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무오
정태제(鄭泰齊)를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삼았다. 태제는 고상(故相) 강석기(姜碩期)의 사위였는데, 일찍 등제(登第)하여 이조 낭관직을 거쳐 승지가 되었다. 그러다가 병술년 강옥(姜獄)이 일어나면서 처가의 죄에 연루되어 14년 동안 폐치되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비로소 동래 부사에 제수되었다. 그런데 처의 성격이 사나워 스스로 동래 옆 고을로 갔는데 태제가 제대로 제어하지도 못한 데다가 가끔 자신도 법을 어겨가면서 왕래하였으므로 이에 죄를 얻어 편배(編配)되고 마침내 다시는 서용(敍用)되지 못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발인할 때 외방에 있는 조관(朝官) 중에서 올라온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승지는 수소문하여 아뢰라."
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전임 조관들은 거의 모두 올라왔고 사자(士子)들도 온 자가 매우 많으니, 대행 대왕의 지극한 인애와 두터운 은택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는 점을 여기에서 더욱 알 수 있습니다. 전 부제학 윤문거(尹文擧)도 올라온 사람 중에 들어 있는데, 이 사람은 선조(先朝) 때부터 일찍이 너그러운 대우를 받으며 여러 차례에 걸쳐 소명(召命)을 받았어도 병 때문에 오지 못했던 자입니다. 지금 병든 몸을 이끌고 상경하여 여관에 머물고 있는데, 이처럼 새로 교화를 펴는 날을 당하여서는 어진 선비를 예우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급히 해야 될 일이니, 위로하고 타이르며 머물러 있도록 권면해야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권시를 대우하던 예로 대우하도록 명하고, 사관(史官)을 보내 졸곡(卒哭) 후에 만나보고 싶다는 뜻으로 유시하게 하였다. 사관이 문거의 뜻으로 회계하기를,
"신이 풍병(風病)에 걸려 몸 반쪽을 쓰지 못하고 먼 시골에 엎드려 있으면서 선왕의 은명(恩命)을 여러 차례 어겼습니다. 그러나 이제 돌아가신 날을 당해 향리에서 감히 편안히 있을 수 없기에 죽음을 무릅쓰고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 궐문 밖에 와서 우러러보며 곡하였습니다. 그런데 삼가 성지를 받들게 되었고, 사관이 집에까지 와 만나보기를 원한다는 성상의 뜻을 유시하였습니다. 하지만 두 다리로 땅을 밟아 보지 못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으니, 위명(威命)을 우러러 받들고 싶어도 그렇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제는 곧장 돌아가 땅속에나 묻혀야 할 몸이니, 잘못된 은혜를 거두시어 나름대로의 분수에 편안함을 얻게 해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듣건대 옛집이 성 안에 있다 하니, 병세가 그와 같다면 서로 만나 볼 수는 없다 하더라도 옛집에 머물러 있었으면 한다. 그러면 그대도 마음에 의지할 것이 있게 되고 나의 마음도 위로될 것이니, 또한 아름답지 않겠는가. 모쪼록 나의 지극한 뜻을 체득하도록 하라."
하고, 다시 사람을 보내어 이 뜻을 전유(傳諭)하자, 문거가 대답하기를,
"도성에 체류하면서 성상을 우러러 뵙는 것이야말로 미천한 신이 바칠 수 있는 정성입니다. 다만 이 몹쓸 병에 걸려 거의 죽게 된 몸이라서 새로 교화를 펴시는 날에 스스로 공을 바칠 길이 없는데 그저 특별한 은총만 받고 있으니 대답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이조 판서 송준길이 청대(請對)하고 입시해 아뢰기를,
"산릉의 일이 다 끝나 신민의 심정이 망극하기만 한데 성상의 옥체에 병환이 더치는 근심이 있을까 두려워 천안을 뵙고 싶었고, 또 일찍이 마음에 품은 생각이 있으면 들어와 고하라는 분부가 계셨기에 감히 청대한 것입니다."
