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무자
우박이 내리고 천둥이 쳤다.
홍명하(洪命夏)를 원접사로 임명했다. 이 때 청나라의 조제사(吊祭使) 및 책봉사(冊封使)가 나올 예정이었는데, 원접사로 임명해 보낼 사람이 없자 당시 관작을 삭탈당한 상태에 있던 명하를 서용해 보내자고 비변사가 청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4일 신묘
상이 양지당(養志堂)에 거둥하니, 약방 도제조 정태화와 제조 채유후 등이 여러 의원들을 이끌고 들어와 진찰하였다. 상이 이어 좌의정 심지원, 부제학 유계, 전 찬선 권시를 명초하고, 또 사관을 보내어
"오래도록 서로 보지 못했으니 오늘 들어오라."
는 뜻으로 이조 판서 송준길과 좌참찬 송시열에게 유시하였는데, 시열이 병 때문에 명을 받들지 못하고 그대로 대죄하자 상이
"안심하고 조섭을 잘 하라."
고 유시하였다. 심지원이 아뢰기를,
"금정(金井)019) 을 설치할 때 소신이 나아가 살펴 보았는데, 흙 색깔이 매우 좋았습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금정을 설치하기 전에는 무척 염려하였는데, 이제 흙 색깔이 그와 같다는 말을 들으니 망극한 중에도 다행이라 하겠다."
하였다. 상이 정태화와 ‘왜인에게 미곡으로 환급(換給)해 주는 일’을 다시 의논하였는데, 공무목(公貿木) 3백 동(同)을 5년 기한으로 미곡으로 환급해 주도록 윤허하면서 1필(匹)의 값은 12두(斗)로 정하도록 하였다. 또 호남에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할 일을 의논드리니, 상이 일렀다.
"감사 김시진(金始振)의 장계대로 내년 가을까지 기다렸다가 확정해서 시행하는 것이 좋겠다."
10월 5일 임진
윤비경(尹飛卿)을 장령으로 삼았다.
밤에 천둥과 번개가 쳤다.
좌참찬 송시열이 차자를 올리기를,
"삼가 상신(相臣)의 장본(狀本)을 【청시사(請諡使)가 청나라에서 올린 장계.】 보건대, 마치 청나라의 명을 실제로 받들기 위하여, 대행 대왕에게 그들이 내려준 시호를 진정으로 가하려 하는 듯이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신은 모르겠습니다만, 인조 대왕 때에는 이를 어떻게 처리하였습니까? 과연 그네들이 보내준 두 글자를 헌문 열무(憲文烈武)의 위에 덧붙였다면020) , 그야말로 당시 신자(臣子)들의 죄라 할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지금 역시 그들에게서 받은 시호가 좋은 내용이라 하더라도 영광스러운 것이 되지 못하고 나쁜 것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냥 그뿐일 텐데, 어째서 오늘날 이토록까지 수고스럽게 힘을 허비해 가며 주선을 한단 말입니까.
이미 지나간 일이니 탓하지 말고 그냥 놔둔 채 쓰지 말자고 한다면 그것도 사실 상관은 없습니다만, 그냥 쓰지 않는 것으로만 그친다면 그것도 미안한 점이 있습니다. 대체로 열성(列聖)의 휘호(徽號)에는 10개의 글자를 관례적으로 써 왔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선문(宣文) 이하의 글자만 시호로 올릴 경우, 8개 글자밖에 되지 않아 그 위에 있어야 할 2개의 글자가 애매하게 비어 있게 됨으로써 마치 앞으로 뭔가 기다려서 충족시키려는 뜻이 실제로 있는 것처럼 보여지게끔 되니, 이렇게 되면 그 이상 추악해질 수가 없게 되고,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또 깎아내린 것 같은 인상을 주게 마련입니다. 대저 대행 대왕의 성덕(盛德)과 지선(至善)에 대해 그 아름다운 행적을 기술하는 것이 이렇듯 구차할 수가 있겠습니까. 원하건대 몇몇 대신(大臣) 및 예관(禮官)과 함께 은밀히 상의하여 잘못된 점을 보완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차자를 안에 머물려 두었다.
10월 6일 계사
여차(廬次)에 나아가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심지원, 원접사 홍명하, 예조 판서 윤강 등을 인견하였다. 상이 좌참찬 송시열의 차자를 내보이며 이르기를,
"차자의 뜻이 어떠한가?"
