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1권, 현종 즉위년 1659년 8월

싸라리리 2025. 12. 2.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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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일 경인

윤집(尹鏶)을 대사간으로, 목겸선(睦兼善)을 사간으로, 김익렴(金益廉)을 헌납으로, 정석(鄭晳)·이동명(李東溟)을 정언으로, 조한영(曺漢英)을 예조 참의로, 목내선(睦來善)을 수찬으로 삼았다.

 

간원이 연달아 아뢰었던 윤선도(尹善道)를 나문하라는 일 및 김여량(金汝亮)의 가자(加資)를 환수하라는 일에 대해, 이 때 상이 비로소 명하기를,
"선도는 먼저 파직한 뒤 추고하고, 여량은 가자를 환수하고 숙마(熟馬) 1필을 주라."
하였다.

 

8월 3일 신묘

장사 때 광중(壙中)에 보판(補板)을 쓰지 말고 또 회 다짐도 5촌을 감하여 모두 기축년의 예대로 하라고 명했는데, 이는 대개 광중이 너무 사치스러울까 염려해서였다.

 

장령 민여로(閔汝老)가 상소하여
"옥후(玉候)가 편치 않으니 임시 방편의 예제를 따르라."
고 청하면서 《예기(禮記)》의 거상(居喪)하는 예(禮)에
"수척해지되 뼈가 드러날 정도까지는 아니 하고 시력과 청력이 떨어질 정도까지는 아니 하며, 병이 있으면 술을 마시고 고기를 들어야 한다. 상(喪)을 이기지 못하면 불효와 같다."
는 등의 말을 인용하여 경계하고, 또 아뢰기를,
"근래 보건대 전하께서 언관이 일을 논계할 때에 아주 자만해 하는 기색이 있습니다. 신의 생각에, 이로부터 바른 선비는 나날이 물러가고 아첨이 풍조를 이룰까 염려됩니다. 또 안악(安岳)과 신천(信川) 궁장(宮庄)의 일에 대해서 사관(査官)과 감사(監司)가 모두 궁가에 영합해서 앞길을 도모했으며, 비국은 또 분명히 밝히기 어려운 일을 가지고 김충건(金忠健) 등에게 벌을 가하라고 청하였습니다. 아, 전답을 빼앗은 데다가 또 죄를 받게 만들었으니, 이것은 참으로 무슨 마음입니까. 대관이 파직하고 추고하라 청한 것은 실로 가벼운 벌인데 전하께서 벌을 시행하시면서 더욱 가볍게 했으니, 신은 실로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인하여 청하기를,
"안악 군수(安岳郡守) 강전(姜琠), 신천 군수(信川郡守) 조여수(趙汝秀)는 삭탈 관작하여 궁가에 아첨한 죄를 징계하고, 황해 감사 강유(姜瑜)는 먼저 파직한 뒤 추고하며, 비국의 해당 당상 역시 무겁게 추고하여 뒤 폐단을 막으소서."
하니,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렸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헌부의 계사를 다시 생각해 보니 안악 군수 강전과 신천 군수 조여수 등의 소행이 매우 형편없다. 모두 먼저 파직한 뒤 추고하여 뒤 폐단을 막으라."

 

8월 4일 임진

대사헌 정지화(鄭知和)가
"장령 민여로(閔汝老)가 상소하여 강전과 조여수를 삭탈 관직하기를 청하였는데, 신의 법률 적용이 마땅함을 잃었습니다."라는 이유로 인피하고, 민여로 역시 "신이 대각의 사체를 모르고 감죄(勘罪)할 일을 상소 가운데 나열하기까지 해서 물의가 시끄럽고 장관이 또 이것을 이유로 인피하였습니다."
하고 체직을 청했다. 지평 김우석(金禹錫)이 잇따라 인피하였는데, 지화와 같은 뜻이었다.

 

8월 5일 계사

이 때 상에게 이미 비장(脾臟)이 상한 병이 있었는데, 약방(藥房)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앓으시는 병환은 위기(胃氣)를 손상시킨 것이 쌓여 허약하게 된 소치이니, 우선 임시 방편의 예제를 따르소서."
하니, 상이 준엄한 말로 허락하지 않으면서 이르기를,
"그런 말이 다시 이르면 차라리 죽을지언정 듣지 않겠다."
하였다.

 

헌납 김익렴(金益廉) 등이 빨리 약방의 청을 따르라고 청하고, 또 헌관을 모두 출사시킬 것을 명하라고 청하였다. 그리고 아뢰기를,
"윤선도(尹善道)에 대해서 비록 파직하고 추고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만, 사간 목겸선(睦兼善)이 동료를 기다리지도 않고 마음대로 거듭해야 할 논계를 정지시켰습니다. 겸선을 체차하고, 다시 선도를 나문하여 정죄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고 단지 헌관의 출사와 겸선의 체차만 허락하였다.