하고, 이어 곡읍(哭泣)을 절제할 것과 내일의 우제(虞祭)는 친행치 말도록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 삭제(朔祭)에도 정을 억누르고 참석하지 않았다. 어제와 오늘 조리를 했으니, 내일 제사를 거행한 뒤에 또 이틀 조리를 하고 초4일 우제에 참석한다면 되지 않겠는가."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발인할 때 외방에서 올라와 참석한 사대부가 전에 비해 상당히 많습니다. 선조(先朝) 때 여러 번 불러도 오지 않았던 자들 또한 모두 올라왔기에 신이 그들을 머무르도록 권유하시라고 진달드리려 했었는데, 성상께서 먼저 하교하셨으므로 신은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윤문거는 고 대사간 윤황(尹煌)의 아들이고 선현(先賢) 성혼(成渾)의 외손입니다. 병자년에 윤황이 척화(斥和)를 주장하였는데, 문거 형제가 사환(仕宦)을 즐거워하지 않는 것은 대체로 그 아비의 뜻을 이어받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문거는 평소 공보(公輔)의 기대를 받고 있었으므로 선조 때에도 누차 소명(召命)을 내렸는데, 지금 또 사관을 보내 머무르도록 권유하셨으니, 참으로 특별한 은혜라 하겠습니다. 그에게 숙환(宿患)이 있으니 직무를 수행하도록 독려할 수는 없겠지만 도성에 머물러 거주하게 한다면 국사에 도움되는 점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윤선거(尹宣擧)는 일찍 올라왔다가 감히 작명(爵命)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하며 기전(畿甸)에 가 머무르고 있는데, 갑자기 하향(下鄕)이라도 해버린다면 새로 정사를 펴는 때에 어찌 하나의 아쉬운 점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밖에 또 어떤 사람들이 있는가?"
하자, 준길이 아뢰기를,
"윤원거(尹元擧)는 곧 문거의 종형인데 그 사람의 지조와 행실이 역시 취할 만한 점이 많습니다. 이상(李翔)이야말로 선사(善士)라 할 것이고, 신석번(申碩蕃) 또한 쓸 만한 인물입니다. 이유태(李惟泰)가 현재 성밖에 거주하고 있는데, 그 또한 힘써 타일러 들어오도록 해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송시열(宋時烈)의 형세는 선조 때부터 이미 신과는 차이가 나 같지 않습니다. 신은 일생 동안 몸이 쇠약한데다 병이 많고 뜻마저 비천하니 조정에 있든 없든 원래 대단한 관계가 없습니다만, 시열의 경우는 스스로 기대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선왕께서 일찍이 어찰(御札)로 부르시자 시열이 이 때문에 감격하여 마침내 곧장 부름에 응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뜻을 굳게 지켜 심지어는 공사(公事) 간의 문자(文字)에 있어서도 쓰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있었는데, 선왕께서도 일찍이 이를 허락하셨습니다. 【시열이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은 것을 가리키는데, 조정에서도 그의 뜻을 본받아 교지에도 그 연호를 쓰지 않았다.】 요즘 시열의 뜻을 살피건대 오래 머물러 있지 않을 계책을 하는 것이 상당히 눈에 띕니다. 즉위하신 초기에 곧바로 그가 물러가도록 허락한다면 사방에서 보고 듣고는 어찌 실망하지 않겠습니까. 뜻있는 선비들도 필시 의욕을 상실할 것입니다.
선왕께서는 일찍이 하교하시기를 ‘만약 10만 정병(精兵)이 있다면 천하에 대의를 펼 수 있다. 예로부터 임금이 온갖 어려움을 겪은 뒤에야 중흥하는 업적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내가 지난날 연경(燕京)과 심양(瀋陽)에서 고통을 당한 것도 어쩌면 하늘의 뜻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셨습니다. 대체로 우리 나라와 같은 형세를 가지고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임금이 참으로 수신 제가하고 현인과 능력 있는 자를 제대로 임용하여 자강책(自强策)을 극진히 강구하면서 힘을 비축해 때를 기다린다면, 하늘의 뜻이 혹 화를 내린 것을 후회하지 않을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발인할 때 올라온 외방의 사대부들을 초계(抄啓)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성상의 의도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직책을 제수하고 싶어서이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지당하십니다. 유생의 경우는 먼 길을 되돌아갈 때 식량을 대기가 참으로 곤란할 텐데, 연로(沿路)로 하여금 호송하게 한다면 실로 위로하고 기쁘게 하는 거조가 될 것입니다. 올해 삼남(三南) 지방에 흉년이 들었는데, 이시방(李時昉)의 말을 들으니 ‘전남도는 대동미 13두(斗)로도 여유가 있으니 두(斗)의 수를 감해 주어도 될 것이다. 충청도는 당연히 헤아려 감해 주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범연히 넘기지 말고 속히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준길이 또 아뢰기를,
"신이 이번에 산릉에 가서 인혼제(引魂祭)와 이환안제(移還安祭)035) 등을 보았는데, 너무도 근거가 없었습니다. 대개 같은 언덕에 두 능을 쓸 경우 선릉(先陵)에 고할 때 이런 제사를 드리는데, 원래 《오례의》에 기재되어 있는 것도 아닐뿐더러 인혼 등의 말 속에는 불가(佛家)나 도가(道家)의 색채가 있는 듯하니, 잘못된 규례는 혁파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겠다고 하였다.
11월 2일 기미
상이 삼우제(三虞祭)를 친행하였다.
각도가 흉년이 들어 황폐해졌기 때문에 군병의 궐액(闕額)을 충정(充定)하는 일을 정지하였다. 조가(朝家)에는 일찍이 5년마다 한 차례씩 궐액을 충정하는 정식(定式)이 있었는데, 지난해에 흉년이 들어 정지하였고 이 때에 이르러 또 정지한 것이다.
