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1권, 현종 즉위년 1659년 9월

싸라리리 2025. 12. 2. 09:45
반응형

9월 1일 기미

우박이 내렸다.

 

9월 3일 신유

산릉(山陵)에 부역하던 승군(僧軍)이 막사를 불태우고 도망하여 흩어지고 단지 우두머리 중만 남았다고 도감 당상 김남중(金南重)이 보고하니, 상이 일렀다.
"앞장서서 주도한 자를 만약 무겁게 다스리지 않는다면 나라가 어찌 나라꼴이 되겠는가. 도감에서 적발하여 아뢰라."

 

장령 윤비경(尹飛卿) 역시 중요한 논계를 지레 정지한 잘못으로써 체직을 청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부제학 유계(兪棨) 등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양사의 많은 관원들이 인피하여 본관에서 처치하게 되었는데, 유후성(柳後聖)의 논계를 정지한 일에 대해서 신들 역시 ‘삼가 알았다.’라고 썼으니, 어찌 감히 태연히 처치하겠습니까?"
하였는데, 유계는
"윤선도의 함사 가운데 신의 죄를 거듭 논하면서 간관들이 아울러 탄핵하지 않았다고 기롱했으니, 더욱 감히 가부를 논할 수 없다."
는 것으로 체직을 청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부교리 남구만(南九萬)이 상소하기를,
"유후성이 범한 죄가 이 얼마나 큰 죄이며, 오늘날 의논한 것이 이 얼마나 중한 일입니까. 설령 현재 의술에 정통한 사람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어찌 막 시장에서 죽을 목숨을 면한 후성으로 하여금 문득 약을 처방하는 반열에 끼게 하여, 국법(國法)이 여러 사람의 마음에 흡족하지 못하게 하고, 거조를 듣기에 놀랍게 하겠습니까. 더군다나 임금과 어버이는 하나이니, 충신이 임금을 섬기면서 어찌 어버이를 섬기는 것과 다르게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효자가 그 어버이를 위하여 의원을 맞아들였는데 만약 의원인 자가 치료하는 방법을 잘못하여 죽기에 이르렀다면 의술이 화타(和陀)나 편작(扁鵲)과 같다 하더라도 반드시 다시 집에 맞이하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오랜 뒤일지라도 국가의 병환을 다시 후성에게 물어서는 안 됩니다. 더군다나 지금은 새로 국가의 슬픔을 만났는데 어찌 갑자기 성상의 몸을 치료하는 책임을 다시 그의 손에 맡기겠습니까.
당초 약방의 계청에 대해 ‘공의(公議)가 중하게 발한 것이어서 지체하는 것이 온당치 못하다.’라고 하교하셨는데, 이는 실로 상의 지혜가 밝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한스럽게도 여러 아랫사람들이 한갓 애타는 정성만 품고서 혹시나 만에 하나라도 효험이 있기를 바라서, 성상의 뜻을 받들어 하교를 받들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대가 올린 말이 실로 근심하고 사랑하는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이니,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유후성 등을 머물려 두고 보내지 않는 것은 실로 그대의 말과 같으니, 마땅히 유배지로 출발시키겠다."
하였다.

 

좌참찬 송시열이 차자를 올려 지은 선왕의 지문(誌文)을 올리고, 또 아뢰기를,
"신이 기억하건대, 봄에 삼가 대행 대왕의 옥음(玉音)을 들었는데, ‘호남 산간 고을의 대동법에 대해서 마땅히 가을을 기다려 혁파할 것인가, 그대로 둘 것인가를 의논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일을 만약 수행해야 옳다고 여기신다면 비록 장례 전이라 하더라도 빨리 처리해야 마땅하니, 분명한 지휘가 있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의 차자를 보고 또 지은 글을 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고 목이 메인다. 호남 대동법에 대한 일은 만약 경의 말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마땅히 의논해 처리하겠다."
하였다.

 

9월 4일 임술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신이 남구만(南九萬)의 소를 얻어 보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성상의 건강이 편치 못하신 지 이미 오래여서 온 나라의 신민들이 누군들 걱정하지 않겠습니까. 유후성 등에 대한 법률 적용의 의논이 이미 정지되었기에 약을 처방하는 데 혹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배소로 출발시키는 것의 느리고 빠른 문제는 너무 구속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우선 머물려 두라는 청을 처음으로 신이 냈던 것으로 여러 대신의 의논을 거치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애초에 인정이란 서로 그리 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어찌 물의가 이 지경에까지 이를 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효자로서는 차마 다시 맞이해 들일 수 없는 의원으로 하여금 약 처방에 참여하게 한 것은 모두 신의 죄입니다.
또 생각하건대, 근일에 올린 약은 다른 의원의 견해에서 조금 변화시킨 것이므로 이 뒤로 증세에 따라 재료를 증감시키는 일을 결코 다른 의원에게 맡길 수가 없습니다.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른 일은 돌볼 겨를이 없습니다. 원하옵건대 신의 본직 및 내의 제조의 직을 체직시켜 공의(公議)에 사죄하게 하고, 우선 후성 등을 머물려 두라는 청을 허락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나의 병 때문에 후성 등을 머물려 두는 것은 실로 마음이 불안하다. 또 경은 어찌하여 사직하겠다는 말을 꺼내는가. 다시는 이런 말을 하지 말라."
하였다. 태화가 좌상 심지원(沈之源)과 함께 세 번째 아뢰어 후성을 머물려 두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9월 5일 계해