 

좌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아뢰기를,
"안악(安岳)과 신천(信川) 두 고을의 조사 보고를 비국에 계하(啓下)하였는데, 궁가에서 애초에 서로 약속하지도 않고 아랫들판의 전답을 나누려고 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만, 밤에 불을 지르고 말과 벽에 활을 쏜 변란 역시 매우 미워할 만했습니다. 때문에 아랫들판의 전답을 나누어 차지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고 김충건(金忠健) 등을 엄하게 형벌을 주어 징계해야 한다는 뜻으로 복계(覆啓)했었습니다. 그런데 송시열(宋時烈)이 이를 이유로 상소를 올려 심지어 ‘밤중에 일어나 밝히기 어려운 일을 갖고서 갑자기 불칙하다는 죄를 주었다.’라고 하였습니다. 말을 쏜 변이 비록 확실히 어떤 사람에게서 나왔는지는 모르지만, 또 그것이 이 무리들에게서 나오지 않았다고 어떻게 단정하겠습니까. 변을 일으킨 사람을 그대로 두고 묻지 않아서는 안 되겠기에 이렇게 형을 청하였지만, 문득 그것이 타당치 못함을 깨닫고 다시 분명히 조사하여 다스리고자 하였습니다. 이른바 불측하다고 죄를 주었다는 것은 신의 본래 의도가 아닙니다. 장령 민여로의 상소에서 또 비국의 해당 당상을 추고하라고 청하였는데, 복계가 이미 신의 손에서 나왔으니 해당 당상은 바로 신입니다."
하고, 인하여 파면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은 조금도 불안해 할 일이 없으니,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8월 6일 갑오

약방이 의관을 거느리고 다시 들어가 진찰하기를 청했는데, 상이 답하기를,
"전일 입시한 의원들이 경솔하게 무식하고 어리석은 말을 내어 소란을 일으켰으니, 보탬은 없고 손해만 있다. 이제부터 절대로 들어와 진찰하지 말라."
하였다. 약방이 네 번째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이성항(李性恒)을 사간으로, 윤비경(尹飛卿)을 장령으로, 김만기(金萬基)를 부수찬으로, 오정원(吳挺垣)을 충홍 감사(忠洪監司)로 삼았다.

 

대신이 2품 이상 및 육조의 참의(參議)를 거느리고 임시 방편의 예를 따르라고 정청(廷請)하니, 상이 답하기를,
"나의 죄가 온몸에 얽혀 있어 어린 나이에 이런 망극한 슬픔을 당하였으므로 다른 사람보다 백 배나 슬퍼하지만 모진 목숨이 끊어지지 않으니, 오히려 한스럽다. 일시적인 감기 때문에 경들의 청이 오늘 나오게 되었는데, 죽어서 듣지 못하는 것이 낫겠다."
하였는데, 조정 신하들이 연달아 세 번째 아뢰고, 옥당 및 좌참찬 송시열(宋時烈) 역시 차자를 올려 청하였으나, 상이 모두 듣지 않았다.

 

전에 훈련 부정(訓鍊副正) 이후광(李后光)과 경상 우병영 우후(慶尙右兵營虞候) 민련(閔堜)이 사사로이 자신들이 벼슬을 얻은 경위를 언급하였는데, 심지어 ‘뇌물을 실어다 바쳐 좋은 벼슬을 차지했다.’고까지 하였다. 뒤에 민련과 혐의 때문에 서로 싸웠는데, 민련이 마침내 그 말을 벼슬아치들 사이에 두루 말하고 다녔다. 간원이 후광과 민련을 나문하여 그 실상을 조사하여 뇌물을 받은 조정 관리를 가려내어 다스리기를 청해서 후광 등이 마침내 하옥되었는데, 민련이
"뇌물을 써서 벼슬을 얻었다는 말을 후광에게서 들었다."
고 하였으나, 후광은 죽기를 각오하고 말하기를
"애초부터 민련에게 말하지 않았다."
고 하였다. 두 사람이 서로 다투며 고집해서 일치되지 않았으므로 모두 네 차례 형을 가했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후광의 아우 후관(后觀)이 격쟁(擊錚)하여 억울함을 호소하자, 상이 후광의 형신(刑訊)을 중지하고 다시 민련을 신문하라고 명하였는데, 민련 역시 끝내 승복하지 않았다. 상이 이르기를,
"이 사람들의 공사(供辭)가 황당하고 어지러워 캐물을 수가 없다. 한결같이 엄한 형신을 가한다면 혹 죽을까 염려된다. 모두 먼 곳으로 유배하라."
하였다.