11월 3일 경신
동지사(冬至使) 채유후(蔡𥙿後), 부사 정지호(鄭之虎), 서장관 권상구(權尙矩)가 청나라로 갔다.
오정위를 승지로, 권시를 병조 참지로 삼았다.
11월 4일 신유
상이 사우제(四虞祭)를 친행하였다.
이조가 발인할 때 올라온 전직 조관(朝官)들을 서계(書啓)하니, 상이 좌참찬 송시열과 이조 판서 송준길에게 문의하여 학행이 뚜렷이 드러난 자를 뽑아 아뢰라고 명하였다.
부호군(副護軍) 윤문거(尹文擧)가 상소하여 돌아갈 것을 청하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을 내리며 허락하지 않았다.
11월 6일 계해
상이 오우제(五虞祭)를 친행하였다.
좌참찬 송시열이 상소하여 전직 조관들에 대하여 그에게 문의하여 아뢰도록 한 명을 사양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몇 개월 동안 병을 앓아 정신이 어지럽고 흐릿하니, 그들의 얼굴을 본다 해도 누가 누구인지 분간도 못할 것인데, 더구나 그들의 현부(賢否)를 가려내는 일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전관으로 있을 때 이런 일로 인하여 공의(公議)에 죄를 얻어 선대왕의 일월과 같은 밝음을 손상시켰으니 그 죄는 죽어도 갚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떻게 감히 과거를 뉘우치지 않고 앞으로의 일을 경계하지 않은 채 호종(怙終)036) 의 율(律)을 다시 범하겠습니까. 격외(格外)의 은명(恩命)을 감히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겠을 뿐더러 전후에 걸쳐 지은 죄 또한 죽어도 남음이 있으니, 신을 체직하고 신을 치죄하시어 조정의 체모를 중히 하소서."
하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으면서, 조금 차도가 있기를 기다려 들어오라고 유시하였다.
11월 7일 갑자
조형(趙珩)을 예조 참판으로, 이만영(李晩榮)을 집의로, 조수익(趙壽益)을 대사헌으로, 이수인(李壽仁)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이시술(李時術)을 발탁하여 선천 부사(宣川府使)로 삼았는데, 그 뒤에 비국이, 문관으로 잇따라 차임(差任)하는 것은 안 된다고 아뢰어 체직하였다.
이조가 아뢰기를,
"전 교리 이수인(李壽仁)은 담박하고 겸손한 자세로 지조를 지켜 세상의 칭송을 받고 있습니다. 사업(司業) 윤선거(尹宣擧)·윤원거(尹元擧)는 모두 실직(實職)이 있습니다. 전 좌랑 신석번(申碩蕃)·최휘지(崔徽之)는 선조(先朝) 때 곧장 출륙(出六)시켰습니다. 전 자의(諮議) 이상(李翔)·송기후(宋基厚)는 일찍이 강직(講職)에 선발되어 제수되었습니다. 전 세마(洗馬) 김만영(金萬榮)도 일찍이 자의(諮議)에 의망(擬望)되었는데, 신석번과 이상이 더욱 두드러집니다. 이 밖에도 재주나 인망으로 볼 때 일컬을 만한 사람이 없지는 않지만 감히 용이하게 계달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송시열이 초계(抄啓)하라는 명을 사면(辭免)하였기 때문에 송준길 혼자서 좌이(佐貳)와 함께 초계한 것이었다.
11월 8일 을축
육우제(六虞祭)를 섭행하였다.
청나라의 조제사(吊祭使)가 입경하니, 상이 최복(衰服) 차림에 소연(素輦)을 타고 모화관에 나가 영접하였다. 사신이 일단 도착하자 현관(玄冠)과 흑포(黑袍) 차림으로 칙서를 맞고, 다시 대궐에 들어와 예를 행한 뒤에는 최복을 착용하고 여차로 돌아갔다.
11월 9일 병인
상이 칠우제(七虞祭)를 친행하였다.
조형(趙珩)을 도승지로 삼았다. 신석번(申碩蕃)·최휘지(崔徽之)·이유태(李惟泰)·윤선거(尹宣擧) 등은 모두 예전부터 부름을 받았던 사람들로서 바야흐로 국장(國葬)에 참여하여 서울에 있었는데 모두 직책을 제수받았다.
이조 판서 송준길이 상소하여 부모를 천장(遷葬)할 휴가를 청하고 이어 체직을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상소의 내용에 대해서는 등대(登對)할 때 면유(面諭)하겠다. 사직하지 말라."
11월 10일 정묘
부제학 유계, 교리 성이성(成以性), 수찬 조윤석(趙胤錫)이 청대하니, 상이 여차에서 인견하였다. 유계가 아뢰기를,
"졸곡이 내일인만큼 청대하기가 미안합니다만, 일에 미칠 수 없을까 염려되기에 진달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진달하고 싶어하는 것은 무슨 일인가?"