상이 여차에 나아가 영상 정태화, 좌상 심지원, 판의금 이시방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좌참찬 의 차자 내용을 보건대 전남도 산간 고을의 대동법을 선조(先朝)에서 가을을 기다려 의논하여 정하라는 전교가 계셨다고 하는데, 이 일의 전말을 내가 알지 못하고 있다."
하니, 태화가 대답하기를,
"호남 연해 27개 고을은 민역(民役)이 가장 고달프기 때문에 먼저 대동법을 시행했으나 산간 고을에서는 원하지 않는 자가 많았고 조정의 의논 역시 일치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시에 행하지 못했습니다. 그 뒤 산간 26개 고을 가운데서 운봉(雲峯), 임실(任實), 정읍(井邑), 금구(金溝), 태인(泰仁) 다섯 고을은 대동법에 들기를 원하니, 이제 허락해야 하는데, 마침 이러한 때가 되었으므로 다른 일을 할 겨를이 없어 미처 품정하지 못했습니다. 밖의 의논은 ‘스스로 원하는 다섯 고을은 우선 시행하고, 기타 산간 고을은 백성들의 뜻이 원하지 않으니 시행할 필요가 없다.’ 하기도 하고, 혹은 ‘국가의 본래 뜻은 역을 고르게 하는 데 있다. 종전부터 역이 수월한 것은 지금 원하지 않는데 백성을 고르게 하는 도리에 통틀어 같게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데, 일의 체모로 말하자면 산간 26개 고을에 대해서도 일체로 행해야 옳습니다."
하고, 지원이 아뢰기를,
"편리한지 여부를 본도에 물은 연후에 실행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시방이 아뢰기를,
"《대전(大典)》의 남형조(濫刑條)에, 남형한 관리는 장 1백 도 3년(杖一百徒三年)으로 되어 있고, 남형하여 사람을 죽인 자는 장 1백에 영원히 서용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어서 사람을 죽인 자의 죄가 도리어 가벼우므로 옳지 않습니다."
하고, 헤아려 처리할 것을 청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법조문에 이른바 영원히 서용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종신토록 벼슬에 서용치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에 도배(徒配)보다 무겁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사람을 죽이고서 이 율(律)을 적용을 받은 자들이 으레 세초(歲抄) 및 사면령 때 서계되어 서용을 입기 때문에 경중이 거꾸로 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남형하여 사람을 죽인 자는 통렬하게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지금부터 서계해 들이지 말라."
하였다. 상이 묻기를,
"형조는 왜 오랫동안 개좌(開坐)하지 않는가?"
하니, 시방이 아뢰기를,
"형조와 금부(禁府)는 으레 8일, 23일, 15일, 그믐, 초하루 및 향(香)을 받아 재계(齋戒)할 때에는 꺼리기 때문에 한 달 동안에 개좌하는 날이 많지 않습니다."
하니, 승지 강백년(姜栢年)이 아뢰기를,
"개좌를 자주 하지 못해 옥송이 지체되니, 마땅히 변통해야 할 듯합니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꺼리는 날에 형을 쓰는 것은 불가하나 봉초(捧招), 원정(原情), 의계(議啓) 등의 일은 행해도 불가한 점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백년이 이로써 금부(禁府)와 형조(刑曹)에 분부하라고 청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송시열이 지어 바친 지문(誌文)을 사관에 보내 영돈녕에게 물으니, 이경석이 대답하기를
"지문을 입계하기 전에 송시열이 초고를 신에게 보여 정정하고자 하였는데, 신이 답하기를, ‘이처럼 갖가지 화가 있는 날에는 마땅히 옛 사람의 말이 누설되었을 때를 생각하라는 경계를 따라야 한다. 노(虜)자는 글자의 뜻이 함축성이 부족하니, 다시 생각하라.’ 하였습니다. 이제 정본(淨本)을 보건대 고쳐야 할 곳은 이미 고쳤으나 신의 천견으로는 ‘사람의 힘 또한 하늘을 이길 수 있는데, 더군다나 천도가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고 있음에랴.[人定亦能勝天 況天道自能洄泬]’라고 한 것은 말이 길며, 또 ‘비풍과 하천을 변풍(變風)의 마지막에 둔 것은 뜻이 어디에 있겠는가.012)  [匪風下泉之終於變風 其意安在]’ 한 이 13자는 비록 없더라도 될 듯합니다."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좌의정 심지원(沈之源) 등이 지은 사람에게 다시 묻기를 청하니, 상이 사관에 보내 송시열에게 말하라고 명하였다. 시열이 대답하기를,
"삼가 전일 전교하신 뜻을 받들고는 선왕이 뜻하신 사업을 더욱 감히 이 글에서 묻어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밖으로는 번거로운 말에 구애받고 안으로는 시의(時議)에 견제받아 은미하고 완곡한 말 표현에 힘썼습니다만, 전편의 대의는 모두 이 일이며 비단 ‘비풍하천(匪風下泉)’만 꺼릴 것이 아닙니다. 만약 오늘 한 대목을 고치게 되면 내일 또 한 대목을 고치게 되어 장차 한마디도 없게 한 연후에야 그만두게 될 것이니, 우리 선왕의 지문이 아니게 됩니다.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털끝 하나만 같지 않아도 문득 다른 사람이 된다.’라고 하였으니, 용모도 그러한데 더군다나 덕스러운 업적이겠습니까. 참으로 이경석의 말처럼 고친다면 이 글을 전부 버리고 별도로 짓는 것이 낫습니다. 일찍이 허적(許積)의 말을 듣건대 ‘간행하지 않게 하면 무사함을 보존할 수 있다.’라고 하였는데, 신의 생각에 참으로 대처하는 적절한 방법만 있다면 쓰지 않은 부분을 쓰고 싶지, 이미 쓴 것을 삭제한다는 것은 절대로 신의 본뜻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알았다고 답하였다.

 

