 필시 차등이 있을 것인데 대체로 3적(三賊)의 죄를 조금도 차이가 없이 논해서야 되겠는가. 가귀(可貴)는 지난해 파종(破腫)한 공이 있어 선왕께서 항상 칭찬하시던 그 말씀이 아직 귀에 남아 있으므로 차마 형을 가할 수 없다."
하면서, 수일 동안 허락하지 않다가 이에 이르러 답하기를,
"가귀의 공은 잊을 수 없으나 그 죄가 사형에 해당되니 아뢴 대로 하고, 후성(後聖)·징규(徵奎)는 원래 죽일 죄가 아니니 사형을 감하여 정배하고, 나머지 의원은 해당 부서로 하여금 조율(照律)하게 하라. 제조의 일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산릉 도감이, 기축년 대상 때의 예에 의하여 승군(僧軍) 1천 명과 연군(烟軍) 3천 명을 각도에 분배하여 징발하되, 연군은 먼저 강도(江都) 및 병·호조(兵戶曹), 태복(太僕) 상평(常平) 각 아문의 미포(米布)로 고용하였다가 가을을 기다려 베는 산군(山郡)에서 거두고 쌀은 해읍(海邑)에서 거두어 보상할 것을 청하고, 이윽고 다시 병조·호조의 저장을 전용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에 따랐다.
5월 18일 무인
장령 황준구(黃儁耉)·허목(許穆), 지평 강유후(姜裕後)·이합(李柙) 등이 원두표(元斗杓)의 일을 다시 논하여 아뢰기를,
"신가귀가 침을 놓은 것이 비록 특명에서 나온 것이지만 병을 앓고 수전증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한 마디의 간쟁도 없었습니다. 이것을 어찌 그 당시의 사세로 미루고 처벌하지 않겠습니까. 대신이 비록 공훈이 있으나 시병(侍病)을 다하지 못한 일에 관계되니 그 공으로 죄를 엄폐할 수 없습니다."
하고, 이어 제조도 함께 논박하였다. 또 아뢰기를,
"유후성은 이미 가귀가 수전증이 있는 줄 알면서도 특명으로 침을 놓게 할 때 자신이 수의(首醫)가 되어 끝내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으며, 조징규(趙徵奎)는 방관만 하고 있다가 가귀가 잘못 혈맥을 범하고 나서야 비로소 말하기를 ‘내가 이미 이럴 줄 알았다.’고 하였으니, 오직 이 말 한 마디에도 그 죄가 죽어도 남음이 있습니다."
하였으나,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대각은 임금의 이목이니 하루도 그 자리를 비울 수 없습니다. 일찍이 인목 왕후(仁穆王后)의 국휼(國恤) 때 공제(公除) 전에 차출한 전례가 있습니다. 지금 나라에 대사가 있는 때인데도 간원이 비어 있으니 일이 몹시 온당하지 않습니다. 속히 정청을 열어 차출하소서."
하고, 또 논계하기를,
"왕자·왕손·부마 등이 자주 내간에 유숙하니, 궁금(宮禁)이 엄하지 않게 되는 조짐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공제 전에 정청을 여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니 굳이 청하지 말라. 그리고 왕자 등이 초상 후에는 유숙한 일이 없다."
하였다.
5월 19일 기묘
정언 이익(李翊)이 아뢰기를,
"일찍이 전 대사간 조한영(曺漢英)의 처사의 그름을 탄핵하였는데, 지금 한영의 자명소(自明疏)를 보니 신을 형편없는 소인이라고 논척하였습니다. 신이 맞서 변명하고자 하나 자못 사대부간의 좋은 일이 아니며, 선조조에 있었던 일이라 또 오늘날 차마 제기할 수 없었는데, 지금 언관에 있으니 그 어찌 감히 그대로 무릅쓰고 있겠습니까."
하고, 피혐하여 체직을 청하였다. 이튿날 지평 강유후, 장령 황준구 등이,
"일찍이 조한영 및 헌납 민유중(閔維重) 등이 피혐할 때 모두 출사시킬 것을 청하고 한영의 상소에 이미 모두 출사시킬 것을 말하였는데, 이익(李翊)이 또 한영의 소척(疏斥)으로 피혐하였으니, 신들이 감히 가부를 가려 처치할 수 없습니다."
하고, 피혐하였다. 장령 허목, 지평 이합 등이 처치하여 함께 출사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5월 21일 신사
종부 주부(宗簿主簿) 홍석(洪錫)이 상소하여 복제(服制)에 고례(古禮)를 쓰지 않는 잘못을 말하고, 또 사위(嗣位)할 때 군신이 길복(吉服)을 입음이 예가 아니라는 것을 들고, 또 대명(大明)과 고려(高麗)의 제도를 따라 신릉(新陵)을 선릉(先陵)의 국내에 정할 것을 청하였으니, 이는 대개 옛 유신 서경덕(徐敬德)의 의상소어(擬上疏語)를 쓴 것이다. 상이 너그럽게 답하였다.