하자, 유계가 아뢰기를,
"송준길이 부모의 분묘를 천장(遷葬)하려고 소장을 진달하여 돌아가기를 청했는데, 허가만 얻으면 내일이라도 출발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은 한번 가면 다시 불러오기가 참으로 어려운데, 가령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세월이 많이 허비될 것입니다. 민간의 사람들도 결코 그를 보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조정 신하들은 아직까지 머무르게 하기를 청하는 말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이 60이 다 된 사람이 추운 날씨에 길을 떠나면 몸을 상할 것이 분명합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지성으로 개유(開諭)하시어 이 걸음을 정지하게 하지 않습니까. 듣건대 그 부모를 장례지낼 때 당초 위아래로 봉분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예가 아니기 때문에 지금 쌍분(雙墳)으로 개장하려 한다고 합니다만, 이는 실로 시급히 해야 될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듣건대, 이 사람이 떠나면 송시열도 분황(焚黃)037) 해야 한다는 이유로 휴가를 얻어 내려갈 것이라고 합니다. 처음 연석(筵席)을 여는 이 때에 이 두 사람을 놓칠 경우, 보도(輔導)할 적임자가 없게 될까 신은 염려됩니다."
하고, 조윤석은 아뢰기를,
"새로 즉위하여 처음 정사를 펴는 이 때에 이 사람은 돌아가도록 허락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하고, 승지 오정위는 아뢰기를,
"성상께서 이 사람을 머물러 있게만 한다면 세도(世道)를 만회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유계가 아뢰기를,
"윤문거는 스스로 과목(科目)에 걸려든 사람이라고 하여 자신을 현사(賢士)로 대우하는 성례(盛禮)는 감히 감당할 수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일단 그를 군직(軍職)에 붙인 이상 그에 따른 상록(常祿)만 지급한다면 그도 반드시 마음을 안정시킬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대로 하겠다."
하였다.
11월 11일 무진
상이 졸곡제(卒哭祭)를 친행하였다.
홍명하(洪命夏)를 겸 지경연으로, 김만기(金萬基)를 부교리로, 홍중보(洪重普)를 예조 참판으로 삼았다.
상이 여차에서 대신 및 좌참찬 송시열, 호조 판서 허적(許積), 이조 판서 송준길 등을 인견하였다. 우상 정유성이 아뢰기를,
"근래 겨울철에 잇따라 안개가 끼는 등 계절의 기후가 절도를 잃고 있으니 지극히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야말로 비상한 변고이다. 한때 사람을 상하게 할 뿐만이 아니고, 장차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하였다. 상이 준길을 앞으로 나오도록 명하고, 엄동(嚴冬)에 길을 떠나면 반드시 몸을 상할 염려가 있으니 결코 가서는 안 된다고 유시하였다. 또 이르기를,
"발인할 때 산릉에 배행(陪行)해야 하겠다고 내가 굳게 마음을 정했다가 경들의 요청에 못이겨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경은 어찌하여 이런 점은 생각지 않고 꼭 떠나려고만 하는가."
하니, 준길이 반복해서 간절히 청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번갈아가며 허락해서는 안 된다는 뜻을 진달하였다. 유성이 아뢰기를,
"준길이 물러나 돌아가면 송시열 역시 이를 좇아 떠나갈 것이 분명합니다."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소신의 진퇴는 국가의 안위(安危)와는 관계없는 것으로서 경연에 출입하는 것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현재 송시열과 유계가 모두 조정에 있으니, 성덕(聖德)을 보좌하고 이끌기에 또한 충분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내 뜻은 반드시 경과 좌참찬 두 사람으로 하여금 함께 바르게 하여 시종 일관 태만함이 없게끔 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지성으로 만류하는 것이다."
하였다. 준길이 이어 체직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체직을 시키는 것은 경이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인데, 경은 그래도 스스로 돌아갈테니 체직도 허락할 수 없다."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소신은 오래도록 병을 앓으면서 헛되이 직명만 띠고 있을 뿐 조정의 어떤 공회(公會)에도 전혀 뒤따라 참여하지 못했으므로 자나 깨나 황송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체직된 뒤에 그대로 서울의 집에 있게 된다면 분수에 비추어 볼 때 조금 편안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의 직책이야말로 매우 한산한 자리인데, 이 직책마저 체직을 허락한다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나는 경이 안심하고 병을 조리할 수 있도록 단지 이 직책을 제수했던 것이다."