호조 판서 허적(許積)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 우연히 좌참찬 송시열이 지은 지문 초고를 보았는데, 비록 그 뜻을 세운 것은 체계가 있었으나 유감스럽게도 그 말을 구사한 것은 통쾌함이 부족했습니다. 이제 삼가 도감에 내려진 원본을 보건대 초고에 비해 고친 바가 많은데 그 고친 바는 바로 말뜻에 약간 모가 드러난 것들이었으니, 신은 이에서 더욱 지극한 서운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아, 우리 선왕의 깊고 성스러운 인덕은 참으로 문자로써 비슷하게나마 묘사하지 못하지만, 평성(平城)의 근심013)  을 임어하신 11년 사이에 실로 하루도 마음에 잊은 적이 없으셨습니다. 큰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중도에서 돌아가셨으니, 어찌 우리 나라 백성들의 하늘에 사무치고 땅에 닿는 지극한 슬픔이 아니겠습니까. 오히려 땅에 떨어뜨리지 말고 후세에 전할 바가 있을 것이니, 무릇 우리 신민이 오늘날 마음을 다해야 할 바가 여기에 있지 않겠습니까. 비록 위축되는 바가 있어 대서 특필은 할 수 없더라도 어찌 지나치게 염려하는 마음으로 깎아내고 또 깎아내어 실제의 자취를 끝내 사라지도록 하겠습니까. 아, 뜻을 펴지 못한 채 공허한 글만 남기는 것도 이미 충신과 지사의 눈물을 금치 못하게 하는데, 이제 그 글까지도 묻히게 한다면 후세 사람이 어떻게 전해 가면서 믿고 덕을 상고하겠습니까. 원대한 계획이 갈수록 쇠미해지고 있는데, 이것조차 전하지 않는다면 또 어찌 천만세토록 무궁한 유한(遺恨)이 아니겠습니까.
환란을 근심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마땅히 조심해야 하니, 쓸 때에 등록(謄錄)하지 말고 새긴 뒤에도 간행하지 말아서 여러 사람의 눈에 번거롭게 뜨이지 않게 하면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 그 통쾌한 말을 다시 쓴다 하더라도 불가할 것이 없는데 더군다나 글뜻의 대요를 삭제해서야 되겠습니까."
하였다. 차자가 들어가자 대신들이 고쳐서는 안 된다고 하여 의논이 드디어 중지되었다.
삼가 상고하건대, 송시열은 대군(大君)의 사부로서 남한 산성에 왕을 모시고 들어갔는데, 상이 산성에서 나오자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소명에도 나아가지 않으면서 문호를 열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정주(程朱)의 학문을 천명하였다. 또 세도(世道)를 붙잡아 인심을 아름답게 하며 천하에 대의(大義)를 펴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효종(孝宗)이 즉위하자 시열이 명을 받들고 도성으로 들어왔는데, 군신이 덕을 같이 하면서 완전히 부합되어 장차 크게 뜻을 펴게 되었다. 오랑캐들이 그 말을 듣고는 사신을 보내 살폈는데 줄을 이을 정도로 잦았으므로 시열이 드디어 물러나 돌아갔다. 그러나 혹 은밀히 상소하여 일을 논하였고 상 역시 손수 쓴 편지로 문답했는데, 상의 말년에 이르러 더욱 정성과 예를 다하여 불러 맞이하니, 시열이 드디어 다시 조정에 나왔다.
상이 총재(冢宰)014)  를 제수하고 온 나라를 맡기었다. 기해년 3월 11일 희정당(熙政堂)에서 여러 신하들을 소대(召對)하였는데, 파할 무렵에 상이 시열만을 머물라고 명하고는 중관(中官)으로 하여금 문호를 활짝 열게 하고서 좌우를 모조리 물리친 뒤에 상이 이르기를,
"매양 경과 조용히 이야기하려고 기다린 지 여러 날이었는데 끝내 편리한 날이 없었기 때문에 오늘 내가 흔쾌히 이렇게 하는 것이다. 나 역시 기분이 상쾌하니 거의 속마음을 다 털어 놓겠다."
하고, 인하여 한숨을 쉬며 이르기를,
"오늘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오늘날의 큰 일이다. 저 오랑캐가 틀림없이 멸망할 형세이다. 예전의 한(汗) 때에는 형제가 매우 번성하였으나 지금은 점차 소모되었고, 전의 한 때에는 인재가 매우 많았으나 지금은 모두 용렬한 자들뿐이며, 전의 한은 오로지 무예를 숭상하였으나 지금은 무예가 점차 폐지되어 제법 중국의 일을 본받고 있다. 이는 바로 경이 전일에 말해 준 주자(朱子)의 이른바 ‘오랑캐가 중원을 차지한 경우 사람들이 그들을 중국 제도로 가르치면 오랑캐는 점차 쇠약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의 한이 비록 영웅이라고는 하지만 주색에 빠짐이 이미 심하니, 그 형세가 오래지 못할 것이다. 오랑캐 안의 일을 내가 자세히 생각해 보았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나에게 군사를 육성하지 말라고 하지만 내가 듣지 않았다. 그 이유는 천시(天時)와 인사(人事)가 어느 날 이처럼 좋은 기회가 다시 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날쌘 포수 10만을 양성하여 아들처럼 사랑하고 돌보아서 모두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병졸이 된 연후에, 그들에게 틈이 있기를 기다렸다가 그들이 예기하지 못할 때에 바로 관외(關外)로 나아가면, 중국의 의사와 호걸로 어찌 호응하는 자가 없겠는가. 대개 곧바로 관외로 나아가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은 이유는 오랑캐들이 군비를 갖추지 않아 요동 심양(瀋陽) 천리에 활을 잡고 말을 탈 줄 아는 자가 전혀 없어서 마치 무인지경에 들어가는 것과 같아서이다. 또 하늘의 뜻으로 헤아려 보건대 우리 나라의 세폐(歲幣)를 오랑캐들이 모두 요동 심양 지방에 두었는데, 하늘의 뜻이 다시 우리 나라를 위해서 쓰고자 하는 듯하다. 또 우리 나라의 포로로 잡혀간 사람이 몇 만 명인지 모르는데, 어찌 내응하는 자가 없겠는가. 오늘의 일은 오직 하지 않는 것이 걱정이지 성공하기 어려움은 걱정거리가 안 된다."
하니, 시열이 대답하기를,
"성상의 뜻이 이와 같으시니 우리 나라뿐 아니라 실로 천하 만세의 다행입니다. 그러나 제갈량(諸葛亮)도 오히려 성공하지 못하고서 ‘성공하기 어려운 것은 전쟁이다.’라고 하였으니, 만일 차질이 있어 나라가 망하는 화가 있게 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웃으면서 이르기를,
"이는 경이 나의 뜻을 시험하는 것이다. 큰 뜻을 품고 큰 일을 일으키면서 어찌 만전을 보장하겠는가. 대의가 이미 분명하다면 망하는 것이 뭐가 부끄럽겠는가. 더욱 천하 만세에 빛이 날 것이다. 또 하늘의 뜻이 있으니, 내 생각에 망할 염려는 없을 것 같다. 하늘이 나에게 부여해 준 것이 그다지 용렬하지 않고, 또 나로 하여금 일찍부터 환난을 겪어서 잘하지 못하는 바를 잘하게 하였으며, 또 나로 하여금 일찍부터 활·말·진법의 일을 익히게 하였으며, 또 나를 저들 나라로 들어가게 해서 그 곳 안의 형세 및 산천(山川)·도리(道里)를 자세히 익히게 했으며, 또 나로 하여금 오랫동안 그곳에 있게 하여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게 하였다. 나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하늘의 뜻이 나에게 있어 막막하지만은 않다고 여긴다.
그러나 신하들 가운데 이 일을 함께 할 자가 없고 내 나이가 점차 많아지므로 항상 의욕이 없고 사는 즐거움을 모르고 있었다. 경이 올라온 후부터 점차 좋은 생각을 두게 되었지만 경 역시 고립되어 있으니 매우 염려된다. 경은 당론(黨論)을 하지 않아서 이 때문에 피차 모두 경을 도와주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경과 뜻을 같이하고 도가 부합되어 항상 골육의 형제처럼 지낸다면 저절로 호응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내가 10년을 기한으로 하는데 10년이면 내 나이 50이 된다. 10년 안에 이루지 못하면 뜻과 기운이 점차 쇠약해져 다시는 가망이 없게 된다. 그 때에 이르면 나 역시 경이 돌아가는 것을 허락할 터이니, 그 때에 경 역시 물러가도 된다.
세자가 매우 현명한데 비록 부자간이라 하더라도 어찌 그 장단점을 모르겠는가. 그는 성질이 온순하고 효성스러운 데다가 또 견고한 의지가 있으니 바로 문치(文治)로 국가를 보존할 어진 임금이 될 것이다. 그는 깊은 궁중에서 생장하여 병가(兵家)의 일을 알지 못하니, 억지로 어려운 일을 책임지울 수 없으며 또 마마를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어린아이처럼 보호하고 있다. 또 질병이 잦고 아직껏 자식이 없어 매우 마음이 쓰인다. 또 생각건대 나이가 어려 혈기가 안정되어 있지 않아서 정력을 아끼지 못해 자식 노릇을 제대로 못하고 또 학문에 방해가 될까 두렵다. 그래서 내가 근일에 별도로 저 곳에 집 한 채를 지어 【이어서 경의각(敬義閣)을 가리켰다.】  그로 하여금 저 곳에서 독서하게 하는 한편 또 조심성 있는 한 늙은 환관을 가려 함께 기거하게 해 놓고 나는 이곳에 있으면서 부자가 서로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때때로 안에 들어가게 하고 있다. 부자간의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 어렵지만 경은 골육과 같기 때문에 이처럼 숨기지 않은 것이다. 대개 오늘날의 일은 내 자신이 하지 못하면 장차 할 수 없게 된다. 세자의 미덕으로는 국가를 안보하기에 충분하니, 지극히 어렵고 위태로운 일을 바라지는 못하더라도 또한 근심은 없을 것이다. 또 내가 내방에 들어갔을 때에는 혈기가 손상될 뿐만 아니라 의지 역시 게을러지고, 일 처리 역시 부당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또 옛 사람의 수명의 길고 짧은 것은 보건대 이에 관계된 경우가 많으니, 참으로 무일(無逸)015)  의 경계와 같다. 때문에 내가 주색(酒色)을 매우 경계하여 몸에 가까이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내가 심기(心氣)가 항상 맑은 것을 깨닫겠고 몸 역시 완건(完健)하니, 10년만 빌려준다면 성공하든 실패하든 간에 마땅히 한번 해 보겠다. 경은 마땅히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은밀히 의논해야 한다. 내가 보건대 송준길은 이 일을 담당할 의사가 없는 듯한데, 경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시열이 대답하기를,
"여기에 뜻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사람은 기가 약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유태(李惟泰)는 어떠한가?"
하니, 시열이 대답하기를,
"이유태가 항상 말하기를 ‘주상께서 만약 큰 뜻을 정한다면 모든 일은 모름지기 견실하게 해야 한다. 비록 사람이 죽더라도 단지 우선 집 뒤에다 장사지내게 하고, 이런 일을 다른 일까지 미루어 나가 모든 백성을 부리는 것과 재물을 소비하는 길을 일체 막아서, 백성을 기르고 먹을 것이 족하게 하는 데 힘써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기쁘게 듣고서 이르기를,
"그의 말이 그렇다면 참으로 쓸 만한 사람이다. 내 생각에 허적(許積)은 굳세고 용기 있어 일을 맡길 만한데, 다만 듣건대 그 사람은 주색에 빠져 있고 자못 검소한 행실이 없다고 하니 애석하다. 내가 일찍이 생각하기를, 나와 함께 이 일을 할 자는 오랑캐에게 죽은 집 자손이요, 그 나머지는 어렵다고 여겼었다. 내가 일찍이 만수전(萬壽殿)을 지을 때 터를 살핀다는 핑계로 한 곳에 가 앉아서 약간 명을 모아 놓고 이 일을 대략 말해 시험해 보았더니, 모두 막연하여 해볼 뜻이 없었다. 무슨 통탄이 이보다 더하겠는가. 여러 신하들이 오직 목전의 부귀만을 생각하고, 이 일을 하면 국가와 집안이 망한다고 무서워한다. 그래서 내가 이 일을 언급하자 모두 소름끼치게 여기므로 나만 공연히 스스로 개탄했을 뿐이다. 그들이 모두 자손을 위할 계책만 하고 나를 기꺼이 도와 주지 않았기 때문에 나도 마침내 도둑놈 심보가 생긴 데다가 또 별달리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여러 딸들의 생계를 만들어 주었다. 큰 계책이 참으로 정해진다면 여러 딸들의 궁가는 이미 조성되었다 하더라도 철거하는 것이 절대로 어렵지 않다."
하니, 시열이 일어나 말을 올리기를,