하니, 윤강이 아뢰기를,
"고부사(告訃使)의 장계 가운데 ‘숙헌(肅憲) 두 글자를 있는 힘을 다해 주선하였다.’는 말이 있었는데, 시열이 차자를 진달한 것은 대체로 이 이유에서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의 생각은 이렇다. 즉 열성(列聖)에는 모두 10자(字)의 시호를 사용했는데, 인조(仁祖)의 시호에 8자만 사용한 것은 매몰찬 듯싶다는 것이며, 따라서 이번에 저네들이 정해준 시호는 본래 사용할 수 없는 것인만큼 우리 나라 단독으로 그 위에 2자를 덧붙여 10자의 시호로 했으면 하는 것이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신의 생각은 이와 다릅니다. 인조의 시호에 기왕 8자를 사용한 마당에 대행 대왕에게만 유독 본조(本朝)에서 2자를 더 올린다면, 구차스럽기 그지없는 일이 될 뿐더러 또한 미안한 점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고, 심지원이 아뢰기를,
"신의 생각도 그러합니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선왕의 훌륭한 덕과 위대한 업적이 어찌 2자를 더하고 더하지 않는 것에 따라 영향을 받겠습니까. 인조묘(仁祖廟)에 의거하여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겠다고 하였다.
10월 7일 갑오
정태화가 약방 도제조의 자격으로 여차에 들어와 진찰하였다. 의관이 물러 나가자, 상이 태화에게 소지(小紙)를 꺼내 보여주며 이르기를,
"시호에 관한 일이 미안하게 되었다는 뜻을 좌참찬에게 말했더니, 이와 같이 써 보냈는데, 그의 뜻은 이 일을 매우 중대하게 여기는 것이었다."
하였다. 태화가 다 읽고 나서 아뢰기를,
"지금 신의 의견대로 하지 않더라도 뒷날 신의 말을 잊지 마소서."
하니, 상이 그러겠다고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8자(字)는 아래에서 올리는 시호이고 2자는 상국(上國)에서 내려 주는 시호입니다. 저 나라의 경우는 우선 논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위와 아래에서 가하는 시호의 곡절은 이와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로써 뒷날을 대처하라는 뜻이겠다."
하였다. 이날 밤 상이 수찰(手札)을 직접 봉(封)하여 계자(啓字) 도장을 찍은 뒤 사관을 보내 송시열에게 은밀히 하문하였는데, 시열도 자기가 직접 밀봉하여 상에게 올렸다. 그래서 승지나 사관도 모두 볼 수 없었다.
10월 8일 을미
밤에 크게 천둥과 번개가 치고 비가 왔다.
10월 9일 병신
정원이, 재변이 중첩해서 나타나고 우박이 쏟아져 농사에 피해를 주고 별자리가 제 위치를 벗어나고 천둥 번개가 숨어야 할 달에 크게 천둥 번개가 치고 비가 왔다는 것을 가지고, 더욱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하여 하늘의 뜻에 응답할 것과 대신과 유신(儒臣)을 인접(引接)하여 재변을 해소시킬 방책을 강구하도록 청하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을 내렸다.
10월 10일 정유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심지원이 상차하여 자신들을 파직해서 하늘의 견책에 응답하도록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이것은 모두 내가 부덕하여 하늘의 마음에 합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들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더욱 덕에 힘을 기울여 나의 과실을 보완하여야 할 것이다."
10월 11일 무술
우승지 이정영(李正英)에게 명하여 전옥서를 적간하고 가벼운 죄수는 풀어 주도록 하였다.
이조 참의 조복양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이어 천둥 번개가 친 이변을 거론하면서 큰 뜻을 분발해 하늘의 위엄에 응답하도록 청하였다. 또 아뢰기를,
"금년 농사는 홍수와 풍재(風災)가 절기마다 피해를 끼쳐 대흉년이 되는 결과를 면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가을철과 겨울철의 시가(市價)가 봄이나 여름철에 기근을 당하던 때와 다름이 없으니, 앞으로 백성에 대한 일이 참으로 걱정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그중에서도 경기 지방의 백성들은 산릉(山陵)의 큰 역사에 바야흐로 모든 힘을 기울이고 있는 데다가 객사(客使)의 책응(責應)을 감당하고 있는 형편이니, 그들에게 부과된 과중한 역할이 다른 도의 배가 될 뿐만이 아닙니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근본이 되는 지역은 이치상 너그럽게 보살펴 주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들의 공부(貢賦)를 감면하여 마음을 위로해 주고 그들의 힘이 조금 펴질 수 있게 하는 일을 다른 도보다 앞서 행해야 합당하니, 경비(經費)는 또한 따질 것이 못 됩니다. 경기 지방의 춘추(春秋) 대동미(大同米) 및 세두(稅豆)를 모두 적당히 감해 주어 조금이나마 혜택을 받도록 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였다.