5월 23일 계미
상이 편치 못한 기색이 있으므로 약방이 온돌에 거처하며 우선 곡읍의 절차를 멈출 것을 청하고, 또 탕약을 드실 것을 권하였다. 이에 상이 답하였다.
"지금 약을 입에 가까이 할 때가 아니지만 이처럼 강청하니 마땅히 따르겠다."
5월 24일 갑신
예조 판서 윤강(尹絳)이 산을 간심한 후 복명하여 아뢰기를,
"신이 삼가 여러 지관들이 논한 곳을 보니, 홍제동(弘濟洞)의 그 뻗어내린 산맥의 장원함과 그 역량의 방대함을 극찬하였으나, 신의 소견은 자못 그렇지 않은 것이 있었습니다. 대개 길지를 택하는 데에는 마땅히 혈(穴)로 주를 삼아야 하는데, 그 혈이 화가(花假)가 되면 청룡, 백호가 둘러싸고 안대가 수려하여 말할 것도 없습니다. 신이 그 혈이 있는 등성을 살펴보니 백여 보를 흘러내려 그 나약한 산세가 마치 선어(鱔魚)의 형체와 같았습니다. 이는 대개 영릉(英陵)의 지류 산맥이라 대용(大用)에 불가합니다. 신이 만약 잡술(雜術)의 혐의를 피하여 그 결점을 말하지 않고 대행 대왕의 옥체를 불길한 사토(沙土) 속에 모시게 된다면 신의 죄는 만 번 죽어도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신이 가서 얻은 진혈(眞穴)은 오직 임영 대군(臨瀛大君)의 산소와 헌릉(獻陵) 국내의 한 곳이 선택의 조건을 갖추었습니다. 널리 풍수에 해박한 지사를 불러 모아 홍제동 및 이 두 혈을 다시 간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산릉 도감이 아뢰기를,
"헌릉 이수동(獻陵梨樹洞), 건원릉(建元陵)의 제일 첫째 등성, 영릉 홍제동(英陵弘濟洞), 임영 대군 묘산(墓山), 안여경 (安汝慶) 묘산(墓山), 월롱산(月籠山), 이 여섯 곳을 지금 다시 간심하려 하는데, 목릉 참봉 이최만(李最晩), 사인(士人) 박세욱(朴世郁)이 풍수에 해박하니 이 두 사람을 대동하소서."
하니, 상이 이에 따랐다.
5월 25일 을유
전 자의(諮議) 이상(李翔)이 대행(大行)의 상사를 듣고 서울에 달려와 배곡하고 귀행할 때 상소하면서 그의 스승이었던 김집(金集)의 말을 인용하여 ‘고례에 따라 질장(絰杖)을 쓰는 제도를 비록 6일 내에는 행하지 못하였으나 오히려 계빈(啓殯)하는 날에 추행할 수 있다.’고 두루 진술하고, 또 아뢰기를,
"국조에는 예속이 성행하여 사대부 사이에는 대·소공(大小功), 시마(緦麻) 등의 가벼운 복을 당하여도 상복을 지어 입고 상에 임하였는데, 군부(君父)의 상을 당하고는 도리어 대·소공, 시마복의 실행할 수 있는 것도 실행하지 않으니 이것은 신이 이해하지 못할 일입니다."
하니, 상이 너그러이 답하고, 또 승지로 하여금 말을 만들어 귀향하지 말라고 회유하게 하였다. 상복에 대한 일은 ‘지금에 와서 경솔히 의논할 수 없다.’ 하여 따르지 않았다. 이윽고 다시 상소를 남기고 귀향하였다.
5월 27일 정해
집의 이유태(李惟泰)가 고향으로부터 상경하였다.
이 해 봄에 기근이 들어 상평청이 3월부터 죽을 쑤어 기민을 구제하였다. 평안도 안주 등 25읍도 3월부터 구제를 실시하다가 이에 이르러 그만두었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현종개수실록1권, 현종 즉위년 1659년 7월 (1) | 2025.12.02 |
|---|---|
| 현종개수실록1권, 현종 즉위년 1659년 6월 (0) | 2025.12.02 |
| 숙종실록65권, 숙종 46년 1720년 6월 (1) | 2025.12.01 |
| 숙종실록65권, 숙종 46년 1720년 5월 (0) | 2025.12.01 |
| 숙종실록65권, 숙종 46년 1720년 4월 (0) | 2025.1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