 

8월 7일 을미

조정 신하들이 다시 임시 방편의 예제를 따르라고 청하여 세 번째 아뢰었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영돈녕 이경석(李景奭), 완남 부원군(完南府院君) 이후원(李厚源) 역시 차자를 진달하여 청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영돈녕 이경석이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행장(行狀)을 지어 올리니, 상이 하교하였다.
"요(堯) 순(舜)의 도(道)는 효제(孝悌)일 뿐이니, 요순의 정치를 이루려면 마땅히 효제의 도를 다해 수신(修身)과 치화(致化)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선왕께서 평상시에 시대의 일을 통렬히 개탄하고 예(禮)로써 현인을 초빙하여 발탁해 심복을 삼고는 도의(道義)로써 서로 수양하게 하시어 이 세상을 삼대(三代)로 돌이키고 대의(大義)를 천하에 펴고자 기약하셨으니, 이것이 실로 선왕의 뜻이요, 평소에 수립한 커다란 규범이다. 그런데 이 행장 가운데에는 이 사실을 그다지 거론하지 않았는데, 특별히 명백하게 지어서 후세에 전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8월 8일 병신

약방이 들어가 진찰하고 약을 의논하기를 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는데, 세 번째 아뢰니 약을 의논하는 것만 허락하였다. 양사(兩司)가 합계하고 홍문관이 차자를 진달하여 임시 방편의 예제를 따르라고 청했다. 대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정청(廷請)하고, 또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자전(慈殿)께서 너무 지나치게 슬퍼하시어 장차 반드시 돌아가실 근심이 계신다고 합니다. 마땅히 서로 권면하고 조리하시어 종사와 신민을 위하여 계책을 삼아야 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세상의 무슨 일이 차등이 없겠는가. 자전께서 아직껏 마른 밥을 들지 않으시니, 걱정되는 마음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내가 마땅히 호소하겠다. 내 병은 거의 나았는데도 경들이 믿지 않고서 굳이 고집하니, 이는 나의 정성이 미덥지 못해서이다. 청을 만약 그치지 않는다면 이는 나로 하여금 얼굴을 들고 뭇 신하들을 대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 백관들이 세 번째 아뢰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다시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에 아뢰기를,
"내전에서 다시 더욱 권유하시어 속히 권제(權制)을 따르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비록 지극하게 권유했지만 차마 따르려 하지 않으니, 마땅히 사세를 보아가면서 다시 권하겠다."
하였다. 또 대비전(大妃殿)에 아뢰기를,
"마른 밥을 드시고, 또 상께 권제를 따르도록 권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미망인(未亡人)이 일부터 마른 밥을 먹지 않는 것이 아니다. 비록 진달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마땅히 먹을 것이다. 권제의 일은 힘껏 권하지 않은 것이 아니나 굳게 고집하여 따르지 않으니, 마땅히 다시 권하여 기어코 따르게 하겠다."
하였다.

 

8월 9일 정유

백관이 세 번째 아뢰고, 정원, 삼사 및 제종(諸宗)이 권제를 따르라고 청하였으나, 상이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정태화(鄭太和) 등과 송준길(宋浚吉)이 면대를 청하니 상이 여막에서 인견하였다. 태화 등이 일제히 권제를 따르라고 청하자, 상이 이르기를,
"재궁(梓宮)이 빈소에 있는데 어찌 차마 이렇게 하는가. 경들은 우선 물러가라."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신들의 청을 들어 주지 않으시면 결코 물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나가서 백관들과 함께 다시 호소하겠습니다."
하였다.

 

헌납 김익렴(金益廉), 정언 이동명(李東溟) 등이 권제를 따르라는 논계에 준엄한 비답이 있었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는데, 대사간 윤집(尹鏶), 사간 이성항(李性恒), 정언 정석(鄭晳) 등이 처치하여 출사를 청하고, 또 윤선도(尹善道)를 나문하라는 논계를 정지하였다. 익렴 등이 나온 뒤에 아뢰기를,
"선도에 대한 논계를 진실로 한결같이 굳게 고집해서는 안 됩니다만, 동료가 일제히 모이기를 기다려 상의하여 정지하는 것이 참으로 체모나 전례에 합당합니다. 그런데 지금 신출내기 동료가 신들이 잠시 물러나 물론을 기다리는 때를 틈타 급급히 정론(停論)하기를 오직 미치지 못할까 염려하듯 했으니, 이 무슨 일입니까."
하고, 인하여 경시를 당하고 모욕을 받았다는 이유로 체직을 청하니, 윤집 등 역시 인피하기를,
"대각의 체모는 의견이 서로 다르면 구차하게 동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이 윤선도의 일에 있어서, 달을 넘겨 가면서 서로 버티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이전의 계사는 내용이 매우 준엄해서 무례하며 불경하다느니, 믿는 것이 있어 재범을 저질러 형벌에 빠진 것이라느니 했는데, 이것들은 모두 신하의 극죄(極罪)이므로 밖의 의논은 대부분 지나치다고 여겼습니다. 집에 있는 동료를 기다려 함께 상의해 결정해야 함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습니다만, 합사(合司)의 여러 계사(啓辭)를 차례로 전하려면 시간에 한정이 있으므로 미치지 못한 형세였기 때문에 부득이 정지한 것입니다. 동료가 이 때문에 인피하였는데 어찌 감히 뻔뻔스럽게 그대로 무릅쓰고 있겠습니까. 체직하소서."
하였다. 헌부가 처치하여 익렴과 동명은 출사시키고 윤집 등은 체직시키기를 청하니, 따랐다. 간원이 인하여 선도를 나문하라는 일을 아뢰었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8월 10일 무술

정계주(鄭繼胄)를 장령으로, 이합(李柙)을 정언으로, 홍처윤(洪處尹)을 사간으로, 이경억(李慶億)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8월 12일 경자

우박이 내렸다.