"진달한 말을 어찌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끝 부분에서 아뢴 일은 더욱 긴급하고 절실하니, 즉시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영돈녕 이경석이 천둥 번개가 친 이변을 가지고 상차하여 놀랍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덕을 닦고 반성하여 천명(天命)을 이어 가도록 청하고, 또 아뢰기를,
"비용을 절약하여 백성을 사랑하고 요역과 부세(賦稅)를 가볍게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입니다. 진정 이와 같이 행하기만 한다면 백성이 어찌 보전되지 않겠으며 나라가 어찌 다스려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백골 징포(白骨徵布)나 황구 충정(黃口充丁)은 말하기에도 참혹합니다. 이런 일을 금한 것이 오래되었는데도 관리들이 근실하게 봉행하지 않고 조정 역시 바로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행 대왕께서 매우 측은하게 여기시어 특별히 묘당으로 하여금 결단을 내려 처리하게 했는데, 미처 완결을 짓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계속 시행할 수 있는 방도는 못 된다 하더라도 흉년을 당한 때에 1년만 징수하는 일을 면제해 주어도 혜택이 역시 클 것입니다.
외방 제영(諸營)의 포목 비축량이 충족되지 못하겠지만, 내각사(內各司)에 비축된 것을 덜어 보충해 주면 모두 잘 될 것입니다. 비국에 명하여 방법을 강구해서 속히 시행하게 한다면, 선조(先朝)에 대해서도 신의를 잃는 일이 없게 될 것이고 오늘날의 입장에서도 뜻을 잘 계승하는 아름다운 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해서(海西) 지방의 경우 지치도록 수응(酬應)하는 것이 관서(關西) 지방과 대체로 동일합니다. 조정에서도 전부터 이것을 유념하여 5두(斗)의 봉납을 때에 따라 헤아려 줄여 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흉년에 또 참역(站役)까지 하게 되었으니, 돌보아 구휼해 주는 행동이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미 행했던 정사에 의거하여 1, 2두를 줄여 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계하고 깨우쳐 준 말은 어찌 감히 가슴에 새기지 않겠는가. 나머지 일들도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해 처리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차자를 비국에 내리니, 비국이 회계하기를,
"죽은 군정(軍丁)과 아약(兒弱)에게도 포목을 징수하는 폐단을 대행 대왕께서 무척이나 변통시키려고 하시어 이미 각도로 하여금 조사해 보고토록 하셨는데, 그 외방 문서들이 이제 비로소 도착하였습니다. 신들이 조사가 끝나는 대로 계품하여 처리하겠습니다. 해서 지역에서 5두의 쌀을 거두는 것에 대해 대신이 이처럼 차자로 진달했는데, 1, 2두 정도 감한다 해도 모자라게 되지는 않을 것이니, 해조로 하여금 차자의 내용에 의거해서 참작해 줄여 받도록 하소서."
하였다. 호조가 계청하기를,
"재해가 아주 심한 고을은 1결(結)당 2두씩 감해 주고, 그 다음으로 재해를 입은 곳은 각각 1두씩 감해 줌으로써 조정에서 관심을 갖고 구휼하는 뜻을 보이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13일 경자
부제학 유계 등이 천둥친 변고 때문에 상차하면서 《주역》 진괘(震卦)의 상사(象辭)를 인용하여 공구 수성해야 하는 도리를 진달하고, 산릉(山陵)에 종행(從幸)하겠다고 한 명을 정지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차자의 내용이 모두 경계하고 깨닫게 해주는 약석(藥石)이니, 어찌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지금 만약 배종(陪從)하지 않는다면, 종신토록 애통한 심정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는가. 배종한 뒤 몸이 더 상하는 것쯤은 말할 겨를도 없다."
10월 14일 신축
약방이, 상의 원기가 아직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으니 망제(望祭)를 직접 거행하지 말도록 청하였으나,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앞서 헌부가, 제궁가(諸宮家)와 각 아문의 시장(柴場)과 어전(漁箭) 가운데 입안(立案)되었다고도 하고 절수(折受)받았다고도 하면서 규정 외의 외람되고 난잡한 행위를 자행하는 곳이 많다는 이유로 일체 혁파하도록 계청하여 윤허를 받았었는데, 각도와 각읍이 법에 의거하여 조사해 아뢰지 않은 탓으로 아직도 넓은 지역을 점유하면서 제멋대로 침해하는 폐단이 있었다. 이 때에 이르러 인평위(寅平尉)의 궁가가 교하(交河) 지역에 시장(柴場)을 점유하고는 절수받았다고 일컬으면서 말할 수 없이 농락을 하는가 하면 사부(士夫)의 분산(墳山)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두 나무를 베어 가져갔다. 헌부가 계청하기를,
"그 시장은 혁파하고, 현감 안정욱(安廷煜)은 덮어둔 채 보고하지 않아 외람되고 난잡한 폐단을 초래했으니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유사로 하여금 분명히 조사해 처리토록 하였다.