하였다. 준길이 다시 나아가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은근하고 간절하시니 신은 지극히 황송하면서도 안타까운 심정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만약 다시 진달드리지 않고 곧장 스스로 내려간다면 이것이야말로 성상의 덕을 저버리는 일이 될 것이기에 다시 신의 사정을 이해해 주시도록 청하니 특별히 체직시켜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뜻은 이미 유시했으니, 더 할 말이 없다."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준길이 이미 개인적인 사정을 진달했는데, 소신이 또 따라서 번거롭게 진달한다는 것이 황공한 일로서 감히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는 있습니다만, 국법(國法)상 추증(追贈)한 뒤에는 으레 분황(焚黃)하는 일이 있으므로, 신 역시 조금 휴가를 얻어 이 예를 행하고 싶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하니, 승지 홍위가 아뢰기를,
"두 신하의 사정에 조금 완급의 차이가 있기는 합니다만, 추위를 무릅쓰고 갔다가 돌아올 수 없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신이 일찍이 옛사람의 문집을 보건대, 추증한 뒤에 곧바로 분황하지 않은 예도 있었습니다."
하였다. 유성이 아뢰기를,
"민응형(閔應亨)이 나이 80이라서 이미 가의(嘉義)로 가자(加資)되었습니다만, 이것은 승품(陞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번에 백관에게 가자할 때에 친히 그에게 제수하신다면 노인을 우대하는 도리에 합당할 듯싶습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응형이 소장을 올려 진언한 것을 보면 모두 진실된 정성에서 우러나온 것으로서 잠시도 국사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하고,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응형은 나라를 근심하고 집은 돌아보지도 않았는데, 심지어 등대(登對)할 때면 눈물을 흘리며 진언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므로 선왕께서도 그의 충성스러운 마음을 가상하게 여겼습니다."
하였다.
장령 허목(許穆)이, 우제(虞祭) 드리는 때를 당하여 그를 수행했던 아전이 병조로부터 곤장을 맞자, 법부(法府)의 체모는 다른 관사와는 다른만큼 해조가 마음대로 다스려서는 안 된다고 하고 해리(該吏)를 수금하였는데 물의가 잘못이라고 여긴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장령 윤비경(尹飛卿), 지평 이무(李堥)도 ‘그 일에 같이 관계되었다.’는 이유로 잇따라 인피하였다. 대사헌 조수익(趙壽益), 집의 이만영(李晩榮), 지평 목내선(睦來善) 등이 처치하여 모두 출사시키도록 청하였다. 허목이 또 물의가 더욱 격렬해진다는 이유로 소패(召牌)에 응하지 않고 다음날 나와 인피하였고, 비경과 이무도 또 잇따라 인피하였다. 이에 수익·만영·내선 등도 처치한 것이 타당함을 잃었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모두들 체직되었다.
11월 13일 경오
윤강을 대사헌으로, 정만화(鄭萬和)를 집의로, 정계주(鄭繼胄)·정박(鄭樸)을 장령으로, 홍주삼(洪柱三)·민주면(閔周冕)을 지평으로, 이시매(李時楳)를 공조 참판으로, 홍명하(洪命夏)를 예조 판서로, 이시술(李時術)을 응교로 삼았다.
상이 재전(齋殿)에 나아가 대신을 인견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칙사(勅使)는 필시 왕자나 부마를 사은사로 차송시키려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부마는 아직 장년(壯年)도 못되었는데 어떻게 차송하겠는가. 종실 가운데 적당한 사람이 있는가?"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종실이라 해도 소원한 자를 차송하면 저네들이 필시 불만족스럽게 여길 것이니, 가까운 종실로서 지위가 높은 사람을 차송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관소(館所)에 찾아가 보는 예 역시 그만둘 수 없다."
하니, 좌상 심지원이 아뢰기를,
"기축년에도 위에서 두 번이나 찾아가 보았으니, 지금 또한 그만둘 수 없습니다."
하였다. 우상 정유성이 아뢰기를,
"신이 연경(燕京)에 갔을 때, 저네들이 주사(舟師)를 조발(調發)할 일을 신에게 자주 말하였습니다."
하고, 태화가 아뢰기를,
"지난해에도 주사 3천 명을 조발하여 산동(山東)에 들여보낸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배 한 척이 명나라 지역으로 표류하였는데, 명나라가 사람을 차임(差任)하여 우리 나라에 호송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때 조서(詔書)의 형식으로 보내왔는가, 문서로 보내왔는가?"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문서로 보내왔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가 답을 보낸 뒤에 저네들 나라에 그 일이 누설되는 바람에 신들이 봉황성(鳳凰城)에 구금되었다가 가까스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는 저네들 나라가 공갈을 치면서 못하는 짓이 없었으므로 우리 나라의 대소 인원이 두려움에 벌벌 떨며 분주히 주선하여 극진히 후대하였는데, 정명수(鄭命壽)가 폐기된 이후로는 피차 느긋해지면서 서로(西路)의 접대가 점점 매몰차게 되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런 식으로 계속하다가는 필시 트집을 잡는 사단이 일어날 것인데, 어쩌면 그렇게도 생각이 모자란단 말인가. 내일 관소에서 접견하겠다는 뜻을 도감(都監)으로 하여금 말하게 하라. 그리고 기축년에 행했던 규례대로 백포(白袍) 차림으로 거동하겠다는 뜻도 말해 주어라."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상께서 오래도록 권도(權道)를 따르는 일을 허락하지 않고 계시는데, 모르겠습니다만 지금은 병이 나은 것 같으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직 아픈 통증이 없는데 어떻게 권도를 따를 수 있겠는가."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졸곡(卒哭)이 지난 뒤에 권도를 쓰는 것이야말로 본래 국조(國朝)에서 공통적으로 행해 오던 예입니다. 졸곡 후에도 권도를 따르지 않는다면 어느 때나 하실 것입니까?"