 

8월 13일 신축

이보다 앞서 좌참찬 송시열(宋時烈)이 겸대한 판의금을 굳게 사양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 때 다시 상소하여 물러가기를 바라는 한편 또 지문(誌文)을 지어 올리라는 명을 사양했는데, 상이 답하였다.
"상소를 모두 읽기도 전에 몸과 마음이 서늘하였다. 경의 질병이 비록 그러하나 마음 편히 조리한다면 저절로 나을 것이다. 경이 비록 나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선왕께서 경을 지우(知遇)로 대접한 은혜를 생각하지 않는단 말인가. 더구나 평소에 나를 부탁한다는 유교(遺敎)가 아직도 귀에 남아 있으니, 경은 깊이 생각하여 마음을 돌리라. 금오(金吾)의 직임에 대해서는 억지로 경의 뜻을 따르겠으나 지문(誌文)을 짓는 일은 경이 아니면 안 되니, 경은 아울러 양해하여 사직하지 말라."

 

8월 14일 임인

교리 이익(李翊)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인하여 권제를 따르라고 청하는 한편, 또 아뢰기를,
"산림(山林)에서 도(道)를 지키며 사는 선비는 나가는 것은 어렵게 여기고 물러나는 것은 쉽게 여깁니다. 여러 차례 대의(大義)를 올렸어도 시행된 바가 없고, 또 권제를 따르라고 청했는데도 기꺼이 들어주지 않으시어 말은 시행되지 않고 뜻이 펴지지 못하였습니다. 의리에 있어 떠나야 되니 그 정상이 참으로 슬픕니다."
하니,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렸다.

 

이경휘(李慶徽)를 사인으로, 이유태(李惟泰)를 집의로, 이정기를 대사성으로, 이시방을 판의금으로, 윤휴를 지평으로, 정만화(鄭萬和)를 응교로, 이완(李浣)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8월 16일 갑진

상이 제도에 지나치게 슬퍼해서 병이 더욱 심해지자, 약방(藥房) 및 대신, 삼사, 종반(宗班), 백관들이 서로 거느리고 뜰에 가득히 모여 하루에 3, 4차례씩 호소했으며, 예문관 봉교 이하와 사헌부 감찰 등이 역시 모두 상소하여 권제를 따르라고 청했으며, 대신이 다시 두 자전(慈殿)에게 아뢰어 더욱 간곡하게 권하기를 청했다. 무릇 10여일에 이르도록 했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는데, 이날 정신(廷臣)이 두 자전께 아뢰어 직접 가서 상께 권제를 따르도록 권하기를 청하니, 양전이 이르기를,
"방금 왔기에 권하였으니, 오늘이야 어찌 따르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이조 판서 송준길(宋浚吉)이 인하여 청대하니, 상이 여차에서 인견하였다. 태화가 상의 건강을 물으니, 상이 이르기를,
"내 병이 조금 덜하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어떤 증세가 덜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기침과 으슬으슬한 증세가 모두 덜한 듯하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상의 말씀이 비록 이러하나 신들이 보기에는 뚜렷한 효과가 있음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정신의 청을 아직껏 따르지 않으시어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민망해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자전의 하교를 받들어 이미 경들의 청을 듣기로 하였다."
하고, 인하여 통곡하여 마지않으니, 여러 신하들 역시 모두 오열하였다.

 

8월 19일 정미

강원도 간성(杆城)에 연일 큰비가 내려 인가가 무너지고 죽은 자가 여러 사람이었으며, 양양(襄陽)에서는 비 때문에 산이 무너져 깔려 죽은 자가 7명이었다고 감사가 전후로 계문하니, 상이 휼전(恤典)을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8월 25일 계축

지평 윤휴가 장단(長湍) 땅에 있으면서 신병을 알리고 소명(召命)에 나아오지 않으니, 상이 조리하고 올라오게 하였다.

 

8월 27일 을묘

양사가 유후성(柳後聖)과 조징규(趙徵奎)를 빨리 국가의 형법으로 바로잡으라는 논계를 정지하였다.