"예로부터 제왕은 반드시 자신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린 연후에 기강을 세울 수 있고 일에 두서가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전하께서 잡다하고 자잘한 일에서 벗어나지 못하신다면, 뜻 있는 선비들이 맥이 빠지지 않는다고 어떻게 단정할 수 있겠으며, 또한 집안만 살찌우고자 하는 여러 신하들 역시 전하를 본받지 않을 것이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옛날 인조(仁祖) 때에 윤황(尹煌)이 말하기를 ‘예로부터 위에서 선을 하여 아랫사람을 거느린 일은 있었지만 아래에서 하는 불선을 위에서 도리어 본받는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다.’ 하였는데, 이 말이 상당한 이치가 있습니다. 전하께서 시험삼아 심신을 깨끗이 하여 모든 잡된 일에 관계된 것을 일체 없애고, 마음을 다해 한결같이 이 일을 위주로 하신다면 신하들 역시 어찌 감히 자신을 잊고 나라를 위해 죽지 않겠습니까. 제갈량(諸葛亮)이 사관(史官)을 두지 않은 것이나 주자(朱子)가 우선 중원을 회복하고 묘(廟)를 세워야 한다고 말한 것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아주 옳다. 이제부터 마땅히 모든 일을 경과 은밀히 의논하겠다. 그런데 은밀히 의논할 길이 매우 어려우니, 내가 그 방도를 천천히 생각해 보겠다. 【후에 과연 이런 전교가 있었다.】  지금 천재(天災)와 시변(時變)이 이와 같은데, 대체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면 본디 재변을 부르게 되는 것이지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도 재변이 반드시 이르게 된다. 옛날 진 무제(晋武帝)가 나라를 세운 후 전혀 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고금에 재변이 많기가 그 때보다 더한 적이 없었으니, 비로소 손을 접고 조용히 앉아 있어도 하늘의 노여움을 초래한다는 것을 알았다. 더군다나 지금 마땅히 해야 할 일은 실로 이치상 당연한 바여서 그만둘 수 없는 것인데 편안하게 하지 않고 있으니, 하늘이 경계를 보임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오늘 의논하는 자들은 모두 우리 나라 사람으로 오랑캐에게 투항한 자들이 변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감히 기운을 내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반드시 그럴 리가 없다. 그들은 우리 나라가 보존되고 있기 때문에 자기들에게 이익되는 것이 매우 많다. 만약 우리 나라가 망한다면 그들도 전혀 손을 쓸 곳이 없게 될 것이니, 우리 나라를 보존시켜 가며 자신들의 이익을 오래 유지하고 싶은 마음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그 당시 혹 공갈한 것은 우선 우리를 협박하여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것이었지만, 그 마음은 실로 우리 나라가 무사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런데 혹 한 마디 언급하면 모두 기운을 잃고 넋이 없어지니, 매우 슬픈 일이다. 또 내가 하고자 하는 일과 아래에서 하고자 하는 것을, 중간에서 대신들이 막으면 끝내 행할 수가 없다. 지난번 포척(布尺)의 규정을 정할 때 내가 경의 말을 듣고 즉시 전교를 내려 먼저 내수사부터 쓰고 있는 포의 척수를 짧게 하도록 했는데 대신 이하가 어렵게 여겼기 때문에 일이 마침내 행해지지 않았다. 이제부터 모름지기 경과 뜻이 같은 자와 더불어 모든 일을 의논하겠다.
내가 오랫동안 경에게 중책을 맡기고자 하였으나 꺼리는 자들이 많아 경이 불안하게 여기는 단서가 있게 될까 염려했다. 또 경이 직책이 오르면 인사 행정을 맡길 만한 자가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 미루어 오면서 마음속으로 항상 답답하게 여겼다. 나의 속마음에 생각하기는 비록 조만간 경에게 중책을 맡긴다 하더라도 또한 양전(兩銓)을 겸해 주관시키려 하는데, 다만 힘든 일을 많이 맡기는 것이 미안하다. 또 그렇게 하면 꺼리는 자가 더욱 많아질 것이기 때문에 단지 마음에만 두고 있다."
하니, 시열이 일어나 대답하기를,
"신은 결코 그럴 만한 인재가 아닙니다. 그렇게 여기신다면 전하께서 신을 매우 모르시는 것입니다. 신이 감히 전하의 위임을 감당할 수 있다고 스스로 생각한 것이 아니고, 전번 전하께서 이미 큰 뜻을 은미하게 보여주셨을 적에 신의 벗 이유태가 일찍이 말하기를 ‘성상께서 과연 큰 뜻을 갖고 계시다면 비록 재주가 없는 자라 하더라도 떨쳐 일어나 석호촌(石壕村)의 부인(婦人)016)  처럼 군사들의 새벽밥을 짓는 일이라도 해야 한다.’라고 했기 때문에, 신이 비록 매우 용렬하지만 감히 소명에 응해 왔던 것입니다. 전하께서 이미 큰 뜻이 계시고 또 신을 버리고자 하지 않으시니, 신이 어찌 감히 물러나 떠날 마음을 갖겠습니까. 마땅히 목숨을 걸고 약속하겠습니다. 그러나 신은 참으로 쓰기에 알맞은 재능이 없으니, 전하께서는 단지 신을 유악 가운데 두시고 때때로 의심된 일을 물으신다면, 신이 어찌 감히 어리석은 재주나마 다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의 생각은 나와 같지 않다. 그러나 경은 시험삼아 오늘날의 일 가운데 어떤 것이 급선무인지 말해 보라."
하니, 시열이 대답히기를,
"이는 짧은 시간에 다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만, 신이 평소에 배운 것으로써 진달하겠습니다.
격치(格致)나 성정(誠正)의 설을 예로부터 진부하고 오활한 말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듣는 자들이 모두 마음속으로 비웃습니다. 그러나 성인께서 이런 쓸데없는 말로써 후세를 속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격치란 것은 이 마음의 본체를 밝혀서 사물의 이치에 통달해서 막힘이 없고 각각 거기에 마땅하게 대처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참으로 밝지 못하면 사물의 이치에 어둡고 막혀서 대처함이 마땅함을 얻지 못할 것이니, 정치에 해가 될 뿐 아니라 인심이 사나워져 복종하지 않게 되며, 심한 자는 모욕을 가하게 되기까지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라를 다스린 자는 이제껏 있은 적이 없습니다. 후세의 오활한 유생들이 초목이나 곤충의 이치를 살피는 것을 격치라고 여기는데, 이것이 비록 격치 가운데 한 가지 일이기는 하나, 단지 이런 것만을 전념하고, 이륜(彛倫)이라는 큰 일을 우선하지 않는다면 어찌 격치라 하겠으며 또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상께서도 만약 이런 것을 격치의 실상이라고 여기신다면, 생각건대 성인의 가르침을 오활하고 절실하지 못하다고 여겨 쓰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옛날 주자(朱子)가 ‘모든 일에 옳음을 구하는 것이 격치의 요점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을 마땅히 깊이 체득해야 할 것입니다.
성의(誠意)의 설에 이르러서는,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것이 바로 실제의 일입니다. 인군이 안으로는 자신의 몸과 마음 사이와, 밖으로는 사람을 쓰고 일을 처리하는 즈음을 모두 여기에 힘을 쓴다면, 나라를 다스리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이른바 정심(正心)이라고 하는 것은 또 마음의 본체를 잠잠하게 텅 비워 깨끗하게 하여 치우치거나 요란스러움이 없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대저 사람은 마음의 본체가 격치를 한 뒤에 밝아지고 호오(好惡)는 성의가 이루어진 뒤에 분별하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이 잠잠하게 비어 밝지 못하면 외물에 흔들리기가 쉽고 인하여 어두워집니다. 그래서 도리어 호오(好惡)의 바름을 잃어서 치우치고 좀스러움이 장차 이르지 않음이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격치와 성의를 한 후에도 정심의 공부가 있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시험삼아 이른 아침 외물과 접촉하지 않을 즈음이나 이 마음에 치우침이 없을 때, 스스로 그 응대함이 어떠한지 징험해 보시면 그 이치에 합당한 것은 반드시 많고 합당치 않은 것은 반드시 적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매우 옳다. 내가 이른 아침에는 그와 같은 것을 많이 징험했는데, 낮의 마음이 요란할 때와는 아주 달랐다."
하니, 시열이 말하기를,
"격치하여 사리가 이미 밝아지고, 성의하여 호오가 이미 분명해지고, 정심하여 마음의 본체가 항상 태연하여 얽매임이 없게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모든 사물에 대한 처리가 모두 그 이치를 얻게 되며, 그렇게 하는데도 모든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고 인심이 복종하지 않는 이치는 필연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른바 격물, 치지, 성의, 정심이라는 것이 과연 오활하고 실제가 없는 헛된 말이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하지 않고 한갓 지려(智慮)와 혈기(血氣)로써 억지로 한다면, 비록 우연히 이치에 맞는 것이 없지는 않겠으나 마치 뿌리 없는 나무나 근원 없는 물과 같아서, 한 가지 일은 이치에 맞고 한 가지 일은 이치에 맞지 않아서 오늘은 일이 잘 되지만 내일은 일이 잘 되지 않습니다. 이러면 자신의 마음도 항상 쾌활하지 못한데, 더군다나 다른 사람이 믿고 복종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참으로 옳다. 이는 옛사람이 이른바 ‘청명한 덕이 몸에 있으면 지기(志氣)가 신묘해진다.’고 하는 것이다. 내가 비록 어리석고 어두우나 실제로 이런 의사(意思)가 때때로 있는데, 이런 의사가 만일 끊임이 없다면 무슨 일을 하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의사가 좋을 때가 아주 적다."
하니, 시열이 대답하기를,
"이것이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학문을 논하면서 경(敬)을 위주로 한 이유입니다. 경을 하면 이 마음이 항상 보존되어 조금도 끊임이 없으며, 경을 하지 않으면 마음이 분란하여 좋은 의사가 쇠미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자가 말하기를 ‘한때 좋은 의사가 있더라도 얼마나 갈 수 있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비록 작은 일이라 하더라도 할 수가 없는데, 더군다나 천하 국가의 일이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이 매양 지성으로 나를 이끌어 주니, 내가 감히 잊을 수가 없다. 경 역시 스스로 뭇 선을 모으고 아름다운 말이 오게 하여 함께 도모한 것을 이루게 하기를 생각하라. 경이 말한 바 이른 아침 운운한 것은 가장 간절한데, 나 역시 여러 번 징험해 보았다. 마음에 거슬리는 일이 있으면 우선 내버려 두었다가, 밤중을 기다려서 불평한 뜻이 사라지게 한 뒤, 아침에 일어나 응대하면 부당한 것이 적게 되니, 이 때문에 맹자(孟子)의 말이 지론임을 알았다."
하니, 시열이 대답하기를,
"상께서 항상 그렇게 공부하시면 학문이 고명해지지 않을 것을 어찌 걱정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마음속으로 크게 고민하는 바가 있는데, 이제 경에게 물어서 결정하겠다. 오늘날의 큰 근심은 두 현인을 종사(從祀)하는 문제보다 더 큰 것이 없다. 내가 일찍이 피차에 대해 백방으로 미봉하여 겨우 안정시켜 바야흐로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이 논의가 갑자기 다시 일어난다면 풍파가 크게 일어나 오래도록 진정되지 않을 것이니, 일을 해치는 것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경은 이 일의 시비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이는 쉽게 말로 결단할 것이 아닙니다. 두 현인을 종사하라는 청은 온 나라가 같은 말을 해온 지 이미 수십 년이 되었으니, 이는 공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직 몇 사람이 그들 선세의 논의를 답습하여 감히 다른 말을 하고 있는데, 신의 생각에 종사는 막중한 전례(典禮)이니 만일 경솔히 의논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래도 괜찮지만 만약 무고하고 모욕한다면 결단코 이는 도리에 어그러진 무리입니다. 두 현인의 도덕이 어떠한지는 논하지 않더라도 이미 훌륭한 선배인데 후배가 어찌 감히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정자(程子)의 문인들이 선배의 단점을 말하면, 정자는 반드시 꾸짖기를 ‘너희는 단지 그들의 장점만 배우라.’ 하였으니, 이 얼마나 좋은 풍도입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무리들은 참으로 도리에 어긋나는 자들이니, 따질 것이 뭐 있겠는가."
하니, 시열이 대답하기를,