하고, 유성이 아뢰기를,
"신들이 오늘 청대한 것은 오로지 이 일 때문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깊이 생각하시어 아랫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해 주지 않으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제 막 졸곡이 지났으니 오늘은 결단코 따를 수 없는데, 종당에는 허락할 것이다."
하였다. 유성이 아뢰기를,
"자전께서 권도를 따르시게 되는 것도 상께서 먼저 하시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전하께서야 따르고 싶지 않다 하더라도 자전에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자전께서는 기축년에 대상(大喪)을 당하셨을 때에도 소상(小祥) 때까지 소식(素食)을 드셨다. 지금 간절히 청한다 하더라도 필시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다. 내 생각에는 음식을 올릴 때에 조미료를 가미하여 드시도록 했으면 싶다."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그런 정도로 어떻게 원기(元氣)를 충분히 보양(保養)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건반(乾飯)에 대한 요청도 오늘에야 비로소 허락하셨는데, 앞으로 권도를 따르시리라고 어떻게 기필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유성이 아뢰기를,
"상께서 ‘오늘은 안 된다.’고 분부하셨으니, 내일부터 상선(常膳)을 올리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이 이렇게까지 청하니, 내일부터는 복선(復膳)하겠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호위청(扈衛廳)은 처음에 반정(反正)한 뒤 위기 상황이 일어날까 염려하여 설치한 것으로서 훈신(勳臣)을 대장(大將)으로 삼아 각각 군관을 거느리고 입직(入直)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혁파하지 않고 있는데, 국가에 도움되는 일은 없이 1년의 급료가 통틀어 3천여 석(石)이나 되니, 비용을 절약하는 도리상 혁파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장이 거느리는 숫자는 얼마나 되는가?"
하자, 지원이 아뢰기를,
"2백 명입니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이 무리들은 호위청이 혁파될 경우 군역(軍役)에 충정(充定)될 것이라고 하기 때문에 걱정들을 하는데, 만약 그냥 해산해 보내기만 한다면 그들도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유성이 아뢰기를,
"선조(先朝) 때 설립한 일을 별안간 혁파하기는 어려우니, 다른 대신에게 문의하여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다음날 수의(收議)하였는데, 영돈녕 이경석, 원평 부원군(原平府院君) 원두표, 완남 부원군(完南府院君) 이후원(李厚源)은 혁파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고, 연양 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은 어렵게 여기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졸지에 변통시키기는 어려우니, 우선은 거론하지 말고 뒷날 서서히 의논하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16일 계유
전남도 옥구현(沃溝縣)의 어부 8명이 익사하였는데, 도신(道臣)이 계문하니, 휼전을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11월 17일 갑술
이수인(李壽仁)을 집의로, 조수익(趙壽益)을 예조 참판으로, 이경억(李慶億)을 예조 참의로 삼았다.
상이 남별궁(南別宮)에 거둥하여 청나라 사신을 접견하였다.
11월 18일 을해
사간 심세정(沈世鼎) 등이 아뢰기를,
"원주 목사(原州牧使) 김경항(金慶恒)은 상평청의 곡식 수백 석을 몰래 취하여 집으로 수송하였는가 하면 황장목(黃腸木) 80여 그루를 몰래 베어 관판(棺板)을 만드는 등 너무나도 탐학한 짓을 제멋대로 자행했으니, 잡아다 국문하소서."
하니, 따랐다.
11월 19일 병자
청나라 사신이 돌아가니, 상이 교외에서 친히 전송하였다.
좌의정 심지원이 정사(呈辭)하였다.
11월 21일 무인
우의정 정유성이 정사하였다.
부제학 유계가 상소하여 전에 《논어》를 강론하던 것을 정지하고 먼저 《중용》을 강론하기를 청하니, 대신 및 송시열·송준길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시열은 병으로 의논드리지 못했는데, 준길의 의견이 유계와 같았으므로 상이 따랐다.