간원과 헌부가 모두 천둥 번개의 이변을 가지고 상차하여 경계할 것을 진달하고, 산릉(山陵)에 종행하겠다고 한 명을 중지할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차자의 내용은 내가 가상하게 여긴다. 수가(隨駕)하는 일을 정지할 수 없다는 뜻은 옥당에 내린 비답에서 이미 다 말하였다."
공조 참의 김응조(金應祖)가 상소하여 6개 조목을 진달하였다. 첫째 성상의 효성을 극진히 할 것, 둘째 성상의 학문을 부지런히 힘쓸 것, 셋째 조정을 바르게 할 것, 넷째 교화를 밝힐 것, 다섯째 하늘의 재변에 근실하게 대처할 것, 여섯째 백성의 고통을 보살펴 줄 것이었는데, 상이 너그럽게 비답을 내렸다.
10월 15일 임인
상이 여차에 나아가 영상 정태화, 좌상 심지원, 원평 부원군 원두표, 판의금 이시방, 좌참찬 송시열, 이조 판서 송준길을 인견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인산(因山)021) 이 이미 박두하여 며칠 남지 않았는데 옥후(玉候)가 완전히 회복될지 정말 알 수 없으니, 산릉에 행차하시는 일은 결단코 할 수 없습니다."
하고, 지원·두표·시열·준길이 모두 아뢰기를,
"병환을 무릅쓰고 억지로 행행(行幸)하실 경우 그에 따른 필연적인 근심이 있게 될까 두렵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준길이 아뢰기를,
"상께서 현재 덕을 잃은 것이 없는데 하늘의 재변이 거듭 나타나고 있으니, 이는 필시 하늘의 마음이 전하를 경동(警動)시켜 완전하게 이루어 주려고 하는 것일 겁니다. 일찍이 주자(朱子)의 글을 보건대 ‘겨울에 천둥이 치면 사세(嗣歲)에 근심이 있게 된다.’고 하였는데, 사세란 곧 다음해를 의미합니다. 이 의리에 대해서는 선조(先朝) 때에도 일찍이 강론하였었습니다."
하고, 시열이 아뢰기를,
"국가가 불행히도 흉년을 당해 현재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는데, 근래 국가의 재정이 넉넉하지 못해 구황(救荒)할 좋은 방책이 없으니,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로서는 아득하기만 하여 어떻게 계책을 세워야 할지 모르겠다. 경들이 심사 숙고해서 직접 내 앞에서 진달하거나 차자로 진달토록 하되 마음속의 생각을 모두 말하도록 하라."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선왕께서 정치를 하신 10년 동안 진구하는 정책이라면 행하지 않은 것이 없으셨으므로 백성들이 마음속으로 감격하여 영원히 잊지 않고 있습니다. 상께서는 모름지기 선왕께서 백성을 어루만지고 보살펴 주었던 마음을 가지셔야 할 것입니다."
하고, 준길이 또 아뢰기를,
"조복양(趙復陽)이 소장에서 진달드린 입지(立志)에 관한 말은 더욱 두려운 자세로 유념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조세(租稅)를 감면하도록 청한 것 역시 절실한 일이니, 상께서 참작하여 처리하셔야 마땅합니다."
하고, 시열이 아뢰기를,
"근래 묘당에서 강구하는 것이나 상께서 진념하시는 것치고 백성을 구휼하려는 정책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공(御供)을 감축하는 것은 아래에서 감히 곧바로 요청할 수 없는 것이니, 오직 상께서 결단해 주셔야 합니다. 신이 듣건대, 함경 감사의 장계 내용 중에 ‘포목을 바치는 일과 황대구어(黃大口魚) 등을 진상하는 것이 민폐를 가장 크게 끼치는 요인이다.’라는 대목이 있다 하는데, 적당히 줄여 주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진상에도 제향(祭享)과 공상(供上)의 구별이 있으니, 구분해서 아뢰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제향에 쓰는 것이야 줄일 수 없다 하더라도, 공상하는 것은 북도(北道)만이 아니라 다른 도도 적당히 헤아려 변통시켜 주어야 할 것입니다. 해사에 분부하여 품달하여 변통하도록 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정경세(鄭經世)가 인조(仁祖) 반정(反正) 초기에 어공(御供)을 견감하는 것이 너무 지나치다고 말씀드리자, 인조께서 이르시기를 ‘아무리 많이 견감하더라도 내가 여염에 있을 때보다는 그래도 낫지 않겠는가.’ 하셨다 하니, 인조의 성스러운 덕이 지극했다 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인조와 같은 마음가짐을 가지신다면 국가에 그만한 다행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태화가 아뢰기를,
"사옹원에는 꿩과 생선을 일정표에 따라 봉진(封進)하는 숫자가 정해져 있는데, 그중에서 숭어[秀魚]는 척수(尺數)까지 정해져 있습니다. 당초 선혜청에서 한 마리당 쌀 4두(斗)로 값을 정했는데, 오늘날에 와서는 물고기 구하기도 지극히 어려운 데다가 척수에 차는 것은 전혀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각읍에 분배해서 책정하여 민폐가 많게 되었습니다. 척수에 구애받지 말고 근수(斤數)만 정해서 봉진토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고, 이르기를,
"대비전에 올리는 것은 다시 품달한 뒤에 조처하도록 하라."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제향(祭享)이야말로 지극히 중한 것인데, 송조(宋朝)에서 남도(南渡)한 후에 묘제(廟制)에 예(禮)를 구비하지 못한 것이 많았으나, 주자도 그것을 그르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고, 준길이 아뢰기를,
"흉년에는 하생(下牲)으로 제사드리는 것이 옛적의 도(道)였습니다. 사리에 합당하기만 하면 군도(君道)도 옳게 되는 것입니다."