"이 무리들을 따질 것이 없음을 그 누가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그 사이에는 더러 부형된 자들이 중지시키지 않고서 도리어 지도하는 경우도 있으니, 미워할 만합니다. 두 현인의 도덕과 학문은 신 역시 말학(末學)이니 어찌 감히 알겠습니까. 만약 상께서 그들의 책을 읽어서 그 마음을 찾아보고 행한 자취를 논해 보신다면 종사해야 하는지의 가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분명히 알며 깊이 믿지 못하시고 오직 다른 사람의 말만 들으신다면, 비록 존숭하는 전례를 지극히 하시더라도 실로 성상의 심신에는 보탬이 없게 될 것이니, 광해군(光海君)이 다섯 현인을 종사한 것이 그 경우입니다. 그러나 신이 이에 대해 별도의 소견이 있지만, 외람되이 감히 진달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번 말해 보라."
하니, 대답하기를,
"다섯 현인의 종사가 비록 온 나라가 함께 청해서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나, 그 가운데 어찌 다시 참작해야 할 자가 없겠습니까. 이이(李珥)가 일찍이 조광조(趙光祖)와 이황(李滉)만을 들어서 종사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신은 이 논의가 가장 적당하다고 여깁니다. 이 뒤에 이이와 같은 큰 현인이 다시 나온다면 마땅히 이미 종사했거나 아직 종사하지 못한 여러 현인 가운데서 정밀히 취사 선택하여 만세까지 다른 의논이 없게 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면 일은 비록 지극히 타당하게 되겠지만, 더욱 시끄러울까 염려된다."
하니, 시열이 대답하기를,
"신이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큰 현인이 나온 연후에야 할 수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 급히 해야 할 바는 이 일이 아닌 듯한데, 조신(朝臣)과 유사(儒士)들이 모두 급한 일로 여기니, 내가 매우 병통으로 여긴다."
하니, 시열이 대답히기를,
"종사는 비록 논의가 일치하기를 기다려서 하더라도 늦지 않으나, 선비들의 습속에 이르러서는 먼저 바로잡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현을 무함하고 모욕하는 자는 상께서 깊이 미워해 끊으셔야지, 급하지 않은 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이후에 만약 무함하거나 모욕하는 자가 있으면 내가 마땅히 통렬히 배척해 용서하지 않겠다. 그러나 내가 밤낮으로 노심 초사하는 것은 오직 군사를 양성하는 한 가지 일뿐이다. 경이 전에 말하기를 ‘군사 양성과 백성을 기르는 것은 반드시 서로 상치된다.’ 하였는데, 어떻게 하면 상치되지 않겠는가?"
하니, 시열이 대답하기를,
"이는 신의 말이 아니라 바로 주자(朱子)의 말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모든 재력(財力)에 관계되는 것은 일체 낭비해 쓰지 말고 모조리 군수(軍需)로 돌리면, 군수가 점차 풍속해지게 될 것입니다. 보오(保伍)의 법을 행해 민정(民丁)으로 하여금 누설이 없게 한 연후에, 3인마다 장정(壯丁) 한 사람을 가려 군사로 삼아서 활쏘기와 말타는 기예를 익히게 하고, 나머지 두 사람은 포(布)를 내어 그 한 병사를 기르게 하기를 지금 어영군(御營軍)의 방법처럼 한다면, 병사로써 병사를 양성하는 것이므로 농민을 침해하는 일이 없을 듯합니다. 보오(保伍)의 법은 《주례(周禮)》의 뜻인데, 그러나 반드시 먼저 기강을 세운 연후에야 이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기강을 세우는 방법은 또한 전하께서 사심이 없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법은 마땅히 천천히 경과 함께 강구하겠다."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강빈(姜嬪)의 옥사(獄事)에 대해서 지금까지 인심이 평정되지 않고 있는데 상께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매양 경과 함께 이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으나 틈이 없어 하지 못했다. 강빈의 악행을 어찌 한 입으로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단지 한 가지 일을 가지고 말하겠으니, 경은 일단 들어보라.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비록 금수라도 있게 마련이다. 소현(昭顯)의 상을 당했을 때 대조(大朝)께서 애통해 하면서 그를 책망하기를 ‘이는 밤에 잠자리를 삼가지 않은 소치이다.’ 하셨는데, 강빈이 발악하기를 ‘아무 달 이후에는 서로 가까이 하지 않았다.’ 하였다. 그 후 자식을 낳고서는 서로 가까이하지 않았다는 말을 실증하고자 즉시 스스로 죽여서 감추었다. 그 성질이 이와 같으니 역모한 것이 괴이할 게 뭐 있는가. 또 역모한 형상은 안에서나 알 뿐이지 밖의 사람이 어찌 알겠는가. 그 일이 낭자하여 완전히 의심이 없는데 밖의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억울하다고 여기니, 내가 실로 마음이 아프다."
하자, 시열이 대답하기를,
"그 역모한 자취를 밖에서는 참으로 모릅니다. 그러나 신처럼 어리석은 자도 의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신이 일찍이 그 당시 선왕의 전교를 기억하는데, 이르시기를 ‘흉한 물건을 묻고 독을 넣은 것은 필시 이 사람의 소행일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대체로 ‘필시’란 두 글자는 분명하지 못한 것을 억지로 단정하는 말입니다. 어찌 분명하지 못한 일로써 대역(大逆)이라고 사람을 죽였는데 사람들이 억울하다고 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송 고종(宋高宗)이 ‘막수유(莫須有)’란 세 글자로 악비(岳飛)를 죽였기 때문에017)   천하가 지금까지도 원통하다고 합니다. 이번 이 ‘필시’란 두 글자도 사람들의 입을 잠잠하게 하지는 못할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가만히 한참 있다가 이르기를,
"이는 내가 생각하지 못하였는데 과연 경의 말과 같겠다. 그러나 역모는 참으로 의심이 없다."
하니, 시열이 대답하기를,
"설령 강이 참으로 역모를 했다고 하더라도, 김홍욱(金弘郁)이 어찌 역모한 사실을 알고서 구원할 리가 있겠습니까. 소견이 이와 같은 데 불과한 것이었는데 전하께서 너무 갑자기 죽였으므로 인심이 더욱 안정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이미 법령을 정하기를 만일 감히 말하는 자가 있으면 강과 같은 죄를 주겠다고 하였는데, 그가 어찌 감히 이 법을 무시하고 말을 한단 말인가. 이 때문에 내가 죽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하니, 시열이 대답하기를,
"이것이 바로 사람들의 말을 초래한 까닭입니다. 강이 이미 역적으로 죽었으면 그만이지, 어찌 다시 사람들이 감히 말하는 것을 염려하여 억지로 감히 말하지 못하게 하는 금령을 설치하여 사람들의 입을 막는단 말입니까. 이는 참으로 속이 꿀리는 사람들이 하는 짓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더욱 의심이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자, 상이 한참 있다가 이르기를,
"경의 말을 듣고 다시 생각해 보니 과연 옳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이 말을 하면서 반드시 주자(朱子)를 일컫는데, 경은 주자의 책을 몇 번이나 읽었기에 이처럼 익숙한가?"
하니, 시열이 대답하기를,
"신은 어려서부터 《대전(大全)》과 《어류(語類)》를 읽고 마음속으로 아주 좋아하였으나, 정신력이 강하지 못해 읽지 못한 것이 아직도 많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주자의 말을 과연 일일이 다 행할 수 있는가?"
하니, 시열이 대답하기를,
"옛 성인의 말은 혹 시세(時勢)가 다르기 때문에 행할 수 없는 것이 있으나, 주자의 말에 이르러서는 시대가 매우 가깝고 또 처한 시대적 상황도 오늘날과 똑같기 때문에 신은 그 말을 모두 다 행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전하께서 시험삼아 한가한 때에 먼저 그의 봉사(封事), 주차(奏箚), 주의(奏議) 등의 글을 읽으시고 그 다음에 《어류》 가운데서 요긴한 말을 열람하시면 반드시 마음에 부합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마땅히 경이 말한 바와 같이 하겠다."
하고, 인하여 이르기를,
"오늘 경과 함께 조용히 이야기를 나눈 것을 매우 다행으로 여긴다. 그러나 오늘 한 말은 별로 신하들의 시비와 진퇴에 관한 일은 언급한 바가 없으나, 밖의 사람들은 반드시 좋아하지 않는 자가 많을 것이다."
하니, 시열이 대답하기를,
"더러 그런 자가 없지 않을 것이나 억측해서 신하들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후일에도 마땅히 오늘처럼 하겠지만, 은밀하게 글로 상의하는 길을 경도 또한 생각하라. 또 오늘 나눈 이야기는 비록 묻는 자가 있더라도 경이 어찌 사람들에게 누설하겠는가?"
하니, 시열이 웃으며 사례하기를,
"전하께서 반드시 신이 전광(田光)처럼 하지는 않을 것018)  으로 여기시기 때문에 이런 하교를 하시는군요."
하자, 상도 웃으며 이르기를,
"이것이 어찌 어른을 의심해서 하는 말이겠는가. 성인 역시 ‘일에 임해서 조심하고, 도모하여 이루기를 좋아한다.’라고 말한 바가 있다."
하였다. 시열이 드디어 물러나왔다. 【시열이 물러나와 그날 독대(獨對)한 대화를 직접 기록해 비장해 두었다. 그 후 사관 이광직(李光稷)이 은밀히 편지로 기록의 유무를 물으며 사실을 책서(策書)에 덧붙이기를 원한다고 하였는데, 시열이 종일토록 깊이 생각했으나 그 가부를 결정하지 못하다가 마침내 스스로 말하기를 "당시 하늘이 성상에게 수명을 빌려 주었더라면 사업을 이루었을 것이니, 그렇다면 기록은 없어도 된다. 이제는 이미 다 틀렸다. 만약 그날의 말 역시 끝내 없어져 버린다면 나의 죄가 어떠하겠는가. 당일의 자상한 경계를 저버리는 이 죄는 도리어 적은 것이다." 하였다. 드디어 손으로 스스로 봉함하여 사람을 시켜 보내려는데, 그날에 광직의 부음(訃音)이 갑자기 이르러 보내지 못하고 말았다. 그 뒤 사관 이세장(李世長)과 이선(李選) 등이 또 광직의 뜻처럼 청하니 시열이 비로소 그 청에 부응하고, 또 그 기록의 끝에 쓰기를 "아, 우리 성고(聖考)의 큰 규모와 큰 뜻을 전석(前席)에서 잠깐 동안 보이셨는데, 하나도 시행하지 못하였다. 저 푸른 하늘은 어찌 그리 무심한가. 오직 이 외로운 신하는 근심에 잠겨 피눈물을 흘리지만 아직 아무 보답도 못하였다. 매양 덕음(德音)을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오늘 아침에 다시 옛 봉함을 뜯어 보니 마치 탑전에 올라가 친히 옥음(玉音)을 듣는 듯하다. 드디어 다시 눈물을 머금고 그 봉투의 겉에다 써서 두 한림에게 알린다. 아, 태사공(太史公)이 말하기를 ‘주상이 밝고 성스러운데도 그 덕이 알려지지 않는 것은 유사의 허물이다.’ 하였으니, 아, 이 사실을 만세 후까지 펴서 알려야 하는가, 하지 않아야 하는가." 하였다. 이선(李選)이 이것을 신축년 5월 시열이 입대하고 물러간 뒤에다 추가해서 수록하였는데, 전의 《실록(實錄)》에서 모두 삭제해 버렸다. 또 지문(誌文)을 지어 바친 아래에다 쓰기를 "효종(孝宗)이 즉위한 처음에 때를 기다려 크게 치욕을 씻고자 하는 뜻을 두었는데, 시열이 상의 뜻을 알아차리고 은밀히 봉사(封事)를 올려 찬양하였다. 효종이 마침내 시열에게 큰일을 맡길 만하다고 생각하여 의지하면서 심복으로 삼았는데, 시열은 실로 못나서 아무 일도 하지 못하였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시열이 상의 명에 의하여 효종의 지문을 지었는데, 구애에 위축되었기 때문에 완곡한 표현에만 힘을 써서 곧바로 쓰지 못함이 많았다." 하고, 이어 허적(許積)의 차자 내용을 기록하였다. 아, 시열의 경륜과 큰 지략은 독대(獨對)할 때의 대화에서 알 수 있고, 지문을 지어 바쳤을 적에 사관이 전달한 유지에 대한 회계 내용을 읽어 보면 당당한 기세를 느낄 수 있으며, 또 허적의 사적인 말을 인용하면서 "대처할 방법만 있다면 미처 쓰지 못한 것을 다시 쓰고자 한다."고 한 데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일에 임해 잘 도모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당인(黨人)들이 또 이 말을 삭제하고는 단지 허적의 차자만 기록해, 마치 시열은 두려워했고 허적만 혼자 말한 것처럼 하였다. 그들의 마음씀의 간사하고 편벽됨이 한결같이 이에 이르렀으니, 그것으로써 후세를 믿게 하고자 한들 어찌 되겠는가.】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51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122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친(宗親) / 정론-정론(政論) / 군사-군정(軍政) / 군사-군역(軍役) / 과학-천기(天氣)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어문학(語文學) / 역사-고사(故事) / 역사-사학(史學) / 사상-유학(儒學) / 외교(外交) / 인물(人物) / 도량형(度量衡) / 변란-정변(政變)