 

8월 28일 병진

약방 도제조 정태화(鄭太和) 등이 아뢰기를,
"상의 건강이 좋지 못하신 지 한 달이 넘었는데 여러 의원들이 약을 처방했지만 아직껏 뚜렷한 효험이 없으니, 신들이 약방에 대죄하고 있으면서 걱정되고 황공하여 어쩔 줄 모르겠습니다. 삼가 듣건대 합계하던 유후성 등의 일을 어제 이미 정계하였다고 하니, 이제 배소로 출발시키는 것을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만, 생각건대 이 두 의원은 성상의 건강을 익히 잘 알고 있는 것이 다른 의원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성상의 건강이 회복될 때까지 우선은 대궐 밖에 머물게 하면 약을 처방하는 즈음에 편리하고 도움되는 바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사체가 매우 중하니, 여러 대신에게 물어 처리하소서."
하였다. 재차 아뢰자 허락하였다. 원임 대신 이경석(李景奭)·이시백(李時白), 좌상 심지원(沈之源) 등이 모두 아뢰기를,
"유후성과 조징규는 범한 죄가 아주 중하니, 대각의 논계가 정지된 뒤에는 즉시 배소로 출발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후성 등은 성상이 앓고 있는 병의 뿌리를 익숙히 알고 있으니 만약 이 두 사람에게 물어 조금이라도 도움이 있다면, 그 다행함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의 일은 성상의 몸을 보호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으니, 두 의원을 배소로 보내는데 늦고 빠름을 논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다시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에게 의논하게 하였는데, 준길의 의논 역시 같았으므로 상이 따랐다. 시열은 급성 위장병을 앓고 있어 즉시 수의(收議)하지 못하였는데 하루가 지나 차자를 올렸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후성(後聖)의 죄는 나라 사람들이 모두 죽여야 한다고 하는데, 이는 왜입니까. 선왕께서 승하하신 변은 실로 천고에 없는 것이었고 후성이 우두머리 의원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심이 그치지 않은 것이 어찌 후성에게 사사로운 원한이 있어서 그렇겠습니까. 인심이 똑같이 여기는 것은 바로 하늘의 이치가 있는 바이니, 인심도 본디 거스르지 못하는 것인데 천리를 더군다나 어길 수 있겠습니까.
이번에 후성이 죽음을 면하고 감옥에서 나왔으니, 중외(中外)에서 들으면 반드시 깜짝 놀라고 분개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일은 마땅히 그를 죽여야 할 것인지 죽여서는 부당한지를 논할 뿐이지, 그로 하여금 약을 처방하게 할 것인가는 본디 논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만약 후성에게 ‘악의는 없었다.’라고 한다면 가귀(可貴)의 마음도 끝내 다른 의도는 없었던 것입니다. 정자(程子)가 그의 조카가 용렬한 의원에게 죽게 되자 그 의원을 죄주기를 청하면서 심지어 마의(馬醫)를 매질한 일을 증거로 삼기까지 했습니다. 정자가 자제의 슬픔으로도 이렇게 하였으니, 만약 군부(君父)였다면 또 마땅히 어떠하였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소문이 멀리 퍼지기 전에 빨리 가두어 그 죄를 바룬다면 법이 밝게 되고 인심이 기뻐할 것이며 만민이 성명하다고 일컬을 것입니다.
약방의 일에 이르러서는 신 역시 민망하고 마음이 탑니다. 그러나 여러 의원을 널리 부르고 물어서 정밀하게 가린다면 효험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이 실로 착실한 도리입니다. 가령 후성을 용서한다 하더라도 싸움에서 패배한 장수에게 용기 있다고 말하는 것은 마땅한 바가 아닐 듯 싶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지금 후성 등의 죄를 결단하는 데 있어서는 먼저 선왕의 뜻을 근본으로 삼고 그 다음에 법으로 처리해야 한다. 가귀의 마음이 다른 것이 없었고 잘못 혈맥을 범하지 않았다면 어찌 지금에 이르렀겠는가. 이는 후성이 죽을 죄가 아님이 분명하다. 사세가 이와 같아 선왕의 뜻을 어기기가 어렵다."
하였다.

 