하고, 시열이 아뢰기를,
"제향에 쓰는 것부터 먼저 반드시 줄여야 합니다. 그런 뒤에야 나머지 절목들을 차례로 변통할 때에 자연히 대쪽을 쪼개듯 하는 형세가 있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선왕께서 말년에 군병들의 원한서린 고통을 애달프게 생각하시어 아약(兒弱)과 도고(逃故)를 대상으로 포목 거두는 일을 모두 면제시키려 하시다가 일을 미처 완결짓지 못하셨는데, 인심의 향배(向背)는 이 일에서 결판난다고 할 것입니다."
하고, 태화가 아뢰기를,
"감해 주어야 할 숫자는 2만 필(匹)이라고 합니다."
하고, 준길이 아뢰기를,
"각 아문에 비축된 것도 부족한 상태이니, 그것을 다른 데로 옮겨 숫자를 채워 주기는 어렵습니다. 내수사는 옛날 선왕들의 대공 지정한 법이 아니기 때문에 예전에 유신(儒臣)들이 모두 혁파하도록 청했습니다만, 조종(祖宗)께서 설치한 제도를 졸지에 변화시키기는 형세상 어려우니, 상께서 짐작하여 내수사에서 덜어 내시어 탕감한 숫자만큼 채워 주신다면, 민심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는 일대 조치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괜찮다. 그러나 모름지기 1년에 얼마를 거둬들이며 얼마를 지출하는지 안 뒤에야 변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신이 부모의 묘소를 옮기려 하는데, 앞으로 10월 중에 옛 묘소를 헐려고 합니다. 졸곡(卒哭) 뒤에 휴가를 청할까 하여 감히 이렇게 미리 진달드립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선 자제들에게 일을 맡기고 경은 기일에 맞춰 내려가도록 하라. 그래도 안 될 것이 없을 것이다. 나는 경들과 함께 국사(國事)를 행하고 싶다. 그런데 경은 나아오는 것은 어렵게 여기고 물러가는 것은 쉽게 여기니, 선조(先朝)에서 물러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하자, 준길이 아뢰기를,
"신처럼 형편없는 자가 막중한 은혜를 받고 있으니, 지금 내려간다 해도 어찌 오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마침내 파하고 나왔다.
10월 17일 갑진
헌부가 인평위(寅平尉)의 시장(柴場)을 혁파할 일로 연계(連啓)하니, 상이 호조에 명하여 시장의 문안(文案)을 조사해 내게 하였는데, 호조가 아뢰기를,
"금년 4월에 헌부가, 제도(諸道)로 하여금 제궁가(諸宮家)와 각 아문의 어전(漁箭)·시초장(柴草場)을 조사해 내서 계문하여 혁파시키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각도의 조사해 낸 계문이 그 때는 도착하지 않았었습니다. 이번에 문제가 된 숙휘 공주(淑徽公主)의 교하(交河) 지역에 있는 시장은 갑오년022) 5월에 내수사에 정문(呈文)한 결과 절수받도록 계하되었고, 이조의 반첩(反貼)023) 관문(關文)이 6월에 본조에 도착했기에 본조에서 본도에 이문(移文)한 것이었습니다."
하였다. 이에 장령 윤비경(尹飛卿), 지평 이무(李堥), 대사헌 채유후(蔡𥙿後)가 모두 사실대로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정언 윤지미(尹趾美) 역시 채유후와는 상피해야 될 혐의가 있는 만큼 감히 처치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인피하니, 상이 모두에게 사피(辭避)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간원이 처치하여 모두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따랐다.