11월 22일 기묘
정원이 아뢰기를,
"내일 주강(晝講)하도록 명을 내리셨습니다. 선조 때에는 경연을 여는 날 유현(儒賢)이 한 사람씩 돌아가며 입시하여 고문(顧問)에 대비했는데, 이는 실로 아름다운 뜻으로 훌륭한 조치였습니다. 또 무관 당상(堂上) 한 사람도 입시하였습니다. 전에 했던 대로 거행하소서. 전경 문신(專經文臣) 등은 하루 먼저 낙점(落點)하여 각자 전공하는 경(經)을 가지고 강독에 입시하여 혹 문의(文義)를 진달케 하도록 선조(先朝) 때 성명(成命)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양사(兩司)도 한 사람씩 교대로 입시하여 일을 아뢰도록 한 정식(定式)이 또한 있습니다. 이대로 분부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23일 경진
내사(內司)의 면포(綿布) 20동(同)을 병조에 내려 아약(兒弱)에게서 거두는 포목을 탕감한 숫자를 보충하도록 명하였다.
상이 재전(齋殿)의 주강에 나아갔다. 영사 정태화 이하 여러 신하들이 입시하여 《중용》을 강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옛날 인조조 때 신이 사관(史官)으로 경연에 입시하였는데, 인조께서 부제학 정경세(鄭經世)에게 하문하시기를 ‘주자의 이름을 휘(諱)해야 하는가?’ 하자, 경세가 대답하기를 ‘임금이 존경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모두 휘하는 것이 좋습니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이조 판서 송준길이 아뢰기를,
"선조(先朝) 때 경연을 열던 날 신이 이 뜻을 진달드렸는데, 선왕께서도 선현(先賢)의 이름을 휘하셨습니다."
하니, 상이 맞다고 하였다. 강이 끝나고 준길이 아뢰기를,
"신이 선조에게 진달드릴 때 늘 천고(千古)의 도통(道統)을 제일의(第一義)로 삼았는데, 지금 바라는 것 역시 이에 불과합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먼저 성지(聖志)를 세우소서. 이 뜻이 확고하게 정해진 뒤에야 도통을 이을 수 있습니다."
하고, 참지 권시는 아뢰기를,
"임금의 목표는 요(堯) 순(舜)처럼 되는 것뿐인데, 요순처럼 되는 방법은 뜻을 그렇게 세우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이 뜻이 확립되지 않으면 소강(小康) 단계의 정치도 이루기 어려울 것인데, 하물며 몸소 실천하여 이끌어 가면서 세도(世道)를 만회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현재 재변이 중첩해서 일어나 신민들이 모두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지가 되는 것은 전하께서 지금 즉위하신 초기에 정력을 다해 선정(善政)을 이루려 하시는 것으로서 옛날의 밝은 임금들도 이보다 더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이런 마음을 잃지 않고 시종 일관 한결같이 한다면, 태평 시대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신들과 같은 무리는 유자(儒者)라는 이름도 감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유(儒)라는 글자 밑에 현(賢)이라는 글자를 더하는 것이 얼마나 중한 이름인데, 그만 신들에게 잘못 가해지고 있으므로, 신은 실로 황공하고 부끄러워 진달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고, 이어 직명을 갈아 줄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판(吏判)이 이토록까지 굳이 사양하니, 영상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이판의 임무는 형조나 호조처럼 일이 많은 것이 아니니, 결코 체직을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생각 역시 그렇다."
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임금 앞에서는 신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옛 제도로서, 유현이라는 칭호는 옛 역사에서 상고할 수가 없는 만큼 조정에서 쓰는 것은 온당치 않다. 그런데 한때의 풍조로 말미암아 위아래에서 통용하면서 심지어는 당사자가 계면쩍어 사양해도 면할 수 없게 되었으니, 이 또한 이상한 일이라 하겠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포목 징수를 감해 주어야 할 아약(兒弱)과 도고(逃故)의 숫자가 1만 9천여 명입니다. 포목을 징수하여 외방에서 쓰도록 해 줄 것은 감영·병영·수영(水營)에 비축된 것을 옮겨 쓰도록 하고, 서울의 경우는 상평청(常平廳)의 무곡(貿穀)과 은(銀) 5천 냥을 호조에 이송하여 그 값을 목면(木棉)으로 계산해서 병조에 보내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병조 판서 정치화가 아뢰기를,
"양서(兩西)의 군민(軍民)으로서 무오년 요동(遼東)에 건너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자와, 정묘년과 병자년에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거나 피살된 자들 같은 경우는 이름만 장부에 헛되이 남아 있는데, 인리(隣里)에 징수하기도 하고 감색(監色)에게 징수하기도 합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이 폐단이 있어 와 백성들이 날로 원망하고 있으니, 대신에게 자문하여 변통시켜야 할 것입니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이런 종류는 모두 탕척시켜 주어야 합니다."