8월 30일 무오

정언 이동명(李東溟)이 아뢰기를,
"윤선도가 함사(緘辭)를 장황하게 꾸미고 심지어 죄명을 뒤집어씌운다는 등의 말로써 언관을 헐뜯었습니다. 공의(公議)가 지극히 엄한데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함부로 굴 수 있단 말입니까. 함사 가운데에서 한두 곳의 스스로 말한 것을 말해 보겠습니다. ‘호(怙)라는 것은 믿는 바가 있다는 말이며, 종(終)이란 재범(再犯)이라는 것입니다. 재범했다고 말한다면 진실로 억울하며 믿는 데가 있어서라고 말한 것 역시 이해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신은 선도의 마음에 과연 믿는 바가 없고 재범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은연중에 소망지(蕭望之)의 일011)  을 제기하고 또 노인을 우대해야 한다는 말을 진달하였으니, 여기에서 더욱 믿는 바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진소(陳疏)하지 못하고 병든 몸을 떠메여 교외로 나갔으며, 의견이 전해지기를 바랐고 하필 예(例)에 구애되겠습니까.’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재차 범한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혈(穴)을 재정하는 데 동참하였으니,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으니, 당초에 산을 살피지 않은 죄는 그 역시 스스로 변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감히 ‘정성을 들이면 밝아지는 효험이 있는 것이다.’는 말로써 자신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청하였으니, 그 말의 어리석고 망렴됨이 또 어떻습니까. 산을 살피라는 명에 애초부터 나오지 않았고 나문하라는 의논을 예사로 보아 아무렇지 않게 누워 일어나지 않으면서, 스스로를 은퇴한 대부(大夫)와 같이 여기고 참람되이 성인의 지위에 비기고, 사부의 옛 은혜를 제기하였으니, 더욱 그릇되고 외람됨이 심함을 볼 수 있습니다."
하고, 인하여 이미 두터운 무함을 입었다는 이유로 인혐하였다. 장령 정계주(鄭繼胄), 지평 김우석(金禹錫), 대사헌 조수익(趙壽益)이 모두 송시열의 상소를 이유로 경솔히 유후성의 중한 논계를 정지했다는 잘못을 이끌어 체직을 청하고, 사간 홍처윤(洪處尹), 정언 이합(李柙), 헌납 김익렴(金益廉), 대사간 이경억(李慶億) 등도 역시 논계를 정지한 잘못과 윤선도에게 배척을 받은 것이 동료들과 다름이 없다는 것으로써 모두 인피하니, 상이 모두 사직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윤선도의 추고 함사(推考緘辭)에 말하기를,
"임금의 의관을 묻는 것은 바로 국가의 장사에 막대한 절차이며 또 종묘에서 혈식(血食)하게 하는 영원한 계책입니다. 만일 진선 진미한 곳을 얻지 못하면 어찌 신하로서 전하에게 충성하는 것이겠으며 선왕께 보답하는 정성이겠습니까.
그리하여 넘어지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곳곳을 살폈으나 전혀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는데, 오직 수원(水原)의 산만은 눈을 들자마자 깜짝 놀라며 상격(上格)임을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용(龍)의 크기와 풍수(風水)가 영릉(英陵)에 비교해서 조금 못 미쳤지만 참으로 천리에 없는 바요, 천재 일우(千載一遇)의 땅이어서, 비록 도선(道銑)과 무학(無學)이 다시 나온다 하더라도 이 말을 바꾸지 못할 것입니다. 신의 소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윤강(尹絳), 이원진(李元鎭) 및 여러 지관(地官)들도 하나의 흠도 없다고 칭찬하여 마지않으면서 모두 나라를 위해 서로 축하했으니, 신이 나라를 위해 쓰기를 원한 것은 여러 사람들과 일반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의논이 마구 일어나 유독 신에게만 죄를 돌려 죽이려고 한다는 말이 날로 귀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때에 병이 다시 위험해져 정신이 혼미했으므로 상소를 진달하지 못한 채 병조에 정장(呈狀)하여 직명(職名)을 계체(啓遞)해 주기를 청하여 병든 몸을 떠메여 교외로 나갔으니, 이 때는 바로 인산(因山)이 이미 수원으로 정해져 여러 도감(都監)의 역사가 모두 한창일 때였습니다. 따라서 누가 이의가 다시 생겨 분분하게 되리라고 억측이나 했겠습니까.