10월 18일 을사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10월 19일 병오
지평 윤휴가 누차 소장을 진달하여 체직을 청하니, 이조에 계하하였다. 이조가, 한결같이 사직하지 말라고만 할 수는 없다고 복계(覆啓)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20일 정미
고부사(告訃使) 정유성(鄭維城)이 복명(復命)하고 청대(請對)하니, 상이 인견하였다. 유성이 아뢰기를,
"신이 압록강을 건넌 뒤에야 상의 건강이 좋지 못하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지금 뵈니 상의 안색이 전보다 휠씬 못합니다. 발인(發引)할 때 배종(陪從)하시면 결단코 안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병은 이미 차도가 있다."
하고, 저쪽024) 의 내부 사정을 하문하였다. 유성이 아뢰기를,
"오늘 올린 《명계유문(明季遺聞)》은 곧 남경(南京) 사람의 저술인데 가까스로 사 가지고 올 수 있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이자성(李自成) 때의 일을 기록한 것인가?"
하자, 유성이 아뢰기를,
"홍광(弘光)025) 융무(隆武)026) 때의 역사 기록입니다. 당시 임금이 황음(荒淫) 무도(無道)하여 토목 공사를 크게 일으키자 군자는 물러가고 소인들이 진출하였는데, 이것이 나라가 망한 원인입니다. 지금 이 역사 기록을 보건대, 숭정(崇禎)027) 때에는 덕을 잃은 일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천계(天啓)028) 때에 덕을 잃었기 때문에 망한 것인가?"
하니, 유성이 그렇다고 아뢰었다. 또 아뢰기를,
"신이 국경을 넘어 우리 나라로 들어와서 양서(兩西) 지역을 보니 더욱 심하게 흉년이 들었습니다. 큰물이 진 뒤끝에 다시 우박의 피해까지 겹쳐 백성들이 기아 상태에 놓여 있으니, 돌보아 보살펴 주는 조치가 없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미곡 징수를 줄여 주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양서 지방에 요역을 견감해 주는 일을 잠시라도 늦출 수 없으니, 속히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라."
하였다. 유성이 아뢰기를,
"저네들의 통보(通報)를 얻어 보건대, 정령(政令)을 발하여 시행하는 것 모두가 백성을 보살피는 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조금도 명나라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갖고 있지 않으니, 인심의 향배란 것이 이처럼 두려운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저네들이 해자(海子)029) 에 놀러 나가 여인들을 가까이하고 즐긴다는 것이 사실인가?"
하자, 유성이 아뢰기를,
"이렇게 이야기가 전파되기는 했습니다만, 그들이 날마다 해자에서 노닌다고들 하나 통보를 보면 하루도 일을 하지 않는 때가 없습니다. 신들이 처음 들어갈 때 북경 시내가 흉흉하기에 그 이유를 물으니, 정지룡(鄭芝龍)의 아들이 주사(舟師) 30만 명을 이끌고 강회(江淮)030) 를 공략하면서 오고 있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뒤 승첩을 거두고 나서 조정 신하들이 통일을 완수한 것을 축하하려 하자 허락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듣건대 청나라 사람들이 이번에 남쪽 전역(戰役)을 치를 적에 몽고(蒙古) 군사 3천 명만 남겨 두었을 뿐 북경에는 다른 군대가 다시 없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하니, 유성이 아뢰기를,
"과연 그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만, 북경 백성의 숫자가 매우 많은데 그들 모두가 군사인 셈입니다. 그런데 몽고가 폐해를 끼쳐 길가의 벼 곡식을 손상시키자, 저네들이 은 30만 냥을 내어 피해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하니, 그들이 백성을 보살피는 것이 이 정도입니다. 영력 황제(永曆皇帝)031) 는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통보(通報)에 ‘국성(國姓)이 난군(亂軍) 속에서 죽었다.’ 하였는데, 국성이라고 한 것이 아마도 주씨(朱氏)로서 왕이 된 자를 가리킨 것인 듯합니다. 지룡의 아들은 그의 아비가 청나라에 포로가 되었기 때문에 성명을 곽신(郭信)이라고 고쳤는데, 그의 군대가 완전히 함몰되자 탈출해 달아났으니 생사를 모른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네들 경내의 농사는 어떠하던가?"
하니, 유성이 아뢰기를,
"기막힌 풍년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똑같은 하늘 아래에서 농사를 짓는데, 우리 나라만 유독 수재(水災)를 입다니 무슨 까닭인가?"