[註 013] 평성(平城)의 근심 : 제왕(帝王)이 적군에게 포위당한 근심을 뜻함. 한 고조(漢高祖)가 흉노(匈奴)를 치다가 평성에서 7일 동안 포위당해 위태롭게 되었는데, 진평(陳平)의 계책을 써서 풀려날 수 있었음. 《사기(史記)》 권8 고조 본기(高祖本紀).[註 014] 총재(冢宰) : 이조 판서.[註 015] 무일(無逸) : 《서경(書經)》 주서(周書)의 편명.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에게 안일에 빠지지 말도록 경계한 내용임.[註 016] 석호촌(石壕村)의 부인(婦人) : 석호촌은 하남성(河南省)에 있는 고을이다. 두보(杜甫)가 석호리(石壕吏)란 시를 지었는데, 그 내용 가운데 보임. 《구가집주두시(九家集注杜詩)》 권3 석호리(石壕吏).[註 017] 송 고종(宋高宗)이 ‘막수유(莫須有)’란 세 글자로 악비(岳飛)를 죽였기 때문에 : 악비는 송 고종 때 사람. 여러 차례 금군(金軍)을 격파하여 큰 공을 세웠는데, 주화파(主和派) 진회(秦檜)에게 ‘막수유(莫須有)’의 모함을 받아 39세에 옥사하였음. 막수유는 ‘그런 일이 있지 않았겠는가?’라는 뜻으로 추측으로 남을 모함하는 것을 가리킴.[註 018] 전광(田光)처럼 하지는 않을 것 : 전광은 전국 시대 사람. 연 태자(燕太子) 단(丹)이 진왕(秦王)을 죽이려고 그에게 부탁했는데, 그는 늙었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대신 형가(刑軻)를 추천. 태자가 그에게 이 일을 누설하지 말 것을 부탁하자 나와서 남에게 의심을 받았다는 이유로 자살했음. 《사기(史記)》 권86 자객 열전(刺客列傳).