7월 3일 밤중에 갑자기 건원릉(健元陵) 서쪽 골짜기와 불암산(佛巖山) 아래 화접동(花蝶洞)을 살핀다는 일을 듣게 되었습니다. 신이 그 때는 병 때문에 몸을 움직이지 못해 부득이 장계를 갖추어 산릉(山陵)의 일 한 가지를 언급하였습니다. 본디 그것이 일반적 규정이 아님을 알았으나, 신은 생각하기를 ‘이루어진 일은 간하지 말아야 하고, 일은 처음 잘 도모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며, 기미가 곧 일어나려 하면 마땅히 일찍이 분변해야 한다.’라고 여겼기에 붉은 정성이 복받쳐 반드시 앙달하고자 하였으나 피곤하여 일에 미치지 못했고, 일이 또 갑작스러워 상소를 갖추지 못하고 부득이 방백(方伯)에게 언급하면서 보고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대개 일의 기미가 긴급하면 제때에 진달하는 것이 중요하니, 어찌 반드시 전례에 구애되겠습니까."
운운하였다. 헌부가 고신(告身)을 빼앗아야 한다고 아뢰니, 상이 이미 파직시켰다는 것으로써 처리하였다.
삼가 상고하건대 윤선도가 광해조(光海朝) 때 상소하여 이이첨(李爾瞻)을 참하라고 청했었는데, 이것을 가지고 스스로 절개를 세웠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유희분(柳希奮)과 박승종(朴承宗)의 무리가 바야흐로 이첨과 서로 알력 관계였는데 선도의 소는 대개 여기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그 소에 이르기를
"김제남(金悌男) 등이 반역을 한 정상은 분명하여 숨길 수가 없으니, 천지(天地)와 신인(神人)이 함께 죽여야 할 자입니다. 이원익(李元翼) 무리가 병으로 본성을 잃어버린 사람이 아니라면 어찌 굳이 대역 죄인을 비호하면서 우리 성상을 등진단 말입니까."
하였으니, 이는 소인이 소인을 공격한 데 불과하며 올바른 의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고 판서 김시양(金時讓)의 《부계기문(涪溪記聞)》  【부계(涪溪)는 종성(鍾城)의 지명이다.】 에 이르기를
"윤선도가 상소하여 이첨의 죄를 논하면서 아울러 승종과 희분이 이첨의 간사함을 알고서도 말하지 않음을 논하였다. 선도는 유가(柳家)와 인척 관계로 그의 뜻을 받아 상소했기 때문에 이런 말로써 그의 흔적을 가리웠던 것이다. 이첨의 무리가 탄핵하여 경원(慶源)으로 유배되었을 때 내가 부계(涪溪)에 유배되어 있었는데 윤선도와 친척의 친분이 있어 서로 왕래하였는데, 곧은 말을 하여 죄를 입었다는 것으로써 스스로 고상한 척하는 태도가 있었다. 내가 말하기를 ‘공의 상소는 여러 신하는 그냥 두고 유독 유희분과 박승종이 말하지 않은 것만 논하였으니, 역시 쇠퇴한 세상의 말이다.’ 하였다. 이극건(李克健) 역시 상소하여 이첨을 논핵하다가 종성(鍾城)으로 유배되어 스스로 자신이 유희분과 상의하여 상소했다고 자랑하였다. 내가 우연히 묻기를 ‘공은 윤상(尹相)과 아는가?’ 하니, 이극건이 말하기를 ‘진소할 때 자주 유희분의 집에서 모였으므로 매우 잘 알고 있다.’ 하였다. 내가 윤선도와 대화하면서 이극건의 말을 언급했더니, 윤선도는 안색이 변하면서 부끄러워 대답하지 못했다. 반정(反正) 초기에 상소했다가 유배된 유생들이 모두 6품직에 초배(超拜)되었는데, 지평 임숙영(任叔英)이 말하기를 ‘윤선도의 상소는 유희분의 뜻을 받든 것으로 「김제남(金悌男)이 역모한 것은 나라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는 말을 했으니, 죄를 면한 것만도 다행입니다. 포상해 발탁해서는 안 됩니다.’고 하였다. 깨끗한 인사들이 이 의논을 옳게 여겼으므로 단지 금오랑(金吾郞)을 제배했다."
고 하였다. 김시양(金時讓)이 윤선도(尹善道)와는 친척의 친분이 있어 서로 가까웠는데도 기록한 바가 이상과 같으니, 당시 선도의 마음 씀씀이를 대개 알 수가 있다.
선도는 문장에 능하고 술수가 많았는데, 이름 역시 성대히 알려져 효종의 잠저(潛邸) 때 사부가 되었다. 후에 과거에 합격하여 대시(臺侍)를 거쳐 여러 차례 주군(州郡)을 맡았었는데, 가는 곳마다 탐장질을 하였다. 그가 성산(星山)을 다스릴 때 대사간 윤지(尹墀)가 논핵한 말 가운데 이르기를
"이름과 실상이 서로 어긋나니 덕(德)을 무너뜨리는 도적이다."
하였다. 병자란(兵子亂) 때 선도는 왕을 뵈러 간다는 명분으로 바닷길을 통해 강도(江都)로 가면서 관망하다가 중도에서 돌아와 끝내 달려가 문안하지 않았다. 대각의 논계로 인해 옥에 갇혔고 충군(充軍)으로 논죄되었다. 효종(孝宗) 임진년에 이르러 비로소 승지에 발탁되었는데 정언 이만웅(李萬雄)이
"인조(仁祖)의 대상(大喪) 때 3년을 마치도록 달려와 곡하지 않았다."