하였다. 유성이 산릉에 종행(從幸)하는 것을 중지하도록 거듭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10월 21일 무신
김만기(金萬基)를 지평으로, 윤원거(尹元擧)를 사업(司業)으로 삼았다.
대신 및 원임 대신이 빈청에 나아가 산릉에 종행하는 일을 정지하도록 청하면서 재계(再啓)를 올리고, 양사(兩司)도 합계(合啓)하여 정지하기를 청했으나,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10월 22일 기유
대신이 2품 이상의 관원을 이끌고 하루에 세 차례나 아뢰고, 양사도 세 차례나 아뢰고, 홍문관이 또 상차하여 종행(從幸)하지 말도록 잇따라 청하였으나, 상이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틀 뒤에 대신이 두 자전(慈殿)에 계청하여 안에서 정지하도록 권하니, 상이 비로소 따랐다.
10월 24일 신해
김만기(金萬基)를 부수찬으로, 목내선(睦來善)을 지평으로 삼았다.
밤에 천둥 번개가 쳤다.
10월 25일 임자
헌부가, 국장(國葬) 때 종신(從臣)들의 취반군(炊飯軍)을 각읍에 나누어 배정하도록 한 것을 취소하여 경기 지방의 백성들에게 조금이라도 폐단을 덜어 주도록 청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26일 계축
짙은 안개가 끼었다. 사시(巳時)가 되자 천둥이 울리고 우박이 쏟아졌다.
장령 허목(許穆)이 부름을 받고 고양(高陽)까지 왔다가 병으로 정장(呈狀)했는데, 회유(回諭)가 오래도록 이르지 않자 이미 체직되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 뒤 스스로 사마(私馬)를 타고 도성 아래에 이르러서야 직명(職名)이 아직 그대로 있다는 것을 비로소 듣고는 마침내 인피하기를,
"신과 같은 사람의 진퇴(進退) 정도야 미미하기 짝이 없다 하더라도, 당초 비답을 내리신 때로부터 거의 반개월이 지나도록 전유(傳諭)하는 성지(聖旨)를 끝내 받아 보지 못했습니다. 임금의 명을 태만히 하고 조정을 업신여길 조짐이 신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신을 체직하소서."
하였다. 헌부가 처치하여 출사시키도록 청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27일 갑인
진시(辰時)에 계빈전(啓殯奠)032) 을 행하고, 사시(巳時)에 찬궁(欑宮)033) 을 열고, 신시(申時)에 조전(祖奠)을 행하였다. 상이 아침부터 나와 곡위(哭位)에 나아갔는데 종일토록 곡성이 끊이지 않았다. 초저녁에 정원이 구전(口傳)으로 아뢰기를,
"상께서 큰 병환을 앓으신 뒤로 원기가 아직 회복되지 않았는데, 새벽부터 곡을 하시어 종일토록 그치지 않으시니, 몸이 더 상할 근심이 있게 될 것은 형세상 필연적인 일입니다. 지극한 정을 억지로라도 참으시고 잠시 여차에 돌아가소서."
하고, 약방 모두 네 차례나 아뢰며 진달했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10월 28일 을묘
대행 대왕의 재궁(梓宮)을 발인(發靷)하였다. 자시(子時)에 견전례(遣奠禮)를 행하였는데, 인시(寅時)에 내전에서 약방에 죽력(竹瀝)과 생강즙을 구해 들이도록 하였다. 이 때 좌상 심지원이 총호사로서 인화문(仁和門)에 있었는데, 중사(中使)를 통해 자전이 너무 슬퍼한 나머지 기절했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아뢰기를,
"발인할 시각이 이미 박두했는데, 삼가 듣건대 자전께서 편찮으시다 하니, 잠시 시각을 물리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얼마 뒤에 지원이 또 아뢰기를,
"자전께서 이와 같으니, 교외에 거동하시는 일은 결단코 해서는 안 됩니다. 뭇 의논도 모두 전하께서 궐문 밖에서 배사(拜辭)함이 마땅하다고들 합니다. 모름지기 빨리 하교하셔야만 일을 분부하고 거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자전의 기후(氣候)가 조금 차도가 있는 듯하니, 발인하는 시각은 그대로 하라."
하였다. 파루(罷漏) 후에 재궁(梓宮)을 받들어 대여(大轝)에 올리고 이어 출발하였다. 상이 소여(小轝)를 타고 인화문(仁和門)으로 나왔는데 곡성이 끊이지 않았다. 인정문(仁政門) 밖에 이르러 상이 여(轝)에서 내려 연(輦)을 탔는데, 백관은 모두 걸어서 수행하였다. 흥인문(興仁門)을 나와 동관 왕묘(東關王廟) 뒤쪽 노제(路祭) 지내는 곳에 이르러 대여를 악차(幄次)에 봉안하였는데, 상도 연에서 내려 막차(幕次)로 들어갔다. 의정부와 충훈부가 노제를 끝마치자 대여가 출발하였다. 상이 막차에서 나와 봉사위(奉辭位)로 나아가 동쪽을 향해 네 번 절하고 통곡하며 가슴을 쳤다. 대여가 멀어지자 상이 환궁하였다.