 

9월 6일 갑자

이 때 양사(兩司)의 여러 관원들이 모두 인피한 지 여러 날이 되었으므로 옥당이 처치해야 되었으나 부제학 유계(兪棨) 등이 인혐하여 진소(陳疏)했고, 유계는 패초에 나오지 않고 있었다. 이날 부응교 심세정(沈世鼎) 등이 차자를 올려 처치하기를,
"나문하라는 청은 본디 공공의 논의였는데 스스로 변명하는 말이 실로 무망(誣妄)하려는 계책에서 나왔습니다. 자신에게 잘못이 없는데, 인피할 만한 혐의가 뭐 있겠습니까. 두 의원의 범한 바가 비록 용서할 수 없는 죄가 있기는 하나 대신이 논계를 정지한 것 역시 임시 방편의 방도에서 나온 것으로 실로 뜻이 있는 것이며 부득이한 일이었습니다. 정언 이동명(李東溟), 장령 정계주(鄭繼胄), 지평 김우석(金禹錫), 사간 홍처윤(洪處尹), 정언 이합(李柙), 헌납 김익렴(金益廉), 대사헌 조수익(趙壽益), 대사간 이경억(李慶億), 장령 윤비경(尹飛卿)을 모두 출사하라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동명·경억·처윤 등은 다시 인피하여 물러나 물론을 기다리고, 계주·우석·이합·익렴·수익·비경은 모두 패초에 나오지 않다가 이튿날 인피하였다. 수찬 조유석(趙胤錫)이 차자를 올려 양사를 모두 체직하라고 하니, 따랐다.