는 이유로 논계하려고 했는데, 선도가 먼저 스스로 효종에게 호소했기 때문에 만웅은 엄한 교지를 받고 지레 체직되었다.
그런데 효종이 옛날의 사부인 송시열(宋時烈)에 대하여 매우 존경하고 복종하여 대우하는 예가 비할 바 없자, 선도가 마음속으로 불평하였다. 또 일찍이 정개청(鄭介淸)을 존경하고 사모하였는데, 개청은 본디 한미하고 천한 사람으로 어려서 중이 되어 풍수설(風水說)을 배워서 먹을 것을 찾아 돌아다녔는데, 어떤 사람이 권해서 머리를 기르게 했다. 처음에는 심의겸(沈義謙)을 섬겼고, 또 박순(朴淳)을 만나서 배우기를 원했는데 박순이 가숙(家塾)에 머물게 하고 가르치고 먹이기를 10여 년 동안 친자제처럼 하였다. 사는 집이 무안(務安)에 있었는데 먹을 것은 가난했으나 학문에 부지런하여 선비들이 칭찬하였으니, 이는 모두 박순이 지도한 것이라고 하였다. 박순이 조정에서 배척을 받자 개청은 연루될까 염려하여 정여립(鄭汝立), 이발(李潑) 등과 서로 사귀었다. 어떤 사람이
"어떻게 박순과 친하게 되었는가?"
물으니, 답하기를,
"그 집에 책이 많기 때문에 젊었을 때 빌려다 보았다."
하였다. 정여립이 모반하다 죽음을 당할 즈음에 개청이 붙잡혀 국청에 나왔는데, 공초하기를
"일찍이 교정청 낭관으로 있을 때 여립과 동료여서 몇 번 만났기 때문에 얼굴을 알 뿐이다."
했다. 상이 그 대답을 보고 개청이 적에게 보냈던 몇 통의 편지를 내리고, 한 차례 신장(訊杖)하고 북도(北道)로 유배하였다. 그 후 적의 무리가 또 개청을 데리고 여립의 집으로 가서 풍수를 논하게 하자 국청이 다시 잡아서 국문하기를 청하였는데, 이미 죽고 없었다. 그 사람의 형편없음이 이러한데도 선도는 유학의 종주로 추숭하여 사당을 세워 제사하였다. 조정이 그 말을 듣고는 그 사당을 헐어 버리니, 선도는 상소하며 항변했으므로 더욱 조정의 논의에 배척받게 되었다.
파산되어 있던 중 효종의 산릉(山陵)을 고르게 되자, 선도는 수원(水原) 읍내가 천재 일우의 땅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수원은 경기의 관문으로 후대에 다섯 가지 환란의 근심이 있다는 말이 있는 데다 또 읍내의 동네를 철거해 옮겨야 하는 폐단이 있으며 풍수의 흠으로는 지맥(地脈)이 파괴되어 있고 초목이 무성치 못하여 인재가 나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해(李澥), 이시백(李時白), 원두표(元斗杓) 등이 일찍이 수원부에 재직했던 자들인데 서로 잇따라 진소하였고, 시백은 더욱 정성을 다하여 간곡하게 말하였다. 심지어 산수 비기(山水秘記)에도
"수원에 장사를 지내면 나라 안이 불안해진다."
는 말이 있다고까지 했다. 인심이 모두 의구심을 품었으나 상이 선도의 말에 선입견을 가지고 반드시 그대로 수원을 쓰고자 하였는데, 대신과 중신이 떼 지어 일어나 힘껏 간쟁한 뒤에야 비로소 청을 들어주었다.
뒤에 봉분에 틈이 생겼는데, 영림 령(靈林令) 익수(翼秀)가 몰래 가서 기록해 가지고 상소하여 말했기 때문에 마침내 능을 옮기게 되었다. 익수는 바로 선도의 가까운 친속으로 역적 정창(挺昌)의 사주를 받아 정(楨), 남(柟)과 서로 화응해 이런 짓을 한 것이다.
사화(士禍)가 일어난 것은 본디 일조 일석의 까닭에서 나온 것은 아니나 근본을 따져 보면 대개 선도를 나문하라고 아뢰어서 더욱 그의 분노하는 마음을 격발하게 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 그 뒤에 또 예를 의논하면서 송시열을 모함하기를
"종사(宗社)의 죄인이다."
라고 했는데, 당쟁을 하는 무리들이 이로 인해 사류를 일망 타진하여, 나라가 나라꼴이 되지 못한 것이 5, 6년이나 되었다. 이경석(李景奭)이 산릉을 논하는 상소 가운데서 말하기를 "나라가 망하려면 반드시 일을 해치는 사람이 있어 한 세상을 미혹시키고,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어지러워지게 된다."
했는데, 그 말이 매우 맞다. 선도의 무리가 이에 말하기를
"수원이 매우 길한 땅인데, 당시 이의를 제기한 사람들은 한갓 수원이 경기의 중요한 지역이므로 옮기기 어렵다는 것만 알았지 임금의 의관을 만세토록 간직할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라고 하였다. 아, 이경석·이시백·원두표·이후원·이해·송시열·송준길·이상진 등의 나라를 위하는 정성이 어찌 여러 지관들만 못하였겠는가. 윤강이 또 진소하기를
"여러 지관들이 수원의 산을 칭찬하는 것이 너무 지나치다. 새 산이 수원보다 배나 나을 뿐만이 아니다."
고 하였다. 그 소를 상고해 볼 만한데 그들의 말이 이러하니, 진실로 많은 말로 분별할 것도 못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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