10월 29일 병진
영릉(寧陵)에 장사지내었다. 진시(辰時)에 하현궁(下玄宮)하였는데, 상이 희정당(熙政堂) 앞뜰로 나아가 망곡례(望哭禮)를 행하였다. 오시(午時)에 상이 연(輦)을 타고 흥인문을 나와 관왕묘에 이른 뒤 막차로 들어가 반우(返虞)를 기다렸다. 얼마 뒤에 우주(虞主)034) 가 도착하니, 상이 막차에서 나와 자리로 나아가 영접하고 곡하면서 절하였다. 우주가 통과한 뒤에 상이 연을 타고 수행하여 홍화문(弘化門)을 통해 들어왔다. 우주를 문정전(文政殿)에 봉안하고, 상이 초우제(初虞祭)를 직접 거행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예문(禮文)에 기재되어 있지는 않지만, 지금은 막 반우(返虞)하여 보통 때와 다르니, 혼전(魂殿)에 문안드리고 싶은데, 어떻겠는가?"
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이미 예문에도 없는데다가 또 바로 우제를 몸소 거행하셔야 하니, 신들로서는 감히 억측으로 단정을 내려 답변드리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예(禮)란 것도 본디 마음을 바탕으로 해서 생겨난 것이다. 나는 안에서 행했으면 할 뿐이다."
하니, 정원이 또 아뢰기를,
"예문에 기재되어 있지 않은 일은 대신(大臣)과 유신(儒臣)에게 물어 행함이 마땅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오늘은 황급하니 미처 물어 의논해 행하지 못하겠다. 이 뒤로 제사를 거행할 때에는 조곡(朝哭)하는 규례에 의거하여 문안드리고 싶으니, 대신과 유신에게 물어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튿날 예조가 대신과 유신에게 의논하였는데, 영돈녕 이경석, 좌상 심지원, 영중추 원두표, 우상 정유성, 이조 판서 송준길은 모두 의논드리기를,
"옛적의 예제(禮制)를 상고할 수는 없으나, 하고 싶다고 하여 없는 제도를 만들어 시행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고, 영상 정태화는 의논드리기를,
"종묘에 친제(親祭)를 드릴 때 먼저 전알(展謁)하는 예를 행하는데, 이번에 재전(齋殿)에 직접 나아가시는 날 먼저 전알하고 곡림(哭臨)한다 해도 무방할 듯싶습니다."
하고, 좌참찬 송시열은 의논드리기를,
"《오례의》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장례를 지낸 후에 조석으로 곡하는 것을 꼭 중지해야 한다고 한 기록이 보이지 않습니다. 예를 행하는 날이 아니라 하더라도 소상(小祥) 전에는 장례 이전에 했던 대로 행하는 것이 본래 마땅한데, 다만 문안이라고 이름하지 않으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살아 계실 때처럼 섬겨야 한다고는 하지만, 일단 예문(禮文)이 없는데다가, 또 죽은 이로 대우한 마당에 생환하기를 바라는 듯한 혐의도 있을 수 있으니, 예관으로 하여금 《오례의》를 다시 상고하여 내용과 형식을 극진히 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영상과 좌참찬의 의논대로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10월 30일 정사
재우제(再虞祭)를 친행(親行)하였다. 상이 헌작(獻爵)을 마치고 실외 판위(板位)에 나가 섰는데, 기운이 고르지 못해 재전(齋殿)으로 물러갔다. 승지가 아헌관(亞獻官) 이하로 하여금 그대로 예를 행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이 때 날씨가 매우 추웠는데, 상이 밤 기운을 무릅쓰고 잇따라 제사 일을 행하다가 감기에 걸렸다. 약방 도제조 정태화가 상의 건강을 해칠까 두려워한 나머지, 전명 중관(傳命中官)을 통하여 구전(口傳)으로 대왕 대비와 왕대비 양전(兩殿)에 아뢰기를,
"더욱 유시하여 중지하도록 만류하시고 지금 이후의 제례(祭禮)는 모두 섭행(攝行)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중관(中官)을 시켜 태화에게 유시하기를,
"자전에게는 원래 일을 아뢰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아들을 상대로 쟁집(爭執)해야 할 것을 어찌하여 매번 번거롭게 자전에게 품달하는가. 지금 이후로는 다시 이렇게 하지 말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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