하였다. 치화가 아뢰기를,
"인족(隣族)을 침해하여 징수하는 폐단은 제도(諸道)가 마찬가지인데, 무술년 이전의 징수하지 못한 것도 아울러 탕척시켜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허다한 궐액(闕額)을 일시에 충정(充定)시키기는 형세상 곤란하니, 군읍의 형편을 참작해서 액수(額數)를 정한 뒤 점차적으로 충정시키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권시가 아뢰기를,
"자산(子産)이 마을 가구를 다섯 단위로 묶어 서로 책임지게 한 것[閭井有伍]038) 은 지금의 오가 작통법(五家作統法)과 같습니다. 이 법이 나라를 경륜하는 데에는 가장 절실하니, 지금 당연히 행해야 합니다."
하고, 태화가 아뢰기를,
"내년 호적(戶籍)을 정리할 때 한성부로 하여금 착실히 거행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절목(節目)을 자세히 정한 뒤에 계품해서 경외(京外)로 하여금 각별히 거행토록 하라."
하였다. 이에 앞서 후원(後苑)에 천둥이 치고 궁중에 귀변(鬼變)이 있어 궁인의 머리카락을 절단한 일이 있었는데, 외간에 말이 전파되자 이 때에 이르러 태화가 재얼(災孼)을 이유로 이어(移御)할 것을 청하니, 상이 혼전(魂殿)이 이 궐내에 있다는 이유로 난색을 표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삭제(朔祭)와 망제(望祭) 때 왕래하며 친림(親臨)하셔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는 나가서 피할 일이 없으니, 먼저 양 자전(慈殿)을 모시고 이어하도록 하라."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자전께서 나가 피하시는데, 전하께서 그대로 머물러 계시는 것은 안 될 일입니다."
하니, 상이 여러 대신 및 송시열에게 물어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대신은 모두 태화의 외논과 같았고, 시열은 병으로 의논드리지 못했다.
산릉 도감(山陵都監)이, 고용한 역군(役軍)의 가(價)를 각도 연군(烟軍)에게 징수하여 병조와 호조에서 대여받은 미포(米布)를 상환하도록 청하였는데, 병조의 군포(軍布)는 3백 73동(同) 45필(匹)이었으며 호조의 미곡은 5천 20석이라고 하였다.
11월 24일 신사
정치화(鄭致和)를 지경연으로, 홍중보(洪重普)를 형조 참판 동지경연으로, 이익(李翊)을 교리로, 홍주삼(洪柱三)을 부수찬으로, 민광소(閔光熽)를 지평으로, 이응시(李應蓍)를 우윤으로, 허적(許積)을 동지경연으로 삼았다.
상이 재전(齋殿)의 주강에 나아가 《중용》을 잇따라 강하였다. 이판 송준길이 아뢰기를,
"어제 강한 것이 호번(浩繁)한데 다 이해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직 많이 읽지는 못하였으나 무릇 글이란 많이 읽을수록 그 뜻이 점점 분명해지지 않는 것이다."
하자, 준길이 아뢰기를,
"무릇 독서를 할 때 처음에는 분명해지는 것 같지만 많이 읽을수록 도로 애매해지는데, 이것이야말로 좋은 소식입니다."
하였다. 인심(人心) 도심(道心) 및 사단 칠정설(四端七情說)에 강이 미치자, 준길이 또 아뢰기를,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이 이 뜻을 강명(講明)하여 저술하였는데, 상께서 이 글을 보지 않으시면 안 됩니다. 대체로 글 가운데 오묘한 뜻에 대해서는 어슴푸레나마 그 요령을 잡은 것처럼 느껴져야만 연신(筵臣)이 강설할 때 바야흐로 의심이 풀려지면서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정언 윤지미(尹趾美)가 아뢰기를,
"객사(客使)가 올 때 선혜청에서 참(站)에서 수용(需用)하는 미곡을 지급하는 것이 관례인데, 생선 한 마리나 닭 한 마리라도 민간에 내도록 요구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기전(畿甸)의 수령 가운데 혹 조종의 뜻을 체득하지 못한 채 기아에 허덕이는 백성들에게 징수하는 자들이 비일 비재하니, 조사해 내어 논죄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26일 계미
주청사(奏請使) 정유성(鄭維城)에게 노비 7구와 전답 30결을 사급(賜給)하고 아들 1인을 벼슬시키도록 명하였다. 부사(副使) 유심(柳淰)과 서장관 정익(鄭榏)에게는 가자(加資)하고 노비와 전결을 차등 있게 사급하도록 명하였다.
11월 27일 갑신
이은상(李殷相)을 승지로, 이지온(李之馧)을 장령으로, 이민적(李敏迪)을 이조 좌랑으로, 목내선(睦來善)을 교리로, 김만균(金萬均)을 부수찬으로, 이수인(李壽仁)을 전한으로, 목겸선(睦兼善)을 부응교로, 이후(李垕)를 집의로, 송창(宋昌)을 봉교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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