 

9월 10일 무진

상이 여차에 임어하여 영의정 정태화, 이조 판서 송준길을 인견하였다. 준길이 지문(誌文)을 서사(書寫)하라는 명을 사양하자, 상이 이르기를,
"좌참찬 이 짓고, 이조 판서가 쓴다면 어찌 좋지 않겠는가."
하였다. 준길이 인하여 진달하기를,
"사업(司業)은 바로 계해년에 특별히 설치한 관직으로 선우협(鮮于浹)이 일찍이 단망(單望)으로 제수되었습니다. 지금 역시 차출하고자 하나 삼망(三望)을 갖추어 의망할 사람이 없으니, 혹 단망이나 혹은 두 사람만 갖추어 의망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준길이 또 아뢰기를,
"숭의전(崇義殿)은 왕씨(王氏)의 제사를 받들기 위해 설치했는데, 수(守)·영(令)·감(監) 등의 직에 만약 여러 해 동안 재임하면 마땅히 승천(陞遷)하는 조치가 있어야 합니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마땅히 연수를 정해 규정을 만들어야 하니, 15년이 차면 승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채유후(蔡𥙿後)를 대사헌으로, 정지화(鄭知和)를 대사간으로, 심세정(沈世鼎)을 사간으로, 강호(姜鎬)를 헌납으로, 임한백(任翰伯)·허목(許穆)을 장령으로, 이무(李堥)를 지평으로, 윤지미(尹趾美)·오시수(吳始壽)를 정언으로, 정재해(鄭載海)를 주서로, 이성항(李性恒)을 승서(陞叙)하여 선천 부사(宣川府使)로, 목겸선(睦兼善)을 부응교로, 윤선거(尹宣擧)를 사업으로 삼았다.

 

9월 14일 임신

대사헌 채유후 등이 아뢰기를,
"전 병사 김시성(金是聲)이 함부로 사람을 죽였는데, 죄를 입은 지 오래지 않아 첩(牒)을 주고 서용하라는 명이 일시에 내려 갑자기 금군 별장(禁軍別將)에 제수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대전(大典)》의 율문(律文) 가운데 형벌을 남용해서 사람을 죽인 자는 영원히 서용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옛 법을 거듭 밝히는 처음에는 더욱 이 시성으로 말미암아 무너뜨려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김시성을 서용하는 것은 명이 있기 전에 나온 것이니,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9월 18일 병자

털이불로 재궁(梓宮)을 싸서 묶었다. 예조가 아뢰기를,
"재궁의 추위를 막기 위한 여러 도구를 싸 묶을 때 별전(別奠)이 있어야 할 듯한데 근거할 만한 명문화된 예법이 없습니다. 총호사에게 문의했더니, 말하기를 ‘이는 예법에 실려 있는 것이 아니니, 가칠(加漆)할 때의 예에 의해 단지 고유(告由)만 하고 전은 올리지 말아야 할 듯하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가칠할 때와는 차이가 있다. 끝난 뒤 전이 없으면 예의 뜻에 부족할 듯하다."
하였다. 이에 전을 베풀었다.

 

9월 19일 정축

박증휘(朴增輝)를 정언으로, 정박(鄭樸)을 장령으로, 임한백(任翰伯)을 교리로, 안후열(安後說)·오시수(吳始壽)를 수찬으로, 정중휘(鄭重徽)를 봉교로, 이민발(李敏發)을 전남 우수사로 삼았다.

 

9월 20일 무인

외재궁(外梓宮)에 옻칠했는데 70번에 이르러 그쳤다.

 

9월 21일 기묘

지평 윤휴가 상소하여 사직하면서 고신(告身)을 정원(政院)에 봉해서 돌려보내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 답하고 그가 올린 고신을 돌려보냈다.

 

9월 23일 신사

약방이 여차에 들어가 진찰하였다. 상이 도제조 정태화(鄭太和)에게 이르기를,
"북도(北道)에 정배한 죄인의 숫자가 매우 많은데, 금년은 농사가 흉년이 들어 반드시 의지해 살아갈 길이 없을 것이니, 다른 도로 이배해야 한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이런 때를 당했으니 반드시 주객이 다 곤궁할 근심이 있을 것입니다. 상께서 이처럼 진념하시니, 정배 죄인을 모두 이배하면 일이 매우 편리하고 마땅할 것입니다. 그 가운데 전가 사변(全家徙邊)한 죄인을 변방으로 들여보낸 것은 본디 조종조에서 변방을 채우려는 뜻이었으니, 이런 무리는 거론하지 마소서."
하자, 상이 명하기를,
"도년(徒年) 이하 및 먼 곳에 유배 보낸 사람은 아울러 이배하라."
하였다. 이들은 모두 1백13명이었으며, 전가 사변 및 역적에 연좌된 자는 모두 논의하지 않았다.

 

부제학 유계 등이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성인이 문(文) 무(武)의 성스러운 덕을 칭찬한 것이 뜻과 사업을 이어받아 따랐다고 말한 데 지나지 않았으며, 증자(曾子)가 맹장자(孟莊子)의 효(孝)를 칭찬한 것은 아버지의 신하와 아버지의 정사를 고치지 않은 것을 어려운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성인이 지위를 이어받는 도리로는 이를 버리고서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아, 선왕께서 널리 현준(賢俊)을 구해 전하를 돕게 하였는데, 전하께서 예로써 높이고 존경함이 역시 이르지 않는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직무를 강요하지 말아서 우대해 기르고 예를 후하게 하시어 나라의 사표가 되게 하고, 경악에 출입하면서 오로지 충고를 담당하게 하여, 정사가 있으면 자문하고 의심되는 일이 있으면 질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전후해서 나온 재야의 신하로서 직책에 매이기를 원하지 않는 자에 대해서도 역시 이런 도리로 대접해 서울에 거주하게 한다면, 거의 준언(俊彦)들이 기쁘게 여길 것이고 분분하게 물러가지는 않을 것이므로 새로운 정치가 맑고 깨끗해지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부드럽게 비답을 했다.

 

9월 25일 계미

임의백(任義伯)을 형조 참의로, 홍위(洪葳)를 승지로 삼았다.

 

9월 27일 을유

영돈녕 이경석(李景奭)이 차자를 올리기를,
"북도에 기근이 들었으니, 상평창의 쌀과 콩으로 영남(嶺南)에 있는 5천 석과 통영(統營)의 곡식 7천 석을 덜어 내어 일에 밝은 자로 하여금 주관하게 해 말을 고용하여 육진(六鎭) 근처로 운반해 들이게 하소서. 그리고 북로(北路)의 감사(監司)나 병사(兵使), 큰 고을의 관리로 하여금 각기 창고에 보관된 포(布)·삼(參)·피물(皮物)·어곽(魚藿) 등의 물건을 내어 주객이 모두 낮은 가격으로 교역하게 하여, 오로지 백성 진휼을 위주로 해야 합니다. 또 수만 근의 목화 및 해조에 소장된 낙폭 휴지(落幅休紙)를 일체 들여보내 무사와 군졸 및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로서 더욱 빈한한 사람들을 살펴서 공급하게 하고, 또 이배한 죄인을 심리하여 석방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차자의 말이 모두 약이 되는 내용이니,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겠다."
하였다. 그 뒤 일이 끝내 시행되지 않았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